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원들 처우 개선을 위해서라면 악역도 마다하지 않겠다』
崔泰枝
1959년 일본 교토 출생. 일본 동무학교 불문과 졸업. 미국 조프리발레학교, 뉴욕 아메리칸 발레시어터 연수. 일본 가이타니발레단에서 프리마 발레리나로 활동하다 1987년 국립발레단 입단. 1996년 최연소 국립발레단 단장에 취임한 후 3회 연임. 2004년 정동극장장 역임. 저서 「나는 인생의 프리마로 춤춘다」.
崔泰枝
1959년 일본 교토 출생. 일본 동무학교 불문과 졸업. 미국 조프리발레학교, 뉴욕 아메리칸 발레시어터 연수. 일본 가이타니발레단에서 프리마 발레리나로 활동하다 1987년 국립발레단 입단. 1996년 최연소 국립발레단 단장에 취임한 후 3회 연임. 2004년 정동극장장 역임. 저서 「나는 인생의 프리마로 춤춘다」.
국립발레단의 崔泰枝(최태지) 단장. 그녀는 1987년부터 10년 동안 국립발레단 수석 무용수로 국내 무대를 누볐다. 1996년에는 최연소 국립발레단 단장이 되어 「해설이 있는 발레」를 기획, 발레 대중화에 앞장섰다. 단원들을 각종 국제 콩쿠르에 참가시켜 세계적인 스타로 키워 냈다.
파리 오페라발레단에서 유일한 동양인 단원으로 활약하고 있는 김용걸, 네덜란드 국립발레단에서 솔리스트로 이름을 떨치고 있는 김지영, 국립발레단의 보물로 불리는 김주원 등이 그의 손을 거쳐 세계적인 발레 스타로 성장했다.
라일락 향기가 진동하는 4월 말, 서울 예술의전당 오페라극장에서 崔泰枝 단장을 만났다. 정기 공연이 끝난 직후라 단원들은 모두 휴가를 가고 사무실 직원 두어 명과 崔단장만이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평상복으로도 숨길 수 없는 긴 목과 팔다리 때문이었을까. 자리에서 일어나 인사하는 동작이 부드럽고 우아했다.
『이렇게 찾아 주셔서 감사합니다』
가냘픈 외모와 달리 목소리는 굵고 허스키했다. 춤이 몸에 밴 탓인지 발레 동작에 가까운 제스처가 많았다. 높낮이가 분명한 일본식 억양은 귀에 거슬리기보다 리드미컬하게 들렸다.
『춤만 추었을 때는 목소리가 이러지 않았는데, 지도자가 되고 경영을 맡으면서 갈라지고 굵어졌어요. 이번에 「로미오와 줄리엣」 공연을 하느라 평소보다 더 잠겨 있는 상태입니다』
崔단장은 2003년 국립발레단을 나와 2004년부터 3년 6개월 동안 정동극장장을 지냈다. 올해 초 국립발레단에 복귀했다. 지난 4월 국립극장 해오름극장에서 공연된 「로미오와 줄리엣」은 국립발레단의 제121회 정기공연 작품이자 崔단장의 복귀 신고작이다. 20세기 러시아 발레의 巨匠(거장) 유리 그리고로비치 안무로 2시간 넘게 공연된 이 작품에 대해 마니아들은 『역시 최태지』라는 평가를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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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태지氏가 책임을 맡고 있는 국립발레단의「피가로의 결혼」공연장면. |
국적 때문에 겪은 정체성 혼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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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병남씨와 커플로 공연한「레퀴엠」. |
崔泰枝 단장은 일본에서 나고 자랐다. 부산 출신의 아버지는 광복 후 빈손으로 渡日(도일)해 마이즈루市에서 골재 채취업으로 성공한 사업가였다. 어머니는 일본에서 태어난 재일교포 2세였다. 그녀는 어머니가 김치를 담그며 흥얼거리던 이미자의 노래를 들으며 자랐다.
『저희 아버지와 어머니는 한국의 부모들처럼 자식들에게 다양한 기회를 주려고 노력했던 분들입니다. 매일 새벽 4시면 일어나 일터로 나가곤 했지요. 어머니는 골재 채취업을 하는 아버지를 도와 인부들의 식사를 담당했어요』
2남2녀 중 막내였던 그녀는 성실하고 근면한 부모를 둔 덕에 경제적 어려움 없이 자랐다. 어머니는 두 딸이 문화와 예술에 조예가 깊은 요조숙녀가 되기를 원했다. 자매는 바지런한 어머니 손에 이끌려 예술 교육을 두루 받았다. 발레도 그중 하나였다.
『저는 어린 시절 집에서 그다지 주목받지 못했어요. 언니나 오빠들에 비해 공부도 못 했고, 남한테 자랑할 만한 재능도 없었죠. 사실 특별히 하고 싶은 것도 없었어요. 그런 제가 언니나 오빠들보다 잘하는 것이 발레였습니다』
토슈즈를 신으면 구름 속을 걷는 것처럼 행복했다. 어린 나이였지만 머릿속이 온통 발레 생각으로 가득했다. 「조센징」이라 부르는 학교 친구들의 놀림도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한국인이라는 사실을 잊게 한 것이 발레였고, 이를 실감하게 한 것 역시 발레였다.
崔단장은 일본 발레계 최고 실력자인 가이타니의 애제자였다. 그녀는 대학 졸업 무렵 가이타니의 추천으로 일본 문화성이 선발하는 발레 장학생이 되어 해외연수 기회를 얻었다. 하지만 국적이 한국인 까닭에 떠나기 직전 다른 무용수에게 양보해야 했다.
『국비 장학생 자격에 「일본 국적을 가진 자」라는 조항이 있었어요. 그 조항을 보는 순간, 내가 일본 사람이 아니라는 걸 실감했죠. 학교 친구들은 물론 발레계 사람들조차 내가 한국인이라는 사실을 몰랐어요. 나조차 일본인이라 착각하며 살았으니까요. 그때까지도 한국은 그냥 모국일 뿐이라고 생각했어요. 한동안 정체성 문제로 혼란스러웠죠』
그때 국적을 일본으로 바꾸고 연수를 갔다면 그의 인생은 달라졌을 것이다. 그녀는 자신이 한국인이라는 사실을 당당히 밝혀 좀처럼 오기 힘든 기회를 날렸다. 딸의 좌절을 지켜본 아버지는 그녀를 프랑스 파리로 유학을 보냈다.
국립발레단과의 인연
崔단장이 국립발레단과 인연을 맺은 것은 1983년. 1년여 동안의 프랑스 유학을 마치고 일본으로 돌아온 직후 국립발레단이 무대에 올린 「세헤라자데」의 객원 주역으로 초청되면서였다. 이 작품으로 한국 관객을 사로잡은 그녀는 1987년 국립발레단의 프리마 발레리나로 정식 입단하게 되었다. 『일본 발레협회 회장인 시마다 히로시 선생님과 당시 국립발레단 단장이셨던 임성남 선생님이 계셨기에 가능했어요. 히로시 선생님은 재일교포로 일본 최초의 발레단을 만든 분이셨고, 임성남 선생님은 그분 밑에서 발레를 익힌 제자였죠』
한국인으로 일본 무대에 서는 데 한계가 있어 고국行을 선택했지만 국립발레단 생활은 쉽지 않았다. 당시 한국 발레는 일본에 비해 수준이 뒤처져 있는 데다 공연 사정이 좋지 못했다. 선진 발레를 막 접하고 온 崔단장으로서는 그 차이를 더 크게 느꼈다. 한국은 배우기보다는 가르쳐야 할 곳이었다.
『당시 한국은 일본에 비해 공연이 많지 않았어요. 열심히 연습을 해도 선보일 무대가 많지 않은데, 그나마 우리말도 못하는 제가 주역자리를 독식하니까 단원들의 시선이 고울 리 없었죠』
단원들의 시기와 질투가 그녀를 외롭게 했다. 崔단장은 『한국말을 전혀 할 수 없었던 내가 동료들에게 일본인으로 취급받아도 아랑곳하지 않았던 것은 말이 필요 없는 발레 덕분이었다』며 웃었다.
『발레는 만국 공통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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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프랑스 파리발레단 연수 중 어머니와 함께. |
자신은 물론 식구들도 몇 달 있다가 돌아오리라는 생각에 트렁크 하나 달랑 들고 찾은 한국이었다. 그런 그녀가 한국 남자와 결혼하고, 두 아이를 낳고 발레계에 남아 있게 되리라고는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다.
그녀보다 훨씬 똑똑하고 예뻤던 언니는 『너는 어떻게 트렁크 하나 들고 가서 그렇듯 잘 살 수 있느냐』며 부러워한다. 일본 명문대를 졸업한 언니는 부모님의 뜻대로 재일교포와 결혼해 평범한 주부로 살아가고 있다.
『언니 오빠들은 모두 일본에 살고 있어요. 아버지가 하시던 사업은 큰오빠가 물려받았죠. 다들 바쁘니까 1년에 한 번 보기도 힘들어요. 부모님이 돌아가신 뒤로는 가족이 한자리에 모이는 일이 없어졌습니다』
『엄마, 나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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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두 딸 리나(22)와 두나(19)의 어릴 적 모습. |
『어머니는 제 공연이 있을 때마다 한국에 오셨어요. 저 대신 딸아이들을 돌봐주셨죠. 제가 어머니께 해드린 거라곤 예술가의 장한 어머니상을 받게 한 것밖에는 없어요. 엄밀히 따지면 그것도 제가 해드린 건 아니죠. 딸을 잘 키웠다고 주는 상이었으니까요』
어머니는 그녀에게 심신의 피로를 풀어 주고 마음의 상처를 치료해 주는 따뜻한 의사였다. 힘들고 지칠 때면 언제든 전화해 『엄마, 나야』라고만 해도 무겁게 자신을 짓누르고 있던 문제들이 거짓말처럼 해결되곤 했다고 한다.
한없이 자신을 지켜 줄 것 같던 어머니는 2003년 암으로 세상을 떠났다. 단장 연임에 실패해 15년 동안 몸담았던 일터에서 밀려나고, 남편과 이혼까지 한 직후라 상실감이 컸다. 그 무렵은 삶이 벼랑 끝으로 몰린 기분이어서 점집을 찾고, 한동안은 절에 들어가 있으면서 자신이 어디서부터 길을 잘못 든 것인지 골몰했다고 한다.
『어렸을 때부터 한 가지 일에 빠지면 주변을 살피지 않는 성격이었어요. 춤만 추었을 때는 가정적으로 아무 문제가 없었어요. 지도위원이 된 후 아이들을 가르치면서 오히려 내가 낳은 딸아이들은 돌보지 못했습니다. 국립발레단이 법인화한 뒤에는 후원금을 유치하기 위해 이리 저리 뛰느라 식구들 얼굴 보기가 힘들었죠』
가까운 사이라도 눈에서 멀어지면 마음에서도 멀어지는 법. 발레단장을 세 번 연임하는 동안 조금씩 벌어진 남편과의 간극은 좀처럼 좁혀지지 않았다. 각자 사는 데 익숙해져서 함께 있는 것이 오히려 더 불편했다. 결국 두 딸아이의 이해를 구한 후 각자의 길을 가기로 했다.
『이혼 후 두 아이는 제가 맡았지만 아이들은 아직도 아빠를 더 잘 따라요. 워낙 가정적인 사람이라 제가 없는 동안 엄마 역할까지 다 했거든요. 그런 점에서 늘 고맙게 생각하고 있어요』
이혼 후 엄마에 대한 원망으로 가득한 두 딸과 화해하는 데 상당한 시간이 걸렸다. 아이러니하게도 발레 때문에 생긴 모녀지간의 균열은 발레로 메워졌다. 엄마를 닮은 두 아이는 발레에 상당한 재능을 보였다.
『아빠를 닮아 키가 175cm나 되는 큰아이는 클래식 발레보다는 현대 발레가 어울려 지금 러시아에서 활동하고 있어요. 작은아이는 소질이 있기는 하지만 발레보다 공부가 더 좋다고 해서 중도에 그만두고 현재 미국에서 고등학교에 다니고 있습니다』
두 딸을 해외에 보내고 홀로 지내던 그녀는 3년 전 판사 출신의 로펌 변호사와 재혼했다. 『어떤 분이냐』고 물으니 『남편이 사생활이 공개되는 건 원치 않으니 양해해 달라』며 웃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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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립발레단의 인기 레퍼토리가 된 大作「스파르타쿠스」. |
「해설이 있는 발레」 기획
崔泰枝 단장은 국립발레단을 키우기 위해 여러 가지 실험을 했다. 대표적인 것이 「해설이 있는 발레」였다.
처음 한국에 와서 공연했을 때 그녀는 발레 관객이 많지 않다는 것에 실망했다. 얼마 되지 않는 관객도 대부분은 출연자들의 가족이나 발레를 배우는 학생들이었다. 발레단에 정식 입단하고 난 후에는 발레단 규모나 연습량에 비해 공연이 많지 않다는 것을 알았다. 3, 4개월 준비한 대작도 1, 2회 공연으로 끝나는 게 예사여서 힘이 빠졌다. 관객이 없으니 공연을 짧게 하는 건 당연했다.
『이때부터 관객이 들지 않는 이유를 나름대로 분석하기 시작했어요. 그 결과 대중들 사이에 「발레는 어렵고 지루하고 비싸다」는 인식이 강하다는 사실을 알게 됐죠』
평소 「만약 내가 단장이라면 이렇게 해보겠다」는 생각을 품어오던 중 기회가 오자 실천에 옮겼다. 우선 「백조의 호수」나 「호두까기 인형」 같은 대작 발레를 하이라이트 부분만 공연하고, 나머지는 발레를 좋아하는 사회 저명인사들이 해설하는 1시간짜리 기획물로 구성했다.
『솔직히 2시간이 넘는 발레를 보고 있자면 전문가인 저희도 지루해서 하품을 하고 졸 때가 많아요. 관람 시간이 점심 식사 후라면 90% 이상 코를 곱니다. 그러니 골수 마니아가 아니고서는 한번 보고 나면 더 이상 찾지 않게 되는 것이죠』
클래식 발레는 대극장에서만 공연해야 한다는 고정관념을 깨고 야외 소극장으로 나갔다. 때에 따라서는 대중이 많이 모이는 공원이나 쇼핑센터의 강당으로 달려갔다. 모두에게 열려 있는 무대이니 입장료도 받지 않았다.
『미끄러지지만 않는다면 어느 공간에서든 공연하겠다고 생각했어요. 당시만 해도 국립발레단이 국립극장 소속이어서 비용 문제로 반대가 많았습니다. 클래식 발레의 격을 떨어뜨린다는 우려 섞인 목소리도 나왔지요. 한 번 공연을 보면 팬이 될 것이라는 자신감을 가지고 밀어붙였습니다』
배우 유인촌, 음악평론가 한상우, 변호사 오세훈(現 서울시장) 등이 해설가로 나섰다. 무료지만 결과는 대박이었다. 전국에서 이 공연을 보려는 사람들로 국립극장이 인산인해를 이뤘다. 공간이 좁아 입장하지 못한 채 밖에서 멀찍이 보고 가는 사람도 많았다. 인터넷에 「해설이 있는 발레」 동호회가 생겨나자 그녀는 이들을 관리하기 위해 재빨리 홈페이지를 만들었다.
『무료 관객인데다 자주 이동해야 했지만 단원들은 모두 신나서 공연했어요. 「해설이 있는 발레」를 기획한 동기 중에는 몇 명에게만 국한되어 있는 주역의 자리를 여럿이 경험할 수 있도록 하자는 취지도 있었어요. 무용수들은 무대에 섰을 때 가장 행복하다는 것을 알기에 처음부터 단원들이 잘 따라줄 거라 믿었습니다』
「해설이 있는 발레」는 상설 작품으로 두 달에 한 번씩 공연하다 2000년 국립발레단이 법인화하면서 예산 문제로 폐지됐다. 崔단장은 『열심히 뛰어서 예산이 확보되면 조만간에 부활시킬 예정』이라고 했다.
발레학교 설립 추진 중
국립발레단에 복귀한 후 崔단장이 진행하고 있는 가장 큰 프로젝트는 발레학교 설립 추진이다. 『6년 동안 거리를 두고 지켜본 결과 국립발레단이 살아남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발레학교가 필요하다는 것을 느꼈다』고 한다.
『저한테는 발레계를 떠나 있던 지난 6년의 세월이 중요한 시기였어요. 처음에는 발레단을 떠나야 한다는 현실을 쉽게 받아들이지 못했지요. 나중에는 잘했다는 생각을 하게 됐죠.
발레리나 출신이 전통공연장을 경영한다는 선입관 때문에 많은 오해를 샀습니다. 정동극장장으로 있는 기간이 저에게는 한국 발레의 문제를 객관적인 입장에서 분석해 볼 수 있는 좋은 시간이었습니다』
프랑스의 파리 발레단, 러시아의 키로프 발레단ㆍ볼쇼이 발레단, 미국의 아메리칸 발레단, 영국의 로열 발레단 등 세계적으로 명성을 떨치고 있는 발레단은 학교가 먼저 세워지고, 그 학교에서 육성한 인재를 중심으로 발레단이 꾸려져 발전해 왔다는 공통점이 있다.
한국보다 발레 역사가 짧은 중국도 발레학교를 먼저 설립해 급성장 중이다. 그녀는 『체계적인 교육과 시스템 정비를 위해 늦었지만 우리나라에도 발레학교를 세워야 한다』고 말했다.
발레 무용수의 절정기는 20~30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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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로미오와 줄리엣」의 주역 무용수. 왼쪽부터 장운규, 정소정, 김주원. |
교육이 끝나면 곧바로 프로 발레단에 입단해 다양하고 풍부한 무대 경험을 쌓아야 해요. 발레 무용수의 절정기는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 가장 아름다운 20代부터 30代 초반까지니까요』
20代 중반의 나이로 국립발레단에 입단했을 때 그녀는 깜짝 놀랐다. 18세가 되면 프로 생활을 시작하는 것이 세계적인 추세인데, 한국은 대학 졸업 후 입단하는 사례가 일반화되어 있었다. 그것이 학력을 중시하는 한국 사회의 맹점 때문이라는 것을 아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필요치 않았다.
『한국은 현장 경험이 얼마나 중요한지 제대로 평가하지 않아요. 무대를 지키는 사람보다는 이론적으로 파고드는 사람을 더 인정하는 분위기죠. 그러다 보니 수십 년 동안 다양한 레퍼토리를 소화한 무용가들은 자신이 쌓은 경험과 노하우를 전수할 기회가 없습니다.
한국의 대학들은 이들을 교수로 채용하지 않아요. 저는 개인적으로 국가를 위해 수십 년 동안 일한 사람 중 최소한 톱클래스에 드는 몇 명은 국가가 나서서 은퇴 후 삶을 보장해 줘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야 후배들이 더 열심히 할 거 아니겠어요』
이야기는 자연스럽게 단원들의 복지 문제로 흘러갔다. 현재 국립발레단 식구는 80여 명이다. 이 중 60명이 월급을 받는 정식 단원이고, 나머지 20여 명은 보수가 없는 연수생이다. 정부에서 지원하는 한 해 예산은 41억원으로 턱없이 부족한 실정이다. 모자라는 부분은 공연 수입과 후원 기금으로 채워야 한다. 경영 책임자인 崔단장의 숙제가 많은 셈이다.
10년 경력 무용수 연봉 3000만원
『열심히 하는 단원들을 독려하기 위해 발레단에 복귀하자마자 노조 측과 협의해 공연 수당을 차등 지급하고 있습니다. 이후에는 관객 동원에 따른 인센티브제를 도입할 예정입니다. 공연만으로는 한계가 있어 후원자를 찾아 열심히 뛰고 있습니다. 김주원 같은 수석 무용수 몇 명을 제외하곤 경력 10년이 넘는데 연봉 3000만원도 안 되는 사람이 많아요. 결혼한 남자 단원들의 경우 생활이 힘든 상황입니다』
국립발레단 최고 스타인 김주원씨는 연봉 4500만원을 받는다. 崔단장은 『대부분의 부대비용은 자비 부담이기 때문에 그 정도 받아도 손에 쥐어지는 것은 얼마 안 된다』고 했다.
『발레는 운동량으로 따지자면 어떤 스포츠에도 뒤지지 않습니다. 전막 공연의 경우 축구 경기 전·후반을 풀타임으로 뛰는 것과 같아요. 한 번 공연하고 나면 체중이 2~3kg씩 줄어들 정도로 체력 소모가 큰 예술이지요.
뛰고, 돌고, 들어올리는 동작이 많아 부상도 잦습니다. 이 때문에 공연 때면 전문가를 불러 부상 예방을 위한 마사지를 많이 받는데, 그 비용은 모두 개인적으로 부담해야 합니다. 부상으로 인한 치료비도 마찬가지죠』
주역 무용수들의 경우 매 공연마다 두 켤레씩 소비하는 토슈즈도 개인 부담이다. 토슈즈 가격은 보통 켤레당 10만원이 넘는다고 한다. 이렇듯 열악한 환경에도 포기하지 않고 발레를 고집하는 건 발레가 좋아서다. 그 마음을 누구보다 잘 아는 처지라 崔단장은 단원들만 생각하면 고생하는 자식을 보듯 안쓰럽다.
『국립발레단 단원도 국가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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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립발레단 연습실에서(왼쪽이 최태지 단장). |
崔단장은 『국립발레단 단원이면 국가대표급 선수나 다름없는데, 우리 사회가 스포츠에 비해 문화예술은 홀대하는 경향이 있다』며 볼멘소리를 했다. 올해부터 軍 면제 프로그램에서 발레 부문이 빠진 것을 염두에 둔 발언이었다.
국방부는 그동안 동아무용콩쿠르와 신인콩쿠르에서 한국무용, 현대무용, 발레 등의 부문별 우승자에 한해 軍복무를 면제하는 제도를 운영해 왔다. 그런데 올해부터 갑작스레 발레 부문은 해외 유명 콩쿠르 상위 입상자에 한해 면제해 준다는 쪽으로 수정했다.
崔단장은 『대회 규모라든지 입상 순위 등의 정확한 면제 기준이 정해지지 않은 상황에서 당장 올해부터 제외시킨 것은 문제가 있다』고 말했다.
『해외 유명 콩쿠르는 스포츠 대회처럼 자주 열리는 게 아닙니다. 또 입상권 안에 드는 것조차 하늘의 별따기 만큼이나 어렵습니다. 그런 점에서 발레 부문의 軍 면제 프로그램은 폐지되었다고 생각하는 게 속 편할 것 같아요』
김용걸을 비롯해 이원국·김현웅·정웅기 등 한국이 자랑하는 스타급 발레리노들은 모두 軍 면제 혜택을 받았다. 崔단장은 『대한민국 남자로서 국방의 의무를 다해야 하는 것이 옳지만 발레리노들에게 軍 복무로 인한 2년여 동안의 공백은 치명적』이라고 말했다.
『하루 연습하지 않으면 자신이 알고, 이틀 하지 않으면 선생이 알며, 사흘 하지 않으면 관객이 아는 게 발레입니다. 유연성을 유지해야 하는 분야여서 단 몇 달만 쉬어도 눈에 띄게 테크닉이 떨어집니다. 그런데 2년여 동안 전투화를 신고 뛰다 서른이 다 되어 온다면 주역으로 무대에 오르기는 힘듭니다』
崔단장은 『전체는 아니더라도 몇몇 엘리트만큼은 성공할 수 있도록 사회가 길을 만들어 줘야 후학들이 많이 생길 것 아니냐』고 했다.
그녀는 『최근 경제적 어려움을 이유로 발레를 포기하고 뮤지컬 무대로 진출한 단원이 몇 명 있는데, 軍 면제 혜택까지 없어져 걱정』이라고 했다. 『이러다 남자 무용수 없이 여자들끼리 발레를 하게 되는 건 아닌지 모르겠다』는 이야기도 덧붙였는데, 농담만은 아닌 듯했다.
『전막 발레 공연에는 보통 70명에 이르는 무용수가 동원됩니다. 이 중 과반수가 남자 무용수죠. 이번에 공연한 「로미오와 줄리엣」에도 40명의 남자 무용수가 출연했습니다. 35명은 단원으로, 나머지 5명은 외부 무용수를 객원으로 참가시켰죠. 「스파르타쿠스」 같은 대작을 공연하려면 이 인원으로도 부족합니다』
崔단장은 『軍 면제 혜택 프로그램과 관련해 이야기하고 싶은 것이 많아 국방부 장관에게 면담 요청을 해 놓았는데 아직까지 응답이 없다』고 말했다.
체력 소모 많은 예술
국립발레단은 지난 5월8일과 9일 양일간에 걸쳐 폴란드 노바오페라하우스에서 「로미오와 줄리엣」 초청 공연을 가졌다. 폴란드로 떠나기 며칠 전 리허설 현장에서 崔泰枝 단장을 다시 만났다.
전체 리허설이 끝난 현장에는 로미오 역의 장운규씨와 줄리엣 역의 전효정씨가 한창 호흡을 맞추고 있었다. 崔단장은 『더블 캐스팅된 현웅이가(김현웅) 부상으로 미국에서 치료 중이라 이번 공연은 운규(장운규) 혼자 소화해야 한다』고 설명했다. 또 한 명의 줄리엣인 김주원씨는 보이지 않았다.
『오늘 서울 시내 한 백화점 문화센터에서 특강이 있어요. 그것 때문에 오늘 리허설에는 빠졌죠. 본인은 부담스러워 하는데, 리허설 못지않게 팬들을 만나는 것 역시 중요한 일이기 때문에 제가 다녀오라고 했습니다』
장운규씨와 전효정씨는 5분짜리 한 장면을 연습하고도 온몸이 땀에 흠뻑 젖었다. 땀을 닦는 전씨에게 『체력 관리는 어떻게 하느냐』고 물으니 『많이 먹어야죠』라고 답했다. 그 소리가 나오기 무섭게 崔단장이 『오늘 몸보신시켜 줄 테니 준비하라』고 했다. 얼마 안 있어 특강을 마치고 돌아온 김주원씨도 합류했다.
이날 오후 6시쯤 이들 세 사람과 기자까지 총 4명이 예술의전당 부근의 한 고깃집에 도착했다. 메뉴판을 집어든 주원씨가 주문한 것은 양곱창이었다. 이슬만 먹을 것 같은 발레리나 이미지와는 영 딴판이었다.
『오늘 저희가 먹는 것을 보면 놀랄 걸요? 셋이서 양곱창 10인분을 시켜 먹은 적도 있어요. 발레는 체력 소모가 많아서 이렇게 먹지 않고는 힘을 쓸 수 없어요』
이들은 이날 양곱창 5인분에 된장찌개가 곁들여 나오는 누룽지까지 시켜 먹었다. 그러고도 40kg대의 체중을 유지하는 건 연습 때 땀을 많이 흘리기 때문이란다.
『엄하면서 따뜻한 분』
식사 후 崔단장이 자리를 비운 사이 세 사람에게 스승에 대해 평해 달라고 주문했다. 발레를 초등학교 때부터 시작한 세 사람에게 崔단장은 직장 상사이기 전에 스승이었다. 세 사람은 『발레를 잘 아는 분이어서 단원들이 다른 것에 신경 쓰지 않고 무용만 열중할 수 있도록 배려해 주시는 분』이라고 입을 모았다.
『참 엄하면서도 따뜻한 분이세요. 저희 같은 무용수들에게 슬럼프는 부상을 입을 때입니다. 단장님이 정동극장장으로 계실 때 제가 리허설을 하다 심한 부상을 입고 우울증에 빠진 적이 있어요. 발레를 그만두고 싶을 만큼 힘들어 하고 있는데, 하루는 단장님께서 어떻게 알았는지 전화를 주셨어요.
「부상은 언제든 있을 수 있다. 이럴 때는 앉아 있지 말고 여행을 통해 마음을 다져라」고 격려해 주셨습니다. 슬럼프를 아는 사람만이 할 수 있는 말이어서 큰 위로가 되었어요』(김주원)
『휴가 기간에도 콩쿠르 준비를 하는 저희를 위해 하루도 빠짐없이 나오셔서 지도해 줄 만큼 단원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애정을 많이 쏟는 분이세요. 발레를 너무 잘 아는 분이라 단장님 앞에 서면 항상 긴장하게 돼 부상을 입는 일도 없습니다』(전효정)
『단원들의 개인적인 스케줄을 꿰고 있을 정도로 머리가 비상한 분이세요』(장운규)
오후 8시가 다 되어 식당에서 나왔다. 崔단장은 『모처럼 스케줄이 없어 일찍 들어간다』며 집으로 향했다. 그녀가 무대에서 은퇴하고도 여전히 한 마리 백조처럼 보이는 이유를 알 것 같았다. ●
사진 : 조준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