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찾는 사람 얼마 없던 10년 전 연안의 혁명기념관과 달리 모택동 생가는 인파로 붐벼
⊙ 고향 사람들 사이에는 모택동 관련 각종 설화 전래
⊙ 모택동, 유소기(전 국가주석), 팽덕회(전 국방부장), 하룡(전 부총리) 등이 호남성 출신
⊙ 고향 사람들 사이에는 모택동 관련 각종 설화 전래
⊙ 모택동, 유소기(전 국가주석), 팽덕회(전 국방부장), 하룡(전 부총리) 등이 호남성 출신
대장정은 일련의 정력적인 인간들이 오직 두 다리와 팔의 힘으로 동쪽에서 서쪽으로, 다시 북동쪽으로 370일 동안 무려 1만8000리의 대행군을 감행했던 여정이었다. 급류, 설산(雪山), 초원을 건너 섬서성(陝西省) 북부의 궁벽한 피신처에 도착했을 때 남은 이는 2만명이 채 되지 않았다. 이 무리의 근거지였던 강서성(江西省)의 소비에트를 출발한 1군단 예하의 인원만 9만명이었고, 양자강(揚子江) 상류와 귀주(貴州)에 진출해 있던 제2방면군, 양자강 중류 북안을 출발하여 사천(四川)에서 합류한 제4방면군, 하남성(河南省)을 거쳐 곧장 서북으로 간 일련의 인원까지 합치면 이 대행군의 대열에 참여한 이들은 20만명이 넘었다. 열에 아홉은 나가떨어지는 ‘고난의 행군’이었다. 이 격동의 중심에 모택동(毛澤東)이라는 사람이 있었다.
2000년 연안
비록 버스를 탔지만 나도 대도하(大渡河)를 건넜고, 홍원의 초원을 건넜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장정의 종착지인 섬서 북부의 연안(延安)으로 향했다. 나는 그때의 감상을 기록해 두었다. 그때의 기록 몇 구절을 그대로 옮겨본다. 그 정제되지 않은 글에는 여전히 실망보다 희망이 크게 들어 있다. <8월 14일, 연안 드디어 연안에 도착했다. 과거 공산당의 근거지에.
‘혁명(革命)기념관’.
혁명기념관에 몰려드는 사람들을 적다고 해야 할지 많다고 해야 할지. 고즈넉하다. 어쨌든 이제 한 사람, 혹은 몇 사람의 영웅들은 다만 기억 속에 남아 있다. 혁명기념관에서 과거 혁명의 열기를 느끼지 못하는 것은 내가 다른 곳에 서 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이제 중국인들에게 혁명은 과거의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광장에서 쓸 만한 쓰레기를 줍는 소년과 쫓는 시늉을 하는 복무원의 실갱이마저 그저 아득하게만 느껴진다. 이제 어제의 혁명은 천 수백 년 전 당나라의 성벽보다 더 과거의 유물처럼 느껴진다.
그러나 다시 시간이 지나면 기억을 되살리려고, 과거를 일으키고 뜯어보려고 안간힘을 쓸 터이다. 물론 완전히 현대의 옷을 입고 과거는 살아나겠지만. 정확한 시기에, 혹은 필요한 시기에 우리에게 일어난 잘된 일과 잘못된 일을 구별하는 것은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잘되기도 하고 잘못되기도 한 일들은 언제나 잘못된, 혹은 잘된 일로 나뉠 터이다. 인간에게 중간이란 원래 존재하지 않는지도 모른다.
모든 것은 당연한 일이다. 영웅들은 사라져야 한다. 얼마나 자연스러운 일인가? 그러나 영웅들은 다른 모습으로 여기에 그대로 남아 있을 수밖에 없다. 그 원형과 몇 가지 색의 옷만 남아 있으면 영웅은 살아난다. 나는 다른 영웅들이 살아나기를 바란다. 내가 바라는 그들은 이름 없는 영웅들이었다. 이름 없는 영웅들이 서로 모여 집단적인 영웅의 새로운 원형을 세우기를 바란다. 그것은 그야말로 ‘중간’이며 훨씬 더 창의적인 것이다. 노 작가의 말처럼 중국인은 과거의 속옷을 완전히 벗지 못했다. 고통스러운 과정일지라도 혁명은 단순한 부정과 긍정을 넘어 다시 해석되어야 한다. “넌 빠져”라고 말한다면 이방인은 할 말이 없지만.
5원을 아끼느라 시내에서 무려 5킬로를 걸어와 대학에 당도했다. 완전히 체력전이다.
학교의 규모는 한국의 고등학교 정도다. 비록 방학이라지만 학교는 너무 고요하다. 몇몇은 앉아서 책을 보고 몇몇은 산책을 한다.
연안대학의 한쪽 벽에 장문의 선언문이 적혀 있다. 중문계열의 동아리에서 적은 모양이다.
“세계의 열차는 이미 기적을 울렸다. …, 젊다는 것은 나의 차표.(世界列車已汽笛 …, 年輕是我的車票)”
감상과 젊은이다운 의지가 적당히 섞인 이 글에서 현재 중국의 젊은 정신의 단상을 보았다면 어쭙잖은 일일까. 무언가 가득 찬 듯한 그러나 무언가 부족한 듯한.>
모택동의 고향으로 가는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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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봉에서 모택동의 고향을 내려다보면 웅장함보다는 아기자기하고 예쁘다는 느낌이 든다. |
3월 8일 장사(長沙)에서 소산으로 가는 길이었다. 호남성(湖南省) 남서쪽의 풍경은 꼭 우리네 충청남도 같다. 나지막한 산들 사이로 아주 넓지도 좁지도 않은 들판이 이어지고, 농토가에 집들이 올망졸망 모여 있다. 큰 산도 없고, 큰 들도 없다. 그나마 지세(地勢)는 충청남도 정도의 기백도 없어 보인다.
그럼에도 이곳에서 중국 현대사를 주무른 일급 인물들이 대부분 나왔다. 우리네 땅과 너무나 비슷하기에 풍경은 지나치게 현실감이 있어 이국(異國)이라는 느낌은 전혀 나지 않는다. 가끔씩 중국어로 벽에 써놓은 글자들만 없다면 한국의 농촌이라고 해도 다 믿을 것이다. 그러나 거대한 산맥 아래나 넓은 벌판 아래서도 현대사를 뒤흔들 인물들이 나오지 못했을 때, 이곳 야트막한 언덕 아래서 중국혁명을 마무리 짓는 인물들이 성장했다.
모택동이 에드가 스노에게 스스로 풀어놓은 이야기는 고향의 이름을 언급하는 것에서 시작한다.
“나는 1893년 호남성 상담현(湘潭縣) 소산(韶山) 마을에서 태어났습니다.”
이 혁명가의 술회방식은 단적으로 수호전적이고, 삼국지적이다. 사실 그 혁명가는 마르크스주의자였으나 철저히 중국의 현실 속에서 성장한 사람이기도 했다. 더욱 재미있는 것은 그가 고향에 자신을 묻어달라고 했다는 것이다.
‘모택동’으로 먹고사는 고향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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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모택동 생가 앞 연못. 모택동의 생가는 숲과 연못으로 둘러싸인 소담스러운 터에 자리하고 있다. |
연못가의 소담스러운 터에 자리를 잡고 있지만 튼튼한 흙벽돌을 쌓아올린 집은 꽤 규모가 있었다. 모택동은 스스로 이렇게 말했다.
“겨울에 벼를 찧을 때는 일꾼을 한 사람 더 쓰기 때문에 밥을 축내는 사람이 7명이나 되었습니다.”
그의 집은 일꾼을 고용할 정도는 되었던 것이다. 집 뒤의 조그마한 골짜기를 한 번 돌면 호젓하고 좋다. 너무 평화로워서 여기는 왠지 선비가 공부하는 터처럼 느껴질 뿐, 혁명가의 생가로 보이지는 않는다. 일찍 꽃망울을 틔운 벚나무와 연한 초록색 잎이 애처로운 버들, 사시사철 푸른 호남의 상록수들이 집 주위를 꽉 메우고 있다. 난세(亂世)가 아니었으면 그도 혁명가의 길을 택하지 않았을 것 같다.
모택동 생가 주변 사람 중 많은 이가 죽은 이에게 기대어 생계를 유지한다. 현지 주민들은 모택동이 원래 고향에 묻히고 싶어 했다고 믿고 있다. 그래서 모택동의 가묘(假墓)까지 만들어놓고 장사를 한다. 들여다보면 약간 조잡하지만 현지 주민들에게는 큰 소득원이 된다.
근처에 모택동 동상이 있다. 숲과 연못에 둘러싸인 생가와는 달리 정연한 돌계단과 동상 옆에 꼿꼿이 선 제복 경찰이 대단히 공학적(工學的)인 분위기를 풍긴다. 동상 앞에서는 아주머니들이 모택동이 혐오하던 봉건적인 의식인 고두(叩頭)를 열심히 드리고 있다. 머리를 땅에 대고 동상에 몇 번이나 절을 한다. 사람이 하도 많아 계단가의 낮은 벽으로 올라가려 하다가 경찰의 제지를 받았다. 불경스러운 행동이었던 것이다. 저 많은 사람이 혁명을 기리는 사람인지는 잘 모르겠다.
平安神이 된 모택동
소산 역으로 돌아오는 길에 택시기사가 이런 이야기를 해주었다.
“동상은 남경(南京)에서 만들었어요. 남경에서 만들어서 차에 싣고 여기까지 오는데, 정강산(井剛山)을 지날 때 차가 아무 이유 없이 멈춰섰어요. 정비기사가 보니 아무 문제도 없었대요. 기름도 있고, 엔진도 문제가 없고, 이유를 찾을 수가 없더래요.”
그럴 수도 있겠지. 그는 말을 이었다.
“그런데 그 다음 날 아침 여섯 시 차가 아무 문제 없이 시동이 걸리고, 앞으로 가는 거예요. 차를 전혀 손보지 않았는 데도 말이죠. 사람들은 모 주석이 혁명성지(聖地)를 그냥 지나치지 못했기 때문에 하루 거기서 묵고 싶어서 차를 세웠다고 생각해요.”
“그래요?”
나는 맞장구를 쳐주었다. 하지만 좀 미심쩍었다. 이 택시기사는 모택동의 영혼을 정말 믿고 있는 것일까?
“아저씨는 모 주석의 영혼이 정말 차를 세웠다고 믿어요?”
“그럼요. 모 주석은 지금 평안신(平安神·사람에게 평안을 주는 도교의 신)이 되었어요.”
“그걸 믿어요?”
“네. 믿어요.”
그리고 그는 이외에도 몇 가지 이야기를 해주었다. 동상을 세우는 날 해와 달이 동시에 나오고, 겨울인데도 두견화가 피었다는 것이다. 꽤 젊은 그가 모 주석이 죽어 평안신이 되었다는 것을 정말 믿는지 확인할 길은 없다. 그러나 모 주석에게 절하는 수많은 사람 중 일부는 정말 그가 신이 되었다고 믿을 것이다. 혹은 믿지 않더라도, 그를 신으로 대접하는 이들이 있는 것은 사실이다.
모택동의 농민혁명 사상
19세기 중반 이래 끊임없이 이어진 중국 혁명사의 특징 두 가지 중 하나는 혁명이 결국 사회주의로 귀결되었다는 사실이다. 그보다 더 특이한 점은 사회주의 혁명의 주체가 도시 프롤레타리아트가 아니라 농민들이었다는 점이다.
《공산당선언》은 분명히 밝히고 있다. 앞으로의 대립은 오직 부르주아지와 프롤레타리아트 양자 사이의 일이다. 혁명은 프롤레타리아트가 하는 것이며, 혁명의 대상은 부르주아지다. 그리고 혁명은 도시에서 일어난다.
그러나 중국의 사회주의 혁명은 《공산당선언》의 어떤 주제도 만족시키지 못했다. 과연 혁명을 담지 할 계급은 있었던가? 청조(淸朝)가 멸망할 당시 공업 노동자는 아직 100만명을 채우지 못했다. 4억의 인구 대국에 100만명이라면, 공업 노동자는 대략 노동인구의 0.5%에도 미치지 못했다고 볼 수 있다.
당시 중국에는 그들이 타도해야 할 부르주아도 없었다. 혁명을 성공시킨 소련의 지도자들이 중국에 바란 것은 기본적으로 부르주아의 혁명이었다. 그래야 그다음 단계인 프롤레타리아 혁명이 가능해진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중국의 혁명을 주도하게 되는 이들의 생각은 달랐다. 부르주아 혁명이 기존의 질서를 깨뜨리기를 기다릴 단계가 아니라, 사회주의 혁명으로 기존의 관계를 바로 깨뜨리면 된다고 생각했다. 착취관계가 존재한다면 혁명을 할 이는 있다.
지금 중국에서 착취당하는 계급은 누구인가? 바로 농민이다. 그렇다면 혁명가로 누구를 조직할 것인가? 농민이다. 모택동의 결론은 그런 것이었다. 《호남농민운동고찰보고》(湖南農民運動考察報告)에는 모택동의 직선적인 사고(思考)가 잘 드러나 있다. 그는 이렇게 주장한다.
타도할 대상은 누구인가?
“농민의 주요 공격목표는 토호와 악덕 신사(紳士), 불법지주, 그리고 각종 종법(宗法) 사상과 제도, 성 안의 탐관오리와 향촌의 악습이다.”
그들을 타도할 주체는 누구인가?
“향촌에서 줄곧 악전고투해 온 주요 세력은 빈농(貧農)이다. 비밀투쟁 시기부터 공개적 투쟁 시기까지 빈농은 언제나 여기서 적극적으로 투쟁해 왔다. 그들이 공산당의 영도를 가장 잘 따르는 이들이다. 그들은 토호 및 악덕 신사와 목숨을 걸고 대립하고 있으며, 그들은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 토호와 악덕 신사의 진영을 향해 돌진한다. 그들 중에는 사실 대단히 많은 사람이 실제로 기왓장 하나 땅 한 뙈기 없다. 그들이 뭐가 있다고 농민회에 들어오기를 거부하겠는가?”
‘가난한 사람’과 ‘덜 가난한 사람’으로 구성된 사회
모택동은 분명히 《공산당선언》의 마지막 문장을 염두에 두고 ‘프롤레타리아’를 ‘빈농’으로 바꾸었다. 선언의 마지막 문장은 이렇다.
“프롤레타리아트가 이 혁명에서 잃을 것은 쇠사슬밖에 없다. 그들이 얻을 것은 전 세계이다.”
모택동과 함께 혁명의 한 축이었으며, 역시 ‘중농(中農)’ 출신이었던 주덕이 한 증언이다.
“어머니는 자식을 열셋이나 낳았는데 아들 여섯과 딸 둘만 살아서 성장했고 뒤로 낳은 다섯은 모두 태어나자마자 물에 빠뜨려 죽여버렸어요. 너무 가난해서 그 많은 식구를 먹여 살릴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아그네스 스메들리, 《주덕평전》)
청말(淸末) 중국의 일반적인 농민의 삶이란 대체로 이러했다. 그래도 주덕의 집은 좀 나아서 남은 사람은 끼니는 먹고 지냈다.
손문(孫文)이 중국을 “‘가난한 자’와 ‘덜 가난한 자’로 된 사회”라고 부른 것은 어느 정도 사실이었다. 당시 중국사회는 전체적으로 극도의 저생산(低生産) 사회였다.
‘인재의 고향’ 호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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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국의 사회주의 혁명을 이끌었던 주역들은 호남성과 사천성 사람들이었다. 모택동은 호남성 출신이다. 호남사범대 내 악록서원 대련의 모습. |
중국의 사회주의 혁명을 이끌었던 주역들은 주로 호남성과 사천성(四川省) 두 지방 사람들이었다. 모택동, 유소기(劉少奇·전 국가주석), 팽덕회(彭德懷·전 국방부장), 하룡(賀龍·전 부총리·인민해방군 원수)이 호남성 출신이며, 주덕(朱德·전 인민해방군 총사령), 진의(陳毅·전 부총리·인민해방군 원수), 등소평(鄧少平·전 중국공산당 중앙군사위 주석)은 사천성 사람이다. 이들보다 더 중요한 역할을 한 사람이 또 누가 있을까. 내전(內戰)기의 임표(林彪·전 국방부장)나, 내전 승리 후의 주은래(周恩來·전 총리) 정도가 이들에 비견될 정도다.
나는 그 호남성 사람 중에서도 모택동과 팽덕회 이력의 유사성 때문에 놀라게 된다. 에드가 스노는 모택동과 팽덕회를 묘하게 대비시켜 놓았다. 그들은 대단히 포용력이 있는 동시에, 대단히 반항적인 유년을 보냈다.
모택동의 아버지는 대단한 구두쇠였으며 오직 돈을 불려야겠다는 의지로 가산을 늘릴 수 있었다. 돈이 있으면 자식은 최소한 교육을 시켜야 한다. 모택동은 일곱 살에서 열세 살까지 마을 소학교에서 《사서》를 배우다가, 스승의 엄격함과 매질 때문에 가출한 적이 있다. 아버지는 대단히 인색하고 엄해서 아들들을 때리고, 먹을 것까지 아꼈던 모양이다.
그는 “매월 1일과 15일이 되면 아버지는 일꾼들에게 계란과 소금에 절인 생선조각을 주었고, 고기는 살짝 맛만 보게 했어요. 그나마 나에게는 아예 계란이나 고기를 주지도 않았어요”라고 회고한다.
그 대신 어머니는 대단히 관대하고 동정심이 많아서 항상 어려운 사람들을 도와주었다고 한다. 소년 모택동은 자기 집은 아버지의 ‘집권당’과 어머니의 ‘반대당’으로 나뉘어 있었다고 술회한다.
반항아 - 모택동과 팽덕회
결국 그는 아버지에게 맞서기로 결심한다. 그가 겨우 열세 살이었을 때 아버지는 손님들 앞에서 그를 욕한다. 그는 격분해서 다시 집을 뛰쳐나왔다. 아버지가 따라나오자 그는 연못가에서 더 이상 가까이 오면 물에 빠져 죽겠다고 위협했다. 아버지와의 협상이 시작된 것이다. 아버지는 머리를 땅에 대고 사죄해야 용서한다고 했고, 그는 아버지가 때리지 않는다면 한쪽 무릎만 꿇겠다고 대꾸했다. 결국 그는 아버지의 ‘항복’을 받아냈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나는 이 일을 통해 내 권리를 지키기 위해 노골적으로 반항할 때는 아버지가 수그러들지만 온순하게 복종만 하고 있으면 아버지가 더 심하게 욕하고 때릴 뿐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팽덕회는 모택동보다 더 엄혹한 어린 시절을 보냈다. 그는 모택동보다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났다. 그러나 훨씬 반항적이었기에, 심지어 가족에게 생명의 위협을 당하기도 한다.
팽덕회는 어렸을 때 구식학교에서 선생의 매질을 자주 당했다. 그런데 어느 날 이 어린이는 선생의 매질에 반항하여 선생에게 의자를 던지고는 달아났다. 당시의 중국 향촌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는 조상도 믿지 않았다. 어린 손자가 조상을 숭배하지 않는다는 것을 안 할머니는 손자를 증오했다. 팽은 이렇게 증언한다.
“나의 할머니는 우리 모두를 자신의 노예로 생각했다. 할머니는 심한 아편 중독자였다. 나는 아편 냄새를 혐오했다. 어느 날 밤 더 이상 그 냄새를 참을 수 없어 나는 벌떡 일어나 아편 그릇을 발로 차버렸다.”
격노한 할머니는 팽을 죽여야 한다고 주장했고, 계모는 동조했으며, 친아버지는 반대하지 않았다. 그는 친외삼촌의 비호 덕분에 살아났는데, 대신 집에서 쫓겨나야 했다. 그 후 그의 일생은 파란만장한 중국혁명의 급류로 이끌려 들어간다. 그 후의 과정은 모택동과 크게 다르지 않다.
그 둘은 모두 중국의 고전에 익숙했고, 처음에는 양계초(梁啓超)를 흠모했다. 모두 국민혁명에 개입했고, 《공산당선언》이나 《계급투쟁》 등을 읽었다. 모택동이 호남사범학교로 들어가 5년 동안 착실히 공부했던 반면, 팽덕회는 군인으로서 일선에 있었다는 점 정도가 차이였다.
모택동이 1921년 상해에서 열린 제1차 공산당전국대표대회에서 호남인으로 유일하게 참석하게 될 때까지 팽덕회는 공산당원이 아니었다. 그러나 그는 국민당 군대 내에서 충분히 좌측으로 움직여 거의 공산당원과 비슷한 생각을 가지게 된다. 이 호남의 두 인물은 대단한 반항아들이었다. 다만 일반인과 달리 반항의 대상을 점점 더 확대시키면서 결국 혁명가가 되었다.
통행료 받는 군벌 같은 중국 경찰
2009년 초여름, 운남성과 사천성을 연결하는 대도하 협곡의 북부를 빠져나오면서 악몽 같은 시간을 보냈다. 대도하가에 놓인 질척거리는 길은 끊어졌다, 이어졌다를 반복했다. 물살은 너무 빨라 수시로 길을 끊어 놓았고, 보수해 놓은 길에는 책상만 한 낙석(落石)들이 자리를 차지했다.
경찰들은 외지(外地)의 번호판만 보이면 먹이를 낚아채듯이 차를 세웠다. 내가 탄 영업차의 기사는 성(省)의 경계를 허가없이 넘었다는 이유로 우리가 낸 차비보다 더 많은 벌금을 물었다. 그리고 길이 좁아지는 곳에서 난 접촉사고로 다시 거금(巨金)을 물었다. 경찰은 마치 통행료를 받는 군벌 같았다.
이런 곳을 지나다 보면 자신도 모르게 강퍅해진다. 그러나 어떤 사람들은 이런 길을 1만8000리나 걸어갔다. 도대체 어떤 사람들일까?
모택동을 위시한 이단아(異端兒)들은 농촌의 해방구(解放區)를 연결하여 도시를 포위할 원대한 꿈을 꾸고 있었다. 그들은 압도적인 물량의 열세에도 불구하고 농촌에서 세력을 넓히고 있었다. 그러나 힘의 차이는 명백했다. 막대한 군비를 투입한 제5차 초공(剿共)작전이 이단아들이 강서성에서 일군 ‘해방구’를 압박해 들어왔다. 적을 포위하기도 전에 적이 먼저 포위해 들어온 것이다. 작은 해방구는 포위되자마자 극심한 고통을 겪었다. 별다른 선택이 없었다. 포위를 뚫고 달아나느냐, 아니면 전투하다 죽느냐의 갈림길에 서게 되었다.
드디어 1934년 10월 16일. 홍군(紅軍)의 주력군은 운명을 건 대탈주를 감행한다. 그때 남경의 국민당 정부는 승리를 확신하고 있었다. 보급도 제대로 못 받는 이들을 양식이 없는 서부변경으로 몰아내면 내전은 완전히 끝나는 것이다. 달아나는 이들의 북쪽에는 배 없이는 도저히 건널 수 없는 양자강이 가로막고 있다. 이 강을 건너지 못하게 하면서 계속 서쪽으로 내몰면 인간으로서는 도저히 건널 수 없는 협곡과 고원이 나온다. 거기에서 홍군은 얼어 죽거나 굶어 죽을 것이다.
홍군은 홍군대로 양자강의 지류(支流) 하나를 건너 다시 동쪽으로 갈 심산이었다. 그 목표지는 선배 ‘비적’ 석달개(石達開)가 건너려 했던 바로 대도하였다. 석달개는 대도하를 건너지 못하고 실패했다. 전속력으로 운남(雲南)에서 사천으로 북상한 이들은 석달개가 건너려 한 안순장을 목표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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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향에 있는 모택동의 동상 앞은 참배객으로 넘쳐난다. |
홍군, 대도하를 건너다
군벌과 국민당군이 뒤섞인 백군(白軍)의 극단적인 기강 해이가 없었다면 도하는 상상도 못 할 일이었다. 선봉군을 이끌던 임표는 기습적으로 안순장을 공격한 후 노획한 배로 선봉대를 옮기기 시작했다. 배 세 척이 밤낮으로 사흘을 날라 1개 사단을 강의 동쪽으로 이동시켰다. 그러나 뒤따라 도착한 1군단 본대와 보조부대가 도하하려 할 때 물은 너무나 불어 있었다. 배를 움직이지 않고 사람들을 다 태우기를 기다리다가는 또 석달개와 같은 운명을 맞을 판이었다.
선봉대를 이끌던 임표는 회의를 소집했다. 결국 이들은 다시 북쪽으로 100km 이동해서 노정교를 건너기로 했다. 노정교는 굵은 쇠사슬로 절벽 양쪽을 연결하고, 그 쇠사슬 위로 나무판을 깔아놓은 대단히 위태로운 다리였다. 지금도 이 다리 중간에서 아래의 물길을 내려다보면 오금이 저린다. 그러나 강의 동서(東西)를 연결하는 다리는 이것뿐이었다. 백군도 차마 이 인민의 재산을 철거하지는 못하고 판자 일부를 걷어내고 동편 기슭에 기관총을 설치하고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아직도 어떻게 도하가 가능했는지 짐작이 되지 않는다. 홍군의 지원자 30명이 차례로 쇠사슬에 매달렸다고 한다. 선두 세 명이 총탄 세례를 받고 물에 떨어졌다고 한다. 그런데도 후속 인원이 계속 쇠사슬에 매달렸고 결국 몇 명이 나무판자 위로 올라섰다고 한다. 총알이 빗발쳤고, 판자에 오른 이들이 뛰어서 다리를 건너 백군의 기관총 보루를 무력화(無力化)시켰다고 한다.
이 진술이 사실이라면, 그런 일이 실제로 일어날 수 있었던 조건은 단 하나다. 사천성의 백군이 사격을 전혀 할 줄 모르거나, 일부러 맞히지 않았던 것이다. 어쩌면 상대방은 자신들과는 다른 악귀(惡鬼) 같은 인간들이라고 생각해서 상대를 하지 않기로 했을지도 모른다.
‘너무 강한 사람’이었던 것이 문제
지휘관부터 병사까지 홍군은 지금껏 중국에서 존재하지 않던 유형의 군대였다. 에드가 스노는 결핍이 심해질수록 더욱 낙관하는 그들에게서 희망을 읽었다. 그들은 강철 같은 사나이들이었고, 무엇이든 극복할 수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모리스 마이스너는 그들이 ‘강한 사람’이 아니라 ‘지나치게 강한 사람’이었다는 사실이 문제였음을 간파한다.
그는 이렇게 지적한다.
“대장정을 겪은 사람들은 살아남기 위해서 모든 것을 희생한 사람들이다. 동료들은 대부분 죽고 자신은 살아남았다. 이 살아남았다는 사실 자체가 엄청난 자신감을 심어주었다. 그들은 오직 인간의 힘으로 모든 것을 이룰 수 있다는 대단히 주의주의(主意主義)적인 신념을 가지게 되었다.”
그 생존의 투쟁을 영도한 사람이 누구였던가? 바로 모택동이다. 그들은 모택동을 숭배할 수밖에 없었다.
문제는 모택동도 사람이었다는 것이다. 그가 오류(誤謬)를 범했을 때 공산당은 위기로 치달을 수 있었다. 그리고 그들은 너무나 강인했으므로 원래 추구했던 혁명의 가치들이 자신들을 소외시키는 시점에서도 견딜 수 있었다. 생산력이 정체되고, 심지어 기근이 들 때에도 그들은 의지로 버틸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오류는 교정되지 않고 유지되었다. 결국 그것은 대약진(大躍進) 운동과 문화대혁명의 화근이 되었다.
지난해 녹음이 우거진 여름 여산(廬山)을 다녀온 적이 있다. 1959년 7월 이 산에서 중국공산당 중앙정치국 확대회의가 열렸다. 이 아름다운 곳에서 무서운 결정이 내려졌다. 대약진은 대학살이었다.
그때 팽덕회는 대약진 운동이 무리하게 진행되었다는 것을 지적하는 편지 한 통을 모택동에게 전달했다. 내용은 극히 온건했다. 그간 대약진 운동의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지나치게 서두른 결과 자원이 낭비되었다는 것뿐이었다.
그러나 모택동은 이 지적을 용납할 수 없었다. 그는 돌연 팽덕회의 서신을 공개하고 회의에 부쳤다. 이 사건은 정치국이 팽덕회 등에게 ‘우파(右派)기회주의’, ‘반당집단(反黨集團)’ 따위의 굴레를 씌운 <팽덕회 동지를 필두로 한 반당집단의 착오에 대한 결의>(關于以彭德懷同志爲首的反當集團的錯誤的決議)로 귀결되었다.
결국 팽덕회의 후임으로 모택동은 팽덕회보다 훨씬 과격하며 ‘강인했던’ 임표를 등용했다. 임표는 국공(國共)내전 시기 동북전선 사령관이었으며, 6·25 당시에는 인해(人海)전술로 이름을 떨친 인물이다.
그러나 모택동과 입술과 이(齒)의 관계에 있던 임표의 등장은 문화대혁명이라는 피바람으로 명백한 오류를 남기게 된다. 모택동도 임표도 너무 강한 사람들이었다. 이들 강한 사람들이 결합하자 보통사람들은 도저히 따라잡을 수 없었다. 인민들은 실현할 수 없는 목표에 눌려 혁명에서 다시 소외되었다.
영웅시대가 끝나기를 바라며
나는 달라이 라마가 모택동을 평가한 것을 보고 깜짝 놀랐다. 그는 ‘모택동은 전반기는 인민을 위해 일한 위대한 인물이었으며, 그 후반기는 오류에 빠져 실패했다’고 말했다. 영웅의 지위는 짧아야 한다. 너무 오래 그 자리에 있으면 영웅 특유의 잔인함만 남고, 판단력은 평범한 사람 수준으로 떨어진 변이체(變異體)로 바뀔 수 있다.
아직 영웅을 기다리는 사람들이 너무 많다. 나도 새로운 영웅이 등장하기를 기대한다. 모택동이 아닌 이름 없는 다수의 영웅 말이다.
소산을 떠날 때 나는 작은 희망을 보았다. 모택동 생가 뒤편의 호젓한 숲을 돌다 보면 ‘모택서빈관(毛澤西賓館)’이라는 호텔의 간판이 보인다. 위트 넘치는 패러디다. 모택동의 무거운 이름은 중화되고, 인민들의 가벼운 생기가 살아 있다.
죽은 사람들은 이제 과거로 사라졌으면 한다. 그 사람이 위인이든 천재든 죽은 사람은 기억의 한편을 차지하는 것만으로 족하다. 죽은 풀이 초지에 가득한데 어떻게 새 풀이 돋아날 것인가? 삶과 죽음의 구분이 없어지면 사람은 타락한다. 영웅도 예외일 수 없으리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