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재훈 詩人이 쓰는 대한민국 구라열전 ⑦ 철학자 姜信珠

“얼마나 아파야 아프지 않을까”

  • 글 : 원재훈 시인  
  • 사진 : 조준우 월간조선 객원사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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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개인의 갈등이 우리 사회의 갈등이고, 그 갈등의 열쇠가 인문학에 있다”
⊙ “내가 껍질을 벗었는데 상대방이 고슴도치 껍질을 벗지 않고 다가온다면 가시에 찔린다.
    아플 수밖에”

姜信珠
⊙ 49세. 연세대 철학박사.
⊙ 경원대, 인천대, 경희대 강사.
⊙ 저서: 《장자의 철학》, 《철학적 시 읽기의 즐거움》, 《철학이 필요한 시간》.

원재훈
⊙ 50세. 중앙대 대학원 문예창작학과 졸업.
⊙ 1988년 《세계의 문학》에 <공룡시대> 外 여러 편의 시로 등단.
‘구라열전’을 쓰면서 과연 백기완, 방동규, 황석영 등 ‘조선 3대 구라’의 뒤를 이를 차세대 구라로는 누가 있을까 고민했다. 장강(長江)의 뒷 물결이 앞 물결을 밀어내는 법, 요즘 우리 사회를 움직이는 구라는 누구인가. 대한민국 젊은 구라 중에서 역시 손에 꼽히는 인물은 철학박사 강신주(姜信珠)다. 이 외에 김어준, 김정운 정도가 떠오른다.
 
  강신주와 전화통화를 하고 광화문의 한 커피 집에서 만났다. 며칠 세수도 하지 않은 것 같은 피곤한 모습이다. 요즘 무척 바쁜 일정을 소화하고 있다. 덕분에 감기 몸살을 앓고 있었다.
 
  요즘 부는 서점가 인문학 열풍의 중심에 강신주가 있다. 그는 철학자이다. 스피노자, 쇼펜하우어와 니체가 생각난다. 두꺼운 안경을 걸치고 골방에 처박혀 있는 철학자의 이미지. 방에 철창을 치고 있거나, 깊은 암자에서 면벽수도를 할 것이라는 통념. 강신주는 그 통념을 깨고 강연을 통해, 다양한 저서를 통해 이 시대를 살고 있는 사람의 아픔과 고통을 만나고 있는 중이다. 젊은 그의 몸에서 건강한 기운이 뿜어져 나온다.
 
  “남 탓 하면 늙은 거지요.”
 
  강신주 박사와 마주 앉아서 나눈 첫마디다. 이런저런 세상일에 대해 불만이 많은 사람들. 이 정권이 어떻고 저 정권이 어떻고 우리 부모는 어떻고, 너의 부모는 어떻고, 학교 폭력이 너 때문에 이 지경이 되었고, 연예인들 비롯한 청소년들의 노출이 저래도 되는 것인가, 하여간 우리는 너도나도 남 탓을 한다. 우리 사회가 그런 형국이다. 바로 늙은이의 모습이다. 적어도 강신주는 그렇게 보는 것 같다. 하지만 가만히 생각하면 내 탓 아닌 게 없다.
 
 
  내 탓 남 탓
 
  그럼 나는 젊은 것인가, 그런가 아닌가 싶은데 강신주는 자신의 전공인 인문학에 대해서 말했다.
 
  “우리는 어떤 구원을 받고 싶어하고 누군가에게 위안을 얻고자 하지요. 깃발을 걸어놓고 저기로 가자는 맹목적인 종교와 비교해 인문학 정신은 달라요. 요즘 인문학이 열풍이라고도 하고 저도 강연을 많이 다녀요. 저는 제 강의를 듣는 사람들에게 이런 말을 하곤 해요. 인문학 정신의 근본은 ‘서로 다르다’라는 겁니다. 시(詩)가 서로 다르고, 니체, 공자가 다르지요. 자기니까 볼 수 있는 게 있어요. 자기의 눈으로 볼 때 진정성이 있고, 그곳에서 감동이 나오는 거지요. 그런 공감, 그런 일을 경험하면 그 자리에서 반성을 하는 겁니다. 잠시 멈추고, 그 멈춘 자리에서 반성을 통해 자기 자신의 모습을 봅니다. 그럼 남 탓 안 하게 되지요.”
 
  철학자 강신주가 대중에게 알려진 것은 그의 저서 《철학이 필요한 시간》을 통해서다. 이 책은 강신주의 인문학 카운슬링이다. 지난 몇 년간 대중 강연에서 열심히 사람들을 만나고 그들과 고민을 같이하면서 그의 철학은 강좌가 아닌 현실에서 움직이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가깝게 어떤 것을 접할 때 비로소 흥미를 느끼게 된다. 그는 젊은이들이 모여 있는 대학, 길거리에서 장삼이사(張三李四)의 사람들을 만나고 그들을 가까이에서 보고 이야기를 나눈다.
 
  강신주는 철학이, 동서양의 모든 ‘다른’ 철학이 다양한 인간의 고민을 해결할 단서를 갖고 있다고 확신한다. 모두가 한 방향으로 나아가는 건, 이미 새마을 깃발과 함께 내려갔다. ‘온리 원(only one)’의 시대가 아니라 ‘에브리맨(everyman)’의 시대이고, 이것은 고대로부터 지금까지 모든 현자의 화두였다. 개인의 갈등이 우리 사회의 갈등이고, 그 갈등의 열쇠가 인문학에 있다.
 
  과연 철학이 필요한 것인가, 철학이 종교가 할 수 없는 일을 할 수 있는가.
 
  “요즘은 종교와 정치가 결탁해 있는 형국이지요. 이런 시절에 철학이나 시(詩)가 더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철학이 머리에서 마음으로 마음에서 삶으로 이어진다면, 시는 마음에서 바로 삶으로 이어집니다. 철학에 개념어가 많고 문장이 어려운 것은 그 분야에 훈련이 없어서 그런 겁니다. 그런데 의외로 단순해요. 누구나 남 흉내 내지 않고 자기가 느끼는 대로 사는 겁니다.”
 
 
  흉내 내기에 빠진 세상
 
  말은 쉬운데 그게 더 어렵다. 강신주는 의외로 단순한 일이라고 한 다음 자기의 모습대로 산다는 것에 대한 부연설명을 시작했다.
 
  “시인 김수영은 시인이 바라는 건 시인들이 필요 없는 세상이라고 했지요. 철학도 마찬가지입니다. 고대의 요순시절에 시인이나 철학자가 필요하지 않았을 겁니다. 시인들은 가난하고 고통스러운 삶을 다루지요, 철학자도 마찬가지입니다. 시와 철학은 형제입니다. 불교의 말에서 저는 많은 영감을 얻습니다. ‘성불(成佛)하세요’라고 스님들은 인사합니다. 이것은 ‘자기의 본래면목(本來面目)을 찾아라’라는 뜻입니다. 이것이 바로 인문학 정신입니다. 자신의 모습을 찾는 데 방법이 다른 겁니다. 철학은 머리로, 지성으로 들어갑니다. 철학이 파괴력이 더 크지만, 실제 더 어려운 건 시입니다. 그래서 전 시인들을 좋아합니다.”
 
  ―그래도 어려운 문제를 쉽게 설명한다면요.
 
  “한 카페 아가씨가 중학교 2학년 수학문제를 풀고 있어요. 물어보니 수학이 단순하고 명증하기 때문이랍니다. 철학이 어렵다고 느끼는 건, 규칙이 수학처럼 많아서 그런 겁니다. 철학을 하고 싶다면 그런 공부는 해야 합니다. 자전거를 타기 위해서, 피아노를 치기 위해서 연습하듯 말입니다. 그 과정만 통과하면 쉬워요. 성불하려고 노력하는 과정입니다. 인문학은 내 생각, 내 감정, 내 표현입니다. 좋은 철학서, 철학사전을 보면 됩니다. 철학은 개념으로 사유(思惟)하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자신이 모르는 걸 어렵다고 하지요. 알면 어려운 게 없는데 사실 그게 또 어렵기도 하지요.”
 
  과연 그러하다. 우리는 왜 이렇게 사나 싶을 때가 있다. 아파트, 차, 여자, 남자, 한결같이 자신이 가지고 있는 것에 소홀하고 남 흉내 내는 데 열심이다. 이런 풍조는 예술가들에게는 표절을, 사업가들에게는 사기를 치게 한다. 자기 자신의 모습을 찾기 위해서는 인문학의 도움이 필요하다. 어떻게 하면 흉내를 내지 않고 살 수 있는가.
 
  “왜 저렇게 흉내 내고 살까, 이것이 바로 부처나 철학자, 시인들이 아쉽게 생각하는 세속적인 사람들의 모습입니다. 어떤 수도승은 아침에 일어나 자신의 가슴을 손으로 두드리면서 주인공 잘 있는가라고 인사한다지요. 그래요. 주인공이 돼야 합니다. 내 인생의 주인공이 되어야 한다는 건, 주문이나 타락한 종교가 되면 안 된다는 겁니다. 주인공이 된다는 건, 깨달은 사람이라는 뜻이지요. 인문학은 공부를 통해서 스스로 깨닫게 합니다.”
 
  그는 명(明)나라 철학자 이지(李贄·이탁오)의 글을 인용했다.
 
  <나는 어려서부터 성인의 가르침을 읽었으나 성인의 가르침을 제대로 알지 못했으며, 공자를 존경했으나 왜 공자를 존경해야 하는지 스스로 알지 못했다. 그야말로 난쟁이가 광대놀음을 구경하다가 사람들이 잘한다고 소리치면 잘한다고 소리를 지르는 격이었다. 나이 오십 이전의 나는 정말로 한 마리의 개에 불과했다. 앞의 개가 그림자를 보고 짖으면 나도 따라서 짖어댔던 것이다. 만약 남들이 짖는 까닭을 물으면 그저 벙어리처럼 쑥스럽게 웃기나 할 따름이다.《속분서- 성교소인》>
 
  이 글을 인용하면서 그는 오십 이전에 한 마리 개처럼 살았다는 투철한 자기반성을 토로하는 그 순간 다른 누구도 아닌 그 자신으로서의 삶을 살 수 있게 됐다고 설명한다. 나이 오십은 대부분 경직되고, 그동안 쌓아온 명성으로 살아가기 쉽다. 그런데 비범한 사람은 나이 오십에 이런 각성을 한다.
 
 
  사랑이라는 언어
 
철학자 강신주가 대중에게 알려진 것은 그의 저서 《철학이 필요한 시간》을 통해서다. 그는 지난 몇 년간 대중 강연을 통해 철학을 전파하고 있다.
  강신주 박사는 대학에서 젊은이들과 많은 이야기를 나눈다. 대학생들의 고민 중에서 예나 지금이나 사랑문제는 심각하다. 인문학으로 사랑을 말해 달라.
 
  “괴테의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과 조선의 예인 황진이의 사랑이 다르지요. 진정한 사랑을 한 사람은 느낌이 다르지요. 사랑은 오직 한 사람이 하는 겁니다. 디테일이 다르지요. 최선을 다한 사랑은 감동으로 다가옵니다. 인문학의 본질 중에 사랑을 빼놓을 수 없습니다. 스피노자 이야기를 해볼까요.
 
  사랑한다, 즉 A가 B를 사랑한다, 사랑하면 행복하다는 감정이 있지요. 어떤 사람을 만나면 기뻐요. 내 근처에 두려고 하지요. 타인에 대해서 기쁨을 느끼는 감정이 바로 사랑입니다. 그런데요, 두 사람이 결혼을 하고 십 년이 지나면 열정적으로 ‘사랑한다’라는 표현보다는 출근하면서 ‘다녀오겠다’고 하는 거지요. 그러면서 무덤덤하게 ‘사랑한다’고 합니다. 그럼 부인은 ‘저도요’라고 하지요. 여기서 사랑한다라는 문맥을 잘 짚어야 합니다. 언어에 대해서 집착하는 거지요. 단지 사랑한다는 언어에 대해서 말입니다. 제가 강의를 하면서 결혼한 지 십 년, 이십 년 된 분들과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공통적으로 이 부분을 힘들어합니다.
 
  ‘접시꽃 당신’의 도종환 시인은 누구보다 절절한 사랑의 시인입니다. 도 시인이 나중에 쓴 시 ‘가구’와 ‘접시꽃’을 비교해 보면 알 수 있지요. 언어는 변하지 않지만 사랑은 변질합니다. 도종환의 ‘가구’처럼요.”
 
  도종환의 시 ‘가구’를 읽어보자.
 
  <아내와 나는 가구처럼 자기 자리에/ 놓여 있다 장롱이 그렇듯이/ 오래 묵은 습관들을 담은 채/ 각자 어두워질 때까지 앉아 일을 하곤 한다./ 어쩌다 내가 아내의 문을 열고 들어가면/ 아내의 몸에서는 삐이걱 하는 소리가 난다/ 나는 아내의 몸속에서 무언가를 찾다가/ 무엇을 찾으러 왔는지 잊어버리고/ 돌아나온다 그러면 아내는 다시/ 아래위가 꼭 맞는 서랍이 되어 닫힌다/ 아내가 내 몸의 여닫이 문을/ 먼저 열어 보는 일은 없다/ 나는 늘 머쓱해진 채 아내를 건너다본다/ 돌아앉는 일에 익숙해져 있다./ 본래 가구끼리는 말을 많이 하지 않는다/ 그저 아내는 아내의 방에 놓여 있고/ 나는 내 자리에서 내 그림자와 함께/ 육중하게 어두워지고 있을 뿐이다.>
 
  도종환의 이 시는 중년부부 서사시라 해도 된다. 이 시에서 이야기하는 가구는 결국 많은 부부의 모습이다. 이 시가 읽히는 이유는 읽는 이가 공감하기 때문이다. 이런 공감을 하지 않는 사람은 이 시를 좋아하지 않는다.
 
  ‘접시꽃 당신’에서의 ‘이 어둠이 다하고 새로운 새벽이 오는 순간까지 나는 당신의 손을 잡고 당신 곁에 영원히 있습니다’라는 사랑과 ‘가구’에서의 사랑을 비교하면 간단하다. 시인이 변한 것이 아니다. 시가 변한 것이 아니다. 이것은 사랑이라는 개념이 변한 거다. 이것이 자연스러운 거다.
 
 
  얼마나 아파야 아프지 않을까
 
강신주는 지금이 철학이나 시가 더 필요한 시기라고 생각한다. 그는 “철학은 머리에서 마음으로, 마음에서 삶으로 이어지고 시는 마음에서 바로 삶으로 이어진다”고 말한다.
  ‘접시꽃 당신’을 읽고 눈물 흘리는 사람이 있고, ‘가구’를 읽으면서 고개를 끄덕이는 독자가 있다. 강신주는 현장에서 중년의 사랑을 많이 봤다. 그들의 고민을 들었다.
 
  “그건 정으로 사는 거지, 사랑으로 사는 게 아닙니다. 정확하게 인식해야 합니다. 이 지점에서 철학자의 역할이 필요합니다. 그 이야기를 듣고 고민합니다. 이게 사랑이 아닌데, 그것을 직시하면 삶이 명료해집니다. 사랑이 아니다. 그걸 알라는 거지요. 저는 거기까지만 인도합니다. 저는 산파입니다. 결정을 하는 사람이 아니라, 현실을 바로 보도록 도와줍니다. 개안을 시키는 거지요. 성인으로 추앙받는 현자(賢者) 소크라테스는 자신을 그저 산파라고 했습니다. 그의 모친은 실제로 조산원에서 근무한 산파였고요. 소크라테스는 사람이 태어나는 순간, 각성하는 순간까지만 갑니다. 자신이 뭘 모르는지만 알려주는 겁니다. 그 후로는 그 사람이 알아서 가는 거지요. 저기 술집이 있다. 저기 성당이 있다. 저기에 가면 술이 있고, 저기에 가면 영성이 있다. 갈 길을 가라. 이런 개안은 우리를 괴롭힙니다. 하지만 본래면목을 찾기 위해서는 상황을 직시해야 합니다. 이혼을 하고 싶다는 부인에게 이런 질문을 합니다. 앞으로 생활을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대책은 있습니까, 라고요. 물론 가정사가 극악한 상황이 아니라면 한번 자신의 결정에 대해서 반성을 하겠지요.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것은 가난도 걱정도 병도 아니다. 그것은 생에 대한 권태이다’라고 마키아벨리가 이야기합니다. 사람이라면 보편적으로 느끼는 감정입니다.”
 
  의사가 환자의 환부를 촬영한 엑스레이 사진을 보여주면서 이런 질문을 한다. 당신은 여기가 아픈데 치료를 하시겠습니까. 환자가 치료를 할 것인지 결정을 한다. 말기암에 걸렸어도 환자가 거부하면 의사는 집도를 할 수가 없다. 우리는 이렇게 아픈 존재인가. 강신주의 카카오톡 글귀는 ‘얼마나 아파야 아프지 않을까’이다. 이 문장을 걸어놓은 이유가 있을 거다.
 
  사람들은 모두 이런 병을 가지고 있는 환자이다. 그 아픈 사람들에게 강신주는 말한다. 아파도 당당하라. 삶의 고통은 삶의 어떤 순간에 분명히 온다. 지금 안 왔다면 이십 년, 삼십 년 후라도 그것은 온다. 그런 걸 깨달아야 한다. 그는 강연을 통해서 만난 사람들과 대화하면서 어떤 순간에는 너무 고통스러워 같이 울기도 한다. 하지만 그 고통에 대처하는 방법은 직구승부라고 강조한다. 해결법에 변화구는 없다. 고통을 피해 딴 곳으로 도망갈 구멍을 만들어두면 안 된다. 백척간두, 배수진의 자세로 그 고통과 맞서는 것. 그것이 핵심이다. 사람들은 고민을 통해서 반성한다.
 
  “가정사, 종교문제, 육아문제 등, 모든 사람은 아파하지요. 만약에 누군가의 폭력으로 다리가 잘린 거라면 서 있을 수 있게 도와주는 것, 그것이 철학이 오늘날 할 일입니다.”
 
  만나는 사람의 경우가 다 다를 텐데, 그들의 이야기를 다 들어줄 수는 없는 일이 아닌가 싶었다.
 
  “저는 그들에게 위로의 말보다는 머릿속을 뒤죽박죽하게 만들어버립니다. 마치 퍼즐 놀이처럼 말이지요. 퍼즐조각을 흔들어놓고 다시 처음부터 맞추어보는 겁니다. 그렇게 스스로 정리하게 하기 위해 강연을 합니다. 문제 해결의 실마리를 주는 겁니다. 만나는 사람들의 디테일이 다 다릅니다. 부처가 모든 사람을 만나서 가르침을 전할 수는 없는 일이지요. 강연을 할 때는 청중의 표정을 살피고 그들의 수준에 맞게 말하려고 합니다.”
 
  그러다가 심각한 경우를 만나게 된다. 대부분 사랑하거나, 사랑받지 못하는 사람들이다. 외연이 넓은 개념어 사랑, 이 말처럼 어려운 말도 없다.
 
  “최승호 시인의 ‘고슴도치 마을’이라는 시가 있어요. ‘문풍지 우는 긴 겨울밤엔 장자를 읽으리라’로 끝나는 시인데 제가 장자 전공이잖아요. 하하… 이심전심입니다. 사랑을 하려면 껍질을 벗고 만나야 됩니다. 내가 껍질을 벗었는데 상대방이 고슴도치 껍질을 벗지 않고 다가온다면 가시에 쿡 찔립니다. 아프지요.
 
  도시에 사는 사람들은 온갖 스펙으로 무장하고 사람들을 만납니다. 껍질을 벗고 사랑하거나 사랑받은 경험이 적어요. 이 금융자본주의에서 껍질은 더 단단하고 가시는 더 날카롭지요. 직장상사, 동료, 가족 사이에서 더 외롭습니다. 더 아픕니다. 내가 어느 날 문득 정리해고를 당하는 것이 아닌가, 이런 빚을 지다가 결국은 노숙자가 되는 게 아닌가 하는 두려움이 있어요. 도시에 사는 우리는 고슴도치 마을에 살고 있습니다. 이런 마을에서는 가면 갈수록 더 외로워집니다. 결혼을 해도 이런 고통은 감소되지 않아요. 스펙에 따라 배우자를 고르면 더 외로워집니다. 그 껍질을 벗고 만나야지요. 스펙 따라 가면 속된 말로 나중에 ‘훅’ 갑니다.”
 
 
  어떤 사람이 강한 사람인가
 
  강신주 박사의 이야기는 강단이 아니라 현장에서 나온다. 조선 구라의 첫 번째 조건이다. 구라에는 인생이 있어야 한다는 방동규 선생의 말에 강신주는 충실하다. 그의 말들은 우리가 만난 광화문의 사거리에 있는 모든 이의 말들이기도 하다. 광화문 사거리는 그런 고통이 둥둥 떠다니는 수족관과 같다. 각양각색의 화려한 열대어들이 질식하기 일보 전까지 부유하고 있다. 멀리서 보면 안개가 자욱한 혼란과 고통의 거리이다.
 
  이러한 세상의 고통을 직시하면서 강신주가 즐기는 것은 바로 산행이다. 강신주의 산행은 고은의 시 ‘그 꽃’을 생각나게 한다. ‘올라갈 때 보았네, 내려갈 때 보지 못한 그 꽃’이란 촌철살인의 시가 그에게는 있다. 그는 산을 올라가고 내려가면서 무엇인가를 보고 있는 모양이다. 당신은 산을 좋아한다. 왜 산을 좋아하는가.
 
  “힘드니까요.”
 
  얼마나 더 아파야 아프지 않을까 하는 문맥과 일치하는 태도다. 산을 오르다 보면 힘들다. 하지만 세상을 살아내기 위해서는 더 힘들어야 한다고 그는 생각하고 행동한다. 이런저런 일상과 인간관계, 좌절과 배신 등등 그를 괴롭히는 현실적인 고통에 더 고통스러운 산행으로 맞서 살아가고자 한다.
 
  내가 철학자 강신주를 만난 곳은 산이었다. 정상을 오르고 하산을 하면서 그의 앞면과 뒷면을 보았다. 동전의 양면처럼 올라갈 때와 내려갈 때가 다르다. 하산을 하다 내가 다리를 절자 부축을 해주었고, 올라갈 때는 뒤에서 일행의 뒤를 봐주었다. 그렇게 나는 강신주라는 ‘사람’에 대해서 호감을 가지게 되었다. 전공자들에게 그가 어떤 평가를 받고 있는지 나는 잘 모르겠다. 다만, 나는 강신주의 책을 좋아하는데, 그의 책에는 산을 올라가는 소의 모습이 있기 때문이다. 소는 보통 논을 갈거나 달구지를 달고 워낭소리를 울리면서 평지를 걸어간다.
 
  소가 산으로 가면 고단하다. 강신주가 공부하는 모습을 옆에서 보면 소가 경작지를 벗어나 산을 타는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우리 시대에 철학을 하고, 사람들을 만나 이야기를 한다는 것은 고된 일이다. 그 일을 지금 강신주가 하고 있다.
 
  언젠가, 광화문 사거리에서 강신주는 나에게 시에 대해서 한두 가지 질문을 했다. 매우 근본적인 질문들이었다. 나는 건성으로 대답했다. 그는 우리 시의 정수를 뽑아 에세이를 쓰고 있다. 시와 철학이 어떻게 연결되는지, 삶에 어떤 연결고리를 가지고 있는지, 우리의 마음을 어떻게 다루고 있는지 꽤 어려운 문제를 쉽게 잘 쓰고 있었다. 이러한 작업의 일환은 김수영 시인에 대한 책을 탈고했다는 이야기로 귀결된다. 문학을 하는 사람으로서 그를 사랑하지 않을 수 없다. 내가 생각하기에 과대평가되어 있는 김수영을 강신주는 어떻게 보고 어떤 철학적 사유를 하는지 궁금하기만 하다.
 
  문학평론가와 시인들이 본 김수영과 철학자 강신주가 본 김수영. 철학적 사유가 깊은 김현승이나 김구용이 아니고, 왜 김수영일까, 그 대답은 책에 나와 있을 것이다. 이러한 저술활동이 무척 힘든 일이기도 하다. 그의 서재에 가보면 책들이 고통스럽게 나뒹굴고 있다. 청계천 구석의 헌책방처럼 널브러져 있는 책들 사이, 강신주는 사유하고 행동한다. 그는 세상 앞에 당당하고 강해지고 싶은 것이다. 어떤 사람이 강한 사람인가.
 
  “더 힘들어야 많이 힘들어야 감당할 수 있습니다. 강한 사람은 자신의 발바닥에 있는 벌레를 밟아 죽이는 사람이 아니라, 초원에서 달려오는 사자와 맞짱 뜨는 사람입니다. 그런 심장을 가지기 위해 저는 산에 올라갈 때 시계를 맞추어 놓고 올라갑니다. 오십 분 동안 한 번도 쉬지 않고 올라가지요. 말 그대로 죽어라 올라가는 겁니다. 그것은 중요한 경험입니다.
 
  아버지가 어려서 본드를 흡입해 보거나 가출한 경험이 있을 때 청소년들을 이해할 수 있지요. 범생이는 문제 청소년들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학교 선생님들도 연수 다니지 말고, 룸살롱에서 아르바이트도 하고, 새우젓 배도 타면서 힘들어야 진정성을 보게 됩니다. 책을 본다고 해결되는 문제는 따로 있지요. 그것은 인생의 입문서이고, 실제 생활에서는 가혹한 경험을 한 사람이 개과천선을 해서 선생이 되는 겁니다.”
 
 
  동양철학에 빠진 이유
 
   ‘선생’은 먼저 태어난 사람을 뜻한다. 외연을 넓혀서 해석하자면 먼저 깨달은 사람이다. 먼저 경험한 사람이다. 경험이 없으면 선생이 아니다. 학생이 선생에게 아픔을 이야기하면, 선생님도 이렇게 이렇게 아팠다고 이야기해야 한다. 경험도 없이 말장난하면 신뢰감이 생기지 않는다. 선생이 바다 이야기를 하면 학생의 눈에 바다가 보이고 물고기가 퍼덕거려야 한다. 강연은 사람을 만나는 일이고, 내가 삶이 힘든 걸 알고 사람을 만나야 한다. 그리고 글쓰기를 준비하는 것이다. 편안하면 안 된다. 그는 말했다.
 
  “사람을 만날 때 힘들어요.”
 
  강 박사에게 개인적으로 제일 힘들었던 시기가 언제인가를 물었다.
 
  “유년시절이 제일 힘들었어요. 집에서 독립을 하기 전에 힘들었습니다. 내가 하고 싶은 걸 할 수 없었어요. 시키는 대로 해야 했고, 무서운 부친 앞에서 강아지처럼 살았지요. 이런저런 이유로 집안은 저에게는 폭력적인 장소였어요. 그걸 견뎌내기 위해서는 일단은 시키는 대로 묵묵히 공부해야 했습니다. 부친이 돌아가신 게 저는 한고비를 넘긴 겁니다. 부친의 안타까운 주검은 이제 저에게 새로운 인생의 길을 걸어가라는 메시지이기도 했지요.”
 
  ―그래서 공대에 진학한 것인가요.
 
  “그렇습니다. 집에서 취직이 잘되는 학과를 원했고, 화공학과를 졸업하고 괜찮은 직장에 취직도 했어요. 지금도 많은 사람이 원하는 그런 편한 직장입니다. 하지만 저는 그 울타리에서 뛰쳐나왔습니다. 독립을 한 거지요. 그제야 내가 하고 싶은 공부를 했습니다. 동양철학을 공부했고 장자를 전공했어요.”
 
  ―왜 동양철학이고 장자인가요.
 
  “대학시절에 이미 서양철학은 공부를 했습니다. 그 시절에 사회과학서적, 서양철학서적 몇 권 안 읽은 사람 없어요. 저도 서양철학은 어느 정도 봤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여태 보지 않았던 장자와 불교에 매력을 느끼기 시작했습니다. 그 만남에서 나는 한방에 훅 갔어요. 우리는 이 현실을 어떻게 해야 하나, 나는 어떻게 살아야 되나, 법화경에 나오는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이런 가르침들은 나를 매혹시켰습니다. 동양의 어떤 정신들이 서양의 문학과 철학보다 한 발 더 나아간 것 같다는 느낌을 받았지요. 사람들은 아는 걸 배우려 하지 않아요. 모르는 걸 배우는 겁니다. 나는 장자나 불교를 통해서 내가 모르는 게 뭔가를 비로소 알게 된 겁니다.”
 
  ―그럼 시인들에게서는 뭘 배웁니까.
 
  “시인이라는 사람들이 재밌어요. 본래면목을 찾아가는 사람들입니다. 성불하는 사람들이에요. 그래서 관심을 가지게 됐어요. 제가 일하는 사무실에서 어떤 시인을 만났는데, 그에게서 그런 모습을 봤습니다. 시인들은 모두 다르고 매우 자유로운 사람들이고 가난한 사람들입니다. 그 시인을 만나기 전까지 저는 한 번도 시인을 만난 적이 없어요. 그 후에 우리 시를 읽고 시인들을 보면서 철학과 연결고리를 찾았습니다. 그 시인을 만나고 나서부터 시와 철학에 대한 책을 쓰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철학적 시 읽기의 즐거움》과 《철학적 시 읽기의 괴로움》 등의 저서를 통하여 역시 철학과 시를 연결고리로 시를 통해 현대 철학의 주요 개념과 현대 철학자들이 고민했던 문제가 무엇인지를 살폈다.
 
 
  종교와 노예
 
  우리는 이야기를 나누면서 대형교회와 종교와 정치의 결탁에 대해 통탄의 심경을 나누었다. 이 시대에 과연 신은 어떤 모습으로 우리 앞에 있는 것인가. 예수는 지금 어느 거리에서 좌절하고 있는가, 철학자로서 신을 어떻게 보는가.
 
  “모세가 자신의 뒤를 따르는 유대인들에게 ‘저기가 가나안 땅이다. 어서 가자’라고 선동하면, 인문학자는 뒤에서 똥침을 놓습니다. ‘뭔 말을 하는 겁니까, 메시아와 낙원은 나에게 있는 겁니다.’ 내가 나를 구원합니다. 이 세상에 ‘멘토는 없다’라고 말하면 사람들은 떨떠름한 표정을 하지요. 하지만 어쩔 수 없지요. 경전 속의 삶과 우리의 삶은 다른 겁니다. 누구의 뒤를 따라간다는 건 바로 노예의 삶을 사는 것이고, 그것이 족쇄입니다. 그나마 종교는 차선입니다. 그래서 대중불교가 있는 것이고, 기독교가 있는 거지요.”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강신주 박사는 매우 에너지가 넘치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강신주는 근육으로 글을 쓰는 철학자이다. 그가 산을 다니고 강연을 다니면서 형성된 이두박근과 삼두박근은 그의 영혼의 팔을 튼튼하게 만들었다. 그 근육의 결에는 그가 학교에서 배운 철학적인 개념어들과, 성장하여 세상을 돌아다니면서 들은 말들, 이혼을 하고 싶다는 아줌마의 고민, 실연을 해서 자살을 하고 싶다는 철부지 학생의 고민, 경제적인 문제로 고통을 받고 있는 친구들의 고민이 함께한다.
 
  그는 남들이 잘 모르는 말을 열심히 공부해서 사람들을 만나 그들의 상처를 보듬어주고, 위안해 준다. 이것이 밭을 갈고 난 소가 경작지를 떠나 산에 올라가는 모습이다. 그는 이런 말을 남기고 서둘러 강연하러 떠났다.
 
  “성불하세요,
 
  당당하세요,
 
  한 번밖에 없는 삶,
 
  사랑도 괴테 흉내 내지 말고,
 
  목숨 걸고 스스로 하세요.”
 
  그가 일어난 자리가 허전하다. 그래도 나는 나의 길을 가야 한다. 허름한 나의 집필실로 가는 시간이 즐거웠다. 거기에 내가 직시해야 할 고통과 아픔이 뱀처럼 똬리를 틀고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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