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르포] 內戰 후유증 앓는 발칸반도

미군 폭격맞은 국방부 청사 7년째 방치
「大세르비아」의 꿈은 식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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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인종 갈등의 앙금은 발칸반도 곳곳에 남아 있어… 시장경제 이행속도가 각국의 번영을 좌우하는 척도

崔永夏 前 우즈베키스탄 대사
1943년 강원도 영월 출생. 육사 22기. 고려大 경영학 석사, 美 트로이州立大 석사. 월남전 참전, 보병 11사단 대대장, 韓美야전군사령부 정보참모, 국방정보본부 정보전력발전실장, 1, 3차 남북고위급회담 참가, 駐러시아대사관 초대 국방무관, 육군준장 예편, 외교안보연구원 본부대사, 駐우즈베키스탄 대사, 선문大 교수 역임. 現 국방부 군사자문위원.
베오그라드 古城의 리투아니아 여인들. 이곳에서 사바江과 다뉴브江이 합류한다.
보스니아 內戰(내전)과 코소보 사태로 국제사회의 시선을 모았던 발칸반도의 舊(구)유고연방은 모두 같은 슬라브 민족의 나라들이다. 역사적으로 주변 강국들의 침략을 받으면서 다양한 문화와 종교의 영향을 받아 異民族(이민족) 아닌 이민족으로 진화되어 왔다.
 
  내륙의 한랭한 겨울기후와 험준한 산악지형은 지역별로 낡은 생활양식, 고립된 민족전통을 지니게 되면서 유럽이면서도 유럽과는 먼 奧地(오지)로 여겨져 왔다. 6세기에 이주해 온 슬라브人들은 발칸반도 북부 주민의 인종적·문화적 요소를 이루고 있다.
 
  발칸반도는 중세에는 그리스·로마·비잔틴·오스만 터키의 영향을 받았다. 근세에는 이탈리아·오스트리아·러시아 등 강대국들의 영향을 받았다. 유고연방은 아니었지만 알바니아도 발칸반도에 속한 나라다.
 
  필자는 최근 알바니아를 비롯한 발칸반도를 여행했다.
 
  이탈리아 바리港(항)을 밤 11시에 출항한 그리스 선적의 낡은 배는 밤새 조용한 아드리아海를 건너 이튿날 아침 8시에 알바니아의 두레스港에 도착했다. 배는 船齡(선령)이 50년은 돼 보였다.
 
 
  터키 治下에서 빛을 봤던 알바니아人
 
코소보 사태 당시 미군 폭격으로 부서진 베오그라드 국방부 청사.
  조용한 아침 안개 사이로 알바니아 제2의 도시 두레스港이 보였다. 두레스는 알바니아의 수도 「티라나」의 관문이다.
 
  배가 멈추자 제복을 입은 출입국관리 서너 명이 승선해 여권심사를 시작했다. 승객들이 미리 제출한 여권들 중 내 여권이 앞부분에 있었음에도 왠지 자꾸 뒤로 밀렸다.
 
  1시간을 기다려도 순서가 오지 않았다. 결국 100여 명의 승객이 모두 내리고 난 뒤 출입국 관리들은 내 여권이 비자가 필요한 북한여권 같다며 여럿이 함께 들여다보면서 수근거렸다.
 
  나는 『여권에 「Republic of Korea」라고 쓰여 있는 것은 남한이고, 북한은 「DPRK」로 쓴다』고 설명해 주었지만 관리들은 별 반응이 없었다. 『여권에 South란 말이 없다』는 말만 되풀이하는 그들을 설득하는 데 半(반) 시간이 걸렸다. 오랫동안 외부세계와 단절했던 나라여서 출입국관리들이 ROK가 뭔지 DPRK가 뭔지 알 수 없는 것이다. 황량한 부두에 내리니 먼저 내린 승객들은 모두 사라지고 나 혼자였다.
 
   두레스에서 수도 티라나까지는 포장도로를 차로 달려 약 40분 걸렸다. 티라나 시내에 들어서니 사람들은 많았지만 활력은 느낄 수 없었다. 거리에 서 있는 동상들이며 조형물, 그리고 건물에 그려진 벽화들에는 공산체제의 잔영이 남아 있었다.
 
  조그만 화로에 옥수수를 구워 파는 아주머니들의 얼굴에는 고달픔이 서려 있었다. 알바니아人은 약 800만 명으로 추산되는데 절반 이상이 국외에서 살고 있다. 세르비아 코소보 자치주에 약 200만 명, 마케도니아·그리스·이탈리아에 30만~40만 명씩이 있고, 나머지 수십만 명이 세계에 흩어져서 살고 있다.
 
  알바니아人들의 선조는 알바노이族으로 불리던 일리리안族이다. 이들은 발칸반도에서 가장 오래된 민족이다. 알바니아는 비잔틴제국에 이어 오스만 터키의 지배를 400여 년간 받으면서 이슬람화되었다.
 
  오스만 터키는 발칸반도의 대부분을 지배하면서 알바니아를 중점적으로 경영했다. 터키 왕실 친위대와 수도 콘스탄티노플 수비군을 알바니아 군대에서 차출해 갔다. 1623년까지 49명의 터키 총리 가운데 11명이 알바니아 출신이었다.
 
 
  40년 쇄국에 유럽 최빈국으로 전락
 
   알바니아는 터키의 충실한 속국으로 살면서 그 힘을 배경으로 같은 속국인 이웃 그리스를 박해하기도 하였다. 1912년 세르비아 몬테네그로와 불가리아가 힘을 합쳐 터키에 대항한 발칸전쟁 때도 알바니아는 뒷전에 머물렀다.
 
  1946년 집권한 공산 독재자 「호자」는 엄격한 스탈린주의를 견지하면서 유례 없는 폐쇄주의를 표방했다. 티토의 유고, 스탈린의 소련과 모택동의 중국공산당과만 교류했다. 대량숙청과 강권정치로 40년의 세월을 보내는 동안 알바니아는 유럽 최빈국으로 전락했다. 1985년 호자가 죽고서야 문호를 개방했고, 1992년 베리샤를 수반으로 하는 민주정부가 수립된 지 14년이 지났으나 舊체제의 늪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티라나 시내의 중심은 스칸데르베그 광장이다. 15세기 터키 지배하에서 알바니아 사람으로 터키군 장군이 됐고, 후에 터키에 대항해 싸운 역사적 인물이 스칸데르베그다. 그의 동상이 있는 광장 북쪽에 1981년에 개관한 국립 역사박물관이 있다.
 
  박물관 2층에는 공산당 40년 독재의 잔학상을 보여 주는 전시실이 있다. 호자 독재에 숙청당해 죽거나 행방불명된 수만 명의 이름이 새겨진 동판이 있다. 기록에 의하면 정치범 숙청은 투옥 1만7900명, 학살 5157명, 추방 3만838명에 달한다.
 
 
  공산당 독재의 흔적
 
티라나의 리니아 공원에서 쉬고 있는 엘리라 가족.
  舊공산주의 국가에서는 하나같이 시민들이 정부를 두려워하고 관리들을 무서워한다. 정보정치와 비밀경찰의 감시를 받는 환경에 길들여졌기 때문이다. 티라나 시내 거리 곳곳에서 경찰에 단속받는 시민들은 머리를 조아리고 굽실굽실한다. 높은 사람이 지나갈 땐 경찰들이 이리 뛰고 저리 뛰고 교통을 차단하여 불편을 주지만 시민들은 별 불평이 없다.
 
  시내 중심을 흐르는 이심 강가에 있는 리니아 공원은 티라나 시민들의 안식처이다. 공원을 지나다가 한 가족을 만났다. 세 살배기 아들과 여동생과 함께 나들이를 나온 30代 중반쯤 돼보이는 엘리라 가족이었다. 그녀는 영어를 잘했다. 그녀는 『개방 이후 살기가 힘들어 이탈리아에 가서 3년간 일하다가 얼마 전에 돌아왔다』며 『티라나 생활이 어렵기는 하지만 마음은 편하다』고 했다. 『이탈리아에서는 알바니아 사람들을 차별해 마음고생을 했으나 고향에 오니 역시 좋다』는 얘기였다. 그녀는 대학교수로 있으면서 月 300유로(韓貨 35만원)를 받아 남편 월급을 합해 어려움 없이 살고 있다고 했다. 알바니아는 개혁·개방을 한다지만 관리들의 부정부패가 심하여 국민들이 식상해하고 있다는 말도 했다.
 
  의외로 영어를 잘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개방 이후 너도 나도 밖으로 나가 영어공부를 열심히 한 덕이다.
 
  알바니아를 벗어나기는 쉽지 않았다. 이웃 나라들이 알바니아를 환영하지 않는 것이다. 마케도니아나 코소보 등 동부 내륙으로 떠나는 교통은 오로지 밤새도록 산악도로를 달려 아침에 내려 주는 열악한 야간 버스뿐이다. 북쪽 해안을 따라 몬테네그로로 겨우 빠져나갔는데 국경도시 슈코다까지 2시간 미니버스로 간 후 택시로 바꿔 타고 국경을 넘어야 했다.
 
 
  인구 65만의 최연소 독립국 몬테네그로
 
   이탈리아 어원의 「몬테네그로(Monte Negro)」라는 나라 이름은 중세 베네치아 왕국의 지배를 받을 때 유래한 이름이다. 현지 사람들은 「검은 산」이라는 뜻의 「츠르나 고라」라고 한다. 산악이 험준해 깊은 계곡에 비친 산들이 검게 보인다는 의미이다.
 
  1992년 1월 유고연방공화국의 여타 공화국들이 제각각 독립을 선포했을 때 몬테네그로는 연방에 잔류, 세르비아 공화국과 함께 新유고연방을 수립했다.
 
  세르비아가 보스니아 內戰과 코소보사태에 인종청소를 하는 등 국제사회로부터 고립되고 경제제재를 받자 같은 연방국가인 몬테네그로는 경제적 어려움을 겪게 됐고, 결국은 독립의 길로 들어서게 되었다. 발칸반도의 갈등 재연을 우려한 EU(유럽연합) 및 미국의 반대로 2003년 베오그라드 협약을 통해 외교와 국방만을 묶는 「세르비아-몬테네그로 국가연합」 기간을 거치기는 했지만 몬테네그로는 2006년 6월3일 평화적 독립을 이루었다. 인구 65만 명의 세계 최연소 독립국이 된 것이다. 세르비아와 같은 문화·종교·언어적 정체성을 가졌음에도 결별을 선언했다.
 
內戰 때 유고연방군의 포격으로 폐허가 된 사라예보 관청.
  아드리아 해안에서 발칸 내륙 산간지방의 보스니아 수도 사라예보까지는 274km의 산길이었다. 손들면 아무데나 서는 완행버스로 7시간이나 걸렸다. 이슬람 나라에 왔구나, 하고 느낀 것은 점심시간이 되어 양고기 바비큐 연기가 자욱한 한 휴게소에 내리면서였다. 작은 물레방아 축에 양고기를 통째로 꿰어서 숯불에 굽는다. 양고기 조각을 주먹보다 큰 식빵 속에 넣고 소스를 뿌려 준다. 우리 돈으로 3000원 정도. 양고기 바비큐 샌드위치 맛은 일품이었다.
 
  사라예보까지 동행한 젊은이 세 사람과 친해져 말동무가 되었다.
 
  內戰 시작 3일 전 여덟 살 나이에 오스트리아로 피란했다는 옆자리의 젊은이는 세르비아계 청년으로 크리스천이었다. 외모가 출중하고 영어가 매끄러웠다. 그는 지금 런던에 정착하여 살고 있으며 고향 사라예보에 있는 어머니를 보러 가는 중이었다. 스웨덴에 정착한 뒷좌석의 무슬림 두 젊은이는 고향의 친구를 찾아가는 중이었다.
 
 
  보스니아 內戰 中 무슬림 20만 사망
 
   內戰을 피해 탈출한 사람들은 호주·미국 등지에 정착했으나 남아 있던 사람들의 희생은 컸다. 보스니아 內戰 동안 약 20만 명이 죽었다. 대부분이 세르비아의 인종청소 대상이었던 무슬림들이었다고 한다.
 
  차창 밖으로 새로 조성된 공동묘지들이 종종 눈에 띄었다. 모두 內戰 때 희생된 사람들의 무덤이라고 했다. 도로변에는 이따금 화환을 걸쳐 놓은 돌무지들이 보였는데 희생자들의 숨진 현장을 표시해 놓은 것이었다.
 
  사라예보로 가는 중간에 헤르체고비나의 수도인 「모스타르」라는 중세도시가 있다. 보스니아 內戰 당시 최대 격전지 중 하나였다. 인구 20만의 이 도시는 이슬람과 크리스천이 선을 긋고 사는 대표적인 도시이다.
 
  로마시대의 유적도 있는 이 도시는 오스트리아 지배하에서는 세르비아 애국운동의 중심지였다. 제2차 세계대전 때는 네레트바江 하류 계곡에서 對獨(대독) 빨치산 활동이 벌어졌다.
 
  보스니아 內戰 이후 네레트바江을 중심으로 이슬람과 크리스천이 갈라져서 산다. 서쪽 크리스천 마을의 멀리 뒷산 꼭대기에는 대형 십자가를 세워 이 도시의 어디서나 볼 수 있다. 지금은 평온해 보이지만 정치적 충돌이 일어나면 종교분쟁은 언제라도 재연될 수 있는 불안한 도시이다.
 
  해질 무렵 사라예보에 도착했다. 인구 39만의 작은 도시다. 사라예보는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가 1907년 오스트리아에 합병되어 합스부르크家의 지배하에 있었을 때 이곳을 방문한 오스트리아 황태자 부부가 세르비아계 청년의 총탄에 암살되어 제1차 세계대전이 일어난 역사적 도시이다.
 
  1984년 동구권 최초로 동계 올림픽이 열렸다. 1995년 8월28일 세르비아軍의 사라예보 시장 박격포 공격으로 38명의 민간인이 사망하고 85명이 부상하자, 미군이 주도하는 나토가 공습을 단행했다.
 
 
  파란 눈, 금발의 무슬림들
 
북부 슬로베니아 류블랴나와 오스트리아 잘츠부르크 간 기차 驛舍.
  세르비아軍은 유엔 요원을 납치해서 나토가 공격할 만한 주요 표적에 결박하여 인간방패로 내세웠다. 정부건물과 공공건물에는 지금도 內戰 당시의 총탄자국이 그대로 남아 있다.
 
  버스터미널에서 전차로 갈아타고 유스호스텔을 찾아가는 동안 3人 1조로 된 검표원들이 올라와 차표검사를 했다. 검표원들의 싸늘한 눈초리와 냉랭한 태도는 팔에 붉은 완장만 안 둘렀지 영화에서 보던 소름끼치는 비밀경찰의 모습 그대로였다. 예약해 둔 舊시가지 유스호스텔 부근에 이르니 40代 후반쯤 돼 보이는 한 여인이 다가왔다.
 
  서툰 영어로 민박을 하란다. 1박에 10유로인데 자기 혼자 사는 집이라 깨끗하다며 팔짱을 끼었다. 『혼자냐』고 내게 묻더니 자기도 혼자 산다며 「프리우먼」임을 강조한다. 그러더니 내 볼에 키스까지 했다.
 
  아침 일찍 동네 뒷산에 오르니 한눈에 뾰족한 이슬람 사원 첨탑들이 열 개는 족히 들어온다. 한 이슬람 사원에 들어가 보았다. 뜰에는 무덤들로 가득 차 있다. 비석을 들여다보니 모두 1992년 內戰 때 죽은 무슬림들이다. 사원 안에는 신자들이 예배를 보고 있었다. 파란 눈의 금발 유럽인들이 코를 땅에 박고 엎드려 기도하는 모습이 매우 이채로웠다. 아시아·中東 무슬림들은 많이 보았지만 유럽 무슬림은 처음 보았다. 오스만 터키가 얼마나 큰 흔적을 남겼는지, 그리고 종교의 힘이 얼마나 무서운지를 다시 한 번 느꼈다.
 
 
  3명의 대통령이 8개월씩 돌아가며 통치
 
세르비아 수도 베오그라드의 중심에 있는 리퍼블릭 광장.
  사라예보에서 시내를 돌아보려고 택시를 탔다. 30代 초반으로 보이는 운전기사는 서툴기는 해도 영어를 할 줄 아는 사람이었다. 그는 內戰 이후 삶이 너무 고달프다며 젊은이들의 실업문제에 대해 매우 시니컬하게 비판했다.
 
  『공산주의에 물든 관리들은 먹고 사는 게 뭔지를 모른다. 한참 일해야 할 젊은이들이 대부분 실직자로 빈둥거리고 노는 실정이지만 정부는 이에 대한 대책을 내놓지 못하고 있다. 세 종파의 수장들이 돌아가면서 대통령을 하고 앉았으니 나라꼴이 말이 아니다.
 
  일하는 젊은이도 기껏해야 하루 10유로 정도 벌기가 힘들어 너도 나도 밖으로 나갈 생각만 한다. 느는 것은 주유소와 식당·호텔 같은 소모적 서비스업뿐이고, 돌아가던 공장이 멈춰 버려 희망이 보이지 않는다. 그래도 나는 택시라도 운전해서 좀 나은 편이다』
 
보스니아 산간 휴게소에 있는 양고기 바비큐 식당.
  보스니아의 경제는 매우 어렵다. 內戰 이후 국제사회가 보스니아의 경제재건을 위해 50억 달러를 지원하여 전후 年평균 25%의 경제성장을 이뤘다. 사회간접자본을 전쟁 前 수준으로 복구했으나 높은 실업률, 불리한 투자환경, 정부구조의 非효율성, 외국원조의 감소 등으로 근래 성장률이 매우 완만해졌다.
 
  실업률은 41%에 달한다. 경제활동이 없으니 稅收(세수)가 적고 정부재정은 빈약하다. 1인당 국민소득이 2000달러 내외 수준에 머무르고 있다. 게다가 EU 가입이 늦어지고 있어 국제사회의 관심과 외국의 투자가 줄고 있다.
 
  이슬람계 48%, 세르비아계 37%, 크로아티아계 14%인 이 나라의 정치구조는 복잡하다. 3명의 대통령이 있어 8개월씩 돌아가며 의장이 되어 연방정부의 외교·통상·교통·통신에 관한 결정권을 행사한다. 3인의 대통령은 보스니아계(이슬람)·크로아티아계(가톨릭)·세르비아계(러시아 정교)를 대표한다.
 
  8개 행정부서의 경우 장관·차관은 종파를 안배해 구성된다. 국회 하원도 각 계파가 14석씩 할당하여 42명으로 구성된다. 정당들이 정치를 하는 게 아니라 종교들이 「宗致(종치)」를 하는 것이다.
 
 
  사라져 버린 大세르비아의 꿈
 
   넓은 평원에 자리 잡은 베오그라드는 고풍스럽고 아름다웠다. 체코의 프라하나 헝가리의 부다페스트와 흡사했다. 인구 100만이 넘는 이 도시는 大세르비아 강국의 꿈을 키워 온 南슬라브 민족의 심장답게 기품이 엿보였다. 기원전 4세기경부터 성장한 이 도시는 발칸의 제 민족들이 각축한 중심지였다. 300여 년간 오스만 터키의 지배 아래 있었지만 다른 어느 지역보다 민족·종교·문화적 정체성을 잘 지켜 냈다.
 
  베오그라드는 제1차 세계대전 후 세르비아-크로아티아-슬로베니아 왕국의 수도가 되면서 급격히 발전했다. 고풍스런 舊시가지의 건물들은 대부분 이 시대에 지어졌다. 新시가지의 현대식 건물들은 제2차 세계대전 후 티토의 유고슬라비아 연방 때 건설된 것들이다.
 
  리퍼블릭 광장을 중심으로 길게 뻗은 舊시가지는 명동거리같이 인파로 북적였다. 도심의 북쪽에 「칼레메그단」 古城(고성)이 있다. 이 성벽에서 내려다보는 다뉴브江과 사바江의 전경은 일품이다. 두 강이 합류하여 흑해 쪽으로 도도히 흘러가는 장엄한 모습은 빈이나 부다페스트에서 본 다뉴브江과는 사뭇 달랐다.
 
  1980년 티토 사망 후 흔들리기 시작한 유고연방은 1989년 東유럽이 민주화하면서 붕괴가 예견됐다. 연방의 붕괴는 1987년 밀로셰비치가 집권하고 보스니아 내전과 코소보 사태가 일어나면서 가속화되었다. 밀로셰비치는 국제적 고립을 자초하면서 보스니아와 코소보의 독립을 막으려 했다. 19세기 중반 세르비아 청년 비밀결사조직이 일으킨 大세르비아주의 운동의 맥이 흐른다.
 
  大세르비아주의는 12세기 말부터 약 200년간 지속된 세르비아 왕국을 재현한다는 민족주의 운동이었다. 6~7세기경 북쪽의 카르파티안 산맥 일대에서 발칸 중부 일대로 이주 정착한 슬라브 민족들은 9세기경 비잔틴의 속국이 되었으나 1196년 「네마냐」 왕국으로 독립하여 大세르비아 왕국을 건설했다.
 
  스테판 두샨 왕(재위 1331~1355년) 때에는 오늘날의 보스니아 지방으로부터 남쪽의 에게海에 이르는 넓은 땅을 통치하면서 전성기를 누렸다. 그러나 南으로부터 북상한 오스만 터키軍과 1389년 코소보 평원 전투에 패하면서 5세기 간 터키의 속국이 되었다. 이후 汎(범)게르만 세력과 범슬라브 세력의 간섭으로 「大세르비아」의 꿈은 좌초했다.
 
  티토 사후 집권한 밀로셰비치는 솟아나는 민족갈등을 누르고 大세르비아 재건의 꿈을 재현코자 했으나 유고연방이 무너지면서 물거품이 되었다. 보스니아 코소보 사태까지 치르면서 지금은 모든 형제들을 잃고 말았다.
 
 
  미군 폭격 맞은 국방부 청사
 
  舊유고연방의 종주국 세르비아는 이제 새로운 살길을 모색하고 있다. 1990년대 초까지만 해도 시장경제로의 이행정도와 세계경제로의 편입, 일반 국민 생활수준 등에 있어 東유럽 국가 중 선두를 달리던 나라였으나 연방의 와해, 內戰과 서방의 경제제재, 국가 경제정책의 실패 등으로 1990년대에는 「잃어버린 10년」을 경험했다.
 
  옛날 유고연방 시절의 GDP는 50% 축소되었고, 실업률은 30%에 달했으며, 국민의 62%가 빈곤층으로 분류되었다. 2000년 10월 밀로셰비치 실각과 함께 등장한 新민주세력은 舊체제 세력의 저항과 개혁세력의 분열로 정쟁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으며, 사유화 외자유치 금융개혁은 지지부진하다.
 
  베오그라드 시내 국방부 청사는 1999년 코소보 사태 때 미군의 폭격을 맞아 크게 파손된 채 그대로 방치되어 있다. 세상이 바뀌어 親서방 민주정부가 들어섰지만 內戰 때 서방이 준 상처는 아물지 않고 있다.
 
  길 건너편 멀리서 부서진 건물 몇 커트를 카메라에 담고 있었는데 군복을 입은 초병이 달려 나와 제지했다. 『폐건물인 줄 알았다』고 했더니 초병은 미소를 띠면서 『눈으로 보고만 가야지 사진촬영은 안 된다』고 했다.
 
  베오그라드 大성당 앞뜰에서 예배를 마치고 나오는 한 50代 시민을 만나 벤치에서 얘기를 나누었다. 대학교수로 은퇴한 사람이었다. 코소보 얘기를 꺼냈더니 그는 의외로 『세르비아는 코소보를 미련 없이 버려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코소보에 대한 세르비아의 미련
 
크로아티아 공예품들. 오스트리아풍이 강하게 배어난다.
  『알바니아 사람들은 민족도 다르고 문화도 달라 끼고 있어 봐야 골치만 아프다. 지난 코소보 사태 이후 현지 알바니아人들이 세르비아人들을 박해해 지금은 모두 떠났다. 이미 베오그라드의 영향권에서 멀리 떠나 있어 독립한 거나 마찬가지다』
 
  그는 코소보가 세르비아 민족의 발상지이며 세르비아 정교의 성지라는 얘기에 주석을 달았다. 『세르비아 사람들은 북쪽의 카르파티안 지방에서 내려와 정착한 南슬라브 민족이며, 세르비아 정교는 그리스 정교에서 왔으니 발상지라는 말은 옳은 얘기가 아니다』고 했다. 다만 코소보에 대해 세르비아人들이 연연하는 것은 12세기 말부터 200년간 전성기를 누렸던 세르비아 네마냐 왕국이 코소보 지방에서 발흥했고, 그리스에서 받아들인 정교가 당시에 함께 번성해 역사적 정서가 남아 있기 때문이라고 했다.
 
  현재 인구 200만 정도 되는 코소보는 원래 세르비아 땅이었지만 코소보 평원 전투에서 오스만 터키에 패한 이후 알바니아 사람들이 대거 이주해 살면서 500여 년간 알바니아 땅이 됐었다. 1913년 터키가 물러간 뒤 다시 세르비아로 귀속되었다.
 
  코소보이 알바니아계 자치정부는 완전한 독립을 요구하고 있지만 세르비아는 「코소보의 특별자치지역 수립은 허용하지만 독립은 있을 수 없다」는 입장이다. 슬라브족의 세력권인 발칸반도에 발을 붙이려는 미국은 「코소보 완전독립」에 호의적이나 체첸과 소수민족 문제를 안고 있는 러시아와 중국은 반대 입장이다. 주변 발칸國들은 自國(자국)의 이해관계에 따라 그리스와 마케도니아는 반대, 크로아티아와 슬로베니아는 찬성 입장이다.
 
 
  세르비아의 맞수 크로아티아
 
   베오그라드에서 크로아티아의 수도 「자그레브」까지는 최근 西유럽 수준의 고속도로가 깔렸다. 4차선 고속도로는 독일·오스트리아·이탈리아 등 西유럽은 물론 체코·슬로바키아·헝가리 등 東유럽 도시들과 에게海의 이스탄불 테살로니카 같은 큰 도시들을 연결하는 발칸반도의 大동맥이다.
 
  사바 강변에 자리 잡은 인구 68만의 자그레브는 북부 발칸의 교통 요지이다. 오스트리아 헝가리제국의 오랜 지배 아래 있었던 영향으로 게르만적 문화요소가 많이 남아 있다. 크로아티아 사람들은 훤칠한 키에 옷을 세련되게 입었다. 한반도의 절반 남짓한 땅에 460만 인구가 산다.
 
  남쪽의 슬라브 민족이 비잔틴제국으로부터 동방정교를 받아들이고 키릴 문자를 쓰는 반면, 이들은 로마 가톨릭을 믿고 라틴 문자를 쓰고 있다. 유고연방 시절 크로아티아는 남부의 여타 연방공화국들보다 높은 문화수준을 향유하며 슬라브 민족주의를 주도한 세르비아와 발칸반도의 주도권을 놓고 경쟁해 왔다.
 
몬테네그로 휴양도시 울친에서 귀가버스를 기다리는 세르비아人들.
  제2차 세계대전 발발 후 독일 치하에 있을 때 크로아티아 괴뢰정부는 세르비아人들을 박해했다. 보스니아 內戰 때에는 세르비아 유고연방군이 크로아티아의 유적과 주요 도시들을 파괴했다. 양국은 늘 대립해 온 경쟁자 관계였다.
 
  유고연방의 대통령이었던 티토는 크로아티아 출신이다. 그는 모스크바 국제공산주의(코민테른) 서기국을 거쳐 크로아티아 공산당 서기장을 역임하고 제2차 세계대전 때에는 인민해방군 사령관으로 독일에 대항해 싸웠다.
 
  발칸반도와 유럽대륙의 중간에 위치한 크로아티아는 빠른 속도로 西歐 유럽국가에 접근하고 있다.
 
크로아티아의 항구도시인 두브로브니크의 舊시가지는 해안을 따라 형성돼 있다. 사진은 舊시가지의 해안 성벽.
  주변 발칸국들이 1인당 국민소득 2000달러 수준에 머무르는 데 비해 크로아티아는 8000달러를 상회하고 있다. 석유·화학공업이 크게 발전했고, 조선업은 세계 4위다. 동구권의 헝가리나 체코보다 앞서가고 있다. EU 가입과 국영기업 민영화로 시장경제를 가속화시켰다.
 
  크로아티아는 관광객으로 붐비는 나라이다. 연간 1000만 명의 관광객이 이 나라를 찾고 있으며, 이들로부터 벌어들이는 외화가 110억 달러에 달한다. 스위스 관광수입 163억 달러(2000년)에 비교된다. 이 나라 관광산업이 전체 GDP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24%에 달하고 있다. 관광산업이 전체 고용의 29%를 차지한다.
 
  1700km의 아드리아 해안은 침강해안으로 기복이 심한 해안을 따라 화강암의 바위산들이 솟아 있고, 1000여 개의 섬이 은하수처럼 뿌려져 있어 경관이 빼어나다. 띄엄띄엄 해안 산간계곡들에, 하얀 벽에 주황색 지붕을 한 집들이 보석처럼 박혀 있다. 마을을 잇는 해안도로는 이 보석들을 꿴 비단 실 같다.
 
  크로아티아 해안의 남쪽 끝 두브로브니크는 넘쳐나는 관광객을 주체하지 못하고 있었다.
 
 
  1등 달리는 발칸반도 최선진국 슬로베니아
 
   자그레브에서 슬로베니아의 수도 「류블랴나」까지 사바江을 따라 상류로 올라가는 기차로 1시간20분이 걸렸다. 인구 25만의 아담한 류블랴나는 중세 고성이 서 있는 시내 한복판의 언덕을 중심으로 퍼져 있다.
 
  가파른 언덕길을 걸어 고성에 오르면 류블랴나 시내가 한눈에 들어온다. 류블랴나는 「사랑스럽다」는 뜻이다. 유럽의 아담한 소도시들같이 정갈스럽고 오목조목 예뻤다. 성 안에 있는 기념품 가게의 젊고 예쁜 여점원은 슬로베니아가 시장경제로 잘 가고 있는 선진국임을 보여 주었다.
 
  목공예품의 문양과 조각이 러시아에서 본 것과 너무 닮아 관심을 보였더니, 슬라브 민족의 역사와 미술에 관해 해박한 지식으로 자세히 설명해 주었다. 관료주의에 찌든 舊사회주의 나라들의 상점 점원들과 전혀 달랐다. 나는 그녀의 친절에 감동되어 배낭에 넣을 자리가 없었음에도 값나가는 공예품 하나를 사지 않을 수 없었다.
 
  1인당 국민소득 1만6000달러의 슬로베니아는 인구 200만의 작은 나라이지만 EU와 NATO에 가입해 빠른 속도로 서구화되고 있다. 유럽대륙에 가까운 발칸반도 북쪽 끝에 위치해 정신적·문화적으로 라틴문화권에 가까워 남부 발칸지방 사람들과는 거리감이 크다.
 
  8세기 독일 프랑코 왕국 지배 때에 가톨릭으로 개종했다. 14세기 이후 제1차 세계대전까지 6세기 동안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家(1273~1918)의 지배가 이어지면서 발칸 여러 나라들 가운데 오스만 터키의 세력이 미치지 않았던 유일한 지역이다. 제1차 세계대전 때는 독일 동맹국이었으며 연합군에 가담한 슬라브 형제국 세르비아 몬테네그로와 전쟁을 치렀다.
 
  동구에서 민주화 바람이 불었을 때 제일 먼저 유고연방에 반기를 들어 연방해체의 주역이 되었다. 1991년 한때 內戰으로 인플레율이 250%에 달하는 혼란을 빚기도 했으나 곧 안정을 회복하여 최근 5~6%대의 꾸준한 경제성장을 기록하고 있다.
 
  알프스 동부 자락에 자리 잡은 슬로베니아는 국토의 절반이 산악이다. 류블랴나에서 오스트리아 국경을 넘으면서 아름다운 알프스 산세와 깊은 계곡을 흐르는 강이며, 한적한 농촌의 아름다운 풍경들, 그리고 기차 안 승객들의 모습은 모두 슬로베니아와 오스트리아는 오래 전부터 한 나라였음을 짐작케 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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