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중탐구

‘오사카 반란’의 주역 하시모토 토오루(橋下徹)

시민 지지 바탕으로 ‘시민단체’와 싸우는 개혁 선봉장

  • 글 : 유민호 퍼시픽21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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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버지는 賤民집단인 부라쿠민(部落民) 출신의 야쿠자
⊙ 복지축소, 공무원 감축 등으로 좌익 시민단체로부터 암살 위협까지 받아
⊙ “아이들에게 말로 해서 안 될 때는 힘으로 해결해야 한다”
⊙ “韓·中에 더 이상 빚 없다”

劉敏鎬
⊙ 51세. 연세대 정치외교학과 졸업. 일본 마쓰시타 정경숙 15기.
⊙ SBS 보도국 기자, 일본 경제산업성 연구소(RIETI) 연구원. 現 워싱턴〈Pacific,Inc〉프로그램
    디렉터, 딕 모리스 선거컨설턴트 아시아 담당 소장.
2011년 11월 27일 오사카 시장 선거에서 승리한 후 지지자들과 함께 만세를 부르는 하시모토 시장.
반역·반란의 시대이다. 세대·성별·인종·장소·시간을 가리지 않고 전(全) 세계에서 역풍(逆風)과 광풍(狂風)이 불고 있다.
 
  각자의 기준에 따라 다르겠지만, 21세기 광풍의 진원지를 굳이 꼽자면, 지금도 계속되고 있는 이슬람권이 될 수 있지 않을까? 제2차세계대전이 끝나면서 지금까지 지탱하던 이슬람권의 모순이 반란을 통해 한순간에 터져 나온다. 어쩌면 한 세대(世代) 이상 끌지도 모르는 이슬람권의 변화는 곧바로 미국으로 옮겨간다. 9·11테러 10주년이 끝난 직후 뉴욕에서 시작된 ‘월스트리트를 점령하라(Occupy Wallstreet)’운동이다.
 
  잃어버린 10년, 20년, 아니 30년으로까지 나아갈지도 모를, 변화와는 담을 쌓고 지내온 일본에도 강한 바람이 상륙했다. 진원지는 ‘덴슈가쿠(天守閣)’가 중심인,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의 아성(牙城) 오사카(大阪)이다. 주역은 1969년생 42세의 하시모토 토오루(橋下徹)이다. BBC 기사에 따르면 ‘깡패 아들(Gangster’s Son)’로, 오사카 시장에 당선된 인물이다.
 
  민주·자민·공산당이 공동추천한 현역시장을 ‘압도적’ 표차로 누르고 당선된, 무당파(無黨派) 정치인이다. 젊고 패기에 넘치는 변호사 출신이자, 정치에 나서기 전 모든 TV 방송국에 종횡무진 출연한 탤런트이기도 하다. 20대 초에 결혼해 무려 7명의 자식을 가진 아버지이다. 변호사·탤런트·정치인, 그리고 대가족의 가장(家長)으로 전부 성공한, 국민적 인기를 누리는 스타이기도 하다.
 
 
  하시모토는 박원순이 아니다
 
  2011년 11월 말 하시모토 당선소식이 전해졌을 때 대부분의 한국인은 한 달 전 서울에 불어닥친 엄청난 광풍을 떠올렸을 것이다. 시민운동가로 서울시장에 당선된 박원순(朴元淳) 열풍이다. 아니나 다를까, 신문·방송 기사의 타이틀의 대부분은 “하시모토(橋下), 일본판 박원순?”이란 식으로 만들어져 ‘오사카 반란’ 기사를 크게 보도했다. 무당파란 점을 부각해, 안철수(安哲秀) 서울대 교수와 비교하는 글도 볼 수 있었다.
 
  결론부터 얘기하자. 하시모토는 박원순과는 전혀 다른 성격의 정치인이다. 안철수의 경우, 안철수 자체에 대한 정보가 거의 없는 상태여서 아예 비교 대상이 될 수 없을 것이다. 하시모토와 박원순으로 압축할 때, 두 사람은 다른 정도가 아니라 아예 정반대에 서 있다고 보는 것이 정확할 것이다. 어떤 측면에서, 정반대에 서 있는 것일까?
 
  12월 5일 아침 8시, 하시모토는 시장 당선 후 처음으로 오사카 시청에 출근했다. 정식으로 취임하기 전이지만, 자신이 앞으로 펼칠 시정(市政) 방향을 밝히기 위해 아침회의에 들어갔다. 첫날 발언은 시청직원에 관한 얘기로 채웠다.
 
  “시청직원들의 채용경위에 대한 정확한 보고서를 받고 싶다. 채용경위에 문제가 있다면 재(再)시험을 통해 다시 자격을 묻고 싶다.”
 
 
  “공무원은 ‘세금 갉아먹는 흰개미’”
 
하시모토 시장은 ‘오사카 유신의 모임’이라는 지역정당을 결성, 돌풍을 일으켰다. 시장선거 당시 유세를 하는 하시모토 시장.
  1981년 레이건 미국 대통령은 취임연설을 통해 세계적인 명언(名言)을 하나 남겼다.
 
  “현재 위기를 맞아, 정부는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위치에 있지 않다. 정부 자체가 바로 문제이기 때문이다.”
 
  하시모토는 선거기간 중 오사카의 문제는 오사카 시청에 있다고 말한다. 공약의 대상을 시민이 아닌, 시청 공무원에 맞춘 사람이다.
 
  오사카시는 전국에서 공무원 비율이 가장 높은 도시이다. 1만명당 공무원 수는 51.4명이다. 오사카시와 비슷한 도시인 요코하마(橫濱)시가 14.5명이란 점을 감안한다면 어떤 상황인지 충분히 알 수 있다. 계장 이상의 간부가 전체 시청 공무원 가운데 31.4%에 달한다고 한다. 다른 도시의 경우 20% 정도이다.
 
  하시모토는 시청 공무원을 ‘세금 갉아먹는 흰개미’에 비유했다. 흰개미는 태양빛으로 가득 찬 대지가 아닌, 어두운 실내에서 일개미들이 가져온 먹이에 의존해서 살아간다. 그는 공무원의 30%인 1만2000명을 감축하고, 퇴직 시직원들에게 취업처를 제공해 온 118개 외곽단체를 폐지하겠다고 말했다.
 
  공무원 1인당 인건비를 1년 내 10% 삭감하고, 최종적으로 30%까지 삭감한다는 공약을 내세웠다. 당선 직후 곧바로 자신의 월급 30%와 퇴직금 50%를 삭감하면서 결전(決戰)의 칼을 갈고 닦았다. 출근 첫날의 첫 발언은 바로 그 같은 결의를 재(再)다짐한 것이라 볼 수 있다.
 
 
  하시모토 당선이 시민운동의 승리?
 
  하시모토는 민주·자민·공산당의 지원을 받은 현역시장을 상대로 싸웠다. 반(反)민주·반자민·반공산당이란 측면에서 무당파로 불린다.
 
  한국의 신문과 방송은 ‘무당파 하시모토’를 한국에서 통용되는 무당파로 해석하면서 ‘오사카 시민운동의 승리’라는 식의 기사를 내놓았다. 잘못된 해석이다. 무당파를 보는 한일(韓日) 간의 시각차를 이해하지 못하기에, ‘하시모토=박원순’이라는 식의 오보(誤報)가 버젓이 등장한다.
 
  한국인이 갖고 있는 ‘무당파’에 대한 이미지는, 곧바로 ‘시민운동’이나 ‘시민단체’라는 말로 이어질 것이다. 일본에서 무당파라는 말은 시민운동·시민단체와 ‘전혀’ 관계가 없다.
 
  일본에서 ‘시민’이란 말은 곧바로 ‘사요쿠(左翼)’ 또는 ‘히다리(左)’라는 말로 받아들여진다. 좋게 말하면 진보, 나쁘게 말하면 공산당이나 사회주의 이념에 경도된 반미(反美)주의자로 받아들여진다. 한국에서도 시민단체를 좌(左)성향으로 보는 것이 일반적이지만, 우(右)성향의 단체들도 시민이란 말을 즐겨 쓴다. 일본의 경우, ‘시민’이라는 말이 들어가면, ‘99% 좌의 이념이 들어간 조직’이라고 본다.
 
  ‘우요쿠(右翼)’ ‘미기(右)’로 표현되는, 좌익 반대에 선 사람들은 보통 ‘고쿠민(國民)’이란 말을 사용한다. 일본 천황을 염두에 둔 ‘신민(臣民)’이란 표현은 ‘울트라 미기(極右)’라 보면 된다. 일본의 미기와 우요쿠는 대부분 조직폭력배인 야쿠자(ヤクザ)들과 깊은 관계가 있다. 고쿠민이란 이미지 속에는 ‘야쿠자의 단체’라는 의미도 들어가 있다.
 
  일본에서는 일반적으로 ‘시민’이나 ‘국민’이란 말이 들어간 단체에 속할 경우, ‘별로 가까이하고 싶지 않은, 극단적인 성격’ 정도로 받아들여진다.
 
  도시에 사는 사람을 의미하는 ‘시민’이라는 말이 아니라, 정치적 이념을 반영하는 ‘시민’이라는 의미의 단어가 등장하면 “저 사람 히다리구만!”이라 반응한다. ‘정통이 아니라 이단(異端), 상하(上下)관계를 무시하는 혼자 잘난 사람’이란 의미가 들어가 있다. 일본사회에서 존경받기 어려운 사람이다.
 
  하시모토의 승리는 시민운동·시민단체의 이념과 무관하다는 것만이 아니라, 시민이라는 말이 가져다주는 ‘히다리·사요쿠’의 주장에 반대했기 때문에 가능했다. 히다리와 사요쿠에 등을 돌린 것이 하시모토이다. 그는 선거기간 중 시민단체나 시민운동가들의 집중포화를 받는다. 노동조합이나 교원단체와 같은 히다리 계통 단체들로부터 살해위협까지 받았다.
 
  ‘하시모토=우익’이라는 기사가 한국신문에 나오지만, 이는 히다리와 사요쿠의 비난을 그대로 실은 글이라 볼 수 있다. 히다리와 사요쿠에 반대하는 과정에서 결과적으로 우요쿠나 미기라 불릴 수는 있겠지만, 군국주의(軍國主義)나 야쿠자를 배경으로 하는 미기와는 기본이 다르다.
 
  시민단체가 하시모토를 싫어하는 가장 큰 이유는 ‘돈’ 문제로 집약될 수 있다. 구체적으로 얘기하자면 ‘복지에 관련된 돈’이다. 하시모토는 복지비용의 대폭적인 수술을 공약으로 내세웠다. 이른바 생활보호대상자에 대한 전면 재점검이다. 복지정책에 대한 대수술을 벌이는 과정에서, 관련 시민단체에 대한 재정지원을 백지(白紙) 상태에서 검토하겠다고 말한다.
 
 
  중국인들의 무더기 생활보호대상 신청 사건
 
  오사카시 복지정책 전면 재검토의 배경으로 설명할 수 있는, 일본인이라면 누구나 알고 있는 ‘웃기는’ 사례를 하나 살펴보자. 2010년 5월 발생한 중국인 48명의 생활보호대상자 신청사건이다. 해외토픽으로 불릴 만큼 어이가 없는 일이 오사카시에서 발생했다.
 
  푸젠성(福建省) 출신 중국인 48명은 일본 입국(入國) 즉시 곧바로 오사카 시청으로 몰려가 생활보호대상 신청서를 올린다. 이들은 오사카에 있는 자칭 친척을 통해 합법적으로 오사카시에 거주한다. 오사카시는 외국인이라도 체류자격을 가진 상태에서 극빈(極貧) 상태에 빠질 경우, 생활보호대상자에 포함시켜 준다.
 
  법적으로 문제가 될 것이 없다고 볼 수 있지만, 상식적으로 볼 때 48명의 중국인이 남의 나라에 몰려와 생활보호기금을 요구하는 것은 어불성설(語不成說)이다. 일본 전체가 들썩거린 것은 물론이다. 상식을 넘어선 중국인의 대담한 요구에도 놀랐지만, 복지천국 오사카시가 어디까지 갔는지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케이스로 언급된다.
 
  일본의 경우 2010년 기준으로 생활보호대상자가 202만명, 가구별로는 146만 세대에 달한다. 1945년 전쟁 직후 이뤄진 생활보호대상자의 규모를 넘어선 가장 많은 수이다. 인구 1억2800만 가운데 1.6%에 채 미치지 않지만, 여기에 노숙자는 포함하지 않기 때문에 실제 규모는 4%를 넘어설 수도 있다고 한다.
 
  단순통계로 보면, 일본 인구 1000명당 16명 정도가 생활보호자에 속한다. 이들 보호대상자에 소요되는 예산도 3조4000억 엔에 달한다. 2010년 한국정부의 1년 총지출 예산은 약 293조원이다. 일본 엔에 대한 환율을 ‘100엔=1400원’ 정도로 할 때 2010년 한국 총예산은 20조 엔 정도이다. 한국 총예산의 15% 정도가 일본에선 생활보호자를 위한 복지기금으로 들어간다는 얘기다.
 
 
  복지天國 오사카
 
  오사카시의 경우 외국인 복지천국만이 아니라, 생활보호자를 위한 ‘복지 철밥통’ 도시로도 유명하다. 2011년 7월 기준으로, 15만1000여 명이 생활보호대상자이다. 오사카 시민 18명당 한명에 해당된다. 일본 전체에서 1000명당 16명이 생활보호자인 데 비해, 오사카시의 경우 1000명당 60여 명 정도가 시로부터 돈을 받고 있다. 극빈자를 도와야 한다는 데 반대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2010년 기준으로 2916억 엔, 시 일반예산의 17%를 생활보호대상자에게 지급한다는 점은 비정상이다. 치안이 엉망이 되고 거리도 쓰레기로 뒤덮였다. 경찰이나 환경미화원에게 돈이 풀리지 않기 때문이다. 시정이 제대로 될 리가 없다.
 
  한국의 부산에 비교되는 오사카시는 1980년대 말 버블경제를 정점(頂點)으로 더 이상 내려갈 수 없을 정도로 추락을 거듭하는 곳이다. 한때 일본을 주름잡았던 오사카 상인은 버블경제가 꺼지면서 가장 큰 피해를 입었다.
 
  시민단체와 시민운동가들은 20년 이상 추락해 온 오사카시의 경제상황이 생활보호대상자를 양산(量産)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하시모토를 압도적으로 지지한 오사카 시민의 경우 생각이 다르다. 시민을 위한 복지라는 정책이, 멀쩡한 사람들을 생활보호대상자로 만들고, 나아가 생활보호혜택을 노린 타지(他地) 사람이나 외국인까지 오사카시로 그러모으고 있다는 것이다.
 
  2010년 기준으로 생활보호대상자는, 한 달 동안 주택지원비로 최고 4만2000엔, 생활비로 8만 엔을 받을 수 있다. 생활보호대상자가 되는 순간 한국 원화(貨)로 거의 170만원 정도의 지원이 보장된다. 오사카시에 살고 있다는 점과, 소득이 없다는 점만 증명하면 곧바로 지급이 시작된다.
 
  한국인도 1년간 취업비자로 갔지만, 도중에 회사가 부도가 나 오갈 데 없게 되면 오사카시에 가서 생활보호를 신청할 수 있다. 법적으로 문제가 없는 한, 곧바로 12만2000엔의 보호기금을 받을 수 있다.
 
  귀화(歸化)하지 않은 외국인, 전 세계에서 몰려온 단기(短期)거주 외국인도 오사카시로부터 생활보호대상자로 지정돼 복지기금을 받고 있다.
 
  그렇다 하더라도, 일본 전국 평균의 4배에 해당되는 1000명당 60명이 생활보호대상자가 된다는 것은 뭔가 이상하다.
 
 
  생활보호 비즈니스
 
오사카부 지사 시절 《조선일보》와 인터뷰하는 하시모토 시장. 그는 오사카 ‘물의 도시 축제’포스터(오른쪽)에 유머러스한 모델로 직접 등장했다.
  일본 내 TV프로그램을 통해 수차례 방영됐지만, 오사카시에는 생활보호 비즈니스란 21세기형 첨단산업이 존재한다. 노숙자를 생활보호대상자에 올려주는 대가로 돈을 받는 식이다. 노숙자는 생활보호대상자가 될 수 없다. 오사카시 어딘가에 거주해야만 복지기금을 받을 수 있다.
 
  브로커가 노숙자에게 다가가 관련 서류를 전부 만들어주고, 월세(月貰) 4만2000엔 하는 집도 찾아주면서 8만 엔에 달하는 생활보호비를 받을 수 있다고 꼬드긴다. 넘어가지 않는 사람이 없다. 시청에 가서, 소득이 없는 거주민이란 점을 증명하면 곧바로 돈이 나온다.
 
  4만2000엔의 월세는 브로커가 운영하는 곳으로 들어간다. 8만 엔을 챙긴 생활보호대상자는 월세로 얻은 집에 들어가 살지도 않는다. 주소만 오사카에 두고 생활은 도쿄(東京)나, 심지어 인도네시아 발리에서 사는 사람도 있다. 동일한 집과 건물이 수십 차례, 많으면 수백 차례에 걸쳐 다양한 이름의 생활보호대상자에게 넘겨진다. 가짜 신분증과 이름 도용도 이뤄진다.
 
  브로커의 소개로 방을 구하는 오사카 생활보호대상자는 전부 여덟 달의 월세를 입주와 함께 지불한다. 브로커는 버블경제가 정점에 달했을 당시의 시키킨(敷金·월세가 끝난 뒤 집을 어지럽힌 데 대한 수리비)과 레이킨(집에 살게 해준 데 대한 고마움으로 표현하는 금전적인 보상)의 비율인, 일곱 달분의 월세를 적용한다. 그중 일곱 달분의 시키킨과 레이킨은 물론 전부 브로커에게 들어간다. 돈의 출처는 오사카시이다. 월세 4만2000엔과, 일곱 달분의 시키킨·레이킨을 합친, 33만 엔이 넘는 시민의 세금이 브로커 손에 넘어간다.
 
  심사기준을 강화하고, 생활보호대상자 여부를 정확히 점검해야 한다고 말하지만, 오사카시의 철밥통 공무원은 꿈쩍도 안 한다. 법적인 증거는 없지만, 브로커 공무원 그리고 복지기금을 둘러싼 ‘검은 관계’가 충분히 상상된다. 검은 관계가 이뤄지는 현장으로, 일본인 모두가 알고 있는 오사카시의 ‘아이린(アイリン)’ 지역은 부패와 도덕불감증의 상징으로 받아들여진다.
 
  하시모토가 시민단체의 적이 될 수밖에 없는 것은 시민단체가 지지하고 관계하는 생활보호대상자에 대한 예산삭감과 실태조사를 공약으로 내세웠기 때문이다. 복지기금을 받을 만한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을 구별해서 시정을 펼치겠다는 것이다.
 
  히다리로 구성된 시민단체는 ‘구별’이 아니라, ‘차별’이라면서 하시모토 타도를 내세운다. 지금까지 그 같은 공격에 살아남은 정치인은 없었다. 적당히 타협하기 때문이다. 오사카 시민들은 하시모토의 결전 결의에 지지를 보내고 있다.
 
 
  야쿠자 아버지, 대학생 때 동거…
 
  하시모토는 일본인이 좋아하는, 당대에 모든 것을 개척한 인물이다. 야쿠자이던 아버지는 하시모토가 초등학교 2학년 때 자살했다. 그는 홀어머니 밑에서 크면서 어릴 때부터 스스로 돈을 벌면서 생활했다. 고등학교 때는 럭비선수로 전국대회에도 참가했다.
 
  와세다 대학 정치경제학부에 들어간 하시모토는, 대학 때부터 현재의 부인과 동거(同居)에 들어가서 아버지가 됐다. 그는 학교공부도 하면서 돈을 버는, 학생과 사회인의 역할을 동시에 해나갔다. 재학 도중 가죽점퍼 장사에 손을 댔지만 실패했다. 그 원인을 파헤쳐가는 과정에서 그는 ‘법을 아는 것이 중요하다’고 판단, 법학공부를 시작했다. 그는 25세 때인 1994년 사법시험에 합격했다.
 
  하시모토는 1997년부터 오사카시를 중심으로 활동을 시작했다. 그는 탤런트 프로덕션사(社)를 상대로 일하다가 본인 스스로가 프로덕션 소속 탤런트 자격으로 라디오와 TV에 출연하게 됐다. 하시모토는 오사카에서 지명도를 높이다가 2003년 도쿄로 진출해, 니혼(日本) TV 법률상담프로그램에 등장했다. 이 프로그램은 5명의 개성 강한 변호사가 등장해, 재미있는 이슈에 대해 법적해석을 내리는, 법과 코미디를 연결한 인기프로그램이다.
 
 
  “지금 일본은 썩었다”
 
경쟁력 있는 교육을 강조하는 하시모토 시장은 오사카부 지사 시절이던 2010년 11월 방한 당시 선린인터넷고를 방문, 수업을 참관했다.
  당시 하시모토는 가장 젊은 변호사인 동시에, 진보적인 법해석을 내리는 인물로 받아들여졌다. 이미 5명의 자식을 가진 가장이자, 자상한 남편으로서의 모습도 보여주었다. 그는 똑 소리 나는 외모에, 막힘없는 빠른 언변(言辯)과 빈틈없는 논리로 시청자를 매료시켰다.
 
  한번은 방송 중 이런 일이 있었다.
 
  “‘사랑하는 마지막 그날까지’라는 글을 새긴 다이아몬드 반지를 선물했지만, 그녀는 다른 남자에게 가버렸다. 사랑하는 그날이 끝났다는 점에서 다이아몬드 반지를 돌려받으려 한다. 가능한가?”
 
  이런 질문에 대해 다른 변호사들은 시시콜콜하게 법리(法理)를 전개했지만 하시모토는 달랐다.
 
  “여기 10만 엔 있으니까, 가져가라. 남자가 쩨쩨하게…!”
 
  박수와 웃음이 터져나왔다. 코미디 같은 얘기지만, 하시모토는 시청자들에게 뭔가 통쾌한 느낌을 주는 청년으로 와닿았다. 그는 젊은이만이 아니라, 여성과 장년층들도 좋아하는 아이돌 변호사로 자리 잡았다.
 
  젊은 변호사 하시모토는 반경을 넓혀, 시사프로그램·토론회·문화행사에도 참가했다. 그러면서 그는 차츰 단순히 ‘웃기는 변호사’가 아니라, ‘개혁 일본’에 대한 나름의 생각과 주장을 펴는 ‘의식 있는 변호사’라는 이미지를 만들어갔다. “일본은 썩었다. 지금 고치지 않으면 영원히 어렵다”라는 것이 그의 메시지이다.
 
  하시모토는 니혼 TV의 법률상담프로그램을 통해, “일본의 문제는 강자(强者)에 약한 것보다, 약자(弱者)에 더 약한 ‘잘못된 미덕(美德)’에 있다”는 식의 논리를 폈다. 그는 “일을 하도록 만드는 것이 아니라, 약자라는 이유로 일을 못 하게 하고 도움을 받도록 만드는 곳이 일본”이라고 단언했다.
 
  하시모토는 2007년 12월 오사카부(府·오사카시와 사카이시로 구성된 광역자치단체) 지사 선거 출마를 발표했다. 자민·민주·공산당 그 어떤 당으로부터도 공천을 받지 못한 채, 무당파로 출마했다. 하시모토가 주장하는 개혁지향적인 생각들이 기존 정당 입장에서 볼 때 수긍하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각종 이해관계로 뒤얽힌 오사카부의 정당들은 아무리 당선이 확실시된다 하더라도, 하시모토를 친구로 부를 수가 없었다. 친구가 아니라, 자신을 물려는 적이기 때문이다.
 
 
  府 지사 시절 자기 월급부터 30% 삭감
 
  2008년 2월, 오사카부 지사로 취임하던 날 하시모토는 오사카부 재정비상사태를 선언했다. 재정이 파탄 난 상태에서 행정을 집행할 수 없다는 것이 주된 내용이었다. 그는 예산 1000억 엔 삭감을 발표했다. 이에 앞서 그는 먼저 자신의 월급 30%와 퇴직금 50%를 삭감했다.
 
  빈민을 위한 28개 집단시설 폐지, 44개의 법인 폐지, 일반직원 퇴직금 삭감, 비(非)상근 직원 보수 삭감, 의무교육 등 교육특별수당 삭감, 오사카부 직할 주택사업 재검토, 문화 관련 사업 재검토, 오사카부 인권협회 등 각종 시민단체와 문화단체에 대한 보조금 폐지….
 
  하시모토가 앞으로 벌일 오사카 시정의 대부분은, 이미 3년 전 오사카부에서부터 시작된 것이다. 시민단체, 환경단체, 문화단체 등이 들고 일어난 것은 당연하다. “시민의 의견을 무시하는 독재자”라는 비난이 공공연하게 일었다. 시민단체, 공무원 노동조합, 생활보호대상자들이 그를 따라다니면서 야유와 비난을 퍼부었다. 고성(高聲)과 막말을 해대는 ‘단기(短氣)’의 오사카인 특유의 캐릭터가 회의장 전체를 지배했다.
 
  하시모토는 그 같은 불만에 대해 눈도 깜짝하지 않았다. 거의 매일 기자회견을 하면서 자신의 정당성을 오사카 주민들에게 직접 전달했다.
 
  하시모토가 던지는 수많은 ‘명언’ 중, 특히 오사카 주민들을 감동시키고 지지세력으로 만드는 것은 교육에 관련된 발언이다. 교육은 미래이기도 하다.
 
  “오사카 학생들의 퇴학률·범죄율은 전국 최고, 학습률은 전국 최하 수준에 머물러 있다. 오사카 어린이들은 미래에 대해 꿈도 희망도 가질 수 없다. 원인은 무능한 학교 선생들에게 있다.”
 
  “학교 선생은 평생직장이 아니다. 책임질 일이 있으면 나가야 한다. 9할의 선생은 최선을 다하고 있다. 1할의 놀고먹는 무능한 선생들을 퇴출(退出)해야만 오사카의 미래가 보인다.”
 
  “아이들에게 말로 해서 안 될 때는 힘으로 해결해야 한다. 입으로만 해서는 안 된다.”
 
  “능력에 대한 검증도 없이 시간이 흐르면 진급하는 그런 인간들을 위해 세금을 낼 수는 없다. 애들이 그런 사람을 본받으며 살아갈 미래를 생각해 보라. 승자승(勝者勝) 원칙의 경쟁이 필요하다.”
 
  “‘최선을 다했다’ ‘열심히 했다’는 말은 프로의 세계에서는 통하지 않는 공허한 말장난이다. 어린이들의 학력증진을 증명해 보이는 결과물을 지금 당장 만들어내야만 한다.”
 
  교육에 관한 하시모토의 명언은 오사카에만 해당되는 것이 아닐 것이다. 현재, 한국의 교육현장에서도 볼 수 있거나, 곧 만나게 될 상황에서 필요한 말일지도 모른다.
 
 
  암살 가능성이 가장 큰 정치인
 
  히다리로부터 독재정치가로 불리는 하시모토는, 암살 가능성이 가장 큰 정치인으로 인식되고 있다. 여기서 말하는 단순히 비유적 의미가 아니라, 실제 피를 흘리며 죽는 그런 암살을 의미한다.
 
  각종 이권(利權)이 얽힌 오사카에서 개혁을 하는 것은 죽음을 각오한 행동이기도 하다. 복지기금과 같은 예산을 삭감할 경우 피해는 야쿠자에게까지 확대된다. “야쿠자가 그를 그냥 두지 않을 것”이라는 얘기도 나오고 있다.
 
  ‘일본판 나꼼수’라고 할 수 있는 웹사이트 ‘니찬네루(2Channel)’에는 하시모토 암살에 관한 온갖 시나리오가 흘러다니고 있다. 그러나 하시모토가 가진 나름의 ‘강력한 배경’ 덕분에 암살을 피할 수 있을 것이란 전망(?)도 나오고 있다. ‘강력한 배경’이란 그가 ‘부라쿠(部落)’ 출신 아버지 밑에서 실제 오사카시의 부라쿠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사실을 두고 하는 말이다.
 
  일본에서 ‘부라쿠’란 가장 천대받는 사람이 사는 마을을 의미한다. 에도(江戶)시대 때부터 만들어진 부라쿠는 동물을 죽이거나, 동물가죽 관련 업무에 관련된 사람들로 구성된 곳이다. 한국식으로 말하자면 백정(白丁)이다. 불교를 믿는 일본에서 부라쿠는 필요악으로 남다른 차별을 받아왔다. 부라쿠 출신자는 함께 모여 살고, 결혼과 교제도 내부에서만 행했다. 일본땅에서 재일(在日)동포가 차별을 받는다고 하지만, 부라쿠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다. 부라쿠 출신에게는 말도 걸지 않는 것이 일본인의 상식이다.
 
  이처럼 강하게 차별을 받는다는 것은 역으로 부라쿠 구성원 내부 결집력이 강하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구성원이 해를 입으면 야쿠자 이상으로 보복을 한다. 실제로 일본에서 부라쿠 출신자는 재일동포와 함께 야쿠자를 구성하는 양대 축 가운데 하나다.
 
  하시모토는 스스로 부라쿠 출신이라 밝히면서, 사회에 진출한 부라쿠의 영웅이다. 이게 “하시모토는 암살되지 않을 것”이라고 주장하는 근거다.
 
 
  누구도 겁내지 않고 정면대결
 
마쓰모토 류 전 부흥담당 장관. 하시모토 시장처럼 그도 부라쿠 출신 정치인이다.
  2011년 7월 초, 마쓰모토 류(松本龍) 부흥담당 장관은 동일본 대지진 참사현장인 미야기(宮城)현의 무라이 요시히로(村井嘉浩) 지사를 만나러 갔다. 무라이는 마쓰모토가 자리에 앉은 뒤 2~3분 뒤에 나타났다. 무라이 지사는 “급한 일 때문에 늦어 미안하다”고 했지만, 마쓰모토의 반응은 싸늘했다.
 
  “중앙에서 손님이 오면 미리 나와서 기다려야지 이게 무슨 결례냐?”
 
  상식적으로 통할 수 있는 말이지만, 마쓰모토의 언동은 야쿠자 이상의 ‘공포’ 그 자체였다. ‘장관의 무서운 훈계와 협박’이란 타이틀로 당시 장면이 인터넷 유튜브를 통해 알려졌다. 비난여론이 비등하자 마쓰모토는 “발언이 너무 지나쳤다”고 사과하고 장관 자리에서 물러났다.
 
  마쓰모토가 사임한 직후 하시모토는 마쓰모토에게 사임 의사를 철회하라고 요청했다. “마쓰모토의 말투가 고압적이기는 했지만, 지사가 늦게 나온 것 자체가 예의에 맞지 않는다는 점에서 크게 잘못된 것은 아니다”라는 것이 하시모토의 설명이었다.
 
  하시모토가 마쓰모토를 지지한 것은 당시 일본에서 크게 화제가 됐다. 역시 동병상련(同病相憐)이라는 것이 당시 반응이었다.
 
  그 누구도 공식적으로 입 밖으로 내지는 않았지만, 마쓰모토는 부라쿠를 대표해 정치가가 된 인물이다. 그는 부라쿠 주민을 정치적 기반으로 하면서 7선(選)의원으로 성장했다. 마쓰모토 장관이 무라이 지사를 상대로 고압적 자세를 보인 것은, 평소 부라쿠 출신자가 보여주는 전형적인 행동패턴으로 이해될 수 있다. 이는 누구도 겁내지 않고 정면대결로 몰아가는 하시모토의 언동이나 자세와도 일맥상통한다.
 
 
  “김일성·김정일 초상화가 걸려 있는 곳에 어떻게 돈을 주나”
 
오사카부 지사 시절인 2010년 11월 청와대로 이명박 대통령을 예방한 하시모토 시장. 하시모토 시장은 “한국에 더 이상 빚은 없다”는 입장이다.
  하시모토가 부라쿠 출신이기 때문에 만신창이가 된 오사카를 구원해 낼 수 있을 것이라는 얘기도 나온다.
 
  그 누구도 드러내놓고 말은 안 하지만 일본인 대부분은 오사카의 문제가 부라쿠와 재일동포와 같은 차별민에 대한 특별대우에서 비롯됐다고 보고 있다. 그동안의 차별에 대한 보상으로 복지예산을 늘렸지만, 질적, 양적인 면에서 복지비용이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고 그 대상자도 확산되면서 오사카의 재정이 전국 최하 수준으로 떨어지게 됐다는 것이다.
 
  하시모토는 아무도 손을 못대는 오사카 조총련계 고등학교에 대한 재정보조금을 끊은 사람이다. “김일성·김정일의 초상화가 걸린 학교에 어떻게 일본국민의 세금을 지원할 수 있는가”라는 것이 하시모토의 생각이다. 오사카 시민이 박수를 보낸 것은 물론이다.
 
  하시모토는 부라쿠에 들어가던 각종 지원금을 끊겠다고 공언했다. 부라쿠 주민 중에서는 하시모토를 비난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자신들의 스타이자 영웅이란 점에서 반발의 정도는 그렇게 심하지 않다.
 
  하시모토의 타도대상은 오사카의 기득권자에 한정되지 않는다. 전후 일본 지식사회를 지배해 온 단카이(團塊) 세대의 논리를 정면으로 뒤엎는, 반(反)단카이의 기수(旗手)로 떠오르고 있다.
 
  필자는 하시모토의 등장과 반란이 일본 국내 문제만이 아닌, 일본 밖, 특히 한국과 중국에까지 확대될 것이라고 확신한다. 오사카 부패에 맞서는 ‘행정개혁가’ 차원이 아닌, 전후(戰後) 일본 지식인의 정신사를 지배해 온 히다리와 사요쿠에 대한 도전이기 때문이다. 시민단체와 시민운동가에 대한 반발 이전에, 시민단체와 시민운동가를 만들어낸 단카이에 대한 도전이 하시모토 정치의 핵심이다. 단카이가 지배해 온 역사관이 부정된다는 점에서, 한국·중국과의 관계에까지 영향을 미칠 것이다.
 
 
  단카이 세대는 누구인가?
 
  단카이 세대는 시민운동의 중심에 선 인물들이다. ‘불쑥 튀어나온 집단’이란 의미의 단카이는 1945년 태평양전쟁이 끝나면서 태어난 세대를 말한다. 학자에 따라 다르지만, 대략 1946년부터 1954년까지 출생한 사람을 지칭한다. 일본판 베이비붐 세대이다. 한때 일본 전체 인구의 20%를 차지한 세대로, 최근 정년(停年)을 맞아 현장에서 사라져가고 있는 사람들이다.
 
  전쟁 직후 태어난 이들은 미(美)점령군 통치하에서 민주주의 가치를 배웠다. 동시에 그들은 자신의 아버지들에게 총을 겨눈 점령군에 대한 반감, 즉 반미(反美)감정도 갖게 됐다. ‘민주주의를 신봉하는 반미주의자’가 단카이의 유년기(幼年期) 초상화이다.
 
  이들은 철이 들면서, 전쟁에 반대하는 평화주의자이자 천황제를 반대하는 민권(民權)운동가로 나섰다. 반전(反戰)운동 반미감정을 가지면서 이들은 1960년대 미국과의 군사동맹에 반대하는 ‘안보투쟁’의 선두에 섰다.
 
  사회로 나오면서 단카이 세대는 이른바 연(年) 10%에 달하는 고도성장기를 만났다. 1980년대 버블경제 최선봉에 서면서 뉴욕 전체를 엔(円)으로 살 수 있다고 말할 당시, 이들은 일본의 허리로 일했다. 뉴욕, 파리, 런던에는, 한 개에 50달러가 넘는 금가루로 만들어진 ‘킨스시(金壽司)’가 등장한다. 초콜릿이나 담배를 구걸하던 패전국의 어린이는 30년 만에 일미역전(日美逆戰)을 경험한다.
 
 
  시민운동의 바탕이 된 단카이 세대
 
  민주당의 오자와 전 간사장이나 간 나오토 전 총리, 하토야마 전 총리에게서 보듯, 단카이 세대는 한국과 중국에 대해 유별나게 친근감을 표시한다. 이들은 전부 단카이 세대 정치인이다. 이들 마음속에는 식민지와 전쟁을 통해 이웃 아시아 국가들에 많은 피해를 입혀서 미안하다는 생각이 있다.
 
  잘 알려져 있듯이 단카이 세대를 대변하는 대표적인 신문은 《아사히(朝日)신문》이다. 한국에 대해 가장 친밀감을 보이는 신문이지만, 문화혁명기의 중국과 김일성 치하의 북한을 지상천국이라 표현한 곳도 《아사히신문》이다. 북송선(北送船)을 탄 재일동포의 대부분은 《아사히신문》이 실은 지상천국 북한에 대한 꿈 같은 기사에서 영향을 받았다.
 
  반미로 무장한 단카이는 ‘반미=친중친북(親中親北)’ ‘한국=미국과 군사동맹한 친미(親美)’라는 이분법으로 세상을 바라봤다. 지금은 달라졌지만, 1980년대 말까지만 해도, 《아사히신문》은 그 같은 세계관과 입장을 대변하는 이념지였다. 독재와 싸우던 한국의 많은 지식인은 단카이 세대의 일방적 세계관을 그대로 받아들였다.
 
  일본에서 ‘시민’이란 말이 정치운동과 연결돼 등장한 것은 1980년대 초이다. 한국의 시민운동은 경실련을 중심으로, 1988년 올림픽을 전후(前後)해 본격화됐다. 시기적으로 볼 때 한국 시민운동의 출발점을, 일본에서 찾을 수 있을 듯하다. 일본 시민운동의 특징은 버블경제에서 나타난 일본의 경제력을 바탕으로 하면서 나타났다. 돈에 대한 자신감은, 전후 위축됐던 일본인의 수동적 태도를 바꿔놓았다. 전승국(戰勝國) 미국에 대한 열등감도 사라지고, 관료와 정치가 주도하의 일본정치에 적극 참여하는 식으로 나타난다.
 
  1980년대 일본 사회의 허리이던 단카이 세대의 자신감과 세계관이 만들어낸 새로운 정치운동이기도 하다.
 
  하시모토는 단카이 세대의 가치관을 대부분 반대한다. 경쟁 없는 자연스런 교육, 사회적 정치적 약자에 대한 정부의 배려, 대미(對美)관계의 재(再)정의 등 단카이 세대가 가진 생각과 정반대로 움직이는 것이 하시모토이다. 경쟁을 해야 한다, 약자를 보호한다고 하지만 약자에 대한 정의부터 새롭게 하고 약자를 평생 약자로 만드는 복지정책에 반대한다, TPP(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Trans Pacific Partnership)를 통해 미국과의 관계를 더 한층 강화해야 한다…. 이런 것이 하시모토의 생각이다.
 
  하시모토가 던지는 반(反)단카이 논리 중 한국이 특히 관심을 쏟아야 할 부분은 하시모토의 역사관이다. 하시모토는 ‘한국이나 중국에 대해 더 이상 빚이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내가 태어나기도 전에 벌어졌던 일에 대해 무슨 책임을 지라는 것이냐?”라는 것이 하시모토의 생각이다. 하시모토는 평화주의자 단카이 세대의 상징이기도 한, 반핵(反核)·비핵(非核)에 정면반대한다. 중국과 북한에 맞서기 위해 일본도 핵을 가져야 한다고 말한다.
 
 
  공식석상에서 기미가요 불러
 
  생리적으로 맞지 않지만, 일본 미기의 중심인 이시하라 신타로(石原新太) 도쿄도(都) 지사가 하시모토를 지지한 이유는 바로 핵이나 반중(反中)노선에서 공통점이 있기 때문이다. 하시모토는 권투경기장에 들러 직접 일본국가(國歌) 기미가요(君が代)를 부르기도 한다.
 
  “노래는 잘 못하지만, 열심히 국가를 부르는 모습에 감동한다.”
 
  니찬네루에 올려진 비디오 메시지는 청년들을 통해 전국에 확산되기도 했다. 대중 앞에서 기미가요를 직접 부른다는 것은, 10년 전만 해도 상상하기 어려웠다. 그랬다가는 천황제와 국가주의에 반대하는 단카이의 반발로 다음 선거에서 결코 무사할 수가 없었다.
 
  하시모토는 한발 더 나아가, 기미가요를 따라 부르지 않거나, 심지어 작은 목소리로 부르는 학교 교사들을 맹비난한다. “국가가 갖는 의미를 왜곡하거나, 부정하는 인간은 교육자가 될 자격이 없다”고 말한다. 외국에서 하시모토가 우익의 대표주자처럼 보이는 이유는, 바로 이 같은 상황에서 나온 해석이라 볼 수 있다.
 
  일본언론의 경우, 신문에 국한할 때 히다리와 미기가 병존한다. 중립의 니혼케이자이(日本經濟), 히다리의 아사히(朝日), 미기의 요미우리(讀賣), 울트라 미기의 산케이(産經) 정도로 대별될 수 있다. 그러나 TV방송의 경우 대부분이 히다리라 보면 된다. 1980년대 이후 단카이가 전부 TV를 장악하면서 논조의 대부분은 히다리 성향이 강하게 나타난다.
 
  이런 방송 패턴대로라면 반단카이 논리를 펴는 하시모토에 대한 비난이 줄을 이을 것이다. 그러나 의외로 TV는 하시모토에 대한 비난을 삼간다. 찬성은 안 하지만, 그렇다고 반대도 안 하는 관망하는 자세가 TV의 하시모토관(觀)이다.
 
  왜일까? 하시모토가 부라쿠 출신이기 때문이다. 부라쿠 출신에 대한 차별이 될 수도 있고, 부라쿠로부터 보복을 받을 수 있다는 점에서 중립적인 입장을 지키고 있다.
 
  분명히 짚고 넘어갈 것은, 하시모토는 결코 복지정책 자체를 부정하거나 반공무원 정서를 가진 인물이 아니라는 점이다. 복지정책을 제대로 그리고 적당하게 해야 한다는 점과, 일하는 공무원과 그렇지 않은 사람들을 구별해서 처리하겠다는 것이 핵심이다.
 
 
  ‘오사카의 반란’, 어디까지?
 
  개혁성향이 강한, 나카다(中田) 전 요코하마 시장은 “오사카시 부시장으로 들어가, 일본 전체를 변화시키는 기폭제가 되겠다”고 말한다. 시장이 부시장으로 들어가 일한다는 것은 정치계의 파격이다. 나카다 전 시장은 하시모토처럼 수상공선제(公選制)를 주장한 일본 정치계의 기인(奇人)이다. 두 사람 모두 인터넷에서 젊은 층의 폭넓은 지지를 받는 디지털 정치가라는 공통점도 갖고 있다.
 
  하시모토의 경우, 트위터 정치가 2위로 36만명의 팔로워를 갖고 있다. 하시모토의 한마디는 곧바로 인터넷을 통해 청년들에게 전달된다. 2008년 오사카부 지사 선거 당시 하시모토를 부라쿠 출신이라 비난한 글이 인터넷에 오르자, 수천 명의 청년이 달려들어 비난에 나선 사람을 무차별 공격한 사건은 유명하다. 하시모토는 각종 명분으로 이뤄지는 인터넷 자유에 대한 법적 제약에 반대한다.
 
  하시모토의 발언과 행동은 현재 일본 전체를 흔들고 있다. 그동안 아무도 말을 못하던 민감한 금기(禁忌)들을 전부 건드리기 때문이다.
 
  ‘오사카의 반란’이 어디까지 미칠지 아무도 모른다. “일본정치 구조상 오사카를 넘어, 도쿄에까지 확대되는 것은 불가능할 것”이란 전망도 있다. 오사카의 덴슈가쿠(天守閣)에 그치는 ‘찻잔 속의 개혁’이 될 것이란 예측이다.
 
  분명한 것은, 아무도 시도하지 못했던 21세기 개혁의 선구자로 하시모토가 등장했다는 점이다. 일본 특유의 정치문화이기도 하지만, 느리지만 확실히 다져가는 반란이 하시모토를 통해 시작됐다. 전후 일본 지식인의 머리를 지배해 온 단카이 세대의 논리가 마침내 빛을 잃어가고 있다는 점도 빼놓을 수 없다. 배경과 상황을 볼 때, 결코 남의 문제가 될 수 없는, 한국의 문제이자 과제를 하시모토의 반란을 통해 발견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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