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순14연대 반란사건 진압 1등공신… “‘숙군’ 없었다면 대한민국은 없어”
白仁燁
⊙ 88세. 평안남도 강서 출생. 군사영어학교 졸업(1차). 미국 지휘참모대학 수료.
⊙ 육군참위(소위) 임관(군번 23번), 17연대장, 수도사단장, 육군본부 정보국장 및 특무부대장 겸직,
제주도 육군제1훈련소장, 6사단장, 9사단장, 1군단장, 6군단장, 육군본부 관리참모부장,
예비역 육군중장(1960년 7월).
⊙전 선인학원 이사장.
⊙ 6·25전쟁에서 3차례 부상… 옹진반도에서 부대후퇴 엄호사격하다 ‘고립’
⊙ 한국군 역사상 27세 ‘최연소 사단장’ 기록
⊙ 인천상륙작전 때, 수도사단장에서 상륙작전연대의 연대장으로 직급 낮춰 참전
⊙ 육군제1훈련소 소장으로 부임, 중공군 개입 후 전선 투입되는 신병 10만명 양성
⊙ “선봉에서 싸우고, 후퇴는 가장 마지막에”
자문 : 南廷屋 박사·군사편찬연구소 책임연구원
白仁燁
⊙ 88세. 평안남도 강서 출생. 군사영어학교 졸업(1차). 미국 지휘참모대학 수료.
⊙ 육군참위(소위) 임관(군번 23번), 17연대장, 수도사단장, 육군본부 정보국장 및 특무부대장 겸직,
제주도 육군제1훈련소장, 6사단장, 9사단장, 1군단장, 6군단장, 육군본부 관리참모부장,
예비역 육군중장(1960년 7월).
⊙전 선인학원 이사장.
⊙ 6·25전쟁에서 3차례 부상… 옹진반도에서 부대후퇴 엄호사격하다 ‘고립’
⊙ 한국군 역사상 27세 ‘최연소 사단장’ 기록
⊙ 인천상륙작전 때, 수도사단장에서 상륙작전연대의 연대장으로 직급 낮춰 참전
⊙ 육군제1훈련소 소장으로 부임, 중공군 개입 후 전선 투입되는 신병 10만명 양성
⊙ “선봉에서 싸우고, 후퇴는 가장 마지막에”
자문 : 南廷屋 박사·군사편찬연구소 책임연구원
백인엽(白仁燁) 예비역 육군중장의 청년시절 모습은 ‘미소년’이다. 그는 ‘6·25전쟁 영웅’ 백선엽(白善燁) 예비역 육군대장의 아우다. 그러나 그는 백선엽의 친동생이기 이전에 ‘용장(勇將)’이다. 그가 평소 가혹할 정도의 교육훈련을 통해 강군(强軍)을 만들었고, 그 결과 6·25전쟁에서 그의 부대가 ‘불패(不敗)’에 가까운 기록을 갖게 됐다는 사실을 기억하는 이는 드물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북아프리카 전선에서 에르빈 롬멜의 전차군단을 격파한 조지 패튼(George S Patton) 장군의 ‘전쟁 10계명’, ‘한 방울의 땀으로 한 드럼의 피를 아낀다’ ‘돌격은 사상자를 줄인다’ ‘뒤에서 미는 지휘관은 리더가 아니라 운전수다’ ‘정보를 전술작전의 최우선으로 한다’를 그는 6·25전쟁 기간 내내 실천에 옮겼다.
때문에 6·25전쟁 전사가(戰史家)들은 그를 백선엽 예비역 육군대장, 김종오(金鍾五) 예비역 육군대장, 임부택(林富澤) 예비역 육군소장과 함께 6·25전쟁을 승리로 이끈 ‘잘 싸운 군인’으로 꼽는 데 주저하지 않는다.
1923년 평안남도 강서(江西) 출신인 그는 평양 약송국민학교·서울 중동고를 거쳐 일본 기후현(岐阜縣) 항공학교를 졸업하고 일본군 소위로 복무하다 광복을 맞았다. 평양으로 돌아온 그는 민족지도자 조만식(曺晩植) 선생의 경호대장을 지냈다. 광복 직후 찬탁(贊託)과 반탁(反託)의 물결 속에서, 그는 조만식 선생의 ‘밀서(密書)’를 이승만(李承晩) 박사에게 전달하기 위해 38선을 넘었다고 한다.
그는 원용덕(元容德) 당시 군사영어학교(陸士 전신) 부교장의 소개로 ‘군영(軍英)’을 졸업하고, 육군 참위(소위)로 임관했다. 이후 그는 1대대 부관, 12연대 부연대장, 12연대장, 17연대장, 수도사단장, 육군본부 정보국장 및 특무부대장, 초대 제주도 육군제1훈련소장, 6사단장, 1군단장, 6군단장을 거쳐, 육군본부 관리참모부장을 마지막으로 1960년 7월 군 생활을 마감했다. ‘참모’보다는 ‘야전 지휘관’ 냄새가 강하게 풍기는 경력들이다.
지난 4월 중순, 기자는 서울 서대문구 연희동 백인엽 장군 자택을 찾았다. 올해로 졸수(卒壽, 90세)를 바라보는 나이지만, “지금 내가 말하는 것, 아시갔어요?”라고 카랑카랑한 평안도 사투리로 되물을 때는 지금도 전장(戰場)을 호령하는 지휘관 말투였다.
전역 이후 그는 언론에 일절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매스컴에 나와 잘난 체할 것도 없고, 내가 떠들면 형님(백선엽)에게 누(累)가 된다”는 게 이유였다. 그는 6·25전쟁을 치르면서 군인 자식들이 배우지 못하는 것을 안타깝게 여겨 1958년 성광학원재단을 인수, ‘선인학원(善仁學園)’을 설립했고, 박정희(朴正熙) 대통령은 그의 학원설립 이념을 높이 평가했다고 한다. 그는 1994년 선인학원이 시·공립화 정책에 따라 인천시(市)로 넘어갈 때까지 학원경영에 전념했다.
백인엽 장군은 6·25전쟁의 분수령이었던 인천상륙작전 때, 수도사단장(당시 대령) 직책을 버리고 17연대장(당시 중령)을 맡았다. 장군 진급의 지름길인 사단장 직책을 버리고, 사지(死地)로 가는 인천상륙작전연대의 연대장으로 종군하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그는 6·25전쟁 기간 중 세 차례의 큰 부상을 입었다. 그 기간 중 사단장급 이상의 장교 가운데 몸에 적탄(敵彈)의 흔적을 갖고 있는 군인은 드물다. 그는 기자에게 “군인(軍人)은 전장에서 싸워야 참군인”이라면서 6·25전쟁 당시 입은 허벅지와 두부(頭部) 관통상 ‘흉터’를 훈장처럼 내보였다.
曺晩植 선생 ‘밀서’ 들고 38선 넘어
백인엽은 평양에서 진남포로 2km 떨어진 강서군 덕흥리에서 2남1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조부는 강서군수를 지냈고, 부친 백윤상(白潤相)은 일본 메이지(明治)대학을 졸업했다고 한다. 백인엽은 “구한말(舊韓末) 참령(소령)을 지낸 외할아버지가 강서군에 훈련차 군수 집에 유하면서 막내딸인 어머니와 아버지를 연결시켰던 것”이라고 했다.
백인엽은 최규동(崔奎東) 전 서울대총장(6·25전쟁 중 납북)이 설립한 중동학교(중동고)의 한 수학교사 소개로 중동학교로 진학한다. 그는 “이병철(李秉喆) 전 삼성그룹 회장도 중동고 별과를 나왔다”면서 “중동학교를 졸업할 무렵, 일본 기후(岐阜) 비행학교로 갔다”고 했다.
백인엽은 학병출신으로 비행대대에서 근무하다 광복을 맞았다. 사흘 만에 귀국한 당시 평양은 이미 소련군이 장악하고 있었다. ‘애송이’ 김일성(金日成)의 등장으로 평양은 술렁이고 있었다. 조만식 선생은 평남 인민정치위원장이었다. 백인엽은 매형인 조만식 선생 비서실장의 소개로 조만식 선생 경비대장(경호실장)이 됐다. 그의 형 백선엽은 비서실에 근무했다.
백인엽 장군은 “이따금 김일성이 찾아와 조만식 선생을 만나 북한 주둔 소련군정청 총사령관 슈티코프 중장의 ‘찬탁 강요’ 메시지를 전달하곤 했다”면서 “그때마다 조만식 선생은 강한 어조로 반대했고, 김일성은 민심(民心)을 갖고 있는 조만식 선생을 표면적으로는 깍듯하게 대했다”고 했다.
백인엽은 “1945년 10월 하순, 소련군의 지도로 창설된 적위대(赤衛隊)가 우리 경호대를 해산했다”면서 “그해 12월 조만식 선생은 고려호텔에 감금됐다”고 했다. 백인엽이 조만식 선생에게 경비대장 사표를 내던 날, 조만식 선생은 그를 불렀다.
백인엽 장군은 “조만식 선생께서 ‘백군, 이남으로 서둘러 가 이승만 박사에게 이 편지를 전달하게’라고 부탁했다”면서 “정일권(丁一權)씨와 함께 경비대 트럭을 타고 38선을 넘다 미군 헌병에게 걸려 곤욕을 치르기도 했다”고 했다. 백인엽은 이승만 박사가 잠시 머물던 경교장(京橋莊)으로 가 밀서를 전달했다고 한다.
美군정, 장교임관 직후 曺晩植 선생 근황 물어
미국은 1945년 9월 초 오키나와에서 일본과 전쟁을 치렀던 하지 중장의 미(美)24군단(6사단·7사단·40사단)을 38도선 이남 점령군으로 진주시켰다. 맥아더 미극동군 사령관 예하의 미24군단장 하지 중장을 점령군사령관, 미7사단장 아널드 소장을 군정장관으로 임명했다.
인천항으로 상륙한 미군은 곧 군정(軍政)을 실시해 행정 및 경찰조직 마련에 착수했다. 미군이 군 조직을 위해 취한 첫 조치는 ‘군사영어학교’를 통해 장교를 배출하는 것이었다. ‘군영(軍英)’으로 부르는 군사영어학교는 1945년 12월 5일, 서울 냉천동 감리교신학대학을 빌려 개교했다.
국방경비대 창설에 관한 인사업무는 중앙청 203호실에서 아고(Argo) 대령이 관장했고, 이응준(李應俊) 장군이 장교채용에 관해 아고 대령에게 조언하고 있었다. 군영에서는 리스 소령이 원용덕 부교장과 함께 ‘군사영어’를 가르쳤다.
백선엽을 아들처럼 생각했던 원용덕 장군은 “장차 장교양성소로 키울 군사영어학교로 진학하는 게 어떠냐”고 그에게 입교를 권했다. 백인엽은 “공산당놈들 원수를 갚기 위해서라도 군대라면 어디라도 가겠다”며 군영에 들어가 1차로 졸업했다. 그의 군번은 23번, 그의 형(兄) 백선엽 예비역 대장은 54번이었다. 백인엽은 군사영어학교 입교를 위한 군정청의 아고 대령 면접 순간을 이렇게 회고했다.
“아고 대령이 고자세로 버티고 있었고, 이응준 장군이 면접에 임하는 장교들의 군대경력을 아고 대령에게 이야기해 주고 계셨습니다. 이형근(李亨根)은 통역관(예비역 육군대장)으로 있더라고요. 아고 대령이 생사여탈권을 갖고 장교들을 즉석에서 합격, 불합격을 판정했습니다. 합격한 사람들은 그 자리에서 군번을 부여받고 참위(소위) 계급장을 달았습니다.”
그는 “임관 직후 군정청은 나를 추가심문반으로 넘겼다”면서 “아고 대령이 ‘손자 같다’면서 ‘조만식 선생의 생사, 근황, 생각’ 등을 물었다”고 했다.
국방경비대 창설을 주도한 것은 물론 미24군단 소속 장교와 하사관들이었다. 미군은 태릉의 1연대를 필두로, 대전(2연대), 이리산(3연대), 광주(4연대), 부산(5연대), 대구(6연대), 청주(7연대), 춘천(8연대) 등 각 도에 1개 연대씩을 창설하기로 하고, 미군 위관급 장교를 고문관으로 각 연대에 파견했다. 최초 1개 중대(200명)를 우선 편성하고, 현지 모병으로 인원이 차는 대로 연대, 대대로 확대개편했다.
―어떤 계기로 1연대로 갔습니까.
“일본군 소좌(소령) 출신으로 부평병기창 감독관을 지낸 채병덕(蔡秉德) 정위(초대 육군참모총장)가 1연대를 창설했어. 그분은 평양에서부터 알고 지내던 분이라 ‘같이 가자’고 하기에 따라갔지요. 그때 이미 서울에는 대대, 각 도에는 중대 편성을 다 해 놓았더군. 채병덕 연대장 부관으로 있다가 부대가 커지면서 선임소대장으로 나갔지. 그러던 중 1연대에서 지휘관 구타사건이 발생하는 바람에 정일권씨는 4연대장, 나는 중대장으로 함께 광주로 내려가게 됐어. 정일권씨는 월남도 함께 하고, 같은 연대에서 근무한 질긴 인연이 있어요.”
백인엽 장군은 “국군이 편성되면서 채병덕 장군은 국방참모총장(합참의장)이 되고 나는 채병덕 장군께 이야기해 2여단(여단장 원용덕) 산하의 12연대(군산) 부연대장으로 자리를 옮겼어. 이게 백인엽 운명의 큰 전환점이 될 줄은 몰랐지”라고 덧붙였다.
肅軍 없었다면 6·25때 대한민국은 무너졌을 것
1948년 4월 3일 새벽, 좌익들의 ‘제주인민해방군’은 제주도내 15개 경찰지서 가운데 14개소를 급습하는 것으로 폭동을 일으켰다. 패전 직전 제주에 주둔하던 일본군은 3개 사단 5만 병력이 사용하던 무기를 그대로 두고 항복해 버리는 바람에 좌익 ‘인민해방군’을 무장시켜 주는 꼴이 됐다.
―여수순천 반란사건을 진압하면서 왜 군 내부에 좌익세력들이 준동했다고 생각했나요.
“가장 큰 요인은 사상적 혼미(昏迷)야. 좌우익이 첨예하게 대립된 사회여건은 군(軍)이 좌우세력 간 힘의 대결장이 되게 하는 결정적 원인이었지요. 북한은 소련의 지원으로 공산정권을 수립하고 일사불란하게 전쟁준비를 하는 동안, 남한은 내부 갈등을 해소하는 데 에너지를 탕진하고 있었다고.”
백인엽 장군은 “여수순천 10·19사건은 제주 4·3사건으로 촉발된 것”이라고 했다.
“수원과 부산에서 증파된 2개 대대로 9연대를 보강해 본격적으로 제주 공비토벌에 나서게 됐어. 그 와중에 연대장으로 부임한 박진경(朴珍景) 대령이 6월 18일밤 좌익 문상길(文相吉) 중위의 지령을 받은 병사에 의해 야전침대에서 취침 중에 M1소총으로 살해당하는 끔찍한 일이 벌어졌어. 당시 군정장관 윌리엄 딘 장군은 자신이 신임하던 박 대령이 피살되자 공비토벌에 박차를 가했지.”
1948년 10월 19일 저녁 제주 토벌작전에 증파하기 위해 여수에서 승선 직전에 있던 김상겸(金相謙) 대령의 5여단 예하 14연대에서 남로당계 장병들 주도로 반란이 일어났다. 반란군은 부대를 장악하고 여수를 손아귀에 넣은 후 그 세력을 순천쪽으로 확대하고 있었다.
“이들은 제주도 토벌을 위해 미군의 M1소총과 기관총, 박격포 등 최신예 무기로 무장한 직후였기 때문에 화력이 막강했어요. 토벌군 사령관에 임명된 육군 총사령관 송호성 준장은 원용덕 대령의 2여단 예하 12연대(군산)·2연대(대전)와 김백일 대령의 5여단 예하 3연대(전주)·4연대(광주) 등 사고지역에 가까운 병력을 토벌부대로 순천방면에 급파했어. 원용덕 2여단장이 ‘김지회(金智會)가 주동해 14연대가 반란을 일으켰다’면서, 당신이 출동을 해야겠다고 했지.”
백인엽 장군은 “백인기 12연대장이 출동하는 대신, 부연대장인 내가 2 개 대대를 이끌고 광주로 집결하라는 명령을 받았다”면서 “토벌군은 순천 외곽인 보성(寶城), 학구(鶴口), 광양(光陽)에 신속히 진출해 포위망을 압축했다”고 했다.
―진압작전은 순조로웠습니까.
“광주에서 트럭 100여 대를 징발해 순천으로 들어갔어. 미군으로부터 지원받은 81mm박격포 12문과 실탄으로 무장하고 산을 넘었죠. 중간에 4연대 소속 장교를 만났더니 ‘순천은 다 점령당했다’고 해요. 4연대는 전부 분산했고, 실제로 백인엽의 12연대 2개 대대와 반란군 2개 연대랑 싸우는 셈이 됐어. 1대대장 김희준(金熙濬) 중령이 트럭에는 박격포, 지프에는 기관총을 매달고 순천 시내로 진격해 들어갔어요. 지서(支署)마다 인공기가 걸려 있고 시체 투성이에요. 인공기에 대고 기관총을 10분 쏘고, 전투준비를 했어. 낮 12시쯤 점심도 건너뛰고 지형정찰을 통해 부대를 3개로 나눠 공격을 개시했지. 신병들은 야간전투에 약해 4시간 동안 점령해야 했기 때문에 서둘러야 했어.”
백인엽의 12연대는 순천시내를 향해 80mm박격포를 50발 쏘며 진격을 개시했다. 순천시내는 순식간에 불바다가 됐고, 반란군은 놀라 가벼운 저항만 하다 광양으로 도주했다. 반란군 수괴인 김지회도 광양 백운산을 통해 지리산으로 숨어들었다.
백 장군은 “토벌군사령부 참모장인 형님(백선엽)은 장성환 중위(공군참모총장 역임)가 조종하는 정찰기를 타고 현지 상공에서 토벌군에게 ‘일몰전 공격하라’는 신호를 보냈다”면서 “무전기가 없던 시절이라 형님은 메모를 넣은 와이셔츠를 벗어 던졌고, 그것을 마침 우리 연대 병사가 발견해 나는 지체없이 선봉으로 순천시내로 공격해 들어갔고 관망하던 다른 부대들도 공격에 가담했다”고 했다. 그는 “유혈이 낭자한 시가전(市街戰) 끝에 반란군의 예봉을 꺾고 순천을 탈환했다”면서 “이튿날 여수는 전투도 거의 안 하고 점령했다”고 했다.
그는 “이어진 구례지역 전투에서 백인기 연대장이 반란군 잔당(殘黨)에게 무전을 도청당하고 포위돼 자결하는 사건이 있었지만, 12연대는 구례지역 전투에서 반란군의 기습공격을 효과적으로 ‘공세이전’하면서 여순반란사건의 종지부를 찍었다”면서 “각 중대 나팔수들을 전부 불러모아 나팔을 불어 적을 공포에 몰아넣었다. 밝은 대낮에 보니 김지회의 애인인 조경순의 핸드백도 보였다”고 했다. 그는 “이 사건을 계기로 국군은 3차례의 대대적인 숙군(肅軍)을 했는데, 만약 이때의 숙군이 없었다면 6·25전쟁을 맞아 대한민국도 붕괴되고 말았을 것”이라고 했다.
6·25 이틀전 진지공사 완료했으나…
―오늘날 2사단의 모체가 되는 17연대를 창설했죠?
“12연대보다 우수한 부대를 만들겠다는 각오로 12연대 대대장 김희준 중령을 데려다가 부연대장을 시켰어. 부대를 창설할 때 장병들 정신교육, 체력훈련, 무기조작 능력 등을 강조해 교육훈련을 반복했지. 지휘관이 똑똑해야 강군이 돼요. 그렇게 훈련이 끝나면 자신이 생겨 대련할 때 병사들이 대검을 뽑고 휘둘러요. 연대를 만드는 과정에서 당시 ‘주먹황제’라고 하는 김두한(金斗漢)이 300명 되는 장정들을 추천해 주기도 했어. 깡패들이지.”
―초대 17연대장으로 옹진반도 방어를 담당하는 옹진지구전투 사령관으로 6·25를 맞이했습니다.
“적정을 살피면서 전쟁이 날 것을 예감하고 있었습니다. 17연대 고문관에게 20일간 시간을 받아 부대를 옹진반도로 이동했어. 그때 18연대, 2연대도 패퇴한 ‘은파산 전투’가 발발했고, 로버츠 군사고문단장은 ‘김석원 수도사단장이 북한군을 선제공격해서 골치’라면서 ‘당신 형이 1사단장으로 올 것이니 절대 선제공격을 하지 말라’고 당부하더군. 적진은 이미 요새화해 공격해서 될 것이 아니라고 했어요. 이용문(李龍文) 정보국장은 연대 안의 공산주의자 명단을 가져다줘 옹진반도에 부대배치를 하기 전에 사상적으로 무장할 수 있었어.”
백인엽은 지형정찰을 통해 일렬로 편성됐던 부대를 본대, 예비대로 나눠 편성하는 등 전쟁에 대비했다. 실탄사격도 병사 1인당 500발씩 사격하도록 했다.
“1950년 6월 23일부터 수색대를 투입해 포(砲)에 견딜 만큼 진지를 강화했지. 민심을 얻기 위해 시내에 나가 ‘딴짓’을 못하도록 단속도 했고. 민간인들도 전쟁 때 보급대로 동원할 수 있도록 했지. 6월 23일부터 인민군 포가 앞으로 나오고, 트럭이 먼지를 일으키며 수없이 왔다 갔다 해. 장교들은 ‘국지전이 아니라 전면전’이라고 보고하더군. 23일부터 부대를 ‘대기’상태에 놓고, 인접부대인 1사단 형님에게 전보를 쳤더니, 시흥에서 참모대학 교육을 받고 계셔. 마침내 북한군은 25일 오전 5시 38선에서 전면공격을 해 왔던 거야.”
4명이 부대 후퇴 엄호사격하다 ‘고립’
―6·25전사에는 25일 오전 4시로 기록돼 있습니다.
“물론, 5시 이전에 소규모 포격을 했지만, 정확히 새벽 5시였다고. 23일부터 이틀 동안 진지공사를 독려하느라 CP(지휘소) 의자에서 깜빡 조는 사이 포격이 시작된 거야. 김희태 소령(1대대장)이 ‘적 전차가 들어옵니다’라고 보고하기에, ‘그 자리에서 사수(死守)하라’고 명령하는데, 전화가 딱 끊겼어요. 그 자리에서 포탄 맞아 죽은 거지. 미군 군사고문 브라운 중령은 반격하라고 했으나, 관측해 보니 가마포 쪽 2대대도 밀리더라고. 브라운 중령(군사고문)은 떠나 버렸고, 옹진반도는 포위당하면 빠져나갈 퇴로가 없어요. 트럭 50대를 이용해 ‘사곶으로 집결하라’고 명령했지. 25일 밤 트럭이 올 때는 라이트를 켜고, 갈 때는 불을 끄라고 했어요. 10차례 하면서 적에게 증원부대가 오는 것처럼 기만(欺瞞)하려고 시도했던 거야.”
―그날밤 적의 야습(夜襲)은 없었습니까.
“포병이 ‘기점사격’을 하는 바람에 야습이 없었어요. 신성모(申性模) 국방장관은 우리 부대에게 ‘후퇴해서 인천으로 가라’며 LST 2척을 보냈어요. 육군본부 직할부대라 챙기는 거지. 가마포에 한 척, 사곶에 한 척을 보냈어. 대대장에게 부대를 빼라고 지시했고. 인접 1사단 12연대 전성호(田盛鎬) 대령도 무너졌고, 우리도 사흘을 못 버티고 후퇴해야 한다는 게 가슴이 아팠어요.”
17연대 2척의 LST가 빠져나갈 시간을 벌기 위해 포격을 하기로 했다. 전투 중 후퇴하려고 자리를 이탈하면 금방 적이 들어와 후퇴를 할 수가 없게 된다. 백인엽은 연대장 운전병, 포병대대장 운전병과 함께 포탄을 날랐고, 포병대대장은 포를 장전하고 발사했다. 오전 9~10시 썰물 때만 배를 뺄 수 있었던 것이다. 4명은 곧 최후를 맞이할 판이었다.
“포로 아니면 죽음뿐이었지. 평안도 출신 포병대대장 박정호(朴廷鎬) 소령에게 ‘여기서 죽자’고 하니 ‘살아야죠’라고 해요. 옷을 훌렁 벗어던지더니 권총을 입에 물고 ‘다녀오겠다’면서 연평도 섬 150m를 헤엄쳐 소형어선 1척을 가져왔더라고. 박정호 소령은 이후 중공군과 교전 중 전사했지만, 그때는 모두 눈물을 흘렸지. 연평도로 대피해 인천으로 후퇴할 방법을 강구하고 있는데, 신성모 장관이 보낸 소해정 2척이 나타난 거야. 우린 그것을 타고 인천으로 무사히 후퇴했어.”
―이승만 대통령은 서울 함락 후 대전에 임시 경무대를 마련했고, 장군께 경호임무를 맡으라고 했다면서요.
“신성모 장관이 ‘백인엽 부대를 데리고 내가 대통령을 모시겠다’고 했대요. 사흘 만에 서울이 함락당해 이승만 대통령으로부터 ‘급사취급’을 당한 장관이라, 마음고생이 보통 심한 게 아니었겠지. 대전행 열차에 부대원들을 태우고 영등포역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더라고. 17연대는 대전으로 가 2개 대대가 넘는 병력으로 대전방어사령부를 구성했고, 대통령 경호를 맡게 됐지. 이영진(李寧鎭) 충남도지사 관저에 이 대통령 내외를 모셨고, 어머니(方孝烈)와 처(鄭淑一)도 함께 살면서 프란체스카 여사를 도와드렸어요.”
한국군 역사상 ‘최연소 사단장’
백인엽 장군은 1950년 8월 초, 17연대장에서 수도사단장에 임명됐다. 백인엽 장군은 “대구병원에 누워 있을 때, 신성모 장관이 ‘전선으로 갈 수 있겠느냐’고 하기에 ‘적이 코앞에 있는데 나가야 한다’고 했다”면서 “이튿날 육군본부에 갔더니 수도사단장으로 임명하더라”고 했다. 신성모 장관은 이승만 대통령으로부터 “전쟁을 잘하는 사람을 사단장에 임명하라”는 지시를 받고 백인엽 대령을 추천해 재가를 받았다고 한다.
수도사단은 1950년 8월 1일, 안동에서 철수한 후 청송에서 기갑연대와 18연대 등 예하 2개 연대가 적의 포위공격으로 막대한 피해를 입자, 국방부는 지휘책임을 물어 김석원 사단장을 해임하고 백인엽 대령을 임명했던 것이다. 백 장군은 “의성에서 사단장 교대식을 했는데 김석원 장군의 눈초리가 매서웠다”면서 “떠나는 김석원 장군이 트럭 1대, 지프차 1대, 쌀을 줄 수 있느냐고 해서 ‘그러시라’며 드렸다”고 했다.
한국군 역사상 27살의 나이에 최연소 사단장이 된 백인엽은 1950년 8월 낙동강 방어선의 중동부 전선인 안강-기계에서 북한군 12사단과 766부대에 궤멸적 타격을 주고 이 지역을 사수(死守)했다. 이때 수도사단에 패한 766부대는 비학산에서 해체돼 북한군 12사단에 흡수됐다.
―기계-안강전투는 1950년 8월 9일∼9월 22일 경북 포항시 기계면과 경북 경주시 안강읍 일원에서 국군 1군단 예하 수도사단이 북한군 유격부대인 766부대로 증강된 12사단의 남진을 저지한 방어전투입니다. 그때도 부상당했다고 들었습니다.
“안강에서 포항으로 가는 도로상에서 다리를 건너다 적 박격포에 왼팔을 부상당했어. 그때 수도사단 전(全)장병이 대통령 표창을 받았지.”
인천상륙작전에 한국 육군의 참전이 결정되면서 지휘관 선정문제가 논의됐다. 이승만 대통령은 “전쟁을 잘하는 사람을 추천하라”고 했고, 신성모 국방장관은 “백인엽 사단장이 어떠냐”고 이 대통령에게 추천했다. 그러나 신 장관은 사단장을 한 사람에게 연대장 임무를 맡겨야 하는 것이 마음에 걸렸다.
신 장관은 백 대령에게 “사단장인데 연대장으로 갈 수 있겠느냐”고 했고, 백 대령은 “전쟁을 하는데 사단장, 연대장이란 보직이 무슨 의미가 있나, 중대장으로라도 참전하겠다”고 했다.
李承晩 대통령, 인천상륙 출발부대를 격려
신성모 장관은 백인엽 연대장에게 “어느 부대를 작전에 데리고 가겠느냐”고 물었다. 그는 “전쟁 초기부터 생사고락(生死苦樂)을 함께한 17연대를 데리고 가겠다”고 했다. 그러나 정일권 참모총장은 반대했다. 정 총장은 “전황 때문에 17연대는 안 된다”면서 “17연대는 경주에서 중요한 전선을 담당하고 있기 때문에 차출할 수 없다”고 했다.
그러나 전략적 측면에서 17연대의 차출은 불가피했다. 백 장군은 “김희준 17연대 부연대장은 연대 완전편성 인원 3200명 가운데 부대 병사가 500여 명밖에 안된다고 보고했다”면서 “충원을 위해 ‘백두산 호랑이’ 김종원(金宗元) 중령과 헌병을 동원해 장정을 모았고, 부상병들 가운데 거동이 가능한 인원을 총동원해 3000명을 만들었다”고 했다. 17연대는 모병한 병사들을 부산 감천리에 임시 연대본부를 설치, 훈련시켜 ‘신병’으로 만들었다.
인천상륙작전은 이승만 대통령, 신성모 국방장관, 정일권 참모총장만 알 정도로 철저하게 비밀에 부쳐졌다. 이승만 대통령은 17연대 장병들을 격려하기 위해 백인엽 연대장을 부산 임시경무대로 불렀다.
“부산지사 관저로 30분 일찍 갔더니 대문 앞에서 기다리고 계셨어. 철모를 벗고 전투모를 쓰고 갔지. 이 대통령 내외, 신성모 국방장관, 김장흥(金長興) 경호실장과 함께 저녁 스테이크를 먹었어요. ‘언제 떠나냐’고 물으시기에 ‘내일 떠납니다’라고 보고했지. 그때 각하가 백김치를 드시는 것을 처음 봤어요. 김장흥 실장이 프란체스카 여사 몰래 전광석화처럼 가져다 드리더라고. 어찌나 급하게 드시던지, 웃음이 나왔지. 프란체스카 여사가 김치 냄새를 싫어하셔서 그동안 김치를 드시지 않았던 거야. 그래도 프란체스카는 내가 대통령께 ‘시보레’ 승용차를 선물하자 ‘각하를 앞자리에 태우지 마라’ ‘포탄 떨어지는 훈련장에서 조심하라’고 일러주는 등 대통령을 극진하게 보살폈어요.” 백 장군의 말이 이어진다.
“그날 저녁, 적군에게 빼앗겼던 서울을 되찾는다니까 얼마나 좋아하시는지 ‘몸조심하고 잘 다녀오라’며 내손을 한참 주무르시는 거야. 눈시울이 뜨거워졌어요. 9시쯤 식사를 마치고, 한밤중에 우리 장병들이 각하께 ‘받들어총’으로 예를 표하니까 무척이나 감격스러워하시더라고요.”
백인엽 장군은 “제주 해상을 두 바퀴 돌고 목적지로 떠났는데, 병사들은 A레이션을 받아들고 좋아했다”면서 “함상에서 선장에게 양해를 얻어 갑판에서 500발씩 사격해 담력을 키웠다”고 했다.
“동이 트는데, 천지가 진동하는 포성이 들리고 맥아더 지휘하에 상륙작전이 시작됐어. 작전 개시 30분 만에 월미도가 아군 손에 떨어지더군요. 적의 저항은 격렬하지 않았어요. 전날 이미 항공모함 함재기가 적 전차를 두들겨서 파괴된 전차가 도로상에 즐비했지. 우리 17연대는 오후 하선해 미7사단과 함께 서울로 진격을 시작했어.”
백인엽 장군은 “인천상륙작전에서 육군 17연대와 한국 해병대가 참전한 것은 한국전사에 의미 있는 일”이라면서 “미군은 파리 진공 때 프랑스군을 배속시켰고, 필리핀 마닐라 진공 때 필리핀 부대를 배속시키는 방법으로 동맹국의 자존심을 챙겨 준다”고 했다.
毛允淑 시인 구출
백인엽 대령은 사단장에서 17연대장으로 ‘서울탈환작전’에 참가하게 됐다. 이승만 대통령의 뜨거운 환송을 받은 17연대는 인천상륙에 이어 미7사단 예하로 서울탈환을 위해 잠실에서 도하작전을 실시했다. 서울 남산을 점령한 17연대는 적의 증원과 퇴로차단을 위해 망우리에 배치된 후 서울시내로 이동했다.
이때 백인엽 대령은 망우리에서 미처 피란을 가지 못한 시인 모윤숙(毛允淑)이 인근 농가(農家)에 피신해 있다는 소식을 듣고 구출했다. 모윤숙은 그때 백인엽 대령에 대한 고마움을 평생 잊지 못했다고 한다. 모윤숙은 이 사실을 이승만 대통령께 보고했다고 한다.
서울탈환작전이 끝나자 이승만 대통령이 경무대로 복귀했다. 백인엽 대령은 경무대로 이승만 대통령을 방문해 서울탈환 보고를 했다. 그때 이 대통령은 “수고했다”고 짤막하게 말한 뒤, 서울시내에 솟아오르는 불길과 검은 연기를 보고, “지금 나에게 오는 게 중요한 게 아니라 빨리 중앙청을 비롯해 서울의 불을 끄라”고 화를 냈다고 한다.
서울탈환을 한 뒤, 백인엽 대령이 지휘하는 17연대는 수도경비 임무를 수행했다. 수도경비 총책임자는 미군 브라운(Brown) 육군소장이었다. 그 밑에는 국군 17연대와 미군 헌병이 배속됐다. 17연대는 연대본부와 1개 대대를 중앙청 뒤쪽의 농림부 건물에 주둔시키고, 별도로 1개 소대를 차출해 경무대 경호임무를 수행했다. 다른 1개 대대는 서울사대 건물에, 나머지 1개 대대는 남산의 일출국민학교에 주둔시켰다.
백인엽 대령은 그 다음 날 미 10군단장 앨먼드(Edward M Almond) 소장으로부터 미 은성무공훈장을 받았다. 국군 17연대는 9월 28일 자정을 기해 한국 해병대가 담당했던 경무대와 중앙청 경비를 인수했다. 9월 29일 중앙청에서 거행된 환도식(還都式) 행사 때 17연대는 중앙청 경비를 담당했다.
수도탈환 이양식은 중앙청 회의실에서 거행됐다. 이승만 대통령과 맥아더 원수, 미8군사령관 워커 육군중장, 미10군단장 앨먼드 육군소장, 미해병1사단장 스미스 해병소장이 참석했다. 서울환도식 행사후 17연대는 지금껏 노획한 적의 무기들을 서울시민에게 공개하는 노획무기전시회를 개최, 시민들로부터 환영을 받았다. 이에 서울시는 17연대의 서울 입성을 환영하는 시민대회를 수도극장(스카라극장)에서 열었다.
당시 서울시민들은 국군 17연대가 국군 중에서 가장 강한 부대로 인식하게 됐다. 건군 후부터 17연대가 국가적인 행사에 의장대 역할을 했기 때문이다. 시민들에게 인지도가 높은 부대였던 것이다. 미군들도 17연대의 이런 모습과 수도경비 임무를 훌륭하게 수행하는 것을 보고 ‘서울연대(Seoul Regiment)’라고 불렀다.
백인엽 대령의 서울탈환작전은 백선엽 장군의 평양탈환으로 더욱 빛을 발했다. 백선엽 장군은 적의 수도인 평양탈환 경쟁에서 미1기병사단을 제치고 선봉으로 입성했다. 당시 《서울신문》은 두 형제의 전공을 기려 〈형제는 용감했다〉는 제하의 글을 싣기도 했다. 6·25전쟁 때 백선엽 장군과 백인엽 장군 두 형제만큼 전투를 잘했던 지휘관도 드물었다.
“You are my boy!”
서울탈환작전 이후 백인엽 대령은 장군으로 진급했다. 얼마후 육군본부 정보국장에 임명돼 중공군의 개입 때 포로심문반을 운용했고, 전략정보의 중요성을 깊이 인식해 정보국에 전략정보과를 설치했다. 전략정보과는 포로로부터 획득된 정보를 연구분석하고 이를 평가해 향후 작전에 반영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임무였다.
백인엽 장군은 중공군의 싸우는 방식에 대해 이제까지 참전군인들의 진술과는 다르게 말했다.
“중공군은 공격을 할 때 반드시 전선 뒤에 독전대(督戰隊)를 운영했지, 그들은 전선을 돌파할 때는 소위 일점개화(一點開花)라는 전법을 사용했어. 쉽게 말하면 한 지점에 집중공격을 한 후 마치 꽃이 만개하듯이 아군 전선을 개방해 분리한 후 공격하는 방식이었어. 그 전에 중공군은 후방으로 유격대를 침투하여 아군 지휘소를 습격함으로써 일거에 아군을 혼란에 빠뜨리는 전법을 썼어. 국군과 유엔군은 중공군의 이런 전법에 당했지. 그들은 또 내가 정보국장일 때 봤는데 ‘정면의 미군을 공격하지 말고 약한 한국군을 때리라’고 전략에 써 있어.”
이승만 대통령은 백인엽 장군을 ‘아들’처럼 대했다. 백인엽 장군은 “이승만 대통령은 75세의 노구를 이끌고 틈만 나면 전선시찰을 했다”면서 “내가 ‘할아버지, 전선에 너무 나가지 마십시오’라고 건강을 염려했더니, 대통령은 ‘인엽아, 적들에게 한치의 땅도 내줘선 안 된다’고 했다”고 회고했다.
“안강-기계에서 부상당해 부산 초량에 있는 집에 머물고 있을 때, 할아버지가 비서를 통해 나를 찾아 주셨어. 그분은 내가 6사단장을 할 때도 화천에 오셨다가 꼭 우리 부대를 둘러보고 가셨지. 생신날 금테 두른 액자를 만들어 갔는데, ‘내가 이걸 받으면 한국의 금이 다 내게로 온다’며 거절하셨어요. 내가 미국 참모대학 갈 때 ‘독립운동 할 때 12달러면 큰돈’이라며 12달러를 주셨지.
내가 오산에서 부상당해 병원에 있을 때 ‘국가와 민족을 위해 싸우려는 투지가 있는 놈이 있구나’라고 느낀 것 같아요. 장군 진급 때 계급장을 달아 주시면서 ‘너는 내아들이다(you are my boy)’라고 하셨어. 제주훈련소에 오셔서 일주일을 머물다 가셨는데, 그때 사흘을 훈련소에서 주무셨어. 이 대통령이 프란체스카 여사를 위해서 화장실 문고리를 만들기 위해 내게 망치와 문고리를 가져오라고 하셨지.
내가 ‘장병들 시키겠다’고 하자, ‘내가 시간이 있는데 내가 달겠다’고 하셨어. 프란체스카 여사가 제주도 화장실에 돼지가 있는 줄 모르고 들어가셨다가 기겁을 하셨다고 해요. 이승만 대통령은 형(兄)을 알기 전에 나를 먼저 알았어. 1951년 판문점 휴전회담 하러 갈 때, 신성모 장관이 ‘백선엽이가 백인엽이 형입니다’라고 하니까, 대통령이 ‘인엽이가 형이 있나?’하더래요.”
백인엽 장군은 “전쟁 중에도 민주적 절차에 따라 온갖 선거를 다 치르는 등 민주주의 유지를 위해 노력한 것을 보면 이 대통령은 정말 자유민주주의를 사랑한 분”이라며 “4·19때 경무대를 떠나며 ‘선엽이랑 인엽이가 있는데…’라며 우리를 찾았다고 들었다”고 했다.
백인엽 장군은 6군단장 시절, 부군단장이던 박정희 대통령과 함께 근무했다. 백 장군은 “박정희 대통령은 인격적으로 훌륭한 사람”이라며 “선엽이 형님과 나를 깍듯이 대해 줬다”고 했다. 그는 “내가 군기(軍紀)가 엄해 박정희 대통령이 고생이 많았을 것”이라며 “나이가 나보다 6살이나 위였지만, 사단장(5사단장)으로 나가기 위해 와신상담(臥薪嘗膽)하는 모습이 대인(大人)의 모습이었다”고 했다.
제주도 1훈련소장으로서 신병양성
이후 백인엽 장군은 제주훈련소장에 임명돼 중공군 개입후 전선에 소요되는 신병양성에 몰두했다. 이때 제주도훈련소에서 관리하는 신병은 10만명에 달했다고 한다.
―1951년 1월 제주 육군제1훈련소 소장으로 부임하게 된 계기는?
“육군본부 정보국장을 맡고 있던 때 중공군의 개입으로 1·4후퇴가 났어. 신성모 국방장관이 나를 불러 ‘제주도로 가라. 가기 전에 경무대에 들르라’고 말해 이승만 대통령에게 신고하고 사흘 정도 지난 뒤 제주도로 갔지. 전투 경험이 전혀 없는 후방근무 장교 50여 명을 데리고 모슬포에 도착했는데, 말 그대로 현무암 투성이에 엄청난 바람까지 불어 황무지 같았어요. 그렇다고 한숨만 쉴 수는 없었지.”
백인엽 장군은 제주 특유의 비바람과 식수(食水)부족으로 어려움을 겪었지만 연병장을 조성하고 훈련장을 만들고 병사 숙소도 조성했다. 부임 한달여 만인 1951년 2월 중순경 첫 정규 신병교육을 받으러 온 청년 500여 명이 LST를 타고 모슬포에 도착해 곧바로 훈련에 들어갔다. 사격술예비훈련(PRI) 교장 네 곳을 만들었고, 10m 조준사격장을 만들어 대한민국 최초로 ‘영점사격’을 실시했다.
―당시 훈련은 어떤 식으로 했나요.
“훈련은 크게 두 가지야. 일본식은 현(縣)에서 1개 사단 혹은 연대가 신병을 뽑아 교육시켜 평생을 그부대 소속으로 근무하는 것이고, 미국식은 중앙공급식이지. 중앙의 교육기관에서 신병 전체를 교육시켜 필요한 전선에 적재적소 투입하는 것이지. 일장일단(一長一短)이 있지만, 미8군 참모부장 호디스 준장과 제주에서 사흘간 갑론을박 끝에 미국식 보충훈련소를 만들기로 했어. 미국측에 장교를 보충하고, 미군사고문단을 100여 명까지 늘려 달라, 훈련병들의 의식주를 책임져 달라고 요구했지. 미8군의 지원 아래 6개월 만에 3만명이 먹고 잘 수 있는 시설을 갖추게 됐고, 교수부도 육사1기 출신 최정예 장교들 500명으로 구성하는 등 요구사항은 거의 관철됐어요.”
그는 “국민방위군 사령관이 예산을 횡령, 국민방위군으로 편성된 장정들이 먹을 것을 제대로 먹지 못해 피골(皮骨)이 상접한 모습으로 모슬포에 도착해 죽는 경우가 많았다”면서 “훈련소장 때 훈련소 안에 위령탑을 세운 적이 있을 만큼 안타까운 일이었다”고 했다.
그는 금성전투에서 6사단장으로 중공군의 7·13공세를 저지했고, 이후 9사단장, 육본기획참모부장, 1군단장, 6군단장, 육본관리참모부장을 역임한 뒤 1960년 7월 14년간의 군생활을 마감하고 전역했다.
“한 방울의 땀이 한 드럼의 피를 아낀다”
백인엽 장군은 “군인은 전쟁에서 이기기 위해 존재한다”고 했다.
“전쟁에서 살아남기 위해 훈련을 하는 것이고, 전쟁에서 살아남아야 군인이야. 미 군사학 교재에 따르면, ‘공격’을 먼저 하면 죽을 확률은 30%이지만, ‘방어’에만 급급하다 보면 전사할 확률은 40~50%에 달한다는 거야. 전쟁 경험자로서 이 말은 진리라고. 공격이 우선이고, 불가피하게 방어를 위해서는 ‘호’를 파야 해. 전술은 동서고금(東西古今)을 막론하고 바뀌지 않는 것이니까. 단지 무기체계만 바뀌고, 약간의 전술변화만 생겨날 뿐이지.”
백인엽 장군은 “나의 전장 지론은 선봉에서 싸우고, 후퇴는 가장 마지막에 한다는 것”이라고 했다. 그는 “‘한 방울의 땀으로 한 드럼의 피를 아낀다’는 패튼 장군의 말이 지금 생각하면 진리”라면서 “혹독한 훈련을 강조하는 지휘관은 진정으로 부하를 사랑하는 지휘관”이라고 했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북아프리카 전선에서 에르빈 롬멜의 전차군단을 격파한 조지 패튼(George S Patton) 장군의 ‘전쟁 10계명’, ‘한 방울의 땀으로 한 드럼의 피를 아낀다’ ‘돌격은 사상자를 줄인다’ ‘뒤에서 미는 지휘관은 리더가 아니라 운전수다’ ‘정보를 전술작전의 최우선으로 한다’를 그는 6·25전쟁 기간 내내 실천에 옮겼다.
때문에 6·25전쟁 전사가(戰史家)들은 그를 백선엽 예비역 육군대장, 김종오(金鍾五) 예비역 육군대장, 임부택(林富澤) 예비역 육군소장과 함께 6·25전쟁을 승리로 이끈 ‘잘 싸운 군인’으로 꼽는 데 주저하지 않는다.
1923년 평안남도 강서(江西) 출신인 그는 평양 약송국민학교·서울 중동고를 거쳐 일본 기후현(岐阜縣) 항공학교를 졸업하고 일본군 소위로 복무하다 광복을 맞았다. 평양으로 돌아온 그는 민족지도자 조만식(曺晩植) 선생의 경호대장을 지냈다. 광복 직후 찬탁(贊託)과 반탁(反託)의 물결 속에서, 그는 조만식 선생의 ‘밀서(密書)’를 이승만(李承晩) 박사에게 전달하기 위해 38선을 넘었다고 한다.
그는 원용덕(元容德) 당시 군사영어학교(陸士 전신) 부교장의 소개로 ‘군영(軍英)’을 졸업하고, 육군 참위(소위)로 임관했다. 이후 그는 1대대 부관, 12연대 부연대장, 12연대장, 17연대장, 수도사단장, 육군본부 정보국장 및 특무부대장, 초대 제주도 육군제1훈련소장, 6사단장, 1군단장, 6군단장을 거쳐, 육군본부 관리참모부장을 마지막으로 1960년 7월 군 생활을 마감했다. ‘참모’보다는 ‘야전 지휘관’ 냄새가 강하게 풍기는 경력들이다.
지난 4월 중순, 기자는 서울 서대문구 연희동 백인엽 장군 자택을 찾았다. 올해로 졸수(卒壽, 90세)를 바라보는 나이지만, “지금 내가 말하는 것, 아시갔어요?”라고 카랑카랑한 평안도 사투리로 되물을 때는 지금도 전장(戰場)을 호령하는 지휘관 말투였다.
전역 이후 그는 언론에 일절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매스컴에 나와 잘난 체할 것도 없고, 내가 떠들면 형님(백선엽)에게 누(累)가 된다”는 게 이유였다. 그는 6·25전쟁을 치르면서 군인 자식들이 배우지 못하는 것을 안타깝게 여겨 1958년 성광학원재단을 인수, ‘선인학원(善仁學園)’을 설립했고, 박정희(朴正熙) 대통령은 그의 학원설립 이념을 높이 평가했다고 한다. 그는 1994년 선인학원이 시·공립화 정책에 따라 인천시(市)로 넘어갈 때까지 학원경영에 전념했다.
백인엽 장군은 6·25전쟁의 분수령이었던 인천상륙작전 때, 수도사단장(당시 대령) 직책을 버리고 17연대장(당시 중령)을 맡았다. 장군 진급의 지름길인 사단장 직책을 버리고, 사지(死地)로 가는 인천상륙작전연대의 연대장으로 종군하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그는 6·25전쟁 기간 중 세 차례의 큰 부상을 입었다. 그 기간 중 사단장급 이상의 장교 가운데 몸에 적탄(敵彈)의 흔적을 갖고 있는 군인은 드물다. 그는 기자에게 “군인(軍人)은 전장에서 싸워야 참군인”이라면서 6·25전쟁 당시 입은 허벅지와 두부(頭部) 관통상 ‘흉터’를 훈장처럼 내보였다.
曺晩植 선생 ‘밀서’ 들고 38선 넘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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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만 대통령이 백인엽 장군의 모친 방효열 여사(왼쪽 세번째)의 환갑을 맞아 방 여사 가족을 경무대로 초대, ‘금시계’를 선물로 주었다. 왼쪽부터 백인엽 장군, 백선엽 장군, 방 여사, 프란체스카 여사, 이 대통령, 변영태 국무총리, 이호 국방부차관. |
백인엽은 최규동(崔奎東) 전 서울대총장(6·25전쟁 중 납북)이 설립한 중동학교(중동고)의 한 수학교사 소개로 중동학교로 진학한다. 그는 “이병철(李秉喆) 전 삼성그룹 회장도 중동고 별과를 나왔다”면서 “중동학교를 졸업할 무렵, 일본 기후(岐阜) 비행학교로 갔다”고 했다.
백인엽은 학병출신으로 비행대대에서 근무하다 광복을 맞았다. 사흘 만에 귀국한 당시 평양은 이미 소련군이 장악하고 있었다. ‘애송이’ 김일성(金日成)의 등장으로 평양은 술렁이고 있었다. 조만식 선생은 평남 인민정치위원장이었다. 백인엽은 매형인 조만식 선생 비서실장의 소개로 조만식 선생 경비대장(경호실장)이 됐다. 그의 형 백선엽은 비서실에 근무했다.
백인엽 장군은 “이따금 김일성이 찾아와 조만식 선생을 만나 북한 주둔 소련군정청 총사령관 슈티코프 중장의 ‘찬탁 강요’ 메시지를 전달하곤 했다”면서 “그때마다 조만식 선생은 강한 어조로 반대했고, 김일성은 민심(民心)을 갖고 있는 조만식 선생을 표면적으로는 깍듯하게 대했다”고 했다.
백인엽은 “1945년 10월 하순, 소련군의 지도로 창설된 적위대(赤衛隊)가 우리 경호대를 해산했다”면서 “그해 12월 조만식 선생은 고려호텔에 감금됐다”고 했다. 백인엽이 조만식 선생에게 경비대장 사표를 내던 날, 조만식 선생은 그를 불렀다.
백인엽 장군은 “조만식 선생께서 ‘백군, 이남으로 서둘러 가 이승만 박사에게 이 편지를 전달하게’라고 부탁했다”면서 “정일권(丁一權)씨와 함께 경비대 트럭을 타고 38선을 넘다 미군 헌병에게 걸려 곤욕을 치르기도 했다”고 했다. 백인엽은 이승만 박사가 잠시 머물던 경교장(京橋莊)으로 가 밀서를 전달했다고 한다.
美군정, 장교임관 직후 曺晩植 선생 근황 물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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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3년 4월 5일, 이승만 대통령이 6사단을 방문해 백인엽 6사단장(준장)에게 태극무공훈장을 수여하고 있다. 백인엽 장군은 인천상륙작전 성공적 수행, 최선봉으로 수도 서울 탈환, 금성지구전투 공로로 받았다. |
인천항으로 상륙한 미군은 곧 군정(軍政)을 실시해 행정 및 경찰조직 마련에 착수했다. 미군이 군 조직을 위해 취한 첫 조치는 ‘군사영어학교’를 통해 장교를 배출하는 것이었다. ‘군영(軍英)’으로 부르는 군사영어학교는 1945년 12월 5일, 서울 냉천동 감리교신학대학을 빌려 개교했다.
국방경비대 창설에 관한 인사업무는 중앙청 203호실에서 아고(Argo) 대령이 관장했고, 이응준(李應俊) 장군이 장교채용에 관해 아고 대령에게 조언하고 있었다. 군영에서는 리스 소령이 원용덕 부교장과 함께 ‘군사영어’를 가르쳤다.
백선엽을 아들처럼 생각했던 원용덕 장군은 “장차 장교양성소로 키울 군사영어학교로 진학하는 게 어떠냐”고 그에게 입교를 권했다. 백인엽은 “공산당놈들 원수를 갚기 위해서라도 군대라면 어디라도 가겠다”며 군영에 들어가 1차로 졸업했다. 그의 군번은 23번, 그의 형(兄) 백선엽 예비역 대장은 54번이었다. 백인엽은 군사영어학교 입교를 위한 군정청의 아고 대령 면접 순간을 이렇게 회고했다.
“아고 대령이 고자세로 버티고 있었고, 이응준 장군이 면접에 임하는 장교들의 군대경력을 아고 대령에게 이야기해 주고 계셨습니다. 이형근(李亨根)은 통역관(예비역 육군대장)으로 있더라고요. 아고 대령이 생사여탈권을 갖고 장교들을 즉석에서 합격, 불합격을 판정했습니다. 합격한 사람들은 그 자리에서 군번을 부여받고 참위(소위) 계급장을 달았습니다.”
그는 “임관 직후 군정청은 나를 추가심문반으로 넘겼다”면서 “아고 대령이 ‘손자 같다’면서 ‘조만식 선생의 생사, 근황, 생각’ 등을 물었다”고 했다.
국방경비대 창설을 주도한 것은 물론 미24군단 소속 장교와 하사관들이었다. 미군은 태릉의 1연대를 필두로, 대전(2연대), 이리산(3연대), 광주(4연대), 부산(5연대), 대구(6연대), 청주(7연대), 춘천(8연대) 등 각 도에 1개 연대씩을 창설하기로 하고, 미군 위관급 장교를 고문관으로 각 연대에 파견했다. 최초 1개 중대(200명)를 우선 편성하고, 현지 모병으로 인원이 차는 대로 연대, 대대로 확대개편했다.
―어떤 계기로 1연대로 갔습니까.
“일본군 소좌(소령) 출신으로 부평병기창 감독관을 지낸 채병덕(蔡秉德) 정위(초대 육군참모총장)가 1연대를 창설했어. 그분은 평양에서부터 알고 지내던 분이라 ‘같이 가자’고 하기에 따라갔지요. 그때 이미 서울에는 대대, 각 도에는 중대 편성을 다 해 놓았더군. 채병덕 연대장 부관으로 있다가 부대가 커지면서 선임소대장으로 나갔지. 그러던 중 1연대에서 지휘관 구타사건이 발생하는 바람에 정일권씨는 4연대장, 나는 중대장으로 함께 광주로 내려가게 됐어. 정일권씨는 월남도 함께 하고, 같은 연대에서 근무한 질긴 인연이 있어요.”
백인엽 장군은 “국군이 편성되면서 채병덕 장군은 국방참모총장(합참의장)이 되고 나는 채병덕 장군께 이야기해 2여단(여단장 원용덕) 산하의 12연대(군산) 부연대장으로 자리를 옮겼어. 이게 백인엽 운명의 큰 전환점이 될 줄은 몰랐지”라고 덧붙였다.
肅軍 없었다면 6·25때 대한민국은 무너졌을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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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탈환 작전에서 백인엽 17연대장(대령)이 서빙고에서 한강도하를 준비하고 있다. 옆 사람은 미군 대전차포대장. |
―여수순천 반란사건을 진압하면서 왜 군 내부에 좌익세력들이 준동했다고 생각했나요.
“가장 큰 요인은 사상적 혼미(昏迷)야. 좌우익이 첨예하게 대립된 사회여건은 군(軍)이 좌우세력 간 힘의 대결장이 되게 하는 결정적 원인이었지요. 북한은 소련의 지원으로 공산정권을 수립하고 일사불란하게 전쟁준비를 하는 동안, 남한은 내부 갈등을 해소하는 데 에너지를 탕진하고 있었다고.”
백인엽 장군은 “여수순천 10·19사건은 제주 4·3사건으로 촉발된 것”이라고 했다.
“수원과 부산에서 증파된 2개 대대로 9연대를 보강해 본격적으로 제주 공비토벌에 나서게 됐어. 그 와중에 연대장으로 부임한 박진경(朴珍景) 대령이 6월 18일밤 좌익 문상길(文相吉) 중위의 지령을 받은 병사에 의해 야전침대에서 취침 중에 M1소총으로 살해당하는 끔찍한 일이 벌어졌어. 당시 군정장관 윌리엄 딘 장군은 자신이 신임하던 박 대령이 피살되자 공비토벌에 박차를 가했지.”
1948년 10월 19일 저녁 제주 토벌작전에 증파하기 위해 여수에서 승선 직전에 있던 김상겸(金相謙) 대령의 5여단 예하 14연대에서 남로당계 장병들 주도로 반란이 일어났다. 반란군은 부대를 장악하고 여수를 손아귀에 넣은 후 그 세력을 순천쪽으로 확대하고 있었다.
“이들은 제주도 토벌을 위해 미군의 M1소총과 기관총, 박격포 등 최신예 무기로 무장한 직후였기 때문에 화력이 막강했어요. 토벌군 사령관에 임명된 육군 총사령관 송호성 준장은 원용덕 대령의 2여단 예하 12연대(군산)·2연대(대전)와 김백일 대령의 5여단 예하 3연대(전주)·4연대(광주) 등 사고지역에 가까운 병력을 토벌부대로 순천방면에 급파했어. 원용덕 2여단장이 ‘김지회(金智會)가 주동해 14연대가 반란을 일으켰다’면서, 당신이 출동을 해야겠다고 했지.”
백인엽 장군은 “백인기 12연대장이 출동하는 대신, 부연대장인 내가 2 개 대대를 이끌고 광주로 집결하라는 명령을 받았다”면서 “토벌군은 순천 외곽인 보성(寶城), 학구(鶴口), 광양(光陽)에 신속히 진출해 포위망을 압축했다”고 했다.
―진압작전은 순조로웠습니까.
“광주에서 트럭 100여 대를 징발해 순천으로 들어갔어. 미군으로부터 지원받은 81mm박격포 12문과 실탄으로 무장하고 산을 넘었죠. 중간에 4연대 소속 장교를 만났더니 ‘순천은 다 점령당했다’고 해요. 4연대는 전부 분산했고, 실제로 백인엽의 12연대 2개 대대와 반란군 2개 연대랑 싸우는 셈이 됐어. 1대대장 김희준(金熙濬) 중령이 트럭에는 박격포, 지프에는 기관총을 매달고 순천 시내로 진격해 들어갔어요. 지서(支署)마다 인공기가 걸려 있고 시체 투성이에요. 인공기에 대고 기관총을 10분 쏘고, 전투준비를 했어. 낮 12시쯤 점심도 건너뛰고 지형정찰을 통해 부대를 3개로 나눠 공격을 개시했지. 신병들은 야간전투에 약해 4시간 동안 점령해야 했기 때문에 서둘러야 했어.”
백인엽의 12연대는 순천시내를 향해 80mm박격포를 50발 쏘며 진격을 개시했다. 순천시내는 순식간에 불바다가 됐고, 반란군은 놀라 가벼운 저항만 하다 광양으로 도주했다. 반란군 수괴인 김지회도 광양 백운산을 통해 지리산으로 숨어들었다.
백 장군은 “토벌군사령부 참모장인 형님(백선엽)은 장성환 중위(공군참모총장 역임)가 조종하는 정찰기를 타고 현지 상공에서 토벌군에게 ‘일몰전 공격하라’는 신호를 보냈다”면서 “무전기가 없던 시절이라 형님은 메모를 넣은 와이셔츠를 벗어 던졌고, 그것을 마침 우리 연대 병사가 발견해 나는 지체없이 선봉으로 순천시내로 공격해 들어갔고 관망하던 다른 부대들도 공격에 가담했다”고 했다. 그는 “유혈이 낭자한 시가전(市街戰) 끝에 반란군의 예봉을 꺾고 순천을 탈환했다”면서 “이튿날 여수는 전투도 거의 안 하고 점령했다”고 했다.
그는 “이어진 구례지역 전투에서 백인기 연대장이 반란군 잔당(殘黨)에게 무전을 도청당하고 포위돼 자결하는 사건이 있었지만, 12연대는 구례지역 전투에서 반란군의 기습공격을 효과적으로 ‘공세이전’하면서 여순반란사건의 종지부를 찍었다”면서 “각 중대 나팔수들을 전부 불러모아 나팔을 불어 적을 공포에 몰아넣었다. 밝은 대낮에 보니 김지회의 애인인 조경순의 핸드백도 보였다”고 했다. 그는 “이 사건을 계기로 국군은 3차례의 대대적인 숙군(肅軍)을 했는데, 만약 이때의 숙군이 없었다면 6·25전쟁을 맞아 대한민국도 붕괴되고 말았을 것”이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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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인엽 장군이 자택에 걸린 6·25 당시의 아끼는 기념사진 2점을 소개하고 있다. 위에 걸린 액자는 이승만 대통령이 모친 방효열 여사의 환갑을 축하하는 장면이고, 아래 사진은 이승만 대통령이 백인엽 장군의 6군단을 방문해 사열하는 모습이다. |
“12연대보다 우수한 부대를 만들겠다는 각오로 12연대 대대장 김희준 중령을 데려다가 부연대장을 시켰어. 부대를 창설할 때 장병들 정신교육, 체력훈련, 무기조작 능력 등을 강조해 교육훈련을 반복했지. 지휘관이 똑똑해야 강군이 돼요. 그렇게 훈련이 끝나면 자신이 생겨 대련할 때 병사들이 대검을 뽑고 휘둘러요. 연대를 만드는 과정에서 당시 ‘주먹황제’라고 하는 김두한(金斗漢)이 300명 되는 장정들을 추천해 주기도 했어. 깡패들이지.”
―초대 17연대장으로 옹진반도 방어를 담당하는 옹진지구전투 사령관으로 6·25를 맞이했습니다.
“적정을 살피면서 전쟁이 날 것을 예감하고 있었습니다. 17연대 고문관에게 20일간 시간을 받아 부대를 옹진반도로 이동했어. 그때 18연대, 2연대도 패퇴한 ‘은파산 전투’가 발발했고, 로버츠 군사고문단장은 ‘김석원 수도사단장이 북한군을 선제공격해서 골치’라면서 ‘당신 형이 1사단장으로 올 것이니 절대 선제공격을 하지 말라’고 당부하더군. 적진은 이미 요새화해 공격해서 될 것이 아니라고 했어요. 이용문(李龍文) 정보국장은 연대 안의 공산주의자 명단을 가져다줘 옹진반도에 부대배치를 하기 전에 사상적으로 무장할 수 있었어.”
백인엽은 지형정찰을 통해 일렬로 편성됐던 부대를 본대, 예비대로 나눠 편성하는 등 전쟁에 대비했다. 실탄사격도 병사 1인당 500발씩 사격하도록 했다.
“1950년 6월 23일부터 수색대를 투입해 포(砲)에 견딜 만큼 진지를 강화했지. 민심을 얻기 위해 시내에 나가 ‘딴짓’을 못하도록 단속도 했고. 민간인들도 전쟁 때 보급대로 동원할 수 있도록 했지. 6월 23일부터 인민군 포가 앞으로 나오고, 트럭이 먼지를 일으키며 수없이 왔다 갔다 해. 장교들은 ‘국지전이 아니라 전면전’이라고 보고하더군. 23일부터 부대를 ‘대기’상태에 놓고, 인접부대인 1사단 형님에게 전보를 쳤더니, 시흥에서 참모대학 교육을 받고 계셔. 마침내 북한군은 25일 오전 5시 38선에서 전면공격을 해 왔던 거야.”
4명이 부대 후퇴 엄호사격하다 ‘고립’
―6·25전사에는 25일 오전 4시로 기록돼 있습니다.
“물론, 5시 이전에 소규모 포격을 했지만, 정확히 새벽 5시였다고. 23일부터 이틀 동안 진지공사를 독려하느라 CP(지휘소) 의자에서 깜빡 조는 사이 포격이 시작된 거야. 김희태 소령(1대대장)이 ‘적 전차가 들어옵니다’라고 보고하기에, ‘그 자리에서 사수(死守)하라’고 명령하는데, 전화가 딱 끊겼어요. 그 자리에서 포탄 맞아 죽은 거지. 미군 군사고문 브라운 중령은 반격하라고 했으나, 관측해 보니 가마포 쪽 2대대도 밀리더라고. 브라운 중령(군사고문)은 떠나 버렸고, 옹진반도는 포위당하면 빠져나갈 퇴로가 없어요. 트럭 50대를 이용해 ‘사곶으로 집결하라’고 명령했지. 25일 밤 트럭이 올 때는 라이트를 켜고, 갈 때는 불을 끄라고 했어요. 10차례 하면서 적에게 증원부대가 오는 것처럼 기만(欺瞞)하려고 시도했던 거야.”
―그날밤 적의 야습(夜襲)은 없었습니까.
“포병이 ‘기점사격’을 하는 바람에 야습이 없었어요. 신성모(申性模) 국방장관은 우리 부대에게 ‘후퇴해서 인천으로 가라’며 LST 2척을 보냈어요. 육군본부 직할부대라 챙기는 거지. 가마포에 한 척, 사곶에 한 척을 보냈어. 대대장에게 부대를 빼라고 지시했고. 인접 1사단 12연대 전성호(田盛鎬) 대령도 무너졌고, 우리도 사흘을 못 버티고 후퇴해야 한다는 게 가슴이 아팠어요.”
17연대 2척의 LST가 빠져나갈 시간을 벌기 위해 포격을 하기로 했다. 전투 중 후퇴하려고 자리를 이탈하면 금방 적이 들어와 후퇴를 할 수가 없게 된다. 백인엽은 연대장 운전병, 포병대대장 운전병과 함께 포탄을 날랐고, 포병대대장은 포를 장전하고 발사했다. 오전 9~10시 썰물 때만 배를 뺄 수 있었던 것이다. 4명은 곧 최후를 맞이할 판이었다.
“포로 아니면 죽음뿐이었지. 평안도 출신 포병대대장 박정호(朴廷鎬) 소령에게 ‘여기서 죽자’고 하니 ‘살아야죠’라고 해요. 옷을 훌렁 벗어던지더니 권총을 입에 물고 ‘다녀오겠다’면서 연평도 섬 150m를 헤엄쳐 소형어선 1척을 가져왔더라고. 박정호 소령은 이후 중공군과 교전 중 전사했지만, 그때는 모두 눈물을 흘렸지. 연평도로 대피해 인천으로 후퇴할 방법을 강구하고 있는데, 신성모 장관이 보낸 소해정 2척이 나타난 거야. 우린 그것을 타고 인천으로 무사히 후퇴했어.”
―이승만 대통령은 서울 함락 후 대전에 임시 경무대를 마련했고, 장군께 경호임무를 맡으라고 했다면서요.
“신성모 장관이 ‘백인엽 부대를 데리고 내가 대통령을 모시겠다’고 했대요. 사흘 만에 서울이 함락당해 이승만 대통령으로부터 ‘급사취급’을 당한 장관이라, 마음고생이 보통 심한 게 아니었겠지. 대전행 열차에 부대원들을 태우고 영등포역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더라고. 17연대는 대전으로 가 2개 대대가 넘는 병력으로 대전방어사령부를 구성했고, 대통령 경호를 맡게 됐지. 이영진(李寧鎭) 충남도지사 관저에 이 대통령 내외를 모셨고, 어머니(方孝烈)와 처(鄭淑一)도 함께 살면서 프란체스카 여사를 도와드렸어요.”
백인엽 장군은 1950년 8월 초, 17연대장에서 수도사단장에 임명됐다. 백인엽 장군은 “대구병원에 누워 있을 때, 신성모 장관이 ‘전선으로 갈 수 있겠느냐’고 하기에 ‘적이 코앞에 있는데 나가야 한다’고 했다”면서 “이튿날 육군본부에 갔더니 수도사단장으로 임명하더라”고 했다. 신성모 장관은 이승만 대통령으로부터 “전쟁을 잘하는 사람을 사단장에 임명하라”는 지시를 받고 백인엽 대령을 추천해 재가를 받았다고 한다.
수도사단은 1950년 8월 1일, 안동에서 철수한 후 청송에서 기갑연대와 18연대 등 예하 2개 연대가 적의 포위공격으로 막대한 피해를 입자, 국방부는 지휘책임을 물어 김석원 사단장을 해임하고 백인엽 대령을 임명했던 것이다. 백 장군은 “의성에서 사단장 교대식을 했는데 김석원 장군의 눈초리가 매서웠다”면서 “떠나는 김석원 장군이 트럭 1대, 지프차 1대, 쌀을 줄 수 있느냐고 해서 ‘그러시라’며 드렸다”고 했다.
한국군 역사상 27살의 나이에 최연소 사단장이 된 백인엽은 1950년 8월 낙동강 방어선의 중동부 전선인 안강-기계에서 북한군 12사단과 766부대에 궤멸적 타격을 주고 이 지역을 사수(死守)했다. 이때 수도사단에 패한 766부대는 비학산에서 해체돼 북한군 12사단에 흡수됐다.
―기계-안강전투는 1950년 8월 9일∼9월 22일 경북 포항시 기계면과 경북 경주시 안강읍 일원에서 국군 1군단 예하 수도사단이 북한군 유격부대인 766부대로 증강된 12사단의 남진을 저지한 방어전투입니다. 그때도 부상당했다고 들었습니다.
“안강에서 포항으로 가는 도로상에서 다리를 건너다 적 박격포에 왼팔을 부상당했어. 그때 수도사단 전(全)장병이 대통령 표창을 받았지.”
인천상륙작전에 한국 육군의 참전이 결정되면서 지휘관 선정문제가 논의됐다. 이승만 대통령은 “전쟁을 잘하는 사람을 추천하라”고 했고, 신성모 국방장관은 “백인엽 사단장이 어떠냐”고 이 대통령에게 추천했다. 그러나 신 장관은 사단장을 한 사람에게 연대장 임무를 맡겨야 하는 것이 마음에 걸렸다.
신 장관은 백 대령에게 “사단장인데 연대장으로 갈 수 있겠느냐”고 했고, 백 대령은 “전쟁을 하는데 사단장, 연대장이란 보직이 무슨 의미가 있나, 중대장으로라도 참전하겠다”고 했다.
李承晩 대통령, 인천상륙 출발부대를 격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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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상륙작전 당일인 1950년 9월 15일, 함상에서 월미도 포격장면을 지켜보는 백인엽 17연대장(맨 왼쪽). 가운데는 미군 LST 선장, 맨 오른쪽은 작전참모 이극성 소령. |
그러나 전략적 측면에서 17연대의 차출은 불가피했다. 백 장군은 “김희준 17연대 부연대장은 연대 완전편성 인원 3200명 가운데 부대 병사가 500여 명밖에 안된다고 보고했다”면서 “충원을 위해 ‘백두산 호랑이’ 김종원(金宗元) 중령과 헌병을 동원해 장정을 모았고, 부상병들 가운데 거동이 가능한 인원을 총동원해 3000명을 만들었다”고 했다. 17연대는 모병한 병사들을 부산 감천리에 임시 연대본부를 설치, 훈련시켜 ‘신병’으로 만들었다.
인천상륙작전은 이승만 대통령, 신성모 국방장관, 정일권 참모총장만 알 정도로 철저하게 비밀에 부쳐졌다. 이승만 대통령은 17연대 장병들을 격려하기 위해 백인엽 연대장을 부산 임시경무대로 불렀다.
“부산지사 관저로 30분 일찍 갔더니 대문 앞에서 기다리고 계셨어. 철모를 벗고 전투모를 쓰고 갔지. 이 대통령 내외, 신성모 국방장관, 김장흥(金長興) 경호실장과 함께 저녁 스테이크를 먹었어요. ‘언제 떠나냐’고 물으시기에 ‘내일 떠납니다’라고 보고했지. 그때 각하가 백김치를 드시는 것을 처음 봤어요. 김장흥 실장이 프란체스카 여사 몰래 전광석화처럼 가져다 드리더라고. 어찌나 급하게 드시던지, 웃음이 나왔지. 프란체스카 여사가 김치 냄새를 싫어하셔서 그동안 김치를 드시지 않았던 거야. 그래도 프란체스카는 내가 대통령께 ‘시보레’ 승용차를 선물하자 ‘각하를 앞자리에 태우지 마라’ ‘포탄 떨어지는 훈련장에서 조심하라’고 일러주는 등 대통령을 극진하게 보살폈어요.” 백 장군의 말이 이어진다.
“그날 저녁, 적군에게 빼앗겼던 서울을 되찾는다니까 얼마나 좋아하시는지 ‘몸조심하고 잘 다녀오라’며 내손을 한참 주무르시는 거야. 눈시울이 뜨거워졌어요. 9시쯤 식사를 마치고, 한밤중에 우리 장병들이 각하께 ‘받들어총’으로 예를 표하니까 무척이나 감격스러워하시더라고요.”
백인엽 장군은 “제주 해상을 두 바퀴 돌고 목적지로 떠났는데, 병사들은 A레이션을 받아들고 좋아했다”면서 “함상에서 선장에게 양해를 얻어 갑판에서 500발씩 사격해 담력을 키웠다”고 했다.
“동이 트는데, 천지가 진동하는 포성이 들리고 맥아더 지휘하에 상륙작전이 시작됐어. 작전 개시 30분 만에 월미도가 아군 손에 떨어지더군요. 적의 저항은 격렬하지 않았어요. 전날 이미 항공모함 함재기가 적 전차를 두들겨서 파괴된 전차가 도로상에 즐비했지. 우리 17연대는 오후 하선해 미7사단과 함께 서울로 진격을 시작했어.”
백인엽 장군은 “인천상륙작전에서 육군 17연대와 한국 해병대가 참전한 것은 한국전사에 의미 있는 일”이라면서 “미군은 파리 진공 때 프랑스군을 배속시켰고, 필리핀 마닐라 진공 때 필리핀 부대를 배속시키는 방법으로 동맹국의 자존심을 챙겨 준다”고 했다.
毛允淑 시인 구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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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으로 향하는 선상에서 17연대 장병들에게 정신교육을 하고 있는 백인엽 17연대장(왼쪽). |
이때 백인엽 대령은 망우리에서 미처 피란을 가지 못한 시인 모윤숙(毛允淑)이 인근 농가(農家)에 피신해 있다는 소식을 듣고 구출했다. 모윤숙은 그때 백인엽 대령에 대한 고마움을 평생 잊지 못했다고 한다. 모윤숙은 이 사실을 이승만 대통령께 보고했다고 한다.
서울탈환작전이 끝나자 이승만 대통령이 경무대로 복귀했다. 백인엽 대령은 경무대로 이승만 대통령을 방문해 서울탈환 보고를 했다. 그때 이 대통령은 “수고했다”고 짤막하게 말한 뒤, 서울시내에 솟아오르는 불길과 검은 연기를 보고, “지금 나에게 오는 게 중요한 게 아니라 빨리 중앙청을 비롯해 서울의 불을 끄라”고 화를 냈다고 한다.
서울탈환을 한 뒤, 백인엽 대령이 지휘하는 17연대는 수도경비 임무를 수행했다. 수도경비 총책임자는 미군 브라운(Brown) 육군소장이었다. 그 밑에는 국군 17연대와 미군 헌병이 배속됐다. 17연대는 연대본부와 1개 대대를 중앙청 뒤쪽의 농림부 건물에 주둔시키고, 별도로 1개 소대를 차출해 경무대 경호임무를 수행했다. 다른 1개 대대는 서울사대 건물에, 나머지 1개 대대는 남산의 일출국민학교에 주둔시켰다.
백인엽 대령은 그 다음 날 미 10군단장 앨먼드(Edward M Almond) 소장으로부터 미 은성무공훈장을 받았다. 국군 17연대는 9월 28일 자정을 기해 한국 해병대가 담당했던 경무대와 중앙청 경비를 인수했다. 9월 29일 중앙청에서 거행된 환도식(還都式) 행사 때 17연대는 중앙청 경비를 담당했다.
수도탈환 이양식은 중앙청 회의실에서 거행됐다. 이승만 대통령과 맥아더 원수, 미8군사령관 워커 육군중장, 미10군단장 앨먼드 육군소장, 미해병1사단장 스미스 해병소장이 참석했다. 서울환도식 행사후 17연대는 지금껏 노획한 적의 무기들을 서울시민에게 공개하는 노획무기전시회를 개최, 시민들로부터 환영을 받았다. 이에 서울시는 17연대의 서울 입성을 환영하는 시민대회를 수도극장(스카라극장)에서 열었다.
당시 서울시민들은 국군 17연대가 국군 중에서 가장 강한 부대로 인식하게 됐다. 건군 후부터 17연대가 국가적인 행사에 의장대 역할을 했기 때문이다. 시민들에게 인지도가 높은 부대였던 것이다. 미군들도 17연대의 이런 모습과 수도경비 임무를 훌륭하게 수행하는 것을 보고 ‘서울연대(Seoul Regiment)’라고 불렀다.
백인엽 대령의 서울탈환작전은 백선엽 장군의 평양탈환으로 더욱 빛을 발했다. 백선엽 장군은 적의 수도인 평양탈환 경쟁에서 미1기병사단을 제치고 선봉으로 입성했다. 당시 《서울신문》은 두 형제의 전공을 기려 〈형제는 용감했다〉는 제하의 글을 싣기도 했다. 6·25전쟁 때 백선엽 장군과 백인엽 장군 두 형제만큼 전투를 잘했던 지휘관도 드물었다.
“You are my bo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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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 9월, 인민군 12사단을 격멸한 후 노획한 전리품을 바라보는 백인엽 수도사단장(오른쪽). |
백인엽 장군은 중공군의 싸우는 방식에 대해 이제까지 참전군인들의 진술과는 다르게 말했다.
“중공군은 공격을 할 때 반드시 전선 뒤에 독전대(督戰隊)를 운영했지, 그들은 전선을 돌파할 때는 소위 일점개화(一點開花)라는 전법을 사용했어. 쉽게 말하면 한 지점에 집중공격을 한 후 마치 꽃이 만개하듯이 아군 전선을 개방해 분리한 후 공격하는 방식이었어. 그 전에 중공군은 후방으로 유격대를 침투하여 아군 지휘소를 습격함으로써 일거에 아군을 혼란에 빠뜨리는 전법을 썼어. 국군과 유엔군은 중공군의 이런 전법에 당했지. 그들은 또 내가 정보국장일 때 봤는데 ‘정면의 미군을 공격하지 말고 약한 한국군을 때리라’고 전략에 써 있어.”
이승만 대통령은 백인엽 장군을 ‘아들’처럼 대했다. 백인엽 장군은 “이승만 대통령은 75세의 노구를 이끌고 틈만 나면 전선시찰을 했다”면서 “내가 ‘할아버지, 전선에 너무 나가지 마십시오’라고 건강을 염려했더니, 대통령은 ‘인엽아, 적들에게 한치의 땅도 내줘선 안 된다’고 했다”고 회고했다.
“안강-기계에서 부상당해 부산 초량에 있는 집에 머물고 있을 때, 할아버지가 비서를 통해 나를 찾아 주셨어. 그분은 내가 6사단장을 할 때도 화천에 오셨다가 꼭 우리 부대를 둘러보고 가셨지. 생신날 금테 두른 액자를 만들어 갔는데, ‘내가 이걸 받으면 한국의 금이 다 내게로 온다’며 거절하셨어요. 내가 미국 참모대학 갈 때 ‘독립운동 할 때 12달러면 큰돈’이라며 12달러를 주셨지.
내가 오산에서 부상당해 병원에 있을 때 ‘국가와 민족을 위해 싸우려는 투지가 있는 놈이 있구나’라고 느낀 것 같아요. 장군 진급 때 계급장을 달아 주시면서 ‘너는 내아들이다(you are my boy)’라고 하셨어. 제주훈련소에 오셔서 일주일을 머물다 가셨는데, 그때 사흘을 훈련소에서 주무셨어. 이 대통령이 프란체스카 여사를 위해서 화장실 문고리를 만들기 위해 내게 망치와 문고리를 가져오라고 하셨지.
내가 ‘장병들 시키겠다’고 하자, ‘내가 시간이 있는데 내가 달겠다’고 하셨어. 프란체스카 여사가 제주도 화장실에 돼지가 있는 줄 모르고 들어가셨다가 기겁을 하셨다고 해요. 이승만 대통령은 형(兄)을 알기 전에 나를 먼저 알았어. 1951년 판문점 휴전회담 하러 갈 때, 신성모 장관이 ‘백선엽이가 백인엽이 형입니다’라고 하니까, 대통령이 ‘인엽이가 형이 있나?’하더래요.”
백인엽 장군은 “전쟁 중에도 민주적 절차에 따라 온갖 선거를 다 치르는 등 민주주의 유지를 위해 노력한 것을 보면 이 대통령은 정말 자유민주주의를 사랑한 분”이라며 “4·19때 경무대를 떠나며 ‘선엽이랑 인엽이가 있는데…’라며 우리를 찾았다고 들었다”고 했다.
백인엽 장군은 6군단장 시절, 부군단장이던 박정희 대통령과 함께 근무했다. 백 장군은 “박정희 대통령은 인격적으로 훌륭한 사람”이라며 “선엽이 형님과 나를 깍듯이 대해 줬다”고 했다. 그는 “내가 군기(軍紀)가 엄해 박정희 대통령이 고생이 많았을 것”이라며 “나이가 나보다 6살이나 위였지만, 사단장(5사단장)으로 나가기 위해 와신상담(臥薪嘗膽)하는 모습이 대인(大人)의 모습이었다”고 했다.
제주도 1훈련소장으로서 신병양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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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인엽 장군과 이화여대 박사 출신인 딸 백남진씨(왼쪽). |
―1951년 1월 제주 육군제1훈련소 소장으로 부임하게 된 계기는?
“육군본부 정보국장을 맡고 있던 때 중공군의 개입으로 1·4후퇴가 났어. 신성모 국방장관이 나를 불러 ‘제주도로 가라. 가기 전에 경무대에 들르라’고 말해 이승만 대통령에게 신고하고 사흘 정도 지난 뒤 제주도로 갔지. 전투 경험이 전혀 없는 후방근무 장교 50여 명을 데리고 모슬포에 도착했는데, 말 그대로 현무암 투성이에 엄청난 바람까지 불어 황무지 같았어요. 그렇다고 한숨만 쉴 수는 없었지.”
백인엽 장군은 제주 특유의 비바람과 식수(食水)부족으로 어려움을 겪었지만 연병장을 조성하고 훈련장을 만들고 병사 숙소도 조성했다. 부임 한달여 만인 1951년 2월 중순경 첫 정규 신병교육을 받으러 온 청년 500여 명이 LST를 타고 모슬포에 도착해 곧바로 훈련에 들어갔다. 사격술예비훈련(PRI) 교장 네 곳을 만들었고, 10m 조준사격장을 만들어 대한민국 최초로 ‘영점사격’을 실시했다.
―당시 훈련은 어떤 식으로 했나요.
“훈련은 크게 두 가지야. 일본식은 현(縣)에서 1개 사단 혹은 연대가 신병을 뽑아 교육시켜 평생을 그부대 소속으로 근무하는 것이고, 미국식은 중앙공급식이지. 중앙의 교육기관에서 신병 전체를 교육시켜 필요한 전선에 적재적소 투입하는 것이지. 일장일단(一長一短)이 있지만, 미8군 참모부장 호디스 준장과 제주에서 사흘간 갑론을박 끝에 미국식 보충훈련소를 만들기로 했어. 미국측에 장교를 보충하고, 미군사고문단을 100여 명까지 늘려 달라, 훈련병들의 의식주를 책임져 달라고 요구했지. 미8군의 지원 아래 6개월 만에 3만명이 먹고 잘 수 있는 시설을 갖추게 됐고, 교수부도 육사1기 출신 최정예 장교들 500명으로 구성하는 등 요구사항은 거의 관철됐어요.”
그는 “국민방위군 사령관이 예산을 횡령, 국민방위군으로 편성된 장정들이 먹을 것을 제대로 먹지 못해 피골(皮骨)이 상접한 모습으로 모슬포에 도착해 죽는 경우가 많았다”면서 “훈련소장 때 훈련소 안에 위령탑을 세운 적이 있을 만큼 안타까운 일이었다”고 했다.
그는 금성전투에서 6사단장으로 중공군의 7·13공세를 저지했고, 이후 9사단장, 육본기획참모부장, 1군단장, 6군단장, 육본관리참모부장을 역임한 뒤 1960년 7월 14년간의 군생활을 마감하고 전역했다.
“한 방울의 땀이 한 드럼의 피를 아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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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 수도사단장 시절, 안강·기계 근방에서 적과의 일전을 준비하는 백인엽 대령(왼쪽). |
“전쟁에서 살아남기 위해 훈련을 하는 것이고, 전쟁에서 살아남아야 군인이야. 미 군사학 교재에 따르면, ‘공격’을 먼저 하면 죽을 확률은 30%이지만, ‘방어’에만 급급하다 보면 전사할 확률은 40~50%에 달한다는 거야. 전쟁 경험자로서 이 말은 진리라고. 공격이 우선이고, 불가피하게 방어를 위해서는 ‘호’를 파야 해. 전술은 동서고금(東西古今)을 막론하고 바뀌지 않는 것이니까. 단지 무기체계만 바뀌고, 약간의 전술변화만 생겨날 뿐이지.”
백인엽 장군은 “나의 전장 지론은 선봉에서 싸우고, 후퇴는 가장 마지막에 한다는 것”이라고 했다. 그는 “‘한 방울의 땀으로 한 드럼의 피를 아낀다’는 패튼 장군의 말이 지금 생각하면 진리”라면서 “혹독한 훈련을 강조하는 지휘관은 진정으로 부하를 사랑하는 지휘관”이라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