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백제의 멸망, 왕건의 등장, 이성계의 조선건국 등 예언
⊙ 혼란기에 민간에 유행하면서 정치 질서의 근본적인 변화를 암시, 민심과 시대 흐름을 전달하는
‘대항언론’ 구실
⊙ 분량이 짧고 압축적이며, 정치 현실에 대한 불만을 담은 내용이 많으며, 매우 빠른 속도로
민중 사이에 퍼져 나간다는 점에서 참요는 트위터와 매우 닮았다
沈慶昊
⊙ 58세. 서울대 국어국문학과 졸업. 일본 교토(京都)대 문학박사.
⊙ 한국학중앙연구원 조교수, 강원대 국어국문학과 조교수 역임. 現 고려대 한문학과 교수.
⊙ 저서 : 《김시습평전》 《한시의 세계》 《한시기행》 《산문기행, 조선의 선비 산길을 가다》
《내면기행, 선인들 묘지명을 스스로 쓰다》 《간찰, 선비의 마음을 읽다》
《나는 어떤 사람인가, 선인들의 자서전》 《한시의 서정과 시인의 마음》
《여행과 동아시아 고전문학》 《국왕의 선물》 《참요》 등.
⊙ 혼란기에 민간에 유행하면서 정치 질서의 근본적인 변화를 암시, 민심과 시대 흐름을 전달하는
‘대항언론’ 구실
⊙ 분량이 짧고 압축적이며, 정치 현실에 대한 불만을 담은 내용이 많으며, 매우 빠른 속도로
민중 사이에 퍼져 나간다는 점에서 참요는 트위터와 매우 닮았다
沈慶昊
⊙ 58세. 서울대 국어국문학과 졸업. 일본 교토(京都)대 문학박사.
⊙ 한국학중앙연구원 조교수, 강원대 국어국문학과 조교수 역임. 現 고려대 한문학과 교수.
⊙ 저서 : 《김시습평전》 《한시의 세계》 《한시기행》 《산문기행, 조선의 선비 산길을 가다》
《내면기행, 선인들 묘지명을 스스로 쓰다》 《간찰, 선비의 마음을 읽다》
《나는 어떤 사람인가, 선인들의 자서전》 《한시의 서정과 시인의 마음》
《여행과 동아시아 고전문학》 《국왕의 선물》 《참요》 등.

- 동학농민운동이 실패로 끝난 후 압송되어 가는 전봉준. <가보세요>는 동학농민운동의 실패를 아쉬워하는 참요다.
이 구전 민요는 창작 시기가 불명확하지만, 육십갑자와 우리말을 중의적(重義的)으로 사용해 동학농민전쟁을 노래한 것으로 해석된다.
흔히 <가보세요(謠)>라고 일컫는다. 이 노래는 농민전쟁이 발발한 갑오년(1894)과 그에 이은 을미(1895)·병신(1896)년을 ‘가보다’ ‘미적대다’ ‘병신’이라는 우리말에 포갬으로써 동학농민전쟁의 좌절을 안타까워하는 민중의 심사를 대변하고 있다.
이렇듯 짧고 간결한 음악적 언어로 현실에 대한 불만과 우려를 표현한 노래를 ‘요(謠)’라 하며, 그중에서도 예언에 대한 믿음을 가리키는 도참(圖讖)사상에 기반한 요를 ‘참요(讖謠)’라 이른다. 그런데 이러한 민중의 노래는 자연스럽게 발생하여 마치 아이들의 언어유희와 같으면서도 미래를 예시하는 기능을 지니기에, 옛사람들은 그것을 동요(童謠)라고 불렀다. 물론 그것들이 모두 아동이 처음 만든 것은 아니다. 오히려 누군가 아동을 통해 유포시키거나 아이들의 노래 형식으로 조작한 경우가 많다. 성호(星湖) 이익(李瀷)은 “귀신이 어린아이에게 붙어서 말을 만들어 내는 것이 동요”라고 했다. 귀신의 존재를 믿어서 그렇게 말한 것이 아니라, 동요의 예지성과 신뢰성을 강조하려고 그렇게 말한 것이다. 사실, 중국과 한국의 문헌을 보면 ‘요’의 생성과 존재 양상은 다음과 같이 매우 다양하다.
격변의 전조
⒜ 본래 민간이나 지식인 사이에 노래가 있었는데, 그 의미를 알 수 없게 된 뒤 역사사건과 결부시켜 변형되고 재해석되는 요
⒝ 후대의 사람들이 만들어 내어 역사사건 뒤에 유포시킨 요
⒞ 하늘의 의지를 드러낸다고 하면서 예언을 하는 요
⒟ 형혹(熒惑·화성)의 움직임에 연관시켜 예언의 주술성이 강화된 요
⒠ 현실 정치나 특정 사건의 흑막을 암시하거나 풍자하는 정치적인 요
⒡ 시대나 군주, 혹은 지방관 등을 송축하는 작위적인 요
이 가운데 ⒜⒝⒞⒟는 참요, ⒠는 정치요, ⒡는 송축요에 해당한다. 혹자는 ⒜⒝⒞⒟와 ⒠를 모두 참요라고도 부른다.
본래 좁은 의미의 참요는 ⒟만을 가리킨다. 참요는 도참사상이나 형혹설과 관련이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는 모두 사건발생을 예언하거나 사건발생을 예언했다고 간주되는 노래로서, 그것들을 넓은 의미의 참요라고 불러도 무방하다. 곧, ⒠는 현실을 풍자하거나 정치적인 성격을 띠지만 예언의 노래로 간주되지 않는다는 점에서는 참요라고 볼 수 없다. 하지만 실제로는 정치요 가운데 그것이 예언의 노래로 간주된 것인지 그렇지 않은지 판별하기 쉽지 않다. 따라서 관점에 따라서는 ⒠의 정치요를 참요로 볼 수도 있는 것이다.
이 글에서는 참요란 개념을 광의의 뜻에서 사용하여, ⒜⒝⒞⒟와 ⒠를 모두 참요라고 부르기로 한다.
우리나라의 참요는 조선 말의 것을 제외하고는 거의 한역(漢譯)된 것이 대부분이어서 정확한 본모습을 파악하기 어렵다. 하지만 왕조의 교체나 외적의 침입, 내란과 같은 큰 사건의 전조(前兆)로서 대개 참요가 발생하여, 그것이 마치 비결(秘訣)처럼 회자되어 왔다.
실제 참요의 생성과 유포 과정을 보면 왕조의 교체나 외적의 침입, 내란과 같은 큰 사건의 전조만이 아니라 정치적 사건의 전조로서도 나타났다. 또한 본래는 예언적 기능이 없었지만 언중에 의해 예언적 기능을 지닌 것으로 간주되었던 노래도 있다. 그러한 것들도 넓은 의미의 참요라고 할 만하다.
참요는 시대의 혼란기와 격변기에 민간에 유행하면서 정치 질서의 근본적인 변화를 암시하는 내용이 많다. 기존 질서가 무너지고 새로운 질서가 들어서려는 징후를 앞장서 포착했기 때문에 ‘공식 언론’이 외면하거나 억압하는 민심과 시대 흐름을 전달하는 ‘대항언론’의 구실도 맡았던 것으로 평가된다. 대체로 분량이 짧고 압축적이며, 정치 현실에 대한 불만을 담은 내용이 많으며, 매우 빠른 속도로 민중 사이에 퍼져 나간다는 점에서 참요는 오늘날의 트위터와 매우 닮았다.
“백제는 둥근달, 신라는 초승달”
《삼국사기》의 〈백제본기〉 의자왕조에 나오는 <백제월륜요>는 의자왕 20년인 660년 사비성에서 나타난 불길한 징조들에 얽힌 설화와 함께 전한다. 노래 가사는 <백제는 둥근 달(百濟同月輪) 신라는 초승달(新羅如新月)>과 같은 식으로 한자시로 번역되어 있다. 다섯 글자로 이루어진 두 시구를 잇댄 연구(聯句)이되, 각 구의 마지막 글자에 운자를 두어 압운을 했다.
의자왕 20년인 660년, 사슴 모양의 개 한 마리가 서쪽으로부터 사비하 언덕에 이르러 왕궁을 향하여 짖더니 잠깐 사이에 사라졌다. 그러자 서울의 개들이 길에 모여 울부짖다가 얼마 후 흩어졌다. 이때 귀신 하나가 궁궐 안으로 들어와, “백제가 망한다. 백제가 망한다”라고 크게 외치고는 땅으로 들어갔다. 왕이 사람을 시켜 파 보게 했더니, 석 자가량의 깊이에 거북이 한 마리가 있었고, 그 등에 <백제는 둥근달, 신라는 초승달>이라는 저 글이 적혀 있었다. 왕이 무당에게 물으니, “둥근달 같다는 것은 가득 찼다는 뜻입니다. 가득 차면 기웁니다. 초승달 같다는 것은 아직 차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차지 않았으면 가득 차게 됩니다”라고 대답했다. 왕은 화가 나서 그를 죽였다. 그러자 다른 사람이 말했다. “둥근달 같다는 것은 왕성하다는 것이요, 초승달 같다는 것은 미약하다는 것입니다. 아마 우리나라는 왕성하게 되고 신라는 점차 미약해진다는 뜻일까 합니다.” 왕이 기뻐했다.
무왕의 뒤를 이은 의자왕은 초반에는 여러 개혁정치를 시행했다. 재위 19년인 659년에는 군사를 보내 신라의 독산성과 동잠성의 두 성을 쳤다. 하지만 백제는 말기 증세를 드러냈고, 천재지변이 발생했다. 이해(659) 봄 2월에 여러 마리의 여우가 궁궐 안으로 들어왔는데 흰 여우 한 마리가 상좌평의 책상 위에 앉았다. 4월에 태자궁의 암탉이 참새와 교미했다. 5월에 서울 서남쪽의 사비하에 길이 석 장(丈)의 물고기가 나와 죽었다. 가을 8월에는 길이 18자의 여자의 시체가 생초진에 떠올랐다. 9월에는 궁중의 홰나무가 마치 사람이 곡을 하듯이 울고, 밤에는 귀신이 궁궐 남쪽 길에서 울었다.
다음 해인 의자왕 20년(660) 2월에는 서울의 우물물이 핏빛이 되었다. 서해 바닷가에서는 조그마한 물고기들이 나와 죽었는데 백성들이 이루 다 먹을 수가 없었다. 사비하는 물이 핏빛처럼 붉어졌다. 4월에는 두꺼비와 개구리 수만 마리가 나무 위에 모였다. 서울의 저자 사람들이 까닭 없이 놀라 달아났는데 넘어져 죽은 자가 100여 명이나 되었다. 5월에는 검은 구름이 용처럼 공중에서 동과 서로 나뉘어 싸웠다. 6월에 왕흥사의 승려들이, 돛배 같은 것이 큰물을 따라 절 문으로 들어오는 것을 목격했다. 이러한 변고가 있은 뒤 궁궐의 땅속에서 거북이가 나왔던 것이다.
신라의 멸망을 예언한 〈지리다도파도파〉
이때 당나라 고종은 소정방을 시켜 군사 13만명을 통솔하여 백제를 치게 했다. 신라 왕 김춘추는 김유신과 함께 당나라 군사를 도왔다. 의자왕은 신하들에게 방책을 물었는데, 충직한 신하 흥수의 말을 듣지 않고 신라군을 탄현에서 맞아 치게 하였다. 당나라와 신라의 군사들이 백강과 탄현을 넘어오자 계백 장군으로 하여금 결사대 5000명을 거느리고 황산에 가서 맞아 싸우게 했다. 계백은 네 번 크게 싸워 모두 이겼으나, 기세가 꺾여 마침내 패하고 말았다.
당나라 군사가 성으로 밀려오자 의자왕은 태자 효(孝)와 함께 북쪽 변경으로 달아났다가 사비성이 함락된 후 항복했다. 소정방은 의자왕과 태자, 왕자, 대신 및 장사 88명과 백성 1만2807명을 당나라 서울로 보냈다. 의자왕은 중국 낙양의 북망산에 묻히고, 다시는 우리나라로 돌아오지 못했다.
신라 제49대 헌강대왕 때는 서울에서 해내에 이르기까지 집과 담장이 잇닿아 있었고, 풍악과 노랫소리가 길에 끊이지 않았다. 《삼국유사》에 보면 대왕은 개운포(지금의 울주)에 행차해서는 처용을 만났고 포석정에 행차해서는 남산의 신을 보았다. 금강령에 행차했을 때는 북악의 신이 나와 춤을 추었다. 그런데 당시 산신이 춤을 추며 <지리다도파도파(智理多都波都波)>라는 노래를 불렀다. 지혜로 나라를 다스리는 사람이 조짐을 알고 많이 도망하여 도읍이 파괴되리란 사실을 일러 말한 것이다. 하지만 왕과 나라 사람들은 상서로운 조짐이라고 여겼다. 결국 신라는 얼마 있지 않아서 망하고 말았다.
《사기》의 <진시황본기>에 보면 도사 노생(盧生)이 바다에 들어갔다가 돌아와서 도참을 진언하기를, “진나라를 망하게 하는 것은 호(胡)입니다”라고 했다. 진시황은 그 말을 믿고 군사를 보내어 흉노족을 격파하고 북쪽 국경에 만리장성을 쌓았다. 그러나 진나라를 망하게 만든 것은 시황의 작은 아들 호해의 가혹한 정치였다. 또 전한 말기에 왕망이 득세했을 때, 우물 속에서 꺼낸 흰 돌에, <안한공 망에게 황제가 되리라 알린다(告安漢公莽爲皇帝)>라는 여덟 글자가 붉은 글씨로 씌어 있었다. 왕망은 이것을 근거로 야심을 이루었다. 그 후부터 제왕은 이러한 도참설을 많이 모방했다. 우리나라에서도 삼국시대에는 도참사상이 널리 퍼졌던 듯하다.
“먼저 닭을 잡고 오리를 치리라”
신라 경명왕 2년(918)은 견훤(진훤) 27년·궁예 18년으로, 곧 궁예가 망한 해이다. 이해 여름 6월, 태봉의 장수 왕건이 왕이라 일컫고 국호를 고려라 하니, 궁예는 달아났다가 죽었다. 궁예는 의심이 많고 조급하여 무고한 사람들을 잇달아 살육했으므로 사람마다 스스로 자신을 보전할 수 없었다. 왕건은 위엄과 덕망이 날로 성하여 호걸들이 그에게 마음을 돌렸다.
이해 3월에 객상 왕창근이 당나라에서 와서 저잣거리의 가게에 있었는데, 저자 안에서 용모가 웅장하고 수염과 머리털은 희며 옛 관을 쓰고 거사의 옷을 입은 사람을 만났다. 그 사람은 왼손에는 세 개의 도자기 주발(바리때)을 들고, 오른손에는 함에 담긴 한 자가량의 오래된 구리 거울을 들고 있었다. 그 사람은 왕창근에게 “내 거울을 사지 않겠는가?”라고 했다. 왕창근이 쌀 두 말을 주고 거울을 사자, 그 사람은 그 쌀을 거지들에게 나누어 주고는 회오리바람처럼 빨리 가 버렸다.
왕창근이 거울을 시장 담벼락에 걸어 놓았더니, 거울에 햇빛이 비치자 은은히 가느다란 글자가 드러나 읽을 수 있었다. <사년(巳年)에 두 마리 용이 나타날 텐데, 한 용은 청목(송악) 속에 몸을 숨기고 다른 용은 흑금(철원)의 동쪽에 모습을 드러내서는, 먼저 닭을 잡고 다음에 오리를 치리라>라는 글이었다. 왕창근이 이를 궁예에게 바쳤다.
궁예의 명으로 그 글을 해독한 사람들은 그 글이 왕건에게 천명이 돌아갔음을 알리는 예견의 말이란 것을 알았다. 그러나 해를 입을까봐 궁예에게는 거짓말을 하였다. 거울에 적혀 있던 노래는 민중 사이에 유포되었다. 그것을 <고경(古鏡)참요>라고 한다. 여기서 ‘먼저 닭(鷄)을 잡고 다음에 오리(鴨)를 친다’는 것은 ‘계림(鷄林), 즉 신라를 멸망시키고 난 후에, 영토가 압록강(鴨綠江)에 이른다’는 의미이다.
“龍孫 열둘 다 죽은 후에”
고려 명종 23년(1193)에 김사미는 경상도 운문을 거점으로, 효심은 초전을 거점으로 반란을 일으켰다. 명종은 대장군 전존걸을 보내어 토벌하게 했다.
이때 권신(權臣) 이의민의 아들 이지순이 장군으로서 출정했다. 이의민은 일찍이 붉은 무지개가 두 겨드랑이에서 일어나는 꿈을 꾸고 상당히 자부하고 있었다. 또 옛 참요에 <용손 열둘 다 죽은 뒤, 다시 십팔자(龍孫十二盡, 更有十八子)>라는 말이 있음을 알고, 분수에 넘치는 기대를 품고 있었다. ‘十八子’는 ‘李’의 파자(破字)이므로 고려의 국왕 열둘이 죽은 뒤 자기 자신이 국왕 자리에 올라 신라를 부흥시킬 뜻을 품었던 것이다. 그래서 이의민은 김사미·효심과 통했다.
이에 대해서는 기록이 조작되었다는 설도 있다. 또 이의민이 반란군을 지원한 것은 사실이지만 신라 부흥을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의 권력을 확대하기 위해서였다고도 한다.
어쨌든 관군의 대장군이었던 김존걸은 분해하면서 “법으로 이지순을 다스리면 그 아비인 이의민이 반드시 나를 해칠 것이요, 다스리지 않으면 적은 더욱 기세가 세질 것이니, 죄는 장차 누구에게 돌아가겠는가!”라고 하고는, 독약을 마시고 죽었다.
그해 12월 김사미·효심의 난은 진압되고, 이듬해 이의민은 공신으로 책봉되었다. 이후 이의민은 관리 임명을 마음대로 하였으며, 그의 아들들도 횡포를 부렸다. 그런데 이의민의 또 다른 아들 이지영이 최충헌의 동생 최충수의 집비둘기를 빼앗은 일이 있었다. 이 사건이 도화선이 되어 이의민 부자는 명종 26년(1196)에 최충헌 형제에게 살해되었다.
대몽(對蒙)항쟁 시기에 삼별초를 지지하여 민중이 부른 참요에도 <용손 열둘이 다 죽고, 남쪽에서 제경(帝京)을 이룩한다(向南作帝京, 龍孫十二盡)>는 노래가 유행했다.
삼별초는 고려 원종 11년(1270)부터 원종 14년(1273) 사이에 대몽 투쟁을 하였다. 《고려사절요》는 삼별초가 민중을 겁박하고 민중에게 해악을 끼쳤다고 적었으나, 반드시 그렇지는 않았을 것이다. 민중은 삼별초가 고려 왕통을 끊고 새 왕조를 세워 주길 기대했을지 모른다. 그렇기에 참요에서 고려는 12대로 끝나리라고 노래했다.
삼별초가 봉기했을 때 원종은 고려 제24대 왕(재위 1259~1274)이었다. ‘용손 열둘이 다 죽는다’라고 한 것은 우의적인 표현이다. 옛날에는 서수(序數)로 간지를 사용했는데, 10간 12지가 60갑자를 이룬다. 이때 12지만을 가지고 순서를 매기면 12가 하나의 단위가 된다. 따라서 12지라고 하면 반드시 12지의 기간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고 ‘하나의 시대’를 의미한다. 더구나 24의 수는 12지를 두 번 거친 오랜 역수(曆數)를 뜻한다. ‘용손 열둘이 다 죽는다’는 말은 ‘고려 왕실은 이제 끝장이다’라는 것을 돌려 말한 것이다.
木子得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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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성계의 조선건국이 있기 전에는 ‘목자득국(木子得國)’이라는 참요가 유행했다. |
고려 말 이성계의 위화도회군 무렵에는 민간에 <목자가 나라를 얻는다(木子得國)>라는 <목자요>가 유행하였다. ‘木子’는 ‘李’를 파자한 것으로, 이씨 성을 가진 이성계가 장차 나라를 얻게 되리라는 예언을 담고 있다.
이 노래는 이성계 쪽 사람들이 만들어 퍼뜨렸을 가능성이 높다. 하지만 유사한 노래가 여기저기서 보고되었다. 조선 태종 때 권근은 태조의 묘인 건원릉에 세울 신도비문을 작성하면서, 태조의 꿈에 신인이 나타나 금척(金尺)을 주는 일이 있었고, 어떤 이인이 지리산 바위 사이에서 얻어 바친 금척에 <나무 아들이 삼한을 고쳐 바로잡는다(木子更正三韓)>고 씌어 있었다는 이야기를 적었다. 그리고 서운관에는 전해 오는 《비기》에 ‘건목득자(建木得子)’라는 말이 있었다고도 했다. 태조의 혁명이 천명에 의해 점지되어 있었음을 강조한 것이다.
연산군과 김자점의 몰락을 예언
연산군 때는 이런 동요가 있었다.
<견소의로고(見笑矣盧古) 굿기로고(仇叱其盧古) 패아로고(敗阿盧古)>
‘로고’는 노구솥을 말하는데, 대·중·소 셋을 하나의 갑에 담은 것을 시속에서 ‘삼합로고’라고 한다. 그래서 ‘로고’로 끝맺는 말을 세 번 중복하여 노래했으므로 이것을 <삼합로고요>라고 했다.
‘견소의’라는 것은 연산군의 행동이 도리에 어그러져서 남에게 웃음을 산다는 것이고, ‘굿기’라는 것은 사람의 행동이 거칠고 음란하여 깨끗지 못한 것을 이르며, ‘패아’라는 것은 패하고 흐려진다는 것이다. 이 노래는 곧 연산군이 패도하여 대업을 실추시키고 자신의 몸도 끝내 보존하지 못하여 남에게 웃음을 사리라는 뜻이다.
임진왜란 이전의 민간에는 <경기감사 우장직령(京畿監司雨裝直領) 사월대월말(四月大月末)>이라는 노래가 유행했다. 왜적이 쳐들어와 선조가 서쪽으로 파천할 때 창황하게 비를 무릅쓰고 떠났기 때문에 우비를 갖출 겨를이 없었다. 사현을 넘었을 때는 비가 더욱 심해졌는데, 경기감사 권징이 우비와 직령을 올려서 선조가 그것을 입고 행차했다. 동요가 이때 이르러서 과연 들어맞았다고 사람들은 말했다.
또 권력을 잡고 횡포를 부리던 자들 가운데 동요에 이름이 오르내린 자들은 패망하지 않은 경우가 없다.
김자점은 인조반정의 공신이지만 효종 즉위년인 1649년에 죄를 지어 영의정의 직을 파면당하고 효종 2년(1651) 12월 아들의 역모 사건에 연좌되어 목이 잘리고 말았다. 그가 권세를 부릴 때 <자점점점(自點點點)>이란 동요가 유행했다.
김자점은 청나라 세력을 업고 권력을 키웠다. 청나라에 포로가 되었다가 풀려 나온 임경업을 심기원 모반 사건에 얽어 죽이기도 했다. 그러나 인조가 승하하고 효종이 등극하자 김자점은 정치세력을 잃게 되었다. 효종은 인조 때 밀려났던 김집·송시열·김상헌 등을 대거 기용했다. 김자점은 대사간 김여경 등 대간의 극렬한 탄핵을 받아 강원도 홍천으로 유배되었다.
북벌론이 대두되자, 김자점은 청나라 앞잡이인 역관 정명수와 이형장을 통해 그 계획을 청나라에 누설했다. 그 후 김자점의 손자며느리 효명옹주가 인조의 계비 장열왕후를 저주한 사건이 발각되었다. 또 김자점의 아들 김익이 수어청 군사를 일으켜 숭선군을 추대하려 했다는 역모도 드러났다. 마침내 김자점은 64세의 나이로 참수되었다. 김자점은 1등 반정 공신으로서 정세 변화 때 권력을 유지하려고 외세를 이용하다가 ‘점점’ 파멸의 나락으로 빠져들었다. <점점요>는 그 사실을 날카롭게 지적하고 김자점의 참월을 조롱한 노래였던 것이다.
물가폭등 예견한 <억귀요>
또한 참요는 민중의 억눌린 심사를 통쾌하게 대변하는 구실을 했다. <밭이 있으면 세금이 없고 세금이 있으면 밭이 없다(有田無稅, 有稅無田)>라는 노래는 조선 중기의 부조리하고 부당한 조세 정책을 꼬집었다. <수원은 원수(水原寃讐) 화성은 성화(華城成火) 조심태는 태심(趙心泰太甚)>이라는 노래는 정조 때 화성 축성 감독관 조심태의 가혹한 닦달을 비난한 노래였다.
영조 때는 아동들이 말을 했다 하면 ‘억귀(億貴)’ 두 글자를 붙여 노랫말을 흥얼거렸다. 그 노래를 <억귀요>라고 했는데, 사람들은 그 뜻이 무엇인지 몰랐다. 그런데 영조 20년에 전염병이 크게 돌아, 서울과 지방에서 무수한 사람이 죽어 나갔다. 당시 조정에서 양민에게 군포 두 필을 부과하는 것이 너무 무겁다고 해서 한 필로 줄였으므로, 군대에서 소용되는 비용에 50만 필의 결손이 생겼다.
그래서 홍계희가 <균역사목>을 정하여, 당시 대리청정하고 있던 사도세자에게 올렸다. 그 내용은 평안도와 황해도를 제외한 전국의 전답에 1결당 쌀 2두(혹은 돈 2전)를 징수하고, 그간 왕실에 속해 있던 어염세나 선세 등 잡세를 균역청으로 귀속시키는 것을 골자로 했다. 그러자 생선값과 소금값이 폭등해서 농민들이 거꾸로 곤란을 겪었으며 곳곳의 관아마다 재고가 비게 되었다. 이 때문에 부득이 그 핑계로 새로운 명목을 만들어 내어 백성들에게서 취했다. <억귀요>는 물가앙등의 조짐을 예견한 참요였던 것이다.
민중이나 지식인들은 노래의 형태는 아니지만 현실의 문제를 은밀하게 비판하는 말을 퍼뜨리기도 했다. 그것을 ‘요언(妖言)’이나 ‘패언(悖言)’이라고 한다. 곧 유언비어를 말한다. 현실 비판의 내용은 괘서와 투서의 형태로 전하기도 했다. 또 아전과 백성 중에서 원한을 품은 사람들은 산에 올라가 크게 욕지거리를 하거나 민심을 혼란시키는 말을 퍼뜨리기도 했다. 그것을 산호(山呼)라고 한다. 참요는 요언(패언)이나 산호와 마찬가지로 민중이나 지식인의 울분과 비판의식을 담고 있다.
참요나 요언, 산호 등은 공적 언론과 대치되는 대항언론으로서, 현실 정치의 잘못을 명확하게 비판하는 기능을 지녀 왔다. 그렇기에 이익은 《성호사설》의 ‘첨앙인주(瞻仰人主)’ 조항에서, “항간의 동요는 궁내의 일들을 풍자하는 내용이 많으므로 군주는 그 노래를 듣고 자신의 몸가짐을 바로잡아야 한다”고 했다.
하지만 정권을 농단하는 자들은 민중의 소리를 두려워하여 그것을 탄압하려고 했다. 고려 원종 때 무신정권의 우두머리였던 임유무가 동요와 도참을 퍼뜨리는 자를 체포하면 관작과 재화를 상으로 주겠다고 했던 것은 그 대표적인 예이다.
참요 연구의 선구자 이은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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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의 요참(謠讖)> 등을 통해 참요연구의 선구자가 된 이은상. |
1949년에 간행된 고정옥의 《조선민요연구》는 민요 연구에서 가장 중요한 성과인데, 이 책은 참요의 항목을 별도로 두지 않고 <녹두새요>와 <가보세요>를 정치요라고 소개했다.
참요에 대해 깊은 관심을 보인 것은 임동권의 《한국민요집》(1961) 《한국민요사》(1964) 《한국민요전집》(1975)이다. 임동권은 문헌상의 참요와 구전 민요 속의 참요를 포함하여 모두 44편의 참요를 소개했다.
필자는 《참요》(한얼미디어, 2012)에서, 내용 자체는 전하지 않더라도 참요의 생성을 알려주는 기록들을 문헌에서 더 조사하여, 127편의 참요 목록을 새로 작성했다. 하지만 이 책에서 제시한 목록은 잠정적인 것에 불과하다. 야담집이나 필기류, 문집 등을 조사하면 더 많은 자료들이 발굴될 것으로 기대된다.
민간의 대항언론은 결코 억압하거나 은폐할 수가 없다. 적시성을 지니고 있기에 제3의 정치력을 갖추고 있다. 공적 언설이나 공공 미디어가 지닐 수 없는 예견의 기능과 풍자의 동력을, 대항언론은 앞으로도 자신의 특징으로 살려나갈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