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가야 開國신화에 하늘과 인간세상의 매개자로 등장, 백제의 멸망을 예언
⊙ 3000년을 사는 장수의 상징, 십장생도 등 민화에 자주 등장
⊙ 人面龜神, 玄武 등 인간의 상상력 가미된 변종도 등장
尹烈秀
⊙ 65세. 원광대 영어교육학과 졸업. 동국대 문학박사(미술사학).
⊙ 에밀레박물관 학예관, 삼성출판박물관·가천박물관 부관장, 문화재청 문화재 전문위원,
민학회 회장 역임. 現 가회민화박물관장.
⊙ 저서: 《민화의 즐거움》 《꿈꾸는 우리민화》 《민화이야기》 《한국 호랑이》 등.
⊙ 3000년을 사는 장수의 상징, 십장생도 등 민화에 자주 등장
⊙ 人面龜神, 玄武 등 인간의 상상력 가미된 변종도 등장
尹烈秀
⊙ 65세. 원광대 영어교육학과 졸업. 동국대 문학박사(미술사학).
⊙ 에밀레박물관 학예관, 삼성출판박물관·가천박물관 부관장, 문화재청 문화재 전문위원,
민학회 회장 역임. 現 가회민화박물관장.
⊙ 저서: 《민화의 즐거움》 《꿈꾸는 우리민화》 《민화이야기》 《한국 호랑이》 등.

- 단양 영춘면 상리 비석.
이러한 창조의 방법 중 가장 간단한 것이 실재의 동물에 상상적 요소를 가미하는 방법으로, 신구가 바로 그러한 예이다. 후한(後漢) 반고(班固)의 《백호통(白虎通)》에는 “영묘한 거북은 신구이며 흑색의 정화로 오색이 선명하여 존망과 길흉을 안다”고 적혀 있다. 우리 역사 속에서 신령스러움과 친근함 때문에 서민 대중문화 깊숙이 자리한 거북의 예술품은 헤아릴 수 없이 다양하게 나타나고 있다.
신구는 용(龍)의 얼굴에 입으로는 상서로운 기운을 내뿜고 있다. 신구의 생김새를 살펴보면, 등 껍데기는 하늘처럼 둥글어 지붕을 나타내고 그 표면에는 별자리가 나타나 있으며 배의 껍데기는 평평하여 땅을 나타낸다. 즉 상하의 껍데기는 그 모습이 우주의 축도와 같고 천지음양의 힘을 나타내는 것이라 하여 수명과 우주를 상징하기도 한다.
우리 선조들은 바다 위에 떠 있는 섬을 거북이의 등으로 알기도 했다. 동해 바다 한가운데에는 삼신산(三神山)이라는 선인(仙人)의 나라가 있는데, 이 섬은 아홉 마리의 거북이 등으로 이루어져 있다고 생각하였다고 한다. 이렇듯 고대인들에게 거북이란 하늘에 상치하는 땅이고, 정신세계에 대한 물질계의 상징이었던 것이다.
예부터 상서로운 길조가 보일 때 나타난다는 신령스러운 네 가지 상상의 동물인 용(龍), 기린(麒麟), 봉황(鳳凰), 거북(龜)을 일컬어 사영수(四靈獸)라 하였다. 이들 가운데 거북은 현실 속의 거북이 아닌 상서로운 기운을 내뿜는 신구로 표현되면서 신격화(神格化)되기도 하였다.
고대 중국에서는 특별한 일이 벌어지면 거북 껍데기를 태워서 생긴 갈라진 금을 이용하여 길흉화복을 하늘에 물어보는 거북점을 쳤다. 이렇게 신성시하는 거북이지만 실제로 중국 사람들은 거북이라고 하면 대경실색할 정도로 싫어한다고 한다. ‘거북 같은 놈’이라는 말은 가장 큰 욕으로 비할 수 없는 모욕적인 말이라고 여기는 중국 사람들의 생각은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한국에서의 거북은 역시 장수의 상징으로 귀엽고 친근한 동물에 속한다. 영수도에 그려진 거북의 형상은 우리가 알고 있는 일반 거북과는 달리 기괴하게 그려지는 경우가 많다. 화조도(花鳥圖)의 경우 연꽃을 배경으로 물고기와 어울려 그려져 있으며, 도교적인 성격을 띠고 있는 것도 있다.
문헌상에 나타난 거북의 기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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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서대묘 현무. |
“이제 평안도 첩정(牒呈·첩보)을 보니 지난달 3일에 선천군에서 신구 한 마리를 잡았다고 하였다. 왕자(王者)의 상서 네 가지 중에 거북이 그 하나를 차지한다. 옛 글에 거북은 천 년이 지나야 한 자(尺)가 된다고 하였는데 하물며 2자 5치(寸)임에랴. 참으로 이는 신기한 물건이다. 서맥(瑞麥)이 호남에서 상서를 나타내고 신구가 관서(關西)에서 기적을 보였으니 왜적은 평정하잘 것도 없고 국가의 중흥(中興)은 점치지 않고도 알 수 있다…(후략).”
한 자가 약 30㎝ 정도 되니 2자 5치이면 약 75㎝ 정도의 길이로, 당시 보기 드문 크기의 거북이였던 것으로 여겨진다. 1000년이 지나야 한 자, 즉 30㎝가 된다고 생각하던 당시 기준으로 봤을 때 75㎝면 2500년가량 산 거북이로 신구라 여길 만하였다. 임진왜란(壬辰倭亂·1592년) 등으로 위태로운 시국이었던 당시에 신구의 출현은 왜적을 평정하고 국가를 다시 일어나게 할 상서롭고 길한 징조였던 것이다.
거북과 관련하여 현무(玄武)의 문헌상의 기록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초사(楚辭)》 ‘원유(遠遊)편’ 보주(補注)에 현무라고 이름을 붙인 까닭에 대한 설명 글이 있는데, “현무는 암수가 한 몸이고 거북과 뱀이 모인 것을 이른다. 북방에 위치하고 있으므로 현(玄)이라 하고 몸에 비늘과 두꺼운 껍데기가 있으므로 무(武)라고 한다”라고 하였다. 송나라 고사손(高似孫)의 《위략(緯略)》에 “거북은 물에 살며 물은 북쪽에 속하고 그 색이 검어서 현(玄)이라 한다. 거북에는 등 껍데기가 있어서 공격을 막을 수 있으므로 무(武)라 한다”고 하여 현무가 북쪽을 수호하는 거북에서 기인했음을 기록하고 있다.
미래를 예언하는 거북
용이 모든 동물의 우두머리, 봉황이 모든 새의 우두머리로 믿어졌던 것처럼 거북은 개충(介蟲·갑충)의 우두머리로 여겨졌던 동물이다. 거북은 실재하는 동물임에도 불구하고 오랜 역사를 통해 영험하고 신령스러운 동물로 여겨졌다. 옛사람들은 거북이 주술적 효능을 가지고 있다고 믿어 등 껍데기를 불에 구워 트는 모양을 보고 앞날의 길흉과 운세를 보았다. 일설에는 점(占)자 모양이 거북등에 막대기를 꽂고 그 방향을 가리키는 형상이라고도 한다. 이처럼 거북과 점복(占卜)은 밀접한 관계가 있다. 거북은 길흉을 점치고 거울은 미추(美醜)를 구별해 준다고 하여 본받을 만한 모범을 귀감(龜鑑)이라 불렀다. 한자의 원형인 갑골문자(甲骨文字)도 거북등(龜甲)에서 나온 것이다.
《삼국유사(三國遺事)》 기이(紀異) 제2 가락국기(駕洛國記)에 가락국(駕洛國) 시조인 수로왕(首露王)의 강림신화(降臨神話)가 나오는데 제왕의 출현과 관련한 주술적 제의로 구지가(龜旨歌)를 부른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여기서 거북은 신성한 군주의 출현을 촉구하는 백성의 뜻을 신에 전달할 수 있는 매개자였다.
기록에 따르면 후한 광무제(光武帝)의 건무(建武) 18년 3월, 낙수(洛水·낙동강)에서 계(?)가 베풀어지고 있던 날의 일이다. 마치 거북이가 엎드려 있는 듯한 생김새를 하고 있는 구지봉(龜旨峰)이라는 마을의 북쪽 산에서 심상치 않은 소리와 기색이 마을 사람들에게 들려왔다. 300여 명의 마을 사람들이 그 소리를 좇아 모여들었고, 분명히 사람의 목소리인데도 그 모습을 찾아볼 수 없었다.
다시 소리가 들려왔다.
“이곳에 누가 있는가.”
아홉 마을의 촌장들은 “우리가 있습니다”라고 대답했다.
“지금 내가 있는 이곳이 어디인가.”
“구지(龜旨)라고 하옵니다.”
“나는 황천(皇天)의 명(命)에 따라 이 땅에 새 나라를 만들고 국왕이 되기 위해 천강(天降)하였다. 그대들은 이 산정(山頂)을 파면서 다음과 같은 노래를 하라. ‘거북아, 거북아, 목을 내밀라. 내밀지 않으면 구워서 먹어버린다.’ 그리고 춤을 추어라. 이것이 곧 대왕을 맞아 환희용약(歡喜踊躍)하는 것이니라.”
아홉 명의 촌장을 비롯하여 300여 명의 군중이 춤추며 이 노래를 불렀더니 이윽고 하늘에서 6개의 황금알이 내려와 6명의 귀공자(貴公子)로 변하여 각각 6가야(伽倻)의 왕이 되었다. 그중 제일 큰 알에서 나온 사람이 수로왕이었다는 이야기다.
주몽이 금와왕 군사들의 추격을 피해 남쪽으로 갈 때에 다리를 놓아 도운 거북도 같은 의미를 지닌다.
또한 백제 말 의자왕(義慈王) 때의 어느 날, 귀신이 대궐에 들어와 “백제망(百濟亡), 백제망”이라고 소리친 후 땅속으로 들어갔다. 괴상히 생각한 의자왕이 사람을 시켜 귀신이 들어간 땅을 파보았더니 거북이 한 마리가 나타났다. 거북의 등에는 “백제동월륜, 신라여신월(百濟同月輪, 新羅如新月)”이라는 글이 적혀 있었다. 왕이 무당에게 그 뜻을 물었더니 무당이 말하기를 “백제는 만월처럼 찼으므로 기울 것이며, 신라는 초승달 같으므로 장차 흥할 것이오”라고 답하였고 예견대로 백제는 신라에 의해 멸망하였다.
吉祥의 상징, 水神의 使者
거북은 3000년을 산다는 믿음 때문에 장수의 상징으로 여겨져 왔다. 민화(民畵)의 십장생도(十長生圖)에 그려지는가 하면 장수하는 사람을 경하하고 더욱 만수무강하기를 빌 때에 ‘귀령학수(龜齡鶴壽)’라는 글귀를 써서 보내기도 한다.
또한 벼루의 뚜껑, 연적, 문진, 주춧돌, 대문 빗장, 와당, 우물, 점통, 화약통, 술장군, 표주박, 물병, 자물쇠, 도장의 손잡이, 비석이나 기념탑의 받침 등 여러 물건에 거북을 조각하거나 그려 넣어 사용하였다.
이렇게 거북의 형상으로 조각된 도장의 손잡이를 귀뉴(龜紐)라 하고, 비석이나 탑의 받침을 귀부(龜趺)라 한다. 귀부는 장생과 길상을 표상하는데 경주의 신라 무열왕릉비(武烈王陵碑)에 있는 것이 대표적이다. 귀부에 나타난 거북의 경우, 용의 아홉 아들 중 비희(??)로 보기도 한다. 비희는 몸은 거북이지만 머리는 용의 모습을 하고 있으며 무거운 것을 들기 좋아하는 특징 때문에 무거운 비석을 등에 지고 있는 귀부로 표현한 것이라 한다.
국내에 남아 있는 문화재급 귀부들의 형태를 비교해 보면 신령스러운 거북을 지역별, 시대별, 설화별 등으로 누가 더 독창적이고 실감나게 표현했는지 각축을 벌이는 듯한 모습들이다. 하나의 신령스런 거북을 대상으로 표현한 무한한 상상의 동물 표본은 우리 문화 속에 잠재된 상상력과 민족적 예술성을 보여준다.
거북과 비슷한 남생이는 석귀(石龜)라 불릴 정도로 껍데기가 단단하다. 민화화조8폭병풍(民畵花鳥八幅屛風) 부분의 철남생이는 머리는 새와 유사하고 입은 악어, 등 껍데기는 물고기 비늘, 발은 새처럼 표현하였다. 바로 옆에 있는 ‘철남생이’라는 이름표만 없다면 여러 동물을 조합하여 만든 상상의 동물이라 여길 정도로 기괴하게 보인다. 단단한 등 껍데기라는 생물학적 특성과 연관한 “남생이 등에 활쏘기”란 속담이 있는데, 매우 어려운 일을 당하는 경우나, 해를 입히려고 하나 끄떡없는 경우를 비유적으로 이른다.
河圖洛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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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민화 거북 부분. |
하도낙서는 후에 팔괘와 정치 도덕의 아홉 가지 원칙인 홍범구주(洪範九疇)의 근원이 되었다. 민화에 보이는 거북을 살펴보면 예언과 수리의 기본이 되는 하도낙서를 등에 지고 나오기도 하고 복점을 치는 내용이 그림으로 그려지기도 한다. 특히 조선시대 민화 문자도 중 ‘예(禮)’자에는 신령스러운 거북의 등에 예의의 근본으로 불리는 하도낙서를 형상화하여 그리기도 하였다.
우리의 많은 옛 이야기에서 용궁에 드나들 수 있는 유일한 교통편은 거북으로 그려진다. 그래서 수신(水神) 하백(河伯)이 다스리는 나라의 백성은 거북이나 고기떼로 생각하기도 하였다. 무조신(巫祖神) 삼시왕(三十王)에 관한 무속 신화인 초공(初公) 본풀이에는 아기씨가 기르던 강아지가 죽어 물에 던졌는데, 용왕국에 들어가 거북 사자가 되어 추방된 아기씨의 바닷길을 돕는다는 내용이 나온다. 조선 후기 창작 소설 《숙향전(淑香傳)》의 내용 중에 김전이 반하수에서 구해준 거북은 남해 용왕의 딸 또는 남해 용왕의 누이로 나오며 이마에는 ‘천(天)’자가 발에는 ‘왕(王)’자가 있는 모습이다. 《별주부전(鼈主簿傳)》에는 거북이 영의정, 자라가 주부로 나온다.
《별주부전》은 원래 인도설화로서 인과응보(因果應報)를 종교적으로 비유한 내용이다. 불교의 전개와 함께 중국을 거쳐 신라에 들어온 후 조선시대 후기 대중문화의 발전과 함께 유행하였다. 《별주부전》과 같은 장편의 서정문화를 발전시킨 민중의 상상력이야말로 아름답지 않을 수 없다.
불교에서는 예불(禮佛)을 드릴 때 신구가 그려진 방석을 사용함으로써 정진(精進)하는 마음으로 부처님께 더 가까이 다가가고자 했다.
이처럼 신성한 거북, 신구가 지니는 근원적 상징은 우주적 심상이다. 우주의 축도와 같은 거북의 생김새, 다른 동물보다 수명이 긴 생태적 속성, 거북점에서 볼 수 있는 예언적 영험력, 매개자로서의 기능 등 신구를 상징하는 대부분이 이러한 우주적 심상의 직접적 구현으로 볼 수 있는 것이다.
인간의 무한 상상력이 빚어낸 거북(人面龜神)
동물이 결합된 화상어(和尙魚)는 한계를 알 수 없는 인간의 끝없는 상상력이 만들어낸 무한 세계 속의 동물로, 이 역시 수미단을 지키고 있다.
“화상어는 동쪽 큰 바다에 사는 물고기로 몸뚱이는 홍적색이며 거북의 일종이다”라는 간단한 설명이 《삼재도회(三才圖會)》 조수(鳥獸)편에 있다. 화상어는 은해사 백흥암 수미단 우측면 중단에 자리해 물고기 몸에 용머리를 한 동물과 얼굴을 마주하고 있다. 화상어의 몸뚱이는 네 발 달린 거북 등에 용의 꼬리가 달렸고, 사람의 얼굴에 둥근 빵떡모자를 썼고, 토끼처럼 긴 귀가 모자 위로 솟아 있다. 앞가슴에서 피어오른 신령스런 갈기는 역동적 힘을 자랑하고 있지만 위협적인 모습보다는 기형적인 인간 형태의 신의 모습으로 보인다.
《산해경(山海經)》의 주해자 곽박(郭璞)도 서문에서 “황당무계(荒唐無稽)하고 기괴기발(奇怪奇拔)한 언어와 이미지로 가득 찬 산해경은 산, 바다, 즉 우주에 대한 그들의 관념과 질서를 적은 내용이다”라고 하였다. 여기의 내용 중에는 인면 물고기, 인면 용, 인면 새, 인면 뱀, 인면 소, 인면 양, 인면 봉황 등 사람 얼굴에 짐승 몸을 합성하여 만든 상상의 동물이 수없이 등장한다.
상상의 동물 가운데 거북이 다양한 모습과 현상으로 남아 있는 이유는, 장생과 길상의 상징에서부터 물과 땅을 지배하는 신으로 인간의 뜻을 신에 전달하는 매개자 역할을 한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생김새가 위는 하늘처럼 둥글고, 아래는 땅처럼 평평하여 우주의 축도와 같아 지구인 세계를 상징하는 상상의 동물로 실존 동물 가운데 가장 많은 형상의 유형이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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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토끼와 거북(상주 남장사). |
동물과 동물의 합성, 거북 그리고 현무
신구와 비슷하게 그려서 나타내는 동물에 현무(玄武)가 있다. 현무는 북방의 수호신으로 북쪽에 있으면서 수기(水氣)를 맡은 태음신(太陰神)이다. 동방의 청룡, 남방의 주작, 서방의 백호와 함께 사신(四神)의 하나로, 거북과 뱀이 배를 맞대고 휘어 감긴 모습으로 현무를 표현한다.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사신의 현무를 닮은 모습으로 오랜 세월 동안 현무가 변화하여 형성된 도상이 신구인 것으로 보인다.
신비한 사방의 별자리를 상상의 동물상으로 상징하여 죽은 자의 무덤 속에 그려진 사신도(四神圖)는 5~6세기의 고구려 고분 벽면에 등장하기 시작하여 6~7세기에 수도 평양(平壤)과 집안(集眼) 지역에서 주로 유행하였다. 인간은 사후 다시 환생할 수 있으며 환생하는 오랜 기간 동안 무덤을 무사히 지켜준다고 믿고 음양오행설에 바탕을 두고 형상화된 사신도를 무덤 벽화로 그렸다.
평양 지역 개마총(鎧馬塚), 약수리벽화분(藥水里壁畵墳), 강서중묘(江西中墓), 강서대묘(江西大墓) 등의 벽화고분이 대표적이다. 이들 중에서도 개마총의 현무가 쌍현무로 표현되어 흥미롭다. 각각의 뱀이 서로 몸을 한 차례 휘감고 있는 형상으로 완벽한 대칭구도를 이루고 있다.
이러한 쌍현무도는 중국에서도 발견된 사례가 없어 고구려인들의 독자적인 상상력으로 보다 강력한 시원 속에서 탄생한 현무 도상으로 여겨진다.
강서중묘의 사신도는 전반적으로 부드러운 선으로 그려져 온화한 감을 주지만 그 구도는 약동감이 넘친다. 특히 현무는 거북의 등을 가졌지만 강인한 힘이 넘치는 말의 형태로 공중에 떠 있는 듯 기묘하게 표현되었다.
강서대묘의 현무도는 고구려 회화의 조형미가 가장 원숙하고 세련되게 표현된 사신도의 대표작이라고 할 수 있다. 거북을 한 차례 휘감은 긴 뱀의 타원형 곡선이 자아내는 훌륭한 공간 분할과 서로 맞댄 머리 사이의 팽팽한 긴장감, 격동하는 몸체, 힘이 넘쳐나는 구성이다. 섬세하게 표현된 뱀의 비늘이나 귀갑무늬, 선묘사와 채색 또한 뛰어난 입체감을 보인다. 상상의 동물이면서도 현세의 동물처럼 생생하고 신비롭게 표현되었다.
집안 지역의 현무 도상은 강서대묘의 현무 도상과 유사하지만, 통구사신총(通溝四神塚)의 현무의 경우 거북을 휘감은 뱀의 머리와 꼬리가 여러 번에 걸쳐 복잡하게 얽혀 있다는 차이점이 있다.
무덤을 지키는 현무의 조형물은 고구려시대에 유행되었지만 고려시대와 조선시대에 이르면서 남아 있는 자료들이 흔치 않게 되었다.
死者의 수호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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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흥사 서산대사 비. |
조선시대 현무는 왕실 의궤를 통해 살펴볼 수 있다. 조선시대에는 왕실의 국장(國葬)을 치를 때 왕이나 왕비의 관이 산릉(山陵)에 도착하면 이를 임시 찬궁(木贊宮)에 모셨는데, 이곳에 사신도를 그렸다. 관을 묻고 난 뒤 찬궁은 불태워졌기 때문에 국장 당시 그려진 사신도는 당시를 기록한 의궤를 통해서만 전해진다.
조선왕조 《산릉도감의궤(山陵都監儀軌)》를 연구한 한국학중앙연구원 윤진영의 글을 통해 1630년부터 1926년까지 의궤에 기록된 현무 도상의 변화와 흐름을 살펴보면 주목할 점이 있다. 초기에 고구려 고분벽화의 전통적인 현무 도상을 따르다가 1757년 제작된 《정성왕후 산릉도감의궤(貞聖王后 山陵都監儀軌)》부터 거북의 몸을 휘감고 있던 뱀이 사라진 형태로 표현된 것이다. 얼굴을 맞대고 팽팽한 긴장감을 형성하던 뱀이 빠지면서 추상적이고 신령스러운 요소가 탈피된 모습이다. 뱀이 빠지면서 생긴 빈자리는 거북의 머리와 서기문(瑞氣紋)으로 채웠다. 이러한 급격한 변화는 사실주의적 표현이 두드러지는 사회적 분위기로 인해 사신을 현실적으로 파악하려 했기 때문으로 보인다.
이렇게 형성된 현무 도상은 이후 강한 영향력으로 조선시대 말기까지 영향을 미쳐 신구라는 신령스러운 거북의 형태로 나타난다. 이러한 상상의 동물은 비현실적이라 생각할 수도 있지만, 꿈과 낭만이 깃들어 있고 공상과 환상이 조화롭게 어우러져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