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둥(廣東) 사람은 혁명을 하고, 푸젠(福建) 사람은 돈을 내고,
후난(湖南) 사람은 군인이 되고, 저장(浙江) 사람은 관리가 된다.”
⊙ 돈을 가장 잘 버는 華商의 주류는 푸젠 출신
⊙ 농사에는 젬병이지만 장사에는 고수, 배를 타도 商船만 탄다
⊙ 남의 돈을 빌려 자신의 사업을 하는 것이 최고의 계책
후난(湖南) 사람은 군인이 되고, 저장(浙江) 사람은 관리가 된다.”
⊙ 돈을 가장 잘 버는 華商의 주류는 푸젠 출신
⊙ 농사에는 젬병이지만 장사에는 고수, 배를 타도 商船만 탄다
⊙ 남의 돈을 빌려 자신의 사업을 하는 것이 최고의 계책

- 푸젠성의 대표적 항구도시인 샤먼. 푸젠은 화교 상인들의 본산으로, 일찍부터 해상무역이 발달했다.
오래 전부터 푸젠(福建) 지방에서 전해져 오는 이 말은 오늘날의 푸젠 사람들이 인생의 신조로 삼는 문구다.
“광둥(廣東) 사람은 혁명을 하고, 푸젠 사람은 돈을 내고, 후난(湖南) 사람은 군인이 되고, 저장(浙江) 사람은 관리가 된다”는 말이 있다.
여기서 푸젠 사람이 돈을 댄다는 것은 두 가지 뜻이 있다. 첫째 푸젠 사람은 돈이 있고, 돈을 대는 방식으로 정치에 참여하고 국가에 보답한다는 것이다.
푸젠성은 중국의 동남부에 위치하고 있다. 북쪽으로는 저장성(浙江省), 서쪽으로는 장시성(江西省), 남쪽으로는 광둥성(廣東省)과 접하고 있으며, 타이완(臺灣)해협을 사이에 두고 타이완과 마주보고 있다. 바다를 면한 중국의 성 가운데서 푸젠은 산악지역이 제일 많은 성이다. 때문에 교통이 불편하고 토지가 적다. “80%가 산이고, 10%가 물, 나머지 10%가 밭(八山一水一分田)”이라는 말이 있을 정도다. 중국의 名茶(명차)로 통하는 우롱차(烏龍茶)의 90% 이상이 푸젠의 산악지역에서 난다.
푸젠성의 약칭은 민(?)이다. 민은 옛날 푸젠에 살았던 미개 민족의 이름이다. 즉 고대에 越族(월족) 사람들이 거주하던 지역임을 뜻한다. 푸젠은 민둥(?東), 민시(?西), 민난(?南), 민베이(?北) 4개 지역으로 나뉜다. 민베이(푸젠 북부) 사람들은 본분을 지키고 낙관적이며, 민둥(푸젠 동부 사람)들은 안정을 추구하고 혼잡함을 두려워한다. 민시(푸젠 서쪽) 사람들은 종족을 소중히 여기고 내부 응집력이 강한 반면, 민난(푸젠 남쪽) 사람들은 이국이나 타향으로 나가는 진취적인 성향으로 무엇인가를 성취해보려는 욕구와 열정을 가지고 있어 천하를 누비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민난 사람은 농사에는 젬병이지만 장사에는 고수다. 북동쪽 바닷가 민둥 사람도 배를 타기는 하지만 고기잡이 배인 데 반하여 민난 사람은 배를 타도 상선을 탄다. 상인의 소질과 상업정신만을 놓고 볼 때 민난 사람들이 제일 뛰어난 자질을 가졌다고 말할 수 있다. 그래서 오늘날 푸젠 상인이라고 하면 곧 민난 상인을 가리킨다.
“商에 황금이 있고, 그 속에 玉이 있다”
중국 상인 하면 동남아를 중심으로 활동하는 華商(화상)을 빼놓을 수 없다. 오늘날 화상들은 동남아 국가 및 기타 지역에서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태국에서는 인구의 10%인 화교들이 공업과 상업의 90%를 차지하며, 화상들이 경영하는 은행의 총자산이 태국 상업은행 총자산의 60%를 차지하고 있다. 인도네시아에서는 화상들이 전국 100대 기업의 60% 지분을 소유하고 있으며, 총인구의 4%인 화교들이 25개의 대기업 중 17개 회사를, 그리고 개인기업의 70%를 차지하고 있다.
말레이시아에서는 정부가 화교기업의 주식을 말레이시아 사람들에게 넘기려는 시도를 하기도 했지만, 전체 인구의 3분의 1을 차지하는 화교들은 여전히 현지 경제의 주요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화상들은 동남아에서의 기적을 세계적인 기적으로 만들어냄으로써 중국 상인들을 ‘가장 돈을 잘 버는’ 사람들의 대명사로 만들었다.
동남아에 거주하는 화상들은 대체로 10개의 집단으로 분류할 수 있다. 여기에는 광둥 지역의 차오저우(潮州), 산터우(汕頭) 지역과 푸젠 및 마카오를 포함한 客家人(객가인·화북에서 화남으로 이사 온 한족의 후예)들로 이루어진 객가 지역 등이 포함된다. 이 중 가장 많은 수를 차지하는 것이 민난 사람들을 주축으로 하는 푸젠 지역이다. 푸젠 출신 화교는 2000만명으로, 화교 인구 전체의 30%를 차지한다는 것이 정설이다.
지리적, 역사적인 이유로 민난 사람들은 생존을 위해 바다 쪽으로 나갈 수밖에 없었다. 일찍이 明(명)나라 永樂帝(영락제) 당시 푸젠 사람들이 동남아로 이주하기 시작했다. “商(상)에 황금이 있고, 그 속에 玉(옥)이 있다”는 말에서 알 수 있듯, 민난 사람들은 농경을 중시하지 않았다. 공부에도 강한 욕망이 없었고, ‘官職(관직) 우선’이라는 사상에도 깊은 영향을 받지 않았다. 중국이 오랜 역사 과정에서 농업을 강조해 온 나라였음에도 불구하고 민난 사람들은 ‘상업이 근본’이라는 생각을 해왔다.
그들은 세상을 알기 시작하면서부터 오직 상업에 종사하는 것에 관심을 쏟아왔다. 생계를 잇고, 사업을 해 나가는 과정에서 그들은 중국 전통문화와 푸젠 지역 문화의 특색을 지닌 경영 스타일과 특징들을 만들었으며, 이를 화교 상업문화의 주체로 전승해갔다. ‘말 한마디로 천냥 빚을 갚는다’ ‘조화를 귀하게 여긴다’ ‘불굴의 상업정신과 근검절약’ ‘충실한 공익정신’ 등의 경영철학을 만들어냈다.
변화하는 자가 세상을 움직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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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5세기 명나라를 통치했던 영락제. 당시 중국인들은 아프리카 희망봉까지 항해했고 푸젠상인들은 돈을 벌기 위해 동남아로 이주했다. |
푸젠 화상은 변화에 능하다. 그들은 어느 한 시기나 하나의 지역, 하나의 업종과 사업형태에 얽매이지 않고 수시로 새로운 목표를 향해 나갈 준비를 하고 있다. 그들은 낡은 규칙에 얽매이지 않고 언제나 기업 발전과 상응하는 단계에서 적당한 조율을 하고 있다.
푸젠 화상들의 변화의 출발점은 ‘이윤’에 있다. 그들은 이윤이라는 가치를 위해 새롭고 빠른 발전 방식을 모색한다. 이런 이유로 푸젠 화상 및 그들에게 소속된 기업들은 경제환경의 변화에 적응하는 능력이 뛰어나다.
변화에 능한 푸젠 사람들의 특징은 초기 상업역사에서도 나타난다. 明代(명대)에 푸젠 지역이 바다를 통해 왜적의 침입을 받자 朝廷(조정)은 항구를 봉쇄했다. 푸젠 해상상인들은 이에 아랑곳하지 않고 ‘변화’를 요구했다. 그리하여 정부의 항구를 개인의 항구로 삼아 전성기를 맞았다. 淸代(청대)에는 나라의 문을 닫는 쇄국정책으로 ‘바다가 봉쇄’당하곤 했는데, 상인의 활동은 그때마다 타격을 받지 않을 수 없었다. 마침내 그들은 정부로부터 盜賊(도적)떼로 몰리자 생활기반이었던 바다를 버리고 육지에 오르는 변화를 꾀했다.
근대 푸젠 사람들은 동남아에서 수많은 가족기업을 건립했다. 가족기업 제도가 일정 궤도에 오르면서 적극성이 상실되자 기업을 현대화한 有限(유한)회사로 바꾸었다. 이처럼 푸젠 화상들은 외부의 환경요인에 따라 끊임없는 변화를 계속해왔다.
자연생태계의 많은 동물들도 환경에 따라 자신의 피부색이나 털 색깔을 조정하는 본능을 가지고 있어 세월의 흐름에 따라 사라지거나 진화하게 된다. 사람도 이와 마찬가지다. 역사적 변화와 세계 각지의 공간 이동을 거친 후 푸젠 화상들은 원인에 따라 변화하는 특수한 능력을 배양하게 됐으며, 기업 경영 과정에서 ‘변화’라는 경영철학을 견지했다. 兵法(병법)에서 사용됐던 ‘변화하는 자가 세상을 움직인다’는 이 말은 푸젠 상인이 언제나 되풀이하여 강조하는 명언이다.
민난은 예로부터 재계의 걸출한 인물들을 많이 배출했다. 자연환경 및 문화적 요인은 민난 사람들의 상업적 자질을 만들었고, 그들의 상업정신을 키워내는 토대가 됐다. ‘돈 되는 곳이면 어디든 간다’는 말처럼 푸젠 출신 화교들은 타고난 근면성과 상인 기질 덕분에 아시아 부호의 다수를 차지하고 있다.
푸젠 상인 천자겅과 린사오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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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국 푸젠성 푸저우의 어륜조선창에서 복원된 14세기 중국 원양무역선 ‘7백년전의 약속호’. |
천자겅은 싱가포르에서 재벌로 성공한 뒤 현지 화교들의 교육을 위한 학교를 설립한 데 이어 1910년 푸젠성 샤먼에 샤먼대학을 비롯한 40여 개의 학교와 병원을 설립했다. 이런 그를 가리켜 마오쩌둥은 생전에 ‘화교를 대표하는 깃발이자 민족의 빛’이라고 극찬했다.
천자겅은 고향에서 살다가 11살 때 아버지가 있던 싱가포르로 이주했다. 당시 아버지는 그곳에서 미곡상을 하고 있었는데 그곳에서 장사를 배우기 시작했다. 하지만 얼마 안되어 아버지의 사업 부도로 어린 나이에 빚까지 떠안게 됐다.
그는 갖은 고생 끝에 고무수지 사업으로 큰 성공을 거두었다. 초기에는 고무수지 판매로 시작했지만 거대한 고무농장을 직접 경영해 원자재를 확보한 뒤, 이를 원료로 생고무를 직접 생산하는 대규모 공장을 운영했다. 자료에 의하면 당시 그의 공장에 근무하는 중국 교포 근로자가 6000여 명에 달했다고 한다.
그의 신조는 ‘교육이 진작되지 않으면 경제가 부흥할 수 없다(敎育不振, 則實業不興)’였다. 그는 국제무역으로 번 돈을 고향의 후세 교육을 위해 투자했다. 巨富(거부)가 된 후에도 그의 생활은 지극히 검약해 평소 식사는 고구마죽·잡곡밥·짠지·땅콩 등이 전부였다고 한다.
수하르토 대통령이 권좌에서 물러나기 전까지 인도네시아의 최대 재벌이었던 린사오량(林紹良) 살림그룹 회장도 푸젠 출신이다. 그는 1916년 푸젠성 하이커우(海口)에서 농민의 아들로 태어난 ‘푸젠방(福建幇)’이다. 고향 사숙에서 공부하고 부친이 경영하던 국수가게에서 일하다가 22세 때 고향이 水災(수재)에 이어 戰亂(전란)에 휩싸이자 징병될 것을 우려해 인도네시아로 이주했다. 숙부가 경영하는 식료품점의 점원으로 4년간 일한 후 형제, 친구들과 함께 두부·콩나물·의약품·의류 장사를 하면서 힘겨운 나날을 보냈다. 그는 전란 시기에 장사를 하려면 물품의 안전한 수송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봤다.
자신이 취급하는 상품 가운데 의약품과 식량을 군에 제공하는 대신, 자기 물건을 안전하게 운반할 수 있도록 군대의 도움을 받았다. 그 과정에서 그가 절친한 관계를 맺은 군인이 중부 자바섬에 주둔했던 제4군구의 수하르토 중령이었다.
1950년대 초기 중부 자바에서 자카르타로 옮겨온 린사오량은 방직제품을 군대에 납품하고 자전거 부품에도 손을 댔다.
그후 권력을 장악한 수하르토는 오랜 친구 린사오량에게 많은 특권을 주었다. 살림그룹 성장의 결정적 계기가 된 것은 밀가루의 독점 가공판매와 정향을 독점 수입하도록 한 것이다. 밀가루는 2억 인도네시아인의 주식이고, 정향은 담배 제조에 필수적인 재료다. 그는 아시아에서 가장 큰 시멘트회사를 건립, 인도네시아 시멘트 수요의 40%를 담당했다.
주로 인도네시아 국민의 의식주와 관련된 산업으로 큰돈을 거머쥐고, 이를 바탕으로 그는 홍콩에서 금융회사를 인수, 제일태평금융공사로 개명했다가 이를 제일태평그룹으로 확장해 금융업과 함께 사업다각화에 나섰다. 살림그룹은 아시아 금융위기가 오기 전 640여 개 계열사에 연간 매출액이 200억 달러에 이르는 거대 기업군으로 성장했다. 비록 수하르토의 하야와 금융위기로 급격하게 위축됐지만 그의 일가의 재산은 60억 달러로, 동남아에서 최고 거부 반열에 올랐다.
‘경영의 神’ 왕융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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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타이완 재계에서 경영의 神으로 불렸던 포모사그룹의 왕융칭 회장. |
그와 형제들이 처음 세운 회사는 東升公司(동승공사)로, 조호르바루의 자그마한 식품가게였다. 제2차 세계대전 이전까지는 주로 쌀과 설탕, 밀가루 등을 팔았다. 戰後(전후)에 이 회사는 해체되고 1949년 쿠알라룸푸르에 ‘궈씨(郭氏)형제 유한공사’를 설립했다. 그는 회사 설립 후 10년이 지나면서 말레이시아에서 설탕소비가 급증하자 이전의 쌀·설탕·밀가루 매매에서 사탕수수 생산과 설탕 제조로 방향을 전환했고, 동시에 국제적인 설탕 교역사업에 뛰어들었다.
그는 설탕에 이어 밀가루에도 손을 대 큰 성공을 거뒀다. 1962년 설립한 밀가루공장은 1990년대 중반에 생산능력이 20만t을 넘어 말레이시아 수요의 40%를 감당했고, 사료시장의 20%를 차지했다. 궈씨형제 그룹은 지금은 호텔업과 부동산업으로 꽃을 피우고 있다.
궈허니엔은 싱가포르에 관광호텔이 부족하다는 걸 알고 1967년 특급 요지를 저렴하게 사들여 5성급 호텔을 지었다. 이어 동남아 주요 도시와 중국 대륙의 주요 도시에 ‘샹그릴라’ 브랜드의 호텔을 지어 운영하고 있다. 그는 1970년대 말 본거지를 말레이시아에서 홍콩으로 옮겨 지주회사인 가리(嘉里)사를 설립한 후 50억 달러가 넘는 돈을 중국에 투자했다. 현재는 말레이시아, 홍콩, 싱가포르, 중국에서 100개가 넘는 회사를 경영하고 있다.
타이완 재계에서 ‘경영의 神(신)’으로 불렸던 포모사(臺塑)그룹 왕융칭(王永慶) 회장은 자식에게 이런 遺勳(유훈)을 남겼다.
“돈은 하늘이 내게 잠시 빌려준 것일 뿐이다. 인간은 누구나 財富(재부)를 바라지만 태어날 때부터 갖고 태어난 사람은 없다. 떠날 때 가지고 떠나는 사람도 없다. 모으는 재산은 저마다 다르지만 세상을 등질 때 모두 돌려줘야 한다는 데에는 예외가 없다.”
그는 무려 9조원에 달하는 재산을 사회에 환원하고 2008년 10월 세상을 떠났다. 왕융칭은 1916년 1월 타이베이(臺北)의 농촌에서 태어났지만 본적은 푸젠성 안시현(安溪縣)이다. 때문에 중국인들 사이에서는 푸젠 출신 기업인으로 통한다. 15세에 공부를 그만두고 茶園(차원)의 잡일부터 시작해 쌀집에서 일을 했다. 16세 때 부친으로부터 200위안을 빌려 쌀가게를 열었다가 점차 정미소·벽돌공장·목재상·PVC원료생산 등으로 사업을 확장했다. 그리고 1954년에 포모사플라스틱을 창업한다.
포모사플라스틱그룹은 정유·석유화학원료·플라스틱가공·섬유·방직·전자재료·반도체·자동차·발전·기계·운수·교육 및 의료사업 등의 산업에 걸쳐 있는 타이완 굴지의 기업이다. 특히 석유화학분야에서는 원유수입·운송·제련·분해·가공제조에서 완성유 소매까지 일체화된 산업 체인을 장악하고 있다. 2006년 매출액은 약 617억 달러로, 타이완의 연간 생산총액의 7%를 차지했다.
경영에서 비범한 능력을 보이는 푸젠 출신 상인들의 사고방식 중에는 한 가지 특이한 점이 있다. ‘위험’이라는 두 글자에 대한 그들의 해석은 종종 ‘이익’이라는 뜻과 동의어로 쓰인다는 것이다. 그들은 모험을 감수하지 않으면 큰 사업을 이룰 수 없다고 생각한다.
창업 초기의 푸젠 상인들은 큰 대가를 얻고 더 많은 자본을 얻기 위해 기꺼이 큰 도박을 하고 더 많은 판돈을 걸었다. 대다수의 푸젠 상인들이 볼 때 어차피 맨손이었기에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았고, 크게 손해를 보아봤자 다시 시작하면 된다고 생각했다.
재미있는 것은 그들은 사업이 어느 정도 안정궤도에 들어서면 이와 반대로 움직였다는 점이다. 대개 “한번의 부주의로 공든 탑이 무너진다”는 결과는 누구도 원치 않기 때문에 천하의 상인들은 누구나 이런 방법을 채택하는데, 푸젠 상인들도 대부분 이러했다.
‘내일로부터 빌려온 돈’
푸젠 상인은 돈을 빌려 사업을 하는데 빼어난 재주가 있다. 그들은 10만 위안이 있으면 은행에서 다시 10만 위안을 빌려서 20만 위안을 투자한다. 다른 지역의 중국상인들이 5만 위안은 은행에 저축하고 5만 위안만 투자하는 것과는 다르다.
또 푸젠 상인은 개인이든 그룹이든 다른 사람의 수중에 있는 돈을 빌리는 데 능하다. 그들에게 돈을 빌려오는 것은 ‘내일’ 혹은 ‘나중’의 돈이었다. 왜냐하면 돈을 빌린다는 것은 오늘 빌려서 오늘 갚는 것이 아니라 ‘내일’ 혹은 ‘나중’에 갚는 것이기 때문이다. 푸젠 상인은 다른 사람에게서 빌린 돈을 사용해 자신의 사업을 하는 것을 최고의 계책으로 여겼다. 그들은 이를 ‘내일로부터 빌려온 돈’이라고 말한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일상생활에서든 아니면 사업활동 중이든 돈을 빌리는 것을 두려운 일로 여긴다. ‘돈을 빌리면 친구가 적어진다’는 것을 경험적으로 알기 때문이다. 그러나 시장경제에서 창업을 하고자 할 때는 타인 자본에 기대는 경우가 많다. 상업이 발달한 푸젠을 중심으로 서쪽으로 차오산(潮汕), 북쪽으로 원저우(溫州), 타이완 사람들은 금융업이 발달하지 않았던 시대부터 서로를 돕는 모임(互助會)을 만들어 회원들 간에 자본을 모아 운용했다.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중반에 바다를 건너온 화교들은 동남아에서 안정적인 생활을 하고 있었지만 사회적인 지위는 높지 않아 현지 주민들로부터 좋은 대접을 받지 못했다. 또한 불완전한 은행시스템으로 대기업만 돈을 빌릴 수 있었고, 화교가 운영하는 소기업과 작은 상점들은 도움을 받을 수 없었다. 그리하여 서로 돕는 모임의 형식은 푸젠 출신 화교들 사이에서 먼저 생겨났고, 점차로 다른 무리들에게 퍼져나갔다. 모든 국가에서 화교 사회에는 이런 모임을 흔히 볼 수 있다.
푸젠성의 省都(성도)가 있는 푸저우 사람들은 예로부터 “차라리 태평성세의 강아지가 될지언정, 亂世(난세)의 인간이 되지는 않겠다”는 말을 자주 해왔다. 푸젠성으로 옮겨 온 사람들의 생활이 고달팠기에 대다수의 사람들은 자신의 손재주에 의지해 살아가야 했다. 푸저우 사람들 중에 요리사와 이발사, 재단사가 많은 것은 그 때문이다.
푸저우 사람들에게는 ‘세 자루의 칼(三把刀)’이란 말이 따라다닌다. 요리·이발·재단에 쓰이는 세 개의 칼이 푸저우 사람들이 삶을 영위하는 수단이었기 때문이다. 실제 중국의 푸젠성 인근 지역 등에는 주방장, 이발사, 포목점 운영업자가 된 푸저우 출신이 많다.
<인민방 시장보>에 따르면, 현재 중국에는 지역으로 구분되는 45개의 상인집단이 있다고 한다. 그중 특정 지역에서 대대로 내려오는 5大(대) 상방이 대표적이다. 저장상방(浙江商幇), 산둥상방(山東商幇), 쑤난상방(蘇南商幇), 민난상방(?南商幇), 주장삼각주상방(珠江三角洲商幇)은 중국의 지역경제가 새롭게 발전함에 따라 부상된 지역별 상인단체들이다.
그중 민난상방은 타이완과 바다를 사이에 두고 마주보고 있는 취안저우(泉州), 장저우(?州), 샤먼을 중심으로 활약하는 상인들을 가리킨다. 민난상방의 문화는 민난 문화와 吳(오)나라, 越(월)나라 문화가 어우러진 전형적인 커자(客家)상업문화다. 대표적인 기업들로는 운동화 제조업체인 안타(安踏), 체육용품 업체인 싼싱(三興), 의류업체인 치파이(柒牌)와 치피랑(七匹狼), 통신전자기업인 샤신(廈新), 음향가전업체인 완리다(萬利達) 등을 꼽을 수 있다.
운동화의 首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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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쟁을 피해 남하한 객가인들이 만든 토루. 그들은 방어의 목적으로 높은 토담에 지붕을 겹겹이 쌓은 거대한 주택을 지었다.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돼 있다. |
푸젠성 진장은 ‘중국 운동화의 首都(수도)’라는 칭호가 붙은 고장이다. 이곳에는 3000여 개의 운동화 공장이 집중되어 있다. 2001년에는 주문자 상표부착 생산방식(OEM)으로 해외에 판매되는 운동화만 연 4억 켤레에 이르렀다. 그중 가장 유명한 기업이 안타그룹이다.
안타그룹의 딩즈중(丁志忠) 회장은 진장 신발업계의 발전을 선도한 경영자로 통한다. 그는 누구보다 품질을 중시했다. 그에 관한 유명한 일화가 있다. 1998년 10월, 안타회사는 한 소비자의 하소연을 들었다. 신발을 사서 사흘밖에 신지 않았는데 신발 앞부분이 찢어졌다는 것이었다. 딩즈중 회장은 신발에 대한 철저한 품질검사를 명하는 동시에 원재료에 대한 테스트를 진행하라고 공장에 지시했다.
검사 결과 이 신발은 품질 면에서 문제가 있었다. 딩즈중 회장은 즉시 전국의 판매점에 진열돼 있는 1만 켤레, 당시 가치로 따지면 100만 위안에 해당하는 신발들을 모두 수거했다. 이로 인한 손실은 어마어마했다. 그러나 딩즈중 회장은 이렇게 하지 않으면 안된다고 생각했다. 지금은 100만 위안의 손해를 보더라도 나중에 100만 위안을 다시 벌 수 있지만, 만약 지금 100만 위안이 아까워 이 일을 덮어두면 나중에는 100만 위안을 벌 방법이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신발들이 모두 반품되어 공장으로 들어온 날, 딩즈중은 그 가운데 한 켤레를 손에 들고 분쇄기 쪽으로 걸어가서 직원들에게 “품질에서 문제가 발생하면 그 대가가 얼마가 되든 반드시 책임을 져야 한다”고 했다. 그는 그 신발들을 전부 분쇄하라고 명령했다. 분쇄기 앞에서 많은 직원들이 눈물을 줄줄 흘렸다. 그날 안타회사에는 침통하고 무거운 분위기였지만, 이후 다시 힘차게 일어났다.
그다지 크지 않은 진장시에서 수천 개의 크고 작은 신발공장들이 거의 동시에 창업의 길을 걸었지만 그들의 운명은 뿔뿔이 갈라졌다. 일부는 국외 브랜드의 가공공장이 되고, 일부는 시장에서 3류 역할을 했고, 어떤 공장은 파산했으며, 또 어떤 부류는 계속 발전하고 있다. 후자의 예 중에서는 안타가 가장 특출했다. 안타는 진장에서 첫 번째로 브랜드 경영의 길을 개척한 신발공장이 됐다.
중국 IT업계의 유명 인사인 리샤오중(李曉忠) 샤신전자그룹 회장도 대표적인 푸젠 상인 중의 한 명이다. 리샤오중 회장은 중국산 휴대폰 돌풍을 일으킨 주역이다. 샤신전자는 샤먼의 대표기업으로, 경제특구 시행 초기인 1981년에 컬러TV·VCD 플레이어 생산회사로 출발해 1997년 상하이(上海)증시에 상장하며 호황을 누렸다. 그러나 1999년 시장의 포화로 적자가 눈덩이처럼 불어나고 주식이 휴지 조각으로 전락하는 최대 위기에 직면했다.
그는 회사의 회생을 책임져야 할 사령탑을 맡았다. 그는 2000년에 주력 제품을 휴대폰으로 전환하고는 외제품이 점령하고 있는 高價(고가) 휴대폰 시장에 뛰어들어 큰 성공을 거뒀다. 오늘날 샤신전자는 휴대폰 성공을 바탕으로 DVD 플레이어, 초박막 액정표시장치(TFT-LCD), 노트북 PC 분야로 사업영역을 넓혀가고 있다.
중국 부동산시장의 태평戰士, 쉬롱마오
21세기 푸젠 출신의 대표적인 상인으로는 ‘중국의 100대 부자’ 중에서 3위를 차지한 쉬롱마오(許榮茂)를 들 수 있다. 그는 중국 부동산시장의 ‘태평戰士(전사)’로 널리 알려진 인물이다. 상하이 난징루에 있는 스마오(世茂) 국제빌딩이 그의 작품이다.
1950년 푸젠 스스(石獅)에서 태어난 그는 의학을 전공했지만 20대 중반에 윤택한 생활을 찾아 홍콩으로 떠났다. 일용노동자에서부터 의사, 타인의 재산관리, 금융 일에도 손을 대는 등 안 해본 일이 없을 정도로 부지런히 일했다. 그러던 중 우연히 증권시장에 발을 들여 주식으로 5억 위안을 벌어들였다. 그것만으로도 한평생 남부럽지 않게 살 수 있었지만 그의 욕심은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
재도전의 첫 출발은 의류사업이었다. 1980년대 중반, 홍콩에 회사를 설립하고 대륙의 생산원가가 저렴하다는 것을 감안해 선전(深?), 란저우(蘭州)에 5개가 넘는 공장을 세웠다. 이곳 공장에서 만들어진 제품은 주로 미국시장으로 수출됐다.
1989년, 쉬롱마오는 당시 예측불허의 부동산 시장에 뛰어들었다. 자신의 고향 스스에서 부동산 사업을 시작했는데, 스스전스호텔(石獅振獅大酒店), 전스경제개발구(振獅經濟開發區)가 그의 작품이다. 이어 민난황금해안휴양지(?南黃金海岸度假村)를 개발해 부동산 개발상으로 이름을 떨쳤다.
1991년, 그는 자의반 타의반으로 가족을 데리고 호주로 떠났다. 호주에서 새 출발을 하게 된 그는 시드니와 다윈(호주 북부)에 대규모 부동산 투자개발사업을 벌여 성공했다. 이를 계기로 在(재)호주 화교사회에서 그는 ‘태평전사’라 불리게 됐다.
그러나 그의 마음속에는 자신의 역량을 중국에서 펼쳐보고 싶은 욕망이 간절했다. 1993년, 그에게 새로운 기회가 찾아왔다. 푸젠 우이산(武夷山)이 세계 투자개발 관광휴양지로 결정되면서 그는 2억 위안을 투자했다. 그때부터 쉬롱마오의 제2의 인생이 시작됐다.
베이징의 부동산시장을 주시하던 쉬롱마오는 1995년 중국의 수도 베이징에서 자신의 계획을 진행시켰다. 10만㎡ 규모의 올림픽화원(亞運花園)을 시작으로 화아오센터(華澳中心), 쯔주화원(紫竹花園), 위징위안(御景園)을 개발하기 시작했다. 스마오그룹이 개발한 이 건물들은 ‘최고층 주택’이란 이름으로 기네스 신기록을 세우는가 하면 주택 판매실적에서도 1위를 차지했다.
스마오그룹은 2000년 3월 상하이스마오투자공사(上海世茂投資公司)를 만들어 상하이 부동산 시장에 진출했다. 상하이에서도 스마오의 타깃은 高價(고가) 부동산시장이었다. 그는 스마오국제빌딩과 스마오국제회의센터를 건설했다.
지독함, 불굴의 정신
몇년 전 ‘필사적으로 싸워야 이길 수 있다(愛?才會?)’는 민난어로 된 노래가 유행한 적이 있었다. 민난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에게 이 노래는 거의 ‘國歌(국가)’와 같은 것이었고, 푸젠 재계에서 이 노래는 푸젠 출신의 상인들의 ‘商魂(상혼)’을 담은 노래로 여겨졌다. 이 노래가 이렇게 칭송된 이유는 푸젠 사람들의 “필사적으로 하라”는 정신을 노래했기 때문이다.
푸젠 사람들은 인생에서 어떤 일을 하든 모두 ‘필사적으로 싸우는’ 정신을 잊을 수 없으며, 그러지 않으면 ‘성공’이라는 두 글자는 있을 수 없다고 생각했다. 일을 할 때 끝까지 최선을 다해야 하는데, 많은 일들이 비록 열심히 했어도 성공할 수 없을 때가 있다. 그러나 성공한 일을 살펴보면 최선을 다하지 않은 경우가 없다.
푸젠 사람은 일을 할 때 행운이라는 것을 별로 인정하지 않는다. 앞서 언급한 노래에는 이런 가사가 있다.
“30%가 하늘이 정한 것이고, 70%는 노력에 의한 것이라네.”
푸젠 출신 상인의 다른 지역 상인과 가장 큰 차이점은 실패했다고 해서 쉽게 무너지지 않고, 실패한 후에도 필사적으로 노력한다는 것이다. 푸젠 상인은 실패하면 더욱 분발하고, 좌절하면 더욱 견고해져 언제나 목숨을 건 최고의 노력으로 자기의 지혜를 이용해 눈부신 성과를 만들어냈다.
푸젠 상인은 일종의 지독함, 불굴의 정신을 갖고 있다. 그들은 생명을 걸고 자신의 최고 경지를 추구하고, 생명이 다할 때까지 1분 1초도 헛되이 보내지 않으려고 노력해왔다.⊙
▣ 푸젠 상인의 15가지 격언
1. 모든 일의 10분의 3은 하늘에 달렸고, 10분의 7은 노력에 달렸다. 노력하지 않으면 성공도 없다.
2. 위험을 무릅쓰고 바다로 나가라. 동양과 서양을 모두 다녀라.
3. 장사가 으뜸이다. 장사에서 황금이 나오고, 장사로 미인을 얻는다.
4. 어느 일에 질 수는 있어도 장사에서 져서는 안된다.
5. 재물보다도 명예를 중히 여겨라. 얕은 재주보다 포부를 더 중요하게 생각하라.
6. 쉽게 번 돈은 쉽게 없어지지만, 피땀으로 번 돈은 만년을 간다.
7. 가난은 뿌리가 있지만, 富(부)는 사회 신분으로 이룰 수 없다.
8. 時勢(시세)를 모르는 사람은 장사꾼이 아니다.
9. 이득이 없는 장사는 하지 마라.
10. 쌀 때 사들이고, 비쌀 때 내다 팔아라.
11. 명성은 세상에 있고, 시세는 시장에 있다.
12. 기업이 크다고 고객을 가벼이 여기지 마라.
13. 장사를 잘하려면 물품 구입을 잘해야 한다.
14. 귀한 상품은 먼 손님을 부르고, 값이 싼 상품은 가까운 고객을 불러온다.
15. 장사에서는 마땅히 수익을 언급해야 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