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추적

305억 기부 약속하고 법정투쟁 벌이게 된 宋金祚 회장

“기부하고 싶은 분위기 만들어야 선진국”

  • 글 : 김창영 언론인·따뜻한손 출판사 대표  
  • 사진 : 서경리 월간조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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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초등학교 졸업후 약품 외판원, 정미소 운영 거쳐 주방용품 수출로 돈 모아
⊙ 부산대, 부산대 양산캠퍼스 사는 데 중도금과 잔금 부족하다며 도움 요청
⊙ 김인세 부산대 총장, 실제로는 건물 짓는 데 기부금 상당액 사용
⊙ 송 회장, 당초 약속과 다르다며 소송 제기했으나 대법원에서 패소
⊙ 송 회장, “기부 약속 지키겠지만 부산대도 나와의 약속 지켜야”
노무현 정부가 들어선 지 1년도 안돼 대통령 측근들의 비리가 연거푸 터지는 바람에 세상에 돈 냄새가 진동하던 2003년 10월, 온 국민의 가슴을 훈훈하게 해 주었던 미담의 주인공이 있었다. 부산의 향토 기업인 송금조(宋金祚) 태양그룹 회장이다. 우리나라의 기부 역사를 새로 쓰며 무려 305억원을 부산대에 쾌척하기로 약정한 그는 이듬해 1000억원을 출연하여 교육문화재단의 새로운 장을 연다.
 
  그 뒤 그는 대학 측이 200억원 가까운 기부금을 거의 다 유용했다며 ‘채무부존재(不存在)’ 소송을 냈고, 4년3개월을 끈 공방 끝에 대법원으로부터 2012년 10월 원고의 청구를 기각당했다.
 
  이런 와중에도 2012년 5월 사재 300억원을 추가 지원하여 재단의 기금을 늘리고, 4개 분야에 걸쳐 수여하는 학술상의 상금을 분야당 2억원으로 증액했다. 총 상금 규모로 보면 삼성그룹 창업자 이병철 선대 회장의 아호를 딴 호암상에 이어 국내 두 번째다.
 
  ‘부산대 기부금 사건’은 대법원의 확정판결이 났다고 해서 완전히 끝난 것은 아니다. 학교를 대표하여 약정서를 체결한 김인세 당시 총장은 수뢰 혐의로 구속되어 재판을 받고 있고, 기부자는 판결에 여전히 반발하면서 또다른 법적 절차 진행을 고려 중이다.
 
  최근에는 교수들이 중재자로 나섰다. 1개월에 걸친 진상조사위원회의 조사와 2차례의 평의회 끝에 2012년 11월 14일 부산대 교수회(회장 이병운 교수)는 “기부금은 양산 캠퍼스 부지대금이라는 사실을 확인했다”며 송 회장의 손을 들어 주었다. 기부금이 ‘부산대 캠퍼스 건설 및 연구지원 기금’이었다는 김 전 총장의 주장을 받아들여 유용이 아니라고 해석한 20일 전 대법원 판결과 정반대의 결론이다.
 
  교수회는 “송 회장 부부가 2003년 당시 개인 기부 사상 최고액을 부지대금으로 기부했는데, 전임 총장이 송 회장 부부의 숭고한 뜻을 저버리고 다른 곳에 써서 소송사태에 이른 것”으로 사건의 본질을 규정하고 “이는 기부자에 대한 예우 차원에서 커다란 잘못을 한 것이고, 이렇게 늦게 진상 규명과 입장 표명을 하게 돼 매우 죄송하다”고 사과했다.
 
  송 회장 부부는 누구인가. 이들은 왜 거액을 사회에 환원하는가. 국민들에게 감동을 안겨 준 선행이 어쩌다 쟁송의 대상으로 전락했을까. 취재 약속을 잡고 송 회장을 사무실로 찾아간 12월 7일, 부산은 한창 달아오른 대선으로 전국 뉴스의 중심에 서 있었다.
 
 
  ‘바보 자랑’
 
  ㈜태양화성, ㈜태양, 태양사 등 3개 회사의 이름 밑에 ‘서면사무소’라고 붓글씨로 쓴, 칠 벗겨진 나무 간판을 따라 2층으로 올라가니 기품 있는 여성이 우리를 맞았다. 진애언(66) 태양학원 이사장이었다. 그 뒤에 선비풍의 노신사가 서 있었다.
 
  “회장님이세요.”
 
  태양학원은 사업에 매진하면서도 ‘배움에 목말랐던 청춘 시절의 열망’을 독학으로 풀던 송 회장이 일찍이 후세교육을 위해 덜 개발된 지역에 설립한 경혜여고의 운영 주체다. 진 이사장은 공식적으로 남편을 호칭할 때면 꼭 ‘회장님’이라고 불렀다. 스물두 살, 나이 차이 이상으로 깍듯해 보였다.
 
  “뭐 할라꼬 인터뷴? 이거, 우리는 바보라고 세상에 대고 자랑하는 거 아이가?”
 
  송 회장이 쑥스러운 듯 혼잣말을 하며 악수를 청했다. 송 회장은 긴 질문에도 짧게 요지만 피력하거나 아예 침묵으로 답변을 대신했다. 송 회장이 짤막하게 키워드 몇 개를 말하면 진 이사장이 이를 받아 부연 설명하는 식으로 인터뷰를 진행했다. 속도는 더뎠고, 사안은 복잡했다. 문답 사이사이 직원이 부지런히 찾아다 준 수십 건의 증빙 자료와 재판 기록, 그리고 각종 참고 문건이 높이 20cm 넘게 쌓였다.
 
  “조금 더 주시면 한 자는 되겠는데요.”
 
  “옛날 자(尺) 압니꺼? 대나무로 만든 거. 나는 지금도 계산기보다 수판이 더 편합디다.”
 
  전국을 누비며 한창 돈을 벌던 호시절을 떠올렸는지, 송 회장 얼굴에 가벼운 미소가 번졌다. 그는 지금도 아침마다 업무를 챙기고, 손수 현금출납을 확인해야 마음이 편하다고 했다. 지금도 아내에게 다달이 일정액의 생활비를 준다. 구순을 바라보는 분이라고는 믿어지지 않을 만큼 숫자와 날짜에 대한 기억이 뚜렷했다.
 
  송 회장의 부인 진 이사장은 김인세 전 총장과 재판부에 대해, 그리고 기부를 가로막는 우리 사회의 제도적 미비점에 대해, 하고 싶은 말이 많은 듯했다. ‘부산대 사건’의 응어리가 풀리지 않은 것이다. 그러나 필자는 대법원 판결이 난 데다 아직도 공방중인 이 사건 본질보다는 무일푼이었던 송 회장의 인생에 대해 더 관심이 많았다. 대화는 그렇게 한참을 겉돌다 이내 제 자리를 찾았다.
 
 
  약 외판 일부터 시작
 
부인인 진애언 태양학원 이사장(왼쪽)과 송금조 태양그룹 회장.
  “세상살이에 비결이 어딨습니까? 매사 근면하고 성실해야지요.”
 
  그의 교과서적인 인생관이, 현대그룹을 세운 정주영 회장이 전경련을 맡아 역동적으로 재계를 이끌 때 서울 청운동 자택 거실에서 보았던 액자를 연상시켰다. ‘일근천하무난사(一勤天下無難事·한 가지 일에 근면하면 천하에 어려운 일이 없다)’.
 
  경상도 시골에서 어머니를 도와 농사일을 하던 소년이 무작정 도회지로 나온 것은 1941년, 열일곱 되던 해였다. 그가 유일하게 믿은 것은 부산에서 고등학교에 다니던 이웃집 형이었다. 자취방에 끼어 칼잠을 자며 일본인이 운영하는 약품 도매상에서 외판(外販) 일을 시작했다. 일본인 주인은 중학교를 나온 선배들에게도 창고 정리와 같은 허드렛일을 시켰는데, 초등학교를 겨우 마친 아이에게 판매와 수금을 맡겼다. 여기에다 주인 딸이 이런 ‘송금조’를 좋아했다는 것을 보면 송 회장은 어렸을 때부터 상당히 똘똘하고 일솜씨가 남달랐던 모양이다.
 
  해방이 되자 일본으로 떠나면서, 주인은 그에게 같이 가자고 권한다. 그는 그러나 더 큰 꿈을 꾸고 있었다. “일제 치하에서도 살았는데, 내 나라 내 땅에서 왜 못 살겠나 싶었지요.” 그의 소망은, 내 가게에서 일하는 것이었다. 1947년, 그동안 모은 자본과 경험을 살려 경남약품이란 약 도매상을 열었다.
 
  경남약품은 10년 뒤 부산 시내를 대표하는 약품 유통업으로 발전한다. 이때 처음 쓴 ‘태양’이란 상호는 연달아 벌이는 다양한 사업의 통일 브랜드로 자리 잡는다. “난 어려서부터 태양이란 말이 좋았어요. 언제나 변함없는 것도 좋았고, 가리지 않고 골고루 비춰 주는 것도 그렇고 ….”
 
  집으로 돌아오면 헌 돈을 다리미로 다려 100장씩 묶어 보관했다. 억척스럽게 돈을 벌고, 한번 손에 쥔 돈은 결코 허투루 쓰지 않자 날이 갈수록 목돈이 쌓였다. 쌀농사를 지은 경험을 살려 이번에는 미곡상을 차렸고, 어느 정도 자리를 잡은 뒤에는 정미소와 양조장으로 확장해 나갔다. 달걀이 병아리가 되고 병아리가 닭이 되는 식이었다.
 
  “실제로도 그랬대요. 초등학교 적부터 다른 친구들이 문방구에 가서 달걀을 연필과 바꿀 때, 우리 회장님은 어머님이 주신 달걀을 모았다가 병아리를 까고, 학교 갔다 오면 그것을 키워 닭으로 파셨대요. 그때의 경험을 경영에도 접목을 한 거죠.” 진 이사장이 부연설명을 했다. “모르는 분야는 아무리 금세 돈이 벌린다고 해도 함부로 손을 대는 법이 없었어요. 한 분야에서 완전히 원리를 터득해야 비로소 연관 분야로 넘어가곤 했지요.”
 
  주로 호남에서 쌀을 반입했는데, 하루 취급 물량이 400~600가마였다. 그 덕분에 부산·경남 대표로 뽑혀 농림부가 소집한 곡물시장 설치 회의에 참석했다. 논의를 마치고 밤늦게 서울 회현동 여관에서 잠이 들었는데, 얼핏 총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부리나케 밖으로 나와 보니 세상이 뒤집어진 듯 소란스러웠다. 라디오를 켜니 ‘박정희’란 이름이 흘러나왔다. 귀에 익은 이름이었다. ‘객지에서 액운을 만날 일은 없겠다’는 안도가 들었다.
 
 
  수출형 제조업으로 승부
 
송금조 회장과 법정 소송을 벌인 부산대학교.
  박정희 정부는 그에게 새로운 산업의 지평을 열어 준다. “제조업으로 승부해야 한국이 산다”는 일본인 친구의 조언에 따라 서비스업으로 번 돈을 제조업에 투자하기로 결심한 것이다. 달러가 없던 시절, 수출시장으로 눈을 돌렸다. 이번에도 농군 출신 기업인의 머리에 가장 먼저 떠오른 아이템은 나이프와 포크 같은 식사 도구와 스테인리스 주방용품. 세계 어디에서든 반드시 필요하고, 누구한테나 환영 받을 수 있는, 범용성이 큰 제품이었다.
 
  태양사를 설립하여 유럽 시장을 개척하는 데 성공한 뒤에는 금속기계를 생산하는 태양산업사, 가전제품에 널리 쓰이는 플라스틱 사출 제품과 운동화를 만드는 태양화성을 연달아 창립하며 사업을 확장해 나갔다. 인라인스케이트를 개발하여 국내외 청소년들에게 선풍적인 인기를 끈 것도 이 무렵이다.
 
  “많을 때는 직원 수가 3000명을 넘었어요. 그래도 월급이 밀린 적이 한 번도 없어요. 성실한 직원들에게는 무이자로 주택구입 자금을 빌려주고 그랬지요.” 벼락이 쳐도 표정의 변화가 없을 것 같던 송 회장의 얼굴에 잔잔한 미소가 감돌았다.
 
  그에겐 늘 행운의 여신이 함께했을까.
 
  “나라고 왜 위기가 없었겠소?” 본격적으로 제조업에 뛰어들기 전 수산물 유통업을 했는데, 전국에서 알아줄 만큼 규모가 상당했다. 지프차에 현찰을 가득 싣고 동해안을 누비며 오징어를 집중적으로 매집했다. 쌓아 놓은 오징어가 창고에 가득했다. 그런데 국내경기가 얼어붙어 팔릴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걱정이 태산 같았다. 망연자실하고 있는데, 낭보가 날아들었다. 이번에도 운명은 그의 편이었다. 가공하여 진공 포장한 오징어가 일본인들의 입맛을 사로잡은 것이다. 자고 일어나면 주문이 밀려들었다. 물량을 대지 못하자, 부르는 게 값이었다. 그것은 전적으로 1964년 도쿄 올림픽 특수 덕분이었지만, 그 배경에는 과거에 맺은 인연이 있었다. 20여 년 전 약품상에서 일할 때 주종 관계로 만난 일본인이 소개해 준 수입업자들이, 그를 믿고 앞장서서 시장을 뚫어 주었기 때문이다.
 
  “지성을 다하면 하늘이 도와줍니다. 성실재근(成實在勤)이라고, 성공의 열매는 근면에 있다더니, 아무리 큰 위기가 닥쳐도 평소에 근면 성실하면 그게 다 전화위복의 계기가 됩디다.”
 
부산대에 300여억원을 쾌적한 송금조 회장의 동상이 부산대에 있다.
  지프든 트럭이든, 닥치는 대로 타고 현장을 누비던 그에게 유일한 호사는 벤츠 승용차다. 식기류를 크게 수입하던 독일인이 “우리는 당신 제품을 수없이 사 가는데, 당신은 왜 독일 차를 안 사느냐”고 항의를 해서 바이어들의 출입국 때 영접용으로 쓰기 위해 벤츠를 샀다. 중고였다. 그것을 만 10년 더 타다가 새로 산 차가 지금의 승용차다. 이것 역시 19년 이상을 타니 구형이 돼 버렸지만, 마일리지가 17만km밖에 안돼 여전히 쓸 만하다.
 
  “말씀은 저렇게 해도 왜 애환이 없었겠어요? 아무도 없는 객지에서 고향의 형에게 의탁하고 있을 때, 하루 종일 외근을 하고 와서는 밤에 그 형이 벗어 놓은 교복을 입어 보고 좋아했다던데. 채 약관이 안된 나이에, 교복 입은 학생들이 얼마나 부러웠으면 ….” 안쓰러운 눈빛으로 남편을 보며 진 이사장이 송 회장의 어릴 적 일화를 공개했다.
 
  그러자 송 회장이 그보다 더 마음이 애달팠던 기억을 털어놓았다. 군대에서 사병생활을 할 때, 고무신을 신고 몇날 며칠을 걸어서 면회를 온 어머니에게 국밥 한 그릇 사 드리지 못하고 그냥 돌려보낸 일이었다. “참 자상하고 자애로운 분이었어요. 무슨 일을 해서라도 돈을 벌어야겠다고 굳은 결심을 한 게 바로 그때지요. 지금 내가 나름대로 성공을 거두었다고 한다면, 성공의 원천은 오로지 그날의 우리 모친에 대한 속죄와 평소의 은공에 대해 보답하자는 자세에서 비롯된 힘입니다.”
 
  선견지명이었을까. 송 회장의 어머니는 사람을 보는 안목이 대단했던 것 같다. 위로 형들이 있는데도 어렸을 때부터 “너는 밥술은 먹고 살 테니까, 내 제사는 네가 지내 달라”고 당부했다고 한다. ‘송성곤(宋聖坤) 김영천(金靈川)’ 불현듯 그때가 그리운지, 송 회장이 양친의 함자를 백지에 썼다. 낮에는 논을 매고 밤이면 한자와 영어를 독학했다는데도 필체가 좋았다. ‘성스런 땅(坤)’과 ‘영험한 내(川)’라는, 두 분의 이름에 담긴 의미는 커 보였다.
 
 
  1985년 태양학원 설립해 교육사업에 뛰어들어
 
송금조 회장과 부인 진애언 이사장이 2003년 10월 부산대를 방문,기금출연행사에 참석하고 있다.
  반세기를 줄기차게 달려온 송 회장도 지천명의 나이를 넘기자 돈벌이와 관계없는 일을 한다. 1985년에 경혜여고를 개교하고, 재정적으로 지원하기 위해 태양학원을 설립한 것이다. 여고를 세운 것은 순전히 어머니가 언행으로 깨우쳐 준 교훈 덕이다. 지금도 그는 신사임당처럼 지혜와 덕을 갖춘 여성을 길러내면 바른 자녀교육이 자동적으로 이루어지고, 가정교육이 똑바르면 자연히 밝고 바른 사회가 이룩된다고 믿고 있다.
 
  송 회장에게 교육은 산업과 더불어 지속적인 국가발전을 담보하는 두 가지 기둥이다. “국민들이 당장 먹을거리를 만드는 것이 산업이라면, 교육은 국가의 미래를 여는 열쇠가 아닌가 합니다.” 다음 세상에 다시 태어나면 “글로 세상을 바꾸고 싶다”는 송 회장의 교육관이다.
 
  부산대에 거금을 기부한 것이나, 경암교육문화재단을 만들어 과학과 기술 교육과 문화 진흥에 기여하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경암(耕岩)은 부산 출신 원로 문인 김정한 선생이 청년기에 한참 도전적으로 기업을 일구어 가던 송 회장에게 “바위 밭을 가는 소처럼 천천히, 끈기 있게 밀고 나가라”는 뜻으로 지어 준 아호다.
 
  돈을 많이 버는 것을 최우선의 목표로 삼은 송 회장에게 돈을 값있게 쓰는 것도 의미 있는 일이라는 사실을 강조하며 본격적으로 사회공헌 활동을 벌이도록 권유한 이는 진 이사장이다. 두 사람은 1995년 11월 결혼했다. 상처(喪妻)를 한 뒤 홀로 지내던 송 회장이 부친의 기일에 맞추어 고향에 내려온 진 이사장을 처음 보고 구애 끝에 부부의 연을 맺은 것이다. 그러나 화려한 무대와 교수직에 익숙한 신부가 나날이 전쟁 치르듯 평생을 살아온 사업가와 한집에 같이 사는 것은 생각처럼 쉬운 일이 아니었다.
 
  예상은 한 것이지만, 가치관이 판이했다. 오랜 유학 생활을 거쳐 메릴랜드대에서 성악연주학으로, 컬럼비아대에서 미술교육으로 박사학위를 받은 진 이사장이 “하루라도 음악을 듣지 않으면 살 수가 없다”는 생각을 가졌다면, 송 회장은 “콩나물대가리가 무슨 돈이 되느냐”는 생각을 가진 가부장적 기업인이었다.
 
  적응할 것은 재빨리 적응을 하고, 고칠 것은 시간을 두고 서서히 고쳐 나갔다. 바이어가 오면 통역을 하고, 무역에 필요한 서류를 작성했다. 그리고 송 회장이 여든을 바라보던 2002년, 주요한 사업을 정리하여 사회사업을 벌이기로 의견을 모았다. 재산의 사회 환원과 공익에 대한 봉사가 제2의 인생으로 돌입하는 새로운 이정표였다.
 
  사업을 차례로 정리하고 있을 때, 마침 그럴듯한 제안이 들어왔다. 부산대가 경남 양산에 새로운 캠퍼스를 지으려고 계약했는데, 중도금과 잔금이 모자라니 대납을 해 달라는 요청이었다. 양산은 마침 송 회장의 고향이자, 선산이 있는 곳이었다. 잔뼈도 굵기 전에 떠난 고향에 굴지의 대학이 들어서도록 터전을 마련해 준다면 남편은 물론이고, 선영에 모신 시부모님들에게 그만큼 보람 있는 일도 드물 것 같았다. 박재윤 총장을 만나 보니 인품도 훌륭해 보이는 데다, 국가 행정을 맡았던 분이라 믿음이 갔다.
 
  문제는 송 회장의 건강이었다. 팔순을 앞두고 갑자기 몸이 편찮아 2003년 3월에 입원을 했고, 퇴원 뒤에도 병원 출입이 잦았다. 그 사이를 파고든 것이 6월에 총장 선거에서 1위를 차지하고 임명을 기다리고 있던 김인세 의과대학 교수였다.
 
 
  부산대의 도움 요청에 그 자리서 지원 약속
 
2009년 준공식을 가졌던 부산대 양산캠퍼스. 이곳에는 의학전문대학원을 비롯한 7개 건물이 들어설 예정이다.
  “그날이 그러니까, 10월 2일이었어요. 2003년 10월 2일.”
 
  송 회장이 사건의 발단이 된 날을 떠올렸다. 취임한 지 꼭 한 달 만에 김 총장이 자택으로 인사차 찾아온 날이다. 그는 현관에 들어서자마자 마루에 엎드려 넙죽 절을 했다. 그리고 “회장님, 저 인세 왔습니다”라며 넉살좋게 웃었다. 초면인데도, 사람을 대하는 태도에 조금치도 거리낌이 없었다.
 
  “회장님께서 슬하에 자제가 없다고 들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마음 탁 놓으십시오. 지금부터는 제가 회장님 아들입니다. 앞으로 회장님을 평생 아버님으로 모시겠습니다. 댁내 경사가 있을 때는 물론이고 …. 나중에 혹시, 애사가 닥치더라도 부산대 전 교수들을 동원해서 상주 노릇을 할 테니 아무 걱정 마십시오.”
 
  이미 부인을 통해 대강의 계획을 전해 들은 송 회장이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그래, 필요한 돈이 얼마나 됩니까?”
 
  “예, 그게, 저, 300 … 4억 ….”
 
  “그 돈이면 다 해결이 됩니까? 옛날부터 ‘4’ 자는 가급적 피했으니, 305억으로 하지요.”
 
  김 총장은 학내 선거에서 당선된 직후부터 학교 동기인 태양학원 행정실장을 통해 줄기차게 진 이사장에게 면담을 요청했다. 진 이사장에게는 병석을 털고 일어난 남편이 “잘 가지고 있다가 나 없을 때 유용하게 쓰라”며 미리 넘겨준 노후자금이 있었다. 통장에 찍힌 숫자는 일금 230억원이었다.
 
  진 이사장은 그 통장에서 100억원을 인출하여 부산대에 넘겨주었다. 부산대에서 기부금 출연식이 열리기 하루 전인 10월 14일이었다. 김 총장이 수시로 들먹이던 대로 “대통령이 임명한 국립대 총장을 못 믿으면 세상에 누구를 믿을 수 있겠느냐”는 말을 신뢰하고, 공식적으로 행사도 치르기 전에 1차로 출연을 한 것이다. 이왕 기부하는 마당에 기분 좋게 요구를 들어 주자는 뜻이 담긴 것이었지만, 돌다리도 두드려 보고 건너는 송 회장의 사업 원칙과는 동떨어진, 이례적이고 과감한 결단이었다.
 
  그런데 직접 돈을 받으러 오겠다던 김 총장이 보이지 않았다. 혼자 나타난 정윤식 기획처장은 총장이 약속한 공동명의가 아니라, 부산대 명의로 통장을 만든 뒤 인사도 없이 돌아갔다. 다음 날 열린 출연식은 허술했고, 싱거우리만큼 짧게 끝났다. 양측이 약정서에 서명하여 교환하는 절차도 없었다. 송 회장과 김 총장이 주고받은 것은 달랑 흰색 빈 봉투 한 장 뿐. 초등학교 우등상 수여식보다도 격식이 떨어져, 대학교 행사라고 부르기엔 너무 민망한, 졸속 이벤트였다. 이것 역시 “심혈을 기울여 성대한 행사를 준비하겠다”는 김 총장의 약속과 너무 달랐다. 그러나 송 회장은 “기부 약속도 해를 넘기면 묵은빚이 된다”며 305억원 약정금 가운데 자투리 5억원을 그해 연말에 결제해 준다. 그 이듬해 2월에 재단을 설립한 뒤에는 재단에서 두 번에 걸쳐 도합 90억원을 추가로 기부한다.
 
 
  기부자 뜻과 다른 용도로 쓴 기부금
 
  부산대는 즉시 <비전펀드(Vision Fund)>라는 브로슈어를 만들어 화답했다. 정문 부근에는 ‘경암 송금조 선생’ 동상을 세웠다.
 
  이러한 가시적인 예우와 달리, 김 총장이 석연찮은 행동을 했다는 게 진 이사장의 설명이다. 그의 말을 잠시 옮겨 본다.
 
  “2차로 5억원을 준 뒤인 1월 22일, 설 인사차 방문해서 차도 마시지 않고 부리나케 자리를 뜨더라고요. 의아해서 회장님한테 자초지종을 물었죠. ‘연구동을 짓는 데 기부자가 동의하면 수의계약을 할 수 있고, 그러면 공사비를 최소한 20%는 절감할 수 있다고 너스레를 떨며 서류에 서명을 요청하여 서명해 줬다’고 하더군요.
 
  그래서 문건을 달라고 했어요. 그랬더니 회장님이 기부자의 자격으로 특정 업체를 추천한 것처럼 해 놓고, 실제 업체 이름은 공란으로 남겨 놓아 총장이 마음대로 수의계약을 할 수 있도록 샛길을 터놓은 백지 위임장이었어요. 더구나 회장님은 캠퍼스 땅 사라고 줬는데 실제는 이런저런 문건을 만들어 가며 특정업체와 수의계약을 해 건물을 짓고 있더라고요.
 
  여하튼 말이 안되는 얘기예요. 회장님은 부산대 건물 지으라고 돈을 준 게 아니잖아요. 그런데 어쩌면 그렇게 ….”
 
  끝이 없었다. 각종 재판 기록까지 뒤적이며 조목조목 설명을 해 나갔다. 300억원이 넘는 돈을 기부하려는 독지가가 왜 이런 상황에 처하게 됐는지 생각하니 가슴이 답답해 왔다.
 
  부산대 발전기금이사회의 결의만 보아도 사법부의 판단과 확연히 다르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2007년 5월 18일 열린 부산대 발전기금이사회는 김 총장의 자금 유용을 확인하고, 지금까지의 물의에 유감을 표하며 송 회장 측의 요구를 전폭적으로 수용한다. 기금 이사장인 김 총장과 10명 이사들의 연명을 받아 그날의 회의 결과를 통보해 준 편지에는 이런 요지의 결의가 명시돼 있다.
 
  “첫째, 송 회장의 기부금은 양산캠퍼스 부지대금임을 확인한다. 둘째, 기부금이 다른 용도로 사용된 점에 대하여 도의적으로 적절하지 못하였음을 인정하며 유감을 표한다. 셋째, 2007년 9월 30일까지 이미 사용된 기부금이 충당되도록 이사장이 최대한 노력한다. 넷째, 기부금이 2007년 9월부터 연말까지 토지공사에 지급되도록 조처한다.”
 
  “보셨지요? 우리가 낸 기부금이 부지대금이었음을 김 총장이나 부산대가 스스로 인정한 증거들이 이렇게 많은데, 어떻게 이런 재판 결과가 나올 수 있어요?”
 
  송 회장과 진 이사장의 얼굴이 붉어졌다. 분을 참지 못하는 것 같았다. 필자도 “법적으로야 어떤 결론을 내렸는지 모르지만 거액을 기부한 사람이 ‘당초 약속과 다르다’며 흥분하는 것에는 그럴 만한 까닭이 있는 것 아니겠는가”라는 생각에 마음이 편치 않았다.
 
 
  “기부를 막는 사회 더는 없었으면…”
 
  사진을 찍기 위해 바로 옆에 있는 자택으로 자리를 옮긴 뒤 앞으로의 계획을 묻자, 진 이사장은 과거의 경험을 들려주었다. 10여 년 전 광주비엔날레에 갈 때 보니 호남이 영남보다 발전이 더딘 것 같아서 가슴이 아프더라는 얘기였다. 그래서 부산대에 대한 기부 약정이 마무리되는 대로 전남대와 전북대에도 기숙사와 도서관 확충을 지원하고 싶었는데, 부산대 사건에 휘말려 썩 내키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그의 말이다.
 
  “거대한 인프라를 건설하는 일이야 정부의 몫이지만, 기숙사나 도서관 같은 것은 민간 차원의 기부를 활용할 수 있지 않겠어요? 그러면 학생들의 복지는 물론이고 영호남의 화합에도 다소 도움이 될 텐데요. 그런데 내 뜻과 또 다르게 기부금이 쓰인다면 ….”
 
  그는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기부자의 뜻과 다른 곳에 기부금을 쓴다면 누가 기부를 하고 싶겠는가’라는 말을 하고 싶어하는 듯했다.
 
  이번 사건의 가장 큰 피해자는 결국 학생이다. 이와 비슷한 사건이 또 일어나지 않게 하려면 기부를 받는 기관이 투명성과 효율성을 향상시켜야 한다. 빌 게이츠 부부가 운영하는 재단에 워런 버핏이 거액의 기부금을 흔쾌히 맡기는 것은 적어도 이 두 가지가 보장되기 때문일 것이다.
 
  “법령도 정비하고 행정절차도 세련되게 개선할 필요가 있어요. 기부금이 공돈이라는 인식도 바꿔야 하고요. 기부자가 존경받는 사회가 선진국입니다.” 진 이사장이, 입으로는 기부를 권장하면서도 실질적으로는 기부를 막고 있는 우리 사회의 각성을 촉구했다.
 
  세 시간이 넘는 취재를 마치며 부산대 사건의 타결 방안을 물었다. 한참 침묵의 시간이 흐른 뒤, 송 회장이 입을 열었다. “한번 한 약속은 지켜야지요. 우리는 국가와 한 약속을 지킬 겁니다. 부산대 역시 우리와 한 약속을 지킬 거라고 봅니다.”
 
  진 이사장이 말을 받았다. “이번 사건의 원만한 해결은 꼭 우리만을 위한 것은 아니에요. 우리 사회에 기부문화를 정착시키고, 있는 사람들이 기부에 동참하도록 이끌려면 사회적 분위기, 사회적 합의가 먼저 이루어져야지요. 그때에야 비로소 우리 사회가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말할 자격이 생기는 거 아니겠어요?”
 
  군데군데 흠집이 난 송 회장의 책상 위에 있는 신문을 얼핏 보니 경기 불황이 장기화하면서 복지시설에 대한 후원은 눈에 띄게 주는데, 생계형 범죄는 늘어나고 있다는 기사가 눈에 들어왔다. 그 옆에는 ‘나눔은커녕 세금 내기도 배 아픈 지도층’이라는 제목 아래 전국에 고액 세금 체납자가 1만명이 넘는다는 기사가 실려 있었다.
 
  “사회가 우리를 너무 아프게 했어요. 명색이 ‘상아탑’이라는 데서 받은 상처도 크지만, 재판 과정에서 입은 상처는 쉽게 아물 것 같지 않네요. 변호사가 있는 우리도 그런데, 돈 없고 의지할 데 없는 사회적 약자들은 얼마나 ….” 섬세한 외모와 달리 야무지고 조리 있게 답변하던 진 이사장이 말끝을 흐렸다. 송 회장이 얼른 창밖으로 눈길을 돌렸다.
 
  “우리는, 너무 긴 시간을 잃어버렸어요.” 송 회장의 무거운목소리가 산사의 종소리처럼 길게 여운을 남겼다. 회색빛 하늘에서는 주먹만 한 함박눈이 쏟아지고 있었다. 부산에서는 여간해서 보기 힘든 눈이라고 했다. 절기 이름대로 대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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