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영화감독을 만나다

이장호

한국영화계의 ‘서태지’

  • 글 : 임도경 한국영상자료원 부원장  
  • 사진 : 서경리 월간조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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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바람 불어 좋은 날>이 장선우, 김동원 감독을 영화계로 이끌어
⊙ 아마추어들이 모여 성공시킨 영화 <별들의 고향>
⊙ “나는 현장적응력, 순발력에 의존하는 즉흥연출가”

임도경
⊙ 이화여대 신문방송학과 졸업. 同 대학원 언론학석사, 경희대 언론학박사.
⊙ 중앙일보 뉴스위크 한국판 편집장, 現 경희대 언론정보학부 객원교수, 한국영상자료원 부원장.
영화는 그 시대의 아픔을 그대로 배태하고 만들어진다. 영상기록이라는 특성과 함께 영화가 만들어진 그 시점의 규제가 작품을 한정시키기 때문이다. 한국영화의 암흑기이기도 한 1970~80년대에는 감독마다 엄혹한 군사정권시대의 각종 검열을 돌파해 온 나름의 비법이 있었다. 가장 쉬운 방법은 로맨스였고, 가끔 가족영화 혹은 계몽영화로 정권의 심기를 달래야 했다.
 
  이런 시절, 이장호 감독은 현실과 영화의 간극을 좁히는 작품들로 정권에 순치돼 온 충무로의 오랜 전통을 두들겨 깨운 기린아였다. 처음에는 청춘물 시대를 열었고, 또 시대의 아픔을 담아내는 리얼리즘 영화의 단초를 제공하기도 했다. 한때는 정치적 메시지가 담긴 강렬한 섹스물로 극장을 달구기도 했다. 올해로 65세가 되는 그의 이름에서 아직도 풋풋한 청년의 이미지가 묻어나는 것은 그의 영화들이 갖고 있는 강렬한 신화적 상징성 덕분이 아닐까 한다.
 
  이 감독은 사부인 신상옥 감독 밑에서 벗어나며 만든 <별들의 고향>(1974)으로 흥행감독이 된 이후 가장 마지막 작품인 <천재선언>(1995)까지 22년간 겨우 19편이라는 과작(寡作)을 남겼다. 그의 저명도에 비해 편수는 적지만 이 작품들 중 절반 정도가 문제작 혹은 흥행작으로 꼽히는 저력을 보여줬다. 그는 “내 영화에는 일관된 스타일이 없기 때문에 나 역시 스타일리스트가 아니다”라고 말하지만, 그의 영화들은 장르와 무관하게 하나같이 즉흥적이며 강렬한 ‘이장호 스타일’로 만들어졌다는 공통점이 있다.
 
  한국가요계가 1990년대 초 ‘난 알아요’라는 곡을 들고 나온 가수 서태지로 인해 패러다임이 전환되듯, 특히 이 감독의 리얼리즘계 작품인 <바람 불어 좋은 날>(1980), <어둠의 자식들>(1981), <바보선언>(1983), <나그네는 길에서도 쉬지 않는다>(1987) 등의 문제작들은 한국영화계에 강렬한 자극제로 작용했다. 어떤 형식으로든 영화에 정치적 메시지를 담아낼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젊은 영화인들은 열광했다. 그는 이런 영화를 만들 당시 충무로에서 거의 유일하게 젊은 영화감독 지망생들의 열렬한 지지를 받는 상업영화 감독이었다.
 
  특히 <바람 불어 좋은 날>이 주는 충격은 대단했다. 재야운동권의 장선우가 이 영화를 보고 감독이 되겠다며 찾아왔다. 다큐멘터리 <송환>의 김동원 감독도 이 영화의 영향으로 이 감독의 연출부가 됐다. 강우석 감독 역시 이 영화를 보고 영화감독이 되겠다는 결심을 굳혔다. <정글스토리>의 감독 김홍준은 매일 이 영화를 봤고, 서울대 영화동아리 ‘얄라셩’의 동료였던 박광수 감독을 소개했다. 이 감독은 그들 동아리에서 8mm 영화를 보고 후에 그 느낌을 그대로 옮긴 <바보선언>을 만들었다.
 
  하지만 대중에게 이 감독은 <무릎과 무릎 사이>(1984), <어우동>(1985)을 만든 섹스물 감독으로 더 강하게 각인돼 있다. 이 상이한 이미지가 만들어지기까지 그의 내부에는 어떤 변화들이 일어났던 것일까. 그의 인생사이기도 한 영화역사를 들여다보자.
 

 
  제1기 <별들의 고향>에서 대마초 사건까지, 청춘물 시대
 
  1945년생 해방둥이인 이 감독은 명동에 건물을 소유할 정도로 부유했던 할아버지 덕에 유복한 유년을 보냈다. 사립인 덕수초등학교에 다녔으며, 서울고를 졸업하고 홍대 건축미술학과에 입학했다. 대학 입학 이후 공부에 관심은 멀어지고 술집에서 보내는 날이 더 많아지자 영화일을 했던 아버지의 손에 이끌려 신상옥 감독 앞으로 가게 됐다. 당시 신 감독은 ‘신필름’이라는 대형 영화사를 이끌고 있는 한국영화계의 실력자였다.
 
  그는 바로 공부를 중단한 채 신필름에 입사했다. 갓 스무 살 시절 이야기이다. 이후 신필름의 전속 감독이었던 나봉한(배우 나운규씨의 아들) 감독 밑으로 들어가 <청산별곡> 등 세 편의 연출부 생활을 마친 뒤, 김수동 감독 밑으로 옮겨 <죽어도 한이 없다>(당시 조감독 이두용)에 참가했다. 이 작품이 끝나기도 전에 신상옥 감독의 연출부로 자리를 옮겨 <무숙자>, <내시> 등의 촬영에 합류했다.
 
  한때 배우의 꿈도 가졌던 그는 1971년 잠시 신필름을 나와서 ‘민족극단’에 입단해 무세중, 박정규씨 등과 함께 무대에 섰다. 이 극단은 그 다음해에 해체됐다. 1972년 결혼 후 신필름에 재입사한 그는 1973년 홍콩합작영화 제작팀에 합류해 1년을 홍콩에서 보내게 됐다. 합작일이 지지부진하자 그 시간을 틈타 열심히 세계적 수준의 영화를 직접 보면서 눈이 뜨이는 경험을 하게 됐다. 말이 연출부지 그간 그는 조수로 막노동만 맡아오던 처지였기 때문에 이런 기회는 연출적 감성을 키울 수 있는 절호의 찬스였던 셈이다.
 
  이즈음 국내 한 신문에서는 그의 친구였던 신예작가 최인호씨가 연재소설 <별들의 고향>으로 공전의 인기를 끌고 있었다. 이 감독의 아버지는 아들에게 이 소설을 스크랩해 보냈다. 이 감독과 최인호씨는 초등학교 시절부터 가깝게 지낸 죽마고우였다. 그는 최인호가 쓴 습작 <별들의 고향>을 대학노트로 이미 봤던 터였다.
 
  신문연재가 끝나고 단행본이 출간될 무렵 귀국한 그는 최인호씨를 졸라 영화판권을 따냈다. 친구라지만 겨우 제2연출부(조감독이 되려면 제1연출부로 올라서야 한다)에 머물고 있던 이 감독에게 영화의 판권을 내주는 일은 쉽지 않은 결정이었을 것이다. 집에서 버티고 있는 이 감독에게 최인호씨는 “야, 구워먹든 삶아먹든 네 맘대로 해”라고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판권을 넘겨줬다. 대가라고는 동생 이영호씨의 등록금을 빌려서 전해준 것이 다였다.
 
〈별들의 고향〉 포스터.
  <별들의 고향>은 경아라고 하는 청순한 처녀가 사회생활에 뛰어들어 첫사랑에 실패하고 다른 남자들을 거치다 결국 알코올 중독자로 전락해 자살하고 만다는 내용으로 살벌한 유신시대에 대중의 순정에 대한 감성을 건드린 작품이었다. 아역배우 안인숙은 이 작품으로 스타덤에 올랐고, 함께 주연을 맡았던 신성일의 대사 “경아, 오랜만에 누워보는군”은 아직도 유행어로 떠돌 만큼 대단한 위력을 발휘했다.
 
  이 감독이 <별들의 고향> 판권을 쥐고 있다는 소문이 충무로에 돌자 신필름에서 입지가 곤란해졌다. 겨우 제2연출부였던 그에게 영화를 맡길 수 없었던 신 감독은 선배인 이형표 감독에게 촬영을 맡기라는 말로 그를 설득했지만 그는 그 길로 신필름을 떠나버렸다. 신 감독은 이런 그를 보고 “키워놓으니까 도망쳤다”고 섭섭함을 토로했다고 한다.
 
  <별들의 고향>이 제작될 당시 한국영화계는 최악의 불황이었다. 상당수의 영화가 필름을 아끼기 위해 반씩 잘라 촬영하는 변칙 시네마스코프로 제작됐다. 영화계에서는 이를 ‘하프 사이즈’로 촬영한다고 했다. 이렇게 해서 대부분 한 편에 9000자~만 자 정도를 사용했다. 매우 특별한 대우를 받는 감독이 쓰는 필름 양이 3만 자였다.
 
  겨우 스물아홉에 제2연출부 출신이었던 이 감독이 <별들의 고향>을 제작하기로 한 화천공사에 내건 조건은 ‘코닥 필름 3만 자’였다. 당시 후지보다 코닥을 고급으로 쳤기 때문이다. 대신 개런티는 감독협회가 정한 최저선인 40만원을 받겠다고 했다. 동생에게 빌린 등록금 15만원을 이 돈에서 갚고 조연출에게 25만원을 주고 나니 남는 게 없었다.
 
  감독으로 메가폰은 잡았지만 조감독 한 번 변변하게 해본 일이 없는 그에겐 별다른 촬영계획이 없었다. 자신의 즉흥적인 감각에 의존하면서 그는 신상옥 감독이 없는 상태에서 진행을 하는 조감독처럼 일했다. 콘티도 없이 일본의 월간 <아사히 카메라>라는 잡지에 나온 근사한 장면들을 스크랩해다가 촬영기사 장석준에게 보여주고 이렇게 찍어달라고 주문하는 주먹구구식으로 영화를 만들었다. 신필름에서 만난 서울고·홍익대 선배인 장 기사는 이런 황당한 요구를 대부분 수용해 주는 구세주였다. 그는 한마디로 이렇게 마구 찍은 필름을 편집실로 가져 들어와 짜맞추는 식의 편집을 하는 아마추어 감독이었다. 이 영화에 플래시백(회상장면)이 많은 것도 이 때문이다.
 
  영화음악 역시 관행을 무시한 데서 대작이 나왔다. 고교 후배인 이장희를 불러 음악을 맡겼다. 당시 관행은 직업적으로 노련한 음악가들이 영화음악을 도맡던 시절이었다. 비용을 줄이기 위해 딱 두 시간 스튜디오를 빌려서 일사천리로 녹음하고 끝내는 식이었다. 이장희는 그 당시 마이크 올드필드가 영화 <엑소시스트> 음악을 신시사이저로 혼자 수없이 더빙을 해 혁신적인 음악을 내놓던 방식을 따랐다.
 
  영화편곡을 해본 일이 없던 이장희는 기타리스트 강동식과 함께 친구가 사장으로 있는 신세계 레코드 스튜디오에서 40일 동안 숙식을 하면서 영화음악을 만들었다. 당시 영화음악은 영상과 소리가 딱 떨어지게 편집하는 것이 상례였지만 영상을 보고 음악을 만드는 게 아니라서 이미 만들어놓은 음악을 적절한 데 끼워넣는 식으로 편집이 시도됐다. 그래서 이 감독은 감정이 살아 있으면 장면이 바뀌어도 음악을 그대로 흐르게 했다. ‘나 그대에게 모두 드리리’라는 히트곡과 함께 영화음악계에 새 지평을 연 이장희의 음악작업 역시 이렇게 무계획적으로 진행됐다.
 
  이 감독이 이렇게 만든 영화는 관객 5만명이면 히트라던 시절에 40만명 이상을 동원하는 대기록을 수립했다. 그는 이를 두고 “아마추어리즘의 승리”라고 말하지만, 관행을 뒤집어버리는 그의 배짱과 감각으로 도전하지 않았다면 만들어낼 수 없었다는 점에서 <별들의 고향>은 한국 청년문화의 감수성을 영화로 옮겨놓은 시금석과 같은 작품으로 인정된다. 이 영화는 하길종 감독의 <바보들의 행진>(1975)과 더불어 1970년대를 상징하는 중요한 작품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이후 그는 <어제 내린 비>(1974), <너 또한 별이 되어>(1975), <그래 그래 오늘은 안녕>(1976)과 같은 후속작들을 이어 만들어냈다. 이 작품들은 <별들의 고향>으로 조성된 청춘영화의 붐을 이끌어가는 데 견인차 역할을 했다. 매번 히트곡을 내놓는 영화음악 역시 ‘이장호식 영화’에 큰 힘을 불어넣어 줬다.
 
  하지만 30대 초에 청년문화의 상징이 된 그를 유신정권은 가만히 놔두지 않았다. 그는 신중현, 이장희와 함께 대마초 파동을 겪으며 현장을 떠나야 했다. 1976년부터 4년 동안 그는 아무런 직업도 갖지 못한 채 집에서 뒹굴며 텔레비전을 보는 낭인 세월을 견뎌내야 했다.
 
 
  제2기 대마초 사건 이후 복권, <바람 불어 좋은 날>로 시작된 리얼리즘의 시대
 
  “내 철학 중 하나가 럭키 찬스는 불행한 얼굴로 온다는 거야. 대마초라는 불행한 얼굴로 와서 나를 의식화시킨 건데 난 그것도 하나님이 만든 죄라고 생각해. 자칫하면 한국영화계 주류의 속물로 흘러가다가 자연도태될 수도 있었는데 그때 의식에 변화를 가졌다는 게 얼마나 고마운 일이야.”(2006, 김영진, 한국영상자료원, <이장호 VS. 배창호> 중)
 
  큰 어려움을 모르고 살아왔던 그는 결혼해서 한 가정의 가장이 된 상황에서 대마초 감독으로 좌절을 겪어야 했다. 그는 실제 가난한 생활을 해보면서 주변사람들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됐다. 소위 반체제 인사들과 교분을 쌓으면서 의식화돼 갔다. 당시 그가 정독한 책이 염무웅의 평론집 〈민중시대의 문학〉이었다. 또 이 시기에 농촌생활을 시작한 작가 이문구씨와 송기원씨를 자주 만나면서 농촌생활의 실상을 직접 보기도 했다. 그는 이렇게 자신이 모르던 세계와도 만났다. 1960년대와 1970년대 한국영화를 통해서는 도저히 알 수 없었던 현실을 직면한 것이다.
 
  1979년 10·26사건 직후인 12월, 4년 만에 대마초 규제가 풀리면서 이 감독은 동아수출공사와 계약을 맺고 제작에 들어갔다. 이 좌절기는 재기작 <바람 불어 좋은 날>(1980)로 보상을 받게 된다. 이 작품에서 그간 그와 어려움을 같이하던 배창호 감독이 첫 조감독을 맡았다.
 
  이 영화에 필요한 세부묘사의 아이디어를 얻기 위해 그는 서울역과 남대문시장 주변 인력시장을 돌아다녔다. 영화의 주인공이 전부 농촌에서 무작정 상경한 젊은이들이었기 때문이다. 작가 송기원씨가 각색한 작품은 완성도가 높았다. <별들의 고향>의 성공 이후 늘 즉흥적인 연출로 일관했던 그는 콘티를 짜고 촬영에 임할 만큼 진지해져 있었다.
 
〈바람 불어 좋은 날〉.
  <바람 불어 좋은 날>은 당시 대학가를 중심으로 불어닥친 민중영화의 개념에 영감을 제공한 작품이다. 그는 어떤 운동권 작품보다 더 직설적으로 ‘민중’의 삶을 그 특유의 박력 있는 거친 호흡으로 담아냈다. 다른 한국영화와는 달리 시골에서 상경한 자장면 배달부 덕배(안성기 분)와 이발사 춘식(이 감독의 동생 이영호 분), 여관 종업원 길남(고 김성찬 분) 등이 이 영화의 주인공이었다.
 
  이 영화가 완성돼 갈 무렵 전두환 정권이 들어섰다. 당장 검열이 문제였다. 심의위원 중 작가 박완서씨가 무던히 애를 썼지만 몇 장면은 끝내 통과되지 못했다. 여관 종업원 길남이 술 취해서 부르는 노래가 문제였다. “영자를 부를거나 순자를 부를거나, 영자도 좋고 순자도 좋다. 땡까랭 땡, 땡까랭 땡.” 이 감독은 문제가 된 ‘순자’를 사운드트랙에서 ‘스운자’로 늘리고 ‘스’자를 드러내는 기지를 발휘해 넘겼다.
 
  이런 신고식을 치르고 개봉관에 걸린 <바람 불어 좋은 날>은 반응이 좋았다. 앞서 이야기한 대로 의식 있는 젊은 영화인들 사이에 그의 존재를 깊이 각인시켰다. 그는 한국영화계의 화두를 만들어내는 감독이었다.
 
  이후 그는 <어둠의 자식들>(1981), <그들은 태양을 쏘았다>(1981), <낮은 데로 임하소서>(1982), <바보선언> (1983), <과부춤>(1983) 등을 연이어 발표했다. 이 작품 속에는 현실적 타락과 구원이라는 기독교적 화두가 중심을 잡고 있었다.
 
  <어둠의 자식들>을 만들 때 그는 온전히 작품에 집중을 할 수 없었다. 그는 이 시기를 가장 힘들게 영화를 만들었던 시절로 기억하고 있다. 당시 허가제로 운영되던 한국의 영화제작사들은 1년에 의무적으로 한국영화를 4편 이상 제작해야 했다. 대마초 사건으로 활동정지를 당하기 전 맺었던 동아흥행과의 계약 때문에 <그들은 태양을 쏘았다> (1981)를 동시에 촬영해야 했기 때문이다. 그는 구로공단 강도 사건을 다룬 <그들은 태양을 쏘았다>는 조감독에게 거의 일임하다시피 했다. 연출부를 나눠서 <어둠의 자식들>은 배창호와 신승수가 조감독을 맡고 <그들은 태양을 쏘았다>는 선우완, 장영일 조감독과 시나리오를 쓴 장선우가 현장을 지휘했다. 그는 마무리작업 때 한 작품만 건지기로 결심하고 <그들은 태양을 쏘았다>를 사실상 포기했고 이 작품은 극장에서 외면당했다.
 
〈어둠의 자식들〉.
  이런 여건에서 만들어진 <어둠의 자식들> 역시 결함이 적지 않게 발견됐지만 흥행에는 성공했고, 신인 나영희를 발굴하는 성과를 얻었다.
 
  <낮은 데로 임하소서>는 허병섭 목사의 전도로 달동네 교회를 다니고 있던 이 감독의 신앙체험을 담은 영화이다. 시각장애인인 인요한 목사의 이야기를 다룬 이청준의 실명소설을 스크린에 옮긴 것으로 그의 동생 이영호가 주인공을 맡았다. 이영호는 그때 실제로 눈이 나빠져 실명상태에 빠져들고 있었다. 이영호는 현실적인 연기로 그해 대종상 신인상을 받았다.
 
  야심 차게 리얼리즘 작품으로 1980년대를 시작한 이 감독은 <과부춤>까지 실패하자 슬슬 흥행에 대한 압박에 고심하기 시작했다. 리얼리즘을 추구하면서도 그 자신 속에는 신상옥 감독만 한 흥행사가 되고 싶은 욕구도 만만치 않게 자리 잡고 있었다. 그는 현진영화사의 김원두 사장과 손을 잡고 <어우동>을 제작하려고 했다. ‘어우동’은 조선조 양반가의 규수였으나 숱한 남자들을 농락한 희대의 스캔들 메이커이다.
 
  여러 차례 카메라 테스트를 하면서 신인을 발굴하던 중 여배우 김보연의 소개로 탤런트 조진원(이보희)을 만나게 되었다. 조진원은 이후 이 감독의 성을 따 이보희로 이름을 바꾼 뒤 이장호 사단의 핵심적인 여배우로 성장한다.
 
  <어우동> 촬영은 순조롭게 진행되지 않았다. 영화사에서는 항일무장전투를 소재로 한 <일송정 푸른 솔은> (1983)을 먼저 제작하자는 제의를 해왔다. 대작 연출에 관심이 많았던 그는 이 제안에 솔깃했다. 하지만 2000명의 현역 장병을 엑스트라로 동원하는 영화는 상투적인 영웅담을 벗어나지 못했다. 전투신을 제대로 찍기 위해 임권택 감독과 정일성 촬영감독에게 도움을 요청했지만 상황은 어쩔 수 없는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그는 이 작품으로 대작은 감독 혼자 만드는 것이 아니라 시스템으로 만들어내는 것이라는 사실을 절감하게 된다.
 
  대작 연출에 혼이 난 이 감독은 차기작으로 <어둠의 자식들2>를 만들 생각이었지만 뜻대로 되질 않았다. 시나리오 사전심의에서 계속 반려되었기 때문이다. 이 감독과 선계약을 맺은 영화사에서는 줄기차게 차기작을 요구해 왔다. 압박에 시달리던 그는 작품성을 철저하게 포기하고 이동철의 소설에 등장하는 가짜 여대생으로 행세하는 창녀를 여주인공으로 등장시킨 졸작 대본에 <바보선언>이라는 타이틀을 달아서 심의를 요청했고, 통과됐다. 대화는 고작 20마디 정도. 한마디로, 되는 대로 찍은 영화였다. 상식과 정반대로 가는 반역과 저항이 이 영화를 찍는 그의 에너지였다.
 
  하지만 영화의 중반을 넘어서면서 상황이 달라졌다. 편집을 하던 김희수씨는 “어쩌면 이 영화가 무서운 영화가 될지도 모르겠다”고 했다. 이 감독은 용기를 내 영화를 마무리했고 이전에도 없었고, 이후에도 다시 볼 수 없는 이장호만의 독특한 개성이 드러나는 영화로 완성됐다. <바보선언>은 영화가 다 만들어진 이후 일 년간 개봉도 하지 못하고 있다가 단성사에서 외화를 일찍 내리면서 일주일 시한부 상영을 조건으로 걸었다가 한 달 이상을 롱런하며 흥행에 성공하는 이변을 일으켰다.
 
  <바보선언>은 개봉도 하지 못하던 시기에 만든 후속작 <과부춤>(1983) 역시 흥행에 실패하자 충무로에는 이 감독을 둘러싸고 “걔 쓰지 마 다쳐”라는 말이 돌면서 그는 슬슬 기피인물이 돼갔다. 그는 자신의 집 등기부등본을 친구에게 맡기고 돈을 빌려서 ‘이장호 워크숍’이라는 영화사무실을 냈다. 무엇이든 일단 벌이고 나서 수습하는 이 감독의 작업 스타일에 따라 그즈음 그는 ‘이장호 사단’이라는 대식구를 거느린 중견감독이 돼 있었다. 그는 사단을 관리하기 위해 16mm 문화영화로 돈을 벌어야 하는 처지였다. 리얼리즘계의 마지막 작품인 <과부춤>을 끝낸 그는 아이러니하게도 <잘살아보세>라는 새마을 영화를 만들고 있었다. 그때 배창호 감독은 <그해 겨울은 따뜻했네>라는 대작을 만들고 있었는데, 이 두 촬영팀은 횡계의 한 오징어 불고기 식당에서 운명처럼 맞닥뜨리게 된다. 그가 다시 한 번 재기의 의지를 다졌을 법한 모멘텀이었다.
 
 
  제3기 <무릎과 무릎 사이>로 시작된 흥행사 시절, 그리고 좌절
 
  <과부춤> 이후 경제적 어려움에 시달리던 이 감독은 여러 가지 책을 탐독했다. 이 속에서 신체언어에 관한 책을 만나게 된다. 그는 ‘무릎’을 통해 깨끗한 이미지의 성충동을 느꼈다. 그리고 직감적으로 이것이 그의 영화인생에 새로운 전기를 마련해 줄 것으로 믿었다. ‘무릎과 무릎 사이’라는 제목을 찾아낸 것이다. 그는 조감독 신승수와 함께 시나리오 작업을 빠른 속도로 마무리했다.
 
  이 영화는 어린 시절 미국인 음악교사에게 성폭력을 당한 상처와 어머니의 완고한 교육 때문에 자신의 욕망을 억압하는 여대생 자영(이보희 분)이 성적 자각에 눈을 뜨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이 영화는 가해자로서 미국인 음악교사를 등장시켜 적당히 반미정서를 담으면서 노출 수위가 검열을 통과할지 의문이 들 정도로 강렬한 절충적 모양새를 취하고 있었다. 그는 공공연히 “내 영화의 겉포장은 섹스, 내용물은 정치”라고 말했다.
 
  영화제작은 태흥영화사가 맡았다. 당시 이태원 사장은 임권택 감독의 <비구니>가 불교계의 반대로 무산된 뒤라 이 영화를 통해 새로운 꿈을 꿨다. 이익은 50 대 50. 그로서는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그즈음 그는 가수 전영록의 추천으로 이현세의 베스트셀러 만화 <공포의 외인구단> 판권도 샀다. 이현세씨는 원작료 액수를 문제 삼지 않고 영화화에 동의했다.
 
〈무릎과 무릎 사이〉.
  <무릎과 무릎 사이>(1984)는 대단한 흥행을 이뤄냈다. 태흥영화사 이태원 사장은 또 하나의 에로물을 원했다. 현진영화사에서 불발된 <어우동>(1985)은 그렇게 다시 시작됐다. 이 작품은 그가 만든 영화 중 최대 관객 동원 기록을 세우며 그의 명성과 권력을 한껏 높여주었다. 그는 더 이상 불우한 사회참여 감독이 아니었다. 하지만 그는 <어우동>을 단순 에로물로 보는 시각에 대해서는 불만이 많다. 복식사에 근거해 천연염료의 느낌을 주는 색채로 주연배우는 물론 엑스트라 옷까지 새로 제작한 덕에 영상감이 뛰어난 이 영화는 사극 미술의 새 지평을 연 계기도 됐다. 또 조선조 여성이 섹스로 왕을 희롱한다는 내용은 대통령의 권위에 도전하는 것이라는 시각에서 몇 장면이 개봉 후 삭제되는 고초도 겪었다.
 
  1985년 영화법 개정으로 누구나 신고만 하면 자유롭게 영화를 만들 수 있게 되자 그는 ‘판영화사’를 설립했다. 24개의 영화사만이 제작을 할 수 있었던 독과점 시대가 끝난 것이다. <공포의 외인구단>은 태흥영화사에서 기획된 것이지만 이 사장은 흔쾌히 이 작품을 판영화사에 넘겼다. <공포의 외인구단>은 ‘공포’라는 말이 혐오감을 준다는 심의당국의 반려로 결국 <이장호의 외인구단>(1986)으로 개명돼 만들어졌다. 이 작품도 흥행에 성공했다. 하지만 이 감독 인생에 흥행과 관련된 영화로는 마지막이었다.
 
  즉흥적 판단과 순발력에 의존해 영화를 만들어온 이 감독은 판영화사를 제대로 활용하지 못했다. 그는 자신의 의견에 주위사람들이 순종하기만을 바랐다. 그는 자신의 연출작은 물론 판영화사를 통해 기획한 모든 작품에 만족스러운 흥행기록을 세우지 못했다. 그가 제작한 <깜동>(1988), <외인구단2>(1988), <숲 속의 방>(1991), <핸드백 속의 이야기>(1991) 등이 저조한 기록을 남긴 채 막을 내렸다.
 
  이 감독은 다시 고립되기 시작했다. 제작 자유화가 그에게 준 것은 횡재가 아니라 은행빚이었다. 이 시기에 이 감독은 <나그네는 길에서도 쉬지 않는다> (1987)는 걸작을 남겼다. 이상문학상을 탄 이제하의 단편소설을 영화화한 이 작품은 <바보선언> 이후 처음으로 이 감독이 흥행에 전혀 관심을 두지 않고 오로지 직감에 의해 만들어놓은 영화이다. 이제하씨는 자신이 작사·작곡한 노래를 무반주로 주연배우였던 김명곤씨에게 부르게 했는데, 눈이 펑펑 쏟아지는 강원도 일대를 배경으로 이 노래가 흘러나오는 신이 명장면으로 꼽힌다.
 
  이 감독은 이 영화를 만들면서 <와이 스토리>(1987)를 함께 찍었다. 흥행이 되는 영화와 작품성을 추구하는 영화를 분리해서 생각했고, 이 두 가지를 병행해 가는 것이 가능하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와이 스토리>는 프랑스 감독 막스 오퓔스의 고전 <미지의 여인으로부터 온 편지>를 한국영화로 만든 작품이다. 포스트모던 스타일로 만들려는 시도는 있었지만 별다른 특성이 없는 작품으로 흥행에 실패했다.
 
  하지만 로드 무비 <나그네는 길에서도 쉬지 않는다>는 평론가들 사이에서 ‘시대가 만들어낸 가장 예술적인 영화’로 꼽힌다. 이 감독의 마지막 흥행작은 <외인구단>이고, 마지막 걸작은 <나그네는 길에서도 쉬지 않는다>였다.
 
  이후 협찬사의 냄새가 나는 <미스 코뿔소 미스터 코란도>(1989)는 겉만 요란한 오락물이라는 혹평을 받았다. 또 재기작으로 김지미씨의 지미필름이 제작사로 나서 만든 <명자 아끼꼬 소냐> (1992)는 사할린 현지촬영까지 시도한 대작이었지만 이미 장년기를 넘어선 김지미씨가 젊은 시절까지 소화해 내기는 역부족이었다는 평을 들으며 흥행에 실패했다.
 
〈어우동〉.
  문민정부 시대를 통과하며 한국사회가 역동적으로 변화하고 있을 때 안동규 영화세상 대표는 좀처럼 후속작을 만들어내지 못하던 이 감독에게 <바보선언>의 속편 <천재선언>(1995)의 연출을 제안했다. 이 작품 역시 그의 즉흥적 감각에 의해 연출됐지만 역설적으로 그가 더 이상 ‘천재 이장호’가 아니라는 사실만 보여준 채 흥행에서 실패하며 막을 내렸다.
 
  그리고 그는 대학교수로 자리를 옮겼다. 물론 그가 자신의 영화를 더 이상 찍지 않았지만 영화계를 완전히 떠난 것은 아니었다. 제작자로서도 몇 편의 영화에 관여했다. <대한민국 헌법 제1조> (2003)와 같은 작품이 그의 기획으로 추진된 영화이다.
 
  영화연출 현장을 떠난 이후 이 감독은 부천 국제 판타스틱 영화제 초대집행위원장을 역임하는 등 나름 바쁜 일상을 보내왔다. 그는 한때 황석영 원작 <장길산> 판권을 사서 대작을 찍으려고 했지만 번번이 좌절했다. 독립운동가였던 김산의 생애를 다룬 님 웨일스의 <아리랑> 판권도 확보했지만 이것 역시 투자를 받는 데는 실패했다. 이 두 작품을 들고 다니며 그는 1990년 이후 한국영화계가 젊은 기획자들과 감독으로 급격하게 세대교체 되었다는 걸 실감했다.
 
  한국영화계의 서태지였던 이 감독은 이제 한국영화계의 후방에 서 있다. 그가 <별들의 고향>에서 보여주었던 터질 듯한 기운을 함께 공유하고 확장시켜 갈 수 있는 분위기를 갖췄다면 한국영화의 전통도 지금과는 다른 모습으로 바뀌지 않았을까. 그가 자신의 조감독 출신인 배창호 감독과 함께 1970~1980년대 한국영화의 패러다임을 전환시킨 공로는 한국영화의 역사가 길어질수록 더 가치 있게 평가받을 것이다.⊙
 

  이장호 감독 인터뷰
 
  “난 현장 적응력, 순발력에 의존하는 즉흥 연출가”
 
  이장호 감독의 필모그래피는 1995년에 개봉한 <천재선언>으로 중단돼 있다. 그 이후의 경력은 중부대학을 거쳐 전주대학 교수로 올해 정년퇴임을 한 학계의 경력, 그리고 부천 판타스틱영화제 집행위원장, 서울영상위원회 위원장 등 영화 관련 기관장의 경력으로 바뀌어 있다. 그런데 요즘 그가 다시 감독으로 돌아오기 위한 진통을 겪는 소식이 들린다. 그가 영화진흥위원회(이하 영진위)와 행정소송에 붙어 있기 때문이다. 지난 3월 24일 그의 작품 GEV(God's Eye View)가 영진위의 2010년 제작지원사업(예술영화, 마스터 영화, 3D영화 3개 부문) 중 마스터 영화 부문 작품으로 선정됐는데, 영진위 신임 집행위원회에서 이를 번복하고 나섰기 때문이다. 심사위원단의 결정대로라면 그는 이미 편당 6억~10억원을 지원하는 이 사업의 지원을 받아 15년 만에 20번째 영화를 찍고 있을 상황이었다.
 
  찬바람이 매섭던 12월 3일 저녁, 그의 사무실이자 신상옥 감독기념사업회이기도 한 서울 방배동의 ‘드림타워’에서 그와 마주했다.
 
  ―모처럼 감독으로 돌아오는 순간이었는데, 쉽게 해결되지 않는 것 같습니다.
 
  “그동안 학교에 있어 영화에 올인을 못 했어요. 집이 경매까지 들어가는 상황에서 월급받는 재미가 쏠쏠했거든요(웃음). 그러면서 15년이 지나갔어요. 올해 정년퇴임 후 하나님이 기뻐하는 영화를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해서 시나리오를 만들어 영진위 마스터 영화 부문에 지원을 했어요. 해외 영화제에서 상을 탄 감독들에 한해서 시나리오 심사를 해서 제작지원을 해주는 분야예요. 임권택 감독의 <달빛 길어올리기>도 이 분야의 지원을 받은 작품이지요. 심사 당시 전체 150편 중 최고점수를 받았다고 하더군요. 그런데 일부 심사과정에 조희문 위원장으로부터 압력이 있었다고 몇몇 심사위원이 반기를 든 사건이 생겼어요. 그 후 진흥위원들의 임기가 끝나면서 계속 결정을 못 짓고 끌더니 새로운 진흥위원이 와서 그동안 미뤄온 일을 정리하는데 엉뚱하게 내 것을 부결시켰어요. 무기명 투표를 했다는데, 부결 사유가 없더군요. 의심스러워 행정소송에 들어갔어요. 그런데도 위원회에서는 여전히 사유를 못 밝히네요. 공공기관의 운영에 관한 법률에는 무기명 투표를 하면 안 되게 되어 있어요. 이 사건을 겪으면서 오히려 이번 일은 탄탄하게 되는 모양이라고 생각하고 있어요. 지금까지 쉽게 되는 일은 쉽게 망해버리고, 돈이 나가고 어렵게 된 일은 값어치가 있었거든요.”
 
 
  “시간이 지나면서 살아남은 〈바보선언〉”
 
〈바보선언〉.
  ―그간 19편을 했는데, 가장 아끼는 작품은?
 
  “영화가 끝나면 내 작품이 싫었어요. 시간이 지나면서 살아남은 게 <바보선언>이에요. 당시 영화정책이 너무 엉망이라 영화계를 떠날 생각으로 상식과는 정반대로 만든 작품인데, 시간이 지나니까 이 영화가 제일 그래도 나은 것 같네요. 다른 사람이 만들어내지 못했던 영화이고, 또 다른 영화들은 시대풍속과 유행이 있어서 지나고 나면 다 촌스럽게 느껴지는데 이건 클래식으로 남아 있는 것 같아요.”
 
  ―작품마다 의도가 확실하게 보이는데, 선정기준은 무엇인가요?
 
  “나는 그때가 한국영화의 개척기라고 생각했어요. 아직 자본은 빈약하고 시장도 형편없고, 모든 것이 아주 척박한 환경이지만 조금씩 영화의 질이 나아지는 그런 때라고 생각했거든요. 그래서 내가 일종의 개척자로서 장르 시험을 많이 해야겠다고 생각했어요. 여러 장르의 영화를 많이 하려고 소재에 대한 시도를 많이 했지요.”
 
  ―1980년대 대마초 사건이 이 감독의 세계관에 영향을 많이 미쳤지요?
 
  “그 사건 전에는 아무 의식 없이 영화계에 뛰어들어 감독이 됐는데, 그런 상황에서 입지를 얻다 보니까 철부지 영화감독이 됐어요. 그 후 시련을 겪다 보니 아픈 만큼 성숙해지더군요. 그 시기에 이탈리아 리얼리즘 영화인 <자동차 도둑>, <길>을 보면서 감동을 받았어요. 한국 영화도 <마부>, <박 서방> 시절이 있었는데, 언제부터 그렇게 호화롭게 됐는지를 의식하기 시작했어요. 정권이 정책적으로 취약한 부분을 삭제하고 검열하니까 영화계 전체가 길들어 익숙한 거짓말 현실을 그리는데 약속을 하듯 흘러갔던 거예요. 그것을 어느 날 이어령 선생한테 얘기했더니 ‘네가 느낀 것이 바로 재래식 화장실에 오래 있는 사람은 냄새를 못 맡는 것과 같다. 넌 빠져나와서 냄새를 맡았다’고 하더군요. 그때부터 이걸 회복해야겠구나 하는 생각을 하다가 복권 후 작정하고 <바람 불어 좋은 날>을 만들었지요.”
 
  ―영화계에서 가장 좋은 인연은 누구라고 생각하나요?
 
  “영화와는 직접적인 상관이 없지만, 나한테는 내 영화 역사뿐만 아니라 인생 속에서 사후에 가장 획기적인 사건으로 기록될 신앙의 길로 들어선 것이에요. 1980년에 <바람 불어 좋은 날> 할 때, 명보극장 사장인 배우 신영균씨가 장로니까 할 수 없이 비위 맞추려고 교회에 들어갔어요. 거기에서 하영조 목사를 만나면서 지갑에 넣고 스크린 뒤에 붙였던 부적을 꺼내 태워버렸어요. 내가 다시 돈 버는 영화 만들면서는 교회를 떠났었지요. 술 마시고 섹스에 대한 얘기를 하면서 죄책감을 느끼다 보니 그렇게 되더군요. 그러다 망하기 시작하면서 다시 교회로 기어들어 갔어요. 그때부터 성경 공부하면서 변화가 오기 시작하더군요. 어느 날 성경 로마서를 읽는데 ‘어이쿠! 나는 지금까지 사망을 권하는 작품만 만들었구나. 영생을 구하는 작품을 못 만들었구나’하는 자각이 싹텄어요.”
 
 
  “나는 즉흥연출가”
 
  ―촬영하는 데 있어 가장 중시하는 요인들은 무엇인가요?
 
  “나는 현장적응력, 순발력에 의존하는 즉흥연출가예요. 신상옥 감독이 하듯이 현장연출이기 때문에 현장조건에 따라 화면의 성패가 나뉘어요. 그래서 ‘천수답’이라는 말을 잘 쓰지요(웃음). 하늘이 도와줘야 좋은 장면을 건진다고 생각해요. 그 순발력이 신 감독님으로부터 받은 위대한 정신적인 유산이에요. 당시 한국에서 영화를 만들려면 순발력, 현장적응력이 있어야만 버틸 수 있지 책상에 앉아 고집하면 다 실패하게 됐었어요. 그 적응력을 신상옥 감독님이 가지고 계셨고 그것을 어깨너머로 배웠어요.”
 
  ―영화 안에서 가장 중시하는 요인은요?
 
  “미세한 표현에서 사실적인 것을 찾으려고 애써요. 예를 들어 <바람 불어 좋은 날> 때 안성기가 변두리 개발지역에서 자장면 배달통을 들고 걸어오는데, 풀 속에서 메뚜기나 개구리를 덮치는 모습을 요구했어요. 시골청년의 순진함을 보여주는 데는 제격인 장면이라는 생각에서였지요. 그런 식으로 애드리브가 많은 스타일이에요.”
 
  ―가장 존경하는 감독은?
 
  “이탈리아 리얼리즘이 전부 나의 선생이에요. 빅토리아 제시카, 로베르토 로시니, 페데리코 펠리니 등을 비롯해 많은 이탈리아 감독이 있지요. 미국 감독 중에는 <올 댓 재즈>, <캬바레>를 만든 밥 포스의 세계를 참 좋아합니다. 한국 감독 중에서는 김기영, 신상옥, 유현목 감독을 좋아하고요. 이만희 감독이 저한테는 선생 중 한 분이에요. <난쟁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을 만든 이원세 감독, 또래로는 배창호가 나에게 영향을 줬고요. 장선우, 이명세도 좋았어요. 요즘은 봉준호가 좋아요. 봉준호 감독이 제일 퍼펙트하고 완성된 영화인 기질이 있다고 생각해요. 예술적인 면과 상업적인 면, 그리고 리얼리즘이 조화를 잘 이루고 있어요. 어떤 영화들은 ‘이 자식은 돈 벌려고만 영화 만드나’하는 생각도 들고 편협한 작품 세계를 가지고 있다는 생각이 드는데 봉준호는 그릇이 크고 조화가 잘돼 있어요.”
 
 
  “영화는 전도의 도구”
 
〈나그네는 길에서도 쉬지 않는다〉.
  ―이 감독의 인생에서 영화란 어떤 존재인가요?
 
  “과거에는 얘기 못 했지만 지금은 영화는 사람들에게 내 영화를 통해 나처럼 새로 거듭날 수 있는 그런 영향을 주고 싶은 도구입니다. 전도의 도구라고나 할까요. 만약 하나님이 자기와 영화 중 하나를 택하라면 과감히 영화를 버리겠어요.”
 
  ―한 시대를 같이 만들어간 배창호 감독은 저예산 영화로 돌아섰는데, 그 선택에 대해 어떻게 보시는지요?
 
  “자연스러운 것이라고 봅니다. 배창호 감독의 그런 선택이 다른 감독에게 용기를 주었을 겁니다. <워낭소리>, <똥파리> 같은 독립영화가 성공한 데는 그와 같은 거물이 그 시장에 뛰어들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이 아닌가 합니다.”
 
  ―이 감독의 영화에 대한 영화비평가들의 시각에 전반적으로 동의하는지요?
 
  “영화평론가가 보는 내 영화는 만든 사람과 다른 것 같아요. 내 영화는 평으로 많이 꾸며지거나 폄하되거나 둘 중 하나예요. 정확히 내 영화를 집어낸 사람은 없어요. 예를 들면 <어우동>, <무릎과 무릎 사이>에 대해서는 평 자체를 못 받았어요. 마치 에로물처럼 취급하더군요. <어둠의 자식들>은 당시 당황할 수도 있었지만 비평을 제대로 받지 못했어요. <바보선언>은 극과 극으로 나눠지고. 그 이전 나이 많은 사람들은 <바보선언>에 대해 당황했어요. 어떻게 이런 영화가 나오나 하면서 평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했어요.
 
  반면 과찬을 받은 것은 흥행은 안됐는데 <나그네는 길에서도 쉬지 않는다>예요. 난해했기 때문인지 영화평론가들이 높이 평가했어요. 하지만 이것조차 나의 생각과는 조금 달라요. 정말로 그걸 잘 맞추는 것은 이제하씨 소설처럼 ‘자동기술’된 작품이라는 점이에요. 나 역시 접신된 상태의 기분으로 영화를 만들었어요. 이상문학상을 탄 추상적인 작품을 나도 추상적으로 만들고 싶다는 생각을 했을 뿐이에요. 영화를 대담하게 전체를 황토색 모노크롬처럼 만들고, 거기에 내가 생각하지 못한 테마로 승화시켰지요.
 
  물론 우리나라 평론의 수준이 높지 않다기보다는 환경이 안 좋은 것 같아요. 영화평을 쓰면 제대로 역량을 인정해 주고 지면을 제공하는 환경이 없으니까 영화평론가들이 진지해지지 않았던 것 같아요. 그간 평론에 대한 갈채가 없었지요.”
 
  ―한국 영화 산업이 불황인데, 앞으로를 전망한다면?
 
  “일시적일 것이라고 생각해요. 어떤 일이든 잘될 때도 있고, 내리막일 때도 있고 그렇잖아요. 이러다가 또 대작이 나오면서 회복될 거예요. 비관적일 필요는 없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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