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인물 탐험] 조선의 계몽군주 正祖

백성과 신하들의 스승을 자부… 辛亥通功으로 상업자유 전면확대

  • : 신동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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君道의 요체는 知事가 아닌 知人에 있다. 正祖는 得人에는 성공했으나 用人에는 실패했다. 당대의 才士인 이가환과 정약용 등을 제대로 활용하지 못하고 老論 벽파의 압력에 밀려 유배를 보냈다.

申東埈 고려大 강사
1956년 충남 천안 출생. 경기高·서울大 정치학과 졸업. 정치학 박사(管仲 연구). 일본 東京大 객원연구원, 조선일보·한겨레신문 정치부 기자 역임. 現 고려大 강사. 저서 「관중과 제환공」, 「통치학원론」, 「삼국지통치학」, 「조조통치론」, 「논어론」, 「공자의 군자학」, 「실록 열국지」 등 20여 권.
正祖가 화성으로 행차하는 모습을 그린「正祖班次圖(정조반차도)」.
조선조 역대 군왕 중 가장 好學(호학)하며 박식했던 인물을 꼽으라면 단연 正祖(정조)와 世宗(세종)이다. 두 사람 모두 世子(세자)나 世孫(세손) 시절에 각각 장인을 비롯한 妻族(처족)이 滅門之禍(멸문지화)에 가까운 죽임을 당했다. 게다가 正祖는 生父(생부)가 뒤주 속에서 餓死(아사)하는 변을 당했다.
 
  世宗과 正祖는 이러한 禍難(화난)을 오히려 轉禍爲福(전화위복)의 계기로 삼아 더욱 학문에 매달렸고 조선조 역대 군왕 중 가장 박학한 군주가 되었다.
 
  正祖는 「弘齋全書(홍재전서)」라는 184권 100책의 방대한 문집을 펴냈다. 조선조 역대 君王 중 이처럼 방대한 문집을 펴낸 군왕은 正祖가 유일했다. 正祖는 47세 때 재위 22년(1798) 되던 해에는 道學(도학·성리학)의 嫡統(적통)을 이어 받았다는 소위 「君主道統說(군주도통설)」을 주창하고 나섰다. 그는 학문적으로 群臣(군신)들을 제압한 뒤 「마침내 천지만물을 포용하고 주재할 수 있다」는 취지를 드러내기 위해 자신의 號(호)를 「弘齋(홍재)」에서 「萬川明月主人翁(만천명월주인옹)」으로 바꿔 사용했다.
 
  여기의 「萬川」은 모든 백성을 상징하고, 「明月」은 萬川을 비추는 지극한 존재로 곧 正祖 자신을 상징했다. 宋代에 性理學(성리학)이 성립한 이래 동양 3國의 역대 君王 중 군주의 신분으로 「군주도통說」을 주창하며 「만천명월주인옹」과 같이 浩然(호연)한 號를 사용한 사람은 오직 正祖밖에 없었다.
 
 
  在位 25년 동안 經筵은 단 두 차례
 
  正祖의 치세는 여러 면에서 이전 시기와 차이가 있었다. 우선 당시 臣權세력이 사실상의 통치권력을 장악해 온 朋黨(붕당)정치의 기본 틀이 무너져 내렸다.
 
  英祖(영조)가 소위 蕩平(탕평)을 내세워 老論과 少論을 두 축으로 한 당시의 朋黨정치구도를 제압하고 王權을 강화한 데 따른 결과였다.
 
  英祖는 이복형인 景宗(경종)을 지지하는 少論세력의 견제 속에서 어렵사리 보위에 오른 까닭에 어렸을 때부터 학문에 몰두하는 모습을 보였다. 英祖의 호학하는 자세는 즉위한 이후 그대로 유지되었다. 英祖가 재위 52년 동안 무려 3500여 회의 經筵(경연)을 실시한 사실이 이를 뒷받침한다.
 
  正祖도 生父인 사도세자의 죽음을 당연시하며 끊임없이 자신에게 적대감을 드러낸 老論 벽파세력의 견제를 피하기 위해 세손 시절부터 두문불출하며 학문에 몰두했다. 그러나 즉위한 이후 재위 25년 동안 겨우 한두 차례만 經筵을 실시했다. 이는 經筵을 사실상 폐강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원래 성리학은 經筵을 帝王學(제왕학) 연마의 필수과정으로 간주했다. 臣權세력의 입장에서 볼 때 이는 王權을 견제하기 위한 유력한 수단이었다. 朋黨정치가 등장한 이래 조선조의 사대부들이 經筵을 극도로 중시한 것은 바로 이 때문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正祖는 모든 臣權세력들로부터 사상 최고의 「好學 군주」로 평가받았다.
 
  이는 正祖가 奎章閣(규장각)을 중심으로 당대 최고의 文臣들을 양성한 사실과 무관하지 않았다. 당시 英祖 비호 아래 급속히 성장한 外戚(외척)세력은 권력의 핵심을 장악하고 맹렬한 주도권 다툼을 벌이고 있었다.
 
  正祖가 볼 때 이들 外戚세력은 「통치권력의 私有化(사유화)」를 꾀하는 王權강화의 최대 장애물이었다. 대표적인 外戚세력으로 正祖의 母系(모계)인 풍산 洪씨의 洪鳳漢(홍봉한) 가문과 貞純王后(정순왕후)의 친정인 경주 金씨의 金龜主(김귀주) 가문을 들 수 있다. 양자는 학문적ㆍ지역적 특성에 따라 흔히 北黨(북당)과 南黨(남당)으로 지칭되기도 하고, 정치적 성향에 따라 흔히 時派(시파)와 벽파로 구분되기도 한다.
 
  두 파의 유일한 공통점은 世孫인 正祖의 대리청정을 반대한 데 있었다. 사도세자가 죽은 뒤 世孫인 正祖는 사도세자에 앞서 요절한 孝章世子(효장세자)의 後嗣(후사)가 된 뒤, 英祖 말기에 대리청정을 하게 되었다.
 
  당시 世孫의 외가인 풍산 洪씨는 우호적인 입장에서 世孫의 대리청정을 적극 주선했다. 그러나 正祖는 장차 이들과의 제휴가 자신의 향후 정국운영 구상에 걸림돌이 될 것으로 보고 이를 단호히 거부하고 나섰다. 이는 사도세자의 죽음에 풍산 洪씨 가문이 깊이 개입된 사실과 무관하지 않았다.
 
 
  홍인한의 三不必知說
 
  이를 계기로 正祖의 외종조부인 洪麟漢(홍인한)이 적대적인 입장으로 돌변했다. 그는 英祖가 죽기 넉 달 전인 英祖 51년(1775) 11월에 소위 「三不必知說(삼불필지설)」을 내세워 世孫의 대리청정을 노골적으로 반대하고 나섰다. 「英祖실록」 51년 11월20일조는 그 배경을 이같이 기록해 놓았다. 당시 英祖가 대신들을 불러놓고 이같이 물었다.
 
  『身氣(신기)가 더욱 피곤하니 어찌 萬機(만기)를 수행하겠는가. 國事(국사)를 생각하느라고 밤에 잠을 이루지 못한 지가 오래되었다. 어린 世孫이 老論을 알겠는가, 少論을 알겠는가, 南人을 알겠는가. 國事를 알겠는가, 朝事(조사·조정 일)를 알겠는가. 병조판서를 누가 할 만한지를 알겠는가, 이조판서를 누가 할 만한지를 알겠는가. 상황이 이와 같으니 장차 종묘사직을 어디에 두겠는가. 나는 어린 세손으로 하여금 그것들을 알게 하고 싶다』
 
  그러자 홍인한이 이같이 대답했다.
 
  『東宮(동궁)은 老論과 少論을 알 필요가 없으며, 이조판서와 병조판서를 알 필요가 없습니다. 조정의 일에 이르러서는 더욱이 알 필요가 없습니다』
 
  이에 英祖가 한참 동안 흐느껴 울다가 기둥을 두드리며 대신들에게 물러갈 것을 명했다가 다시 入侍(입시)를 명한 뒤 이같이 탄식했다.
 
  『나의 사업을 장차 나의 손자에게 전할 수 없다는 말인가. 나는 몸이 쇠약해져 헛소리를 하고 있어 장차 밤중에도 쪽지를 내보내어 경 등을 불러들이게 될 것이고, 경 등이 비록 入侍하더라도 영의정이 누군지 좌의정이 누군지 알지 못할 것이다. 만일 內官마저 없다면 國事가 장차 어떻게 되겠는가. 차라리 나의 손자로 하여금 나의 心法(심법)을 알게 하겠다』
 
  홍인한이 언급한 「三不必知說」은 바로 「당파」와 「국사」, 「조정인사」에 대해 世孫이 반드시 알아야 할 필요가 없다는 뜻이다. 이는 世孫을 정치에서 배제함으로써 궁극적으로 世孫의 지위를 박탈하려는 속셈에서 나온 것이었다.
 
  少壯(소장) 관원들은 이들의 행태에 분개했다. 史官(사관)의 다음과 같은 평이 그 증거이다.
 
  『國事나 朝政(조정)을 世孫이 알지 못하면 누가 알아야 한단 말인가. 홍인한은 보필하는 지위에 있으면서 君主의 간곡한 下敎(하교)를 듣고도 오만하게 감동하지 않을 뿐 아니라 감히 공공연히 드러내놓고 반대하니 그 말이 비할 데 없이 패악했다. 홍인한이 조금도 딴마음이 없었다면 어찌 臣子(신자)로서 「三不必知」라는 말을 할 수 있겠는가』
 
 
  正祖 대리청정 석 달 만에 英祖 사망
 
홍봉한 공격의 선봉에 선 徐命善(왼쪽)과 金鍾秀.
  당시 홍인한이 이끄는 老論 벽파는 장차 사도세자의 親子인 世孫이 寶位(보위)에 오를 경우 보복을 가할까 두려워한 나머지 世孫의 廢位(폐위)를 적극 강구했다. 이들은 조만간 노쇠한 英祖가 사망할 때를 대비해 世孫의 즉위를 막기 위해 총력을 기울였다.
 
  이때 正祖는 사부이자 참모로 활약한 洪國榮(홍국영)의 도움을 얻어 새로운 세력을 규합하면서 이에 정면으로 맞서고 나섰다. 少論 계열의 강직한 副司直(부사직) 徐命善(서명선)이 다음과 같은 상소를 올렸다.
 
  『좌의정 홍인한이 감히 「삼불필지說」을 언급했다고 하니 만일 儲君(저군·동궁)이 알지 못한다면 어떤 사람이 이를 알아야 한다는 말입니까. 聖上의 밝은 지혜를 赫然(혁연)히 떨쳐 펴시어 속히 대신의 죄를 바로잡아 국가대사가 존중되는 지경으로 돌아가게 하십시오』
 
  이 소식을 들은 홍인한은 곧바로 자신의 수하에 있는 司直(사직) 沈翔雲(심상운)에게 반대 상소를 올리게 했다. 그러나 英祖는 심상운을 처벌토록 조치한 뒤 世孫에게 대리청정을 맡길 것을 천명했다. 正祖가 대리청정을 시행한 지 불과 석 달 만에 英祖는 83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이에 正祖가 마침내 24세의 나이로 조선조의 22대 君王으로 즉위하였다.
 
  보위에 오른 正祖의 급선무는 보위의 안정이었다. 이는 戚臣세력의 척결과 직결돼 있었다. 正祖는 11세 때 부친인 사도세자가 老論세력의 견제에 걸려 비참한 최후를 맞이한 것을 잊지 않았다.
 
 
  正祖의 外戚 제거
 
  正祖는 즉위하자마자 세자 시절의 스승이자 참모였던 홍국영을 중심으로 鄭履煥(정이환)과 金鍾秀(김종수), 徐命善 등을 규합해 외척세력 제거에 나섰다. 김종수는 홍봉한 공격의 선봉장으로 활약하면서 후일 벽파의 거두가 되었다. 정이환은 김귀주의 심복과 같은 인물이었다.
 
  正祖는 이들의 도움을 얻어 마침내 홍인한을 여산, 사도세자와 동복인 和緩翁主(화완옹주)의 양자가 되어 홍인한과 함께 전횡을 일삼았던 鄭厚謙(정후겸)을 경원으로 유배 보냈다. 다만 왕실의 권위를 고려해 외조부 홍봉한과 고모인 화완옹주는 처벌하지 않았다.
 
  正祖는 여세를 몰아 이내 김귀주 계열의 외척세력을 제거하고자 했다. 김귀주는 예봉을 피하기 위해 곧 정이환 등을 사주해 홍봉한을 공격하고 나섰다. 사도세자가 홍봉한이 바친 뒤주에 갇혀 죽었다는 것이 이들의 주장이었다. 그러나 正祖는 英祖의 말을 인용해 홍봉한을 두둔하면서 이를 일축했다.
 
  이때 正祖는 김귀주를 제거하기 위해 巧策(교책)을 구사했다. 正祖 원년(1777) 9월9일 심야에 혜경궁 洪씨의 환후가 위독하니 모든 관료들은 입궐해 문후하라는 교서가 내려졌다. 당시 남촌에 살고 있던 김귀주 역시 황급히 궁궐로 달려왔다. 그러나 그가 승정원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불참자 명단이 통보된 뒤였다. 결국 김귀주는 「혜경궁을 위문하지 않았다」는 죄로 흑산도로 유배 가게 되었다.
 
  그러나 正祖의 이러한 외척세력 제거가 완벽하게 성공한 것은 아니었다. 홍봉한이 아무런 처벌도 받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김귀주는 유배 이상의 처벌을 받지 않았다.
 
  이때 소위 「3大 謀逆(모역)사건」이 터져 나왔다. 이 사건은 과거에 老論 자제들이 경종을 살해코자 했던 소위 「三級手(삼급수) 사건」과 여러모로 비슷했다.
 
 
  잇단 암살 시도
 
  「3大 모역사건」을 일으킨 집안은 홍인한과 함께 老論 벽파를 이끌던 洪啓禧(홍계희) 집안이었다. 홍계희는 시정의 무뢰배인 羅景彦(나경언)을 사주해 사도세자의 비행을 英祖에게 고하게 하여 사도세자를 죽음에 이르게 한 핵심인물로 正祖가 즉위하기 전에 죽었다. 正祖의 보복을 두려워한 홍계희의 아들 洪趾海(홍지해)는 곧 홍인한과 함께 世孫을 제거하려다가 실패하자 마침내 무력을 동원해 正祖를 암살하려 했던 것이다.
 
  첫 번째 모역사건은 正祖 원년(1777) 7월28일에 일어났다. 당시 홍지해의 조카인 洪相範(홍상범)은 역사인 田興文(전흥문)과 궁성을 경호하는 호위군관 姜龍輝(강용휘) 등을 포섭한 뒤 궁중으로 난입해 正祖를 척살하려 했으나 실패하고 말았다.
 
  이들은 7월28일의 거사가 실패로 돌아가자 보름 뒤에 재차 景秋門(경추문) 북쪽 담장을 넘어 거사하려다가 수포군에게 체포되고 말았다. 이들은 아무런 代案(대안)도 없이 君王을 弑害(시해)하려 한 것이다. 조선조의 君弱臣强(군약신강) 현상이 어느 정도로 심각한 상황이었는지 짐작케 해주는 대목이다.
 
  세 번째 모역사건은 소위 「恩全君(은전군) 추대사건」을 말한다. 이는 홍계희의 8촌인 進善(진선) 洪啓能(홍계능)과 홍상범의 사촌인 洪相吉(홍상길)이 주도하여 正祖를 살해한 후 사도세자와 景嬪(경빈) 朴씨 사이에서 태어난 은전군 李?(이찬)을 국왕으로 추대하고자 한 사건이었다. 홍계능의 아들과 조카, 제자 등이 가담한 이 사건에는 前 참판 閔弘燮(민홍섭)과 前 승지 洪樂任(홍락임) 등이 연루되었다. 홍락임은 혜경궁 洪씨의 친동생이다. 외삼촌이 생질을 살해하는 모의에 가담한 셈이었다.
 
  正祖는 친히 鞫廳(국청)을 열어 관련자 은전군을 自盡(자진)시키는 등 주동자 23명을 사형에 처했다. 正祖는 宿衛所(숙위소)를 설치한 뒤 홍국영을 숙위대장을 삼아 자신의 신변을 보호토록 조치였다.
 
  正祖는 재위 3년(1779) 3월에 문득 홍국영을 축출하고 서명선을 영의정, 洪樂性(홍락성)을 좌의정에 임명했다. 正祖는 왜 자신의 즉위와 집권 초기의 王權강화에 결정적인 공헌을 한 홍국영을 축출한 것일까.
 
  원래 홍국영은 홍봉한과 마찬가지로 풍산 洪씨 가문이다. 홍봉한은 그의 10촌 조부, 혜경궁 洪씨는 11촌 숙모에 해당한다. 홍국영은 英祖 48년(1772)에 25세의 나이로 과거에 급제해 시강원 司書(사서)에 임명되면서 세손인 正祖와 처음으로 인연을 맺었다. 이후 正祖의 스승이 된 홍국영은 타고난 재능을 바탕으로 正祖를 충실히 보필했다. 그는 正祖를 위해 모든 정보를 상세히 제공하면서 정치적 충고를 아끼지 않았다. 당시 고단한 처지의 正祖에게 홍국영은 유일한 은신처이자 보호막이었다.
 
 
  세도정치의 선구자 홍국영
 
규장각이 있던 창경궁 주합루.
  홍국영이 正祖가 즉위하자마자 약관 29세에 正祖의 신임을 바탕으로 국가 최고의 원훈이 된 것은 바로 이런 前功(전공) 때문이었다. 그는 正祖 초기에 도승지와 훈련대장, 금위대장, 숙위대장을 겸임하면서 인사권은 물론 軍權(군권)까지 장악했다.
 
  국가대사가 모두 홍국영을 거친 뒤 正祖에게 보고됨으로써 홍국영은 무소불위의 권력을 행사했다. 세상에서는 홍국영의 專政(전정)을 두고 소위 「勢道政治(세도정치)」라고 불렀다. 正祖 사후 60년 동안 진행된 세도정치의 효시가 바로 홍국영이었다.
 
  홍국영은 은연중 자신의 소임을 잊고 正祖의 통치노선과 배치되는 權臣(권신)의 길을 걷고 있었다.
 
  孝懿王后(효의왕후) 金씨는 지병이 심해 후사를 기약하기 힘들었다. 이를 간파한 홍국영은 자신의 누이를 正祖의 후궁(元嬪·원빈)으로 들여앉혔다. 원빈 洪씨는 자식을 낳지 못하고 1년 만에 사망했다.
 
  이에 홍국영은 차선책으로 正祖의 이복동생인 恩彦君(은언군) 李?(이인)의 아들 常溪君(상계군) 李湛(이심)을 원빈 洪씨의 양자로 삼아 完豊君(완풍군)에 봉하게 했다. 이어 완풍군을 正祖의 후계자로 삼을 생각으로 송덕상을 조종해 왕세자 책봉을 청하는 상소를 올리게 했다.
 
  홍국영의 행태를 묵묵히 지켜보던 正祖는 홍국영의 행보가 보위를 넘보는 참람한 행보로 치닫자 마침내 칼을 뽑아들었다. 正祖는 홍국영과 처음으로 대면한 지 7년째 되는 재위 3년(1779) 9월26일에 홍국영을 불러 독대한 뒤 곧바로 사직소를 올리고 致仕(치사)를 선언하게 했다. 正祖는 이어 홍국영의 세력기반이 된 숙위소 등을 일거에 폐지한 뒤 서명선을 중심으로 한 새로운 정권을 탄생시켰다.
 
  正祖는 홍국영을 퇴진시킨 후 여러 세력을 고루 기용해 王權을 강화하고자 했다. 당시의 정치세력은 黨色(당색)으로 볼 때 老論·少論·南人으로 3분되나 이미 英祖의 탕평으로 인해 黨色이 크게 희석된 까닭에 오히려 時派와 벽파로 양분하는 것이 타당하다. 時派는 사도세자의 죽음을 동정하면서 正祖의 정국운영에 동조한 세력을 말하고, 벽파는 사도세자의 죽음을 당연시하면서 正祖의 정국운영에 동조하지 않은 세력을 지칭한다.
 
  이런 상황에서 正祖는 학식이 풍부하고 의리에 투철한 참신한 기풍의 젊은 人材를 대거 충원함으로써 王權강화에 박차를 가하고자 했다. 구체적인 방안으로 제시된 것이 바로 奎章閣의 설치였다. 正祖는 「기존의 관료체제로는 臣權이 王權을 압도하는 기형적인 정치구조를 시정할 길이 없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
 
 
  奎章閣 설치
 
抄啓文臣 출신인 정약용(왼쪽)과 서유구.
  규장각은 御製(어제·군주의 글)와 御眞(어진·군주의 초상화) 등을 봉안하는 것이 기본 임무였다. 각종 서적의 수집과 편찬도 규장각의 고유 업무 중 하나였다. 규장각은 설립 초 北京에서 5000여 권의 책을 구입했다. 正祖 5년에 이르면 무려 3만 권의 도서를 소장하게 되었다.
 
  당시 규장각의 閣臣(각신)은 提學(제학) 2명과 直提學(직제학) 2명 등 모두 6명의 정원으로 구성되었다. 각신을 보좌하는 잡직으로 閣監(각감) 2명과 檢書官(검서관) 4명 등 모두 35명이 있었다. 이 밖에 正書(정서) 등 70여 명의 서리가 있어 총 105명에 달했다. 이는 당시 최고의 권위기관인 弘文館(홍문관)의 84명보다 큰 규모였다.
 
  규장각의 직원 중 주목할 대상은 검서관이었다. 이들은 비록 閣臣(각신)의 대열에 들지는 못했으나 대단히 중요한 淸要職(청요직)으로 간주되었다. 이는 초대 검서관에 등용된 李德懋(이덕무)와 柳得恭(유득공), 朴齊家(박제가) 등의 면모를 보면 알 수 있다. 모두 서얼 출신이기는 했으나 당대 최고의 학식과 능력을 자랑한 인물들이었다.
 
  이들의 대거 발탁에는, 오직 서얼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뛰어난 學才(학재)를 지니고 있음에도 벼슬길에 나서지 못한 적폐를 제거하려는 正祖의 강한 의지가 반영되었다.
 
  당시 閣臣에게는 많은 특권이 부여되었다. 왕을 조석으로 면대할 수 있고 召對(소대)와 夜對(야대)는 물론 경연에도 참여할 수 있었다. 특히 直閣(직각)을 거치면 왕명 없이 곧바로 銓郞(전랑)에 천거될 수 있었다. 사헌부에서 왕의 허락 없이 閣臣의 죄를 청할 수 없었고, 형사상 특혜가 주어져 공무 중에는 이들을 체포하거나 구금할 수 없었다.
 
  각신에 대한 이런 특혜는 당시의 관료사회에 하나의 충격이었다. 이는 「正祖실록」 6년 5월26일조에 실린 공조 참의 李澤徵(이택징)의 상소문을 보면 쉽게 알 수 있다.
 
  『閣臣의 登對(등대)는 승정원을 거치지도 않고, 朝紙(조지)에도 반포되지 않고 있습니다. 이런 일이 법규로 굳어지면 규장각은 곧 전하의 私閣(사각)이 되는 것으로 나라의 公閣(공각)이 아니고, 閣臣은 곧 전하의 私臣(사신)이 되는 것으로 조정의 公臣(공신)이 아닌 것입니다』
 
 
  正祖와 초계文臣들의 인간적 결속
 
  正祖대를 통틀어 閣臣에 임명된 사람은 모두 38명이다. 南人의 蔡濟恭(채제공)과 少論의 李福源(이복원) 및 徐命膺(서명응) 등을 제외하면 모두 老論이나, 이를 時派와 벽파로 구분하면 時派의 비중이 압도적으로 많았다. 이택징의 발언은 時派 중심의 임용에 대한 벽파의 반발로 볼 수 있다.
 
  閣臣들에게는 黨色을 초월한 공통점이 있었다. 그것은 당론을 고수하면서도 탕평에 반대하지 않는 淸流(청류)였다는 점이다. 正祖는 규장각을 통해 戚臣의 타도와 王權강화의 친위세력을 확보하고자 했다.
 
  규장각의 閣臣은 과거시험의 시험관을 담당하고, 元子(원자)의 강학을 주관하고, 관료들의 再교육을 담당함으로써 통치이념과 국가정책을 비롯해 모든 정치현안을 다루는 정치의 산실이 되었다. 당시 규장각은 고유 업무 이외에 소위 抄啓文臣(초계문신)의 기능을 담당했다. 이는 37세 미만의 문과 급제자를 대상으로 실시된 문신의 再교육에 주안점을 둔 제도를 말한다.
 
  초계문신제는 主목적이 친위세력의 양성에 있던 만큼 경학과 사학 위주로 교과가 편성되었다. 이들에 대한 학사일정은 엄격하고 체계적으로 진행되었다. 課講(과강)과 課製(과제)를 통해 학업을 평가받아야 했고, 매달 한 번씩 親試(친시)와 親講(친강)의 명목으로 正祖 앞에서 시험을 치렀다. 이때 신상필벌의 원칙이 엄격히 적용되었다. 초계문신에게 閣臣과 마찬가지로 각종 혜택이 주어졌다.
 
  正祖의 치세를 통틀어 초계문신에 선발된 사람은 모두 138명이다. 이들의 절반 이상이 淸要職(청요직)에 올랐고 각신에 임명된 사람은 18명이나 되었다. 正祖 치세의 후반기에 이르러서는 公卿大夫(공경대부)의 대부분이 초계문신 출신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이 시기 대표적인 실학자인 丁若鏞(정약용)과 徐有?(서유구)도 초계문신 출신이었다.
 
  이 제도는 正祖와 초계문신 간에 君臣관계를 넘어 師弟관계로 발전케 만들었다. 이는 正祖와 초계문신 사이의 정치적 결속을 강화하는 계기로 작용했다. 正祖가 소위 「군주도통론」을 주장하게 된 배경이 바로 여기에 있었다.
 
 
  南人 채제공의 기용
 
  正祖는 규장각과 초계문신제 등을 통해 친위세력을 대거 육성했음에도 불구하고 기본적으로는 老論의 時派와 벽파의 대립구도 속에서 정국을 운영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만큼 老論의 세력이 막강했다. 時派와 벽파가 하나의 당파로 작동하기 시작한 것은 正祖 8년(1784) 6월부터였다. 당시 정국은 少論의 서명선이 주도권을 잡은 가운데 김종수를 대표로 하는 老論 내의 소위 淸明黨(청명당)이 가세하는 구도로 짜여 있었다.
 
  正祖는 재위 12년(1788)에 들어와 시파와 벽파의 대립이 가시화하자 이내 3당의 색깔을 뒤섞어 老論의 金致仁(김치인)과 少論의 李性源(이성원), 남인의 蔡濟恭(채제공)을 3정승에 임명하는 획기적인 인사를 단행했다. 「正祖실록」 12년 2월29일조는 당시의 인사에 대한 正祖의 자평을 이같이 기록해 놓았다.
 
  『朋黨이 생긴 이래 三相(삼상)이 오늘과 같은 적은 아마도 처음 있는 일일 듯하다. 이번 일로 나는 자부하는 바가 있다. 경들은 모름지기 각자 마음을 다해 나로 하여금 공효를 볼 수 있게 하라』
 
  正祖가 南人의 채제공을 右相(우상)으로 발탁한 것은 정국 주도권에 대한 자신감의 표현이었다.
 
  이후 정국의 주도권을 채제공이 장악한 가운데 金?(김익)과 金履素(김이소), 朴宗岳(박종악) 등 시파가 재상직을 독점하면서 벽파는 크게 위축되었다.
 
 
  사도세자를 위하여
 
  이를 계기로 正祖는 재위 13년(1789) 7월에 이르러 錦城尉(금성위) 朴明源(박명원)의 건의를 받아들이는 형식으로 그간 미뤄 놓았던 사도세자 묘의 遷葬(천장)을 공식 선포하고 나섰다.
 
  박명원은 正祖의 속마음을 읽고 이내 묘소의 떼가 말라죽고, 左靑龍(좌청룡)이 뚫린 형상이라며 천장의 구실을 만들어 주었다. 풍수에서 좌청룡은 「후손」을 의미하고 우백호는 「재물」을 뜻한다. 「좌청룡이 빈약하다」는 것은 왕실의 가장 중요한 왕자 생산에 문제가 되는 것이니 이보다 더 좋은 구실은 없었다. 正祖가 기다렸다는 듯이 곧바로 수원의 花山(화산)으로 천장할 것을 명했다.
 
  원래 수원의 「花山」은 尹善道(윤선도)가 顯宗(현종)의 명을 받아 수원으로 내려가 산세를 본 후 孝宗(효종)의 능묘 자리로 보고한 곳이었다. 당시 顯宗은 孝宗의 묘를 이곳으로 결정하고 토목공사를 시작했으나 돌연 宋時烈(송시열)의 東九陵(동구릉) 추천을 계기로 老論세력이 일제히 윤선도를 비난하면서 무산되었다. 이로써 동구릉은 선조 이후 君弱臣强 현상이 일반화하면서 왕실의 공동묘지로 변하고 말았다.
 
  당시 正祖는 孝宗의 寧陵儀軌(영릉의궤)를 훑어보고 사도세자의 묘를 「花山」으로 천장하려는 마음을 굳히고 있었다. 그는 윤선도가 「花山은 盤龍弄珠(난룡농주: 누워 있는 용이 여의주를 희롱하는 형국)의 자리로 천 년에 한 번 만날까 말까 한 명당이다」라고 언급한 대목을 가슴에 새겨 두었다. 花山은 말 그대로 지형이 꽃봉오리가 둘러싼 형태로 花心(화심)에 해당하는 곳이 세도세자의 능침이었다.
 
  사도세자의 묘는 花山으로 천장되면서 왕릉에 버금하는 수준으로 꾸며졌다. 명칭은 顯隆園(현륭원)으로 격상되었다(高宗 때 사도세자가 莊祖로 추증되면서 隆陵으로 승격).
 
  당초 正祖는 英祖 50년(1774)에 양주 拜峰山(배봉산)에 있던 사도세자의 묘인 永祐園(영우원)을 처음으로 성묘하면서 조악한 주변환경에 경악했다. 正祖는 2년 뒤 보위에 오르게 되었으나 일련의 王權강화책을 구사하기에 바빠 영우원의 이장을 뒤로 미뤄 놓았다. 그러나 正祖는 단 한순간도 이를 잊은 적이 없었다.
 
  원래 영우원의 遷葬(천장)을 구실로 내세운 正祖의 속셈은 華城(화성)의 경영에 있었다. 이는 正祖가 천장이 성공리에 끝난 재위 18년(1794) 벽두에 「화성축조」라는 뜻밖의 계획을 발표한 사실을 통해 쉽게 알 수 있다.
 
  이 해는 사도세자와 혜경궁 洪씨 모두 환갑이 되는 해였다. 이 해 1월13일 현륭원을 참배한 正祖는 신료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齋室(재실)에서 하룻밤을 뜬 눈으로 지새웠다. 다음날 행궁으로 돌아온 正祖는 신하들을 이끌고 팔달산에 올라 그 자리에서 화성축조의 대강령을 지시했다.
 
사도세자의 능인 隆陵.
 
  개인상인의 자유 商행위 보장한 辛亥通功
 
  원래 正祖의 화성경영은 주도면밀한 계획하에 이뤄진 것이었다. 正祖는 이를 위해 사전에 두 가지 조치를 취했다. 하나는 경제개혁 조치인 소위 辛亥通功(신해통공) 조치였고 다른 하나는 武力기관인 壯勇外營(장용외영)의 설치였다.
 
  正祖 15년(1791) 6월에 좌의정 채제공의 건의를 받아들이는 형식으로 전격 실시된 辛亥通功은 화성의 경제문제를 의식한 조치였다.
 
  당시 3정승 중 좌의정 채제공만이 재상직에 남아 있는 소위 「獨相(독상)」 체제가 구축되어 있었다. 正祖의 절대적인 신임을 받은 좌의정 채제공은 六矣廛(육의전)을 제외한 모든 市廛(시전)의 禁亂廛權(금난전권)을 혁파하고 개인상인의 자유로운 商행위를 보장했다. 이것이 바로 辛亥通功이다. 「通功」은 일종의 품앗이를 뜻하는 말로 육의전과 시전 상인에게 부여된 전매 특권을 모든 상인에게 나눠 주는 것을 의미했다.
 
  원래 금난전권은 육의전에 한정되어 있었으나 점차 재정적 곤경을 타개하는 방안으로 활용되면서 그 범위가 시전까지 확대되었다. 18세기 이후 활발한 유통경제로 인해 시전이 증가하면서 「금난전권」은 상업발전의 커다란 걸림돌로 작용하기 시작했다. 금난전권은 소상인의 몰락과 상품유통의 지연, 물가폭등을 야기했다.
 
  신해통공은 단순한 상업정책이 아니었다. 여기에는 正祖의 王權강화 의도가 강하게 반영되어 있었다. 당시 금난전권을 보유한 일부 특권상인은 老論의 閥閱(벌열)과 깊이 연결되어 이들의 정치자금줄 역할을 수행하고 있었다.
 
  금난전권은 서울의 경계를 넘어 인근 시장까지 적용되고 있었다. 이는 수원도 예외일 수 없었다. 금난전권이 존재하는 한 화성의 상권은 위축될 수밖에 없었다. 신해통공은 표면상 소상인 보호와 물가안정을 내세웠으나 사실은 老論을 견제하고 화성을 육성키 위한 방안의 하나로 나온 것이었다.
 
  正祖는 재위 17년(1793)에는 친위무력기관인 壯勇外營의 설치를 마무리 지었다. 당초 친위무력기관으로 설치된 숙위소는 군왕의 직속군대로 편성되었으나, 숙위대장 홍국영이 전횡하면서 그 성격이 군왕의 친위군대에서 홍국영의 私的 무력기관으로 변질되었다. 이에 正祖는 홍국영의 축출과 더불어 숙위소를 혁파한 뒤 그 代案(대안)으로 壯勇衛(장용위)를 신설했다.
 
  장용위는 正祖 6년(1782)에 무예와 통솔력을 지닌 무관 30명으로 출발한 뒤 正祖 11년(1787)에 50명으로 보강돼 壯勇廳(장용청)으로 승격되었다가 이듬해에 다시 壯勇營(장용영)으로 개편되었다. 장용영은 正祖의 관심과 지원을 받아 正祖 17년(1793) 마침내 도성에 설치된 壯勇內營(장용내영)과 화성에 설치된 壯勇外營의 2원체제로 확대되었다. 內營이 수도경비를 전담한 데 반해 外營은 현륭원과 수원행궁의 수호를 그 임무로 삼았다.
 
  外營의 설치는 사실 세자에게 傳位(전위)한 이후를 대비한 친위 무력의 보존에 있었다. 外營이 內營을 월등히 능가하는 3000여 명의 상비군과 비상시에 동원되는 守城軍으로 구성되어 外營의 기병이 「親軍衛(친군위)」로 호칭된 사실이 그 증거이다.
 
 
  진산사건
 
  正祖의 화성경영 복안은 「현륭원 천장-신해통공-장용외영 설치-화성축조」라는 단계적인 수순으로 구성돼 있었다.
 
  당초 화성축조 논의는 正祖 14년(1790) 6월에 부사직이던 姜游(강유)가 수원에 현륭원이 있다는 이유 등을 들어 축성의 필요성을 건의하면서 부상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듬해 10월 뜻밖에도 충청도 진산에 사는 남인 尹持忠(윤지충)과 權尙然(권상연)이 조상의 신주를 불태우고 제사를 폐지한 소위 「珍山事件(진산사건)」이 일어나면서 논의가 중지되었다.
 
  진산사건은 400년 동안 유교의 강상윤리를 정면으로 부정한 일대 사건이었다. 윤지충은 南人의 영수 윤선도의 6대손으로 인물화로 명성을 날린 尹斗緖(윤두서)의 증손이었다. 권상연은 호서산림의 대표적 인물 중 한 사람인 權?(권시)의 5세손이었다.
 
  당시 南人들은 천주교를 학문 차원에서 받아들인 西學(서학)에 깊이 빠져 있었다. 老論 세력은 西學을 신봉하는 南人을 「邪學(사학)의 무리」로 매도하고 나섰다. 이들은 채제공의 獨相 체제를 허물기 위해 서학에 대한 비판의 목소리를 높였다.
 
  윤지충과 권상연의 행동을 폭로해 진산사건의 단초를 제공한 사람은 하급관원인 別檢(별검) 洪樂安(홍낙안)이었다. 그는 장문의 규탄서를 통해 윤지충과 권상연을 逆律(역률)로 다스릴 것을 청했다.
 
  대부분의 老論과 少論이 사건의 확대를 꾀하고 나서자 正祖는 이 사건을 채제공에게 일임함으로써 문제를 축소하려고 했다. 채제공은 政敵(정적)들의 예봉을 피하기 위해 진산사건에 단호한 입장을 보였다. 그는 비록 역률죄를 적용하지는 않았으나 참형을 건의해 正祖의 허락을 얻어 냈다. 당시 正祖는 처벌보다 교화를 원했으나 정치적 기반을 유지하기 위한 채제공의 입장을 감안해 그의 건의를 받아들였다.
 
  이 사건으로 채제공과 南人의 정치적 위상이 크게 실추되었다. 결국 正祖가 재위 16년(1792) 정월에 박종악을 우의정으로 임명함으로써 16개월 동안 유지된 채제공의 獨相체제가 종료되었다. 이로 인해 正祖의 王威(왕위) 역시 적잖은 타격을 입게 되었다.
 
 
  萬人疏 사건
 
  이때 영남 유생 1만여 명이 연명해 「사도세자의 罪를 신원하고 그를 모해한 무리를 처벌해야 한다」는 상소를 올리는 사건이 빚어졌다. 이를 통상 「萬人疏事件(만인소사건)」이라고 한다. 이는 正祖가 사도세자의 伸寃(신원)문제에 지대한 관심이 있는 것을 기화로 사도세자의 죽음에 적극 간여한 老論을 실각시키고 南人으로의 換局(환국)을 실현하려는 속셈에서 나온 것이었다.
 
  그러나 사도세자의 伸寃문제는 간단한 사안이 아니었다. 당초 正祖도 즉위 당시 자신은 어디까지나 효장세자의 아들임을 강조하면서 사도세자의 伸寃문제를 철저히 금지시킨 바 있다. 이는 老論의 반발을 무마하고 정국의 안정을 꾀하기 위한 고육책이었다. 正祖가 즉위한 직후 안동 유생 李道顯(이도현) 부자는 사도세자의 伸寃을 주장하는 상소를 올렸다가 처형되고 그들의 고향인 安東府(안동부)도 縣(현)으로 강등됐다.
 
  그러나 이때에 이르러 영남 南人들은 더 이상 물러설 수 없다는 생각으로 집단적인 시위의 방법을 동원해 老論을 향한 일대 결전을 선언하고 나선 것이다. 이 사건으로 인해 사도세자의 죽음과 관련한 소위 「壬午義理(임오의리)」 문제가 정국 현안으로 부상했다.
 
  正祖 17년(1793) 5월에 채제공이 「사도세자를 신원해야만 正祖의 王權이 闡揚(천양)된다」는 상소를 올리면서 다시 한 번 파란이 일었다. 이는 正祖의 중재로 가까스로 수습되기는 했으나, 景宗 때 英祖의 즉위를 둘러싸고 老論이 참변을 당한 사건과 관련한 소위 辛壬義理(신임의리)를 고수하는 벽파세력들은 더욱 강경한 모습을 취했다.
 
 
  華城 축성
 
수원 華城의 팔달문.
  正祖는 재위 17년(1793)에 채제공을 水原留守(수원유수)로 파견했다. 채제공은 이 해 5월에 華城 축성 방안을 본격적으로 건의하고 나섰다. 채제공의 건의를 계기로 正祖 18년(1794) 벽두에 마침내 10년 계획하의 華城 축조가 시작되었다.
 
  華城의 축성기법은 柳馨遠(유형원)이 「磻溪隧錄(반계수록)」에 제시한 내용에 따라 이뤄졌다. 실학자 유형원은 이미 100년 전에 수도외곽의 방어차원에서 수원城의 필요성을 언급해 놓은 바 있다. 유형원의 선견지명에 감탄한 正祖는 그에게 이조참판을 追贈(추증)했다.
 
  正祖가 10년 계획을 잡은 것은 장차 10년 동안 王權강화의 기틀을 완전히 다져 세자에게 보위를 물려준 뒤 화성으로 옮겨 가 生父인 사도세자의 능원을 지키며 上王으로 일생을 마치고자 하는 복안에서 나온 것이었다.
 
  正祖가 재위 도중에 굳이 傳位(전위)하려고 한 것은 生父 사도세자 때문이었다. 그는 평소 부친을 왕으로 追崇(추숭)해 자신의 恨을 달래고자 했으나 「나의 처분을 지켜라」라고 엄명한 英祖의 유언을 저버릴 수 없었다.
 
  은혜와 의리의 기로에서 고민하던 正祖는 그 代案으로 世子에게 보위를 넘겨 세자로 하여금 사도세자를 추숭케 하는 방식으로 모든 문제를 일거에 해결코자 한 것이다. 그러나 이 또한 구차한 방안이 아닐 수 없다. 正祖의 우유부단한 면모가 여실히 드러나는 대목이다.
 
  正祖 20년(1796)에 들어와 마침내 華城 축조가 마무리되자 이 해 10월16일에 성대한 낙성연을 베풀어 華城 축조를 기념하면서 王權강화의 새로운 전기로 활용하고자 했다.
 
  이때 正祖가 취한 것은 바로 「君主道統論」을 내세워 학문적으로 臣權세력을 제압하는 방안이었다. 이는 仁祖(인조) 이래 당연시된 「山林道統論(산림도통론)」을 정면으로 부정함으로써 君威를 높이고자 하는 속셈에서 나온 것이었다.
 
 
  임금이 道學의 道統이다
 
  正祖는 집권 초기에 집권의 명분을 강화하고 지지세력을 확산키 위해 山林을 중용하는 모습을 보였다. 宋德相(송덕상)과 韓啓增(한계증), 李象靖(이상정), 金履安(김이안) 등이 正祖의 부름을 입은 대표적인 山林들이었다. 영남 南人의 구심점 역할을 한 이상정을 제외하고 모두 老論의 기호학파였다.
 
  이들 중 가장 주목받은 인물은 송덕상이었다. 송시열의 玄孫인 그는 비록 학식은 미미했으나 가문을 배경으로 湖西의 士林을 주도하고 있었다.
 
  正祖는 老論을 포섭하기 위해 홍국영의 건의를 받아들여 송덕상을 유현으로 예우하면서 그가 제시한 대부분의 건의를 그대로 수용했다. 송시열을 효종의 사당에 배향하고, 萬東廟(만동묘)에 친필 현판을 하사하고, 여주에 大老祠(대로사)를 건립하고, 「宋子大典(송자대전)」의 간행을 주선한 것은 바로 이 때문이었다.
 
  그러나 송덕상은 식견이 짧아 늘 홍국영에게 이용만 당하다가 마침내 홍국영의 역모 혐의에 연루돼 패가망신하고 말았다.
 
  正祖는 송덕상을 통해 山林에 대해 부정적인 시각을 갖게 되었다. 홍문관의 소장 관료에 의해 山林의 폐단과 허구가 적나라하게 지적되자 「山林無用論(산림무용론)」이 하나의 대세로 자리 잡게 되었다.
 
  正祖는 이를 王權강화의 호재로 적극 활용해 山林이 종전에 지닌 권위를 王威 속으로 흡수하는 작업을 진행시켰다. 正祖는 곧 군주가 道學의 스승이라는 소위 「君師論(군사론)」을 기초로 군주가 道學의 적통이라는 「군주도통論」을 주창하고 나섰다.
 
  이 과정에서 山林이 專有(전유)해 온 節義論(절의론)이 폐기되고 老論 정통론이 크게 퇴색했다. 이는 군주가 義理를 주관하는 시대가 도래했음을 상징하는 것이었다. 「正祖실록」 20년 9월 무신조는 奉朝賀 김종수가 우의정 尹蓍東(윤시동)에게 보내는 글에서 밝힌 「군주도통論」의 수용 배경을 이같이 수록해 놓았다.
 
  <우리 군주는 聖人으로 총명하기 그지없어 군주의 자리에 있으면서 스승을 겸하고 있다. 나는 머리가 하얗게 센 지금까지도 우러러 존경하는 마음이 더욱 깊어지기만 하여 내 군주가 바로 나의 스승이라는 것만을 알고 있을 뿐이다. 유학과 관련해 聖上의 계획이 당당하며 광대하고 정밀한데 누가 감히 입을 놀려 이론을 제기할 수 있겠는가>
 
  이를 계기로 正祖의 「군주도통論」은 더욱 빛을 발하게 되었다.
 
 
  君臣 간 정면 대결
 
벽파의 거두 심환지.
  그러나 「군주도통論」이 현실정치의 세력판도까지 바꿀 수는 없었다. 오히려 「군주도통論」을 내세운 正祖의 고압적인 태도는 老論세력의 반발을 촉진하는 배경으로 작용했다.
 
  正祖 18년(1794) 12월에 벽파의 영수 김종수를 강제로 은퇴시키면서 항간에 사도세자의 모해자를 제거하려 한다는 「친위쿠데타說」과 華城으로의 「천도說」이 나돈 것 또한 正祖에게 불리하게 작용했다. 이에 老論 벽파의 「군주도통論」에 대한 의구심은 더욱 깊어만 갔다.
 
  老論 벽파는 正祖의 측근이자 南人의 영수인 채제공에게 공격의 초점을 맞췄다. 벽파의 맹공을 견디지 못한 채제공이 正祖 22년(1798) 6월에 사직서를 제출하는 것을 계기로 이 해 8월에 심환지 등을 정점으로 하는 벽파 정권이 수립되자 正祖의 王權강화 행보에 적잖은 차질이 빚어지게 되었다.
 
  이때 老論 벽파가 채제공에 이어 차세대 재상으로 지목된 南人의 영수인 李家煥(이가환)을 천주교 신봉 혐의로 거세게 공격하고 나서자 正祖의 입지는 더욱 좁아졌다.
 
  조정과 在野에서 正祖에 반대하는 일련의 움직임이 이어지자 정국이 급속히 경색되었다. 正祖의 친위세력으로 초계문신 출신인 우의정 李時秀(이시수)가 있었으나 그의 역량으로는 경색된 정국을 풀어 나가기에 벅찼다.
 
  이에 正祖는 특단의 조치를 강구하고 나섰다. 그것이 바로 正祖 24년(1800) 5월 그믐날의 경연에서 나온 소위 「五晦筵敎(오회연교)」이다. 「오회연교」는 말 그대로 5월 그믐날 경연에서의 下敎를 뜻한다.
 
  正祖는 「오회연교」에서 자신의 탕평원칙을 강조하는 한편 壬午義理에 대한 자신의 지지입장을 공개적으로 천명했다. 탕평원칙의 강조는 英祖 때 시행된 일련의 조치에 기초한 老論의 집권원칙을 부정하는 것으로 정계개편을 예고한 것이었다. 正祖의 고압적인 태도에 老論 벽파는 경악했다. 오회연교 수용은 곧 이가환을 정점으로 하는 南人 정권으로의 換局을 의미했다.
 
  時派에서 벽파로 전향한 이조참판 李書九(이서구)가 『壬午義理와 辛壬義理를 구분하겠다는 것은 巧辯(교변)에 지나지 않는다』며 正祖의 제의를 정면으로 거부했음에도 正祖는 더 큰 반발을 우려한 나머지 이서구를 처벌하지 못했다.
 
  이때 수찬 金履載(김이재)마저 오회연교에 동조하는 우의정 이시수를 비난하고 나서자 正祖의 분노가 폭발했다. 「正祖실록」 24년 5월29일조는 당시 正祖의 진노를 이같이 기록해 놓았다.
 
  <重臣(중신)에게 특별히 임무를 맡긴 것은 오로지 세속을 바로잡자는 데서 나온 것이다. 조정이 한 시대의 이목을 새롭게 하려고 하는 이때 그 누가 중신의 상소문 구절을 흠잡아 횡설수설한단 말인가. 밖으로 드러난 자부터 중벌로 다스린 뒤에야 진정으로 습속을 바로잡는 길이 될 것이니 수찬 김이재를 귀양 보내도록 하라>
 
 
  正祖 독살說
 
  正祖는 김이재의 배후에 반드시 조종한 자가 있을 것으로 판단하고 3일 안에 자수할 것을 종용했다. 그러나 6월3일이 지나도 자수하는 자가 나타나지 않았다.
 
  얼마 후 正祖는 벽파의 영수 심환지를 소환해 최후통첩을 내렸고, 다시 4일 후 심환지를 불러 마지막으로 경고했다. 그러나 正祖는 이로부터 12일 후인 이 해 6월28일에 49세의 나이로 급서하고 말았다. 이로써 君臣 간의 정면대결 양상으로 치닫던 「오회연교」 사태는 끝내 未決 사안으로 남게 되었다.
 
  당시 正祖의 사망은 많은 의혹을 남겼다. 南人들 사이에서는 正祖의 독살설이 파다하게 유포되었다. 정약용도 이 사건을 언급하면서 독살설을 강하게 암시한 바 있다. 당시 南人들은 「오회연교」의 내용 중 「義理는 시대에 따라 달라질 수 있고 재상을 임명할 때는 반드시 8년 정도의 시련을 준 뒤 8년을 믿고 등용할 수 있다」는 대목에 주목했다. 이들은 이를 두고 장차 南人으로의 換局을 의미하는 것으로 풀이했다.
 
  正祖가 죽은 뒤 어린 세자가 純祖(순조)로 즉위하자 벽파의 후원자인 貞純王后가 수렴청정을 하게 되었다. 정권을 잡은 老論 벽파는 正祖 지지세력에 대한 대대적인 숙청작업에 나섰다. 이가환과 정약용 등이 유배에 처해지고, 正祖의 무력기반이었던 장용영이 혁파되었다.
 
  벽파정권은 6년 만에 붕괴되고 이후의 정국은 安東 金씨를 중심으로 하는 外戚세력과 소수의 京華閥閱(경화벌열)이 장악하게 되었다. 조선조 朋黨정치가 빚어낸 최악의 정치형태인 외척세력의 세도정치가 이로부터 60년 동안 이어졌다. 조선조 붕괴의 조짐은 바로 이때부터 싹트기 시작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正祖의 치세는 시기적으로 몇 가지 측면에서 그 이전 시기와 뚜렷한 차이를 보이고 있다. 우선 경제 면에서 상품의 유통이 활발해져 상업이 크게 발전한 점을 들 수 있다. 英祖와 正祖가 전례 없이 자주 행차한 것은 바로 이 때문이었다.
 
  正祖는 소위 京江商人(경강상인)을 포함해 私營匠人(사영장인)과 각종 민간업자들과 만나는 데 비중을 두면서 도성 밖 행차에 자주 나섰다. 正祖는 사도세자의 묘를 華城으로 천장한 뒤 한강을 건너는 횟수가 잦아지자 舟橋司(주교사)를 신설해 경강상인들의 큰 배를 모두 이에 등록시키고 이들에게 세곡 운송권의 일부를 나눠 주었다.
 
 
  평민들의 목소리를 듣다
 
화성행궁.
  正祖의 능행은 재위 24년간 무려 68회에 이른다. 여기에 도성 내 행차를 합치면 총 110회에 달한다. 재위 3년차부터 행차를 시작한 점을 감안하면 한 해에 평균 5회꼴로 바깥 행차에 나선 셈이다.
 
  正祖 때 평민의 上言(상언)제도가 관행으로 굳어졌다. 도성 내에서는 공식적인 접수처가 세 곳 있었다. 어가가 창덕궁 돈화문을 나와 雲從街(운종가·종로)와 마주치는 지점인 把子橋(파자교) 앞, 여기서 서편으로 경복궁 또는 경희궁을 향해 올라가다가 탑골 부근에 있는 鐵物橋(철물교) 앞, 다시 같은 방향으로 계속 가서 육조거리와 마주치는 지점인 惠政橋(혜정교) 앞 등이 그곳이다.
 
  正祖의 바깥 행차는 장관이었다. 각 지방에서 上言을 하기 위해 서울로 온 인파를 포함해 관광에 나선 인파는 수만을 헤아렸다. 당시 도성과 경기도 일대는 상공업의 발달로 사회변동이 심하게 일어나 국왕이 직접 나서 갈등과 분쟁을 해결하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이 벌어지고 있었다.
 
  백성들은 그런 역할을 해주는 正祖의 행차에 환호를 보냈다. 正祖의 급작스런 죽음을 두고 영남 南人들뿐만 아니라 수많은 백성들이 애통해 한 것은 이와 무관하지 않았다. 史官도 正祖의 죽음을 두고 이같이 애도의 뜻을 표했다.
 
  『上이 창경궁 迎春軒(영춘헌)에서 승하하자 햇빛이 어른거리고 삼각산이 울었다』
 
  正祖는 세종과 더불어 조선조가 배출한 역대 군왕 중 최고의 名君(명군)에 해당한다. 두 사람 모두 博物君子(박물군자)의 君王으로 學德(학덕)을 겸비한데다가 치세 기간 중 많은 업적을 남김으로써 후세인의 칭송을 받게 되었다.
 
  그러나 正祖는 모든 것을 스스로 해결해야 안심하는 소심한 완벽주의자의 모습을 보임으로써 대세를 그르쳤다는 지적을 면하기 어렵다. 이는 그가 어린 시절부터 생명의 위협을 느끼며 성장한 사실과 무관하지 않았을 것이다.
 
 
  君道의 요체는 知事 아닌 知人
 
  正祖는 사도세자의 죽음과 관련한 壬午義理에 지나치게 얽매여 많은 시간을 허비하고, 장용영의 친위군을 비롯해 규장각과 초계문신제를 통해 배출된 친위문관들을 하나의 세력으로 조직화해 내지 못하는 한계를 보였다. 비록 학문적으로는 「군주도통說」을 내세워 老論 벽파를 비롯한 조정 관원들을 제압해 王威를 드높이는 성과를 얻었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현실정치의 王權강화로 연결시키지 못한 것은 바로 이 때문이었다.
 
  원래 군주가 신료들과 學知(학지)를 놓고 爭知(쟁지)하는 것은 君道(군도)가 아니다. 學知를 놓고 다투는 것은 臣道(신도)에 불과할 뿐이다. 正祖가 「산림도통論」을 제압하는 「군주도통論」을 내세워 이를 관철시킨 것을 결코 높이 평가할 수 없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君道의 요체는 知事(지사)가 아닌 知人(지인)에 있다. 人材의 등용을 뜻하는 「得人(득인)」과 인재의 활용을 뜻하는 「用人(용인)」이 바로 知人의 요체이다. 正祖는 得人에는 나름대로 성공했으나 用人에는 실패했다고 보아도 과언이 아니다. 당대의 才士인 이가환과 정약용 등을 제대로 활용하지 못하고 老論 벽파의 압력에 밀려 유배를 보낸 것 등이 그 증거이다.
 
  당시의 상황에서 正祖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老論 벽파를 포함한 群臣을 제압할 수 있는 강력한 결단력이었다. 正祖에게는 불행하게도 결단력이 부족했다. 正祖가 비록 당대 및 후대에 名君이라는 소리를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통치의 실효를 거두지 못한 것은 바로 이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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