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중인터뷰] 민주화운동권의 主流였던 張琪杓의 親北·親盧 노선 비판

『시장경제가 인간해방의 길이다』

  • : 김연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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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全泰壹은 혁명가가 아니었다. 몸이 불타들어 가는 순간에도 그는「遵法」을 외쳤다』

張 琪 杓
1945년 경남 김해 출생. 마산工高·서울大 법대 졸업. 민통련 정책연구실장·사무차장, 전민련 사무차장, 민중당 정책위원장, 신문명 정책연구원장, 한국사회민주당 대표, 녹색사민당 대표 역임. 저서 「우리 사랑이란 이름으로 만날 때」, 「문명의 전환」, 「신문명 국가 비전」 등.
서울大 법대생 張琪杓는 청년 全泰壹(전태일)의 焚身(분신)을 세상에 알렸고, 짙어져 가는 근대화의 그늘을 걷어내기 위해 청계천 피복공장에 위장취업했다. 그의 일생은 청년 全泰壹과의 만남이라는 충격적인 사건에서 헤어날 수 없었다. 張琪杓(장기표·59) 前 녹색사민당 대표는 『그런 게 운명이라고 하는 모양』이라고 했다.
 
  여섯 번의 수배, 다섯 번의 獄苦(옥고)로 이어진 고난의 행군은 그렇게 시작했다.
 
  在野의 리더 張琪杓는 金槿泰(김근태·보건복지부 장관), 李富榮(이부영·열린당 의장)과 함께 全民聯(전민련: 전국민족민주연합)을 조직해 1980년대 후반 한국사회를 뒤흔들었다. 그 후 李在五(이재오·한나라당 의원), 金文洙(김문수·한나라당 의원)와 함께 민중당을 창당했다.
 
  1980년대와 1990년대 在野 운동권을 이념적으로 선도했던 張琪杓씨는 지금 들판에 홀로 서 있다.
 
  그가 끊임없이 시도했던 소위 진보정당의 제도권 진입은 민중당의 실패 이후 번번이 실패했다. 지난 총선에서 그가 이끌던 사민당은 원내 진입에 실패했다. 국회에 들어선 것은 「민족자주(NL)」 계열의 민주노동당이었다.
 
  張대표는 月刊朝鮮의 인터뷰 요청을 오랫동안 거절했다.
 
  『내가 후배들한테 제일 욕먹는 게 민국당(2000년 총선 직전 한나라당 공천에서 대거 탈락한 김윤환·신상우 등의 정치인이 조직한 정당)에 참여한 것이고, 두 번째가 朝鮮日報 욕을 안 하고 있다는 거예요. 月刊朝鮮과 인터뷰했다고 후배들한테 또 욕먹기가 싫습니다』
 
 
 
 主思派 눈치 보기가 계속되는 이유
 
   그가 이번에는 흔쾌히 자리를 함께해 주었다. 『盧武鉉 정권의 失政으로 나라가 위기에 빠졌는데, 욕먹는 것 겁나서 얘기를 못 하겠느냐』고 했다.
 
  ─盧武鉉 정부가 요즈음 「親北·左派」라는 비판에 펄펄 뜁니다. 李富榮 열린당 의장은 『우리 가운데 주사파가 있으면 검찰에 고발하라』고 합니다. 그러면서도 이념 문제, 특히 북한 문제에 대해서는 불투명한 자세를 견지하고 있습니다.
 
  『1980년대 중반에 운동하던 젊은 친구들이 전부 親北 주사파로 달려갔어요. 그걸 제대로 비판하면 운동권에서 소외당하니까, 다들 침묵을 지킨 거예요. 그게 지금까지 이어져 오는 거죠. 정치권에 있는 우리 연배들이 그 점에서 기회주의적이에요. 운동권 출신은 그렇다고 치고 盧武鉉씨는 뭐냐? 이 양반은 운동권 콤플렉스가 있어요. 친북적인 경향을 띠어야 운동권 정서하고 맞고, 진보적이라는 얘기를 들으니까, 아무런 철학도 없이 친북적 자세를 견지하는 거예요』
 
  ─金正日 정권에 대한 張대표의 입장은 뭡니까.
 
  『저는 親北(친북)입니다. 북한 주민들하고 친하게 지내야죠. 그런데 지금 親北하자는 사람들은 親북한정권, 親金正日 하자는 얘기예요. 이 親北은 「反북한인민」이에요. 이걸 구분을 안 하고, 金正日 정권을 비판하면 「反北」이라고 몰아붙여요』
 
  ─張대표가 1989년에 운동권의 전국적 연합체인 전민련을 만들 때 당시 전대협을 위시한 상당수 운동권 단체가 주사파의 영향 아래 있었지 않습니까.
 
  『나는 주사파를 계속 비판했어요. 주사파들이 내가 운동권의 主流니까 나를 함부로 비판하지 못했어요. 김영환(「강철서신」의 저자), 서울大 정치학과 나온 박시종이 하고 홍성교도소에 함께 있으면서 참 토론을 많이 했어요. 김영환은 그때 「KAL 858기 폭파 사건」을 안기부에서 조작했다고 해요. 내가 북한에서 한 게 맞다고 항복을 받아 냈어요』
 
  ─주사파로 달려갔던 이들이 지금 국회 안에 진출해 있고, 청와대에도 많이 포진해 있습니다. 주체사상의 영적 세례를 받았던 일이 지금 어떤 의미를 갖고 있는지 스스로의 석명이 필요한 것 아닐까요.
 
  『그 친구들이 갓 대학에 들어와서 「북한이 잘 살고 있다, 사회주의를 한다, 평등한 사회다」라는 주장에 매료된 거죠. 「북한은 주체의 나라인 반면 남쪽은 독재정권이다」라고 생각하게 된 게 꼭 그 친구들만의 책임은 아닙니다. 그쪽으로 내몬 우리 사회 내부의 요인도 생각해야 합니다』
 
 
 
 盧武鉉은 과거사 청산할 도덕성이 없다
 
  ─북한이 그런 사회가 아니라는 사실이 밝혀지지 않았습니까.
 
  『주사파만 그런 게 아니에요. 「잘못됐다」고 해야 할 사람들이 다들 구렁이 담 넘어가듯이 자신의 잘못을 덮으려고 하잖아요. 한때 대한매일로 이름을 바꿨던 서울신문, KBS, MBC가 모두 군사정권 때 어용언론의 전형이었잖습니까? 金大中 정부가 들어서니까 거기에 가서 붙고, 지금은 盧武鉉 정부에 가서 붙었어요.
 
  권력에 끊임없이 비판적인 것이 언론입니다. 나는 조선일보와 동아일보, 중앙일보를 옹호할 생각이 전혀 없습니다. 조선·동아가 일제시대 때 잘못한 것, 군사정권 때 독재를 옹호한 것은 반성하고 가야죠. 그렇다고 盧정권이 「우리한테 비판적이니까 혼나 봐라」 이건 안 됩니다』
 
  ─청와대와 열린당이 입법을 통해 과거사 청산을 하겠다고 나섰습니다. 「親日派를 완전 제거한 金日成이 옳으냐, 親日 협력한 朴正熙가 옳으냐」를 국민들에게 강요하려는 이념적 伏線(복선)이 깔린 것 아닙니까.
 
  『「金日成이냐, 朴正熙냐 선택을 강요한다」는 건 너무 비약인 것 같아요. 과거사 진상규명을 해야죠. 하지만 이런 식의 과거사 진상규명은 적절치 못해요. 과거사의 진상을 밝히려는 의도, 동기와 목적, 주체가 분명해야 합니다. 盧武鉉 대통령과 盧武鉉 정권이 직접 나서서 과거사 진상 규명을 할 자격이 있느냐? 나는 자격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盧武鉉 대통령이 유신헌법을 공부해서 유신 시절에 판사를 했습니다. 그것 자체를 나무라고 싶지는 않아요. 하지만 盧武鉉씨가 뭐 그렇게 잘한 일도 없잖아요. 盧武鉉씨가 쓴 「여보 날 좀 도와줘」라는 책이 있어요. 「장인이 양민학살에 연루돼 판사 못 됐다는 소리 듣기 싫어서 판사가 됐다」, 그게 판사가 된 이유예요.
 
  盧武鉉씨는 서른서너 살이 넘어설 때까지 사회정의라든가 민주화에 대해 아무런 생각이 없었어요. 1980년대에 일본에 요트 타러 다녔고, 대통령 되고 일본에 가서는 「그 시절이 내 인생에서 가장 행복했던 때」라고 얘기했어요. 어떻게 변명을 하든 이건 비정상적인 것 아닙니까? 1981년에 부림사건 재판에 참여했다지만, 그 사람이 변호사로서 변론이나 했지 특별하게 움직인 게 있나요』
 
  ─1980년대에 盧武鉉 대통령을 만난 적이 있습니까.
 
  『감옥에 갇혀 있느라 볼 기회가 없었어요. 盧武鉉씨가 1987년 6월항쟁 전후에 움직이기 시작했어요. 盧대통령은 과거사를 심판할 도덕성이 없는 사람입니다. 신기남(열린당) 前 의장도 마찬가지예요. 그 사람이 「탈레반」으로 불릴 정도로, 강경 원리주의자로 통했습니다. 그 사람이 과거사 청산을 얼마나 강하게 주장했습니까. 그런데 그 사람 아버지가 독립군을 고문한 일제 헌병이라는 사실이 밝혀졌어요. 만에 하나 그게 안 밝혀졌을 경우, 일제 헌병의 자식이 주도한 과거사 청산이 무슨 의미가 있었겠습니까? 신의장은 유신독재, 군사독재 시절에 아무런 민주화운동도 안 하고 변호사로 잘 살았어요. 그런 사람이 민주화의 기수인 양 설치고…』
 
 
 
 『요트 타고 골프 치는 서민이 있습니까?』
 
  ─문학평론가 김명인씨가 한 잡지에서 「대한민국은 親日派·親美派 정상배들이 세운 나라다. 이 사실을 확인하는 게 과거사 규명의 본질이다」고 주장했습니다. 대한민국은 태어나지 말았어야 할 私生兒(사생아)라는 얘기인데.
 
  『대한민국을 세운 세력은 모두 親日派·親美派 정상배다 그런 얘기는 잘못이죠. 정부를 세우기 위해 선거가 있었고, 그 선거에 민족진영이 대거 참여했습니다. 盧武鉉씨가 대한민국 자체를 부정하는 발언까지 했는데, 역사를 그렇게 규정하면 세계에 안 그런 나라가 몇이나 되겠어요. 이 사람들은 과거사를 규명하는 데 목적이 있는 게 아니라 자신들의 권력을 유지하고 再창출하는 데 이용하려는 거예요 』
 
  ─大選 전 張대표는 인터넷 홈페이지를 통해 「盧武鉉씨는 대통령이 돼서는 안 될 사람이다」고 강하게 주장했습니다. 왜 그랬습니까.
 
  『여기저기서 발언하는 것을 보면 너무 즉흥적이고, 말이 그때그때 상황에 따라 달라져요. 많은 사람들이 「盧武鉉씨가 親노동자적이다, 서민적이다」고 하는데 나는 전혀 동의하지 않습니다. 요트 타고 골프 치는 서민이 있습니까? 나는 盧武鉉씨가 대통령이 되면 우리 사회는 극단적인 대립을 맞을 거라고 걱정했어요』
 
  ─정치인의 인기란 게 참 묘하더군요. 「盧風(노풍)」이 한창일 때 盧武鉉씨가 관훈토론에서 『金大中의 3단계 통일론을 모른다』, 『북한의 공화국연방제안은 읽어보지 못했다』고 하는데, 국민들은 『서민적이다』, 『소탈하다』는 반응을 보이더군요.
 
  『盧武鉉씨가 서민적이라는 말을 듣는 이유가 두 가지인데, 하나는 親노동자적인 발언을 많이 한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말을 유식한 척 안 하고 한다는 겁니다. 그 외에 盧武鉉이 서민적일 이유가 뭐가 있나요? 盧武鉉씨가 변호사라 돈도 많이 벌었다는데, 서민적일 이유가 없습니다. 盧武鉉씨가 말을 아무렇게나 하지만, 잘하는 태도는 아니죠. 서민들이 다소 격식을 안 갖추는 면이 있기는 하지만, 盧武鉉씨처럼 말하는 서민이 어디 있나요』
 
  ─盧武鉉 대통령이 한때 「민주대연합」을 주장했는데요.
 
  『한마디로 시대착오예요. 民推協(민추협) 했던 사람들이 개나 한 마리 잡아놓고 친목을 도모하겠다면 그건 좋아요. 자기네들이 옛날에 뭘 했다고 떠드는 것은 꼴불견이에요. 상도동계니 동교동계니 하던 분들이 별로 민주세력도 아니잖아요.
 
  全斗煥씨가 쿠데타했을 때 제대로 저항하지 않고, 조용히 음식점이나 술집 하던 사람이 얼마나 많은데요. 그리고 그 양반들이 권력을 잡았고, 누릴 것 다 누렸잖아요. 가장 도덕적이어야 할 세력이 온갖 부정부패에 연루됐어요. 지금 국민들에게 자랑할 게 뭐가 있나요. 1970년대와 1980년대에 민주화를 위해서 애를 쓴 것으로 족해야죠』
 
  ─張대표는 민중당(1990년), 개혁신당(1995년), 무지개연합(1996년), 새시대개혁당(2000년), 사민당(2002년)을 만들었습니다. 현실 정치판에서는 번번이 실패했는데….
 
  『저는 신념으로 정치를 해온 사람입니다. 실패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나는 고교 평준화도 반대』
 
   ─이정우씨와 교육혁신委가 주장하는 대학 평준화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나는 고교 평준화도 반대합니다. 고교 평준화가 1970년대 중반에 시행됐습니다. 경기중학교에 보내려고 가정교사 쓰고, 경기고등학교에 보내려고 가정교사를 썼어요. 고교입시라도 없애서 과외를 없애야겠다, 그래서 상당히 효과를 거두었습니다. 시행 30년 만에 평준화는 한계에 도달했습니다.
 
  근본적인 해결책은 일류대학을 나오지 않더라도 천대받지 않고, 인간적인 대접을 받으면서 살 수 있는 환경을 만드는 겁니다. 그게 바로 사회보장제도예요. 그 틀을 갖추면서 고등학교 때부터 공부를 아주 잘하는 사람은 열심히 할 수 있도록 만들어 줘야죠. 지금 지식경쟁 시대 아닙니까? 하향 평준화하게 되면 나라가 망하는 거예요』
 
  ─張대표가 말씀하는 사회민주주의는 경쟁의 불가피성을 인정한다는 점에서 좀 독특하군요.
 
  『국민들이 평균 생활 수준까지 살 수 있도록 보장하고, 그 위에서 치열하게 경쟁하게 해야죠. 저는 시장경제론자입니다. 시장경제를 해야 인간의 자유가 보장됩니다. 사회주의 계획경제가 뭡니까? 생산도 소비도 다 계획에 따르는 겁니다. 나는 오늘 저녁에 돼지고기를 먹고 싶은데, 정부에서 쇠고기를 먹으라고 하면 곤란하잖아요. 시장경제가 자연의 섭리예요. 정치적으로는 민주주의를 해야 하고, 경제적으로는 시장경제를 해야 돼요. 민주주의 시장경제를 보장해 주는 것이 사회보장입니다』
 
  ─국가보안법 폐지 주장에 대해서는 어떤 입장입니까.
 
  『나는 국가보안법은 폐지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왜 그래야 되느냐, 국가보안법이 우리 사회의 親北세력을 온존시키기 때문입니다』
 
  ─아주 독특한 해석이십니다.
 
  『형법에 내란죄, 외환죄, 간첩죄가 다 규정돼 있습니다. 부족하면 보완하면 됩니다. 문제는 찬양 고무죄입니다. 국가보안법을 유지해야 한다는 분들이 「시청 앞에서 인공기를 내걸고, 金日成·金正日이를 찬양해도 제재할 방법이 없다」고 합니다. 찬양 고무하도록 내버려 둬서, 찬양 고무하는 정신 나간 사람이 누구인지 국민들이 알도록 해야 합니다. 그게 이 체제를 강화하는 방법이라고 생각합니다. 무엇보다 국가보안법은 死文化가 됐습니다. 지금 국가보안법으로 구속돼 있는 사람이 11명뿐이에요』
 
 
 
 『장전항이 칠흑이에요. 거기 무슨 희망이 있습니까』
 
  ─대학가에서 한때 「늦은 통일을 가장 좋은 통일로 만들자」는 노래가 유행했습니다. 張대표가 생각하는 통일은 어떤 겁니까.
 
  『우선 통일은 그렇게 쉽게 될 일이 아니에요. 또 하나 통일은 자꾸 하려고 하면 할수록 더 안 되게 돼 있습니다. 북한이 통일을 원하겠어요?』
 
  ─북한이야 북한식 체제를 남한에 이식하는 통일을 원하겠죠.
 
  『그게 되겠어요? 설령 우리의 60만 군대를 해산하고, 국가정보원을 북한의 국가보위부에 넘겨줘서 북한이 원하는 통일이 됐다고 합시다. 金正日이 내려와서 남한 사람들에게 「당장 사유재산 다 내놓고, 내일부터 배급 타러 나오라」고 해 보세요. 朴正熙·全斗煥 정권을 무너뜨린 남쪽 사람들이 가만있겠어요? 불가능합니다. 20년 전 소련과 중국의 사회주의가 건재했을 때는 가능했을지 모르죠. 북한이 한반도를 통일한다는 건 되지도 않을 일입니다』
 
  ─북한에서 중국과 같은 변화가 일어날 수 있을까요.
 
  『金正日은 개혁·개방을 할 수 없어요. 제가 금강산 관광을 다녀온 적이 있습니다. 장전항 주변이 칠흑 같은 암흑이에요. 거기 무슨 희망이 있나요. 북한에서는 金日成이 죽었을 때 金正日이 집권을 안 했어야 합니다. 그랬으면 은근슬쩍 정권을 교체하면서 잘못을 金日成에게 전가시키고 북한 사회를 변화시킬 수 있었을 거예요』
 
  ─6·15 공동선언 제2항 「북한의 낮은 단계 연방제와 남쪽의 연합제案에 공통점이 있고, 그걸 바탕으로 통일을 지향한다」를 놓고 논란이 있었습니다.
 
  『나는 그런 논쟁 자체가 별 의미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문서로 어떻게 통일을 합니까. 북한이 하겠습니까. 6·15 공동선언은 「그냥 잘해보자」는 얘기에 불과해요. 체제가 통일돼야 통일이지 사회주의 국가는 사회주의대로, 자본주의 국가는 자본주의대로 그대로 놔두면서 그게 무슨 통일입니까.
 
  남한의 主思派(주사파)들이 교본으로 읽었던 조진경이라는 사람이 쓴 두 권짜리 책이 있습니다. 여기에 「남한의 체제와 북한의 체제를, 조금이라도 변화시키면서 통일하자는 사람은 통일을 안 하자는 사람들이다」로 돼 있습니다. 주사파들은 통일하지 말자는 겁니다』
 
 
 
 全泰壹과의 운명적 만남 여섯 번의 수배, 다섯 번의 獄苦
 
   1970년 11월13일 서울 청계천 평화시장 앞 길거리에서 평화시장 재단사로 일하던 청년 全泰壹(전태일·당시 22세)이 온몸에 시너를 끼얹고 분신자살을 기도했다. 시커먼 가스가 氣道(기도)를 막아가는 가운데 全泰壹은 외쳤다.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 『우리는 기계가 아니다』, 『일요일은 쉬게 하라』, 『노동자들을 혹사하지 말라』
 
  그 무렵 청년 全泰壹은 친목모임인 三棟會(삼동회)를 만들어 근로자들의 작업환경 실태조사를 위해 설문조사를 벌이는등 초보적인 노동운동을 시작했다. 어머니 李小仙 여사가 일수로 빌린 돈 3200원으로 근로기준법 책을 사서 공부하던 全泰壹은 『대학생 친구가 한 명 있었으면 좋겠다』고 얘기했다고 한다. 全泰壹은 초등학교를 4학년까지만 다녔다.
 
  서울大 법대생 張琪杓는 全泰壹의 첫 번째 대학생 친구가 됐다. 그와 全泰壹 가족의 인연은 지금까지 이어져 오고 있다.
 
  『全泰壹이 분신하기 한 달 전에 경향신문에 「다락방 속 16시간 노동」이라는 제목으로 평화시장 노동자들의 열악한 작업환경에 대한 기사가 아주 크게 났어요. 이걸 제가 서울법대의 학생운동 신문인 「자유의 종」에 실었어요. 그러고 나서 딱 한 달 만에 全泰壹이 분신자살을 한 거예요.
 
  그때 저는 韓日문제에 관한 강연회를 개최했다고 경찰에 쫓기고 있었습니다. 하숙집에도 못 들어갈 형편이니 全泰壹이 입원한 성모병원에 갈 수가 있어야죠. 후배를 시켜 全泰壹의 어머니 李小仙 여사를 명동성당 앞으로 불러냈어요. 李여사가 나를 붙잡더니 「태일이가 그렇게 대학생 친구를 찾았다. 왜 죽고 나서 이제서야 나타났느냐」며 붙잡고 울어요.
 
  두 시간 정도 만났습니다. 李여사가 全泰壹이 어떻게 자라고, 청계천 평화시장에서 어린 노동자들을 위해 어떻게 살았는지 얘기했어요. 내가 법대 학생총회를 소집해서 그 얘기를 다 전했어요』
 
  ─全泰壹 분신사건을 계기로 노동운동에 투신한 건가요.
 
  『全泰壹이 죽은 후 그해 12월27일에 청계피복 노조가 결성됐지요. 저는 서울대생 내란 음모사건(1971년), 金大中 납치사건 규탄 시위(1973년), 유신독재 반대시위(1973년)에 휘말려 구속되는 바람에 그쪽으로는 많이 신경을 쓰지 못했어요. 틈틈이 全泰壹의 평전을 쓰기 위해 수기와 자료를 모았죠. 하도 험악한 시절이라 비밀리에 복사를 했어요』
 
 
 
 『全泰壹은 혁명가가 아닌, 사랑의 사람』
 
   ─全泰壹 평전을 쓰는 데 얼마나 참여했습니까. 1980년대에는 저자 없이 「어느 청년 노동자의 삶과 죽음」이라는 제목으로 책이 돌아다녔고, 1995년에야 趙英來(조영래: 故人) 변호사가 저자로 밝혀졌지 않습니까.
 
  『내가 쓰려고 자료를 모으고 시작은 했지만 능력과 시간이 안 됐어요. 趙英來 변호사가 글을 잘 써요. 그래서 趙辯(조변)이 쓴 거죠. 1980년대만 해도 이 책이 販禁(판금) 대상이었으니까, 굳이 저자를 밝혀서 피해를 자초할 필요가 없었거든요』
 
  ─全泰壹은 어떤 사람입니까.
 
  『사랑이 강한 사람이죠. 全泰壹은 체제를 뒤집어엎으려던 혁명가가 아니었어요. 몸이 불타 들어가는 상황에서 그가 외친 말이 「遵法(준법)」입니다. 단순한 노동투사가 아니에요. 우리 청소년들을 교육하는 데 全泰壹같이 좋은 모범이 없어요. 全泰壹은 아무리 현실이 어려워도 좌절하지 않았습니다. 거지 생활을 하며 길거리에서 배를 곯고, 피부병을 앓아 죽을 지경이어도 절망하지 않았어요.
 
  수기에 보면, 慶州(경주)역 앞에서 어느 아주머니가 떨어뜨린 500원을 주워서 돌려주지 못하고 빵을 사 먹은 것을 그렇게 자책합니다. 全泰壹은 나이 스물두 살에 죽었습니다. 죽을 때도 어린아이같이 순수했어요. 자기 버스비로 풀빵을 사서 어린 재단사·미싱사·시다들에게 나눠 주고 자신은 걸어서 집에 갔어요. 그런 사람들을 인간답게 살게 하기 위해서 끊임없이 노력했어요.
 
  全泰壹은 정식 초등학교도 아니고 공민학교에서 4학년까지 공부했습니다. 그러면서도 공부를 하기 위해 자기가 입고 있던 바지와 곤로를 팔아서 중학강의록을 받아 봤어요.
 
  영화 「아름다운 청년 全泰壹」을 만들면서 全泰壹의 인간에 대한 끊임없는 사랑, 아무리 자기가 어려워도 높은 이상을 추구하는 마음, 어떤 일이 있어도 열심히 공부하려는 마음을 국민들에게 보여 주고 싶었어요』
 
  ─全泰壹을 청소년들에게 따라야 할 인간상으로 부각시키기 어려운 큰 난점은 그가 生을 포기했다는 것 아닐까요.
 
  『그래요. 그게 딜레마더군요』
 
 
 
 청계피복 女工들과 같이 생활
 
  ─1977년에 청계피복 노조 사건으로 구속됐는데 감옥을 계속 들락날락하면서 언제 청계피복 노조 일을 한 건가요.
 
  『全泰壹 분신사건 직후 서울법대생 70여 명이 서울 명동 성모병원에 들어가 全泰壹의 시신을 보고, 全泰壹의 가족들을 위로했습니다. 나는 그때부터 완전히 형제처럼 돼 버렸어요. 1974년부터 1975년까지 내가 거기서 일을 했어요. 말하자면 위장취업이지』
 
  ─기술이 없었을 텐데, 女工들하고 같이 「미싱 시다」 같은 일을 한 겁니까.
 
  『그때 내 나이가 서른 살이었으니까 시다를 할 수는 없었지요. 「앞으로 피복제조업을 하려고 한다」며 주로 다리미질 하는 일을 했어요. 천을 갖다 놓고 잘라서, 미싱으로 오버로크 쳐서 물건이 돼서 나오면 다리미로 다리는 거죠. 「시아게(마무리 작업이라는 일본어)」 담당이었어요. 우리 공장은 작았기 때문에 나 같은 사람이 했고, 큰 공장에서는 시아게 기사가 별도로 있습니다.
 
  그때 경찰에 수배(민청학련 사건 관련으로) 중이었는데 하계동에 몰래 방 한 칸을 얻어 놓고 출퇴근했어요. 회사에 나갈 때 시다하는 여공들에게 찰떡 한 5000원어치 사다 주고 그렇게 1년을 살았어요』
 
  ─지금도 그 시절 청계피복 노조 사람들과 친합니까.
 
  『그 사람들은 나를 신뢰하죠. 지금 생각하면 그때는 더 이상 가까워질 수 없는 사이였어요. 평화시장에서는 보통 밤 11시에 일이 끝나는데, 주변 정리하고 나면 자정 가까이 됩니다. 숙소에 가서 밥 해서 김치하고 먹고 나면 새벽 1시가 되는 거예요. 그때부터 노동운동이 어떻고 노동조합이 어떻고 새벽 서너 시까지 얘기를 해요. 새벽에 잠깐 자고 아침에 또 출근하고, 이런 생활을 1년 동안 같이 했으니 서로 잘 알게 되죠』
 
 
 
 勞使문제 해결이 가장 큰 관심
 
   ─노동현장에 뛰어들었던 건 그게 마지막인가요.
 
  『현장에 들어간 것은 그 이후에는 없죠. 하지만 노동운동에 대한 관심은 한시도 놓아 버린 적이 없어요. 내가 정치하는 목적의 가장 중요한 목표 중의 하나가 노사문제의 합리적인 해결입니다. 나는 시장경제야말로 인간해방의 길이라고 생각합니다. 굳이 규정하자면 「民主시장주의자」예요. 나는 노사문제의 합리적인 해결이 가능하다고 믿어요. 이것에 대한 해답을 내놓는 것이 정치권의 책임입니다.
 
  정리해고 반대투쟁을 하거나, 정리해고를 강행하는 노사 대치를 넘어서는 해결책이 분명히 있습니다』
 
  ─全泰壹 사건이 張대표가 민주화투쟁, 노동운동에 뛰어들게 만든 결정적인 계기가 된 거군요.
 
  『그렇죠. 하지만 그 사건이 없었어도 나는 굉장히 별나게 살았을 거예요. 국민학교 때부터 사회를 바로잡겠다는 의지가 강했어요. 농사꾼인 아버님이 저에게 큰 사명감을 불러일으켰어요. 漢學을 하셔서 삼국지 이야기, 중국의 古史라든지, 사명대사·서산대사 우리나라 독립운동가들 얘기를 많이 해주셨어요. 나는 고등학교 1학년 때부터 입주 가정교사였습니다. 내가 고등학교 1학년 때 중학교 3학년을 가르친 거예요. 그렇게 1년을 고생하고 나니까 1급 가정교사가 됐어요』
 
  ─대학생활은 어땠습니까.
 
  『서울大 법대생쯤 되면 나보다 똑똑하고 사회적으로도 정의감이 투철할 줄 알았어요. 그런데 맨날 고시공부만 하더라구요. 법대 교수님들은 모두 東京제국대학 나오신 분들이고. 적응이 영 안 돼요. 그래서 1학년 때부터 법대 학생 모임을 만들고, 安秉煜(안병욱)·咸錫憲(함석헌) 선생을 찾아다니고 했어요.
 
  한번은 학생집회에서 「東京제대 나온 교수들이…」 했는데, 「東京제대 나온 地主(지주) 아들들이…」라고 잘못 전해졌어요. 학장이 오라고 해서 갔더니 崔文煥(최문환) 총장께서 「장기표가 도대체 어떤 놈이야!」하고 들어오시더니 엄청나게 화를 내세요. 「학생들이 아무것도 모르면서 정의감만 앞서서」라며 혼을 내시는 거야.
 
  후배들이 말리고 해서 아무 말도 않고 가만히 있었어요. 학장실에서 나온 뒤 「이 놈의 대학 안 다닌다」면서 자퇴서를 냈어요. 이렇게 학생운동에 빠졌고, 그러다 1967년에 군대에 가버린 거죠』
 
  張대표는 광복 직후인 1945년 12월27일 경남 김해에서 태어났다. 마산工高를 졸업한 후 1966년 서울大 법대에 입학했고, 1995년 정식으로 졸업장을 받았다. 그는 운동권의 이론가·정책통이었다.
 
  민주통일민중운동연합(민통련) 정책연구실장(1985~1988), 민중당 정책위원장(1991~1992)이라는 이력이 그의 이런 면모를 잘 보여 준다. 그는 많은 책을 냈다. 지금까지 낸 책이 「해방의 논리와 자주사상」, 「사랑의 정치를 위한 나의 구상」(全 8권), 「지구촌시대 민족발전전략」, 「문명의 전환」 등 모두 16권이다. 우리 시대의 論客(논객)이라 해도 좋을 만한 저술활동이다.
 
 
 
 『사회주의도 주체사상도 좇아 본 적이 없다』
 
   ─張대표가 1989년 주도적으로 출범시켰던 전민련은 한국사회의 체제변혁을 추구했습니다. 姜慶大군 치사 정국을 이끌면서 盧泰愚 정권 타도에 나서기도 했구요. 체제변혁의 지향점에 사회주의가 있었던 것 아닙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나는 1970년대부터 「자생적 공산주의자」로 낙인이 찍혔는데, 나는 한 번도 사회주의를 따라가 보자고 생각한 사람이 아니에요. 主體思想(주체사상)을 따라가 본 사람도 아니고….
 
  1960년대에 서울大 학생들이 많이 읽었던 책이 毛澤東의 「모순론」, 밀즈의 「들어라 양키들아」, 폴 스위지의 「자본주의의 이론」 같은 책이었어요. 요즘 같으면 소설거리도 안 되는 책들이었어요. 하지만 그때에는 사회주의에 대한 막연한 선망을 가진 사람들이 아주 많았어요.
 
  1970년대에 들어오면서 이런 사회주의적인 성향들이 희석돼 버렸어요. 사회주의 세력이 거의 없어져 버린 거죠. 1970년대의 투쟁은 그야말로 反군사독재 투쟁이었어요. 그런데 1980년대 중반에 우리 사회가 사회주의와 주체사상으로 확 빨려 들어가더라구요』
 
  ─張대표도 그런 경향에 쫙 빨려 들어간 것 아닙니까.
 
  『나는 1984년에 민통련을 만들면서 새로운 이념을 주장한 사람입니다』
 
  ─사회주의가 아니고요.
 
  『1980년대 운동권에 레닌주의가 풍미했는데, 이것은 사회주의적인 발상이 아니었어요. 극단적인 이기주의 발상이에요. 자기가 「레닌이 되고 싶다」는 속내였어요.
 
  저는 진짜 민주주의자가 되고 싶었어요. 1985년에 내가 민통련 창립선언을 쓰면서 민중민주주의를 주창했어요. 사람들이 나보고 「생각이 잘못돼 있다」고 해요. 그래서 내가 「민중이 주체가 되어야 한다. 너희들이 노동자냐, 내가 노동자냐. 나야말로 평화시장에서 오래 있으면서 노동자를 잘 아는데, 왜 노동자만 변혁의 주체가 돼야 하느냐. 국민 대중이 주체가 돼야 한다」고 반박했어요』
 
  ─「인민민주주의(프롤레타리아 민주주의)」라는 단어를 쓰기가 현실적으로 곤란하니까, 대신 민중민주주의라는 말을 쓴 것 아닙니까.
 
  『검찰과 당국에서 우리를 탄압할 때 민중민주주의를 인민민주주의와 등치해서 탄압했죠. 나는 국민대중 주체의 민주주의를 해야 한다는 개념이 확실했어요. 민통련 할 때 젊은 운동권의 후배들한테 얼마나 비난을 받았는지 몰라요. 국민 대중을 운동의 주체로 내세운다고, 계급의식이 없다는 겁니다. 운동권 사람들이 「당신은 시민민주주의(civil democracy) 신봉자에 불과하다」고 공격했어요. 문익환 목사나 나 같은 사람들을 그들은 「명망가」라고 불렀어요. 부르주아라는 거예요』
 
 
 
 北韓이 民衆黨을 좌초시켰다
 
  ─지구상에 마지막으로 남은 마지막 스탈린주의 국가의 지배자를 흠모하고, 그 지배 이데올로기를 운동의 논리로 채택했다는 것은 한국 지성사의 부끄러운 과거가 아닐까요.
 
  『굉장히 가슴 아픈 일이죠. 민중당이 왜 실패했어요? 주사파들 때문에 안 된 것이에요. 민중당 출범을 준비하던 1989년 1월부터 3월까지 북한이 對南방송을 통해서 「앞으로 운동권이 정당으로 나가야 된다」는 지령을 내렸어요. 주사파(NL계열)들이 합류할 듯하다가 거부했는데 그 이유가 기가 막혀요.
 
  주사파들이 합법 정당으로 나가면 親北을 할 수 없잖아요. 親北을 하면 선거에 나가서 표가 나오겠어요. 재야 운동권으로 있어야만 親北활동을 계속할 수 있거든요. 민중당이 「이선실 간첩단」 사건의 와중에 그냥 날아간 것 아닙니까. 북한은 민중당이 잘 되는 게 싫은 거예요. 민중당이 잘 돼서 재야를 끌고가 버리면 親北노선을 추종하는 세력이 사라져 버리니까』
 
  ─북한과 남쪽의 여론 양쪽에서 협공을 받은 셈이군요.
 
  『내가 운동권의 정통파 아닙니까. 운동권의 제도권 정당화를 통해 운동권이 정상적인 길로 들어서야 했는데, 南에서 北에서 도처에서 나를 죽이려고 드니까, 어떤 때는 의도적으로 어떤 때는 非의도적으로…. 이걸 돌파해 낼 힘이 없으니까, 운동권의 많은 선후배들이 3金이 지배하는 지역주의 정당에 들어가 국회의원이나 하는 것에 만족하고, 운동권의 한쪽에는 주체사상을 좇는 세력이 잔존해 있고…. 그래서 내가 여기까지 밀려온 거예요』
 
  ─글 쓰는 것을 전문으로 하는 사람도 책 쓰기가 힘든데 언제 책 쓸 준비를 합니까. 「신문명국가 비전」, 「지구촌시대 민족발전전략」, 「국가파산을 막을 희망의 메시지」 등의 張대표 저서를 읽어 보면 정보화·세계화의 중요성에 대한 인식이 확실하게 자리잡고 있는데요.
 
  『우선 열심히 읽어요. 내가 감옥살이를 오래 했잖아요. 징역을 몇 년 살면, 2~3년 못 본 책을 거의 다 읽을 수 있어요. 미국의 엘빈 토플러, 피터 드러커, 폴 케네디 같은 사람들의 책을 거의 다 읽었어요. 징역을 10년 살았는데 10년 동안 뭐 했겠어요』
 
  ─성균관 대학교의 李大根(이대근) 교수가, 「진보와 보수의 옛날 기준이 생산수단의 소유관계였다면 이제는 생산력이다」라고 했습니다. 이게 세계화의 논리이기도 한데, 공감하십니까.
 
  『산업문명 시대의 기준으로 진보와 보수를 나누는 것은 적합하지 않습니다. 성장을 우선으로 하고, 세금을 낮추고, 국방력을 강화하면 보수라는 소리를 듣죠. 그러나 세계화의 시대에는 이런 식으로 하면 진보가 아니라 오히려 수구예요.
 
  생산력의 비약적인 발전이 이뤄진 정보화 사회에서는 노동인력의 대폭 감축이 필연적입니다. 노동인력의 대폭적인 감축이 진보란 말이에요. 자동화를 통해 노동인력이 대폭 줄어드는 그런 새로운 사회를 전제로 해서 국민이 모두 잘 살 수 있는 방안이 무엇이냐? 이 관점에 서는 것이 진정한 진보예요. 토플러, 드러커, 폴 케네디 같은 사람들이 진보주의자들이죠』
 
 
 
 평등부부상 수상
 
  ─지금 재산이 얼마나 됩니까.
 
  『조그만 아파트 한 채가 전부예요. 돈 얘기가 나오면 부끄럽고 별로 할 얘기가 없어요. 지금도 고향에 가면 형수들이 용돈하라고 5만원씩, 10만원씩 주세요』
 
  ─직업 운동가, 정치인으로 살아오면서 생활비와 활동비는 어떻게 충당했습니까.
 
  『아내가 교사를 했고, 지금도 교육계통의 직장에 다니고 있어 먹고사는 건 해결합니다』
 
  ─2000년 여성신문에서 주는 「평등부부상」을 받았던데, 집에서 어떤 공로를 쌓았습니까.
 
  『부부 사이가 화목하면 어떤 사회적인 어려움이 있더라도 모두 극복할 수 있어요. 사랑의 제일 핵심은 부부사랑이에요. 제가 「우리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만나자」는 책에 부부가 잘 사는 방법을 아주 상세히 써 놓았어요. 부부간에 잘 살려면 많이 노력해야 합니다. 서로 이해하려고 노력해야죠』
 
  네 시간에 걸친 인터뷰를 끝내면서 張대표는 홀가분한 표정이었다. 『원고를 다 정리하면 張대표가 한번 볼 수 있도록 해드리겠다』고 하자 『이미 내 입을 떠난 말들이다. 그걸 어떻게 다루느냐는 언론의 몫 아니냐』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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