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수천 년 계속되어 온 ‘낡은’ 국가체제에서 완전히 다른, ‘새로운’ 모델의 국가체제로 전환
⊙ 5·16 主體들은 기성 정치인·지식인들보다 사람·지식·통찰력이 달랐다
⊙ 4·19의 의식혁명과 再탄생혁명, 5·16의 산업화혁명과 국가再造혁명이 대한민국 자유민주주의의
인프라
宋復
⊙ 74세. 서울대 정치학과 졸업, 서울대 신문대학원 석사, 서울대 대학원 정치학 박사.
⊙ 《사상계》 기자, 《청맥》 편집장, 《서울신문》 기자, 연세대 사회학과 교수·국학연구원장 역임.
⊙ 저서 : 《서애 유성룡 위대한 만남》 《열린 사회와 보수》 《한국사회의 갈등구조》 등.
⊙ 5·16 主體들은 기성 정치인·지식인들보다 사람·지식·통찰력이 달랐다
⊙ 4·19의 의식혁명과 再탄생혁명, 5·16의 산업화혁명과 국가再造혁명이 대한민국 자유민주주의의
인프라
宋復
⊙ 74세. 서울대 정치학과 졸업, 서울대 신문대학원 석사, 서울대 대학원 정치학 박사.
⊙ 《사상계》 기자, 《청맥》 편집장, 《서울신문》 기자, 연세대 사회학과 교수·국학연구원장 역임.
⊙ 저서 : 《서애 유성룡 위대한 만남》 《열린 사회와 보수》 《한국사회의 갈등구조》 등.

- 5·16은 합법정부를 몰아낸 쿠데타였지만, 국가再造혁명이기도 했다.
5·16을 어떻게 평가할 것인가. 그것도 ‘역사적으로’ 어떻게 평가할 것인가. 5·16이 일어나고 반(半)세기가 지나고 있다면 그 ‘평가’는 누구에게나 자유로울 수 있다. 누가 평가를 하든 저어하거나 거리낄 것이 없다.
역사는 모든 현재(現在)를 과거로 만든다. 과거는 모든 현존(現存)을 무덤으로 바꾼다. 무덤만큼 평가에 자유를 부여하는 것이 없다. 무덤은 객관(客觀)이고 엄혹(嚴酷)이다. 살아있을 때 한 대로, 지은 대로, 걸은 대로, 무덤은 말한다. 그래서 역사는 준엄하다.
5·16을 ‘역사적으로’ 어떻게 평가할 것인가. 그 물음은 오늘날 대한민국은 어떻게 만들어졌는가부터 풀어야 한다.
오늘날 대한민국은 말할 것도 없이 이승만(李承晩) 초대(初代) 대통령이 역사상 처음으로 자유민주주의 국가를 이 땅에 건설하는 데서 시작한다. 주목할 것은 그것이 역사상 ‘처음’ 이라는 데 있다. 처음인 것만큼 자유민주주의를 만드는 인프라가 있을 수 없다. 군주주의(君主主義)·독재주의(獨裁主義)·전체주의(全體主義) 체제는 인프라 없이도 체제(體制)의 운영이며 체제의 지속이 가능하다. 그러나 자유민주주의 체제는 기본적으로 다원주의(多元主義) 체제이고 시장경쟁 시스템이다. 그것은 구조적으로 시스템을 뒷받침하는 인프라 없이는 진행이 불가능하다.
자유민주주의의 인프라는 경제적으로는 산업화이고 정치·사회적으로는 시민의식의 확립이다. 그것은 자유민주주의 성립의 토대이며 전제(前提)조건이다. 그 조건이 충족되지 않는 한 자유민주주의는 한 치도 앞으로 나아가지 못한다. 나아가기는커녕 예외 없이 곧바로 카오스 상태로 들어간다. 끊임없이 정쟁이 벌어지고, 파업이 일어나고, 그래서 정치는 항시 불안정하고 사회는 무질서하고 경제는 침체한다. 오히려 강제·강압에 의해서 유지되는 독재주의이며 전체주의 체제가 낫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증가한다. 우리의 초기 자유민주주의도 그래서 불가피하게 카오스를 경험해야 했고 그 시기를 거쳐야 했다. 그것을 피해 가는 길은 우리에게 없었다.
4·19, 의거이며 혁명
4·19가 일어나고 5·16이 일어나는 것은 바로 그 이유에서다. 우리만 4·19며 5·16을 경험한 것이 아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신생한 나라들 중 자유민주주의를 택한 나라들은 예외 없이 이 대정변(大政變)을 경험했다. 그것의 성공 여부는 차치하고, 자유민주주의의 인프라 없이 자유민주주의의 길로 간 나라들은 한 나라도 빠짐없이 어둠의 혼돈상태로 들어갔고, 그 다음 4·19와 같은 폭발, 5·16과 같은 정변을 만났다. 그것은 우연이 아니라 필연이었다.
그러나 우리의 4·19와 5·16은 그들 나라의 그것과는 달랐다. 그래서 신생국 140개국 중 유일하게 산업화도 성공하고 민주화도 성공했다. 그 ‘무엇’이 그렇게 만들었는가. 바로 그 ‘무엇’에 대한 평가가 4·19에 대한 역사적 평가이고, 5·16에 대한 역사적 평가다.
먼저, 우리에게 4·19는 무엇인가. 4·19는 어떤 역사적 의의를 갖는가. 4·19는 우리 역사에, 아니 지금의 이 ‘대한민국’에 무엇을 기여했는가. 한때 4·19는 의거(義擧)냐 혁명(革命)이냐를 가지고 논란을 벌였고, 그 논란은 아직도 계속된다. 의거든 혁명이든, 아직도 그 논란을 계속하는 것은 개념(concept)의 불분명성과 개념의 미발달 때문이다. 혹은 사회적 시각의 미성숙에 의한 논쟁이다.
4·19는 명백히 ‘의거’다. 독재에 대한 저항이며 불의(不義)에 대한 항거다. 자유민주주의를 파괴하는 불의, 그 불의에 항거해서 그 불의를 바로잡자고 분연히 일어선 것이다. 그래서 불의를 저지른 정권을 무너뜨렸다. 그래서 그것은 의문의 여지 없이 ‘의거’다.
그러나 그 ‘의거’는 ‘의거’로서 끝나지 않았다. 우리 역사상 처음으로 ‘밑으로부터’ 일어나서, 구(舊)정권을 몰아내고 새 정권을 만들어 냈다. 위로부터가 아니라 ‘밑으로부터’였다. 그것은 우리의 기나긴 역사에서 처음 있는 일이었다. ‘밑으로부터’에 의한 정권교체, 새로운 국가기구의 형성과 선택― 이것은 엄청난 의식의 충격이며 의식의 바꿈, 의식의 개조(改造)였다. 그것은 바로 ‘의식혁명’이었다.
4·19를 통해 우리 의식은 다시 만들어진 것이다. 아니 다시 태어난 것이다. 서구(西歐) 근대 혁명사에서 말하는 ‘시민의식’으로 다시 만들어지고 다시 태어난 것이다. 그 시민의식은 바로 의식의 재(再)탄생이었다. 그렇다면 4·19는 우리의 ‘의식혁명’인 동시에 그 의식의 ‘재탄생 혁명’이다. 4·19는 분명히 의거다. ‘의거’이면서 동시에 ‘혁명’이다. 이 ‘혁명’으로 우리는 우리 선대(先代)가 가졌던 전통의식을 현대의식으로 탈바꿈했다. 이 ‘의식혁명’ ‘재탄생혁명’으로 우리는 우리의 선대와 결별했다. 우리는 우리 선대의 오직 생물학적 후손일 뿐, 사회학적 후예는 아니었다. 정치·사회적으로 우리는 우리 선대와 다른 사람들이 됐다.
5·16, 기적의 근대화 그리고 국가再造
정변이자 혁명
우리 역사에서 5·16은 무엇인가. 5·16 없이도 오늘날의 이 ‘대한민국’은 존재하는가. 미군(美軍)이 계속 주둔하고 있다고 가정하는 한 오늘의 이 ‘대한민국’은 아니라 해도 대한민국이란 존재 그 자체가 사라지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칠레나 아르헨티나 혹은 필리핀이나 인도네시아와 같은, 신생국 어디나 보이는 그냥 그 모습 그대로의 그 나라, 그 대한민국은 여전히 존재하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산업화되고 민주화되고 세계화된 현재의 이 ‘대한민국’, 세계 주요국 정상회담 G20을 개최할 만큼 세계의 중심에 선 이 ‘대한민국’의 역사가 5·16 없이도 가능했을까. 10위권을 넘나드는 경제대국 군사대국 IT산업대국. 수출입 1조 달러를 넘보는 무역대국― 이 ‘대한민국’의 현 주소가 5·16이 아니고도 될 수 있었을까. 아무리 ‘무모한 역사적 가정’이라 해도, 정말 5·16 없이 그때 그 50년 전의 민주당 정권으로 오늘날의 이 파천황적(破天荒的) 대변화를 일으킬 수 있었을까.
그러나 그 5·16이 역사의 물줄기를 완전히 바꾸어 놓은 대변혁의 주체라 해도, 5·16은 분명히 정변(政變)이다. 군사 쿠데타라는 비(非)합법적 수단으로 국민이 선택한 합법적인 정부를 몰아내고 정권을 탈취한 정변이고 사변(事變)이다. 그것은 아무도 부인할 수 없고 또 부인할 필요도 이유도 없다. 대다수의 5·16 주체들은 5·16이 ‘정변’이라는 데 대해서 거부감을 갖고 부정하려고 하지만, 거부한다고 정변이 정변 아닐 수 없고, 부정한다고 사변이 사변 아닐 수는 없다.
그러나 그 결과가 완전히 다르고 그 결실이 완전히 달랐다. 그 많은 신생국들에서 보는 그 많은 군사 쿠데타, 군사정변과는 완전히 다른 쿠데타이며 다른 정변이었다. 다른 신생국들의 그것은 힘으로 권력만 빼앗았지 아무런 결실이 없었다. 거둔 열매가 없었던 것만큼 결과적으로 모두 실패했다. 실패했던 것만큼 역(逆)쿠데타·재(再)쿠데타가 끊임없이 반복되었다. 민생(民生)은 도탄에 빠지고 경제는 침체되고 부정과 비리만 쌓여 갔다. 5·16은 쿠데타였지만 예외적인 쿠데타였고, 분명 군사정변이었지만 예외의 정변이었다.
예외적인 쿠데타. 상례(常例)에서 볼 수 없었던 정변, 그것은 분명 우리 민족에게는 복(福)이었다. 다른 신생국들에게선 화(禍)가 되고 재앙이 되었던 것이 우리에게는 정반대가 되었다. 복이며 행운이 된 것이다.
쿠데타가 어떻게 복이 되며, 정변이 어떻게 행운으로 둔갑할 수 있는가. 결과적으로 그렇게 된 것이다. 5·16이 그런 결실을 거둔 것이다. 그 결과는 대성공(大成功)이며 그 결실은 대성취(大成就)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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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76년 포철 제2고로 화입식에서 직접 불을 댕기는 박정희 대통령. 5·16세력은 기성 지식인과 정치인들을 능가하는 통찰력으로 산업화를 달성했다. |
“필리핀, 天國이더라”
무엇이 ‘대성공’이며 무엇이 ‘대성취’인가. 그것은 산업화 대성공이며, 국가재조(再造)의 대성취다. 우리는 5·16이 일어나던 1960년대 초에서 민주화로 이행되던 1980년대 말까지, 불과 30년 사이에 농업사회에서 산업사회로 탈바꿈했다. 그 탈바꿈의 속도는 너무 빨랐고, 그 탈바꿈의 과정은 너무 치열했다. GNP증가율이 연(年) 10% 내외로 30년간 계속되었다. 그 사이 우리는 수천 년 꼭 같았던 한 모델의 ‘낡은’ 국가체제에서 완전히 다른, 지금까지 전혀 경험하지 못했던 ‘새로운’ 모델의 다른 국가체제로 전환했다. 그것은 곧 새로운 국가의 창건, 바로 국가재조였다.
이 국가재조는 정치 경제 사회 문화, 국가 전 분야에서 격렬한 ‘구조변동’을 야기했다. 그 변동은 마치 앙시앵 레짐(ancien r?gime)이라는 구(舊)체제에서 신(新)체제로 이행하던 1789년의 프랑스대혁명이 치르는 ‘피의 투쟁’과도 흡사했다. 삶의 틀이 완전히 달라지지 않으면 안 되었다. 생활양식 사고(思考)방식 행위유형― 이 모두가 지난날의 구조와는 완전히 결별했고 또 결별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만큼 그 과정은 리얼하고 격렬했다.
1960년대 초, 필리핀의 마닐라를 다녀오던 기자들이 으레 하던 말은 “필리핀, 천국(天國)이더라”, “마닐라, 천국이더라”였다. 그때 그 필리핀의 1인당 GNP는 240달러, 우리 80달러의 3배였다. 그리고 30년이 지난 1980년대 말, 우리의 1인당 GNP는 필리핀의 8배였다. 3분의 1이던 1인당 GNP가 8배 많아졌다면 30년 동안에 필리핀이 제자리걸음을 할 때 우리는 24배를 뛰었다는 것이다. 그것은 인도네시아·베트남·태국·말레이시아와 비교해도 조금도 다름이 없다. 우리의 변화속도는 그렇게 빨랐고, 우리의 구조변동은 그렇게 급격했다.
한 번 더 강조하면, 5·16은 정변이다. 그것도 군사 쿠데타라는 비합법적 수단을 통해 정권을 장악한 정변이다. 그 정변으로 하여 산업화를 성공시키고 새로운 국가를 만들어 냈다. 다시 국가를 만드는 국가재조에 성공한 것이다. 그것은 명백히 ‘산업화혁명’이며 ‘국가재조혁명’이다. 그렇다면 5·16은 정변이면서 혁명이다. 마치 4·19가 의거이면서 혁명이듯이 5·16 또한 2개의 개념, 2개의 성격을 동시에 띠고 있다. 이는 아무도 부인할 수 없고, 설혹 부인해도 그 부인의 수명은 극히 짧을 수밖에 없다.
문제는 무엇이 그것을 동시적으로 이룩하게 했느냐이다. 그 어떤 요인이 그 같은 대성공 대성취를 가져오게 했느냐이다. 그것은 그 3개의 요인으로 나눠 설명할 수 있다. 그 3개의 요인은 오로지 5·16을 평가하기 위해서다. 그것도 ‘역사적’으로 평가하기 위해서다. 그 말은 그 당시 우리의 모든 상황을 종합적으로 분석하고 진단하면서 5·16을 본다는 것이 아니라, 5·16의 주체― 5·16을 일으킨 사람들만을 가지고 본다는 것이다. 그 3개의 요인은 첫째는 사람이고, 둘째는 지식이고, 셋째는 통찰력(洞察力)이다.
엘리트 군인들의 식견에 놀라
첫째로, ‘사람이 달랐다’는 것이다. 5·16정변을 일으킨 사람들과 그때의 정권 안팎에 있던 기성(旣成)정치인 (흔히 말하는 구정치인)― 그들은 서로 다른 사람들이었다. 생각하는 바가 다르고, 지향하는 바가 다르고, 행동하는 바가 완전히 다른 사람들이라는 것이다. 물론 가치관도 미래관도 다른 사람들이었다.
1960년, 나는 《사상계》 기자였다. 4·19 뒤 들어선 새정권(민주당)은 조변석개(朝變夕改)로, 뭐 하나 일관되게 추진되는 것이 없었다. 대학가에선 데모가 매일같이 계속되었다. 그때 수색에 있던 국방대학원에 취재차 갔다가 우연히 고급장교들(대령급)의 세미나를 참관했다. 주제는 국방개혁에 관한 것이었다. 국방개혁은 예나 이제나 국가와 사회, 그리고 군(軍)이라는 다(多)측면의 것이어서 종합적인 것이 될 수밖에 없었다. 그 세미나를 참관하면서 나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시쳇말로 군인들이 ‘너무 똑똑하다’는 것이다. 국가에 대한 식견이며 사회에 대한 안목이 기성정치인 기성지식인들과는 완전히 달랐다.
그들의 두뇌는 명석했고, 그들의 설명은 분석적이었다. 어느 것 하나 두루뭉술 넘어가는 것이 없었다. 거기에 뚜렷이 느껴지는 그들의 결단력과 추진력·돌파력은 섬칫하기까지 했다. 우유부단하고 사욕·사심(私慾·私心)에 차고, 권력에 눈이 어두운, 내가 자주 대하는 그 기성정치인들과는 아예 유(類)가 달랐다. 고리타분한 구시대의 지식마저도 노트를 읽어 주는 것 말고는 아예 강의를 못하던 강단의 교수들, 미래상도 시대감각도 변화의식도 전혀 갖지 못한 일반 지식인들이며 언론인들― 그들과도 그들은 완전히 달랐다.
바로 뒤 취재를 통해 안 일이지만 그들은 내가 다녔던 서울대학을 가고도 남을 정도로 고등학교 때 성적이 우수했고, 거기에 미국 사람들에 의해 군인장교로 미국에 유학하며 세계를 보았고 바깥 세계를 알았다. 우물 안 개구리나 다름없었던 우리 지식인, 우리 기성정치인들과는 차원이 달랐다. 차원이 다른 것만큼 사람이 달랐다. 나는 쿠데타를 직감했다. 1960년, 그때까지 ‘군사 쿠데타가 일어나지 않은 신생국은 우리만이다’ 할 정도로 우리는 쿠데타에서 예외가 되어 있었다. 그러나 ‘예외는 예외 없이 깨진다’는 ‘예외의 법칙’이 있다.
그들이 기성정치인과 달랐기에, 그들이 기성지식인들과도 달랐기에, 그들은 쿠데타를 했고, 정변을 일으켰고, 그리고 산업화와 국가재조에 성공했다. 그들이 만일 당시의 기성정치인, 당시의 기성지식인들과 같았다면 우리 역시 다른 신생국들의 쿠데타와 하나도 다를 것이 없고, 우리 또한 오늘날 북한이나 다름없이 50년 전 보릿고개를 아직도 넘고 있을 것이다. 그들이 ‘달랐다’는 것을 이제는 인정해 주어야 한다. 그것이 역사를 보는 바른 눈이고, 5·16에 대한 바른 평가다.
신생국들, 제도형성 단계에서 실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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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66년 10월 월남전 참전 7개국 정상회담 참석차 필리핀을 방문해 마르코스 대통령(오른쪽)과 인사를 나누는 박정희 대통령. 이때까지만 해도 필리핀은 한국보다 훨씬 잘사는 나라였다. |
만일 5·16이 나지 않았다면, 당시 정권도 경제발전에 성공할 수 있었을까.
말을 바꾸면, 당시 기성정치인 기성지식인들도 산업화를 성공시킬 수 있었을까이다. 당시 현장을 뛰고 현장을 취재한 사람으로서 생각하면 그것은 가당치도 않은 소리다. 이유는 경제개발의 절대적 요건인 추진력 결단력 돌파력은 차치해 두고, 무엇보다 지식이 부족하고 통찰력이 거의 제로 상태에 가까웠기 때문이다.
경제를 발전시키는 3단계 과정에서 당시 정권 담당자나 정치인 지식인들이 갖고 있던 지식은 1단계에 그쳤고, 2단계 3단계는 엄두도 낼 수 없는 상태였다.
그 제1단계는 마스터 플랜(master plan)― 계획수립이다. 물론 종합적이고도 기본적인 전체계획의 수립이다. 흔히들 말하는 경제개발의 청사진이다. 이 마스터 플랜은 해외 지식인, 특히 미국 경제학자들에 의해 잘 만들어졌고, 우리를 포함해 많은 신생국들이 수입해 가지고 있었다. 마스터 플랜은 어디나 복사가 가능했고, 그것을 자기 나라에 맞춰 다시 짜면 바로 그 나라의 미래 청사진이 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 마스터 플랜대로 하면 경제는 어김없이 발전해 간다고 생각했다. 당시 우리가 갖고 있던 경제개발의 능력은 바로 그 수준이었다. 그러나 어느 나라도 그 마스터 플랜대로 되지 않았고, 그 마스터 플랜만 가지고 경제발전에 성공한 나라는 한 나라도 없었다.
경제개발의 2단계는 인스티투션 빌딩(institution building), 즉 제도형성이다. 마스터 플랜이 있다면 그 마스터 플랜을 실현하는 제도를 만들어야 한다. 제도는 법과 기구다. 그것은 경제개발을 담당하는 부서를 만들고, 매뉴얼― 규정을 만들고, 자리를 만들고, 그리고 그 자리에 가장 맞는 사람을 골라 앉히는 것이다. 신생국들이 하나같이 실패한 것은 이 2단계에서다.
부서를 만들고 규정을 만들고 자리를 만드는 것은 어느 나라나 할 수 있다. 그러나 그 자리에 맞는 사람을 못 찾아 내는 것이다. 소위 말하는 적재적소(適材適所)― 적재(適材)를 적소(適所)에 앉히지 못하는 것이다. 그것은 정치가 불안할수록 사회가 혼탁할수록 되지 않는 것이다. 뇌물 비리에 가득 찬 당시의 우리 정치를 생각해 보라. 당시의 우리 사회를 회고해 보라. 능력 있는 적재일수록 탈락하고 뇌물청탁에 능한 사람일수록 발탁되지 않았던가.
當爲가 아니라 方法論에 정통
경제개발의 3단계는 퍼포먼스 빌딩(performance building)― 성과달성이다. 성과달성은 투입(input)보다 산출(out put)이 많아야 가능하다. 적자(赤字)를 내면 안 되는 것이다. 숫자에 빨간 글자가 많아지면 어떤 기업도 망하고 어떤 개발도 실패한다. 세계 최고의 기업이라고 자랑하던 일본항공 JAL도 적자가 누적되면서 망하지 않던가. 2단계도 어렵지만 이 3단계가 가장 지난한 것이다. 사람도 달라야 하지만 무엇보다 지식이 달라야 하는 것이다.
지식 중에서도 이론적 지식인 이론지(理論知)보다는 실행적 지식인 실행지(實行知)가 다르고 뛰어나야 하는 것이다. 실행지는 일의 선후(先後) 일의 완급(緩急) 일의 프라이오리티(priolity)를 아는 것일 뿐 아니라 메스돌로지(methodology), 이른바 방법론(方法論)에 정통한 것이다.
당시 우리 지식인들의 최대 약점은 이 방법론의 무지, 아니 아예 방법론이 없는 것이었다. 방법론의 개념조차 없었다. 원론적(原論的)인 것, 당위적(當爲的)인 것만 내세웠다. 당시 최고 지성지라는 《사상계》를 보라. 모두 원론이고 모두 당위다. 어떻게 그것을 해낼 것인가, 어떻게 실현해서 어떤 성과를 낼 것인가는 전혀 없었다. 이유는 ‘방법론’의 개념이 없었기 때문이다. 방법론이 없는 지식, 그것은 지식이 아니다. 방법론을 가르치지 않는 학문, 그것이 학문이 못되듯이.
5·16을 일으킨 사람들은 이 방법론의 지식이 있었다. 낡은 이론지보다 실행지를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지식이 달랐다. 그래서 또한 경제개발의 그 어려운, 다른 신생국들이 모두 못 해낸, 경제개발의 2·3단계를 충분히 해 냈을 뿐 아니라 초과달성까지 했다.
그러면서 그들의 지식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정치인, 기성지식인들이 도저히 갖지 못한 것을 또 하나 갖고 있었다. 이른바 통찰력(洞察力)이라는 것이다.
불가능을 가능케 한 사람들
셋째로, ‘통찰력이 달랐다’는 것이다. 통찰력― 그것은 유기체(有機體)와도 같은 상황(situation), 끊임없이 변화하는 그 상황의 핵심을 파악하는 것이다. 그래서 미래를 미리 내다보는 것이다. 당시 우리 경제학자들은 이 통찰력이 없었다. 정치인은 그렇다손 쳐도 경제를 전문으로 공부하는 경제학자들이 5·16을 일으킨 군인들보다 미래 경제에 대한 통찰력이 훨씬 부족했던 것이다. 부족한 정도가 아니라 아예 미치지 못했던 것이다.
1961년 쿠데타가 나고 군사정부 국가재건최고회의에서 곧장 경제개발 5개년계획을 수립했다. 그 요지 중의 하나는 ‘수출입국’(輸出立國)이었고, 그리고 4년 후인 1965년에 수출 1억 달러를 달성한다는 계획이었다. 이를 당시 최고의 경제학자로 일컬어지던 성창환(成昌煥) 교수(그는 최고회의 의장고문까지 역임했다)가 격렬히 비판하고 나섰다. 비판의 핵심은 군인들이 경제를 전혀 모른다는 것. 그 결과 이런 5개년계획이 만들어졌다는 것이며, 더구나 수출입국은 전혀 실행 불가능한 정책일 뿐 아니라, 수출 1억 달러는 ‘코리아 판타지(한국환상곡)’라고, 가히 절규하다시피 목소리를 높였다. 그때 경제학자들은 예외 없이 수입(輸入)대체산업을 주장했다.
절대다수의 경제학자들이 성창환 교수와 꼭 같이 비판했고, 언론도 모두 그렇게 썼다. 그래서 국민도 정치인도 군사정부는 곧 무너지고 한국경제도 더 수렁에 빠진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결과는 정반대였다. 1965년에 달성한다던 수출 1억 달러는 한 해 앞당겨 1964년에 달성했다. 그것은 완전 기적이었다.
1961년 5개년계획 수립 당시 우리의 수출은 2000만 달러에 불과했다. 그리고 외국에 팔아먹을 상품도 없었고 그 상품을 생산할 산업도 없었다. 누가 생각해도 경제학자들이 맞는 것이었다. 그런데 어떻게 수출입국으로 산업화를 성공시킨다고 생각했고, 국가재조를 기대했는가. 오늘날 무역 1조 달러를 무역 2000만 달러 시대에 어떻게 내다볼 수 있었는가. 그 통찰력, 그 예지력은 어디서 나왔는가.
뿐이랴. 경부고속도로를 만들 때는 어떠했는가. 최고의 반대자는 김대중(金大中)·김영삼(金泳三) 전직 대통령들(당시 야당 정치인)이었고, 국회의원들이었고, 교수·언론인 등 지식인들이었다. 김대중 의원은 경부고속도로가 아니라 서울-강릉 고속도로를 닦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만일 그때 야당 정치인들의 반대대로 경부고속도로를 만들지 않았다면 오늘날의 이 ‘대한민국’이 존재할까. 도대체 박정희(朴正熙) 대통령은 어떻게 그 같은 통찰력을 갖게 되었을까.
5·16이 없었던 대한민국 상상할 수 없어
포스코를 건설할 때는 어떠했는가. 한국에 일관제철(一貫製鐵) 산업이 불가능하다는 것은 일본 기업인·일본 정치인이 먼저 주장했고, 거기에 세계 최고의 경제분석기관이라는 세계은행(IBRD)이 가세했다. 세계은행은 한국이 간청하는 차관(借款)을 브라질과 터키에 제공했다. 우리는 제철산업의 고로(高爐) 경험이 전혀 없고 그들 나라는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나라들은 모두 실패해서 세계은행의 돈만 날리고 말았다.
세계은행이 ‘불가능하다’고 말한 것만큼 국내 정치인·국내 지식인, 심지어는 경제장관들도 제철산업을 모두 반대했다. 일본 수상을 지낸 후쿠다 다케오(福田赳夫)도 박태준(朴泰俊)에게 불가능하다고 설득했다. 후쿠다는 후일담에서 “박태준이 ‘해냅니다. 나는 해냅니다. 그것이 내가 이 땅에 태어난 의미입니다’라고 말했을 때 ‘어쩌면 이 사람이면 해낼지 모른다’ 생각했고, 그리고 나를 비웃기라도 하듯 포스코라는 대 사업을 성취해 냈다”고 술회했다.
도대체 그 통찰력, 그 지식, 그 결단력과 추진력, 돌파력이 어디서 나왔을까. 5·16은 그런 사람들이 일으킨 쿠데타였고 정변이었고, 그리고 그런 사람들이 만들어 낸 혁명이었다.
나는 50년이 지난 지금도 50년 전 내가 그들을 취재했을 때와 꼭 같이, 그들은 ‘사람이 달랐다’, 그들은 ‘지식이 달랐다’, 그들은 ‘통찰력이 달랐다’고 생각한다. 나는 지금도 꼭 같이 말한다. 그리고 앞으로도 변함없이 말할 것이다. 5·16이 없었던 대한민국을 상상할 수 있을까. 5·16이 아니고도 오늘날 이 ‘대한민국이 존재할 수 있을 것인가.
오늘날 우리의 이 ‘대한민국’, 그 대한민국의 자유민주주의가 꽃피는 것은 그 인프라를 만든 4·19와 5·16― 그 4·19의 의식혁명과 재탄생혁명, 그 5·16의 산업화혁명과 국가재조혁명. 바로 이 두 혁명 때문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