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82년부터 20년간 2214경기 출장… 15명의 元年 심판 중 최초
⊙ 프로야구 원년 심판복은 ‘푸른색 모자, 푸른 줄의 상의와 감청색 정장’ 自費 구매
⊙ 1984년 삼성-롯데 7차전 한국시리즈 잊지 못해… 최동원의 ‘한국시리즈 선발 4승’
⊙ 최고 투수는 선동열, 타자는 장효조, 감독은 김성근, 가장 성실한 선수는 이만수
李揆錫
⊙ 66세, 성균관대 정외과 졸업. 경기상고 야구부 감독, 한양대 야구부 코치 역임.
⊙ 아마야구 심판, 한국프로야구협회 심판(1982~ 2001년), KBO 운영위원,
대한야구협회 심판이사·기술이사 역임.
⊙ 프로야구 원년 심판복은 ‘푸른색 모자, 푸른 줄의 상의와 감청색 정장’ 自費 구매
⊙ 1984년 삼성-롯데 7차전 한국시리즈 잊지 못해… 최동원의 ‘한국시리즈 선발 4승’
⊙ 최고 투수는 선동열, 타자는 장효조, 감독은 김성근, 가장 성실한 선수는 이만수
李揆錫
⊙ 66세, 성균관대 정외과 졸업. 경기상고 야구부 감독, 한양대 야구부 코치 역임.
⊙ 아마야구 심판, 한국프로야구협회 심판(1982~ 2001년), KBO 운영위원,
대한야구협회 심판이사·기술이사 역임.
괄괄한 목소리, 호불호가 분명한 불같은 성격 탓에 야구 감독이나 선수들까지도 그의 눈치를 살펴야 했다. 초창기 프로야구는 심판의 무덤이었다. 관중은 자신이 응원하는 팀이 지기라도 하면 심판 탓을 하며 욕설과 쓰레기, 국물이 담긴 컵라면, 오줌 넣은 생수병 등을 던졌다.
이런 야유와 어필을 ‘소신 판정’으로 맞섰던 프로야구 원년 심판 중 한 명이 이규석 전 이사다. 기자는 지난 7월 5일 떡 벌어진 어깨에 부리부리한 눈을 지닌, 포효하는 목소리의 ‘판관’을 서울 강남의 한 카페에서 만났다. 내부가 쩌렁쩌렁 울렸다.
“원년 심판들이 15명인데, 9명은 전임심판, 6명은 지방주재심판이었어요. 충무로 백인천 감독의 형 백인원(작고)씨가 운영하는 양복점에서 심판복을 맞추었는데 푸른색 바지에다 푸른 줄이 들어간 하얀색 상의, 감청색 정장, 푸른색 모자였어요. 색깔을 누가 정했는지 기억이 안 나요. 양복과 보호장구를 모두 자비(自費)로 샀지요.”
이런 말도 했다.
“당시 심판 중에 승용차를 가진 사람이 없어서 고속버스를 타고 전국을 돌아다녔어요. 인천에서 부산까지 갈 때는 10시간이 걸렸어요. 고달팠지. 지방에 내려갈 때는 비용을 아끼려고 심판끼리 숙소를 같이 쓰기도 했고….”
프로야구 출범을 앞두고 일본 심판연수를 다녀온 일도 떠올렸다.
“AFKN에서 본 메이저리그 심판과 달리 일본 프로야구 심판들은 뭔가 달랐어요. 그들의 삼진과 아웃 콜을 보면서 흉내를 많이 냈지요. 관중에게 새로운 볼거리였는지 모르지. 그러나 돌이켜 보면, 운동장에서 심판 보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요. 모두 선수를 보지, 심판은 안 보거든요. 시대가 원해서 그랬는지 모르지만, 지금은 하면 안 돼요. 누가 심판인지 모르는 경기가 심판을 잘 본 경기죠. 안 그래요?”
심판의 우렁차고 굵은 목청은 타고나야만 하는 것일까.
“아뇨. 목이 좀 약했어요. 한번은 목청이 찢어졌어요. 삼성-빙그레전이었는데 1회부터 말이 안 나오는 거야. 그때 삼성 포수가 이만수였는데 ‘말이 안 나오니, 전광판을 보라’고 했어요. 시합이 끝나고 병원에 가니 성대 결절이라는 거야. 창(唱) 하는 사람이 폭포수 아래에 소리 질러 득음하듯이 소리 지르며 며칠 고생하고 나니 목쉬는 일이 없어지더군요.”
관중에게 날린 주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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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99년 8월 18일 잠실 한화-LG전에서 최초 2000경기 출장기록을 세운 이규석 심판(왼쪽 3번째). |
“화가 많이 났거든. 구단 직원들이 그 광경을 보고 뛰어와 사태를 진정시키려고 했어요. 그때 쓰러진 관중이 벌떡 일어나 ‘이규석 심판님. 정말 죄송합니다. 평소 제가 가장 존경하는 심판인데, 오늘 너무 장난을 쳤습니다’ 하며 사과하는 거였어. 하하. 홈팀이 졌을 때 난동을 피우는 이는 대개 암표상들이야. 홈팀이 지면 관객이 줄거든.”
그는 심판 제1조건을 “건방 안 떠는 것”이라고 했다.
“심판이 건방을 떨면 끝이야. 심판도 인간이니 항상 실수할 수가 있어요. 그런데 건방 떨면 실수할 때 관중이나 선수들이 조용히 못 넘어가. 너 잘 걸렸다고 달려들어. 그러나 겸손하면 실수해도 오히려 선수나 감독이 괜찮다고 말해요. 자기가 열심히 하면 관중이나 선수가 제대로 평가해요.”
이규석 전 이사는 “2214경기 중 완벽하게 본 경기는 하나도 없다”고 겸손하게 말했다.
“한 경기에서 주심(루심이 아닌)은 투수가 던진 100여 개의 공을 판정해야 하는데 인간이기에 오차가 있을 수 있고, 오판이 4~5개라면 아주 잘 본 것이라고 할 수 있어요. 그러나 공 하나에 승부가 갈리니 사명감으로 그라운드에 서야 해요. 평소 자기 생활이 느슨해지면, 그러니까 가정에서부터 평탄치 않으면 심판을 잘할 수 없어요. 어제 저녁 부부싸움을 한 심판은 그 생각을 하느라 경기에 집중할 수 없거든. 또 전날 술을 많이 마시면 다음날 졸기도 하지요. 그렇게 되면 한순간에 실수하게 돼요.”
초창기 프로선수들은 ‘기록 만들어 주기’가 심했다고 한다. 1988년 시즌 막판 롯데-MBC 간 잠실경기. 주심을 보는데 이상했다. MBC 김상훈이 타석에 들어서면 롯데 내야진이 뒤로 물러섰다. 김상훈은 평소 안 하던 번트를 여러 번 대서 1루에 살아 나갔다. MBC 투수들도 롯데 선수들에게 스트라이크를 던지지 않았다. 롯데 홍문종은 포볼로 나가면 2, 3루를 훔쳤다. 두 팀이 짜고 기록 만들어 주기를 하는 것이었다. 두 팀 사령탑이 이규석 심판의 얼굴을 애써 외면했다.
“황당하고 화가 많이 났어. 그래서 거꾸로 판정했지요. 그때 MBC 투수가 지금 해설위원 하는 이용철이야. 홍문종이 타석에 들어설 때 원바운드 볼을 던지기에 ‘스트~라이크’라고 외쳐 버렸지. 관중도 손뼉을 쳤어요.”
그는 이런 우스갯소리도 했다.
“감독이나 고참 선수들은 심판 성질 건들이면 안 된다는 것을 아는데, 뭘 모르는 ‘루키’들은 심판을 약 올려요. 아마에서 배운 못된 버릇인가 봐. 바보 같은 짓이지. 한영준(롯데)이 프로에 입단했는데 선동열(기아 감독)과 고려대 동기야. 선동열이 농담으로 ‘내가 한 해만 한영준 밑에 있었어도(한 해 후배만 돼도) 야구 그만둔다’고 할 정도로 독한 놈이거든. 내가 주심을 보는데, 타석에 들어서며 대뜸 ‘그리(그렇게) 심판을 잘 보는교?’ 그래요. 그러곤 혼자서 낄낄 웃어. 이닝 교대할 때 내가 롯데 더그아웃으로 가서 당시 강병철 감독에게 ‘야! 저놈이 내게 얼마나 심판 잘 보느냐고 하는데…’라고 하니까 더그아웃 분위기가 순간 싸늘해져. 한영준이 다음 타석에 들어설 때 내게 ‘무조건 잘못했심더’라고 빌어요. 나중에 들어 보니, 혼이 났다고 해. 루키 버릇을 잡아 주는 것도 심판의 역할이지요.”
‘야구냐, 야바위냐’의 1984년 한국시리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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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82년 3월 프로야구 개막원년 모습. |
롯데를 한국시리즈 파트너로 선택한 삼성은 롯데에 7차전까지 가는 접전 끝에 패하고 말았다. 롯데 최동원 투수는 ‘한국시리즈 선발 4승’이라는 불멸의 기록을 세웠다. 당시 이규석은 1차전과 7차전 주심을 맡았다.
“삼성이 벌 받은 것이지. 7차전 당시 최동원(작고) 투수의 공이 그리 안 좋아 보였어요. 삼성이 다 이긴 경기였어. 삼성 장효조(작고)의 수비 하나와 투수 김일융을 바꾸지 못해서 역전당했지요. 장효조는 그때 스탠드 불빛에 공이 들어갔다고 했어요. 김일융도 지쳤는지 마지막에는 공이 좋지 못했어. 최동원의 믿기지 않은 호투와 ‘공포의 1할 타자’ 유두열의 역전 3점 홈런은 한국 프로야구사의 오점을 최고의 명승부로 연출했지요.”
1984년 한국시리즈 7차전에 그가 심판을 맡게 된 사연도 특이하다. 원래 그 경기는 최고참 심판이 맡아야 했다. 7차전을 앞두고 심판장이 그를 불러 심판을 맡으라고 종용했다. 그는 거부했다. “책임이 막중하고 팀장급이 맡아야 하는 게 관례가 아니냐. 나를 시키는 이유가 뭐냐”고 따졌는데, 이유를 설명해 주지 않았다.
“실은 연봉을 두고 내가 심판장에게 불만이 있었어요. (심판장이) 능력보다 연봉을 적게 주고, 자기 편애하는 사람만 챙기는 거야. 그래서 젊은 객기를 부렸어요.”
결국 7차전에 심판을 맡아 경기를 잘 치렀다. 나중 한 야구기자의 말인즉, “삼성-롯데 양 구단이 경기를 앞두고 심판진 구성을 두고 대립했는데 ‘이규석이라면 좋다’고 묵시적 합의를 봤다”는 것이었다.
이규석 전 이사도 단 한 번 징계를 받은 일이 있다. 1987년 9월 9일 잠실에서 열렸던 빙그레-MBC전이었다. 빙그레 유승안은 1-2로 뒤진 9회 초 1사 이후 좌중간으로 장타를 때렸다. 홈런처럼 보였다. 그러나 타구는 펜스 상단을 맞고 들어왔다. 간신히 2루까지 내달린 유승안이 두 손을 무릎에 대고 허리를 구부린 채 한숨을 쉬는 사이 MBC 김재박이 릴레이한 볼이 유승안을 향했다.
유승안은 기술적으로 공을 헬멧으로 받아쳤다. 공이 1루 쪽으로 데굴데굴 굴렀다. 그 틈에 3루까지 뛰었다. 유승안의 헤딩이 수비방해냐, 김재박의 송구실책이냐를 두고 논란이 일었다.
“저는 1루심이었어요. 유승안이 고개만 살짝 돌려 송구 방향을 틀었는데 애매했어요. 워낙 잘 맞은 타구여서 아웃시키기도 아깝고…. 심판 4명이 합의로 3루의 유승안을 2루로 돌려보냈지요. 누이 좋고 매부 좋은 경기였지만 오심이었어요.”
KBO는 그날 심판 합의에 책임을 묻고 4심 모두에게 벌금 4만원을 부과했다. 그는 “지금 생각해도 말이 안 되는 판정이었다. 나중 유승안에게 ‘고의로 그랬냐’고 물으니 대답이 걸작이었다. ‘그것도 기술인데 뭐 어때요’라는 거였다”고 했다.
名판관의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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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국 메이저리그 심판연수 시절. 왼쪽에서 두 번째가 이규석 심판이다. |
“그때 2루로 뛰던 선수가 서정환(전 해태·삼성 감독)이었을 거야. 아웃 선언을 하면 되는데, 미안한 마음에 세이프를 선언했지요. 당시 대구 《매일신문》이 ‘엉터리’라고 크게 보도했어. 나중 KBO에서 연락이 왔기에 ‘내가 잘못했다’며 징계를 요청했지. 그런데 징계는 받아들여지지 않았어요.”
1996년 10월 한화와 현대의 준플레이오프 경기가 있었다. 그해 유독 현대에 유리하게 비치는 판정이 많았다. 현대의 심판 로비설도 언론에 등장했다. 플레이오프에 현대가 올라가자, 패장 한화 강병철 감독이 “경기는 선수가 하고 심판은 판정만 제대로 봤으면 좋겠다”고 했다. 당시 쌍방울에 있던 김성근 감독도 “가장 큰 문제는 심판이다. 준플레이오프에서 드러났듯이 공정해야 할 심판이 어느 한쪽 편을 든다면 어쩔 도리가 없다”고 했다.
결국 그해 10월 24일 김광철 심판위원장이 포스트 시즌 심판 판정시비에 대한 책임을 지고 사직했다. 이 전 이사의 말이다.
“지금 같으면 당장 옷 벗을 만한 이상한 루머였어요. 그해 한국시리즈에서 김재박 감독의 현대와 김응룡 감독의 해태가 맞붙었어요. 3루심을 보는데 관중이 심판더러 ‘돈을 얼마나 먹었느냐’고 해요. 어찌나 화가 나는지. 현대 쪽 사람들과 접촉조차 안 했는데…. 나중 ‘너만 몰랐다’고 하는 얘기를 하는 이도 있지만…. 말이 안 되는 얘기였어. 지금도 현대 로비설은 없다고 봐요. 심지어 어느 팀에서 심판에게 큰 선물을 주고 TV도 사줬다는데 내가 받은 일이 일절 없는데, 다 거짓말이야.”
그는 심판로비설에 대해 이렇게 매듭을 지었다.
“세상에 비밀이란 게 없습니다. 시간이 가면 다 나옵니다. 살아오며 반성되는 면도 없지 않지만, 양심껏 살았다고 자부해요. 내가 잘못하면 후배를 개망신시키는 일이라고 생각했어. 심판은 오케스트라 지휘자와 같아요. 같은 곡이라도 지휘자에 따라 전혀 다른 곡이 되듯 심판도 경기 흐름에 따라 원만하게 경기를 끌어야 해. 기계적으로 세이프와 아웃을 반복하다가는 경기를 엉망으로 만들 수 있어요.
예를 들어 선동열의 공이 좋을 때 웬만한 타자는 공을 못 쳐요. 그럼, 스트라이크 존을 좀 좁혀 줘야 해. 반면 패전 투수의 공은 스트라이크 존을 넓혀 줘야 해요. 약이 잔뜩 올라 있는 지는 팀에다 빡빡하게 심판을 보면 곤란하지 않겠어요? 승패와 상관없이, 지는 팀이나 이기는 팀이나 다 동의할 수 있게, 경기 흐름을 이끄는 것이 유능한 심판의 역할이지.”
선동열 장명부 장효조 이만수 정영기

“관찰자의 시선으로 본 최고의 투수는 누구냐”의 질문에 단연 선동열 감독을 꼽았다.
“선동열이 메이저리그에 갔다면 무조건 10승은 넘었을 거야. 말할 필요가 없지. 선동열의 전성기가 프로야구 때라면, 아마야구의 전성기는 최동원이었어. 좌완 투수는 한화 구대성이 최고였고, 볼 컨트롤 좋기로는 한용덕(전 한화감독 대행)·이상군(한화 투수코치)이 ‘기계’였어요. 그런데 두 사람보다 뛰어난 이가 일본에서 온 장명부(작고·전 삼미 수퍼스타즈 투수)였어. 원하는 곳에 공을 뿌릴 수 있는 괴물이었지요.”
이런 말도 했다.
“가장 불운한 투수? 왜 있잖아. 빙그레 있다가 삼성 거쳐 롯데 간 친구. 공주고 나와서…. 그래, 노장진. 공은 아주 묵직한데 야구를 안 해. 맨날(매일) 도망가. 기량은 최고지만 운동을 안 해. 삼성에서 잠깐 잘했지만 오래 못 갔어. 참 안타까운 선수였지요.”
타자는 누가 최고인지 물어보았다.
“장효조는 스윙스피드도 빠르고 선구안도 뛰어나 ‘안타제조기’라고 불렸어요. 심판보다 선구안이 좋았어. 언젠가 한번 테스트를 해 봤어요. 바깥쪽에서 약간 빠진 볼을 일부러 스트라이크라 판정했더니 장효조가 살짝 고개를 돌리더군. 내가 ‘그래 약간 빠졌지?’라고 말했어요. 찬스에 강한 타자는 김성한(한화코치)이지요.
장타는 이승엽(삼성)과 장종훈(한화 은퇴) 심정수(삼성 은퇴)인데 대구구장의 담장거리가 짧아 이승엽이 득을 봤다고 하는데, 말이 안 돼. 그런 선수는 없어요. 지금 봐서는 (장래성 있는 홈런타자가) 박병호(넥센) 정도인데, 이승엽의 기록(353개 홈런·7월 6일 현재)을 깨긴 어렵고, 이대호(오릭스)가 한국에 있었으면 모르겠지만…. 그래도 언젠가는 그 기록도 깨질 겁니다. 해외 용병선수? 우즈, 데이비스, 호세 정도가 떠올라. 우즈는 참 좋은 선수였지요. 데이비스는 덜렁대고 성질이 지랄 같아서 그렇지 대단했지요.”
그는 “성실하기로 이만수(SK감독), 정영기(전 한화2군 감독)가 최고”라고 했다.
“이만수는 노력으로 따져 대한민국 1등입니다. 누구는 펜으로 밤을 새운다는데, 방망이를 휘두르며 밤을 새워요. 내가 한양대 야구부 코치로 부임하니 김시진(롯데감독)이 3학년, 이만수가 2학년이었어. 당시 한양대 감독이 그를 자꾸 주전에서 빼려고 했는데 나는 그의 성실성을 높이 샀어요. 팀이 원정을 가면 다른 선수들은 들떠서 늦게까지 잠을 못 이루는데 이만수는 밤 10시만 넘으면 코를 드르렁드르렁 골아요. 그러곤 새벽에 일어나 운동을 합니다. 부친이 직업군인이셨는데 아들 둘을 권투선수로 키우려고 일찍부터 새벽운동을 시켰다고 해요. 그런데 운동신경이나 센스가 별로였어. 그걸 연습으로 이겨 낸 거지요.
정영기도 성실하기로 둘째가라면 서럽지. 한번은 타석에 들어서더니 데드볼도 아닌데 갑자기 드러눕는 겁니다. 아무래도 이상해 포수에게 물었더니 ‘안 맞은 것 같다’는 거예요. 의심은 가지만 워낙 성실한 친구라 1루로 보냈지. 다음 타석 때 다시 들어왔기에 대뜸 ‘너, 야구 그만둬라. 사기나 치고 살아라’고 했지요. 그랬더니 ‘선생님, 죄송합니다’ 하며 비는 거야. 나중에 물어보니 너무 안 맞아서 그랬다는 거야. 딴 놈 같으면 안 속았는데 평소 워낙 성실해서 속은 거지. 지도 얼마나 답답했으면 그랬겠어.”
이규석 전 이사는 이종범(한화코치)을 ‘야구천재’라고 칭했다.
“최고 유격수? 김재박? 제일 잘했던 것은 이종범이야. 최고야. 야수 중에서 그만한 선수는 아직 없어요. 그런데 일본을 잘못 갔어. 일본 가면서 망가졌어요. 그는 그야말로 야구천재야.”
“인마, 같이 먹고살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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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96년 10월 23일 잠실운동장에서 열린 '96프로야구 한국시리즈 현대 유니콘스-해태 타이거스 6차전. 오른쪽 끝이 이규석 심판이다. |
“감독은 항상 선수들과 같이 생활하다 보니 선수들의 작은 변화를 못 읽지만, 심판은 달라요. 가끔 만나니 조금만 변화가 있어도 눈에 띄지요. 더군다나 나는 야구 감독을 경험해 선수들에게 관심이 많았지. 언젠가 OB-롯데 전에서 OB 김형석이 타석에 들어섰어요. 당시 극심한 슬럼프를 겪고 있었어. 내가 봐도 타격폼이 영 아니기에 대뜸 ‘너 그렇게 해서 밥 먹고 살겠냐’고 했어요. 김형석이 ‘아유~ 큰일 났어요. 제가 왜 이러는지 모르겠어요’ 그래요. ‘그러지 말고 배트를 휘두를 때 발 스탠스를 고민해 봐. (발을) 살짝 들었다가 내릴 때 포인트를 맞춰야지’라고 했더니 그 타석에서 홈런을 쳤어. 기가 막혔던지 곁에 있던 포수가 ‘가르쳐 주면 어떻게 해요? 저도 가르쳐 주세요’ 하며 볼멘소리를 해. 내가 그랬죠. ‘인마, 같이 먹고살아’.”
감독 얘기를 해 달라고 했더니 말을 아꼈다.
“심판들이 해태 시절 김응룡 감독(현 한화감독) 눈치를 봤어요. 지금은 안 통했겠지만, 그땐 통했어. 김 감독이 만만한 심판을 흔들어 어떻게 해서든 경기를 유리하게 만들려고…, 관중하고 합세해서 하니 심판은 위축될 수밖에 없겠지요. 좌우지간 해태가 심판 덕을 좀 봤지.
김성근 고양원더스 감독은 시대를 앞서간 감독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에게 미움을 샀어요. 항상 공부하는 책벌레인데, 일본 선진야구를 국내에 소개했다고 봐요. 다른 국내 구단들이 김 감독을 뒤따라가지 못해, 욕하면서 그의 야구를 다 배웠어. 특별한 감독이었고 우리나라 최고 감독이 아닐까요.”
요즘 프로야구는 신출내기 감독 LG 김기태·넥센 염경엽 감독의 돌풍이 매섭다. 현재 2위와 3위를 엎치락뒤치락하고 있다.
“요즘 염경엽·김기태 감독 보고 다들 의외라고 하는데, 나는 선수 시절부터 지켜봐 잘 알아요. 충분히 자질과 능력을 갖추고 있는 분들입니다. 인품도 뛰어나고 주위 분위기를 잘 맞추고 (선수들의 장점을) 이끌어 내는 능력을 갖췄어요. 또 그런 염경엽 감독을 발탁한 넥센의 이창석 단장도 대단한 사람이지. 모든 것이 인사가 만사 아니겠어요? 돌풍에는 다 이유가 있고, 세상에는 그냥 되는 것이 없어. 조직의 리더라면 그 내부를 들여다봐야 합니다.”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팀이 있냐고 물었더니 한참을 빙빙 돌려 말하더니 ‘LG트윈스’라고 고백했다.
“나도 사람이니까, 어느 팀이 이겼으면… 하는 생각을 가지고 있어요. 하지만 엄청 자제했어요. 본분을 잊지 않으려 노력하지만 좋아하는 마음이야 있지. 그리고 그 마음이 항상 약자 쪽으로 가요. 사람 심리가 다 그렇잖아.”
이규석 전 이사는 현업에서 물러나고 한 번도 야구장을 찾지 않았다고 한다. “후배들이 부담을 느낄까 봐 일부러 찾지 않았다”고 했지만, 평생을 그라운드에서 호령하던 ‘판관’의 추억에 마음이 울컥할까 봐 그랬다는 것이었다.
“그래도 야구를 집에서 매일 지켜봐요, 하루도 거르지 않고. 요즘 인터넷 포털사이트에 8개 팀이 전국 4개 구장에서 벌이는 경기를 모두 보여주잖아. 4개 구장을 한 TV 모니터에 밭 전(田)자 모양으로 틀어놓고 보지요. 야구를 봐야 살맛이 나거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