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제의 IT기업인] 경영권 포기로 저작권 분쟁 끝낸「벅스」朴晟燻 사장

『저더러 殺身成仁이라고들 해요. 끝은 아닙니다. 더 큰 것을 얻기 위한 양보일 뿐입니다』

  • : 김민희  minikim@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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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컴맹이었기 때문에 PC방 사업, 인터넷 음악 서비스를 시작할 수 있었다』
「벅스(Bugs)」(舊「벅스뮤직」)의 朴晟燻(박성훈·38) 사장은 경영권 포기로 1년 4개월 동안 계속된 음반업계와의 싸움을 끝냈다.
 
  朴사장은 지난 3월31일 주주총회에서 사임했고, 金京南(김경남) 한국 音源(음원)제작자협회(이하 「음제협」) 상임고문이 벅스의 새로운 대표이사로 취임했다. 사임 후에도 朴사장은 37%의 지분을 보유해 벅스의 최대 개인 株主로 남게 된다.
 
  朴晟燻 사장을 서울 강남의 테헤란밸리에 있는 그의 사무실에서 만났다. 예상과 달리 사무실은 활기가 넘쳤다. 훤칠한 키의 朴사장은 미남형이었다.
 
  ―지적재산권 문제만 해결하면 될 텐데 경영권을 포기한 이유는 뭔가요.
 
  『음반계 쪽과의 협상이 복잡했습니다. 음반업계 사람들의 목소리가 둘로 나뉘었어요. 「벅스 경영권은 건드리지 말고, 지적재산권만 해결하자」, 「음반업계가 추천하는 사람이 경영을 해야 한다」. 양쪽을 다 끌어안기 위해 제가 양보했어요』
 
  ―자신이 창업해서 일군 회사의 경영권을 다른 사람에게 넘기기가 쉽지 않았을 텐데요.
 
  『저 역시 이게 합리적인 방법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음반업계에 「벅스가 죽어야 우리가 산다」는 식으로 공격하는 사람들이 너무 많았어요. 사실 경영권 포기는 마지막 카드예요. 투자자들한테 투자를 받으면 해결되는 문제인데 법적 문제가 걸려 있으니까 투자를 안 해줘요. 돈이 안 들어오니까 어쩔 수 없었어요.
 
  주변에서는 저더러 殺身成仁(살신성인)이라고들 해요. 나 하나 경영권 포기해서 모든 문제가 해결된다면 이보다 더 좋은 게 어디 있겠어요. 끝은 아닙니다. 더 큰 것을 얻기 위한 양보일 뿐입니다』
 
 
 
 『벅스 운영에 직·간접 참여할 것』
 
  ―벅스와 음반사 측 사이의 긴 싸움은 이제 끝난 건가요.
 
  『기본적인 큰 틀은 그렇죠. 「제가 경영권을 포기함으로써 음반사와의 문제가 모두 해결될 거다」라는 내용의 기사들이 나간 후 「말도 안 된다」는 얘기를 한 음반사는 없었거든요. 도레미·예당·SM·서울음반 등이 가장 거부감이 컸는데 곧 해결될 겁니다』
 
  ―朴사장은 앞으로 어떤 일을 하게 되나요.
 
  『확실하게 결정되지는 않았지만, 어떤 식으로든 벅스의 운영에 직·간접적으로 참여하게 될 겁니다. 벅스의 전체적인 서비스 내용도 크게 달라지지 않을 겁니다. 저작권 문제가 해결되면서 신곡 서비스가 재개되면 이용자들한테 훨씬 폭넓은 음악 서비스를 제공할 수 있습니다』
 
  ―음반협회 측과의 문제가 해결되면 벅스의 자금문제는 숨통이 틔게 될까요.
 
  『자금 라인은 다 형성돼 있어요. 2002년까지 흑자를 내던 회사가 2003년에 소송에 걸리면서 적자로 돌아선 거잖아요. 지금도 흑자가 될 수 있는 사이트 볼륨이나 구조는 다 돼 있어요. 제가 대표직을 내놓으면서 音源문제가 해결될 것이라는 기사가 나가자, 요 며칠 동안 광고주들의 전화가 많아졌어요』
 
  朴晟燻 사장은 1997년 국내 최초로 「PC방」 사업을 시작했다. 「인터넷으로 음악을 듣는다」는 개념 자체가 생소하던 2000년 2월에는 국내 최초로 인터넷 음악 서비스 사이트 「벅스」를 탄생시켰다.
 
  국내 유명 포털 사이트의 CEO들은 대부분 명문대를 졸업해서 해외에서 MBA나 공학박사를 취득했다. 朴晟燻 사장의 최종 학력은 경남 밀양고등학교 졸업이다.
 
  『고등학교 때 공부를 제법 했어요. 3년내내 반장을 했고요. 「대학이라면 서울법대 정도는 가야겠다」는 욕심이 있었어요. 실력에 안 맞는 좋은 대학에 시험 칠 때마다 떨어져 5修까지 했어요. 모 대학 교육학과에 합격했지만 입학은 안 했어요』
 
  ―대학입시 공부를 왜 그만 뒀나요.
 
  『5修를 하다가 포기했어요. 공부는 안 하고 딱지치기만 하는 동네 꼬마들한테 「그만 놀고 공부 좀 하라」고 야단을 쳤더니, 동네 아줌마들이 좋게 보셨는지 제게 과외를 맡기더라고요. 재수 생활 4년 경력으로 가르치다 보니 「실력이 좋다」는 소문이 나서 학생들이 몰려들었어요. 한 달에 100만원 이상 벌었어요. 「대학은 때려치우고 돈이나 벌겠다」 하는 생각에 진학을 포기했어요. 어린 나이에 돈맛을 안 거죠』
 
  ―대학 안 나온 게 사업하는 데 지장을 받지 않았습니까.
 
  『한국 최고의 명문대를 나온 후배들을 거느리고 일을 했지만, 사회를 보는 시각이나 상식에서 뒤진다고 생각해 본 적이 없어요. 더군다나 인터넷 IT 분야의 지식은 제가 더 낫다고 자부합니다. 저는 전부 실전에서 쌓은 지식이잖아요』
 
 
 
 고졸 학력의 IT업계 CEO
 
  대학 입학의 꿈을 접은 朴사장은 비디오방·카페·24시간 편의방 등 다양한 사업을 경험했다. 사업은 순탄하지 않았다. 1993년 盧泰愚 정부가 「범죄와의 전쟁」을 벌일 때 3000만원을 투자한 카페에 놀러갔다가 카페 사장으로 몰려 「불법 영업」 혐의로 14일 동안 유치장에 갇히는가 하면, 어렵게 차린 카페는 불이나 전소되기도 했다.
 
  『불난 카페를 재개하려고 동네 아줌마들한테 1000만원, 2000만원씩 빌려다가 1억원으로 「술 파는 노래방」을 차렸어요. 부산에서 이런 형태의 업소를 제가 처음으로 시작했어요. 장사가 잘 됐어요. 빚도 좀 갚고. 그런데 이 일은 더 하고 싶지 않았어요. 술을 파는 게 싫었어요. 부산 광안리에 3층짜리 유리건물을 지어, 300평짜리 레스토랑을 시작했어요. 「비치 비키니」라고 지금도 있어요』
 
  朴사장은 1996년 한 해 동안 「25시간 편의방」을 운영했다. 장사를 하면서 「PC방」 사업을 구상했다.
 
  『서울 신림동 고시촌에서 공부하는 한 후배가 「요즈음 고시촌에는 컴퓨터 3~4대 갖다 놓고 線(선)만 이어서 하는 게임이 있는데, 장사가 잘 된다」고 해요. 얘기를 가만히 들어보니 컴퓨터를 인터넷으로 연결하면, 여럿이 게임을 할 수 있고, 인터넷 검색도 가능하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대리점식으로 운영하면 신종 사업이 되겠구」나 하는 판단이 섰어요』
 
  1997년 부산大와 경성大 앞에 각각 국내 PC방 1, 2호점이 탄생했다. 이름은 「슬기방」. 그때만 해도 국내에는 인터넷 사용자가 많지 않았고, 인터넷으로 사용자 간에 게임을 한다는 개념이 없었기 때문에 장사가 잘 안 됐다.
 
  『마침 후배의 아버지가 10억원의 자금을 대 주면서 「키워 봐라」 하셨어요. 컴퓨터를 30대로 늘리고, 인테리어도 최고 전문가를 초빙해서 깔끔하게 하고, 커피도 팔면서 「인터넷 카페」로 컨셉트를 바꿨어요』
 
 
 
 국내 PC방 1호 「슬기방」 창업
 
   朴사장의 인터넷 카페는 이후 전국에 우후죽순처럼 솟아난 PC방의 효시였다.
 
  PC방 사업이 안정 궤도에 오를 즈음인 1998년 난관에 봉착했다.
 
  PC방이 청소년 유해업소로 분류되면서 「등록제」였던 것이 「신고제」로 바뀌었고, 학교 주변에는 설립 허가가 나지 않았다. 또한 主수입원이었던 인터넷 게임 「스타크래프트」의 청소년 사용 금지가 되면서 PC방은 큰 위기를 맞았다.
 
  朴사장은 부산 「인터넷문화업협회」 초대 회장을 맡아, PC방 업체의 목소리를 대변했다.
 
  『PC방은 민간이 자발적으로 만든 정보 인프라網인데, 정부가 PC방을 못 하게 하는 건 말이 안 되는 거죠. 정부가 몇조원을 들여도 못 할 정보 인프라망을 PC방 사업자들이 한 겁니다』
 
  朴사장은 협회 일을 하느라 1999년 자신의 PC방 사업을 접었다.
 
  PC방 업체를 대변하면서 朴사장은 인터넷 시장의 흐름을 파악하게 됐다.
 
  마침 6명의 소프트웨어 개발자들이 음악 사이트 「벅스」를 만들어 놓고 朴晟燻 사장에게 어떻게 키울지 자문을 했다. 그 당시 6명 가운데 5명이 지금까지 朴사장과 함께 「벅스」를 운영하고 있다.
 
  「인터넷으로 음악을 제공한다」는 아이디어는 좋았지만, 수십만~수백만 명이 동시 접속할 수 있는 「서버」의 용량이 문제였다.
 
  『먼저 장비 비용이 장난이 아니에요. 회선비만 한 달에 5억~10억원이 필요하다는 계산이 나왔어요. 도저히 답이 안 나와요. 제가 MBA를 했거나, 컴퓨터에 대한 전문지식이 많았다면 착수할 수 없는 사업이었어요. 직원들이 전부 「안 된다」, 「망한다」고 했지만, 저는 밀어붙였어요. 시장만 확보되면, 장비와 회선 비용은 부차적인 문제라고 판단한 거죠』
 
 
 
 「사람만 모으면 돈이 된다」
 
  창업 당시 자본금은 1억원. 朴사장이 아는 사람들에게서 빌려온 돈이었다.
 
  「시장의 원리」로 직원들을 설득시킨 朴사장은 부산市 서면의 30평짜리 오피스텔에서 국내 1호 인터넷 음악 서비스 사이트 「벅스」를 가동시켰다. 초기 자본금 1억원은 몇 달 안 가서 바닥 났고, 빚은 늘어 갔다. 『회선을 끊겠다』는 통보를 받았다.
 
  『서울로 올라왔어요. 직원들은 부산에 남겨두고 보따리 두 개를 들고 왔어요, 한 손에는 회사 소개서, 한 손에는 속옷 보따리. 사우나에서 한 달, 여관에서 한 달 살았죠. 많이 굶었어요. 서울에 아는 사람이 있어도 자존심 때문에 손을 벌리기 싫었어요』
 
  ―투자자들을 어떻게 설득했습니까.
 
  『투자자들의 질문은 똑같아요. 「수익 모델이 뭐냐」. 저는 「사람만 모으면 돈이 된다」고 했어요. 이용자들이 돈을 만들어 주는 거잖아요. 벅스는 초창기에 광고만으로도 먹고 살았어요.
 
  투자자들한테 그랬어요. 「지금은 땅을 일구는 시기다. 2003년이 되면 닷컴이 싹트는 시기가 올 거다. 닷컴의 르네상스 시대가 올 거다」라고. 그 말이 결국 맞아떨어졌어요. 2002년부터 우리 회사가 각광받기 시작했고, 2003년에 클라이맥스가 됐으니까』
 
  ―인터넷 환경이 워낙 빠르게 변하지 않습니까. 「벅스」의 사업모델도 변화시켜야 하는 것 아닌가요.
 
  『인터넷 환경은 빠르게 변하지만 음악은 유행을 타지 않는 장르입니다. 서비스의 패턴만 변할 뿐이죠. 또 음악은 국경이 없어서 국제화하기 가장 좋은 사이트입니다』
 
  벅스는 2003년 4월 서울 강남의 스타타워로 사무실을 옮겼다.
 
  『워낙 벅스가 유명세를 타니까 스타타워에서 「6개월 무료에 2년 계약」이라는 조건으로 러브콜을 했어요. 제가 미신을 믿는 건 아니지만, 사무실을 잘못 옮긴 것 같아요. 거기에 들어가면서부터 저작권 소송에 휘말렸고, 社勢(사세)가 기울기 시작했어요.
 
  결국 건물주가 명도 소송을 하고, 법원으로부터 「사무실을 비우라」는 명령을 받았어요. 「설마 쫓아내기야 하겠느냐」고 안이하게 생각했어요. 투자를 곧 받으려던 때여서, 「밀린 것 내면 되겠지」라고 했죠. 그런데 2004년 1월9일 100명 정도의 용역업체 직원들이 들이닥쳤어요. 1000평 정도의 사무실에 근무하던 직원 200명이 쫓겨났어요. 스타타워 지하 주차장에 우리 직원들의 짐이 널브러져 있고, 직원들은 PC를 들고 건물 앞에 서 있었어요』
 
  朴사장은 『띵 했다』는 표현으로 그 당시 심경을 설명했다.
 
  『그날 밤 직원들과 술 마시면서 많이 울었어요. 「이 건물을 통째로 사자」고 전의를 불태웠죠』
 
 
 
 『벅스가 음반시장에 직접적 피해 입히지 않았다』
 
  ―2003년 7월, 인터넷 음악 서비스 유료화를 벅스가 홀로 거부하면서 음반사들로부터 미운 털이 박히기 시작했습니다. 유료화를 거부한 이유가 뭡니까.
 
  『어차피 시장은 유료화로 가게 돼 있습니다. 하지만 아직은 유료화보다 회원수와 페이지 뷰를 늘리는 게 더 시급한 숙제입니다. 이용자가 돈을 내고 음악을 갖고 싶은 마음이 들 때 자연스럽게 유료화해야 한다는 게 우리의 주장이었습니다. 걸음마 단계에서 유료화하면, 조금씩 커가는 시장이 확 죽어 버릴 테니까요』
 
  음반사들이 벅스에 청구한 피해 보상금은 160억원이다. 사건은 아직 법원에 계류 중이다.
 
  ―인터넷 음악 서비스를 시작하면서, 저작권 문제가 불거질 거라는 예측은 안 했습니까.
 
  『했죠. 작사가와 작곡가에게 지급하는 저작권료, 가수와 연주자들에게 지급하는 실연권료, 음반사·기획사 등에 지급하는 저작 인접권료가 있는데, 앞의 두 가지는 이미 지급하고 있습니다. 저작 인접권 부분이 해결되지 않은 겁니다.
 
  음악은 미리 경험하고 음반을 구입하는 것이기 때문에 한 번의 경험만으로 비용을 지불하는 영화와는 다릅니다. 인터넷 음악 서비스는 정보를 전달해 주는 매체로 봐야 합니다. 지금은 벅스에서 음악을 들어 보고 좋으면 음반을 사고, 안 좋으면 안 사요』
 
  ―「벅스」 같은 인터넷 음악 사이트들 때문에 음반시장이 위축됐다는 목소리가 높은데요.
 
  『벅스가 음반 시장을 죽인 직접적인 원인인지 생각해 봐야 합니다. 1997년 IMF 외환위기가 터지면서 도·소매상 음반사들이 문을 닫기 시작했고, 1990년대 후반과 2000년대 전반에 「길보드」(불법복제 음반) 때문에 음반 유통망이 타격을 입었어요.
 
  음반의 主 소비 계층은 10代 후반과 20代 전반입니다. 이 연령대가 휴대폰을 2년 주기로 바꾸고, 통신료 내고, 벨소리와 컬러링을 다운로드 받고, 인터넷에서 아바타 사고, 게임 하고…. 써야 할 돈이 많아지니까 음반을 두 장 사던 사람이 한 장 사게 되는 겁니다. 이 시기에 「소리바다」와 벅스가 「대체제」 역할을 한 거죠. 음반 시장에 직접적인 피해를 입힌 건 아닙니다. 벅스는 다운로드가 안 되기 때문에 직접적인 대체제 역할은 다운로드가 되는 소리바다가 했다고 봐야 합니다』
 
 
 
 소탈·솔직·대범
 
  朴사장은 『아따~』, 『억수로』 같은 부산 사투리를 섞어 가며 소탈하게 말하는 스타일이다.
 
  ―부산 사투리가 심한데, 일부러 안 고치는 건가요.
 
  『자연스러운 게 좋은 거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의미 전달을 분명히 하기 위해 표준말을 써야 하는 자리에서는 표준말을 쓰려고 노력하는데 잘 안 됩니다』
 
  ―지금은 노력하는 건가요.
 
  『나름대로 노력하는 게 이렇습니다(하하)』
 
  그는 「서비스」를 계속 「스비스」로 발음했다.
 
  ―검정 양복을 즐겨 입으시나 봐요.
 
  『20만원짜리 명품 카피 양복인데 다들 좋아 보인다고 해요. 드라이크리닝 하는 날만 빼고 이 옷을 입어요. 얼마 전에 양복을 세 벌 더 샀어요. 새로 산 건 안 입게 돼요』
 
  국내 최초로 PC방을 시작하고 인터넷 음악 시장을 개척한 朴사장은 PC방 창업 당시 컴퓨터 자판기를 한 번도 두드려 보지 못한 「컴맹」이었다. 그는 『컴맹이었기 때문에 사용자 중심의 발상을 할 수 있었다』고 했다.
 
  벅스 마니아들을 주변에서 어렵지 않게 만날 수 있다.
 
  손은미(회사원·25)씨는 하루 평균 2시간 벅스를 이용한다.
 
  『야근할 때나 점심시간에 책 읽을 때, 게임할 때 벅스에서 음악을 틀어 놓고 해요. 「나만의 앨범」에는 200곡 정도 노래들을 골라 놨어요. 다른 사이트를 이용하려고 해봤는데 인증이다, 로그인이다 복잡해서 안 들어가게 돼요』
 
  임수연(회사원·35)씨는 하루 10시간 이상 벅스에서 음악을 듣는다.
 
  『사무실에서 하루 종일 벅스에 들어가 음악을 작게 틀어 놓고 일해요. 집에 가면 아이들한테 아카펠라, 영화 OST, 클래식 등을 틀어 주죠. 벅스에는 원하는 음악이 다 있어서 좋아요』
 
  벅스에서 음악 서비스를 이용하는 방법은 간단하다. 벅스 사이트(www.bugs. co.kr)로 들어가 검색창에 원하는 노래를 입력한 후 「듣기」를 선택하면 바로 음악이 흘러나온다. 「가사」를 클릭하면 이용자들이 올린 가사창이 뜨고, 「뮤비」를 클릭하면 해당 노래의 뮤직비디오가 상영된다. 별도의 로그인 과정을 거치지 않아도 음악을 들을 수 있다는 점에서 벅스는 이용자들에게 좋은 점수를 얻고 있다.
 
  ―자금 문제도 해결되고 법적 문제도 해결됐으니, 순항하는 일만 남았네요.
 
  『사이트의 언어를 다국적으로 업그레이드시키려고 해요. 중국어·영문 버전을 먼저 만들 겁니다』
 
 
 
 뭐니 뭐니해도 체력
 
  ―한 분야의 최고가 되기 위해서 남들이 안 하는 노력을 했을 텐데.
 
  『뭐니뭐니 해도 체력이에요. 담배를 끊었고, 술은 거의 안 마셔요. 한때 폭탄주를 수십 잔 마셨는데 지금은 안 마셔요. 조깅과 아령운동을 틈틈이 하고. 「내 몸이 지치면 아무것도 못 한다」는 것을 절실히 깨달았어요』
 
  朴사장은 『사업 마인드는 아버지에게서 물려받았다』고 했다.
 
  그의 부친은 6·25 전쟁 때 학도병에 지원했다가 다리를 다쳐 상이군인이 됐다. 「사람이 모이면 돈이 된다」는 사실을 몸소 보여주었다. 부친은 상이군인들을 위해 스무 채의 집을 지었다. 협업농장을 만들어서 자급자족하는 공동체를 운영했다.
 
  밀양 상이군경회 회장을 맡았고, 밀양군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였다고 한다. 朴씨의 부친은 교통사고로 1997년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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