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67년 봉천동 천막학교로 시작해 내년이면 창립 50주년
⊙ 한국 유일의 미술전문고교로 새로운 50년을 만들겠다
⊙ 아내도 암, 나도 암 극복… 학생들이 모두 손주 같아
⊙ 시설은 좋지 않아도 학생들 먹는 것만은 최고로
⊙ 육영수 여사가 지원하려는데 윤필용 당시 수경사령관이 방해
⊙ 한국 유일의 미술전문고교로 새로운 50년을 만들겠다
⊙ 아내도 암, 나도 암 극복… 학생들이 모두 손주 같아
⊙ 시설은 좋지 않아도 학생들 먹는 것만은 최고로
⊙ 육영수 여사가 지원하려는데 윤필용 당시 수경사령관이 방해

- 이돈환 이사장이 교내 벤치에 앉아 서울미술고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관악구 봉천동 서울미고에 갈 때마다 독특한 분위기를 느꼈다. 교정이 크지 않았고 며칠 전부터 교사(校舍) 전체를 리모델링하고 있지만 그다지 인상적이지 않았다. 이 이사장은 학생식당부터 보여주며 “호텔급 시설”이라고 자랑했다. 과장이긴 했지만 정결했고 무엇보다 학생들이 먹는 음식에 신경 쓴다는 사실이 믿음직했다.
서울미고는 교육계의 기적으로 통한다
얼마 뒤 다시 서울미고에 갔을 때 이 이사장은 “점심이나 먹자”며 기자를 학생식당으로 이끌었다. 동네 아주머니처럼 털털해 보이는 여성이 급식 과정을 일일이 지켜보며 무슨 지시를 내리고 있었다. 이 이사장의 부인인 김정수(金貞洙) 서울미고 교장(72)이었다. 부부의 주요 일과는 학생들의 입맛을 챙기는 것이었다.
내년 창립 50년을 맞는 서울미고는 ‘교육계의 기적’으로 통한다. 마포 부잣집 딸이었던 김정수 교장은 경희대 재학 시 ‘운동권 학생’으로 유명했다. 그가 갑자기 봉천동 달동네에 천막을 치고 여공(女工)들을 모아 가르치기 시작했다. 진정 나라를 발전시키는 것은 순간의 데모보다 청소년 교육이라는 것을 깨달았던 것이다.
이돈환 이사장은 김정수 교장의 경희대 선배다. 그런 두 사람이 부부의 연을 맺은 것은 2012년 세상을 뜬 조영식 경희대 설립자 덕분이었다. 부부가 되자 이돈환 이사장도 교육에 깊이 간여하기 시작했다. 이 이사장은 “서울미고는 고등공민학교에서 학력인정학교를 거쳐 정규학교가 됐다”며 “이제 새로운 미래가 시작된다”고 했다.
— 학교에 대한 자부심이 대단한 것 같습니다.
“제 소신은 귀(耳)로 듣는 교육보다 눈(眼)으로 보는 교육이 돼야 한다는 것입니다. 내년 창립 50주년을 앞두고 ‘파워 100년 위원회’를 만들었어요. 지나온 50년을 돌아보고 다가올 50년을 준비할 조직입니다.”
— 이 이사장께서 생각하는 서울미고의 미래는 무엇인가요.
“서울미고뿐 아니라 우리나라 전체 학교가 해당되는 말인데요. 미래형 학교의 조건은 이런 겁니다. 부정에서 긍정, 대립과 분열에서 화합과 협력, 과거지향에서 미래지향, 안 된다에서 된다로 바꾸자는 거지요. 이제는 혁신 갖고는 안 됩니다. 학교와 교사와 학생과 학부모가 힘을 합치는 협약(協約)학교로 가야 우리 교육을 살릴 수 있습니다.”
— 그 말은 지금의 교육이 죽었다는 뜻입니까.
“죽었지요. 전 그 이유가 ‘교육의 정치화’ 때문이라고 봅니다. 가장 헌신적이고 숭고해야 할 교육현장이 어느 사이 정치판처럼 변했고 학생들은 정치도구로 전락했습니다. 이런 파행을 되돌리려면 ‘정치의 교육화’밖에 없다고 봅니다.”
— 그런 인식이 《월간교육》이 창간하게 된 바탕입니까.
“이돈희 전 장관과 《월간교육》을 창간할 때 공감대가 이미 형성돼 있었습니다. 문제는 자금인데, 그분이 돈을 모아오면 제가 그만큼 지원하겠다는 소위 ‘매칭펀드’를 제안했어요.”
한순간의 데모보다 인재 양성이 더 중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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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돈환 이사장의 부인 김정수 교장은 ‘인간 상록수’로 화제가 됐다. 사진은 《주간여성》이라는 주간지에 난 김 교장 기사(왼쪽)와 이 이사장·김 교장 결혼식 관련 기사. |
“치열했지요. 한일회담에 반대하는 6·3사태의 주역이었고요. 그때 데모를 하다 졸도해 병원에 입원했는데 거기서 ‘한순간의 데모보다 인재를 양성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것을 깨달았다더군요. 퇴원하자마자 봉천동에 천막을 치고 당시 배울 기회가 없었던 청소년들을 가르치기 시작한 게 1967년 5월 25일입니다.”
— 지금은 많이 발전했지만 당시 봉천동은 ‘달동네의 대명사’였지요.
“청계천 주변의 무허가 주택들이 철거되면서 죄다 이쪽으로 몰려왔습니다. 가장 가난했던 분들이 살던 동네입니다.”
— 천막학교가 여러 번 변신했습니다.
“천막학교가 1971년 한흥공예기술학교로, 1974년 한흥미술학교로, 1984년 서울예림미술학교에서 1994년 마침내 서울미술고로 바뀌었습니다.”
— 왜 하필 미술학교였습니까.
“김정수 교장이 원래 미술에 관심이 많았어요. 훗날 경인교대 교수로 정년을 맞은 정문규 선생님이라고, 한국의 5대 서양화가로 꼽힌 분이 있는데 김 교장이 예일여고에 다닐 때 그분이 미술교사였다더군요. 정 교수님을 훗날 서울미고 재단 이사로 모시기도 했습니다.”
— 1972년에 두 분이 결혼했지요.
“1961년부터 알고 지냈지요. 제가 경희대 변론부장을 할 때 김 교장은 변론부원이었고요.”
— 어쩌다 후배를 아내로 맞은 겁니까?
“조영식 설립자께서 부산대에서 명예박사 학위를 받았는데 식후 축하연이 열렸어요. 그 자리에서 그분이 ‘처녀 총각끼리 결혼하는 게 어떻겠느냐’고 하시더군요. 결혼은 생각도 안 했는데 그 말을 들은 후 ‘그럴 수도 있겠다’는 마음이 생겼어요. 김 교장도 저와 똑같았다더군요. 중매는 조 박사께서 서고 주례는 이선근 박사님께서 맡아주셨어요.”
— 학교가 좀 좁아 보입니다.
“사연이 있어요. 김 교장이 처녀의 몸으로 천막학교를 세우고 불우한 청소년을 모아 가르치자 곧 소문이 났어요. 《한국일보》에 보도되기도 했는데 제목이 ‘인간 상록수’였습니다. 그 뒤 방송에 나가기도 했고요. 고 육영수(陸英修) 여사께서 신문을 보시고 감동하셨는지 청와대 민정비서관을 보냈습니다. ‘이 일대의 땅을 줄 테니 제대로 된 학교를 세우라’는 것이었지요.”
당대의 권력자 윤필용 사령관에게 “넌 ×장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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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정수 교장은 암을 이겨냈다. 그래서인지 학생들을 손주처럼 보살핀다. |
“하필 우리가 학교를 세우려는 부지가 수경사(首警司) 장교들의 숙소 부지였습니다. 당시 수경사령관이 ‘나는 새도 떨어뜨린다’는 말이 있을 만큼 권력이 대단했던 윤필용(尹必鏞)씨였습니다.”
— 윤필용 사령관이 반대한 겁니까.
“김정수 교장과 사연이 많았지요. 김 교장이 윤필용씨를 찾아가 ‘넌 ×장군’이라고 험한 말을 하기도 했어요. 그런데 하필 김 교장 인척 중에 김용한 장군이라고 윤필용 사령관과 육사 8기 동기생이 계셨는데 당시 준장이었어요. 윤 사령관과 대립하면 진급이 어려울 수도 있잖아요. ‘너 때문에 진급에 지장 있으면 안 되니까 제발 양보하라’고 몇 번이나 부탁해서 결국 타협하고 말았지요. 그 때문에 학교부지가 좁아진 겁니다.”
— 그분은 장군이 됐습니까.
“아니요. 논산훈련소 부소장으로 끝났지요.”
— 김 교장 집안이 그리 부자였습니까.
“한때 개인세금 납부액이 우리나라에서 두 번째로 많았습니다. 삼성 이병철 창업주, 대우그룹 김우중 회장보다도 개인세금을 많이 냈고 여의도에서 통일교 다음으로 땅이 많다고 소문이 났을 정도니까요. 그렇게 유복한 집안에서 태어났지만 김 교장이 온갖 고생 다했습니다.”
— 무슨 고생을?
“1976년에 자궁암에 걸렸어요. 강북삼성병원에서 그런 진단을 받고 자궁을 적출해야 한다고 했는데 김 교장이 제가 장손인 게 마음에 걸렸던 모양이에요. 옛 비원 옆에 중앙병원이 있었는데 그 병원 김석환 원장께서 자궁적출 대신 치료를 해보자고 해 노력 끝에 완치가 됐습니다. 그 후 아들 딸을 낳았어요. 아마 그런 경험 때문에 김 교장이 우리 서울미고 학생들을 전부 제 자식처럼 생각하는 거 같아요.”
— 그러는 이 이사장께서도 암에 걸리셨다는 이야길 들었습니다.
“전립선암으로 3년을 투병했지요. 전립선암 3기였어요. 방광과 정낭으로 전이까지 됐고요. 올 1월 방사선 치료를 다 끝냈는데 5월 19일에 완치 단계라는 진단을 받았습니다.”
이선근 박사와 대학 1학년 때부터 인연
— 이선근 박사를 12년 동안이나 모셨지요.
“이선근 박사께서 박정희 대통령의 정신적 스승이었습니다. 3공화국은 문(文)은 이선근, 무(武)는 박정희 대통령이었습니다. 그분과 인연을 맺게 된 게 대학교 1학년 때였습니다.”
— 무작정 찾아갔나요.
“제가 대학 1학년 때 책을 한 권 지었어요.”
— 대학 1학년이 책을?
“《수도(修道)웅변연구》라고, 제 입으로 말하긴 쑥스럽지만 지금도 웅변 관련서 중에서는 고전으로 통합니다. 그 책의 서문을 이효상 전 국회의장께서 써주셨습니다. 이 전 의장은 제가 대구 대륜고를 다닐 때 은사였습니다. 추천사를 유진오 총장, 조영식 박사에게 받았는데 당시 과 주임교수께서 이선근 박사께도 추천사를 받으라고 해 이 박사가 사시던 청파동 집으로 찾아갔지요.”
— 처음 본 사람에게 추천사를 써주던가요.
“그분이 제 책 원고를 한 시간 이상이나 꼼꼼히 읽으시더군요. 그러더니 두 가지를 묻는 겁니다. ‘이군, 죽을 고비를 넘겨본 적이 있는가’와 ‘앞으로 뭘 하고 싶으냐’는 질문이었습니다.”
— 뭐라고 답했습니까.
“제 형제가 모두 11남매였습니다. 그중 6명이 어렸을 때 사망하고 다섯 명이 남았어요. 먹을 것도 없고 입을 것도 부족하고 병에 걸리면 치료할 약도 없던 시절이었습니다. 항상 죽음이 옆에 도사리고 있었지요. 앞으로의 포부를 묻는 질문엔 ‘38선에 학교를 짓고 싶다’고 했지요.”
“38선에 학교를 짓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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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불쑥 교실에 들어갔는데도 학생들이 이돈환 이사장을 반겼다. |
“38선에 학생 숙소를 만들어서 38선을 베개 삼아 통일조국의 꿈을 키우는 인재를 양성하겠다고 했지요.”
— 멋진 대답입니다.
“그날로 이선근 박사님 비서 비슷하게 됐습니다. 무슨 일만 있으면 항상 절 부르시고 행사 때마다 수행하도록 했지요. 이 박사께서 한국웅변학회장을 맡았을 때 김병삼·나석호씨가 부회장이었고 전 학생위원장을 맡았습니다.”
— 이선근 박사가 영남대 총장으로 부임할 때도 함께 가셨지요.
“이 박사께서 부르시더니 본인이 대구 인맥이 전혀 없으니 저보고 도와달라더군요. 제가 고향이 영천입니다. 조금 망설이긴 했습니다. 당시 제가 《중앙웅변계》라는 월간지를 운영하고 있었거든요. 하지만 이 박사님의 간곡한 청을 거절할 수도 없어 따라갔지요. 그러다 12년을 모시게 됐습니다.”
— 그런 이선근 박사를 신군부가 푸대접했지요.
“박정희 대통령의 그림자를 지우는 작업의 일환이었다고 봅니다. 그 중심이 박 대통령의 스승이자 정권의 멘토였던 이 박사님일 수밖에 없었어요. 이 박사님을 한국정신문화연구원 원장직에서 물러나게 했습니다. 이 박사께서는 댁에 칩거하셨고요. 전 처남들이 운영하는 회사를 맡았습니다. 이 박사님께서는 1983년 1월 9일 돌아가셨어요.”
— 한 시대의 종말입니다.
“참 공교로운 게 있어요. 이 박사님 돌아가신 날 박순천 여사께서도 세상을 떴습니다. 이은상, 곽상훈, 박관수 선생님 같은 분들도 비슷한 시기에 타계했어요.”
— 이선근·이은상 선생께선 국립묘지에 나란히 묻히셨지요.
“그 때문에 우스갯소리가 있어요. 두 분이 저세상에서도 하도 토론을 열심히 해 국립묘지가 시끄러울 것이라는. 하하.”
— 이선근 박사를 아직도 잊지 못합니까.
“얼마 전 영남대학교 박물관과 기념관 관계자가 찾아와 인터뷰를 한 적이 있습니다. 이선근 박사가 절 어느 곳이나 데리고 다니면서 하신 말씀이 있어요. ‘자네는 역사의 증인이 돼야 한다’고. 한국정신문화연구원에 ‘하성문고’를 기증했는데 하성(霞城)이 이 박사님의 호입니다. 그 일에도 제가 관여를 했고….”
박정희 대통령, 10·26 보름 전 마지막으로 봤다
— 박정희 대통령도 자주 보셨겠네요.
“뭔가 운명 같은 게 있는지 박 대통령께서 서거하시기 보름 전인 1979년 10월 9일 예고도 없이 정신문화연구원을 방문하셨어요. 갑자기 검은 승용차 2대가 연구원으로 들어오는 겁니다. 차지철 경호실장이 이 박사를 찾는데 하필 이 박사께서 화장실에 가신 겁니다. 원래 노인들이 화장실에 오래 계시잖아요. 진땀이 났지요.”
— 어떻게 시간을 끌었습니까.
“연구원 현관에 있는 전경 사진을 한참 설명하는데 차 실장은 화를 내고…. 어떻게 시간을 흘려보냈는지 허허. 아 참 당시 노태우 전 대통령도 청와대에 있었는데 함께 왔더군요.”
— 전두환 전 대통령과도 면식이 있지요.
“전 전 대통령이 제2 땅굴을 발견한 공로로 5·16민족상을 받았을 때 심사위원장을 하시고 수상자 모임인 오월회 회장도 하신 분이 이선근 박사였습니다. 그런데 불가사의하게도 전 전 대통령 내외와 찍은 사진, 이선근 박사와 성철스님 등이 찍은 사진, 《생활의 발견》을 쓴 임어당 선생이 친필 사인해 준 책, 육영수 여사 친필 편지 등이 없어진 거예요. 어딘가 있을 법도 한데 아직 못 찾았어요.”
— 그런 세월을 보내며 교육계에서 평생을 보냈으니 기억도 많겠습니다.
“제가 전교조에 대해 할 말이 많은데 몇 가지만 말할게요. 전교조가 처음에 타깃으로 삼은 학교가 세 군데 있었어요. 그중 한 학교는 두 손을 들었고, 또 다른 학교는 아예 폐교됐습니다. 우리만 살아남았지요.”
전교조에 ‘만나자’ ‘대화하자’ ‘진상 규명하자’ 먼저 요구
— 비결이 뭡니까.
“제가 서울미고 이사장을 맡고 있지만 원래 ‘이사장’이란 단어에서 상상되는 게 꽤 아름답지 못합니다. 비리(非理)·공금 유용, 이런 게 연상되잖아요. 그렇지만 전 자신이 있었어요. 전교조에서 홈페이지에 ‘서울미고 비리 제보’ 코너를 마련했지만 신고된 것도 없었고요. 그래서 제가 먼저 전교조에 대화하자고 했지요.”
— 대화요?
“제가 전교조에 요구한 건 세 가지였습니다. ‘만나자’ ‘대화하자’ ‘진상을 규명하자’.”
— 그거 전교조의 단골 슬로건 같은데요.
“그랬더니 오히려 그쪽에서 절 슬금슬금 피하더군요. 제가 전교조 본부와 청량리 지부를 찾아갈 정도였습니다. 정면 돌파한 거죠.”
— 우리 교육이 엉망이 됐다는 얘기가 많습니다.
“엉망이 되긴 했지만 사실 교육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습니다. 전 저출산·고령화·일자리 창출 모두를 교육으로 풀 수 있다고 봅니다.”
— 지나친 교육예찬 같습니다.
“교육이 사실 어려운 분야입니다. 교육 문제를 풀겠다고 한 대통령 중에 정말 교육 문제를 해결한 분은 한 명도 없습니다. 이유가 있어요. 지금까지 교육 문제를 관료와 정치권이 다뤄왔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되면 교육을 규제·통제의 시각으로밖에 볼 수 없게 됩니다. 원래는 현장에서 교육인들이 중심이 돼 풀어야 하는데 주인공이 바뀐 거죠.”
— 관료나 정치권은 엉뚱한 해법을 내놓는 게 많죠.
“일례로 학교폭력 문제를 들어볼까요? 행정자치부가 학교폭력에 대해 내놓은 대책이라는 게 고작 ‘처벌 강화’입니다. 교육이 처벌만으로 된다면 학생들 두들겨 패면 된다는 말인가요? 이런 대책이란 게 나오는 근원을 살펴보면 학교나 학생을 규제의 대상으로만 보는 뿌리깊은 인식 때문이지요.”
— 교육당국에 실망하신 게 많은 것 같습니다.
“미술전문고등학교는 우리나라에 서울미고가 유일합니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 생겼어요. 서울시 교육청에서 보내온 공문에는 ‘특수목적고’라고 해놓고 실제론 일반계 고등학교로 분류한 겁니다. 참 이상하잖아요. 일반계 고등학교면 시설비나 인건비를 지원해야 되는데 지원은 안 하거든요.”
— 그래서 어떻게 하셨습니까.
“제가 따지니 당시 서울시 부교육감도 사석에선 ‘이 이사장 말이 옳다’고 했는데 바뀌진 않은 거예요. 부지가 좁다는 이유 하나 때문에. 그런 일이 한두 번이 아니었습니다. 교명(校名)을 바꿀 때도 해프닝이 있었어요.”
— 무슨 해프닝인가요.
“서울예림미술학교에서 서울미술고등학교로 바꾸는데 석 달을 미루는 거예요. 제가 따지자 당시 담당자들이 협박까지 하는데… 전 굴하지 않았어요. 저희 학교 영문명이 ‘Seoul Art High School’입니다. 교육청에서 절대 그 이름을 쓰지 말라고 했어요.”
— 서울예고는 어떻게 씁니까.
“하하. 서울예고는 ‘Seoul Arts High School’입니다. 제가 그 이상은 말 안 하겠습니다.”
— 이 이사장의 투지는 인정하지만 많은 국민이 교육계, 특히 사학(私學)은 비리의 온상처럼 보고 있습니다.
“저도 그걸 느낍니다. 그렇게 된 까닭이 있어요. 교육은 긍정과 신뢰의 상징이 돼야 하는데 부정과 불신의 대명사가 됐기 때문입니다. 사실 모든 문제를 학교에서 풀 수 있는데 오히려 학교가 문제의 근원처럼 된 것은 학교 내의 일부 급진세력이 부정·불신·분열을 조장했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교육에는 여전히 희망이 있습니다.”
사회의 여러 문제, 교육으로 대부분 풀 수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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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이 이돈환 이사장 부부를 만났을 때의 사진이다. |
“정부가 가장 적은 돈을 들여서 가장 효과를 낼 수 있는 곳이 바로 학교입니다. 일례로 우리 학교 자랑 좀 해볼까요?”
— 해보십시오.
“서울미고에서는 기간제 교사를 정규직 교사로 바꾸고 있지요. 작년에 6명의 정교사를 채용했고 올해도 5명을 뽑습니다. 내년에도 4명을 더 충원할 예정이고요. 전 그분들에게 ‘1인 1저서’를 내고 10년 안에 박사 학위를 받으라고 강조합니다. 교사가 성장해야 학생들도 성장하기 때문입니다.”
— 제자리걸음만 하는 교사보다는 발전하는 교사가 아이들에게 모범이 되겠지요.
“그건 제 경험 때문이기도 해요. 제 중학교 때 은사 한 분은 훗날 경북대 대학원장이 되셨어요. 고교 때 은사 한 분은 삼성전자의 사장이 되셨고요. 그분들의 발전을 보며 저도 잘해야겠다고 마음먹었습니다. 사실 이런 게 바로 청년 일자리와 관계되는 겁니다.”
— 무슨 말이신지.
“전국에서 기간제 교사 줄이고 교육에 대한 인식변화만 있어도 1년에 1만명 이상의 청년 일자리가 제공됩니다. 전 교사를 경제적인 관점에서 봐선 안 된다고 생각해요. 교사 충원을 지금보다 훨씬 늘려야지요. 그런 점에서 우리가 지금 해외에서 하는 새마을운동도 경제적인 접근보다 교육적인 접근을 해야 해요. 그들에게 무슨 건물 한 채 지어주는 것보다 문맹퇴치가 더 중요한 거 아닌가요?”
— 듣고 보니 그럴듯합니다.
“전 초·중·고교에도 총장제를 도입해야 한다고 주장해 왔습니다.”
— 총장과 교장이 어떻게 다릅니까.
“초·중·고별로 연합학교를 만들어 1개 학교는 교장이, 전체 연합학교는 총장이 책임지는 거죠. 도시와 시골학교를 묶는 것도 고려해 볼 만해요. 시골에는 기숙사형 학교를 짓고 도시에는 출퇴근형 학교를 짓는 겁니다. 도시와 시골학교를 계속 교류시키고요. 이리되면 시골의 저출산 문제 또한 자연스레 해결되지요.”
— 저출산이 왜 해결되나요?
“시골학교에 기숙사나 교사용 관사를 지으면 가장 골칫덩어리인 집 문제가 풀립니다. 그럼 젊은 교사들끼리 결혼을 하게 되고 자녀를 낳으니 저출산이 해결되는 거 아닙니까? 도농 간 균형발전도 자연스럽게 이뤄질 테고. 이렇게 하면 결손가정 문제도 풀려요.”
— 결손가정 문제도요?
“결손 부모를 뒀거나 가정환경이 불우한 학생들을 기숙형 학교에 넣는 겁니다. 가정에서 풀지 못하는 문제를 학교에서 대신해 주는 거죠. 그뿐 아니라 노인 일자리 창출도 교육에선 가능합니다.”
— 어떻게요.
“전 퇴직교사들의 노하우가 사장되는 게 너무 안타깝습니다. 그분들이 퇴직하면 주로 사기를 당하는데 그 경륜을 썩히는 게 나라로서도 낭비입니다. 전 ‘교육사’ 제도를 도입해야 한다고 봅니다. 교육사들이 컨설팅하고 학교 운영에 참여하면 얼마나 좋겠어요. 다문화가정 같은 소외계층에도 그분들을 투입할 수 있고요.”
— 그렇지만 교사라는 직업 자체를 정년이 보장되는 ‘철밥통’처럼 여기는 국민들이 많습니다. 이 이사장께서는 스스로의 개발을 요구하지만 현실에 안주하는 교사들도 많지 않습니까.
“그래서 우리 학교에서 만든 게 ‘수업혁신부’라는 겁니다. 교사들에게 자극을 주려고요. 모든 교사가 다 철밥통은 아닙니다. 우리 미술부장인 이장복 선생님이라고 있어요. 그분은 시간강사에서 시작해 기간제 교사를 거쳐 정규직이 된 분입니다. 교사의 5단계를 다 거쳤어요. 그분이 지금도 토요일, 일요일에 빠짐없이 학교에 나와 학생들을 가르칩니다. 제가 걱정이 돼 ‘그러다 집에서 부인이 화내면 어쩌느냐’고 물은 적이 있어요.”
— 뭐라고 하시던가요.
“그분이 정년이 3년 남았는데 교사로 있는 동안 학생들을 위해 모든 걸 바치겠다는 뜻을 가족에게 전했는데 가족도 흔쾌히 동의했대요. 전 이런 분에겐 정년이 불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열정 앞에 나이가 무슨 소용입니까. 그래서 전 이렇게 말해요. 정년(定年)은 있지만 정년(停年)은 없다고요.”
— 혹시 서울미고가 배출한 유명인이 있습니까.
“졸업생이 1만여 명에 육박하는데 가장 성공한 학생은 웹젠 대표인 김동주 대표지요. 학생 때는 그리 두각을 나타내지 못했는데…. 아 참 우리 학교 출신 미스코리아가 6명이나 됩니다. 축구선수 안정환의 부인인 이혜원씨도 서울미고 출신이고요.”
이돈환 이사장은 인터뷰가 끝난 뒤 학교 이곳저곳을 구경시켜 줬다. 풀 한 포기 바위 하나에도 손길이 닿지 않은 곳이 없었다. 그것들을 어루만지며 이사장은 “그때는~” 하며 추억의 편린들을 펼쳐보여줬다. 학생들이 체육수업을 마치고 우르르 교실로 몰려들자 이 이사장의 입가에 할아버지가 손주를 보는 듯한 미소가 번졌다.
며칠 뒤 또 만났을 때 이돈환 이사장은 “그때 이야기하지 않은 부분이 있는데…”라며 또다시 인터뷰를 시작할 기세였다. 이러다간 팔십을 바라보는 그의 인생 전부를 들어야 할 것 같았다. 어지간한 인물들을 다 인터뷰해 봤지만 이토록 끈덕진 이는 없었다. 이게 그가 험난한 사학교육인으로 살아남은 비결인 듯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