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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중 인터뷰] 朴正熙의 최후를 지켜본 유일한 생존자 金桂元 前 청와대 비서실장, 18년 만에 다시 입 열다

『김재규는 사형장으로 끌려 나가다 내 방을 한참 바라보았다』

조갑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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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26 일주일 전 朴대통령이 實演을 했다. 식사 중에 朴대통령이 「金실장, 급하면 이렇게 하는 거야」라며 테이블 밑에 누워 나를 쳐다봤다』

■『(궁정동 시해 현장에서)내가 김재규의 손을 쳐서, 권총이 불발됐다. 그 권총은 예민해서 나뭇잎 하나라도 걸리면 사용할 수 없다. 전방 근무시절 그걸 알았다. 10·26 당시 내 말을 믿지 않아 진술하지 못했다』
■『내가 심문받던 옆방에서 김재규가 고문받는 소리, 아내의 목소리가 들렸다. 사형받으러 나가는 김재규가 천천히 사형장을 향해 걸어가다가 내 방을 바라봤다』
■『쿠데타를 할 軍병력은 차지철이 보유하고 있었다. 全斗煥 장군이 차지철의 심복이었고,(차지철이) 하나회다 뭐다 뒷돈을 대주었다. 김재규는 쿠데타할 능력이 없었다』

金桂元
前 청와대 비서실장
1923년 경북 영주 출생. 연희전문학교 졸업. 육군 참모총장(대장), 중앙정보부장, 駐대만총영사관 대사, 대통령비서실장 역임. 現 원효실업 회장.
꿈틀꿈틀 살아나는 궁정동 현장
  金桂元(김계원·83) 前 청와대 비서실장은 1979년 10·26 당시 궁정동 만찬장에서 朴正熙 대통령의 마지막을 지켜본 유일한 생존자다. 이후 무려 27년이 흘렀지만 10·26은 현대사의 모진 미스터리로 여전히 살아 있다. 2005년 1월 영화 「그때 그사람들」이 개봉된 뒤 10·26은 또다시 숱한 화제와 논란을 낳았고, 결국 訟事(송사)로 이어졌다. 朴대통령의 아들 志晩(지만)씨는 영화상영금지 가처분 신청을 내기도 했다.
 
  金 前 실장은 1987년 9월16일 月刊朝鮮과 만나 朴대통령의 마지막 순간을 처음으로 증언했다. 그의 증언은 당시 센세이션을 일으켰다. 그리고 18년이 흐른 뒤 다시 月刊朝鮮 기자와 만났다.
 
  간혹 金 前 실장의 근황이 언론에 전해지기도 했다. 하지만 토막소식 정도였고 어느 것도 그가 겪은 고통과 부채의식을 담아 내진 못했다.
 
  그는 한 해가 저무는 지난 12월28일 기자와 만나 작심하듯 기억을 다시 꺼냈다. 27년 전 궁정동 만찬장이 마치 살아난 듯 꿈틀꿈틀 재연됐다.
 
  먼저 『「그때 그사람들」 영화를 봤냐』고 물었다. 金 前 실장은 『다 못 보고 15분 정도만 잠깐 봤다』며 『난 별로 흥미가 없어서 봐도… 옛날 회상을 하니 기분이 나빠서』라고 했다. 재차 『조금 본 인상은 어떠냐』고 묻자, 『아 글쎄, 조금 보다 그만뒀다니까』라고 손사래를 치며 불편한 속내를 드러냈다.
 
  기자는 10·26이 일어나던 해의 대통령 면담일지 복사본을 金 前 실장에게 보여 주었다.
 
  - 18년치 대통령 면담일지를 모두 가지고 있습니다. 그중 1979년 6월에서 9월까지의 자료를 가지고 왔습니다. 일지를 보면 대부분 車智澈(차지철) 당시 경호실장과 독대하는 시간이 많습니다. 또 배드민턴을 자주 치고 자유시간이 많은 것 같아요. 차지철이 金실장보다 먼저 대통령과 만나는 경우도 많습니다. 이유가 있나요.
 
  『특별한 이유는 없어요. 경호 관계니까 차지철이 먼저 보고한 것이지요』
 
  - 車실장이 보고할 때는 먼저 청와대 비서실의 허가를 받아야 하지 않나요.
 
  『경호실장은 비서실의 허가가 없어도괜찮았어요』
 
 
 
 대통령을 못 만나는 中情부장
 
金桂元 비서실장이 1978년 朴대통령에게서 임명장을 받고 있다. 金실장은 6년간의 駐대만 대사 생활로 인해 국내 정세에 매우 어두웠다. 이것이 비서실장으로서 金載圭와 車智澈의 권력투쟁을 조정·통제하지 못한 결정적인 요인이었다.
  - 자료를 보면 대통령이 金載圭(김재규) 당시 정보부장과 만난 횟수보다 차지철을 만난 경우가 더 많아요.
 
  『(김재규가 대통령과 만난 경우가) 별로 없죠. 자꾸 (차지철이) 제한을 하니…』
 
  朴대통령에게 누가 먼저 보고하느냐는 것은 파워게임에서 누가 권력을 차지하느냐와 상관이 있다. 車智澈이 金載圭의 대통령 접근까지 가로막은 전횡은 결과적으로 10·26의 불행한 씨앗을 낳은 셈이다.
 
  - 그건 이상합니다. 대통령의 접근권은 의전수석이나 비서실장에게 있는데, 정보부장이 경호실장 허가를 받아 대통령을 만나는 것은 이상하지 않나요.
 
  『…대통령의 뜻이니…』
 
  - 그게 바로 문제의 발단 아니었습니까.
 
  『그래서 제가 「그렇게 해선 안 된다」고 했어요. 어떨 때는 오히려 제가 답답해서 金載圭에게 「꼭 대통령을 만나고 싶으면 내게 찾아오라」고 말해 만남을 주선한 일도 있어요』
 
  - 金실장이 정보부장으로 계실 때도 경호실장이 대통령과의 접견을 막았습니까.
 
  金 前 실장은 육군참모총장을 역임한 뒤 1969년 10월부터 1970년 12월까지 중앙정보부장(제5대)을 맡았고, 1971년 2월 駐대만 대사로 임명됐다.
 
  『아닙니다. 마음대로 대통령을 만났어요. 한밤중에 서슴없이 청와대에 들어갔습니다. 또 그래야 했고요. 그런데 비서실장을 맡고 보니 그렇지 않았어요. 김재규는 경호실장 허가 없이는 일과시간에도 대통령과 접견할 수 없었어요』
 
  - 1979년 당시 대통령께서 지나치게 車智澈에게 의존하려 한 것 같아요. 귀찮은 것은 모두 그에게 맡기고….
 
  『朴대통령께서는 당시 저하고 잡담이나 하며 지내려고 하셨던 것 같아요. 제가 뭐 일을 잘합니까. 駐대만 대사로 6년이나 외국에 나갔다 왔는데 저를 비서실장으로 기용했어요. 저를 곁에 둔 것은 그냥 허물없이 얘기할 수 있는 친구를 원하셨던 것 같아요』
 
 
 
 金載圭, 『그놈(차지철)이 자리가 없다고 나를 밀어 버렸다』
 
趙甲濟 기자가 보여주는 朴대통령 면담일지를 보며 당시를 기억해 내는 金桂元씨.
  10월26일 오전 10시30분 청와대內 헬기장에서 석 대의 헬리콥터가 이륙한다. 헬기는 곧장 삽교천 방조제 준공식장으로 날아갔다. 앞서 김재규 정보부장은 차지철 경호실장에게 전화를 걸어 헬기에 동승할 수 있는지를 물었다. 하지만 차지철은 매몰차게 거절한다.
 
  기분이 상한 김재규는 승용차로 직접 현장에 내려갔다. 김재규는 삽교천 방조제 준공식장에 가진 않았다. 대신 이날 새로 건립된 KBS 對北 방송 송신소로 향했다. 거기서 金실장과 조우한다.
 
  - 김재규가 헬기를 못 탄 사실을 어떻게 아셨나요.
 
  『제게 전화를 해왔어요. 「가려고 했는데 그놈이 자리가 없다고 밀어 버려서 전 자동차로 가야겠습니다」라고 말했어요』
 
  - 「밀어 버렸다」는 말은 글자 그대로 떠밀어 냈다는 뜻인가요.
 
  『아닙니다. 金부장은 청와대 헬기장에 오진 않았어요』
 
  - 그럼 金부장은 삽교천 방조제 준공식장에 가지 못했겠군요.
 
  『아닙니다. 가긴 갔어요. 삽교천엔 안가고 송신소에 갔어요. 그날 중앙정보부가 운영하는 對北 송신소 개소식이 함께 열렸기 때문입니다』
 
  - 그 자리에서 김재규를 분명히 봤나요? 착각하신 게 아닙니까.
 
  『아닙니다. 분명히 만났어요. (김재규의) 표정이 좋지 않았어요. 헬기에 못 탔으니까. 하지만 그와 대화를 나눌 상황은 아니었어요. 제가 朴대통령을 수행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 차지철은 당시 경호실장으로 막강한 권력을 행사하고 있었는데, 김재규를 핍박해서 무엇을 얻으려 했을까요.
 
  『글쎄요… 잘 모르겠지만… 차지철은 김재규나 저나 모든 사람들이 자기 밑에 꿇어 엎드리기를 기다렸던 것 같아요』
 
軍수뇌부와 함께 한 車智澈 경호실장. 앞줄 왼쪽부터 黃汀淵 해군참모총장, 周永福 공군참모총장, 車智澈 경호실장, 李世鎬 육군참모총장, 陳鍾埰 보안사령관.
 
 
 『全斗煥은 차지철의 심복이었다』
 
  - 쿠데타할 생각은 없었다고 봅니까.
 
  『글쎄… 있었죠.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저도 처음에는 김재규 하고 싸울 때 차지철이 (쿠데타를) 하지 않을까 생각했어요』
 
  - 차지철이 쿠데타를 한다면 동원할 무력이라도 있었나요.
 
  『될 겁니다』
 
  - 우선 청와대 경호실과 30단이 있을 테고….
 
  『그것 말고도 軍에 심복이 있었습니다. 全斗煥 장군도…. 「하나회」다 뭐다 뒤에서 돈 대준 것 아닙니까』
 
  - 비서실장 입장에서 보면, 당시 全斗煥 보안사령관도 차지철 밑에 있다고 보신 겁니까.
 
  『네, 왜냐면 경호실 차장이니 뭐니 차지철이 갖다 놓은 것 아닙니까』
 
  - 차지철 밑에서 작전 차장을 한 게 노태우, 全斗煥, 김복동씨가 있었고 수경사령관도 차지철 사람이었습니까.
 
  『그것은 모르겠습니다』
 
  - 당시 하나회 존재를 아셨습니까.
 
  『그땐 몰랐습니다. 제가 불행한 것이 비서실장 하기 직전에 6년간 駐대만 대사로 갔다 와서 국내 사정은 전혀 몰랐어요』
 
  - 그 때문에 비서실장 자리를 고사하셨다지요.
 
  『네, 못 하겠다고 하니 朴대통령이 「괜찮아. 내가 모든 것을 다 알아서 해줄 테니 걱정마라」 하시더군요』
 
  - 재미있는 표현이네요. 비서실장이 모든 것을 알아서 해줘야지, 왜 대통령이 알아서 하겠다고 했을까요.
 
  『軍 시절부터 朴대통령과 관계가 있으니… 제게 그런 말씀하실 수도 있죠』
 
  - 朴대통령과 軍 시절 어떤 인연이 있나요.
 
  『과거 朴대통령께서 보병으로 계셨는데 진급이 안 돼 소외되셨어요. 제가 미국 가서 포병학교 교육을 받고 오니 轉科(전과)를 하셨더군요. 그전부터 개인적으로 알고는 있었어요. 고향이 같으니까. 포병으로 오니 반갑다고 했어요』
 
  - 군단 포병단장을 같이 하셨나요.
 
  『아닙니다. 제가 선임이었습니다. 제가 포병감을 하고, 朴대통령은 군단 포병사령관을 하셨습니다』
 
  - 사실상 朴대통령이 직속부하셨군요.
 
  『직속은 아니지만 방계라고 할까요? 그리고 제가 포병학교 교장을 하고, 그 다음다음에 교장을 하셨습니다』
 
  朴대통령이 宮井洞(궁정동) 나棟에 도착한 것은 오후 6시5분. 궁정동은 중앙정보부장 공관 옆에 있는 비밀 식당으로 몇 달 전에 지어진 새 건물이었다. 만찬장에는 직사각형 식탁이 있었다. 식탁 안쪽에 朴대통령이 혼자 앉았고 그 맞은편엔 김계원, 김재규가 착석했다. 차지철은 김재규의 왼쪽 측면에 조금 떨어져 앉았다.
 
  대화가 부마사태, 金泳三씨 문제, YH사건 등이 나오면서 분위기는 가라앉았다. 김계원은 분위기를 바꿔 보려고 TV를 켜는 등 애를 썼지만 되레 험악해졌다.
 
 
 
 
『中情부장과 경호실장을 바꾸려고 했다』

 
1952년 포병학교장 시절의 金桂元(가운데).
  - 당시 상황을 보면 朴대통령이 일방적으로 김재규를 나무라는 자리였습니다. 너무하다는 느낌이 들 정도입니다. 조금 이상하다는 느낌이 들지 않았나요.
 
  『그래서 분위기를 바꾸려고 몇 번이나 시도했는데 안 돼요. 그래서 TV를 틀라고 했어요. 「삽교천 행사 뉴스가 나올 겁니다」라고 대통령께 말씀드렸어요』
 
  - 뉴스를 보고서도 또 이야기가 그 쪽으로 흘렀지요. 왜 그런가요. 朴대통령이 화가 많이 났습니까.
 
  『차지철이 자꾸만 바람을 넣었어요. 왜냐하면 그런 이야기가 계속돼야만 자기가 유리한 방향으로 이끌 수 있으니…』
 
  - 따지고 보면 죽은 자리를 朴대통령과 차지철이 만든 셈입니다. 계속 김재규가 울화통을 터뜨리게 만들었나요.
 
  『네, 사실은 그런 이야기를 할 때가 아닌데… 낮에만 해도 (朴대통령의) 기분이 좋으셨는데…』
 
  - 당시 법무장관이던 金致烈(김치열)씨 이야기를 잠깐 할게요. 10·26이 있기 며칠 전 그가 朴대통령에게 두 번이나 불려갔다고 해요. 대통령이 시국 얘기를 하면서 자기를 정보부장으로 내정하려 한다는 느낌을 받았답니다. 그래서 10월26일 발령이 날 줄 알고 기다리고 있었다고 하더군요. 김재규는 자신이 물러날 줄 알고 그날 「결행」을 한 것은 아닐까요? 당시 실장께서 김재규에게 人事(인사) 이야기를 하셨나요.
 
  『그런 얘기를 하진 않았습니다. 내심 정보부장과 경호실장 자리를 바꾸려고 생각한 적은 있습니다. 기회가 오면 朴대통령에게 건의하려 했지요. 하지만 기회가 없었어요』
 
  - 김재규에게 혹시 인사가 날 거라고 정보를 준 사람은 없었을까요.
 
  『글쎄요. 절대 그런(인사) 이야기를 잘 안 하니까요』
 
  - 인사에 대한 느낌은 받았나요.
 
  『그런지도 모르겠습니다』
 
  - 김재규도 그 자리가 마지막이란 사실을 알았을 것 같아요. 그래서 시해할 생각을 했을 것 같습니다.
 
  『저는 전혀 느끼지 못했어요. 김재규가 대통령 시해나 쿠데타 계획이 있었다면 저에게 귀띔 정도는 했을 거라고 믿어요. 김재규, 前 국방장관 李鍾贊(이종찬·1916~1983), 朴대통령, 저 이렇게는 정말 가까운 사이입니다』
 
  - 5·16 이전의 말씀이지요.
 
  『네, 심지어 여자문제에 대해서도 서로 얘기할 정도예요. 김재규가 쿠데타를 모의했다면 먼저 제게 귀띔했을 겁니다』
 
  만찬석상에서 시국수습 방안을 두고 朴대통령과 차지철에게 혼이 나자 김재규가 우발적으로 저질렀다는 것이 金 前 실장의 주장이다.
 
  그는 『김재규가 그날 뭔가 달랐다면, 그 자리에 권총을 가져왔을 것입니다. 옆에 있는 건물도 아니고, 총을 가져오기 위해 계단을 오르내릴 필요가 있었을까요. 식당 2층 자신의 사무실에 얼마든지 총을 숨겨 놓을 수 있었을 텐데 뭐하러 허덕거리며 옆집에 갔을까요?』라고 했다.
 
  김재규는 당시 만찬장을 빠져나와 50m를 걸어 인근 본관으로 갔다. 식당으로도 쓰이는 1층 회의실 문을 여니 정승화 총장과 김정섭 2차장보가 있었다. 잠시 대화를 나눈 김재규는 곧장 2층으로 올라가 자신의 책장 선반 뒤에 감추어 두었던 권총을 꺼내 바지 주머니 속에 넣었다.
 
 
 
 『金載圭는 자포자기 심정에서 朴대통령 사살』
 
   - 시해할 생각이 있었다면 처음부터 권총을 지녔을 텐데, 도중에 권총을 가지러 간 게 이상하긴 해요.
 
  『그렇지요. 처음에는 계획이 없었다고 봐요』
 
  그날 저녁 7시40분쯤 김재규가 쏜 총탄은 차지철의 오른쪽 팔목을 꿰뚫었다. 차지철은 실내 화장실로 달아났다. 김재규는 다시 朴대통령을 겨냥한다. 총알은 朴대통령의 가슴에 꽂혔다.
 
  - 朴대통령이 총에 맞은 뒤 차지철은 실내 화장실로 피신했습니다. 왜 김재규가 대통령에게 총을 쐈다고 생각하나요.
 
  『김재규가 차지철을 쏜 순간, 「이젠 나는 죽었다. 이러나 저러나 차지철을 죽였으니 용서 못 받을 것이다」는 심정이었을 겁니다』
 
  - 1탄과 2탄 사이에는 약간의 간격이 있습니다. 또 김재규가 차지철은 앉아서 쏘고 朴대통령은 서서 쐈습니다. 엉겁결에 차지철을 쐈는데, 朴대통령도 쏴야겠다고 생각했는지…. 시간차가 애매합니다. 어쨌든 김재규의 권총이 고장이 났습니다. 왜 불발이 됐나요.
 
  『불발이 난 것은 제가 김재규의 손을 쳤기 때문입니다. 그 권총(독일제 월터PPK)은 예민해서 나뭇잎 하나라도 걸리면 사용할 수 없어요. 전방 근무 시절 경험이 있습니다. 권총이 나뭇잎에 걸려 불발이 나더라구요. 그래서 이 총은 테러용으로 못 쓰겠다고 생각했지요. 제가 쳤기 때문에 불발이 난 겁니다. 그런데 제 말을 믿질 않아 당시 말을 못 했어요』
 
  - 朴대통령은 가슴에 총을 맞고 「난 괜찮아」라고 하셨는데, 같이 있던 두 명의 아가씨(심수봉·신재순)에게 피하라는 뜻이었나요.
 
  『그것보다는 그런 상황에서도 여성들이 대통령을 보호하려고 하니, 「나를 너무 생각하지 말라」는 뜻으로 이해됩니다. 물론 당시에는 아무 생각도 없었지만 말입니다』
 
  - 그때 朴대통령의 마지막 모습이 어땠나요. 보통사람 같으면 몸을 피하려고 했을 텐데, 가만히 계셨습니다.
 
  『朴대통령께서 비스듬히 쓰러지셨는데 저는 식탁 밑으로 들어갔다고 생각했어요』
 
1975년 10월 영동-동해 고속도로 개통 테이프를 끊은 직후의 朴대통령.
 
 
 
「궁정동 피습」을 예감한 朴正熙

 
  당시 만찬장 테이블 밑은 日食집처럼 다리를 내려놓을 수 있을 정도로 깊게 파였다.
 
  『10·26이 일어나기 일주일 전인가, 朴대통령이 제가 보는 데서 實演(실연)을 했어요. 식사 중에 朴대통령께서 「金실장, 급하면 이렇게 하는 거야」 하며 테이블 밑에 누워 저를 쳐다보셨어요』
 
  - 그런데 막상 일이 나자 피신하지 않고 조용히 계시니… 이상하지 않나요.
 
  『아니죠. 옆으로 누우셨지요』
 
  - 어쨌든 피하진 않으셨잖아요. 사람은 본능적으로 무엇을 하게 돼 있거든요. 차지철은 도망갔고요. 朴대통령은 오히려 체념한 듯한 행동을 했어요.
 
  『사실 朴대통령 스스로도 자기가 총에 맞았다고 느끼지 못하셨을 겁니다. 통증보다는 뭐랄까… 정신적 쇼크가 더 컸을 거예요』
 
  김재규는 차지철과 朴대통령에게 치명상을 입힌 뒤 권총이 고장 나자 만찬장에서 뛰어나가 정보부 의전과장인 朴善浩(박선호)의 권총을 받아 다시 방 안으로 들어갔다. 김재규는 차지철이 문갑을 잡고 피하는 것을 발견하고, 그의 복부를 향해 권총을 쐈다. 그러고 나서 식탁 왼쪽으로 돌아 50cm 앞에서 「야수의 심정으로 정분을 끊고」 朴대통령의 머리를 쏘았다.
 
  그러나 金실장은 김재규와 그의 부하들이 총질을 해대는 상황이었지만 아무런 대처를 하지 못했다.
 
  - 金실장께서 비판받는 부분인데… 김재규가 총을 들고 들어왔을 때 문 밖에 있지 않았나요? 朴대통령 머리에 확인 사살할 당시 말입니다. 안에서 朴대통령을 보호해야 하는데, 밖에 계셨습니다.
 
  『당시 朴善浩가 김재규에게 현관에서 총을 주는 것을 본 것 같아요』
 
  - 덮쳐서 말릴 생각을 하지 않았나요.
 
  『그때 대통령이 총에 맞았는지 잘 몰랐어요』
 
  - 차지철을 쏜 뒤 朴대통령을 쏴 옆으로 쓰러지는 것을 보시지 않았나요.
 
  『대통령이 쓰러진 것은 본 것 같아요. 그런데 대통령께서 (총에 맞아) 쓰러졌다기보다 식탁 밑으로 들어간 줄만 알았습니다』
 
  - 아니 그것보다 김재규가 총을 들고 있어 겁이 나 들어갈 수 없었던 것 아닙니까.
 
  『그것도 있죠…. 하지만 그것보다는 朴대통령이 총에 맞았을 것이라는 생각은 안 했어요』
 
  金실장은 中情(중정) 요원이 모는 차의 뒷좌석에 朴대통령을 무릎 위에 비스듬히 누이고 국군 서울지구 병원으로 갔다. 1987년 그는 기자와 만나 이렇게 말했다.
 
  <朴대통령 체구가 아주 작고 가벼웠어요. 돌아가신 줄도 모르고 빨리 병원에 가서 살려야 한다는 생각만 했죠. 처음엔 좀 신음소리가 나는 것 같았어요. 그때 내 양복에 피가 많이 묻었는데 그것도 몰랐어요. 병원에 가서 얘기 들으니까 「이미 절명하셨습니다」 그래요>
 
  - 朴대통령을 안고 가시다가 숨이 넘어가는 때를 기억합니까.
 
  『몰랐어요』
 
  - 살아 있다고 봤습니까.
 
  『네』
 
  - 두 분의 키가 비슷하시지요.
 
  『네, 朴대통령과 제가 누가 크냐고 서로 물을 정도였습니다』
 
 
 
 「陸本으로 오라」는 김재규 전화에 崔圭夏 총리 벌떡 일어서 『갑시다』
 
   - 朴대통령의 키는 164cm였어요.
 
  『제가 162cm인데… 저보다 크셨네요』
 
  - 10·26 당시 崔圭夏(최규하) 총리가 처음 청와대로 왔을 때, 「차지철과 김재규가 싸우다 김재규의 잘못된 총에 각하가 돌아가셨다」고 정확하게 말씀드렸나요.
 
  『네, 그렇게 알았으니까요』
 
  당시 朴대통령을 시해한 김재규는 범행현장을 떠나 육본 벙커를 향한다. 그때가 저녁 8시5분쯤이었다. 당시 정승화 육군참모총장은 朴대통령 시해 사실을 듣고 1군과 3군에 비상사태를 발령한 뒤 국방장관·합참의장·해군총장·공군총장·연합사 부사령관 등을 육군 벙커로 오도록 연락했다.
 
  이런 상황에서 金실장은 육본으로부터 걸려온 김재규의 전화를 받았다.
 
  - 崔총리와 몇몇 장관에게 육본으로 가자고 한 것은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김재규가 육본을 장악하고 쿠데타를 모의하고 있다」는 의심이 가능한 게 아닙니까. 김재규가 金실장에게 전화로 육군 벙커로 오라고 했을 당시 崔총리는 어떻게 했나요.
 
  『崔총리가 가만히 있다가 벌떡 일어나 「갑시다」고 했어요』
 
  - 당시 崔총리의 판단이 중요한데, 왜냐면 김재규가 범인인 줄 알았는데 김재규가 벙커로 오라고 해서 가겠다는 것은 좀 문제 있는 것 아닙니까.
 
  『그렇죠.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겠지요』
 
  - 김재규가 朴대통령을 쏘아 죽였다는 것을 알았을 것 아닙니까.
 
  『알았죠』
 
 
 
 朴槿惠, 『괜찮습니다. 어머니 때도 있었고… 말씀하시죠』
 
訪韓한 카터 美 대통령과 朴正熙 대통령.
  - 알았으니, 김재규가 육본에 갔다는 것은 상식적으로 軍을 동원해 쿠데타를 했을 것이라고 볼 수 있지 않나요.
 
  『저는 김재규가 그럴 만한 능력이 있었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육본에 갔다고 하더라도 軍을 장악하지는 못했을 거라고 봤어요. 또 내가 말하면 들을 것으로(쿠데타를 돌릴 것으로) 봤어요』
 
  - 金실장께서 朴槿惠(박근혜)씨에게 朴대통령 시해를 전했을때 반응이 어땠나요.
 
  『특별히 기억이 나진 않지만, 朴槿惠를 보니 눈물이 났어요. 그래서 말을 못하고 있으니 「괜찮습니다. 어머니 때도 있었고… 말씀하시죠」라고 했어요』
 
  - 朴槿惠씨가 어느 정도 짐작했다는 뜻이네요.
 
  『네』
 
  金桂元 前 청와대 비서실장은 당시 朴대통령의 有故(유고)만 밝힌 채 사건의 진상에 대해 함구했다. 金실장은 崔총리에게 『국가안보를 위해 보안을 유지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밝힌 뒤 내각에 대해서는 구체적인 사인을 말하지 않았다. 이 때문에 金실장은 김재규에 협조했다는 혐의를 받았다.
 
  그는 10월29일 연행된 뒤 구속돼 김재규의 공범으로 발표되었다. 1979년 12월20일 「김계원 피고인」은 계엄보통군법회의에서 김재규 등과 함께 사형선고를 받았다. 죄명은 내란목적 살인 및 내란 중요임무종사 미수죄였다.
 
  1980년 5월24일 새벽 김재규가 형장으로 끌려가던 날 金실장은 그의 마지막 모습을 목격했다.
 
  - 金실장에게 김재규가 깍듯하게 대했지요.
 
  『네, 김재규가 사형당하는 날 제 방 쪽을 한참 봤어요』
 
  - 그때 마지막 표정은 어땠나요.
 
  『복도가 어두워 표정은 못 봤습니다. 제 방 위치를 아니까 천천히 걸으며 이쪽을 봤어요』
 
  - 육군 구치소 안에서 만난 적은 없나요.
 
  『없어요. 간수가 한 명씩 붙어 있었으니까요』
 
  - 김재규가 사형 당하러 가는 것을 누구에게 들었나요.
 
  『전날 제 담당 간수가 「내일 아침에 갈 겁니다」라고 그래요. 밤에 잠이 와요? 그렇게 있으니 새벽에 웅성웅성 거려요』
 
  - 金실장은 그 당시 무기징역이 확정된 상태였습니까.
 
  『사형에서 무기로 감형됐습니다』
 
  - 사형선고 받은 뒤 얼마 만에 무기가 됐나요.
 
  『나흘인가 닷새 뒤에 무기로 감형됐습니다. …사형수 상태로 며칠 있었죠』
 
  - 감형될 것이라고 예상했나요.
 
  『당시엔 제가 크리스천이니 기도만 했어요』
 
 
 
 死刑囚 생활
 
   - 사형수의 느낌은 어떤가요.
 
  『글쎄요. 당시 한 가지 생각뿐이었습니다. 「죽을 때 내 모습이 어떨까. 총알이 내 이마를 뚫을까, 가슴을 뚫을까」라고 생각했지요』
 
  - 한국전쟁을 겪었으니, 죽음에 대한 공포가 적었을 텐데….
 
  『마찬가지예요. 죽음에 대한 공포심은 누구나 똑같아요』
 
  金실장은 김재규의 사형이 집행된 지 이틀 뒤 안양교도소로 이감됐으며, 1982년 5월1일 형집행정지로 풀려났다. 그는 옥중에서 어머니 李一順(이일순·당시 80세·1982년 1월8일 사망)씨의 부고를 접해야 했다.
 
  - 조사를 받으실 때 고문을 당하셨나요.
 
  『직접적인 고문은 없었고 잠을 재우지 않았어요. 잠이 들라치면 깨워요』
 
  - 조사받을 때 김재규를 봤나요.
 
  『못 봤어요. 다만 고문당하는 소리를 들었어요. 또 우리 집사람 목소리가 옆방에서 났어요. (그 소리를 들으니) 아주 괴로웠어요. 집사람을 고문한 것은 아니었지만…』
 
  - 김재규 소리가 많이 났나요.
 
  『네, 비명도 들리고』
 
  - 그때 간이 좋지 않았다는데… 김재규가 간이 안 좋아 제대로 집무를 못 본 사실을 압니까.
 
  『네, 그때 그런 얘기가 많았죠. 얼굴도 시커멓다 하고…』
 
  - 김재규가 軍장교 시절 자동차 추락사고가 났을 때, 그를 업어서 병원까지 데려갔었죠. 그 이후 가까워졌지요.
 
  『그렇죠. 그때부터 저를 은인으로 생각했어요』
 
  1960년 金桂元 당시 소장이 육군대학 총장으로 부임하면서 부총장이던 김재규와 인연을 맺었다. 그 즈음 김재규의 지프차가 벼랑으로 굴러 떨어졌을 때 金桂元이 중상을 입은 그를 병원으로 옮겨 목숨을 구했다고 한다.
 
 
 
 신민당 전당대회
 
육군보안사령관 시절의 金載圭.
  - 1979년 5월30일 신민당 전당대회가 중요한데, 全大 전에는 김재규와 차지철 사이가 그렇게 나쁘지 않았다는 설이 있습니다. 全大를 계기로 둘 사이가 나빠지지 않았나요.
 
  『비서실장으로 와 보니 둘 사이가 이미 나빠져 있었어요. 그래서 제가 두 사람 자리를 서로 바꾸는 게 어떻겠냐는 말을 했어요. 이미 청와대 비서실도 필요성을 느끼고 있었던 것 같아요』
 
  - 신민당 全大에서 김재규의 對野(대야) 공작이 실패해 이철승씨 대신 金泳三씨가 총재로 당선됐어요. 그날 저녁 全大를 놓고 식사하면서 朴대통령이 신문지를 둘둘 말아 김재규 머리를 치면서 나무라셨다고 하던데… 확실하지는 않지만. 실은 차지철도 공작을 했죠.
 
  『네, 제도 「朴대통령이 왜 저렇게 하실까」 하고 느꼈어요. 공작을 여러 사람에게 맡기니 혼선이 일었어요. 두 사람을 통하지 않고 朴대통령이 직접 하신 경우도 있습니다. 야당 정치인을 불러 (공작을) 지시했어요』
 
  - 全大 이후 눈에 띄게 차지철이 김재규를 욕하고, 朴대통령도 김재규를 무능하다고 보는 것을 느꼈습니까.
 
  『그렇게 느끼진 않았는데… 성격상 두 사람은 안 되겠다, 바꾸는 게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 빨리 바꿨어야 했는데….
 
  『이틀 늦은 것 같아요. 삽교천에 다녀오자마자 바로 했어야 했는데…. 청와대 의전수석인 최광수에게도 몇 번 이야기했어요. 「요 다음에 대통령께 보고할 때 나도 하겠지만 너도 건의 드려라. 둘이 바꾸는 게 좋겠다」고 했습니다. 朴대통령은 최광수를 믿고 좋아했어요』
 
 
 
 朴正熙와 카터의 감정 폭발
 
  신민당 全大 한 달 뒤인 6월29일 카터 대통령이 訪韓(방한)한다. 카터가 도쿄에서 김포에 도착한 시각은 밤 9시가 훨씬 지나서였다. 밤에 남의 나라를 방문한 것도 결례인데 보안상을 이유로 도착시간조차 가르쳐 주지 않았다. 이 바람에 朴대통령은 미리 나와 한 시간을 기다려야 했다.
 
  다음날인 6월30일 청와대에서 두 사람은 頂上회담을 했다. 그 자리에서 朴대통령은 국내 안보를 일방 강연하듯 쏟아 내며 카터를 무안스럽게 만들었다. 화가 난 카터는 옆자리에 앉은 밴스 美 국무장관에게 『이자가 2분 이내에 입을 닥치지 않으면 나는 이 방에서 나가 버리겠다」는 메모를 써 건네주기도 했다고 한다.
 
  - 카터와 만났을 때 배석하셨죠.
 
  『네. 朴대통령이 우리 실정을 오래 말씀하셨어요. 15분쯤 하셨나요?』
 
  - 15분이면 통역시간과 합쳐서 30분 정도는 되겠네요.
 
  『네, 「주한 미군철수는 안 된다」는 것이 주요 내용이었습니다』
 
  - 인권문제에 대한 지적은 없었나요.
 
  『별로 없었던 것 같아요』
 
  - 朴대통령이 카터를 만날 때 많이 고민을 하시던가요.
 
  『그런 것 같아요. 혼자 방에서 골똘히 생각하셨어요』
 
  - 카터 대통령의 인상은 어땠나요.
 
  『무뚝뚝하고… 두 분이 서로 잘 안 맞았어요』
 
  - 「朴대통령 카터에게 엿 먹이는 구나」 하는 느낌을 받진 않으셨나요.
 
  『그렇게는 안 느꼈고… 「자기 열성을 다해 카터를 설득시키려고 애쓰시는구나」하고 생각했어요. 朴대통령은 진지하게 이야기했습니다. 반박하는 식이 아니었고 이해시키려 하셨습니다』
 
  - 그 자리에서 카터가 발언을 하지는 않았나요.
 
  『별로 없었던 것 같아요. 굉장히 화가 난 것 같았어요』
 
  - 자기 고집은 좋은데 손님을 불러 그렇게 하면 안 되지요.
 
  『잘못된 거지요. 술술 부드럽게 해야되는데…』
 
  - 우리 쪽에서 안 말렸나요.
 
  『대통령이 그렇게 하실 줄 누가 알았나요』
 
  - 그렇게 하려면 참모들하고 먼저 논의를 했을 텐데….
 
  『통역을 맡았던 최광수가 말을 부드럽게 바꾸는 방법밖에 없었을 겁니다』
 
  - 카터 등장 이후 미국이 주한미군과 인권문제로 압박해 오니 朴대통령이 꽁하고 벼르고 있지 않았나요? 마치 「너도 내 욕 많이 했으니 내가 할 이야기는 하겠다」는 식이 아니었나요.
 
  『사실 카터도 잘못이에요. 남의 나라에 국빈으로 와서 비행장에 내려 軍 숙소로 바로 가는 사람이 어딨어요. 악수만 하고 바로 미군 숙소로 가버렸어요. 그런 불미스런 일이 어딨나요. 화가 더 났죠』
 
  - 평소 朴대통령이 카터를 이야기할 때 「땅콩장사나 하던 사람」 정도로 얘기하지 않았나요.
 
  『글쎄요. 하지만 과히 좋지 않게 생각 했어요』
 
  - 朴대통령이 카터를 직설적으로 욕한 적이 있습니까.
 
  『기억에 없는데… 뭐 있었을 겁니다. 회담을 마치고 본관 앞에 나가 보니 카터가 탄 리무진이 안 떠나요. 朴대통령과 제가 옆에서 기다리는데 당시 미국 대사 글라이스틴이 리무진에 탔다 내렸다를 반복해요. 한참 있어도 떠나지 않아요. 또 10m쯤 갔다가 다시 멈춰 서요.
 
  의전비서에게 가서 알아보라고 하니 「카터와 글라이스틴이 이야기한다」는 정도만 얘기해요. 나중에 들으니 글라이스틴이 카터에게 욕을 얻어먹었던 것 같아요』
 
  회담 후 카터는 리무진을 숙소 입구에 세워둔 채 차 안에서 글라이스틴 대사에게 회담 진행과정에 대한 불만을 토로한 것으로 전해졌다. 朴대통령은 그간 카터에게 묻어 두었던 섭섭한 생각을 토로한 것이었다.
 
  그해 7월20일 미국은 「주한미군 철수를 하지 않겠다」고 발표했다. 朴대통령의 이날 압박이 성공을 거둔 셈이었다.
 
 
 
 최태민과 박근혜
 
  - 얼마 전 金실장께서 『차지철과 김재규의 사이가 나빴던 것은 대통령의 큰 딸인 槿惠씨를 둘러싼 힘겨루기가 원인』이라고 말씀하신 게 한 주간지에 실렸는데, 무슨 의미인가요.
 
  『자꾸 차지철이 김재규가 하는 일에 제동을 거는데, 그중 하나가 박근혜와 崔太敏(최태민) 목사 문제였습니다. 최태민 때문에 여러 사람에게 (청와대로)비난이 꽤 많이 들어왔어요. 결국 대통령에게 보고되는데… 구국봉사단 총재였던 최태민이 재벌 사람을 불러 돈을 모으는데… (액수가) 꽤 큽니다.
 
  박근혜씨가 앞서서 돕기 때문에 김재규가 朴대통령에게 몇 번 말씀을 드렸는데, 「朴대통령이 딸 얘기만 듣는다」고 해요』
 
  - 당시 朴槿惠씨를 시집보내야 한다고 말한 적이 없나요.
 
  『朴대통령께 두어 번 말씀드린 일이 있어요. 그런데 한번은 朴대통령께서 최태민 얘기를 했어요.「최태민이라고 있는데 金실장 알아?」 그래요. 제가 알 수 없죠. 「얘기를 들었습니다만… 목사라고 하던데요」 하니, 「글쎄 목사라고 하는데 진짜인지 뭔지 모르겠어. 내가 불러 親鞫(친국)을 했는데, 요즘은 덜 만나는 모양인데」 그래요』
 
  - 최태민을 직접 불러 친국을 했다는 겁니까.
 
  『네, 朴대통령에게서 직접 들었습니다. 김재규에게 사실이냐고 물으니 「親鞫을 했다」고 해요. 꿇어 앉혀서…. 그런데 그 배후에 차지철이 있다는 겁니다. 김재규는 「차지철이 최태민의 청와대 출입을 방조해 놓고 대통령에게 보고하지 않았다」고 불만이 높았어요.
 
  김재규는 자기 나름대로 대통령에게 보고하는데, 차지철이 볼 때는 김재규가 옆에서 자꾸 자기가 하는 일에 이러쿵저러쿵 말을 하니, 둘 사이가 점점 나빠졌다고 봅니다. 김재규는 자연 청와대 출입이 어려워지게 된 겁니다』
 
  - 朴槿惠씨도 朴대통령에게 김재규를 많이 비난했겠네요.
 
  『그렇죠. 자연 그렇게 될게 아닙니까. 자기가 하는 일에 감시하는 것처럼 이러쿵저러쿵 이야기하니…』
 
  - 「최태민이 기업체 회장에게 일종의 압력을 넣어 돈을 많이 모은다」는 보고가 청와대로 올라온 거죠.
 
  『그때 잘못한 일이 있는데, 최○○이라고 있어요. 그 친구가 청와대 비서로 있었는데, 제가 판단을 잘못해서 朴대통령에게 「槿惠양이 영부인 일을 하고 있으니 그를 보좌하는 비서관을 두는 게 좋겠다」고 보고했어요. 대통령께서 「글쎄…」 이러시면서 「누가 좋겠냐」고 묻길래 「槿惠양에게 물어보는 게 좋겠다」고 했어요. 그때 의전수석인 최광수 이야기가 「최○○이 담당하면 좋겠다」고 해서 제가 추천하지 않았겠어요? 최씨 몇이 몰리게 된 것이지요』
 
  - 최○○은 최태민과 가까워졌겠네요.
 
  『그렇죠. 제가 생각한 것과 영 달라지게 됐어요』
 
  - 참 이상한 게 그전의 朴대통령 같으면 최태민을 잡아넣었을 텐데.
 
  『한 번은 「야단치려고 해도 에미 없는 것이 불쌍해서 눈물 나더라」고 하시던데요』
 
 
 
 김재규와 차지철, 그리고 朴正熙
 
   - 이 문제 역시 朴대통령의 접근권 관리가 제대로 안 됐기 때문인 것 같아요. 빨리 정보부장을 바꿨어야 했던 것 아닙니까.
 
  『(朴대통령이) 두 사람 모두에게 미련을 갖고 있었어. 둘 다 좋아했으니까요』
 
  - 朴대통령이 김재규를 좋아한 이유는 어디에 있나요.
 
  『두 사람이 동향인 데다 육사 동기(2기)고 초등학교 교사 경력도 같았다고 해요. 사실 확인은 안 했지만 김재규에게 그런 이야기를 들었어요. 그래… 「김재규는 朴대통령과 어릴 때부터 친분관계가 있구나」 하고 생각했지요』
 
  - 朴대통령이 김재규를 대할 때 동생처럼 대했지요.
 
  『네, 朴대통령이 아무에게나 말을 안 놓는데, 김재규는 동생처럼 얘기해요』
 
  - 朴대통령이 김재규를 너무 몰아세워 그에게 미안한 감정 같은 것은 못 느꼈나요.
 
  『미안한 느낌은 없으셨던 것 같아요. 김재규를 너무 믿고 귀여워했어요. 「저놈은 야단쳐도 괜찮다」는 식이었지요. 김재규는 자기대로 다 컸는데, 「여기 있는 놈들 전부 나보다 나은 놈이 없는데 나를 멸시한다」고 생각한 것 같아요』
 
  - 어떻게 보면 朴대통령이 차지철보다 김재규를 더 신뢰한 것 같지 않나요.
 
  『네, 맞아요』
 
  - 김재규도 朴대통령을 진심으로 깍듯하게 모셨지요.
 
  『네, 그럼요』
 
  - 朴대통령이 차지철에게 대하는 것은 김재규와는 달랐지요.
 
  『그렇게 친밀하진 않았아요. 뭔가 간격을 두고 있었던 것 같아요』
 
  - 차지철과 김재규의 갈등을 朴대통령이 조장하거나 암묵적으로 악용해 권력의 안전을 도모하려 했다고 보진 않으십니까.
 
  『정치인으로 두 사람을 경쟁시켰을 수 있었는지 모르지만, 朴대통령 성격으로 볼 때 악의적으로 그렇게 하시진 않았을 거예요. 朴대통령은 두 사람 다 귀엽게 보셨어요』
 
  - 이럴 때 JP(김종필) 같은 분이 朴대통령을 만나 간언할 수 있는데, 그런 역할을 하지 못했어요. JP도 차지철을 상당히 경계를 했겠네요.
 
  『네』
 
 
 
 「朴正熙는 JP를 후계자로 고려 않았다」
 
건설부 장관 시절 국회에서 답변하는 金載圭.
  - 朴대통령께서 신직수(청와대 법률특보)·김기춘(법률 비서관)씨에게 「언젠가 자리에서 물러난다. 그 전에 JP를 총리로 임명해 자연스레 대통령 권한대행을 맡기는 방안을 연구하라」고 지시했다고 하던데, 그런 보고를 받았나요.
 
  『그랬을까요? 누가 괜히 한 말일 겁니다』
 
  - 朴대통령의 지시로 그런 연구를 했다고 하던데요.
 
  『저는 朴대통령이 어떤 계기가 있었다고 해도 JP에게 (대통령직을) 넘기진 않았을 것으로 봐요』
 
  - 그런 느낌을 받았나요? JP를 싫어하는….
 
  『특별한 이유는 없지만, 제가 육군참모총장 시절, 「JP를 그만두게 해야 한다」고 보고한 적이 있습니다. 당시 김종필 중앙정보부장과 오히라 일본 外相의 韓·日 청구권 협상 메모를 두고 학생데모가 심할 때였는데, 朴대통령에게 그 얘기했더니 짜증을 내시며 「그런데도 그 친구 왜 못 알아들어」라고 하시면서 저보고 「金장군이 JP와 가깝잖아. 나가라고 얘기해」라고 할 정도였어요. 제가 비서실장 시절에도 국내·외 사정이 한참 복잡해 웬만하면 JP를 불렀을 텐데 한 번도 부르지 않았어요』
 
  - 朴대통령이 1979년 당시 만난 사람을 보니 공화당 사람과는 거리를 두신 것 같아요.
 
  『싫은 사람은 안 만나려 하셨어요』
 
  - 朴대통령이 김수환 추기경과 만나시지는 않았나요.
 
  『제가 한번 만나시라고 말씀드렸는데 과히 반응이 좋지 않았어요』
 
  - 그분들을 싫어하셨나요.
 
  『김수환 추기경, 강원용 목사 같은 분들 이름을 거명하면 그냥 머리를 흔들었어요』
 
  - 그분들이 곧잘 바른 소리를 해서 그런 반응을 보이셨나요.
 
  『저는 그런 분들과 朴대통령을 연결시키려 했는데 「그만둬」 했어요. 朴대통령이 김재규나 저를 보시면, 어린애처럼 생각하시고 「그만둬」, 「나둬」, 「싫어」라고 하셨어요. 물론 딴 비서관들에겐 그런 표현을 쓰지 않으셨어요』
 
  - 정승화 장군과 차지철의 관계는 어땠나요.
 
  『좋지도, 나쁘지도 않은 사이였어요. 그런데 차지철은 정승화를 좀 밑으로 봤죠.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있다고 본 것 같아요. 정승화는 자기 주관이 있는 사람이니까 경솔히 움직일 사람이 아니지요』
 
 
 
 사무라이 기질 있던 김재규
 
   - 김재규의 軍 시절 당번병을 만난 적이 있습니다. 그 사람 눈에 비친 김재규는 사무라이 영화에 중독된 사람이라고 하던데요.
 
  『맞아요. 김재규는 일제시대 일본군 소년 항공병으로 갔다 왔다고 하는데 그학교 교육이 사무라이 기질로 만드는 겁니다. 격하면 배를 가르는 것은 보통이고. 김재규가 그런 기질이 있었던 것 같아요』
 
  - 그가 사무라이 얘기를 자주 하지 않던가요.
 
  『그냥 일본 이야기를 많이 했는데, 「어떤 목적을 위해서는 목숨을 버리겠다」는 기질이 있었다고 봐요』
 
  - 사무라이들은 자신이 존경했던 이가 잘못되면, 그 사람을 죽이고 스스로 자살한다고 봅니다. 김재규도 그런 생각을 하지 않았을까요.
 
  『글쎄…』
 
  - 김재규는 평소 예절이 바른 사람이었죠. 차지철과 다르죠. 차지철은 교양이 없고 안하무인이고.
 
  『그럼요』
 
  - 그런데 김재규는 갑자기 폭발하는 성격이 있다고 하던데… 누가 「김재규가 건설장관 시절, 국회 상임委 도중 갑자기 화를 내더라」고 기억하더군요. 10·26이 일어난 그날 밤도 그런 성격이 폭발한 게 아닐까요.
 
  『그렇죠. 그러니 옆 건물 2층까지 뛰어가 권총을 가져왔겠죠』
 
 
 
 朴正熙의 애창곡
 
   - 金실장은 朴대통령을 어떤 사람으로 보십니까.
 
  『모든 것이 깨끗하고 직선적인 사람입니다. 구질구질하게 말을 돌려서 하는 분이 아니셨어요. 그분을 두고 요즘 친일파라는 말이 많은데 그런 사람을 친일파라고 하면, 대한민국에 남을 사람이 하나도 없어요. 요즘 과거사 문제로 떠드는데 언제까지 이런 짓을 해야 하나요』
 
  - 朴대통령이 사석에서 일본 노래를 부르시는 것을 본 적이 있나요.
 
  『뭐… 없어요. 일본 노래를 부른들 또 어떴습니까. 그걸 가지고, 그걸 부르면 친일파가 돼버리는 건가요?』
 
  - 朴대통령이 어떤 노래를 주로 부르셨나요.
 
  『「버들잎 외로운 이정표~」, 「으악새 슬피우니~」 두 가지만 불러요. 트럼펫도 부셨는데, 잘은 못하셨지만 오르간도 치시고요. 사범학교 출신이니 음악 기초는 합니다. 일제시대에 사범학교에 들어가면 천재라고 했지요』
 
  - 1970년대 신민당 전당대회에서 金大中씨가 대통령 후보로 뽑힐 당시 정보부장을 하셨죠. 그때 정확하게 예측을 하셨나요? 아니면 金泳三씨가 후보가 된다고 보셨나요.
 
  『예측을 잘못했던 것 같아요. (잘못해서) 대통령께서 좀 화가 나셨던 것 같습니다(웃음)』
 
  - 오히려 朴대통령은 金泳三씨가 되면 경상도 표를 나누니까 오히려 金大中씨가 된 게 잘된 일이라고 생각하시진 않았나요.
 
  『글쎄요. 그때 그랬는지 기억이 나질 않아요. 당시 저는 정치문제에 대해 그다지 관여를 안 했어요』
 
  - 정치는 다른 사람이 했나요.
 
  『그때가 제가 정보부장이 된 지 얼마 안 됐을 때입니다. 나중에 공화당 쪽 사람에게 들으니 제가 그걸 잘못해서 잘렸다고 해요』
 
  - 무엇을 잘못했다는 건가요.
 
  『大選을 잘못 예측해서…』
 
  - 大選이 아니라 전당대회가 아닙니까.
 
  『뭐든 「잘못해서 잘렸다」는 이야기를 그때 들었어요. (全大 때문인지도) 모르지요』
 
  - 朴대통령이 김형욱을 사석에서 욕하신 적이 있나요.
 
  『농담처럼 이야기하시지, 그렇게 심하게 욕한 적은 없었어요』
 
 
 
 朴대통령, 釜馬사태 심각하게 안 봐
 
  - 권력자로서 朴대통령을 만난 사람들은 비정하다고 하지만, 행정하는 사람들은 그를 따뜻하고 합리적인 분으로 보더군요. 권력자냐, CEO냐를 두고 시각차가 크다는 느낌이 듭니다. 혹시 무서운 사람이라고 느낀 적은 없나요.
 
  『별로. 당시에는 어느 정도 통치에 자신감이 있으셨다고 봅니다』
 
  - 1979년 釜馬사태 당시 비상계엄령은 과잉조치가 아니었나요.
 
  『저도 크게 염려하지 않았어요. 그런데 김재규가 (부산에) 갔다 와서 「보통이 아니다」라고 해요. 저에게 「실장님, 판단을 잘못하고 있다」고 해요. 차지철은 반대로 「괜히 (김재규가) 놀라서 저렇다」고 반박했어요. (두 사람의 시각차가) 대통령의 판단을 흐리게 한 것 같아요』
 
  - 朴대통령이 돌아가시기 하루 전에 국가안보회의를 열었지요. 당시 釜馬사태 분석보고를 했는데, 朴대통령이 釜馬사태를 계기로 국정쇄신을 하려 하셨지요.
 
  『그런 것 같아요. 하지만 당시 朴대통령은 釜馬사태를 그다지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았어요』
 
  - 평상시 같으면 아무 일도 아닌데 작은 허점도 허용하지 않으려는 독재시대의 과잉이 사태를 키웠다고 봅니다. 조금만 뚫려도 김재규처럼 「큰일났다」고 과대평가한 것이지요. 지역도 한정됐는데 계엄령을 내리니 더 문제가 됐어요. 계엄령은 누구의 주장인가요.
 
  『차지철일 겁니다』
 
  - 장시간 좋은 말씀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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