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수동
1959년 대구 출생. 영남大 미대와 同 대학원 졸업. 160회가 넘는 기획전과 17회의 개인전.
1959년 대구 출생. 영남大 미대와 同 대학원 졸업. 160회가 넘는 기획전과 17회의 개인전.
사람 사이에 情(정)이 흐르고 흘러 사랑이 된다. 「한 번도 상처받지 않은 것처럼 사랑하라」는 詩句(시구)처럼 사랑은 언제나 새롭다. 하지만 우리는 현실에 부대끼면서 사랑을 잃어버렸다.
서양화가 李秀東(이수동·47)씨의 그림은 사랑을 잃어버린 우리들의 가슴을 아릿하게 만든다.
미술평론가 임창섭씨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李秀東은 언젠가 한 번 보았을 법한, 꼭 한 번은 경험했을 것 같은 이야기를 그려 낸다. 우울한 이들에게는 즐거움을, 깊은 절망에 빠져 있는 이들에게는 작은 희망을 불러일으킨다. 李秀東 스스로가 아주 작은 일에 희망과 즐거움을 느끼는 작가이다>
얼마 전 그의 「작은 그림 큰 마음」 전시회가 끝났다. 그 열기가 식지 않은 「노화랑」에서 李秀東씨를 만났다. 그는 푸근한 인상이었다. 왜 그의 그림이 사람들의 마음을 후벼파는지 알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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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들이, Acrylic on canvas, 100.0×80.3cm, 200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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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夏夢 夏夢, Acrylic on canvas, 27.3×22.0cm, 199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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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녕하세요?, Acrylic+부조 on canvas, 2000. |
한 장의 그림에 수많은 사연 담겨 있어
―그림이 굉장히 詩的(시적)입니다.
『그림은 詩와 비슷해요. 詩가 짧은 글로 수많은 이야기를 전하듯이 한 장의 그림이 수많은 사연을 담고 있습니다. 그림을 보면 제목을 보지 않아도 어떤 이야기를 전하려는지 알 수 있잖아요』
―백화점 광고지에 선생님의 그림을 사용하고 있는 걸로 압니다. 도시적인 정취 때문이겠죠.
『제가 도시적으로 보이지는 않죠(웃음). 도시적이고 좀더 세련되고 싶은 마음이 그림 속에 녹아 있어서 그렇지요. 누구나 그런 마음을 가지고 있잖아요. 저 또한 마찬가지고』
요즈음 그의 그림이 개인 홈페이지 「블로그」의 바탕화면으로 많이 쓰인다고 한다. 블로그의 속성과 李秀東씨의 그림은 절묘하게 어울린다. 현대인들은 블로그에서 지극히 개인적인 이야기를 풀어 낸다. 李秀東씨의 그림은 그의 소박한 이야기를 담고 있다.
미술평론가 朴榮澤(박영택·경기大 예술대학 교수)씨는 그를 「이야기꾼」이라고 불렀다.
<李秀東의 그림은 한눈에 쏘옥 들어오는 문장이다. 어렵거나 난해하거나 혹은 번잡스럽지 않다. 간결하고 명징하고 더욱이 서늘하다. 그는 이미지를 담아 내어 내밀한 戀書(연서)를 쓰고 記憶(기억)과 追憶(추억)을 시각화한다. 일종의 詩畵(시화) 혹은 그림일기다. 李秀東의 이야기 그림은 한국인의 보편적인 인성과 정서에 겨냥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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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표현주의 기법의 초기 작품. |
「가을동화」 이후 인터넷에 그림 퍼져
李秀東씨의 그림은 2000년 방영된 KBS 드라마 「가을동화」를 통해 대중에게 알려졌다.
이 드라마의 남자 주인공이 그린 그림이 李秀東씨의 그림이었다. 그 후 그의 그림은 급물살을 타듯 인터넷을 타고 퍼져나갔다.
―「가을동화」에는 어떻게 참여하게 되셨습니까.
『「가을동화」 미술감독이 전시회에 와서 제 그림을 보고 연락했더군요. 「영상매체에 잘 어울리는 그림」이라며 제 그림을 사용하겠다는 섭외가 왔어요』
―선생님 작업실에서 드라마를 촬영했나요.
『아니오. 드라마 속의 작업실은 양양에 있는 폐교였고, 제 그림만 제공했죠. 마지막에 주인공이 展示會(전시회)를 하는 장면이 있는데, 거기에 전시된 그림이 전부 제 그림이었습니다』
―「가을동화」로 선생님 그림이 대중들에게 많이 알려졌는데 좋은 일이 많았습니까.
『빛 좋은 개살구였어요(웃음). 술 먹을 때만 좋았습니다』
―그림이 드라마 등을 통해 알려지면 새로운 것을 시도하는 데 지장이 있지 않나요.
『저는 제 취향대로 그림을 그립니다. 인터넷을 즐기는 젊은층에서 제 그림의 한 부분을 좋아할 수는 있겠지요. 그렇다고 그 사람들의 시선을 의식해서 「이렇게 그려야겠다」는 생각은 하지 않습니다. 다른 사람의 취향에 맞춰 그림을 그리면 화가의 생명이 길지 않습니다』
―그림에 「女子」가 많이 등장합니다.
『제 그림의 주제가 「사랑」이어서요. 사랑이라는 게 남녀간의 섬세한 感情(감정)의 흐름입니다. 제가 남자라서 그런지 女子를 많이 그리게 되더군요』
그는 「男子와 女子」, 「달」, 「자작나무」, 「집」, 「구름과 하늘」, 「바다와 호수」 등의 소재로 다양한 구성과 연출을 통해 또 다른 풍경과 이야기를 만들어 낸다. 그의 그림은 한 편의 드라마를 연상시킨다.
친구들의 분발에 「셔터맨」 생활 청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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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별밤, Acrylic on canvas, 33.3×24.2cm, 2005. |
高3 때 담임선생님이 『4년 장학생으로 영남大 가는 게 효도하는 일이다』, 『용 꼬리보다는 닭 대가리가 되라』며 서울에 있는 대학에 원서를 쓰지 못하게 말렸다고 한다.
아내가 운영하는 미술학원에서 「셔터맨」으로 일하면서, 학원 한 구석에서 그림을 그리던 그는 영남大 대학원에 진학한다.
『친구 박일룡이 대한민국 美術大殿에서 대상을, 홍창룡이라는 친구가 中央美術大殿에서 대상을 받았어요. 망치로 머리를 한 방 얻어 맞은 기분이었어요. 저는 「셔터맨」으로 집사람이 미술 학원하는 걸 돕고 있었는데, 「내가 이렇게 살아도 되나」 회의감이 밀려 왔어요. 붓이 손에 잡히지 않더군요』
―그래서 어떻게 하셨습니까.
『집사람에게 「그림 공부를 더 하고 싶다. 그림 때문에 너를 만났고, 너 또한 그림을 그려서 잘 알지 않는가. 대학원을 보내 달라」고 부탁했습니다.
집사람이 첫 번째 등록금을 대줬어요. 입학한 뒤에는 조교를 하면서 스스로 학비를 벌었습니다』
―친구들의 공모전 입상이 그림에 진력하는 계기가 됐는데, 공모전에는 출품하지 않았습니다. 이유가 있나요.
『제 그림이 공모전하고 맞지 않아요. 더구나 상을 받기 위해 그림을 그리는 건 더욱 싫었어요. 공모전 욕심을 버리니까 그림이 자유로워졌어요. 젊은 날에 큰 상을 받으면 그림이 고착화될 가능성이 많이 있습니다. 그 성취에 평생 매달리게 되니까요. 저는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고 내 마음대로 그림을 그리고 싶었습니다』
게으름도 일종의 기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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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꿈, Acrylic on canvas, 34.8×27.3cm, 2004. |
『처음에는 대학에 강의를 나갔는데 그게 제 성격하고 맞지 않았어요』
―어떤 점에서 맞지 않았나요.
『제가 게을러요(웃음). 「가족을 부양해서 먹여살려야겠다」는 강한 집념이 없었어요. 아내의 미술학원으로 대충 먹고살 정도는 됐으니까요. 대학원 때 표현주의에 빠져서 독일로 유학을 가려고 했어요. 독일 유학을 가겠다니까 집사람과 처가에서 강하게 반대를 했어요.
「대학원만 다니겠다고 하지 않았으냐. 물에 빠진 사람 건져 놓으니까 이제 보따리 챙기려 한다」는 얘기였어요. 미술학원 한 귀퉁이에서 그림을 그리고 있으니까 우울증이 오더군요.
독일 유학을 반대하던 처갓집에서 제 모습을 보고 작업실을 얻어 주더군요. 하얀 캔버스를 그냥 놔두지 못하고 마구 그림을 그렸습니다. 아무 생각 없이 그림만 그렸어요. 게으름이 제게 전업작가의 길을 열어 준 거예요』
―독일 유학과 작업실을 바꾼 셈이네요.
『바로 그거죠(웃음). 그렇다고 독일 유학을 단념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독일 유학을 가기 위한 준비가 됐다는 걸 보여 주기 위해 첫 번째 개인전을 열었습니다. 개인전이 성황리에 끝났지만 가정적으로 불안정했습니다. 친구들이 그 힘든 부분들을 채워 주더군요.
친구들과 매일 어울려다니다 보니 「이렇게 人生이 재미있는데 굳이 집안 식구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독일 유학을 갈 게 뭐 있나」 하는 생각이 들어서 유학 꿈을 접었죠. 그때 친구들의 후원이 없었다면 마음을 잡지 못해 힘들었을 것입니다』
예술가를 후원해 주는 사람을 「패트런(patron)」이라고 부른다. 패트런은 예술작품에 뛰어난 眼目(안목)을 가진 사람으로 예술가를 이해하고 그들이 작품활동을 하는 데 경제적 지원을 해주는 사람을 일컫는다. 역사적으로 가장 유명한 패트런은, 르네상스 시대의 레오나르도 다빈치는 물론 그 당시 많은 예술가들을 후원해 주었던 메디치 家門(가문)이다. 「메디치 가문이 있었기에 르네상스 예술이 꽃 피울 수 있었다」는 얘기가 있을 정도다.
―첫 번째 개인전인데 「패트런」이 많았네요.
『당시 표현주의에 빠져 있었고, 제 예술이 확립되어 있지 않은 시절이었습니다. 하지만 저의 그림을 좋아하고, 또 저를 믿는 친구들이 주변에 하나둘씩 생기더군요. 그 친구들의 도움이 전업화가로 살아가는 데 큰 힘이 됐습니다』
―첫 번째 개인전 이후 표현주의 기법으로 그림을 그렸는데, 지금의 작품과는 성격이 많이 달라 보입니다.
『첫 번째 개인전 때 표현주의 기법으로 인물 위주의 그림을 전시했습니다. 후원해 주는 한 친구가 그 그림을 아파트에 걸어 놓으니까, 어린 아들이 무섭다고 자꾸 울더랍니다. 그 친구가 조심스럽게 「그림을 바꿔 줬으면 좋겠다」고 해요. 그때 많이 느꼈습니다. 「그림 때문에 아이가 공포스러우면 되겠는가」, 「그림이 사람을 괴롭힐 수는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원래 제 성격이 소프트해요. 공격적인 그림하고 맞지 않는다고 생각했습니다. 그 후 조금씩 변한 거죠. 제가 공격적으로 그림을 그렸던 것은 당시 제가 처한 현실이 무척 힘들었기 때문일 겁니다』
표정은 최악의 밀고자
―인물을 많이 그리시는 이유는.
『「표정은 최악의 밀고자」라는 말이 있습니다. 사람의 표정처럼 변화무쌍하고 재미있는 소재는 없어요. 살아 왔던 모든 것을 숨기지 못하는 것이 표정입니다. 감정 없는 사람이 없듯이 얼굴에는 많은 사연이 있습니다. 주변의 모든 사람이 작품의 소재가 됩니다』
―그래서 「생활일기」 連作(연작)이 나오게 된 것이군요.
『그렇습니다. 「생활일기」는 제가 생활하면서 느꼈던 것을 그린 겁니다. 생활이라는 게 얼마나 재미있습니까. 사람을 만나고 그 사람들에게 새로운 것을 느끼고 하다 못해 주변의 모든 사물도 하나의 이야기가 됩니다. 주변의 모든 것들이 저에게는 새롭게 느껴질 때가 많습니다. 그럴 때마다 詩人이 詩想(시상)을 떠올리는 것처럼 그림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화가에게는 시대를 그려 내야 할 책임이 있습니다. 너무 개인적인 素材(소재)를 쓰시는 것 아닌가요.
『화가의 시대적 책임이라는 게 물론 있지요. 하지만 지금은 격동의 시대가 아니고, 화가에게 사회 참여를 요구하는 시기가 아닙니다. 사회 참여를 강조하는 민중미술이 제게는 맞지 않아요. 그림은 제가 좋아서 하는 일입니다. 제 성격하고 지금의 작업, 소재가 가장 잘 어울린다고 생각합니다』
―새로운 미술 思潮(사조)와 동떨어져 있다는 건 모험 아닌가요.
『설치미술이라든지, 영상매체를 이용한 미술이라든지 하는 미술사조를 의식하지 않습니다. 여자가 화장을 많이 한다고 해서 아름다운 것이 아니듯, 미술사조라는 화장을 하지 않아도 그림은 좋을 수 있습니다』
숨은그림찾기
李秀東씨의 그림을 가만히 들여다보고 있으면 재미있다. 스치듯 지나가면 그 의미를 알 수 없는 기호 같은 것이 보인다. 映畵(영화)의 카메오처럼 그림 속에서 슬쩍 지나가며 재미를 던지는 상징들이다.
―「생활일기」 그림을 보면, 숨은그림 찾기를 하는 느낌이 듭니다.
『사랑은 드러내 놓고 하는 사랑보다 멀리 퍼지는 향기처럼 은근하면서 따사로운 사랑이 좋습니다. 인스턴트 같은 급한 사랑이 싫다 보니 직설적인 것보다 찾아야만 알 수 있게 사랑을 표현합니다. 그래서 여러 상징들을 보일 듯 말 듯 그려 넣고 있습니다』
―숨은 그림을 찾다 보면 뱀을 의외로 많이 그리셨는데, 「뱀」의 의미는 뭔가요.
『뱀은 세상의 「惡(악)」을 상징하죠. 「시련」을 상징하기도 해요. 살면서 얼마나 힘든 일이 많이 있습니까? 시련을 피할 수만 있다면 피해 나가는 것이 좋다고 생각해 뱀을 사람 곁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그려 넣습니다』
―대구에서 활동하다가 서울에 올라온 계기가 있습니까.
『인사동 「노화랑」의 노승진 사장님 때문입니다. 노 사장님이 1992년 젊은 작가를 발굴하기 위해 미술평론가 朴榮澤씨와 함께 대구 작업실에 찾아와서 알게 됐습니다. 상경을 준비하던 차에 IMF 외환위기가 터져 연기했어요.
그러다 2004년에 올라왔습니다. 참 힘들게 상경했습니다(웃음). 서울 집값이 너무 비싸 일산에 자리 잡았습니다. 화랑과 화가의 만남은 결혼과 비슷합니다. 좋은 아내를 만나면 인생이 피는 것처럼 화가는 좋은 화랑을 만나아죠』
―「노화랑」과는 전속제인가요.
『전속은 아니지만 전속처럼 노화랑에서만 기획전을 하고 있습니다』
대구를 떠나 서울에서 활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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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내와 두 딸 나라·나운과 함께. |
『드라마 「가을동화」로 인지도가 높아져 제가 엄청나게 富(부)를 쌓은 걸로 아는 분들이 많았어요. 조금 전에 말씀 드렸지만 술값 정도였어요. IMF 외환위기 이후 아내가 미술학원을 그만둬서 제가 생활을 책임져야 할 상황이었습니다. 한눈 팔지 않고 오로지 그림만 그리며 살았는데 위기가 닥친 거예요. 결연한 각오로 서울에 올라온 겁니다(웃음)』
―서울에 와서 좋아진 점은 어떤 게 있나요.
『일산으로 작업실을 옮기고 나서 일이 많아졌지요. 아무래도 대구보다는 서울이 기회가 많습니다』
―2002년부터 「샐러리맨」을 그림에 많이 등장시키고 있죠.
『제가 워낙 술을 좋아하다 보니 술자리가 잦습니다. 술자리에 오는 사람 대부분이 샐러리맨들입니다. 술 한잔 마시고 몽롱한 상태에서 세상에 대해 취기 어린 말을 쏟아 내는 남자들의 얼굴이 아주 재미있어요. 술 한잔 마신 남자들은 솔직합니다. 그게 매력입니다. 그걸 스케치하고 浮彫(부조)로 표현했습니다.
제 그림 속의 샐러리맨들은 모두 술에 취해 얼굴이 벌겋게 물들어 있습니다. 저는 도시 속에서 살아가는 남자들을 좋아해요. 전원에서 느긋하게 사는 사람들은 당기질 않아요』
―「생활일기」 連作은 평면이지만, 「안녕하세요? 샐러리맨」 시리즈는 입체적입니다.
『아이들이 지점토를 가지고 노는 것을 보다가 영감을 얻어 부조로 표현하게 됐어요. 그게 활동적인 남자의 이미지와 맞다고 생각되었습니다. 부조라고 해서 작품의 성향이 달라졌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제 생활이 바뀌면 그림도 달라지겠지요』
―그림이 너무 많이 알려진 까닭인지 선생님 그림에 대한 평가는 극과 극입니다.
『부러움과 시샘을 한 몸에 받고 있기 때문 아닐까요. 하지만 남의 시선을 의식하지는 않습니다. 어느 누구도 「그림은 이래야 한다」고 정의할 수 없지 않을까요.
예술에 대한 관념이 통일되었다면, 지금 예술은 사라지고 하나의 상품만 남았을 겁니다. 개개인의 취향과 성품에 따라 좋아하는 것이 다르지요. 남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으려고 애를 씁니다』
―지방에서 활동하고 있는 화가들에게 「서울로 올라 오라」고 하고 싶으세요.
『지방에서 막 전업화가의 길을 가고자 하는 화가들이 있다면, 빨리 서울로 올라오라고 하고 싶어요. 지방은 미술 문화가 많이 뒤처져 있습니다. 그림을 전시할 공간조차 확보하기 어려워요. 이게 소위 말하는 지역 불균형인데, 많은 차이를 느낍니다』
두 딸, 『화가는 되지 않겠다』
李秀東씨는 영남大 미대 후배인 아내 張善子(장선자)씨와 사이에 「나라」와 「娜雲(나운)」 두 딸을 두었다. ―한국에서 전업화가로 산다는 게 참 벅찬 일인 것 같습니다. 가족들의 적극적인 후원이 없었다면 여기까지 오기 힘들었겠죠.
『집사람과 아이들에게 늘 미안한 마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림을 그리다 보니 의외로 같이 있는 시간이 부족합니다. 아침에 출근해 저녁에 퇴근하는 평범한 가정의 家長(가장)처럼 생활인으로 살지 못하는 것이 화가입니다. 작업실에서 늘 그림만 그리고 있으니 가족들과 어울려 생활할 수 없습니다. 집사람의 내조가 없었다면 힘들었겠지요. 두 딸이 「화가는 되지 않겠다」고 해요. 큰딸은 이화女大 의류학과에 다니고 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