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세 때 쌀 한 가마니에 팔려가 아이 돌봐
⊙ 北의 외갓집, 찾고 또 찾았지만 흔적도 못 찾아
嚴相益
1954년생. 경기고, 고려대 법대 졸업 / 사법고시 24회, 사법연수원 15기 수료 / 국가안전기획부 정책연구관, 법무법인 ‘정현’ 변호사 역임. 現 엄상익법률사무소 변호사
나에게 외가는 공허한 관념이다. 외할머니와 손자 사이의 피가 흐르는 것 같은 따뜻한 느낌도 상상이 되지 않는다. 어머니는 두만강가의 도시 회령에서 살았었다. 해방 다음 해 결혼을 하고 서울로 왔다. 그러고는 부모님과는 영영 이별이었다. 그 친정엄마가 나의 외할머니다. 6년 전 어머니가 돌아가시던 그해 첫날 아침이었다.⊙ 北의 외갓집, 찾고 또 찾았지만 흔적도 못 찾아
嚴相益
1954년생. 경기고, 고려대 법대 졸업 / 사법고시 24회, 사법연수원 15기 수료 / 국가안전기획부 정책연구관, 법무법인 ‘정현’ 변호사 역임. 現 엄상익법률사무소 변호사
“이제 아흔 살이다 너무 많이 살았어. 사는 게 지겹다.”
죽음을 예견한 듯 어머니는 탄식하듯 말했다. 나는 어머니가 왜 그렇게 끈질기게 살아왔는지 알고 있다. 스무 살 때 헤어진 북에 두고 온 가족을 한 번만이라도 보고 싶어서였다. 어머니의 영혼은 반이 눈물인 것 같았다. 죽기 전 어머니는 평생 가슴에 꽁꽁 숨겨두었던 외갓집 얘기들을 내게 풀어놓았다.
“내가 네 살 무렵이었어. 온 가족이 원주를 떠나 북으로 북으로 한없이 걸었지. 나는 아버지 등에 업혀 갔어. 앞에서 힘겹게 걸어가는 어머니의 등에 걸려 있는 바가지가 흔들거리던 광경이 지금도 남아 있어. 그렇게 만주의 용정까지 갔지. 우리 식구는 거지나 다름없었어. 어린 내가 배가 고파 우니까 이 집 저 집에서 불쌍하다고 감자 하나씩을 주었지. 돈도 없고 농토도 없는 아버지와 어머니가 어떻게 거기서 목숨을 부지했는지 몰라.”
1936년 초 《동아일보》는 수많은 가난한 농민의 만주 이주를 보도하고 있었다. 나의 외가는 그 흐름에 섞여 갔을지도 모른다. 집안에서 전해오는 말로는 외증조부가 만주에서 독립운동을 하다가 돌아가시는 바람에 맏아들인 외할아버지가 가족을 데리고 갔다고 한다. 늙은 어머니의 고백은 계속되었다.
“내가 일곱 살 때였어. 가난한 집에서 입을 하나라도 덜려고 내가 쌀 한 가마니에 팔려갔어. 형편이 괜찮은 집에 가서 그 집 갓난애를 돌보는 일을 하게 된 거지. 애가 애를 업고 있으니까 허리가 휘어지는 것 같았어. 같은 밥상에서 같이 밥을 먹던 엄마가 너무 보고 싶었어. 밤에 일어나 오줌을 누면 ‘내 딸’ 하고 그윽한 눈길을 보내주던 아버지도 그리웠고. 어렸어도 나는 공부하고 싶었어. 글자가 적힌 종이쪽지를 저고리춤에 몰래 숨겨두고 아이를 업고 다닐 때 그걸 조금씩 외웠어. 그렇게 일 년쯤 지나니까 엄마가 나를 찾으러 왔지. 그래서 집으로 돌아갔어.”
일본 소설 〈오싱〉을 읽으며 흰 눈밭에 쓰러진 일곱 살짜리 팔려간 계집아이가 나오는 대목에서 울컥한 적이 있다. 어머니가 바로 그 주인공인 셈이었다. 나는 어머니의 다음 말을 조용히 기다렸다.
“우리 집은 회령으로 넘어와 오산동에서 작은 구멍가게를 하게 됐어. 가족 생계가 달렸기 때문에 파는 ‘요깡’(양갱)을 품어만 봤지 먹어보지 못했어. 그런 가난 속에서도 엄마는 나를 학교에 보냈어. 너무 행복했지. 마음속으로는 고등여학교도 가고 싶었어. 같은 학교에 다니는 일본 아이들이 벤토에 흰쌀밥을 담아 오는데 그게 참 부러웠어. 그렇게 학교를 졸업하고 회령역에 직원으로 취직을 했는데 우연히 서울 유학생인 네 아버지와 만나 결혼하게 된 거야.
해방이 되고 공산당이 인민위원회를 조직했는데 가슴 아픈 광경을 본 게 평생 잊히지 않아. 내가 다니던 성당의 독일인 신부님이 참 좋은 분이었어. 인민위원회 사람들이 여러 사람 보는 앞에서 신부님에게 구덩이를 파게 하고 그 앞에 무릎을 꿇게 하는 거야. 뒤에서 ‘탕’ 하고 총을 쏘니 신부님이 구덩이 안으로 굴러 떨어지는 거야. 왜 그렇게까지 했는지 몰라.
그다음 해 결혼하고 네 아버지를 따라 서울로 오는데 친정엄마인 네 외할머니가 이렇게 말씀하셨어. ‘가족 전부 데리고 남쪽으로 갈 테니 기다려라.’ 원산에서 작은 어선을 타고 몇 날 며칠을 남으로 내려왔지. 그 후로 70년 동안 엄마를 보지 못했어.”
생활력이 강한 어머니는 뜨개질 품팔이를 해서 모은 돈으로 변두리에 집 한 채를 마련했다. 북에 있는 가족이 남으로 내려오면 살게 할 집이었다. 수천수만 번의 뜨개질 속에 어머니의 손은 피가 터지고 살점이 떨어져 나갔다. 어머니는 남북 이산가족 찾기가 한창일 때 하루 종일 KBS 광장에서 살았다. 어머니는 어느 순간 남북 정권의 이산가족 찾기는 정치적인 쇼라고 생각했다. 선전 가치가 없는 나의 외가는 상봉 대상이 아닐지도 모른다고 의심했다.
이후 중국과의 교류가 시작됐다. 어머니는 만주에 있는 먼 친척과 연락이 닿았다. 그 친척에게 북에 들어가 헤어진 가족을 찾아봐 달라고 부탁했다. 그 친척은 북의 외가가 고향을 떠났는지 흔적이 없다고 전했다. 어머니는 그 말을 믿지 않았다.
어머니의 모습은 점점 세월에 풍화되었고 시간이 얼마 남지 않은 것처럼 보였다. 나는 어머니의 한(恨)을 풀어줘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인도(人道) 차원이라는 구호를 내세우며 이산가족 찾기를 한다는 정부지만 간절한 마음이 없는 것 같아 보였다. 그들은 어머니의 처절한 아픔에 공감하지 못했다. 마음에 진동이 없는 입으로만의 인도주의로 여겨졌다. 내가 북쪽 사람을 만나 직접 부탁하기로 결심했다.
궁하면 통한다고 했다. 우연히 북쪽 사람을 소개받게 됐다. 통일부의 접촉 허가를 얻은 후 베이징에서 북한의 고위 관료를 만났다. 어머니의 간절한 염원을 얘기하면서 사정했다. 나는 착수금과 외할아버지와 외할머니의 흑백사진과 인적사항이 적힌 쪽지를 건네주면서 성공보수를 약속했다. 이념이나 정치보다 달러의 힘이 더 강하다고 믿었다. 북한의 관료를 다그치기도 하고 그에게 따지기도 하면서 일을 성공시키라고 부탁했다. 계속 나를 살피던 북한 관료의 얼굴에서 동정의 빛이 비치고 한마디가 나왔다.
“효자시구만요. 제가 직접 회령의 오산동에 가서 서류를 뒤져보고 외가가 살던 집도 찾아가 보겠습니다. 제가 개나리 피는 언덕이 있는 그 동네를 압니다. 그리고 이런 일은 북에서도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은 아닙니다. 해보겠습니다. 저는 남북회담 때 북측대표단의 한 사람으로 서울에 가보기도 했습니다. 워커힐에서 묵었었죠. 대신 일이 잘되면 성공보수와 함께 우리 아들 영어전자사전도 선물로 줘야 합니다.”
나는 그가 북에서 외갓집 사람들을 찾을 경우 베이징으로 데리고 나오라고 했다. 그 비용도 충분히 주겠다고 했다. 그 후 연락이 왔다. 회령에 갔더니 외가의 공적 기록을 전혀 찾을 수 없다는 것이었다. 탐문을 해도 아는 사람이 없다고 했다. 그러면서 6·25전쟁 때 온 가족이 폭격으로 사망했든가 아니면 두만강을 건너 만주로 이주한 것으로 추정된다고 했다. 이상했다. 중국으로 갔다면 그곳에 있는 친척이 모를 리가 없었다. 그러나 그들은 전혀 모르고 있었다. 오히려 북으로 들어가 보겠다고 하면서 돈을 요구했었다. 어머니를 위해 나는 돈을 아낄 생각이 없었다.
나의 마지막 추정은 외가가 6·25전쟁 시 폭격으로 완전히 사라졌다는 것이다. 미군은 6·25전쟁 때 초토화 작전을 벌였다. 북한 지역에 있는 마지막 보까지도 없애 원시시대로 돌아가게 했다는 연합군 최고사령부(GHQ) 보고서가 있었다. 나의 외가는 오래전에 이미 사라진 것 같았다.
아흔 살이 되던 해 꽃 피는 봄, 어머니는 한눈금 남았던 삶의 에너지마저 빠져버린 것 같았다. 어머니는 침대에서 혼수라는 평온한 세계로, 의식도 없고 고통도 없는 세계로 흘러갔다. 나는 어머니의 옆에서 눈을 감고 어머니의 영혼이 어디에 있을까 깊은 물속 같은 내면으로 침잠해 들어갔다. 어머니의 영혼이 몸을 빠져나와 시간과 공간 너머, 저쪽 세계의 강가에서 마중 나온 그립고 그리웠던 엄마와 아빠를 만나고 있었다. 온 가족이 활짝 웃는 얼굴이었다. 아득히 보이는 외할아버지가 나를 보고 손짓하며 말을 건넸다.
‘어이쿠, 귀하고 귀한 우리 손자. 살아서는 한 번도 볼 수 없었네. 그렇지만 사랑하고 또 사랑하네. 내가 살았던 세월이 아쉽네. 잘 살다 오면 그때 만나세.’
그 옆에서 외할머니와 그곳으로 간 어머니가 활짝 미소를 지으며 내게 손을 흔들고 있었다.
‘외할아버지, 외할머니 반갑습니다. 사랑해요.’
이승에 있는 내가 인사를 올렸다. 나의 외가는 처절하게 밟히고 짓뭉개져 흔적조차 남지 않은 이 땅의 민초였다.
내가 읽은 역사책의 페이지에서 새어 나오는 신음 소리는 외할머니와 외할아버지의 절규였다. 책갈피 사이에 배어 있던 피 냄새는 허공에서 떨어진 폭탄에 갈기갈기 찢긴 외할아버지와 외할머니의 살점에서 흘러나온 피 아니었을까. 나는 할머니와 손자 사이에 흐르는 따뜻한 정을 빼앗겼다. 군사분계선이 남과 북을 막고 있어도 꿈은 그곳에 다리를 놓고 있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