孫世一의 비교 評傳 (42) 한국 민족주의의 두 類型 - 李承晩과 金九

臨政, 임시 대통령 李承晩「有故」 결의

  • : 손세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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孫世一
1935년 釜山 출생. 서울大 문리과대학 정치학과 졸업 후 美國 인디애나대학 저널리즘 스쿨, 日本 東京大 법학부 대학원에서 修學. 思想界, 新東亞 편집장과 東亞日報 논설위원을 거쳐 1980년 「서울의 봄」 때에 政界에 투신하여, 11·14·15代 국회의원을 역임하는 동안 民韓黨 外交安保特委長, 서울시지부장, 民推協 상임운영위원, 民主黨 통일국제위원장, 國會通商産業委員長, 國民會議 정책위 의장, 원내총무, 전당대회 의장, 韓日議員聯盟 부회장 등을 역임했다. 주요 논문으로 「大韓民國臨時政府의 政治指導體系」, 「韓國戰爭勃發背景 연구」, 「金九의 民族主義」 등이 있고, 著書로 「李承晩과 金九」, 「人權과 民族主義」, 「韓國論爭史(編)」, 譯書로 「트루먼 回顧錄(上, 下)」, 「現代政治의 다섯 가지 思想」 등이 있다.
金九는 1924년 1월1일에 폐병을 앓고 있던 아내가 죽었다. 이 무렵 金九는 단칸방에서 다섯 식구가 살고 있었다. 눈물바다를 이룬 崔遵禮의 장례식 소식은 국내와 미주의 신문에까지 보도되었다.
 
  李承晩은 歐美委員部 活動을 재개하기 위하여 1월23일에 하와이를 떠나서 워싱턴으로 향했다. 그는 중앙아메리카를 거쳐 파나마 운하를 돌아가는 여정을 택했다.
 
  李承晩은 金九, 趙素昻, 李始榮 세 총장의 건의에 따라 국무총리 盧伯麟을 해임하고 李東寧을 후임으로 임명하여 새 내각을 출범시켰다. 그러나 改造派가 장악하고 있는 臨時議政院은 李東寧 내각과 대립했다. 임시의정원은 李承晩의 「有故」를 결의하고 임시정부에 獨立黨代表會議 소집을 요구하면서 改憲作業을 서둘렀다.
 
  閔泳翊의 서자 閔廷植이 上海에 와서 閔泳翊의 유산을 찾는 일로 소동이 벌어졌다. 閔廷植이 日本總領事館에 연행되자 改造派들은 동포들의 격렬한 비난 여론을 업고 李東寧 내각을 총사퇴시키고, 고령의 朴殷植을 임시대통령 대리로 선출했다.
 
  李承晩은 10월에 歐美委員部의 체제를 재정비한 다음 하와이로 귀환했다.
 
 
  (1) 李東寧을 국무총리로 하여 國務院改編
 
 
  1924년에 접어들면서 李承晩과 金九는 각각 새로운 도전과 시련을 겪어야 했다. 그것은 개인적인 불행을 동반한 것이었다.
 
 
 
 崔遵禮가 폐병으로 죽어
 
  金九는 새해 첫날에 아내가 죽었다. 1920년 6월에 上海로 왔던 崔遵禮(최준례)는 1922년 6월에 둘째 아들 信을 낳고 몸조리도 제대로 못 하고 있으면서, 시어머니에게 세숫물을 버려 달라고 하기가 황송했는지, 세숫대야를 들고 아래층으로 내려가다가 층계에서 굴러 떨어져 크게 다쳤다.1) 이 무렵 金九는 프랑스조계 貝勒路永慶坊(패륵로 영경방) 10호의 집 2층을 빌어 방 둘은 다시 세를 주고 다섯 식구는 작은 방 하나에 함께 살고 있었다. 거의 거동을 할 수 없게 된 최준례의 몸수발을 金嘉鎭(김가진)의 며느리 鄭靖和(정정화)가 와서 해주었다. 정정화는 아직 아이가 없을 때라서 金九의 단칸방에서 같이 살다시피하면서 최준례의 병간호를 하고 갓난아이를 돌보아 주었다. 金九는 어려운 살림에 아내를 입원시킬 엄두도 내지 못했고, 아이들의 옷도 장만할 여유가 없었다. 그리하여 정정화는 손수 헌 옷을 이용하여 아이들 옷을 만들어 입혔다.2)
 
  최준례는 낙상으로 인한 늑막염이 폐병으로 악화되어 寶隆病院(보륭병원)에서 진찰을 받고 虹口(홍구)폐병원에 입원했다. 외국선교회에서 운영하는 홍구폐병원은 서양시설을 갖추고 형편이 어려운 환자들을 무료로 치료해 주고 있었다. 그러나 홍구는 일본조계지였으므로 金九는 한 번도 아내를 문병할 수 없었고, 위독하다는 연락을 받고도 임종을 지켜보지 못했다. 그 연락을 받은 곽씨부인이 병원으로 달려갔을 때에는 최준례는 이미 영안실로 옮겨져 있었다. 최준례는 운명하는 순간에도 金九나 시어머니에게 연락하지 못하게 했다.3) 이렇게 그녀는 서른다섯의 한 맺힌 생애를 마쳤다.
 
  金九는 독립운동 기간 중에는 혼례나 장례를 성대하게 치르는 것을 찬성하지 않았으므로, 아내의 장례를 검약하게 치르기로 하고, 국내 친지들에게는 알리지도 않았다.4) 그러나 여러 사람들이 그녀의 생전의 고초가 金九 때문이었으므로 곧 나라일에 공헌한 것이라 하여 각자가 의연금을 추렴하여 장례를 성대히 치르고 묘비까지 세워 주었다. 장례식은 1월4일에 거행되었는데, 이 장례식 소식은 매우 이례적으로 국내와 미주에까지 알려졌다. 「東亞日報」는 최준례의 장례식 광경을 다음과 같이 보도했다.
 
崔遵禮의 묘비 건립사실을 보도한 1924년 2월28일자「東亞日報」지면. 묘비 뒤의 중절모 쓴 사람이 金九이고, 그 옆이 곽씨부인, 묘비 오른쪽이 장남 仁, 왼쪽이 둘째 信이다.
  〈상해 김구씨의 부인 최준례 여사는 지난 1월1일 오후 2시에 세상을 떠났는데, 지난 4일 오후 2시에 프랑스조계 하비로 공부국 묘지(霞飛路工部局墓地)에서 기독교식에 의하여 목사 조상섭(趙尙燮)씨의 사회로 상해에 있는 남녀동포가 많이 모여서 엄숙하게 거행하얏는데, 일동은 모두 깊은 느낌의 얼굴로써 지내었고, 윤기섭(尹琦燮)씨가 설명하는 역사 중에 김구씨가 두 번째 감옥에 들어가서 십오년의 중역을 선고받은 뒤에 가출옥이 되기 전 4년 동안에는 안악군에 있는 안신여학교(安信女學校)에서 선생이 되어 약간의 봉급으로써 늙은 시모를 봉양하나 또한 넉넉지 못하야 교수한 여가에는 친히 동산에 올라가서 나무를 베어다가 삼동의 얼음 같은 찬 방을 녹이고 소생의 어린 딸 하나와 함께 삼대의 여인끼리 서로 의지하면서 즐거움 없는 세월을 보내었다는 말에는 회장한 일동의 눈에 눈물이 비오듯 하였다. 풍파와 고초를 많이 당하고 쉬지 아니하며 분투하는 남편을 다시 만난 뒤에도 가난살이를 하던 일이며, 이번에 최씨가 세상을 떠난 뒤에도 김구씨는 우리 민족의 처지가 이와 같으니 극히 검소하게 장례를 지내려고 결심하였으나, 많은 동지들의 권고와 주선으로써 창피치 아니한 장례를 거행하게 된 것이더라.〉5)
 
  또한 샌프란시스코의 「新韓民報」는 이 기사를 그대로 전재했다.6) 하와이의 「國民報」의 경우는 이때의 신문이 보존되어 있지 않아서 보도내용을 알 수 없다.
 
  프랑스조계 崇山路(숭산로) 경찰서 뒤쪽 공동묘지에 있는 최준례의 묘 앞에는 특이한 한글 묘비가 세워졌다. 뒷날 북한의 최고인민회의 대의원 및 상임위원장, 김일성대학 총장 등을 역임했다가 숙청된 한글학자 金枓奉(김두봉)이 지은 이 비문은 생년월일까지 「4222년 3월19일생」을 「ㄹㄴㄴㄴ해ㄷ달ㅊㅈ날 남」이라고 한글자음으로 표기하고, 옆에 「남편 김구 세움」이라고 썼다. 이러한 비문은 아마 국내외를 막론하고 전무후무한 것일 것이다.
 
  최준례가 병원에 입원해 있는 동안 큰 아이 仁도 병이 중하여 共濟病院에 입원하고 있었는데, 최준례의 장례를 치른 뒤에 완쾌하여 퇴원했다. 젖먹이 둘째 信은 걸음마를 익힐 즈음이었다. 信은 우유를 먹었으나 잘 때에는 반드시 곽씨부인의 빈 젖을 물고서야 잠이 들었다. 그리하여 차츰 말을 배울 때에는 할머니만 알고 어머니가 무엇인지 몰랐다.7)
 
 
 
 경호원 韓泰珪가 日本密偵이 되어
 
  최준례의 장례를 치르고 며칠 지나지 않은 1월10일에 열린 한국노병회 제16회 이사회는 金九로 하여금 다시 한 번 자괴감을 느끼게 하는 결정을 했다. 이날의 이사회에서는 북경 학병단에 유학 중이던 孔周宣과 白雲瑞가 학업을 마치고 상해로 왔다는 보고에 이어, 통상회원 韓泰珪(한태규)가 노병회의 주의 정신에 위반되는 행위를 했으므로 포상 수여를 중지한다는 결정을 한 것이다.8) 한태규는 평양사람으로서 임시정부 초창기부터 경호원으로 일을 하면서 金九의 두터운 신임을 받아왔다. 그리하여 金九는 노병회를 결성할 때에도 그를 참여시켜 경리부의 일을 맡겼었다(「月刊朝鮮」 2005년 7월호, 「金九, 內務總長되어 國民代表會議에 해산명령」 참조).
 
  金九는 사람을 쓸 때에 의심하면 일을 맡기지 말고, 일을 맡기면 의심하지 않는다는 것이 신조였다. 그러나 바로 그러한 신조 때문에 金九는 한태규 문제로 1923년 하반기 내내 큰 곤욕을 겪어야 했다.
 
  어느 날 아침 일찍 국무총리 盧伯麟이 金九의 집을 찾아왔다.
 
  『뒷도로변에 어떤 젊은 여자 시체가 하나 있는데, 중국인들이 한인이라고 떠드니까 백범이 나와 같이 나가서 알아봅시다』
 
  金九가 노백린과 함께 뒷도로변으로 가서 보니까 明珠의 시체였다. 金九는 명주가 어떻게 상해에 왔는지는 알지 못했으나, 鄭仁果와 黃鎭南 등의 식모로 일했고 젊은 남자들과 문란한 행동을 한다는 말도 듣고 있었다. 金九는 얼마 전 어느 날 밤에 한태규가 그녀와 같이 다니는 것을 우연히 본 적이 있었다.
 
  명주는 피살된 것이 분명했다. 타박으로 머리 위에 피 묻은 흔적이 있고, 목 부분에 노끈으로 조른 자국이 있었다. 그 교살수법은 바로 金九가 서대문감옥에서 「김진사」로부터 배웠던 것을 경호원들에게 연습시켜 정탐꾼 처형에 이용하던 활빈당의 사형 방법이었다.
 
  金九는 곧바로 프랑스 공무국으로 찾아가서 서대납에게 이 사실을 알리고 합동조사에 착수했다. 먼저 한태규가 명주와 밤중에 드나들던 집에 어떤 남녀가 세들어 산 일이 있는지를 조사하여, 한 달 전에 두 사람이 동거한 사실을 확인했다. 그러나 그 집은 명주의 시체가 발견된 곳과 거리가 너무 멀었다. 그래서 시체가 놓여 있던 근처 셋방 명부를 조사하자 어떤 집에서 열흘쯤 전에 방 하나를 한씨 성에게 빌려 준 기록이 있었다. 그 방을 조사하자 마루 위에 핏자국이 남아 있었다. 한태규에게 혐의가 집중되었다.
 
  金九는 서대납에게 한태규 체포를 상의했다. 그리고는 한태규를 불러서 요즘은 어디서 숙식하느냐고 물었다. 그는 방을 얻지 못하여 이리저리 옮겨다닌다고 대답했다. 바로 그때에 프랑스 경찰이 들이닥쳐서 한태규를 체포했다.9)
 
  그런데 프랑스 공무국 경찰의 보고서에는 한태규의 체포경위가 다르게 기술되어 있다. 상해 일본총영사관 소속 형사들이 프랑스 공무국의 협조를 받아서 폭탄소지 혐의가 있는 한국인 하숙집을 급습한 것은 1923년 9월23일이었다. 그곳은 한태규의 숙소였다. 그러나 한태규는 8일 전에 이미 그곳을 떠났기 때문에 그를 체포하지는 못했다. 그러다가 10월16일에 프랑스 공무국 경찰이 한태규를 체포했다. 그는 중국인으로 귀화해 있었다.10)
 
 
 
 被殺者는 愛國心 많은 식모살이 女人
 
  프랑스 경찰의 신문이 시작되었다. 金九도 배심원으로 신문에 참여했다. 처음에 한태규는 자신이 폭탄을 소지한 사실은 시인했으나 여자 피살사건과는 아무 관계가 없으며, 피살된 여인을 한 번도 본 적이 없다고 잡아뗐다. 신문은 3주일 동안 계속되었다. 프랑스 경찰이 증거 자료를 제시하며 추궁하자 결국 그는 범죄 사실을 시인했다. 한태규는 명주와 7~8개월 동안 동거했고, 그러는 동안에 명주는 한태규가 일본밀정이라는 것을 눈치챘다. 명주는 비록 배우지는 못한 여자였으나, 애국심이 강하고 金九를 절대적으로 믿고 존경했다. 그 때문에 한태규는 명주가 자기를 金九에게 고발할 것이라고 생각하고 그러기 전에 살해했다고 자백했다. 한태규는 국민대표회의에 관한 문서와 정보를 일본 경찰에 넘겨주고 있었다. 프랑스 경찰의 가택 수색 전날 그는 일본총영사관 소속 형사의 집을 찾아가서 명주를 살해한 사실을 숨기기 위해 일부러 자신이 다량의 폭탄을 보유하고 있다고 자백한 것이었다.11)
 
  한태규 사건을 같이 조사한 羅愚(나우) 등은 金九에게 이런 말을 했다.
 
  『우리는 한이 돈을 물쓰듯 하면서 이상한 행동을 하는 것을 보고, 십중팔구 정탐꾼이라고 추측한 지 이미 오래였습니다. 그러나 확실한 증거를 얻지 못해 선생께 보고하지 못했습니다. 의심만으로 보고하였다가 도리어 동지를 의심한다는 꾸지람이나 들을 것 같아서 입을 다물고 있었습니다』12)
 
  한태규는 프랑스 공동법정에서 종신형을 선고받았다.13) 그는 감옥의 중죄수들과 같이 탈옥을 모의하여 1924년 1월1일 이른 아침에 탈옥을 감행하기로 했다. 그러고 나서 한태규는 그 사실을 프랑스 간수들에게 밀고했다. 약속된 시간에 중죄수들이 감방 문을 일제히 열고 칼·몽둥이·돌을 들고 쏟아져 나왔으나, 기다리고 있던 간수들이 일제히 총을 쏘아 죄수 8명이 즉사했다. 이를 본 죄수들은 감히 움직일 엄두도 내지 못했다.
 
  한태규의 포상수여 중지를 결의한 한국노병회의 이사회가 열린 것은 이 무렵이었다. 金九는 그 뒤에 한태규가 법정에 증인으로 출두하여 자기의 밀고로 죽은 여덟 명의 시체를 담은 관머리에 서서 증언했다는 말을 들었다. 이러한 사실을 적으면서 金九는 〈그런 악한을 절대 신임했던 나야말로 세상에 머리 들기 어렵다는 자괴심으로 지냈다〉14)고 자책했다.
 
  金九는 얼마 뒤에 한태규의 편지를 받았다. 감옥 동료를 8명이나 죽게 한 공로를 인정받아 프랑스 감옥관으로부터 풀려났다면서, 전죄를 용서하고 다시 써 달라는 내용이었다. 金九는 답장을 하지 않았다. 金九가 답장을 하지 않은 것에 겁을 먹었는지 한태규는 얼마 뒤에 귀국했다. 뒷날 金九는 그가 평양에서 소매상으로 돌아다니더라는 소문을 들었다.15)
 
 
 
 워싱턴으로 가면서 中美旅行하기로
 
  李承晩은 1월23일 오전 10시에 마우이 호(S. S. Maui)편으로 샌프란시스코를 향하여 호놀룰루를 출발했다. 하와이에 돌아온 지 1년 5개월 만에 다시 워싱턴으로 가는 길이었다. 한인기독교회의 예배당과 한인기독학원의 교사건축을 완성한 李承晩으로서는 워싱턴에 가서 구미위원부의 활동을 재개하는 것이 무엇보다도 중요했다. 그것이 대통령의 직무를 성실히 수행하는 일이었다.
 
  여비는 각 섬의 동포들이 따로 거두어주었다. 워싱턴에 있는 변호사 트립(Prett A. E. Tripp)이 관동대지진 때의 한국인 학살사건을 미국과 영국 정부에 보고하고 세계 여론을 환기시키도록 李承晩 대통령을 워싱턴으로 보낼 것을 요망하는 편지를 하와이교민단 본부로 보내왔기 때문에, 여비모금은 어렵지 않게 이루어졌다.16) 교민단 본부는 하와이 각 섬의 동포들과 기관들로부터 1,015달러 25센트를 모금해 주었는데, 이 때의 모금에 호응한 동포들은 329명에 이르렀다.17)
 
  떠나던 날 부두에는 환송 나온 사람들이 별로 없었다. 「리통령려비 공고서」는 선편 사정으로 갑자기 떠나게 되어 일반 동포에게 미리 알리지 못했다고 했으나, 李承晩이 떠난 뒤에도 「國民報」가 그의 출발 사실을 보도하지 않았던 것을 보면,18) 그것은 그의 여행일정 때문이었던 것 같다.
 
  李承晩은 샌프란시스코로 갔다가, 그곳에서 태평양 연안을 따라 중앙아메리카 몇 나라를 거쳐서 파나마 운하를 통과하여 3월5일에 워싱턴의 외항 볼티모어(Baltimore)에 도착하는 화물선을 타기로 한 것이었다. 학창 시절부터 강연여행이 생활비를 버는 방편이었던 李承晩은 여행에 익숙해져 있었고 여행 자체를 즐겼다. 여행은 그에게 미지의 인간 사회의 발견이자 학습이었고, 때로는 그의 활동의 성취를 확인해 주는 것이기도 했다. 중앙아메리카 나라들은 마야문명의 유적지가 많고, 스페인의 식민지 지배로부터 벗어난 뒤에도 완전한 독립을 누리지 못하고 있는 고난의 역사가 서린, 산 박물관 같은 지역이었다. 1914년에 완성되어 세계해운의 역사를 바꾸어 놓은 파나마 운하도 李承晩의 호기심의 대상이었을 것이다.
 
 
 
 韓國人虐殺 자료 가지고 온 任永信 만나
 
1930년 워싱턴에서 만난 李承晩과 任永信. 任永信은 1948년 정부수립 때에 초대 상공부 장관으로 임명되었다〔孫忠武, 「漢江은 흐른다」(1927)에서〕.
  샌프란시스코에 상륙한 것은 1월29일 오전 9시. 부두에는 임정구가 마중나와 있었다. 그러나 임정구의 연락을 받은 국민회 총회장 최진하가 부두에 나갔을 때에는 승객들이 모두 흩어지고 난 뒤였다.19)
 
  샌프란시스코에 머무는 며칠 사이에 李承晩은 서울에서 자기를 찾아서 미국까지 온 任永信을 만났다고 한다. 1921년에 일본 히로시마(廣島)여자전문학교를 졸업하고 귀국하여 梨花學堂의 교사로 있던 임영신은 미국 유학을 준비하고 있다가, 咸台永도 관계하고 있는 독립운동단체의 부탁으로 관동대지진 때의 한국인 피살사건과 관련된 자료들을 가지고 그를 찾아 왔다는 것이다. 그 자료는 재일본 조선YMCA의 김낙영이 수집하여 국내로 보내온 것이었다고 한다. 자료들과 임영신을 소개하는 편지를 보고 나서 李承晩은 감격해서 눈물을 흘리고 있는 임영신을 자기 옆으로 데려다 앉히며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매우 장한 나의 딸이야. 너와 같은 딸들이 있으니, 우리나라는 꼭 독립이 되고 말 게야』
 
  뒷날 대한민국 초대 상공부 장관이 되는 임영신과 李承晩의 교분은 이렇게 시작된 것이었다.20)
 
  관동대지진 때의 한국인 학살사건에 대해서는 李承晩도 큰 관심을 가지고 사건발생 직후부터 진상을 파악하기 위하여 임시정부뿐만 아니라 국내의 동아일보사에까지 문의한 적이 있었고,21) 사건 취재를 위하여 일본에 특파원을 보낼 것을 미국 신문사 두 곳과 교섭하기도 했었다.22) 그러므로 李承晩이 이때에 한국인 학살관계 자료를 가지고 온 임영신을 만난 것이 사실이라면 여간 기뻐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이야기는 「여행일지」를 비롯한 李承晩의 자료나 당시의 신문기사 등에서는 찾아볼 수 없다.23)
 
  李承晩은 31일 오후에 이창규와 함께 선편으로 샌프란시스코를 떠나서 로스앤젤레스로 향했다. 2월1일에 윌밍턴(Willmington)에 도착한 두 사람은 로스앤젤레스로부터 李承晩을 보러 온 사람들과 만났다. 윌밍턴에 머물던 2월5일에 李承晩은 구미위원부로 타전하여, 3·1절 기념식에서 관동대지진 때에 학살된 4000명의 동포들에 대한 추도 기도를 올리도록 상해와 하와이로 대통령 교령을 보내라고 했다.24)
 
  李承晩은 2월7일에 중앙아메리카를 항해하는 화물선 베네수엘라호(S. S. Venezuela)에 올라 윌밍턴을 출발했다. 샌프란시스코에서부터 온 이창규와 그밖의 네 사람이 그를 배웅했다.
 
  2월14일에 과테말라의 참페리코(Champerico)에 도착한 베네수엘라호는 하룻밤을 정박했다가 16일에 엘살바도르의 산 호세(San Jose)에 도착했다. 승객 50명이 자동차로 수도 산 살바도르 (San Salvador)를 관광했다. 2월18일에 산 호세를 떠나서 니카라과의 코린토(Corinto)에 도착한 것은 이튿날 오전 7시였다. 승객 24명이 기차로 수도 마노구아(Manogua)로 가서 하룻밤을 묵으면서 관광했다. 21일 새벽에 코린토를 떠나서 24일 오후 6시에 파나마 운하의 입구인 발보아(Balboa)에 도착했다. 길이 93km 의 파나마 운하를 통과하는 데는 14시간 30분이 걸렸다.
 
 
 
 稅關職員들이 外交的 禮遇해 주어
 
  3월1일 오후에 쿠바의 수도 아바나(Havana)에 도착한 베네수엘라호는 이튿날 오후 4시에 볼티모어로 향해서 출발했다. 李承晩은 떠나는 날 오후 늦게 시작하는 카니발을 보지 못하는 것이 아쉬웠다.
 
  볼티모어에 도착한 것은 3월6일 오전 7시30분이었다. 세관 직원들은 李承晩에게 외교적 예우를 해주었고 짐 검사도 하지 않았다. 12시55분에 볼티모어를 출발하여 오후 1시에 워싱턴에 도착했다. 南宮炎(남궁염)이 벌링턴 호텔(Burlington Hotel) 방을 예약해 놓고 있었다.25)
 
  이러한 일정만으로는 李承晩이 왜 이 시기에 중앙아메리카를 여행했는지 알 수 없다. 여행 도중에 동포들을 만난 것도 아니었다. 어려운 상황에서 인구세와 한인기독학원 건축비 등 각종 성금을 희사한 동포들로부터 여비를 지원받아 여행을 하면서 중앙아메리카를 오직 관광목적으로만 여행했다면 적이 의아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그의 중앙아메리카 여행에 대한 「新韓民報」의 다음과 같은 기사는 반대파들의 비난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이승만 박사가 도미함은 보도하였거니와, 수일 전 로스앤젤레스로부터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한 몇몇 동포의 전하는 말을 들은즉, 당지의 거류 동포 약 1백 명이 리박사를 위하야 환영회를 열었었는데, 리박사가 그 환영회석상에서 말한 대요는, 우리 사회에서 반대가 있어야만 일이 잘되리라는 뜻으로 연설하였다 하며, 누구가 반대하든지 하던 일은 그대로 진행하여 나아가야만 되겠다고 하였다 한다.
 
  리박사는 그곳서 수일 동안 묵어서 장차 큐바에 있는 동포를 심방하고 돌아오는 길에 워싱턴에 들를 계획이라는데, 그의 말이 이번 자기의 여행은 무슨 공무를 위하야 온 것이 아니고 다만 무슨 사사로이 볼 일이 있어서 미주에 건너온 길이라고 말하였다고 하더라.〉
 
  기사는 끝에 「부기」라면서 다음과 같은 말을 덧붙이고 있다.
 
  〈국민보 1월26일호와 2월2일호를 보아도 리박사의 도미한 사실이 기재되지 않았은즉, 혹 등하불명(燈下不明)으로 국민보사에서 몰라서 기재하지 못하였는지는 알 수는 없지마는 만일 이번 여행이 공행일진대 국민보에서 먼저 알았을 터이 아닌가. 그런데 여기 어떤 동포들은 리박사를 환영하였다고 시비하는 이가 있다니, 비밀히 여행하는 이를 어떻게 알고 환영할까. 아무리 시비하기 좋아도 그러한 시비는 아니하였으면 좋을 듯하다.〉26)
 
  그것은 李承晩의 중앙아메리카 여행을 야유한 것이었다. 李承晩은 국민대표회의 때문에 동요하던 상해 정국이 진정되었다고 판단하고, 새로운 구상을 할 겸, 중앙아메리카 여행을 결심했던 것 같다. 화물선을 이용하는 여행이었으므로 비용도 기차여행보다 저렴했는지 모른다.
 
  李承晩이 워싱턴에 도착하고 나서 3월 15일에 「안경과 단장 고친 것 합 1달러 60센트」, 「의복세탁과 다리미질 합 5달러 95센트」 등까지 적은 총계 930달러 90센트의 여비사용 내역서를 하와이 민단본부로 보내면서 〈이것을 공포할 것은 아니나 몇몇 동지들에게 조용히 보이려거던 마음대로 하시오〉 하고 있는 것은 자신의 중앙아메리카 여행에 대한 비방을 의식한 것이었다.27)
 
 
 
 세 總長이 國務總理 교체 건의
 
  워싱턴에는 상해에서 金九, 趙素昻, 李始榮 세 사람이 공동명의로 친 전보가 기다리고 있었다. 그것은 2월18일에 호놀룰루로 친 전보였다. 이 무렵 임시정부를 지키고 있는 사람은 국무총리 노백린과 이들 세 총장뿐이었다.
 
  〈시국수습 무망 이유로 노백린 면직하오. 이동녕씨 응낙하니 곧 임명하오.〉28)
 
  국무총리 노백린은 시국을 수습하지 못하는 책임을 물어 면직하고 대신에 前 내무총장 李東寧을 국무총리로 임명하라는 건의였다.
 
  국민대표회의가 결렬된 뒤에 창조파들은 블라디보스토크로 떠나고, 다른 지역에서 왔던 사람들도 각자 자기 근거지로 돌아간 뒤의 상해 정국은 평정을 되찾은 듯이 보였다. 그러나 사실은 더욱 침체에 빠져 있었다. 국민대표회의의 실패에 크게 좌절감을 느낀 안창호도 상해를 떠나 연말까지 흥사단원 박일병과 함께 北京을 거쳐 山海關(산해관), 錦州(금주), 葫蘆島(호로도) 등지를 답사하면서 이상촌 건설을 위한 땅을 물색하고 다녔다. 산해관에서는 梁起鐸을 만나서 만주 등지를 동행했다. 1924년 1월 초에는 서간도로 가서 한족회, 西路軍政署, 대한독립단 등 그곳의 여러 독립운동단체가 통합하여 결성한 大韓統義府를 방문했다.29)
 
  임시정부의 재정궁핍은 청사도 유지할 수 없는 형편이었다. 그리하여 임시정부는 1923년 8월13일부터 프랑스조계 蒲柏路(포백로) 明德里 26호의 이시영의 집 2층을 임시정부 청사로 쓰고 있었다. 이동녕도 이 집에서 함께 기거했었다.30) 이러한 상황인데도 국무총리 노백린은 총장 세 사람과 단합하지 못하여 국무회의도 열지 않고 있었던 것이다. 그는 또 국무총리로 부임하고 나서 1년 동안 李承晩에게 편지 한 번도 하지 않았다.31) 그리하여 세 총장은 임시정부의 기능을 정상화시키기 위해서는 국무총리를 교체할 수밖에 없다고 판단한 것이었다.
 
  상해 정국의 침체를 타개하기 위한 움직임은 주로 개조파 인사들을 중심으로 1923년 말쯤부터 나타나고 있었다. 1923년 12월15일에 열린 연설회는 그 대표적인 것이었다. 상해독립운동자들이 대거 참가한 이 날의 연설회는 오후 7시에 시작하여 10시30분까지 계속되었는데, 「제2기에 첫째로 할 일」이라는 연제로 열변을 토한 尹滋瑛의 다음과 같은 요지의 말은 연설회 주동자들의 생각을 대표하는 것이었다.
 
  『독립선언을 제1기 운동이라고 하고 지금부터는 제2기 운동이라고 한다. 제1기의 운동은 심히 간단하여 적의 개말고는 다 운동자였다. 그후는 전선이 변경되고, 따라서 혼란하다. 어떤 사람이 제2기의 운동자인가? 〈총 만드는 재주를 배우고, 총 살 돈을 만들고, 총 놓을 아이를 만들자〉고 부르짖는 수십년래의 소위 지도자는 독립운동자가 아니다. 적으로 더불어 생사를 결하는 것이 독립운동이다. 일찍이 〈대한 남녀는 다 함께 모여들어 단합하자고 부르짖은 것〉은 잘못이다. 혁명적 독립운동자만이 단합하여야 되겠다. 독립운동 제조소라는 상해에는 성토문이 제일 많았다. 금후로는 상해가 독립운동의 참모부가 되어야겠다. 주리고 얼고 욕보는 독립운동자가 아직도 합하지 못할까? 한인은 다 오라고 하는 통일은 말고 정신적으로 결합하여, 성토문은 다 불사르자!』32)
 
  상해파 고려공산당의 핵심인물인 윤자영의 이러한 급진적 주장은 상해 정국의 새로운 파란을 예고하는 것이었다.
 
 
 
 〈오는 편지마다 재정 재정하고 가는 편지마다 조직 조직하야…〉
 
  워싱턴에 도착한 李承晩이 해야 할 긴급하고 중요한 과제는 임시정부의 기능을 정상화시키는 일이었다. 그는 워싱턴에 도착한 이틀 뒤인 3월8일에는 필라델피아로 徐載弼을 찾아갔다. 이날은 토요일이었다. 李承晩은 서재필의 집에서 하룻밤을 자면서 앞으로의 일을 상의하고, 이튿날 오후에 돌아오는 길에 뉴욕에 들러 한인교회와 동포기관을 방문하고, 동포들을 만나면서 이틀 동안 머물렀다.33)
 
  李承晩의 임시정부 정상화 방침은 3월 24일에 임시정부 각원들에게 보낸 편지와 3월29일에 임시의정원에 보낸 편지에 구체적으로 표명되었다. 국무위원들에게는 다음과 같이 적었다.
 
  〈상해에서 오는 편지마다 재정 재정하고 여기서 가는 편지마다 조직 조직하야 서로 끝이 없으니, 피차에 형편을 모르고 이와 같이 하는 중에서 장차 오해가 생길까 염려하야 이 편지를 국문으로 소상히 씁니다.
 
  우리는 본래 저축한 재정도 남에게 취대할 곳도 없으며, 다만 필요한 일이 있으면 사실을 들어 동포에게 청구하야, 아니주면 아무리 급한 일이라도 못하고 주면 꼭 그 일에 쓰고 그대로 알려 주나니, 이것은 아주 정한 전례라 다른 수가 없나니, 아주 이런 줄 아시고 다시는 사사비용이나 운동비나 보내라고 요구하지 마시오.
 
  미주와 하와이의 동지들이 한 가지 하려는 것은 정부의 경상유지비를 여기서 담보하야 원동 각처의 모든 우리 국민이 다 행하도록 붙들어 나가자 함이라. 그러나 한 가지 어려운 것은 여기 동포들이 알기에 국무원이 아직도 단결이 못 되어 일도 할 수 없고 돈이 있어도 규모 있게 쓸 수 없으니 돈을 보내도 소용이 없다 하는지라. 이것으로 인연하야 일하기가 어렵소이다. …〉
 
  李承晩은 이처럼 자신이 임시정부에 자금을 마련하여 보내지 못하는 이유를 국무원이 단결하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말하고, 국무원 인선과 재정운용 방안을 다음과 같이 제시했다.
 
  〈지금이라도 미주와 하와이의 도움을 얻으시려면 귀처에서 이 아래 두 가지를 먼저 행하여야 되겠소이다.
 
  1) 현 각원 제공의 협의로 그중에 누구든지 하나로 국무총리의 책임을 맡게 하고 그밖에는 혹 겸대나 보결로 원만히 조성하야 다 협동하겠다는 뜻을 표하고, 만일 그렇지 않은 사람은 국무원의 연서로 보고하면 장차 면직이라도 시켜서 협동되도록 할 것이라. 노총리가 그동안 굳게 지켜온 것은 우리가 다 감복하는 바이로되, 이동녕씨가 입각하려 하면 그로 대임시키고 군무총장의 임명으로 시무하야 협동을 도모하는 것이 좋을 듯하며,
 
  2) 각원과 직원을 극소수로 한정하고 그 생활비와 가옥세로 경상유지비를 일정하게 마련하야 각원 일동의 연서로 내게 보내면 여기서 동지들과 극력 주선하리니, 이렇게 수입되는 돈은 아무리 급한 일이 있을지라도 범용치 못할 줄로 알아서 돈 내는 사람들이 알고 있도록 하시오.
 
  이것만 되면 사업진행비도 다시 변통할 것이요, 원동의 군사상 활동도 조리 있게 진행할 것이니, 이것이 가장 급선무입니다.〉34)
 
  한편 李承晩의 편지를 미처 받지 못한 상해의 세 총장은 3월25일에 李承晩에게 다시 다음과 같이 타전했다.
 
  〈계원 불충. 김구로 총리서리 전보와 이동녕 동의 제안을 의정원에 전보하오.〉35)
 
 
 
 『李東寧이나 金九나 좋소』
 
  李承晩은 사흘 뒤인 3월28일에 임시의정원에 전보와 편지를 보내어 자신의 임시정부 정상화 방안에 협조할 것을 촉구했다. 전보는 다음과 같은 것이었다.
 
  〈각원 변동 내 권리에 있으나 의정원이 특별 협조하오. 노총리가 제각원과 합동 못 하면 사면 권고하고, 타각원 서리하오. 이동녕이나 김구나 좋소. 공함가오.〉36)
 
  李承晩은 이 전보의 부본을 편지에 동봉했다. 그는 편지의 서두를 이렇게 적었다. 그것은 임시의정원의 권위를 최대한으로 존중하는 듯한 문투였다.
 
  〈상해 정계의 풍파가 침식한 후로 민심이 더욱 정돈되어 점점 일치하는 바, 이때에 국무원의 단결이 원만히 되어야 사무도 진행하며 인심도 집중시켜 광복대사에 최고기관인 책임을 담당할지라. 이것이 본 통령과 제각원의 동일한 뜻이므로 여러 번 왕복하며 힘써 온 것이라.
 
  그러나 제각원의 정의(情誼)가 융통치 못하므로 모든 계획이 다 이에서 중지되는지라. 이것을 상당히 처리함이 나의 직책이오 권리인 줄을 모름은 아니나 다만 몸이 멀리 있어 형편을 소상히 모르고 자량으로 천동함이 신중치 못할 염려가 있으므로 특별히 귀원 협조를 요구함이니, 이는 전혀 귀원 제원의 공심과 애국심을 확실히 믿으며 사기(역사)에 긴중함만 헤아리고 위탁함이라. 바다 밖에 앉은 이 사람의 정경과 내지에서 자유 못 하는 동포들의 바라는 마음을 위하야 각원 일동과 화중히 협의하야 국무원 단결을 속히 성취케 하기 바랍니다.…〉
 
  이렇게 전제한 다음 李承晩은 임시정부 정상화 방안으로 다음의 여덟 가지를 들었다.
 
  1) 정부의 각원은 대략 주지가 같아서 이해와 화복을 같이 하겠다는 결심이 있어야 일국의 정령을 행하며 만민의 정신을 합할 수 있다. 앞으로는 아무리 유력한 인물일지라도 차라리 밖에 나가서 정부를 공박할지언정 안에서 합동을 방해하는 폐단은 없도록 해야 한다.
 
  2) 정부에 참여하는 사람은 총차장 이하 모든 직원까지 정부 반대분자와 연락을 끊어서 동료 간에 신뢰가 자라게 해야 한다.
 
  3) 국무회의에 계속 참석하지 않거나 국무원의 결정을 복종하지 아니하여 조직적 진행을 방해하는 각원은 국무원 일동의 권고로 사면케 하든지 혹은 면직이라도 하고 상당한 이로 골라서 임명하되, 긴급한 경우에는 임시처사로 본 통령에게 보고하고 집행할 수 있으나, 다만 그런 경우에는 각원 일동의 연서가 있어야 한다.
 
  4) 기왕에 한성정부 조직에 선정된 모든 각원은 다 다시 정부에 들어와서 현임 각원들과 협동하여 직책을 분담함으로써 대동단결의 뜻을 표하도록 힘쓸 것이나, 다만 각 개인이 기왕에 무슨 주지나 어떤 행동을 취했든지 지금부터는 본 정부의 연래로 지켜오는 대정방침을 성심으로 복종하여 파괴나 분열적 운동을 행하지 않을 것을 먼저 선언하여 내외의 의혹을 풀게 해야 한다.
 
  5) 의정원에서 회의할 때에 매양 쟁변과 토론하는 태도를 버리고 화중공제하여 일이 되도록 의론 조처하기를 힘쓰고, 중요한 사건의 범위만 의론하여 행정부에 넘겨서 재량으로 집행하게 해야 한다. 이는 다름 아니라 전시를 당하여 외교와 군사상 행동에 비밀을 요구하는 까닭이다.
 
  6) 의정원에서는 우리 정형에 능히 행할 수 있는 사항만 의결할 것이며, 의결된 사항은 기여이 실행하기를 힘써서 정부의 위신을 높여야 한다.
 
  7) 국무원과 의정원이 합동하여 정부의 경상비를 극소액으로 일정하게 마련하고, 사람마다 합동하여 1년 예산을 먼저 얻기에 전력하여, 확보한 뒤에는 그 돈을 꼭 예산대로 쓰게 해야 한다. 이것이 정부의 경제책을 바로잡는 첫걸음이다. 이것만 되면 아직은 대부분이 미주와 하와이에서 나올 것이오, 이 방법이 확장되면 다른 사업비도 비교적 쉽게 조달될 것이고, 얼마씩 저축하여 장래를 준비하기도 무난할 것이다.
 
  8) 의정원에서 법안을 제정하여 대한국민은 어디에 있든지 각각 매년 또는 매월에 얼마 이상씩 내어 국민의 의무로서 각기 소재 지방에서 기관을 설치하여 각인들로부터 징수해야 한다. 이것이 정부 경제책에 유일한 기초적 방법이므로 속히 실시될수록 우리 대사에 효과가 더욱 빠를 것이다.37)
 
  국무원과 임시의정원에 보낸 위와 같은 편지를 보면, 李承晩은 국무원이나 임시의정원이 자신의 임시정부 정상화 방안에 협조할 것으로 기대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趙素昻을 가장 信任해
 
1924년 무렵에 李承晩이 가장 신임했던 趙素昻. 두 사람은 뒤에 이념차이로 대립했다〔姜萬吉, 「趙素昻」(1982)에서〕.
  이 무렵 李承晩은 상해 인사들 가운데에서 조소앙을 가장 신임하여, 그와 빈번히 연락을 취하고 있었다. 조소앙의 중용을 강력히 추천했던 張鵬은 하와이로 떠나기에 앞서 자기가 해 오던 역할까지도 조소앙에게 인계했던 것 같다.38) 장붕은 1924년 1월 초에 하와이에 도착했다.39) 조소앙이 李承晩에게 다음과 같은 편지를 보내고 있는 것을 보면, 이 무렵 李承晩은 임시정부에 보내는 자금도 조소앙 앞으로 보냈던 것 같다.
 
  〈이 편지 보시는 대로 곧 융통하셔서 비록 1,000달러가 못 되더라도 987호 우편함으로 보내도록 지시해 주시기 바랍니다. 그래야 대사에 실패가 없을 것입니다. 만약 재무총장에게 보내시면 시국문제가 더욱 소용돌이 속으로 빠져 들어서 어떻게 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를 것입니다.〉40)
 
  아무리 李承晩의 신임을 받고 있었더라도 임시정부로 보내는 자금까지 재무총장이 아니라 외무총장인 자기에게 보내라고 하고 있는 것은 사리에 맞지 않는 일이다. 그러나 李承晩이 국무원과 임시의정원에 보낸 편지로 미루어 보면, 비록 액수도 많지 않고 정기적으로 보내지도 못하는 형편이기는 하나, 임시정부의 자금 운용 실태는 그가 보기에 합리적이지 못했던 것이다.
 
  그것은 하와이 동포들의 인구세를 임시정부로 보내는 문제를 두고 李承晩과 교민단장 金永琦가 마찰을 빚고 있었던 사실로도 짐작할 수 있다. 김영기는 이시영으로부터 하와이지방 인구세 수봉위원으로 위촉을 받고 징수한 돈을 몇 차례 직접 상해로 보냈었다. 그러나 李承晩은 하와이교민단은 구미위원부에 소속된 정부기관이므로 징수된 인구세는 일단 먼저 구미위원부로 보내야 한다면서 김영기를 질책했다.41)
 
  李承晩은 자신이 조소앙만을 지나치게 신임하는 것을 못마땅해 하는 이시영에게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내가 본디 소앙과 면분은 있었으나 사업상 관계는 없었고, 다만 먼 데서 추앙하는 마음만 가지고 지내다가, 정부 설립 이후로 그의 행동을 보건대 상해 풍파 중에서 제정신 가진 이가 몇이 못 되는 중 소앙은 홀로 한 가지 주의를 지키고 선동자들과 섞이지 않는 것만으로도 여기서는 그이가 아직 청년이라도 성한 행동을 가진 줄로 압니다.
 
  지금에 우리가 조직적으로 독립사업을 진행하려 할진대 내지와 원동과 구미 각지에 연락기관을 세우고 뜻도 같으며 사생을 같이 할 사람들이 각각 나누어 맡아서 먹으나 굶으나 사나 죽으나 변치 말고 함께 지켜 나가야 할 터인데, 팔방미인으로 조석 변개하는 사람들과는 아모 일 못 하는 법입니다. 그중에 소앙을 예관(신규식)과 다른 동지들이 누차 말하기로 나는 생각하기를 적어도 성재(이시영), 석오(이동녕), 예관, 소앙, 우천(조완구) 등 제우는 뜻도 대략 같고 처지도 같아서 남들의 평을 들어도 같이 듣는 터이니 꿋꿋이 합동 진행하여 갈 줄로 믿은 것입니다.…〉
 
  李承晩이 거명한 사람들은 모두 기호파 인사들이었다. 그중에서도 조소앙을 특별히 신임하게 된 것은 연전의 국민대표회의 때의 그의 단호한 태도가 믿음직하게 여겨졌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李承晩은 다음과 같은 말도 적었다.
 
  〈나는 상해에 더 믿는 이도 없고 또 구하지도 아니하며, 다만 성재, 김구, 소앙, 계원(노백린) 제형으로 시국 정돈될 때까지 함께 지켜오자는 것뿐이라. 당신들이 능히 합하야 계원을 잘 어거하여 가지고 몇 사람을 더 첨부하야 조직 진행할 수 있으면 여기서 재정이라도 얻어서 도울 것이오, 그러지 못하면 그저 버려두어 볼 수밖에 없으니, 아직까지는 내 권리를 써서 새 사람들을 얻어다가 일해 보자는 데까지 내 생각이 미치지 아니하였소이다.〉
 
  그리고 이동녕을 국무총리로 임명하라는 세 총장의 건의를 받아들이면서도 이동녕에 대하여 미덥지 못한 심정을 솔직히 털어놓았다.
 
  〈석오형이 들어와서 총리 책임을 맡게만 되면 다행이니 아무쪼록 그대로 주선하시오. 저는 석오에게 대하야 수십년 경애하는 마음으로 사모하여 온 것뿐이오 다른 것은 조금도 없으며, 공무상으로는 시국이 어려울 때에 선동자들을 거절하고 동지들과 충성스러이 지켜 나가자는 뜻이 없이 물러가 드러눕는다 할 때에 나는 전일 바라던 바와 같지 아니함을 한탄한 것뿐이니, 이번에는 정부에 한 번 나오면 사생간에 나라를 위하야 일심 단결을 주장한다는 결심이 있어야 될 것입니다.〉42)
 
  이동녕에 대한 李承晩의 이러한 우려는 바로 현실로 나타났다.
 
 
 
 議員 7명 참가한 臨時議政院 開院式
 
  임시의정원은 2월29일부터 개원되어 있었다. 이시영의 집 2층 임시정부 청사에서 열린 제12회 임시의정원 개원식은 임시의정원 설립 이후로 가장 초라한 개원식이었다. 정원 36명 가운데에서 참석한 의원은 의장 尹琦燮을 포함하여 呂運亨, 趙琬九(조완구), 趙尙燮, 崔錫淳, 金朋濬, 金承學의 7명뿐이었고, 정부 쪽 참석자도 국무총리 노백린, 내무총장 金九, 외무총장 조소앙, 재무총장 이시영이 전부였다. 그 밖에 학생 등 20여 명이 참석했다. 이 날의 개원식에서 이채로운 것은 국무총리 노백린의 告辭였다.
 
  『연전에 독립만세를 불렀을 때에 나는 하와이에 있었는데, 그때에 노래 하나를 지은 것이 있습니다. 그 노래를 부름으로써 고사에 대신하겠습니다』
 
  이렇게 말한 노백린은 〈사랑과 믿음으로 우리 마음 하나 되어 / 물이거나 불이거나 나라 위해서라면 / 다같이 나아가세 저 하늘 저 땅처럼 언제나 그침없이〉 하는 노래를 부르고는 자리로 돌아가서 앉았다.43)
 
  의장 윤기섭은 답사에서 『국무총리 각하의 특별한 고사는 그 뜻이 매우 심원합니다』라고 말했으나,44) 식장의 사람들은 어리둥절했을 것이다. 이때는 나란히 앉은 김구, 조소앙, 이시영이 李承晩에게 연명으로 노백린을 면직하라고 타전하고 나서 열흘이 지난 뒤였다.
 
  정족수 미달로 회의를 열지 못하던 임시의정원은 새로 보충된 의원들의 자격심사와 사면청원한 의원들의 처리문제를 논의하느라고 한 달 넘어 현안 심의를 하지 못하다가, 3월21일에 이르러서야 제11회 의정원에서 계류시켜 놓은 대통령 탄핵안과 임시헌법 개정안을 표결로 폐기했다. 그리고 제11회 의정원에서 文時煥의 긴급동의안을 처리할 때의 불법성에 대한 책임을 물어 의장 윤기섭을 인책 사임시키고, 조상섭과 여운형을 각각 의장과 부의장으로 선출했다.45) 이때부터 임시의정원은 李承晩의 현상유지 방침에 반대하는 이른바 개조파가 주도하게 되었다.
 
  金九 등 세 총장은 4월5일에 다시 李承晩에게 이동녕 총리 임명동의안을 의정원에 타전하라는 전보를 쳤고,46) 李承晩은 같은 날로 임시의정원 의장 앞으로 〈전 내무총장 이동녕으로 국무총리 임명하니 의정원이 동의하시오〉 라고 타전했다.47)
 
  그런데 이때는 노백린이 정식으로 면직되지 않은 시점이었다. 공식기록에는 노백린이 면직된 것은 4월9일이었고, 그 날짜로 내무총장 金九가 국무총리 임시대리로 임명되었다.48) 그 때문에 임시의정원에서는 이동녕의 국무총리 임명동의안을 토의하면서 노백린의 면직 이유와 金九의 국무총리대리 취임 경위에 관해서 의원들의 질의가 있었다. 이 무렵 노백린은 자기의 면직 문제와 관련하여, 『나는 대통령을 사면시킬 수 있어도 대통령은 나를 사면시킬 수 없다』고 호언하고 다녔다.49) 이동녕은 4월22일에 의정원의 임명동의를 받아,50) 이튿날 정식으로 국무총리에 취임했고, 같은 날짜로 金九는 국무총리 임시대리직에서 해임되었다.51)
 
  임시정부와 임시의정원의 대립은 국무원 임명동의안 심의에서부터 첨예하게 표출되었다. 이동녕은 金九, 조소앙, 이시영을 유임시키고 군무총장에 노백린, 학무총장에 김승학, 법무총장에 金甲, 교통총장에 金圭冕(김규면), 노동국총판에 조완구를 임명하고 임시의정원에 신임각료들의 임명동의안을 제출했다. 그러나 임시의정원은 신임자의 인물의 적부 등에 대해서는 아무런 언급이 없이, 유임된 각원들에 대해서도 동의안을 제출하라느니, 책임내각이니, 헌법해석이니 하며 억지 논란으로 10여 일을 보내고, 법률해석이 있기까지 동의안을 보류한다고 했다. 그러다가 유임자도 동의를 요구하도록 하자는 동의를 둘러싸고 논란을 벌인 다음, 결국 신임총장 동의안을 기습적으로 표결에 붙여 부결시키고 말았다.52)
 
  이동녕은 5월26일부로 임명동의안이 부결된 김갑, 김승학, 김규면을 그대로 각각 법무차장, 학무차장, 교통차장에 임명하고 나흘 뒤인 31일에는 이들을 다시 총장대리로 임명했다. 노백린은 참모총장으로 임명되고, 군무총장은 이동녕 자신이 겸임했다. 그리고 金九는 노동국총판을 겸임했다.53) 金九는 이제 새로이 출범하는 임시정부의 막강한 실력자가 되어 있었다. 이렇게 하여 이동녕 내각이 출범했으나, 그것은 임시의정원의 동의를 얻지 못한 「대리」내각이었다.
 
 
  (2) 臨時議政院의 臨時大統領 「有故」 결의
 
 
  임시의정원이 이동녕의 총리 임명동의안에는 찬성하고도 각료들의 임명동의안을 부결시킨 것은 임시의정원의 판세의 변화에 따른 것이었다. 5월6일에 의장 조상섭이 의장직을 사임한 뒤에 8일에 실시된 의장단 선거에서 부의장 여운형이 의장에, 전원위원장 崔昌植이 부의장에 선출되었고, 이어 14일에는 다시 여운형이 의장직을 사임하고 최창식이 의장에 선출되었다.54) 두 사람은 이르쿠츠크파 고려공산당 간부들이었다. 최창식이 임시의정원 의장에 선출된 것은 李承晩을 퇴진시키기 위한 개조파의 전략이었다. 뒷날 조완구는 성명서를 통하여 이때에 최창식이 「음모적 수단」을 부려 의장에 당선되었다고 성토했다.55)
 
  개조파의 목표는 임시헌법을 개정하는 일이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헌법개정에 필요한 의석수를 확보하는 일이 급선무였다. 의원자격 심사문제를 둘러싼 논란이 다시 한 달 가까이 계속된 것도 그때문이었다. 그리하여 6월7일에 이르러서는 최창식이 의정원 의장직 및 의원직의 사임서를 제출하는 사태까지 벌어졌으나, 최창식의 사임서는 9대 1의 표결로 반려되었다.56)
 
 
 
 安昌浩와 金奎植이 上海에 돌아와
 
  이때의 개조파 인사들의 행동이 안창호와 얼마나 깊이 관련된 것이었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안창호는 장기간 만주지역과 서북간도 등 여러 지방을 순방하고 2월에 상해로 돌아와서 「대동통일취의서」를 발표하고 통일운동을 다시 시작하고, 3월에는 미주 흥사단의 자금지원을 받아 南京에 東明學院을 설립했다. 그리고 국민대표회의 때에 개조파로 함께 활동했던 윤자영이 4월5일에 상해청년동맹회를 결성하자 흥사단 청년들 다수를 참여시켰다.57) 그러므로 임시의정원을 장악한 개조파들의 동향이 안창호와 무관했을 수는 없다.
 
  러시아 정부에 큰 기대를 걸고 블라디보스토크로 갔던 창조파 인사들도 이 무렵에는 上海와 北京 등지로 돌아와 있었다. 일본군의 시베리아 철수와 러-일 협상의 진전, 레닌의 사망 등의 정세변화와 이동휘 그룹의 반대로 소비에트 러시아 정부는 창조파들이 러시아 경내에서 「정부」를 자처하며 활동하는 것을 허용하지 않았던 것이다.58) 독립운동자들 사이에서 면목이 없게 된 金奎植은 실의에 빠져서 프랑스조계 동방대학 영어교사로 취직했다.59) 尹海, 申肅 등 다른 간부들은 北京으로 돌아왔다. 창조파들은 6월7일에 김규식을 포함한 9명의 국민위원회 집행위원 명의로 「국민위원회공보」 제1호를 발행하여 2월22일에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열었던 국민위원회 제1회 회의의 결의사항을 공포했다. 그것은 그들이 조직했던 「정부」체제를 「한국독립당」 조직으로 바꾸는 내용이었다. 사흘 뒤인 6월10일에는 한국독립당안을 발표하게 된 경위를 알리는 「포고」 제1호를 발표하고, 이어 6월15일에는 적의 양해 아래 국내에 출입했다는 이유로 朴容萬을 비서장직에서 면직시키고 국민위원회에서 제명했다.60) 이러한 움직임은 개조파들의 李承晩 퇴진작업을 더욱 부추기는 것이었다.
 
 
 
 議政院會期를 이듬해 2月까지 연장
 
  압도적인 우위를 확보한 개조파들은 조금씩 연장해 오던 임시의정원 회기를 아예 이듬해 2월까지로 연장했다. 그리고는 마침내 6월16일에 조상섭, 김붕준, 최석순 등 8명의 명의로 「임시대통령 유고문제에 관한 제의안」을 제출했다. 제의안은 현임대통령 李承晩이 임지를 멀리 떨어져 있으면서 4년 동안 자리를 비우고 있는 것은 허용될 수 없는 문제라면서 그 해결책으로 다음의 3개항을 제의했다.
 
  1) 미주에 있는 현임 임시대통령 이승만 각하에게 전보하여 속히 귀환하도록 청할 것.
 
  2) 지금부터 현임 임시대통령 이승만 각하가 임지에 귀환할 때까지는 임시대통령이 유고임을 공포할 것.
 
  3) 임시대통령이 유고인 기간은 현임 국무총리 이동녕 각하가 임시헌법 제17조에 따라 당연히 그 직권을 대리하는 것을 공포할 것.61)
 
  이 임시대통령 유고안은 그날로 가결되었다.62) 이때의 대통령 유고안 결의가 어떤 의미를 담고 있는지는 상해여론사에서 발행된 「上海評論」 창간호의 다음과 같은 논평에 잘 드러나 있다.
 
  〈헌법개정은 최창식을 우두머리로 한 일파의 의사인데, 첫째 보수파의 반대로 인하야 안건이 제출된 후 통과될 만한 표수를 얻기가 문제이었으며, 둘째는 통과될 만한 표수를 얻어서 개정안이 통과된다하더라도 미국 계통의 대통령인 이승만이 위원제에 동의할 리가 만무한즉, 역시 한 난문제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최군의 전략 수단은 먼저 통과될 만한 표수의 동의자를 득하였고, 다음에는 대통령의 유고안을 통과시켜서 대리대통령을 선임하야 미주에 있는 이승만으로 하여금 간섭의 여지가 없도록 만들어 놓았다.〉63)
 
  최창식 그룹과 가까운 인사들에 의하여 발행되었던 것으로 보이는 「上海評論」지의 이러한 논평은 최창식 등이 구상하고 있는 개정헌법의 권력구조가 소비에트러시아의 체제를 본뜬 위원제였음을 시사한다. 이때의 임시의정원 기록이 보존되어 있지 않아서 결의안의 심의과정이 어떠했는지 알 수 없으나, 이처럼 중대한 결의안이 제출된 그날로 전격적으로 처리되었다는 것은 결의안 채택 과정에 문제가 없지 않았을 것으로 짐작된다.
 
 
 
 믿을 것은 하와이의 側近들뿐
 
  임시의정원의 임시대통령 유고 결의로 李承晩은 큰 위기를 맞았다. 임시정부는 6월21일에 李承晩에게 다음과 같이 타전했다.
 
  〈총리 취임. 의정원은 보결된 다섯 각원을 고의로 부결하고, 유임된 세 총장까지 힐난하며, 대통령이 유고하니 총리가 대리하라고 결의. 정부는 불가타하야 재의 요구코자하나 내두 풍파 불측. 곧 회전. 국무회의 구차 형성. 서신으로 상고.〉64)
 
  6월24일에는 임시의정원도 李承晩에게 임시대통령 유고 결의 사실을 통보하면서 곧 상해로 올 것을 촉구하는 전보를 쳤다.
 
  〈속히 오시오. 각하 오시기까지 유고로 결정. 국무총리가 대리 공포하기로 하얏소. 회답.〉65)
 
  임시정부와 임시의정원의 전보를 받자 李承晩은 6월24일에 답전을 쳤다. 임시정부에는 〈대통령 대리 불가하니 받지 마시오〉라고 타전했고66), 임시의정원에는 〈필요하면 가지오. 대통령 대리 내지 마시오. 내 공함에 다 말했소〉67) 라고 타전했다.
 
  이렇게 상해로 답전을 보내고 나서 李承晩은 그 자리에서 하와이의 측근들에게 비밀전보를 치고, 자금지원을 요청했다. 믿는 것은 그들뿐이었다.
 
  〈밀전. 민단-부인-동지 임원께. 상해서 모분자가 다시 풍파. 시국 위태. 돈 있어야 일하겠소. 편지 가오.〉68)
 
  임시정부는 바로 대통령유고 결의 재의요구안을 임시의정원에 제출했다. 임시의정원은 6월25일에 이 요구안을 상정했으나,69) 토론 끝에 대통령재의요구안 심사위원회를 구성하기로 하고 이 위원회에 심사를 맡겼다. 「모분자」란 안창호를 지칭한 말이었을 것이다.
 
 
 
 在外同胞들에게 직접 呼訴하기로
 
  李承晩은 긴장했다. 그는 개조파들을 견제하기 위하여 극동과 미주지역의 모든 재외동포들에게 직접 호소하기로 결심하고, 「재외동포에게」라는 긴 성명서를 작성했다. 그것은 반대파에 대한 선전포고였다.
 
  〈이 글을 쓰는 나 리승만은 재외동포에게 고하노니, 동포여 당신이 리승만 일 개인에게 대하야 무슨 감상을 가지든지 한국에 대한 애국심은 다 일반이라. 나도 한국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이 글을 쓰나니, 당신도 한국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이 글을 보시오.…〉
 
  이처럼 비장한 말로 글을 시작한 李承晩은 한국이 독립을 이루지 못하는 이유가 재외동포들이 단결하지 못하는 데 있다고 말하고, 단결하지 못하는 이유는 사람들이 모두 자기 단체나 자기네 지도자의 세력하에서 통일하자고 고집해 왔기 때문에 그것이 도리어 통일을 방해하고 분열을 조장했다면서, 임시정부에 대한 태도와 관련하여 다음과 같이 말했다.
 
  〈기왕부터 정부를 옹호하여 온 이들은 자기 직책 다한 것만 풍족히 여기지 말고 직책을 행치 않는 동포도 직책을 행하도록 힘써서 아직까지도 반대나 혹 중립 태도를 가지는 사람들로 하여금 그 영향이 어디에 미치는 것을 깨닫게 할지며, 이왕에 정부를 반대하는 단체나 인도자를 도와온 사람은 그 인도자나 단체로 하여금 정부를 복종하게 하든지 그렇지 못하면 친부자형제 간이라도 충의상 문제에 대하여는 길을 나누어 대의를 밝힐 것이며, 어떤 단체와 어떤 인도자에게 속하였든지, 또는 정부 주권자에게 대하야 어떠한 감상을 가졌든지 다 물론하고, 한인된 자는 한국 정부에 대한 직책을 면할 수 없나니, 이 직책을 아니하는 자는 독립을 장애하는 자로 인정할지라.…〉
 
  그는 이어 정부의 집권자에 대하여 시비하거나 반대하는 것은 공화국 국민의 권리이나 정부 그 자체를 반대하는 것은 곧 국가를 반대하는 공적이라고 역설했다. 대통령이나 각원들이 같은 지방이나 같은 당파의 사람이 아니므로 정부를 돕지 않는다는 말은 전제국가에도 없고 공화국에는 더욱 없는 말이며, 인민의 유치한 정도만 드러낼 뿐이라는 것이었다.
 
 
 
 政府의 大政方針은 現狀維持
 
  李承晩은 대통령이 다른 지도자들과 담합되지 못하여 통일이 되지 않는다는 말에 대해서는 이렇게 해명했다.
 
  〈대통령이 모든 인도자를 합동하야 일하지 못하니 통일이 못 된다 하는 말은 또한 사실이 아니라. 당초에 정부 조직된 이후로 어떤 각원들은 당초부터 정부를 공격하며 자유행동을 취하였고, 어떤 각원은 당지에서 각각 단체를 모아서 서로 악선전으로 남을 결단내고 홀로 주권을 잡으려 하는 중에서 분쟁을 이루어 서로 다 결단을 받게 되었으며, 급기야 형편이 어찌할 수 없이 된 후에는 대통령을 청하여다 놓고 사면하고 나가라고 권면하다가, 그도 여의치 못하매 자기들이 나가서 파괴행동을 시작한 것이라. 이것은 세상이 다 아는 일이니, 우리가 오래 살기만 하면 역사에 다 소상히 올라서 우리 눈으로 볼 수 있을 것이라.
 
  지금에라도 이전 각원들이 다시 들어와 함께 일하고저 하면 나는 성심으로 환영할 터이오 한 사람이라도 들어와서 다시 함께 일하기를 간절히 원하나, 다만 한 가지 요구할 것은 지금부터는 현 정부의 대정방침을 성심으로 복종하겠다는 뜻을 공중에게 선언함이라. 이는 목적이 같지 않은 사람들이 한 단체 안에 합동되면 물과 불이 합함과 같으니 결단코 조용할 수 없는 연고라.…〉
 
  그러면서 현 정부의 대정방침이란 곧 현상유지라고 잘라 말했다.
 
  〈현 정부 대정방침이라는 것은 무엇을 가리킴이냐. 다름 아니오 곧 과거 5, 6년 동안 지켜 내려오는 바 현 정부제도를 유지하야 이 단체 명의로 대한인의 통일을 이루어 광복대사의 최고기관을 삼자 함이라. 이것이 곧 우리 내지 외양의 다수 인민의 사명이요 또 우리의 직책이므로, 우리는 이것을 우리의 힘 자라는 데까지 지켜나온 것이다.…〉
 
  李承晩은 대통령이 왜 지도자들을 한데 모아서 크게 의논해 보지 않느냐는 말에 대해서는, 자기가 21년에 상해에 갔을 때에 다른 지도자들과의 단합을 위하여 여러 가지 시도를 해 보았으나 실패했던 것과 국민대표회의가 결렬되고 만 사실 등을 들면서, 모든 지도자들이 서로 양보하고 자기를 희생하겠다는 결심을 하기 전에는 열 번 백 번 모여 본들 세상에 수치만 드러낼 뿐이라고 말했다. 그러고는 다음과 같이 단호하게 긴 성명을 마무리했다.
 
  〈그러므로 우리 백성이 먼저 자기의 권리와 직책을 행하며 다른 사람들로 하여금 또 이와같이 하도록 만들고, 이와같이 아니하는 사람은 친형제 동기라도 나라에 불충하는 자로 인정할진대, 모든 인도자들이 비로소 사심을 버리고 공의를 위하야 일할지니, 이것이 곧 우리 민국통일의 완전한 방침이며 모든 공화국의 기초적 주의라. 지금 우리 기회가 날로 가까이 오나니 어서 준비하고 앉아서 시기를 기다리다가 대대적으로, 조직적으로, 내외 합동으로 군사상, 외교선전상에 일시 병발하기를 마치 신체 완전한 사람이 원수를 대할 적에 사지 백체가 다 일심응종하야 싸우듯 하여야 될지라. 모든 충애동포여 어서 합심합세다.〉70)
 
 
 
 排日移民法은 韓國人과 무관
 
  李承晩은 「재외동포에게」에 이어 다시 「한인들은 어찌하려는고」라는 장문의 성명서를 작성했다. 이 성명서는 새로 제정된 미국이민법의 시행을 계기로 美·日전쟁의 가능성이 더욱 커진 상황을 설명하면서 동포들의 단결을 강조한 글이었다.
 
  1924년 5월26일에 제정되어 7월1일부터 실시하기로 된 미국의 새 이민법은 일본인의 미국 이민을 전면적으로 금지한 것으로서, 排日이민법(Japanes Exclusion Act)라고도 불렸다. 일본은 이 이민법이 백인들의 황인종 차별법이라면서 같이 대항해야 한다고 국내동포들까지 부추겼다. 이에 대하여 李承晩은 「東亞日報」에 다음과 같은 글을 보내어 미국의 새 이민법이 한국인들과는 상관이 없음을 설명했었다.
 
  〈미국이 일본이민법안 통과한 것은 우리가 냉정한 태도로 볼 것뿐이다. 백인이 황인을 구별하니 황인이 합동하야 백인을 대항하는 것이 옳다는 말은 진정으로 우리의 인종동등권을 위하야 하는 말이 아니오 다만 일시의 인종적 감정을 선동하야 이용하려는 것 뿐이니 [어리석게 남의 이용이 되지 말 것이라.] 영미국 각 신문에 크게 선전되는 것을 보건대 『한인들이 미국이민법을 반항하야 서울에 있는 영미영사관을 포탄질하려는 음모가 발각되므로 일본관리들이 영사관을 극히 보호한다』하는 지라. 이것이 다 사실이 아니요 악선전에서 나온 줄로 아는 사람도 적지 않지마는, 남이 백계로 이용하려는 것을 모르고 그 선동에 빠지는 한인이 한둘이라도 있으면 [심히 어리석은 일이다].
 
  우리는 동양에서 먼저 남과 같이 살자는 것이 제일 급한 문제라. 이 문제를 먼저 해결한 후에야 서양인과 관계가 어떠한 것을 의논할 계제가 있을 것이지, 만일 그렇지 아니하야 우리가 다 희생하고라도 다른 동양인이 세계에 상등대우를 받게 하자 할진대 이는 [속담에 남의 친환(親患)에 단지(斷指)하는 이보다 더 우스운 일이라. 단지하는 자는 손가락이나 허비할 뿐이지마는 이것은 생명까지 허비할 터이로다].
 
  하물며 이번에 미국이민법이 우리에게 조금도 관계가 없는 것이라. 우리 이민은 막힌 지가 오래고, 다른 사람만 특별한 대우를 받다가 지금에 이것이 막힌 것이니, 우리에게는 조금도 상관이 없는지라. 아주 냉정히 볼 것이외다.〉71)
 
  괄호 안의 내용은 조선총독부에 의하여 「東亞日報」 지면에서 삭제된 부분이다. 조선총독부의 검열이 얼마나 교묘했는가를 짐작하게 한다. 李承晩은 이보다 앞서 4월에도 「東亞日報」의 영문 논설난에 「자유와 단결」이라는 글을 기고했었는데,72) 이 글은 조선총독부에 압수되었다.73)
 
 
 
 美-日戰爭 발발하면 美國과 협조해야
 
  「한인들은 어찌하려는고」는 먼저 오늘날의 국제정치는 강대국은 다른 나라와 연맹도 하고 밀약도 하여 국가이익과 세력을 유지도 하고 확장도 하며 약소국가는 열강의 분쟁을 이용하여 자국의 위치를 보호도 하고 권리를 확장도 하는 것이라면서, 오늘날 한국의 처지로는 이웃나라의 충돌을 잘 이용해야 된다고 전제하고, 약소국이 열강의 충돌을 이용하는 방법을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소약국이 열강의 충돌을 이용하는 방법은 어떤 이웃나라를 믿어서 그 나라가 잘되면 우리를 독립시켜 주리라 하고 그 나라를 돕자는 것이 결코 아니니, 이것은 우리나라 사람들도 다 경력을 인연하야 아는 바라 더 말할 필요가 없고, 다만 그 중간에서 남이 서로 싸우는 기회를 이용하야 우리가 우리 정신을 차려 가지고 우리일 하자는 것이라. 이런 기회를 타서 우리가 우리 일만 잘하면 누가 이기고 누가 지든지 다 우리에게 상관없고 다만 우리 일을 이루는 데 속하기가 기러기 털이 순풍을 만난 것 같을 것이다.…〉
 
  李承晩은 일본이 어느 나라와든지 머지않아 또 전쟁을 하게 되는 것은 필연적인 일이며 그것은 우리에게 큰 기회가 될 것인데 우리는 무엇을 준비해야 되겠느냐고 물으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설령 어떤 나라가 일본과 개전하게 되어서 그 나라가 우리와 연맹을 하자든지 우리에게 재정이나 혹 군기를 도와주마 하면 우리는 이에 대하야 어찌하겠느뇨. 설령 그 나라가 우리 민국정부를 승인하면 우리는 또 무슨 태도를 가지겠는고. 우리 모든 한인들이 다 합동하야 그 정부 아래서 설령 지휘를 받으며 조직적 행동을 취하겠는가, 또 여전히 분쟁 분열로 서로 싸우다가 말겠는가.…〉
 
  美·日전쟁이 발발하는 경우 비록 미국 정부의 「지휘」를 받더라도 그들과 협력하여 행동해야 된다고 강조하고 있는 것이 눈길을 끈다.
 
  李承晩은 이어 독립운동자들이 단결하지 못하고 실패했던 일을 상기시켰다. 1917년의 소약속국동맹회회의(The Conference for the League of Small and Subject Nationalities)에 참가한 한인대표들이 대표권 문제로 논쟁을 벌였던 일부터 임시정부의 수립과 통합과정의 분란, 소비에트 러시아 정부와의 교섭과정의 파행, 현재의 미주 동포사회의 반목 등에 이르기까지의 분열상을 구체적으로 적시하면서 현재의 상황을 「반신불수 병들린 자」에 비유했다. 그러면서 이렇게 말했다.
 
  〈설령 지금 우리에게 좋은 기회가 오게 되면 또 이상에 말한 바와 같이 서로 다투며 서로 해하겠는가, 다 합하야 형식상 승인을 얻든지 실제로 재정을 얻든지 하면 모든 한인이 다 이에 합동적으로, 조직적으로, 꾀있게, 지혜롭게, 규모 있게, 효력있게 이용할 수 있겠는가. 모든 한인은 이때에 이것을 연구하야 준비해야 될 것이다.〉
 
  李承晩은 한국인들이 분열의 폐단을 시정하지 못한다면 연전에 있었던 관동대지진 때의 학살과 같은 참상을 도처에서 당해도 말 한마디 해줄 사람이 없을 것이라고 경고하면서, 유태인과 아르메니아인들이 당해 온 학살의 보기를 들었다. 그리고 다음과 같은 말로 글을 맺었다.
 
  〈지금 우리가 급히 급히 할 것이 다른 것 아니오, 한인된 자는 어디 있든지 각각 자기 동포를 보호하며 나라를 회복하기 위하야 민국정부 밑에 다 한 단체를 이루어서 대동단결로 우리의 앞길을 준비하여 가지고 앞의 기회를 잘 이용하기를 결심하는 것이 도리요 또한 지혜라 하노라.〉74)
 
 
 
 팸플릿으로 만들어 國內外에 配布
 
  이 성명서는 앞의 「재외동포에게」와 함께 하와이에서 대량으로 팸플릿으로 만들어져 시베리아와 만주, 중국 각 지역의 동포 기관과 하와이 미주지역의 동포들에게 뿐만 아니라 국내의 언론기관 등에도 발송되었다. 이 성명서들이 얼마나 광범위하게 배포되었는가는 간도의 局子街(지금의 延吉市)에 있는 崇信學校에까지 다섯부가 발송된 사실75)로도 짐작할 수 있다.
 
  李承晩은 성명서들을 하와이와 극동지역에 배포하고 남은 것은 워싱턴으로 보내라고 하와이로 타전하고 있는데,76) 이는 그가 이 성명서들의 배포에 크게 신경을 쓰고 있었음을 말해 준다.
 
  분만과 위기의식을 함께 느끼면서 작성했을 이 두 성명서는 李承晩의 문장력을 보여 주는 것이기도 하다. 그러나 그가 강조한 대동단결의 논지는 결국 다른 독립운동자들의 분파적 행동에 대한 신랄한 매도였다. 李承晩은 자신의 임시 대통령 직위의 정통성과 합법성, 그리고 자신의 사고와 행동의 무오류성을 믿었다. 그리하여 자신이 통솔하는 임시정부에 복종하지 않는 자는 〈친부자형제 간이라도 나라에 불충하는 자로 인정〉해야 한다고 주장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의 이러한 주장은 반대자들의 자성을 유도하기보다는 오히려 반감만 촉발했을 것이 틀림없다.
 
  구미위원부의 법률고문 돌프(Fred A. Dolph)도 7월에 「한인첨위에게 보내는 글(Open Letter to Koreans)」을 썼다. 돌프는 워싱턴회의가 끝난 뒤에 서재필과 鄭翰景이 워싱턴을 떠나고 나서 구미위원부가 활동을 중단하다시피 하고 있는 동안에도 아무런 보수도 없이, 오히려 자신의 변호사 수입으로 위원부를 지켜 왔었다.77)
 
  〈한국 독립은 조만간에 옵니다〉라는 말로 시작되는 돌프의 편지는 한국인의 민족적 자긍심을 한껏 고취시키면서 임시정부와 구미위원부의 존재가치를 강조한 것이었다. 그는 임시정부의 수립과 각원 선정과정이 국제적으로 인정받기에 충분한 법적 타당성을 지녔다고 강조하고, 한국인들의 큰 결점은 자신감의 부족이라고 말했다. 그는 한국인이 극동에서 가장 우수한 민족이라면서, 그 근거로 금속활자의 발명과 李舜臣의 철갑선 등을 들었다.78) 돌프의 편지도 재외동포 사회에는 물론 국내에까지 발송되었다.
 
 
 
 漢城政府正統性 내세워 「有故」 決議 거부
 
  李承晩은 7월1일에 국무원 앞으로 편지를 썼다. 그는 먼저 지금까지 자신은 한성정부의 각원을 친소 간에 한 사람도 내보내지 않았다고 말하면서 한성정부의 정통성을 다시 한번 강조하고 나서, 상해 인사들에 의하여 그 정통성이 손상되었음을 상기시켰다. 대통령 칭호만 하더라도 자신은 처음부터 집정관총재로 시행해 왔는데 상해 정객들의 선동과 시비 때문에 일시적인 타협책으로 대통령이라고 개칭했을 뿐이라는 것이었다. 그는 임시의정원의 태도와 관련하여 이렇게 적었다.
 
  〈상해의 조취모산(朝聚暮散)하는 몇몇 정객으로 일국 정부를 임의로 변동되기를 허하는 날은 음모와 궤휼수단으로 정부 번복이 무상하며 명예와 권리를 다투느라고 풍파는 더욱 심하리니, 광복을 촉성하기는 고사하고 세인 이목에 수치를 면치 못할지라. 지난 5, 6년 경력을 관찰한 제공은 깊이 아실 줄 압니다.…〉
 
  그러면서 국민대표회의가 결렬된 뒤에 정국의 동요가 진정됨에 따라 내외 각지에서 질서의 정비를 바라는 여론이 높아지므로 지난 3월에 정부를 확충하여 사업을 진행할 방안을 국무원과 의정원에 제안하고 회답을 기다리고 있었는데, 다시 헌법개정이니 대통령 대리니 하는 말만 하고 있으니 말이 안 나온다면서, 〈슬프다. 상해 인사들은 종시 이렇게 세월만 보내며 좋은 기회를 앉아서 잃어 버리려 하는가〉 하고 힐난했다. 그러고는 다음과 같이 단호하게 말했다.
 
  〈의정원은 개회한 지 오래서 반 년이 지났으매 폐회할 기간이 여러 번 넘은지라. 이것도 사례에 부당하니 속히 폐회하도록 하시며, 국무원에서는 합심 단결하야 기호이니 서북이니 하는 유치한 평론에 구애치말고 자래로 준수하여 오던 현 정부 방침을 굳게 지켜서, 중망을 저버리지 말며 대업을 촉성케 하심을 무망하나이다.〉79)
 
  이처럼 李承晩이 한성정부의 정통성을 강조하면서 임시의정원의 처사를 힐난하고 있는 것은 자신의 대통령직을 위협하는 어떠한 결정도 결코 받아들이지 않겠다는 의지를 표명한 것이었다.
 
 
 
 獨立黨代表會議 소집 결의와 法制改定政務刷新 연구조사위원 선정
 
  개조파 의원들은 임시대통령 유고 재의요구안을 심사위원회에 회부해 둔 채 그들의 기정 방침을 추진해 나갔다. 7월12일에는 독립당대표회의 개최건의안과 법제개정 정무쇄신 연구조사위원 선정안이 동시에 제출되었다. 두 안건의 제안자는 윤기섭, 여운형, 윤자영, 김상덕, 조덕진, 嚴恒燮(엄항섭) 등 20명으로 되어 있었고, 한 사람 말고는 모두 같은 사람들이었다.80) 전자는 전년에 실패했던 국민대표회의와 같은 성격의 모임을 이번에는 임시정부가 주동이 되어 소집하자는 대정부 건의안이고, 후자는 임시의정원 안에 개헌작업을 하기 위한 기구를 구성하자는 제의였다.
 
  임시정부는 독립당대표회의 소집에 찬성하지 않았다. 외무총장 조소앙은 전년의 국민대표회의의 결렬 경위를 설명하면서 반대했다. 재무총장 이시영은 임시의정원의 독립당대표회의 소집의 결의에는 찬성하나 현재의 임시정부 재정 형편으로는 도저히 시행하기 어렵다는 이유로 반대했다.81)
 
  그러나 임시의정원은 7월17일에 이 건의안을 가결하고 회의소집에 관한 조례까지 제정하면서 임시정부를 압박했다.82) 그리고 7월24일에는 윤자영, 김붕준, 김상덕, 조상섭 등 11명의 법제개정 정무쇄신 연구조사위원을 선정하고 개헌작업 준비를 서둘렀다.83) 이어 8월17일에는 그동안 결론을 미루어 왔던 대통령 유고 재의요구안 심의위원회가 6월16일의 임시의정원의 임시대통령 유고결의가 타당하다는 결정을 내렸고,84) 임시의정원은 8월21일의 회의에서 이 결의를 확정했다.85) 이로써 李承晩은 공식적으로 임시대통령의 직권이 중지되고, 국무총리 이동녕이 임시대통령 직무를 대리하게 되었다.
 
 
  (3) 朴殷植을 臨時大統領代理로
 
 
  임시대통령 李承晩의 유고와 임시대통령 직무대리를 반포하는 1924년 9월1일자 「임시대통령령」에는 아이로니컬하게도 李承晩 자신의 이름과 국무총리 이하 각 총장들의 이름이 병기되어 있었다.86) 이 대통령령을 반포하기에 앞서 임시정부는 李承晩에게 〈대리안 고집. 부득이 반포하오. 곧 오심이 필요〉라는 전보를 쳤다.87)
 
  이승만은 격노했다. 그는 이동녕 앞으로 다음과 같이 타전했다.
 
  〈현상 변개 동포가 불원. 대리 반포 못 하오.〉88)
 
 
 
 李東寧 나무라는 편지 보내
 
  이동녕 앞으로 전보를 친 이튿날 李承晩은 국무원 앞으로 이동녕과 다른 국무원들을 심히 나무라는 편지를 보내고, 자신은 결코 임시의정원의 결정에 따르지 않겠다고 다음과 같이 천명했다.
 
  〈누차 공함으로 행정의 실권을 이총리에게 위임하야 현상유지하에서 서무를 국무원 공결로 집행케 하였나니, 대리 명의를 첨가할 필요가 없는지라. 지금에 총리로 대통령을 대리케 하면 그 이튿날부터 정계풍파가 다시 일어나서 변동을 예측하지 못할 터인즉, 소란거리를 만들어 정국을 파괴하는 결과에 불과할 것입니다.
 
  의정원에서 이 안(대통령 유고안―필자 注)을 통과하고 집행하기를 촉구하므로 국무원에서 부득이 준행한다 할진대, 이는 각원 일동이 저 창조 개조 각 분자와 표리 상응하야 찬동한다는 세론이 없지 않을지니, 장차 파괴의 책임을 제공이 피면키 어려우리다.
 
  상해의 한두 부분적 인사가 민중의 公願을 위반하고 정부를 자의로 擅便(천편 : 마음대로 처단함)코저한 지 오래이나, 대통령은 결코 응종치 않을 터이니, 시일과 심려를 허비치 말고 다만 현 정부하에서 합일하야 국사를 함께 도모함이 유일한 양책이라고 반포하시오.〉89)
 
  그러나 이동녕 내각은 이미 임시의정원의 요구를 수용하고 있었다. 독립당대표회의의 소집문제에 대해서는 임시정부안에서도 의견이 갈렸다. 이동녕, 이시영, 조소앙, 조완구 등 기호파 인사들은 회의소집에 반대했으나, 金九를 비롯하여 노백린과 법무총장 대리 김갑 등은 회의소집에 찬성이었다. 상해 청년동맹회 등 청년들도 회의소집을 열망했다. 그리하여 임시정부에서는 여러 차례 비밀회의를 열어 토론한 끝에 이를 수용하기로 하고, 9월3일에 국무원령 제1호로 「獨立黨代表會議召集簡章」을 발표했다.90) 그리고 9월20일에는 2천만 민중이 〈사상을 통일하고 의견을 종합하여 … 동일한 보조로써 임시정부 기치 아래 집중〉하자는 「2천만 민중에게 경고함」이라는 포고문을 발표했다.91)
 
  「독립당대표회의소집간장」은 전년의 국민대표회의 때와는 달리 회의의 주도권을 임시정부가 행사하는 것으로 규정했다. 「간장」은 회의소집권을 갖는 소집위원회를 국무원 중에서 구성하고(제2조), 회의에 참가하는 대표는 단체가 선출한 대표와 정부에서 지정하는 대표로 한정하기로 했다(제4조 2항). 그리고 회의의 소집에 필요한 일체의 비용은 정부에서 지출하고(제5조), 위원회의 사무규정 및 대표회의 의사규정도 국무원으로 구성되는 위원회에서 정하기로 했다.92)
 
  그러나 국민대표회의에 의하여 이미 그 권위가 크게 훼손되었고, 회의에 소요될 비용을 마련할 방안이 없는 임시정부로서 각 지역에 산재한 독립당의 대표들을 한자리에 소집한다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金九가 독립당대표회의 소집에 적극적이었던 것은 서울에서 온 閔泳翊의 서자 閔廷植으로부터 자금을 조달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93)
 
  임시정부의 이러한 동향에 대하여 李承晩은 9월29일에 이시영에게 보낸 편지에서 그의 착잡한 심경을 토로했다. 그는 먼저 이동녕이 취임하자마자 제도변경 논의와 독립당대표회의 소집제의에 동의한 사실을 비난하고, 자신의 상해 방문 문제에 대해서는 상해에 가더라도 믿을 사람이 한 사람도 없고 자금을 몇만 달러 가져가 본들 자기를 진정으로 존경하고 보호해 줄 사람이 없을 뿐만 아니라 자금이 떨어지면 모두들 돌아서 갈 터이므로 누구와 더불어 대사를 의논하겠느냐고 한탄했다. 그러면서 〈그러나 여비가 있으면 한 번 가는 것은 마다하지 않겠으나 공상에 끝날 뿐이외다〉라고 처량해하고 있는데,94) 그것은 자신이 상해를 떠나 있다는 사실이 결코 「유고」가 될 수 없음을 말하고자 한 것이었다.
 
 
 
 하와이 遠征野球團과 같이 온 尹致暎
 
하와이 원정야구단과 함께 하와이로 왔던 尹致暎. 1925년에 李承晩 등의 환송을 받으며 미국 본토로 떠날 때의 모습〔尹致暎, 「尹致暎의 20世紀」(1991)에서〕.
  李承晩은 하와이로 돌아가기로 결심했다. 하와이 동포사회의 동요를 미리 막고 자신의 지지기반을 더욱 공고히 하여 상해의 독립운동자들을 제압하기 위해서였다. 어쩌면 이들 상해의 〈조취모산하는 몇몇 정객〉들과는 결별해야 할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이 무렵 하와이에서는 모처럼 동포들의 망향의 열기를 일깨우는 이벤트가 있었다. 6월17일에 도착하여 한 달 넘어 머물다 간 서울 중앙YMCA의 하와이 원정야구단의 방문이 그것이었다. 원정야구단의 하와이 방문은 한인기독학원 학생들의 고국방문 때의 초청약속에 따라 이루어진 것이었다.
 
  원정야구단은 각 지역의 교회와 학교, 그리고 동포들이 몰려사는 농장캠프를 역방했다. 가는 곳마다 동포들의 열렬한 환영을 받았는데, 환영회에서는 어디에서나 빼놓지 않고 독립운동 이야기가 강조되었다. 원정야구단은 아홉 번 시합을 했는데, 성적은 2승 6패 1무였다. 시합 때마다 그 지방 동포 남녀노소가 거의 총출동하다시피 했다. 그들 가운데에는 야구를 잘 모르면서도 소풍놀이 삼아 참석하여 응원하는 사람도 있었다.95) 7월4일의 미국 독립기념일에 하와이의 일본인 직업야구팀인 아사히(朝日)팀과 시합했을 때에는 3만여 명의 관중이 모였다고 한다.96) 원정야구단은 7월28일에 프레지던트 윌슨호(S. S. President Wilson)편으로 귀국길에 올랐다.
 
  원정야구단의 일원으로 하와이에 왔던 尹致暎은 야구단과 떨어져서 그대로 남았다. 그는 미국 본토로 유학 가기 위하여 서울을 떠나온 것이었다. 李承晩에게 보내는 국내의 자금송부 등에 대한 尹致昊의 전언을 가지고 왔던 그는 하와이에 머물면서 「태평양잡지」를 펴내는 일을 도왔다.97)
 
  「태평양잡지」는 李承晩의 하와이 귀환에 맞추어 1924년 10월호를 「특별환영호」로 만들었다. 이 「특별환영호」는 속표지에 李承晩의 사진을 크게 싣고, 그 다음장에는 큰 활자로 한 면 전체에 걸쳐 〈대통령 리승만 각하께압서 본항에 행차하압심에 대하야 본 잡지사는 2천 독자를 대표하야 각하의 안착하심을 약소하나마 수중의 화환으로써 경의를 표하였사오며, 아울러 본 잡지사는 특별환영호로 제목하여 환영의 뜻을 원래하압신 각하께 봉정하압나이다〉라고 최대의 경의를 표했다.
 
 
 
 徐載弼이 다시 歐美委員部 고문되어
 
李承晩 특별환영호로 발행된「태평양잡지」1924년 10월호 표지.
  李承晩은 하와이로 떠나기에 앞서 구미위원부가 제대로 활동할 수 있도록 체제를 새로 갖추어 놓아야 했다. 그는 3월에 워싱턴에 도착하여 활동을 시작하면서 자신이 구미위원부 임시위원장을 맡고, 남궁염은 掌財(장재)로 임명했다. 그리고 클리블랜드에 있는 朱榮翰을 불렀다. 그는 먼저 중단되었던 「구미위원부통신」을 다시 발행하면서 지방위원의 성명보고와 지방정세 보고를 지시하고, 국민부담금을 1인당 매월 1달러 50센트씩 납부할 것을 촉구했다.98) 주영한은 여름 동안 일하다 돌아갔다.
 
  李承晩은 10월1일자 「구미위원부통신」을 통하여 새로 임명된 구미위원부 위원들을 발표했다. 먼저 남궁염을 대리 위원장으로 임명하고, 새 위원으로 申衡浩와 許政 두 사람을 임명했다. 신형호는 1921년 7월에 정한경의 후임으로 서기로 임명되기도 했었다.99) 그리고 워싱턴회의가 끝나면서 사임했던 서재필이 다시 고문으로 취임했다. 법률고문 돌프는 물론 유임되었다.100) 새로 발행되는 「구미위원부통신」은 재외동포들뿐만 아니라 국내 언론기관으로도 발송되었다.
 
  그동안 독립운동 일선에서 물러났던 서재필은 李承晩의 설득으로 다시 외교 선전 활동에 협력하기로 결심했다. 그는 6월11일에 일본에서 가토 타카아키(加藤高明) 내각이 성립되자 6월14일부로 가토에게 한국인들에게 자유를 허용할 것을 촉구하는 정중한 편지를 보내기도 했다.101)
 
  구미위원부를 새로 구성한 李承晩은 10월14일에 워싱턴을 떠났다. 이튿날 필라델피아에 들러 서재필을 만나고 뉴욕으로 돌아온 李承晩은, 그곳에서 이틀 동안 동지들을 만난 다음, 10월16일 아침에 뉴욕을 떠나 시카고와 그랜드 캐니언(Grand Canyon)에서 하룻밤씩 묵고, 로스앤젤레스에 도착한 것은 10월22일이었다. 그곳에서 사흘 동안 머물면서 동포들을 만나고, 10월25일에 이창규와 함께 칼라와이 호(S. S. Calawaii)편으로 로스앤젤레스를 떠나서, 11월1일 아침에 호놀룰루에 도착했다.102)
 
  李承晩은 상륙하기에 앞서 배 위로 찾아온 「애드버타이저(The pacific commercial Advertiser)」지 기자에게 자신의 이번 하와이 방문은 한국인의 대동단결을 도모하고 그것을 통하여 한국독립운동을 촉진하기 위한 것이라고 말하고, 한국인들이 일본인들이나 그밖의 동양인들과 같이 이번 배일이민법에 반대하고 있다는 보도는 누군가에 의한 허위선전에 지나지 않는다고 말했다.
 
  부두에는 교민단 간부들을 비롯하여 한인기독학원 교사들과 학생들, 애국부인회 회원 등 많은 사람들이 마중나와 있었다. 그리고 저녁 7시 반에는 한인기독교회에서 李承晩 환영회가 열렸다.103)
 
 
 
 閔廷植의 資金行方에 上海同胞들의 關心쏠려
 
  1924년 4월 무렵부터 상해 동포사회의 관심은 임시정부나 임시의정원의 동향보다도 국내에서 온 민정식의 자금행방으로 온통 쏠렸다. 민정식이 상해에 도착한 것은 4월4일이었다. 그는 부인과 여섯 살 난 딸과 동행자 세 사람과 함께 왔다.104) 민정식은 명성황후(민비)의 조카인 閔泳翊의 중국인 첩 소생이었다. 국내 신문에는 민정식이 막대한 재산을 주체할 줄 몰라서 공연히 겁을 먹고 상해로 도망간 것으로 보도되었으나,105) 민정식의 상해行은 임시정부와 관련이 있었다. 당시 재무총장 이시영의 비서로 근무했던 閔弼鎬의 회고에 따르면, 「朝鮮日報」의 편집국장 金炳赫과 민정식의 재산관리인 閔丙吉이 임시정부가 곤경에 빠져 있다는 말을 듣고 상해에 숨겨져 있는 민영익의 유산을 찾아내어 임시정부를 돕기 위해 민정식을 상해로 유인해 낸 것이었다. 민병길은 민필호의 인척이었다.106)
 
  한편 일본 총영사관의 정보문서는 민정식이 주변에서 자신을 친일파로 비난하는 것을 모면하기 위하여 상해에 와서 임시정부에 독립운동자금으로 거액을 제공하기로 약속했다고 적고 있다. 그런데 민정식의 돈을 사용하는 문제를 두고 임시정부 안에서는 의견이 갈렸다고 한다. 노백린은 독립운동은 정신을 근본으로 하는 것이므로 민정식 같은 인물의 돈을 받는 것은 독립정신에 위배될 뿐만 아니라 임시정부의 위신에 관계되는 일이라면서 거절해야 된다고 주장한 반면에, 金九는 개전의 정이 있는 사람은 용서하여 당원을 늘려서 독립의 날을 더욱 앞당기도록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는 것이다.107)
 
  결국 임시정부에서는 민정식의 돈을 쓰기로 했다. 그리하여 민정식은 얼마간의 자금을 임시정부에 내놓았던 것 같다. 일본 경찰의 한 정보보고서는 민정식이 5월중에 3만원, 6월 초순에 2만원 모두 5만원을 임시정부에 제공했다고 했으나,108) 이는 지나치게 과장된 액수일 것이다. 그것은 독립운동자들 사이에 그만큼 과장된 소문이 돌고 있었음을 말해 주는 것이다. 또 다른 보고서는 민정식이 5월에 임시정부에 600달러를 내놓았고, 임시정부는 5월8일에 임시정부 청사를 이시영의 집 2층에서 한 달 임대료 100달러인 프랑스조계 西門路 78호로 옮겼다고 했는데,109) 아마 그 정도가 민정식이 실제로 제공한 액수였을 것이다.
 
 
 
 紅蔘 팔아 만든 高宗의 秘資金
 
改造派들에 의하여 임시대통령 대리로 선출된 朴殷植〔白嚴 朴殷植全集(1)」(2002)에서〕.
  상해에 도착한 민정식은 임시정부와 프랑스 경찰의 보호를 받았다. 임시정부는 프랑스조계 古拔路(고발로) 7호에 민정식 일행이 머물 거처를 마련하고 사람을 붙여 보호하도록 했다. 그리고 프랑스경찰이 지원해 준 개인 경호원 3명이 그의 경호를 담당했다. 그리하여 민정식은 친척들과의 연락을 끊고, 다른 동포들로부터 협박당하지도 않았다. 그는 일본인들이 많이 살고 있는 홍구 근처를 제외하고는 어디든지 자유롭게 나다녔다.110)
 
  민정식이 나타나자 상해에는 민영익이 죽기 전에 수십만원에 이르는 막대한 자금을 상해와 홍콩의 은행에 예치해 두었는데, 민정식이 상해에 온 것은 그 자금을 찾아가기 위한 것이라는 소문이 파다했다.111)
 
  그 소문은 사실이었다. 高宗은 가장 믿는 심복인 처조카 민영익을 시켜서 홍삼 1만 근을 상해에서 팔아서 수십만원의 비자금을 마련하여 상해의 은행에 예치해 두었으나, 나라가 일본에 병탄당한 뒤에 이 돈은 민영익의 사유재산이 되고 말았다. 민영익은 본부인과의 사이에는 아들이 없었고 중국 망명 시절에 중국 소주 여인을 데리고 살았는데, 그녀와의 사이에 낳은 아들이 민정식이었다. 그런데 민영익은 1914년에 죽으면서 아무런 유언도 없이 열쇠 하나만 소주 여인에게 주었고, 소주 여인도 얼마 있지 않아서 죽고 말아, 그 열쇠는 민정식이 물려받았다. 그는 그 열쇠로 민영익이 상해의 은행에 맡겨 둔 재산을 찾으려고 했으나, 그 열쇠가 상해 어느 은행의 금고나 보험상자의 열쇠인지 알 수 없었다. 민영익은 생전에 서화를 좋아하고 자신이 난초를 잘 치기도 했으므로 값비싼 골동품도 남아 있을 것으로 기대했었는데, 아무것도 찾을 수 없었다. 임시정부에서는 혹시 저금통장 같은 것이 나오지 않을까 하는 기대도 했으나 허사였다. 그리하여 이때부터 민영익이 숨겨 놓은 비자금을 찾기 위한 임시정부의 탐색전이 시작되었다.
 
  임시정부에서는 청년들을 동원하여 밤낮으로 민정식의 신변보호에 힘쓰는 한편 민필호는 몇몇 외국인 변호사들과 함께 비밀리에 민영익의 예금이 실제로 있는지 알아보았다. 상해 英商匯豊銀行(영상회풍은행: Hongkong and Shanghai Banking Cooperation)에 민영익이 맡긴 보험상자가 보관되어 있었다. 그러나 상자 속에는 소송문서 몇 장 말고는 아무것도 없었다. 낙담한 민필호가 은행장에게 묻자 혹시 홍콩 본점에 무엇이 있는지 모르겠다는 대답이었다. 과연 본점에도 민영익의 보험상자가 보관되어 있었다. 민필호 일행은 중국인 유력자 唐紹儀(당소의)를 찾아가서 홍콩 회풍은행의 친구에게 보내는 소개장을 얻어 가지고 홍콩으로 갔다. 1년 동안 밀린 보험상자 임대료 1,000원을 지불하고 상자를 열어보았으나 그 상자 역시 비어 있었다.112) 이렇게 하여 민영익의 숨겨 놓은 자금을 찾기 위해 8개월 동안이나 공들였던 임시정부의 모든 노력은 수포로 돌아가고 말았다. 그 뒤에도 이 돈의 행방은 수수께끼로 남았다.
 
 
 
 李東寧 內閣의 崩壞
 
  이 무렵에 민정식의 장인 李範喆이 사위와 딸을 본국으로 데려가기 위하여 상해로 왔다. 一進會 회원인 이범철은 민정식의 재산을 노리고 그의 딸을 민정식과 결혼시켰기 때문에 민정식은 그를 몹시 증오하고 있었다. 민정식은 장인의 요청을 거절하면서 한 달 동안이나 만나지 않았다. 그러자 이범철은 일본 총영사관의 힘을 빌어 민정식을 강제로 데려가려고 획책했다. 그는 일본 총영사관에 사위가 한국인들에게 감금되어 있으므로 구출해 달라는 청원서를 제출했다.113) 이 요청에 따라 12월10일 오전에 프랑스 경찰의 지원을 받은 일본 경찰이 민정식 일행이 묵고 있는 天文臺路 與業里 1가 28호의 집을 덮쳤다. 이범철은 일본 형사들을 1층에 대기시킨 채 민정식을 2층 방으로 데려가서 설득했다. 그러나 민정식은 이범철을 따라 나서려고 하지 않았다.
 
  『당신은 나를 어디로 데려가려 합니까? 나는 어느 곳이든 당신을 따라가는 것을 더 이상 원치 않습니다』
 
  『그렇게 말하지 말게. 나는 경찰들과 함께 왔네』
 
  민정식의 완강한 저항에도 불구하고 일본 경찰은 민정식과 그의 처와 어린 딸을 자동차에 태워서 일본 총영사관으로 데려갔다.114) 사흘 뒤에 일본 총영사관은 그에게 일본 경찰 한 명을 붙여서 상해를 떠나게 했다.115)
 
  민정식이 일본 경찰에 연행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당황한 임시정부는 긴급회의를 열고 대책을 숙의했다. 민정식이 일본 경찰에 연행되던 날 밤에 金九는 부하 여러 명을 풀어서 일본 여관과 그밖에 민정식 내외가 숨어 있을 만한 장소를 찾아보았으나 허사였다.116)
 
  민정식이 일본 경찰에 연행된 사건은 상해 독립운동자들 사이에 또 한 번의 파란을 몰고 왔다. 여기저기에서 임시정부를 성토하는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흥분한 일부 동포들은 임시정부의 무능에 분격하여 임시정부 청사로 몰려가서 항의했다. 결국 국무총리 이동녕이 민정식이 연행된 다음날인 12월11일에 사건의 책임을 지고 임시의정원에 사퇴서를 제출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그러나 이동녕의 사임만으로 독립운동자들의 흥분이 가라앉지 않았다. 이동녕 내각의 붕괴를 획책하던 개조파들은 뜻밖의 기회를 만났다. 그들은 흥분한 청년들의 여론을 업고 총장들의 총사직을 요구했다. 이에 金九를 비롯한 모든 각료들도 마침내 사직하고 말았다.117)
 
  이동녕이 사직서를 제출한 그날로 임시의정원은 고령의 朴殷植을 대통령대리로 선출했다. 박은식은 이튿날 임시의정원 회의에 출석하여 대통령대리직을 수락하고, 이어 16일에는 내무총장 李裕弼, 외무 겸 재무총장 李圭洪, 군무 겸 교통총장 노백린, 법무총장 吳永善, 학무총장 조상섭, 노동총판 김갑의 내각 인선안을 임시의정원에 제출하여 동의를 얻었다. 다음날 이동녕 내각 때의 각부 총장들과 실무 책임자들이 모두 면직되고, 박은식을 국무총리로 하는 새 내각이 정식으로 출범했다.118)●
 
 

  1) 도진순 주해, 「백범일지」, 1997, 돌베개, 287쪽, 363쪽. 2) 정정화, 「녹두꽃」 1987, 未完, 89쪽. 3) 위의 책, 89~90쪽.
 
  4) 「東亞日報」 1924년 1월4일자, 「金龜氏喪配」. 5) 「東亞日報」 1924년 1월12일자, 「崔女史葬儀」. 6) 「新韓民報」 1924년 2월21일자, 「김구씨 부인 최여사의 장의」. 7) 「백범일지」, 288쪽. 8) 在上海日本總領事館警察部, 「朝鮮民族運動年鑑」 1924년 1월10일조.
 
  9) 「백범일지」, 307~308쪽. 10) 「중국국적의 한인 한태규 사건에 관한 건」, 「韓國獨立運動史 資料 20 臨政篇Ⅴ」, 1991, 國史編纂委員會, 23~24쪽. 11) 「중국국적의 한인 한태규 사건에 관한 건」, 「韓國獨立運動史 資料 20 臨政篇Ⅴ」, 23~24쪽 ; 「백범일지」, 308쪽. 12) 「백범일지」, 308쪽. 13) 「韓國獨立運動史 資料 20 臨政篇Ⅴ」, 29쪽. 14) 「백범일지」, 308~309쪽. 15) 「백범일지」, 309쪽.
 
  16) 日本外務省史料館 소장, 「不逞團關係雜件 鮮人ノ部 在歐米(七)」 1924년 1월25일 公機密 제5호, 「自稱大統領李承晩渡米ニ關シ報告ノ件」. 17) 「대통령려비 공고서」, 「美洲韓人民族運動資料」, 1998, 國家報勳處, 39~43쪽. 18) 「新韓民報」 1924년 2월14일자, 「리승만박사 도큐설」. 19) 「新韓民報」 1924년 1월31일자, 「리승만박사 도미」. 20) 孫忠武, 「漢江은 흐른다――承堂 任永信의 生涯」, 1972, 東亞出版社, 236~244쪽. 21) Konation→Kopogo, Oct. 24th 1923 및 Konation→Dong-A Daily, Oct. 24th 1923, The Institute for Korean Studies, ed, The Syngman Rhee Telegrams, vol. Ⅳ., 2000, Kukhakcharyowon, pp.500~501. 22) 「李承晩이 李商在에게 보낸 1923년 9월경의 편지」, 「雩南李承晩文書 東文篇(제十六권) 簡札1」, 1998, 延世大現代韓國學硏究所, 193쪽. 23) 임영신의 전기는 이때에 李承晩이 팔레스호텔에 묵고 있었다고 했으나, 李承晩이 묵었던 곳은 스튜어트(Stewart) 호텔이었다(Log Book 1924년 1월29일조). 또한 이 전기는 이때에 李承晩은 제네바의 國際聯盟에 갔다가 하와이로 가는 길이었다고 기술하는 등 신빙성에 문제가 있다. 24) Syngman Rhee→Korea Commission, Feb. 5th 1924, The Syngman Rhee Telegrams, vol. Ⅳ., p.507.
 
  25) Syngman Rhee, Log Book of S. R. 1924년 1월23일~3월6일조. 26) 「新韓民報」 1924년 2월14일자, 「리승만박사 도큐설」. 27) 「리박사 려행비조」, 「美洲韓人民族運動資料」, 38쪽. 28) Kim Cho Lee→Daitongleung, Konation, Feb. 18th 1924, The Syngman Rhee Telegrams, Vol.Ⅳ., p.508.
 
  29) 「安昌浩가 아내 이혜련에게 보낸 1924년 1월13일자 편지」, 「島山安昌浩全集 1 시문 서한Ⅰ」, 2000, 島山安昌浩先生紀念事業會, 577~579쪽. 30) 「不逞團關係雜件 鮮人ノ部 上海假政府(五)」, 1923년 8월14일 公信 제778호, 「僭稱政府移轉ニ關スル件」. 31) 「李承晩이 李商在에게 보낸 1923년 9월경의 편지」, 「雩南李承晩文書 東文篇(제十六권) 簡札1」, 194쪽. 32) 「獨立新聞」 1923년 12월26일자, 「獨立運動前途에 대한 演說會開催」. 33) Syngman Rhee, Log Book of S. R. 1924년 3월8~11일조.
 
  34) 「국무원 제공에게」, 「雩南李承晩文書 東文篇(제六권) 大韓民國臨時政府關聯文書 1」, 101쪽 ; 「태평양잡지」 1924년 7월호(제6권 7호), 18~19쪽. 35) Kim Jo Li→Daitongleung, Mar. 25th 1924, The Syngman Rhee Telegrams, Vol.Ⅳ., p.512. 36) Daitongyung→Eujungwon(Kopogo), Mar. 28th, 1924, ibid., p.513. 37) 「의정원에 보낸 대통령의 공함」, 「태평양잡지」 1924년 7월호(제6권 7호), 16~18쪽.
 
  38) 尹大遠, 「大韓民國臨時政府의 組織·運營과 獨立運動方略의 분화(1919~1930)」, 1999, 서울大學校 博士學位論文, 199쪽. 39) 「新韓民報」 1924년 1월31일자, 「하와이 : 상해로부터 장붕씨가 건너와」. 40) 「趙素昻이 李承晩에게 보낸 1924년 1월13일자 편지」, 「雩南李承晩文書 東文篇(제十八권) 簡札 3」, 202쪽. 41) 「구미위원부통신」(1924년 7월12일), 「美洲韓人民族運動資料」, 71쪽. 42) 「李承晩이 李始榮에게 보낸 1924년 3월29일자 편지」, 「雩南李承晩文書 東文篇(제十六권) 簡札1」, 203쪽.
 
  43) 「不逞團關係雜件 鮮人ノ部 上海假政府(五)」 1924년 3월6일 機密 제41호, 上海臨時政府ノ議政院會議召集ノ件」. 44) 위와 같음. 45) 「不逞團關係雜件 鮮人ノ部 上海假政府(五)」 1924년 4월3일 機密 제62호, 「議政院議事速記錄追報ノ件」. 46) Kopogo→Daitongniung, Apr. 5th, 1924, The Syngman Rhee Telegrams, Vol.Ⅳ., p.515. 47) Daitongniung→Euijungwonjang(Kopogo), ibid., p.514. 48) 「大韓民國臨時政府公報」 제1호, 1924년 9월1일, 「雩南李承晩文書 東文篇(제八권) 大韓民國臨時政府關聯文書 3」, 246쪽. 49) 「不逞團關係雜件 鮮人ノ部 上海假政府(五)」 1924년 5월12일 機密 제91호, 「議政院議事速記錄追報ノ件」. 50) 「獨立新聞」 1924년 4월26일자, 「議會聞略」. 51) 「大韓民國臨時政府公報」 제1호, 1924년 9월1일, 「雩南李承晩文書 東文篇(제八권) 大韓民國臨時政府關聯文書 3」, 246쪽. 52) 「獨立新聞」 1924년 5월31일자, 「國務院同意否決」. 53) 「大韓民國臨時政府公報」 제1호, 1924년 9월1일, 「雩南李承晩文書 東文篇(제八권) 大韓民國臨時政府關聯文書 3」, 246쪽. 54) 위의 책, 247쪽. 55) 「朝鮮民族運動年鑑」 1924년 12월19일조. 56) 「大韓民國臨時政府議政院文書」, 1974, 國會圖書館, 192쪽.
 
  57) 李明花, 「島山先生의 獨立運動과 統一戰線」, 2002, 景仁文化社, 491~492쪽. 58) 申肅, 「나의 一生」, 1963, 日新社, 81~82쪽 ; 金俊燁·金昌順, 「韓國共産主義運動史(1)」, 1986, 청계연구소, 389~390쪽 ; 반병률, 「성재 이동휘일대기」, 1998, 범우사, 387~396쪽 참조. 59) 「韓國民族運動史料(中國篇)」, 501쪽, 512쪽. 60) 「韓國民族運動史料(中國篇)」, 511~517쪽. 61) 「不逞團關係雜件 鮮人ノ部 上海假政府(五)」, 1924년 8월20일 機密 제147호,「假政府大統領ノ職權問題ニ關スル件」. 62) 「大韓民國臨時政府公報」 제1호, 1924년 9월1일, 「雩南李承晩文書 東文篇(제八권) 大韓民國臨時政府關聯文書 3」, 247쪽. 63) 「不逞團關係雜件 鮮人ノ部 上海假政府(五)」, 1925년 1월16일 機密 제17호, 「上海評論」 創刊號(1924.12.22). 64) Kopogo→Daitongleung, Jun. 21st 1924, The Syngman Rhee Telegrams, Vol.Ⅳ., p.521. 65) Eijungwon Eijang Choi Changsik→Datongyung Koric, Jun. 23rd. 1924, ibid., p.522.
 
  66) Yisyngman→Kopogo, Jun. 24th 1924, ibid., p.524. 67) Yisyngman→Euijungwon, Jun. 24th 1924, ibid., p.523. 68) Syngman Rhee→Konation, Jun. 24th 1924, ibid., p.525. 69) 「大韓民國臨時議政院文書」, 217~218쪽.
 
  70) 리승만, 「재외동포에게」, 「不逞團關係雜件 鮮人ノ部 在歐米(七)」 1924년 9월12일 機密 제231호, 「李承晩ノ聲明書配布ニ關スル件」. 71) 리승만, 「미국이민법안에 대하야」, 「東亞日報」 1924년 7월5일자 및 「태평양잡지」 1924년 7월호(제6권 7호), 9쪽. 72) Syngman Rhee, “Liberty and Union”, 「東亞日報」 1924년 4월22~23일자. 73) 정진석 편, 「日帝시대 民族紙 押收기사모음Ⅱ」, 1998, LG상남언론재단, 539~540쪽.
 
  74) 「태평양잡지」 1924년 7월호(제6권 7호), 1~4쪽. 75) 「不逞團關係雜件 鮮人ノ部 在歐米(七)」 1924년 9월12일 機密 제231호, 「李承晩ノ聲明書配布ニ關スル件」. 76) Syngman Rhee→Konation, Jun. 28th 1924, The Syngman Rhee Telegrams, Vol.Ⅳ., p.526. 77) 「구미위원부통신」 제77호(1924년 3월24일), 「美洲韓人民族運動資料」, 4쪽. 78) 프레드 에이 돌프, 「한인첨위에게 보내는 글」, 「美洲韓人民族運動資料」, 25~26쪽 ; 「不逞團關係雜件 鮮人ノ部 在歐米(七)」 1924년 9월8일 機密 제41호, 「在米鮮人ノ意見書ニ關スル件」, Fred A. Dolph, “Open Letter to Koreans”.
 
  79) 「國務院에 致한 公牒」, 「雩南李承晩文書 東文篇(제六권) 大韓民國臨時政府關聯文書 1」, 102~104쪽 ; 「태평양잡지」 1924년 7월호(제6권 7호), 37~39쪽. 80) 「不逞團關係雜件 鮮人ノ部 上海假政府(五)」, 1924년 7월21일 機密 제121호, 「獨立黨代表會議開催計劃ニ關スル件」 및 1924년 8월2일 機密 제131호, 「法制改正政務刷新硏究調査委員選定ノ件」. 81) 「不逞團關係雜件 鮮人ノ部 上海假政府(五)」, 1924년 8월14일 機密 제145호, 「不逞鮮人ノ獨立黨代表會議開催計劃ニ關スル件」. 82) 「大韓民國臨時政府公報」 제1호, 1924년 9월1일, 「雩南李承晩文書 東文篇(제八권) 大韓民國臨時政府關聯文書 3」, 247쪽. 83) 「不逞團關係雜件 鮮人ノ部 上海假政府(五)」, 1924년 8월2일 機密 제131호, 「法制改正政務刷新硏究調査委員選定ノ件」. 84) 「不逞團關係雜件 鮮人ノ部 上海假政府(五)」, 1924년 8월20일 機密 제147호, 「假政府大統領ノ職權問題ニ關スル件」. 85) 「大韓民國臨時政府公報」 제1호, 1924년 9월1일, 「雩南李承晩文書 東文篇(제八권) 大韓民國臨時政府關聯文書 3」, 247쪽. 86) 위의 책, 246쪽. 87) Kopogo→Daitongleung, Aug. 31st 1924, The Syngman Rhee Telegrams, Vol.Ⅳ., p.528. 87) Kopogo→Daitongleung, Aug. 31st 1924, ibid., Vol.Ⅳ., p.528. 88) Syngman Rhee→Leechongli, Sept. 2nd 1924, ibid., p.529. 89) 「國務院에 致하는 公牒」(1924.9.3), 「雩南李承晩文書 東文篇(제六권) 大韓民國臨時政府關聯文書 1」, 106쪽.
 
  90) 「不逞團關係雜件 鮮人ノ部 上海假政府(五)」, 1924년 10월3일 高警 제3260호, 「不逞團代表會議ニ關スル件」 및 1924년 10월24일 機密 제187호, 「不逞鮮人ノ狀況ニ關スル件」. 91) 「不逞團關係雜件 鮮人ノ部 上海假政府(五)」, 1924년 10월9일 關密高警 제25782호, 「臨時政府布告文發送」. 92) 「不逞團關係雜件 鮮人ノ部 上海假政府(五)」, 1924년 9월22일 機密 제164호, 「獨立黨代表會議召集簡章ニ關スル件」. 93) 「不逞團關係雜件 鮮人ノ部 上海假政府(五)」, 1924년 10월24일 機密 제187호, 「不逞鮮人ノ狀況ニ關スル件」. 94) 「李承晩이 李始榮에게 보낸 1924년 9월29일자 편지」, 「雩南李承晩文書 東文篇(제十六권) 簡札1」, 205쪽. 95) 「不逞團關係雜件 鮮人ノ部 上海假政府(五)」, 1924년 8월10일 機密 제40호, 「在京城中央基督靑年會野球團ノ布口圭渡航ニ關スル件」. 96) 尹致暎, 「東山回顧錄―尹致暎의 20世紀」, 1991, 삼성출판사, 86쪽. 97) 위의 책, 85쪽, 88~90쪽.
 
  98) 「구미위원부통신」 제77호(1923년 3월24일), 「美洲韓人民族運動資料」, 4~5쪽. 99) 「獨立新聞」 1922년 9월30일자, 「歐美委員部의 職員移動」. 100) 「구미위원부통신」 제8-6호(1924년 10월1일), 「美洲韓人民族運動資料」, 9쪽. 101) 「不逞團關係雜件 鮮人ノ部 在歐米(七)」 1924년 9월8일 機密 제41호, 「在米鮮人ノ意見書ニ關スル件」, 102) Syngman Rhee, Log Book of S. R. 1924년 10월14일~11월1일조. 103) 「不逞團關係雜件 鮮人ノ部 在歐米(七)」 1924년 11월3일 公제342호, 「李承晩 着布 報告ノ件」. 104) 「韓國民族運動史料(中國篇)」, 1976, 國會圖書館, 507~508쪽. 105) 「東亞日報」 1924년 3월5일자, 「亂麻가튼 竹洞宮內」. 106) 閔弼鎬, 「大韓民國臨時政府와 나」, 金俊燁編, 「石麟 閔弼鎬傳」, 1995, 나남출판, 80쪽.
 
  107) 「不逞團關係雜件 鮮人ノ部 上海假政府(五)」, 1924년 4월28일 機密 제21호, 「上海假政府近情ニ關スル件」. 108) 「不逞團關係雜件 鮮人ノ部 上海假政府(五)」, 1924년 7월11일 機密 제122호, 「假政府改革問題ニ關スル件」. 109) 「不逞團關係雜件 鮮人ノ部 上海假政府(五)」 1924년 5월28일 機密 제98호, 「假政府閣員任命其他ニ關スル件」 및 1924년 8월5일 機密 제144호, 「上海假政府ノ財政狀態ニ關スル件」. 110) 「閔庭植에 관한 文件 Ⅱ」, 「韓國獨立運動史 資料 20 臨政篇Ⅴ」, 1991, 國史編纂委員會, 45쪽. 111) 「韓國民族運動史料(中國篇)」, 507쪽. 112) 閔弼鎬, 앞의 글, 81~82쪽. 113) 「閔廷植에 관한 文件(Ⅰ)」, 「韓國獨立運動史 資料 20 臨政篇Ⅴ」, 38~39쪽.
 
  114) 「閔庭植에 關한 文件 Ⅱ」, 「韓國獨立運動史 資料 20 臨政篇Ⅴ」, 45~46쪽. 115) 「韓國民族運動史料(中國篇)」, 508~509쪽. 116) 「韓國民族運動史料(中國篇)」, 509쪽. 117) 「不逞團關係雜件 鮮人ノ部 上海假政府(五)」, 1924년 12월27일 機密 제225호, 「僭稱假政府幹部更迭ニ關スル件」. 118) 「韓國民族運動史料(中國篇)」, 50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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