李明博 정부는, 反國家的 한국사 교과서를 公認해 줌으로써 좌경 교사들이 亡國的 교육을 당당하게 할 수 있는 길을 열었다. 현대사 왜곡, 편향, 날조는 반역 수준이다. 대한민국 세력엔 反感을, 從北세력엔 好感을, 김일성·김정일에겐 동정심을 갖도록 만드는 국가 檢定 교과서로 키운 미래 세대는 어떤 세상을 만들 것인가?

- 정부의 검정을 받아 이번 학기부터 사용되는 한국사 교과서들.
한총련과 전교조 선언문에나 나옴 직한 편향된 기술들이 교과서에 실림으로써 국가 공인(公認) 역사관으로 승격하게 된 배경과 책임 소재는 반드시 가려야 할 것이다. 이 정부가 검정해 준 교과서의 현대사 왜곡은, 좌파(左派)정권이라고 불리는 김대중(金大中) 정부 시절의 국정 교과서보다 훨씬 심하다.
천재교육에서 간행한 《고등학교 한국사》는 한국전(韓國戰)에서 일어난 학살의 책임을 대한민국에 전가(轉嫁)하였다.
6ㆍ25 중 학살 책임을 대한민국에 떠넘겨
![]() |
| 6·25 당시 서울대 병원에서 북한군에게 학살당한 국군부상병·민간인들을 기리는 ‘이름 모를 자유전사비’. |
이 대목은 거짓이고 왜곡이다. 가장 먼저 희생당한 것은 보도연맹원들이 아니고, 기습당한 국민이고 국군이었다. 6월 28일 서울에 들어온 북한 공산군은 숨어 있던 좌익들의 협조를 받아 경찰ㆍ군인 가족들을 찾아다니면서 잔인하게 죽이기 시작하였다. 더구나 부상당하여 서울대 병원에서 치료를 받고 있던 국군 장병들을 집단학살하는 전쟁범죄를 저질렀다. 후퇴하던 정부는 이 소식을 듣고는 후방에서 좌익들이 들고 일어날 가능성이 높다고 판단, 자위적 대응조치를 취하였다.
서울대 병원 영안실 옆 언덕배기에는 비(碑)가 하나 세워져 있다. 1963년 6월 20일에 건립된 ‘이름 모를 자유전사(自由戰士) 비(碑)’의 비문(碑文)은 이렇게 새겨져 있다.
<1950년 6월 28일 여기에 자유를 사랑하고 자유를 위해 싸운 시민이 맨 처음 울부짖은 소리 있었노라. 여기 자유 서울로 들어오는 이 언덕에 붉은 군대들이 침공해 오던 날 이름도 모를 부상병 입원 환자, 이들을 지키던 군인, 시민 투사들이 참혹히 학살되어 마지막 조국을 부른 소리 남겼노라. 그들의 넋은 부를 길이 없으나 길게 빛나고 불멸의 숲 속에 편히 쉬어야 하리. 겨레여 다시는 이 땅에 그 슬픈 역사를 되풀이하지 말게 하라.〉
공산당의 10월 폭동을 ‘10월 봉기’로 美化
![]() |
| 대구 10월 폭동을 봉기로 묘사한 《고등학교 한국사》 (천재교육 刊). |
<한편 일부 상인과 지주의 매점매석으로 식량 위기가 오자 미군정은 강제로 쌀을 사들이는 수매제를 시행하였다. 농민들은 강제 수매를 공출로 받아들였고, 이는 9월 총파업과 10월 봉기와 같은 저항 운동의 중요한 쟁점이 되기도 하였다.>
이 교과서는 이 나라에서 오랫동안 ‘10월 폭동’(또는 ‘대구 폭동’)으로 통용되던 단어를 ‘10월 봉기’ 및 ‘농민 저항운동’으로 바꿨다. ‘폭동’을 ‘봉기’, ‘저항’으로 바꾸면서 폭동 주동자인 공산주의자들을 기록에서 빼버렸다. ‘봉기’와 ‘저항’이란 낱말을 결합시키면 민중이 불의(不義)를 참지 못하고 용감하게 들고 일어났다는 뜻이 된다. 교과서는, 공산당이 주동한 폭동이란 사실뿐 아니라 폭도들이 경찰관과 농민들을 잔인하게 학살한 사실도 묵살하였다.
공산당의 선동에 속아 넘어가 10월 폭동(대구 폭동)에 가담하였던 학생의 증언을 소개한다.
김계철(金桂澈)은 대구사범 학생으로 10월 폭동에 가담했다가 월북(越北), 공산주의의 실상에 절망한 뒤 중국으로 탈출, 1994년 44년 만에 귀향(歸鄕)한 사람이다. 김계철은 광복이 되자 좌익 학생들이 대구사범 김용하 교장을 연단으로 끌고 나와 여러 학생이 보는 앞에서 ‘민족반역자’라고 몰아세우는 것을 보았다. 학생들이 특별하게 친일(親日)행동을 한 적도 없는 김 교장의 머리를 신짝을 벗어 때리는데 교사들은 물끄러미 구경만 하고 있었다.
1946년 9월 하순, 한 좌익 선배가 김계철에게, 쪽지를 봉투에 넣어주면서 대구의대 학생 대표에게 갖다주라고 했다. 김 군은 봉투를 들고 가다가 쪽지를 펴 보았다. ‘시체 네 구를 준비하라’로 시작되는 메모였다.
쪽지를 전달받은 학생 대표는 읽어보더니 옆에 있는 학생에게 “되는가”하고 물었다. 그 학생이 김 군을 데리고 해부실로 가더니 약물에 잠겨 있는 시체와 붕대로 감겨 있는 송장들을 보여주면서 “본 대로 전하라”고 하는 것이었다.
10월 1일 대구에서 좌익 노동자들이 ‘쌀 배급’, ‘일급제(日給制) 반대’, ‘박헌영(朴憲永) 선생 체포령을 취하하라’는 구호를 내걸고 폭력시위를 벌였다. 경찰의 자위적(自衛的)인 발사로 시위대원 한 사람이 맞았다(이 사람의 신원은 확인되지 않아 과연 사망했는지조차 확실하지 않다).
다음 날 흰 가운을 입은 대구의대 학생들이 들것에 들고 나와 시위를 선동하는 데 이용한 시체는 전날 경찰의 총격을 받은 사람이 아니었다. 김계철 소년이 보았던 해부실 시체였다.
대구폭동 당시의 학살
이날 대구경찰서는 폭도화한 시위 군중에 항복하고 경찰관들은 달아났다. 무기를 탈취하고 수감자들을 풀어준 극렬세력은 동족을 상대로 한 살육(殺戮)의 제전(祭典)을 벌인다. 표적은 경찰과 지주(地主)들이었지만 무고한 사람들이 더 많이 죽었다. 살육의 방법도 그 뒤 되풀이되는 전형적인 공산당식이었다. 가족이 보는 앞에서 때로는 그 가족까지 때려죽이고 찔러 죽이고 찢어 죽이고 찍어 죽였다. 공산당이 가학(加虐) 취미적 학살을 즐긴 것은 이른바 ‘반동(反動)학살’을 ‘위대한 혁명적 행위’로 합리화해 양심을 마취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좌익이 선동한 폭동에는 깡패와 양아치, 부화뇌동한 민중이 대거 참여하여 절제되지 않는 살육에 도를 더했다. 좌익 의대생과 의사들이 인명(人命)살상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경북도립의원에 실려온 부상 경찰관들은 화단 주변에서 폭도들에 의하여 맞아 죽었다.
<어떤 부상한 경찰관이 살려달라고 병원의 계단을 올라가는데 폭도들이 그 사람을 끄집어 내리려고 했다. 그 경관은 계단의 모서리를 쥐고 안 내려오려고 하는데 위에서 그 병원 의사가 떠밀었다. 아래로 굴러 떨어진 경관의 머리를 폭도들이 돌을 번쩍 들어 내리쳤다. 머리는 박살이 나고 흰 것이 튀어나왔다.>(이원만 《나의 정경 50년》)
이날 10월 2일 오후 미군은 대구 일원에 계엄령을 선포하고 사태를 장악했다. 좌익 폭도들은 그러나 대구 근교로 진출하여 살상의 피바람은 경북으로 번져가기 시작한다. 칠곡군 약목면에서는 이런 일이 일어났다.
<폭도들은 약목지서를 먼저 습격하여 주재 중인 세 경관을 기둥에 결박한 다음 낫과 도끼로 전신(全身)을 참살했다. 또 왜관경찰서를 습격하여 서장 사택을 파괴하고 서장, 수사과장 외 4명의 경찰관을 도끼로 참살했다. 특히 장 서장은 두부로부터 밑으로 절반을 째 죽였다.>(《대구시보》 1946년 10월13일자)
北 토지개혁은 미화, 南 농지개혁은 폄하
▲ <미군정의 정책은 토지개혁, 소작료 추가 인하와 금납제 등을 바라는 농민들의 기대에는 미치지 못하였다. (중략). 38도선 이북에서는 북조선 인민위원회의 전신이었던 북조선 임시 인민위원회가 광복 당시 남북에서 가장 큰 과제 중의 하나였던 토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무상몰수, 무상분배의 토지개혁을 전면적으로 실시하였다.>(천재교육 교과서 314페이지)
《고등학교 한국사》는 천재교육 교과서 이외에도 거의가 북한의 토지개혁은, ‘무상(無償)몰수, 무상분배’ 방식이므로 농민에게 유리한 개혁이었던 것처럼 서술하고 있다.
1946년에 남한보다 한발 앞서 실시한 북한의 토지개혁은 토지에 대한 농민들의 사적(私的) 소유권을 인정하지 않는 것이었다. 토지소유권은 국가가 가졌고, 농민들은 소작권만 가졌다.
농업경제학자 김성호(金聖昊)씨는 “남한 학자들은 남한의 농지개혁이 유상(有償)이었으므로 북한 측 개혁보다 못한 것처럼 보이지만 북한의 토지개혁은 농민에게 소작권만을 주었기 때문에 무상이었던 것이다. 진상을 알아야 한다”고 비판한 바 있다.
북한 정권은 개인에게 주었던 경작권도 1950년대 말에 회수, 협동농장으로 일원화하였다. 그 결과 농민들의 근로의욕이 떨어진 것이 1990년대 수백만의 떼죽음을 부른 원인이었다.
반면 6ㆍ25 남침 직전에 단행된 이승만(李承晩)의 농지개혁은 지주계급을 없앰으로써 민주화의 기틀을 만들었고, 유상으로 지주들에게 지급된 지가(地價)증권은 산업자본의 씨앗으로 전환되었다. 세계적 성공사례를 비판하고, 세계적 실패사례를 칭찬하는 교과서로 배운 학생들은 무엇이 될 것인가.
金九 등의 실패한 남북협상 美化
《고등학교 한국사》는 거의가 김구(金九), 김규식(金奎植)이 1948년 4월 평양에 가서 김일성(金日成)과 회담한 것을 ‘통일국가 수립을 위한 노력’이라고 미화(美化)하였다. 천재교육에서 펴낸 교과서는 ‘생각 열기’란 항목에서 “우리가 우리의 몸을 반쪽을 낼지언정 허리가 끊어진 조국이야 어찌 차마 더 보겠나이까”(김구, 김규식이 김두봉에게 보낸 편지)란 감상적(感傷的) 문장을 소개하면서 ‘김구, 김규식은 왜 남북협상에 나섰을까?’라고 유도성 질문을 던졌다. 이 교과서는 김구, 김규식이 김일성에게 철저하게 농락당한 사실을 소개하지도, 비판하지도 않았다.
이승만의 건국(建國) 노선에 반대한 김구, 김규식은 1948년 북한으로 올라가 김일성과 회담하고 4월 30일에 ‘남북정당사회단체 지도자협의회의 공동성명서’를 발표하였다. 이 성명서는 두 사람에 대한 역사적 평가에 치명적인 내용을 담고 있다. 철저하게 김일성에게 이용당하여 대한민국 건국을 방해하려 하였음이 드러나기 때문이다.
성명서는 5월 10일로 예정된 남한 단독선거를 반대하기 위하여 회의가 열렸음을 분명히 한 뒤 ‘소련이 제의한 바와 같이 우리 강토에서 외국군대가 즉시 철퇴할 것’을 요구하였다. 남한의 양김(兩金)씨는 전쟁을 준비하던 김일성의 주한미군(駐韓美軍) 철수론에 동조한 것이다.
이 성명서는 또 “남북정당사회단체지도자들은 우리 강토에서 외국군대가 철퇴(撤退)한 후에 내전(內戰)이 발생할 수 없다는 것을 확인한다”라고 했다. 1949년 6월 주한미군이 철수한 1년 뒤 북한군의 남침(南侵)이 있었다. 주한미군 철수는 남침의 초대장이었다. 그럼에도 김구, 김규식은 외국군대가 철수한 후에 전쟁이 없을 것이라고 확언함으로써 결과적으로 국민들을 속인 셈이다. 지도자가 속는 것은 결국 국민들을 속이는 행위이다.
이 성명서는 ‘외국군대가 철퇴한 이후 하기(下記) 제(諸)정당단체들은 공동명의로써 전(全)조선정치회의를 소집하여’ 임시정부를 수립하고, ‘선거를 통하여 통일적 민주정부를 수립하여야 할 것’이라고 했다. 통일정부 수립을 주도할 ‘하기 제정당단체들’은 북조선노동당, 남조선노동당, 한국독립당, 민족자주연맹, 근로인민당, 북조선농민동맹 등 56개 단체였다. 김구, 김규식 세력과 남북한 좌익단체 연합체가 건국을 주도한다는 말이다. 즉 이승만 세력 등 자유진영을 제외하고, 남북한 좌익세력이 뭉쳐 공산국가를 만드는 데 김구, 김규식이 가담한다는 뜻이었다. 여기서도 김구, 김규식은 철저히 이용당하였다.
교과서가 학생들에게 교훈을 남기려면 김구와 김규식이 공산당 전술에 속아 넘어간 사실을 명기(明記), 이런 일의 재발을 경계하도록 하여야 했다.
교묘한 兩非論
![]() |
| 남북한에 대해 양비론적 시각으로 접근하는 역사학자 김성칠의 《역사 앞에서》를 실은 《고교 한국사》 교과서. |
‘북한 정부’란 말은 북한을 국가로 인정하는 어법(語法)이다. 우리 정부와 언론은 헌법정신에 따라 북한을 국가로 인정하지 않으므로 ‘북한 정부’라고 하지 않고 ‘북한 당국’ ‘북한 정권’이라고 쓴다. 정부는 국가를 의미한다. 당국과 정권은 국가를 의미하지 않는다. 이 교과서는 우리 헌법이 대한민국의 영토를 불법 점거한 반국가단체로 규정한 북한 정권을 ‘정부’라고 호칭, 국가로 인정한 셈이다.
올해 채택된 《고등학교 한국사》 교과서들은 거의가 북한 정권의 출범과정에서 일어났던 반(反)민족적, 반민주적 사건들을 가르치지 않는다. 김일성을 소련 군대가 조종한 사실, 김일성이 스탈린 앞에서 시험을 친 뒤 북한 정권의 지도자로 결정된 사실, 남로당이 스탈린의 지령을 받아 반탁(反託)에서 찬탁(贊託)으로 돈 사실, 북한 정권의 국호(國號) 및 헌법도 스탈린이 만들어준 사실들을 교과서에 싣지 않는 것은 북한 정권의 반민족성을 은폐하기 위한 의도로 보인다.
문제 교과서는 김일성과 김정일에게 불리한 사실을 덮으려고 갖은 애를 다 쓰는데, 덮기엔 너무나 무리가 많은 사안인 경우엔 대한민국과 미국을 끌고 들어가 양비론(兩非論)으로 흐려버린다.
(주)미래엔컬처그룹이 만들어 정부의 검정을 통과한 《고등학교 한국사》는 ‘6·25전쟁이 발발하다’란 제목의 글 시작에 역사학자 김성칠의 《역사 앞에서》에서 따온 글을 올렸다. 첫 문장은 이렇다.
<남의 장단에 놀아서 동포끼리 서로 살육을 시작한 걸 생각하면 더욱 가슴이 어두워진다. …동기로 본다면 인민공화국이나 대한민국이나 조금도 다를 바 없을 것이다.>
이 교과서는, 남침한 북과 남침 당한 남이 도덕적으로 같다는 이 억지를 학생들에게 가장 강하게 기억시켜 주려는 편집방법을 취하였다. 도저히 변호할 수 없는 북한 정권의 민족반역적 전쟁 행위까지 양비론으로 비호한 것이다. 양비론은 북이 불리해질 때마다 등장한다. 미래엔컬처그룹 교과서는, 6·25전쟁 이후 남북한 체제를 양비론으로 다 비판하는 것 같지만 결과적으로는 북에 유리하게 썼다.
<남북의 두 지도자인 이승만과 김일성은 이(注:서로에 대한 적개심)를 부추겨 자신들의 장기독재 체제를 강화하였다. 박정희가 반공을 내세워… 민간 차원의 다양한 평화통일 운동을 탄압하고, …강경한 대북정책을 추진하였다. 북한에서도 남조선 혁명론을 바탕으로 무장공비 남파 등 군사적 도발을 통해 위기상황을 고조시켰다.>
전쟁 중에도 이승만 정부는 언론의 자유, 선거의 자유, 의회의 활발한 토의를 기본적으로 인정하였다. 김일성 정권은 히틀러, 스탈린을 능가하는 전체주의 억압구조를 만들었다. 남은 민주주의를 부정하지 않은 권위주의 정권, 북은 사생활(私生活)까지 통제하는 전체주의 정권이었다. 권위주의와 전체주의는 하늘과 땅만큼 다르다. 두 정권은, 동격(同格)으로 비교할 성격이 아니다. 그럼에도 두 정권을 동질(同質)로 분류한 것은 김일성의 무자비한 학살과 탄압을 ‘이승만 수준’으로 미화해 주기 위한 의도로 보인다.
박정희의 ‘강경한 대북정책’은 북한 정권의 군사적 도발에 대한 자위책(自衛策)이었다. 이 교과서는 거꾸로 박정희의 ‘강경한 대북정책’이 ‘북의 무장공비 남파 등 도발’을 부른 것처럼 썼다.
피카소의 <한국에서의 학살> 게재
![]() |
| 《고교 한국사》 교과서에 실린 피카소의 <한국에서의 학살>. |
<에스파냐의 화가 피카소는 6·25전쟁 중 양민들이 학살당했다는 소식을 듣고 이 그림을 그렸다. 갑옷을 입은 군인들이 맨몸의 여성과 어린 아이를 총과 칼로 공격하는 모습은 전쟁의 참상과 공포, 인간성 파괴 등을 표현하고 있다. 6·25전쟁 중 북한 측은 점령한 남한 지역에서 인민재판을 행했고, 남한 측은 수복한 지역에서 북한군에 협조한 부역자를 처벌하였다. 점령과 수복의 과정에서 처벌과 보복이 자행되어 수많은 양민이 희생되었다. 특히 경남 거창, 충북 영동의 노근리, 황해도 신천 등지에서 많은 양민이 학살되었다.>
교과서에 실린 <한국에서의 학살>은 피카소가 황해도 신천에서 벌어진 양민학살 소식을 듣고 그렸다고 전한다. 세계의 공산주의자들은 이 그림을 반미 선전에 악용했다.
이 교과서는 그림 설명에서도 북한군을 감싸고 국군과 미군을 비방하는 불균형을 보였다. 북한군이 점령지에서 행한 학살을 ‘인민재판’이라고만 표현, 마치 적법한 재판을 거친 것처럼 오도(誤導)하였다. 양민 학살이 이뤄졌다는 지명(地名)을 소개하면서 북한군과 좌익들에 의한 학살지(서울대 병원, 대전형무소, 전라남도 등)는 제외하였다. ‘황해도 신천 대학살’이란 것은 미군 및 국군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는, 북한 정권이 창작한 거짓말인데 이것까지 소개하였다. 시각적 효과와 편향된 기술을 결합시켜 국군과 미군을 모함한 것이다.
1950년 3월 미국 정부는 프랑스 공산당원인 피카소가 ‘평화 빨치산 세계 총회’란 단체의 대표 12명을 이끌고 미국에 들어오려는 것을 금지시켰다. FBI(연방수사국)는 피카소를 안보에 위해(危害)한 공산주의자로 분류, 그가 죽을 때까지 감시 파일을 유지하였다. 평화 빨치산 세계 총회는 소련 공산당 간부 주다노프가 조종하던 공산당의 선전 조직이었다.
피카소는 미국에 가서 트루먼 대통령에게 원폭(原爆) 제조 금지를 설득하고, NATO 창립에 항의하며, 미국의 공산당을 지원하고, ‘할리우드의 10인’을 체포한 데 항의하려고 입국을 신청하였던 것이다. 피카소가 <한국에서의 학살>이란 제목의 그림에 담은 것은 방미(訪美)가 좌절된 이듬해였다. 제2차 세계대전 중 프랑스 공산당에 입당한 피카소는 1973년 죽을 때까지 열성 당원이었다. 수백만 프랑의 기부도 했으며 공산당의 선전에 필요한 그림도 그려주었다.
살바도르 달리는 이렇게 말하였다.
“피카소는 화가이고 나도 그렇다. 피카소는 스페인 사람이고 나도 그렇다. 피카소는 공산주의자이고, 나는 그렇지 않다!”
피카소는 프랑코의 독재를 비판하였지만 그보다 심한 스탈린의 독재엔 침묵하였다. 그는 1950년에 스탈린평화상을, 1962년엔 레닌평화상을 받았다. 소련 당국은 그러나 피카소의 그림을 ‘타락한 것’으로 규정, 전시를 하지 못하게 하였다.
미국 정부의 피카소 입국금지 조치는 예술이 ‘반역의 면허증’이 아님을 천명한 것이다. 예술엔 국경(國境)이 없지만 예술인엔 국경이 있다.
북한의 대표적 도발들 외면
‘1ㆍ21 청와대 무장공비 침투 사건(1968년)’, ‘푸에블로호 납치 사건(1968년)’, ‘미 EC-121기(機) 피격 사건(1969년)’, ‘8ㆍ15 대통령 암살미수 사건(육영수 여사 피살 사건)(1974년)’, ‘아웅산 폭탄 테러(1983년)’, ‘KAL기 폭파(1987년)’, ‘천안함 폭침(爆沈)(2010년)’ 등 북한 정권에 의해 자행된 일곱 개 주요 도발사건의 교과서 본문(本文) 수록 여부를 확인해 보았다.
미래엔컬처그룹, 법문사, 삼화출판사 교과서는 위의 사건 중 단 하나도 언급하지 않았다. 천재교육 교과서는 1ㆍ21 무장공비 침투사건에 대해서는 짧은 설명과 함께 생포된 무장간첩 김신조의 사진을 실었다. ‘푸에블로호 납치사건’도 본문에 짧게 기술돼 있었다.
상대적으로 편향성이 약한 지학사 교과서는 유일하게 아웅산 테러를 사진과 함께 본문에서 다뤘다. 비상교육은 1·21 청와대 습격사건과 푸에블로호 납치사건에 대해 언급을 했다. 미래엔컬처그룹 교과서는 북한 도발 사례를 “무장공비 남파 등 군사적 도발을 통해 위기상황을 고조시켰다”고 포괄적으로만 서술했다.
최근 남북관계에서 가장 큰 문제를 일으킨, 1999년 연평해전, 2002년 서해교전, 2009년 대청해전 등 북한의 도발사례도 6종의 교과서 가운데 한 책만 짤막하게 실었다. 2010년 3월 26일에 발생한 천안함 폭침사건도 묵살되었다. 교과서의 검정 날짜가 2010년 7월 30일이므로 저자의 의지가 있었다면 수록이 가능했을 것이다.
가장 큰 왜곡은 꼭 실어야 할 것을 빼는 일이다. 두 교과서는 한국의 역사를 바꾼 서울올림픽도 다루지 않았다. 북한 정권에 불리한 사건과 대한민국에 유리한 사건은 가능한 한 싣지 않는 경향이 확연하였다. 북한 정권에 유리한 사건과 대한민국에 불리한 사건은 크게 다뤘다. 아웅산 테러를 싣지 않으면서 실미도 사건은 다루는가 하면 ‘북한이 개방에 나서다’는 제목은 있지만 ‘북한 도발’이란 제목은 없었다.
두 번의 북핵실험도 언급 안 해
천재교육에서 펴낸 《고등학교 한국사》의 ‘북한 핵문제’ 항목엔 놀랍게도 북이 2006년과 2009년에 핵실험을 두 번 했다는 기록이 없다. 책 뒤에 붙은 ‘역사 연표’에도 실려 있지 않았다. 북한 정권이 제네바 합의를 파기하고 국제법을 위반했으며, 무엇보다도 남북한 비핵화 선언을 깼고, 우라늄 농축 방식의 핵개발을 새로 시작하였다는 사실도 명시하지 않고 슬그머니 넘어갔다.
이 책은 미국과 북한의 관계가 상당한 진전을 보이다가 <새로 출범한 미국의 부시 정부는 북한을 테러지원국가로 지목하는 등 강경태도를 보였다>고 설명한 뒤 곧바로 <북한은 제네바 합의에서 동결하기로 한 원자로를 재가동시켰고… (중략) …북미 관계는 다시 긴장국면으로 들어갔다>고 기술하였다.
북이 제네바 합의가 금지한 우라늄 농축 방식의 핵개발을 추진하다가 발각된 것과 두 차례 지하 핵실험을 한 것이 북핵(北核) 위기의 본질인데, 이 두 사건을 묵살하고 마치 부시의 강경정책이 위기의 원인인 것처럼 쓴 것이다.
반면에 정부가 올해 채택한 《고등학교 한국사》 6종은 이미 실패한 것으로 판명난 김대중의 햇볕정책을 파격적인 지면(紙面)을 할애, 미화하고 있다. 그러기 위하여 햇볕정책의 부정적인 면을 묵살하거나 축소하였다.
교과서들은, 김대중 정권이 김대중-김정일 회담을 성사시키려고 불법 대북송금 사건을 일으켜 4억5000만 달러를, 국민들을 속이고, 김정일의 해외 비자금 계좌 등으로 보낸 사실은 언급하지 않았다. 김대중, 노무현 정권이 약 100억 달러에 이르는 대북 퍼주기를 하고도 국군포로나 납북자를 한 사람도 송환받지 못한 사실도 지적하지 않았다. 북이 햇볕정책 기간에 서해에서 두 차례 군사적 도발을 한 사실도 묵살되었다. 북한 정권이 김대중-김정일, 노무현-김정일 회담에서 약속한 것을 지키지 않은 사실도 지적하지 않았다.
이승만ㆍ박정희(朴正熙)ㆍ전두환(全斗煥) 정부 시절에 있었던 발전에 대하여는 항상 꼬리를 달아 비판하던 교과서들은 김대중의 햇볕정책에 대하여는 홍보문처럼 무비판적으로 기술하였다. 교과서들은 김일성ㆍ김정일ㆍ김대중에 대하여는 일방적으로 비호 내지 편을 들고 이승만ㆍ박정희ㆍ전두환 정부에 대하여는 일방적으로 비방하는 편집방향을 일관되게 유지하였다.
김정일의 惡政에 관대
![]() |
| 북한 식량난의 원인을 외부의 탓으로 돌리는 내용을 담은 《고교 한국사》 교과서. |
<홍수와 가뭄 등으로 식량생산이 크게 줄어들어 수많은 사람이 굶어 죽는 상황까지 발생하였다. 에너지 부족으로 공장의 가동률도 크게 떨어졌다. 소련 및 동유럽 사회주의권의 붕괴와 미국의 경제봉쇄 정책이 에너지와 식량을 수입할 수 있는 외화 획득을 어렵게 하였기 때문이다.>
이 교과서는 북한 주민이 굶어 죽는 상황의 책임을 자연재해, 동구공산권 붕괴, 미국의 경제봉쇄 정책으로 돌린다. 이는 완벽한 거짓이다. 김정일은 ‘협동농장 개혁, 핵 및 미사일 개발 중지, 군사비 지출 감축, 김일성 시신(屍身)보존 금수산 기념궁전 축소’만 했어도 북한주민들을 굶겨 죽이지 않을 수 있었다. 북한 기아사태의 모든 책임은 김정일이 져야 한다. 미국의 경제봉쇄 등으로 에너지와 식량을 수입할 수 있는 외화 획득이 어려워져 굶어 죽는 사태가 발생하였다는 이 교과서의 책임전가는, 김정일도 웃을 왜곡이다.
이 교과서의 필자는 대한민국을 만든 세력에 대하여는 왜 그토록 잔인하고, 민족반역자이자 학살자인 김정일은 왜 그토록 동정하는가? 유대인의 잠언집(箴言集)인 탈무드에 나오는 문장이 생각난다.
“잔인한 자를 동정하는 자는 동정받아야 할 사람들에게 잔인하다.”
이 교과서가 억류된 국군포로, 납북자, 탈북자, 강제수용소 문제에 대하여 냉담한 것은 잔인한 자를 숭배하기 때문이 아닐까?
천재교육 발간 《고등학교 한국사》의 현대사 부문 제목들을 보면 이승만ㆍ박정희 정부에 대한 비판과 김일성·김정일 정권에 대한 비호와 미화가 대조적이다.
이 책은 이승만·박정희 정부를 아래 제목으로 비판한다.
“냉전과 독재의 함정에 빠지다”
“군사독재가 시작되다”
“유신체제에 맞서다”
이 책은 김일성·김정일 정권을 아래 제목으로 비호하고 미화한다.
“김일성 유일사상 체제를 세우다”
“북한이 개방에 나서다”
‘박정희’ 생략한 채 ‘한강의 기적’ 설명
건국 대통령과 건설 대통령을 ‘독재’라고 비판하려면 700만 학살에 책임이 있는 김일성ㆍ김정일 정권은 ‘전체주의 체제’나 ‘학살 정권’이라고 해야 맞다. 그런데 ‘독재’란 낱말을 회피하고 ‘유일사상 체제’라고 순화하였다. 마치 김일성이 대단한 사상가나 되는 것처럼 호도(糊塗)한 것이다. 북한은 ‘유일사상 체제’가 아니라 ‘유일 독재 체제’이다. 이 책은 본문에선 드물게 북한 정권을 ‘독재’라고 표기하였지만 제목이 읽는 이들의 판단을 크게 좌우하므로 제목에서 ‘독재’를 뺀 것은 편향적 편집이다.
‘북한이 개방에 나서다’라는 제목은 김정일 정권도 민망해 할 선전문구이다. ‘개방’의 참뜻은 사람과 물건과 정보의 자유로운 교류이다. 북한은 한 번도 그런 교류를 허용해 본 적이 없다.
책의 제목은 저자(著者)가 가진 가치판단 기준과 우선순위, 그리고 이념성향을 집약적으로 드러낸다. 위의 제목에서 우리는 저자가 대한민국 건설 세력에 대하여는 반감을, 대한민국의 적(敵)인 북한 정권에 대하여는 호감이나 동정심을 가진 인물임을 짐작할 수 있다.
편향성이 높은 천재교육 발간 교과서의 경우, 박정희가 주도한 ‘한강의 기적’을 설명하면서 ‘박정희’란 이름을 한 번도 사용하지 않았다. 박정희가 결심하고 추진하였던 주요 정책의 주체는 ‘군사 정부’나 ‘정부’로만 표현된다. 학생들에게 ‘박정희’에 대한 좋은 정보를 차단함으로써 그에 대한 호감을 차단하려는 의도가 엿보인다. 한국의 경제 발전이나 ‘한강의 기적’을 ‘박정희’란 명사를 사용하지 않고 설명하는 것은 훈민정음의 창제(創製)를 ‘세종대왕’이란 단어를 쓰지 않고 설명하는 것과 같다.
이 교과서는 수출주도형 경제성장이 ‘만성적인 무역적자’를 유발시켰다고 기술한 뒤 정작 무역흑자로 돌아서게 한 1980년대의 전두환 정부 시절 경제에 대해선 부정적인 기술만 하고 있다. 전두환 정부 시절과 겹치는 1980년대 한국의 연평균 경제성장률이 10%를 넘어 세계 1위를 기록하였다는 사실은 언급하지 않았다.
반면 김대중, 노무현이 잘했다고 생각하는 대목에선 ‘정부’라고 하지 않고 ‘김대중’, ‘노무현 정부’식으로 친절하게 표기하였다.
박정희 vs 김대중 이미지 비교
![]() |
| 《고교 한국사》 교과서에 실린 박정희 대통령과 김대중 대통령의 사진. 박 대통령은 딱딱한 군복차림, 김 대통령은 밝게 웃는 모습이다. |
《고등학교 한국사》에 실려 있는 우리나라 대통령의 사진 이미지는 어떨까.
2011년부터 사용되는 《고등학교 한국사》는 미래엔컬처그룹, 지학사, 천재교육, 비상교육, 법문사, 삼화출판사에서 나온 6종이다. 분석대상이 된 사진과 삽화 자료의 수는 총 1195건이었다(같은 사진이 여러 번 등장할 경우 중복하여 수치를 잡았다. 한 사진 속에 두 인물이 나올 경우 각각의 수치에 포함했다. 수치는 사진 등장 횟수다).
대통령 10명 중 최다(最多)를 기록한 이는 17회의 박정희이다. 미래엔 교과서를 제외한 5종 교과서에 등장했다(미래엔에는 ‘통일주체국민회의와 의장 박정희’라는 제목의 사진이 있으나 사진 속 얼굴의 확인 불가로 제외했다).
이 중 7회가 5ㆍ16 군사혁명 당시의 군복 차림에 선글라스를 끼고 있는 모습의 사진이었다. 5종 교과서에 모두 등장했으며, 두 번씩 반복 등장한 경우(천재, 삼화)도 있어 ‘박정희’에 대한 이미지에 큰 영향을 끼칠 것으로 보인다. 그 외 유신 관련 신문기사 내의 얼굴사진 5회, 서거 기사 속 얼굴사진 3회, 남한에 온 박성철 북한 부수상을 만나는 박정희(1972. 12. 1) 1회, 퇴역 당시 사진 1회이다.
두 번째는 16회를 기록한 이승만 초대(初代) 대통령이다. 비상 교과서를 제외한 5종에 실렸다. 이 중 증명사진 형태 5회(자료 및 포스터에 사용됨), 김구와 손잡은 사진 3회, 신문기사 속 사진 3회, 건국 취임선서 장면 2회, 귀국연설 1회, 웃는 얼굴 1회, 상하이 임시정부 시절 사진 1회로 나타났다.
세 번째는 13회 등장한 김대중 대통령이다. 유일하게 6종 교과서에 모두 등장했다. 이 중 8회가 제1차 남북정상회담(비상 2회, 법문 2회)이었고, 노벨평화상 수상 장면이 3회, 대통령 취임식 장면이 2회였다.
네 번째는 7회를 기록한 전두환 대통령이다.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 발족 장면 2회, 육군대장 전역식 연설 1회, 야구장에서 시구(始球)하는 모습 1회, 수의(囚衣)를 입고 법정에 선 모습 1회, 5공 청문회 장면 1회, 12ㆍ12사태 주역이었던 하나회 단체 사진 1회 등으로 나타났다.
다섯 번째는 6회를 기록한 노무현 대통령이었다. 여섯 번째는 5회 등장한 노태우(盧泰愚) 대통령, 일곱 번째는 4회를 기록한 이명박(李明博) 대통령이다. 윤보선(尹潽善) 대통령은 3회, 김영삼(金泳三) 대통령은 2회 등장했다. 최규하(崔圭夏) 대통령의 사진은 없었다.
등장한 사진의 이미지에서 큰 대조를 보이는 것은 박정희와 김대중이었다. 박정희의 경우 군복과 선글라스를 착용하고 굳은 표정을 지은 사진이 7회였다. 신문기사 속에 사용된 증명사진류도 8회인데, 내용 역시 비상계엄령 선포, 유신헌법 관련, 서거 등 무겁고 어두운 이미지를 주었다.
이에 반해 김대중의 경우, 모든 사진이 김정일과 손을 잡고 환하게 웃고 있거나 노벨평화상 수상 장면, 대통령 취임식 사진으로 표정이 밝다. 사진 설명도 김대중에게 우호적이다.
문익환ㆍ임수경 처벌을 ‘탄압’이라 가르치는 교과서
1989년에 발생한 문익환, 임수경 불법(不法) 방북(訪北) 사건은 남북한의 좌익세력이 배후에서 합작하여, 대남(對北)공작 차원에서 일으킨 것이다. 이 사건이 일어난 1989년은 직선제로 당선된 노태우 대통령 시절이다. 그런데 올해부터 고등학교에서 가르치는, 교과부 검정에서 통과된 미래엔컬처그룹 발행 《고등학교 한국사》 392페이지는 이렇게 설명한다.
<6월 민주항쟁으로 통일운동이 활발해져, 문익환 목사와 대학생 임수경 등이 북한을 방문하였지만 노태우 정부는 국가보안법을 적용하여 탄압하였다.>
이 교과서는 문익환과 임수경의 북한 방문이 불법이었음을 밝히지 않았다. 교과서는, 민주정부와 법원의 정당한 법치(法治)행위를 ‘탄압’이라고 표현하였다. 학생들이 국가보안법에 부정적인 생각을 갖도록 하려는 선동이라고 볼 수밖에 없다.
‘탄압’이란 용어는 임수경과 문익환에 대하여는 호감을, 대한민국의 법치주의에 대하여는 불신감(不信感)을 심어주려는 의도를 드러낸 것으로 보인다.
미래엔컬처그룹 교과서는 364페이지, ‘그때 그 사건’에서 ‘동백림(東伯林·동베를린) 간첩단 사건’에 대해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1967년 국회의원 선거에서 공화당은 3선 개헌을 위한 의석 확보를 위해 대대적인 부정선거를 저질렀다. 부정선거에 대한 비판여론이 고조되자, 중앙정보부는 동백림 간첩단 사건을 발표하였다. 유럽에서 평화 통일 운동을 하던 작곡가 윤이상, 화가 이응로 등을 간첩으로 체포하여 국내로 압송하였던 것이다.>
윤이상, 이응로는 ‘평화 운동가’가 아니라 북한 정권의 대남(對南)공작에 협력한 범법자(犯法者)들이었다. 윤이상은 한국의 국가정보기관에 의하여 ‘유럽의 북한 공작원’으로 분류되었고 북한 정권과의 관계를 정리하지 못하여 생전(生前)에(김영삼 정부 시절에도) 귀국이 허용되지 않았었다.
이응로는 부인 박인경과 함께 동백림 사건뿐 아니라 1977년에 발생한 백건우-윤정희 부부 납치 사건에도 북한 공작원에 협조한 혐의가 있다. 2010년 11월 출간된 윤응렬(尹應烈) 장군(공군 前 작전사령관)의 회고록 《상처투성이의 영광》에서 필자는 흥미로운 증언을 하고 있다.
윤씨는 주불(駐佛)공사로 재직하면서 이응로·박인경 부부를 서울로 압송하였다. 그는 파리로 돌아온 직후 중앙정보부 본부로부터 ‘이·박 부부가 간첩 활동에 사용한 송수신기와 난수표(亂數表)를 수거하라’는 지시를 받고 베테랑 수사요원들과 함께 파리에 있는 이씨의 집으로 들어가 물증을 확보하는 데 성공하였다고 회고록에서 밝혔다.
<나는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북한 간첩들의 난수표를 보았다. 난수표는 특수 처리된 아주 얇은 용지의 넓이 3.5㎠, 길이 3.0cm 정도 크기였다. 그것은 직경이 담배보다 약간 가늘게 둘둘 말려 프랑스 고루아(golois) 담뱃갑 안에 담배와 같이 숨겨져 있었다.>
난수표에는 확대경으로 읽어야 할 정도의 작은 활자가 가득 인쇄되어 있었다고 한다. 윤 장군은 당시 중정(中情) 요원들이 난수표뿐 아니라 세포조직 명단과 검거에 대비해 마련한 자살용 청산가리까지 확보했다고 회고록에서 밝히고 있다.
‘주요 검색어’도 左편향적
교과서는 이러한 사실관계는 생략한 채 윤이상과 이응로가 무고하게 연루된 것처럼 적고 있다. 노무현 정권 시절의 과거사 위원회도 동백림 사건에 대해 <관련자들이 북한 공작원들과 접촉하면서 동베를린(50명) 및 북한 방문(12명), 북측 인사로부터의 금품수수(17명) 등을 통해 실정법을 위반한 것은 맞다. 과장은 됐지만 조작은 아니다>라며 실체가 있는 사건임을 분명히 했다.
《고등학교 한국사》엔 1980년 5월의 광주사태에 대한 학생들의 이해를 오도할 수 있는 기술이 있다. 미래엔컬처그룹 교과서는, 공수부대원들을 집단 학살범으로 왜곡한 영화 <화려한 휴가>를 보도록 추천하였다. 천재교육 교과서는 ‘광주시민군 궐기문’을 실었는데 이 글 속에 사실이 아닌 부분이 있다.
“20일 밤부터 계엄당국은 발포명령을 내려 무차별 발포를 시작하였다”는 대목은 사실과 다르다. 계엄당국은 ‘무차별 발포’를 명령한 적이 없다는 것이 5ㆍ18 재판과 수사과정에서 확정되었다. 2007년 <화려한 휴가>가 상영되었을 때 국방부는 이 영화의 왜곡된 부분을 바로잡는 노력을 하나도 하지 않았다. 국방부가 방치한 이 왜곡된 영화가 이젠 교과서에까지 등장, 학생들에게 추천되고 있는 실정이다.
이 교과서가 추천한 ‘주요 검색어’도 좌편향적이다.
<8단원: 냉전, 베를린 봉쇄, 빌리 브란트, 여운형, 제주도 4·3사건, 반민 특위, 대충자금, 천리마 운동. 9단원: 베트남 전쟁, 제3세계, 이한열, 전태일, 주체사상>
교과서가 추천한 위의 영화들을 보고, 위 단어들을 검색해 본 학생들은 한국 현대사에 대해 어떤 생각을 갖게 될까.
성공한 독일 통일은 단점만 記述
미래엔컬처그룹에서 발행한 《고등학교 한국사》는 8단원 349페이지 탐구활동 ‘각국 통일과 그에 따른 문제점’에서 베트남의 공산통일과 독일통일을 다루고 있다.
베트남은 1985년 이후, 외국 자본을 유치하는 등 개혁에 성공해 발전을 이룩했다는 식의 긍정적인 면을 서술한 반면, 독일 통일은 “서독의 자본과 엘리트에 의해 주도된 흡수통일 방식이 내적 통일에 많은 문제점을 안겨주었다”고 부정적으로 기술하고 있다. 교과서는 편향된 기술을 한 뒤 “우리에게 가장 바람직한 통일 방안은 무엇이며 그를 위해 어떤 준비를 해야 하는지 토론해 보자”라는 유도성 질문을 던진다.
이 교과서는 독일 통일의 부정적인 면을 부각시키기 위하여 철 지난 통계를 제시한다.
<동독 경제가 빨리 부흥되지 않고 20%에 가까운 높은 실업률이 지속…>이라는 주장은 낡은 것이다. 독일 통일 이후 신연방주(구 동독 지역)의 실업률은 2006년(19.2%)을 정점으로 계속 하락하고 있다(2009년 현재 실업률은 13.0%). 1992년 이후 2004년까지 신연방주의 국내 총생산량(GDP)이 두 배 가까이 성장하여 1991년 독일 국내 총생산에서 7%에 불과하던 비중이 2008년에는 11.7%로 상승했다. 1인당 GDP는 서독 지역의 35%에 불과했으나 2000년에는 72%, 2008년에는 79%에 달했다.
2010년 《이코노미스트》는 2009년 무역수지 흑자(黑字)가 가장 많은 나라가 독일이라고 밝혔다. 독일의 2009년 4월~2010년 3월 사이 무역흑자는 2072억 달러로서 2위인 러시아의 1388억 달러, 3위 중국의 1387억 달러를 앞섰다. 2010년 3월의 산업생산액은 1년 전에 비하여 8.6% 증가하였다. 이는 유럽에서 가장 높은 축에 드는 것이었다. 실업률도 프랑스의 10%보다 낮은 7.8%였다. 서독이 동독을 흡수, 통일한 1990년 이후부터 2009년까지 독일은 세계수출 1위 국가였다.
반면, 베트남은 월맹에 의한 공산통일 이후 공산 전체주의 체제를 더욱 심화시켰고 과거 월남처럼 부패해졌다. 베트남 공산당은 국민의 사유재산을 말살했으며 언론·출판·결사·종교의 자유를 압살했다. 그들은 월남 정부의 부패에 대항해 시위를 벌였던 지식인, 학생, 종교인들을 탄압하였다.
공산당 지도부는 1980년대 중반부터 소련의 페레스트로이카(개혁)를 모방한 ‘도이모이’를 차용, 체제개혁에 착수했다. 서방 자본주의 국가들의 기술과 자본을 도입하고 사유재산 소유와 자유기업 체제를 부분적으로 허락한다는 것이 골자지만 정치적 민주화가 아득하고 공산당 일당(一黨) 독재체제도 변화가 없다. 300만명의 인명을 희생시킨 베트남식 통일을 미화하고, 한 사람의 인명 손실 없이 통일한 독일식을 비판하는 교과서로 배운 학생들이 자유통일의 주체세력이 될 수 있을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