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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리우드 키드 安正孝의 ‘별들이 빛나는 이야기’ ⑤ 멋쟁이 프랑스 남우, 샤를 부아이에 vs. 모리스 슈발리에

‘프랑스産’이란 이유로 은막의 戀人이 되다!

  • 글 : 안정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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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할리우드는 “여성에게 호감을 주는 멋쟁이 프랑스 남자”로 부아이에를 부각시켜
⊙ 부아이에는 아랫배가 나와 중년을 넘긴 다음에는 ‘연인’이라는 호칭이 무색해져
⊙ 슈발리에가 교양이 있고 멋진 프랑스인의 인상을 가꾸는 과정에 부아이에가 지대한 영향 미쳐
⊙ 슈발리에야말로 ‘de bon aire(우아하고 세련되다는 뜻)’의 진정한 표상

安正孝
⊙71세. 서강대 영문학과 졸업. 《코리아헤럴드》 기자, 《코리아타임즈》 기자·문화체육부장,
    이화여대 통역번역대학원 초빙교수 역임.
⊙ 주요 작품으로 소설 《전쟁과 도시》(후에 《하얀 전쟁》) 《헐리우드 키드의 생애》
    《은마는 오지 않는다》(후에 《銀馬》) 《악부전》 《솔섬》 등이 있다.
    번역서로 《백년동안의 고독》을 비롯해 150여 권이 있다.
영화 <로마의 휴일(Roman Holiday, 1953)> 도입부에서, 어느 작은 나라의 황녀인 오드리 헵번이 숙소를 탈출해 모험을 벌이기 전에, 외신기자들과 회견을 하다가 유럽공동체에 대한 견해를 피력한다. 우리나라가 분단의 전화(戰禍)에 휘말리던 시기에 유럽에서는 이미 EC를 구성하자는 움직임이 진행 중이었다는 뜻이다.
 
  현지를 여행한 경험이 없다면 얼른 이해가 안되겠지만, 유럽은 국경이나 국적이 그리 큰 의미를 갖지 못한다. 세상에서 가장 먼 ‘나라’가 되어버린 북한, 얼마 전까지만 해도 ‘적성’ 국가였던 ‘중공(中共)’, 그리고 식민지 통치로 인한 정서적 앙금과 문화적 단절이 심했던 일본―이렇게 세 나라에 둘러싸여 고립된 지정학적 상태로 살아온 대한민국은, 북한이 지금도 여전히 그렇듯이, 국제적인 감각이 대단히 희박했고, 특히 ‘백의민족’을 미화하는 국수주의적 착각이 지배했던 교육의 영향으로 ‘국경’과 ‘민족’에 대한 인식이 무척 과민했었다. 그래서 한국 영화의 중흥기에는 ‘홍콩 현지 촬영’이라는 광고 장치가 대단히 효과적으로 잘 먹혀 들어가기도 했다.
 
  요즈음 ‘한류’나 ‘K-POP’을 두고 사람들이 지나치게 떠들썩하는 현상 또한 어쩌면 외국이라는 개념을 과대포장하려던 그런 소원한 인식의 부산물이 아닌가 하는 생각까지 든다. 우리나라와 홍콩의 ‘합작’을 대단한 사건이라고 여겼던 당시 우리나라에서는 일본에서나 마찬가지로 프랑스와 독일과 이탈리아의 합작 사실을 지나칠 정도로 강조하고는 했는데, 역시 같은 맥락이겠다.
 
  하지만 유럽에서 유레일(Eurail)로 기차를 타 본 사람은 이웃 ‘외국’에 가는 게 얼마나 쉬운지 알게 된다. 사실, 영화 3대 강국인 프랑스와 독일, 이탈리아가 국제적인 합작이나 연예인의 교류가 빈번한 것도 문화적이기보다는 단순한 경제적인 시각에서 이루어졌다고 보는 것이 옳다. 대서양을 가운데 두고 발생한 영화산업의 문화적 이산(離散·diaspora) 현상은 유럽의 여러 나라 사이에서가 아니라, 현재의 EU와 아메리카 할리우드 양 진영 사이에서 진행되었다고 이해하는 편이 정확하겠다.
 
 
  ‘찰스 보여’가 아닌 ‘샤를 부아이에’인 까닭?
 
장 가뱅의 <망향>을 미국에서 재탕한 영화 <카스바의 사랑>의 한 장면. 극중 “나하고 같이 카스바로 갑시다”로 알려진 샤를 부아이에의 대사는 없다.
  영화산업의 문화경제적인 교류는 근본적으로, 문학에서 건축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분야에서, 유럽의 식민지였던 아메리카의 열등감으로부터 파생한 후유증이라 여겨지기도 한다. 흔히 ‘대륙적(Continental)’이라고 일컬어지는 유럽예술에 대한 아메리카의 선망은 20세기 초반까지 계속되었다. 유럽의 오페라에 대한 열등감을 극복하기 위해 미국에서 뮤지컬이라는 새로운 분야를 개척한 경우처럼, 때로는 생산성을 촉발하기도 했다.
 
  영화계에서 유럽 대륙 연기자들의 할리우드 영입이 이루어지던 초기에 프랑스에서 미국으로 건너간 샤를 부아이에(Charles Boyer, 1899~1978)는 할리우드의 ‘대륙 숭배’ 잠재의식으로부터 덕을 톡톡히 본 연기자다. 그는 로미 슈나이더처럼 국적과 정체성을 걱정할 필요가 없었다. 미국으로 건너간 슈나이더는 대륙적인 매력만으로 할리우드 정복에 승산이 없었을 뿐 아니라 미국적 표현방식에서 연기력으로 승부를 벌이기도 무리였다. 반면 부아이에는 그냥 ‘프랑스에서 왔다’는 상징적 여건 하나만으로 쉽게 상승세를 탔다.
 
  대부분의 영화활동을 프랑스가 아니라 미국에서 했고 1942년에 미국 시민으로 귀화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래서 프랑스 영화를 다룰 때는 별로 언급이 되지 않았음에도, 미국에서와는 달리 우리나라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의 이름을 영어식 이름 ‘찰스 보여’ 대신 ‘샤를 부아이에’라고 부르는 까닭은 무엇일까? 그것은 아마도 그가 어느 모로 보나 미국인이 아니라 프랑스인이라는 고정관념이 강하기 때문이리라.
 
영화 <카스바의 사랑>의 포스터.
  샤를 부아이에는 스스로 대서양을 건넌 것이 아니라 유럽을 상징할 만한 판매촉진용 간판 배우로 활용하겠다는 할리우드의 상업전략에 따라 선택을 받은 배우였다. 11살 때부터 프랑스에서 연예활동을 시작한 그는 나치 정권이 1917년에 설립한 국립 우파영화사(UFA, Universum Film Aktien Gesell schaft)에서 프랑스를 겨냥한 영화 제작을 위해 데려갔지만, 1929년 MGM이 같은 목적으로 새로운 계약을 제시하여 미국으로 빼앗아 갔다. 그리고 ‘여성에게 호감을 주는 멋쟁이 프랑스 남자’로 부아이에를 부각시키는 할리우드의 공정(工程)은 크게 성공을 거두었다.
 
  장 가뱅의 <망향>을 미국에서 재탕한 영화 <카스바의 사랑(Algiers, 1938)>이 한국에서 상영될 무렵에는 이런 전설이 널리 퍼졌었다. 샤를 부아이에가 반쯤 게슴츠레하고 몽롱한 눈으로 헤디 라마르를 그윽하게 쳐다보며 “Come with me to the Casbah(나하고 같이 카스바로 갑시다)”라고 말했을 때 미국의 어느 극장에서는 여성 관객들이 모두 자리에서 일어나 “Yes!(그래요!)”라고 외쳤다는 얘기였다.
 
  고등학생이었을 무렵에 이런 얘기를 듣고 할리우드 키드는 무척 의아했었다. 사실 낭만적인 역을 맡기에는 얼굴이 다소 지나치게 크다는 신체적인 약점만 뚜렷할 뿐, 부아이에는 전형적인 미남 배우와 거리가 멀었기 때문이다.
 
  <카스바의 사랑>에서는 전설이 된 카스바 대사가 아예 나오지 않는다. 영화사에서 선전문으로 사용했던 따옴표 속의 표현이 마치 진짜 대사였던 양, 요즈음 대한민국의 인터넷 헛소문처럼, 전 세계적으로 삽시간에 퍼져나갔을 따름이었다.
 
 
  ‘카스바 대사’는 가짜
 
샤를 부아이에의 첫 색채 영화 <사막의 화원>에서 그는 운명적 사랑의 주인공으로 분한다. 사진은 오아시스 촬영 장면.
  할리우드에서 부아이에가 첫 주연을 했던 낭만적인 뮤지컬 <방랑자(Caravan, 1934)>에서 그는 헝가리 귀족 집안의 로레타 영과 무분별한 결혼을 한다. 그러나 그녀가 진짜 사랑하는 남자를 만나자 점잖게 양보하고 물러나는 멋진 집시 남자 역을 맡아 대단한 인기를 얻었다. 그리고 그가 출연한 첫 색채 영화 <사막의 화원(The Garden of Allah, 1936)>에서 부아이에는 다시 <방랑자>와 비슷한 운명적 사랑의 주인공으로 등장한다.
 
  기도와 침묵을 통한 공동수행으로 유명하며 엄격하기 짝이 없는 트라피스트 가톨릭 수도회 소속인 부아이에. 그는 종교적인 은둔생활에서 고독한 평화와 명상의 행복을 찾는다. 방문객 담당이 되어 외부인들과 접촉하기 시작한 어느 날, 다투었다가 화해를 하는 젊은 남녀를 보게 된다. 바깥세상의 청춘남녀가 누리는 사랑이 가져다주는 지극한 환희의 비밀이 무엇인지 호기심의 갈증을 이기지 못한 그는 수도복을 벗고 사복 차림으로 알제리의 수도원을 탈출한다.
 
  신으로부터 도망쳐 불안하고 착잡한 도피를 계속하던 배교자 부아이에는, 할아버지로부터 엄청난 유산을 물려받은 부자이며 정신적인 위안을 받기 위해 신을 추구하는 마를레네 디트리히를 기차에서 만나 영혼의 덫처럼 집요한 사랑에 빠진다.
 
  이토록 가당치도 않은 이색적인 상황설정으로 시작되는 <사막의 화원>은 환상여행을 상품화한 전형적인 셀즈닉(David O. Selznick)표 할리우드 특산품이다. 아카데미 촬영상을 받은 사막의 단순하고 황홀한 풍경과, 눈썹이 없는 깊은 시선으로 응시하는 디트리히 눈매의 신비함과, 모래로 점을 치는 노인이 곧 닥쳐오리라고 예언하는 불행에 대하여 모험적인 호기심을 느끼는 여인과, 술집 무희들의 요염한 춤과 이국적인 의상, 폐허가 된 요새에서 횃불을 보고 찾아와서 군가를 부르는 외인부대와, 사방에서 휘날리는 베일 자락을 동원하여 의도적으로 한없이 예쁘게 만든 작품이다.
 
  1980년 전에 만든 영화답게 파란(!) 밤하늘에 빛나는 커다란 별들과 거의 멈춤이 없어서 때로는 배우들의 대사가 잘 들리지 않을 정도인 막스 스타이너의 간드러진 음악도 모자라서인지, 윌리엄 디털리(William Dieterle) 감독은 더 많은 극적 효과를 노리며 이런 식의 자막까지 군데군데 심어 놓았다.
 
  “Journeying without aim, drawn by the mystic summons of blue distances…(망망한 푸른 빛깔의 신비한 손짓에 이끌려 정처 없는 여행은 계속되는데…)”
 
  노골적으로 유럽 관객을 손짓해 부르느라고 독일에서 수입해 간 디털리 감독과 여배우 디트리히, 그리고 프랑스에서 수입한 축축한 눈망울의 부아이에가 엮어 낸 영화 <사막의 화원>은 분명히 한없이 유치한 영화지만, 몇 번을 봐도 재미있고 즐겁기 짝이 없으며, 때로는 감동까지 자아낸다. 하지만 이 영화에서도 부아이에한테서는 안개 속의 탕녀처럼 보이는 디트리히만큼은 낭만적인 모습이 발견되지 않는다.
 
 
  타이타닉 주제를 엮어 넣은 영화
 
  그러나 당시까지 사람들의 기억에 생생했던 타이타닉 주제를 엮어 넣은 영화 <역사는 밤에 이루어진다(History Is Made at Night, 1937)>에서는 샤를 부아이에의 매력이 제대로 드러난다. <역사>에서 다시 한 번 상류사회 여인과 사랑에 빠지는 주인공 역을 맡은 부아이에는 유럽 최고의 웨이터로 유명한 프랑스인이다. 그래서 이탈리아에서 할리우드가 빌려 갔던 롯사노 브라치처럼 영어 대사를 할 때마다 걸핏하면 입을 내밀고 드러내는 유럽 억양이 크게 부담스럽지가 않다. 또 시각적인 정보를 다소간이나마 걸러내는 흑백 화면에서는 그의 머리가 그리 커 보이지도 않는다.
 
  <역사>의 낭만성을 한국 관객이 이해하려면 약간의 사전지식이 필요하다. 서양의 식당문화에서는 주방장이나 수석 웨이터가 사교계에서 상당히 사회적으로 존경을 받는 위치를 차지한다. 그래서 어니스트 헤밍웨이 같은 유명인들도 자신의 신분을 과시할 때는 이름난 식당의 웨이터 이름을 자주 입에 올리곤 했다. 약간 과장을 한다면, 상류사회 인사들은 흔히 요리사와 웨이터가 누구인지를 따져 식당을 골라 드나들었다고 한다.
 
  이런 관습이 서양의 문학과 영화에서 자주 반영되곤 하는데, <역사>에서는 파리의 유명한 식당에서 일하는 수석 웨이터 부아이에와 그의 친구 요리사가 등장한다. 특히 부아이에가 뉴욕으로 건너가 유럽식 요리법과 봉사정신으로 단숨에 상류층 인사들에게 접근하는 과정이 재미있게 구성되었다.
 
  진 아더는 이혼 수속을 밟던 중이었지만 독선적이고 의처증이 심한 선박왕 남편은 그녀에게 막대한 위자료를 빼앗길까봐 걱정한다. 결국 남편은 아더가 운전사와 불륜을 저지르는 장면을 연출하여 아더를 함정에 빠트리려 한다. 술에 취한 단골 고객을 호텔로 데려다주던 부아이에가 마침 옆 객실에서 이 장면을 목격하고는 뛰어 들어가 운전사를 한 방에 때려눕히고 그녀를 위기에서 구한다. 이렇듯 극적이고도 우연한 만남으로 인해 그들의 역사가 그날 밤 파리에서 이루어지기 시작한다.
 
  부아이에가 일하는 식당인 줄 모르고 아더는 ‘파란 성(Ch쮗teau bleu)’으로 쫓아가서는, 영업시간이 끝난 다음 ‘성’을 독차지한다. 아더는 텅 빈 식당에서 최고급 요리를 즐기고, 흥겨운 기분에 신발을 벗어버리고는 악단의 연주에 맞춰 밤새도록 부아이에와 단둘이 탱고를 춘다. 이 맨발의 탱고 장면은 영화역사상 몇 번째인지는 몰라도 자주 손꼽히는 명장면이다. 나중에 여러 영화에서 우리들은 표절한 심야의 무도 장면을 식상할 정도로 자주 보게 된다.
 
  진 아더를 궁지로 몰아넣으려다가 실패한 남편은 그녀를 구출한 심야의 기사(騎士) 샤를 부아이에를 살인범으로 몰고는 아내를 억지로 끌고 뉴욕으로 간다. 그런 가운데 남편과 별거하며 의상실 모델로 일하던 아더는 뉴욕 식당가를 주름잡던 부아이에와 재회한다. 두 사람은 함께 타히티로 도망가자고 하지만 자신의 죄를 뒤집어쓴 남자의 결백을 증명해 주기 위해 아더는 단두대로 끌려갈 각오를 하고서 프랑스로 돌아갈 결심을 한다. 그러나 그들이 타고 가던 호화 유람선이 빙산과 충돌하여 침몰한다.
 
 
  키가 크지 않은 데다 미남도 아니어서
 
고전 심리극 <가스등>에서 보석도둑 샤를 부아이에는 오페라 여가수를 살해하고, 여가수의 상속녀이자 조카딸인 잉그릿 버그만(왼쪽 첫번째)을 유혹해 결혼까지 한다.
  고전 심리극 <가스등(Gaslight, 1944)>에서 샤를 부아이에는 똑같은 얼굴과 똑같은 두 눈으로 완전히 다른 모습을 보여준다. 안개가 잔뜩 낀 영국 런던의 한 저택에 유명한 오페라 여가수가 살해당한다. 부아이에는 어느 왕족으로부터 선물로 받았다는 여가수의 보석을 훔치려다가 살인까지 저지른 것이다. 목적을 달성하지 못한 부아이에는 여가수의 상속녀이자 조카딸인 잉그릿 버그만을 유혹하여 결혼까지 하고는, 여가수의 저택에 진입한다. 어디에 숨겨 놓았는지 알 길이 없는 보석을 다락방에서 몰래 찾아내기 위해 그는 버그만을 교묘하게 정신병자로 몰아 바깥세상으로부터 격리시키고 집을 봉쇄한다.
 
  정말로 비낭만적인 보석도둑 샤를 부아이에의 몽롱한 눈은 차갑고, 어둡고, 냉혹하며, 신혼여행을 가서 호텔 계단에 선 그의 모습은 음흉하다 못해 드라큘라처럼 섬뜩하기까지 하다. 마지막 장면에서 런던경찰국 수사관 조셉 카튼에게 체포된 다음 버그만에게 “밧줄을 풀어 달라”며 보석에 관한 고백을 할 때는 그의 눈이 병적인 광기로 죽은 고등어처럼 번득이기까지 한다. 정말로 낭만적인 연인과는 거리가 멀어도 한참 멀다.
 
  부아이에는 에리히 마리아 레마르크(Erich Maria Remarque, 1898~1970)의 소설을 어윈 쇼의 각색을 거쳐 영화로 만든 <개선문(Arch of Triumph, 1948)>에서 잉그릿 버그만과 다시 공연한다. <개선문>에서 부아이에는 독일 나치 정부로부터 시민권을 박탈당하고 무국적자가 된 의사다. 그는 언제 붙잡혀 추방을 당할지 모르는 불안한 처지에서 하루하루를 긴장 속에 살아간다. 그리고 마찬가지로 갈 곳조차 없이 난민들의 도시 파리에서 밤무대 가수로 절망적인 삶을 살아가는 버그만을 만나 비극적인 사랑을 나눈다.
 
  <개선문>의 주인공은 작가 레마르크와 똑같은 인생역정을 거친다. 레마르크는 18살의 나이로 제1차 세계대전에 참전했던 경험을 바탕으로 써 낸 반전(反戰)소설 《서부 전선 이상없다(All Quiet on the Western Front, 또는 Im Western nights Nueus, 1927)》를 발표했다가 패배주의적이라는 이유로 나치로부터 온갖 모함과 학대를 당한다. 그의 책들은 괴벨스의 명령에 따라 모두 분서(焚書)를 당하고, 그가 스위스로 피신한 다음 조국에 그냥 남아 있던 누이는 ‘도망친 레마르크 대신’ 1943년에 단두대에서 처형되었다.
 
  레마르크는 1939년 미국으로 건너가 1947년 귀화했으며, 사회개혁에 앞장섰던 미국 잡지 《콜리어(Collier’s》에 연재한 <개선문(Arc de Triomphe, 1945)>에는 그가 살아온 무국적자의 삶에 얽힌 배경과 분위기가 세계대전 직전의 음울한 파리를 무대로 생생하게 살아난다.
 
  두 영화에서 그의 상대역을 맡았던 버그만은 부아이에보다 키가 컸다. <개선문> 도입부에서 비가 주룩주룩 내리는 다리를 건너던 부아이에가 버그만을 처음 만나는 장면을 잘 살펴보면, 촬영 각도가 교묘하게 밑으로 향했기 때문에 얼른 드러나지 않지만, 두 사람의 키 차이가 쉽게 확인이 가능하다. 사실 버그만은 워낙 키가 커서 함께 출연한 남자 배우들이 늘 ‘특단의 조처’를 취해야 했으며, <추상(Anastasia, 1956)>을 촬영할 때는 율 브리너가 그녀에게 이런 호통을 쳤다고 한다.
 
  “난 절대로 상자 위에 올라서지 않겠어요. 그래야 당신이 얼마나 말처럼 큰 여자(what a big horse)인지 세상 사람들이 제대로 알게 될 테니까요.”
 
  “은막의 마지막 위대한 연인(the last of the cinema’s great lovers)”이라고 불리었던 부아이에는 키가 크지 않았으려니와 별로 미남도 아니어서, 1940년에 처음 촬영 현장에서 그를 만난 베티 데이비스는 누구인지를 알아보지 못하고 사람을 시켜 부아이에를 쫓아냈다고 한다. 그는 노년기가 비교적 빨리 시작되었고, 아랫배가 나와 중년을 넘긴 다음에는 사실 ‘연인’이라는 호칭이 잘 어울리지를 않았다. 부아이에가 겨우 두 장면 ‘특별 출연’을 한 <멋쟁이(How to Steal a Million, 1966)>를 보면, 그는 시들어 망가진 얼굴에 별다른 개성이나 특징을 간직하지 못한 보통 늙은이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실생활에서의 샤를 부아이에는 진정한 의미의 ‘위대한 연인’이었다. 그는 한 번밖에 결혼을 하지 않았고, 44년을 해로한 영국 배우 출신 아내가 암으로 죽고 나서 슬픔을 이기지 못해 이틀 후에 세코날을 ‘과다복용’하여 자살했다. 부아이에의 탓은 아니었겠지만, 이 무렵에는 우리나라에서도 실연을 당한 젊은이들이 세코날로 자살하는 경우가 많았다.
 
 
  명멸하는 별이 마지막 타오르듯
 
안정효가 그린 샤를 부아이에의 캐리커처.
  “<노인과 바다> 같은 고전영화의 주연을 맡아 한 번만이라도 다시 노익장을 과시하고 싶다”던 원로배우 신영균의 소망이 쉽게 이루어지지 않듯, 얼굴과 연기력을 팔아 살아가는 연기자들은 나이를 먹어 온몸이 쪼글쪼글 늙어갈수록 점점 쇠락의 길로 하염없이 끌려가는 게 보통이다. 그들 가운데 선택된 소수만이 스펜서 트레이시나 헨리 폰다처럼 완숙해지는 경지로 당당하게 넘어간다.
 
  샤를 부아이에는 노년에 그리 두드러진 활약을 하지는 못했지만, 생명을 다한 별이 소멸하기 전에 한 차례 맹렬하게 타오르듯, <파니(Fanny, 1961)>에서 무두질 관록을 아낌없이 과시했다. 마르셀 파뇰(Marcel Pagnol, 1895~1974)의 희곡 3부작을 브로드웨이 뮤지컬로 제작했다가 다시 영화 <파니>로 만들면서 조슈아 로건 감독은 부아이에를 처음부터 섭외했지만, 노래 솜씨가 없었던 그는 “다른 사람의 목소리에 입맞추기(lipsync)는 하지 않겠다”며 출연을 거절했다. 그래서 로건은 영화에서 아예 노래를 없애 버리기로 결심했다고 한다.
 
  샤를 부아이에 한 사람의 관록을 사들이기 위해 아예 영화의 형식을 바꿔 버린 쾌거였다. 그리고 그 보상은 충분했다.
 
  항구 도시 마르세유에서 섬약한 아이로 성장한 파뇰은 자질구레한 일상을 섬세한 필치로 승화시키는 재능이 뛰어났으며, 소설보다 희곡을 먼저 썼기 때문인지는 몰라도 <파니>에서는 힘겹고 애틋한 미완성 겹사랑에 관한 멋지고 감미로운 대사가 넘쳐난다.
 
  항구에서 주막을 경영하는 부아이에의 외아들 홀스트 부크홀츠는 뱃고동 소리만 들으면 ‘마도로스’가 되어 바다로 나가고 싶은 욕망에 사로잡혀 실성할 지경인 19살 청년이다. 그는 어릴 적부터 이웃에서 성장한 18살 레슬리 캐론을 사랑하는 마음 때문에 훌쩍 고향을 떠나지 못하고 고민한다. 이와 비슷한 경우를 우리는 <인생의 낙원(It’s a Wonderful Life, 1947)>에서 만난 적이 있다. 같은 동네서 성장하여 사랑하게 된 도나 리드더러 “세상을 두루 돌아다니며 보고 싶은 내 마음을 막지 말라”고 울먹거릴 정도로 애원하면서도 제임스 스튜어트는 차마 그를 붙잡지 못하는 여인을 버리지 못한다. 결국 스튜어트는 꿈을 포기하고 왈칵 리드를 포옹하며 사랑을 선택한다.
 
  그러나 <파니>에서는 “남자의 앞날을 가로막았다”는 원망을 듣게 될까봐 두려워하는 캐론이 부크홀츠를 놓아 주고, 그는 아버지가 말릴까봐 걱정이 되어 부아이에한테는 작별인사조차 없이 몰래, 비글호처럼 탐사를 떠나는 범선의 선원이 되어 5년 항해에 나선다. 그리고 여러 해가 지난 다음 다시 고향으로 돌아와 정비공으로 취직한 부크홀츠에게 캐론이 묻는다.
 
  “그래서 황금나무가 자라는 도시에 가 봤나요?”
 
  그러자 헛된 꿈 때문에 낭비해 버린 삶을 후회하며 그가 말한다.
 
  “가 보니까 화산재밖에 없었어요.”
 
  영화에서는 분명히 두 젊은이 부크홀츠와 캐론이 얘기의 주인공이지만, 아카데미 남녀주연상 분야의 후보로는 샤를 부아이에만 올랐다. <파니>에서는 젊은 두 주연보다 늙은 ‘조연’ 부아이에가 실질적인 주연이었다는 뜻이다.
 
 
  앙숙이면서도 단짝인 두 늙은이
 
모리스 슈발리에의 캐리커처.
  월요일 12시반만 되면 가슴에 빨간 꽃을 달고 나비넥타이로 멋을 내고는 여자를 만나러 가던 부아이에. 아들이 도망친 다음, 인생에서 가장 큰 낙을 잃고 <박서방>의 김승호처럼 심술보만 늘어난다. 그럴 때마다 옆에서 살금살금 약을 올리는 사람이 모리스 슈발리에(Maurice Chevalier, 1888~1972)다. 앙숙이면서도 단짝인 주책없는 두 늙은이 슈발리에와 부아이에의 관계는 닐 사이먼의 <선샤인 보이스>에서 끊임없이 티격거리는 월터 매타우와 조지 번스가 영락없다.
 
  <파니>에 출연할 당시 실제 나이가 73세였던 슈발리에는 18살 레슬리 캐론을 사랑하는 54세의 홀아비 역을 맡았다. 그는 아내를 잃은 지 4개월밖에 안되었지만, “남들이 5년 동안 흘린 눈물보다 더 많은 눈물을 4개월 동안에 흘렸으니까, 재혼을 해도 문제가 안된다”며 어린 처녀에게 접근한다. 대가 끊기게 될 만큼 자식이 귀한 집안에서 아이를 낳지 못하는 차남이었던 그는 부크홀츠가 떠난 다음 캐론이 그의 아기를 임신했다는 사실을 알고 “내 자식으로 낳아 달라”며 더욱 열심히 구애를 하고는, 가난한 생선장수의 외동딸 캐론을 드디어 아내로 맞아들이는 데 성공한다.
 
  부크홀츠의 사생아는 만인의 축복 속에 슈발리에 가문의 영광으로 태어나 돈 많은 삭구점(索具店) 사장 슈발리에의 상속자 친아들이 된다. 친할아버지 부아이에는 손자의 대부가 되어 족보가 무척 복잡하게 얽히기는 하지만, 그래도 영화 <파니>는 모든 등장인물이 나름대로 행복하게 오래오래 두루 잘살았다는 마르셀 파뇰 특유의 낭만적이고 슬픈 희극의 형태를 고스란히 갖춘다.
 
영화 <파니>에서 부아이에(왼쪽 첫번째)와 슈발리에는 단짝이자 주책없는 늙은이로 분했다.
  프랑스의 극장 무대에서 주로 활동하던 모리스 슈발리에는 1929~35년에 미국으로 건너간다. 슈발리에는 같은 시기 할리우드 생활을 하던 샤를 부아이에와 친하게 지냈지만 영화에서 함께 공연하기는 <파니>가 처음이었다.
 
  ‘suave’나 ‘debonair(=de bon aire)’라는 어휘는 둘 다 프랑스어에서 유래하며, 영어의 ‘sophisticated’와 비슷하게 ‘우아하고 세련되었으며 느긋한’이라는 의미로 쓰인다. 이들 두 단어는 할리우드에서 캐리 그랜트, 딘 마틴, 프렛 아스테어, 그리고 모리스 슈발리에를 묘사하는 형용사로 흔히 동원되었지만, 샤를 부아이에한테 적용하는 데는 매우 인색했다. 하지만 슈발리에가 교양이 있고 멋진 프랑스인의 인상을 가꾸는 과정에서 부아이에가 끼친 영향은 지대했다.
 
  이탈리아어와 에스파냐어를 위시해 5개 국어를 구사하고 독서를 많이 하며 혼자 지내기를 즐겼던 은둔형의 부아이에는 11살 연상인 슈발리에의 문화적 스승 노릇을 단단히 한 셈이었고, 훗날 결국 슈발리에야말로 대표적인 ‘de bon aire’의 진정한 표상이 되었다. 그래서 할리우드는 슈발리에와 출연 계약을 할 때, “독특한 프랑스어 억양을 쓰지 않고 레슬리 캐론처럼 지나치게 ‘영어화한(Anglicanized)’ 발음을 하면 해약하겠다”는 단서까지 달았다고 한다. 캐론은 빈센트 미넬리의 <파리의 아메리카인(An American in Paris, 1951)>에서 상대역으로 출연할 신인으로 진 켈리가 발레학교에서 직접 발굴한 프랑스 아가씨였다.
 
 
  파리 상류사회의 ‘특수 잉여계층’을 다룬 <지지>
 
영화 <지지>에서 슈발리에는 독신자이자 미녀 수집이 취미인 늙인이 역할을 맡았다.
  멍청영화에 잘 어울리는 아널드 슈워제네거의 투박한 말투와 마찬가지로 슈발리에의 유럽식 영어 발음은 이렇듯 정체성을 보증하는 하나의 상표가 되었다. 정장을 차려입고 미소를 항상 입가에 흘리며 유쾌하고 느긋하게 짙은 프랑스 억양으로 노래를 부르는 모리스 슈발리에의 분위기를 아주 잘 살린 뮤지컬 영화는 두말할 나위도 없이 빈센트 미넬리의 <지지(Gigi, 1958)>였다.
 
  세 번이나 결혼했음에도 동성애를 즐긴다고 자랑하며 떠들던 프랑스 여성 소설가 콜레트(Sidonie-Gabrielle Collete, 1873~1954)가 1944년에 발표한 중편소설이 원작인 <지지>는 MGM의 마지막 대작 뮤지컬이었다. 연예관(music hall)에서 무언극 배우와 무희로도 활동했던 콜레트는 화류계(demimonde) 여자들의 심리를 노골적으로 묘사하면서 자전적인 경험담을 곁들인 소설을 50권이나 발표했는데, 소설 《지지》는 ‘춘희’와 같은 고급 접대부(courtesan) 출신의 할머니로부터 대를 이어 남자를 즐겁게 해 주는 ‘계약직 첩’이 되는 훈련을 받는 소녀가 주인공이다.
 
  잡지에 연재했던 소설 《신사는 금발을 좋아한다(Gentlemen Prefer Blondes)》로 대단한 명성을 얻은 아니타 루스(Anita Loos, 1888~1981)의 각색을 거쳐 소설 《지지》가 1951~52년에 브로드웨이에서 공연되었을 당시 콜레트가 직접 오드리 헵번을 발굴하여 무대로 진출시켰다. 또 러너와 로우(Alan Jay Lerner 대본, Frederick Loewe 작곡)가 희곡을 뮤지컬로 재개작하고 레슬리 캐론을 모리스 슈발리에의 상대역으로 삼아 미넬리 감독이 영화로 옮길 때는 검열에 각별히 신경을 써서 퇴폐적인 분위기를 열심히 제거했다.
 
영화 <지지>의 포스터.
  그래서 사전 지식이 없는 관객은 캐론이 할머니에게서 어떤 종류의 직업 훈련을 받는지 얼른 눈치를 차리지 못할 정도가 되었다. 캐론의 어머니는 집안살림에 전혀 신경을 쓰지 않아서 딸의 장래가 어떻게 되든 도무지 관심이 없다. 그래서 할머니가 대신 어린 캐론의 인생을 설계하지만, 순진한 말괄량이 지지는 할머니가 일반적인 예절이나 옷차림뿐 아니라 여송연 선택법이나 보석 감정법 따위를 어떤 의도로 그녀에게 교육시키는지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다. 당시 유럽에서는 고급 접대부라고 하면, 여성 가정교사와 남성 집사(butler)나 마찬가지로, 자신은 부유하지 못하지만 간접적으로나마 상류사회의 화려한 삶을 언저리에서 덩달아 누리는 혜택을 받던 ‘특수 잉여 계층’이었다.
 
  <지지>에서 훗날 직업적인 사랑을 해야 하는 자신의 처지를 알지 못하는 캐론은 ‘틈만 나면 사랑밖에 할 줄 모르는 파리 사람들’을 희한하게 생각한다. 구수한 독신자 늙은이 슈발리에는 미녀 수집이 취미라면서 “어린 소녀들이 세상에 존재하도록 배려한 하나님에게 감사(Thank Heaven for Little Girls)”를 드린다. 한꺼번에 2000명의 손님을 초대하여 요란한 파티를 여는 젊은 한량 역을 맡은 루이 주르당 역시 프랑스에서 수입한 연기자다. 그는 몸매를 가꾸거나 멋이나 부리면서 일 따위는 전혀 하지 않아도 저절로 돈이 굴러들어오기만 하는 인생 때문에 “지겨워 죽겠어요(It’s a Bore)”라고 한탄하는 노래를 부른다. 여성계를 대표하는 바람둥이 에바 가보르(헝가리 출신 여배우)와 같은 전형적인 부르주아 ‘유한마담’들은 고급 식당을 찾아다니며 먹어대거나 교양을 쌓는 일 말고는 별로 할 일이 없어서, 요즈음 인터넷 채팅과 비슷한 수다 떨기로 무료한 인생을 열심히 낭비한다.
 
  19세기 말 파리 상류사회의 풍속도를 관광안내서처럼 이토록 다채롭게 담아 놓은 영화 <지지>는 아홉 개의 아카데미상을 휩쓸었지만 연기상은 하나도 없었고, 모리스 슈발리에만 특별상의 영광을 누렸다.
 
 
  애정 행각의 죗값을 치른 영화 <하오의 연정>
 
슈발리에는 1929년 첫 유성영화 <사랑의 대행진>에서 자유분방한 애정활동을 벌이다 본국으로 소환되는 대사관 무관으로 주연을 맡았다.
  가수로서 가장 큰 밑천인 노래를 포기해야 했던 무성영화로 할리우드 경력을 쌓기 시작한 슈발리에는 1929년이 되어서야 한껏 노래를 불러 젖히며 인기를 굳혔다. 희극영화의 귀재로 명성을 날린 독일 출신 에른스트 루비치(Ernst Lubitsch, 1892~1947)의 첫 유성영화 <사랑의 대행진(The Love Parade, 1929)>에서 그는 지나치게 자유분방한 애정활동을 벌이다 본국으로 소환되는 대사관 무관으로, 주연을 맡았다. 하지만 1944년 파리에서 공산당 시위에 참가하고 반핵(反核)운동에 서명을 하는 등 좌익운동을 지나치게 열심히 하는 바람에 ‘매카시 선풍’의 된서리를 맞았다.
 
  모리스 슈발리에는 1954년이 되어서야 다시 미국으로 돌아갔으며 <하오의 연정(Love in the Afternoon, 1957)>에 출연했을 때 그의 나이는 70이 다 되었다.
 
  우연히도 같은 해에 태어난 어니스트 리먼(Ernest Lehman, 1920~2005)과 더불어 할리우드 최고의 시나리오 작가로 손꼽히는 I.A.L. 다이아몬드(1920~ 1988)가 빌리 와일더 감독과 호흡을 맞춰 <뜨거운 것이 좋아(Some Like It Hot)>를 함께 만들어 내기 3년 전에 의기투합하여 탄생시킨 <하오의 연정>에서, 모리스 슈발리에는 그가 <사랑의 대행진>에서 수많은 여성과 지나치게 열심히 벌였던 애정의 행각에 대한 죗값을 톡톡히 치른다.
 
  지금까지 살펴본 대부분의 슈발리에 영화에서처럼 역시 늙은 남자와 어린 여자의 ‘사랑’을 소재로 삼은 <하오의 연정>에서 슈발리에는 불륜관계를 전문으로 캐고 다니는 홀아비 사립탐정이다. 그와 함께 사는 얌전하고 착한 딸 오드리 헵번은 첼로를 공부하는 음악도다. 아버지가 조사해서 서류로 정리해 놓은 간통사건 내용들을 마치 사설 도서관이 소장한 음란서적을 탐독하듯 몰래 즐겨 읽는다.
 
  그러다가 슈발리에의 의뢰인 한 사람이 그의 아내와 간통을 저지른 개리 쿠퍼를 죽이겠다고 권총을 챙겨 들고 어느 날 릿츠 호텔 14호 특실로 향하고, 이 사실을 알게 된 헵번은 ‘굉장히 커다란 권총’의 위험을 알려주러 갔다가 우여곡절 끝에 쿠퍼와 사랑에 빠진다. 미국인 재벌 총수 쿠퍼는 세계 각국을 돌아다니며 이 여자 저 여자를 감미로운 음악으로 유혹하여 지저분한 사랑을 즐기고는 하는데, 1년에 한 번 파리에 들를 때마다 상대를 바꾸다가 결국 이름조차 알려주지 않는 어린 헵번에게 발목이 잡히고 만다.
 
  <뜨거운 것이 좋아>나 마찬가지로 <하오의 연정>은 당연히 희극으로 분류해야 하지만, 할리우드 키드의 콧등을 시큰하게 만들었던 인상적인 장면이 적어도 세 군데나 박혀 있다.
 
  그 첫 번째는 늙은 바람둥이의 호감을 얻기 위해 오드리 헵번이 쿠퍼와 격을 맞추려고, 부잣집 딸인 그녀가 지금까지 세계 각처를 돌아다니며 연애를 했던 열아홉 남자를 열거하는 장면이다. 학창시절의 수학선생, 아프리카에서 활동하는 선교사, 코사크 출신의 승마선생, 유고슬라비아 조각가, 네덜란드의 술중독자, 브뤼셀의 은행가, 그 은행가의 운전기사, 피레네 자전거 여행을 하면서 차례로 거친 네 명의 교환학생 등등. 하지만 그들에 관한 자료는 헵번이 아버지의 서류를 탐독하여 습득한 정보였다.
 
  두 번째는 상대방이 순진한 처녀였다는 사실을 슈발리에로부터 알아내고 양심의 가책을 느껴 “다른 여자들을 만나러 간다”고 거짓말로 핑계를 대면서 황급히 파리를 떠나려는 쿠퍼를 오드리 헵번이 역으로 쫓아가는 마지막 장면이다. 기차가 출발한 다음에까지 개리 쿠퍼의 존재는 “잠깐 즐긴 싸구려 정사의 상대였을 따름”이라고 우겨대며 눈물을 글썽이던 헵번은 결국 기차에 뛰어올라 쿠퍼의 품에 안긴다.
 
  세 번째는 바람둥이를 따라 역으로 가 버린 딸 헵번이 호텔 복도에 남겨 두고 간 커다란 첼로를 안고 혼자서 집으로 돌아가는 쓸쓸한 모리스 슈발리에의 측은하고도 애틋한 뒷모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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