孫世一
1935년 釜山 출생. 서울大 문리과대학 정치학과 졸업 후 美國 인디애나대학 저널리즘 스쿨, 日本 東京大 법학부 대학원에서 修學. 「思想界」·「新東亞」 편집장과 東亞日報 논설위원을 거쳐 1980년 「서울의 봄」 때 政界에 투신해, 11·14·15代 국회의원을 역임하는 동안 民韓黨 外交安保特委長, 서울시지부장, 民推協 상임운영위원, 民主黨 통일국제위원장, 國會通商産業委員長, 國民會議 정책위 의장, 원내총무, 전당대회 의장, 韓日議員聯盟 부회장 등을 역임했다. 주요 논문으로 「大韓民國臨時政府의 政治指導體系」, 「韓國戰爭勃發背景 연구」, 「金九의 民族主義」 등이 있고, 著書로 「李承晩과 金九」, 「人權과 民族主義」, 「韓國論爭史(編)」, 譯書로 「트루먼 回顧錄(上, 下)」, 「現代政治의 다섯 가지 思想」 등이 있다.
1935년 釜山 출생. 서울大 문리과대학 정치학과 졸업 후 美國 인디애나대학 저널리즘 스쿨, 日本 東京大 법학부 대학원에서 修學. 「思想界」·「新東亞」 편집장과 東亞日報 논설위원을 거쳐 1980년 「서울의 봄」 때 政界에 투신해, 11·14·15代 국회의원을 역임하는 동안 民韓黨 外交安保特委長, 서울시지부장, 民推協 상임운영위원, 民主黨 통일국제위원장, 國會通商産業委員長, 國民會議 정책위 의장, 원내총무, 전당대회 의장, 韓日議員聯盟 부회장 등을 역임했다. 주요 논문으로 「大韓民國臨時政府의 政治指導體系」, 「韓國戰爭勃發背景 연구」, 「金九의 民族主義」 등이 있고, 著書로 「李承晩과 金九」, 「人權과 民族主義」, 「韓國論爭史(編)」, 譯書로 「트루먼 回顧錄(上, 下)」, 「現代政治의 다섯 가지 思想」 등이 있다.
한국독립운동자들의 큰 기대 속에서 출범한 洛陽中國軍官學校 韓人특별반은 훈련생들의 관리를 두고 金九와 李靑天 사이에 알력이 빚어졌을 뿐만 아니라 日本의 강력한 항의로 말미암아 1期生 훈련에 끝나고 말았다. 金九는 自派 훈련생들을 南京의 중국군관학교에 입교시키고 이들을 주축으로 韓國特務隊獨立軍을 조직했다. 사람들은 그것을 「金九구락부」라고도 불렀다. 이와는 별도로 金九는 새로 응모해 오는 청년들을 수용하여 중국군관학교에 보내기 위한 예비교육을 실시할 學生訓練所를 설치했다.
1935년 7월에 5黨統合으로 民族革命黨이 결성되면서 臨時政府의 폐지를 주장하고 나오자, 金九는 臨時政府 옹호운동에 앞장섰다. 1935년 11월에 臨時政府에 복귀한 金九는 民族革命黨과 대결하기 위하여 韓國國民黨을 결성하고 그 외곽단체로 韓國國民黨 靑年團을 창설했다. 또한 金九는 廣東에 아들 金仁과 安恭根의 아들 安禹生을 파견하여 韓國靑年前衛團을 조직했다.
(1) 1기생으로 그친 洛陽軍官學校 韓人특별반
金九가 중국국민당의 지원을 받아 1934년 2월에 개설한 중국군관학교 낙양분교의 韓人특별반은 한국독립운동자들의 큰 기대의 대상이 되었다. 그것은 1월에 새로 구성된 임시정부 국무위원들의 「취직서사」에서 천명된 것과 같이 임박한 제국주의 일본과의 전면전 수행을 담당할 실질적인 군사력이 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러한 기대는 李靑天·李範奭·吳光鮮 등 한인특별반 교관들의 다음과 같은 훈화로도 짐작할 수 있다.
1, 2년 이내에 제2차 世界大戰 발발 기대
〈지금의 정세에서는 한국 민족만으로는 강적 일본 제국의 타도는 지난하므로 같은 압박 아래 있는 중국의 수뇌부와 우리 동지 사이에 제휴가 이루어져 중·한 합작으로 반일 항만의 운동을 일으켜 목적을 달성해야 한다. 앞으로 다가올 1935, 6년의 일본 제국의 국제적 위기는 반드시 제2차 세계대전을 발발시킬 것이다. 개전에 즈음하여 적국 일본 제국에 대적하고, 일본군의 후방 연락의 중요지대이며 동아시아 대륙과 일본 본토의 교량적 역할을 하는 한국과 남만주 지방에서 일본군 군사시설의 파괴, 고관의 암살, 교통통신기관 및 중요 건물 등의 폭파를 행하고, 노동자·농민 대중의 폭동을 유발시켜 그것을 지도하고, 중국군과 합동하여 그 전면적 지원 아래 숙원을 달성해야 한다. 그때에는 국외의 모든 민족이 단결하고 여러분들도 소집될 것이므로 즉시 응소할 수 있도록 모든 준비를 갖추어 놓아야 한다. 본교는 우리 한국 민족이 열망하는 한국 독립을 위하여 한국 혁명이 발발할 때에 긴요한 간부 양성을 목적으로 하여 설립된 것이다.〉1)
이처럼 이 무렵 중국에 있던 한국독립운동자들은 1, 2년 이내에 일본을 상대로 한 전면전이 발발할 것으로 전망하고 있었다. 그것은 金九도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실제로 3년 뒤인 1937년 7월7일에는 中·日전쟁이 발발했다.
개교하고 처음 맞은 3월1일에는 교관들과 학생들이 낙양분교 강당에 모여 3·1절 기념식을 거행했다. 이 자리에서 이청천은 다음과 같은 요지의 기념사를 했다.
『오늘은 한국 민족이 독립운동의 첫소리를 울린 날로서 잊어서는 안 될 기념일이다. 우리는 지난 날[1919년]의 오늘의 의기를 가지고 목적달성을 위해 적극적 활동을 하지 않으면 안 된다. 오늘은 이 자리에서 간단하게 식을 거행하는 데 그치지만 본국에서 성대하게 기념 축전을 거행할 날, 곧 한국 독립도 가까웠다고 믿는다』
이청천의 기념사에 이어 학생대표 李利興과 梁鐵山이 일치단결하여 한국 독립을 관철시키자는 연설을 한 다음 1분간 묵도를 하고 해산했다.2)
訓練生들에게 自己命令에 服從하라고 강조
9년 만에 다시 중국으로 건너온 어머니와 두 아들을 만나고 南京에 어머니의 거처를 마련한 金九는 4월 중순에 낙양군관학교로 갔다. 그는 훈련생 전원을 학교 뒷숲으로 소집하고 일장 연설을 했다. 그는 자신이 한국의 독립을 목적으로 30년 넘어 해외에서 활동해 왔음을 강조하고, 앞서 이청천 등 교관들이 했던 것과 같은 내용의 연설을 한 다음, 앞으로의 한국 혁명운동에 관해서는 자기의 의사를 존중하고 자기의 명령에 절대로 복종해야 된다고 엄중히 말했다. 훈련생들은 모두 金九의 이 말에 찬성했다. 그러나 이청천은 이때에 金九가 「자기의 명령에 절대 복종하라」고 훈련생들에게 한 말에 크게 분개했고, 이때부터 金九 그룹과 이청천派 사이의 반목이 격화되었다고 한다.3)
그러나 金九 그룹과 이청천派의 반목은 낙양군관학교 한인특별반 운영의 주도권 다툼 때문에 빚어지고 있었던 것만은 아니다. 그것은 이 무렵에 한국 對日전선통일동맹 주도로 추진되고 있던 단일新黨 결성운동과 깊이 관련된 것이었다.
1932년 11월에 독립운동단체들의 협의기구로 결성된 통일동맹은 그 결성 주동자였던 金奎植이 9개월 동안 미국을 방문하고 있던 기간뿐 아니라 그가 돌아오고 나서도 별다른 활동을 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1934년에 접어들면서 독립운동의 구심력을 강화해야 할 필요성을 느끼고, 3월1일부터 사흘 동안 남경에서 제2차 대표대회를 소집하게 되었다. 통일동맹의 이러한 움직임은 조국광복의 기회가 될 對日 전면전쟁이 임박했다는 국제정세 인식과 아울러, 중국 국민정부의 두터운 신임과 재정지원을 받고 있는 金九 그룹에 대한 대항에서 나온 것이었다.4) 움직임의 핵심인물은 義烈團의 金元鳳이었으나, 이청천도 적지않은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다. 이청천·洪冕熙(洪震)·申肅 등이 만주에서 결성했던 韓國獨立黨 대표들과, 남경에 있는 尹琦燮·申翼熙 등의 韓國革命黨 대표들은 1934년 2월25일 남경에서 新韓獨立黨을 결성하고, 즉시 통일동맹에 참가하여 단일신당 운동에 앞장서고 있었다.5) 이청천은 새로 결성된 신한독립당의 군사위원장이 되었다.6)
이러한 분위기는 낙양군관학교 한인특별반의 훈련생들 사이에도 어쩔 수 없이 그대로 반영되었다. 金九는 자파 훈련생에게 기밀비를 별도로 지급했고,7) 이청천은 자신의 세력 강화를 위해 자파 인물인 高雲起(公震遠)를 중심으로 「한국군인회」라는 비밀결사를 조직했는데, 회원은 30명가량 되었다.8) 김원봉派 훈련생들은 그들대로 의열단의 노선에 따른 행동을 하고 있었을 것임은 말할 나위도 없다.
『同床異夢의 統一運動에는 참가 안 해』
통일동맹 제2차 대표회의는 한국독립당(金徹·金枓奉·宋秉祚), 신한독립당(홍진·윤기섭·신익희), 朝鮮革命黨(崔東旿), 의열단(金斌 외 2명) 등 각 단체대표 12명이 참석하여 대동단결체 조성방침案을 중심의제로 하여 논의를 진행했다. 이때에 통일동맹 중앙위원회는 1)종래와 같은 중앙간부만의 기관으로 하지 말고 가맹단체들로부터 다수 투사를 집결시켜 적극적 공작을 전개하거나, 또는 2)가맹단체는 물론 그밖의 각 혁명단체를 전부 해소하고 혁명동지 곧 단원을 통일동맹에 합류시켜 단일 대동맹을 조직할 것, 3)그러기 위해서는 혁명단체 밖에 있는 대한민국 임시정부도 폐지할 것의 세 가지를 결정할 필요가 있다고 제의했다. 이 제의를 놓고 토론을 거듭한 결과 이론이 있어서 가결은 보지 못했으나 대체로 그 취지는 양해되고, 각자 되도록 이에 따르기로 하되 일단 소속단체에서 협의해서 그 단체의 의견을 정리해 가지고 다시 통일동맹 간부회의를 열어 논의하기로 하고 일단 해산했다.9)
4월12일에는 통일동맹의 중앙집행위원회 상무위원 김두봉 외 5명의 연명으로 「가장 완전한 대동단결체 조성」에 관한 방안을 토의하기 위한 각 혁명단체 대표회의를 1935년 3월1일 이전에 소집할 것을 제의하면서, 이에 동의하는 단체는 대동단결체를 조성하는 방안과 대표회의에서 결정될 방안에 따라 성립될 단체의 주의·강령·정책 등에 관한 초안을 보내라고 통고했다. 이어 4월22일에는 이에 대한 각 단체의 의견을 9월1일까지 보내줄 것을 추가로 통고했다.10)
단일신당 조직에 가장 열성적이었던 것은 의열단의 김원봉派였다. 김원봉은 통일동맹에 가입하고 있지 않은 단체까지를 망라하여 단일신당을 조직함으로써 공산주의 이데올로기에 입각한 신당의 지도권을 장악할 수 있고, 그렇게 함으로써 중국 국민정부와의 관계에서 자기보다 우위에 있는 金九 그룹의 세력을 누를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 것이었다.11) 이러한 사정은 金九의 다음과 같은 술회로도 짐작할 수 있다.
〈이때에 우리 사회에서는 또다시 통일바람이 일어나 대일전선통일동맹의 발동으로 의논이 분분하였다. 하루는 의열단장 김원봉군이 특별면회를 청하기로 남경 秦淮(진회) 강가에서 밀회하였다. 김군이 나에게 물었다.
『현재 발동되는 통일운동에 부득불 참가하겠으니 선생도 동참하시는 것이 어떻습니까?』
『내 소견에는 통일의 대체는 동일하나, 동상이몽(同床異夢)으로 간파되니, 군의 소견은 어떠하오?』
『제가 통일운동에 참가하는 주요 목적은 중국인들에게 공산당이란 혐의를 면하고자 함이올시다』
『나는 그런 목적이 각기 다른 통일운동에는 참가하기를 원하지 않소』
나는 이렇게 말하면서 거절했다.〉12)
1927년 7월에 上海에서 의열단을 정비한 김원봉은 1929년 초에 北京으로 가서 安光泉과 함께 朝鮮共産黨再建同盟을 조직하고, 부설 교양기관으로 레닌주의정치학교를 설립했다. 그리고 동맹의 기관지로 「레닌주의」를 발간하여 청년들의 공산주의 이념 교육에 힘썼다. 1931년에 만주사변[9·18 전쟁]이 터지자 그는 본거지를 남경으로 옮겨 중국 국민정부와 접촉하는 한편 대일전선통일동맹의 결성을 주도했다.13) 이러한 김원봉을 金九는 공산주의자로 단정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安恭根은 중국인들에게 『의열단은 코민테른(국제공산당)으로부터 원조를 얻어 한국 혁명운동의 통일을 획책하고 있다』고 말하고 있었다고 한다.14)
金九가 신당에 참여하지 않기로 하자, 金九로부터 격려 연설을 듣고 만년필을 선물받기도 했던 의열단 청년들은 金九를 「민족운동의 적」이라면서 비난했다고 한다.15)
김원봉을 공산주의자라고 생각한 것은 金九만이 아니었다. 신당결성 운동에 참여하고 있던 민족주의자들도 대체로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당시 조선혁명당대표로 신당결성에 참여했던 金學奎는 김원봉이 통일을 주장한 것은 〈자기네 공산주의가 중국국민당에 나타나는 것이 불리한 까닭에 그것을 카무플라주하자는 것이었다〉고 적고 있다. 김학규는 金九가 신당결성에 참여하지 않은 이유도 〈통일이란 미명하에 공산주의인 김원봉 일파의 권모가 내포해 있으니 그렇게 불순한 공산주의자들과 통일운동하는 것은 결국 그들에게 기만, 이용만 당할 것이라는 것을 간파하였기 때문이라 한다〉고 했다.16)
中國政府와의 교섭창구였던 朴贊翊과 결별
金九가 1934년 8월에 자신이 입교시킨 낙양군관학교 한인특별반 훈련생 25명을 남경으로 철수시킨 것은 위와 같은 여러 가지 상황을 종합해서 내린 판단에 따른 것이었다. 철수한 훈련생 가운데에는 郭樂園 여사가 두 손자와 함께 고국을 탈출할 때에 길안내를 했던 崔昌漢과 金九의 장남 金仁도 포함되어 있었다. 金九가 자파 훈련생들을 철수시킨 데 뒤이어 이청천·이범석·오광선 세 교관도 사직하고, 한인훈련생들은 중국인 훈련생 60명과 함께 제3대에 편입되어 중국인 교관의 교육을 받게 되었다.17)
때를 같이 하여 金九를 크게 상심하게 하는 일이 또 한 가지가 벌어졌다. 그것은 중국국민당과의 연락을 맡아서 수고해 온 朴贊翊과 결별하게 된 것이었다.18) 金九는 낙양군관학교 분교에 韓人훈련생들을 입교시킨 뒤에 중국 인사들을 만나느라고 편의상 金弘壹의 집에 두어 달 동안 머물렀다. 이청천과 박찬익으로부터 편지를 받은 것은 이 무렵이었다. 이청천의 편지는 교관직을 그만두고 조선혁명당 군사위원장으로 일하기로 했으므로 그렇게 알아 달라는 것이었고, 박찬익의 편지는 임시정부 관계 가족들의 생활안정에 관한 金九와의 의견차이를 거론하면서 불평을 털어놓은 것이었다.
金九는 두 편지를 김홍일에게 보이면서 실망을 감추지 않았다. 특히 박찬익의 편지에 큰 충격을 받았다. 金九는 밤새껏 생각한 끝에 이튿날 아침 안공근을 불렀다. 그는 안공근에게 앞으로는 중국정부나 국민당과의 연락업무를 박찬익 대신에 맡으라고 말했다. 그리고 김홍일에게는 그러한 사실을 중국 군정당국에 알리고 안공근을 소개해 달라고 부탁했다. 김홍일은 즉시 중국국민당 비서장과 군관학교 교육장에게 각각 만날 시간을 약속하고 金九와 안공근을 안내했다.19) 金九는 도장도 새로 새겼다는 것을 중국국민당의 연락 창구인 蕭錚(소쟁)에게 알리고, 앞으로는 새 도장을 지닌 안공근에게만 자금을 지급해 달라고 통보했다.20)
박찬익이 말한 임시정부 관계 가족들의 생활안정에 관한 의견차이란 가흥에 있는 李東寧과 嚴恒燮 가족의 생활비 보조 문제에 관한 것이었다. 金九는 그때까지 두 사람에게 매달 200원을 송금했었는데, 박찬익이 그만두고 안공근이 재정을 맡은 뒤로는 매달 120원으로 감액해서 보냈다. 이 무렵 이동녕은 폐결핵에 걸려 각혈을 하고 있었고, 엄항섭은 가족들의 병치다꺼리로 고생하고 있었다.21) 200元(원)이라는 돈이 결코 적은 액수가 아니었던 점을 감안할 때에, 박찬익의 불평은 金九를 격분시켰을 것이다.
韓國特務隊獨立軍 또는 「金九구락부」
金九는 낙양군관학교 분교에서 철수시킨 훈련생들 가운데에서 가장 신뢰할만한 사람들은 특무공작을 맡겨 각처로 내보내고, 나머지 훈련생들은 남경에 있는 중국육군군관학교 10기, 11기에 입학시켰다. 그러나 중국군관학교에 보낸 것은 일시적인 방편이었다. 金九는 이들을 집단적으로 수용하여 훈련시킨 다음 항일투쟁에 투입하고자 했다. 그리하여 1934년 12월 하순에 중국육군군관학교에 재학 중인 훈련생들을 중심으로 하여 한국특무대독립군을 조직했다. 본부는 남경성 안의 木匠營 高安里 1호에 두었는데, 이곳은 「金九구락부」라고도 불렸다.22) 그곳은 외부에서는 2층으로 보이나 실제로는 3층인 5칸 크기의 중국식 다세대 건물이었다. 金九는 그 건물의 한 칸을 임대한 것이었다.23)
한국특무대독립군의 조직취지는 〈첫째로 본 조직은 한국특무대독립군이라 칭하고, 군사적 무장과 수양을 목적으로 한다. 둘째로 조직 목적 또는 수령의 명령을 배반하고 다른 당파와 통교하여 동지를 적에게 파는 경우에는 혁명 반역자로서 처분한다. 셋째로 우리는 한국 혁명을 위해 전원 무장하고 일본 제국주의와 그 정책을 파괴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고, 군사적 조직을 완성한다〉는 것이었다.24)
한국특무대독립군은 金九의 리더십에 절대적으로 복종하는 개인조직의 성격이 강했다. 참모 安恭根, 비서 吳冕稙, 중대장 겸 조사부장 金東宇(본명 盧鍾均), 조사부원 安敬根 등 핵심 인물들은 모두 金九의 심복으로 활동해 온 사람들이었다. 본부에는 「東亞日報」, 「大阪每日新聞」, 「上海每日新聞」, 영자신문 등 국내외의 각종 신문을 비롯하여 「新東亞」, 「キンク”」 등 잡지류와 무기와 탄약 등이 비치되어 있었다. 金九는 대원들에게 각종 자료를 읽히고 정신교육을 하면서 대원들의 반일의식을 고취했다.25) 한국특무대독립군에서 훈련받은 청년들 가운데에는 기밀탐지의 임무를 띠고 국내로 파견된 사람도 있었다.26)
韓國獨立黨은 격론 끝에 不參선언
「가장 완전한 대동단결체 조성」을 위한 통일동맹 집행위원회의 제의서에 대해 찬부와 의견을 회신해 줄 것을 요망하면서 그 시한으로 통고했던 9월1일이 되도록 회답을 보내온 단체는 많지 않았다. 가맹단체들의 내부 의견이 쉽사리 정리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자 통일동맹은 9월2일 각 단체에 독촉장을 보내고 1935년 2월20일에 각 혁명단체대표회의를, 이어 2월25일에는 통일동맹 제3차 대표회를 남경에서 개최하기로 결정했다고 통보했다. 그러고 나서는 10월1일부로 기관지 「戰線」 제1호를 발행하여 「대동단결체 조성」의 필요성을 홍보했다.27) 「대동단결체 조성」이란 단일신당 결성을 뜻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협의기구에 지나지 않았던 통일동맹이 단일신당으로 변신하는 과정에는 주도권 장악을 위한 알력이 있게 마련이었고, 또 이데올로기의 대립에 따른 불신과 갈등이 불가피했다.
가장 심한 동요를 겪은 것은 임시정부의 실권을 장악하고 있던 한국독립당이었다. 한국독립당은 1934년 3월1일에 제2차 대표회가 열릴 무렵까지만 해도 「대동단결체 조성」을 촉구하고 있었으나, 막상 이 대회에서 임시정부 폐지론이 대두되자 당론이 흔들리게 된 것이었다. 임시정부가 폐지되면 상해 동포사회에서 누리고 있는 유리한 기반이 무너지게 되고 미주와 하와이 동포들의 지지도 통일신당으로 흡수될 것이었다. 그리고 현재의 지도부는 자연 도태될 운명에 봉착하게 될 것이었다.
한편 10월2일에 항주의 임시판공처에서 개원한 임시의정원은 성원이 되지 않아 한 달이나 유회하다가 30일과 31일 이틀 동안 열렸는데, 「大政方針」을 두고 장시간 토론을 벌였으나 아무런 결론 없이 폐원하고 말았다. 이때에 모인 의정원 의원 13명 가운데에는 통일신당 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있는 사람이 여럿 포함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때의 회의록에 〈30일 하오 7시 반에 다시 모여서 계속 개회하였다가 정회하고, 비공식회의에서 전 국무위원 金九가 서류와 회계에 대한 일체를 아직까지 완전히 인계치 아니하는 데 대하야 많은 토의가 있고…〉28)라고 기록되어 있는 것이 눈길을 끈다. 이들은 자신들의 정치적 운명에 관한 문제보다도 金九가 가지고 있는 자금에 더 관심이 컸던 것이다.
해가 바뀌어 통일동맹이 통보한 각 혁명단체 대표대회 날짜가 닷새 앞으로 박두한 1935년 2월15일부터 사흘 동안 한국독립당은 당론 결정을 위한 제7차 당대표대회를 항주에서 소집했다. 區會와 支會대표 17명이 참석한 이 회의는 임시정부 존폐 문제로 의견의 일치를 보지 못하고 논란을 벌인 끝에, 결국 신당참가 반대파(송병조·趙琬九·車利錫·朴昌世·金朋濬)가 중립파(梁起鐸·金思潗·朴敬淳·李世昌·文逸民·金弘敍)와 합세하여 찬성파(김두봉·李光濟·姜昌濟·劉振東·具益均)를 누르고 한국독립당의 해체 불가와 신당 불참가를 결의하고, 3월1일에 「제7차 대표대회 선언」을 발표하여 통일동맹이 소집한 각 혁명단체 대표회에 불참할 것을 선언했다.29)
〈본당은 5개성상을 경과하는 도중에서 항상 우리의 근본책인 대당조성에 노력하여 왔다.… 그러나 운동선상 각자의 모순과 결점과 집착은 변함이 없이 의연히 존재할 뿐 아니라 가일층 강화되어 전환할 여지가 보이지 않게 되니, 이는 일시의 苟合[구합: 분별없이 남의 말에 찬동함]으로 전철을 다시 밟아 뜻아닌 분규와 淆亂[효란: 뒤섞여 어지러움]하느니보다는 차라리 시간을 참아 성숙을 기다리는 것이 우리 운동선상의 利라고 보는 견해로서 지극천만한 유감이나마 그 회의에 참가를 중지한 소이이다.〉30)
독립운동자들 사이의 병폐가 되어 온 각자의 모순과 결점과 집착이 없어지기는커녕 오히려 심화되고 있는 현재의 상황에서 단일당 조직은 시기상조라는 것이었다.
한국독립당이 불참을 선언하자 통일동맹은 2월20일로 예정했던 각 혁명단체대표대회를 6월20일로 연기했다.
(2) 韓國特務隊獨立軍과 學生訓練所
1935년 들어 金九는 일본 수사기관의 집중적인 추적 속에서도 통일동맹파들의 임시정부 폐지책동을 저지하고 각지에서 응모해 오는 청년들을 훈련하고 관리하는 일에 바빴다. 일본 경찰의 다음과 같은 보고는 이때의 金九의 활동상황을 집약해서 설명해 준다.
〈의열단 및 그 밖의 각 단체의 金九일당에 대한 질시 반목은 더욱 격화되어, 앞에서 말한 신당수립 운동도 그 근원은 金九파에 대한 압박에서 연유한 사실을 명백히 간취할 수 있다.
이러한 주위의 적대시에도 불구하고 金九 일파는 이러한 종류의 단체[독립운동단체] 사이의 큰 세력의 위치를 잃지 않고, 중국 쪽의 보조금은 월액 5,000원이라고 한다. 그리고 아나키즘계에 속하는 흑색공포단을 장악하고 있어서 실행력이 가장 강하고 자금도 풍부하여, 해마다 많은 조선인 자제를 권유하여 중국군관학교에 유학시켜 군사교련을 실시하는 한편, 민족의식의 앙양에 힘을 기울여 졸업한 자들은 내지(일본)·조선·만주 각지로 보내어 기회 있을 때마다 테러행위를 실행하게 하고 또 기도하는 등 가장 무서운 단체이기 때문에, 현지의 각 기관은 金九 일당에 대한 수사와 경계에 전력을 기울이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31)
일본 수사당국이 金九의 소재를 파악하기 위하여 얼마나 혈안이 되어 있었는가를 짐작하게 하는 문장이다.
中國軍官學校 입학 위한 豫備敎育 실시
金九는 한국특무대독립군과는 별도의 조직으로 1935년 2월에 學生訓練所를 설치했다. 이 학생훈련소의 설치는 안공근의 건의에 따른 것이었다. 장소는 남경성 안 東關頭 32호의 중국식 단층건물 2동이었다. 이 훈련소는 중앙육군군관학교에 입교시키기 위해 각처에서 모집한 한인 청년들에게 예비교육을 실시할 목적으로 설립된 것으로서, 「特務隊豫備訓練所」 또는 「蒙藏訓練所」라고도 불렸다.32)
金九가 학생훈련소를 설치한 것은 낙양군관학교 분교의 한인특별반이 1회 졸업생만 내고 폐쇄되었기 때문이었다. 낙양군관학교 분교는 1935년 4월9일에 한인특별반 훈련생들을 모두 졸업시킨 다음 더 이상 한인훈련생들을 받지 않기로 한 것이었다. 1년 전 입교할 때에는 모두 92명이었으나, 金九의 명령으로 퇴교한 25명과 병으로 퇴교한 사람 등을 제외한 62명의 학생이 졸업했다.33) 金九는 김원봉·안공근·김홍일 등과 함께 졸업식에 참석했으나, 이청천과 이범석은 참석하지 않았다.34)
처음에 중국국민정부는 한인특별반 학생들이 졸업하면 그들을 「중한혁명군」이라는 이름 아래 별도로 在洛陽中國軍敎導隊로 편성하여 국민정부 휘하의 무장단체의 하나인 反滿抗日工作別動隊에 배속시키기로 했었다. 그러나 한인지도부의 분열로 한인특별반 학생들의 졸업 후 진로는 자신들의 소속 당파에 따라 갈라지게 되었다. 이청천과 김원봉 계열의 훈련생들은 남경으로 가서 軍政府學兵隊라는 이름으로 남경성 中華門[남문] 밖에 잠시 함께 대기하다가, 이청천 계열의 졸업생들은 신한독립당 산하의 靑年軍事幹部特別班으로 편입되었고, 김원봉 계열의 졸업생들은 1935년 7월에 결성된 민족혁명당에 흡수되었다.35)
낙양군관학교 한인특별반이 폐쇄된 것은 金九와 이청천의 알력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보다는 일본의 방해가 더 큰 원인이었다. 이 무렵에는 일본과 중국 사이에 친선공작이 본격적으로 진행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1935년 1월21일과 22일 이틀 동안 남경에서 열린 王兆銘 외교부장과 수마 야키치로(須磨彌吉郞) 남경주재 일본총영사 사이의 회담에서 1)排日 및 일화배척의 근절, 2)한인독립운동자들의 인도와 그 책동 방지, 3)제3국으로부터의 고문 및 교관의 초청, 무기수입, 자본수입의 중단과 그 분야에서의 일본과의 합작이라는 일본의 3개항 요구사항에 대해 중국 쪽이 긍정적 반응을 보인 것이었다.36)
日本總領事가 中國政府에 金九 체포 교섭
수마 총영사는 낙양군관학교 한인특별반 문제를 중국정부에 항의하고, 谷正倫 경비총사령에게 金九 체포 문제를 교섭했다.
『대역(大逆) 金九를 우리가 체포하려는데 입적(入籍)이니 무엇이니 딴 말을 해선 안 되오』
金九가 중국 국적을 취득했다는 등의 핑계로 자기네가 金九를 체포하는 것을 방해하지 말라는 것이었다.
『일본에서 고액의 현상금을 걸었는데, 金九를 내가 체포하면 그 상금을 내게 주시오』
곡정륜은 이러한 수마와의 교섭내용을 金九에게 알려 주면서 남경에서는 각별히 조심하라고 부탁했다. 이렇게 하여 낙양군관학교 한인특별반은 제1기 졸업생을 낸 뒤에 다시 수용하지 말라는 상부의 명령을 받았다는 것이다.37)
낙양군관학교 한인특별반의 1년 과정반에는 신체에 이상만 없으면 입학할 수 있었다. 그러나 다른 중국군관학교에서는 입학을 허락한다 하더라도 중국어는 말할 것도 없고 중학 졸업 이상의 학력이 있어야 했다. 金九는 각처에서 모집해 온 한인청년들을 중국군관학교에 입학할 수 있을 만한 실력을 갖추도록 훈련시키려고 한 것이었다.
학생훈련소 설치 사실은 대외적으로 철저하게 비밀에 부쳐졌다. 그리하여 한국특무대독립군 대원들조차도 학생훈련소의 무단출입이 금지되었고, 학생훈련소 훈련생들 역시 특무대독립군 본부에 마음대로 내왕하지 못했다.
학생훈련소에는 「朝鮮日報」, 「東亞日報」, 「大阪每日新聞」, 「大公報」 등의 신문들과 잡지류 및 각종 서적들이 비치되어 있었다. 훈련생들은 오전 7시에 일어나서 오후 10시에 취침했는데, 이들에게 실시된 예비교육은 일정한 수업시간이 편성되지 않았고, 학식이 있는 대원의 주도 아래 중국어·기하·대수 등의 자율학습을 했다.38) 훈련생의 지도감독은 김동우가 맡았고, 金九의 아들 金仁과 賀應武라는 안공근의 친척이 훈련생들과 합숙하면서 훈련생들의 일과를 관리했다.39)
金九와 金元鳳이 같이 單一大黨 만든다고 報道돼
金九 그룹이 반대하고 있는 상황에서 한국독립당마저 불참한다면 대동단결 조직은 아무런 실효를 기대할 수 없었다. 그리하여 김원봉을 비롯한 통일동맹 주동자들은 김두봉을 통하여 한국독립당 간부들을 설득하고 회유했다. 국내 신문에 다음과 같은 엉뚱한 기사가 보도된 것도 그러한 설득 내지 회유공작의 일환이었을 것이다.
〈모처착 정보에 의하면 해외에, 특히 상해·남경·북경 등지의 민족운동자와 공산주의자들이 최근에 이르러 대동단결을 하야 가지고 단일대당(單一大黨)을 조직하기로 되었다 한다. 곧 상해를 근거로 하고 있는 민족주의자로 직접행동파의 거두인 김구 일파와 공산주의적 색채가 농후한 의열단 수령 김원봉 일파가 최근에 이르러 합작을 하고 신한독립당의 수령 이청천과도 최근에 전기 2파가 합작을 하였다 한다. 그리하여 종래에는 민족주의자와 공산주의자가 각기 반목 질시하는 경향이 현저하던 것이 최근에 이르러 합동이 되고 또는 다소의 포옹되지 아니하던 민족당들도 모두 합동하야 단일대당을 조직하고 있는 것은 비상한 주목을 끌게 되었다. 그 까닭에 경무국에서는 각 파의 행동을 엄밀히 내사하기로 하고 상해 이시이 이타로(石射猪太郞) 총영사에게 민족 공산 등 각 파의 태도를 조사하여 보내도록 발첩을 하였다. 이 회보를 기다려 경무국으로서도 상해·남경·북경 등 각지에 근거를 둔 공산주의자와 민족주의자의 단일대당에 관한 대책을 세우리라 한다.〉40)
「모처착 정보」의 출처가 어디인지는 분명하지 않으나, 기사의 내용으로 보아서 단일신당 결성을 추진하는 쪽에서 흘린 정보였던 것이 틀림없다. 이 기사는 한달 뒤에 그대로 샌프란시스코의 「新韓民報」에 전재되었다. 「新韓民報」에는 이 기사 뒤에 다음과 같은 기사가 함께 실려 있어서 주목된다.
〈모처착 정보에 의하면 신한독립당의 군대양성계획은 이청천씨의 수중에서 실현되고 있다고 한다. 그리하야 종래에 사이가 좋지 않던 김구와 이청천도 근간에 대활동이 실현되어, 이청천은 이미 남경군관학교의 교관이 되어가지고 각지에서 군관생을 모집하야 군관학교에 입학 졸업케 한 후 각지에 파송하야 그 임무를 다하게 한다 하며, 이청천은 물론 김원봉과도 완전히 합일되었다고 한다.〉41)
이 기사로 미루어 앞의 기사도 이청천派에서 보낸 정보였던 것으로 여겨진다.
臨時議政院에 편지 보내
임시정부 폐지 문제로 독립운동자들 사이에 논란이 분분하자 金九는 임시정부를 적극적으로 옹호하고 나섰다. 낙양군관학교 한인특별반 운영에 힘을 기울이면서 독자적인 활동을 하는 동안 임시정부와는 소원해져 있었으나, 그렇다고 위기에 처한 임시정부를 팔장을 끼고 바라보고 있을 수만은 없었던 것이다. 그것은 자신이 심혈을 기울여 지켜온 임시정부에 복귀하는 계기도 될 수 있었을 것이다. 金九는 5월19일에 「臨時議政院諸公에게 告함」이라는 편지를 직접 써서 보냈다. 그는 이 편지에서 자신이 지금 진행하고 있는 활동이 임시정부에서 맡긴 임무라는 점을 강조했다.
〈九는 연전에 임시정부에서 특위(特委)의 임무를 봉승하여 그 지정범위 내에서 지금까지 능력이 미치는 대로는 충성을 다하여 사명을 욕되지 않도록 노력하는 바, 지금 전문에 의하면 아직 명실이 상부하지 않는 대당 조직의 미명을 가지고 임정 법인의 해소를 도모하는 인사들이 있다 하니 과연 그런가 아닌가. 이제까지는 우리 독립운동계에 대단체들과 정부라는 거짓이름을 가지고 나타났던 일까지 있었으나, 우리 임정같이 위대한 사적을 이룩한 것은 일찍이 견문하지 못했다. …〉
金九는 이봉창과 윤봉길의 의거도 임시정부의 업적임을 상기시키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동양 화난의 괴수인 일황을 꾸짖어 벌하고 그의 장수와 신하를 처형한 것이 우리의 신성한 임시정부이다. 한족의 피를 가지고 국권국토를 광복하려는 한인은 거개 임정을 誠心擁戴(성심 옹대)할 의무가 있다. 우리 정계에는 세상에 보기드문 악례가 있다. 자기 필요로 임정 직원이 되었다가도 개인의사에 불만이 있는 때에는 헌신짝처럼 벗어 던지고 반역을 꾀함이 한두 사람에 그치지 않았다. 지금 여러분이 九 역시 그런 無義無信輩(무의무신배)로 같이 간주하는가. 九는 비록 직임을 가지기는 불능하나 국민된 책임만은 銘心刻骨(명심각골)하고 모험분투한다. … 九는 일심으로 임무를 다하여 홀로 선열의 혼령을 위로하고 이것으로 임정의 책임을 다하고저 노력 중이다.…〉
金九는 자신은 결코 민족통일을 반대하는 것이 아니라 진정한 통일을 요망하고 있으나, 임시정부를 해체하는 것은 천만부당하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과거에 軍統[군사통일회의], 國大[국민대표대회] 등에서보다 질적·양적으로 확실한 신념이 생길 때까지는 임정에서 위임해 준 특무에 본의를 수행할 것을 미리 말하여 둔다. 전례에 비추어 우리의 금후 통일은 해외 몇 개 단체나 몇몇 인사의 책동으로만 넉넉지 않고 내외지를 통하여 전 민족의 대표적 의사로 되지 못하면 과거 연극이 도로 될까 염려한다. … 임정법인문제는 용이하게 提擧〔제거: 다룸〕함은 천만부당하다. …〉42)
이처럼 金九는 대일전선통일동맹이 주도한 통일운동은 1921년의 군사통일회의나 1923년의 국민대표대회 때와 마찬가지로 全민족의 통일된 의사를 반영한 진정한 통일운동체가 아니라고 매도했다.
國務委員 7명 중 5명이 사직해
金九의 이러한 경고성 편지에도 불구하고 한국독립당은 5월25일부터 사흘 동안 항주에서 임시대표대회를 열어 석 달 전의 제7차 대표대회의 결의를 번복하고 각 혁명단체대표회에 참석하기로 결의했다. 그것은 그동안 김두봉 등 신당 참여파들이 중립파들과 조소앙 등 반대파들을 집요하게 설득한 결과였다.43) 그러나 송병조, 차이석, 조완구, 이동녕, 李始榮, 김붕준 등은 극력 반대했다. 통일이란 미명 아래 공산주의자인 김원봉 일파의 권모가 내포되어 있으므로, 공산주의자들과 통일 운운하는 것은 결국 그들에게 기만 이용만 당하는 것이라는 생각에서였다.44) 그러나 반대파였던 조소앙·박창세 등도 찬성 쪽으로 바뀌어 한국독립당을 해체하고 신당결성에 참여하기로 결정되고, 당원 70여 명이 신당에 합류했다.45) 그리고 이사장 송병조를 비롯한 반대파들은 신당참여파들과 결별을 선언하고 임시정부를 사수하기로 결의했다.46)
이렇게 하여 1년 넘어 우여곡절을 겪은 신당조직 운동은 마침내 1935년 7월5일에 民族革命黨의 결성을 보게 되었다. 이때의 일을 金九는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그로부터 소위 5당 통일회의가 개최되니 의열단, 신한독립당, 조선혁명당, 한국독립당, 미주 대한인독립당이 통합하여 조선민족혁명당이 탄생하였다. 5당 통일 속에는 임시정부를 눈엣가시로 보는 의열단원 김두봉, 김약산[金若山: 김원봉] 등의 임시정부 취소운동이 극렬하였다. 당시 국무위원 김규식, 조소앙, 최동오, 송병조, 차이석, 양기탁, 柳東說(유동열) 일곱 사람 가운데 김규식, 조소앙, 최동오, 양기탁, 유동열 다섯 사람은 통일에 심취하여 임시정부 파괴에 무관심하였다. 이것을 본 김두봉은 임시 소재지인 항주에 가서 송병조, 차이석 양인을 보고, 『5당 통일이 되는 차제에 명패만 남은 임시정부를 존재케 할 필요가 없으니 취소하여 버리자』고 강경하게 주장하였으나, 송병조와 차이석 두 사람은 강경히 반대하였다. 국무위원 일곱 사람 가운데 다섯 사람이 직책을 내놓으니, 국무회의를 진행시킬 수가 없었다.〉47)
金九가 김두봉을 의열단원이라고 한 것은 착오이다. 김두봉은 한국독립당의 대표로 통일동맹의 신당결성 작업에 참가하고 있었다. 국무위원 다섯 사람은 따로따로 임시의정원에 사표를 제출하고 민족혁명당 결성작업에 참여했다. 조소앙은 사직을 하게 된 경위를 가장 자세하게 적었는데, 그는 이번의 신당 운동은 종래의 임시정부 방침이었다고 주장했다. 그러면서도 의정원 의원직은 사임하지 않았다. 그는 김규식과 김두봉과 함께 신당의 규약제정위원으로 선임되었다.48) 양기탁은 4월27일에, 김규식은 5월25일에, 조소앙은 6월19일에, 최동오는 각 혁명단체대표대회가 열리고 있던 6월26일에 각각 사표를 제출했다. 유동열의 사표제출 날짜는 확실하지 않다.49) 조소앙과 함께 한국독립당 대표로 참석한 양기탁은 신당 위원장에 내정되었고, 대일전선통일동맹 결성 때부터 주동적 역할을 했던 김규식은 미주 한인독립당 대표자격으로 참여했다. 최동오와 유동열은 만주에서 결성된 조선혁명당 대표였다.
「韓國民族革命黨」이냐 「朝鮮民族革命黨」이냐
6월 초순 들어 통일동맹 중앙 간부 등이 중국 국민정부 군정부 당국에 대하여 〈새로 조직되는 재중 한국인 독립운동단체의 행동은 종래와 같은 지리멸렬한 것이 아니라 하나의 통제 아래 원대한 이상을 향하여 매진하는 것으로서, 비단 한민족의 이익뿐만 아니라 나아가서는 중국 전체의 민중을 행복으로 이끌 것은 명백하다. 따라서 중국 정부에서는 상당한 원조를 해줄 것을 바란다〉는 청원서를 제출했다.50) 그것은 신당운동의 직접적인 동기가 임박한 대일 전면전을 앞두고 金九파에 맞서서 중국 국민정부의 지원을 기대한 데서 나온 것임을 말해 준다.
6월25일부터 28일까지 열린 신당창립 예비회의에 이어 6월28일부터 7월4일까지 신당창립 대표회가 열려, 신당의 黨名·黨議·黨綱·政策·黨章이 결정되었다.
가장 논란이 된 것은 당명 문제였다. 「민족혁명당」 앞에 「한국」이라는 국명을 붙일 것인지, 「조선」이라는 국명을 붙일 것인지를 두고 의견이 대립되었다. 의열단 쪽에서는 「조선」을 주장했고, 한국독립당 쪽에서는 「한국」을 주장하여 회의가 결렬될 위기에까지 몰렸다. 김두봉이 「조선」도 「한국」도 떼어 버리고 그냥 「민족혁명당」으로 하자고 중재안을 제안하여 그대로 채택되었다. 그리하여 중국 쪽에 대해서는 한국민족혁명당으로, 국내 민중에 대해서는 조선민족혁명당으로, 서양 여러 나라에 대해서는 Korean Revolution Association으로 쓰기로 했다.51)
신당창립대회에 대한 일본 검찰의 정보 보고서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포함되어 있어서 주목된다.
앞서 열렸던 신당창립 예비회의에서는 양기탁이 위원장으로 내정되어 있었으나, 코민테른에서 파견되어 이 회의를 이면에서 지도하고 있던 張權相이 『코민테른에서는 金九를 민족파 거두로 인정하고 있다』고 주장하면서, 金九를 위원장으로 선출하도록 노력했으나, 金九 쪽에서 응할 태세가 아니어서 위원장 자리는 당분간 결원으로 두기로 하고, 양기탁은 감찰부장으로 임명하게 되었다는 것이었다.52)
장권상이란 이 무렵 중국공산당에 가입하여 상해에서 활동하고 있던 張建相(장건상)53)을 지칭하는 것 같으나, 이러한 일본 검찰의 정보보고를 확인할 만한 다른 자료는 발견되지 않는다. 이 무렵 장건상은 의열단의 고문으로 활동하고 있었으므로 金九 문제를 두고 김원봉과 협의했을 가능성은 충분히 있다. 장건상의 권고설과는 관계없이 김원봉이 金九에게 당의 위원장과 군관학교의 최고지위를 주겠다면서 입당을 간청했다는 증언은 있다.54)
신당창립대회에서는 또한 11개의 결의안이 채택되었는데, 그 가운데에는 임시정부를 옹호하고(제1항), 임시정부의 헌법을 개정한다(제2항)는 항목이 포함되어 있었다. 그것은 임시정부 옹호파들의 주장을 반영한 것처럼 보이나, 임시정부의 헌법을 개정한다고 결의한 것은 이때에 시행되고 있던 임시약헌의 규정에 근거해서 합법적으로 임시정부의 기능을 정지시킬 수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일 것이다. 유일 독립당의 출현을 전제로 하고 1927년에 개정된 임시약헌은 「대한민국의 최고권력은 임시의정원이 이를 가짐. 단, 광복운동자의 대단결인 당이 완성된 때에는 국가의 최고 권력이 이 당에 있음」(제2조)이라고 규정되어 있고, 헌법 개정조항에서도 「광복운동자의 대단결인 당이 완성된 때에는 이 당에서 개정함」(제49조 제2항)이라고 되어 있었다.55) 그러므로 새로 결성되는 민족혁명당이 〈독립운동자의 대단결인 당〉이 될 것이므로 국가의 최고권력, 곧 임시정부의 권능도 자신들이 행사할 것이고, 그것에 필요한 개헌도 자신들이 할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金元鳳이 書記長으로 實權 장악
민족혁명당은 7월5일에 결당식을 거행했다. 결당식에서는 당의·당강 등을채택하고 중앙집행위원 15명과 후보위원 4명, 중앙검사위원 5명과 후보위원 1명을 선출했다. 중앙집행위원에는 김원봉·김두봉·김규식·이청천·최동오·윤기섭·조소앙·신익희 등이 망라되었고, 중앙집행위원장의 선출은 보류되었다. 양기탁과 홍진은 중앙검사위원으로 선출되었다.
이튿날 열린 제1차 중앙집행위원회에서는 당을 실제로 이끌어 갈 부서를 결정하고 그 책임자를 선정했는데, 김원봉은 당무를 총괄하고 예산 결산의 편성과 재정 수지를 관장하는 서기장으로 선임되었다. 김두봉은 조직부장, 최동오는 선전부장, 이청천은 군사부장, 김규식은 국내외 동포 문제를 담당할 국민부장, 윤기섭은 조련부장에 선정되었다. 조소앙과 신익희는 국민부 부원으로 선정되었다.
신당 결성에 참가한 각 단체들은 기존의 당원과 재산을 모두 민족혁명당에 인계하도록 되어 있었다. 그리하여 7월25일까지 인계가 완료되었는데, 그 내역은 이 무렵의 독립운동단체들의 실상을 짐작하게 하는 것이어서 주목할 만한 가치가 있다.
의열단은 그때까지 양성한 군관학교 훈련생 및 졸업자 100여 명과 군관학교 재학생 등을 포함한 단원 200여 명, 그리고 재산은 중국국민당 중앙당부로부터 매달 지급되는 월수 정액 3,000元(원), 한국독립당은 당원 70여 명과 인쇄기계 및 그밖의 비품, 월수 정액 600원을 인계한다고 했다. 이 600원의 월수 정액은 한국독립당 광동지부가 중국국민당 광동성당부로부터 받는 300원, 강소성당부로부터 받는 150원, 절강성 항주당부로부터 받는 150원을 말하는 것이었다. 신한독립당이 인계한 것은 군관학교 훈련생 및 졸업자 50여 명, 만주지방에 있는 당원들을 포함한 당원 600여 명, 월수 정액 500원이었다. 월수 정액은 중국국민당 중앙당부로부터 300원, 전 동북의용군 사령관 李杜(이두)로부터 받는 100원, 개인기부 100원이었다. 조선혁명당은 남만주 일대에 있는 당원 1,000여 명과 무기(장총·단총·기관총 등) 400여 정을 인계한다고 했고, 월수 정액은 불명이었다. 그리고 미국에 있는 대한독립당은, 당원은 200여 명이고 수입과 비품은 자세하지 않다고 했다.56)
「民主集權制」 政權樹立 표방
민족혁명당의 이념과 운동방향은 당의와 당강에 잘 표명되어 있다. 먼저 당의에서는 혁명적 수단으로 일본의 침략세력을 박멸하여 국토와 주권을 회복하고 〈정치·경제·교육의 균등을 기초로 한 진정한 민주공화국을 건설하여, 국민 전체의 생활의 평등을 확보하고, 나아가 세계 인류의 평등과 행복을 촉진한다〉고 하여 이 무렵 중국 관내 지역의 독립운동단체들이 일반적으로 지향하던 삼균주의를 기반으로 한 민주공화국 건설이 당의 기본노선임을 천명했다.
이어 당강에서는 독립한 뒤에 수립할 국가의 기본방향과 정책을 17개조로 제시했는데, 가장 주목되는 것은 「봉건세력 및 일체의 반혁명세력을 숙청하고, 그럼으로써 민주집권제의 정권을 수립한다」(제2항)고 하여, 민주집권주의에 의한 정권수립을 표방한 것이었다.57)
「민주집권」 또는 「민주집중제」란, 레닌이 볼셰비키黨 조직 활동의 원칙으로 제창한 이른바 민주적 중앙집권주의(democratic centralism)를 뜻하는 것이었다. 그것은 당원에 의한 민주적 선거에 따라 선출된 지도부를 중심으로 중앙집권주의적으로 당조직을 운영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스탈린 시대의 반대파에 대한 대량숙청도 바로 이 민주적 중앙집권주의의 이름으로 단행되었던 것은 두루 알려진 사실이다. 그리고 그러한 제도에 의한 정권이란 소비에트 체제를 뜻하는 것이었음은 말할 나위도 없다. 경제제도로는 토지는 국유화하여 농민에게 분급하고, 대규모의 생산기관과 독점적 기업은 국영으로 하며, 국민의 일체의 경제활동은 국가의 계획 아래 통제한다고 하여 사회주의 경제체제를 표방했다. 이러한 주장은 신당 창당에 참여한 다른 정당들의 강령에도 천명되어 있었다.
민족혁명당의 결성에 대해 동포사회의 지식인들은, 각 파의 독립운동단체들이 金九파의 전횡을 견제하고 자신들의 재정난을 타개하기 위하여 조선민족운동의 통일이라는 명분 아래 소련과 중국좌경혁명분자의 원조를 받고 있는 의열단과 합동하여 운동자금 마련을 기대하고 신당을 조직한 것이라고 분석했다. 그러나 가장 유력한 민족주의 세력인 金九파 및 국민회 등 在美 각종단체와 신당에 참여한 단체들의 간부이면서도 신당에 참여하지 않은 인사들의 반대도 만만치 않기 때문에 앞으로 신당과 金九 일파 사이에는 맹렬한 쟁투가 벌어지리라는 것이 그들의 전망이었다고 한다.58)
學生訓練所를 龍池山의 澄光寺로 옮겨
남경에서 신당결성 작업이 진행되고 있는 동안 金九는 학생훈련소 문제로 노심초사했다. 6월경이 되어 학생수가 30명가량 되자 장소가 협소하고 또 훈련소의 존재가 일본경찰에 알려지게 되었다. 그리하여 황급히 훈련소를 옮기기로 했다. 金九는 낙양과 그밖의 지역에 사람을 파견하고 또 자신이 직접 낙양을 시찰하고 장소를 물색한 끝에, 남경에서 100리쯤 떨어진 강소성 宜興縣 張渚鎭 龍池山에 있는 澄光寺(징광사)로 훈련소를 정하고 6월22일에 학생들을 버스에 분승시켜 그곳으로 옮겼다.
엄항섭과 학생 6명과 함께 징광사에 도착한 金九는 전날 먼저 도착해 있던 학생 10명도 같이 불러 모아 놓고 한 시간 동안 훈시를 했다. 金九는 이때에 치하포 사건 이야기를 학생들에게 들려주었다. 변복한 일본인을 보고 明成皇后를 살해한 왜놈일 것이라고 생각하고 죽일 결심을 했고, 그를 처치한 다음 집에 돌아와서 대기하다가 체포되어 해주감옥에 투옥되었다가 인천감옥으로 이송되었고, 사형선고를 받자 소문을 듣고 많은 사람들이 찾아왔던 일, 특히 江華島의 金周卿이 자신의 전 재산을 털어 석방운동을 벌였으나 끝내 실패하고 그 자신은 블라디보스토크로 도망치고, 자기는 탈옥했던 일 등을 자세히 이야기하고, 그 뒤의 일은 뒷날 이야기해 주겠다고 말했다.59)
金九의 이야기가 끝나자 엄항섭은 감동하고 있는 학생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여러분은 金九 선생의 훈시를 잘 지켜서 앞으로 한국독립을 위해 정성을 다하는 훌륭한 혁명가가 되기 바랍니다』
金九는 징광사에서 두세 밤 묵고 나서 학생들이 다 모이자 그곳을 떠났다.60)
학생훈련소 설립 초기에는 김동우가 대원들의 감독 책임을 맡고 있었으나, 징광사로 옮긴 뒤에는 엄항섭이 嘉興으로부터 와서 학생 총감독을 맡아 학생들과 함께 지냈다. 엄항섭은 金九의 자금지원이 줄어들자 이동녕과 함께 金九와 안공근에게 불만을 품고 있었고, 그 때문에 안공근은 이동녕과 엄항섭이 신당조직에 참가하는 것이 아닌가 의심하고 지원금을 중단하기까지 했었다.
1935년 6, 7월경부터 중국 국민정부는 매달 5,000원씩 지급하던 원조금을 2,500원 내지 3,000원으로 감액하여 金九도 활동자금이 넉넉지 못했다.61) 그러나 두 사람은 관망적 태도를 보이고 있을 뿐이었고, 엄항섭은 항주의 중국공안국 등에 취직운동을 해보았으나 뜻대로 되지 않았다. 그리하여 5월경에 金九에게 사정하여 매달 100여 원씩을 다시 지원받게 되었다.62)
7월 중순이 되어 金九는 다시 징광사를 방문했다. 이때에 그는 학생들에게 지난번 훈화의 후속편을 들려주었다. 그는 절에 오니까 옛날 생각이 난다면서 인천감옥을 탈옥하여 삼남지방을 방랑하던 끝에 마곡사에서 머리를 깎고 승려가 되었던 이야기를 자세히 했다. 이야기를 마치면서 金九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여러분은 부모 곁을 떠나 타향에서, 더구나 이와 같은 절간에서 생활하는 것이 여간 처량하지 않을 것이오. 한편으로 어쩌면 이러한 생활이 무의미한 것 같은 생각이 들지도 모르겠소. 그러나 이 모든 것이 조국광복을 위한 준비교육이기 때문에 열심히 공부해 주기 바라오. 아마 여러분도 긴 머리카락을 자를 때에는 매우 원통하고 슬픈 느낌이 들었겠지만, 이 역시 조국광복을 위한 것으로 생각해 주기 바라오』
金九는 사흘 동안 징광사에 묵으면서 주변상황을 둘러보고 나서 혼자서 남경으로 돌아갔다.63)
추석날 밤에 울음판 벌어지기도
金九는 이 해 추석을 징광사에 가서 훈련생들과 함께 지냈다. 북간도 용정의 은진중학 출신으로서 은진중학 교사 明熙朝의 감화를 받고 남경으로 가서 학생훈련소에 입소하여 훈련을 받았던 羅哲(본명 羅士行)은 이때의 일을 다음과 같이 회상했다.
『1935년 8월 추석날 밤이 아주 인상 깊게 기억에 남아 있습니다. 金九 선생을 비롯한 여러 독립운동 지도자들이 그날을 우리와 함께 지내려고 용지사(징광사)에 오셨지요. 그래서 중국의 추석음식인 월병(月餠)을 먹어 가면서, 밤이 새도록 여러 이야기를 나누었지요. 지나간 나라 일들을 되새기다가 그만 격앙하여 모두들 목을 놓고 통곡하는 바람에 큰 울음판이 벌어지기도 했지요. 또 이탈리아의 에티오피아 침공 가능성 등 국제적으로 세계전쟁이 다시 일어날 기미가 보인다 하여, 그렇게만 되면 우리도 독립할 가능성이 생긴다는 등의 세계정세 이야기도 많이 나누었고요. 또 金九 선생이 명성황후를 시해한 원수를 갚느라고 치하포에서 일인을 죽여 그 피를 마시던 이야기를 소상하게 해주시는 걸 듣기도 했지요』64)
학생훈련소 학생들은 문학에 재능이 있는 송몽규가 중심이 되어 300여 쪽에 이르는 등사판 잡지를 만들기도 했다. 金九는 이를 몹시 칭찬하면서 자신이 참여했던 신민회의 경험을 회상하여 대원들 모두가 「새로운 백성이 되어야 한다」는 뜻에서 잡지 이름을 「新民」이라고 지어 주었다.65)
그러나 징광사에서의 활동은 오래가지 못했다. 9월에 징광사와의 임대계약 기간이 만료됨에 따라 대원들은 다시 남경으로 돌아왔다. 먼저 엄항섭이 9월 초에 돌아오고, 이어 9월16일부터 18일까지 사흘 동안에 훈련생 27명이 3대로 나뉘어 철수했다. 일부 훈련생들은 목장영 고안리 1호 한국특무대독립군 본부에 수용되었으나, 대부분은 곽낙원 여사가 거처하는 八寶後街 23호의 집에서 합숙했다. 그러다가 훈련생 4명이 차례로 남경주재 일본총영사관 경찰에 체포되는 바람에 10월 초순에 전원이 남경 성내 藍旗街 8호로 다시 옮겼고, 곽낙원 여사도 다른 곳으로 거처를 옮겼다.66)
金九는 학생훈련소의 예비훈련이 어느 정도 진척되자 이들을 남경의 중앙육군군관학교에 입학시키기 위하여 국민정부와 교섭했다. 그러나 중국 정부의 입장과 일본의 집요한 압력 때문에 그것은 실현되기 어려운 일이었다. 金九는 차선책으로 학생훈련소 대원들을 중국기술학교에 입학시키려고 했으나 그것 또한 여의치 않았다.67) 그리하여 金九는 10월3일경과 10월25일경에 두 차례 학생들이 합숙하고 있는 곳을 방문하여 학생들을 군관학교에 입학시키지 못한 것에 대해 유감의 뜻을 표시하고, 학생들에게 15원에서 20원씩의 여비를 지급하여 해산시켰다. 이로써 학생훈련소는 사실상 폐쇄되었다.68)
金九는 다른 한편으로 특무대독립군 대원들에게 특무활동 지침을 하달하여 국내·만주·일본 등지로 파견했다. 그는 1935년 9월20일 무렵부터 11월14일까지 50여 일 동안 11차례에 걸쳐 19명의 대원을 상해·간도·국내로 파견했다. 그러고도 훈련생 9명이 남아 있었다.
臨時政府 옹호 캠페인 벌여
金九는 민족혁명당이 결성되자 임시정부를 적극적으로 옹호하면서 민족혁명당을 규탄하고 나섰다. 그는 광동 중산대학 한국인 학생들이 발행하는 「빛(光)」 7월호에 「임시정부에 대하여」라는 글을 기고했다.69) 이 글에서 金九는 〈임시정부를 구성하는 자연인에 대해서는 얼마든지 질책할 수 있으나 법인인 임시정부의 정부 자체에 대해서는 누구든지 손을 댈 수 없음을 정중히 언명한다〉고 하여 임시정부의 정통성을 강조하고, 신당결성 운동에 대해서는 〈과거 통일운동의 실패는 같은 자리에서 맹약하고 단체를 조직하면서, 조직한 뒤에는 표변하여 탈퇴하고 다시 신단체를 조직한다. 신단체를 조직하면 이를 제지하는 것이 당연함에도 불구하고 그것과 손잡고 일을 한다. 이것이 곧 지난날의 통일운동이었다〉70)고 비꼬았다.
이어 金九는 7월8일에 다시 「임시정부에 대하여」라는 장문의 글을 써서 샌프란시스코의 「新韓民報」에 보냈다. 金九는 이 글에서 먼저 〈지금 우리 운동계의 괴이한 현상이 너무나 함묵을 계속할 길 없어 귀보를 통하야 내외동포에게, 더욱 미주·하와이·멕시코 재류 동지 동포에게 간략한 말씀을 드리나이다〉라고 편지를 쓰게 된 동기를 밝힌 다음, 통일동맹의 통일론을 〈당치않은 국가론, 같잖은 혁명론〉이라고 신랄하게 비판했다.
〈九는 연래 환경관계로 모든 일에 참관이 없이 다만 일종 책임을 힘쓸 뿐이오 모든 것은 현명한 동지들께 ○○하심을 감사할 뿐입니다. 근일에 통일동맹으로서 국외 각 단체의 통일을 도모하는 바, 이 활동에 대하여 누구나 그 완전하게 자리가 잡히어 우리 민족적 광복운동의 총집중될 기본 역량이 되기를 충심으로 기대하지 않으리요. 유감이나마 당치 않은 국가론, 같잖은 혁명론, 투기적 과대평가가 임시정부 존폐 문제를 가지고 예전 연극을 거듭하려 하니, 진실로 가석한 일입니다. 더욱 냉정한 안목으로 원칙을 붙잡고 본의 아닌 자가말살의 후회를 없도록 할 이 때가 아닙니까. 이를 잘 살피는 이도 많지마는 현란한 관념으로 자가의혹을 면치 못하는 이도 없지 않은 사실인 까닭에 임시정부의 존재한 의의와 공적이며 통일의 진체와 현 운동자의 착오며 미주·하와이·멕시코 재류동포의 지난 날의 공로와 장래에 더욱 면려할 희망 등을 짧은 지면이나마 들어 말씀코자 하오니 힘써 이해하시기를 거듭 바랍니다.〉
『예전 연극으로 피의 臨時政府 역사 허물지 못해…』
「예전의 연극」이란 군사통일회의나 국민대표대회와 같은 움직임을 통한 임시정부 해체론을 지칭한 것이었다. 金九는 임시정부를 해체할 수 없는 이유로 이봉창과 윤봉길 등의 희생에 의해서 17년 동안이나 지켜온 〈피의 임시정부〉 역사의 중요성과 의의를 다음과 같이 강조했다.
〈임시정부는 나라가 망한 후 십여 년 동안 모든 열혈의 결정으로 누가 이론을 가졌거나 토론이 없이 내외 각지의 각개 계급이 두말없이 성립시킨 것이 아닙니까. 선뜻 들어 이는 우리 주권행사의 최고 집중체이며, 국토의 일편을 못 찾았으나 내외국인의 스스로 승인코 주저없는 한국민의 대표기관이고 적의 통치에 대립된 적체단체로 해석 없이 표명된 것이 아닙니까. 뿐 아니라 당시 우리 동포로서는 극소수를 제한 외에는 전국적으로 직접·간접, 명시·묵시로 일치하였던 사실을 누가 부인하겠습니까.
그 후로 다소간 여러 가지 운동이 그를 압도코저 하였으나 사실상 그만한 기초역량이 없으므로 자기네의 한 부인 연극만 지었던 것이 아닙니까. 비록 여러 사정이 처음과 같지 않아 임정의 진행이 부족한 것도 사실이나, 엄연한 정체가 계속하여 십칠년을 내려온 것이 어찌 우연한 일일까요. 이는 물을 것 없이 정체가 그런 정체인 까닭인 것입니다. 이런 고로 우리의 특수한 사명을 가진 이 정체는 비록 부인 명의뿐일지라도 그 중대함이 이러하거든 하물며 대다수의 국민의 마음속에 사라지지 않은 것이리까. …
민국 6, 7년 이래로 안팎 정세가 점점 핍박이 심하였으나 엄연히 지켜올 뿐 아니라 형세가 악렬할수록 운동은 더욱 맹렬하여, 십사년 일월 팔일과 사월 이십구일의 이봉창·윤봉길 양 의사의 탁절(卓絶)한 사업이 얼마나 찬란 조요(照耀)하였습니까. 광명하고 거룩한 피의 임시정부입니다. 역대의 이런 의사네들의 열혈이 어찌 사라지리까.〉
그러면서 그는 통일동맹이 주도하고 있는 통일론을 반대하는 이유를 다음과 같이 밝혔다.
〈임시정부도 통일을 진심 갈력(竭力)하여 왔습니다. 실제로 힘썼습니다. 그러나 매양 시배(時輩)들은 다른 꿈의 통일을 그립니다. 사상상으로 정감상으로 갖은 기세를 합류하야 마치 통일은 자기네들이요, 임정만이 방해하는 듯이 의식적 선전, 무의식적 착각으로 분열과 괴상이 너무 혼란하였습니다. 그러나 정부는 통일의 진체를 받잡아 약헌에 분명한 조문으로 대당(大黨)의 최고권을 긍정하였습니다. 다만 대당은 완전한 집중체, 즉 내외 통합의 실질을 가질 것으로 순정한 민족적 국가사상이 박힌 그 요소라야만 능히 그 임무를 질 것입니다. 질적 원칙이 선명치 못하거나, 응당 집중하여야 할 양의 결함이 있거나, 일시적 결합으로 기초의 실질이 박약한 등으로는 통일체의 미성(未成)이요, 더욱 대당 운운의 임무를 가질 수 없으니, 광복운동자의 도덕과 양심으로는 당연히 시험적 과대평가를 못 할 것입니다. 그런즉 정세가 허하는 정도에서 순정한 운동역량을 크게 하기 위해 통일을 노력할 것이요, 사상으로 정감으로 불쾌할지라도, 그를 희생하고 이를 더욱 충실히 광명케 하는 것이 진정한 오늘 우리의 깊이 각오할 바라 합니다. …〉
『미주·하와이·멕시코同胞는 臨時政府를 지탱해 온 주추』
이처럼 金九는 민족혁명당이 임시약헌에 규정된 〈독립운동자의 대단결인 당〉이 결코 아니라고 강조한 것이다. 그러면서 그는 자신은 비록 임시정부의 직책을 맡고 있지는 않으나 임시정부에 대한 책임은 다할 것이라고 강조하고, 미주동포들의 임시정부에 대한 성원을 당부했다.
〈우리 광복운동에 대한 미주·하와이·멕시코 재류 동포의 깊은 관계와 또 거대한 공헌은 긴말할 것 없이 원년도로부터 지금까지 십팔년 동안에 거룩한 임무를 이행하야 온 바이 아닙니까. 더욱 임정에 대하야 오로지 정신과 물질로 옹호와 유지의 주추임은 사실입니다. 앞으로도 임정에 대한 위기가 깊어가는 이때이라 더욱 면려하며 대의를 굳게 잡고 흔들림없이 전시전종의 공명정대한 뿌리박힌 국수의 민덕을 빛내실 줄 믿습니다.
九는 임정의 책임은 스스로 믿기에 누구에게도 사양치 않습니다. 비록 직접 직무는 없다 하여도 자기의 책임감과 여러 의사들의 보여 준 바를 사무쳐 스스로 면려하며 있습니다.〉
그러면서 다음과 같은 말로 글을 맺었다.
〈이상 여러 말씀은 너무 지리한 듯합니다. 현하에 되어 가는 정세는 참으로 순하게 보이지 않습니다. 그리하여 밀절하게 주의하며 또는 임정 자신의 능률을 힘있게 하며 굳세게 지킴을 돕는 데 오늘의 힘쓸 바입니다. 그리하여야 진정한 통일도 촉성될 줄 믿으며 사나운 바람과 급한 비에 능히 끄떡없이 목적을 이루리라 합니다. 아! 내외 동포, 더욱 미주·하와이·멕시코 재류 동지 동포네의 굳센 힘을 거듭 빌며 이 말을 마칩니다.〉71)
이 편지는 金九가 민족혁명당과의 대결에서 미주동포들의 지지를 확보하기 위해 얼마나 신경을 쓰고 있었는지를 짐작하게 한다.
金九의 임시정부 옹호와 민족혁명당 규탄 캠페인은 신당결성에 참여하지 않은 다른 독립운동자 그룹을 임시정부 쪽으로 집결시키는 계기를 마련했다.
민족혁명당 불참을 선언하고 임시정부를 고수하고 있던 송병조와 차이석은 민족혁명당 반대세력들과의 연대방안을 적극적으로 강구했다. 먼저 형식상 민족혁명당에 참가는 했으나 사실상 독자적인 입장을 견지하고 있는 한국독립당 광동지부장 김붕준과 간사 楊明鎭과 연락을 취하고, 민족혁명당에 참가하지 않은 신한독립당의 閔丙吉과 협력하여 내부분열 공작을 벌이고, 신당의 지도부 구성에 불만을 품고 있는 조소앙 등 한국독립당계 인사들의 탈당을 유도하면서, 李始榮·조완구 등을 통하여 金九의 협조를 얻기로 한 것이다.72)
趙素昻 등 6명의 民族革命黨 탈당
민족혁명당은 당의 주도권 문제를 둘러싸고 출범하자마자 분열되었다. 중앙집행위원장도 선출하지 않고 서기장 김원봉과 조직부장 김두봉이 당무의 주도권을 행사했다. 김두봉은 한국독립당 소속이면서도 정치적으로는 의열단과 같은 입장을 취해 왔었다. 이러한 사실은 통상적인 당무에서뿐만 아니라 당의 앞으로의 진로 전반에 관해서도 의열단의 뜻이 강력하게 반영될 것임을 예고하는 것이었다.73)
민족혁명당이 결성된 지 석 달 만에 조소앙·박창세·문일민 등 한국독립당계 인사 6명은 탈당을 선언했다. 조소앙의 직접적인 탈당 동기는 인사문제에서 소외되었기 때문일 것이나, 그가 내세운 가장 근본적인 결별 이유는 이념의 차이였다. 조소앙 등 6명은 9월25일에 「한국독립당 재건선언」을 발표한 데 이어, 10월5일에는 한국독립당 임시 당무위원회의 명의로 「黨員同志에게 告함」이라는 장문의 성명서를 발표했다. 이 글에서 조소앙 등은 민족혁명당을 유물론에 입각하여 무산계급의 독재적 정치를 유일수단으로 하는 공산주의 정당으로 규정하고, 자신들이 탈당한 이유를 다음과 같이 밝혔다.
〈민족주의의 독립운동은 원칙상 사회주의자의 국제관과는 판연히 다른 감정과 이론을 가지는 것이다. 민족의 경제문제만을 중심으로 하여 국가의 말살과 주권의 포기와 자기 민족의 과정을 무시하는 공산주의자와는 한층 氷炭不相容(빙탄불상용)의 혈분적 상반성을 가지는 것이다. 만일 원칙상 상치되는 것을 서로 양해해서 일시적으로 敵對戰線을 확대 과장하려는 공동정책에서, 또는 자기중심의 진로를 획득하기 위해 동상이몽적 상호 이용의 천박한 소견만으로는 백발백불중의 결과에 爾詐我虞[이사아우: 너를 속이고 나는 즐김]의 幻劇(환극)을 산출할 뿐이니, 국내의 신간회와 국외의 촉성회의 합동이 곧 그러한 환극이었다.…〉74)
이처럼 조소앙이 민족혁명당의 중심세력인 의열단을 「혈분적 상반성을 가진」 공산주의자들로 몰아붙인 것은 그의 민족혁명당 참여동기를 의심스럽게 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 자신도 제정 위원의 한 사람으로 참여했던 민족혁명당의 당의와 당강이 그의 이론인 삼균주의에 입각해 있었기 때문에 그가 탈당의 명분으로 제시한 이념의 차이는 자기모순이었다. 국내의 신간회 운동과 중국 관내에서 추진되었던 민족유일당 촉성운동을 신랄하게 비판한 것은 金九의 민족혁명당 비판논리와 일치하는 것이어서 흥미롭다.
민족혁명당은 조소앙 등의 「한국독립당 재건선언」이 발표되자 김두봉·崔錫淳 등 한국독립당 출신을 항주로 급파해서 설득작업을 벌였다. 그러나 뒤이어 「당원동지에게 고함」이 발표되자 설득가망이 없다고 판단하고, 한국독립당의 원로 양기탁 명의로 「조소앙 등 6명의 반당사건에 관하여 일반동지에게 고함」이라는 성토문을 발표한 데 이어 10월20일에는 이들을 〈반당분자, 반혁명분자, 주구〉라고 규정하여 제명하고, 조소앙을 〈기회주의가 천품(天稟)인 변절자 조소앙〉이라고 맹렬히 비난했다.75)
조소앙 등 한국독립당 대표 6명에 이어 신한독립당의 대표로 민족혁명당 결성에 참가했던 홍진과 曹成煥도 탈당하여 처음부터 신당 참여를 거부하고 있던 같은 당의 민병길과 함께 한국독립당 재건에 참여했다.76)
(3) 臨時政府의 擁護團體로 韓國國民黨 결성
송병조와 차이석은 10월로 예정된 임시의정원의 정기회의를 통하여 임시정부의 기능을 정상화시키기로 했다. 두 사람은 남아 있는 두 국무위원이면서 송병조는 임시의정원 의장, 차이석은 부의장을 겸하고 있었다. 임시정부의 기능을 정상화시키기 위해서는 金九의 임시정부 복귀가 결정적으로 필요했다. 두 사람은 항주에 있는 이시영·조완구 등의 내응을 얻고, 가흥에 있는 이동녕과 연락하여 金九의 협조를 교섭했다. 金九의 협조란 당장에는 자금지원이었다. 金九는 이동녕을 통하여 임시의정원 회의경비로 500원을 송병조에게 보냈다. 송병조는 각 지방에 흩어져 있는 의정원 의원들에게 회의 소집을 통보하면서 출석자들에게는 여비를 보냈다.77)
趙素昻은 金九의 臨政복귀 반대
10월19일 오후 2시에 항주의 이전 한국독립당 사무소에서 제28회 임시의정원 개원식이 거행되었다. 재적의원 14명 가운데에서 8명이 참석했다. 10월22일에 속개된 회의에서는 국무위원 다섯사람의 사직안을 처리했다는 상임위원회의 보고와 1935년도(1934.10.1~ 1935.8.31) 재정상황 보고가 있었는데, 재정상황 보고는 이때의 임시정부의 궁핍상을 그대로 보여 주는 것이었다. 수입총액은 1,547元(원)이었는데, 부채 1,505원 6角 9分 가운데에서 550원 5각 1푼을 갚고, 남은 부채가 590원 1각 8분이었다.
의원 7명이 참석한 이튿날의 회의는 비공식 간담회로 진행되었다.78) 간담회의 내용은 공식회의록에는 누락되어 있으나, 일본 경찰의 정보보고에 따르면 다음과 같았다.
송병조는 재정상황보고에서 본 바와 같은 임시정부의 재정 궁핍상을 설명하고, 金九파의 협조를 얻어야 할 필요성을 역설했다. 그러나 조소앙·박창세 등 한국독립당 재건파는 극력 반대했다. 항주의 임시정부 판공처 습격사건 때에 金九 측근들에게 봉변을 당한 이래로 金九에게 반감을 가지고 있던 조소앙은 金九가 임시정부에 복귀하는 것은 곧 임시정부의 주도권을 金九 일파에 빼앗기는 것이라고 생각한 것이었다. 그때에 같이 봉변을 당했던 金澈은 1934년 6월29일에 사망하고 없었다.79)
임시의정원은 조소앙 등의 불참으로 성원이 되지 못하여 11월까지 유회를 거듭했다. 그러자 일부에서는 조소앙 일파는 민족혁명당 탈당을 가장하여 그 당의 밀명을 받고 임시정부를 허물기 위하여 합류한 것이 아니냐고 의심하면서 그들의 행동에 대해 다시 심의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하기까지 했다.
송병조는 김붕준과 양명진과 함께 조완구와 이시영을 만나서 대책을 협의한 결과, 조소앙 등은 나중에 설득하기로 하고 이동녕을 통하여 金九의 임시정부 복귀를 교섭하기로 결정했다. 그리하여 마침내 11월2일에 열린 의정원 회의에서 윤기섭 등 장기 결석의원 5명을 임시약헌 제23조 규정에 따라 제명함으로써 법정 정족수를 만든 다음 국무위원 보선을 실시하여 金九·이동녕·이시영·조완구, 조성환 5명을 국무원으로 선출했다. 국무위원의 임기는 1년이 남아 있었다. 조소앙은 김붕준과 양명진과 함께 임시의정원 상임위원으로 선출되었다.80)
南湖에 놀잇배 띄우고 臨時議政院 會議
이때의 일을 金九는 다음과 같이 간략하게, 그러나 퍽 실감나게 적어 놓았다.
〈이 무렵 나는 임시정부가 무정부 상태라는 조완구 형의 친서를 받고 심히 분노하여 급히 항주로 달려갔다. 그곳에 주재하던 김철은 이미 병사하였고, 5당 통일에 참가하였던 조소앙은 벌써 민족혁명당에서 탈퇴하였다. 그때에 항주에 주거하던 이시영, 조완구, 김붕준, 양소벽(양명진), 송병조, 차이석 등 의원들과 임시정부 유지문제를 협의하였다. 그 결과 의견이 일치되어 일동이 가흥에 도착하여 이동녕, 안공근, 안경근, 엄항섭, 김구 등이 남호에 놀잇배 한 척을 띄우고 선중에서 의회를 개최하였다. 이 회의에서 이동녕·조완구·김구 3인을 새로 국무위원으로 보선하니, 기존의 송병조·차이석을 합하여 모두 5인이 되어, 비로소 국무회의를 진행할 수 있게 되었다.〉81)
그러나 이때에 보선된 국무위원은 위의 세 사람에 이시영과 조성환을 합하여 다섯 사람이었고, 기존의 송병조와 차이석과 함께 국무위원은 모두 7명이 되었다.82) 이튿날 신임 국무위원 취임식을 거행한 데 이어 국무회의를 열어 책임주무원을 호선한 결과 주석에 이동녕, 내무장에 조완구, 외무장에 김구, 군무장에 조성환, 법무장에 이시영을 선임했다. 송병조와 차이석은 각각 재무장과 비서장으로 유임되었다.83)
이로써 金九는 윤봉길의 홍구공원 폭탄사건으로 1932년 4월에 상해를 떠난 뒤 3년 6개월 만에, 그리고 법적으로는 1933년 3월22일에 국무회의에서 국무위원직을 박탈당한 지 2년 8개월 만에 임시정부에 복귀했다. 임시정부 초창기부터 임시의정원 의장, 국무위원 등의 직책을 맡아서 고난을 겪어 온 원로들로 다시 구성된 임시정부는 국무위원 연명으로 동포들에게 보내는 포고문을 발표했다. 포고문은 임시정부를 말살하려는 책동에 맞서 그것을 사수하기 위해 분기할 것을 호소했다.84)
조직을 재정비한 임시정부는 11월 말에 항주에 있던 판공처를 중국 국민당 강소성당부소재지인 鎭江으로 옮기기로 했다. 이에 따라 11월 하순에 송병조, 차이석, 조성환, 조완구 등 국무위원들은 진강으로 이사하고, 金九는 남경으로 돌아왔다. 이로써 임시정부는 3년 반 동안의 항주시대를 마감하고 진강시대를 맞이하게 되었다.
國務委員 전원이 韓國國民黨 간부로 참여
金九는 어떤 일을 결심하기까지는 우유부단하다는 평을 들을 정도로 신중했으나, 마음먹은 일을 실행할 때에는 물불을 가리지 않는 성품이었다. 金九의 복귀와 더불어 임시정부는 자금 면에서나 인적자원 면에서나 그의 지도력이 주축이 될 수밖에 없었다. 金九는 민족혁명당에 대항하여 임시정부를 옹호하고 나갈 강력한 단체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임시정부의 재건에 참여한 인사들과 협의하여, 11월에 항주에서 韓國國民黨을 창당했다. 「국민당」이라는 당명은 아마 중국국민당을 의식하고 지은 것이었을 것이다.
金九는 한국국민당을 결성하게 된 동기를 다음과 같이 적었다.
〈5당 통일이 형성될 당시부터 동지들은 단체조직을 주장하였으나, 나는 극히 만류하였다. 그 이유는, 다른 이들은 통일하자는데 내용이 복잡하여 아직 참가하지는 않았으나, 내가 어찌 차마 딴 단체를 조직하겠느냐 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조소앙이 한국독립당 재건설을 추진하니, 내가 단체를 조직하여도 통일의 파괴자는 아니며, 임시정부가 종종 위험을 당하는 것은 튼튼한 배경이 없었기 때문인데, 이제 임시정부를 옹호하는 단체가 필요하다 생각하고 한국국민당을 조직하였다.〉85)
한국국민당의 지도부는 金九를 이사장으로 하고, 7명의 이사(이동녕·송병조·조완구·차이석·김붕준·안공근·엄항섭)와 3명의 감사(이시영·조성환·양명진)로 구성되었다. 이는 국무위원 전원과 조소앙을 제외한 임시의정원 상임위원 두 사람이 모두 포함된 것이었다. 金九의 핵심측근인 안공근과 엄항섭이 이사에 포함되었고, 엄항섭은 또 중앙본부의 선전부장을 겸했다. 조직부장에는 金九파가 아닌 차이석이 선임되었다.86)
한국국민당의 이념과 독립운동 방략은 창립선언과 당의 및 당강에 잘 드러나 있다. 창립선언은 〈조국의 촌토를 회복하지 못하고 원수의 쇠사슬 아래 유린되야 애호(哀號)하는 동포의 울음소리는 의연하다. 이 어떤 까닭인가. 적의 세력이 강함도 원인의 하나이지마는 자가의 착오가 중요한 성분을 지었도다. 사상의 차이와 견해의 같지 않음과 조직의 무능한 것 등이 또한 적지 않은 원인의 하나이며, 기본적 정의 도덕의 산란, 현대적 종횡술책의 난용이 최대 원인이라 긍정치 아니치 못하리라〉87)고 하여 독립운동자들 사이의 내부갈등이 독립운동의 장애요인이었음을 지적했다. 그리고 당의에서는 정치·경제·교육의 균등이라는 삼균주의에 입각한 신민주공화국의 건설을 천명하고, 9개항의 구체적 사항을 표방했는데, 중요한 것을 들면, 1)국가주권 광복의 혁명적 의식을 국민에게 고취 환기하여 민족적 혁명역량을 총집중할 것, 2)엄밀한 조직하에 민중적 반항과 무력적 파괴를 적극적으로 진행할 것, 3)우리의 광복운동을 우호적으로 원조하는 국가 및 민족과 긴밀히 연락할 것, 5)토지와 대생산기관을 국유로 하고, 국민의 생활권을 평등하게 할 것, 8)독립운동에 대한 사이비 불순적 이론과 행동을 배격할 것, 9)임시정부를 옹호, 진전시킬 것 등이었다.88) 민족혁명당을 겨냥하여 〈사이비 불순적 이론과 행동〉을 배격한다고 말하고 임시정부를 옹호 진전시킨다고 천명하고 있는 것이 주목된다.
이러한 항목들은 1930년에 조직된 한국독립당의 당강과 기본적으로 맥이 같은 것이었다.
『國家가 없으면 民族을 保存할 수 없다』
구체적 활동의 여건이 어려울수록 필요한 것은 선전활동이었다. 한국국민당도 민족혁명당에 대항하여 정국을 임시정부 중심으로 끌고 가기 위해서는 역시 기관지를 발행하여 선전활동에 주력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리하여 1936년 3월15일자로 기관지 「韓民」을 발행했다. 신문 형태로 매달 한 번씩 발행된 「韓民」은 1938년 4월3일까지 17호가 발행되었고, 그 사이 두 번의 호외가 발행되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89) 「韓民」의 다음과 같은 「창간사」는 공산주의에 반대하면서도 토지와 기간산업의 국유화와 같은 사회주의제도를 표방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에서 느끼는 한국국민당의 이념적 고민을 잘 보여 준다.
〈자본제국주의가 발흥하기 시작한 이래로 침략과 약탈의 방식이 가장 과학적으로, 가장 조직적으로, 가장 치밀하고 교활하게 감행되어 정의 인도의 가면 아래서 약육강식의 악의 법칙은 점차 첨예화하고 심각해졌다. 과거의 약탈자는 다른 나라를 병탄하기 위해 그 통치권을 강탈한 것뿐이었으나 현대제국주의자는 여기에 만족하지 않고 민족마저 말살시켜 버렸다. 그러나 총검으로써 이 목적을 달성하려고 하지 않고 정치적 압박과 경제적 착취로 피정복자를 자멸시킨다.…
그러므로 현대에 처한 우리는 국가가 없으면 민족을 보존할 수 없고, 민족을 보존하지 못하면 개인의 삶은 획득할 수 없다. 우리 혁명운동의 궁극 목적이 개인의 삶을 추구하는 일이라는 것은 어린아이도 분명히 아는 바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이른바 무슨무슨주의자배는 삶을 추구하면서도 국가를 홀시한다. 이것은 장사를 지내는 자가 시체를 망각하는 경우와 같다. 이것이 이른바 본령을 잃은 운동이다.〉
「韓民」의 창간호에는 또 「愚民」이라는 필명으로 「우리 독립운동의 동향」이라는 기고문이 실려 있는데, 이 글은 탁월한 중심인물의 영도력 아래 단결할 것을 강조하면서, 그러한 인물의 보기로 이탈리아의 무솔리니, 독일의 히틀러, 터키의 케말 파샤, 중국의 蔣介石, 러시아의 스탈린을 들고 있다.90) 이 글의 필자가 누구였는지는 분명하지 않으나, 그것은 金九를 이들과 같은 존재로 받들어야 한다고 암시한 것이었을 것이다.
「韓民」은 매호에서 한국의 독립을 선전하고, 특히 이봉창과 윤봉길을 순국 의사로 찬양함으로써 청년들의 영웅심을 자극하는 한편, 민족혁명당을 공산주의 단체로 단정하여 공산당 토벌정책을 취하고 있는 중국국민정부로 하여금 그들에 대한 지원의 단절 또는 경감을 촉구하는 주장을 폈다.91)
國民黨 전위단체로 靑年團 창설
金九는 임시정부에 복귀한 뒤에도 일본 경찰과 밀정들의 추적을 피하면서 청년들을 모집하여 훈련시키고, 또 필요한 임무를 주어 각지로 파견하는 일에 힘을 기울였다. 그리고 그렇게 훈련시켜 파견한 젊은이들이 일본 경찰에 체포되었다는 소식을 들을 때면 金九는 마음속으로 더욱 칼을 갈았다.
1936년 4, 5월 무렵에 이르러 새로 응모해 온 청년들이 20명쯤 되었다. 이 때에 한국특무대독립군의 훈련을 맡고 있던 김동우·오면직·韓道源 등이 안공근의 전횡에 불만을 품고 이탈한 것은 金九로서는 여간 큰 손실이 아니었다. 이들은 상해로 가서 韓國猛血團을 조직했다. 김동우와 오면직은 金九의 고향인 황해도 安岳 출신으로서, 1921년 11월에 상해로 와서 金九의 지시에 따라 국무원비서장이었던 金立을 모스크바 자금을 횡령했다고 하여 처단한 이래로 金九의 심복으로 고락을 같이해 왔었다. 한국맹혈단의 단원들은 2월22일에서 3월25일 사이에 김동우를 제외하고는 모두 상해 일본영사관 경찰에 체포되고 말았다.92)
金九는 한국특무대독립군에 속해 있던 남경군관학교 졸업생 17명과 학생훈련소의 훈련생 20여 명 등을 규합하여 7월11일에 남경 남기가 8호의 엄항섭 집에서 한국국민당 청년단을 조직했다.93) 한국국민당 청년단이 金九의 직접적인 지도 아래 결성된 것은 그들의 「창립선언」에 구체적으로 표명되었다. 「창단선언」은 지난 날의 독립운동에 대해 〈돌이켜 보면 우리의 피눈물을 짜낼 뿐이었고, 파탄과 분열은 우리 운동의 대치욕이 되고 말았다. 피가 끓는 대한의 젊은이여, 암담한 환경에 빠진 조국은 실망과 비애 속에서 방황하고 있다〉고 개탄하고 나서, 다음과 같이 천명하고 있다.
〈우리는 이것을 원망하고 있어서는 안 된다. 이에 느낀 바 있어서 우리 혁명운동의 정통이며 토적총사령부(討敵總司令部)인 한국국민당에 모인 청년투사들은 지난 40여 년 동안 일관된 정신을 가지고 혁명운동에 분투 노력하신 白凡 金九선생의 영도를 받아 그의 손이 되고 발이 되어 그 정신과 사업을 계승하기 위하여 순수하고 진지한 열정을 가지고 분기하여 한국국민당 청년단을 창립했다.…〉
그리고 이날 그들이 채택한 「구호」에는 〈국내 전선으로 들어가라〉, 〈반동사상과 파벌귀를 쓸어 내자〉, 〈일체의 반동조직을 방지하자〉, 〈우리의 영수를 옹호하자〉 등이 포함되어 있었다.94)
이렇게 창립된 청년단은 한 달 뒤인 8월27일에는 기관지 「韓靑」을 창간하여 「韓民」보다 더욱 격렬한 이론투쟁을 벌이면서 한국국민당의 전위단체이자 선전 및 교육기관의 역할을 담당했다.
1937년 2월에는 광동에서 韓國靑年前衛團이 조직되었다. 일찍이 한국독립당의 지부 등이 설치되어 있던 광동지방에서는 민족혁명당이 결성된 뒤에는 金九와 함께 임시정부 재정비에 참가한 김붕준과 양명진 등의 일부 세력을 제외하고는 거의가 민족혁명당에 참여했었다. 그리하여 한국국민당은 金九와 안공근이 학생훈련소를 관리하던 金九의 아들 김인과 안공근의 아들 安禹生을 광동에 파견하여 임시정부의 지지세력 만회를 위한 활동을 벌이게 했다. 이들은 중산대학생인 金昌滿과 金德穆, 金鋼, 馬超軍 등과 협력하여 민족혁명당 광동지부 당원인 安炳武, 韓泰寅 등을 끌어들여 한국국민당과 국민당 청년단을 지원하는 단체로 한국청년전위단을 조직했다. 민족혁명당에서는 간부를 파견하여 사태를 수습하고자 했으나, 지부는 해체되고 말았다. 한국청년전위단도 기관지로 「前線」을 발행했다.95) 이러한 청년단들의 활동이 임시정부를 비롯한 독립운동자들 사이에서 金九의 정치지도력의 확고한 기반이 되었음은 말할 나위도 없다.●
1) 金正柱編, 「朝鮮統治史料(八)」, 1971, 韓國史料硏究所, 495~496쪽.
2) 金正柱編, 「朝鮮統治史料(八)」, 503~504쪽. 3) 金正柱編, 「朝鮮統治史料(八)」, 496쪽. 4) 社會問題資料硏究會編, 「思想情勢視察報告集(2)」, 1976, 東洋文化社, 30쪽. 5) 위와 같음. 6) 지복영, 「역사의 수레를 끌고 밀며――항일무장독립운동과 백산 지청천장군」, 1995, 문학과지성사, 303쪽. 7) 內務省警報局編, 「社會運動의 狀況(8)」, 1972, 三一書房, 1548쪽. 8)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독립운동사자료집(11)」, 1976, 독립유공자사업기금 운용위원회, 828쪽. 9) 金正明編, 「朝鮮獨立運動 Ⅱ」, 1967, 原書房, 514쪽.
10) 金正柱編, 「朝鮮統治史料(八)」, 714~715쪽. 11) 「思想情勢視察報告集(2)」, 30~31쪽. 12) 金九, 「金九自敍傳 白凡逸志」(親筆影印本), 1994, 集文堂, 199쪽. 13) 김영범, 「한국근대민족운동과 의열단」, 1997, 창작과 비평사, 270~299쪽 참조. 14) 「思想情勢視察報告集(2)」, 9쪽. 15) 염인호, 「김원봉연구」, 1993, 창작과 비평사, 187쪽. 16) 金學奎, 「白波自敍傳」, 「한국독립운동사연구」 제2집, 1988,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594~595쪽. 17) 金正柱編, 「朝鮮統治史料(八)」, 496쪽.
18) 南坡朴贊翊傳記刊行委員會, 「南坡 朴贊翊」, 1989, 乙酉文化社, 221~222쪽. 19) 金弘壹, 「大陸의 憤怒」, 1972, 文潮社, 299~300쪽. 20) 「金九가 蕭錚에게 보낸 1934년 10월30일자 편지」, 白凡金九先生全集編纂委員會編, 「白凡金九全集(4)」, 1999, 대한매일신보사, 386~388쪽. 21)「思想情勢視察報告集(2)」, 222쪽. 22) 金正柱編, 「朝鮮統治史料(八)」, 708~709쪽. 23) 한상도, 「韓國獨立運動과 中國 軍官學校」, 1994, 문학과 지성사, 334쪽. 24) 金正柱編, 「朝鮮統治史料(八)」, 709쪽. 25) 한상도, 앞의 책, 334~335쪽. 26) 金正柱編, 「朝鮮統治史料(八)」, 501~502쪽. 27) 金正明編, 「朝鮮獨立運動 Ⅱ」, 514~515쪽.
28) 국사편찬위원회, 「대한민국임시정부자료집(2) 임시의정원Ⅰ」, 2005, 287쪽. 29) 「思想情勢視察報告集(2)」, 32쪽, 60쪽. 30) 國史編纂委員會, 「韓國獨立運動史 資料 3 臨政篇 Ⅲ」, 1973, 探求堂, 400쪽. 31) 「思想情勢視察報告集(2)」, 4쪽.
32) 金正柱編, 「朝鮮統治史料(八)」, 482쪽; 「思想情勢視察報告集(2)」, 387쪽. 33) 「思想情勢視察報告集(2)」, 382~386쪽. 34) 金弘壹, 앞의 책, 300쪽. 35) 한상도, 앞의 책, 326~327쪽. 36) 日本國際政治學會編, 「太平洋戰爭への道(3)」, 1987, 朝日新聞社, 85쪽. 37) 도진순 주해, 「백범일지」, 1997, 돌베개, 359쪽. 38) 송우혜, 「윤동주평전」, 1989, 열음사, 131쪽; 「思想情勢視察報告集(2)」, 223쪽. 39) 한상도, 앞의 책, 341~342쪽.
40) 「東亞日報」 1935년 3월2일자, 「民族共産各派가 提携 單一大黨組織說」. 같은 날짜의 「朝鮮日報」와 「每日申報」에도 비슷한 기사가 실렸다. 41) 「新韓民報」 1935년 4월4일자, 「민족공산 각파가 지휘 김구, 김원봉, 리청천 중심으로 단일당」.
42) 「白凡金九全集(4)」, 359쪽. 43) 「思想情勢視察報告集(2)」, 32쪽. 44) 金學奎, 앞의 글, 595쪽. 45) 「思想情勢視察報告集(2)」, 38쪽. 46) 「思想情勢視察報告集(2)」, 32쪽, 65~66쪽.
47) 「백범일지」, 357~358쪽. 48)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독립운동사(4) 임시정부사」, 1972, 독립유공자 사업기금운용위원회, 647쪽. 49) 國史編纂委員會, 「韓國獨立運動史 資料 1 臨政篇 Ⅰ」, 1970, 探求堂, 416~417쪽. 50) 金正柱編, 「朝鮮統治史料(十)」, 715쪽. 51) 「思想情勢視察報告集(2)」, 33쪽; 金學奎, 앞의 글, 593쪽; 강만길, 「증보 조선민족혁명당과 통일전선」, 2003, 역사비평사, 65쪽. 52) 「思想情勢視察報告集(2)」, 13쪽. 53) 張建相, 「獨立運動 半世紀의 回顧」, 「月刊中央」 1968년 8월호 참조. 54) 「韓國民族運動史料(中國篇)」, 1976, 國會圖書館, 865쪽. 55) 韓詩俊編, 「大韓民國臨時政府法令集」, 1999, 國家報勳處, 56쪽, 61쪽.
56) 「思想情勢視察報告集(2)」, 33~39쪽. 57) 「思想情勢視察報告集(2)」, 88쪽; 金正明編, 「朝鮮獨立運動 Ⅱ」, 540쪽.
58) 「思想情勢視察報告集(2)」, 15쪽. 59) 「思想情勢視察報告集(2)」, 234~235쪽. 60) 「思想情勢視察報告集(2)」, 233쪽. 61) 金正明編, 「朝鮮獨立運動 Ⅱ」, 585쪽. 62) 「思想情勢視察報告集(2)」, 222쪽. 63) 「思想情勢視察報告集(2)」, 228~229쪽. 64) 송우혜, 앞의 책, 131~132쪽.
65) 송우혜, 위의 책, 132쪽. 66) 「思想情勢視察報告集(2)」, 230쪽. 67) 한상도 앞의 책, 343~344쪽. 68) 「思想情勢視察報告集(2)」, 230~231쪽. 69) 金正明編, 「朝鮮獨立運動 Ⅱ」, 538쪽. 70) 「思想情勢視察報告集(2)」, 9~10쪽.
71) 「新韓民報」 1935년 8월8일자, 「림시정부에 대하여」.
72) 「思想情勢視察報告集(2)」, 42쪽. 73) 김영범, 앞의 책, 402쪽. 74) 「思想情勢視察報告集(2)」, 165쪽. 75) 「思想情勢視察報告集(2)」, 46쪽. 76) 「思想情勢視察報告集(2)」, 162쪽. 77) 金正明編, 「朝鮮獨立運動 Ⅱ」, 531~532쪽.
78) 「대한민국임시정부자료집 (2) 임시의정원Ⅰ」, 2005, 국사편찬위원회, 289~293쪽. 79) 「韓國民族運動史料(中國篇)」, 834쪽. 80) 「대한민국임시정부자료집 2 임시의정원Ⅰ」, 293쪽; 金正明編, 「朝鮮獨立運動Ⅱ」, 532쪽; 金正柱編, 「朝鮮統治史料(十)」, 775~776쪽. 81) 「백범일지」, 358~359쪽. 82) 「대한민국임시정부자료집 1 헌법·공보」, 2005, 국사편찬위원회, 190쪽. 남호의 놀잇배 위에서 의정원 회의가 열렸다는 「백범일지」의 기록과는 달리, 일본 경찰의 정보보고에는 회의장소가 가흥의 엄항섭 집으로(金正明編, 「朝鮮獨立運動Ⅱ」, 532쪽), 일본고등법원의 정보보고에는 항주성 내 한 중국음식점으로(金正柱編, 「朝鮮統治史料(十)」, 775쪽) 되어 있다. 83) 「대한민국임시정부자료집 1 헌법·공보」, 190쪽.
84) 「림시정부포고문」, 「白凡金九全集(4)」, 389~394쪽; 「대한민국임시정부자료집(1) 헌법·공보」. 191쪽 85) 「백범일지」, 359쪽. 86) 朝鮮總督府警務局, 「最近に於ける朝鮮治安狀況 1937年」, 1966, 巖南堂, 280쪽. 87) 「新韓民報」 1936년 1월16일자, 「한국국민당선언서」.
88) 金正明編, 「朝鮮獨立運動 Ⅱ」, 644~645쪽. 89) 趙凡來, 「韓國國民黨硏究」, 「한국독립운동사연구」 제4집, 1990,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384쪽. 90) 「思想情勢視察報告集(3)」, 147쪽, 153~154쪽. 91) 金正明編, 「朝鮮獨立運動 Ⅱ」, 566쪽.
92) 金正明編, 「朝鮮獨立運動 Ⅱ」, 569쪽. 93) 金正明編, 「朝鮮獨立運動 Ⅱ」, 561쪽 ; 趙凡來, 앞의 글, 21쪽. 94) 金正明編, 「朝鮮獨立運動 Ⅱ」, 562~563쪽. 95) 「思想情勢視察報告集(5)」, 32쪽.
1935년 7월에 5黨統合으로 民族革命黨이 결성되면서 臨時政府의 폐지를 주장하고 나오자, 金九는 臨時政府 옹호운동에 앞장섰다. 1935년 11월에 臨時政府에 복귀한 金九는 民族革命黨과 대결하기 위하여 韓國國民黨을 결성하고 그 외곽단체로 韓國國民黨 靑年團을 창설했다. 또한 金九는 廣東에 아들 金仁과 安恭根의 아들 安禹生을 파견하여 韓國靑年前衛團을 조직했다.
(1) 1기생으로 그친 洛陽軍官學校 韓人특별반
金九가 중국국민당의 지원을 받아 1934년 2월에 개설한 중국군관학교 낙양분교의 韓人특별반은 한국독립운동자들의 큰 기대의 대상이 되었다. 그것은 1월에 새로 구성된 임시정부 국무위원들의 「취직서사」에서 천명된 것과 같이 임박한 제국주의 일본과의 전면전 수행을 담당할 실질적인 군사력이 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러한 기대는 李靑天·李範奭·吳光鮮 등 한인특별반 교관들의 다음과 같은 훈화로도 짐작할 수 있다.
1, 2년 이내에 제2차 世界大戰 발발 기대

이처럼 이 무렵 중국에 있던 한국독립운동자들은 1, 2년 이내에 일본을 상대로 한 전면전이 발발할 것으로 전망하고 있었다. 그것은 金九도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실제로 3년 뒤인 1937년 7월7일에는 中·日전쟁이 발발했다.
개교하고 처음 맞은 3월1일에는 교관들과 학생들이 낙양분교 강당에 모여 3·1절 기념식을 거행했다. 이 자리에서 이청천은 다음과 같은 요지의 기념사를 했다.
『오늘은 한국 민족이 독립운동의 첫소리를 울린 날로서 잊어서는 안 될 기념일이다. 우리는 지난 날[1919년]의 오늘의 의기를 가지고 목적달성을 위해 적극적 활동을 하지 않으면 안 된다. 오늘은 이 자리에서 간단하게 식을 거행하는 데 그치지만 본국에서 성대하게 기념 축전을 거행할 날, 곧 한국 독립도 가까웠다고 믿는다』
이청천의 기념사에 이어 학생대표 李利興과 梁鐵山이 일치단결하여 한국 독립을 관철시키자는 연설을 한 다음 1분간 묵도를 하고 해산했다.2)
訓練生들에게 自己命令에 服從하라고 강조
9년 만에 다시 중국으로 건너온 어머니와 두 아들을 만나고 南京에 어머니의 거처를 마련한 金九는 4월 중순에 낙양군관학교로 갔다. 그는 훈련생 전원을 학교 뒷숲으로 소집하고 일장 연설을 했다. 그는 자신이 한국의 독립을 목적으로 30년 넘어 해외에서 활동해 왔음을 강조하고, 앞서 이청천 등 교관들이 했던 것과 같은 내용의 연설을 한 다음, 앞으로의 한국 혁명운동에 관해서는 자기의 의사를 존중하고 자기의 명령에 절대로 복종해야 된다고 엄중히 말했다. 훈련생들은 모두 金九의 이 말에 찬성했다. 그러나 이청천은 이때에 金九가 「자기의 명령에 절대 복종하라」고 훈련생들에게 한 말에 크게 분개했고, 이때부터 金九 그룹과 이청천派 사이의 반목이 격화되었다고 한다.3)
그러나 金九 그룹과 이청천派의 반목은 낙양군관학교 한인특별반 운영의 주도권 다툼 때문에 빚어지고 있었던 것만은 아니다. 그것은 이 무렵에 한국 對日전선통일동맹 주도로 추진되고 있던 단일新黨 결성운동과 깊이 관련된 것이었다.
1932년 11월에 독립운동단체들의 협의기구로 결성된 통일동맹은 그 결성 주동자였던 金奎植이 9개월 동안 미국을 방문하고 있던 기간뿐 아니라 그가 돌아오고 나서도 별다른 활동을 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1934년에 접어들면서 독립운동의 구심력을 강화해야 할 필요성을 느끼고, 3월1일부터 사흘 동안 남경에서 제2차 대표대회를 소집하게 되었다. 통일동맹의 이러한 움직임은 조국광복의 기회가 될 對日 전면전쟁이 임박했다는 국제정세 인식과 아울러, 중국 국민정부의 두터운 신임과 재정지원을 받고 있는 金九 그룹에 대한 대항에서 나온 것이었다.4) 움직임의 핵심인물은 義烈團의 金元鳳이었으나, 이청천도 적지않은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다. 이청천·洪冕熙(洪震)·申肅 등이 만주에서 결성했던 韓國獨立黨 대표들과, 남경에 있는 尹琦燮·申翼熙 등의 韓國革命黨 대표들은 1934년 2월25일 남경에서 新韓獨立黨을 결성하고, 즉시 통일동맹에 참가하여 단일신당 운동에 앞장서고 있었다.5) 이청천은 새로 결성된 신한독립당의 군사위원장이 되었다.6)
이러한 분위기는 낙양군관학교 한인특별반의 훈련생들 사이에도 어쩔 수 없이 그대로 반영되었다. 金九는 자파 훈련생에게 기밀비를 별도로 지급했고,7) 이청천은 자신의 세력 강화를 위해 자파 인물인 高雲起(公震遠)를 중심으로 「한국군인회」라는 비밀결사를 조직했는데, 회원은 30명가량 되었다.8) 김원봉派 훈련생들은 그들대로 의열단의 노선에 따른 행동을 하고 있었을 것임은 말할 나위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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民族革命黨 결성을 주도한 義烈團長 金元鳳〔염인호「김원봉 연구」(1993)에서〕. |
4월12일에는 통일동맹의 중앙집행위원회 상무위원 김두봉 외 5명의 연명으로 「가장 완전한 대동단결체 조성」에 관한 방안을 토의하기 위한 각 혁명단체 대표회의를 1935년 3월1일 이전에 소집할 것을 제의하면서, 이에 동의하는 단체는 대동단결체를 조성하는 방안과 대표회의에서 결정될 방안에 따라 성립될 단체의 주의·강령·정책 등에 관한 초안을 보내라고 통고했다. 이어 4월22일에는 이에 대한 각 단체의 의견을 9월1일까지 보내줄 것을 추가로 통고했다.10)
단일신당 조직에 가장 열성적이었던 것은 의열단의 김원봉派였다. 김원봉은 통일동맹에 가입하고 있지 않은 단체까지를 망라하여 단일신당을 조직함으로써 공산주의 이데올로기에 입각한 신당의 지도권을 장악할 수 있고, 그렇게 함으로써 중국 국민정부와의 관계에서 자기보다 우위에 있는 金九 그룹의 세력을 누를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 것이었다.11) 이러한 사정은 金九의 다음과 같은 술회로도 짐작할 수 있다.
〈이때에 우리 사회에서는 또다시 통일바람이 일어나 대일전선통일동맹의 발동으로 의논이 분분하였다. 하루는 의열단장 김원봉군이 특별면회를 청하기로 남경 秦淮(진회) 강가에서 밀회하였다. 김군이 나에게 물었다.
『현재 발동되는 통일운동에 부득불 참가하겠으니 선생도 동참하시는 것이 어떻습니까?』
『내 소견에는 통일의 대체는 동일하나, 동상이몽(同床異夢)으로 간파되니, 군의 소견은 어떠하오?』
『제가 통일운동에 참가하는 주요 목적은 중국인들에게 공산당이란 혐의를 면하고자 함이올시다』
『나는 그런 목적이 각기 다른 통일운동에는 참가하기를 원하지 않소』
나는 이렇게 말하면서 거절했다.〉12)
1927년 7월에 上海에서 의열단을 정비한 김원봉은 1929년 초에 北京으로 가서 安光泉과 함께 朝鮮共産黨再建同盟을 조직하고, 부설 교양기관으로 레닌주의정치학교를 설립했다. 그리고 동맹의 기관지로 「레닌주의」를 발간하여 청년들의 공산주의 이념 교육에 힘썼다. 1931년에 만주사변[9·18 전쟁]이 터지자 그는 본거지를 남경으로 옮겨 중국 국민정부와 접촉하는 한편 대일전선통일동맹의 결성을 주도했다.13) 이러한 김원봉을 金九는 공산주의자로 단정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安恭根은 중국인들에게 『의열단은 코민테른(국제공산당)으로부터 원조를 얻어 한국 혁명운동의 통일을 획책하고 있다』고 말하고 있었다고 한다.14)
金九가 신당에 참여하지 않기로 하자, 金九로부터 격려 연설을 듣고 만년필을 선물받기도 했던 의열단 청년들은 金九를 「민족운동의 적」이라면서 비난했다고 한다.15)
김원봉을 공산주의자라고 생각한 것은 金九만이 아니었다. 신당결성 운동에 참여하고 있던 민족주의자들도 대체로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당시 조선혁명당대표로 신당결성에 참여했던 金學奎는 김원봉이 통일을 주장한 것은 〈자기네 공산주의가 중국국민당에 나타나는 것이 불리한 까닭에 그것을 카무플라주하자는 것이었다〉고 적고 있다. 김학규는 金九가 신당결성에 참여하지 않은 이유도 〈통일이란 미명하에 공산주의인 김원봉 일파의 권모가 내포해 있으니 그렇게 불순한 공산주의자들과 통일운동하는 것은 결국 그들에게 기만, 이용만 당할 것이라는 것을 간파하였기 때문이라 한다〉고 했다.16)
中國政府와의 교섭창구였던 朴贊翊과 결별
金九가 1934년 8월에 자신이 입교시킨 낙양군관학교 한인특별반 훈련생 25명을 남경으로 철수시킨 것은 위와 같은 여러 가지 상황을 종합해서 내린 판단에 따른 것이었다. 철수한 훈련생 가운데에는 郭樂園 여사가 두 손자와 함께 고국을 탈출할 때에 길안내를 했던 崔昌漢과 金九의 장남 金仁도 포함되어 있었다. 金九가 자파 훈련생들을 철수시킨 데 뒤이어 이청천·이범석·오광선 세 교관도 사직하고, 한인훈련생들은 중국인 훈련생 60명과 함께 제3대에 편입되어 중국인 교관의 교육을 받게 되었다.17)
때를 같이 하여 金九를 크게 상심하게 하는 일이 또 한 가지가 벌어졌다. 그것은 중국국민당과의 연락을 맡아서 수고해 온 朴贊翊과 결별하게 된 것이었다.18) 金九는 낙양군관학교 분교에 韓人훈련생들을 입교시킨 뒤에 중국 인사들을 만나느라고 편의상 金弘壹의 집에 두어 달 동안 머물렀다. 이청천과 박찬익으로부터 편지를 받은 것은 이 무렵이었다. 이청천의 편지는 교관직을 그만두고 조선혁명당 군사위원장으로 일하기로 했으므로 그렇게 알아 달라는 것이었고, 박찬익의 편지는 임시정부 관계 가족들의 생활안정에 관한 金九와의 의견차이를 거론하면서 불평을 털어놓은 것이었다.
金九는 두 편지를 김홍일에게 보이면서 실망을 감추지 않았다. 특히 박찬익의 편지에 큰 충격을 받았다. 金九는 밤새껏 생각한 끝에 이튿날 아침 안공근을 불렀다. 그는 안공근에게 앞으로는 중국정부나 국민당과의 연락업무를 박찬익 대신에 맡으라고 말했다. 그리고 김홍일에게는 그러한 사실을 중국 군정당국에 알리고 안공근을 소개해 달라고 부탁했다. 김홍일은 즉시 중국국민당 비서장과 군관학교 교육장에게 각각 만날 시간을 약속하고 金九와 안공근을 안내했다.19) 金九는 도장도 새로 새겼다는 것을 중국국민당의 연락 창구인 蕭錚(소쟁)에게 알리고, 앞으로는 새 도장을 지닌 안공근에게만 자금을 지급해 달라고 통보했다.20)
박찬익이 말한 임시정부 관계 가족들의 생활안정에 관한 의견차이란 가흥에 있는 李東寧과 嚴恒燮 가족의 생활비 보조 문제에 관한 것이었다. 金九는 그때까지 두 사람에게 매달 200원을 송금했었는데, 박찬익이 그만두고 안공근이 재정을 맡은 뒤로는 매달 120원으로 감액해서 보냈다. 이 무렵 이동녕은 폐결핵에 걸려 각혈을 하고 있었고, 엄항섭은 가족들의 병치다꺼리로 고생하고 있었다.21) 200元(원)이라는 돈이 결코 적은 액수가 아니었던 점을 감안할 때에, 박찬익의 불평은 金九를 격분시켰을 것이다.
金九는 낙양군관학교 분교에서 철수시킨 훈련생들 가운데에서 가장 신뢰할만한 사람들은 특무공작을 맡겨 각처로 내보내고, 나머지 훈련생들은 남경에 있는 중국육군군관학교 10기, 11기에 입학시켰다. 그러나 중국군관학교에 보낸 것은 일시적인 방편이었다. 金九는 이들을 집단적으로 수용하여 훈련시킨 다음 항일투쟁에 투입하고자 했다. 그리하여 1934년 12월 하순에 중국육군군관학교에 재학 중인 훈련생들을 중심으로 하여 한국특무대독립군을 조직했다. 본부는 남경성 안의 木匠營 高安里 1호에 두었는데, 이곳은 「金九구락부」라고도 불렸다.22) 그곳은 외부에서는 2층으로 보이나 실제로는 3층인 5칸 크기의 중국식 다세대 건물이었다. 金九는 그 건물의 한 칸을 임대한 것이었다.23)
한국특무대독립군의 조직취지는 〈첫째로 본 조직은 한국특무대독립군이라 칭하고, 군사적 무장과 수양을 목적으로 한다. 둘째로 조직 목적 또는 수령의 명령을 배반하고 다른 당파와 통교하여 동지를 적에게 파는 경우에는 혁명 반역자로서 처분한다. 셋째로 우리는 한국 혁명을 위해 전원 무장하고 일본 제국주의와 그 정책을 파괴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고, 군사적 조직을 완성한다〉는 것이었다.24)
한국특무대독립군은 金九의 리더십에 절대적으로 복종하는 개인조직의 성격이 강했다. 참모 安恭根, 비서 吳冕稙, 중대장 겸 조사부장 金東宇(본명 盧鍾均), 조사부원 安敬根 등 핵심 인물들은 모두 金九의 심복으로 활동해 온 사람들이었다. 본부에는 「東亞日報」, 「大阪每日新聞」, 「上海每日新聞」, 영자신문 등 국내외의 각종 신문을 비롯하여 「新東亞」, 「キンク”」 등 잡지류와 무기와 탄약 등이 비치되어 있었다. 金九는 대원들에게 각종 자료를 읽히고 정신교육을 하면서 대원들의 반일의식을 고취했다.25) 한국특무대독립군에서 훈련받은 청년들 가운데에는 기밀탐지의 임무를 띠고 국내로 파견된 사람도 있었다.26)
韓國獨立黨은 격론 끝에 不參선언
「가장 완전한 대동단결체 조성」을 위한 통일동맹 집행위원회의 제의서에 대해 찬부와 의견을 회신해 줄 것을 요망하면서 그 시한으로 통고했던 9월1일이 되도록 회답을 보내온 단체는 많지 않았다. 가맹단체들의 내부 의견이 쉽사리 정리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자 통일동맹은 9월2일 각 단체에 독촉장을 보내고 1935년 2월20일에 각 혁명단체대표회의를, 이어 2월25일에는 통일동맹 제3차 대표회를 남경에서 개최하기로 결정했다고 통보했다. 그러고 나서는 10월1일부로 기관지 「戰線」 제1호를 발행하여 「대동단결체 조성」의 필요성을 홍보했다.27) 「대동단결체 조성」이란 단일신당 결성을 뜻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협의기구에 지나지 않았던 통일동맹이 단일신당으로 변신하는 과정에는 주도권 장악을 위한 알력이 있게 마련이었고, 또 이데올로기의 대립에 따른 불신과 갈등이 불가피했다.
가장 심한 동요를 겪은 것은 임시정부의 실권을 장악하고 있던 한국독립당이었다. 한국독립당은 1934년 3월1일에 제2차 대표회가 열릴 무렵까지만 해도 「대동단결체 조성」을 촉구하고 있었으나, 막상 이 대회에서 임시정부 폐지론이 대두되자 당론이 흔들리게 된 것이었다. 임시정부가 폐지되면 상해 동포사회에서 누리고 있는 유리한 기반이 무너지게 되고 미주와 하와이 동포들의 지지도 통일신당으로 흡수될 것이었다. 그리고 현재의 지도부는 자연 도태될 운명에 봉착하게 될 것이었다.
한편 10월2일에 항주의 임시판공처에서 개원한 임시의정원은 성원이 되지 않아 한 달이나 유회하다가 30일과 31일 이틀 동안 열렸는데, 「大政方針」을 두고 장시간 토론을 벌였으나 아무런 결론 없이 폐원하고 말았다. 이때에 모인 의정원 의원 13명 가운데에는 통일신당 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있는 사람이 여럿 포함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때의 회의록에 〈30일 하오 7시 반에 다시 모여서 계속 개회하였다가 정회하고, 비공식회의에서 전 국무위원 金九가 서류와 회계에 대한 일체를 아직까지 완전히 인계치 아니하는 데 대하야 많은 토의가 있고…〉28)라고 기록되어 있는 것이 눈길을 끈다. 이들은 자신들의 정치적 운명에 관한 문제보다도 金九가 가지고 있는 자금에 더 관심이 컸던 것이다.
해가 바뀌어 통일동맹이 통보한 각 혁명단체 대표대회 날짜가 닷새 앞으로 박두한 1935년 2월15일부터 사흘 동안 한국독립당은 당론 결정을 위한 제7차 당대표대회를 항주에서 소집했다. 區會와 支會대표 17명이 참석한 이 회의는 임시정부 존폐 문제로 의견의 일치를 보지 못하고 논란을 벌인 끝에, 결국 신당참가 반대파(송병조·趙琬九·車利錫·朴昌世·金朋濬)가 중립파(梁起鐸·金思潗·朴敬淳·李世昌·文逸民·金弘敍)와 합세하여 찬성파(김두봉·李光濟·姜昌濟·劉振東·具益均)를 누르고 한국독립당의 해체 불가와 신당 불참가를 결의하고, 3월1일에 「제7차 대표대회 선언」을 발표하여 통일동맹이 소집한 각 혁명단체 대표회에 불참할 것을 선언했다.29)
〈본당은 5개성상을 경과하는 도중에서 항상 우리의 근본책인 대당조성에 노력하여 왔다.… 그러나 운동선상 각자의 모순과 결점과 집착은 변함이 없이 의연히 존재할 뿐 아니라 가일층 강화되어 전환할 여지가 보이지 않게 되니, 이는 일시의 苟合[구합: 분별없이 남의 말에 찬동함]으로 전철을 다시 밟아 뜻아닌 분규와 淆亂[효란: 뒤섞여 어지러움]하느니보다는 차라리 시간을 참아 성숙을 기다리는 것이 우리 운동선상의 利라고 보는 견해로서 지극천만한 유감이나마 그 회의에 참가를 중지한 소이이다.〉30)
독립운동자들 사이의 병폐가 되어 온 각자의 모순과 결점과 집착이 없어지기는커녕 오히려 심화되고 있는 현재의 상황에서 단일당 조직은 시기상조라는 것이었다.
한국독립당이 불참을 선언하자 통일동맹은 2월20일로 예정했던 각 혁명단체대표대회를 6월20일로 연기했다.
(2) 韓國特務隊獨立軍과 學生訓練所
1935년 들어 金九는 일본 수사기관의 집중적인 추적 속에서도 통일동맹파들의 임시정부 폐지책동을 저지하고 각지에서 응모해 오는 청년들을 훈련하고 관리하는 일에 바빴다. 일본 경찰의 다음과 같은 보고는 이때의 金九의 활동상황을 집약해서 설명해 준다.
〈의열단 및 그 밖의 각 단체의 金九일당에 대한 질시 반목은 더욱 격화되어, 앞에서 말한 신당수립 운동도 그 근원은 金九파에 대한 압박에서 연유한 사실을 명백히 간취할 수 있다.
이러한 주위의 적대시에도 불구하고 金九 일파는 이러한 종류의 단체[독립운동단체] 사이의 큰 세력의 위치를 잃지 않고, 중국 쪽의 보조금은 월액 5,000원이라고 한다. 그리고 아나키즘계에 속하는 흑색공포단을 장악하고 있어서 실행력이 가장 강하고 자금도 풍부하여, 해마다 많은 조선인 자제를 권유하여 중국군관학교에 유학시켜 군사교련을 실시하는 한편, 민족의식의 앙양에 힘을 기울여 졸업한 자들은 내지(일본)·조선·만주 각지로 보내어 기회 있을 때마다 테러행위를 실행하게 하고 또 기도하는 등 가장 무서운 단체이기 때문에, 현지의 각 기관은 金九 일당에 대한 수사와 경계에 전력을 기울이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31)
일본 수사당국이 金九의 소재를 파악하기 위하여 얼마나 혈안이 되어 있었는가를 짐작하게 하는 문장이다.
中國軍官學校 입학 위한 豫備敎育 실시
金九는 한국특무대독립군과는 별도의 조직으로 1935년 2월에 學生訓練所를 설치했다. 이 학생훈련소의 설치는 안공근의 건의에 따른 것이었다. 장소는 남경성 안 東關頭 32호의 중국식 단층건물 2동이었다. 이 훈련소는 중앙육군군관학교에 입교시키기 위해 각처에서 모집한 한인 청년들에게 예비교육을 실시할 목적으로 설립된 것으로서, 「特務隊豫備訓練所」 또는 「蒙藏訓練所」라고도 불렸다.32)
金九가 학생훈련소를 설치한 것은 낙양군관학교 분교의 한인특별반이 1회 졸업생만 내고 폐쇄되었기 때문이었다. 낙양군관학교 분교는 1935년 4월9일에 한인특별반 훈련생들을 모두 졸업시킨 다음 더 이상 한인훈련생들을 받지 않기로 한 것이었다. 1년 전 입교할 때에는 모두 92명이었으나, 金九의 명령으로 퇴교한 25명과 병으로 퇴교한 사람 등을 제외한 62명의 학생이 졸업했다.33) 金九는 김원봉·안공근·김홍일 등과 함께 졸업식에 참석했으나, 이청천과 이범석은 참석하지 않았다.34)
처음에 중국국민정부는 한인특별반 학생들이 졸업하면 그들을 「중한혁명군」이라는 이름 아래 별도로 在洛陽中國軍敎導隊로 편성하여 국민정부 휘하의 무장단체의 하나인 反滿抗日工作別動隊에 배속시키기로 했었다. 그러나 한인지도부의 분열로 한인특별반 학생들의 졸업 후 진로는 자신들의 소속 당파에 따라 갈라지게 되었다. 이청천과 김원봉 계열의 훈련생들은 남경으로 가서 軍政府學兵隊라는 이름으로 남경성 中華門[남문] 밖에 잠시 함께 대기하다가, 이청천 계열의 졸업생들은 신한독립당 산하의 靑年軍事幹部特別班으로 편입되었고, 김원봉 계열의 졸업생들은 1935년 7월에 결성된 민족혁명당에 흡수되었다.35)
낙양군관학교 한인특별반이 폐쇄된 것은 金九와 이청천의 알력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보다는 일본의 방해가 더 큰 원인이었다. 이 무렵에는 일본과 중국 사이에 친선공작이 본격적으로 진행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1935년 1월21일과 22일 이틀 동안 남경에서 열린 王兆銘 외교부장과 수마 야키치로(須磨彌吉郞) 남경주재 일본총영사 사이의 회담에서 1)排日 및 일화배척의 근절, 2)한인독립운동자들의 인도와 그 책동 방지, 3)제3국으로부터의 고문 및 교관의 초청, 무기수입, 자본수입의 중단과 그 분야에서의 일본과의 합작이라는 일본의 3개항 요구사항에 대해 중국 쪽이 긍정적 반응을 보인 것이었다.36)
日本總領事가 中國政府에 金九 체포 교섭
수마 총영사는 낙양군관학교 한인특별반 문제를 중국정부에 항의하고, 谷正倫 경비총사령에게 金九 체포 문제를 교섭했다.
『대역(大逆) 金九를 우리가 체포하려는데 입적(入籍)이니 무엇이니 딴 말을 해선 안 되오』
金九가 중국 국적을 취득했다는 등의 핑계로 자기네가 金九를 체포하는 것을 방해하지 말라는 것이었다.
『일본에서 고액의 현상금을 걸었는데, 金九를 내가 체포하면 그 상금을 내게 주시오』
곡정륜은 이러한 수마와의 교섭내용을 金九에게 알려 주면서 남경에서는 각별히 조심하라고 부탁했다. 이렇게 하여 낙양군관학교 한인특별반은 제1기 졸업생을 낸 뒤에 다시 수용하지 말라는 상부의 명령을 받았다는 것이다.37)
낙양군관학교 한인특별반의 1년 과정반에는 신체에 이상만 없으면 입학할 수 있었다. 그러나 다른 중국군관학교에서는 입학을 허락한다 하더라도 중국어는 말할 것도 없고 중학 졸업 이상의 학력이 있어야 했다. 金九는 각처에서 모집해 온 한인청년들을 중국군관학교에 입학할 수 있을 만한 실력을 갖추도록 훈련시키려고 한 것이었다.
학생훈련소 설치 사실은 대외적으로 철저하게 비밀에 부쳐졌다. 그리하여 한국특무대독립군 대원들조차도 학생훈련소의 무단출입이 금지되었고, 학생훈련소 훈련생들 역시 특무대독립군 본부에 마음대로 내왕하지 못했다.
학생훈련소에는 「朝鮮日報」, 「東亞日報」, 「大阪每日新聞」, 「大公報」 등의 신문들과 잡지류 및 각종 서적들이 비치되어 있었다. 훈련생들은 오전 7시에 일어나서 오후 10시에 취침했는데, 이들에게 실시된 예비교육은 일정한 수업시간이 편성되지 않았고, 학식이 있는 대원의 주도 아래 중국어·기하·대수 등의 자율학습을 했다.38) 훈련생의 지도감독은 김동우가 맡았고, 金九의 아들 金仁과 賀應武라는 안공근의 친척이 훈련생들과 합숙하면서 훈련생들의 일과를 관리했다.39)
金九와 金元鳳이 같이 單一大黨 만든다고 報道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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金九, 金元鳳, 李靑天 등의 제휴에 의한 單一大黨 조직설을 보도한 1935년 3월2일자「東亞日報」. |
〈모처착 정보에 의하면 해외에, 특히 상해·남경·북경 등지의 민족운동자와 공산주의자들이 최근에 이르러 대동단결을 하야 가지고 단일대당(單一大黨)을 조직하기로 되었다 한다. 곧 상해를 근거로 하고 있는 민족주의자로 직접행동파의 거두인 김구 일파와 공산주의적 색채가 농후한 의열단 수령 김원봉 일파가 최근에 이르러 합작을 하고 신한독립당의 수령 이청천과도 최근에 전기 2파가 합작을 하였다 한다. 그리하여 종래에는 민족주의자와 공산주의자가 각기 반목 질시하는 경향이 현저하던 것이 최근에 이르러 합동이 되고 또는 다소의 포옹되지 아니하던 민족당들도 모두 합동하야 단일대당을 조직하고 있는 것은 비상한 주목을 끌게 되었다. 그 까닭에 경무국에서는 각 파의 행동을 엄밀히 내사하기로 하고 상해 이시이 이타로(石射猪太郞) 총영사에게 민족 공산 등 각 파의 태도를 조사하여 보내도록 발첩을 하였다. 이 회보를 기다려 경무국으로서도 상해·남경·북경 등 각지에 근거를 둔 공산주의자와 민족주의자의 단일대당에 관한 대책을 세우리라 한다.〉40)
「모처착 정보」의 출처가 어디인지는 분명하지 않으나, 기사의 내용으로 보아서 단일신당 결성을 추진하는 쪽에서 흘린 정보였던 것이 틀림없다. 이 기사는 한달 뒤에 그대로 샌프란시스코의 「新韓民報」에 전재되었다. 「新韓民報」에는 이 기사 뒤에 다음과 같은 기사가 함께 실려 있어서 주목된다.
〈모처착 정보에 의하면 신한독립당의 군대양성계획은 이청천씨의 수중에서 실현되고 있다고 한다. 그리하야 종래에 사이가 좋지 않던 김구와 이청천도 근간에 대활동이 실현되어, 이청천은 이미 남경군관학교의 교관이 되어가지고 각지에서 군관생을 모집하야 군관학교에 입학 졸업케 한 후 각지에 파송하야 그 임무를 다하게 한다 하며, 이청천은 물론 김원봉과도 완전히 합일되었다고 한다.〉41)
이 기사로 미루어 앞의 기사도 이청천派에서 보낸 정보였던 것으로 여겨진다.
臨時議政院에 편지 보내
임시정부 폐지 문제로 독립운동자들 사이에 논란이 분분하자 金九는 임시정부를 적극적으로 옹호하고 나섰다. 낙양군관학교 한인특별반 운영에 힘을 기울이면서 독자적인 활동을 하는 동안 임시정부와는 소원해져 있었으나, 그렇다고 위기에 처한 임시정부를 팔장을 끼고 바라보고 있을 수만은 없었던 것이다. 그것은 자신이 심혈을 기울여 지켜온 임시정부에 복귀하는 계기도 될 수 있었을 것이다. 金九는 5월19일에 「臨時議政院諸公에게 告함」이라는 편지를 직접 써서 보냈다. 그는 이 편지에서 자신이 지금 진행하고 있는 활동이 임시정부에서 맡긴 임무라는 점을 강조했다.
〈九는 연전에 임시정부에서 특위(特委)의 임무를 봉승하여 그 지정범위 내에서 지금까지 능력이 미치는 대로는 충성을 다하여 사명을 욕되지 않도록 노력하는 바, 지금 전문에 의하면 아직 명실이 상부하지 않는 대당 조직의 미명을 가지고 임정 법인의 해소를 도모하는 인사들이 있다 하니 과연 그런가 아닌가. 이제까지는 우리 독립운동계에 대단체들과 정부라는 거짓이름을 가지고 나타났던 일까지 있었으나, 우리 임정같이 위대한 사적을 이룩한 것은 일찍이 견문하지 못했다. …〉
金九는 이봉창과 윤봉길의 의거도 임시정부의 업적임을 상기시키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동양 화난의 괴수인 일황을 꾸짖어 벌하고 그의 장수와 신하를 처형한 것이 우리의 신성한 임시정부이다. 한족의 피를 가지고 국권국토를 광복하려는 한인은 거개 임정을 誠心擁戴(성심 옹대)할 의무가 있다. 우리 정계에는 세상에 보기드문 악례가 있다. 자기 필요로 임정 직원이 되었다가도 개인의사에 불만이 있는 때에는 헌신짝처럼 벗어 던지고 반역을 꾀함이 한두 사람에 그치지 않았다. 지금 여러분이 九 역시 그런 無義無信輩(무의무신배)로 같이 간주하는가. 九는 비록 직임을 가지기는 불능하나 국민된 책임만은 銘心刻骨(명심각골)하고 모험분투한다. … 九는 일심으로 임무를 다하여 홀로 선열의 혼령을 위로하고 이것으로 임정의 책임을 다하고저 노력 중이다.…〉
金九는 자신은 결코 민족통일을 반대하는 것이 아니라 진정한 통일을 요망하고 있으나, 임시정부를 해체하는 것은 천만부당하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과거에 軍統[군사통일회의], 國大[국민대표대회] 등에서보다 질적·양적으로 확실한 신념이 생길 때까지는 임정에서 위임해 준 특무에 본의를 수행할 것을 미리 말하여 둔다. 전례에 비추어 우리의 금후 통일은 해외 몇 개 단체나 몇몇 인사의 책동으로만 넉넉지 않고 내외지를 통하여 전 민족의 대표적 의사로 되지 못하면 과거 연극이 도로 될까 염려한다. … 임정법인문제는 용이하게 提擧〔제거: 다룸〕함은 천만부당하다. …〉42)
이처럼 金九는 대일전선통일동맹이 주도한 통일운동은 1921년의 군사통일회의나 1923년의 국민대표대회 때와 마찬가지로 全민족의 통일된 의사를 반영한 진정한 통일운동체가 아니라고 매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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金九가 臨時議政院 의원들에게 보낸 1935년 5월19일자 편지. |
國務委員 7명 중 5명이 사직해
金九의 이러한 경고성 편지에도 불구하고 한국독립당은 5월25일부터 사흘 동안 항주에서 임시대표대회를 열어 석 달 전의 제7차 대표대회의 결의를 번복하고 각 혁명단체대표회에 참석하기로 결의했다. 그것은 그동안 김두봉 등 신당 참여파들이 중립파들과 조소앙 등 반대파들을 집요하게 설득한 결과였다.43) 그러나 송병조, 차이석, 조완구, 이동녕, 李始榮, 김붕준 등은 극력 반대했다. 통일이란 미명 아래 공산주의자인 김원봉 일파의 권모가 내포되어 있으므로, 공산주의자들과 통일 운운하는 것은 결국 그들에게 기만 이용만 당하는 것이라는 생각에서였다.44) 그러나 반대파였던 조소앙·박창세 등도 찬성 쪽으로 바뀌어 한국독립당을 해체하고 신당결성에 참여하기로 결정되고, 당원 70여 명이 신당에 합류했다.45) 그리고 이사장 송병조를 비롯한 반대파들은 신당참여파들과 결별을 선언하고 임시정부를 사수하기로 결의했다.46)
이렇게 하여 1년 넘어 우여곡절을 겪은 신당조직 운동은 마침내 1935년 7월5일에 民族革命黨의 결성을 보게 되었다. 이때의 일을 金九는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그로부터 소위 5당 통일회의가 개최되니 의열단, 신한독립당, 조선혁명당, 한국독립당, 미주 대한인독립당이 통합하여 조선민족혁명당이 탄생하였다. 5당 통일 속에는 임시정부를 눈엣가시로 보는 의열단원 김두봉, 김약산[金若山: 김원봉] 등의 임시정부 취소운동이 극렬하였다. 당시 국무위원 김규식, 조소앙, 최동오, 송병조, 차이석, 양기탁, 柳東說(유동열) 일곱 사람 가운데 김규식, 조소앙, 최동오, 양기탁, 유동열 다섯 사람은 통일에 심취하여 임시정부 파괴에 무관심하였다. 이것을 본 김두봉은 임시 소재지인 항주에 가서 송병조, 차이석 양인을 보고, 『5당 통일이 되는 차제에 명패만 남은 임시정부를 존재케 할 필요가 없으니 취소하여 버리자』고 강경하게 주장하였으나, 송병조와 차이석 두 사람은 강경히 반대하였다. 국무위원 일곱 사람 가운데 다섯 사람이 직책을 내놓으니, 국무회의를 진행시킬 수가 없었다.〉47)
金九가 김두봉을 의열단원이라고 한 것은 착오이다. 김두봉은 한국독립당의 대표로 통일동맹의 신당결성 작업에 참가하고 있었다. 국무위원 다섯 사람은 따로따로 임시의정원에 사표를 제출하고 민족혁명당 결성작업에 참여했다. 조소앙은 사직을 하게 된 경위를 가장 자세하게 적었는데, 그는 이번의 신당 운동은 종래의 임시정부 방침이었다고 주장했다. 그러면서도 의정원 의원직은 사임하지 않았다. 그는 김규식과 김두봉과 함께 신당의 규약제정위원으로 선임되었다.48) 양기탁은 4월27일에, 김규식은 5월25일에, 조소앙은 6월19일에, 최동오는 각 혁명단체대표대회가 열리고 있던 6월26일에 각각 사표를 제출했다. 유동열의 사표제출 날짜는 확실하지 않다.49) 조소앙과 함께 한국독립당 대표로 참석한 양기탁은 신당 위원장에 내정되었고, 대일전선통일동맹 결성 때부터 주동적 역할을 했던 김규식은 미주 한인독립당 대표자격으로 참여했다. 최동오와 유동열은 만주에서 결성된 조선혁명당 대표였다.
「韓國民族革命黨」이냐 「朝鮮民族革命黨」이냐
6월 초순 들어 통일동맹 중앙 간부 등이 중국 국민정부 군정부 당국에 대하여 〈새로 조직되는 재중 한국인 독립운동단체의 행동은 종래와 같은 지리멸렬한 것이 아니라 하나의 통제 아래 원대한 이상을 향하여 매진하는 것으로서, 비단 한민족의 이익뿐만 아니라 나아가서는 중국 전체의 민중을 행복으로 이끌 것은 명백하다. 따라서 중국 정부에서는 상당한 원조를 해줄 것을 바란다〉는 청원서를 제출했다.50) 그것은 신당운동의 직접적인 동기가 임박한 대일 전면전을 앞두고 金九파에 맞서서 중국 국민정부의 지원을 기대한 데서 나온 것임을 말해 준다.
6월25일부터 28일까지 열린 신당창립 예비회의에 이어 6월28일부터 7월4일까지 신당창립 대표회가 열려, 신당의 黨名·黨議·黨綱·政策·黨章이 결정되었다.
가장 논란이 된 것은 당명 문제였다. 「민족혁명당」 앞에 「한국」이라는 국명을 붙일 것인지, 「조선」이라는 국명을 붙일 것인지를 두고 의견이 대립되었다. 의열단 쪽에서는 「조선」을 주장했고, 한국독립당 쪽에서는 「한국」을 주장하여 회의가 결렬될 위기에까지 몰렸다. 김두봉이 「조선」도 「한국」도 떼어 버리고 그냥 「민족혁명당」으로 하자고 중재안을 제안하여 그대로 채택되었다. 그리하여 중국 쪽에 대해서는 한국민족혁명당으로, 국내 민중에 대해서는 조선민족혁명당으로, 서양 여러 나라에 대해서는 Korean Revolution Association으로 쓰기로 했다.51)
신당창립대회에 대한 일본 검찰의 정보 보고서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포함되어 있어서 주목된다.
앞서 열렸던 신당창립 예비회의에서는 양기탁이 위원장으로 내정되어 있었으나, 코민테른에서 파견되어 이 회의를 이면에서 지도하고 있던 張權相이 『코민테른에서는 金九를 민족파 거두로 인정하고 있다』고 주장하면서, 金九를 위원장으로 선출하도록 노력했으나, 金九 쪽에서 응할 태세가 아니어서 위원장 자리는 당분간 결원으로 두기로 하고, 양기탁은 감찰부장으로 임명하게 되었다는 것이었다.52)
장권상이란 이 무렵 중국공산당에 가입하여 상해에서 활동하고 있던 張建相(장건상)53)을 지칭하는 것 같으나, 이러한 일본 검찰의 정보보고를 확인할 만한 다른 자료는 발견되지 않는다. 이 무렵 장건상은 의열단의 고문으로 활동하고 있었으므로 金九 문제를 두고 김원봉과 협의했을 가능성은 충분히 있다. 장건상의 권고설과는 관계없이 김원봉이 金九에게 당의 위원장과 군관학교의 최고지위를 주겠다면서 입당을 간청했다는 증언은 있다.54)
신당창립대회에서는 또한 11개의 결의안이 채택되었는데, 그 가운데에는 임시정부를 옹호하고(제1항), 임시정부의 헌법을 개정한다(제2항)는 항목이 포함되어 있었다. 그것은 임시정부 옹호파들의 주장을 반영한 것처럼 보이나, 임시정부의 헌법을 개정한다고 결의한 것은 이때에 시행되고 있던 임시약헌의 규정에 근거해서 합법적으로 임시정부의 기능을 정지시킬 수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일 것이다. 유일 독립당의 출현을 전제로 하고 1927년에 개정된 임시약헌은 「대한민국의 최고권력은 임시의정원이 이를 가짐. 단, 광복운동자의 대단결인 당이 완성된 때에는 국가의 최고 권력이 이 당에 있음」(제2조)이라고 규정되어 있고, 헌법 개정조항에서도 「광복운동자의 대단결인 당이 완성된 때에는 이 당에서 개정함」(제49조 제2항)이라고 되어 있었다.55) 그러므로 새로 결성되는 민족혁명당이 〈독립운동자의 대단결인 당〉이 될 것이므로 국가의 최고권력, 곧 임시정부의 권능도 자신들이 행사할 것이고, 그것에 필요한 개헌도 자신들이 할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金元鳳이 書記長으로 實權 장악
민족혁명당은 7월5일에 결당식을 거행했다. 결당식에서는 당의·당강 등을채택하고 중앙집행위원 15명과 후보위원 4명, 중앙검사위원 5명과 후보위원 1명을 선출했다. 중앙집행위원에는 김원봉·김두봉·김규식·이청천·최동오·윤기섭·조소앙·신익희 등이 망라되었고, 중앙집행위원장의 선출은 보류되었다. 양기탁과 홍진은 중앙검사위원으로 선출되었다.
이튿날 열린 제1차 중앙집행위원회에서는 당을 실제로 이끌어 갈 부서를 결정하고 그 책임자를 선정했는데, 김원봉은 당무를 총괄하고 예산 결산의 편성과 재정 수지를 관장하는 서기장으로 선임되었다. 김두봉은 조직부장, 최동오는 선전부장, 이청천은 군사부장, 김규식은 국내외 동포 문제를 담당할 국민부장, 윤기섭은 조련부장에 선정되었다. 조소앙과 신익희는 국민부 부원으로 선정되었다.
신당 결성에 참가한 각 단체들은 기존의 당원과 재산을 모두 민족혁명당에 인계하도록 되어 있었다. 그리하여 7월25일까지 인계가 완료되었는데, 그 내역은 이 무렵의 독립운동단체들의 실상을 짐작하게 하는 것이어서 주목할 만한 가치가 있다.
의열단은 그때까지 양성한 군관학교 훈련생 및 졸업자 100여 명과 군관학교 재학생 등을 포함한 단원 200여 명, 그리고 재산은 중국국민당 중앙당부로부터 매달 지급되는 월수 정액 3,000元(원), 한국독립당은 당원 70여 명과 인쇄기계 및 그밖의 비품, 월수 정액 600원을 인계한다고 했다. 이 600원의 월수 정액은 한국독립당 광동지부가 중국국민당 광동성당부로부터 받는 300원, 강소성당부로부터 받는 150원, 절강성 항주당부로부터 받는 150원을 말하는 것이었다. 신한독립당이 인계한 것은 군관학교 훈련생 및 졸업자 50여 명, 만주지방에 있는 당원들을 포함한 당원 600여 명, 월수 정액 500원이었다. 월수 정액은 중국국민당 중앙당부로부터 300원, 전 동북의용군 사령관 李杜(이두)로부터 받는 100원, 개인기부 100원이었다. 조선혁명당은 남만주 일대에 있는 당원 1,000여 명과 무기(장총·단총·기관총 등) 400여 정을 인계한다고 했고, 월수 정액은 불명이었다. 그리고 미국에 있는 대한독립당은, 당원은 200여 명이고 수입과 비품은 자세하지 않다고 했다.56)
「民主集權制」 政權樹立 표방
민족혁명당의 이념과 운동방향은 당의와 당강에 잘 표명되어 있다. 먼저 당의에서는 혁명적 수단으로 일본의 침략세력을 박멸하여 국토와 주권을 회복하고 〈정치·경제·교육의 균등을 기초로 한 진정한 민주공화국을 건설하여, 국민 전체의 생활의 평등을 확보하고, 나아가 세계 인류의 평등과 행복을 촉진한다〉고 하여 이 무렵 중국 관내 지역의 독립운동단체들이 일반적으로 지향하던 삼균주의를 기반으로 한 민주공화국 건설이 당의 기본노선임을 천명했다.
이어 당강에서는 독립한 뒤에 수립할 국가의 기본방향과 정책을 17개조로 제시했는데, 가장 주목되는 것은 「봉건세력 및 일체의 반혁명세력을 숙청하고, 그럼으로써 민주집권제의 정권을 수립한다」(제2항)고 하여, 민주집권주의에 의한 정권수립을 표방한 것이었다.57)
「민주집권」 또는 「민주집중제」란, 레닌이 볼셰비키黨 조직 활동의 원칙으로 제창한 이른바 민주적 중앙집권주의(democratic centralism)를 뜻하는 것이었다. 그것은 당원에 의한 민주적 선거에 따라 선출된 지도부를 중심으로 중앙집권주의적으로 당조직을 운영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스탈린 시대의 반대파에 대한 대량숙청도 바로 이 민주적 중앙집권주의의 이름으로 단행되었던 것은 두루 알려진 사실이다. 그리고 그러한 제도에 의한 정권이란 소비에트 체제를 뜻하는 것이었음은 말할 나위도 없다. 경제제도로는 토지는 국유화하여 농민에게 분급하고, 대규모의 생산기관과 독점적 기업은 국영으로 하며, 국민의 일체의 경제활동은 국가의 계획 아래 통제한다고 하여 사회주의 경제체제를 표방했다. 이러한 주장은 신당 창당에 참여한 다른 정당들의 강령에도 천명되어 있었다.
민족혁명당의 결성에 대해 동포사회의 지식인들은, 각 파의 독립운동단체들이 金九파의 전횡을 견제하고 자신들의 재정난을 타개하기 위하여 조선민족운동의 통일이라는 명분 아래 소련과 중국좌경혁명분자의 원조를 받고 있는 의열단과 합동하여 운동자금 마련을 기대하고 신당을 조직한 것이라고 분석했다. 그러나 가장 유력한 민족주의 세력인 金九파 및 국민회 등 在美 각종단체와 신당에 참여한 단체들의 간부이면서도 신당에 참여하지 않은 인사들의 반대도 만만치 않기 때문에 앞으로 신당과 金九 일파 사이에는 맹렬한 쟁투가 벌어지리라는 것이 그들의 전망이었다고 한다.58)
學生訓練所를 龍池山의 澄光寺로 옮겨
남경에서 신당결성 작업이 진행되고 있는 동안 金九는 학생훈련소 문제로 노심초사했다. 6월경이 되어 학생수가 30명가량 되자 장소가 협소하고 또 훈련소의 존재가 일본경찰에 알려지게 되었다. 그리하여 황급히 훈련소를 옮기기로 했다. 金九는 낙양과 그밖의 지역에 사람을 파견하고 또 자신이 직접 낙양을 시찰하고 장소를 물색한 끝에, 남경에서 100리쯤 떨어진 강소성 宜興縣 張渚鎭 龍池山에 있는 澄光寺(징광사)로 훈련소를 정하고 6월22일에 학생들을 버스에 분승시켜 그곳으로 옮겼다.
엄항섭과 학생 6명과 함께 징광사에 도착한 金九는 전날 먼저 도착해 있던 학생 10명도 같이 불러 모아 놓고 한 시간 동안 훈시를 했다. 金九는 이때에 치하포 사건 이야기를 학생들에게 들려주었다. 변복한 일본인을 보고 明成皇后를 살해한 왜놈일 것이라고 생각하고 죽일 결심을 했고, 그를 처치한 다음 집에 돌아와서 대기하다가 체포되어 해주감옥에 투옥되었다가 인천감옥으로 이송되었고, 사형선고를 받자 소문을 듣고 많은 사람들이 찾아왔던 일, 특히 江華島의 金周卿이 자신의 전 재산을 털어 석방운동을 벌였으나 끝내 실패하고 그 자신은 블라디보스토크로 도망치고, 자기는 탈옥했던 일 등을 자세히 이야기하고, 그 뒤의 일은 뒷날 이야기해 주겠다고 말했다.59)
金九의 이야기가 끝나자 엄항섭은 감동하고 있는 학생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여러분은 金九 선생의 훈시를 잘 지켜서 앞으로 한국독립을 위해 정성을 다하는 훌륭한 혁명가가 되기 바랍니다』
金九는 징광사에서 두세 밤 묵고 나서 학생들이 다 모이자 그곳을 떠났다.60)
학생훈련소 설립 초기에는 김동우가 대원들의 감독 책임을 맡고 있었으나, 징광사로 옮긴 뒤에는 엄항섭이 嘉興으로부터 와서 학생 총감독을 맡아 학생들과 함께 지냈다. 엄항섭은 金九의 자금지원이 줄어들자 이동녕과 함께 金九와 안공근에게 불만을 품고 있었고, 그 때문에 안공근은 이동녕과 엄항섭이 신당조직에 참가하는 것이 아닌가 의심하고 지원금을 중단하기까지 했었다.
1935년 6, 7월경부터 중국 국민정부는 매달 5,000원씩 지급하던 원조금을 2,500원 내지 3,000원으로 감액하여 金九도 활동자금이 넉넉지 못했다.61) 그러나 두 사람은 관망적 태도를 보이고 있을 뿐이었고, 엄항섭은 항주의 중국공안국 등에 취직운동을 해보았으나 뜻대로 되지 않았다. 그리하여 5월경에 金九에게 사정하여 매달 100여 원씩을 다시 지원받게 되었다.62)
7월 중순이 되어 金九는 다시 징광사를 방문했다. 이때에 그는 학생들에게 지난번 훈화의 후속편을 들려주었다. 그는 절에 오니까 옛날 생각이 난다면서 인천감옥을 탈옥하여 삼남지방을 방랑하던 끝에 마곡사에서 머리를 깎고 승려가 되었던 이야기를 자세히 했다. 이야기를 마치면서 金九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여러분은 부모 곁을 떠나 타향에서, 더구나 이와 같은 절간에서 생활하는 것이 여간 처량하지 않을 것이오. 한편으로 어쩌면 이러한 생활이 무의미한 것 같은 생각이 들지도 모르겠소. 그러나 이 모든 것이 조국광복을 위한 준비교육이기 때문에 열심히 공부해 주기 바라오. 아마 여러분도 긴 머리카락을 자를 때에는 매우 원통하고 슬픈 느낌이 들었겠지만, 이 역시 조국광복을 위한 것으로 생각해 주기 바라오』
金九는 사흘 동안 징광사에 묵으면서 주변상황을 둘러보고 나서 혼자서 남경으로 돌아갔다.63)
추석날 밤에 울음판 벌어지기도
金九는 이 해 추석을 징광사에 가서 훈련생들과 함께 지냈다. 북간도 용정의 은진중학 출신으로서 은진중학 교사 明熙朝의 감화를 받고 남경으로 가서 학생훈련소에 입소하여 훈련을 받았던 羅哲(본명 羅士行)은 이때의 일을 다음과 같이 회상했다.
『1935년 8월 추석날 밤이 아주 인상 깊게 기억에 남아 있습니다. 金九 선생을 비롯한 여러 독립운동 지도자들이 그날을 우리와 함께 지내려고 용지사(징광사)에 오셨지요. 그래서 중국의 추석음식인 월병(月餠)을 먹어 가면서, 밤이 새도록 여러 이야기를 나누었지요. 지나간 나라 일들을 되새기다가 그만 격앙하여 모두들 목을 놓고 통곡하는 바람에 큰 울음판이 벌어지기도 했지요. 또 이탈리아의 에티오피아 침공 가능성 등 국제적으로 세계전쟁이 다시 일어날 기미가 보인다 하여, 그렇게만 되면 우리도 독립할 가능성이 생긴다는 등의 세계정세 이야기도 많이 나누었고요. 또 金九 선생이 명성황후를 시해한 원수를 갚느라고 치하포에서 일인을 죽여 그 피를 마시던 이야기를 소상하게 해주시는 걸 듣기도 했지요』64)
학생훈련소 학생들은 문학에 재능이 있는 송몽규가 중심이 되어 300여 쪽에 이르는 등사판 잡지를 만들기도 했다. 金九는 이를 몹시 칭찬하면서 자신이 참여했던 신민회의 경험을 회상하여 대원들 모두가 「새로운 백성이 되어야 한다」는 뜻에서 잡지 이름을 「新民」이라고 지어 주었다.65)
그러나 징광사에서의 활동은 오래가지 못했다. 9월에 징광사와의 임대계약 기간이 만료됨에 따라 대원들은 다시 남경으로 돌아왔다. 먼저 엄항섭이 9월 초에 돌아오고, 이어 9월16일부터 18일까지 사흘 동안에 훈련생 27명이 3대로 나뉘어 철수했다. 일부 훈련생들은 목장영 고안리 1호 한국특무대독립군 본부에 수용되었으나, 대부분은 곽낙원 여사가 거처하는 八寶後街 23호의 집에서 합숙했다. 그러다가 훈련생 4명이 차례로 남경주재 일본총영사관 경찰에 체포되는 바람에 10월 초순에 전원이 남경 성내 藍旗街 8호로 다시 옮겼고, 곽낙원 여사도 다른 곳으로 거처를 옮겼다.66)
金九는 학생훈련소의 예비훈련이 어느 정도 진척되자 이들을 남경의 중앙육군군관학교에 입학시키기 위하여 국민정부와 교섭했다. 그러나 중국 정부의 입장과 일본의 집요한 압력 때문에 그것은 실현되기 어려운 일이었다. 金九는 차선책으로 학생훈련소 대원들을 중국기술학교에 입학시키려고 했으나 그것 또한 여의치 않았다.67) 그리하여 金九는 10월3일경과 10월25일경에 두 차례 학생들이 합숙하고 있는 곳을 방문하여 학생들을 군관학교에 입학시키지 못한 것에 대해 유감의 뜻을 표시하고, 학생들에게 15원에서 20원씩의 여비를 지급하여 해산시켰다. 이로써 학생훈련소는 사실상 폐쇄되었다.68)
金九는 다른 한편으로 특무대독립군 대원들에게 특무활동 지침을 하달하여 국내·만주·일본 등지로 파견했다. 그는 1935년 9월20일 무렵부터 11월14일까지 50여 일 동안 11차례에 걸쳐 19명의 대원을 상해·간도·국내로 파견했다. 그러고도 훈련생 9명이 남아 있었다.
臨時政府 옹호 캠페인 벌여
金九는 민족혁명당이 결성되자 임시정부를 적극적으로 옹호하면서 민족혁명당을 규탄하고 나섰다. 그는 광동 중산대학 한국인 학생들이 발행하는 「빛(光)」 7월호에 「임시정부에 대하여」라는 글을 기고했다.69) 이 글에서 金九는 〈임시정부를 구성하는 자연인에 대해서는 얼마든지 질책할 수 있으나 법인인 임시정부의 정부 자체에 대해서는 누구든지 손을 댈 수 없음을 정중히 언명한다〉고 하여 임시정부의 정통성을 강조하고, 신당결성 운동에 대해서는 〈과거 통일운동의 실패는 같은 자리에서 맹약하고 단체를 조직하면서, 조직한 뒤에는 표변하여 탈퇴하고 다시 신단체를 조직한다. 신단체를 조직하면 이를 제지하는 것이 당연함에도 불구하고 그것과 손잡고 일을 한다. 이것이 곧 지난날의 통일운동이었다〉70)고 비꼬았다.
이어 金九는 7월8일에 다시 「임시정부에 대하여」라는 장문의 글을 써서 샌프란시스코의 「新韓民報」에 보냈다. 金九는 이 글에서 먼저 〈지금 우리 운동계의 괴이한 현상이 너무나 함묵을 계속할 길 없어 귀보를 통하야 내외동포에게, 더욱 미주·하와이·멕시코 재류 동지 동포에게 간략한 말씀을 드리나이다〉라고 편지를 쓰게 된 동기를 밝힌 다음, 통일동맹의 통일론을 〈당치않은 국가론, 같잖은 혁명론〉이라고 신랄하게 비판했다.
〈九는 연래 환경관계로 모든 일에 참관이 없이 다만 일종 책임을 힘쓸 뿐이오 모든 것은 현명한 동지들께 ○○하심을 감사할 뿐입니다. 근일에 통일동맹으로서 국외 각 단체의 통일을 도모하는 바, 이 활동에 대하여 누구나 그 완전하게 자리가 잡히어 우리 민족적 광복운동의 총집중될 기본 역량이 되기를 충심으로 기대하지 않으리요. 유감이나마 당치 않은 국가론, 같잖은 혁명론, 투기적 과대평가가 임시정부 존폐 문제를 가지고 예전 연극을 거듭하려 하니, 진실로 가석한 일입니다. 더욱 냉정한 안목으로 원칙을 붙잡고 본의 아닌 자가말살의 후회를 없도록 할 이 때가 아닙니까. 이를 잘 살피는 이도 많지마는 현란한 관념으로 자가의혹을 면치 못하는 이도 없지 않은 사실인 까닭에 임시정부의 존재한 의의와 공적이며 통일의 진체와 현 운동자의 착오며 미주·하와이·멕시코 재류동포의 지난 날의 공로와 장래에 더욱 면려할 희망 등을 짧은 지면이나마 들어 말씀코자 하오니 힘써 이해하시기를 거듭 바랍니다.〉
『예전 연극으로 피의 臨時政府 역사 허물지 못해…』
「예전의 연극」이란 군사통일회의나 국민대표대회와 같은 움직임을 통한 임시정부 해체론을 지칭한 것이었다. 金九는 임시정부를 해체할 수 없는 이유로 이봉창과 윤봉길 등의 희생에 의해서 17년 동안이나 지켜온 〈피의 임시정부〉 역사의 중요성과 의의를 다음과 같이 강조했다.
〈임시정부는 나라가 망한 후 십여 년 동안 모든 열혈의 결정으로 누가 이론을 가졌거나 토론이 없이 내외 각지의 각개 계급이 두말없이 성립시킨 것이 아닙니까. 선뜻 들어 이는 우리 주권행사의 최고 집중체이며, 국토의 일편을 못 찾았으나 내외국인의 스스로 승인코 주저없는 한국민의 대표기관이고 적의 통치에 대립된 적체단체로 해석 없이 표명된 것이 아닙니까. 뿐 아니라 당시 우리 동포로서는 극소수를 제한 외에는 전국적으로 직접·간접, 명시·묵시로 일치하였던 사실을 누가 부인하겠습니까.
그 후로 다소간 여러 가지 운동이 그를 압도코저 하였으나 사실상 그만한 기초역량이 없으므로 자기네의 한 부인 연극만 지었던 것이 아닙니까. 비록 여러 사정이 처음과 같지 않아 임정의 진행이 부족한 것도 사실이나, 엄연한 정체가 계속하여 십칠년을 내려온 것이 어찌 우연한 일일까요. 이는 물을 것 없이 정체가 그런 정체인 까닭인 것입니다. 이런 고로 우리의 특수한 사명을 가진 이 정체는 비록 부인 명의뿐일지라도 그 중대함이 이러하거든 하물며 대다수의 국민의 마음속에 사라지지 않은 것이리까. …
민국 6, 7년 이래로 안팎 정세가 점점 핍박이 심하였으나 엄연히 지켜올 뿐 아니라 형세가 악렬할수록 운동은 더욱 맹렬하여, 십사년 일월 팔일과 사월 이십구일의 이봉창·윤봉길 양 의사의 탁절(卓絶)한 사업이 얼마나 찬란 조요(照耀)하였습니까. 광명하고 거룩한 피의 임시정부입니다. 역대의 이런 의사네들의 열혈이 어찌 사라지리까.〉
그러면서 그는 통일동맹이 주도하고 있는 통일론을 반대하는 이유를 다음과 같이 밝혔다.
〈임시정부도 통일을 진심 갈력(竭力)하여 왔습니다. 실제로 힘썼습니다. 그러나 매양 시배(時輩)들은 다른 꿈의 통일을 그립니다. 사상상으로 정감상으로 갖은 기세를 합류하야 마치 통일은 자기네들이요, 임정만이 방해하는 듯이 의식적 선전, 무의식적 착각으로 분열과 괴상이 너무 혼란하였습니다. 그러나 정부는 통일의 진체를 받잡아 약헌에 분명한 조문으로 대당(大黨)의 최고권을 긍정하였습니다. 다만 대당은 완전한 집중체, 즉 내외 통합의 실질을 가질 것으로 순정한 민족적 국가사상이 박힌 그 요소라야만 능히 그 임무를 질 것입니다. 질적 원칙이 선명치 못하거나, 응당 집중하여야 할 양의 결함이 있거나, 일시적 결합으로 기초의 실질이 박약한 등으로는 통일체의 미성(未成)이요, 더욱 대당 운운의 임무를 가질 수 없으니, 광복운동자의 도덕과 양심으로는 당연히 시험적 과대평가를 못 할 것입니다. 그런즉 정세가 허하는 정도에서 순정한 운동역량을 크게 하기 위해 통일을 노력할 것이요, 사상으로 정감으로 불쾌할지라도, 그를 희생하고 이를 더욱 충실히 광명케 하는 것이 진정한 오늘 우리의 깊이 각오할 바라 합니다. …〉
『미주·하와이·멕시코同胞는 臨時政府를 지탱해 온 주추』
이처럼 金九는 민족혁명당이 임시약헌에 규정된 〈독립운동자의 대단결인 당〉이 결코 아니라고 강조한 것이다. 그러면서 그는 자신은 비록 임시정부의 직책을 맡고 있지는 않으나 임시정부에 대한 책임은 다할 것이라고 강조하고, 미주동포들의 임시정부에 대한 성원을 당부했다.
〈우리 광복운동에 대한 미주·하와이·멕시코 재류 동포의 깊은 관계와 또 거대한 공헌은 긴말할 것 없이 원년도로부터 지금까지 십팔년 동안에 거룩한 임무를 이행하야 온 바이 아닙니까. 더욱 임정에 대하야 오로지 정신과 물질로 옹호와 유지의 주추임은 사실입니다. 앞으로도 임정에 대한 위기가 깊어가는 이때이라 더욱 면려하며 대의를 굳게 잡고 흔들림없이 전시전종의 공명정대한 뿌리박힌 국수의 민덕을 빛내실 줄 믿습니다.
九는 임정의 책임은 스스로 믿기에 누구에게도 사양치 않습니다. 비록 직접 직무는 없다 하여도 자기의 책임감과 여러 의사들의 보여 준 바를 사무쳐 스스로 면려하며 있습니다.〉
그러면서 다음과 같은 말로 글을 맺었다.
〈이상 여러 말씀은 너무 지리한 듯합니다. 현하에 되어 가는 정세는 참으로 순하게 보이지 않습니다. 그리하여 밀절하게 주의하며 또는 임정 자신의 능률을 힘있게 하며 굳세게 지킴을 돕는 데 오늘의 힘쓸 바입니다. 그리하여야 진정한 통일도 촉성될 줄 믿으며 사나운 바람과 급한 비에 능히 끄떡없이 목적을 이루리라 합니다. 아! 내외 동포, 더욱 미주·하와이·멕시코 재류 동지 동포네의 굳센 힘을 거듭 빌며 이 말을 마칩니다.〉71)
이 편지는 金九가 민족혁명당과의 대결에서 미주동포들의 지지를 확보하기 위해 얼마나 신경을 쓰고 있었는지를 짐작하게 한다.
金九의 임시정부 옹호와 민족혁명당 규탄 캠페인은 신당결성에 참여하지 않은 다른 독립운동자 그룹을 임시정부 쪽으로 집결시키는 계기를 마련했다.
민족혁명당 불참을 선언하고 임시정부를 고수하고 있던 송병조와 차이석은 민족혁명당 반대세력들과의 연대방안을 적극적으로 강구했다. 먼저 형식상 민족혁명당에 참가는 했으나 사실상 독자적인 입장을 견지하고 있는 한국독립당 광동지부장 김붕준과 간사 楊明鎭과 연락을 취하고, 민족혁명당에 참가하지 않은 신한독립당의 閔丙吉과 협력하여 내부분열 공작을 벌이고, 신당의 지도부 구성에 불만을 품고 있는 조소앙 등 한국독립당계 인사들의 탈당을 유도하면서, 李始榮·조완구 등을 통하여 金九의 협조를 얻기로 한 것이다.72)
趙素昻 등 6명의 民族革命黨 탈당
민족혁명당은 당의 주도권 문제를 둘러싸고 출범하자마자 분열되었다. 중앙집행위원장도 선출하지 않고 서기장 김원봉과 조직부장 김두봉이 당무의 주도권을 행사했다. 김두봉은 한국독립당 소속이면서도 정치적으로는 의열단과 같은 입장을 취해 왔었다. 이러한 사실은 통상적인 당무에서뿐만 아니라 당의 앞으로의 진로 전반에 관해서도 의열단의 뜻이 강력하게 반영될 것임을 예고하는 것이었다.73)
민족혁명당이 결성된 지 석 달 만에 조소앙·박창세·문일민 등 한국독립당계 인사 6명은 탈당을 선언했다. 조소앙의 직접적인 탈당 동기는 인사문제에서 소외되었기 때문일 것이나, 그가 내세운 가장 근본적인 결별 이유는 이념의 차이였다. 조소앙 등 6명은 9월25일에 「한국독립당 재건선언」을 발표한 데 이어, 10월5일에는 한국독립당 임시 당무위원회의 명의로 「黨員同志에게 告함」이라는 장문의 성명서를 발표했다. 이 글에서 조소앙 등은 민족혁명당을 유물론에 입각하여 무산계급의 독재적 정치를 유일수단으로 하는 공산주의 정당으로 규정하고, 자신들이 탈당한 이유를 다음과 같이 밝혔다.
〈민족주의의 독립운동은 원칙상 사회주의자의 국제관과는 판연히 다른 감정과 이론을 가지는 것이다. 민족의 경제문제만을 중심으로 하여 국가의 말살과 주권의 포기와 자기 민족의 과정을 무시하는 공산주의자와는 한층 氷炭不相容(빙탄불상용)의 혈분적 상반성을 가지는 것이다. 만일 원칙상 상치되는 것을 서로 양해해서 일시적으로 敵對戰線을 확대 과장하려는 공동정책에서, 또는 자기중심의 진로를 획득하기 위해 동상이몽적 상호 이용의 천박한 소견만으로는 백발백불중의 결과에 爾詐我虞[이사아우: 너를 속이고 나는 즐김]의 幻劇(환극)을 산출할 뿐이니, 국내의 신간회와 국외의 촉성회의 합동이 곧 그러한 환극이었다.…〉74)
이처럼 조소앙이 민족혁명당의 중심세력인 의열단을 「혈분적 상반성을 가진」 공산주의자들로 몰아붙인 것은 그의 민족혁명당 참여동기를 의심스럽게 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 자신도 제정 위원의 한 사람으로 참여했던 민족혁명당의 당의와 당강이 그의 이론인 삼균주의에 입각해 있었기 때문에 그가 탈당의 명분으로 제시한 이념의 차이는 자기모순이었다. 국내의 신간회 운동과 중국 관내에서 추진되었던 민족유일당 촉성운동을 신랄하게 비판한 것은 金九의 민족혁명당 비판논리와 일치하는 것이어서 흥미롭다.
민족혁명당은 조소앙 등의 「한국독립당 재건선언」이 발표되자 김두봉·崔錫淳 등 한국독립당 출신을 항주로 급파해서 설득작업을 벌였다. 그러나 뒤이어 「당원동지에게 고함」이 발표되자 설득가망이 없다고 판단하고, 한국독립당의 원로 양기탁 명의로 「조소앙 등 6명의 반당사건에 관하여 일반동지에게 고함」이라는 성토문을 발표한 데 이어 10월20일에는 이들을 〈반당분자, 반혁명분자, 주구〉라고 규정하여 제명하고, 조소앙을 〈기회주의가 천품(天稟)인 변절자 조소앙〉이라고 맹렬히 비난했다.75)
조소앙 등 한국독립당 대표 6명에 이어 신한독립당의 대표로 민족혁명당 결성에 참가했던 홍진과 曹成煥도 탈당하여 처음부터 신당 참여를 거부하고 있던 같은 당의 민병길과 함께 한국독립당 재건에 참여했다.76)
(3) 臨時政府의 擁護團體로 韓國國民黨 결성
송병조와 차이석은 10월로 예정된 임시의정원의 정기회의를 통하여 임시정부의 기능을 정상화시키기로 했다. 두 사람은 남아 있는 두 국무위원이면서 송병조는 임시의정원 의장, 차이석은 부의장을 겸하고 있었다. 임시정부의 기능을 정상화시키기 위해서는 金九의 임시정부 복귀가 결정적으로 필요했다. 두 사람은 항주에 있는 이시영·조완구 등의 내응을 얻고, 가흥에 있는 이동녕과 연락하여 金九의 협조를 교섭했다. 金九의 협조란 당장에는 자금지원이었다. 金九는 이동녕을 통하여 임시의정원 회의경비로 500원을 송병조에게 보냈다. 송병조는 각 지방에 흩어져 있는 의정원 의원들에게 회의 소집을 통보하면서 출석자들에게는 여비를 보냈다.77)
趙素昻은 金九의 臨政복귀 반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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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5년 11월에 새로 구성된 臨時政府 國務委員들. 앞줄 오른쪽부터 李始榮·李東寧·趙琬九, 뒷줄 왼쪽부터 安秉祚·金九·曺成煥·車利錫(白凡紀念館 제공). |
의원 7명이 참석한 이튿날의 회의는 비공식 간담회로 진행되었다.78) 간담회의 내용은 공식회의록에는 누락되어 있으나, 일본 경찰의 정보보고에 따르면 다음과 같았다.
송병조는 재정상황보고에서 본 바와 같은 임시정부의 재정 궁핍상을 설명하고, 金九파의 협조를 얻어야 할 필요성을 역설했다. 그러나 조소앙·박창세 등 한국독립당 재건파는 극력 반대했다. 항주의 임시정부 판공처 습격사건 때에 金九 측근들에게 봉변을 당한 이래로 金九에게 반감을 가지고 있던 조소앙은 金九가 임시정부에 복귀하는 것은 곧 임시정부의 주도권을 金九 일파에 빼앗기는 것이라고 생각한 것이었다. 그때에 같이 봉변을 당했던 金澈은 1934년 6월29일에 사망하고 없었다.79)
임시의정원은 조소앙 등의 불참으로 성원이 되지 못하여 11월까지 유회를 거듭했다. 그러자 일부에서는 조소앙 일파는 민족혁명당 탈당을 가장하여 그 당의 밀명을 받고 임시정부를 허물기 위하여 합류한 것이 아니냐고 의심하면서 그들의 행동에 대해 다시 심의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하기까지 했다.
송병조는 김붕준과 양명진과 함께 조완구와 이시영을 만나서 대책을 협의한 결과, 조소앙 등은 나중에 설득하기로 하고 이동녕을 통하여 金九의 임시정부 복귀를 교섭하기로 결정했다. 그리하여 마침내 11월2일에 열린 의정원 회의에서 윤기섭 등 장기 결석의원 5명을 임시약헌 제23조 규정에 따라 제명함으로써 법정 정족수를 만든 다음 국무위원 보선을 실시하여 金九·이동녕·이시영·조완구, 조성환 5명을 국무원으로 선출했다. 국무위원의 임기는 1년이 남아 있었다. 조소앙은 김붕준과 양명진과 함께 임시의정원 상임위원으로 선출되었다.80)
南湖에 놀잇배 띄우고 臨時議政院 會議
이때의 일을 金九는 다음과 같이 간략하게, 그러나 퍽 실감나게 적어 놓았다.
〈이 무렵 나는 임시정부가 무정부 상태라는 조완구 형의 친서를 받고 심히 분노하여 급히 항주로 달려갔다. 그곳에 주재하던 김철은 이미 병사하였고, 5당 통일에 참가하였던 조소앙은 벌써 민족혁명당에서 탈퇴하였다. 그때에 항주에 주거하던 이시영, 조완구, 김붕준, 양소벽(양명진), 송병조, 차이석 등 의원들과 임시정부 유지문제를 협의하였다. 그 결과 의견이 일치되어 일동이 가흥에 도착하여 이동녕, 안공근, 안경근, 엄항섭, 김구 등이 남호에 놀잇배 한 척을 띄우고 선중에서 의회를 개최하였다. 이 회의에서 이동녕·조완구·김구 3인을 새로 국무위원으로 보선하니, 기존의 송병조·차이석을 합하여 모두 5인이 되어, 비로소 국무회의를 진행할 수 있게 되었다.〉81)
그러나 이때에 보선된 국무위원은 위의 세 사람에 이시영과 조성환을 합하여 다섯 사람이었고, 기존의 송병조와 차이석과 함께 국무위원은 모두 7명이 되었다.82) 이튿날 신임 국무위원 취임식을 거행한 데 이어 국무회의를 열어 책임주무원을 호선한 결과 주석에 이동녕, 내무장에 조완구, 외무장에 김구, 군무장에 조성환, 법무장에 이시영을 선임했다. 송병조와 차이석은 각각 재무장과 비서장으로 유임되었다.83)
이로써 金九는 윤봉길의 홍구공원 폭탄사건으로 1932년 4월에 상해를 떠난 뒤 3년 6개월 만에, 그리고 법적으로는 1933년 3월22일에 국무회의에서 국무위원직을 박탈당한 지 2년 8개월 만에 임시정부에 복귀했다. 임시정부 초창기부터 임시의정원 의장, 국무위원 등의 직책을 맡아서 고난을 겪어 온 원로들로 다시 구성된 임시정부는 국무위원 연명으로 동포들에게 보내는 포고문을 발표했다. 포고문은 임시정부를 말살하려는 책동에 맞서 그것을 사수하기 위해 분기할 것을 호소했다.84)
조직을 재정비한 임시정부는 11월 말에 항주에 있던 판공처를 중국 국민당 강소성당부소재지인 鎭江으로 옮기기로 했다. 이에 따라 11월 하순에 송병조, 차이석, 조성환, 조완구 등 국무위원들은 진강으로 이사하고, 金九는 남경으로 돌아왔다. 이로써 임시정부는 3년 반 동안의 항주시대를 마감하고 진강시대를 맞이하게 되었다.
國務委員 전원이 韓國國民黨 간부로 참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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韓國國民黨 결성을 보도한 1936년 2월1일자「東亞日報」. |
金九는 한국국민당을 결성하게 된 동기를 다음과 같이 적었다.
〈5당 통일이 형성될 당시부터 동지들은 단체조직을 주장하였으나, 나는 극히 만류하였다. 그 이유는, 다른 이들은 통일하자는데 내용이 복잡하여 아직 참가하지는 않았으나, 내가 어찌 차마 딴 단체를 조직하겠느냐 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조소앙이 한국독립당 재건설을 추진하니, 내가 단체를 조직하여도 통일의 파괴자는 아니며, 임시정부가 종종 위험을 당하는 것은 튼튼한 배경이 없었기 때문인데, 이제 임시정부를 옹호하는 단체가 필요하다 생각하고 한국국민당을 조직하였다.〉85)
한국국민당의 지도부는 金九를 이사장으로 하고, 7명의 이사(이동녕·송병조·조완구·차이석·김붕준·안공근·엄항섭)와 3명의 감사(이시영·조성환·양명진)로 구성되었다. 이는 국무위원 전원과 조소앙을 제외한 임시의정원 상임위원 두 사람이 모두 포함된 것이었다. 金九의 핵심측근인 안공근과 엄항섭이 이사에 포함되었고, 엄항섭은 또 중앙본부의 선전부장을 겸했다. 조직부장에는 金九파가 아닌 차이석이 선임되었다.86)
한국국민당의 이념과 독립운동 방략은 창립선언과 당의 및 당강에 잘 드러나 있다. 창립선언은 〈조국의 촌토를 회복하지 못하고 원수의 쇠사슬 아래 유린되야 애호(哀號)하는 동포의 울음소리는 의연하다. 이 어떤 까닭인가. 적의 세력이 강함도 원인의 하나이지마는 자가의 착오가 중요한 성분을 지었도다. 사상의 차이와 견해의 같지 않음과 조직의 무능한 것 등이 또한 적지 않은 원인의 하나이며, 기본적 정의 도덕의 산란, 현대적 종횡술책의 난용이 최대 원인이라 긍정치 아니치 못하리라〉87)고 하여 독립운동자들 사이의 내부갈등이 독립운동의 장애요인이었음을 지적했다. 그리고 당의에서는 정치·경제·교육의 균등이라는 삼균주의에 입각한 신민주공화국의 건설을 천명하고, 9개항의 구체적 사항을 표방했는데, 중요한 것을 들면, 1)국가주권 광복의 혁명적 의식을 국민에게 고취 환기하여 민족적 혁명역량을 총집중할 것, 2)엄밀한 조직하에 민중적 반항과 무력적 파괴를 적극적으로 진행할 것, 3)우리의 광복운동을 우호적으로 원조하는 국가 및 민족과 긴밀히 연락할 것, 5)토지와 대생산기관을 국유로 하고, 국민의 생활권을 평등하게 할 것, 8)독립운동에 대한 사이비 불순적 이론과 행동을 배격할 것, 9)임시정부를 옹호, 진전시킬 것 등이었다.88) 민족혁명당을 겨냥하여 〈사이비 불순적 이론과 행동〉을 배격한다고 말하고 임시정부를 옹호 진전시킨다고 천명하고 있는 것이 주목된다.
이러한 항목들은 1930년에 조직된 한국독립당의 당강과 기본적으로 맥이 같은 것이었다.
『國家가 없으면 民族을 保存할 수 없다』
구체적 활동의 여건이 어려울수록 필요한 것은 선전활동이었다. 한국국민당도 민족혁명당에 대항하여 정국을 임시정부 중심으로 끌고 가기 위해서는 역시 기관지를 발행하여 선전활동에 주력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리하여 1936년 3월15일자로 기관지 「韓民」을 발행했다. 신문 형태로 매달 한 번씩 발행된 「韓民」은 1938년 4월3일까지 17호가 발행되었고, 그 사이 두 번의 호외가 발행되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89) 「韓民」의 다음과 같은 「창간사」는 공산주의에 반대하면서도 토지와 기간산업의 국유화와 같은 사회주의제도를 표방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에서 느끼는 한국국민당의 이념적 고민을 잘 보여 준다.
〈자본제국주의가 발흥하기 시작한 이래로 침략과 약탈의 방식이 가장 과학적으로, 가장 조직적으로, 가장 치밀하고 교활하게 감행되어 정의 인도의 가면 아래서 약육강식의 악의 법칙은 점차 첨예화하고 심각해졌다. 과거의 약탈자는 다른 나라를 병탄하기 위해 그 통치권을 강탈한 것뿐이었으나 현대제국주의자는 여기에 만족하지 않고 민족마저 말살시켜 버렸다. 그러나 총검으로써 이 목적을 달성하려고 하지 않고 정치적 압박과 경제적 착취로 피정복자를 자멸시킨다.…
그러므로 현대에 처한 우리는 국가가 없으면 민족을 보존할 수 없고, 민족을 보존하지 못하면 개인의 삶은 획득할 수 없다. 우리 혁명운동의 궁극 목적이 개인의 삶을 추구하는 일이라는 것은 어린아이도 분명히 아는 바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이른바 무슨무슨주의자배는 삶을 추구하면서도 국가를 홀시한다. 이것은 장사를 지내는 자가 시체를 망각하는 경우와 같다. 이것이 이른바 본령을 잃은 운동이다.〉
「韓民」의 창간호에는 또 「愚民」이라는 필명으로 「우리 독립운동의 동향」이라는 기고문이 실려 있는데, 이 글은 탁월한 중심인물의 영도력 아래 단결할 것을 강조하면서, 그러한 인물의 보기로 이탈리아의 무솔리니, 독일의 히틀러, 터키의 케말 파샤, 중국의 蔣介石, 러시아의 스탈린을 들고 있다.90) 이 글의 필자가 누구였는지는 분명하지 않으나, 그것은 金九를 이들과 같은 존재로 받들어야 한다고 암시한 것이었을 것이다.
「韓民」은 매호에서 한국의 독립을 선전하고, 특히 이봉창과 윤봉길을 순국 의사로 찬양함으로써 청년들의 영웅심을 자극하는 한편, 민족혁명당을 공산주의 단체로 단정하여 공산당 토벌정책을 취하고 있는 중국국민정부로 하여금 그들에 대한 지원의 단절 또는 경감을 촉구하는 주장을 폈다.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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鎭江시대의 臨時政府 요인들과 가족들(白凡紀念館 제공). |
國民黨 전위단체로 靑年團 창설
金九는 임시정부에 복귀한 뒤에도 일본 경찰과 밀정들의 추적을 피하면서 청년들을 모집하여 훈련시키고, 또 필요한 임무를 주어 각지로 파견하는 일에 힘을 기울였다. 그리고 그렇게 훈련시켜 파견한 젊은이들이 일본 경찰에 체포되었다는 소식을 들을 때면 金九는 마음속으로 더욱 칼을 갈았다.
1936년 4, 5월 무렵에 이르러 새로 응모해 온 청년들이 20명쯤 되었다. 이 때에 한국특무대독립군의 훈련을 맡고 있던 김동우·오면직·韓道源 등이 안공근의 전횡에 불만을 품고 이탈한 것은 金九로서는 여간 큰 손실이 아니었다. 이들은 상해로 가서 韓國猛血團을 조직했다. 김동우와 오면직은 金九의 고향인 황해도 安岳 출신으로서, 1921년 11월에 상해로 와서 金九의 지시에 따라 국무원비서장이었던 金立을 모스크바 자금을 횡령했다고 하여 처단한 이래로 金九의 심복으로 고락을 같이해 왔었다. 한국맹혈단의 단원들은 2월22일에서 3월25일 사이에 김동우를 제외하고는 모두 상해 일본영사관 경찰에 체포되고 말았다.92)
金九는 한국특무대독립군에 속해 있던 남경군관학교 졸업생 17명과 학생훈련소의 훈련생 20여 명 등을 규합하여 7월11일에 남경 남기가 8호의 엄항섭 집에서 한국국민당 청년단을 조직했다.93) 한국국민당 청년단이 金九의 직접적인 지도 아래 결성된 것은 그들의 「창립선언」에 구체적으로 표명되었다. 「창단선언」은 지난 날의 독립운동에 대해 〈돌이켜 보면 우리의 피눈물을 짜낼 뿐이었고, 파탄과 분열은 우리 운동의 대치욕이 되고 말았다. 피가 끓는 대한의 젊은이여, 암담한 환경에 빠진 조국은 실망과 비애 속에서 방황하고 있다〉고 개탄하고 나서, 다음과 같이 천명하고 있다.
〈우리는 이것을 원망하고 있어서는 안 된다. 이에 느낀 바 있어서 우리 혁명운동의 정통이며 토적총사령부(討敵總司令部)인 한국국민당에 모인 청년투사들은 지난 40여 년 동안 일관된 정신을 가지고 혁명운동에 분투 노력하신 白凡 金九선생의 영도를 받아 그의 손이 되고 발이 되어 그 정신과 사업을 계승하기 위하여 순수하고 진지한 열정을 가지고 분기하여 한국국민당 청년단을 창립했다.…〉
그리고 이날 그들이 채택한 「구호」에는 〈국내 전선으로 들어가라〉, 〈반동사상과 파벌귀를 쓸어 내자〉, 〈일체의 반동조직을 방지하자〉, 〈우리의 영수를 옹호하자〉 등이 포함되어 있었다.94)
이렇게 창립된 청년단은 한 달 뒤인 8월27일에는 기관지 「韓靑」을 창간하여 「韓民」보다 더욱 격렬한 이론투쟁을 벌이면서 한국국민당의 전위단체이자 선전 및 교육기관의 역할을 담당했다.
1937년 2월에는 광동에서 韓國靑年前衛團이 조직되었다. 일찍이 한국독립당의 지부 등이 설치되어 있던 광동지방에서는 민족혁명당이 결성된 뒤에는 金九와 함께 임시정부 재정비에 참가한 김붕준과 양명진 등의 일부 세력을 제외하고는 거의가 민족혁명당에 참여했었다. 그리하여 한국국민당은 金九와 안공근이 학생훈련소를 관리하던 金九의 아들 김인과 안공근의 아들 安禹生을 광동에 파견하여 임시정부의 지지세력 만회를 위한 활동을 벌이게 했다. 이들은 중산대학생인 金昌滿과 金德穆, 金鋼, 馬超軍 등과 협력하여 민족혁명당 광동지부 당원인 安炳武, 韓泰寅 등을 끌어들여 한국국민당과 국민당 청년단을 지원하는 단체로 한국청년전위단을 조직했다. 민족혁명당에서는 간부를 파견하여 사태를 수습하고자 했으나, 지부는 해체되고 말았다. 한국청년전위단도 기관지로 「前線」을 발행했다.95) 이러한 청년단들의 활동이 임시정부를 비롯한 독립운동자들 사이에서 金九의 정치지도력의 확고한 기반이 되었음은 말할 나위도 없다.●
1) 金正柱編, 「朝鮮統治史料(八)」, 1971, 韓國史料硏究所, 495~496쪽.
2) 金正柱編, 「朝鮮統治史料(八)」, 503~504쪽. 3) 金正柱編, 「朝鮮統治史料(八)」, 496쪽. 4) 社會問題資料硏究會編, 「思想情勢視察報告集(2)」, 1976, 東洋文化社, 30쪽. 5) 위와 같음. 6) 지복영, 「역사의 수레를 끌고 밀며――항일무장독립운동과 백산 지청천장군」, 1995, 문학과지성사, 303쪽. 7) 內務省警報局編, 「社會運動의 狀況(8)」, 1972, 三一書房, 1548쪽. 8)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독립운동사자료집(11)」, 1976, 독립유공자사업기금 운용위원회, 828쪽. 9) 金正明編, 「朝鮮獨立運動 Ⅱ」, 1967, 原書房, 514쪽.
10) 金正柱編, 「朝鮮統治史料(八)」, 714~715쪽. 11) 「思想情勢視察報告集(2)」, 30~31쪽. 12) 金九, 「金九自敍傳 白凡逸志」(親筆影印本), 1994, 集文堂, 199쪽. 13) 김영범, 「한국근대민족운동과 의열단」, 1997, 창작과 비평사, 270~299쪽 참조. 14) 「思想情勢視察報告集(2)」, 9쪽. 15) 염인호, 「김원봉연구」, 1993, 창작과 비평사, 187쪽. 16) 金學奎, 「白波自敍傳」, 「한국독립운동사연구」 제2집, 1988,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594~595쪽. 17) 金正柱編, 「朝鮮統治史料(八)」, 496쪽.
18) 南坡朴贊翊傳記刊行委員會, 「南坡 朴贊翊」, 1989, 乙酉文化社, 221~222쪽. 19) 金弘壹, 「大陸의 憤怒」, 1972, 文潮社, 299~300쪽. 20) 「金九가 蕭錚에게 보낸 1934년 10월30일자 편지」, 白凡金九先生全集編纂委員會編, 「白凡金九全集(4)」, 1999, 대한매일신보사, 386~388쪽. 21)「思想情勢視察報告集(2)」, 222쪽. 22) 金正柱編, 「朝鮮統治史料(八)」, 708~709쪽. 23) 한상도, 「韓國獨立運動과 中國 軍官學校」, 1994, 문학과 지성사, 334쪽. 24) 金正柱編, 「朝鮮統治史料(八)」, 709쪽. 25) 한상도, 앞의 책, 334~335쪽. 26) 金正柱編, 「朝鮮統治史料(八)」, 501~502쪽. 27) 金正明編, 「朝鮮獨立運動 Ⅱ」, 514~515쪽.
28) 국사편찬위원회, 「대한민국임시정부자료집(2) 임시의정원Ⅰ」, 2005, 287쪽. 29) 「思想情勢視察報告集(2)」, 32쪽, 60쪽. 30) 國史編纂委員會, 「韓國獨立運動史 資料 3 臨政篇 Ⅲ」, 1973, 探求堂, 400쪽. 31) 「思想情勢視察報告集(2)」, 4쪽.
32) 金正柱編, 「朝鮮統治史料(八)」, 482쪽; 「思想情勢視察報告集(2)」, 387쪽. 33) 「思想情勢視察報告集(2)」, 382~386쪽. 34) 金弘壹, 앞의 책, 300쪽. 35) 한상도, 앞의 책, 326~327쪽. 36) 日本國際政治學會編, 「太平洋戰爭への道(3)」, 1987, 朝日新聞社, 85쪽. 37) 도진순 주해, 「백범일지」, 1997, 돌베개, 359쪽. 38) 송우혜, 「윤동주평전」, 1989, 열음사, 131쪽; 「思想情勢視察報告集(2)」, 223쪽. 39) 한상도, 앞의 책, 341~342쪽.
40) 「東亞日報」 1935년 3월2일자, 「民族共産各派가 提携 單一大黨組織說」. 같은 날짜의 「朝鮮日報」와 「每日申報」에도 비슷한 기사가 실렸다. 41) 「新韓民報」 1935년 4월4일자, 「민족공산 각파가 지휘 김구, 김원봉, 리청천 중심으로 단일당」.
42) 「白凡金九全集(4)」, 359쪽. 43) 「思想情勢視察報告集(2)」, 32쪽. 44) 金學奎, 앞의 글, 595쪽. 45) 「思想情勢視察報告集(2)」, 38쪽. 46) 「思想情勢視察報告集(2)」, 32쪽, 65~66쪽.
47) 「백범일지」, 357~358쪽. 48)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독립운동사(4) 임시정부사」, 1972, 독립유공자 사업기금운용위원회, 647쪽. 49) 國史編纂委員會, 「韓國獨立運動史 資料 1 臨政篇 Ⅰ」, 1970, 探求堂, 416~417쪽. 50) 金正柱編, 「朝鮮統治史料(十)」, 715쪽. 51) 「思想情勢視察報告集(2)」, 33쪽; 金學奎, 앞의 글, 593쪽; 강만길, 「증보 조선민족혁명당과 통일전선」, 2003, 역사비평사, 65쪽. 52) 「思想情勢視察報告集(2)」, 13쪽. 53) 張建相, 「獨立運動 半世紀의 回顧」, 「月刊中央」 1968년 8월호 참조. 54) 「韓國民族運動史料(中國篇)」, 1976, 國會圖書館, 865쪽. 55) 韓詩俊編, 「大韓民國臨時政府法令集」, 1999, 國家報勳處, 56쪽, 61쪽.
56) 「思想情勢視察報告集(2)」, 33~39쪽. 57) 「思想情勢視察報告集(2)」, 88쪽; 金正明編, 「朝鮮獨立運動 Ⅱ」, 540쪽.
58) 「思想情勢視察報告集(2)」, 15쪽. 59) 「思想情勢視察報告集(2)」, 234~235쪽. 60) 「思想情勢視察報告集(2)」, 233쪽. 61) 金正明編, 「朝鮮獨立運動 Ⅱ」, 585쪽. 62) 「思想情勢視察報告集(2)」, 222쪽. 63) 「思想情勢視察報告集(2)」, 228~229쪽. 64) 송우혜, 앞의 책, 131~132쪽.
65) 송우혜, 위의 책, 132쪽. 66) 「思想情勢視察報告集(2)」, 230쪽. 67) 한상도 앞의 책, 343~344쪽. 68) 「思想情勢視察報告集(2)」, 230~231쪽. 69) 金正明編, 「朝鮮獨立運動 Ⅱ」, 538쪽. 70) 「思想情勢視察報告集(2)」, 9~10쪽.
71) 「新韓民報」 1935년 8월8일자, 「림시정부에 대하여」.
72) 「思想情勢視察報告集(2)」, 42쪽. 73) 김영범, 앞의 책, 402쪽. 74) 「思想情勢視察報告集(2)」, 165쪽. 75) 「思想情勢視察報告集(2)」, 46쪽. 76) 「思想情勢視察報告集(2)」, 162쪽. 77) 金正明編, 「朝鮮獨立運動 Ⅱ」, 531~532쪽.
78) 「대한민국임시정부자료집 (2) 임시의정원Ⅰ」, 2005, 국사편찬위원회, 289~293쪽. 79) 「韓國民族運動史料(中國篇)」, 834쪽. 80) 「대한민국임시정부자료집 2 임시의정원Ⅰ」, 293쪽; 金正明編, 「朝鮮獨立運動Ⅱ」, 532쪽; 金正柱編, 「朝鮮統治史料(十)」, 775~776쪽. 81) 「백범일지」, 358~359쪽. 82) 「대한민국임시정부자료집 1 헌법·공보」, 2005, 국사편찬위원회, 190쪽. 남호의 놀잇배 위에서 의정원 회의가 열렸다는 「백범일지」의 기록과는 달리, 일본 경찰의 정보보고에는 회의장소가 가흥의 엄항섭 집으로(金正明編, 「朝鮮獨立運動Ⅱ」, 532쪽), 일본고등법원의 정보보고에는 항주성 내 한 중국음식점으로(金正柱編, 「朝鮮統治史料(十)」, 775쪽) 되어 있다. 83) 「대한민국임시정부자료집 1 헌법·공보」, 190쪽.
84) 「림시정부포고문」, 「白凡金九全集(4)」, 389~394쪽; 「대한민국임시정부자료집(1) 헌법·공보」. 191쪽 85) 「백범일지」, 359쪽. 86) 朝鮮總督府警務局, 「最近に於ける朝鮮治安狀況 1937年」, 1966, 巖南堂, 280쪽. 87) 「新韓民報」 1936년 1월16일자, 「한국국민당선언서」.
88) 金正明編, 「朝鮮獨立運動 Ⅱ」, 644~645쪽. 89) 趙凡來, 「韓國國民黨硏究」, 「한국독립운동사연구」 제4집, 1990,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384쪽. 90) 「思想情勢視察報告集(3)」, 147쪽, 153~154쪽. 91) 金正明編, 「朝鮮獨立運動 Ⅱ」, 566쪽.
92) 金正明編, 「朝鮮獨立運動 Ⅱ」, 569쪽. 93) 金正明編, 「朝鮮獨立運動 Ⅱ」, 561쪽 ; 趙凡來, 앞의 글, 21쪽. 94) 金正明編, 「朝鮮獨立運動 Ⅱ」, 562~563쪽. 95) 「思想情勢視察報告集(5)」, 32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