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토목 걸작선 ① 10월 완공 37주년 맞는 소양강댐

콘크리트 중력댐이 흙과 모래의 砂礫댐으로 바뀐 내막

  • 글 : 서철인 월간조선 기자  ironin@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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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총 공사비 290억원, 對日청구권 자금으로 해결
⊙ 제1목적인 발전 전용 댐으로 할 것이냐, 홍수와 가뭄 조절까지 포함한 다목적댐으로 할 것이냐를
    놓고 한전과 건설부 대립
⊙ 소양강댐 건설을 위해 수자원개발 특별법 만들고, 수자원개발공사 출범
⊙ 국내 최대 사력댐으로 완공, 엄청난 적자를 흑자로 돌린 현대건설은 발전 기반 다져
⊙ 연인원 500만명 투입, 40여 명 희생
높이 123m의 사력댐으로 건설된 소양강댐.(사진 제공=한국수자원공사)
강원도 춘천시 신북읍 천전리 산4번지. 서울에서 46번 경춘국도를 타고 가다 신북IC에서 양구 방면으로 6km 쯤 달리니 두 개의 산봉우리를 이은 거대한 언덕이 눈앞에 펼쳐진다. 높이 123m에 제방 길이 530m의 소양강(昭陽江)댐이다. 댐 꼭대기에서 떨어지는 물줄기가 장엄하다.
 
  이 웅장한 댐이 경제적으로 빈곤했던 1970년대 초 우리 기술과 인력으로 건설됐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는다. 콘크리트 없이 흙과 모래와 돌만으로 이뤄진 댐이 오늘날까지 끄덕없이 버티고 있다는 것 또한 신기하다.
 
  소양강댐은 1967년 4월 착공해 1973년 10월에 완공됐다. 총 공사비가 290억원 투입된, 당시로서는 초대형 프로젝트였다.
 
  댐 건설로 형성된 담수호 면적은 2703㎢, 총저수용량은 29억t에 이른다. 10만kw 용량의 수력 발전기 두 대가 돌아가면서 연간 3억5000만kWh(벙커C유 40만 드럼분)의 전력을 생산하고 있다. 국내 최대 규모다.
 
  소양강댐은 가뭄 때 농사에 필요한 용수(用水)를 공급하고, 장마 때 물을 가두어 홍수를 조절함으로써 수도권을 비롯한 한강 하류 지역민의 생활에 안정을 가져다주었다. 부족한 전력을 공급, ‘한강의 기적’을 일구는 근간이 됐다.
 
  소양강댐은 2004년 대한토목학회가 발표한 ‘한국 토목 걸작선’에 선정됐다. 또한 2007년 대한건설협회가 발표한 ‘건설산업 60년을 대표하는 부문별 10대 건설’에서 토목 부문 10선(選)에 선정됐다. 소양강댐 외에 경부고속도로, 경부고속철도, 인천국제공항 등이 10선에 들었다.
 
  오는 10월 15일 완공 37주년을 맞는 소양강댐 건설에 얽힌 비화를 취재했다. 소양강댐은 공사 기간 6년여 동안 연인원 500만명이 투입됐다. 이 기간 동안 시행사(수자원개발공사)와 시공사(현대건설)를 대표해 현장을 지휘한 관리자와 엔지니어들을 만났다. 벌써 40년 전 일이라 공사에 참여한 이들 중에는 이미 세상을 떠난 이도 있었고, 생존자라 해도 대부분 80대 이상의 고령자(高齡者)였다.
 
 
  애초엔 수력발전용 댐으로 설계
 
1972년 10월 담수가 시작된 후 현장을 찾아 설명을 듣고 있는 박정희 대통령.(사진 제공=한국수자원공사)
  소양강댐 건설 계획이 발표된 것은 장면(張勉) 내각 시절인 1960년. 국토건설사업의 일환으로 춘천댐, 섬진강댐 등과 함께 추진되었다. 하지만 예산이 부족한 데다 군(軍) 작전상 곤란한 지역이라는 이유로 섬진강댐을 제외한 두 댐의 건설 계획은 취소됐다.
 
  소양강댐 건설 계획이 재개된 것은 1961년 5·16 혁명 후 박정희(朴正熙) 정권이 들어서면서다. 박 대통령은 분단 후 북한에 비해 남한의 전력이 절대적으로 부족함을 절감, 건설부에 수력발전용 댐을 건설하라고 지시했다. 춘천댐과 섬진강댐이 동시에 착공됐고, 뒤이어 소양강댐도 타당성 조사에 들어갔다. 때마침 대일(對日)청구권 문제가 해결의 실마리를 보여 재원(財源) 마련의 길도 열렸다. 이에 따라 1962년 11월 일본공영(日本公營)주식회사에 설계 용역을 주는 계약을 체결했다. 설계 용역 계약금은 3400여만원이었다.
 
  일본공영은 일제 때 조선전업주식회사(한국전력 전신)에 근무하던 일본인들이 해방 후 본국으로 돌아가 설립한 댐 건설 전문 업체. 북한의 수풍댐 등 일제 때 세워진 댐들은 모두 이들의 손을 거쳤다. 1960년대까지만 해도 한국에는 댐 기술자가 없었다. 일제 때 일본인 기술자들의 어깨너머로 배운 기능공들만 존재할 뿐이었다. 건설부는 설계 작업 시 한국인 기술자를 고용한다는 조건으로 일본공영에 용역을 맡겼다.
 
  1965년 대일 청구권 문제 해결이 담긴 한일(韓日)기본조약이 조인됐다. 일본이 한국에 3억 달러를 10년에 걸쳐 무상으로 지불하고, 경제협력으로 정부와 민간에 각각 2억 달러와 1억 달러를 차관해 준다는 것이 주요 내용이었다. 정부는 대일 청구금 중 일부를 소양강댐 건설에 투입하기로 했다. 이에 따라 댐 건설 계획이 급물살을 탔다.
 
 
  건설부·한전 소유권 놓고 논쟁
 
  1967년 2월 정부는 소양강댐 시행사로 현대건설을 지명(指名) 낙찰했다. 그 해 4월 착공식을 갖고 진입로 작업에 착수했다. 이 무렵 한전과 건설부는 댐의 용도를 본래의 계획대로 발전 전용으로 할 것인지 다목적으로 할 것인지를 놓고 줄다리기를 하고 있었다. 한전은 공비(工費)가 적게 드는 제1목적의 발전 전용 댐을 건설해야 한다는 입장이었고, 건설부는 발전은 물론 홍수 조절과 관개(灌漑) 기능까지 아우르는 다목적댐으로 건설해야 한다는 입장이었다. 양측이 이렇듯 첨예하게 대립한 데는 댐의 용도에 따라 소유권이 달라지기 때문이었다. 발전 전용 댐으로 건설되면 한전이 소유권을 갖고, 다목적댐으로 건설될 경우 건설부가 갖도록 돼 있었던 것이다.
 
  결국 오랜 논쟁 끝에 같은 해 7월 공비 부담은 늘지만 경제적 가치가 큰 다목적댐으로 결정됐다. 이에 따라 댐 건설 계획도 대폭 수정됐다. 높이 86m에 저수(貯水)용량 10억t의 저(低)댐에서 높이 122m에 저수용량 29억t의 중(中)댐으로 변경된 것이다. 건설비도 애초 114억원에서 203억원으로 증가했다.
 
  정부는 소양강댐의 설계를 변경하기 위해 수자원개발계획이 담긴 법안을 입안, 통과시켰다. 아울러 다목적댐을 전문으로 관리·감독할 수자원개발공사(현 한국수자원공사)를 그해 11월 설립, 출범시켰다. 수자원개발공사는 한전과 건설부 직원을 영입, 양측의 융합을 꾀한 조직이기도 했다.
 
 
  콘크리트댐으로 건설하면 돈 안 남아
 
수자원개발공사 설계 부장으로 근무한 이경보씨.
  소양강댐 건설을 둘러싼 논쟁은 이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이번에는 시행사인 수자원개발공사와 시공사인 현대건설이 설계도 변경 문제를 놓고 충돌했다. 수자원개발공사는 일본공영이 작업한 설계대로 콘크리트 중력댐으로 가야 한다는 것이었고, 현대건설은 흙과 모래와 돌로 만드는 사력댐이 효율적이고 경제적이니 설계를 변경해야 한다는 주장이었다.
 
  당시 수자원개발공사 설계부장으로 근무했던 이경보(李景輔)씨는 “설계도를 변경할 경우 그에 따른 추가비용이 발생하고 업무량이 증가하는 만큼 반대할 수밖에 없었다”며 이렇게 말했다.
 
  “이미 공사에 필요한 중장비며 자재를 대일 청구권 자금으로 발주한 마당에 설계도를 180도 바꾼다는 것은 상식적으로 있을 수 없는 일이었어요. 그런데도 설계도가 바뀌는 걸 보고 정주영(鄭周永)씨 힘이 참 대단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설계도가 변경되는 바람에 우리는 몇 달 동안 밤을 새워야 했어요.”
 
댐에 축조할 암석을 소양강 근처 야산에서 채취하고 있는 모습.(사진 제공=현대건설)
  수자원개발공사 입장에서는 나름 연구하고 조사한 끝에 결정한 공법인 데다 갑(甲)의 입장에서 을(乙)의 요구사항을 그대로 수용해야 하는 터라 자존심이 상했다. 현대건설이 갑의 경제적 출혈은 물론 자존심까지 건드려 가며 설계도 변경을 밀어붙인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소양강댐 건설 초기 현장 소장으로 근무했던 황정규(黃正奎)씨의 이야기다.
 
  “소양강댐의 공식적인 착공은 1967년 4월이지만 실제 본격적인 공사가 시작된 것은 1968년 5월쯤이었어요. 그 전에 한 일은 댐에 수용될 용지 문제를 해결하는 일이었지요. 저는 민자(民資)로 추진된 춘천댐에 이어 남강댐을 건설하던 중 정주영 사장의 부름을 받고 현장에 투입됐어요. 정주영 사장은 제게 ‘소양강댐을 현대건설이 수주했는데, 설계도를 검토한 후 시공 계획을 짜 보라’고 하더군요. 설계도대로라면 당시 소양강댐의 규모는 저수용량 면에서 한반도는 물론 동양 최대였습니다. 그만한 규모의 댐을 콘크리트 공법으로 건설하기 위해서는 엄청난 양의 시멘트와 철근이 필요한 상황이었지요.”
 
  국내에서 생산되는 시멘트로는 역부족이었다. 필요한 자재의 대부분을 일본에서 공수해 와야 할 판이었다. 그런데 문제는 공수해 온다 해도 강원도 산골까지 운송할 방법이 없다는 데 있었다. 당시 강원도의 교통 기반은 단선 경춘선 철도와 2차선도 안되는 경춘가도가 전부였다. 황씨는 정 사장에게 “경춘선을 복선으로 깔고, 경춘가도를 4차선으로 확장하지 않는 한 댐에 필요한 시멘트와 자재를 공급하기 어렵다”고 보고했다. 황씨의 말이다.
 
건설 초기 현장 소장으로 근무한 황정규씨.
  “현실적으로 경춘선을 복선으로 깔고 경춘가도를 4차선으로 확장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어요. 그래서 정주영 사장께 ‘정일권(丁一權) 총리를 만나거든 공사하는 동안 군에서 경춘선 철도를 좀 비워 줄 수 있느냐’고 물어보시라 했습니다. 경춘선 철도가 군수물자 수송에 사용되고 있던 시절이었거든요. 정 사장과 정 총리가 가까이 지내고 있다는 걸 알고 드린 부탁인데, 얼마 후 정 사장이 제게 정 총리가 한 말을 전하더군요. ‘무슨 소리냐, 경춘선은 군수물자 수송의 대동맥이다. 경춘선 철도를 못 쓰면 군은 마비된다’고 하더래요.”
 
  춘천댐은 콘크리트 댐으로 건설됐고, 남강댐은 사력식 댐으로 건설 중이었다. 두 공법을 모두 경험한 황씨는 “콘크리트 댐은 운송 문제 말고도 시공사 입장에서 남는 게 없다는 것이 단점이라는 사실을 파악하고 있었다”며 이렇게 말했다.
 
  “콘크리트 댐의 경우 장비와 시멘트, 철근 등 주요 자재가 관급이기 때문에 나머지 거푸집이나 골재로 이득을 내야 하는데 쉽지 않습니다. 적자나 보지 않으면 다행일 정도예요. 공사 규모가 크면 클수록 더욱 불리하죠.”
 
 
  태국에서 날아온 행운의 초청장
 
  정주영 사장도 이 사실을 파악하고 있었다. 그 때문에 공사를 시작하기도 전에 흑자는커녕 적자폭을 얼마나 줄이느냐를 놓고 골몰하고 있었다고 한다. 당시 해외 공사 견적 책임자이면서 부사장이었던 권기태(權奇泰)씨는 “겉으로 내색을 하지 않아서 그렇지 당시 정주영 사장은 소양강댐 때문에 골머리를 앓고 있었다”고 말했다.
 
  “정 사장은 수주할 때부터 소양강댐은 적자가 날 수밖에 없는 사업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어요. 그렇다고 발을 뺄 수도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정부에 밉보여서 좋을 게 없었으니까요. 더구나 박 대통령이 정 사장을 특별히 신뢰하고 맡긴 일 아닙니까. 밖에서 보기에는 특혜였기 때문에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속앓이만 하고 있었어요.”
 
  소양강댐 공사로 적자가 커질 경우 현대건설 경영권이 흔들릴 수 있을 정도로 심각한 상황이었다고 한다. 그 무렵 태국 정부 측으로부터 댐 공사 발주 설명회가 있으니 입찰 후보로 참가하라는 초청장이 날아들었다. 이 초청장 한 장이 상황을 역전시키는 기회가 되리라곤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다. 설명회에 직접 참가한 권씨의 회고다.
 
  “태국이 당시 건설하려던 댐이 파솜댐입니다. 현대건설이 태국의 고속도로를 성공적으로 건설한 까닭에 댐 공사 입찰 후보로 초청한 것인데, 미국에 용역을 주어 작업했다는 설계도를 보니 높이 100m짜리 사력댐이더라고요. 당시 국내에서는 사력댐의 경우 높이 30~40m까지만 가능한 것으로 여기고 있던 시절이라 깜짝 놀랐습니다. 또 설명회를 통해 서구 유럽에서는 200m가 넘는 사력댐도 건설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됐지요.”
 
 
  사력댐 건설 보고받은 정주영, 박수 치며 “바로 그거야”
 
박정희 대통령과 함께한 정주영 현대건설 사장 부부.
  입찰에는 실패했지만 권씨는 그 어느 때보다 더 설레는 마음으로 귀국했다. 그러곤 정 사장에게 이 사실을 보고했다. “소양강은 사력이 쌓여 하상(河床)이 높아졌으니 하천 정비를 해서 사력을 댐 건설에 사용하면 일석이조(一石二鳥) 아니겠느냐”는 개인적인 의견까지 덧붙였다. 가만히 듣고 있던 정 사장은 박수를 힘껏 치며 “바로 그거야”라고 소리를 질렀다. 위기를 기회로 만들 수 있는 해결책이라고 판단한 것이다.
 
  정주영 사장은 그 길로 소양강댐 건설 현장으로 달려갔다. 댐 건설 부지 주변에는 흙, 자갈, 모래 등 사력댐에 필요한 자재가 널려 있었다. 정 사장은 황정규 현장 소장과 함께 일본으로 날아갔다. 당시 일본 기후현(岐阜縣)에 건설 중인 미보로댐(御母衣ダム)이 사력댐이라는 정보를 입수하고 확인차 길을 나선 것이다. 황정규씨 이야기다.
 
  “그때가 1968년 5월 초였어요. 일본이 5월 황금연휴를 맞았다는 기사를 봐서 기억이 납니다. 정 사장께서는 ‘수자원개발공사에는 절대 비밀로 해야 한다’며 몇 번이나 당부하셨죠. 그러곤 도쿄에서 승용차를 렌트해 기후현 미보로댐 공사 현장까지 쉬지 않고 달려갔어요. 미보로댐은 높이 130m로 건설 중이었고, 소문대로 사력댐이었습니다.”
 
 
  위기를 기회로 바꾼 鄭周永
 
1973년 10월 15일 소양강댐 준공식 장면.(사진 제공=한국수자원공사)
  확신에 차 귀국한 정 사장은 곧바로 임원회의를 소집했다. 그리고 소양강댐 건설 공법을 사력댐으로 바꿔야 하는 이유들을 브리핑 자료로 만들라고 지시했다. 그 자리에 권기태 부사장과 황정규 현장 소장도 참석했다. 이들은 자료 검색 등의 연구 끝에 북한의 폭격을 받을 경우 콘크리트댐은 사력댐에 비해 훨씬 위험하다는 새로운 사실을 찾아내 브리핑 내용에 추가했다. 콘크리트댐은 폭격을 받으면 파괴돼 쏟아지는 물로 수도권이 순식간에 잠길 위험이 있는 반면, 사력댐은 폭격을 받아도 푹석 주저앉는 정도이기 때문에 한꺼번에 수량이 쏟아질 염려는 없다는 내용이었다. 소양강댐이 북한 가까이에 있다는 점에서 이 부분은 매우 중요했다.
 
  정 사장은 완성된 브리핑 자료를 들고 김학렬(金鶴烈) 당시 부총리 겸 경제기획원 장관을 찾아가 설명했다. 처음부터 끝까지 주의 깊게 경청한 김 장관은 “이 문제는 총리와 대통령도 알아야 할 사실이니 청와대에 들어가 정일권 총리에게 한 번 더 브리핑하라”고 당부했다.
 
  “결국 이 내용은 정 총리를 거쳐 박정희 대통령에게까지 보고가 되었습니다. 박 대통령 역시 브리핑 내용을 주의 깊게 경청하더니 육군참모총장에게 시켜 1, 2군 사령관을 불러 그 앞에서 한 번 더 브리핑하라고 지시했다고 하더군요. 또 이 문제를 스터디한 후 보고하라고 군에 과제를 주었다고 해요.”
 
  군은 안보 문제 차원에서 콘크리트댐과 사력댐의 차이를 면밀히 분석했다. 그 결과 브리핑 내용이 사실이라는 결론을 내렸고 이를 대통령에게 보고했다. 얼마 후 소양강댐 건설 공법은 콘크리트 중력식에서 흙과 모래와 돌을 이용한 사력식으로 변경됐다.
 
  이후 공사는 일사천리로 진행됐다. 댐은 중앙에 연필심을 박듯 진흙으로 단단히 다진 다음 모래와 자갈을 차례로 경사지게 쌓아올린 후 맨 마지막에 표면을 암궤로 견고하게 고정시키는 방식으로 축조했다. 댐의 바닥 너비만 무려 550m나 된다. 높이도 사력으로 바뀌면서 더 높아져 123m가 됐다.
 
  준공 당시 한 일간지 신문은 댐을 두고 “123m의 인조산(人造山)’이라고 표현했다. 그럴 만도 한 것이 댐 축조에 들어간 진흙과 모래, 돌을 모두 합쳐 960만㎥나 된다. 이 수치는 3500만 국민 한 사람이 7가마니씩의 자갈과 흙을 져 날라야 하는 양이라고 한다.
 
  권기태씨는 “흙과 자갈, 모래 등을 소양강댐 건설에 공급하느라 주변의 산이 몇 개 사라졌다”고 말했다.
 
  현대건설은 애초 계획했던 콘크리트댐을 사력댐으로 변경함으로써 적지 않은 흑자를 냈다. 또한 동양 최대의 사력댐 기술을 인정받아 말레이시아 등으로부터 댐 공사를 수주했다. 권씨는 “소양강댐 공사는 현대건설이 한 단계 발전하는 기반이 됐다”고 말했다.
 
 
  조직폭력배 잡아다가 1000여 명 현장 투입
 
  소양강댐 공사 기간 동안 현대건설이 현장에 투입한 소장은 총 4명이다. 초기 소장은 황정규씨. 그는 진입로와 대체도로를 만들고, 가물막이와 가배수로 공사가 진행될 때까지 현장을 지켰다.
 
  대체도로는 기존 춘천에서 양구를 거쳐 인제에 이르는 도로가 물에 잠기게 돼 새로운 길을 내는 작업이었다. 말하자면 우회도로를 만드는 작업인 셈인데, 그 길이가 무려 33km에 이르렀다.
 
  “댐이 완공되면 강원도 춘성, 양구, 인제 등 3개 군(郡)과 6개 면(面), 37개 마을이 물에 잠기게 돼 있었어요. 당시 이주민만 1만8000여 명에 이르렀던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만큼 거대한 호수가 하나 만들어지는 상황이라 대체도로를 내는 일은 시급했어요. 보통 댐이 중간 정도 축조되면 담수(湛水)를 시작하거든요.”
 
  도로 작업이 시작될 무렵 정부는 사회 정화 차원에서 전국의 조직폭력배와 정치 깡패들을 검거했다. 그 숫자가 무려 3000여 명에 달해 수감소가 부족한 상황이었다. 정부는 이 인원의 절반 가까운 숫자를 소양강댐 도로 공사 현장에 투입했다. 노동으로 정신을 개조하겠다는 의도였으나 전과만으로 잡아들인 상황이라 이들의 불만은 컸다. 야당에서는 ‘인권 유린’이라며 정부를 비난했다.
 
  “정부에서 하는 일이라 거부할 수도 없었어요. 1000여 명의 폭력 전과자들이 현장에서 먹고 자며 작업을 했죠. 이들을 경비하는 경찰 병력만 200여 명이 배치됐고요. 임금은 현대건설, 식사는 강원도, 숙소는 정부가 제공하는 방식으로 부담을 나누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들이 일은 하지 않고 밤낮 패싸움을 벌이는 등 사고가 끊이지 않았다는 데 있었어요. 도무지 공사 진척이 되지 않았습니다.”
 
 
  살인 사건까지 발생
 
  도로 5km에 1000여 명의 폭력배들을 늘어 놓으니 사고가 끊이지 않았다. 팔다리가 부러지는 사고는 다반사였고, 나중에는 살인 사건까지 발생했다. 황씨는 ‘이대로는 도저히 안되겠다’고 판단해 강원도 분실에 있는 중앙정보부 직원에게 도지사 주재 임시회의를 주선해 달라고 부탁했다. 당시 강원도에서는 중앙정보부 직원의 파워가 가장 셌다고 한다.
 
  “며칠 후 2군 사령부에 내무부 장관과 강원 도지사, 현대건설 사장이 모여 회의를 했습니다. 내무부에서는 현대건설 측에 고충이 있으면 얘기하라고 하더군요. 회의에 동석한 제가 이야기했습니다. ‘정부에서는 깡패들 길들이겠다고 공사 현장에 투입시켰는데, 부모와 선생도 잡지 못한 사람들을 저희가 어떻게 잡겠느냐’고 했죠. ‘도로공사가 마냥 지연돼도 상관없느냐’고도 따지듯 물었습니다.”
 
  이튿날 강원도 내 일간지에 이 내용이 대서특필됐다. 폭력배들 때문에 소양강댐 공사가 차질을 빚고 있다는 내용이었다. 그날 오전 10시쯤 춘천지방검찰청에서 황씨를 연행해 갔다. 담당 검사는 이제 갓 부임한 듯 젊고 잘생긴 데다 패기가 넘치는 사람이었다. 그는 이 검사에게 조직 폭력배들이 공사 현장에 투입된 이후 있었던 일들을 하나도 빠뜨리지 않고 이야기했다. 시종일관 그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고 있던 검사는 “알았다”며 고개를 끄덕인 후 그를 배웅까지 해 주었다. 이 검사가 지금은 너무나도 유명해진 박찬종(朴燦鍾) 변호사다.
 
  박 검사의 공정한 수사와 상부 보고 덕분인지 그로부터 20일 후 1000여 명의 폭력배들은 모두 공사 현장에서 철수했다. 황씨는 “폭력배들이 공사 현장을 점거하다시피 한 7~8개월 동안 정말 힘들었다”고 말했다.
 
 
  32t 덤프트럭 처음 들어와
 
세 번째 현장 소장으로 투입된 정태수씨.
  황 소장에 이어 두 번째로 현장에 부임한 책임자는 임경근씨였다. 3개월 쯤 현장을 지킨 그는 이미 고인(故人)이 됐다.
 
  세 번째 현장 책임자인 정태수(鄭泰壽)씨는 1970년 1월에 투입됐다. 1968년 말에 착공된 가배수로와 가물막이 공사가 끝나갈 즈음이었다. 정씨는 “경부고속도로 서울-오산 구간과 오산-목천 구간 공사를 끝내고 서울에 올라와 한숨 돌리던 차에 투입됐다”고 당시를 회고했다.
 
  “고속도로 건설로 오랫동안 가족과 떨어져 지낸 데다 심신이 지쳐 있던 터라 이제는 서울 본사나 서울 근교에서 근무하기를 희망하고 있었어요. 그런데 정 사장이 어느날 호출하더니 ‘미안하지만 한 번만 더 수고해 달라’며 현장으로 내려보내더군요.”
 
  정씨는 정 사장에게 ‘흙으로 하는 공사는 타의 추종을 불허할 정도로 달인’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던 사람이었다. 고속도로 건설 내내 정 사장이 그의 옆에 붙어 있었을 정도로 신임 받던 직원이기도 했다. 그가 투입되면서 본격적인 댐 축조 공사가 시작됐다.
 
건설부 동력과장으로 근무한 김여택씨.
  “소양강댐 공사는 엄청난 흙과 모래, 암반이 소요되는 작업이었어요. 때문에 고속도로 건설에 투입된 것보다 훨씬 큰 중장비들이 대일 청구권 자금으로 들어왔죠. 제 기억으로 32t 덤프트럭이 30여 대 투입됐고, 그 밖에 3㎥ 용량의 스쿠퍼, 27t급 자주식 진동다짐기, 22t급 롤러, 굴착기 등이 동원됐죠. 이 중장비들은 모두 국내에 처음 반입된 것들이었습니다. 32t 덤프트럭의 경우 바퀴 하나의 높이가 사람 키 두 배만 했어요.”
 
  소양강댐은 공사 기간 동은 40여 명의 인명 피해를 냈다. 정씨는 “대부분 중장비들이 낸 사고로 목숨을 잃었다”며 이렇게 설명했다.
 
  “덤프트럭이 전복되거나 인부를 치는 등 교통사고가 많았어요. 매일 아침 안전교육을 실시하는데도 소용이 없더군요. 교통사고 외에 산사태로 3명의 희생자가 발생한 적도 있었어요. 1971년 여름장마 때였는데, 비가 겁이 날 정도로 쏟아지던 날 현장 식당 뒤편의 산이 무너지며 토사가 식당을 덮쳐 종업원 3명이 목숨을 잃었습니다. 점심시간이 지난 오후에 일어나 그나마 인명 피해가 적었지요.”
 
 
  절반 완공 때 정주영이 1000만원 봉투 줘
 
1972년 현장 시찰을 나온 안경모 수자원개발공사 사장.(사진 제공=한국수자원공사)
  1972년 10월 댐이 3분의 2 이상 축조되자 담수가 시작됐다. 정씨에 따르면 29억t의 저수 용량을 채우기 위해서는 3년여의 시간이 필요해 완공되기 전부터 담수를 시작한 것이라고 한다. 그는 “담수가 시작된 이후 비만 오면 잠을 제대로 잘 수 없었다”고 말했다.
 
  “콘크리트댐은 물이 넘치면 자연스럽게 댐을 타고넘어 흐르지만 사력댐은 흙과 모래라서 파고듭니다. 제방이 침식돼 무너질 수 있죠. 이 때문에 어느 정도 담수가 되었을 때는 혹시라도 위로 물이 넘칠까 조마조마했어요. 밤새 비상 대기해야 했죠.”
 
  정씨는 그해 말까지 꼬박 3년 동안 근무했다. 이 기간 동안 있었던 일 중 ‘정주영 사장이 준 격려금으로 내복 잔치를 했던 것’과 ‘현장에서 보낸 직원들의 특별한 여름휴가’를 가장 기억에 남는 일로 꼽았다.
 
  “1971년 10월, 소양강댐 전체 공정의 절반이 완성됐을 때 이를 기념하는 행사가 있었어요. 정주영 사장, 주원(朱源) 건설부 장관, 안경모(安京模) 수자원개발공사 사장 등이 참석했지요. 오전 10시쯤 시작된 공식 행사가 끝나자 정 사장이 저를 불러 일금 1000만원이 든 봉투를 건네주더군요. 500만원은 수자원개발공사 관리사무실에 주고, 500만원은 직원들끼리 알아서 쓰라고 했습니다. 이 돈으로 뭘 할까 궁리하다 현장에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 내복 한 벌씩을 사서 선물하기로 했습니다.”
 
  당시 현장에는 현대건설 직원이 60명 파견 나와 있었고, 중장비를 운영하는 기능공이 300명, 매일 나오는 일용직 인부가 300명 등 700명에 가까운 인원이 일하고 있었다. 정씨는 이들 모두에게 똑같은 내복을 한 벌씩 선물했다.
 
  “겨울이 멀지 않은 데다 내복이 귀한 시절이라 모두들 ‘덕분에 따뜻한 겨울 나겠다’며 행복해하더군요. 저도 모두 함께 나눌 수 있어서 기분이 좋았습니다.”
 
 
  여름휴가도 공사장 인근 계곡에서 보내
 
소양강댐 건설 현장에 있던 이들은 어느덧 80대 고령에 접어들었다.
  공사는 24시간 쉬지 않고 진행됐다. 현대건설 직원 60명은 교대로 밤 근무를 했다. 공기(工期)가 얼마 남지 않아 여름이 되어도 휴가를 갈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렇다고 남들 다 가는 휴가를 무시하고 지나칠 수는 없었다. 정씨는 고민 끝에 공사 현장에서 가까운 곳에 위치한 청평사 계곡에 간이 야영장을 만들었다. 그러곤 교대로 직원 가족들을 불러 낮에는 현장 근무를 하고 밤에는 가족과 함께 휴가를 즐길 수 있게 했다. 경치가 수려한 곳인 데다 부식물까지 회사에서 제공해 주니 모두들 좋아했다.
 
  “그때 우리는 돈을 벌기 위해서가 아니라 국가의 미래를 건설한다는 사명감으로 일했습니다. 내 일 네 일 가리지 않고 모두들 열심히 땀을 흘렸죠. 힘들었지만 즐거웠고 보람도 있었습니다. 그래서인지 지금도 그때가 그리워지곤 해요.”
 
  정씨뿐만 아니라 소양강댐 건설 관계자들은 모두들 “힘들고 어려웠지만 그때가 좋았다”고 입을 모았다. 또한 오늘날까지 당당하게 제 몫을 해내고 있는 소양강댐을 보면 가슴이 뿌듯하다고 했다.
 
  소양강댐 건설은 해방 이후 처음으로 진행한 대형 프로젝트였다. 전문가들은 “소양강댐의 성공적 건설 덕분에 한국 토목과 건설 기술이 눈부시게 발전할 수 있었다”고 평가했다.
 
  지난 여름 내내 한국은 아열대성 기후를 보이며 국지성 호우가 잦았다. 폭우가 쏟아질 때마다 긴장감을 놓지 못하는 한강홍수통제소 직원들은 가슴을 쓸어내리며 “소양강댐이 없었다면 서울이 물바다가 될 뻔했다”는 말을 입버릇처럼 한다. 지난 37년 동안 소양강댐이 얼마나 큰 역할을 해 왔는지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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