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장취재] 후버 대통령 기념도서관

15평의 후버 대통령 전시실, 도서관 건물 하나가 전부

  • : 정혜연  hychung@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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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예산 320억원, 개인 기부자들이 대부분 충당
지난 2월9일,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남쪽으로 한 시간 남짓 달려 팔로알토에 위치한 스탠포드大에 도착했다. 스탠포드大는 캠퍼스가 굉장히 넓고, 학교 건물에서 세월의 흐름이 느껴질 정도로 고풍스럽다.
 
  이곳을 찾은 이유는 캠퍼스 안에 위치한 「후버연구소」를 방문하기 위해서였다. 후버연구소는 스탠포드大 정문에서 동쪽으로 5분 정도 떨어진 가베츠 거리에 있는데, 미국 최고의 「싱크탱크」로 불리는 연구소다.
 
  200여 명의 세계적인 석학과 전문연구원들이 정치·경제·사회·교육 등 각 분야의 이슈를 연구하고 있다. 미국內에서는 가장 유명한 아카데미 센터이고, 세계적으로는 사회적인 이슈에 대한 서적 출간 등을 통해 각종 지식을 전달하는 역할을 하고 있다.
 
  후버연구소의 시작은 지금의 모습과 많이 달랐다. 미국의 제31代 대통령인 허버트 후버가 자신이 소장하고 있던 전쟁 관련 기념물들을 전시하면서 시작됐다. 이 기념물들이 쌓이고 쌓여 「후버전쟁기념관」이 됐고, 후에 「후버도서관」으로, 오늘날의 「후버연구소」로 자리매김을 하게 됐다. 전직 대통령의 이름을 딴 도서관이 그의 기념관으로, 90년의 세월을 넘어 오늘날 미국 지식의 産室(산실)이 된 셈이다.
 
  캠퍼스內에서 후버연구소를 찾기는 쉬웠다.
 
  벽돌색의 둥근 아치형 지붕이 하늘을 향해 날씬하게 솟아난 건물이 후버연구소이다. 10층은 넘어 보이는 이 건물에는 맨 꼭대기층을 제외하고 외부와 연결된 창문이 하나도 없다. 출입문 앞에 가보니, 「후버도서관」이라는 푯말이 붙어 있었다. 이 건물을 정점으로 후버 前 대통령의 부인인 「루이후버기념관」과 사무실 건물이 있었다.
 
  세 건물을 잇는 가운데에는 작은 광장이 있었다.
 
  광장으로 가기 위해 계단을 오르자, 벽에 「허버트 후버, 메모리얼 센터」라는 글귀가 새겨 있었다. 큰 고딕체로 박은 후버 대통령의 이름에서 뭔지 모를 위엄이 느껴졌다.
 
  위로 올라가자, 후버의 이름이 새겨진 1m 둘레의 원통 비석이 보였다. 이 비석 위에는 기하학적인 모양의 건축물이 얌전하게 올려 있었다. 이 자그마한 광장은 공사 중이었다. 담당자의 얘기에 따르면 후버연구소에는 작은 공사들이 빈번하다고 한다.
 
  후버연구소 1층에서 미셸 호래니 매니저를 만났다. 신문기자 출신인 그녀는 20년째 후버연구소의 홍보를 맡고 있다고 했다.
 
  그녀는 기자와 같은 사람들의 방문이 익숙한 듯 보였다. 그녀에게 이메일로 「한국에서 대통령기념관을 짓는 사업이 추진 중인데, 후버 대통령의 기념관을 한번 둘러보고 싶다」고 취재를 요청한 터였다.
 
 
  全세계에서 벤치마킹
 
후버연구소의 광장 위에 세워진 원통형 비석에 후버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
  『제 업무 중 하나가 그런 목적으로 방문한 사람들에게 이곳을 투어하는 일입니다. 얼마 전에는 필리핀에서 온 여자가 후버연구소를 둘러보고 갔어요. 「기념관을 건립 중인데, 후버연구소가 어떻게 운영되고 있는지 자료를 수집하려고 왔다」고 하더군요. 기념관 사업이 어떤 것인지에 대해 묻고 갔습니다. 해마다 미국에서, 또 세계 각지에서 수십 명이 후버연구소의 성공적인 운영에 대해서 벤치마킹을 하러 옵니다』
 
  작은 광장에 서서, 호래니氏로부터 후버연구소 건물에 대해 간략한 설명을 들었다.
 
  『후버연구소의 출발은 1919년이었습니다. 우리는 이때를 「개척자 시대」라고 부릅니다. 당시 후버氏가(대통령 취임 전의 일이다) 이곳에 자신의 소장품을 기증하면서 시작됐습니다. 모두 전쟁과 관련된 기념물들이었죠.
 
  그는 전쟁이 사회에 미치는 영향, 전쟁과 혁명, 평화에 대해 관심이 컸는데, 그와 관련된 기념품들을 스탠포드大에 기증했습니다. 맞은편에 보이는 둥근 아치형의 건물을 지어, 그곳에 기념물들을 전시했습니다. 오늘날의 후버도서관이죠. 소장품이 늘어나면서, 본격적인 후버기념관의 모습이 갖춰지기 시작했습니다』
 
  ―나머지 두 건물은 당시에 함께 지어진 것이 아닙니까.
 
  『후버씨가 나중에 대통령으로 당선됐고, 또 대통령에서 물러난 이후 말년에 이곳에 대한 애착이 컸습니다. 그때부터 본격적으로 후버도서관이 대통령 기념관으로 변신했고, 자료가 늘어나면서 지하층에서부터 건물이 늘었습니다.
 
  1960년대에 들어 왼쪽에 보이는 후버부인 기념관이 생겼습니다. 전쟁과 그의 업적에 대해 연구하는 사람들이 늘어나면서 사람들이 몰렸고, 1970년에 지금의 사무실 건물이 생겼습니다.
 
  오늘날에는 이메일이라는 통신 수단이 있지만, 예전에는 모든 일들을 한자리에 모여서 처리해야 했으니까요. 처음에 전쟁 기념관으로 시작된 것이 시간이 흐르면서 필요에 따라 점점 늘어나서 지금의 후버연구소 모습을 갖추게 된 겁니다』
 
  호래니氏의 설명을 듣고 보니, 후버연구소를 이루는 3개의 건물은 동시대에 지었다고는 보기 어려울 정도로 통일된 느낌이 없었다. 메인인 후버도서관이 중세풍의 고즈넉한 모습이라면, 두 번째 세웠다는 후버 부인의 기념관은 네모 반듯한, 별다른 특징이 없는 건물이었다. 대통령 기념관이 있는, 또 미국 최고의 「싱크탱크」라고 해서 대단히 웅장한 건물일 줄 알았는데, 조금 실망스러웠다.
 
 
  광산 巨富가 대통령이 되기까지
 
후버연구소의 매니저인 미셸 호래니氏가 기부자들의 벽면 앞에서 포즈를 취했다.
  취재를 가기 전, 후버연구소 측으로부터 건네받은 허버트 후버 대통령에 대한 자료를 살펴봤다.
 
  1874년 아이오와州의 웨스트 브랜치에서 태어난 후버는 열 살 때 부모를 잃고 10代를 고아원에서 지냈다. 이후 그는 삼촌이 살고 있던 오리건州로 이주했고, 1891년 스탠포드大에 입학했다. 당시 스탠포드大 1학년은 등록금 없이 학교를 다닐 수 있었다고 한다.
 
  후버는 스탠포드에서 지질학을 전공했고, 1895년 졸업한 이후 지질학 연구소에서 첫 사회생활을 시작했다. 그는 광산업에 관심을 갖게 됐고, 영국·오스트레일리아 등에서 광산업자이자 광산업 컨설턴트로 20여 년을 지냈다.
 
  스탠포드大 동기생인 루이 헨리와 결혼한 후버는 중국으로 이주해 사업가로서 왕성한 활동을 벌였다. 1908년 독자적으로 유명 광산 컨설턴트가 된 그는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기 전까지 세계의 각국을 돌아다녔다.
 
  그의 인생을 바꿔 놓은 것은 1914년 발발한 제1차 세계대전이었다.
 
  후버는 광산업으로 큰돈을 벌어 유럽에 거주하고 있었다. 그는 제1차 세계대전 당시 유럽에 발이 묶여 있던 미국 관광객과 사업가 12만 명이 본국으로 이주하는 데 도움을 줬다. 그는 벨기에가 1914년 독일로부터 침략당하면서 식량난에 몰리자, 벨기에를 위한 상공회의소에 도움을 주었다.
 
 
  제31代 대통령에 당선
 
후버도서관 1층에 전시된「허버트 후버 룸」.
  1917년 4월, 미국이 전쟁에 참전한 이후 당시 우드로 윌슨 대통령은 후버를 「식량 관리자」로 임명했다. 전쟁이 끝난 뒤, 「뉴욕 타임스」는 후버에 대해 『미국에 생존하고 있는 가장 중요한 열 명 중 한 명』이라고 기록했다.
 
  후버가 제1차 세계대전과 관련된 기록을 모은 것은 어찌 보면 필연이었다. 후버는 1919년 미국으로 돌아와 母校(모교)인 스탠포드大에 5만 달러를 기증하고, 전쟁 기념물들을 제공했다. 신문기사, 포스터, 정부문서, 성명서 등 다양한 문서들이었다.
 
  후버는 1920년 본격적으로 미국 정치판에 뛰어들었다. 이후 그는 상공부·노동부 장관을 지냈고, 1927년 공화당의 대통령 후보가 됐다. 그는 민주당 후보였던 알프레드 스미스를 제치고, 미국의 제31代 대통령에 당선됐다.
 
  후버 대통령은 취임 이후 정부의 公共(공공) 서비스 분야를 늘리는 등 다양한 정책을 펼쳤지만, 1929년 미국에 몰아닥친 경제 대공황으로 인해 무능한 대통령이라는 낙인이 찍혔다. 일부에서는 후버 대통령을 「한 일이 아무것도 없는 대통령」으로 치부해 버렸다.
 
 
  후버 대통령의 정신이 깃든 후버연구소
 
미국 스탠포드大 캠퍼스 안에 있는 후버연구소의 후버도서관 전경.
  호래니 매니저와 함께 사무실 棟으로 들어갔다. 왼쪽 벽면에는 짙은 녹색의 작은 간판이 벽면에 붙어 있었다. 「허버트 후버 기념 빌딩」.
 
  호래니는 후버연구소에 대해 설명을 이어 갔다.
 
  『후버연구소의 1919~1960년까지는 단순한 「기록 모으기」의 시대였습니다. 후버 대통령이 혼자서 5만 달러의 돈을 털어 시작했고, 그를 지지하는 친구들이 개인적으로 돕는 정도였죠.
 
  후버 대통령이 말년에 W. 글랜 캠벌이라는 전문 경영인을 고용하면서, 1960년대는 후버연구소에 랜드마크가 되는 시기가 됐습니다. 이때부터 전문 인력들이 모이기 시작했고, 자연히 관심은 경제·정치 분야로 넘어갔습니다.
 
  연구소는 기본적으로 전쟁 등 국제적인 이슈가 주 관심사인데, 1960년대 이후에는 미국 내부의 이슈들에 대해 연구했습니다. 특히 교육과 건강에 대한 문제가 새로운 어젠다로 떠올랐죠. 현재 200여 명의 석학과 전문연구원들이 7개 분야에서 연구를 하고 있습니다』
 
  ―한국에서는 후버연구소가 「보수적 성향」의 지식의 場(장)으로 알려져 있습니다만.
 
  『틀리지 않습니다. 후버연구소는 오랫동안 굉장히 보수적인 기관으로 알려져 왔습니다. 후버는 대통령 재임시, 「작은 정부, 적은 세금」에 대해 관심이 컸습니다. 하지만 오늘날의 후버연구소를 단순히 보수적인 기관으로만 볼 수는 없습니다. 시대가 달라진 만큼, 마약 등에 대한 이슈를 다루기도 합니다. 우리가 출간하는 책들은 정치·사회뿐 아니라 다양합니다. 한 해 300권 정도의 책을 내죠』
 
  호래니 매니저의 설명이 이어졌을 때, 기자는 좀 다급한 마음이 들었다. 이곳에 온 주요한 이유는 후버연구소보다는 후버 대통령의 흔적을 찾기 위해서였다. 후버 대통령이 생전에 사용했을 물품부터 그의 사진들이 전시돼 있을 기념관, 후버도서관이 빨리 보고 싶었다. 후버연구소의 자랑을 늘어놓고 있으니, 마음이 조급해질 수밖에 없었다. 그녀의 말을 가로막으려 할 때, 호래니 매니저가 이런 말을 꺼냈다.
 
  『기념관을 둘러보려고 온 사람들은 「후버 대통령의 흔적을 찾을 수 있는 곳은 후버도서관이 전부가 아니냐」고 말을 합니다. 후버연구소는 후버 대통령이 사망한 후에 독자적으로 발전한 곳이 아니냐는 것이죠. 그렇지 않습니다. 후버도서관은 물론이고, 현재 후버연구소에서 이뤄지고 있는 모든 일들은 「후버의 정신」에 근간을 두고 있습니다. 어떤 연구원들이 어떤 주제를 어떤 방식으로 다루든, 그 기본은 하나입니다』
 
  ―후버의 정신이 뭡니까.
 
  『「지식을 모으고, 아이디어를 공유하고, 이것들을 흩뿌린다」는 것이 후버의 정신입니다. 이 연구소는 평화를 지키기 위한 보호장벽의 역할을 하고, 인간의 존엄성을 향상시키기 위해 존재합니다. 정부가 개인의 사생활을 침입하는 것을 엄격하게 제한시키는 역할을 해야 한다는 것이 우리의 생각이고, 후버의 정신입니다』
 
 
  15평 남짓한 후버 대통령 전시관
 
허버트 후버 前 미국 대통령의 스탠포드大 졸업장과 성적표가「후버 룸」에 전시돼 있다.
  작은 광장 앞에 있는 후버전시관으로 향했다. 30평 남짓한 이곳에서는 일년에 3~4차례 후버연구소가 소장하고 있는 포스터 등을 전시한다. 마침 「전쟁」 관련 포스터 전시殿이 한창이었다. 한눈에 봐도 古문서라는 것을 알 수 있을 만큼 나달나달해진 문서들이 유리벽 안에 전시돼 있었다. 스탠포드大 재학생으로 보이는 몇몇 학생들이 이 전시회를 관람하는 모습이 눈에 띄었다.
 
  호래니 매니저와 함께 후버도서관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맨 꼭대기층을 제외하고는 창문이 하나도 없는 바로 그곳이었다. 도서관을 관람하기 위해서는 약간의 돈을 지불해야 한다. 일반인은 2달러, 어린이와 노인은 1달러, 스탠포드大 재학생들은 무료다.
 
  1층 둥근 테이블의 안내데스크에서, 두 명의 직원이 설명서를 나눠 주고 있었다. 둥근 테이블의 가장자리에는 각종 편지들이 진열돼 있었다. 가장 인상적이었던 것은 「닥터 지바고」의 작가인 보리스 파스테르나크의 친필 메모였다. 자잘한 글씨체로 쓰인 메모지 몇 장이었는데, 후버 대통령이 어떤 이유에서인지 보관하게 됐다고 했다. 입구 뒤편으로는 청동으로 만들어진 후버 대통령의 반신상이 전시돼 있었다. 근엄하고 권위 있는 얼굴이다.
 
  도서관 1층의 오른쪽은 후버 대통령 기념관, 왼쪽은 후버 대통령 부인의 기념관이었다. 후버 대통령 기념관을 보기 위해 입구로 들어서자, 고작 15평밖에 되지 않는 작은 방 안에 달린 밝은 오렌지색 커튼이 제일 먼저 눈에 들어왔다. 투어는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진행됐다.
 
 
  수집광, 허버트 후버 대통령
 
후버도서관 1층의 안내 데스크.
  왼쪽 벽면에는 「허버트 후버 1874~1964」라는 제목의 스탠포드 마크가 새겨진 액자가 걸려 있었다. 그가 이곳에 전쟁 관련 자료를 기증했을 때부터의 짤막한 얘기가 적혀 있었다. 그 옆에는, 후버 대통령의 백일 사진, 고아원에서 삼촌의 집으로 옮겨 살기까지의 스토리가 적혀 있었다.
 
  그가 스탠포드大 재학 시절 친구들과 함께 찍은 사진이 있었다. 흥미롭게도, 그의 스탠포드大 졸업장과 성적표가 함께 있었다. 호래니는 『제 성적표가 공공연하게 전시된다면 기분 좋지 않을 것』이라며 『후버 대통령은 공부를 꽤 잘한 것 같다』며 웃었다.
 
  1893년에서 1914년까지 광산업자로 살아온 그의 인생이 나열돼 있었다. 벽면의 중간에는 후버 대통령의 일생을 정리해 놓은 작은 스크린이 반짝이고 있었다. 「환영」이라는 한국어가 있는 것으로 보아, 이곳을 찾는 한국인들이 꽤 있는 것 같다.
 
  그의 정치 역사를 알 수 있는 사진과 전시물들이 이어졌다. 가장 큰 사진은 네바다州의 명물인 「후버댐」. 원래 댐의 이름은 후버댐이 아니었는데, 그의 재임 시절에 완공이 돼서 붙여졌다고 호래니씨가 설명했다.
 
  무척 인상적인 사진을 한 컷 발견했다.
 
  후버 대통령이 스탠포드大에 전쟁 관련 문서를 기증할 때 찍은 사진이었다. 사진 설명에는 「아담스씨와 랄프루츠, 후버연구소의 공동 디렉터인 두 사람이 후버도서관에 처음으로 전쟁관련 문서를 배로 옮겨 오면서 찍은 사진」이라고 돼 있었다. 문서의 양은 경이로운 정도였다. 높이는 사람 키를 훌쩍 넘어섰고, 넓이는 사람 열 명을 붙여 세워야 할 정도였다. 10평가량의 방에 가득 찰 정도의 분량이었다.
 
  그가 대통령 재임 시절에 업무를 보던 사진과 그의 간략한 업적을 충분히 엿볼 수 있었다. 전시관은 아주 깔끔하고 정갈하게 정돈돼있었다.
 
  하지만 미국 역대 대통령의 전시관치고 규모가 너무 작은 게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들었다. 아니, 「작다」는 표현보다는 「지나치게 소박하다」는 표현이 정확하겠다. 그의 생전의 메모와 사진들, 몇 개의 소품이 있을 뿐이었다. 그를 칭송하는 전직 대통령의 서찰 한 장, 신문기사 스크랩 하나 없었다. 그래도 명색이 미국 전직 대통령의 기념관인데.
 
  맞은편에는 후버 대통령 전시관과 똑같은 형태의 후버 대통령 부인, 루이 후버의 전시관이 있었다. 그녀의 전시관에서는 「광산업자」 남편을 만나서 세계 각국을 많이 돌아다닌 흔적을 엿볼 수 있었다. 벨기에의 손뜨개 자수며, 동양의 골동품들이 즐비하게 전시돼 있었다.
 
  기념관 구경을 마치고, 후버도서관으로 들어갔다. 도서관 입구에서 우리를 제일 먼저 반긴 것은 여러 사람들의 이름이 갈색으로 빼곡하게 적힌 벽면이었다. 후버 연구소에 기부한 사람들의 이름이었다.
 
 
  후버도서관, 600만 건의 古문서 보관
 
전시관 벽면에 걸려 있는 후버 대통령의 조각상.
  후버 도서관의 맨 위층에서 몇몇 학생들을 볼 수 있었다. 스탠포드大의 전경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전망 좋은 곳이었다. 하지만 이것이 끝이었다. 후버 대통령을 대단하게 기억할 만한 어떤 문구 하나 찾을 수 없었다. 대신 이 곳에는 후버가 생전에 모은 자료들부터 현재까지 모아진 돈으로 살 수 없는 문서들이 존재한다. 현재 후버도서관에는 총 10만 권의 서적과, 600만 건의 古문서, 10만 개의 정치적 포스터들이 소장돼 있다.
 
  1시간 정도 후버연구소를 샅샅이 살펴보고 난 뒤, 호래니 매니저와 다시 사무실에 마주 앉았다. 「후버도서관 벽면에 새겨진 사람들의 이름이 인상적이었다」고 하자, 호래니씨가 웃었다.
 
  『그런 분들 덕분에 현재의 후버연구소가 건재할 수 있죠. 후버연구소의 전기, 물, 스태프 월급 등을 합쳐서 일 년에 필요한 비용이 얼마인지 아세요? 올해 예산이 320억원입니다. 매년 그 정도의 돈이 필요합니다』
 
후버 대통령이 스탠포드大에 기증한 전쟁 관련 서류들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다.
 
  기부금으로 운영
 
후버도서관으로 향하는 벽면에는 기부자들의 이름이 빼곡히 적혀 있다.
  ―운영자금은 어떤 식으로 충당합니까.
 
  『후버연구소의 운영 방식은 특별합니다. 우리가 스탠포드大 내에 있고, 연구원 중에 스탠포드 교수들이 있기는 하지만, 대학으로부터 모든 자금을 지원받지 않습니다. 스탠포드大에서 4억원 정도를 지원받고, 기부 단체에 모인 돈 중 5% 정도만을 사용할 수 있습니다. 그 돈을 합쳐도 우리 일년 예산의 절반 정도밖에 되지 않죠』
 
  ―나머지 자금은 어떻게 충당합니까.
 
  『후버연구소가 자체적으로 기부금을 모으고 있습니다. 후버연구소는 비영리단체이기 때문에 돈벌이를 할 수 없어서, 캠페인 등을 통해 개인들에게 기부를 받고 있습니다. 펀드를 조성하는 부서가 따로 있는데, 8명의 직원들이 메일 발송, 전화통화 등을 통해 개인들과 일일이 접촉해서 기부금을 받습니다. 다행히 매년 필요자금을 충당하지만, 늘 빠듯하죠』
 
  ―기업으로부터 지원을 받지 않습니까. 아까 후버 여사의 기념관 벽면에 보니, 「아메리칸항공」 등 기업체의 이름이 적혀 있던데.
 
  『운영자금이 아니라, 건물을 지을 때 기부금을 받았기 때문에 이름을 적어 놓은 것입니다. 과거에 몇 번 기업체로부터 기부받은 적은 있지만, 요즈음에는 그마저 드뭅니다. 당시 기부금을 받을 때 우리의 리서치와 기업체의 기부금이 전혀 상관이 없다는 점을 분명히 하고 받았던 것으로 기억해요』
 
  ―기업체들의 기부금 액수가 훨씬 클텐데요.
 
  『물론 그렇겠죠. 하지만 우리의 주요 업무 중 하나가 리서치예요. 만약 기업체로부터 매년 기부금을 받아 운영할 경우, 그들의 방식에 휩쓸릴 수 있습니다. 우리는 철저하게 중립적으로 연구하는 기관입니다. 그럴 가능성을 배제하기 위해서 힘들지만, 개인 기부자들로부터 펀드를 조성받고 있습니다』
 
  ―정부의 자금 지원은 없습니까.
 
  『전혀 없습니다. 예전에 산타모니카에서 정부와 함께 특별계약을 맺어 정부와 관련된 리서치를 한 적은 있습니다. 하지만 후버연구소는 연구를 하는 곳이고, 정부나 특정 회사의 기호에 맞는 프로젝트를 하는 곳이 아닙니다』
 
  ―한국에서는 현재 朴正熙 前 대통령의 기념관 건립 사업이 진행 중인데, 몇 해째 지지부진합니다. 정부가 얼마의 돈을 지원할 것이냐」 하는 부분을 두고 논란이 많은데요.
 
  『정확한 사정은 알 수 없지만, 우리의 운영방식과는 많이 다르네요. 우리에게 기부를 하는 사람들은 뭐랄까, 어떤 의무감보다는 감정적인 차원에서 기부를 합니다. 후버연구소가 자신의 이익과 얼마나 부합되는지의 차원이 아니라, 그저 상징적인 의미로 생각하는 사람들이죠. 막연하게나마 「이런 기관이 계속 유지됐으면 좋겠다」 하는 심정입니다. 물론 정부로부터 지원을 받으면 예산이 풍부할 수 있겠지만, 우리는 정부가 연구소 운영에 관여하는 것을 원하지 않습니다』
 
 
  한 해 3000명 방문
 
  ―기부자들이 많습니까. 한 해 몇 명이 후버연구소를 다녀갑니까.
 
  『기부자의 수에 대해서는 정확히 알지 못합니다. 한 해 평균 3000여 명의 연구원과 방문객들이 全세계에서 이곳을 찾아옵니다. 후버도서관을 둘러보는 사람에서부터, 이곳에 소장된 각종 자료를 자신들의 정치·경제·사회적 변화의 모태로 삼는 사람들까지요』
 
  ―후버 대통령이 대통령 재임 시절에 평이 좋았던 인물은 아니지 않습니까. 「경제공황에 제대로 대처하지 못했다」는 평가가 있는데, 연구소를 운영하면서 이런 부분이 부담스럽지 않습니까.
 
  『사람들이 대통령 재임 시절의 후버 자체에 대해서 크게 신경 쓰는 것 같지 않습니다. 초창기에는 나이 드신 분들이 이곳을 찾아와서, 가끔 화난 표정으로 도서관을 둘러보고 가기도 했습니다.
 
  이곳은 단순히 「대통령 후버」가 아니라, 어린 시절, 학창 시절, 장관이었던 시절의 그에 대한 소중한 기억을 담는 곳입니다. 아울러 그가 소장했던 전쟁 자료들까지요. 단순히 대통령만을 기억하는 곳이 아니기 때문에, 크게 부담스럽지 않습니다』
 
  ―솔직히 대통령 기념관치고는 소박하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좀더 거창하고, 권위 있는 곳이리라고 생각했거든요.
 
  『기념관이 반드시 큰 부지에 거창하고 멋있는 건물이어야 할까요? 후버 대통령이 이곳에서 첫 삽을 떠서 오늘날이 되기까지 90년이라는 세월이 걸렸습니다. 후버 대통령이 초창기에 내놓은 자금은 5만 달러가 전부였고요.
 
  방문객들이 종종 제게 「연구소가 나날이 번창하는 이유가 무엇이냐」고 물을 때, 항상 이렇게 답합니다. 「그의 정신을 계승하려는 우리의 노력이 오늘날을 만들었다」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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