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외 포커스

일본의 保守정치에 대한 異色분석

일본의 내셔널리즘은 ‘大衆 엔터테인먼트 내셔널리즘’

  • 글 : 유민호 퍼시픽21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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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시마 유키오, 이시하라 신타로, 하시모토 도루는 ‘정치인’이기에 앞서 大衆의 욕구를
    잘 포착하는 엔터테이너
⊙ 엔터테인먼트를 통해 大衆의 마음을 먼저 사로잡은 후 정치적 메시지 전달
⊙ 명문가 출신인 아베 총리는 부인이 바(bar)에서 대중과 소통

劉敏鎬
⊙ 52세. 연세대 정치외교학과 졸업. 일본 마쓰시타 정경숙 15기.
⊙ SBS 보도국 기자, 일본 경제산업성 연구소(RIETI) 연구원.
⊙ 現 워싱턴 프로그램 디렉터, 딕 모리스 선거컨설턴트 아시아 담당 소장.
‘내셔널리즘’을 내세우는 일본의 보수주의자들. 미시마 유키오, 이시하라 신타로, 하시모토 도루, 아베 신조.
‘제3극(極)에서 제2극으로!’
 
  지난 1월 28일 일본 언론이 전한 새로운 정국(政局) 현황이다. ‘제3극’이라는 말은 지난해 일본 총선 기간 중 나온 유행어 중 하나이다. 오사카(大阪) 시장 하시모토 도루(橋下徹)가 만들어 낸 말로, 자민당과 민주당을 뛰어넘는 ‘제3의 정치연대’라는 의미를 갖고 있다.
 
  일본유신회(日本維新の會)가 바로 제3극의 핵이다. 하시모토와 이시하라 신타로(石原愼太郞) 전(前) 도쿄도(東京都) 지사가 공동대표로 있는 정당이다. ‘3극’이라는 말은 기존의 정당에 실망한 사람들을 위한 대안(代案)정당이라는 의미이다. 하시모토의 제3극론은 선거에서 기대 이상의 결과를 만들어 냈다. 57석을 얻어 집권여당에서 제2당으로 추락한 민주당에 이은 54석을 차지한 것이다. 지역정당으로 출발한 일본유신회가 창당 1년 만에 전 집권여당을 3석차로 바짝 따라잡은 것이다. 제2극이란 말은 하시모토의 발언을 기초로 일본 신문이 만들어 낸 올해의 신조어(新造語)이다.
 
  하시모토 도루는 “결코 일본유신회 존속에 매달리지는 않을 것”이라면서 “자민당의 대항세력으로서 일본유신회, 모두의 당(みんなの), 민주당 일부를 연결하는 신당(新黨)창당이야말로 일본을 위하는 길이라 생각한다”고 말하고 있다.
 
  올 여름 있을 참의원(參議員) 선거를 앞두고, 민주당 내 보수계의원과 연합해서 집권여당에 맞서 싸우겠다는 것이 하시모토의 생각이다. 어느 틈엔가 하시모토는 여당인 제1극(자민당)에 맞선 제2극의 대표주자로 올라서 있다.
 
 
  右翼, 保守, 내셔널리스트
 
  한국인 입장에서 볼 때 ‘제2극론’은 ‘그 나물에 그 밥’이란 느낌이 든다. 아베 신조(阿倍晉三) 총리가 이끄는 제1극 자민당과 제2극으로 부상(浮上)한 일본유신회의 역사관과 세계관은 대동소이(大同小異)하다. 국내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이나 평가가 다를 뿐, 한국과 같은 주변국에 대한 정책이나 역사관은 별로 다르지 않다. 독도영유권, 일본군위안부, 역사교과서와 같은 문제들의 경우, 누가 더 큰 목소리를 내느냐가 다를 뿐이다. 제1극과 제2극의 한반도와 중국에 대한 입장은 내셔널리즘(Nationalism)을 기반으로 하고 있다.
 
  일본에서 내셔널리즘은 한국 신문방송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우익(右翼)’이란 용어를 대치하는 개념이다. 잘 알려져 있듯이, 내셔널리즘은 국가주의(國家主義), 국수주의(國粹主義), 민족주의, 국민주의의 어딘가에 위치한 개념이다.
 
  《월간조선》 2012년 9월호에서도 밝혔지만, 일본에서 보수(保守)와 우익은 전혀 다른 의미로 사용된다. 우익은 보수를 명분으로 하면서 ‘돈’에 눈독을 들이는 사이비 정치단체이다. 조폭(組暴)집단이라 보면 된다. 정치적 슬로건 뒤에서 탈법(脫法)과 비행(非行)을 저지르는 야쿠자(ヤクザ) 조직이다.
 
  일본인은 이시하라 신타로 지사를 극우(極右)라든가 우익의 범주에 있는 인물로 보지 않고, 보수주의를 대표하는 내셔널리스트라고 생각한다. 일본 정치의 우경화(右傾化)는 ‘내셔널리즘’이란 틀에서 살피는 것이 보다 정확할 것이다.
 
  보는 시각에 따라 다르겠지만 올 여름에 있을 참의원 선거는 일본의 내셔널리즘 열풍을 굳히는 결정타가 될 가능성이 높다. ‘아베 버블’로 일컬어지는 경기부양책이 지속되고, 센카쿠(尖閣·중국명 댜오위다오·釣魚島)열도를 둘러싼 중국과의 긴장관계가 높아질수록 브레이크 없는 내셔널리즘 열풍은 계속될 것이다.
 
 
  아베, 이시하라, 하시모토
 
  참의원 선거에서 제1극과 제2극을 합친 의원 수가 전체 3분의 2를 넘어설 경우, 곧바로 헌법개정에 들어갈 수 있다. 국군을 창설하고, 비핵(非核) 3원칙도 대폭 수정할 전망이다. 과거사와 관련한 망언(妄言)과 같은 ‘말’이나 1회성 퍼포먼스로서의 내셔널리즘이 아니라, ‘행동과 실천’으로서의 일본 내셔널리즘을 구체화할 것이다.
 
  현재 일본 내셔널리즘의 핵심은 크게 세 사람으로 압축된다. 아베 총리, 일본유신회의 공동대표인 하시모토 도루와 이시하라 신타로이다. 이 세 사람은 비슷하면서도 다른 배경을 가졌다. 아베가 귀공자 출신 3세 정치인이라면, 소설가 출신인 이시하라 신타로는 2차 세계대전 전후(前後)와 미군 점령군(GHQ)시대, 고도성장기, 현재의 상황을 전부 경험한 파란만장의 장로(長老)이다. 귀족 피를 이어받은 정치가(아베 총리)와 길바닥에서 막 자란 40대 초 풍운아(하시모토 도루), 그리고 소설적 상상력을 정치에 입식(入植)한 80대 노인이 현재 일본 내셔널리즘의 핵인 것이다.
 
  이들은 총론(總論) 차원에서는 뜻을 같이하지만, 내셔널리즘을 실현하기 위한 각론(各論)에서는 서로 다른 견해를 갖고 있다.
 
  극단적으로 말해 이시하라는 전후(戰後) 잃어버린 일본 내셔널리즘을 복구하기 위해서는 전쟁도 불사할 수 있다는 생각을 갖고 있다. 이 점에서 그는 총리 취임 이후 야스쿠니(靖國)신사 참배에 관한 언급 자체를 자제하고 있는 아베 총리와는 크게 다르다.
 
  이 세 사람의 내셔널리즘 행보를 보면서 필자가 주목한 부분은 ‘서로 얼마나 다른가’ 하는 점이 아니다. 일본 국민을 내셔널리즘 열풍으로 몰아가는 세 사람의 공통분모가 무엇인가 하는 것이 궁금하다.
 
  “도쿄에서 까마귀가 사라졌다고 하더군요!”
 
  워싱턴의 일본인 친구와 함께 식사를 나누던 중 들은 흥미로운 얘기이다. 신문사에서 일하는 일본인 친구는 4년 임기를 마치고 도쿄로 돌아갈 예정이다. 중학교 학생인 자식과 부인을 미리 보낸 뒤 혼자서 ‘자유로운’ 시간을 보내고 있다. 매일 아침 자식과 인터넷 화상(畵像)통화를 하는 것이 ‘살아가는 재미’ 중 하나라고 한다. 까마귀 얘기는 4년 만에 귀국한 자식의 도쿄 관찰기 중 하나이다.
 
 
  이시하라 스타일
 
작년 4월 이시하라 신타로는 미국 헤리티지재단에서 연설하면서 개헌 문제를 언급했다.
  “공원에 가도 까마귀가 2, 3마리 정도 눈에 들어올 뿐, 수십 마리씩 무리를 지어 움직이던 과거의 모습이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고 합니다. 아들은 그게 4년 만에 찾은 도쿄의 첫인상이라고 하더군요.”
 
  도쿄에 가 본 사람은 알겠지만, 기분 나쁜 울음소리와 함께 떼로 몰려다니며 도시 전체를 뒤덮는 까마귀떼는 도쿄의 첫 이미지 중 하나였다.
 
  “어떻게 까마귀가 사라졌나요?”
 
  “이시하라 도쿄도 전 지사의 노력 때문이겠지요! 까마귀를 보면서 느꼈는데, 그 사람 대중(大衆)의 마음을 참 잘 읽는 정치가입니다.”
 
  “까마귀와 대중, 그리고 이시하라?”
 
  일본인 친구의 분석이 흥미롭다는 생각이 들었다. 결코 이시하라를 고운 눈으로 볼 수 없는, 일본 최대의 야당지 신문기자인데도 칭찬에 가까운 말을 던지는 것도 특이했다. 대중의 마음을 읽는다는 게 무슨 의미인지 물어봤다.
 
  “까마귀 박멸은, 해도 그만 안 해도 그만입니다. 아무도 주목하지 않는 행정입니다. 너무 열심히 하면 환경이나 동물보호단체로부터 반발만 불러일으키기 십상이지요. 그러나 도쿄 도민(都民) 모두가 지저분하고 기분 나쁘게 여기는 것이 까마귀입니다. 눈에 확 뜨이는 것은 아니지만 도쿄 도민들이 평소에 괴롭게 생각하는 문제를 보이지 않게 해결하는 능력, 그것이 바로 대중을 다루는 이시하라의 특출한 능력입니다.
 
  대중은 큰 이슈에 흥분하기도 하지만, 아주 작은 부분에 대해서도 감동합니다. 미국에 대해 ‘노(No)라고 말할 수 있는 일본’이라고 큰소리를 치기도 하지만, 거꾸로 대중의 가려운 부분을 찾아서 소리 소문 없이 해결하는 것이 이시하라 스타일의 정치입니다.”
 
 
  ‘國民’이 아니라 ‘大衆’
 
  한국에서 이시하라는 국수주의의 거두(巨頭), 망언 제조기, 역사를 모르는 파렴치한, 중국과 전쟁도 불사하자는 소(小)영웅주의자 정도로 알려져 있다.
 
  일본인들은 그를 어떻게 생각할까? 시각에 따라 다르겠지만, ‘안심하고 일을 맡길 수 있는 매력적인 인물’이란 것이 이시하라에 대한 일본인들의 일반적인 평가다. 문학가로서의 뛰어난 상상력과 함께, 일본의 가치와 일본인의 마음을 가장 잘 이해하는 ‘어른’이라는 것이다. 지난 대선(大選)기간 중에 한국민이 박근혜 후보자에게 가졌던 심정과 비슷하지 않을까 싶다.
 
  ‘국민(인민·시민)으로서의 일본인’이 아닌, ‘대중(大衆)으로서의 일본인’의 속성을 잘 알고 있다는 점이 이시하라의 가장 큰 장점이다.
 
  국민·인민·민중·시민이란 말은 이데올로기를 내포하고 있다. 대중은 어떨까? 대중문화·대중소설·대중가요·대중식당 같은 단어가 떠오른다. 바람 따라 줏대 없이 흔들리는, 무개념 무의식의 집단이 바로 대중이다.
 
  이시하라는 거창하게 ‘국민’이나 ‘민족’을 앞세우며 내셔널리즘을 외치는 사람이 아니라, 대중지향적인 엔터테이너(Entertainer)다. 대중으로부터의 인기를 기반으로 정치적 메시지를 전한다. 정치적 메시지를 던지면서 세를 확장하는 포퓰리즘 정치가와 순서가 다르다.
 
  일본인들이 보는 이시하라의 이미지 중 하나로, ‘이시하라 군단(石原軍)’을 빼놓을 수 없다. 이시하라 군단은 ‘이시하라 프로모션’ 소속 연예인들을 의미한다. ‘이시하라 프로모션’은 이시하라의 동생인 이시하라 유지로(石原裕次)가 세운 연계기획사이다. 1987년 사망한 이시하라 유지로는 일본인들이 가장 아끼는 배우 중 한 명이다. 일본인들은 이시하라 신타로를 ‘이시하라 군단’의 총사령관으로 여기고 있다.
 
  ‘이시하라 프로모션’은 50년 역사를 가진, 일본 연예 프로덕션사의 대형(大兄)에 해당하는 곳이다. 이시하라 유지로가 죽은 뒤 대표 자리를 이은 와타리 데쓰야(渡哲也), 형사반장으로 잘 나오는 다치 히로시(ひろし), 미남 배우의 대명사인 간다 마사키(神田正輝) 같은 최정상급 배우 10여 명을 중심으로 한 정예 프로덕션이다. 이미지로 보자면, 1970년대 한국의 남우(男優)를 대표하는 남궁원·장동휘 같은 성격의 연예인 집산지이다. 장년층만이 아니라, 2030세대의 연예인도 꾸준히 키워서 한 세대 뒤를 준비하는 곳이다.
 
  이시하라 신타로는 이시하라 군단의 명예회장이다. 유지로의 ‘이시하라 프로모션’도 형인 이시하라의 경제적 도움으로 만들어졌다. 유지로의 영화 데뷔도 형의 도움과 지원 덕분에 가능했다. 이시하라 신타로를 일약 문단의 스타로 만들어 준 소설 《태양의 계절》(太陽の季節)을 영화화하면서 주인공 역으로 유지로가 발탁돼 정상급 배우로 올라섰기 때문이다. 이시하라는 당시 영화감독으로부터 동생을 주인공으로 발탁한다는 약속을 받고 소설 판권을 넘겼다고 한다.
 
 
  戰後 청년 대중의 욕구를 정확히 포착
 
인기 배우이자 가수였던 이시하라 유지로. 그가 남긴 ‘이시하라 프로모션’ 소속 연예인들은 이시하라 신타로에게 큰 힘이 되고 있다.
  이시하라 유지로가 ‘이시하라 프로모션’을 만든 것은 1963년이다. 당시만 해도 연예전문 프로덕션은 그 누구도 생각하지 못했던 미개척 분야였다. 1963년은 일본에서 텔레비전이 활성화하기 시작하던 때이다. 소설가 이시하라 신타로는 글만이 아니라, 영상물을 통한 대중과의 만남에 특히 주목했다. 그가 동생에게 ‘이시하라 프로모션’을 만들라고 권유한 것은 텔레비전이 ‘대중의 시대’를 가속화시킬 것이라는 사실을 누구보다도 일찍 감지했기 때문이다.
 
  이시하라의 소설 《태양의 계절》은 ‘통속적이고도 욕구지향적인’ 부분을 강조한 3류 러브스토리다. 젊은이들 사이의 성(性)관계를 암시하는 표현이나, 광적(狂的)이고 파괴적인 사랑에 관한 묘사가 많다. 그러나 이시하라의 소설은 패전(敗戰)의식에 젖어 있던 전후의 일본인에게는 ‘신선한 충격’으로 와 닿았다. 쇼난(湘南) 해변을 배경으로 한 청춘의 러브스토리가 새로운 시대로 이어지는 희망과 정열로 받아들여졌다. 바닷가에서 사랑을 속삭이는 ‘태양족(太陽族)’이란 신(新)일본인도 탄생했다.
 
  이시하라는 전후의 일본인, 정확히 말해 대중이 원하는 욕구와 희망이 무엇인지를 정확히 알고 소설을 쓴 것이다. 그는 전쟁, 역사, 죽음, 가난과 같은 어둡고 고독한 얘기가 아니라, 쾌락과 서커스를 원하는 대중의 심리를 꿰뚫어 보고 있었다. 《태양의 계절》로 24살의 이시하라는 일본의 대표적인 문학상인 아쿠다가와(芥川) 상을 수상했다.
 
  일본인이 이시하라를 ‘이시하라 군단’ 총사령관으로 보는 이유는 선거 때마다 ‘이시하라 프로모션’ 소속 연예인들이 그의 주위를 둘러싸기 때문이다. 이들은 그냥 이시하라와 눈만 맞추고 가는 것이 아니라, 선거운동 기간 줄곧 따라다니면서 열렬히 지원유세를 한다.
 
  10여 년 전 필자는 이시하라의 도쿄도 지사 선거운동을 보러 간 적이 있다. 텔레비전에서 보던 대스타 10여 명이 무대 위에 줄을 지어 서서, ‘예의 바르게’ 이시하라의 연설을 듣고 있는 장면이 인상 깊었다. 모두 멋을 부린 정장 차림이기 때문에, 선거 유세장이 아니라 고급 파티장에 온 듯한 느낌이 들었다. 이들이 나오는 날, 유세장에 모이는 사람들은 1000명은 보통이고, 많으면 1만명에까지 이른다. 청중은 남녀노소(男女老少) 할 것 없이 다양하다.
 
  이시하라 군단 소속 연예인들은 평소에 정치에 대한 얘기를 전혀 하지 않는 사람들이다. 이들은 “정치 때문이 아니라 죽은 이시하라 유지로에 대한 우정과 그 형에 대한 예우로 유세장을 찾았다”고 말한다. 정치가로서가 아니라 인간으로서 이시하라를 믿고 지지한다는 의미다. 이들은 앞장서서 이시하라 지지를 호소하지도 않는다.
 
  이시하라는 도쿄도 지사 선거에서 항상 압도적인 표를 얻으면서 당선됐다. 도쿄 도민의 절대적인 지지는 바로 ‘이시하라 군단’이 보여주는 의리와 인간미와도 직접적인 관계가 있다. 이시하라 유지로의 형 이시하라 신타로를 보면서, 일본 사회에서 잊혀 가는 형제애(兄弟愛) 가족애(家族愛) 조직 내 의리와 정(情)을 재발견하는 것이다.
 
  이시하라의 내셔널리즘에 기초한 발언은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시작된다. 내셔널리즘을 통해 사람을 모으는 것이 아니다.
 
  사실 사람들은 이시하라가 무슨 말을 하는지 잘 모른다. 이시하라의 카리스마와 ‘이시하라 프로모션’ 소속 연예인들에게 정신이 팔려 있을 뿐, 이시하라의 사상이나 발언에는 크게 귀를 기울이지 않는다. 다만 무슨 말을 해도 긍정적으로 받아들일 뿐이다. 대스타에게 영혼을 팔아넘긴 대중의 입장에서 이시하라를 바라보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이시하라는 정치가 이전에 대중이 열광하는 대스타, 즉 엔터테이너라는 사실이다.
 
 
  미시마, 천황으로부터 銀시계 수상
 
  현대 일본 내셔널리즘의 화신(化身)이자 출발점인 미시마 유키오(三島由紀夫) 역시 대중을 상대로 한 엔터테이너라는 점에서 이시하라 신타로와 유사하다. 미시마는 이시하라의 7살 위 선배이자 친구이다.
 
  잘 알려져 있듯이 미시마는 1970년 11월 25일 할복자살 사건으로 전(全)일본을 충격으로 몰아넣은 인물이다. 그는 일본에 첫 번째 노벨문학상을 안겨준 《설국》(雪國)의 저자 가와바타 야스나리(川端康成)에 버금가는 작가이다.
 
  미시마는 평민 출신이면서도 황족(皇族)이 공부하는 학습원고등학교에 들어가 수석으로 졸업했다. 그의 할아버지는 농민 출신으로 도쿄대 법학부에 들어간 입지전적(立志傳的)인 인물이다. 사무라이 집안에서 태어난 미시마의 할머니는 미시마의 교육에 절대적인 영향을 주었다.
 
  미시마는 1944년 학습원고등학교를 수석 졸업, 천황으로부터 은(銀)시계를 상으로 받았다. 이후 할아버지와 아버지의 뒤를 이어 도쿄대 법학부로 진학했다. 1945년 1월 학도병으로 나가 전투비행기 제작공장에서 노동자로 일하기도 했다.
 
  미시마는 도쿄대를 졸업한 후, 일본 관료의 최고봉인 대장성(大藏省·재무부)에 들어갔다. 그는 관료로 일하면서 동성애(同性愛)를 다룬 소설 《가면의 고백》(面の告白)을 내놓아 폭발적인 인기를 누렸다. 이후 그는 《풍요의 바다》(豊饒の海) 《금각사》(金閣寺) 등 수많은 작품을 발표했다.
 
  미시마가 자기의 소설을 통해 다룬 주제는 ‘미(美)’이다. ‘일본인의 가치와 감각을 통한, 일본인이 사랑하는 미’가 미시마 소설의 키워드이다. 미시마라는 필명 자체도 후지산(富士山)이 보이는 시즈오카(靜岡)현의 작은 섬, 미시마(三島)에서 따온 것이다.
 
 
  영화처럼 살다간 인생
 
  그러나 일본인들이 사랑하던 작가는 어느날 갑자기 세상에서 사라졌다. 그의 나이 45세 때였다.
 
  미시마는 이날 도쿄 이치가야(市ヶ谷)에 있는 육상자위대 동부방면총감부 총감실을 방문해 총감과 대화를 나누다가 자신을 따르던 대원들을 동원해 총감실 옆 베란다로 밀고 나갔다. 비상이 걸리면서 자위대원들이 몰려들자, 미시마는 프랑스 디자이너 지방시(Givenchy)가 디자인한 군복을 입고 연설을 시작했다.
 
  “자위대가 추구하는 건국의 본업은 무엇인가? 일본을 지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일본을 지키는 것은 무엇인가? 천황을 중심으로 역사와 전통을 지키는 것이다!”
 
  쿠데타를 통해서라도 천황을 지지하는 구(舊) 일본헌법으로 되돌아가자는 것이 미시마의 메시지였다. 연설 직후 미시마는 할복(割腹)을 감행했다. 목과 하체로 이분(二分)된 미시마의 시신은 부하들에 의해 수습됐다.
 
  문학적으로 볼 때 미시마의 죽음은, 차가운 봄바람과 함께 한순간에 사라지는 벚꽃에 비유된다. 가장 아름다울 때 세상에서 사라지는 것이 미시마가 생각하는 ‘미’의 가치이자 의미이다.
 
  미시마의 ‘극적(極的)’인 인생은, 평소에 보여준 ‘극적(劇的)’인 삶을 통해 예견됐다고 볼 수 있다. 미시마는 문학가인 동시에 연예인, 나아가 대중예술가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미시마는 자신이 쓴 소설을 기반으로 ‘일본 내셔널리스트들의 바이블’로 여겨지는 영화 <우국(憂國)>을 만들기도 했다. <우국>은 1936년 위관(尉官)급 청년장교들이 일으켰던 2·26사건 당시 자결한 청년장교 부부의 이야기를 소재로 하고 있다. 미시마는 이 영화의 감독·주연·각색·미술·의상 등을 혼자서 담당했다. 영화 <우국> 속에서 할복 자결하는 주인공 다케야마 신지(武山信二) 중위 역할도 미시마 자신이 맡았다. 다케야마=미시마인 셈이다.
 
 
  보디빌더, 베스트 드레서, 劍客
 
미시마 유키오가 훈도시 차림에 일본도를 들고 육체미를 뽐내고 있다.
  미시마는 그때까지 일본 문필가 그 누구도 시도하지 않았던 보디빌딩(Body Building)에도 손을 댔다. 1960년대 당시 보디빌딩은 먹고 할 일 없는 서방 귀족들의 오락 정도로 여겨졌었다. 미시마는 보디빌딩으로 몸을 만든 후, 국부(局部)만 살짝 가린 일본식 속옷 훈도시 차림으로 육체미 잡지에 등장했다. 전후의 궁핍을 극복한 1960년대는 일본인들에게 희망의 시대였다. 근육으로 단련된 벌거벗은 미시마의 모습은 일본 대중의 자신감을 나타내는 초상화이기도 했다.
 
  미시마는 뛰어난 패션 감각을 가진 인물로도 유명했다. 그가 즐겨 입는 양복의 대부분은 프랑스 유명 브랜드사(社)에 직접 주문한 것이다. 미시마는 대중이 탄성을 지를 수 있는 모든 엔터테인먼트에 손을 댔다. 검도 5단인 미시마는 앉은 상태에서 일격에 상대방을 찌르는 ‘이아이(居合)’ 검술을 전파한 인물이기도 하다. 서로 마주 서서 땀을 흘리며 싸우는 ‘신켄쇼부(眞劍勝負)’가 아니라, 숨을 죽이고 눈을 아래로 깔고 앉아 있는 상태에서 단칼에 적을 거꾸러뜨리는 기법이다. 거대한 미국에 맞선 작은 일본인의 일격(一擊)이라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는 검법이다. 훈도시 차림으로 이아이 기법을 보여주는 미시마의 근육질 영상은 영화 <우국> 속의 다케야마의 이미지와 함께 일본 내셔널리즘의 상징으로 남아 있다.
 
  엔터테이너 미시마의 능력은 외국의 대중에게까지 전파됐다. 미시마는 통역사 뺨치는 영어실력을 가졌다. 귀족학교인 학습원 출신인 그는 재학 중 영어와 독어를 기본으로 배웠다. 1960년대 외국인이 도쿄에 오면 먼저 미시마를 찾아갔다. 영어로 영국 BBC에서 사무라이론(論)을 소개한 인물이 미시마이다. 그가 노벨문학상 수상자 후보로 자주 오르내린 것은 외국 미디어와의 친밀한 관계 때문이기도 했다.
 
  이시하라의 경우에서처럼, 대중은 미시마에게 매료되면서 그의 메시지를 듣는 식이었다. 미시마는 자신을 대스타로 받아들이는 대중을 천황의 신민(臣民)으로 되돌리려 한 것이다. 이 또한 ‘엔터테인먼트를 통한 내셔널리즘’이다.
 
 
  탤런트가 된 변호사
 
하시모토 도루 오사카 시장은 TV법률상담 프로그램에 출연하면서 인기를 끌었다.
  오늘날 일본 정계에서 돌풍을 일으키고 있는 하시모토 도루 일본유신회 공동대표는 미시마 유키오, 이시하라 신타로를 잇는 ‘엔터테이너 내셔널리스트’다. 하시모토는 일본인이 좋아하는, 당대에 모든 것을 개척한 인물이다.
 
  야쿠자이던 아버지는 하시모토가 초등학교 2학년 때 자살했다. 하시모토는 홀어머니 밑에서 크면서 어릴 때부터 스스로 돈을 벌어 생활했다. 고등학교 때는 럭비선수로 전국대회에도 참가했다.
 
  와세다대학 정치경제학부에 들어간 하시모토는, 재학 때부터 현재의 부인과 동거(同居)에 들어가 대학생 아버지가 됐다. 때문에 하시모토는 학교공부도 하면서 돈을 버는, 학생과 사회인의 역할을 동시에 해야 했다. 재학시에 가죽점퍼 장사에 손을 댔다가 실패하기도 했다. 이때 자신의 실패 원인을 파헤쳐 가는 과정에서 법(法)을 아는 것이 중요하다고 판단, 법학 공부를 하기 시작했다.
 
  25살이 되던 1994년, 하시모토는 사법시험에 합격했다. 1997년 오사카에서 변호사 개업을 한 하시모토는 지방 변호사로 그칠 수도 있었다. 그러나 하시모토는 탤런트 프로덕션사를 상대로 일하던 중, 본인 스스로가 프로덕션사로 들어갔다. 엔터테인먼트 활동을 통해 일확천금(一攫千金)의 기회를 잡을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일본에서 오사카는 ‘연예인 양성소’라는 이미지가 강한 지역이다. 강한 오사카 사투리로 뭉쳐진 이 지역 출신 연예인끼리의 우의(友誼)도 남다르다. 하시모토는 ‘변호사 자격증을 가진 탤런트’ 신분으로 방송에 출연해 오사카에서 지명도를 높이다가 2003년 도쿄로 진출했다. 변호사라는 직업을 충분히 살릴 수 있는, 니혼(日本)텔레비전의 법률상담 프로그램에 등장한 것이다.
 
 
  “일본은 썩었다”
 
  이 프로그램은 필자도 즐겨 봤는데, 다섯 명의 개성 강한 변호사가 출연해 재미있는 이슈에 대해 법적 해석을 내리는, 법과 코미디를 연결한 인기 프로그램이었다. 머리카락을 갈색으로 염색하고 나왔던 하시모토는 진보적인 법해석을 내리면서 네 명의 선배 변호사들과 싸우는 청년 변호사라는 이미지를 심어 줬다. ‘기득권 세력에 도전하는 청년정치인’이라는 이미지는 이때부터 형성되기 시작한 셈이다.
 
  하시모토는 자신이 젊은 나이지만 다섯 명의 자식을 가진 가장(家長)이란 점을 강조하면서 “다산(多産)이 애국의 첫 출발”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자신의 법해석이 잘못됐다는 지적을 받아도 “자식들을 먹여 살리려면 틀린 법해석을 해서라도 돈을 벌어야 한다”고 대꾸했다. 이 프로그램을 시청하는 일본인들은 ‘젊은 가장(家長) 변호사’ 하시모토의 인간적인 매력에 푹 빠져들었다.
 
  변호사 하시모토는 시사프로그램, 토론회, 문화행사에도 참가하면서 단순히 ‘웃기는 변호사’가 아니라 ‘개혁 일본’에 대한 나름대로의 생각과 주장을 펴는 ‘고민하는 변호사’라는 이미지를 쌓아 갔다. “일본은 썩었다, 지금 고치지 않으면 영원히 어렵다”라는 것이 그의 메시지였다. 하시모토는 니혼텔레비전 법률상담 프로그램을 통해 “일본의 문제는 강자(强者)에 약한 것보다 약자(弱者)에 더 약한 ‘잘못된 미덕(美德)’에 있다”는 식의 논리를 폈다. 그는 “일을 하도록 만드는 것이 아니라, 약자라는 이유로 일을 못하게 하고 도움을 받도록 만드는 곳이 일본”이라고 단언했다.
 
  전국 대상의 텔레비전에 얼굴을 비친 지 4년 만인 2007년 12월 하시모토는 오사카부(府) 지사 선거에 출마해 당선됐다. 이후 그는 쾌도난마(快刀亂麻) 스타일로 일본 정국을 이끄는 제2극의 총사령관에 올라섰다.
 
  하시모토의 독재적인 행정 스타일이나 퍼포먼스 위주 행정을 비난하는 사람도 많다. 그러나 하시모토에게 관심을 가진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미 하시모토에 열광하는 대중으로 변해 버린 상태이다. 그들로서는 하시모토가 무슨 말을 해도 좋다. 미시마나 이시하라와 마찬가지로 그들은 하시모토를 ‘정치가’로 보는 게 아니라 ‘엔터테이너’로 보고 있기 때문이다. 하시모토가 전하는 정치적 메시지는 하시모토라는 대중 엔터테이너가 내놓은 상품 가운데 하나일 뿐이다.
 
  필자는 하시모토 도루의 인기는 좀처럼 사라지지 않을 것이라고 확신한다. 50년 가까운 정치생활 내내 한 번도 실패를 몰랐던 이시하라 신타로를 보면 하시모토의 미래를 읽을 수가 있다. 더욱이 이시하라는 자민당 중진(重鎭)인 아들 이시하라 노부테루(石原伸晃)가 아니라, 자신과 함께 공동대표로 일본유신회를 이끌고 있는 하시모토 도루를 사실상 자신의 ‘정치적 후계자’로 내세운 상태다. 하시모토로서는 이시하라 신타로가 50년간 구축한 팬들도 공유(共有)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아베 부인의 內助
 
2006년 10월 방한 당시 아베 총리 부부가 국립현충원을 참배하고 있다.
  아베 현 일본 총리는 근본적으로 대중정치가가 되기 어려운 인물이다. 너무 화려한 배경을 가진 귀공자이기 때문이다. 총리를 역임한 친척들과 중의원(衆議員)으로 11번이나 당선된 장관 출신의 아버지를 비롯해 너무 많은 스타들이 아베 주변에 포진해 있다.
 
  대중은 질투심에 불타는 존재들이다. 특별히 능력도 없어 보이는데, 가족의 후광으로 승승장구하는 사람에 대한 느낌은 ‘결코’ 긍정적이지 않다. 아베 총리도 그런 범주에 들어가는 인물이다. 아베 총리는 미시마, 이시하라, 하시모토로 이어지는 ‘자기 개발형’ 엔터테이너의 카리스마를 따라잡을 수 없다.
 
  이런 한계를 가진 아베 총리지만, 대중과의 소통을 위해 나름대로 최선을 다하고 있다. 한국 언론에도 보도됐지만, 아베 총리의 부인 아키에(昭惠) 여사는 자신의 바(bar)를 갖고 있다. 이 바는 주변 사람들과 술도 마시면서 얘기를 나눌 수 있는 공간이다. 한국 언론은 ‘자신의 바에서 술에 취한 총리 부인’이란 식의 부정적인 기사를 냈지만, 일본인은 다르게 생각한다.
 
  현대 일본 여성은 ‘양처(良妻)’로서의 역할을 반대한다. 교육수준이 높을수록 남편과 따로 논다. 그러나 아키에 여사는 ‘남편을 돕는 전통적인 양처’라는 이미지를 만들어 냈다. 그렇다고 집안에서 식사를 준비하고 청소를 하는 양처는 아니다. 바에 앉아 대중과 호흡하는 것을 즐기는, 자기 세계를 가진 현대판 양처이다. 남편인 아베 총리는 술 한 잔 못 마시는 약골(弱骨)이지만, 부인은 남편 지지자들과 어울려 술에 취하기까지 한다. 일본 대중이 들으면 감동할 만한 ‘미담(美談)’이다.
 
  아키에 여사가 한류(韓流)를 사랑한다느니, 달라이 라마를 존경한다느니 하는 얘기도 대중을 상대로 한 퍼포먼스라고 보면 된다. 아베 총리가 역대 총리 부부 가운데 처음으로 부인의 손을 잡고 함께 비행기 트랩에서 내리는 장면을 연출했던 것도 대중을 염두에 둔 엔터테인먼트라고 할 수 있다.
 
  내셔널리즘의 특징 중 하나는 ‘질풍노도(疾風怒濤)’에 있다. 하나로 뭉쳐져서 무조건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다. 내셔널리즘은 논리나 이성(理性)이 아니다. 심각하고 복잡한 얘기 이전에 엔터테인먼트를 통해 대중을 모으고, 이어 내셔널리즘으로 나가는 것이 일본 정치의 특징 중 하나다.
 
  현재 상황을 보면 할복자결한 미시마에 이어, 이시하라 신타로, 아베 신조, 하시모토 도루로 연결되는 엔터테이너에 의한 일본의 ‘대중 내셔널리즘’은 당분간 지속될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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