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경남도 덕원에 있던 수도사들은 공산정권에 의해 강제수용소로 끌려가 학살을 당했고, 4년6개월여 참혹한 수감생활 끝에 살아남은 사람들은 시베리아 열차편으로 유럽으로 강제 추방돼. 왜관에 수도회가 마련되자 그들은 또다시 한국으로 돌아와 한센병 환자, 걸인, 노동자, 농민들을 돕기 시작
“독일인 수도자들은 한센병 환자촌을 건립하기 위해 독일에서 거지 행세를 하며 구걸을 했어요. 딱한 한국 사정을 보여주며 ‘제발 도와달라’고 호소했죠. 그래서 1마르크, 2마르크씩 받은 돈이 왜관수도원 계좌로 들어왔고, 그 돈으로 한센병 환자들을 도왔어요.”(인영균 왜관수도원 원장)
“독일인 수도자들은 한센병 환자촌을 건립하기 위해 독일에서 거지 행세를 하며 구걸을 했어요. 딱한 한국 사정을 보여주며 ‘제발 도와달라’고 호소했죠. 그래서 1마르크, 2마르크씩 받은 돈이 왜관수도원 계좌로 들어왔고, 그 돈으로 한센병 환자들을 도왔어요.”(인영균 왜관수도원 원장)

- 2007년 화재로 소실됐다가 최근 재건축된 왜관수도원 성당. 남북통일을 기원하며 ‘평화의 성당’으로 이름지었다.
그는 “베네딕도회 수도규칙(Regula Benedicti)이 ‘기도하며 일하라’”라며 “수도사들의 노동은 무자비하고도 거룩하다”고 귀띔했다. “표정없이, 쉴 새 없이 땀 흘리며 기도하는 이들이 수도자들”이라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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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52년 당시의 왜관 성당과 수도원. |
새로 지은 100주년 기념성당으로 향했다. 두 해 전 수도원이 불타 새로 지은 건물이었다. 鄭鎭奭(정진석) 추기경과 李文熙(이문희)·尹恭熙(윤공희) 대주교·姜禹一(강우일) 주교, 張益(장익) 춘천교구장 등 한국 천주교의 리더들이 모두 보였다. 수많은 검은 옷의 수도자들을 보며 필자가 느낀 생각은 ‘총명하게 생겼구나!’였다. 대도시의 속물들과는 달라 보였다.
入堂頌(입당송)이 흘렀다. ‘온 땅은 하느님께 환호하라. 알렐루야. 노래하여라. 그분의 이름을~(JU-BI-LA-TE Deo omnis terra, alle-lu-ia psalmum dicite mominiejus)’로 시작되는 미사곡이 묵직한 오르간과 함께 라틴어 음성으로 성당 안에 울려 퍼졌다.
[서울 백동(혜화동) 수도원 시절(1909~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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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30년대 후반 베네딕도회 파렌코프 신부가 모터 달린 자전거를 타고 신자들을 찾아다니던 모습. 선교지는 넓은데 도로 사정은 열악해 당시 선교사들 사이에 모터 달린 자전거가 인기였고, 한국인들에게는 신기한 구경거리였다. |
初老(초로)의 한 신사가 독일 뮌헨에서 서쪽으로 약 40㎞ 떨어진 튀르켄트 펠트驛(역)에서 내려 늪지대를 향해 걸어가고 있었다. 땀에 전 긴 팔 사제복이 사람의 이목을 끌었다.
이 신사가 朝鮮(조선)교구를 맡은 귀스타브 샤를 마리 뮈텔(한국명 閔德孝) 주교다. 그는 자신의 조선 선교를 도와줄 사제와 수도회를 찾고 있었다. 로마 교황청에 도움을 청했지만, 유럽 대부분의 수도회는 여력이 없다며 거절하는 상황이었다.
뮈텔 주교의 출생지인 프랑스 역시 외면했다. 그러나 오직 한 곳에서 可否(가부) 답신이 오지 않았다. 독일에 위치한 베네딕도 산하 ‘상트 오틸리엔 수도회’였다.
정 추기경은 “뮈텔 주교가 독일 오틸리엔 수도회를 찾아가 조선 교회의 지도자를 양성할 학교 건립을 요청했다”고 말했다. 그 말의 행간에는 복잡한 인연이 숨어 있다. 왜관수도원 印榮均(인영균·45·세례명 클레멘스) 원장신부에게 흥미로운 이야기를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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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베버 아빠스 |
계속된 인 원장의 말이다.
“베버 아빠스는 조금 늦게 정중한 거절 편지를 뮈텔 주교에게 써 보냈어요. 그런데 이 답신이 주교 손에 들어가지 않았던 겁니다. 주교가 이미 상트 오틸리엔으로 길을 떠났기 때문이죠. 주교가 우여곡절 끝에 늦은 밤, 오틸리엔 수도원 성당의 우뚝 솟은 종탑을 발견했고, 초인종을 눌러 ‘문간 수사’(수도원 출입문을 여닫는 역할을 맡은 수사)를 깨웠지요.”
손님의 위엄 있는 수염, 깊고 그윽한 눈동자, 늪에 빠져 무거워진 신발, 더러운 사제복을 입은 뮈텔 주교의 방문에 베버 총아빠스는 당황했다. 그는 ‘어째서 지금 한국에 가야 하는가’하고 되뇌었지만, 먼 길을 달려온 주교의 얼굴을 외면할 수 없는 노릇이었다.
그리고 몇 달이 안돼 뮌헨신학원 도미니코 엔스호프 원장신부와 달링겐 신학원 보니파시우 사우어 원장신부는 일본 나가사키를 거쳐 조선으로 데려다 줄 ‘제노바發(발)’ 汽船(기선) 위에 서 있게 된다.
일제의 탄압으로 서울 떠나
1909년 조선에 도착한 두 사람은 서울 백동(지금의 혜화동)에 터를 잡았다. 자리 잡은 터가 무려 13만2232m²(4만 평)에 달했다고 한다. 지금 혜화동 일대는 가톨릭 사제를 양성하는 신학교와 교리신학원 등 천주교 서울대교구 건물이 똬리를 틀고 있다. 한국 가톨릭의 뿌리가 이곳에서 처음 시작된 셈이다.
성 베네딕도회 오틸리엔 수도회는 뮈텔 주교의 요청대로, 백동 수도원을 세웠다. 또 숭신학교(사범학교)와 숭공학교(기술학교)를 설립, 활발한 교육사업을 펼쳤다. 정 추기경은 “숭공학교 졸업생 중에는 나중 기업가로 성공한 분도 여럿 계신다”며 “서양 기술과 문화를 공식적으로 처음 가르쳤기에 한국 문화에 혁명적 영향을 끼쳤다”고 평가했다.
인영균 원장신부는 “지금의 대학로까지가 수도원 땅이었고 외래 수종인 마로니에 나무 수령이 100년이 된 것도 있어 백동 수도원에서 심은 것으로 추측한다”며 “혜화동 터가 지금의 한국 천주교 교육의 중심지가 됐다”고 했다.
현재 혜화동 성당의 주보 성인이 성 베네딕도다. 베네딕도 수도원이 그곳에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백동 수도원은 1927년 함경도로 떠나게 된다. 왜 떠나야만 했을까. 강 주교의 말이다.
“베네딕도회에서 한국인 인재를 키우는 것을 일제가 달가워하지 않았어요. 음으로 양으로 압력을 넣었다는 얘기도 있어요.”
[덕원수도원(1927~49), 연길수도원(1928~46) 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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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소문에서 바라본 서울 백동 수도원(1909~1927). |
덕원수도원이 배출한 교회 지도자로 윤공희·池學淳(지학순) 주교, 金南洙(김남수) 주교, 鄭義采(정의채) 몬시뇰 등이 있다.
덕원수도원 사진을 보면 마치 꿈속 같다는 생각이 든다. 안개에 싸인 들은 공중에 둥둥 떠있는 듯하다. 하지만 덕원수도원 건립은 순탄하지 않았다. 건축할 돈이 부족한데다 1929년과 1930년 두 차례의 흉년과 태풍으로 상황이 악화됐다. 태풍이 바닷물을 원산만으로 밀고 들어와 수도원 아랫마을이 물에 잠기기도 했다. 수도원 재정을 지원하던 독일도 정치 상황이 나빠졌고, 오틸리엔 수도원 역시 파산 상태였다.
그러나 베네딕도회가 원산교구를 위임받은 후 신자 수가 눈에 띄게 늘었다. 1921년 무렵 신자 수는 500명이었는데 10년 후인 1931년에는 신자 수가 4345명으로 거의 열 배가 늘어났다는 기록이 있다.
그러나 천주교에 대한 적대적인 분위기는 여전했다. 어떤 마을에서는 영세받은 소작인이 소작하던 땅을 빼앗겼으며, 배교를 맹세하면 다시 농지를 받는 일들도 있었다.
여기다 한국인의 정체성을 말살하기 위해 일제는 성당이나 수도원 내에서 한국어 사용을 금지했다. 왜관수도원 宣智勳(선지훈·50·라파엘) 신부는 “독일인 수도자도 일본어를 배워야 했다”고 말했다. 당시 한국에 있던 수도사들의 일본어에 대한 심정이 배어 있는 편지 내용을 소개한다.
‘이제 우리는 매년 한 사람씩 일본에 가 일본어를 배우도록 해야 합니다. 일본어를 할 줄 모르면 여기서 견디기가 더 어려워집니다. 제 생각으로는 십 년 후면 강론도 한국어로 해서는 안될 것 같습니다.’(1940년 2월 9일, 엘리지오 콜러 신부가 오틸리엔으로 보낸 편지)
‘저는 2년만 지나면 신학교에서 라틴어 수업을 제외한 모든 수업을 다 일본어로 해야 할 것이라고 예상하고 있습니다. 한국인들은 오래전부터 쓰고 있던 성과 이름을 일본식으로 고치고 있습니다.’(1940년 4월 5일, 보나파시오 사우어 주교아빠스의 편지)
‘일본이 내일부터 한국어 대신 일본어로 강론해야 한다고 명령한다면 저는 보따리를 싸서 고향으로 돌아가야 할 것입니다.’(1940년 7월 25일, 티모테오 비털리 신부의 편지)
광복과 공산 치하에서 큰 희생당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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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덕원 수도원(1927~1949)의 아침 풍경. |
북간도는 정치적으로 민족적으로 미묘한 요소들이 뒤섞인 민감한 지역이었다. 이 특수한 상황에서 연길수도원은 본당 사목과 교육 사업을 위한 중심지 역할을 수행했다. 광복 이후 이 지역을 장악한 중국 공산당은 독일인 성직자와 수사들을 수용소에 가두었다가 이후 본국으로 강제 추방했다.
1945년 8월 15일 광복이 찾아왔다. 일본 천황의 항복 이후 원산과 덕원 일대에는 정적이 감돌았지만 성당과 수도원에서는 종소리가 힘차게 울려 퍼지고 태극기도 휘날렸다.
덕원수도원 건물 중 신학교는 1945년 초 일본군이 접수, 병영으로 사용했다. 천황의 항복 후 일본군 장교들은 신학교 뜰에 병력을 집합시켰다. 그들은 통곡을 한 후 원산항으로 철수, 그곳에서 소련군의 進駐(진주)를 기다렸다. 선지훈 신부의 말이다.
“당시 수도자들이 남긴 자료에는 깜짝 놀랄 증언이 들어있습니다. ‘원산에서 수녀들이 사제관 다락방 창문 너머로 끔찍한 광경을 목격했다. 일본군들은 숱하게 자결을 택했고 그들의 자결 의식과 신음 소리가 수시간 그치지 않았다’는 겁니다.”
그러나 광복의 기쁨은 오래가지 못했다. 소련군의 붉은 깃발이 나타났기 때문이다. 얼마 안 가 소련 군대는 살인과 약탈을 자행했다. 또다시 낯선 압제자의 먹잇감이 된 것이다.
여기다 조선 공산당도 부르주아, 부자, 특히 반공 인사들을 체포하는 데 밤낮을 가리지 않았다. 그나마 종교를 믿고 있던 소련 병사들이 덕원수도원을 보호해 주었다. 당시 덕원에 있던 이소 샤이빌러 신부는 본국으로 보낸 편지에서 “소련군이 없었더라면 이곳 한국인들은 우리를 벌써 잡아먹었을 것”이라고 썼다.
소련군이 물러나자 조선 공산당의 탄압으로 덕원수도원은 1949년 문을 닫을 수밖에 없었다. 많은 성직자와 독일인 수사들은 처형되거나 강제수용소로 끌려갔다. 정진석 추기경의 말이다.
“공산 치하에서 많은 수도자가 박해받고 순교했습니다. 하느님이 베네딕도회에 더 큰 일을 시키기 위해 혹독한 시련을 주신지 모르겠어요. 당시 숨진 36명의 순교자에 대한 ‘諡福(시복: 신앙의 모범을 보인 고인의 삶을 교황청에서 공식적으로 인정하는 것) 절차’가 지금 준비 중입니다.”
강제수감, 학살당한 수도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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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53년 10월에 주한 교황사절 서리 겸 춘천 지목구장으로 임명된 퀸란 신부가 왜관 수도공동체를 방문했다. 앞줄 왼쪽부터 이경우 가브리엘 신부, 김남수 안젤로 신부, 퀸란 신부, 티모테오 비털리 몬시뇰 신부. |
“북한군에 체포된 많은 독일인 수도자가 4년6개월 동안 죽음의 행진을 겪은 뒤 수용소에서 지내다 독일로 돌아갔어요. 하지만 한국을 못 잊어 다시 돌아와 이곳 왜관에 자리 잡았습니다.”
인영균 원장신부의 증언이다.
“한국전쟁 직전이었지요. 조선 공산당은 수도원 시스템을 알고 있었어요. 長上(장상), 즉 공동체의 지도자를 먼저 치면 된다고 생각했어요. 치밀하게 작전을 짜서 밀주 혐의로 수도원 살림을 책임진 신부님을 잡아가고, 不穩(불온) 삐라를 인쇄했다고 잡아갔지요. 천주교가 공산주의를 반대하니까 걸면 다 걸 수 있잖아요. 그 다음에 아빠스와 원장·부원장 신부를 잡아 평양으로 데려갔지요.
결국 보니파시오 사우어 원장신부님이 평양 감옥에서 獄死(옥사)하셨어요. 고령에다 천식으로 고생하셨다고 전해집니다. 나머지 신부·수사님들은 언제 돌아가셨는지 알지 못하고 유해도 못 찾았어요. 독일인 장상들과 수도자들은 강제수용소에 거의 4년 이상 수용됐고 1954년이 돼서 겨우 풀려났지만 일부에 불과해요. 많은 이가 얼어 죽고 굶어 죽고 병들어 죽었지요. 평양에 계셨던 분들은 한국전쟁 직후 유엔군이 올라왔을 때 다 학살했을 겁니다. 시신도 못 찾았어요. 당시 평양감옥에서 독일 수도원에 보낸 편지와 쪽지가 아직 남아 있어요.”
李錫哲(이석철·95·미카엘) 수사는 왜관수도원의 최고령 수도자이다. 서울 명륜동에서 태어나 1936년 덕원수도원에 들어가 평생 수도자의 길을 걸었다. 誓願(서원)은 1941년 5월에 했다. 한국 베네딕도 수도원의 역사가 그의 삶에 녹아 있다. 귀가 어두워 보청기를 끼고 15년 전 사고로 다리를 다친 것 외에는 지금도 건강하다.
최고령 이석철 미카엘 수사의 증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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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석철 수사 |
이 수사는 “하느님 앞에 죄를 지어 부끄럽기 짝이 없다고 생각해 敎理(교리) 공부를 시작했다”고 한다. 수사가 된 그는, 평생 기도하며 살겠다는 꿈을 이뤘지만 또 다른 시련이 기다리고 있었다.
“일제가 물러갔다고 기뻐했는데 곧이어 소련군이 왔어요. 덕원수도원이 큰길 옆에 있었는데 소련군이 진군하다 들어와 ‘뭐 하는 집이냐’고 하더군요. 알고 보니 전부 독일 사람이고 검은 옷의 수도자들이거든요. 정중하게 이들을 대접했지요. 독일인 원장은 ‘우린 로마 교황청이 파견한 선교사다. 우리는 히틀러를 반대한다. 그는 가톨릭을 박해했다’고 했더니 덕원수도원을 괴롭히지 않았어요.”
소련군이 물러가자 이번에는 조선 공산당이 들이닥쳤다. 키우던 가축과 농지를 모두 압류하고 독일인 수도자와 한국인 신부를 강제수용소로 압송했다.
“한국인 신부들과 독일인 수도자는 모두 데려갔지만 저희 같은 평수사들과 신학생은 풀어줬어요. ‘너희는 독일인에게 박해를 당했으니 해방해 준다’는 겁니다. 그네들은 ‘해방’이라 불렀지만 우리는 ‘쫓겨났던’ 겁니다. 결국 부산으로 피란 가서 다시 수도 공동체를 세웠고 산전수전 다 겪고 왜관에 둥지를 틀었습니다.”
[왜관수도원 시절(1952~)]
1952년 1월 일본에 도착한 티모테오 비털리 신부는 패전국의 추위와 스산함을 온몸으로 느꼈다. 그는 덕원에서 추방된 수도자들을 돌보라는 명을 받고 한국으로 가는 길이었다. 한국 베네딕도회 장상으로 임명된 것이다. 덕원수도원 소속 선교사였던 그는 1948년부터 미국 뉴저지주 뉴튼 수도원에서 라틴어 교사로 봉직하고 있었다.
역시 덕원수도원 소속으로 있다가 독일로 건너간 노규채 아우구스티노 신부와 만나 한국행을 서둘렀다. 두 사람이 부산에 도착한 날이 1952년 1월 25일이었다. 이들은 부산에 피란 와 있던 ‘덕원 형제들’을 불러 모았다. 형제들은 부산항 부두, 미군 막사에서 막노동을 하면서 신앙을 지키며 다시 덕원과 연길로 돌아갈 날을 손꼽고 있었다.
하지만 전쟁은 계속됐고 돌아갈 길은 점점 어려워졌다. 티모테오 신부는 수도자들이 기도하며 일할 ‘집’을 장만하는 것이 급선무라고 판단했다.
당시 천주교 대구대교구 崔德弘(최덕홍·요한) 주교는 티모테오 신부에게 낙동강 근처 작은 시골 본당인 낙산성당(지금의 가실)을 맡아 달라고 제의했다. 노규채 신부가 현장 답사를 하니 너무 외떨어진 시골이었다. 그곳 신부도 낙산行(행)을 말리면서 기차역도 있고 읍 소재지인 왜관을 추천했다. 베네딕도 수도자들은 1952년 6월 말 왜관으로 이사했다. 한국 베네딕도회 이형우 아빠스의 말이다.
“대구대교구의 호의로 왜관에 임시로 터를 잡고 덕원과 연길로 돌아갈 날을 손꼽아 기다렸어요. 하지만 그럴 가망이 없어 보이자 왜관에 수도원을 세웠고, 당시 지역사회가 요구했던 선교, 교육, 문화, 사회사업을 벌였죠.”
인영균 원장은 “왜관수도원 옆에 바로 왜관역이 있다. 통일이 되면 열차 타고 덕원으로 가려고 했다”면서 이렇게 말했다.
“낙동강 전투에서 얼마나 많은 이가 죽었나요. 거기에 왜관수도원의 존재 이유가 있지 않나 싶어요. 평화와 기도가 바로 왜관수도원의 모토입니다. 100주년을 기념해 세운 성당도 남북통일 기원하는 뜻에서 ‘평화의 성당’이라 이름 지었죠.”
왜관수도원이 마련되자 독일로 송환된 많은 수도자가 다시 한국으로 돌아왔다. 개중에는 북한 수용소에서의 악몽 같은 기억 때문에 ‘한국 선교가 끝이 났다’고 생각하는 이도 더러 있었다. 하지만 이들은 스스로 원해서 다시 한국으로 왔다.
살아남은 선교사들, 다시 한국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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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저녁기도를 마치고 성당을 나오는 이형우 아빠스(앞줄 왼쪽). |
〈사제복을 입지 않은 그는 상상하기 어렵다. 중후한 인품, 약간 경직된 듯한 깍듯한 예의는 자유분방한 사람들에게 익숙한 영국인에게는 낯설었다. 동아시아에서의 30년도 그가 속속들이 독일인이라는 것을 바꾸지는 못했다. 그는 선교지 사람들에게 깊은 감동을 준 듯한데, 한국에 파견된 독일 베네딕도회 선교사 모두가 그랬다는 사실을 나중에 알게 되었다. 그는 전형적인 독일인으로 대단히 인상적인 ‘교회의 군인’이었다.>
엑베르토 신부는 1956년 7월 23일 한국으로 다시 돌아와 경북 왜관에 정착했고 경북 성주·낙산·약목성당 신부로 일하다 1986년 1월 왜관에서 선종했다. 인영균 원장의 말이다.
“강제수용소에 끌려갔다가 살아남은 독일인 수도자들은 한국전쟁이 끝난 뒤 시베리아 철도를 통해 고향 독일로 송환됐어요. 풀려나기 직전, 수용소 생활로 삐쩍 마른 몸을 숨기려 이분들을 평양으로 데려가 잘 먹여 살을 찌웠다고 하더군요. 갑자기 기름진 음식을 먹고 좔좔 설사를 했다는 얘기가 전해져요. 해외 언론에 자신들의 만행을 숨기려는 의도겠지요.
반면 한국인 평수사들은 전쟁 직후 뿔뿔이 남하했는데 하느님의 섭리인지, 모두 부산에 모였어요. 1951년의 일입니다. 10여 명이 모여 공동체 생활을 했는데, 낮에는 미군부대나 부산항 부두에서 막노동을 했고 밤에 기도하고 지내다 1952년 초 왜관에 정착했어요.”
그들은 왜 왜관을 보금자리로 택했을까. 왜관은 낙동강 전투의 경계점을 이루는 곳이다. 왜관이 남한을 지키는 마지막 보루였던 셈이다. 이날 기념미사에 참석한 金寬容(김관용) 경북도지사는 “덕원 수도자들이 왜관으로 모이게 된 것은 참으로 경이롭다”며 “한국전쟁 당시 낙동강 방어선인 왜관이 나라를 지켰음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강우일 주교는 베네딕도회가 백동과 덕원을 거쳐 왜관으로 내려간 것에 대해 “지난 100년 동안 3번의 급변, 그러니까 일제 치하와 조선 공산당의 탄압, 한국전쟁을 겪으며 수도회가 이뤄놓은 터전을 아낌없이 내놓고 빈손으로 하느님의 새로운 포도밭으로 나갔다. 그것이 수도회의 100년”이라며 의미를 부여했다.
어려운 이웃들 속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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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왜관에 있던 옛날 수도원 성당. |
왜관수도원은 ‘독일 뷔르츠부르크 나환자구호협회’와 ‘미세레오르 재단’에 도움을 청했고 지원을 끌어냈다. 협회 측에서는 왜관 인근 지역의 한센병 환자 거주지를 하나로 통합, 환자들을 한군데에서 돌볼 것을 한국 정부에 요구했다고 한다. 왜관에 위치한 ‘성신원’은 그런 배경에서 생겨났다.
1962년 건립된 성심의원(現 가톨릭병원 성주 분원)은 지금도 남아 있다. 이 병원은 왜관수도원 목공소에서 내부 공사를 했고, 의료기기와 약품들은 협회에서 공급해 주었다. 대구 파티마 병원 의사인 디오메데스 메페르트 수녀가 정기적으로 환자를 찾았다. 지금도 마을 성당 앞에는 그녀의 흉상이 있다.
디오메데스 수녀는 1주일에 한 번은 왜관의 또 다른 한센병 환자 정착촌인 ‘베타니아원’, 연중 네 번은 상주와 문경에도 갔다. 중증 환자는 구급차를 불러 실어 날랐다.
1963년 말 엑베르트 신부가 사목한 ‘성신원’에는 환자 97명과 미감아동 46명이 살았다는 기록이 있다. 호노라트 밀레만 신부가 건립한 왜관 ‘베타니아원’에는 환자 97명과 건강한 어린이 27명이 살았다. 점촌본당이 운영한 ‘상신원’에는 환자 122명과 어린이 40명, 성주 ‘성모성심원’에는 환자 35명과 어린이 16명이 정기적으로 치료를 받았다고 한다. 정진석 추기경의 회고다.
“왜관수도원은 오갈 데 없는 나환자 정착촌을 4군데나 세웠고 결핵환자와 독거노인을 위한 마을도 세웠어요. 또 산업화 그늘에 가려진 노동자와 외국인 노동자를 위해 사랑의 봉사활동도 펴왔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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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린이들과 함께한 엑베르토 되르플러 신부. |
“한센병 환자들이 자립할 수 있도록 도와주려 해도 돈이 없었죠. 농작물이라도 키우려면 돈이 있어야 하지 않습니까. 기도하는 수사님들이 밤낮 일해도 얼마나 벌겠어요? 전통적으로 수도회는 세상의 재화를 올바른데 사용할 수 있도록 길을 마련하는 역할을 해왔어요. 열심히 벌고 기부받은 돈을 투명하게 양심에 따라 쓰는 게 수도원의 중요한 기능이죠. 독일인 수도자들은 돈을 구하기 위해 독일로 가서 거지 행세를 하며 구걸을 했습니다. 딱한 한국 사정을 보여주며 ‘제발 도와달라’고 호소했죠. 그래서 1마르크, 2마르크씩 받은 돈이 왜관수도원 계좌로 들어왔어요. 그걸로 한센병 환자를 위한 공간을 만들었고 양계장을 할 수 있도록, 자그마한 토지라도 소유할 수 있게 자금을 대주었어요.”
왜관수도원 신부와 수사들은 근대화 과정에서 낙오한 농민과 노동자를 위한 인권운동도 활발히 전개했다. 경북 구미에 독일의 ‘농촌 청년운동(Landjugendbewegung)’을 본떠 ‘한국 가톨릭 농촌청년회’가 설립된 것이나 ‘구미 노동자 센터(現 구미 가톨릭 근로자 문화센터)가 세워진 것도 베네딕도회 수도자들의 노력 덕분이다.
구미 노동자 센터는 1970년대 후반부터 노동자들에게 체계적으로 노동권을 가르치고 지역 노조를 결성하는 구심점 역할을 했다. 또 노동법의 보호를 받지 못하는 베트남, 필리핀, 파키스탄 노동자들에게 법 규정을 설명하고 고용주들에게 법 준수를 촉구하는 일도 했다.
지난 8월 25일 선종한 헤르베르트 보타와(한국명 許昌洙) 신부는 1970~80년대 군사정부 시절 민주화에 앞장선 베네딕도회 수도자다. 독일 뮌헨대학 신학과(철학박사)에 다니던 1968년 사제 서품을 받은 뒤 유신헌법이 공포되던 1972년 10월 한국에 왔다. 대구가톨릭신학원 원장을 거쳐 지난 1985년부터 구미 가톨릭 근로자 센터 소장을 맡았고 국제엠네스티 한국지부장(1991~2002)도 지냈다. 2005년에는 ‘국가인권위원회 대한민국 인권상’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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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분도출판사에서 펴낸 책들. |
경찰이 수배학생을 숨기지 말 것을 요구할 때도 “길을 가다 한국인이 다쳐 쓰러져 있다면 내가 외국인이기에 그냥 지나쳐야 하느냐”며 오히려 야단을 쳤다고 한다.
왜관수도원은 ‘분도출판사’를 세워 각종 가톨릭 출판물을 펴냈다. 전국 판매망을 갖춘 분도출판사의 본사가 왜관에 위치하고 있다. 1970년대 ‘해방신학’을 처음으로 국내에 소개한 것도 분도출판사였다. 헬러 카마라의 <평화 혁명>은 분도출판사가 발간한 초창기 도서 중 하나다.
그때까지만 해도 왜관수도원 분도출판사에서 발간된 책들은 ‘한국 천주교 주교회의’ 소속의 한 위원회를 통해서만 판매됐다. 어느 날 주교회의에서 “우리는 이런 책이 필요 없다”고 하자 왜관수도원의 세바스티아노 로틀러 신부는 “우리는 이런 책을 계속 만들겠다”고 고집을 꺾지 않았다. 세바스티아노 신부는 가방 두 개에 책을 넣고 서울의 서점을 찾아다니며 책을 팔았다.
광주 민주화운동 외부에 알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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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혜화동 성당 모습. 베네딕도회의 백동 수도원터에 세워졌다. 그곳에 동성고, 가톨릭大 성신교정, 교리신학원 등 한국 가톨릭 교육기관이 모여있다. |
“왜관수도원은 가톨릭 저항운동의 시작이 됐던 곳이지요. 분도출판사는 안 팔리는 책, 남들이 외면하는 책만 찍었죠. 다른 출판사가 안 찍는 책을 우리가 찍었고, 그렇게 탄압을 당했습니다. 책을 통해 민주화운동에 큰 역할을 했고 그 덕분에 판금조치를 당하고 신부, 수사들이 수배당했지요.”
“그런 저항정신은 어디서 나오나요?”라고 묻자 인영균 원장신부는 “이 시대가 어디로 가야 하는지 함께 아파하고 고민하는 것이 수도원의 역할”이라고 말했다.
1980년 5·18 광주 민주화운동이 세상에 알려진 것도 왜관수도원을 통해서였다. 당시 생생한 현장 기록물도 수도원이 입수, 전국에 배포했다. 압착 롤러로 문서를 복사한 뒤 이를 목공소 가구 납품차에 숨겨 서울로 운반했다는 것이다.
길은 저절로 생기지도, 누가 억지로 닦아 만들어지지도 않는다. 길은 길이 아닌 곳을 오래오래 다님으로써 길이 된다. 길은 인간이 지상에 남긴 자취들 중에서 가장 강인하고 가장 겸손하다. 막히면 돌아가고 사람의 발끝에서 끊임없이 새로 생겨나는 것이 바로 길이다.
100년의 길
한국 베네딕도회가 혜화동과 함경도 덕원, 연길을 거쳐 왜관으로 이어진 길도 마찬가지다. 아무도 가지 않으려는 가장 낮은 길을, 가진 것 다 내놓고 외롭게 걸어왔다. 그 길에서 보낸 맨발의 역사가 이제 100년이 된 것이다.
현재 한국 베네딕도 수도원 소속 142명의 수도자들 가운데 71명이 왜관 본원에서 생활하고 있다. 또 본원을 중심으로 경기 남양주의 요셉 수도원, 미국 뉴저지에 뉴튼 수도원이 있다. 수도자들이 없어 문을 닫은 뉴튼수도원을 왜관수도원이 인수한 것이다. 또 서울과 부산, 대구, 금남, 화순에도 분원이 있다.
왜관의 작은 마을에서 성장한 수도원이 전국은 물론 해외에도 진출한 것은 놀랍다. 겨자씨처럼 작은 왜관의 공동체가 국내는 물론 해외로 뻗은 커다란 열매가 된 것이다. 그 열매가, 모든 수도자의 바람처럼, 다시 북한에서 꽃을 피울 것이 틀림없어 보인다.⊙
▣ 베네딕도 수도회와 오틸리엔 연합회
베네딕도회란 가톨릭 교회 내의 수도회의 하나다. 1500년 전 이탈리아 누르시아 출신 성 베네딕도(480~547경)가 저술한 수도규칙을 따르는 남녀 수도회들의 연합을 일컫는다. ‘베네딕도회’가 처음 한국에 들어왔을 때 ‘芬道會(분도회)’라고 표기한 것이 지금까지 이어진다.
한국에 성 베네딕도회가 처음 들어온 것은 1909년 2월 독일 상트 오틸리엔 수도원의 선교사 두 명이 서울에 들어오면서부터였다. 그해 서울 혜화동에 설립한 가톨릭 교회 최초의 남자수도원이 왜관수도원의 전신이다.
오틸리엔 연합회는 1884년에 창설됐다. 이들은 먼저 수도승들을 東(동)아프리카에 선교사로 파견했는데, 대부분이 순교하거나 병으로 사망했다. 이후 아시아로 눈길을 돌려 1923년 필리핀 마닐라 대교구에 수도 공동체를 설립했다. 1990년에는 고아들을 위해 설립된 인도의 쿠밀리 수도원이 오틸리엔 연합회에 편입됐다.
1923년과 1959년에는 베네수엘라와 콜롬비아에 각각 공동체를, 1924년에는 北美(북미)에도 진출, 미국 뉴저지주 뉴튼에 공동체를 세웠다.
▣ 세바스티아노 로틀러 신부
출판으로 독재정권에 항거
세바스티아노 로틀러 신부의 한국 이름은 林仁德(임인덕·73)이다. 고향은 南(남)독일의 뉘른베르크 지방이다. 사제서품은 1965년 4월에 받았다. 이듬해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화물선을 타고 일본 고베와 대만 카오슝, 인천, 부산을 거쳐 왜관에 도착했다. 그의 나이 서른 무렵이었다.“대학생이던 스무 살 때 聖召(성소·성직자가 되기 위한 신의 부르심)를 진지하게 고민하기 시작했죠. 뷔르츠부르크大(대)에서 철학과 신학을 공부했고, 뮌헨대에서 계속 공부했어요. 당시 대학생들은 제3세계에 대해 많은 고민을 했죠. 2차 세계대전 이후 아프리카 난민이 많이 발생했잖아요. 유럽 사람으로서 책임이 있지 않으냐, 이들을 위해 유럽이 책임져야 한다고 생각했지요. 그때만 해도 한국에 대해선 잘 몰랐어요.”
사제의 길을 걷겠다고 결심한 뒤 요셉 쟁그라인 신부를 만난 것이 한국행을 결심한 계기가 됐다. 요셉 신부는 평양 수용소와 감옥에서 4년여를 혹독하게 견뎠던 베네딕도회 신부였다.
“그분은 1954년 독일로 돌아왔어요. 당시 아데나워 수상이 스탈린과 김정일에게 직접 전화를 걸어 포로 송환을 요구했다고 합니다. 대신 자동차와 각종 건설장비를 주었다고 하더군요. 개인적으로 아데나워 수상을 지금도 존경해요. 요셉 신부님을 통해 많은 이야기를 듣고 한국문화에 대해 알게 됐어요. 그즈음, 경제학과 정치학을 공부하러 온 한국 사람을 만나 좋은 인상을 받았죠.”
1966년 한국에 온 뒤 2년 동안 서울에서 한국어를 공부하고 경북 성주성당 보좌신부와 점촌성당 본당신부, 1971년부터 1993년까지 분도출판사 사장을 역임했다.
<평화혁명>, <해방신학>, <종의 목마른 노래>, <자유란 무엇인가>와 같은 책들을 그의 손을 거쳐 펴냈다. 가난한 민중의 얼굴을 담은 사진작가 최민식의 사진집도 분도출판사에서 간행됐다. 출판으로 독재정권에 항거한 셈이다.
“분도출판사를 갑자기 맡게 됐어요. 해방신학 서적과 시청각 자료, 노동사목, 농부들을 위한 활동을 많이 했어요. 한국정부가 좋아하지 않았어요. 당국의 검열에 많이 걸렸지만 우리는 인권과 자유, 정의를 중요하게 생각했지요. 또 나중에는 여성문제와 환경문제와 관련된 책도 펴냈어요.”
1980년 5.18 광주사태도 그를 통해 세상에 알려지게 됐다.
“광주 사람들이 우리 출판사에서 잡지 하나를 인쇄했는데 날짜는 기억에 나지 않지만 월요일 정오쯤 왔는데 ‘큰일 났다. 광주에 문제가 생겼다’고 해요. 신문을 보니 ‘군인 3명 사망, 민간인 1명 사망’이란 보도가 났어요. 그 사람이 본 것을 기록하고 녹음했지요. 그로 인해 나중에 7명의 신부가 감옥에 갔지요. 저는 양심에 따라 행동하면 경찰의 진술을 거부할 수 있다고 생각했어요. 수도원 아빠스의 명령도 양심에 따라 거부할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그는 한국에서 청춘을 살랐지만 “다시 태어나도 한국으로 오겠다”고 말했다.
“다시 살아도 사제의 길을 걷고 싶어요. 그리고 다시 한국으로 돌아와 가난한 이웃들과 함께 기도하고 싶어요.”
▣ 영구귀국한 겸재 정선의 화첩
“한국인의 것을 고향으로 돌려보낸다”
베네딕도회 한국 진출 100주년을 기념해 겸재 정선의 ‘金剛內山全圖(금강내산전도), ‘九龍瀑(구룡폭)’, ‘咸興本宮松(함흥본궁송)’ 등 미공개 그림 21점이 화첩에 묶여 왜관으로 돌아왔다. 이 화첩은 일제강점기인 1925년 독일 노르베르트 베버 총아빠스가 한국을 방문했을 때 수집해 갔던 것이다.겸재의 화첩은 그동안 독일 오틸리엔 수도원에 보관돼 있다가 영구임대 형식으로 돌아왔다. 반환 시점은 지난 2005년이지만 오틸리엔 수도원과의 약속대로 한국 선교 100주년을 맞아 이번에 일반에 공개한 것이다.
겸재 정선의 그림은 초기 조선 산수화의 특징을 고스란히 담고 있다는 평이다. 강한 농담의 대조 위에 청색을 주조로 암벽의 면과 질감을 나타낸 것이 특징이다.
선지훈 신부는 “화첩 반환은 왜관의 형제 수도원에 대한 깊은 신뢰의 표시와 함께 ‘한국인의 것을 고향으로 돌려보낸다’는 뜻을 담고 있다”며 “외국으로 반출된 우리 문화재의 무상 반환에 아름다운 선례를 남겼다는 점에서 큰 의미를 지닌다”고 밝혔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