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누는 기업 ② 私財 110억원 기부한 千信一 세중나모여행사 회장

『기부를 하고 나니 만나는 사람마다 제 얼굴이 좋아졌다고 해요』

  • : 김용삼  dragon03@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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千信一
1943년 부산 출생. 경남高·고려大 정외과 졸업. 동양철관(주) 상무이사, 제철화학(주)·동해산업(주)·한국과산화공업(現 영우화학) 사장 역임. 現 대한레슬링협회장.
부자들의 기부는 늘 화제다. 370억 달러를 내놓은 워렌 버핏은 『내가 다른 시대에 태어났더라면 어쩌면 맹수의 점심거리가 되었을지도 모를 일이지 않은가』라고 했다. 2억7000만 달러를 기부한 빌 게이츠는 『가능한 한 더 빨리, 더 많이 돕겠다』고 했다.
 
  110억원대의 주식을 쾌척한 千信一(천신일·64) 세중나모여행 회장의 「기부 소감」을 들어 보자.
 
  『기부를 하고 나니까 만나는 사람마다 요즘 제 얼굴이 좋아졌다고 해요. 하루하루가 즐겁고 보람을 느낍니다』
 
  기분 좋다는 담백한 말밖에 없다. 「노블레스 오블리주」 같은 거창한 말은 입 밖에도 내지 않는다. 그래도 그런 큰돈을 선뜻 내놓은 계기는 있지 않았을까?
 
  『포스코를 설립하신 朴泰俊(박태준) 명예회장과 李健熙(이건희) 삼성 회장이 제게는 代父(대부) 같은 분들입니다. 이분들이 늘 「기업은 이익을 내야 하고, 이익은 환원해야 한다」고 말씀하셨죠. 2005년 7월 세중나모여행이 코스닥에 상장되는 과정에서 株價(주가)가 많이 뛰어 옳거니, 하고 결심하게 됐지요』
 
 
  포항工大에 땅 6만3000평 무상 기증
 
  千회장의 기부는 지난 20여 년간 조용히 이어져 왔다. 1985년 포항工大에 학교부지 6만3000평을 기증한 일이 있고 고려大와 포항工大, 국립중앙박물관 등에 10억원 이상을 내놓았다.
 
  『제가 1974년 제철화학(現 동양제철화학의 前身)을 설립했다가 규모가 너무 커져 개인적으로 감당 못 할 정도가 됐어요. 대우그룹에 회사를 팔아 포항에 땅 8만3000평을 샀습니다. 아파트를 지어볼까 생각했었죠. 그 무렵, 포스코가 포항工大 지을 땅을 찾다가 제 땅이 학교 부지로 적합하다며 팔라고 했어요. 그래서 8만3000평 중 2만 평은 유상 매각하고, 나머지 6만3000평은 조건 없이 기부한 겁니다』
 
  ─기부 때문에 아파트 사업을 포기하신 겁니까.
 
  『그래요. 그 땅 위치가 포항에서는 아파트 부지로 제일 좋은 지역이라는 평가를 받던 곳입니다. 주위에서 만류했지만 이왕 줄 바에야 깨끗하게 주자 마음먹고 그냥 기증했죠』
 
  千회장의 기업은 「세중나모여행」과 「세중정보기술」 등 12개의 관계사로 구성돼 있다. 최근 합병·상장된 세중나모여행은 자본금 80억원, 연매출 750억원 규모다. 세중 관계社의 전체 매출은 연간 1600억원 정도다.
 
  千회장의 이번 기부금은 모두 개인 재산이다. 자신이 최대株主(주주)로 있는 세중나모여행의 보유주식 가운데 3분의 1인 110만5000株, 금액으로 환산하면 110억원 정도다. 100만株를 한꺼번에 내놓으면 경영권 행사에 지장은 없을까.
 
  『별 지장 없습니다. 그런데 제가 좋은 일을 하면 株價가 많이 뛸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네요. 대주주가 주식을 많이 가져야 하는데, 지분이 줄어드니 주식시장엔 악재가 됐나 봐요. 하지만 실적이 더 좋아지면 회복되리라 봅니다』
 
2006년 10월15일 경기도 용인 세중옛돌박물관 개관 7주년 기념음악회. 千信一 회장은 이 음악회 막간을 이용해 110억원 대의 주식 기부를 발표했다.
 
  「朴在鴻 사장, 千信一 상무」 체제
 
  고려大 정외과를 졸업한 千회장은 1973년 동양철관공업 상무이사를 거쳐, 30代 초반이던 1974년 제철화학(주)을 설립했다. 한때 정치가를 꿈꾸기도 한 그는 尹天柱(윤천주·前 서울大 총장) 박사가 정계에 입문할 당시 국회 보좌관으로 의정활동을 도왔다.
 
  그러나 부인 전경자씨를 만나면서 인생이 달라진다. 정계에 진출하려던 꿈을 접고 대신 CEO의 길로 들어선 것이다. 당시 장인은 수도관을 생산하는 鋼管(강관) 회사인 「한국주철관」의 부사장이었다고 한다. 경쟁사인 동양철관이 부도가 나자 장인이 회사 인수 작업을 사위에게 맡겼다고 한다.
 
  인수 작업을 마무리 지은 千회장은 상무이사(공장장)가 되었다. 그의 나이 서른 무렵이었다. 사장은 고려大 동창이자 朴正熙(박정희) 대통령의 장조카인 朴在鴻(박재홍)씨가 맡게 된다. 대통령의 친인척을 사장으로 기용하면 아무래도 경영에 득이 될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렇게 해서 「朴在鴻 사장, 千信一 상무」 체제가 탄생한다.
 
  『당시 수도관 생산회사가 「한국주철관」과 「동양철관」 두 개밖에 없었는데, 이 두 회사가 결국 한 주인에게 갔으니 공급을 독점하는 상황이 됐습니다. 서울과 부산의 수도관 파이프 공급을 전부 우리가 했기 때문에 1년 만에 동양철관 인수자금을 다 갚을 정도로 이익이 컸죠』
 
  ─朴대통령이 뒤를 봐줘서 사업이 잘 된 것은 아닙니까.
 
  『朴在鴻씨 덕을 좀 본 것이 사실이지만, 그것은 부차적인 문제고 우리는 정말 열심히 일했습니다. 동양철관에서 흑자가 많이 나서 제가 朴在鴻 사장에게 「우리도 정치자금을 좀 내자」고 했어요. 그래서 朴在鴻씨가 朴대통령을 찾아가 「정치하는 데 보태 쓰시라」며 용돈을 드리니, 朴대통령이 「그 돈으로 일선장병 위문을 하라」고 해요. 그래서 군부대 위문하느라 전방 사단 안 가본 데 없이 다녀 봤습니다』
 
  ─정치에 미련은 없었나요.
 
  『5共이 막 시작될 무렵 국회의원 출마 기회가 있었습니다. 당시 제가 부산의 모 지역에 여당 의원으로 출마한다는 소문이 퍼지자 제 사무실로 숱한 사람들이 찾아와 청탁을 하는데 정신이 없더군요. 국회의원이 되려면 융자알선, 취업알선, 검찰사건의 청탁까지 들어줘야 하는 현실에 환멸을 느꼈습니다. 결국 한 달만에 출마를 접었어요. 그때 정말 판단을 잘한 것 같아요』
 
 
  朴泰俊 회장과 교분 쌓아
 
   千信一 회장은 동양철관(주) 상무로 있던 서른한 살 무렵 「제철화학」을 설립한다. 당시 강철로 된 수도관의 내면 부식을 막기 위해 콜타르 에나멜을 칠했는데, 전량 일본에 수입을 의존하고 있었다. 그는 콜타르 에나멜을 국산화하기 위해 회사를 차렸다.
 
  『동양철관 퇴직금과 장인에게 빌린 돈을 합쳐 제철화학을 설립했습니다. 회사가 포스코에서 원료를 공급받아 제품을 만드는 것이기에 포스코에 보답한다는 뜻에서 전체 주식의 35%를 장학재단에 기부하고 회사를 설립했어요. 또 이익금의 35%를 무조건 장학재단으로 되돌리도록 했죠. 그런 인연으로 朴泰俊 회장과 교분을 쌓았고, 그분이 저를 많이 도와주셨어요』
 
  ─朴泰俊 명예회장은 어떤 분인가요.
 
  『朴在鴻씨를 통해 알게 됐는데 기업인으로서, 인생의 선배로서 존경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하루는 포스코에 설치할 설비를 실은 배가 外港(외항)에 들어왔는데 태풍이 닥쳤어요. 朴회장은 비바람이 몰아치는 부두에 나가 무전기를 붙잡고 밤새도록 배가 무사히 입항할 수 있는지 상황을 체크하면서 직원들을 독려하더군요. 매사에 투명하고 원리원칙에 한 치도 어긋남이 없는 분이에요. 朴회장 같은 분이 한국의 지도자가 된 것은 우리나라에 큰 福입니다』
 
 
  여러 우물 파기
 
  그러나 제철화학이 계속 커지자 그는 매각을 결정한다. 왜일까.
 
  『포스코가 100만t, 300만t, 1000만t씩 공장을 계속 증설하는데, 제가 거기에 맞춰 공장 증설을 할 여력이 없었습니다. 한 번 증설하는 데 비용만 200억~300억원이 듭니다. 회사가 엄청나게 커지는 거야 좋지만 제가 운영하기에는 분에 넘친다고 생각했어요. 차라리 이걸 팔고 여력에 맞는 사업을 하자고 결심했죠』
 
  1977년 千회장의 손을 떠난 제철화학은 대우에서 포항제철, 거평그룹, 자산관리공사를 거쳐 동양화학으로 넘어갔고, 현재는 동양제철화학으로 문패를 바꿨다. 이 회사의 창업주인 千회장은 현재 동양제철화학의 社外(사외)이사로 적을 두고 있다.
 
  제철화학을 매각한 千회장은 이후 건설업·섬유업에 뛰어들었고, 1980년엔 「한국과산화공업」(現 영우화학)을 인수했다. 1982년에는 세중여행사를 설립, 여행업에 본격적으로 뛰어들었다. 세중여행은 지난 25년간 삼성·포스코 등 500여 개 기업을 대상으로 한 商用(상용) 여행시장에서 1위를 고수했고, 단 한 차례도 적자를 낸 적이 없다. 千회장의 설명이다.
 
  『1980년대 초 일본에 가보니 여행업이 상당히 발달해 있더군요. 한국에도 해외여행 물결이 닥치면 유망사업이 되겠다 싶어 여행사를 설립했어요』
 
  2005년 우리나라 해외 출국자가 1000만 명, 한국을 찾아온 관광객이 600만 명을 넘어섰다. 국민 5명 중 1명이 해외여행을 할 정도로 여행 산업이 호항을 맞았건만 千회장은 『우리 여행업계는 지금 절박한 상황에 처했다』고 했다.
 
  『국내에 여행사가 1만 개나 난립해 창업과 폐업이 반복되고, 과당경쟁으로 적자생존 게임이 벌어지고 있어요. 저는 「고객에게 질 좋은 서비스를 하고 제 값을 받아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업계 현실은 그렇지 못해요. 동남아 4박5일 패키지 프로그램이 29만원짜리가 있습니다. 결국 고객들을 현지에서 쇼핑시켜 커미션으로 적자를 메우다 보니 여행은 없고 쇼핑만 있는 셈이죠』
 
  「한국 여행문화의 문제점이 뭐냐」고 물으니 단번에 답이 나왔다.
 
  『예약문화가 없다는 겁니다. 주말에 해외에 나가는 스케줄을 그 주에 결정하는 사례가 빈번하고, 예약했다가 취소하기를 밥먹듯 해요. 이런 문제 때문에 여행사와 항공사들이 골병듭니다』
 
  그동안 千회장이 걸어온 사업의 길은 동양철관 경영, 제철화학 설립, 한국과산화공업 경영, 건설업, 섬유무역, 여행사 창업, 항운회사 운영, 정보기술, 컨설팅, 게임산업 등 현란하기 그지없다.
 
  대표적인 장치산업이자 굴뚝산업인 철관제조, 화학분야에서 느닷없이 서비스업인 여행업에 뛰어드는가 하면, IT 사업에 진출하는 등 서로 관련이 없는 분야를 무시로 넘나드는 「여러 우물 파기」의 연속이었다.
 
2004년 3월 문화관광부 이창동 장관으로부터 체육훈장 맹호장을 받고 있는 千信一 회장.
 
  IT 사업에 진출
 
  千회장은 1993년 세중정보기술을 설립, IT 사업에 진출했다. 그러나 IT 진출 代價를 톡톡히 치렀다. 수많은 시간과 비용을 투자해 소프트웨어를 개발해 놓으면 특허권 침해 혐의로 민·형사 소송을 당했고, 애써 기른 인력을 경쟁사에게 빼앗겼다. IT업계의 고질적인 병폐였다. 회사 경영은 날로 어려워지고 그나마 이익이 많이 나는 세중여행에서 돈을 끌어다 세중정보기술 직원들의 월급을 주는 형편이었다.
 
  『하루는 세중정보기술 직원들 월급날 경리담당 임원이 출근을 안 해요. 간신히 전화 연락이 되자 이 친구가 「회장님, 그동안 투자한 돈은 잊어버리시고, 이제 세중정보기술은 그만 접으시죠」 하는 겁니다. 이런 우여곡절 끝에 지금은 1년에 25억원 정도 이익을 내는 회사가 됐습니다』
 
  2002년 千회장이 마이크로소프트社로부터 따낸 가정용 게임기 「X박스」 국내 공급권은 큰 화제가 됐다. 그러나 애착을 가지고 도전했던 게임사업에서 큰 손해를 봤다.
 
  그는 실패 이유를 마이크로소프트社 제품이 소니보다 1년 늦게 출시되어 시장 선점이 늦었고, 게임 소프트웨어가 동양인들의 문화에 잘 맞지 않은 점을 들었다. 이 와중에 IT 거품이 꺼지면서 내리막길을 걸었다. 당시 기분을 묻자 『나는 실패한 것은 비교적 빨리 잊어버리려고 노력하는 성격』이라고 답했다.
 
 
  『일확천금에 눈먼 젊은이 너무 많아』
 
경기도 용인에 세운 세중옛돌박물관에는 千회장이 20여 년 동안 국내외에서 모은 석물 6000여 점이 전시되어 있다. 千회장은 일본에 유출되는 옛 석물을 보고 화가 나서 이를 모으게 됐다고 한다.
  ─우리나라 정보통신 기술이 세계 최고 수준이라고 하는데 실제 사업을 하시는 입장에서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좋은 원천기술은 상당부분 외국 회사들이 가지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오랜 시간을 들여 사람을 키우려 하기보다는 다른 회사에서 키운 사람을 빼가는 풍토가 만연해 있어요. 스카우트하는 것이 비용도 적게 들고 쉬우니까 자꾸 이런 일이 반복되는 겁니다. 젊은이들 중에는 일확천금에 눈이 어두운 사람이 너무 많은 것이 문제라고 봐요』
 
  千회장은 2005년 7월 외견상 아무 연관이 없는 여행사와 IT 회사를 합병, 상장했다. 우량 여행사와 어려운 IT社의 합병은 재계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그러나 합병의 진짜 속뜻은 사실 직원들을 위한 것이었다. 세중나모는 2000년 홈페이지 제작 소프트웨어인 「나모웹에디터」를 개발, 코스탁 시장에 상장했다. 벤처 열풍이 불면서 한 株(주)당 가격이 12만원까지 치솟았으나 거품이 꺼지면서 2000원대로 곤두박질쳤다. 직원들 대부분이 적게는 5000만원에서 많게는 2억원이 넘게 빚을 지게 됐다.
 
  『생각해 보세요. 직원들이 평균 1억원이 넘는 부채를 지고 있는 상황에서 무슨 아이디어가 나오고, 일이 손에 잡히겠습니까. 그래서 우량기업인 세중여행과 합병을 통해 직원들을 돕기로 한 것입니다』
 
  합병 당시 주식은 3000원. 이후 1만8300원까지 올라 직원들의 부채문제를 말끔히 해결했다고 한다. 일부 직원은 수천만원에서 수억원의 차익을 거뒀다.
 
 
  李健熙 회장과의 콤비 플레이
 
   李健熙 삼성 회장과의 인연은 레슬링으로 맺어졌다고 한다. 李회장이 1982년 대한레슬링협회장을 맡으면서 그를 국제담당이사로 추천했고, 1996년 李회장이 IOC 위원이 되면서 자연스레 레슬링협회장 자리를 이어받았다.
 
  千회장에게 「레슬링이란 무엇이냐」고 묻자 『아무런 도구나 기구 없이 맨몸으로 땀 흘리는 만큼 성과가 나오는 신사적이고 정직한 운동』이라고 답했다.
 
  李健熙 회장은 레슬링계의 「정신적 지주」이고, 千회장은 「행동대장」이란 말이 체육계에서 돌고 있다. 李健熙·千信一 「콤비 플레이」는 레슬링협회를 맡아 올림픽 7회 연속 金메달 획득이라는 금자탑을 쌓았다.
 
  千회장은 올림픽 7회 연속 금메달 획득과 체육발전에 이바지한 공로로 2004년 체육훈장 맹호장과 대한민국 체육상을 받았다. 그러나 그는 『상은 제가 받았지만 한국 레슬링은 李健熙 회장 덕분에 세계 수준으로 오르게 된 것』이라며 功을 돌렸다.
 
  『레슬링협회 연간 예산이 20억원인데, 李회장께서 대부분을 지원해 주시고 제가 부족한 일부를, 국민체육진흥공단에서 일부를 지원받아 운영하고 있습니다. 금메달을 따면 지급하는 포상금은 李회장께서 별도로 주고 있어요』
 
  千회장은 레슬링에 대한 李회장의 각별함을 이렇게 설명했다.
 
  『국내 레슬링 기술의 발전을 고민하던 李회장은 옛소련의 레슬링 金메달리스트들을 코치로 불러들여 지도를 맡겼습니다. 李회장은 옛소련 출신 코치들에게 우리 선수들이 올림픽에 나가 메달을 따면 인센티브를 주겠다고 약속, 선진 기술을 한국 선수들에게 전수하도록 했어요. 李회장은 지금 레슬링협회 명예회장을 맡고 있는데, 간혹 태릉을 방문해서 선수들을 격려합니다. 지금 李회장께서 대부분의 예산을 레슬링협회에 지원하고 있는데, 金메달을 계속 따면 지원금을 계속 올려 주겠다고 약속했어요. 레슬링협회도 기업경영과 비슷하게 인센티브제로 운영하는 거죠』
 
  ─가까이서 본 李健熙 회장은 어떤 분이던가요.
 
  『그분이 겉보기에 정이 없어 보이지만 정말 정이 많은 분입니다. 우리나라 진돗개를 영국 개(犬)품종협회인 캐널클럽에 애완견으로 정식 등록하는 데 애쓴 분이 李健熙 회장 아닙니까. 사소한 것에도 신경을 많이 쓰시죠. 그리고 아이디어가 끊임없이 솟아나는 분이에요』
 
  ─기업가 입장에서 李健熙 회장을 평하신다면.
 
  『그분은 「기업을 하면서 적자를 내면 범죄행위나 다름없다」는 말을 자주 합니다. 기업하는 사람은 무조건 이익을 내야 존재가치가 생긴다는 거죠』
 
  ─대부분의 대기업이 2세, 3세로의 경영권 승계 과정에서 어려움을 겪고 있고, 삼성도 예외는 아닌 상황인데요.
 
  『저는 주인 있는 기업이 주인 없는 기업보다 훨씬 이익을 많이 낸다고 생각합니다. 기업은 주인이 있어야 제대로 움직인다고 봐요』
 
 
  문화재에 대한 관심
 
  千회장은 문화재에 대한 사랑이 각별하다. 그는 2000년 7월 일본에 유출되거나, 전국 흩어져 있던 우리나라 옛 석물을 모아 경기도 용인에 「세중옛돌박물관」을 세웠다. 현재 이 박물관에는 千회장이 20여 년 동안 국내외에서 모은 석물 6000여 점이 전시되어 있다. 국내 최초이자 유일의 돌 전문 박물관이다.
 
  1978년 어느 날 인사동 골동품 가게를 지나다가 어느 일본인이 文人石(문인석)과 武人石(무인석), 그리고 石佛(석불)을 사기 위해 흥정하는 것을 보고 화가 나서 그 가게에 있던 27점의 석물을 통째로 산 것이 옛 돌을 모으게 된 계기였다고 한다.
 
  2001년에는 일본에 밀반출되었던 文人石과 武人石 등 문화재급 석물 70점을 일본인 소장자 구사카 마모루(日下守)씨로부터 환수해 국내에 들여왔다. 이 일로 千회장은 2002년 국민훈장 석류훈장을 받았다.
 
 
  『기업하기 좋은 환경을 만드는 지도자가 최고』
 
  ─지금까지 말씀을 들어 보니 포항의 땅을 기반으로 더 큰돈을 벌 수 있었고, 문화재 보호 같은 사업은 직접 챙기지 않아도 되었을 텐데, 너무 많은 일을 하시느라 돈 벌 기회를 놓친 것은 아닙니까.
 
  『(웃음) 사업하는 사람은 타고난 그릇이 있는 것 같아요. 큰 기업 하려면 인사문제를 냉정하게 해야 하는데, 나는 체질상 부정한 짓을 한 사람 외에는 부하직원에게 나가라는 소리를 못 해요. 큰 기업은 그렇게 하면 안 되거든요. 저는 이 정도 규모의 기업을 운영하도록 태어났나 봅니다』
 
  ─지금 우리나라는 정치 리더십이 국민이나, 기업하는 사람들의 수준을 따라오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평소 생각하시는 국가 지도자상에 대해서 말씀해 주시죠.
 
  『기업하는 사람이 기업하기 좋은 환경을 만들어 주는 사람이 지도자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지도자는 모름지기 국민들이 잘 살도록 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책무인데, 고용창출하고 이익 많이 내서 세금 많이 내는 존재가 바로 기업입니다. 그러니 기업이 장사 잘 하도록 도와주는 것이 지도자의 첫 번째 과업이라고 생각합니다』 ●
 
  사진 : 이태훈
 
 

  [千信一 회장의 기부 내역]
 
  -고려大 정경관 건립기금 및 박물관 발전기금 16만 株
  -고려大 교우회 10만 株
  -연세大 동문회 10만 株
  -포항工大 장학금 9만 株
  -국립중앙박물관회 4만5000株
  -한국민속박물관회 3만 株
  -청소년레슬링육성지원단 4만 株
  -청소년국제여름마을 한국협회 4만 株
  -세중문화재단 50만 株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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