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망을 잃지 말고 살아 있기를 간절히 기도한다
姜哲煥 조선일보 기자
⊙ 1968년 평양 출생.
⊙ 1963년 北送된 在日 북송교포 가족으로서 온 가족이 1977년 8월 함남 요덕군에 위치한 정치범수용소에 수감. 10년간의 수감생활 끝에 출소, 탈북 후 1992년 8월 대한민국에 입국.
⊙ 한양대 무역학과 졸업.
⊙ 한국전력공사 근무.
⊙ 저서: <대왕의 제전> <수용소의 노래>.
⊙ 상훈: 타임지 선정 ‘아시아의 영웅’.
지금으로부터 32년 전, 그러니까 우리가 아홉 살 때 너희와 처음 만났던 그때를 지금도 잊을 수 없다. 아마 내 인생에서 상상도 못했던 지옥을 처음으로 경험했던 때여서 우리에게는 평생 잊을 수 없는 날이기도 할 거야. 할아버지가 지은 죄로 온 가족이 요덕수용소로 끌려온 이후 수용소 학교에 간 첫날 우리는 곁눈질로 서로를 바라보았지. 수용소 학교 교장(보위원)은 1000여 명의 학생 앞에서 “리룡모, 강철환, 리영국은 앞으로 나와”라고 소리쳤고, 우리 셋은 학생들 앞으로 나가 모두에게 새로 온 학생임을 소개했었어.
“여기는 평양도 함흥도 아니기 때문에 학교 규율을 어기고, 일을 제대로 하지 않으면 죽을 각오를 하라”는 교장의 협박에 처음부터 기가 죽어 얼마나 두렵던지…. 아마 너희도 같은 심정이었을 거야.
룡모 너는 나와 같은 평양에서 왔고 영국이는 함흥에서 왔지만, 우리 모두의 공통점은 부모님이 무슨 죄를 지었는지도 모르면서 그곳에 서 있었다는 것이었다.
우리가 학교에서 처음으로 한 일은 학교에서 15里(리) 떨어진 산속에서 통나무를 나르는 일이었지. 나는 노동이라고는 해본 적이 없는 평양 아이여서 나무를 어깨에 메고 달리다시피 온종일 움직이는 것이 너무나 감당하기 어려웠다. 달리고 또 달리다가 그만 정신을 잃고 쓰러졌는데 나중에 눈을 떠보니 학급 친구들이 나를 둘러싸서 발로 차고 있었어.
벌떡 일어나 싸우고 싶었지만 움직일 힘조차 남아있지 않았다. 나 혼자 이렇게 쓰러진 줄 알고 부끄러워 주위를 둘러보다가 옆에 쓰러진 너희를 발견하고 느낀 위안은 지금도 잊히지 않아. 수용소에 처음 들어오는 아이들은 누구나 겪는 신고식 같은 것이었지.
우리는 같은 날 수용소 학교에 입학하고, 또 같은 날 강제노동으로 쓰러진 인연으로 아마 평생 친구로 맺어진 것 같다.
영양실조로 정신이 나간 룡모
영국이는 형 때문에 잡혀 왔다 했고, 너는 아버지 때문이라 했었지. 네 아버지가 노동당 前(전) 교육부 부부장을 지낸 엘리트로 최고위급 간부의 자녀들이 다니는 남산학교의 교원을 지냈고, 김정일과 그의 이복동생 김평일을 가르친 스승이었다는 이야기를 듣고 놀라던 일이 엊그제인 것만 같다.
그 후 몇 년이 지난 어느 날이었던가. 네가 영양실조에 걸려 정신이 나갔다(미쳤다)는 이야기를 듣고 남의 일 같지 않았었어. 우리가 수용소로 끌려온 지 6년쯤 흘렀을까 너희 가족이 수용소에서 석방된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얼마나 부럽던지 집에 가서 할머니에게 “왜 우리는 이곳에서 살아야 하냐”며 행패를 부린 기억이 난다.
그 후 4년이 지나 우리 집도 수용소에서 풀려나 요덕군 읍에 나와 처음 너의 얼굴을 봤을 때 얼마나 반갑던지…. 둘이 부둥켜안고 울었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다.
1990년 설날 술병을 들고 네 아버님께 새해 인사를 하러 갔던 때가 생각난다. 살아서는 절대로 나올 수 없다던 승호리 정치범 교화소에서 구사일생으로 살아 나온 아버님은 우리를 보고도 아무 말씀 없으셨지. 그러다가 우리가 부어 드린 술잔에 醉氣(취기)가 올라 눈물을 흘리시며 승호리 수용소 이야기를 하실 때 우리는 함께 분노했었지.
“사람들을 세워 놓고 기관총을 난사해 죽이고, 교화소 뒷산에는 사람을 매장하기 위한 구덩이가 파여 있었다”며 “요덕수용소는 아무것도 아니다”는 말씀을 하실 때 사실 나는 그 말을 믿을 수 없었다. 이 지옥 같은 요덕수용소보다 더한 곳이 있다니 말이야.
네 아버님의 절규 같은 이야기를 들으며 승호리에서 생을 마감하셨다는 할아버지 생각에 가슴이 미어졌다. 어릴 적 나를 무릎에 앉혀 놓고 귀여워해 주시던 할아버지가 간절히 그리웠다.
너와 나는 의형제를 맺고 “죽어도 같이 살고, 살아도 같이 살자”는 평생의 맹세를 했었지. 네가 가는 곳에는 내가 있었고 내가 가는 곳에는 네가 있을 정도로 우리는 함께 붙어 있었고, 그때 우리는 부모 형제보다 더 가까운 형제 같은 친구였다.
1991년 어느 겨울날 네가 여자친구네 집에 함께 있다가 그곳에 들이닥친 보위부 요원들에게 매를 맞으며 끌려갔다는 소식을 듣고 얼마나 속이 철렁했는지 모른다.
너희 3형제와 형수들까지 모두 다시 붙잡혀 수용소로 끌려갈 때 나는 너무 두려워 감히 너의 가족을 바래다줄 엄두조차 내지 못했었다. 훗날 소문에 네 아버님이 술김에 김정일을 비난한 것이 보위부에 보고돼 김정일의 지시로 영원히 나올 수 없는 수용소로 끌려갔다는 이야기를 듣고 얼마나 가슴이 아팠던지….
또다시 죽음의 수용소로 끌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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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함남 요덕 정치범수용소에서는 강제 노역과 고문, 공개처형 등이 공공연히 행해지고 있다. |
네가 끌려간 후 우연히 담당 보위원을 만나 네 이야기를 들었을 때 나는 속으로 참 많이 울었다. 보위부는 네게 모진 고문을 가하면서 나와 무슨 짓을 했는지 대라고 했지만, 함께 남한 방송 듣고 김정일을 비난한 사실을 끝까지 부인했다고 하더구나.
“그래서 강철환이 너는 살아난 것이다”라는 보위원의 말을 듣고 한편으로는 가슴을 쓸어내렸지만, 그 모진 고문을 당해야 했던 네 생각을 하니 치가 떨려 견딜 수 없었다. 내가 너의 입장이었으면 너를 끝까지 지켜 주었을까, 그 모진 고문을 견디어 냈을까? 나는 지금도 나 자신에게 반문해 보곤 한다.
네가 끌려간 뒤 남한 방송 청취한 것이 보위부에 보고돼 나를 잡으려는 보위부의 감시가 심상치 않아 위기를 느꼈고, 도주하다 죽는 한이 있어도 앉아서 죽지는 않겠다는 결심을 했었다.
아마 내가 탈북하기로 모진 마음을 먹은 것은 네가 수용소에 끌려가는 것을 보면서부터인 것 같다. 나는 탈북에 성공했고 지금 대한민국에 살고 있다.
그 후 나는 우리와 함께 요덕수용소에 처음 수용됐던 영국이의 형 영선씨를 만났다. 다대포에 침투했다가 망명한 형 때문에 영국이네 집이 요덕수용소로 끌려갔다는 사실을 그때 처음 알았다.
영선이 형은 나에게서 동생 영국이의 소식을 듣고 참 많이도 울었다. 그리고 2000년 이후 요덕수용소에서 나온 사람들에게서 영국이가 아직도 수용소에 갇혀 있다는 소식을 듣고 서글픈 마음 다잡을 수 없었다. 영국이가 가끔 내 이야기를 했다고 한다. 아마도 내가 망명한 이후 내 사진이 풍선에 실려 요덕수용소에 뿌려졌다고 하니 그곳에서 나를 아는 사람들은 내가 남조선으로 도망갔다는 소식은 다 아는 것 같다.
너무 미안하다
우리 셋이 함께 수용소로 끌려갔는데, 너희 둘은 수용소에서 죽었는지 살았는지도 알 수 없고, 나만 대한민국에서 이렇게 살고 있다. 너무 미안하다.
나름 요덕수용소를 세계 곳곳에 폭로해 그곳을 없애겠다고 동분서주했지만, 김정일은 아직도 요덕을 그대로 운영하고 있구나. 아마 나의 노력이 부족했기 때문이고, 내가 죽음의 문턱에 있는 너희를 살리기 위해 최선을 다한 것 같지 않구나.
가끔 집에 누워 북한에 두고 온 여동생과 삼촌들 생각을 하다 보면 너희 생각이 난다. 그 소꿉 시절 수용소에서 맺어진, 잊을 수 없는 인연과 함께했던 슬픈 추억들이 30년이 지난 오늘에도 내 가슴 깊은 곳에 맺혀 있다.
너희가 기적적으로 생존해 김정일 정권이 망하는 날 함께 만나게 되면 얼마나 좋을까. 너무나 어렵겠지만, 부디 희망을 잃지 말고 살아 있기를 간절히 기도하고 또 기도할 뿐이다.⊙
이순 선배님께
작가에게 가장 두려운 것은, 육체의 고통보다 ‘잊히는 것’
馬光洙 연세대 국문과 교수
⊙ 1951년 서울 출생.
⊙ 대광고, 연세대 국문과 졸업. 同 대학원 국문학 석·박사.
⊙ 1977년 <배꼽에> 등 6편의 시가 <현대문학>에 추천돼 등단. 홍익대 국문과 조교수, 연세대 국문과 부교수 역임. 장편소설 <권태>를 <문학사상>에 발표, 소설가로 데뷔.
⊙ 저서:<상징시학> <왜 나는 순수한 민주주의에 몰두하지 못할까> <사라를 위한 변명> <카타르시스란 무엇인가> <윤동주 연구> <문학과 性(성)> <삐딱하게 보기> <비켜라 운명아> <연극과 놀이정신> 외 다수.
李筍(이순) 선배님께. 이순 선배님, 선배님이 지금 죽었는지 살았는지, 나는 그것조차 모릅니다. 인터넷으로 검색을 해 봐도 개인정보가 안 나오고, 또 선배님과 친했던 여자 선배님들에게 물어봐도 다들 모른다고 하더군요. 그래서 이렇게 잡지의 지면을 빌려 편지를 써 보게 되었습니다.
이순 선배님이 대학교수와 소설가로 활동하시다가 갑자기 뇌막염에 걸려 쓰러지신 것이 내 기억에는 1986년 9월입니다. 아름다운 용모를 가진 學科(학과) 女(여)선배님으로서(나보다 나이가 두 살 많으셨지요), 또 같이 문학을 하는 동지로서 우리의 인연은 무척 따뜻하고 보람찼었습니다. 그런데 선배님은 남편과 두 아들을 남겨두고 갑자기 쓰러져 긴 병환에 시달리게 되었던 것입니다.
병의 증상은 백치 상태가 되어 글도 못 쓰는 형편이었고, 결국 학교(청주대 국문과)에도 못 나가게 된 것이지요. 그때 내가 얼마나 안타까워했는지 모릅니다. 내게는 가장 가까운 異性(이성) 친구이자 문학 동지였으니까요.
감히 쳐다보지도 못할 나무
학창시절의 이순 선배님이 생각납니다. 내가 1969년에 연세대 국문과에 입학했을 때 선배님은 3학년이셨죠. 선배님은 항상 미니스커트를 입고 다녔고, 머리를 허리께까지 길게 길러 순진무구한 내 마음을 황홀한 羨望(선망)으로 가득 채워 놓았습니다. 하지만 1학년 초년생인 나에게 3학년 누나인 선배님은 감히 ‘쳐다보지도 못할 나무’로만 보였습니다.
그러다가 우리가 친해지게 된 건 1969년 가을에 국문과 연극부에서 공연했던 작품에 우리 둘이 배역을 맡으면서부터였습니다. 내가 이순 선배님의 아버지 역할을 맡았었지요.
그 뒤 선배님은 학부를 졸업하고 곧바로 대학원 석사과정에 진학했고, 24세 되던 나이에 열두 살 연상의 夫君(부군)과 서둘러 결혼을 하셨습니다. 그때 내가 결혼식장에 賀客(하객)으로 참석하여 內心(내심) 얼마나 배가 아팠는지 모릅니다. 웨딩드레스를 입은 헌칠한 키의 선배님이 꼭 동화 속 공주님같이 느껴져서입니다.
그때는 나도 대학원에 입학해서 학과 조교일을 보고 있었는데, 선배님의 첫 직장을 내가 소개해 드리게 되는 일이 그래서 생겼습니다. 국문과 사무실로 어느 여자고등학교에서 교사 추천을 의뢰해 와, 내가 학과장님께 말씀 드려 선배님을 보내게 된 것입니다.
박사과정에 들어가 대학강사를 할 처지가 못 되었습니다. 부군이 직장을 그만두셔서 家計(가계)를 책임져야 했기 때문입니다. 그때 내가 얼마나 안타까워했는지 모릅니다. 그러면서 나는 詩(시)로, 선배님은 小說(소설)로 문단에 등단을 했고, 틈틈이 작품을 발표했습니다. 그러나 아이 둘을 기르면서 학교 교사 노릇까지 하는 선배님께선 자주 글을 쓸 형편이 못 되었습니다. 그런 도중에도 우리는 꽤 자주 만나 문학에 대한 토론을 벌이기도 하고, 장래 문제에 대해 서로 걱정하기도 했습니다.
선배님이 작가로서 제2의 탄생을 하시게 된 것은 1979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중편소설 부문에 당선하여, 再(재)데뷔를 하면서부터였습니다. 그 뒤 선배님은 많은 원고 청탁을 받게 되어 학교 교사생활을 그만두고 전업작가의 길을 걸어가시게 됩니다.
병마에 쓰러지고, 남편과 死別하고…
때마침 내가 박사과정을 마치고 홍익대에 전임교수로 취직된 것도 1979년 봄이었습니다. 그때 내가 이순 선배님과 만나, 한껏 즐거운 마음으로 우리 두 사람의 새로운 출발을 술을 마시며 自祝(자축)했던 기억이 새롭습니다. 그러다가 1년 후 선배님은 연세대 국문과 박사과정에 진학했지요. 그때 내가 선배님을 도와드릴 겸 해서 홍익대학교에 시간강사 자리를 주선해 주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다시 홍익대학교 내 연구실 안에서 많은 대화를 나눌 수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내가 1984년 봄에 연세대 국문과로 직장을 옮길 때, 다행히 이순 선배님도 청주대 국문과 전임교수로 발령받아 가시게 되었죠. 그리고 2년 있다가 그만 病魔(병마)에 쓰러지신 것입니다.
더욱 내가 가슴 아팠던 것은, 몇 년 후 선배님을 간병하던 부군께서 먼저 癌(암)으로 세상을 뜨신 것입니다. 참으로 무서운 불행의 연속이었습니다. 그 소식을 잡지를 통해 접한 이후로, 나는 더 이상 선배님 소식을 들을 수 없었습니다. 이사를 가셨는지 전화를 걸어도 받는 사람이 없었고, 知人(지인)들도 전혀 소식을 전해 주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모두 잊힐 것이다
인생이 참으로 무섭다고 느끼게 된 것은 선배님의 急病(급병)이 처음이었고, 그 다음에 내게 닥쳐온 불운 때문이었습니다.
나는 1989년부터 장편소설 <권태>를 시작으로 소설도 쓰게 되었습니다. 그러다가 얼마 안된 1992년에 소설 <즐거운 사라>로 감옥살이까지 하게 되었고, 결국 대법원에서 유죄판결을 내려 학교에서도 해직되었습니다.
그런 뒤 1998년에 복권되어 학교로 다시 복직했는데, 2000년에 가서는 학과 교수들의 집단 이지메로 ‘교수 재임명 탈락’ 사건이 났어요. 다행히 학교 당국에서 배려해 줘서 잘리는 것은 면했지만, 가까이 지냈던 친구 교수들에 대한 격심한 배신감으로 인해 나는 깊은 우울증에 걸려 학교를 휴직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면서 정신병원에 입원하기도 하고 자살 시도도 몇 차례 하다가, 겨우 정신을 차려 학교에 복직한 게 2004년입니다. 그리고 다시 2007년 내 인터넷 홈페이지에 실은 작품이 외설죄에 걸려 또 법적 처벌을 받았지요.
이렇게 어려운 일을 당할 때마다 간절히 생각하는 게 선배님이었어요. 내게는 정말 누님 같은 助言者(조언자)였기 때문이죠. 그러나 도저히 선배님의 近況(근황)은 알아볼 길이 없었습니다. 정말 살아갈수록, 무서워지는 게 ‘인생살이’입니다. 한 치 앞의 위험을 모르고 불안하게 살아가는 것이 우리의 實存(실존)이니까요.
세상이 무섭고, 사람이 무섭고, 운명이 무서울 때마다 나는 이순 선배님의 돌연한 불행을 생각해 보게 되더군요. 요즘 예전에 내게 증정해 주신 선배님의 소설을 다시 읽어보고 있습니다. 장편소설로 <바람이 닫은 문>과 단편집으로 <우리들의 아이>, <佰父(백부)의 달>이 있더군요. 그리고 수필집도 내셨었는데, <제3의 여성>이라는 책이었습니다.
다시 읽어봐도 상당한 文才(문재)가 느껴지는 작품들입니다. 그래서 다시 인터넷 헌책방을 뒤져 선배님의 다른 장편소설 <네게 강 같은 평화>와 <숨어있는 아침>도 구입하게 됐습니다. 너무 아깝게 잊힌 작품들이라고 생각되어, 나는 선배님의 소설들을 가지고 학술논문도 한 편 써서 학회지에 발표하기까지 했습니다. 그게 선배님과 가까이 지냈던 후배의 도리가 아닌가 해서요.
지금의 내 나이가 환갑을 바라보고 있으니, 이순 선배님도 환갑쯤 되셨을 겁니다. 예전에 캠퍼스에서 함께 젊은 낭만을 즐겼던 때를 추억해 보면, 정말로 세월의 無常(무상)함이 느껴집니다.
나도 이제 늙어 몸 아픈 곳이 많습니다. 언제 선배님처럼 쓰러질지 몰라요. 그러나 작가에게 가장 두려운 것은, 육체의 고통보다 ‘잊히는 것’일 것입니다.
이순 선배님은 안타깝게도 잊힌 작가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나는 이른바 문단이나 학계의 ‘왕따’입니다. 내가 겪은 筆禍(필화)사건도 벌써 잊혀 가고 있고, 또 내가 죽으면 그 사건은 물론이고 내 작품들 또한 잊힐 것입니다. 선배님의 불행을 생각하면, 자꾸만 나의 미래가 점점 더 불투명하게만 보입니다.
이순 선배님, 아직 서울 어디엔가 계신다면 부디 건강을 회복하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우리 둘이 다시 만나 이야기 꽃을 피워 보고 싶습니다. 2009년 7월에 마광수가 씁니다.⊙
아무것도 해드린 것이 없는 아들이 어머니에게
“아직도 밥상 앞에서 어머니를 보내지 못하고 있습니다”
朴東奎 문학평론가·서울대 명예교수
⊙ 1939년 경북 월성 출생.
⊙ 서울고, 서울대 국문과 졸업. 同 대학원 석·박사.
⊙ 서울대 국문과 교수, 토론토대학 객원교수, 중앙공무원 교육원 겸임교수 역임.
⊙ 現 월간 시 전문지 <심상> 편집고문.
⊙ 저서: <카오스의 질서화 작용> <현대한국소설의 이해> <현대한국작가 연구> <글쓰기를 두려워 말라> 등 다수.
⊙ 상훈: 현대문학상, 황조근정훈장.
어머니가 세상을 떠난 지 벌써 십 년이 훌쩍 지났습니다. 편집자가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이에게 보내는 편지를 쓰라고 해서 한참이나 생각해 보았지만 어머니보다 더 소중한 분이 누가 계시겠습니까? 남들은 이미 세상을 떠난 이에게 철 늦게 편지를 쓴다고 하겠지만 제 마음에는 아직도 어머니에게 못 다한 사연들이 구름처럼 쌓여 있습니다.어머니, 우리가 연기 나는 기차를 타고 처음 서울에 와서 자리 잡은 곳이 원효로 3가 전차 종점 바로 건너편에 있던 일본식 연립주택이었지요. 하나의 벽을 두고 두 집이 붙어 있었던 이 집에서 저는 초등학교를 다녔지요.
좁은 마당 담장 곁에는 한여름부터 장작을 조금씩 모아서 쌓아 놓아야 한겨울을 보낼 수 있었지요. 어머니는 겨울이 올 때까지 장작을 조금씩 사 모았지요. 초등학교 4학년 때 눈이 소복하게 온 날 나는 이 마당에서 도끼를 들고 장작을 쪼갰지요.
비록 나이는 어렸지만 맏이였던 나는 집안의 일꾼이 되어야 했지요. 그런데 그날은 장작을 쪼개다 보니 손에 물집이 생겼지요. 그날 밤 어머니가 내 손에 잡힌 물집을 바늘로 따 주시면서 “네가 엄마를 도와주느라 손에 물집이 생겼구나” 했을 때 저는 하늘을 나는 것 같이 마음이 들뜨고 자랑스러웠습니다.
처음 고생하는 어머니에게 도움이 되는 자식이 되는 것이 얼마나 기쁜 일인지를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 도움이라는 것은 쉽고 간단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저 마음뿐 어떻게 해볼 수 있는 일들이 참으로 많지 않았습니다. 어려서 그랬겠지만 철없던 저는 도움은커녕 속만 상하게 해드린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지요.
신문팔이를 그만두게 한 어머니
제가 초등학교 5학년 때 어머니는 겨울이 다가오자 원효로 2가에 있던 용문시장에 가장 싼 김장거리를 살 수 있을까 하고 매일 다니셨지요. 그러다 어느 날 가게에서 어머니가 배추를 리어카에 담고 있는 동안 나는 김장 시장 안 배추를 산같이 쌓아 놓은 곳을 다니면서 배추를 다듬고 남은 배춧잎 중에서 싱싱한 잎사귀를 골라 리어카에 담았지요.
어머니가 앞에서 리어카를 끌고 내가 뒤에서 밀며 집으로 돌아오는 길이었지요.언덕길로 올라가다가 잠시 쉬는 사이 “배추 잎사귀는 왜 주워다가 리어카에 실었니?” 하고 어머니가 물으셔서 “말려서 시래기로 쓰면 되잖아요” 하고 대답했지요 그러자 어머니는 “철이 들어 집안 형편도 아네” 하고 내 손을 잡으셨지요.
어머니가 내 손을 잡고 철이 들었다고 하는데도 하나도 기쁘지 않고 겨우 시래기나 주워 오는 것밖에 할 수 없는 내가 속상하기만 했습니다.
이 속상함은 곧 내가 가장 소중하게 여기는 어머니에게 내 마음에 품고 있는 것들을 다 해드릴 수 없다는 무력감에 빠져들게 했습니다.
제가 초등학교 6학년 때 한국전쟁이 났지요. 아버지는 국군을 따라 남쪽으로 내려가시고 어머니와 어린 우리 삼남매만 서울에 남아 있게 되었지요. 어머니는 인민군이 서울을 점령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서 집안에 있던 옷가지와 놋그릇 은수저 등을 우리 집 앞 큰길가에 들고 나가 신문지 위에 펼쳐 놓고 하루 종일 땡볕에 젖먹이 셋째를 껴안고 앉아 있었지요. 나는 어머니 곁에서 놀기만 했지요.
그러다가 나도 무엇인가 해본다고 신문팔이로 나섰지요. 원효로에서 시청 옆까지 걸어가서 인민군이 찍어내는 신문을 받아다 충무로와 명동 근처에서 팔았지만 열 장을 받아 나와 들고 다니면 겨우 한 장을 팔 수 있었지요.
어느 날 중앙우체국 근처에서 신문을 들고 다니는데 인민군 장교가 나를 불러 세우고 신문 한 장을 사면서 북쪽 화폐를 주었지요. 계산을 하지 못해서 머뭇거리는 나를 보면서 장교가 “나도 집에 너만한 아이가 있어 거스름돈은 그냥 가져” 하고 가 버렸어요. 그날 어머니에게 북한 화폐를 내밀며 이 말을 하자 어머니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신문팔이를 그만두게 했지요. 자존심이 상하셨을까요?
며칠 뒤 다시 내가 아이들을 따라 세검정 자두밭에 가서 자두를 받아 팔겠다고 하자 어머니는 웃으면서 돈을 주었지요. 그런데 이 자두도 잘 팔지 못해서 결국 동생들과 함께 먹어 없애 버렸지요. 어머니는 “서툴러서 그렇지” 하면서 고생했다고 내 등을 두드려 주셨지요.
맛있는 사과 한 개 드리고 싶은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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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울대 국문과 졸업 무렵 어머니 故(고) 유익순 여사와 함께한 박동규 교수. |
제가 찾아 가서 문안을 드렸지만 몇 시간 앉아 있다가 오는 것밖에 없었지요. 어머니, 안방에 혼자 앉아 계시던 어머니와 헤어져 집 문밖에 나설 때면 눈앞이 캄캄했습니다. 부엌에 들어갔을 때 혼자 끼니를 해 드시느라고 새까맣게 타 버린 양재기와 때 묻은 냄비를 보면서 어떻게 해 드릴 수 없었던 저는 얼마나 속으로 눈물을 삼켜야 했는지 모릅니다. 어머니, “바빠서 잘 찾아뵙지 못해서” 하고 말문을 열면 어머니는 내 손을 잡으며 “다 안다” 하고 저를 다독거리셨지요.
어머니, 어머니가 우리 곁을 떠나기 전 다니시던 길을 지금도 걷고 있습니다. 내가 강의를 끝내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어머니를 찾아갔다가 나올 때면 내 가방을 들고 대문 밖까지 나와서 가방을 내밀며 “너무 힘들게 하지 마라” 하면서 손을 흔들던 어머니를 기억합니다.
병드신 몸으로 방안에서 대문까지 내 가방을 들고 나오신 이유를 저는 잘 알지요. 그런데 이제 겨우 어머니에게 맛있는 사과 한 개라도 드릴 수 있게 되었지만 어머니 곁에 있지를 못합니다. 이 좋은 세상에 사과 한 개라면 아이들도 웃겠지만, 우리 가족이 이틀을 굶었을 때 수수떡 다섯 개를 사서 우리 형제에게 두 개를 나누어 주시고 세 개를 신문지에 싸서 “내일 아침에 너희 줄게” 하시면서 어머니 혼자 굶으시던 얼굴이 지금도 생생해서 무력감만 가득한 제 심정에 어머니를 향한 정표를 보일 뿐입니다.
어머니, 아직도 밥상 앞에서 어머니를 보내지 못하고 있는 아들의 편지를 기쁘게 받아 주세요.⊙
나의 사랑하는 어머니에게
어머니가 손수 지어주신 옷
朴映宣 국회의원
⊙ 1960년 경남 창녕 출생.
⊙ 경희대 지리학과, 서강대 언론대학원, 美 미시간주립대 대학원 졸업.
⊙ MBC 기자, 보도국 경제부장, 뉴스데스크 앵커 역임.
⊙ 17·18대 국회의원, 現 민주당 정책위 수석부의장.
“그리워하는 데도 한 번 만나고는 못 만나게 되기도 하고, 일생을 못 잊으면서도 아니 만나고 살기도 한다.” 수필가 피천득 선생님은 가슴속에 간직한 아스라한 그리움을 이렇게 표현했지요.
요즘 생각해 보면 사랑하는 내 어머니에게 일생을 못 잊으면서 감사하다는 말을 해야 함에도 그 말 한 번 지금껏 제대로 아니 한 듯합니다.
“얘, 좀 일찍 다녀라….”
어제도 어머니는 제 귀가가 늦다며 걱정하셨습니다.
이제 제 나이 오십. 제 늦은 귀가를 아직도 걱정해 주시는 어머니가 계시다는 것은 정말 감사한 일입니다.
그러나 그런 어머니의 소중한 걱정에 대해 저는 아직도 감사는커녕 마치 짜증 어린 소리로 대꾸했지요.
“어머닌 제발 자식에 대한 안달 좀 내려놓으실 수 없나요?”
하나 곧바로 왜 어머니께 다정하게 대하지 못했는지 또 후회했지만, 어머니는 이미 댁으로 가신 후였습니다.
크림빵이 10원이던 시절이 있었지요. 아이들 얼굴만한 둥근 빵 속에 하얀색 크림이 들어간 삼립 크림빵 말입니다. 그 시절엔 버스 차비도 10원이었습니다.
그때 나는 국민학교, 요즘 표현으로 하면 초등학생이었지요. 어머니는 그 시절 내게 용돈을 한 달에 500원 주셨습니다. 그 500원 속에는 학교에서 돌아오는 차비가 포함돼 있었습니다. 크림빵을 매일 사 먹고 싶었지만 500원으로는 좀 부족했습니다.
하는 수 없이 크림빵이 먹고 싶으면 난 아이들과 종종 학교에서 집에까지 걸었던 기억이 아스라합니다.
그런 날이면 어제처럼 어머니는 왜 이렇게 늦었느냐며 호되게 야단을 치셨습니다. 대문 앞에서 저를 목이 빠지게 기다리시느라 지쳐 있던 어머니의 얼굴엔 반가움과 노여움이 교차했지요.
500원으로 한 달 살기
제가 울먹이며 크림빵 사 먹고 싶어 그랬다고 하면 어머니의 호통은 좀 수그러들긴 했지만, 그래도 어머니는 용돈을 늘려 주시지는 않았습니다. 그땐 그것이 좀 서운했지요. 그러나 저도 용돈을 늘려 달라고 떼쓰지는 않았던 기억이 납니다. ‘500원으로 한 달 생활하기’를 몸에 익히는 지혜를 알아 가고 있었는지도 모릅니다.
제가 사회인으로 첫발을 내디디면서 그때 저는 ‘어머니의 500원의 교훈’을 깨달았습니다. 풍족한 것보다 부족한 듯 살아가며 그 부족한 것을 만들어 가는 게 삶의 즐거움이며 더 소중한 것이라는 것을 말입니다.
그러나 제 아이에게 저는 그렇게 부족하게 살아가며 즐거움을 얻는 법을 아직 가르치지 못하고 있습니다. 어찌 보면 요즘 아이들은 너무 풍요롭고 풍족하여 부족함이 주는 삶의 기쁨을 찾는 방법을 모르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어렸을 때 제가 학교 길을 나서면 제 모습이 보이지 않을 때까지 골목길에서 제 뒷모습을 지켜보시던 어머니를 기억합니다. 골목길을 돌아설 때 혹시나 하고 뒤를 돌아보면 어머니는 늘 저를 보고 계셨고 저도 어머니를 향해 힘차게 손을 흔들었지요.
매일 아침 그렇게 어머니는 저를 학교에 보내셨지요. 그땐 몰랐지만 지금 생각해 보면 어머니의 그런 말없는 배웅은 제게 큰 힘이었습니다. 어디서나 언제나 어머니가 지켜보신다는 게 말없는 버팀목이었던 듯합니다.
인간에겐 항상 그렇게 지켜봐 주는 사람이 있다는 것이 삶의 원천이 된다는 것을 깨달은 것은 제가 어른이 된 후였습니다. 그런 어머니는 늘 학교에서 돌아오면 당근이 들어간 야채빵을 만들어 주시곤 했지요. 대문을 들어서며 “엄마!” 하고 문을 박차며 외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것이었고요.
어쩌다 “그래, 학교 다녀왔니?” 어머니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을 때 마치 집안이 텅 비어 있는 것 같은 허전함 때문에 이 방 저 방 기웃거리던 기억도 새롭습니다.
그런데 저는 제 아이에게 그렇게 하지 못하네요. 아이의 뒷모습이 보이지 않을 때까지 배웅하는 것은 물론 학교에서 돌아올 때면 아이는 으레 엄마가 집에 있다는 것을 기대할 수 없으니까요.
“엄마, 오늘은 언제 들어와요?”
학교에서 돌아와 전화를 거는 것이 고작 아이의 기쁨일 겁니다. 이렇게 엄마 노릇 하는 것이 과연 제대로 된 것인지 매일매일 반문합니다.
나를 지탱해 준 힘
어머니는 어린 저에게 늘 옷을 손수 지어 입히셨습니다. 겨울에는 뜨개질한 스웨터를, 여름이면 시원한 면으로 된 블라우스를 만들어 입히셨지요.
어머니가 만들어 주신 옷을 입고 나서면 그 독특함과 유일함 때문에 사람들은 늘 내게 그 옷 누가 짜 준 것이냐 누가 만들어 준 것이냐고 묻곤 했습니다.
그때 저는 왜 사람들이 꼬치꼬치 그런 것을 묻는지 잘 몰랐습니다. 옷은 당연히 어머니가 만들어 주시는 것으로 알았기 때문입니다. 어머니는 제 옷을 만들기 위해 자주 패션잡지를 사다가 보시곤 했던 기억이 납니다. 그 당시 제일 잘나가던 패션잡지가 일본에서 만든 <주부의 벗>이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제가 그 잡지를 보면서 이 옷이 예쁘다고 하면 얼마 안 있어 그와 같은 옷을 재봉질하거나 뜨개질하시던 어머니의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합니다.
“해마다 어쩌면 이렇게 키가 쑥쑥 크냐”며 새로 지은 옷을 가져다 대어 보고는 흐뭇해 하시던 어머니의 손길과 미소. 그 손길과 미소에서 한없는 사랑을 느끼며 컸다는 것을 이제야 더욱 소중하게 생각합니다.
제 아이에게 직접 옷 한 벌 만들어 주지 못하고 저는 “이 옷 입어라 저 옷 입어라” 참견만 하지요. 그런 저와 비교하면 어머니가 제게 베풀어 주신 사랑과 교육은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소중한 힘이요, 저를 지탱하는 근원이었다는 것을 이제 와서 이렇게 고백합니다.
“엄마! 학교 다녀왔어요!”라고 외치던 딸이 이제 나이 오십 되어 다시 크게 외칩니다.
“어머니! 사랑합니다.” ⊙
나의 뿌리, 그리고 내 미래의 모습인 엄마에게
“엄마, 가능한 한 오래오래 나 좀 부탁해요”
서현진 MBC 아나운서
⊙ 1980년 부산 출생.
⊙ 이화여대 무용과 졸업.
⊙ MBC 뉴스데스크, 생방송 화제집중, 일요일 일요일 밤에, 라디오 굿모닝 에프엠 진행.
⊙ 現 불만제로, 일요일 일요일 밤에 진행 중.
⊙ 상훈: 2001 미스코리아 대회 善, 포토제닉상, 미스월드 대회 베스트 드레서상.
“엄마! 나 미스코리아 나갈 거예요. 말리지 마.”대학 3학년이 되던 해 초봄, 느닷없이 던진 나의 선전포고에 엄마를 비롯한 식구들이 혼비백산했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네요. 지금 생각해도 미스코리아는커녕 예능 계통과 거리가 먼, 얌전한 집안 사람들 사이에서 나란 존재는 돌연변이요 사고뭉치 아니었나 싶어요.
지금 와서야 말이지만 그때 나는 우리 식구들의 반대에 대처할 준비를 치밀하게 했을 정도로 마음을 단단히 먹은 상황이었어요. 이대로 아무것도 이룬 것 없이 대학생활의 후반부가 시작된다니 견딜 수 없었거든요.
그런데 재미있는 게, 엄마가 그렇게 말렸는데도 정작 미스코리아로 호명되는 순간 나 바보같이 머릿속이 하얘지고 엄마 생각밖에 안 났던 거 있죠?
뭐든지 혼자 결정하고 어른스러운 척했지만 난 어쩔 수 없는 우리 집 막내인가 봐요. 그나저나 미스코리아 때도 대학 갈 때 그랬던 것처럼 엄마 기도발이 통했나? 나보다 훨씬 예쁜 애들도 많았었는데, 그죠?
그때부터였을까요? 내 삶이 평범함과는 거리가 먼 쪽으로 걷잡을 수 없이 흘러간 게 말이에요. 미스코리아에 미스월드, 대학 졸업할 즈음엔 아나운서 시험을 보겠다고 온 집안을 뒤엎고….
지금 생각해도 난 참 누굴 닮았을까? 아빠도 엄마도 남 앞에 나서면 얼굴이 홍당무가 되는 숙맥인데. 늘 튀고 싶어 안달했던 지난날들을 보내고 어느덧 5년차 아나운서가 되었어요. 엄마, 나 잘하고 있는 거 맞죠?
돌아보면 늘 엄마가 입버릇처럼 말씀하신 것처럼 내 20대는 행운의 연속이었던 것 같아요. 철부지에 제멋대로인 내 삶을 진짜 누군가 저 위에서 지켜주시는 게 아닐까 진지하게 궁금해질 정도로 말이죠.
이만하면 많은 사람에게 사랑도 받고 인정도 받으니 그만 만족하고 살아도 될 텐데 저는 아직 더 바라기만 하네요. 저 참 욕심쟁이죠? 왜, 히딩크 감독님이 2002년 윌드컵 때 그러셨잖아요.
“나는 아직도 배가 고프다.”
나도 히딩크 감독님처럼 아직 배가 고픈가 봐요. 나보다 못한 사람은 잘 안 보이고 자꾸 저 위로 위만 보고 쫓아가느라 고개가 꺾어질 듯이 목이 너무 아픈 거 있죠?
이런 제 욕심 때문에 너무 힘들게 살까 봐 늘 엄마가 자나 깨나 걱정하는 걸 알면서도 아직은 철이 덜 들었나 봐요. 욕심을 조금만 비우면 일상이 훨씬 느긋하고 여유 있을 텐데, 그럼 엄마가 내 걱정 훨씬 덜할 텐데 그게 잘 안돼요.
엄마처럼 사는 게 가장 어려워
엄마, 요즘 들어 내가 미스코리아에 나가겠다고 했을 때 엄마가 하셨던 말씀이 자꾸 생각나요. 그때 엄마가 “평범하게 사는 게 가장 어렵고 행복한 거야”라고 말했잖아요.
솔직히 당시에는 그렇게 말하는 엄마가 나약하고 궁상맞아 보여 싫었어요. 그래서 “그러니까 엄마가 지금 이렇게 평범하게 살지. 난 엄마처럼 살지 않을 거야”라며 버릇없이 쏘아붙였던 것도 여러 번이었고. 근데 나도 철이 들려나? 엄마처럼 사는 게 결코 쉽지 않다는 걸 이즘에야 깨닫고 있어요.
스물넷에 집안의 장남인 아빠와 결혼했고, 딸 셋을 모두 제왕절개로 낳은 엄마. 지금도 제왕절개 수술은 두 번 이상 하기 힘들다고 하는데, 수술 후유증 때문에 배 한쪽에 감각을 잃어버릴 정도로 미련한 울 엄마. 엄마가 손이 귀한 집안의 장남에게 시집 와서 얼마나 부담이 컸을지, 내가 그 당시 엄마 나이가 된 이제야 좀 알 것 같아요.
막내인 나까지 아들이 아닌 딸이어서 얼마나 실망했을까. 그런데도 엄마는 우리 세 자매를 아들 못지않게 잘 키우려 늘 애면글면하셨죠. 큰언니가 고3이던 시절 엄마는 1년 동안 새벽밥을 지어 보조가방 한가득 예닐곱 가지 반찬과 함께 싸 주셨고, 부산에서 대구 팔공산까지 첫 새벽 버스를 타고 다니며 백일기도를 하셨잖아요.
그리고 그것 기억나요? 나 예고 입시 준비할 때, 온갖 스트레스에 짜증 다 받아주면서 중3 1년 내내 나랑 등하교 같이 하면서 내 운전기사 했던 것. 엄마에게도 아내나 엄마가 아닌 여자 정옥태로서의 삶이 있었을 텐데 그때 내겐 그런 엄마가 왜 그렇게 당연했을까?
엄마, 나 고등학교 때 생각나요? 내가 고등학교에 갈 무렵 우리 집 형편이 갑자기 어려워졌잖아요. 가뜩이나 무용한다고 레슨비에 콩쿠르에 난 늘 ‘돈 먹는 기계’였는데 덜컥 원하는 예고를 붙고도 엄마한테 은근 미안했어요. 학교에 입학하고 나서도 비싼 예고 등록금 낼 날이 가까워지면 엄마 얼굴에 근심이 가득했죠.
그런데 막상 등록금 내는 날이 되면 마법처럼 어디선가 돈이 짠! 하고 나타나곤 해서 나는 늘 신기하게만 생각했어요. 그때는 어린 마음에 그냥 친구들이랑 밤늦게까지 하고 싶은 무용 맘대로 할 수 있다는 것만 좋았는데 지금 생각해 보니 그 돈을 마련하기 위해 엄마는 친한 친구들에게 얼마나 자주 아쉬운 소리를 했을까 싶은 마음에, 다 지난 일인데도 콧등이 시큰해져요.
엄마! 나는 정말이지 엄마처럼 살기 힘들 것 같아요. 엄마 희생 덕분에 내가 너무나 많은 것을 보고 누리며 살다 보니 나란 인간, 내 삶이 너무 중요해져 버렸어요.
늘 막내인 줄 알았던 나도 어느덧 남들이 결혼 적령기라고 부르는 나이가 됐지만 아직 누군가의 아내, 며느리, 엄마가 되고 싶은 마음보다는 내 꿈을 더 적극적으로 좇고 싶고, 더 많은 것을 이루고 싶은 욕심만 부려요. 엄마가 그랬던 것처럼 한 여자로서 인생을 고스란히 남편과 자식에게 바치기보다는 그냥 홀가분하게 나 하나만 생각하며 살고 싶다고 생각하면서요.
엄마, 어떤 게 맞는 걸까? 맞고 틀린 게 있긴 한 걸까? 사람마다 각자 인생이 있으니까 자신의 선택대로 사는 거겠죠? 하지만 요즘 부쩍 무릎이며 허리, 몸 여기저기가 고장 나서 힘들어하는 엄마를 보면, 나만의 것이라고 생각했던 내 인생이 온전히 내 것만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어요. 엄마 딸 현진이는 엄마가 세 번째로 제왕절개 위험을 감행해서 낳은 엄마의 세 번째 분신이니까요.
어렸을 때 내 눈에 비친 엄마는 무척 엄하고 강한 분이었어요. 그런데 이순이 멀지 않은 지금은 세 번의 제왕절개 탓인지 몸도 쇠약해지고, 관절염에 디스크 때문에 여행도 마음대로 못 다니시죠.
그런 엄마를 볼 때마다 가슴이 아파요. 엄마의 피와 살로 빚어지고, 엄마의 땀과 눈물로 자라온 내가 어떻게 나의 독립된 인생만을 운운할 수 있을까 반성하기도 해요. 내가 바로 엄마이고, 엄마가 바로 내 미래의 모습인데 말이에요.
어느 신문의 칼럼 한 귀퉁이에서 ‘여자가 진짜 불쌍해지는 순간은 친정 엄마가 돌아가시는 그 순간부터다’라는 글귀를 읽은 적이 있어요. 불과 1, 2년 전만 해도 그냥 ‘감동적이네’ 하고 지나갔을 법한 이 글귀가 최근 들어 유난히 머릿속에서 떠나질 않네요.
나뿐만 아니라 나와 같은 많은 철부지 딸에게 말하고 싶어요. 엄마와 함께할 시간은 그리 길지 않다고. 진짜 불쌍한 여자가 되기 전에 고마움과 사랑을 엄마에게 표현하자고.
“엄마, 울 엄마라서 고마워요. 가능한 한 오래오래 나 좀 부탁해요.”
나 끝까지 정말 이기적이죠? 죄송해요, 엄마!⊙
늘 제 등 뒤에 서 계시던 어머니께
어머니, 당신은 어떤 표정으로 아들을 보고 계실까요
元鍾盛 월간에세이 주간
⊙ 1937년 강원도 횡성 출생.
⊙ 연세대 대학원 졸업. 한국정신문화연구원 명예문학박사.
⊙ (주)동양엘리베이터 회장, 한국문인협회 부이사장 등 역임.
⊙ 現 (주)DY홀딩스 회장, (주)SFA 명예회장, 국제 PEN 클럽 고문.
⊙ 저서: <향 싼 종이에선 향내 나고, 생선 싼 종이에선 비린내 난다 1, 2>
등 뒤에 서 계시던 어머니를 기억하게 된 것은 행운이었습니다.“잘 살았는가? 잘 살고 있는가?”
스스로에게, 젊어서는 잘 하지 않았던 물음입니다. 그런데 제게 무슨 숙제라도 생긴 양 요즘 들어 이 물음에 종종 시달리곤 합니다.
하루는 한 중견 문인과 식사를 함께하게 되었습니다.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는 중에 명함을 주고받게 되었는데, 그의 작은 손지갑에 꽤 많은 사진이 들어있는 것을 보게 되었습니다.
무슨 사진이냐고 물으니 가족 사진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그는 여러 장의 사진을 꺼내 보였습니다. 그의 아내 사진은 물론 성장기별로 찍은 아이들 사진, 돌아가셨다는 부모님 사진, 게다가 퇴색된 할머니의 흑백사진까지 꺼내 보여주었습니다. 그러면서 자신이 기억하는 모든 식구라고 했습니다. 이렇게 지갑 속에 넣고 다니는 이유가 있느냐고 묻자, 그는 고개를 주억거리며 대충 이런 얘기를 들려주었습니다.
“어머니가 돌아가신 지 10여 년의 세월이 흘렀습니다. 그런데 얼마 전에 서랍을 정리하다 보니 어머니가 남겨두고 간 수첩이 눈에 들어오는 거예요. 그러자 와락 어머니 생각이 나지 뭡니까. 그런데 막상 어머니 얼굴이 떠오르지 않아요. 그저 희미한 윤곽만 생각날 뿐이고 눈이며 코며 어느 것 하나 또렷하지 않았어요. 이상하다 싶어 상황이 비슷한 동년배에게 물으니 그 사람도 그렇다는 거예요. 그러면서 그렇게 조금씩 잊히는 것 아니겠느냐며 대수롭지 않다는 표정이에요. 하지만 나는 그럴 수 없었습니다. 어머니의 형상이 기억 속에서 사라진다는 것은 있을 수 없잖아요. 솔직히 더 나이가 들어 아주 잊힐까 두려워진 거지요.”
그의 평범한 가족사 얘기는 할머니 얘기로 이어졌습니다.
“어린 제 기억으로 할머니는 어느 하루도 빠짐없이 아버지의 출근길을 문밖에서 배웅하곤 하였지요. 그런데 참 이상한 것은 길이 구부러져 아버지의 모습이 사라질 때까지 단 한 번도 아버지는 할머니를 뒤돌아보지 않는 거예요. 그때 아버지 뒷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할머니를 생각하면 지금도 가슴이 알싸해져요.”
그때 문득 내 등 뒤에 서 계시던 어머니도 그러했을 거라는 생각이 퍼뜩 떠오르는 것이었습니다.
어머니는 근 90수를 누리시다 10년 전에 저세상으로 떠나셨습니다. 그런데 문득 눈앞에서만 보았던 모습이 전부가 아닐 거라는 데 생각이 미치자 제 등 뒤에서 당신은 어떤 모습으로 어떤 표정으로 나를 보고 계셨을지 궁금해졌습니다.
학교를 보내고 세상으로 내보내는 아침마다 많이 걱정하셨을 것 같았습니다. 앞만 보고 뛰어가는 자식을 보면서 또 많이 기도하셨을 것 같았습니다. 혹 어느 때는 한 번쯤 뒤돌아 서서 당신을 봐 주길 바랐는데 뒤돌아보지 않은 아들이 섭섭하고 서운하셨을 것 같았습니다.
어느덧 저도 세월의 나이테가 겹겹이 쌓인 나이가 되었습니다. 그동안 참 많은 사람과 만나고 헤어졌습니다.
잘 살았는가?
그런데 이렇게 나이가 들고 보니 제 등 뒤에 서 계셨던 어머니처럼 아주 많은 사람이 등 뒤에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제 앞에 있었던 사람들보다 더 많이 나를 걱정해 주고 격려해 주고 자랑해 주었을 거라는 생각이 주마등처럼 지나갔습니다.
문득 車凡錫(차범석) 선생이 생각났습니다. 2006년에 작고하신 차범석 선생께서는 종종 <월간에세이>에 글을 내주셨습니다. 그중 ‘아내의 얼굴’이라는 제목 아래에 결혼 46년 만에 처음으로 아내의 얼굴을 찬찬히 보게 되었는데, 그동안 자신의 본위로만 살아온 이기심에 자격지심이 생기더라고 적어 두었습니다.
40년을 오로지 사업에만 몰두했던 나로서는 이보다 더하면 더했지 못하지는 않았으리라 생각합니다. 이제 겨우 내 앞에 있는 사람보다 등 뒤에 있던 사람들이 중요하다는 것을 알아차린 셈이라고나 할까요.
세월이 가면 세상에 평화가 오고 삶이 윤택해질 거라는 기대는 이제 하지 않습니다. 건강을 기원하고 건강식이 천지에 깔렸는데도 병원이 살찌는 것처럼, 반목은 더 깊어지고 화해는 요원해야 정치인의 물동이가 가득해질 테니 그 또한 세상의 이치라는 생각도 하게 됩니다.
하지만 이제 그 물동이를 비울 때도 된 것 같습니다. 목전에 있는 사람들보다 등 뒤에 있는 사람들을 볼 수 있다면 거기에 물동이 비우는 방법 하나쯤은 들어있을 거라는 생각을 해봅니다.
오늘은 온종일 제 등 뒤에서 아들의 뒷모습을 지긋이 살펴주시던 어머니의 눈길이 느껴집니다.
“잘 살고 있느냐?”⊙
스물셋에 첫 아르바이트를 한 장남 성원에게
네가 진정으로 좋아하는 일을 하거라
李元馥 덕성여대 산업미술과 교수
⊙ 1946년 대전 출생.
⊙ 경기고, 서울대 건축공학과 졸업. 독일 뮌스터대 상업미술학과 졸업. 同 대학원 디자인 디플롬.
⊙ 서울 600년 홍보전문위원, 한국만화학회 부회장, 사단법인 한국만화애니메이션학회 초대 회장, 미국 UC어바인 교환교수 역임.
⊙ 저서: <21세기 먼 나라 이웃 나라> <이원복 교수의 와인의 세계, 세계의 와인> <가로세로 세계사> 등 다수.
⊙ 상훈: 도서잡지 윤리위원회상, 한국색동회 눈솔상, 올해의 책상 등.
아들에게.네게 이메일로 자주 편지를 썼다만 새삼스럽게 원고지에, 그것도 공개가 된다는 전제로 쓰니 여간 쑥스럽지 않구나. 그러나 너에게뿐 아니라 네 나이 또래 청년들에게 해 주고 싶은 이야기이기도 하니 남들이 읽는 것에 상관하지 않으련다.
며칠 전 전화통화에서 네가 아르바이트를 해서 이 세상에 태어나 처음 번 돈으로 아빠가 좋아하는 와인 한 병을 사 놓고 기다린다는 얘기, 너무 감격스럽고 흐뭇해서 팔불출 소리 듣는 것 따위 아랑곳하지 않고 주변에 한바탕 자랑을 하고 다녔다.
네 나이가 벌써 스물셋, 언제부터인가 아빠랑 손잡고 사우나에 가는 걸 싫다고 하더니 어느새 늠름한 사나이로 자라났구나.
나이 스물셋에 첫 아르바이트를 했다면 꽤 늦게 시작한 것이지만, 그래도 네가 직접 돈 벌기가 얼마나 어렵고 돈의 가치가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 직접 체험하고 느끼게 되었다는 것은 지금이라도 늦지는 않다. 그러나 언제까지 아르바이트만 할 것이 아니라 언젠가는 네가 평생 또는 일정 기간 모든 노력을 던질 직업을 가져야 할 텐데, 아직 그 나이에 확실한 진로를 정하지 못하고 시간을 보내고 있는 게 조금은 안타깝다.
성공의 의미
![]() |
| 이원복 교수의 장남 성원군. |
그 후 2년이 넘도록 뚜렷한 진로를 결정하지 못하고 이것저것 기웃거리기만 하며 네 방에만 틀어박혀 밤낮이 뒤바뀐 생활을 하는 것을 보고 아빠는 그저 빨리 네가 어느 쪽이든 진로를 정해 달려나가는 모습을 보기 원할 뿐 허송세월한다는 생각은 하지 않는다.
하기야 사람이 꼭 대학을 나와야 할 이유는 없다. 고등학교만 나오고도 대통령을 하는 사람이 얼마든지 있는 세상이니까. 조련된 월급쟁이 대량생산소나 다름없는 대학보단 대통령은 아니더라도 어떤 일이든 네가 행복할 수 있는 일을 할 수 있다면 그것이 곧 성공 아니겠니?
아빠 나이 세대는 인생의 길이가 너희 또래에 비하면 반도 안된다. 왜냐하면 우리는 너무 가난한 어린 시절을 보냈고, 산업화 시대에 청춘을 보냈기 때문이다. 가난에서 벗어나기 위해 무조건 앞만 보고 뛰었고, 그래서 성공이 인생의 목표이고, 성공해야 행복해질 수 있다고 믿고 살아온 삶이었다. 그러니 자연 이웃이나 동료와의 경쟁이 극심했고, 경쟁에서 밀리는 것을 부끄러워하고 실패한 인생으로 생각했다.
자연 우리 세대의 삶엔 규범이 생겼다. 스물네 살에 대학을 졸업하고 스물여덟에 군대에서 제대한 후 취직하고 결혼하고, 서른에 대리 마흔에 부장, 이사…. 이런 식으로 정신없이 살다가 55세에 정년을 맞는 규범 말이다. 워낙 정보도 없고 순박한 시대여서 장가를 가야 어른으로 취급해 주던 시대라서 스물여덟부터 쉰다섯까지가 어른의 삶, 절대의 삶이니 실상 우리가 사회적으로 왕성하게 살 수 있는 기간은 채 30년이 되지 않는다.
그러나 너희는 어떠냐? 발달된 의료 기술과 풍족한 환경, 놀라운 식생활 개선으로 평균수명은 거뜬히 100세를 넘길 것이다. 아무리 못해도 90세까지는 건강하고 씩씩하게 살게 될 게다.
게다가 너희는 우리 세대보다 접하는 정보가 풍부해 정신적으로 사회적으로 훨씬 빠르게 성숙한다. 우리 때는 대학 시절에나 <플레이보이> 같은 성인잡지를 접하고 놀랐는데, 요즘엔 초등학교 아이들까지 인터넷으로 야동을 보는 정도이니 이미 스무 살이면 완전한 성인이 되지 않느냐? 너희가 사는 절대 인생의 기간은 적어도 70년 이상이니 우리보다 두 배 이상 산다는 얘기가 틀리지 않는 것 같구나.
삶 자체가 놀이이고 즐거움
삶의 길이가 두 배로 길어진다면 네 아빠 세대처럼 숨 가쁘게 헐떡대며 인생을 살 필요가 없다. 훨씬 여유롭고 즐겁게 주변을 살피며 살아가도 시간은 충분하다. 우리 세대의 삶이 골인 지점에 모든 것을 거는 100m 단거리 경주라면, 너희 또래의 인생은 마치 일요마라톤 대회의 뜀뛰기와 같다. 목적지에 언제 도착하느냐가 중요한 게 아니라 뛰는 것 자체를 즐기면서 피곤하면 풀밭에 누웠다 가는, 삶 자체가 놀이이고 즐거움인 생활. 너희에겐 인생의 목표가 성공이 아니라 행복이고, 행복한 인생이 성공한 인생일 것이다. 사고방식 자체가 우리 세대와 정반대이니, 우리 또래 부모와 네 또래 자식들 간에 소통이 잘되지 않는 것은 바로 이런 삶의 가치관 차이 때문 아닌가 싶다.
너의 결단이 썩 내 맘에 드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네 인생은 네 것이니 어찌 아비가 이래라저래라 할 수 있겠니? 네가 택한 삶이니 나중에 후회하든 만족해 하든 적어도 아빠 원망은 하지 않을 것 아니냐! 아빠는 그저 네가 필요했던 모든 지원을 해준 것으로 만족하련다.
이제부터 삶은 네 몫이며 너 홀로 서서 모든 것을 결정해 나가야 한다. 그러니 아빠 인생보다 두 배나 더 긴 네 인생에서 2~3년 동안의 방황이란 결코 긴 것은 아닐 것이다. 이것이 아무 일도 하지 않고 방에만 틀어박혀 있는 네 모습을 보면서도 갖는 느긋함이고 나 자신에 대한 달램이다.
그런 네가 아르바이트를 시작해서 아빠에게 줄 선물까지 샀다니 그렇게 기쁠 수가 없구나. 부디 무엇이든 네가 즐기면서 할 수 있고 돈도 벌어 자족할 수 있는 일을 찾으렴. 그것이 기술을 익히는 것이든, 학문을 닦는 것이든, 네가 좋아하는 일을 하거라.
오늘은 이만 줄이마.
사랑한다, 아들아.
아빠가⊙
엄마 없이 잘 자라준 딸 휘은에게
쉽게 얻은 열매의 단맛에 취하지 마라
張錫周 시인
⊙ 1954년 충남 논산 출생.
⊙ 청주고, 서울대 사회학과 졸업.
⊙ 1979년 조선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 동아일보 신춘문예 문학평론 입선. 도서출판 청하 대표 역임.
⊙ 저서: 시집 <물은 천개의 눈동자를 가졌다> <붉디붉은 호랑이> <절벽>, 평론집 <20세기 한국문학의 모험>(전 5권) 등 다수.
⊙ 상훈: 제1회 애지문학상.
마당에 심은 모란들이 초란만한 봉오리들을 맺더니 며칠 전부터 붉은 꽃을 활짝 피우고 있다. 저토록 만개한 모란꽃을 보고도 내 마음이 활짝 펴지지 않는다. 아비는 꽃 중에서도 모란을 가장 어여삐 여기는데, 그게 눈에 들어오지 않은 것은 마음에 큰 결핍이 있는 까닭이다. 네가 가고 난 뒤 아비는 한 보름간을 몹시 앓았다. 본디 아비가 잔병이 없는 강건한 체질인데, 어쩐 일인지 오한이 나고 온몸이 두들겨 맞은 듯 아팠다. 이불을 뒤집어쓰고 끙끙 혼자 앓다가 결국은 집에 와 있던 네 오빠에게 약을 지어오라고 일러 그 약 먹고 누워 있었다.
네가 인천공항에서 눈이 빨개지도록 울 때조차 아비는 담담하고 의연하게 너를 보내리라 마음먹고 있었다. 너는 스물세 해 동안 잘 커 주었다. 여섯 살 때 네 엄마와 헤어져 내게 온 너는 열일곱 해를 엄마 없이 잘 자라 주었다. 무엇보다도 네가 엄마의 보호와 도움없이 자라도록 한 게 제일 마음 아픈 일이다.
그러나 너는 힘들고 어려워도 한 번도 엄마를 찾은 일이 없다. 그게 다 내 마음을 아프게 하는 일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겠지. 너무 일찍 철이 들어버린 네가 대견하면서도 한편으로 가슴이 아렸다.
작은 일에 지극하고 큰일에 대범했으면
입시 위주의 공부를 썩 달가워하지 않았기에 입시라는 목표에만 매진하도록 닦달하는 학교생활이 부담스러웠을 것이다. 네가 불만에 차서 자주 짜증을 내고 우울해 할 때 아비는 속이 타는 것처럼 아팠다. 어쨌든 너는 잘 견뎌주었다.
고등학교를 마치고 대학에 가니 입시의 중압감에서 벗어난 듯 너는 활달해지고 잘 웃는 아이로 돌아와 마음이 놓였다. 학보사 기자 노릇도 하며 네가 처음 쓴 기사가 실린 학보를 손에 들고는 대견해서 미소를 짓곤 했다.
너는 더 너른 세상에서 네 가능성을 시험하기 위해 떠났다. 네 앞날은 축복받아야 마땅하다. 그럼에도 아비는 우선 깊은 상실감에 마음이 파인 듯 아팠나 보다. 마음이 아프니 몸이 따라 아픈 것이다. 다행스럽게 보름쯤 지나 아픈 것을 떨쳐내고 예전과 같이 새벽에 일어나고 책 읽고 글 쓰고 이른 저녁을 먹고 일찍 잠드는 생활의 리듬을 되찾았다.
어제는 서운산을 찾아 능선 길을 따라 서너 시간 걷다 돌아왔다. 녹음이 짙푸른 산길을 걸으니 기분도 상쾌해졌다. 네가 유학을 끝내고 돌아오면 너와 함께 어깨를 마주하고 이 길을 걸어야겠다고 혼자 다짐했다. 잃었던 밥맛도 되찾았다.
너에게 앞으로 인생을 사는 데 도움이 되는 몇 마디를 이르고자 한다. 우선 몸을 소중하게 생각하고 아껴라. 끼니를 거르지 말고 몸에 이로운 음식을 찾아 먹도록 해라. 이는 몸을 섬기려 함이 아니다. 몸을 잘 건사하는 것은 해야 할 마땅한 일을 늠름하게 이루기 위함이다. 해야 할 마땅한 일을 할 때는 몸을 아끼지 말고 던져 고되게 부려도 좋다.
작은 일에 지극하고 큰일에 대해서는 대범하도록 해라. 사람들은 작은 일에 연연하면서도 대충대충 하고 큰일에 대해서는 우왕좌왕하다가 중심과 맥락을 놓치기 일쑤다. 어떤 경우에도 너 자신을 믿고 그 믿음에 따라 말하고 행동해라. 그게 중심을 잡는 것이다.
너무 많은 말을 하지 말도록 해라. 그렇다고 말해야 할 순간에 입 다물고 있는 것도 매우 어리석어 보인다. 꼭 해야 할 말을 하도록 해라. 그리고 침묵해라. 말보다는 눈빛으로 말해라. 바람이 불 때는 그것이 곧 지나가는 것임을 잊지 말아라. 비가 올 때도 마찬가지다. 참고 기다릴 줄 알아야 한다. 구름이 걷히면 해가 나는 법이다.
발끝으로 서 있으면 오래 서 있을 수 없다. 네가 가진바 능력과 분수에 맞는 선택을 하고 그 선택에 항상 책임을 져라. 너무 빨리 가려면 쉽게 지친다. 천천히, 끝까지 목표한 데까지 나아갈 수 있도록 준비하고 마음을 다해라. 마음을 다하면 몸도 따라간다.
하루하루를 그냥 넘기지 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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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석주 시인의 딸 휘은씨는(오른쪽) 동덕여대 문예창작과 졸업 후 미국 플로리다 주립대에서 심리학 전공 석사 과정을 밟고 있다. |
하루하루를 그냥 넘기지 말고 무언가를 조금씩이라도 써라. 쓰면서 더 많이 보게 될 것이다. 그걸 성찰이라고 한다. 무릇 빛이 좋고 향기가 좋더라도 꽃은 열매를 위한 하나의 과정에 지나지 않는다. 시위를 당길 때 꽃이 아니라 열매를 겨냥해라.
아비가 늘 옆에 끼고 읽는 옛사람의 책에서 이르기를, 빛으로 가는 길은 어두워 보이고, 앞서는 길은 뒤처져 보이고, 짧은 것은 길어 보이고, 강한 것은 약해 보이고, 더불어 평등한 것은 불평등한 것으로 보이고, 가장 잘된 일은 잘못된 것처럼 보이고, 가장 큰 사랑은 무정해 보이고, 가장 위대한 진리는 어리석어 보인다고 했다. 이 말들에 숨은 지혜에 귀를 기울이고, 분별과 사려를 키우는 일에 애쓰도록 해라.
쉽게 얻은 열매의 단맛에 취하지 마라. 그것은 어쩌면 네 것이 아닐지도 모른다. 네 땀과 피와 시간으로 익힌 열매의 단맛이 네가 기쁜 마음으로 취해야 할 것이다. 남의 것에 욕심내지 말고 제 가진 것을 아낄 줄 알아야 한다. 다른 누구도 아닌 오로지 너 자신이 돼라.
네가 먹을 음식과 네가 입을 옷과 네가 살 집을 스스로 마련해라. 해 뜨고 난 뒤엔 걷고 일해라. 해진 뒤엔 손과 발을 깨끗이 씻고 지친 몸을 쉬게 해라. 꼭 필요하지 않은 물건들을 쌓아 두지 마라. 그것들이 귀한 시간을 갉아먹고 인생을 낭비하게 만든다. 한 삶을 사는 데 꼭 필요한 것만을 구해라.
양털로 지은 옷 한 벌, 책 읽을 시간, 훌륭한 벗, 오래된 포도주, 비바람 막아주는 집, 그 다음 동트는 새벽의 빛을 구해라. 늘 세상에서 처신함은 봄비와 같이 하고, 뜻은 가을 하늘에 뜬 매같이 높은 데 두어라.
네 아비가 너를 염려하는 마음이 깊어 말이 많았다. 너에겐 말 많으면 탈 많다고 이르고는 아비는 그걸 따르지 못했다. 오늘 말 많았으니 며칠은 입 다물고 있겠다. 소식 더 자주 전하고, 몸 잘 건사해라.⊙
아프리카 우간다에 있는 에이즈(AIDS) 고아 윌슨에게
너를 사랑하는 사람이 많다는 걸 기억해 줘
정애리 탤런트·월드비전 친선대사
⊙ 1960년 전남 영광 출생.
⊙ 금란여고 졸업.
⊙ 1978년 KBS 주연급 신인탤런트 모집 당선. MBC 쇼2000 MC, MBC 라디오 ‘음악살롱’DJ, 월드비전 홍보대사 역임.
⊙ 저서: <사람은 버리는 게 아니잖아요>
⊙ 상훈: 한국방송연기대상 신인상, MBC 방송연기대상 최우수연기상, 기독교문화대상 등.
안녕 윌슨, 그동안 잘 있었니?너를 만나고 온 지도 어느새 1년이 다 되어 가네. 지난 2006년에 아프리카 우간다 카총가에 갔을 때 너희를 처음 만났지. 너는 2003년에 에이즈(AIDS)로 부모를 다 잃고 고아가 되었다고 했어. 동생 티모시, 그리고 막내 리처드도 잘 있는지 궁금하다. 여동생도 있었지만 그 아이는 여자라 먼 친척집에 입양됐다고 했던 것도 기억난다. 여자아이들은 집안일 등 시킬 일도 많고 또 남겨져 있으면 성폭행 등의 위험이 있어서 그렇게 입양되는 경우가 종종 있다고….
윌슨! 넌 잘 웃지 않았어. 하긴, 학교도 다녀야 하고 동생들도 돌봐야 하고, 또 생계까지 책임져야 하는 나이 어린 家長(가장)이니까. 열세 살에 그 모든 걸 책임지기에는 너의 어깨가 너무나 무겁겠지. 요즘도 날마다 부모님께 다녀오니?
너를 따라가 보았던 부모님의 산소 말이야. 말이 산소지 집에서 50m쯤 떨어진 그냥 잡초더미에 불과했지. 어린 삼형제가 잡초더미 앞에 그냥 서 있는데 어찌나 눈물이 나던지. 아무것도 해 줄 수 없는 분들이지만 그래도 그 자리의 흔적으로라도 너희에게 큰 위안이 되는 것 같았단다.
집은 여전히 그 모습이니? 네가 사는 보금자리를 두고 이렇게 얘기하기 정말 미안하지만, 내가 갔을 때 너희 집은 누가 봐도 그냥 창고라고 했을 거야. 아니, 창고도 그런 창고가 없더라. 좁기는 또 얼마나 좁은지, 어떻게 그 안에 세 명이 들어갈 수가 있는지 아직도 이해가 안돼.
우리나라에도 쪽방이라는 게 있거든. 근데 그보다 더 좁더라. 그러니 당연히 눕지도 못하겠지. 이런 생각도 잠시 들더라. 아프리카 그 넓은 땅인데 허름하긴 해도 좀 널찍하게 쓰면 안되나 하는. 하긴, 열악한 게 어디 집뿐이었겠니?
전기는 물론 먹을 것도 없었고, 식수는 빨래를 헹구어 놓은 것처럼 탁했지. 그나마 가까이나 있니? 그 먼 길을 맨발로 걸어서 식수를 길어 오던 네 모습이 떠오른다. 어린 동생들을 돌보던 의젓한 네 생각에 나도 모르게 미소도 짓고.
생명보다 귀한 건 없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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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애리씨가 2006년 우간다에서 만난 에이즈고아 윌슨을 안고 있다. |
아무리 어리다고 해도 그 병에 대한 두려움이 충분히 느껴져. 있잖아, 난 사실 네 막내동생 리처드가 걱정이야. 동네 사람들도 그렇게 얘기하고, 또 정황으로 봐서 리처드도 감염이 되지 않았을까 염려가 돼.
바이러스 감염 검사를 해 봤으면 좋겠어. 만약에 HIV 감염자라면 약만 먹어도 괜찮잖아. 물론 먹고살 양식도 없는데 하루에 1달러나 하는 약값이 걱정이겠지. 그래도 해 보자. 약값은 얼마든지 도와줄 수 있을 거야. 리처드의 생명보다 귀한 건 없단다. 보고 싶다. 배불뚝이 리처드. 앵무새처럼 우리 한국말을 잘도 따라 하던 그 목소리도.
네가 처음 웃음을 보여줬던 게 언젠지 기억나니? 내가 영어 성경을 선물했었을 때야. 학교에서 영어를 배운다며 너무도 귀하게 성경을 받아 들고 가슴에 안던 너. 한 귀퉁이로 가 조심스레 책장을 넘기던 너. 너의 그 눈빛에 내가 눈물이 핑 돌았잖니! 회개도 하면서.
그래, 네가 하나님을 믿는다는 걸 알고 마음이 참 좋았어. 지금 너의 상황이 힘들어도 힘들어 하지만은 않을 거란 확신이 생겼어.
윌슨, 네가 같이 갔던 우리 일행을 다 울렸던 거 아니? 동료 연기자들의 도움으로 소와 염소를 사 줬잖아. 처음엔 어리둥절해하던 네가 힘들게 소를 나무에 매어 놓곤 갑자기 우리에게 뚜벅뚜벅 걸어왔지. 그러고선 눈물이 그렁그렁한 얼굴로 환하게 웃으며 악수를 청했잖아.
“Thank you, Thank you.”
가슴이 미어지더라. 아이답지 않은 너 때문에. 난, 네 부모가 왜 에이즈에 걸려서 너희가 고아가 됐는지 그런 건 따지고 싶지 않아. 단지 네가 항상 이것만은 기억해 줬으면 좋겠어. 너를 사랑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는 것. 그리고 하나님이 항상 너와 함께 계신다는 것.
참, 내가 네 후원자가 됐어. 우린 떨어질 수 없는 사이야. 알았지? 그리고 후원자들이 집을 지어 주기로 했는데 공사는 시작했니? 다음에 가면 부쩍 자란 너를 보겠구나, 기대가 커. 가축들도 잘 키우고 있겠지? 살다 보면 힘든 일들도 있을 거야. 그때마다 기도하자. 나도 할게. 리처드 꼭 병원에 데려가고, 사랑해! 다시 만날 때까지 잘 지내.
한 가지 고백할 게 있어. 에이즈 고아인 너희를 만나러 가기 전에 혹시라도 내가 편견을 가지게 되면 어쩌나 하는 염려가 있었단다. 난 한국에서 에이즈 예방과 편견 없애기 교육을 하기도 했던 사람인데 말이지.
나도 모르게 너희 앞에서 움츠리면 어쩌나 하고, 그런데 너흰 그냥 예쁘고 사랑스러운 아이들이었어. 온전히 사랑의 마음으로만 너희를 안게 되더라. 감사하게도. 아~이제 후련하다. 다시 한 번 사랑해! 안녕.⊙
나의 가장 소중한 두 딸 진성, 정연에게
딸이 “엄마처럼 살고 싶다”면 엄마는 성공한 인생
趙允旋 국회의원
⊙ 1966년 서울 출생.
⊙ 서울대 외교학과 졸업, 美 컬럼비아대 법과대학원 석사.
⊙ 김&장 법률사무소 변호사, 한국씨티은행 부행장 겸 법무본부장 역임.
⊙ 現 한나라당 대변인.
이 편지를 쓰는 엄마 사무실 컴퓨터 앞에는 너희 둘이 함께 찍은 사진 액자가 있어. 늘 엄마를 보고 배시시 웃고 있단다. 사진을 볼 때마다, 아무리 내가 낳았지만, 어쩌면 둘 다 예뻐도 너무 예쁘다는 생각을 한단다. 이런 말을 하면 주변 사람들이 늘 ‘고슴도치 엄마’라고 놀리지만, 엄마는 늘 ‘우리 딸들은 객관적으로도 예쁘다’고 항변하고 맘속으로도 그렇게 굳게 믿고 있단다.
가끔 엄마는 아빠에게 “내가 딸들 하나는 참 기막히게 낳지 않았어?”라고 하면, 아빠는 “당신 혼자 낳았냐고요”라며 마치 엄마가 아빠 때문에 ‘희석’되었을 법도 한데 그렇지 않아 다행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거 다 안다는 듯 불평을 한단다.
엄마의 답은 언제나 같아. “아니, 왜 그렇게 예민하게 제 발 저려 하셔요”라며 놀리곤 하지.
예쁘다는 것 말고도 딸 자랑을 하라고 하면 만 가지도 더 있지만, 그중에서도 엄마와 아빠가 제일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건 너희 둘의 ‘품성’이란다. 너희가 가진 품성 중에서도 가장 돋보이는 건 바로 남을 배려하는 마음이야. 그 품성이 너희에게는 아주 큰 자산이 될 거라 믿는다.
진성이 기억나니? 언젠가 친할머니께서 선물로 받은 깨를 볶아 깨강정을 만드느라 하루 종일 애를 썼는데 결국은 망쳐버리셨다는 얘기를 듣곤, 네가 그랬지.
“할머니, 뭘 그렇게 고생을 하세요. 그냥 저희 집에 와서 드세요.”
엄마는 사실 아차 싶었어. 며느리인 엄마의 입에서 나와야 할 소리가 겨우 중학생이었던 네 입에서 먼저 나왔다는 게 참 부끄럽더구나.
네가 그렇게 어른들께 따뜻한 말을 하니까 친할머니 외할머니 할 것 없이 네 위로를 기대하며 하소연을 좀 더 하시는 것 같지 않던?
너는 아주 어릴 때부터 그랬단다. 네가 네 살이나 되었을 때였나, 엄마가 주말에 하루는 늦잠을 자고 있는데 아빠가 안방 불을 켜니 네가 그 작은 손으로 엄마 눈을 가려 주며 이러더구나.
“아빠는, 엄마 아픈데 불을 켜면 눈이 부시잖아….”
진성이가 따뜻하게 배려를 한다면 정연이는 믿음직스럽게 배려를 한다고 해야 할까? 그래서 엄마는 “나는 큰딸 덕분에 외롭지 않고, 작은딸 덕분에 배고프지 않을 것 같다”고.
정연이는 늘 어린아이인 줄 알았는데, 한 번은 토요일 밤, 엄마가 위경련으로 고생을 하니 밤을 새워 간호를 하더구나. 정연이는 연방 바지런히 움직이면서 전자레인지에 핫팩을 데워 수건으로 싸서 배에 둘러 묶어 주고, 까스활명수도 갖다 주고, 미지근한 보리차도 머리맡에 놓아 주더구나. 그러고는 잊을 만하면 한 번씩 들어와 “엄마 괜찮아?”라고 물어 보기를 새벽녘까지 하더라고.
아침에 진통이 멎고서는 정연이에게 물어봤지. 어쩜 그렇게 엄마한테 필요한 걸 알아서 다 해 주느냐고. 대답을 듣고 정말 마음이 아팠단다.
“엄마, 내가 배가 많이 아파 봐서 어떻게 하는지 잘 알아.”
그래. 엄마가 직장 다닌다는 알량한 이유로 네가 아파서 뒤척였던 밤들을 엄마 아닌 이모할머니와 함께했었다는 게 정말 미안했었어.
늘 바쁜 직장을 다녔던 엄마는, 다른 엄마들처럼 좋은 학원, 좋은 선생님도 잘 모르고, 선행학습도 시키지 못하고, 숙제나 준비물을 챙겨 준다는 것조차 못했던 것 미안하다.
“엄마, 혹시 세탁기 돌릴 수 있어?”
“엄마, 혹시 퇴근할 때 이거 사다 줄 수 있어?”
다른 애들은 당연히 엄마가 해 줘야 하는 일들을 너희는 이렇게 물어보곤 했지. 심지어는 일요일에 아침밥을 차려 줘도 너희는 고맙다고 하지 않니? 다른 엄마들은 당연히 애들에게 해 줘야 할 보살핌을 엄마는 딸들에게서 ‘고맙다’는 인사를 받으며 해 주다니, 엄마는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모르겠구나.
딸 둘의 섭섭함은 ‘단 10초’
많은 사람이 물어본단다. 딸만 둘이어서 섭섭하지 않으냐고. 사실 이제야 고백하지만, 정연이를 낳았을 때 딸이라는 말을 듣고 한 10초쯤 섭섭했었단다. 그 순간 아빠가 약간 서운해 하는 기운이 느껴져서 그랬던 것 같아.
하지만 정연이가 크는 지난 10여 년 동안 세상은 정말 많이 바뀌었어. 엄마도 아들 하나 갖게 셋째를 낳아야 하는 것 아니냐는 말을 줄기차게 들어 왔지만, 요즘은 사실 딸이 둘이라는 말을 하면서는 오히려 내가 참 쿨하다는 생각이 스스로 들 정도니, 세상이 바뀌어도 많이 바뀐 것 같지 않니? 우리 주변에도 “여자가 무슨, 여자니까…”라고 말하는 몰상식한 사람은 없지 않니?
엄마가 어렸을 때는, 지금 엄마가 하고 있는 일들을 하리라고 엄마는 물론, 외할머니나 외할아버지도 생각하지 못했단다. 너희들이 컸을 때에도 마찬가지야. 엄마가 20~30년 후를 어떻게 알겠니. 다만, 사람은 자기가 좋아하는 일을 잘하게 되어 있고, 잘하는 일로 인정받게 되어 있는 거란다.
엄마가 가끔 얘기하지. 10대 시절에 해야 하는 일이 정말 많다고. 해야 하는 일이 너무 많아 하루 종일 매달려도 잠이 들 때가 되면, 오늘은 이걸 못하고 저걸 못했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꽉 차게 살아야 한다고.
엄마는 너희에게 다른 걸 바라는 게 아니란다. 그저 하루하루를 보람되게, 알차게, 내가 해야 할 일을 다 했나 생각하고, 조금 길게는 내가 어떤 일을 좋아하나, 어떤 일을 더 잘하나, 나를 되돌아보는 습관을 갖자는 거야. 그렇게 호흡이 길게 지내면 틀림없이 어느 순간, 훌륭한 재목이 되어 있는 자신을 발견할 거라 믿어.
성공한 인생이라는 것이 무엇일까. 그저 열심히 살려고 노력해 왔지만, 너희를 낳은 이후에 그 기준이 어느 날 명확해지더구나. 바로, 너희가 “나도 엄마처럼 살고 싶어. 그러면 행복할 것 같아”라고 여긴다면, 엄마 인생은 성공한 거라고. 엄마의 인생을 가장 가까이서 보는 너희가 인정해 주는 삶이 곧 성공한 삶이라는 걸.
그런데 너희의 삶도 마찬가지야. 너희의 삶을 보면서 엄마도 “아, 나도 이런 일을 해 봤으면 좋았겠다. 다시 태어나 우리 딸들 같이 살았으면…” 하는 생각이 들 수 있게, 우리, 서로 그렇게 닮고 싶은 모습으로 살아가자꾸나. ⊙
먼저 떠난 정신적 스승 法山 스님께
“이제야 스님의 뜻을 좀 알겠습니다”
地藏 남산 대원정사 주지
⊙ 1970년 충북 청주 출생(속명 金孝俊).
⊙ 세광고·동국대 불교학과 졸업.
⊙ 조계종 승려로 출가, 軍宗 장교로 공군에서 9년 복무(소령 전역).
⊙ 초의차명상원 개원(2005).
⊙ 저서: <차명상> <스님도 군대 가나요> <행복한 생활명상> 등.
故(고) 法山(법산) 스님께.방안의 짐을 정리하다가 문득 스님의 목소리가 담긴 카세트테이프를 발견했습니다. 제목은 ‘새벽 소리’. 누군가를 깨웠으면 하는 바람으로 새벽 소리라는 제목을 만드셨던 것 아닌가요? 스님과 함께 있었을 때는 생각해 보지 않았는데 지금 불현듯 그런 생각이 드네요.
테이프 포장지 속 지금의 저보다 더 어려 보이는 스님의 얼굴이 마치 저를 쳐다보는 것 같습니다. 지금은 구할 수 없는 귀한 자료이기도 하지만 스님의 모습과 목소리가 담겨 있기에 저에게는 보물과 다름이 없지요. 테이프를 틀어 스님의 목소리를 들었습니다. 아주 오랜만입니다. 스님. 16년 만에 들었습니다. 죄송해요. 잊으려 했었고, 또 잊었다고 생각해서 그런지 송구스럽게도 그동안 마음에 두지 않았습니다.
사실은 스님의 마지막 모습을 떠올리기 싫었습니다. 예전에는 무서워서 그랬고, 그리고 지금은 죄송해서 그랬습니다. 지금도 스님과 나눈 마지막 대화가 생생합니다.
“밥 먹고 가.”
“아니요. 절에 가서 먹을게요.”
“그래, 그럼 내일 보자구.”
“예, 고생하세요. 스님.”
이것이 저와 스님과의 마지막 대화였어요. 그 이후의 상황에 대해 스님은 잘 모르시지요? 제가 말씀드릴게요. 절에 도착하니까 스님이 계신 사무실의 다른 분에게서 불이 났다고, 어서 빨리 오라는 연락이 왔습니다. 그래서 정신 없이 불안한 마음으로 사무실로 달려왔습니다. 와서 보니 사무실에 진짜로 불이 나서 시뻘건 불길이 창문 밖으로 마치 혀를 날름거리듯 연기와 함께 뿜어 나오고 있었어요.
건물 앞에 다른 동료들이 괴로워하면서 앉아 있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얼굴에 심한 화상을 입었고 말조차 잘 못했어요. 그때 제가 물었습니다.
“도대체 어떻게 된 거예요? 스님은요?”
무언가 말을 하려고 했는데 말이 안 나오는 듯 보였어요. 지금은 이름도 잘 기억이 나지 않지만, 며칠 뒤 그분들의 장례식에 가서도 많이 울었습니다. 안타까움과 불안한 마음으로 여기저기 스님을 찾았습니다. 혹시 병원에 먼저 실려 가지 않았을까?
불이 다 꺼지고 난 후 소방대원과 경찰이 저를 부르더군요. 현장에 누군가가 있는데 같이 가서 신원을 확인해 달라고 그랬습니다. 그때는 나이가 어려 죽은 사람을 한 번도 본 적이 없었습니다. 겁이 덜컥 났습니다. 죽은 사람을 본다는 것 때문에. 그리고 그게 바로 스님일지도 모른다는 것 때문에.
저도 그때는 제정신이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소방관들을 따라 가슴까지 차오르는 물을 헤치고 껌껌한 지하 사무실로 내려갔습니다. 숨을 쉬기도 힘들었고, 손전등에 비치는 모든 것이 온통 시커멓게 변해 있었습니다.
火魔에 희생된 스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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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화재로 숨진 법산 스님이 생전에 남긴 명상 테이프. |
소방대원이 누구냐고 물었어요.
“이것이 사람입니까?”
얼떨결에 제가 묻자 “예, 시신입니다. 누군지 알아볼 수 있겠습니까?”라고 묻더군요. 심장이 마구 뛰고 뱃속이 울렁거리기 시작했어요. 아마 그때 그곳에 저 혼자 있었더라면 분명히 미쳐버렸을 겁니다. 정신을 바짝 차리고 자세히 보니 타다 남은 양말 조각이 보였어요. 스님은 양말이 두 켤레밖에 없었기 때문에 제가 금방 알아보았습니다.
그날 이후, 아세요? 스님은 밤에 화장실 갈 때마다 저를 따라다니셨어요. 스님이 따라다닌 것이 아니라 제가 그렇게 생각한 거겠지요. 죄송합니다. 스님을 욕되게 해서요. 스님이 살아계신 동안 많은 사람이 스님을 좋아해서 따라다녔습니다. 그런데 사는 세상이 서로 달라지고 나니 모두 멀리했어요. 저조차 말입니다.
그때 스님 많이 속상하셨지요? 다들 살려고 빠져나왔지만 혼자 지독한 가스와 뜨거운 고통 속에서 마지막까지 불을 끄신다고 애쓰시다가 그렇게 쓰러지셨는데 모두 무섭다고 피하다니 말이지요. 저에게도 언젠가 죽었을 때 저를 아는 사람들이 무서워하고 멀리 피하는 때가 오겠지요. 그 모습을 만약 스님께서 보신다면 평소처럼 저에게 이런 농담을 하실 것 같습니다.
“살아 있을 때 잘하지.”
스님의 죽음은 저에게 커다란 충격이자 무언가를 일깨워준 큰 계기가 되었습니다. 누군가 하신 그런 말씀이 기억나요. 공부할 사람이 공부하지 않으면 세상이 알아서 공부를 시켜준다고. 장례를 치르는 동안, 그때 희생된 다른 분들의 장례까지 치르면서 거의 두 달을 영안실에서 보냈는데, 정말로 그 짧은 시간 동안 엄청난 많은 세상 경험이 있었습니다.
스님은 자주 저에게 出家(출가)해서 같이 살자고 하셨는데 결국 스님의 장례를 치른 지 얼마 되지 않아 저도 출가했습니다. 스님은 가셨지만 저는 새롭게 태어났습니다. 같이 살겠다는 약속은 지켜 드릴 수가 없네요. 다음 生(생)에 또 다른 인연이 올 것 같습니다. 그동안 준비 잘하고 있을게요.
지금 스님의 목소리를 듣고 있습니다. 예전에 녹음실에서 스님의 목소리를 처음 들었을 때는 많이 웃었습니다. 보통 ‘명상의 말씀’ 같은 테이프에는 묵직하고 세련된 성우들의 목소리가 들리잖아요. 그런데 그런 목소리를 기대하고 귀를 기울이고 있었는데 경상도 억양이 들어간 스님의 목소리가 들리니까 좋게 말해서는 산뜻했고, 좀 안 좋게 말하자면 ‘이 테이프 잘 안 팔리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아마 지금 시대에 스님의 목소리로 다시 녹음을 하신다면 큰 인기를 끌 수 있었을 텐데. 어쩔 수 없는 일이지요.
“스님 못다한 일을 하겠습니다”
그때 스님은 참 고생이 많았었지요. 제가 몇 년 전부터 스님이 걸었던 비슷한 길을 걷고 있는데 정말로 힘이 듭니다. 힘들 때마다 사실은 스님을 생각했어요. 그때 법산 스님도 이런 심정이었겠구나 하고요. 스님은 그때 ‘오디오 대장경’을 만들고 계셨는데 그 꿈을 채 펴지도 못하고 떠나셔서 스님에게는 큰 恨(한)이 되지 않았나 싶습니다.
저도 당시는 대학을 막 졸업했을 때였고 또 출가하기 전이라서 스님이 하고자 했던 일들이 그렇게 중요한 것인지 잘 몰랐습니다. 출가 후 수행과 공부를 하다 보니 우리 대중에게 정말로 많은 것이 필요하다는 것을 새삼 알게 되었습니다.
그중에서도 근본 불교 經典(경전)이 쉬운 우리말로 번역되는 것과, 번역된 경전을 일반 사람들이 쉽게 공부하고, 그 내용을 실천할 수 있게 하는 것이 꼭 필요하다는 것을 알게 됐습니다. 다행히 요즘은 여러 사람의 노력으로 번역 부분에서 많은 성과가 나타나고 있습니다.
스님은 생전에 사람들이 쉽게 공부할 수 있게 하기 위해 경전의 내용을 한 편의 드라마 형식으로 꾸미는 작업을 하셨습니다. 그 테이프를 듣고 있으면 마치 라디오방송의 드라마를 듣는 느낌이 듭니다. 요즘같이 바쁘고 힘든 현대인들이 부처님 말씀을 배울 수 있는 아주 적당한 방법인데 작업을 미처 못 마친 것을 생각하면 할수록 많은 아쉬움이 듭니다. 그때 녹음을 도와주셨던 성우분들께서도 안타깝게 몇 년 뒤 대한항공 괌 비행기 사고로 유명을 달리하셨다고 들었습니다. 다시 한 번 그분들의 명복을 빕니다.
스님은 당시 주변의 도움 없이 혼자만의 길을 걷고 있었지만 지칠 줄 모르며 항상 긍정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지금 생각해 보면 분명한 삶의 목표를 가지고 오직 그것만을 생각하고 계셨던 것 같습니다. 저도 지금은 茶瞑想(차명상)이라는 것을 합니다. 아직 변변치 못하지만 생활 속에서 쉽게 수행하고 더욱 지혜로워지면서 사는 방법을 연구하고 실천하고 있습니다. 방법은 좀 다르지만 스님이 생각하셨던 것과 비슷한 것 같습니다. 이젠 안 무서워할 테니 저 좀 많이 밀어주세요. 스님이 못다 한 것도 제가 꼭 해드리겠습니다.
“저 잘했지요!”
다음번 스님 만나면 이 말 꼭 해 드리고 싶습니다. 스님 덕에 정말로 눈을 뜨게 되었습니다. 다시 한 번 깊이 감사 드립니다. 제가 하는 일이 잘되면 스님의 답장이라 생각하겠습니다. 또 힘들어도 더욱 열심히 하라는 답장이라 생각하겠습니다. 그럼 이만. 지장 합장.⊙
늘 친구 같고 애인 같은 아내 은선에게
지금처럼 토닥이며 배우고, 항상 새롭고 행복하게 살자
표민수 방송 PD
⊙ 1964년 대구 출생.
⊙ 서울대 독문과 졸업.
⊙ 1991년 KBS 공채 18기 입사. KBS 드라마국 PD 역임.
⊙ 現 팬엔터테인먼트 드라마제작팀 PD.
⊙ 작품: 드라마 <거짓말> <슬픈 유혹> <풀하우스> <넌 어느 별에서 왔니> <그들이 사는 세상> 등.
⊙ 상훈: 제35회 백상예술대상 신인 연출상, KBS 출입기자단 선정 최우수프로그램상, 경실련 최우수프로그램상.
20여 년 전 우리가 처음 만난 그날을 생각하면 빨간 공중전화 부스가 먼저 떠오른다. 수많은 사람이 스쳐가고 있던 호텔의 빨간 공중전화 부스 앞에서 주위를 둘러보며 수줍게 서성이고 있었던 소녀를 발견한 순간 난 세상이 환해짐을 느꼈다. 얼굴도 모른 채 한참을 기다렸던 사람이 삶의 동반자가 되고, 엇갈렸던 첫 만남이 필연이 됐구나. 그날 우리는 선배의 주선으로 만남을 약속했지만 호텔의 같은 층, 다른 커피숍에서 서로를 기다렸었지. 휴대폰도 없었고 언제 올지 모르는 너를 애타게 기다리면서 잠시 화장실을 다녀오는 길에 공중전화 부스 앞에서 그 소녀를 봤고, 첫눈에 반했지.
너를 만나기 전 나는 답답하기 이를 데 없는 남자였다. 알다시피 나는 6형제 중 막내에다가 남자 중·고등학교를 나왔지. 기대를 품고 간 대학에서도 여학생과 어울릴 기회를 갖지 못했어. 학과 동기 65명 중 여자는 세 명뿐이었거든. 게다가 그 세 명도 나보다 남성다웠지. 그래서 ‘여자는 이래야 한다’는 나름의 기준이 내재돼 있었나 봐.
너와 만난 지 1년이 조금 지났을 때로 기억한다. 강릉으로 출장을 가 있던 나에게 너는 “파리로 유학을 가고 싶다”며 “허락해 달라”고 했지. 고민 끝에 너를 보내기로 했어. 반대했다가 앙금으로 남을 미안함이 싫었던 것 같아. 아내의 유학조차 자신을 위해 허락했을 만큼 난 이기적인 인간이었나 보다. 지금도 그 성격에는 변함이 없지만.
사랑하는 법을 가르쳐 준 사람
그렇게 파리로 간 너를 만나기 위해 태어나서 처음으로 외국에 나갔지. 파리에 발을 딛고 느꼈던 바람을 나는 아직 잊지 못한다. 이국의 네 방에서는 외로움으로 응고된 고독의 향기가 났지. ‘아, 여자도 남자와 다를 것 없는 사람이구나’란 사실을 그때 처음 알았어.
네가 낯선 곳에 와서 공부를 하면서 느꼈을 외로움이 내가 지방에 가 있었을 때 느꼈을 감정과 같다는 것을. 여자도 외로울 땐 가끔 남자 동료와 어울려 술을 마실 수 있고, 바쁘면 미처 연락을 못 할 수도 있다는 사실을 너를 만난 지 3년이 지나서야, 파리로 보내고 나서야 알았다.
남들은 우리 부부를 ‘닭살 커플’이라고 하는 거 알지? 결혼 14년차인 우리가 알콩달콩 사니까 아직도 신혼으로 보이나 봐. 사람들이 부부싸움 안 하느냐고 물을 때마다 해주는 말이 있어. “남북통일이나 보수냐 개혁이냐 등의 문제로 싸우는 것이 아니라 라면에 계란을 넣고 안 넣고의 문제로 다툰다”고.
너 유학 가 있을 때도 우리 참 많이 싸웠지. 파리에 있는 네가 전화로 신림동 만두랑 순대가 먹고 싶다고 하기에 당장 신림동에 가서 그것들을 사왔지. 너를 더욱 기쁘게 해주고 싶은 마음에 몰래 비행기표를 끊고 출국하기 직전 공항에서 전화했었어. 그러곤 “바쁜데 연락도 없이 왜 오느냐”는 너의 말이 섭섭해 안 가겠다고 소리를 지르며 싸웠지. 물론 비행기표가 아까워서 결국 갔지만 말이야.
파리에서 패션쇼 준비하는 너를 도와 2박3일 동안 스타일화에 묻어 있는 지우개 가루 털어주고 온 것을 생각하니 피식 웃음이 난다. 너 유학 가 있는 동안 한 달 전화비가 80만원씩 나왔는데, 알고 있니? 하루는 전화국 직원이 해외사업하느냐고 묻더라. 그 무렵의 일들을 생각하니 아련하게 웃음이 번진다.
은선아, 너와 살면서 대화하고 맞춰 가며 사람을 알게 됐다. 사람이 왜 화를 내고 무엇을 생각하며 갈등은 어떻게 풀어야 하는지, 사랑이란 어떤 것인지 등 많은 걸 배웠어. 네가 지금 내 옆에 없었다면 나는 아직도 내 고집만 부리며 염세주의에 빠져 있었을 거야. 살지 않는 것이 고통을 느끼지 않는 최선이라 생각했건만 이제는 삶에 지나친 애착이 생길까 봐 걱정될 정도야.
세상에서 가장 든든한 후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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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 5월 부인 전은선씨와 함께 일본 여행 중. |
우리는 아이가 없으니까 서로에게 더욱 집중할 수 있는 것 같아. 그렇지 않으면 결혼생활이 지루하겠지. 남들이 들으면 또 닭살이라 하겠지만 둘이 놀 때 정말 즐겁다. 손금 봐주기, 엽기적인 사진 찍어서 보내주기, 화분에 새싹 나면 물 주면서 대화하기, 누가 더 청소 잘했나 자랑하기, 같이 쇼핑하고 무작정 걸으며 이야기하기 등….
즐거움과 행복을 공유하는 방법은 찾아내기 나름인 것 같다. 우리가 함께한 지도 어느덧 14년이 됐네? 함께하는 시간이 길어지다 보니 둘만의 약속들도 하나씩 늘어가고 있구나. 지금처럼 아무리 화가 나도 하지 말아야 할 것들 잘 지키면서 살자.
서로를 가장 잘 아는 오래된 친구처럼 곁에 있지만 네가 항상 새로워서 삶이 재밌다. 함께하는 세월 동안 더 여유로워지고 침착해지는 너의 모습을 발견하게 돼. 상황에 따라 대처하는 행동이나 말투는 물론 가끔 발견하는 흰 머리카락까지도 새롭다. 그리고 확실한 것 한 가지는 공중전화 부스 앞의 소녀 같았던 그때보다 지금의 네가 더 예쁘다는 거야. 함께할수록 정말 나에게 꼭 맞는 사람이 되어가는 것 같아.
죽기 전 너에게 어떤 말을 남길 수 있을까 생각해 봤다. 너와의 ‘소풍’을 끝내고 가는 길, 당신 덕분에 이번 생이 즐거웠다고, 나 없이도 더 행복하게 살라고 말해 주고 싶어. 남자도 만나고 친구들도 만나고 쓰고 싶은 곳에 돈도 쓰면서 네가 더 행복했으면 좋겠어.
은선아, 우린 앞으로도 서로에게 더 배우고 새롭게 보여줄 모습들이 많이 남아있는 것 같다. 지금처럼 서로 토닥이며 배우고, 늘 새롭고 행복하게 그렇게 살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