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로 한국에 천주교가 전파된 지 227주년을 맞게 되고, 대구대교구가 설정된 지 꼭 100년이 된다. 구약(舊約)성경 시편에 ‘정녕 천 년도 당신 눈에는 지나간 어제 같고, 한 토막 밤과도 비슷하다’고 하지 않았던가.
“(지난해 3월 주교회의 성명의) 전반적인 내용은 제가 보기에 ‘우려한다’는 쪽인데, 반대 논조처럼 보일 수도 있습니다. 추기경께서 ‘그런 문제를 전문가 판단에 맡겨야 되지 않나? 나중에 잘되고 못되고는 심판받을 것’이라 말씀하셨는데, 충분히 할 수 있는 말씀이라 봅니다.”
⊙ 100년 전 대구교구 신자 2만6000명, 본당 18곳→ 2011년 신자 45만8000여명, 본당 156곳
⊙ 1911년 4월 8일 조선교구는 교황 비오 10세의 명으로 서울교구와 대구교구로 나눠져
⊙ 천주교 양적 성장 불구, 질적 신앙 떨어져… 대구대교구 설정 100주년을 맞이해 새로운 신앙 쇄신을
준비
⊙ 4대강 사업은 신앙과 직접 관련 없어… “4대강 사업, 전문가에게 맡겨야 한다는 추기경 말씀에 공감”
曺煥吉 대주교
⊙ 59세. 광주가톨릭대(옛 대건신학교) 졸업. 1981년 사제 수품. 대덕·복자성당 보좌신부,
덕수성당 주임신부, 미국 교포사목 역임. 대구대교구 사목국장·사무처장, 매일신문 사장,
한국신문협회 부회장 역임.
⊙ 現 한국 주교회의 매스컴위원장, 주교회의 성직 주교위원회·민족화해 주교특별위원회·
시복시성 주교특별위원회 위원.
“(지난해 3월 주교회의 성명의) 전반적인 내용은 제가 보기에 ‘우려한다’는 쪽인데, 반대 논조처럼 보일 수도 있습니다. 추기경께서 ‘그런 문제를 전문가 판단에 맡겨야 되지 않나? 나중에 잘되고 못되고는 심판받을 것’이라 말씀하셨는데, 충분히 할 수 있는 말씀이라 봅니다.”
⊙ 100년 전 대구교구 신자 2만6000명, 본당 18곳→ 2011년 신자 45만8000여명, 본당 156곳
⊙ 1911년 4월 8일 조선교구는 교황 비오 10세의 명으로 서울교구와 대구교구로 나눠져
⊙ 천주교 양적 성장 불구, 질적 신앙 떨어져… 대구대교구 설정 100주년을 맞이해 새로운 신앙 쇄신을
준비
⊙ 4대강 사업은 신앙과 직접 관련 없어… “4대강 사업, 전문가에게 맡겨야 한다는 추기경 말씀에 공감”
曺煥吉 대주교
⊙ 59세. 광주가톨릭대(옛 대건신학교) 졸업. 1981년 사제 수품. 대덕·복자성당 보좌신부,
덕수성당 주임신부, 미국 교포사목 역임. 대구대교구 사목국장·사무처장, 매일신문 사장,
한국신문협회 부회장 역임.
⊙ 現 한국 주교회의 매스컴위원장, 주교회의 성직 주교위원회·민족화해 주교특별위원회·
시복시성 주교특별위원회 위원.
전임 교구장 이문희(李文熙) 대주교의 카리스마와 비교되는, 엄숙하고 태연자약한 인상은 그가 일할 때나 쉴 때나 한결같을 것이란 느낌을 갖게 했다.
언젠가 그가 대구대교구 소유인 《매일신문》 사장이 되었을 때, 또 몇 년 뒤 보좌주교로 수품(受品)했을 때, 그리고 지난해 11월 대주교로 임명됐을 때 교회 안팎에서 놀라는 표정이 많았다. 장상(長上)이면 으레 거쳤을 유학경험도 없다. 그러나 그의 부상(浮上)이 신의 의지를 받든 교황 베네딕토 16세의 뜻이었기에 더욱 놀라웠다.
그 놀람은 스멀스멀 잦아들었다. 조 대주교는 승품 이전과 다른 모습도, 목덜미가 뻣뻣한 자부심 충만한 행동을 보여주지 않았다. 평소처럼 ‘기름기 없는’ 얼굴로 사제와 신자들을 만났다. 그러고 보니, 조환길 대주교의 사목(司牧)표어는 ‘처음과 같이 이제와 항상 영원히’다. 이 표어는 천주교 기도문의 하나인 ‘영광송’에서 따온 문구다.
조 대주교와 인터뷰는 지난 2월 8일 대구 남산3동 주교관에서 이뤄졌다. 지난해 말부터 세 차례나 인터뷰 요청을 했던 터라, 대구로 내려가는 기차에서부터 조바심이 났다.
이제와 항상 영원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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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02년 신축된 대구 계산성당. 천주교 대구대교구 주교좌성당으로 대한민국 사적 290호다.<사진제공=천주교 대구대교구> |
그는 지난해 11월 5일 대주교 임명 직후 가진 기자회견에서 이렇게 말했다.
“왜 저 같은 사람한테 무겁고 큰 직책이 주어졌는지 저도 잘 알 수 없고, 저보다 하느님께서 더 잘 아실 텐데 왜 이런 직무를 주시는지 다 알지 못합니다.”
대주교란 직책이 어떤 자리인지, 얼마나 고된지 보통사람은 잘 알지 못한다. 다만 앞서 겪었던 대주교의 삶에서 ‘가시방석’임을 비유적으로 알 수 있다. 9대 교구장 최영수(崔榮壽) 대주교는 2년간 암과 사투를 벌이다 끝내 선종했다. 8대 교구장 이문희 대주교도 3년 전 암수술을 받았으나 다행히 경과가 좋다. 그리고 이 대주교와 함께 대구대교구를 이끌던 서정덕(徐貞德) 보좌주교는 지병으로 4년간 투병하다 2001년 12월 선종했다. 조 대주교는 10대 교구장이다.
“처음 대주교가 되었다는 소식을 접했을 때 기쁘기보다 두려움과 떨림이 앞섰습니다. 직책이 교구장이고 대주교라서 그렇지, 평범한 사제(司祭)라는 데 크게 변함이 없다고 봐요. 특별히 공부를 많이 한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덕(德)이 뛰어난 것도 아닌데 하느님께서 교황님을 통해 하시는 일이니까 받아들였어요. 능력은 없으나 순명(順命)할 뿐입니다.”
조 대주교의 가장 큰 과업은 당장 코앞에 다가온 대구대교구 설립 100주년 기념사업을 진두지휘하는 일이다. 올해로 한국에 천주교가 전파된 지 227주년을 맞게 되고, 대구대교구가 설정된 지 꼭 100년이 된다. 구약(舊約)성경 시편에 ‘정녕 천 년도 당신 눈에는 지나간 어제 같고, 한 토막 밤과도 비슷하다’(시편 90.4)고 하지 않았던가. 100년 안에는 순교와 박해, 은총과 감사의 시간이 촘촘히 박혀 있다.
“교구 100주년을 기념한다는 말은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은혜를 기억하고 그 은혜에 어울리게 살기를 마음먹는다는 뜻입니다. 시간을 창조하시고 주재하시는 하느님께서는 대구대교구의 100년 역사를 시작하고 인도해 오셨으며, 또 우리에게 그 의미를 발견하도록 초대하십니다.”
1911년 4월 8일, 그러니까 100년 전 조선교구는 교황 비오 10세의 명으로 서울교구와 대구교구로 나눠졌다. 가톨릭에서는 하느님의 ‘누룩’을 분배하고 그 누룩이 어디서 발효될지 결정하는 것은 인간의 몫이 아니라고 말한다.
그리고 두달 뒤인 6월 11일 서울 종현성당(명동성당)에서 대구교구 플로리앙 드망즈(한국명 안세화·安世華) 초대 교구장 주교의 서품식이 거행됐다. 가톨릭 잡지인 《경향잡지》는 당시 서품식 기사를 이렇게 썼다.
“성당 밖에 나온즉, 듣지 못하던 음성이 들렸는데 자세히 알아보니 대구사람의 목소리였다. 성당을 사면으로 돌아가니 대구 말소리가 끊이지 않으니 그 수의 많음을 가히 알겠다. 신기하다, 대구사람들의 거동이여. 모두 희색이 만면하고 희락함이 희한한지라.”(대구대교구 100주년 뉴스레터 창간호 참조)
| ▣ 천주교 대구대교구 100년 略史 ⊙ 1911년 4월 8일 대구교구(대목구) 설정(초대 교구장 드망즈 주교) ⊙ 1914년 성 유스티노 신학교 설립 ⊙ 1918년 10월 13일 성모당 축성 ⊙ 1927년 가톨릭신문사 설립 ⊙ 1938년 12월 13일 제2대 교구장 문제만 주교 임명 ⊙ 1942년 8월 30일 제3대 교구장 하야사카 주교 임명 ⊙ 1946년 1월 16일 제4대 교구장 주재용 신부 임명 ⊙ 1948년 5월 제5대 교구장 노기남 주교 임명(서울 교구장 겸임) ⊙ 1950년 10월 대구 매일신문 인수 ⊙ 1955년 9월 15일 제7대 교구장 서정길 주교 착좌 ⊙ 1962년 3월 24일 대구대목구에서 대구대교구로 승격 ⊙ 1980년 대구 가톨릭병원 개원 ⊙ 1981년 6월 6일 교구설정 70주년 기념 성체대회 ⊙ 1982년 3월 3일 관구 대신학교 설립 ⊙ 1983년 5월 《빛》잡지 발간 ⊙ 1984년 5월 5일 교황 요한 바오로 2세 대구 방문 ⊙ 1986년 7월 5일 제8대 교구장 이문희 대주교 착좌 ⊙ 1995년 통합 ‘대구가톨릭대’ 출범 ⊙ 1996년 9월 9일 대구 평화방송 개국 ⊙ 1997년 11월 30일 제1차 교구 시노드 개최 ⊙ 2007년 4월 30일 제9대 교구장 최영수 대주교 착좌 ⊙ 2010년 11월 4일 제10대 교구장 조환길 대주교 착좌 |
徐相敦 선생과 대구대교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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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11년 6월 11일 대구대교구 초대 교구장인 드망즈 주교의 주교 서품식이 서울 명동성당에서 열렸다.<사진제공=천주교 대구대교구> |
“전주가 대구보다 신앙이 먼저 전파돼 신자 수가 많았어요. 대구는 충청도에서 박해를 피해서 온 사람들이 이주하면서 신앙이 시작됐어요. 그러나 대구는 일제(日帝)가 경부선을 놓은 탓에 교통 접근성이 높아 선교사 왕래가 유리한 장점이 있었습니다. 당시 대구에 있던 열성 신자들이 ‘교구가 대구로 왔으면 좋겠다’고 뮈텔 주교에게 청을 넣었다고 합니다. 소위 유치활동을 했다고 할까요? 그중에는 서상돈 선생도 포함됩니다.”
양기탁(梁起鐸·1871~1938)과 함께 1907년 국채보상운동을 제창한 이가 민족운동가 서상돈(徐相敦·1851~1913)이다. 독립협회와 만민공동회에서 활동한 그는 4대에 걸쳐 신앙을 지킨 순교자 집안 출신이다. 서상돈의 증조부는 천주교를 믿다가 출문당해 강원도에 은신하다 세상을 떠났고, 조부는 대원군의 박해를 피해 경북 상주, 옥산 등지에서 옹기굴 막일꾼으로 일하다 숨졌다. 아버지 대에 이르러 처가인 대구로 옮겨와 남문(南門) 밖 장터 앞에 자리를 잡았다. 13살 때 점포 심부름꾼으로 시작, 억척스레 장사를 배워 후일 3만석 대지주가 되었다.
“서상돈 선생의 숙부 세 분(서태순·서익순·서인순)이 모두 순교하셨습니다. 그중 서태순은 대구 팔공산 한티 순교성지에 묻혀 있어요. 병인박해 때 상주에서 돌아가셨습니다.”
대구에 남방교구 본부가 자리잡게 되자, 서상돈 선생은 농장 1만여 평을 희사했다. 또 영남지역 신앙의 상징인 계산주교좌성당 건립에도 거액을 내놓아 대구교구 발전의 초석이 됐다고 한다.
“교구가 대구로 오면서 조선교구는 서울과 대구 교구로 나눠지게 됐습니다. 그러니까 서울대교구도 대구대교구와 같이 올해 100주년이 되는 셈이지요. 하지만 서울대교구는 조선교구의 전통을 이어, 따로 100주년 행사를 하지 않습니다. 진정한 의미에서 대구만이 100주년을 맞이한 셈입니다.”
2009년 천주교도 500만명 돌파
분할 당시 대구교구의 관할 범위는 영남 전역과 전라도와 제주도, 충북까지 아우르고 있었다. 그러다 교세(敎勢)가 점점 늘면서 1937년 전주교구와 광주교구가 독립해 분할됐고, 6·25사변을 거친 뒤 57년 부산교구, 66년 마산교구, 69년 안동교구가 분할됐다. 그러나 비록 교구는 분할됐지만 부산교구와 마산교구, 안동교구, 청주교구는 여전히 대구 관구(管區)소속이며, 대구대교구장인 조 대주교는 대구관구장도 겸하고 있다.
현재 한국천주교회는 군종(軍宗)교구와 북한에 위치한 교구들을 제외하고 100년 동안 서울과 대구 2개 교구에서 서울·대구·광주 대교구와 부산·대전·인천교구 등 16개 교구로 늘어났다.
“한국천주교 227년의 역사 중 전반기 100년은 박해시대였죠. 신자가 조금 늘면 박해로 이어져 많은 사람이 순교했고 산속으로 피신해야 했습니다. 신앙자유를 얻은 뒤 조금씩 선교가 시작됐는데 1911년 당시 전국 신자 수가 7만3000명에 본당이 54곳이었습니다. 대구교구는 영호남을 합쳐 신자가 2만6000명에 본당이 18곳으로 미미한 숫자였어요.”
100년이 지난 오늘날 대구대교구(현재 대구 전역과 경북 중남부 지역)는 신자 45만8000명에 본당 156개, 신부는 421명이다.
한국천주교 전체로 본다면, 1930년 10만명에 불과하던 신자 수는 1970년 이후 폭발적으로 증가해 1974년 100만명을 돌파했고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의 두 차례 방한(訪韓)에 힘입어 1985년 말 200만명, 1992년 말 300만명, 그리고 2008년 500만명을 넘어 2009년 512만명을 기록했다. 개신교나 불교의 교세가 정체 내지 침체기로 돌아섰지만 천주교는 계속 불어난 셈이다.
양적 교세 성장의 그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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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84년 방한해 대구 계산성당을 찾은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사진제공=천주교 대구대교구> |
그러나 양적 성장이 신앙의 질적 성숙까지 받쳐 주지 못하고 있다. 신자 증가율이 둔화되고, 냉담자 수 증가, 주일미사와 고해성사를 포함한 성사(聖事)생활의 활력 감퇴가 두드러지고 있다. 물론 대구대교구만이 아닌 한국천주교회 전체의 문제다.
“신자 수가 500만명에 이를 만큼 양적으로 성장했다고 봅니다. 하지만 질적 측면에서는 신앙이 뭐랄까, 좀 퇴보했다고 할까요? 한국천주교회는 스스로 신앙을 받아들였고 여기다 순교자에게서 물려받은, 아주 특이하면서도 자랑스러운 신앙의 역사를 지니고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날의 신앙은 그런 깊이보다 세상 살아가는 방편으로 신앙을 믿는 이가 많은 것 같습니다. 신앙을 삶으로 연결시키지 못한 채 신앙 따로, 생활 따로가 되어 가고 있어요. 여러 문제가 있습니다만, 우선 성직자와 수도자들이 바르게 살아서 신자들을 이끌어야 한다는 책임을 통감합니다.”
대구대교구의 경우 2010년 현재 신자수가 45만9093명이지만 냉담자가 21만4844명(46.5%)에 이른다. 한 해 평균 1만명이 세례를 받아 전체 신자 수는 해마다 증가하고 있지만, 증가율은 점점 둔화되고 있다. 세례를 받은 뒤 성당에 안 나오는 냉담자, 냉담이 길어져 주소 파악조차 안되는 행불자도 늘고 있다. 조 대주교는 “전체 신자 숫자는 지난 20년 동안 계속 증가하는데, 미사 참례자나 성사(聖事) 보는 신자 수는 해가 바뀌어도 비슷하거나 조금 떨어지는 추세”라고 우려했다.
신앙의 쇄신을 위한 ‘제2차 교구 시노드’의 시작
교구 설립 100주년을 맞이한 대구대교구는 대대적인 신앙 쇄신을 준비하고 있다. 지난 100년을 뒤돌아보고, 다가올 100년을 맞이하려고 ‘다시 새롭게’와‘새 시대, 새 복음화’란 캐치프레이즈를 마련했다. 그리고 ‘생명사랑 나눔운동’을 통해 제3세계 불우아동 결연사업, 장기기증운동, 헌혈, 헌옷모으기 등 다양한 자선사업과 생명운동을 벌이고 있다.
신앙 쇄신 방안으로 ‘은총의 100주년 1·3 운동’도 전개하고 있다. 대상은 교구의 모든 신자다. 하느님과의 올바른 관계, 이웃과의 올바른 관계, 자신과의 올바른 관계를 위해 하루 한 번 칭찬하기, 성경 1줄 쓰기 등 세부 실천계획을 마련했다.
이와 함께 교구설정 기념일인 4월 8일부터 ‘제2차 교구 시노드’를 준비하고 있다. 시노드(Synod)는 교리·규율·전례 등 가톨릭 교회 안의 중요한 문제를 토의해 결정하려고 모인 교회의 대의원 회의다. 라틴어 시노두스(Synodus)에서 유래한 말로, ‘함께하는 여정’을 뜻한다. 앞서 이문희 대주교 시절인 1997년부터 2년간 1차 시노드(당시 표어는 ‘함께 가자, 생명의 길로!’였다)를 열었었다.
“향후 1~2년 동안 시노드 회의를 엽니다. 이를 위해 성직자, 수도자, 평신도를 포함한 대의원 500명을 이달 안에 선발해 4가지 주제별로 집중토론을 합니다. 첫째는 젊은이 복음화, 둘째는 새 시대 선교, 셋째는 소외된 계층에 대한 교회의 관심과 배려, 넷째는 교구 및 대리구 체제와 사제생활입니다.
가장 중요한 안건은, 교회가 100주년을 맞이해 어떤 복음화 계획과 대책을 세우느냐 입니다. 교회의 존재이유는 선교와 복음화에 있지요. 단순히 신자 수 늘리기에 급급해하기보다 이 세상 사람들이 하느님 말씀 안에 살아가는 세상, 정말 하느님 보시기에 좋은 세상을 만들어 결국 하느님께 인도하는 것이 교회의 목적입니다. 100주년을 맞이해 시노드라는 수단으로 신앙의 반성과 쇄신을 꾀하려 해요.”
베네딕토 16세 교황은 과거 추기경 시절, 미래의 교회에 대해 예언자적(豫言者的) 발언을 한 적이 있다.
“교회는 작아져야 하고, 나아가 아주 새롭게 다시 시작해야 한다. 그러나 시험을 거치고 나면 내면화되고 간소화된 교회에서 대단한 힘이 솟아 나올 것이다. 철두철미하게 계획된 세계의 사람들은 말할 수 없이 외로워질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되면 작은 규모의 신앙인 공동체가 전혀 새롭게 발전할 것이다.”
조 대주교는 “교황께서 미래의 교회를 내다보고, 소공동체의 활성화를 얘기하신 것 같다”며 이렇게 덧붙였다.
“오늘날 교회가 대형화할수록 신자의 익명화도 가속화하고 있어요. 많은 신자가 주인의식을 갖고 교회 안에서 복음과 함께 살아갈 수 있는 소공동체 운동이 필요합니다. 이는 시노드와 맞물려 토론하고 연구해야 할 과제가 아닌가 생각이 듭니다.”
대구대교구 100년의 가장 큰 은총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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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는 5월에 열리는 교구 100주년 경축대회 준비를 위한 실무위원회 출범식 모습.<사진제공=천주교 대구대교구> |
조 대주교는 주저하지 않고 드망즈 초대 주교가 부임한 후 성모에게 했던 3가지 허원(許願)을 꼽았다.
드망즈 주교는 1911년 6월 26일 대구 땅을 처음 밟았다. 대구역에 도착하자 신자들이 역앞에 구름처럼 몰렸다고 한다. 환영식은 밤늦게까지 이어졌고 불꽃이 밤하늘을 수놓았다. 대구시민 전체의 축제와 같았다.
이튿날 드망즈 주교는 계산성당에서 첫 미사를 봉헌하며 대구교구 기초를 세우겠다고 결심한다. 하지만 자신의 힘으로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부임 후 맞이한 첫 주일날(7월 2일), 그는 루르드의 성모에게 기도하며 3가지를 청했다.
‘루르드의 성모’(프랑스어·Notre Dame de Lourdes)는 프랑스의 루르드에서 1858년부터 열여덟 차례에 걸쳐 나타났다고 보고된 성모 마리아를 가리키는 말이다. 루르드는 성모 공경의 한 근거지로 해마다 전 세계에서 수많은 순례자가 찾아오는 명소다. 또 루르드에 있는 샘물을 마시고 수천 건의 기적 치유사례가 보고됐다고 한다.
조 대주교의 말이다.
“드망즈 주교님은 이날 미사를 드리고 루르드 성모님을 우리 교구 주보성인으로 선포하십니다. 그러면서 주님 사업을 이끌 신학교 건립과 주교관 건축, 주교좌 성당 증축 등 3가지를 청하셨지요. 그러면서 이 3가지가 다 이뤄지면, 좋은 자리에다 프랑스의 루르드 지방에 있는 성모 동굴과 흡사한 동굴을 지어 봉헌하겠다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그 허원이 몇 년 안에 다 이뤄졌어요. 그래서 1918년 10월 18일 동굴을 지어 성모님께 봉헌하셨습니다.
저는 이 3가지 허원 중 신학교를 세운 것이 교구발전에 가장 큰 영향을 주지 않았나 생각해요. 당시엔 신학교가 서울 용산(지금은 혜화동 위치)에 있었는데, 드디어 대구에 신학교를 세우게 된 것이었어요.”
성 유스티노 신학교는 1914년 10월 3일 첫 신학생 57명을 받는다. 그렇다면 빠듯한 살림에 어떻게 신학교를 지었을까. 당시 드망즈 주교는 자신이 묵을 숙소조차 없어 임시거처에 기거하고 있었다.
조 대주교가 설명하는 신학교 설립과정은 이렇다. 드망즈 주교는 루르드 성모에게 기도한 뒤 1912년 9월부터 세계 각 지역의 유지들에게 호소문을 보내 한국인 사제양성에 필요한 재정지원을 청한다. 이후 세계 도처에서 편지가 답지하는데, 중국 상하이에서 익명의 신자가 유스티노 성인의 이름을 딴 신학교 건립을 소망한다며 거금(巨金)을 전해 왔다.
“그 상황에서 신학교가 세워져 많은 신자들이 기뻐할 수밖에 없었어요. 김수환(金壽煥) 추기경도 유스티노 신학교를 다니셨고 7대 대구대교구장을 역임하신 서정길(徐正吉) 대주교님도 이곳 출신입니다. 유스티노라는 교명(校名)은 중국인 기부자의 세례명에서 유래합니다.”
신학교가 세워지기 전 경상도 지방에 신앙공동체를 세웠던 신자들은 사제의 얼굴을 보기 위해, 혹은 미사와 고해성사를 보기 위해 수백 리 길을 걸어가야 했다. 그러나 신학교가 생기고 사제들이 배출되기 시작하면서 그런 불편은 점차 해소되어 갔다.
保守도시 대구와 대구대교구
대구(大邱)는 보수적 성향의 도시로 알려져 있다. 기질이 억세고 외지인에게 배타적이며 개방적이지 못하다는 평가도 덤으로 갖고 있다. 여기다 대구·경북 정치인들의 보수적 성향도 간과할 수 없다.
대구라는 지명이 하나의 독자적인 행정구역 명칭을 갖게 된 것은 고려시대부터라고 알려져 있다. 그러다 조선 중기에 경상감영이 설치된 17세기 초부터 영남지역의 중심지로 부상한다.
근대화 이전의 영남지방은 백두대간에 의해 다른 지역과 자연적으로 단절돼 70개의 소분지(小盆地)마다 자급적 생산체제를 갖추고 있었다. 분지 특성상 고을마다 현지 중소 지주층을 중심으로 일가(一家)를 이루었는데, 그런 자립적인 분위기가 ‘보리 문디’ 기질의 지역성을 배태시켰다고 한다. ‘문디’ 기질은 남한테 기죽거나 아쉬운 소리를 잘 못한다. 토착민으로 자기 지역에 대한 책임의식에 비견된다.
“어떤 이는 대구가 팔공산과 비슬산 줄기로 둘러싸여 지역색이 강하게 됐다고 분석하고, 또 어떤 이는 너무 춥고 더운 분지형(盆地形) 기후 탓에 ‘이것 아니면 저것’이라는 기질이 배태됐다고 봅니다. 과거 자유당 시절, 대구는 야당(野黨)도시였어요. 하지만 3공화국 이후 대구·경북 출신들이 고위직에 오래 앉아 보수적으로 바뀌었을 것이란 얘기도 있어요. 그분들의 성향 탓에 (밖에서) 대구사람을 보수적으로 생각하는 면도 있어요. 또 이쪽(영남)에서 저쪽(호남)으로 정권이 바뀌면서 지역갈등이 빚어진 측면도 있고요.”
“교회 안에 지방색 드러내는 일 없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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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11년에 착공해 1918년에 완공된 대구 성모당.<사진제공=천주교 대구대교구> |
“과거엔 백두대간에 의해 경상도가 단절돼 선비들이 과거 보러 가려면 험한 추풍령 고개를 넘어야 했지요. 지금은 교통이 사통팔달로 이어져 (지역적 고립이) 많이 개선됐어요. 또 대구가 보수적이고 배타적인 고장의 대명사처럼 인식되면서 그런 선입견을 깨려 의식적으로 노력도 많이 했어요. 우리 교회 안에서도 지방색을 드러내는 일은 전혀 없거든요. 전라도나 타 지역 출신들도 성당에서 열심히 활동하고 있고 성당내 직책도 맡고 있어요. 또 올해가 ‘대구방문의 해’고, 오는 8월 27일부터 대구세계육상선수권대회가 열리는데 그런 국제행사를 통해 변화하려 합니다.”
대구의 보수적 이미지 구축에 《매일신문》이 일조하고 있다는 평가도 나온다. 《매일신문》의 소유주는 대구대교구다. 조 대주교는 2004년 12월부터 2007년 4월까지 이 신문의 사장을 맡았었다.
“《매일신문》만이 아니라 대구·경북 지역 언론들이 전반적으로 보수적 색채를 띱니다. 자유당 시절에는 《매일신문》이 정통 야당지였어요. 재야 기질의 논조를 지키다 필화사건을 겪기도 했지요. 1955년 9월 14일 ‘대구 매일신문 테러사건’으로 불리는 ‘백주 테러’를 당했고, 당시 주필 최석채(崔錫采) 선생이 국가보안법 위반혐의로 피소당한 일이 있잖아요.
지방신문은 지방을 대변할 수밖에 없어요. 지방의 성향이랄까, 그런 색깔을 드러내게 돼 있지요. 지방언론이기에 지역발전에 걸림돌이 되는 사안을 비판하는 것은 당연하고, 대변할 것은 대변하는데, 그게 보수적 색깔을 띠게 만들었는지 모릅니다.”
조 대주교는 《매일신문》 사장 시절, 한국신문협회 부회장을 역임했고 현재는 한국천주교 주교회의 매스컴위원장을 맡고 있다.
―언론에 비친 천주교의 모습에 만족하나요.
“대체로요. 어떤 분야에 대해 잘 모르고 기사를 쓰거나 방송을 하는 경우가 종종 있어 이번에 216쪽 분량의 《미디어 종사자를 위한 천주교 용어 자료집》을 만들어 언론에 배포했어요. 한국천주교에 대한 언론의 시각이 나쁘다 좋다고 평가할 정도는 아니지만, 종교는 원래 예민한 문제가 많잖아요. 가톨릭을 바르게 알릴 필요는 있다고 생각합니다.”
주교회의 4대강 성명은 ‘깊은 우려와 유감’의 표현
교회의 원로 장상(長上)인 주교들이 4대강 사업에 ‘유감’을 표시하면서 사제, 신자 사이에서 고민이 깊어지고 있다. 4대강 사업에 반대하는 것이 ‘착한’ 신자의 도리인지, 4대강 사업에 찬성하면 고해소에 들러 사제에게 죄 고백을 해야 하는지, 왜 교회가 신앙의 이름을 빌려 ‘정치문제’에 관여하는지 답답해하는 신자들이 적지않다.
급기야 지난해 12월 8일 정진석(鄭鎭奭) 추기경이 “주교단에서는 4대강 사업이 자연파괴와 난개발의 위험이 보인다고 했지, 반대한다는 소리를 한 것은 아니다”고 말하면서 파장이 더욱 커지고 있다. 정의구현사제단이 추기경에게 “궤변”이라고 몰아세우는 상황으로 치달았다. 조 대주교 역시 조심스러워했다.
“4대강은 정치적이면서도 환경적 경제적 사회적 문제로 결부돼 버렸습니다. 단순한 4대강이 아닙니다. 굉장히 복잡한, 저 역시 조심스러운데, 다들 너무 예민하게 반응하는 것 같아요. 신앙하고 직접적인 관련이 있는 것은 아니거든요. 물론 간접적으론 환경이나 동식물이나, 하느님의 창조질서에 맞게 이뤄져야 한다는 것은 마땅한 일입니다. 4대강 문제도 주교회의에서 담화문을 낼 때, 정말 제대로 된 조사와 의견수렴 과정을 거치면 좋았을 텐데, 그렇게 못하고 밀어붙이는 데 대한 어떤 불만스러움, 우려하는 분위기가 굉장히 짙었죠.”
“예민한 문제를 자꾸 어르신한테 말하니까…”
천주교 주교회의는 지난해 3월 12일 4대강 사업 ‘유감’을 공식 표명했다. 성명서에는 ‘현재 우리나라 곳곳에서 동시다발적으로 진행되고 있는 4대강 사업이 이 나라 전역의 자연환경에 치명적인 손상을 입힐 것으로 심각하게 우려하고 있습니다’는 내용이 담겼다. 조 대주교의 계속된 설명이다.
“전반적인 내용은 제가 보기에는 ‘우려한다’는 쪽인데, 반대 논조처럼 보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판단하는 것은 (주교님들) 각자의 몫이라고 봐요. 추기경님도 나름대로 당신의 개인적 생각을 충분히 말씀하실 수 있다고 봐요. 또 거기에 대해, 예민하게 반응하는 것도 그렇고, 추기경께서 ‘그런(4대강) 문제를 전문가 판단에 맡겨야 되지 않나, 나중에 잘되고 못되고는 심판받을 것’이라 말씀하셨는데, 충분히 가능한 말씀이라 봅니다. 그런데 그런 예민한 문제를 자꾸 어르신한테 말하니까…, (우리가) 피상적인 문제조차 다 알 수 없는데, 정치적 경제적 환경적 문제를 다 알 수 없는데… 저도 이렇다 저렇다 콕 찍어 얘기하기 어렵습니다. 그러나 정부가 큰 프로젝트를 실행하는데 미숙한 과정이 많았었습니다. 뒤늦게 설명하러 다니고 여론을 무마하려고 애썼지만, 많이 서툴렀다는 생각을 갖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런 일 때문에 교회가 분열돼선 안 됩니다.”
―당시 주교회의 결정이 ‘반대’였느냐, 아니면 ‘우려’ 수준이었느냐를 두고 여러 얘기가 오갑니다. 분위기는 어떠했나요.
“분위기는 전부 다 우려하고 걱정하는 것이죠. 그래서, 그때, 찬반토론을 들었죠. 4대강 사업본부장이 오셔서 찬성 입장을 말하고, 서울대 환경대학원 교수의 반대 논조도 들었습니다. 물론 4대강 문제만을 논하려고 주교회의를 연 것이 아니었기에 다른 의제들을 모두 다룬 뒤 마지막 날, 4대강과 관련한 담화를 발표하는 것으로 의견을 모았지요.”
―투표를 했다고 하던데요.
“그렇죠. (담화문을 발표)‘하자’, ‘말자’는 것을 투표했어요. 뭔가 (주교들의 의사를) 표시하자는 쪽이 우세했어요. 그래서 하게 됐어요. 주교회의도 어떤 예민한 문제에 대해선 투표를 합니다. 각자 생각이 다를 수 있기에 하자, 말자는 것을 투표했고, 주교회의 의장(강우일 주교)이 책임자였으니 그분께서 문안을 만들어 발표했지요. 그게 다입니다.”
고교 1학년 때 司祭의 길 결심
조환길 대주교는 1954년 대구 달성군에서 조순조(2000년 작고)·나일남(94)씨의 5남3녀 중 넷째 아들로 태어났다. 3대가 천주교를 믿는 집안이었다. 조 대주교의 아버지는 달성군 강림면에 위치한 ‘강림공소’에서 40년 넘게 공소회장으로 봉직한 신앙인이었다. 공소(公所)란 본당보다 작은 교회단위로, 신부가 상주하지 않는 벽촌(僻村)의 신자들이 모여 기도하는 공간을 말한다.
“외할아버지가 우리 마을에서 처음으로 신앙생활을 하셨다고 해요. 타지에서 오신 서당 훈장님이 외할아버지에게 신앙을 전했다고 합니다. 결혼 전 아버지는 외할아버지의 방앗간에서 일하면서 자연스레 신앙을 갖게 됐다고 해요. 그렇게 해서 3대째 신앙이 이어진 셈이지요.”
《가톨릭신문》 보도에 따르면, 조 대주교 가족들은 아무리 농사일이 바쁘고 힘들어도 매일 1시간 넘게 저녁기도를 함께 했다. 그는 어릴 적부터 농사일을 하던 부친을 성실하게 도왔으며 부모로부터 꾸지람 한 번 듣지 않았다고 한다. 주일마다 공소 앞자리에 쪼그리고 앉아 아버지의 강론에 귀를 기울였다.
“시골이라 신부님이 안 계셔서 신자끼리 모여 기도하고 예배를 드렸어요. 처음 외할아버지가 마을 공소회장을 맡으셨지요. 해방 후 호열자(虎列刺·콜레라)에 걸려 돌아가시자 아버지가 30대 때 공소회장을 이어받아 40년 동안을 줄곧 맡으셨어요. 나중에 논공성당(대구 달성군 논공읍에 위치)이 생기면서 강림공소는 사라졌어요.”
조 대주교가 성소의 꿈을 키운 것은 대구고 1학년 때 이태식 부제(副祭·사제품을 받기 전 성직자)의 《태시기가》를 읽고 나서다. 이 책은 29세 나이로 숨진 부제의 편지·수필·시를 한데 엮은 유고집이다.
“달성에서 초·중등학교를 나와 대구고에 진학했는데 1학년을 마칠 무렵, 우연히 《가톨릭시보》(현 《가톨릭신문》)에 《태시기가》라는 책소개 글을 읽었어요. 사제 서품을 앞둔 청년이 마산 앞바다에서 수영을 하다 죽자, 추모하기 위해 그가 남긴 글을 모은 것이었어요. 책 이름이 《태시기가》인 것은 그분이 항상 친구에게 보낸 편지 말미에 그렇게 썼기 때문입니다.”
지금은 절판돼 볼 수 없지만 이해타산(利害打算)과 감춤이 없는 젊은 사도(使徒)의 아름다운 영혼이 담긴 책이었다고 한다. 그의 계속된 말이다.
“읽어 보고 충격이랄까, 아니 이렇게 사는 사람도 있구나 하고 생각했습니다. 신학생이면서도 영혼이 개방적이었고, 재치와 유머로 가득한 글이 흥미로웠어요. 그렇게 사는 것도 괜찮겠다 싶었습니다. 사실, 공소에서는 신학생 만날 기회가 전혀 없었고 신부님도 1년에 2~3번밖에 못 봤습니다. 그 책을 읽은 뒤 소신학교(小神學校·중등 교육과정의 신학교)를 찾아갔어요. 전학을 가고 싶다고 했더니 소신학교 교장이신 박병원 신부님이 ‘고교를 마치고 대신학교(大神學校·대학과 대학원 과정의 신학교)에 들어가도 된다’고 하시더군요. 그래서 졸업하고 대신학교에 들어갔습니다.”
조 대주교는 1972년 대건신학대학(현 광주가톨릭대)에 진학, 1981년 3월 19일 사제 수품을 했다.
―어린 시절 꿈은 무엇이었나요.
“특별한 것은 없었어요. 선생님과 글을 쓰는 직업을 꿈꾸긴 했지만 딱 이것이라는 것은 없었어요.”
―사제가 된다고 했을 때, 부모님의 반대는 없었나요.
“조금 놀랐지만, 반대는 안 하셨지요. 일단 가고 나니 이제는 나올까봐 걱정이 돼서 열심히 기도하셨습니다. 신부가 된 뒤에도 계속 잘살기를 기도하는 것이 모든 부모 마음이죠.”
《가톨릭신문》에 따르면, 조 대주교의 형인 조창길(61)씨는 동생의 신학교 입학 후 온 가족이 기도에 매달렸다고 말했다. 7남매 형제들은 “좋은 신부가 되게 해 달라”고 기도했지만 어머니는 아주 특별한 기도를 올렸다. 학창 시절, 인물이 훤칠해 여자들이 쫓아다니진 않을까 하는 조바심에 “차라리 우리 신부 아들, 팍삭 늙었으면 좋겠다”고 기도했다는 것이다.
불완전한 사람들끼리 서로 용서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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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터뷰 도중 사색에 잠긴 조환길 대주교. |
“사람이 죄를 지으면, 죄 지은 상대방에게 용서받아야 합니다. 그런데 사람에게 죄 지은 게 아니라, 하느님께 죄를 지었으면 어떻게 용서받을까요? 우리 속담에 ‘하늘에 죄를 지으면 빌 곳이 없다’고 하는데, 실은 모든 죄가 다 하늘에 지은 죄입니다.
그러나 죄의 굴레를 벗는 방법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가르쳐주신 ‘주님의 기도’에 보면, ‘저희에게 잘못한 이를 저희가 용서하오니 저희 죄를 용서하시고…’라는 구절이 나옵니다. 하느님에게 용서받으려면 사람들끼리 서로 용서하라는 가르침입니다. 사람이 자기 혼자서 완전하게 되어 절대로 죄를 짓지 않고 사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하지만 불완전한 사람들끼리 서로 받아들여 주고 용서해 줄 수는 있습니다. 우리가 그렇게 하면, 하느님께서도 우리 죄를 묻지 않으시겠다는 거지요.”
―현대 문명사회에서 물질적 성공이 모든 가치 가운데 최고의 가치가 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물질세계와 정신세계는 서로 대립할 수밖에 없는 건가요. 정신이 부자가 된다는 것은 어떤 의미입니까.
“재물은 나쁜 것이 아닙니다. 쓸모가 있으니까 좋은 것이죠. 좋은 것도 어떻게 쓰느냐에 따라 올바른 결과를 가져오기도 하고 나쁜 결과를 가져오기도 합니다. 원자력은 사람이 발견한 자연의 이치인데, 이것으로 암도 고치고 에너지를 생산하니 얼마나 좋습니까? 하지만 그걸로 무기를 만들어 많은 사람을 해칠 수도 있습니다. 재물을 얼마나 많이 소유하느냐보다, 그걸 어떻게 쓰느냐가 결정적으로 중요한 겁니다. 그리고 그 결정을 내리는 기준은 정신적인 가치고요. 그러니까 물질적인 가치와 정신적인 가치는 서로 배척하거나 대립하는 게 아니고 서로 도우면서 같이 가야 하는 것입니다. 다만, 정신이 물질을 이끌어야지 그 반대가 되면 곤란합니다. 물질이 정신을 압도하고 좌지우지하는 상황을 만들지 말아야겠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