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연재

털어놓고 하는 이야기- 崔時仲 편 (上)

장돌뱅이가 어울렸던 어린 시절

  • 정리 : 김태완 월간조선 기자  kimchi@chosun.com
  • 사진 : 조준우 월간조선 객원사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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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 주]
《월간조선》이 2012년 1월호부터 추억과 감동의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새 연재물 <털어놓고 하는 이야기>는 한국 근·현대사를 눈물 겹게 살아온 명사(名士)들의 진솔한 고백이자 회고입니다.
첫 고백은 최시중(崔時仲) 방송통신위원장이 하였습니다. 120리 길을 걸어다니며 장돌뱅이가 됐던 한 소년이, 대통령의 ‘멘토’이자 현 정권 출범의 주역이 되기까지의 이야기를 담았습니다. 많은 관심 바랍니다.

⊙ 어부인 아버지의 낙상(落傷)으로 ‘소년가장’에 장돌뱅이가 되다
⊙ 5일장 돌며 하루 120리길 걸어 오징어, 대게 팔아
⊙ 동네서점 점원으로 일하며 인문학 심취… 세상에 대해 눈떠
⊙ 고 3때, 부당해임 교사 6명 복직 요구하며 휴학 주도… 해임철회

崔時仲
⊙ 74세. 서울대 정치학과 졸업. 동양통신 기자, 동아일보 정치부장·논설위원·편집국 부국장,
    한국갤럽조사연구소 회장 역임.
⊙ 現 방송통신위원회 초대 위원장(2011년 3월 연임), 국무총리실 산하 콘텐츠산업진흥위원회
    당연직 위원.
나는 평생 기자로 살았지만, 신산(辛酸)스럽던 내 삶을 기록으로 남기진 않았다. 그러나 소년가장이 되어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깨어나 경북 포항과 기계, 안강, 경주, 영천을 떠돌던 장돌뱅이 유년시절을 잊은 적이 없다. 속이 시커멓게 타 들어가는 고통이었으나, 회피하거나 도망치지 않았다. 가난이 야속했지만 ‘정신의 모험담’이 되어 나 자신을 일깨우고 도전하게 만들었다.
 
  일흔이 넘어 처음으로 나의 이야기를 털어놓으려 한다. 뒤돌아보니 기뻤던 일도 슬펐던 일도 다 있지만, 모든 체험이 한국 근·현대사의 눈물겨운 역사와 맞닿아 있다는 생각이 든다. 하늘이 나와 가족과 이웃, 우리나라를 버리지 않았음에 감사한다.
 
 
  보결로 초등학교 입학
 
  나는 1937년 경북 포항의 항구마을 구룡포에서 태어났다. 여느 어촌처럼 바다가 있고, 바다를 내려다볼 수 있는 바위(내가 즐겨 찾아가던 바위를 ‘내 바위’로 명명하기도 했다.)가 있었으며 멀리 형산강이 굽이굽이 흐르고 있었다. 동해바다는 나에게 의지를 새롭게 하고 용기를 일깨우며 상상의 나래를 펴는 생명의 원천과 같은 공간이었다.
 
  기억이 가물가물한데, 초등학교 5학년이나 6학년 무렵이었다. 아버지는 해방 직후 쌍끌이배로 고등어를 잡는 어부이자 어로장이셨다. 어느 날 망루에서 고기떼를 보고 내려오시다 크게 낙상(落傷)을 했다. 그때가 40대 중반이었다. 이후 하반신 마비로 다리를 못 쓰게 됐고 평생 생활능력을 잃었다. 겨우 지팡이를 짚고 다녔는데, 구룡포 앞바다를 하염없이 바라보시던 모습이 떠오른다.
 
  그날부터 어머니와 나, 3명의 여동생은 살기 위해 몸부림쳤다. 어머니는 생선을 파는 도부장수가 되어 새벽에 나가 기진맥진해 돌아왔다.
 
  아버지가 다치기 전 우리집 형편이 어땠을까 생각하다가, 문득 내가 초등학교(구룡포초등학교)를 보결(?)로 입학한 사실이 떠오른다. 1944년 입학 당시 초등학교 교장은 일본인이었다. 그땐 입학 정원보다 지원학생 수가 많아 입학시험을 봐야 했다. 입학 여부는 구두시험으로 대신했는데 질문은 단 두 개였다.
 
  “말(馬)에 뿔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당연히 “없다”고 답했다.
 
  “하나에서 열까지를 헤아려 보세요.”
 
  나는 “하나, 둘, 셋, 넷…”에서 열까지를 단숨에 외웠다. 그런데 불합격 처분을 받았다. 나중에 알고 보니 일본어로 말하지 않고 우리말을 한 것이 잘못이었다. 그리고 며칠 뒤 아버지와 나는 교장 선생님의 사택을 찾았다. 아버지는 찹쌀 한 가마를 지게에 졌다.
 
  교장 선생님께 인사드리고 돌아온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등교 통지를 받았다. 아버지가 ‘특청’을 넣은 것이 효력을 발휘한 것이다. 전쟁 말기, 찹쌀 한 가마가 집에 있었다는 것은 살림살이가 괜찮았다는 뜻이 아닐까.
 
 
  눈물자국 마를 날이 없었다
 
오른쪽에서 네번째가 대륜고 시절 최시중. 교복 살 돈이 없어 군복을 염색했다. 친구들이 구두를 신고 있지만 혼자 운동화를 신었다.
  아버지가 낙상한 이후 모든 것이 달라졌다. 어머니는 밤낮없이 일했지만 여섯 식구가 먹고살기는 턱없이 부족했다. 게다가 6·25 전쟁이 터져 살기가 더욱 어려워졌다. 당시 형산강을 경계로 북쪽은 북한 인민군이, 남쪽은 국군이 대치하며 전쟁을 벌였다. 우리 가족은 구룡포읍에서 1km쯤 떨어진 ‘새골’이라는 산골에 천막을 치고 피란살이를 한 기억이 난다. 멀리 장사를 떠났던 어머니도 용케 우리가 있던 천막으로 돌아오셨다.
 
  전쟁이 끝난 뒤에도 형편은 나아지지 않았다. 구룡포중학교에 수석으로 입학했으나 학비가 없어 수업을 빼먹는 날이 많았다. 등록금을 내면 몇 달 학교를 다니다가도, 못 내면 다닐 수 없었다. 내가 학교를 빠져도 학교 수업은 계속되었다. 그것이 냉혹한 현실이었다. 나는 어머니를 도와 선창가에서 고구마나 호박떡을 구워 팔았다. 숯불로 구우니까 항상 얼굴은 얼룩덜룩했다.
 
  보통 장사는 오전 7시에 시작해서 10시까지가 성시(成市)였다. 아침을 거른 어부들과 상인들에게 주로 팔았는데, 그 시간은 구룡포중학교 학생들이 등교하는 시간이었다. 남학생이 지나가며 힐끗 보는 것은 그나마 참을 만했지만, 여학생이 쳐다보는 것은 괴로웠다. 당시 구룡포중학교는 남녀공학이었다. 숯불을 부채로 부치느라 눈물이 마를 날이 없었지만, 여학생들과 눈이 마주치면 부끄러움에 속으로 눈물을 흘려야 했다. 늘 얼굴에는 눈물자국이 마를 날이 없었다.
 
  밤에는 ‘펭귄 표’ 통조림 공장에서 통조림 나무상자를 만들었다. 목재소에서 합판을 가져다가 망치와 못으로 상자를 만드는 작업이었다. 그 시절에는 목장갑이란 게 없었다. 서툰 맨손으로 일하다 손을 다치기 일쑤였다.
 
 
  장돌뱅이가 되다
 
  밤낮으로 일했지만 그것으로 여섯 식구의 끼니를 해결할 수 없었다. 본격적으로 장사를 시작했다. 구룡포 집에서 포항 죽도시장까지는 어림잡아 60리(24km) 길이었다. 오징어 200마리, 그러니까 10축을 둘러메고 새벽 5시쯤 집을 나섰다. 버스요금을 아끼려 60리 길을 걸어갔다. 쉬지 않고 걸으면 오전 10시쯤 죽도시장에 도착할 수 있었다. 대략 50리 길을 지나는 지점이 지금의 포항제철이 있는 곳이었다. 그곳을 지나면 어깨가 축 처지고 걸음걸이가 무뎌졌다. 그러나 먹고살겠다는, 살아야겠다는 일념으로 한발 한발 내디뎠다.
 
  저녁 5시쯤 오징어를 다 팔고 쌀 한두 되를 산 뒤 다시 왔던 길을 되돌아와야 했다. 그러니까 하루에 120리 길을 걸어 다닌 셈이다. 집에 도착하는 시간은 얼추 밤 11시쯤이었다. 당시엔 도로 포장이 안돼 있었고 가로등도 없던 시절이었다. 터덜터덜 혼자 걸어오다 허깨비가 보이고, 호랑이가 덮칠 것 같은 두려움에 오금이 저리기도 했다. 포항과 구룡포 중간지점에 200m쯤 되는 터널이 있었다. 터널에는 전깃불도 없고 방수공사도 잘 안돼 있어 물방울이 목덜미에 떨어질 때 모골이 송연했던 두려움이 지금도 생생하다. ‘걸음아 날 살려라’ 하는 심정으로 뛰듯이 집으로 돌아왔다.
 
  그 시절, 고난을 고난으로 여기지 않고 120리 길을 걸었다. 돌이켜 보니, 멀고도 멀었던 그 길이 내게 ‘축복’이었다. 그 덕분에 지금도 걷기만큼은 자신 있다. 빨리 걷고, 또 멀리 걸어도 피곤하지 않다. 지금까지 살아오며 병원 신세를 진 적이 없고 멀리 해외출장을 가도 시차(時差)를 느끼지 않는다. 국내든 해외든 오전 6시만 되면 벌떡 일어나 걷기 시작한다. 그런 걷는 습관이 나를 지탱하는 힘이 됐다.
 
  본격적인 장돌뱅이 길로 들어섰다. 구룡포 장에서 오징어와 대게를 사서 장기 장(現 포항시 남구 장기면)에서 팔고, 또 장기 장에서 물건을 떼 와 오천 장(現 포항 남구 오천읍)으로 건너가 팔고, 다시 영일 장(現 포항 남구 연일읍)으로 떠나는 식이었다. 잠은 길바닥이나 개울가에서 청하여, 진짜 장돌뱅이가 되어 갔다. 물건이 좋으면 멀리 안강, 경주, 영천까지 원정을 나갔다.
 
  본격적인 대게 철이 되면, 대게를 드럼통에 넣어 밤새 장작불로 쪘다. 살이 탱탱하게 분 대게가 그렇게 먹고 싶었지만 한 번도 먹지 못했다. 찐 대게를 가마니에 포장해서 시외버스에 싣고 경주나 안강 장터에 나가 팔았다.
 
  그 시절을 회상하면 신통하다는 생각이 든다. 키도 작고 힘도 부족한 소년이 타지의 5일장을 돌아다녔으니 말이다.
 
최시중 방송통신위원장 생가 주변에서 바라본 구룡포 항구. 이곳에서 그는 바다를 바라보며 꿈을 키웠다.
 
  책에 빠지다
 
  당시 구룡포에는 작은 서점이 하나 있었다. 단지 책을 읽고 싶은 마음에 서점 점원을 자청했다. 서점 주인을 찾아가 “열심히 일할 테니 손님이 없는 시간에 책을 볼 수 있게 해 달라”고 청했다. 물론 무급이었다. 하루에 손님이 고작 10명 정도여서 책 읽을 시간이 많았다. 규모는 작았으나 소설류나 전기류 등 구색은 다 갖추고 있었다. 1년여 동안 하루 5~6시간씩 책을 읽으며 보냈다. 지금 내 머릿속 지식의 절반 이상이 그 시절 독서에서 나왔다.
 
  톨스토이의 《부활》, 사르트르의 《구토》, 이병도의 《국사대관》, 이광수의 《무정》, 카뮈의 《이방인》, 게오르규의 《25시》 등을 독파한 기억이 생생하다. 책을 읽으며 사춘기적 고민을 많이 했다. 예를 들어 ‘인생이란 무엇인가’,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나’ 하는 식이었다. 당대 사상가나 신앙인이 하는 고민을 하면서 내 가난한 처지를 생각했다. 나를 사로잡았던 두 개의 문구도 떠오른다.
 
  “인생은 행복을 추구하는 시간의 연속이다.”
 
  “인생은 선택의 연속이다.”
 
  그 시절 내게는, 나를 일깨워 줄 스승도 친구도 없었다. 오직 혼자 생각하고 고민하며 견뎌 내야 했다. 내가 선택한 일은 자신이 책임을 져야 했다. 살며 얼마나 많은 선택을 하는지를 생각했다. 따지고 보면, 삶은 기막힌 선택들이 켜켜이 쌓인 결과물이 아닌가.
 
  책임을 받아들인다는 것은 현실을 직면한다는 뜻과 다르지 않다. 나는 가난한 현실을 외면할 수 없었다. 가난이 야속하고 어머니의 기진맥진한 모습이 슬펐지만 그렇다고 현실이 달라지지 않았다. 그래서 견뎌야 했고, 선택과 책임을 져야 했고, 그 속에서 행복을 찾으려 했다.
 
 
  훔쳐먹은 무화과의 감동
 
  집 근처에 작은 공원(구룡포공원)이 있었다. 답답할 때는 울적한 심사를 달래려고 줄넘기를 하곤 했다. 맨발로 줄넘기를 할 때마다, 내 발 밑에 다져진 이 땅처럼, 몸과 마음도 다져져야 제대로 된 인간으로 살 수 있다고 수없이 되뇌었다. 그것을 ‘극기(克己)’라고 생각했다. 극기라는 말을 내 인생의 좌우명으로 삼은 것도 이때부터다. 지금도 동해바다를 바라보며 줄넘기를 하는 광경이 떠오른다.
 
  평생 담배를 입에 대지 않은 것도 극기와 연결돼 있다. 말이 중학생이지, 장사하느라 학교에도 못 갔던 나에게 초등학교 시절 담임 선생님으로부터 교과서 등사를 도와 달라는 부탁을 받았다. 당시는 교과서를 학생 수대로 구하기 어렵던 시절이어서 등사본으로 책을 만들곤 했다.
 
  초등학교 시절, 필체가 좋아 수업자료를 등사하는 일에 곧잘 불려 갔다. 그날 등사작업을 하던 중 선생님이 담배를 피우다 그대로 놓고 수업하러 가셨다. 창 밖에서 불어오는 바람에 실려 코 끝에 와 닿는 민트 담배향은 너무나 유혹적이었다. 한창 사춘기를 지나던 시절이라, 한 모금 빨아 보고 싶은 생각과 사투를 벌여야 했다. 엄청난 번민 속에서 담배가 다 타 재가 돼 바닥에 떨어져 버릴 때까지 뚫어지게 바라봤다.
 
  그때 바닥에 떨어진 재를 바라보며, 머릿속에 이런 생각이 떠올랐다.
 
  ‘내가 이 담배를 한 모금 빨면 평생 담배를 피울 것이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을 넘기면 평생 담배를 입에 무는 일은 없을 것이다.’
 
  그 일 이후 지금까지 단 한 번도 담배를 입에 대지 않고 살았다.
 
  무화과 열매에 대한 교훈도 잊을 수 없다. 7살 무렵이었다. 당시 구룡포에는 일본식 신사(神社)가 있었다. 그 신사에 무화과 나무가 있었는데, 어찌나 탐스럽던지 볼수록 침이 넘어갔다. 결국 담을 타 넘고 들어가 무화과 몇 알을 따 먹었다. 더 따려고 하는데 그만 일본인 신사 주지의 아들에게 들키고 말았다. 걸음아 날 살려라, 도망쳤다. 개울에 빨래하러 가신 엄마에게 뛰어갔다. 헐레벌떡 뛰어온 나를 보시고 어머니는 깜짝 놀랐다. 나는 시치미를 뚝 떼면서 “어머니가 보고 싶어 왔다”고 거짓말을 했다.
 
  혹시나 주지 아들이 올까봐 어머니의 치맛자락을 붙잡고 집에 오니, 툇마루에 바구니 가득 무화과가 있지 않은가. 나는 물론이고 어머니도 매우 놀랐다. 나는 자초지종을 밝힐 수밖에 없었다.
 
  어머니는 나에게 아랫도리를 걷으라 하곤 회초리로 때렸다. 아직도 머릿속에 무화과의 교훈이 생생하다. 야단치기보다 무화과를 바구니 가득 선물한 신사 주지의 교육적 의미를 곰곰이 새겨 본다. 그것이야말로 참교육, 인성교육이 아니겠는가.
 
 
  고교진학도 못한 내가 선생님이 되다니…
 
경북 포항 남구 구룡포읍 구룡포리의 최시중 방송통신위원장 생가. 지금은 이웃 주민이 살고 있다.
  군고구마와 호박떡을 열심히 팔고 있을 무렵, 구룡포읍사무소에서 연락이 왔다. 공민학교 선생님을 할 생각이 없느냐는 것이었다. 중학교 졸업장은 간신히 받았으나 제대로 수업도 받지 못하고 밤낮으로 일하던 나를 딱하게 여겼던 모양이었다. 공민학교는 나처럼 정규학교를 다니지 못하는 불우한 학생들을 위한 일종의 공교육 기관이었다. 그때 내 나이 17살, 1953년 무렵이었다. 귀가 번쩍 띄었다.
 
  고교 진학도 못한 내가 선생님이 되다니…, 믿기지 않았다.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나는 1~3학년 담임교사로 학생들을 가르쳤다. 제자 중에는 나보다 나이가 많은 이들도 더러 있었다. 이때 받은 첫 월급으로 한턱 낸다고 산 음식이 세상에 태어나서 처음 맛본 ‘짜장면’이었다.
 
  공민학교 교사를 하며 내 삶을 뒤돌아보았다. 비록 출발은 늦었지만, 세상을 향해 도전하고 싶었다. 어부인 아버지가 낙상을 당한 뒤 뱃사람이 되고 싶은 마음은 사라졌다. 검정고시를 치기보다 당당히 정규과정을 거치고 싶었다.
 
  나는 어디든 고향을 떠나 다른 곳에서 공부하리라 결심했다. 대구의 대륜고등학교에 다니던 외사촌에게 편지를 보내 ‘아무 학교나 고등학교 입학시험이라도 보고 싶다’고 했더니 며칠 뒤 대륜고 입학원서를 보내 왔다. 주저없이 원서를 썼고 남들보다 2년 늦은 ‘늙다리 고교생’이 되었다.
 
  당당히 수석으로 입학했지만 등록금 걱정을 던 것은 아니었다. 담임 선생님이 “중간에 왜 공백기간이 있느냐”고 집안형편을 물었다. 솔직히 고백하자 “어떻게 공부할래?” 하시며 한숨을 내쉬었다. 뜻밖에도 선생님께서 입주 가정교사 자리를 구해 주셨다. 그때부터 먹고 자는 일이 수월해졌다.
 
 
  고교 배구선수로 전국체전 출전
 
  고교시절, 배구선수로 전국체전에 출전했다. 당시만 해도 큰 키(175cm)에다 장돌뱅이로 다져진 체력이 바탕이 돼 센터와 공격수로 주전 자리를 꿰찼다. 1955년 경북도 대표로 서울에서 열린 전국체전에 출전했다.
 
  그때 처음으로 밟은 서울은 폭격으로 초토화돼 폐허나 다름없었다. 큰 건물이 거의 없었다. 그나마 서울역, 명동성당, 남대문, 동아일보, 중앙청 건물은 그대로 있었다. 서울을 상징하는 건물들만 용케도 포화에서 비켜 갔구나 생각하니 신기하게 느껴졌다. 그러나 첫 경기에서 경기고등학교에 패해 예선 탈락하고 말았다. 아쉬움이 두고두고 남았다.
 
  과목은 수학을 가르쳤지만, 배구부 코치였던 선생님도 떠오른다. 정말이지 똑 부러지는 선생님이었다. 수업이 끝나면 주거니 받거니 배구 토스를 연습했는데, 공을 떨어뜨리지 않고 1000번을 계속해야 통과시켜 주었다. 999번을 받다가 한 번을 떨어뜨려도 처음부터 다시 시작했다. 얼마나 힘들던지 자지러질 정도였다. 세월이 흘러 생각하니, 그런 분들이 기억에 남는다.
 
  대륜고 체육 선생님의 동생이었던 ‘반기진’이란 친구를 잊지 못한다. 자기 집에 날 데리고 가서 맛있는 것도 사 주고, 옷가지도 나눠 주고, 사실상 보호자 역할을 해 주었다. 심지어 등록금 도움까지 받았다. 고3 때 내가 학도호국단 운영위원장을 할 때, 친구는 학도호국단 연대장을 할 정도로 절친한 ‘짝’이었다. 친구는 고교 졸업 후 나와 함께 상경, 성균관대에 진학했으나 일찍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너무나 안타깝다.
 
  친구 신세를 지며 학교를 다니던 터라 마음에 늘 빚이 있었다. 그래서 여름방학이면 친구들을 구룡포 집으로 불러 바다 구경을 시켜 주었다. 당시 구룡포에는 고래잡이 어선이 있었다. 그 배를 태워 주는 것이 최고의 관광코스였다. 포경업을 하는 마을 아저씨께 배를 태워 달라고 청을 드려 허락을 받았다.
 
  포경선은 망루가 있다. 망루에는 고래잡이 베테랑만 올라갈 수 있다. 먼 바다를 바라보고 고래의 이동경로를 파악할 수 있기 때문이다. 고래는 포유동물이어서 반드시 수면 위로 숨을 내쉬어야 한다. 유능한 고래잡이 어부는 고래가 물 밖으로 올라오는 지점을 정확히 간파한다. 고래가 얼굴을 내미는 지점의 100m 쯤 주변에서 기다리다가 고래가 나타나면 작살총을 쏜다. 고래는 도망을 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점점 힘이 빠진다. 헤밍웨이의 《노인과 바다》에 나오는 장면을 연상하면 된다.
 
 
  무전여행 중 똥물에서 목욕도
 
  배를 고래 옆에 바싹 갖다 대면 올가미와 밧줄을 준비해야 한다. 너무 무거워 고래를 실어 올릴 수 없다. 줄을 꿰어 고래를 배에 비끄러매고 항구로 돌아간다. 항구 앞에서 긴 뱃고동을 울린다. 포경의 환호였다. 그러면 어판장이 들썩이기 시작한다. 도시 친구들의 눈이 휘둥그레질 수밖에 없었다.
 
  고2 여름방학 동안 혼자서 무전여행을 한 기억이 난다. 1955년 8월이었다. 본격적인 대입시험을 준비하기 앞서 나름대로 고교시절을 정리하고 싶었다. 곧바로 대구로 가지 않고 포항 기계면과 죽장면, 청송, 영주, 선산(구미)을 거쳐 걸어서 대구로 향했다. 국방색 담요 한 장에다 즐겨 읽던 이병도의 《국사대관》, 톨스토이의 《인생독본》을 배낭에 챙겼다. 무식이 용맹인지, 당시는 휴전이 체결된 지 얼마 안돼 깊은 산중엔 빨치산이 출몰했다.
 
  아침부터 걸어 오후 2~3시가 되면 이명(耳鳴)현상이 일어났다. 발뒤꿈치가 땅에 닿으면 귀에서 찡, 찡 하는 소리가 났다. 피곤하다는 신호였다. 그러면 가던 길을 멈추고 그늘 밑에서 쉬었다. 그렇게 쉬다가 걷다가를 반복했고, 배고프면 아무 집에나 찾아가 밥을 얻어먹었다.
 
  포항 기계면을 지날 때였다. 길가에 구멍가게가 보이길래 찾아가 밥을 얻어먹었다. 주인에게 “잠을 자게 해 달라”고 청하니 방이 없다는 것이었다. 가게 옆에 마굿간이 눈에 띄었다. “눈만 붙일 수 있다면 어디든 괜찮다”며 하소연했다. 근처 개울에서 목욕을 하고 마굿간 소 옆에 누워 잠을 청하는데 갑자기 마을 청년 여럿이 죽창을 들고 찾아왔다.
 
  “손 들고 나와. 어서!”
 
  청년들은 “뭐하는 놈이냐”, “왜 이 산골에 나타났느냐”고 다그쳤다.
 
  자초지종을 얘기하고 학생증을 내밀었더니 의심의 눈길을 풀었다. 마을 청년의 말이, 주변에 빨치산 공비의 출몰이 잦다는 것이었다.
 
  이튿날 일어나 다시 길을 재촉하는데, 어젯밤 목욕을 했던 개울이 눈에 들어왔다. 세상에나… 소똥이 덕지덕지 쌓인 곳이었다. 어제 목욕을 할 땐, 아무런 냄새도 없었고 시원하다는 느낌밖에 없었는데, 알고 보니 똥물이었던 것이다. 그것을 보고 당나라로 유학 가며 해골바가지로 물을 마신 원효대사가 떠올라 너털웃음이 났다.
 
  가다가다 지치면 쉬어 가고, 전망 좋은 곳이 나오면 앉아 고함도 치고, 울분도 토하고, 앞날이 보이지 않는 내 삶을 쏟아냈다. 피곤했지만 지루하지는 않았다. 다만, 배고픔은 어쩔 수 없었다. 끼니를 해결하기 위해선 나름대로 머리를 써야 했다. 마을 부잣집이나 선생님, 공무원 집을 수소문해서 문을 두드렸다. 딱한 내 몰골을 보고, 이들은 흔쾌히 도움을 주었다.
 
 
  “젊은이의 사회 불만은 사회발전의 동력이 됩니다”
 
최시중 방송통신위원장의 별명은 ‘울보’다. 어린 시절을 회고하며 자주 눈시울을 붉힌다. 지난 2010년 3월 제주도에서 열린 한국신문방송편집인협회 세미나에 참석, “뒷모습이 아름다운 선배로 남고 싶다”며 눈물을 흘렸다.
  한번은 경북 선산(구미)의 고위 공직자 집을 찾아간 일이 떠오른다. 알고 보니 군수집이었다. 대문을 두드려 “밥 주세요” 하니까 부엌일 보는 아주머니가 주먹밥 같은 것을 주었다. 나는 “거지가 아니니 안에 가서 먹읍시다” 그랬다. 부엌에 갔더니 닭을 넣은 미역국이 보글보글 끓고 있었다. 아주머니가 숟가락을 꽂은 미역 닭국 한 그릇을 건네길래, 이번에는 “상을 차려 달라”고 했다. 손님다운 대접을 해 달라는 것이었다. 아주머니는 뜨악하게 나를 쳐다보더니 상을 차려 주었고, 그릇을 금세 다 비우자 한 그릇을 더 주었다.
 
  그런데 집안이 떠들썩하기에 주위를 살펴보니, 군지역 교육장, 경찰서장, 세무서장 등 유지들이 단합대회를 하고 있었다. 그래서 당시로선 귀한 미역 닭국을 끓였던 모양이었다.
 
  잘 먹고 어디서 잘까 고민하다가 읍사무소로 향했다. 숙직 근무자에게 “같이 잡시다” 청했더니 “여긴 가정집이 아니니 돌아가라”고 했다. 나는 자꾸 “숙직실에서 같이 자고 가자”고 조르는데, 경찰관이 찾아와 나를 연행하는 것이 아닌가.
 
  경찰관은 내 배낭을 다 풀고, 내용물을 조사한 뒤 대륜고로 전화까지 걸어 신분을 확인했다. 의혹은 풀렸지만 무전여행하는 나를 보고 경찰관은 곱지 않은 시선으로 이렇게 말했다.
 
  “너, 임마! 세상에 불평 많은 놈이구나.”
 
  나는 이렇게 말했다.
 
  “예, 많습니다. 그런데 사회에 대한 젊은이의 불만은 사회발전의 동력이 됩니다. 탓하지 마십시오.”
 
  ‘김삿갓 방랑기’도 아니고 경찰관과 많은 대화를 주고받았다. 한참을 듣던 경찰관이 나를 읍사무소에 데려다 주며 숙직 공무원에게 재워 주라고 부탁했다. 이튿날 떠날 채비를 하는데, 그 경찰관이 다시 찾아왔다. 내 손에 20원, 요즘 돈으로 2만원이 훨씬 넘는 돈을 쥐여주었다. 경찰관은 “경찰서장이 주라고 하더라”며 “피곤할 때는 차도 타고 가라”고 다정하게 말했다. 나를 기특하게, 용기 있는 놈이라고 생각했던 모양이었다. 그렇게 무전여행을 끝내고 대구로 돌아왔다.
 
 
  공부하라며 돈 모아 하숙집 얻어준 선생님들
 
  1956년, 그러니까 고등학교 3학년 무렵의 일이다. 봄방학이 끝나고 3월 학교에 갔더니 선생님 6명을 학교재단이 해임하는 사태가 일어났다. 선생님들은 한결같이 젊고 존경받는 교사들이었다. 해임사유도 알 수 없었다. 재단이 부당한 일을 했다고 생각했다. 학도호국단 운영위원장인 나는 선생님의 복직을 내걸고 24일이나 동맹휴학을 주도했다.
 
  자유당 독재정권 시대였기 때문인지 몰라도, 휴학 주동자들을 전원 구속한다는 말이 공공연히 떠돌았다. 휴학기간이 닷새, 열흘이 지나면서 학생들은 점점 동요하기 시작했다. 학부모들까지 나서서 학생들을 학교로 되돌려 보내려 했다. 우리는 아침마다 조를 나눠 학교 등교길을 지키곤 했다. 당시 나는 된장 군납공장 아들 집에서 가정교사로 일하고 있었다. 그 집으로 학생회 간부들을 불러 대책회의를 가지곤 했다.
 
  어느 날 재단에서 선생님 6명 중 3명만 복직시키겠다는 뜻을 전해 왔다. 받아들일 수 없었다. 그러자 대구·경북지역 교장선생님들이 모여 나를 퇴학시키기로 했다는 소문이 들렸다. 그리고 어떤 학교도 나의 재입학을 불허하기로 결의했다는 얘기도 나왔다. 나는 생각했다. 학교를 그만두면 다시 장돌뱅이가 되면 그만이라고. 두렵지 않았다.
 
  3주가 지나고 25일째 되던 날, 드디어 재단이 백기를 들었다. 6명의 선생님을 전원 복직시키기로 결정한 것이다. 뛸 뜻이 기뻤고 당당히 학교로 돌아올 수 있었다.
 
  학교는 정상화됐지만 공부할 시간이 너무 부족했다. 어수선한 학교 분위기에다 방과후 가정교사 탓에 공부에 집중할 수가 없었다. 나를 걱정하던 선생님들이 십시일반 돈을 모아 하숙집을 얻어 주었다. 팔자에 없는 ‘고급’ 하숙생이 된 것이다. 그날부터 대입시험을 치르는 5개월 동안 내 인생에서 가장 열심히 공부했다. 엉덩이가 짓무르를 때까지, 토막잠을 청하며, 교과서를 다 외우다시피 공부했다. 정말이지 죽을판 살판으로 공부했다.
 
  서울대 입학시험을 치르던 날, 수학 시험지를 받고 절망할 수밖에 없었다. 가장 배점이 높은 문제를 풀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답이 보이지 않았다. 가만히 눈을 감았다. 역사과목 선생님이 한 말씀이 떠올랐다.
 
  ‘나폴레옹 사전에 불가능이란 없다.’
 
  그날, 그 시간에 하필 선생님의 그 말씀이 왜 떠올랐을까. 그리고 눈을 뜨고 다시 시험지와 마주했다. 서울대 정치학과에 당당히 합격했다.
 
 
  실패란 ‘아직 성공하지 못했다’는 뜻
 
2008년 3월 26일 최시중 방송통신위원장이 동향의 이명박 대통령에게 임명장을 받은 뒤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나에게 정신적으로 가장 큰 영향을 끼친 단어가 극기다. 쏟아지는 잠을 이기기 위해, 배고픔을 참기 위해, 힘든 일을 견뎌내기 위해, 밀려드는 유혹을 뿌리치기 위해, 절체절명의 위기를 겪어 온 시간이었기에 극기는 내 정신을 지배한 단어가 되었다.
 
  그런 의미에서 소년 시절의 고생은 어떤 어려움도 돌파할 수 있는 정신적 힘을 주었고, 지금까지 큰 병 없이 건강하게 살 수 있는 체력을 만들어 주었다.
 
  나는 인생 여정 속에서 행복한 삶을 살아가는 데 도움이 되는 몇 가지 사자성어를 마음속에 품고 있다. 한 개인으로서는 천망불루(天網不漏), 이웃과 더불어 사는 사람으로서는 송무백열(松茂栢悅), 조직의 일원으로는 화이부동(和而不同)이다.
 
  우선 한 개인으로서 자신을 스스로 다스리기 위한 ‘천망불루’는 노자의 《도덕경》에 나오는 ‘천망회회 소이불루(天網恢恢 疏而不漏·하늘의 그물은 넓고 넓은 것 같아 보이지만, 하나하나를 챙기며 결코 빠뜨린 적이 없다)’에서 유래한다. 의도적으로 남을 속이고 해치는 것처럼 자신의 양심에 어긋나거나 인륜을 저버린 죄는 하늘이 반드시 응징을 하게 된다. 양심과 소신을 지키며 하늘의 뜻에 반하지 않는 삶을 살아야 값진 삶을 살 수 있다.
 
  또한 사람은 혼자 살아갈 수 없다. 이웃들과 더불어 살아가는 지혜가 필요하다. 그것이 바로 ‘소나무가 무성하면 곁에 있는 잣나무가 기뻐한다’는 뜻인 송무백열의 정신이다.
 
  ‘남과 사이좋게 지내되 의(義)를 굽혀 좇지는 아니한다’는 의미인 화이부동도 필요하다. 자신의 원칙과 주장을 펼치면서도 상대방 주장을 경청(傾聽)하고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한다. 남을 생각하지 않는 아집은 대립과 갈등만 야기한다. 비빔밥은 30여 가지 각종 재료가 어우러져 독창적인 맛을 낸다. 비빔밥처럼 화(和)하면서도 동(同)하지 않고, 각각의 개성을 살린 악기들이 심포니를 이루듯, 다양성 속에서 상생(相生)해야 한다.
 
  또 인생 전반에서는 새옹지마(塞翁之馬)와 역지사지(易地思之)라는 말을 늘 새겨 왔다. 세상을 살다 보면 맞닥뜨릴 어려움이 끝없이 많다. 때로는 넘어지기도 하지만, 이 또한 털고 일어서는 법을 배우는 소중한 계기가 된다.
 
  실패란 실패자란 뜻이 아니라 “당신이 아직 성공하지 못했다”는 뜻일 뿐이다. 실패의 원인을 찾고 일어설 줄 아는 용기가 더욱 현명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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