藝家를 찾아서

〈오발탄〉의 유현목 감독 후손들

분단과 신앙, 그리고 인간운명을 필름에 담다

  • 글 : 김태완 월간조선 기자  kimchi@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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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학대학 입학 좌절과 비극적 6·25 체험 … 9남매 중 3남매만 살아남아
⊙ “사회비판, 반공 이데올로기, 종교적 갈등은 엉긴 ‘피와 살’ 같은 것”
⊙ 〈오발탄〉의 원판 필름 유실돼 … 한국영상자료원, 디지털 복원 성공
⊙ 배우 김진규·김석훈·문희·문종숙 등 지적인 배우 좋아해
영화 〈오발탄〉(1961년작)의 고(故) 유현목(兪賢穆·1925~2009) 감독. 신상옥(申相玉) 감독이 한국 영화감독 중에서 최고의 ‘로맨티스트’라면, 유현목은 영화 〈아리랑〉의 나운규(羅雲奎) 뒤를 이어 한국적 리얼리즘을 완성한 ‘스타일리스트’였다.
 
  〈김약국의 딸들〉(1963) 〈순교자〉(1965) 〈카인의 후예〉(1968) 등 인간의 운명과 신앙(종교), 역사(분단)를 주제로 진지하고 뜨거운 영화를 만들었다. 어쩌면 그는 전쟁과 분단, 이념이 충돌했던 불우한 시대를 진솔하게, 역동적으로 필름에 담은 영화예술가일지 모른다.
 
  물론 그가 남긴 43편의 영화 중에 실험영화 〈춘몽〉(1965) 〈말미잘〉(1995)이 있고, 코미디영화 〈몽땅 드릴까요〉(1968), 멜로드라마 〈아낌없이 주련다〉(1962)가 있으나 그의 영화는 사회적·종교적 메시지가 사랑 타령보다 중요했다. 가벼운 멜로보다 어둡고 무거운 주제를 택했다.
 
  체인 스모커에다 말술로 충무로를 풍미한 그는 지난 2009년 사망했으나 아직도 그의 작품을 기억하는 영화인이 많다. 기자는 경기도 파주 교하에서 유 감독의 부인인 서양화가 박근자(朴槿子·86) 여사를 만났다. 유현목·박근자 부부는 1958년 결혼했으나 슬하에 자녀가 없다. 그래서인지, 유 감독이 남긴 많은 영화자료를 한국영상자료원에 기증한 상태다.
 
유현목 감독의 막내동생 유영목씨.
  “감독님(남편을 그렇게 불렀다.)은 종교적 테마를 많이 다뤘죠. 그 이유는 가족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고 봅니다. 시어머니(李喜善·1893~1973)는 감독님이 목사가 되길 늘 갈망하셨어요. 황해도 사리원에서 고된 시집살이를 겪은 시어머니가 멀리 교회 종소리를 듣고 위안을 얻으셨대요. 성경책을 읽으며 언문을 깨치고 집안 식구 모두 열렬한 신자로 만들었죠.
 
  그이(유현목)는 당시 38선을 넘어와 감리신학교에 응시했지만 떨어지고 말았어요. 그 무렵 그이의 외삼촌이 인쇄소와 한약재 사업으로 부자가 됐는데 그분 소개로 덕수궁 근처에 미군 고위간부를 찾아갔어요. 연희전문학교 신학과에 입학시켜 달라는 청을 넣기 위해서요. 남편이 (집 앞에서) 골똘히 기도하는 모습을 그 미군이 보고, 기꺼이 연희전문 백낙준 교장에게 소개장을 써 주었대요. 그이는 소개장을 와이셔츠 윗주머니에 넣고 종일 서울 시내를 돌아다녔대요. 목사의 꿈에 한껏 부풀어서 말이죠. 그런데 집에 와서 보니 다른 메모는 그대론데 유독 그 소개장만 없었답니다. 목사의 인연이 없었나 봐요.”
 
  그의 어머니는 유 감독의 바로 아래동생(兪承穆)을 해방 직후 평양신학교로 보냈다. 그러나 신학교 본과 1학년 때 6·25가 발발, 유엔군 폭격을 피해 과수원으로 숨었다가 아버지(兪稀浚·1885~1950)와 함께 폭사하고 만다. 월남 후 이번에는 막내아들(兪榮穆)을 서울의 중앙신학교(現 강남대)에 입학시켰다. 신학교를 나온 유영목은 중앙대에 편입했으나 결국 목사의 길을 걷지 못했다고 한다.
 
 
  신앙의 갈등과 비극적 가족사
 
유현목·박근자 부부는 1958년 결혼했다.
  유영목씨의 말이다.
 
  “우리 집 과수원이 평양~신의주 간 경의선 국도와 가까웠는데 1950년 10월 17일 사리원에 유엔군이 처음 입성하던 날, 아버지와 형이 돌아가셨어요. 인민군이 과수원 언덕배기에다 참호를 파 놓고 응사를 하는 곁에 과수원집이 있었는데, 두 분이 거기 숨었던 겁니다. 유엔군은 그곳이 인민군 야전지휘소라고 생각해 박격포를 쐈어요. 안타깝지만 고통 없이 돌아가셨어요.
 
  형(유현목 감독)은 그 장면을 목격하지 못해 실감하기 어려웠겠지만 작가적 감수성으로 받아들였을 겁니다. 그 영향으로 신앙에 대한 심오한 생각이 〈순교자〉 〈사람의 아들〉 같은 영화를 완성할 수 있었다고 봐요.”
 
  1958년 겨울 유형목·박근자 두 사람은 서울 남산교회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그때 신랑은 34살, 신부는 27살이었다. 앞서 약혼식은 서울대 미대를 졸업한 박근자의 개인전으로 대신했다. 박 여사의 말이다.
 
  “시어머니께서 당신이 다니시던 교회에서 세례를 받아야 한댔어요. 당시 사리원 출신 목사가 지금의 경향신문 뒤편 언덕에 천막교회를 세웠는데 불 탄 소련대사관 자리였어요. 이상하게도 교회 언덕을 오르는데 자꾸만 버선이 벗겨졌어요. 천막이 바람에 펄럭일 때마다 햇빛이 쏟아지고 무언가에 열중해 기도하던 목사 모습이 떠오릅니다.”
 
  — 지금은 신을 믿으세요?
 
  “그럼요. 저나, 남편도 신의 존재를 믿었지만 교회엔 가지 않으셨어요.”
 
  김은국의 소설 《순교자》를 영화화한 〈순교자〉(1965)는 고통스런 신앙의 길을 그린 작품이다. 무신론적인 결말보다 신앙의 영원성에 초점을 맞췄다고 할까. 이 작품으로 유현목은 그해(1965) 대종상 감독상을 수상했다.
 
  그러나 “신은 없다”는 대사가 문제가 되어 개신교 교회로부터 상영저지를 당하고 말았다. 일부 목사들은 유현목 감독을 ‘사탄’이라 불렀다.
 
영화 〈사람의 아들〉의 한 장면. 이 영화는 신앙적 갈등을 담은 무거운 주제의 작품으로 1980년 대종상 작품상을 수상했다.
  이문열의 소설을 영화화한 〈사람의 아들〉(1980) 역시 신앙적 번민을 담고 있다. 진지하고 무거운 주제의 이 영화는 신학생 민요섭(하명중 분)을 신흥종교의 교주로 묘사한다. 요섭은 자신을 따르는 조동팔(강태기 분)과 고아, 불구자, 걸인, 창녀들을 상대로 빈민구제 사업을 펼치다 동팔의 칼을 찔린다. 요섭은 하늘을 향해 “하나님! 이것으로 제 죄를 사하여 주시렵니까”라고 읊조린다. 1980년 대종상 작품상, 한국영화평론가협회상 작품상을 수상한 〈사람의 아들〉의 에필로그는 이렇다.
 
  ‘이 황량한 벌판에서 민요섭은 신의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어쩌면 유 감독이 민요섭일지 모른다.
 
  유현목은 유희준·이희선 사이에서 9남매(아들 여덟에 딸 하나) 중 다섯째 아들로 태어났다. 위로 형들이 있었으나 일찍 사망했다고 전해진다. 유현목은 《영화인생》(혜화당 간)에서 어머니를 ‘각고(刻苦)덩어리’로 묘사했다. 뼈를 깎는 괴로움도 자식을 위해서라면 감수했다는 의미다. 사리원에서도 20리쯤 더 들어가야 하는 벽지에서 어렵사리 박토를 일구고 고무신 가게를 열어 살림을 키웠지만, 6·25로 송두리째 잃고 다시 맨손으로 서울에서 장사를 하며 자식을 키웠다.
 
  유영목씨의 말이다.
 
  “9남매 중 누나(유정순), 형(유현목), 그리고 저, 이렇게 셋만 남기고 다른 형제들은 일찍 돌아가셨어요. 바이올린을 전공한 형(兪亨穆)이 있었는데 황해도 해주예술전문학교를 다녔어요. 희극인 송해씨가 그 학교를 나왔어요.
 
  6·25가 터지자 인민군 군악대에 뽑혔는데 그 후론 소식이 끊어졌어요. 형(유현목)이 동국대 교수로 있을 때 교환교수로 있던 중국 옌볜대를 통해 수소문했지만 생사를 확인할 수 없었죠. 나중 해주예술학교 출신들을 통해 알아보니 ‘인민군 군악대에 끌려가다가 폭격을 맞아 사망했다’고 해요.”
 
  유 감독보다 9살이 많은 누이 정순(兪正順·12년 전 작고)은 경성보육학교를 졸업한 뒤 평양, 인천, 사리원, 경기도 평택 등지에서 유치원 교사로 재직했다고 한다. 슬하에 딸 하나를 뒀는데 피아노를 전공, 교회 오르가니스트로 활동하고 있다. 막내인 유영목(85)은 목사의 길은 걷지 못했으나 경기 부천에서 교회 장로로 40년째 봉사하고 있다. 그의 딸 유은경(兪恩璟)은 예술 집안답게 대학에서 응용미술과를 졸업했다.
 
 
  유현목과 영화 〈오발탄〉
 
영화 〈오발탄〉의 한 장면. 〈오발탄〉은 6·25 직후 한 가정을 배경으로 빈곤한 현실과 정신적인 불안을 주제로 삼고 있다. 필름이 유실됐으나 작년 디지털로 복원했다.
  영화평론가 김종원 선생은 유현목의 영화를 ‘분단과 신앙, 그리고 인간 운명’으로 정의한다. 분단이 전쟁이라는 민족의 비극을 뜻하는 것이라면, 신앙은 6·25를 겪은 가족의 비극을 오버랩시킨다. 영화 속 분단과 신앙이, 인간의 운명이란 관점에서 유기적으로 연결돼 있다.
 
  분단을 소재로 한 영화로 〈카인의 후예〉(1968) 〈나도 인간이 되련다〉(1969) 〈불꽃〉(1975) 〈장마〉(1979) 등이 있다. 영화 〈오발탄〉도 분단의 비극을 내포한 작품이다.
 
  〈오발탄〉은 1960년에 만들어졌으나 5·16 군사정변으로 상영금지됐다가 이듬해 개봉됐다. 김진규·최무룡·문정숙 등이 출연했던 이 영화의 특징은 대사를 통한 스토리 전개보다 영상주의적 표현을 시도한 점이다. 박근자 여사의 말이다.
 
  “피카소의 ‘게르니카’ 같은 작품이 시대적 고통 속에서 달구어졌듯 〈오발탄〉도 그 시대가 품어서 나온 작품이라고 생각합니다. 작년 디지털로 복원이 돼 무척 기뻐요. 〈오발탄〉은 네거티브 필름(필름으로 영화를 만들 당시 원판 역할을 하던 필름)이 유실됐고, 1963년 제7회 샌프란시스코영화제에 출품하기 위해 영어 자막을 삽입한 판본만 남아 있었어요.”
 
  그러나 이 판본도 화면 절반이 뜯겨 나간 장면이 있고 상영시간 107분 중 40분 분량의 화면에 678개의 영어 자막이 들어 있었다고 한다. 작년 5월 한국영상자료원은 2년간의 디지털 복원작업을 거쳐 복원에 성공, 일반에 공개했다.
 
  〈오발탄〉은 6·25 직후 예닐곱 식구가 사는 한 가정을 배경으로 빈곤한 현실과 정신적 불안을 주제로 삼고 있다. 실성한 실향민 어머니(노재신 분)와 만삭의 아내(문정숙 분), 사고뭉치 동생(최무룡 분), 그리고 양공주 여동생(서애자 분), 또 고무신을 사 달라고 보채는 딸, 이렇게 많은 부양가족을 거느린 주인공 철호(김진규 분)는 박봉으로 근근이 살아간다.
 
  철호는 고통스러운 충치 하나를 시원하게 빼 버릴 치료비와 정신적인 여유도 없이 번민의 나날을 보낸다. 라스트 신에서 무작정 택시에 오른 철호에게 운전기사가 묻는다.
 
  “어디로 모실까요?”
 
  “….”
 
  “어디로 모실까요?
 
  “해방촌으로. 아니 대학병원으로. 아니 중부경찰서로 ….”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철호는 아비 노릇, 남편 노릇, 형 노릇, 오빠 노릇, 그리고 실성한 노모의 자식 노릇까지 다 감당해야 했던 것이다.
 
  방향을 잃은 손님을 태운 운전석 조수는 “오발탄 같은 손님을 태웠군” 하고 중얼거린다.
 
  이 영화는 자유당 말기의 만연된 부정부패, 6·25 전쟁 후의 기아와 절망에 처한 인간상 등을 어두운 톤으로 그리고 있다.
 
 
  길었던 1965년과 3편의 영화
 
유현목은 실험영화인 〈춘몽〉을 만들었다가 음화(淫畵)제조 혐의로 기소되기도 했다.
  — 북에서 피란 온 사연, 6·25 당시 폭격으로 인한 비극적 가족사가 종교 문제에 천착하거나 반공 이데올로기 문제를 영화에 다루게 된 계기가 아닐까요.
 
  박근자 여사의 말이다.
 
  “사회비판, 반공 이데올로기, 종교적 갈등은 그이에게 엉긴 ‘피와 살’ 같은 것이었죠. 박정희 정권에 대해선 양면의 얼굴을 갖고 계셨죠. (대통령과) 같이 술 드실 기회가 있었고, 밤이 늦도록 육영수 여사가 (술을) 따르고 할 때도 있었어요. 감독님 밑에 있던 한 여자 조감독 중에 무척 그런 계통에 빠른 이가 있어서 줄이 닿았던 모양입니다. 그러면서도 술에 취하면 관용 지프를 발로 걷어차서 꽤나 파출소에 드나드셨나 봐요. 또 영화 검열이 심한 시절이었잖아요.”
 
  — 박정희 대통령을 미워하거나 특정 정파를 선호하시진 않으셨죠?
 
  “그런 적은 없었어요. 공화당에서 그이를 끌어들이려 꽤 애썼어요. 혁명세력하고 가까웠어요. 김종필이니 하는 분들이랑 같은 세대잖아요.”
 
  — 정치하실 수도 있었겠네요.
 
  “네, 하지만 할 사람이 아니시죠.”
 
  유현목은 실험영화인 〈춘몽〉(1965)을 만들었다가 음화(淫畵)제조 혐의로 기소되기도 했다. 쾌락놀이를 하던 여인이 찢어진 가운으로 몸을 가린 채 도망가는 장면이 시비가 됐다. 당시 검열에 앞서 유 감독 스스로 전라 장면을 들어냈지만 검사는 홍보용 스틸사진을 증거로 처벌하려 했다.
 
  또 영화 〈7인의 여포로〉(1965)로 구속된 이만희 감독을 두둔했다가 반공법 위반 혐의로 법정에 서야 했다. 군 간호장교들을 강간하려는 중공군을 북한 장교가 쏴 죽이는 장면이 도마에 오르자 유 감독은 “우리나라의 국시는 반공이 아니라 자유”라고 말해 군사정권을 자극했다. 박 여사의 말이다.
 
  “곤욕을 치렀죠. 그해(1965년) 〈춘몽〉이 걸리더니 〈순교자〉로 말썽이 되고 ‘반공 국시’가 또 빌미가 됐어요. 당시 최모라는 군 출신 검사가 있었어요. 그 검사의 처제가 제가 그림을 가르치던 공군 사관생도의 여자 친구였어요. 그래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죠.
 
  검사의 장인이 열렬한 개신교 신자인데, 〈순교자〉에서 ‘하느님은 없다’고 하니까 장인에게 잘보이려고 사위가 나선 것이죠. 왜 소설의 원작자(김은국)한테 달려들지 않고 영화만 그랬는지 몰라요. 소설은 다들 안 읽나 봐요.
 
  그 검사는 〈춘몽〉의 여우(女優)가 인사 오기를 은근히 기다렸는데 그 배우가 콧대가 높아서 안 갔어요. 저나 남편이나 눈치가 없어서 인사해야 하는지 몰랐어요. 검사의 처제가 제게 이런 말을 했어요. ‘형부가 말 타는 걸 좋아하는데 말 그림이라도 그려서 인사라도 오실 걸 그랬다’는 겁니다. 아무런 인사 없이 그냥 밍밍하게 있으니까 괘씸히 여겼나 봐요. 어쩌면 취하할 수 있었는데 걸려든 거예요. 세상이 그렇더라고요. 그래도 남편은 집에 와서 한 번도 그런 어려움을 얘기한 적이 없어요.”
 
  결국 유 감독을 괴롭혔던 반공법 위반 혐의는 무죄, 음화제조 혐의는 3만원의 벌금 선고로 막을 내렸다.
 
유현목 감독이 연출한 주요 영화 포스터들.
1.〈김약국의 딸들〉(1963) 2.〈잉여인간〉(1964) 3.〈구름은 흘러도〉(1959) 4.〈아내는 고백한다〉(1964)
5.〈순교자〉(1965) 6.〈임꺽정(林巨正)〉(1961) 7.〈오발탄〉(1961) 8.〈성웅 이순신〉(1962) 9.〈춘몽〉(1965)
 
  취했을 때 신을 가장 가깝게 느껴
 
유현목 감독의 미망인 박근자 여사.
  박근자 여사는 “남편이 참을성이 많았고 워낙 말이 없었다”고 했다.
 
  “제가 애를 못 낳았는데 지금의 차병원이 수도극장 앞에 자그맣게 문을 열 때, 남편과 찾아갔어요. 의사가 ‘난소가 막혔다’고 수술을 권하는데 남편이 아이를 포기하겠다고 말했어요. 제 몸에 칼을 대고 싶지 않았나 봐요. 그땐 미안하다는 생각을 못했어요. 자존심인지, 어리바리해서인지 …. 지금 와서 생각하니 미안해요. 그때 애를 낳아 줬어야 하는 게 아닌가 하고.”
 
  — 다, 운명 같은 게 아닐까요.
 
  “한국영상자료원에 감독님 자료를 일부 기증하고도 집에 영화기록물이 많아요. 속 썩이는 자식이 있느니, 이게(자료가) 더 가치 있다고 생각해요. 그이가 말년에 저더러 ‘돈 얘기 평생 안 해서 고맙다’는 말을 했는데, 자식이 있었다면 그럴 수 있었겠어요?
 
  저는 살아오며 생활비 달라는 말, 안 해 봤어요. 얼마나 버는지 간섭을 안 했어요. 비정기적으로 생활비를 받긴 했는데 남편 월급은 모두 영화사(유프로덕션)로 들어갔으려니 생각해서 일절 간섭을 안 했어요. 저도 돈을 몰랐어요. 을지로 5층 상가건물이 그때 세워졌는데 공짜로 입주한다고 생각했을 정도였으니 세상 물정을 몰랐던 거죠.”
 
1994년 미국 할리우드 유니버설 스튜디오 앞에서 유현목·박근자 부부.
  — 말년의 유현목 감독 모습은 어땠나요.
 
  “술을 무척 드셨고요, 진짜 술고래시고 줄담배 …, 그래도 오래 사셨죠. 이쪽(경기 파주)으로 이사 오고 나서 친구 만나기가 어려워선지 혼자 새벽 2~3시까지 응접실에 앉아 맥주잔을 탁자에 탁탁 부딪치고 …, 한 번도 술친구가 못 되어 준 게 후회가 듭니다. 그이는 젊었을 때 그런 말을 자주 하셨어요. 당신이 취했을 때 신을 가장 가깝게 느낀다고 ….”
 
  — 어떤 의미인가요.
 
  “의미는 정확히 모르지만 어떤 느낌이 와 닿아요. 그럴 수 있겠다고 …. 하지만 그 좋아하던 술도 작품할 땐 거의 안 드셨어요. 시나리오 작업부터 직접 참여해 일사불란하게 찍었어요. 시나리오 작가를 무척 귀하게 여겼고, 항상 좋은 작가 만나기를 원했죠. 평생 몰입하는 성격이었어요.”
 
 
  허름한 여관방에 영화 만든다고 앉아 있는 꿈 꿔
 
한국영상자료원이 주최한 〈유현목, 현실과 영화 사이에서〉에 전시된 유 감독의 영화 대본들.
  — 감독님 작품 중에 사모님이 좋아하는 작품은?
 
  “〈순교자〉를 좋아했어요. 지금은 그이가 순교자가 됐어요. 연출이 수학같이 짜여 있어요. 군더더기가 없고요. 장면 장면이 너무 좋고, 라스트 신도 좋아요. 조형적으로 아티스틱한 구도들, 너무 좋아요. 또 〈사람의 아들〉도 좋고 초기 작인 〈인생차압〉(1958) 〈분례기〉 (1971) 같은 작품도 좋고요.”
 
  — 촬영 현장에 자주 갔었죠?
 
  “그럼요. 옛날엔 자주 다니기도 했었죠. 철없이 같이 다녔어요. 캔버스 들고 이젤 짊어지고 … 그림도 안 그리면서 …. 하하하. 얼마나 철이 없었던지.”
 
  — 내조를 어떻게 하셨나요.
 
  “ 더불어 같이 산다는 것 자체가 서로 영향을 준 것 같아요. 서로 자유롭게 간섭하지 않고, 잔소리 서로 안 하고 서로 캐묻지도 않았고, 그런 게 서로 내조·외조한 게 아닌가 싶어요.”
 
  — 감독님을 둘러싼 스캔들이 없었잖아요.
 
  “있었겠죠. 있었던 것으로 알고 있어요. 그럼 뭐, 어때요? 그이는 남자건 여자건 분위기 있고 지성적인 분을 좋아했어요. 물론 자존심이 상했지만 그런대로 불평은 안 했던 것 같아요. 인생의 기복이 이런 것 저런 것 있는데 지나고 나면 다 아름다워요. 힘든 과정 거치며 우리 부부 사이도 성장한 것 같아요. 여러 일을 치르면서 영혼이 상승하게 된다는 생각이 들어요.”
 
  유현목 감독의 영화에 자주 캐스팅된 남자배우는 김진규·신성일·신영균·최무룡 등이다. 여배우는 문희·엄앵란·윤정희·남정임 등이 대표적이다.
 
  — 고인은 어떤 배우를 좋아하셨나요.
 
  “배우 김진규를 무척 좋아했어요. 그분은 연기를 안 해도, 가만히 있어도 그 자체가 고민하는 스타일이잖아요. 뭔가 지니고 있을 것 같은 … 배우는 연기 이전에 뭔가가 있어야 하잖아요. 또 남우 김석훈, 여우 중에선 문희·문종숙 같은 지적 이미지의 배우를 좋아했어요.”
 
  — 사모님의 지적 이미지에 감독님이 끌린 게 아닐까요.
 
  “여러 차례 복선이 깔리는 운명이 있었고, 운명지어진 만남이나 그런 질서가 있었던 것 같아요. 지금도 가끔 꿈에서 뵙죠. 허름한 여관방에 영화 만든다고 앉아 있는 … 제작자가 돈이 없어 고생하는 꿈 …. 기차를 탔은데 저쪽 칸에서 이쪽 칸으로 걸어오는 꿈을 꿨어요.
 
  그렇게 한세상 다 갔네요. 이렇게 살았든, 저렇게 살았든, 그냥 꿈결 같아요.”⊙
 
1956년 영화 〈교차로〉로 데뷔
 
  ‘정열적인 테크니시안’
 
1956년 데뷔작 〈교차로〉를 편집할 당시의 유현목.
  1956년 〈교차로〉로 야심만만하게 데뷔한 유현목 감독은 43편의 작품을 연출했다. 데뷔작 〈교차로〉에는 짤막한 에피소드가 전해진다.
 
  어느 날 충무로에서 한국배우전문학원을 경영하던 김인걸이라는 사람이 유현목 감독을 찾아왔다. 그는 자신이 제작하는 영화의 연출을 유 감독에게 맡기고 싶었다. 당시 그는 1955년 이규환 감독의 대히트작 〈춘향전〉의 제1 조감독으로 명성을 날릴 때였다.
 
  그는 이청기 각본의 시나리오를 보여줬는데 제명은 〈교차로〉였다. 유현목은 우선 스승인 이규환 감독과 의논했고 흔쾌히 허락을 받았다. 조미령·이택균·강신탁 등이 출연한 이 영화는 양부모에게서 자란 쌍둥이 자매가 우여곡절 끝에 친부모를 만난다는 줄거리다.
 
  이 영화가 개봉되자 신문에 ‘정열적인 테크니시안’ ‘한국영화의 스토리텔링을 탈피하다’는 헤드라인이 올랐다. 영화계에서는 이제야 영화감독 같은 놈이 태어났다는 소문이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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