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85년 身檢 때「2급 현역」판정
● 1986년 오른손 검지 절단
● 1986년 병역 면제 판정
● 이후 노동운동 본격화
● 1986년 오른손 검지 절단
● 1986년 병역 면제 판정
● 이후 노동운동 본격화

- 2003년 2월23일 오후 서울 평창동 포포인츠 쉐라톤 호텔에서 열린「盧武鉉 청와대」의 비서실 워크숍에 참석한 비서관 내정자들이 서로 인사를 나누고 있다. 맨 왼쪽이 李光宰 국정상황실장 내정자. 오른손 검지 일부가 보이지 않는다.
盧武鉉 대통령의 최측근인 열린당 李光宰(이광재) 의원(강원 태백-영월-평창-정선)의 오른손 검지(둘째 손가락)는 반밖에 없다. 그는 「右手(우수) 제2수지 지절결손」으로 제2국민역 판정을 받아 병역을 면제받았다.
李의원의 손가락 절단에 대해 의혹이 무성했지만, 그는 침묵했다.
李의원과 가깝게 지내는 1980년대 운동권 출신 인사 여러 명에게 물어봤지만, 이들은 李의원의 손가락이 왜 절단됐는지 정확하게 알지 못했다. 서울지역 대학의 84학번으로 집시법 위반혐의로 구속됐던 金모씨는 『李의원과 한때 술도 마시고 농담도 하는 친한 사이였지만 손가락에 대해서는 자세히 모른다』고 했다.
金씨는 『(손가락 문제를) 껄끄러워하는 것 같았고, 굳이 묻지 않았다』며 『「1980년대 중반쯤 공장에 위장취업을 하며 노동운동을 하다 프레스에 손가락이 절단됐다」는 이야기를 李의원 주변 사람들로부터 들었다』고 했다.
1986년 10월 건국大 농성 시위 사태로 감옥살이를 했던 여권의 閔모씨는 『(李光宰 의원이)「부산에서 노동운동을 하다 손가락이 잘렸다」는 이야기를 들었고, 주위 사람들도 다 그렇게 알고 있다』고 말했다.
閔씨는 또 『대학생 출신들은 아무래도 현장 노동자보다 일손이 느리고, 일도 서툴러 큰 사고를 당하는 경우가 많았다』며 『李의원도 그런 이유에서 손가락이 잘린 것으로 나는 안다』고 했다.
노동현장으로 뛰어드는 것은 1980년대 학생운동의 한 줄기였다. 서울大 물리학과 출신인 조정식씨는 위장취업 중 산업재해로 목숨을 잃었다. 대학을 다니던 중 혹은 졸업하고 노동현장에 뛰어들었던 국회의원들이 17代 국회에 20여 명에 이른다.
李의원이 공장에서 일하다가 손가락을 잃었다면 오히려 「자랑거리」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열린당과 민주노동당의 이른바 진보성향 정치신인들은 시국사건으로 감옥살이 한 것을 「훈장」처럼 내세운다.
열린당의 한 초선의원은 『감옥살이를 한 것은 한 시대를 산 우리 나름의 「나라 사랑」 방식』이라며 『경제발전에 헌신한 이들이 있듯, 우리는 민주화를 위해 스스로 고난을 택했다는 점에서 부끄럽지 않다』고 말했다. 이런 분위기인데도 李光宰 의원은 한 번도 「공장에서 일하다가 다쳤다」는 식의 해명을 하지 않았다.
지난 17代 총선 당시 李光宰씨의 軍 면제 사유에 대한 언론보도는 「노동운동 중 부상」으로 통일돼 있다. 「李光宰 후보는 과거 노동운동을 하면서 작업 중 부상을 입었던 것으로 알려졌다」(국민일보 2004년 4월1일자), 「李光宰 후보는 과거 노동운동을 하면서 작업 중 부상을 당한 것으로 알려졌다」(연합뉴스 2004년 3월31일자)로 나타났다.청와대 주변, 여의도 政街(정가)에는 「李光宰씨가 위장취업했다가 손가락을 잘렸다」는 얘기가 定說(정설)로 퍼져 있다.
청와대를 취재하는 한 기자는 이렇게 설명했다.
『李光宰씨가 국정상황실장을 맡으면서, 제일 먼저 병역기피 의혹이 제기됐다. 국정상황실장은 대한민국의 모든 비밀정보를 종합하고 대통령에게 보고하는 사람이다. 그런 사람이 고의로 병역을 기피했다면 큰일이라고 생각했다. 李光宰씨는 언급을 회피했다.
몇몇 李光宰씨의 측근으로 볼 수 있는 사람들이 술자리 등에서 「李光宰씨가 경기도의 한 공장에 위장취업했다가 손가락이 잘렸다」는 식으로 얘기를 했다. 일종의 「언론 플레이」였다고 생각한다. 그 얘기가 효과가 있었고, 李光宰씨가 총선에 출마하자 「노동운동하다가 부상당했다」는 기사가 쏟아져 나온 것이다』
「李光宰 의원이 병역기피를 위해 손가락을 자른 것이 아니냐」는 의혹을 최초로 제기한 것은 2003년 10월13일자 중앙일보 「이연홍 칼럼」이었다. 당시 중앙일보 정치부장이었던 李기자는 李光宰씨와 만나서 들은 이야기를 토대로 이런 칼럼을 썼다.
<그(李의원)는 언젠가 술자리에서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손가락 얘기를 하다가 나온 말이다.
『나는 당시 민족민주전선이라는 민민투 기관지를 만들고 있었어요. 그때 김세진·이재호가 분신했지요. 나도 분신해 죽겠다는 생각을 많이 했어요. 저는 지금 두 번째 인생을 사는 거나 마찬가지입니다』
반쪽 손가락이 자랑일 순 없지만 부끄럽진 않다는 투였다. 그는 이렇게 매듭지었다.
『어찌 됐든 내 양심에 문제가 된다고 생각지는 않아요』
자세한 얘기는 하지 않았다. 얘기 자체를 회피했다.
그나마 얘기한 건 군대 때문은 아니었다는 메시지를 주고 싶어서였던 것 같다. 물론 본인으로선 소상히 밝히기 싫을 것이다. 그러다 보니 언론도 그 문제를 짚지 않았다. 한때 몇몇 언론이 취재를 하다 말았다>
現 중앙일보 논설위원인 이연홍 기자에게 전화를 걸었다.
―이 칼럼을 통해 흐릿하기는 하지만 「손가락 절단이 병역기피와 관련이 있는 것 아니냐」는 의혹을 처음 제기했는데. 왜 이 칼럼을 썼나.
『盧武鉉 권력의 최고 실세인 李의원의 손가락 절단을 놓고 여러 가지 설이 많아서 문제제기 차원에서 썼다』
―어떤 說이 있었나.
『운동권 내에서 자신의 결백을 증명하기 위해서 손가락을 잘랐다는 얘기, 노동운동하다가 손가락이 잘렸다는 얘기, 군대에 가지 않기 위해 손가락을 잘랐다는 얘기가 있었다』
―칼럼을 읽어 보면, 李光宰씨가 손가락을 잘랐다는 건지, 노동운동하다가 잘렸다는 건지 명확하지 않다.
『그건 李光宰씨가 (손가락 부분에 대해) 애매모호하게 얘기를 계속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는 단 한 번도 이 부분에 대해 공식적으로 언급한 적이 없다』
―그 후 후속기사가 나오지 않았는데.
『나는 문제를 제기하는 차원에서 썼다. 이렇게 띄워놓으면 어느 언론에선가는 파헤치리라고 생각했는데 그러는 언론이 하나도 없었다』
「이연홍 칼럼」이 나오기 며칠 전인 2003년 10월11일 李光宰 의원은 국회 운영위원회의 청와대 비서실 국정감사에 「국정상황실장」 자격으로 출석, 자신의 軍 면제 사유에 대해 발언했다.
당시 속기록이다.
〈金鶴松 의원(한나라당) 현재 저에게 제보가 들어와서 이야기인데 軍에 갔다 왔습니까?
李光宰 안 갔습니다.
金鶴松 軍에 안 간 이유는 무엇입니까?
李光宰 자료로 설명 드리겠습니다.
金鶴松 간단하게 답하세요
李光宰 오른쪽 손가락이 없어서 안 가게 되었습니다.
金鶴松 저에게 제보가 들어와서 이야기인데 어릴 때 다친 것입니까? 언제 다친 거예요?
李光宰 86년 대학교 때 다쳤습니다.
金鶴松 그것 때문에 軍에 안 갔군요.
李光宰 그렇습니다.
金鶴松 제가 추측하는 부분에 대해서는 이야기 드리지 않겠습니다>
한나라당 金鶴松 의원에게 전화를 걸어 「당시 추측하는 부분이 무엇이었느냐」고 물었다. 金의원은 『그때 추측했던 부분에 대해선 말하지 않겠다』고 했다. 金의원은 보좌관을 통해 다음과 같은 자신의 입장을 알려왔다.
『李의원이 軍에 가지 않으려 했다는 여러 제보가 있었으나 확실한 증거나 단서를 찾지 못해 더 이상 추궁하지 않았다. 그래서 軍 기피 뉘앙스만 전달하려 했다. 좋지 않은 일로 동료의원을 괴롭히고 싶지 않다』
李의원은 국회에서 『86년 대학교 때 다쳤다』고 증언했으나, 언제·어디서·어떻게 다쳤는지에 대해서 설명하지 않았다.
취재하던 중 제보가 하나 들어왔다. 『李光宰 의원이 자신의 저서 안에 「손가락을 스스로 잘랐다」고 써 놓았다』는 얘기였다. 국회와 언론의 끈질긴 추궁에도 불구하고 손가락을 어떻게 잃었는지 굳게 입을 닫았던 李光宰 의원이 그런 사실을 고백했을까, 의문이 들었다.
그런 책이 있는지 알아보기로 했다.
먼저 서울 종로의 교보문고와 영풍문고에 가서 「李光宰」라는 저자명으로 검색을 했다. 李의원과 同名異人이 쓴 세무·회계와 사회복지 관련 서적이 여럿 검색됐다. 정치인 李光宰가 쓴 책은 없었다. 직원들은 『李光宰 의원의 책은 入庫(입고)된 적이 없다』고 했다.
국회도서관으로 갔다. 국회도서관에는 법에 따라 출판되는 서적들이 의무적으로 납본된다. 국회도서관에서 도서검색을 했다. 책이 한 권 나왔다. 17代 총선 한 달 전인 2004년 3월10일 발행된 「우통수의 꿈」이라는 책이었다.
선거용으로 급히 제작돼 지역구에 뿌려졌던 것으로 추측된다. 출판사에 확인했더니, 『시중에 판매된 책이 아니다』라고 했다.
이 책에 그가 그토록 피해 왔던 「손가락 이야기」가 담겨 있었다. 「우통수의 꿈」 44쪽의 내용이다.
〈全斗煥 정권은 철권을 휘둘렀다. 저항의 강도도 더해갔다. 주변의 선배와 친구들이 하나씩 죽어갔다. 학생회관에서 떨어지는 학생도 있었고, 제 몸에 불을 지르는 학생도 있었다. 1986년 신림동 4거리에서 서울大 김세진과 이재호가 분신을 시도했다. 몸에 불이 붙어 비틀거리면서 구호를 외쳤다. 떨어진 간판에 살점이 녹아 내렸다. 그 장면을 보며 나는 분노에 치를 떨었다.
나도 투신과 분신을 생각했다. 그 생각은 망령처럼 나를 따라다녔다. 그러나 나는 죽을 용기가 부족했다. 죽지는 못하지만 사는 한 포기하지는 않겠다고 다짐했다. 태극기 하나를 샀다. 손가락을 잘라 태극기에 혈서를 썼다.
「절대 변절하지 않는다」
나는 그 피 묻은 태극기를 이화여대 선배에게 건넸다. 나를 지켜봐 달라고>
변절하지 않기 위해 손가락을 잘랐다는 것이다. 그가 스스로 손가락을 잘랐다면 그는 국회 국정감사에서 위증을 한 셈이다. 「다쳤다」는 말과 「스스로 손가락을 잘랐다」는 기술 사이에는 메워질 수 없는 간극이 있다.
李의원은 변절하지 않으려고 혈서를 쓰면서 왜 하필 오른손 검지를 잘랐을까?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를 저격한 安重根 義士(1879~1910)도 손가락이 하나 없다. 安重根 義士는 1909년 『우리가 지금까지 아무 일도 이루지 못했으니 남의 웃음거리가 되는 것을 면하기 어려울 것』이라며 손가락을 잘라, 흐르는 피로 태극기 위에 「대한독립」이라는 글자를 크게 썼다.
安重根 義士가 스스로 자른 손은 왼손 무명지(넷째 손가락)다.
태극기에 혈서를 쓰기 위해 安重根 義士는 왼손 무명지를 잘랐고, 李의원은 혈서를 쓰기 위해 오른손 검지를 잘랐다.
병무청 관계자는 『총의 방아쇠를 당기기 위해선 오른손 검지가 반드시 필요하다』며 『오른손 검지 절단은 軍 징집을 피하기 위한 「고전적」 수법』이라고 했다.
李의원을 두고 병역기피 의혹이 끈질기게 제기된 것도 오른손 검지가 절단됐기 때문이다. 1980년대 당시 운동권 학생들은 軍 징집을 피하기 위해 적지 않은 노력을 기울였다. 軍 징집을 피하기 위해 지하로, 위장취업으로, 노동현장으로 숨어들어간 이가 많았다.
1986년 국가보안법 혐의로 구속, 軍에 가지 않았던 열린당의 한 간부는 『1980년 중반 운동권 학생들은 입대를 「미군 용병으로 잡혀가는 일」로 인식하는 분위기가 강했다』며 『軍 징집을 피해 공장으로 흘러 들어간 학생들이 많았다』고 말했다.
1980년대에 全大協(전대협·전국대학생대표자협의회) 연대사업국장으로 일했던 「북한민주화포럼」 李東湖(이동호) 간사는 『軍 징집을 피하기 위해서 일부러 앞장서 점거시위에 참여하거나 가투(가두투쟁)를 주도하다가 잡혀 「별」을 다는 방법을 택하기도 했다』며 『그러나 핵심 운동권 지도부는 자신이 잡히면 지하조직의 뼈대나 체계가 노출될 것을 우려해 징집을 거부, 공장에 숨은 경우가 많았다』고 했다.
과거 全大協의 전신인 反美청년회에서 학생운동을 했던 姜吉模(강길모)씨는 『軍에 안 가기 위해 여러 방법이 동원됐는데 일부 학생은 일부러 「불온 문서」를 소지한 채 경찰서 앞이나 시위 현장에 「나 잡아가시오」하는 격으로 서성대기도 했다』며 『그러나 일부 급진적 학생은 軍에 조직을 만들기 위해 스스로 입대한 경우도 적지 않았다』고 했다.
병역의무를 면제받기 위해 손가락이나 발가락을 절단했다가 검찰에 적발된 사례도 있었다. 광주지검은 1994년 8월18일 「민중 속으로 몸을 던져 주체사상을 전파하고 공산혁명을 꾀한다」는 이른바 남총련(광주·전남지역 총학생회연합) 산하 「투신국」 사건을 수사하는 과정에서 대학생 14명이 오른손 검지 등 自害를 통해 병역을 면제받은 사실을 찾아내고, 처벌했다.이들은 1988년에서 1991년 사이에 오른손 검지(8명)와 오른쪽 엄지발가락(4명), 무릎연골 제거수술(2명) 등 신체를 훼손, 6명은 병역면제 판정을 받았고 8명은 징집면제를 받았다. 그러나 이들 대부분 병역기피의 공소시효(3년)가 지나 처벌받지 않았다.
손가락 절단이 당시 운동권에서 軍 징집을 피하기 위해 흔히 선택되는 수단은 아니었다. 軍에 가지 않을 목적으로 손가락을 잘라 평생 장애인으로 살아가는 일이 간단치 않기 때문이다.
게다가 학생들끼리 「斷指(단지)」가 성행했다면, 집단적으로 함께 손가락을 자르는 조직이 있었을 텐데, 과거 1980년대 학생운동史를 뒤져도 그런 전례는 거의 없다 해도 무방하다. 왼손 무명지를 자른 安重根 義士의 경우 「정천단지회」(단지동맹)를 조직, 몇몇 義士가 함께 손가락을 잘랐다.
당시 이 사건을 지휘했던 權泰鎬(권태호) 광주지검 공안부장을 찾았다. 그는 대전고등검찰청 차장검사와 춘천지방검찰청 검사장을 거쳐 현재 법원연수원 기획부장에 재직 중이었다.
―오른손 검지 등을 자르는 방법으로 병역을 기피한 사실을 어떻게 찾아 냈나.
『남총련 산하 운동권 학생들을 조사하는 과정에서 일부 학생들의 신체가 훼손됐고 추궁한 끝에 밝혀 냈다. 또 경찰 쪽에서 여러 차례 「운동권 학생들이 손가락을 잘라 병역면제를 받았다」는 정보가 들어왔던 것으로 기억된다. 당시 혐의가 있던 학생이 모두 유죄판결을 받았고, 스스로 손가락과 발가락 등을 훼손한 사실을 자백했다. 처음에는 그 사실을 믿을 수 없었고, 안타까웠다』
―自害 학생들이 모두 강성 主思派였나.
『당시 남총련이 학생운동에서 많은 역할을 했다. 학생 모두를 主思派로 분류했던 것으로 기억된다. 개별적 성향이 다른지는 몰라도…. 그러나 구체적인 이념적 성향이나 노선은 기억나지 않는다』
―軍에 가지 않기 위해서 다른 방법도 있었을 텐데, 오른손 검지를 자르는 등 신체를 훼손한 이유를 뭐라고 보나.
『예를 들어 국가보안법 혐의로 구속돼 軍에 가지 않는 방법도 있겠지만, 자신의 형량이나 혐의를 계획대로 계산해 軍에 빠질 수는 없는 법이다. 조직이 드러난다든가 여죄가 밝혀지든가 할 가능성이 있었을 것이다』
―학생들이 법정에서 뉘우치던가.
『일부 후회하는 학생들도 있었지만, 그렇지 않은 학생도 있었다. 스스로 신체를 훼손할 정도니 다른 운동권 학생들에 비해 (이념 면에서) 상대적으로 달랐다고 생각할 수 있다』
―운동권 학생들 사이에서 빚어진 유사한 신체훼손 사건이 있었나.
『더러 조폭들이나 일반시민들의 軍 기피 목적의 오른손 검지 절단 사건을 접한 적은 있지만, 운동권에서의 유사 사건은 글쎄… 찾아봐야 할 것 같다』
―사회적 반향은 어땠나.
『수사를 하던 검찰도 놀랐다. 당시 사회적 파장이 컸던 것으로 기억한다』
1983년 연세大 화공과에 입학한 李의원은 1984~1985년 징병검사 연기를 요청한 뒤 1985년 身檢(신검)을 받고 2급 현역입영대상 판결을 받는다. 1986년 입대했으나 곧바로 귀가조치된다. 오른손 검지가 없었기 때문이다.
李의원은 그해 「右手 제2수지 지절결손」으로 제2국민역(면제) 대상이 됐다. 그는 이듬해인 1987년 11월18일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입건돼 1988년 3월11일 징역2년, 집행유예 3년, 자격정지 2년 刑이 확정됐지만, 같은 해 12월21일 특별사면된다.
1980년대 당시 병역법을 살펴보자. 全斗煥 정권은 운동권 학생들을 軍에 집어넣기 위해 병역법 시행령을 여러 차례 바꾸었고, 그 결과 희비가 갈린 학생들이 적지 않았다고 한다.
국회 金모 보좌관은 『시행령이 바뀌면서 집시법(집회 및 시위에 관한 법률) 위반자 중에서 일부는 軍에 갔고, 또 일부는 軍에 안 간 사람이 있을 정도로 병역법이 복잡했다』며 『나 역시 軍에 빠지기 위해 경찰조사 과정에서 집시법 위반 혐의에다 공소사실에도 없는 폭력시위 혐의까지 포함시켜 결국 면제됐다』고 회상했다.
李의원이 대학에 입학할 무렵에도 병역법이 한 차례 개정됐다. 다음은 1983년 12월14일 국회를 통과한 개정안의 주요 내용이다.
〈第17條 現役入營對象者가 入營한 때에 행하는 入營部隊 身體檢査에서 現役服務에 부적합하다고 判定되어 歸鄕한 者에 대하여는 本籍地 兵務廳長이 다시 身體檢査를 한 후 兵役의 種類를 變更하도록 하던 것을 앞으로는 兵役義務者의 便益을 위하여 다시 身體檢査를 하지 아니하고 入營部隊 身體檢査의 결과에 따라 바로 兵役免除·第2國民役 또는 補充役 등으로 兵役의 種類를 變更하도록 함.
第56條 徵兵檢査 對象者로서 外觀上 明白한 心身障碍者에 대하여는 願에 의하여 徵兵檢査를 하지 아니하고 바로 第2國民役에 編入할 수 있도록 함으로써 徵兵檢査 對象者의 便益을 도모함〉
개정안에 따라, 현역 복무가 「부적합하다」고 판단되는 사람의 경우, 再신검 없이 곧바로 병역면제 처분을 받을 수 있게 됐다. 복잡한 절차가 대폭 간소화된 셈이다. 한번 신검을 받아 병역면제나 제2국민역 판정을 받으면 그것으로 끝이다.
李의원은 손가락을 자른 1986년 「제2국민역」 판정을 받은 뒤 학생운동에 더욱 투신한 것으로 보인다. 당시 그는 학생운동 연합 기관지인 「백만학도」의 편집장을 맡고 있었으며 경찰에 쫓기는 몸이었다. 경찰의 추적이 좁혀지자 그는 충청도에서 막노동을 하며 은신했고, 그해 말 부산으로 내려가 신분을 속여 주물공장에 취직했다. 1987년 가을 부산 보안대 요원에게 체포됐다. 斷指(단지)가 학생운동의 기폭제가 된 셈이었다.
1986년 입영 당시 李의원은 신체훼손에 대한 자기 진술서를 썼다. 지난 5월9일 병무청에 李의원의 진술서 존재여부를 확인한 결과, 『진술서 보존기한이 10년이어서 폐기처분됐을 것』이라는 답변을 받았다.
1980년대에 발생한 신체훼손에 의한 병역면제 사례도 전산화 작업 미비로 확인되지 않았다. 『병역기록에 대한 전산화 작업은 1990년대 이후 이뤄졌다』는 게 병무청의 설명이다.
李의원이 프레스 작업을 하다 손가락이 절단됐으면 産災(산재)판정을 받았을 테고, 그 기록은 노동청(지금은 근로복지공단)에 보관됐을 것이다.
민주노동당 魯會燦(노회찬) 의원은 제철공장에서 쇠를 깎다 오른쪽 무릎을 크게 다쳐 産災판정을 받았고, 지금도 그때 상처가 「V」字 모양으로 남아 있다. 『회사가 産災를 거부하는 경우는 있어도, 위장취업이 탄로날까 봐 産災 사실을 숨기는 대학 출신들은 없었다』는 게 당시 위장취업해서 노동운동을 했던 이들의 전언이다.
李의원은 노동운동을 하다 다치지 않았기 때문에 주위 사람들에게 적극적인 해명에 나서지 못한 것으로 드러났다. 『노동일을 하다 손가락이 잘렸다』고 하면, 야당의 혹독한 검증에 의해 사실 여부가 금방 드러났을 것이기 때문이다.
『스스로 손가락을 잘랐다』고 하면, 병역법 86조(「병역의무를 기피하거나 감면받을 목적으로 도망하거나 행방을 감춘 때, 또는 신체손상이나 詐僞(사위) 행위를 한 사람은 1년 이상 3년 이하의 징역에 처한다」)를 위반한 셈이니 함부로 말하고 다닐 형편도 아니었을 것이다. 물론 공소시효는 3년에 불과하다.
하지만 공소시효는 형법상 의미일 뿐이다. 병역법 제71조에는 「허위 또는 부정한 방법으로 병역 면제 처분을 받은 경우 이를 취소할 수 있다」고 명시하고 있다. 지난해 프로야구 선구 병역비리 파문이 빚어졌을 때, 병역기피가 드러난 만 35세 미만의 선수 50여 명이 공소시효가 지났음에도 再신검을 받은 사례가 있다.
李의원은 그동안 병역기피 의혹을 피하기 위해 지난해 「우통수의 꿈」이 출간되기 전까지 주위에 『다쳤다』는 식으로 어물쩍 斷指 이유를 숨겨 왔다. 지난해 총선 때 지역 방송 주최 토론회에서 李光宰 후보는 상대 후보들의 집요한 추궁에 자신의 손가락에 대해 언급했다고 한다. 李의원과 경쟁했던 한나라당 金龍學(김용학) 후보의 증언이다
『여러 후보들이 「당신 손가락이 왜 없느냐」고 따져묻자, 李의원은 답변을 하지 않았다. 계속 질문이 이어지자 李光宰 후보는 「우울해서 잘랐다」고 짧게 대답했다. 하도 어이가 없는 답변을 해서 다른 후보들이 더 이상 묻지 않았다』
李의원 스스로 이런 면피성 해명이나 언급을 그만두고, 왜 어떻게 손가락을 잘랐는지 해명해야 할 차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