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진왜란 당시 이원익이 평안도 관찰사로 마지막 남은 땅인 관서를 지킬 때 백성들이 그를 믿고 따른 것은 안주 목사 시절 그가 보여준 인품과 선정에 감복했기 때문이다. 이원익은 무엇보다도 백성의 삶, 즉 民生을 주목했고 함께 고민했다.
崔鎭弘
⊙ 48세. 고려대 정치외교학과 졸업. 서울대 정치학 박사.
⊙ 現 서울대 한국정치연구소 선임연구원.
⊙ 저서 : 《법과 소통의 정치》.
崔鎭弘
⊙ 48세. 고려대 정치외교학과 졸업. 서울대 정치학 박사.
⊙ 現 서울대 한국정치연구소 선임연구원.
⊙ 저서 : 《법과 소통의 정치》.

- 오리 이원익. (충현박물관 제공)
아무튼 우리는 우리의 삶을 대신 살아 주겠다는 과잉친절(?)의 허구를 이겨 냈다. 여기서 필자는 식민지를 경험했다는 아픈 기억보다는 그 어려움을 이겨 냈다는 사실에 방점을 찍고 싶다. 그 어려움을 이겨 낸 우리 민족의 저력은 어디에 있을까. 간단하게 말할 수 있는 내용이 아니다. 우리 역사로 시선을 돌려 그 근거를 찾아보자.
모든 역사는 서술하는 사람에 따라 다르게 기술될 수 있다. 조선조가 망한 쪽에 초점을 두고 역사를 기술하는 이가 있는 반면, 조선의 역사가 500년이나 지속되었다는 사실에 초점을 두는 이도 있다. 그렇다. 조선조가 망했을 때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초점을 500년간의 지속에 두면 500년 지속의 저력 또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국가가 망하는 것도, 500년이나 지속되는 것도 결국은 당시 사람들로부터 비롯된 것이 아닌가.
이번 호에서 필자는 조선조가 500년이나 지속될 수 있었던 저력이라는 다소 큰 주제에 초점을 맞추고 싶다. 큰 주제에 접근할 때에는 구체적인 실례를 살펴본다. 그것이 필자의 방식이다. 시기는 400여 년 전 임진왜란에, 인물은 이원익(李元翼·1547~1634년)이라는 당시의 재상(宰相)을 택했다.
선조가 평안도로 피란 간 이유
이원익은 누구인가? 조선의 3대 임금 태종의 5세손으로 태어난 이원익은 88세라는 긴 생애를 살면서 40년 가까이 정승의 지위에 있었다. 특히 선조, 광해군, 인조 세 임금 아래에서 각각 두 차례씩 영의정에 임명되었다.
물론 이 자리에서 이원익의 화려한 이력을 살펴보려는 것은 아니다. 임진왜란, 광해군 시기, 인조반정(1623년), 이괄(李适)의 난(1624년), 정묘호란(1627년) 등 말 그대로 격동의 시기를 정치의 중심에서 경험했던 이원익이라는 인물은 여러 가지 각도에서 조망이 가능하다. 그러나 필자가 이 자리에서 주목하는 사안은 아주 미세하다. 바로 이원익의 대민관(對民觀), 즉 백성을 바라보는 그의 시선을 중점적으로 살펴보고자 한다.
이원익이 나이 46세로 이조판서가 되었을 때(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났다. 전쟁이 시작된 지 불과 보름 만에 선조(宣祖)는 피란을 준비하게 되었다. 그동안 우리는 임진왜란 당시 선조가 의주로 피란을 갔다는 사실만 알고 있었다. 정작 선조가 어떻게 피란을 갔는지에 대해서는 주목을 하지 않았다. 하지만 선조가 임진왜란 당시에 ‘어떻게’ 피란 갔는지를 살펴보아야 지난날의 과오를 반성하고 교훈을 얻을 수 있지 않을까?
이제 선조가 피란을 어떻게 갔는지 살펴보기로 하자. 선조는 전쟁이 발발한 지 보름 후인 4월 28일 “적병이 깊숙이 침입해 들어와 남쪽 여러 고을들이 날마다 함락되고 있다. 경성 가까이 온다면 (나는) 관서(關西)로 피하겠다”고 밝혔다.
그런데 관서로 피란을 가려는 이유에 대해 선조는 “이원익이 전에 안주를 다스릴 때 관서지방의 민심(民心)을 크게 얻었기 때문에, 그곳에서는 지금까지 그를 잊지 못하고 있다”고 말하고 있다. 이어서 선조는 이원익으로 하여금 “평안도로 가서 부로(父老·마을의 중심이 되는 어른)들을 알아듣도록 설득하여 민심을 수습하라”는 지시를 내린다.
당시 풍전등화(風前燈火)와 같은 상황를 맞이한 선조가 생각한 것은 바로 관서지방의 백성들이 이원익만큼은 신뢰를 하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그리고 이 신뢰감은 조선이 임진왜란을 극복하는 하나의 불씨가 되었다.
황해도사 시절 軍政 잘 처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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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황해도사 이원익의 업무 능력을 보고 그를 중앙으로 추천한 율곡 이이. |
전쟁이 발발하기 전인 선조 20년(1587년)에 41세의 이원익은 안주 목사에 임명되어 4년간 근무했었다. 하지만 이미 26세 때인 선조 5년에 이원익은 황해도사(都事) 직을 수행했었다. 도사(都事)란 지금의 부지사와 비슷한 직책이었다. 당시 관찰사가 오랫동안 공석이었으므로 이원익이 대신 맡아 일을 완벽하게 처리하였다. 특히 병적(兵籍)에 관한 일을 맡아서 완전하게 정리를 하여 전국에서 제일가게 만들었다.
당시 군정(軍政)은 상당히 문란하여 돈 있고 세력 있는 사람은 관리와 결탁하여 군역을 면제 받고 힘없고 가난한 사람들만이 군역을 지게 되었다. 이러한 현실에서 병적을 만드는 일을 이원익은 공정하고 깔끔하게 처리하였던 것이다. 이때 황해도로 율곡 이이(栗谷 李珥·1536~1584년)가 부임하여 이원익의 능력을 확인하고 이원익을 추천하여 중앙으로 돌아오게 한다.
이원익의 황해도 이력이 훗날 안주 목사 부임으로 이어졌다. 당시 지방관은 외직이라 일부를 제외하고는 나가기를 꺼렸다. 더구나 재해로 소출이 줄어 기민(饑民)이 생기거나 국세를 제대로 걷지 못하면 반대파에 의해 바로 탄핵을 받아 쫓겨나기 일쑤였다. 특히 평안도 지방의 요충지이지만 여러 해 재해와 수탈로 백성들이 피폐하고 영락(零落)한 안주는 이름과 달리 편안하지 못했다. 당연히 관리들의 기피대상 1호였다(이원익의 안주 목사 활동에 대해서는 양철원의 <梧里 李元翼>과 이정철의 <오리 이원익과 두 번의 貢物變通>을 참조하였다).
선조가 모두들 기피하는 안주를 맡을 적임자를 추천하라고 했을 때 황해도사 시절 뛰어난 일처리를 보였던 이원익이 추천을 받아 부임하게 되었다. 이원익은 안주 목사로 임명된 다음날 단기(單騎)로 길을 떠난다.
지방관으로 임명된 다음날 홀로 임지로 출발한 것은 당시 관행으로 보면 대단히 드문 경우이다. 대개는 임명된 후에도 한동안 서울에 머물면서 여기저기 임명과 관련된 정부기관들과 유력자들을 공식·비공식적으로 방문하여 인사를 차리다가, 그 사이에 신임 수령을 데리러 현지의 아전들이 서울에 도착하면 그들과 함께 부임하곤 했다.
있는 것을 활용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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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기도 광명시 소하동에 있는 관감당(觀感堂). 청렴했던 이원익이 관직에서 물러난 후 살았다. 비가 새자 1630년 인조가 새 집을 지어 하사했다. 1916년 중건했다. (충현박물관 제공) |
우선 그는 안주의 관속들에게 선박을 동원하여 곡식이 저장되어 있는 해변 고을에 가서 대기할 것을 지시한 후, 자신은 곧장 평안도 감사에게 가서 곡식 대출을 신청하여 허락받는다.
감사의 허락이 떨어지자마자 곧 곡물이 저장된 해변 고을로 가서 곡물을 꺼내 배에 싣고 안주로 운반한다. 이것으로 안주 백성들을 구제하고, 아울러 종자까지 나누어 주었다. 다행히 그해 가을에 크게 풍년이 들어 백성들은 빌린 곡식을 갚았고, 안주 지역도 소생했다.
또한 당시 안주는 오랜 피폐로 군액(軍額)에 결원이 많았다. 그로 인해 친척이나 이웃이 피해를 입는 경우가 허다했다. 군대에 필요한 재정을 위해 마을별로 징포(徵布)를 부과했는데, 남아 있는 사람들이 떠난 사람들의 몫을 담당해야 했다.
이미 황해도에서 군적 작업을 하면서 누구보다도 군정(軍政)의 문제점을 잘 알고 있던 이원익은 창고에 있는 곡식으로 징포를 사서 중앙에 납부하고, 이 곡식은 풍족한 가을에 거두는 방식으로 해결했다.
이원익이 행한 방식은 있는 것을 활용하는 것이었다. 따라서 이원익의 이러한 방식은 누구라도 마음만 먹으면 할 수 있는 것이었다.
한편, 당시 평안도 각 고을은 전세(田稅)를 서울에 내지 않았다. 안주 역시 마찬가지였다. 대신 안주는 변방 경계를 담당한 강계, 의주, 창성 같은 고을에 전세를 납부했다.
그런데 이 전세의 운반 및 수납 과정이 대단히 문란했다. 그 결과 안주 백성들은 원래 내도록 규정된 양보다 훨씬 많은 양을 내야 했다. 무거운 쌀을 운반해야 하고, 더구나 험한 지형을 통과해야 하는 지역의 특성 때문에 법적으로 백성들에게 수취하도록 규정된 양보다 수취량이 다소 늘어나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피했을 것이다.
또한 안주는 변경지역이라 거둔 조세를 국경지역의 소요비용으로 직접 전달해 사용하도록 했다. 하지만 바로 이러한 상황을 빌미로, 추가로 징수한 양이 지나치게 많았다.
조세 업무를 아전 대신 직접 처리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 이원익은 기존에 아전들이 담당했던 전세 운반을 직접 수행함으로써 그 문제를 해결했다. 원래 전세의 수취 및 납부는 지방관의 임무 중에서도 가장 중요했다.
때문에 이원익의 행동은 원칙에서 벗어난 것이 아니라 오히려 가장 원칙적인 행동이었다. 이원익이 직접 나가서 걷고 납입하니 아전들이 횡포를 부릴 기회가 없었다. 특히 변방 끝인 강계, 의주, 창성까지도 직접 가서 납부하였다.
안주 목사로서의 그의 활동은 대단히 성공적이었다. 당시 평안 감사는 윤두수(尹斗壽)였다 그는 이원익의 활동을 높이 평가하여 이를 조정에 보고하였다. 그 결과 이원익은 종2품 가선대부로 승진하였다.
형조참판으로 조정에 돌아온 후 임진왜란이 일어나는 다음 해까지 그는 윤두수에 이어 호조판서를 지냈고 이어서 예조, 이조판서를 역임했다. 임진왜란을 앞두고 그는 재상급 인물로 성장했다.
선조의 명을 받고 평안도에 도착한 이원익은 선조의 기대 이상으로 임무를 수행했다. 평안도에서 조정에 복귀하기 직전에 이원익은 정1품 숭록대부에 오른다. 이것은 민심을 안정시키면서도 8000명의 정예 군사를 훈련시키는 등 평안도의 전쟁준비를 잘한 것에 대한 치사였다. 관찰사에서 정승으로 곧바로 승진한 것은 조선 건국 이래 처음 있는 일이다.
또한 평안도 백성들은 자발적으로 그를 위해 사당을 세우고 제사를 지냈는데, 떠난 지방관을 기려서 살아 있는 사람의 사당을 세운 것 역시 건국 이래 그가 처음이라고 한다.
이와 같은 이원익의 안주에서의 선정(善政)은 조선을 살리는 불씨가 되었다. 평안도 지역 민심을 다독이는 수준을 넘어, 평안도를 전세(戰勢) 역전의 기반으로 만들었다.
임진왜란 당시 이원익이 평안도 관찰사로 임명받아 마지막 남은 땅인 관서를 지킬 때 백성들이 믿고 따른 것은 이때의 인품과 선정에 감복했기 때문이다. 임진왜란을 이겨낸 요인은 여러 가지로 설명될 수 있겠지만 전쟁 초기에 전열을 정비하는 데는 평안도 백성들의 활약이 대단히 중요했다.
安民의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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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원익의 영정을 모신 오리영우(梧里影宇). 경기도 광명시 소하동에 있으며, 조선 후기 소규모 사당의 모습을 잘 보여준다. (충현박물관 제공) |
이원익은 여기에 하나를 덧붙인다. ‘백성이 나라의 근본’이라는 말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 문구 자체가 바로 정치의 최고 목적이 되어야 한다고 강조한 것이다. 그래서 이원익은 ‘민생 이외의 기타의 일들은 모두 부수적인 일(其他事, 皆餘外也)’에 불과하다고 말한다.
이원익이 보기에 위정자들의 가장 큰 문제점은 ‘민생’이라는 가장 큰 주제를 평범하게 보아 넘기는 데 있었다. 하지만 당시의 민생문제는 왜군을 물리치는 것 이상으로 중요한 문제였다. 그는 말한다.
“지금 신(臣)이 직접 자세히 보고 왔는데 왜(倭)가 물러간다 하더라도 국가의 근본이 이 지경이 되었으니, 크게 걱정스럽습니다.”
“일체 안민(安民)에 염두를 두소서. 이것을 생각하지 않고 한갓 일처리에 급급해한다면, 이는 근본을 버리고 말단만을 다스리는 것입니다.”
백성의 삶을 편하게 하는 ‘안민’의 길은 백성의 삶을 직접 현장에서 경험하는 것에서 출발한다. 이원익은 무엇보다도 백성의 삶, 즉 민생(民生)을 주목했고 함께 고민했다.
하지만 이 글의 서두에서 말했듯이 아무도 자신의 삶을 대신해 줄 수는 없다. 백성의 삶 역시 국가가 대신 살아 줄 수는 없다. 그러나 조금 도와줄 수는 있다.
‘조금 도와줌’과 ‘대신 살아 줌’과의 차이는 엄청나다. 역사상 모든 독재자는 대신 살아 준다는 방식을 고수했다. “너희가 모르는 행복을 나는 알고 있다. 너희들의 행복을 내가 보장해 줄 테니 나만 믿고 따라오라”는 것이 모든 독재자의 주장이었다.
하지만 ‘조금 도와준다’는 의미는 이와 다르다. 등산의 예를 들어 보자. 북한산 등반을 하다 보면 종종 아찔한 상황을 만날 때가 있다. 가파른 바위길을 오르다가 힘에 부쳐서 올라가기도 어렵고 내려가기도 힘들게 된 경우를 말한다. 이때 뒤에서 조금만 도와주면 안전하게 등산을 마무리할 수 있다. 하지만 만약 그런 도움을 만나지 못한다면 위험한 지경에 이를 수도 있다. 결국 함께 산다는 것은 대신 살아 주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 조금씩 도와주면서 산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한편 대신 살아 주는 것이 아니라 조금 도와준다는 의미는 상대방을 인정하는 데서 출발할 수밖에 없다.
백성은 근본, 士族은 元氣
이원익은 이 땅의 힘없는 백성만 본 것이 아니다. 이원익은 이 땅의 힘 있는 자들, 당시의 표현대로 말하면 ‘대가(大家)’와 ‘세족(世族)들’을 배제하고는 국가를 유지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물론 이들에게 특권(特權)을 주는 것에는 반대했지만, 이원익은 이들의 국가에 대한 헌신은 마땅히 인정해 주어야 함을 강조했다.
그는 말한다. “대가’와 ‘세족들은 … 평상시에는 호강(豪强)이라고 불렸었지만 오늘날 시점에서 보건대 그들이야말로 국가에 관련되어 있는 것이 크다고 하겠습니다. 소민들은 물고기나 새같이 놀라 흩어졌어도, 사족(士族)들은 동요하지 않았으니 일국의 원기(元氣)가 될 만합니다. 당초 변란이 일어나던 시기에 군사를 모아 의병(義兵)을 일으킨 자들이 모두 이 사족이었으니 이로써 인심의 향배(向背)가 정해졌습니다. 이 점을 심상히 보지 말고 국가가 그들을 알아주어야 할 것입니다.”
이원익은 백성을 국가의 근본으로, 그리고 세족, 즉 사족들은 국가의 원기로 보았다. 사족들을 호강이 아닌 국가의 원기로 규정하고 있다. 사족이라고, 소위 ‘가진 자’라고 배척하지 않고 포용하는 자세를 보인다. 가진 자와 못 가진 자가 서로 반목하면 이미 국가의 기능이 마비될 수밖에 없다.
또한 이원익은 전쟁의 희생자를 기리고 그들의 희생을 보상하는 데 철저를 기할 것을 주문했다. 국가가 지켜 주지도 못한 백성들, 그 백성들이 국가를 위해 죽어 갔는데 이들을 국가가 기리지 않는다면 국가는 두 번이나 실패를 하고 마는 것이 아닌가.
그래서 이원익은 ‘전쟁터에서 죽거나 절의에 죽은 사람들’을 찾아내 자녀가 있는 사람은 그들이 거처하는 곳에서 별도로 휼전(恤典)을 베풀었다. 전쟁에서 희생자들에 대한 예우를 극진히 한 것이다. 이는 국가의 중요한 의무이다.
‘새 술을 헌 부대에’
한편 전쟁 초반에 평안도 중화읍(中和邑) 백성들의 활약이 눈부셨다. 당시 이 고을은 한 사람도 적(敵)에게 붙은 자가 없었으며, 전사한 자가 수천이나 되었다.
당시 평안도의 책임자가 바로 이원익이었다. 그는 이 지역에서 이들과 함께 전투를 벌였다. 당시 이원익은 배를 바닷가에 정박시키고서 백성들을 불러 말하기를 “너희들이 국가를 위하여 싸우다가 죽는 것은 당연할지라도 너희 처자들은 사세가 급해지면 도망할 곳이 없으니 먼저 배 위에 오르게 하고서 적세를 관망하는 것이 어떠한가?” 하였더니, 백성들은 대답하기를, “차라리 적에게 죽을지언정 강을 건너 어디로 가겠는가” 하고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싸우기를 계속했다.
이원익은 이들의 ‘각종 잡역(雜役)을 각별히 감(減)하여 장려하는 뜻을 보여 줄 것’과 더불어 ‘이들이 지난번 과거를 치를 때에도 적의 토벌을 급선무로 삼아 그 때문에 과거에도 응시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아뢰고 이들을 위해 국가에서 과거를 따로 시행해 줄 것을 역설하였다.
그의 주장은 기존의 행정수행 방식 자체를 수정하기보다는 그것의 투명하고 공정한 운영에 강조점을 두었다. 다시 말하면 새로 만들기보다는 있는 것을 활용하자는 주의였다. 그는 말한다. “한 이익을 일으키는 것이 한 폐단을 제거하는 것만 못하고, 한 일을 내는 것은 한 일을 더는 것만 못하다.”
이원익의 이러한 생각은 정치적으로 아주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우리는 흔히 ‘새 술은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는 생각을 한다. 하지만 이원익은 새 술을 헌 부대에 부으려 하고 있었다.
이원익의 이러한 생각은 정치를 ‘오래된 집을 수리하면서 사는 것’ 또는 ‘환자를 치료하는 행위’로 이해하는 사고와 비슷하다.
필자의 고향 집은 백년도 훨씬 더된 아주 오래된 구옥(舊屋)이다. 보수하면서 살기가 여간 어려운 것이 아니다. 경제적인 이유에서만 보면 부수고 새로 짓는 것이 훨씬 타당할 수 있다.
하지만 이러한 생각을 환자에게 적용할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정치란 이와 같다고 생각한다. 아무리 치욕적인 역사라도 그 부끄러운 부분을 달래고 치유하면서 안고 가야 하는 것이 정치가 가야 할 길이다.
‘愛民’이 아니라 ‘安民’
다시 이원익의 ‘대민관(對民觀)’으로 돌아간다.
임진왜란 당시 평안도 백성들은 이원익을 믿고 따랐다. 왜? 간단하다. 그가 신뢰를 주었으니까. 그런데 그 신뢰를 이념으로 줄 수 있을까? 천만에 말씀이다. 그들의 삶을 함께 고민해 줄 때만이 신뢰를 줄 수 있었다.
이원익은 바로 백성들의 삶을 주목했던 것이다. 여기서 필자는 다시 ‘안민’이라는 단어를 강조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런데 이 ‘안민’이란 단어의 상대어로 필자는 ‘애민(愛民)’을 꼽는다.
‘애민’이란 백성‘을’ 사랑한다는 의미이다. ‘안민’은 백성‘이’ 편안하다는 의미이다. 언뜻 비슷해 보이는 이 두 단어가 상당한 차이가 있다는 것은 이미 ‘율곡’편(<월간조선> 2011년 1월호)에서 살펴보았다.
‘애민’은 이념으로 흐르는 경향이 강하다. 백성은 소외되고 그 용어만 남게 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하지만 백성이 편안하다는 ‘안민’은 백성이 소외되면 말 자체가 사라지고 마는, 다시 말해서 운명적으로 백성과 함께할 수밖에 없는 단어이다. 이원익은 애민이 아닌 안민에 주목했기에 평안도 백성들은 그를 신뢰했다.
임금이 버리고 떠난 궁궐을 불태운 것도 조선의 백성이었고, 그 임금을 도와 조선을 회복시킨 것도 또한 조선의 백성이었다.
‘백성이 나라의 근본’이라는 용어만 남발하던 당시 위정자들의 모습은 오늘날 ‘복지’를 열심히 외치는 위정자들의 모습과 많이 닮아 있어 보인다. 오늘날 어느 누구도 복지를 언급하지 않고는 표를 얻을 수 없게 되었다. 그런데 필자가 보기에는 이원익 시대의 민생이 제외된 ‘백성 근본론’이 오늘날 민생이 제외된 복지론으로 이어지는 듯하다. 무엇보다도 ‘보편적 복지’란 ‘국민의 삶을 대신 살아 주겠다’는 위험천만한 의미와 무엇이 다른지 필자는 모르겠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