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의 아버지 윌리엄 우드는 6·25 전쟁 때 2사단 작전참모로 참전했다. 아버지는 아들이 2사단장으로 한국에 부임하러 간다고 하니 지갑에 간직했던 종이쪽지를 선물로 주었다. 1950년 낙동강 전선에서 美 2사단장이 내린 한국 死守 명령서였다.
두 여중생 사망사건의 뒷수습을 맡았던 우드 소장은 한국을 떠나면서 『아버지 세대는 한국 땅을 지키면서 싸우고 죽었다』고 말했다.
존 R. 우드
1972년 美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하고 포병소위로 임관했다. 1978년 38포병 1대대 사격지휘장교, 2사단 1여단 화력 지원장교로 한국에 근무했다. 시카고大에서 경영학 석사, 美 참모대학에서 군사학 석사학위를 받았다. 모교인 웨스트포인트에서 경제학 조교수를 지냈다. 1984년 백악관 연구원으로 선발돼 국가안전보장회의(NSC)에서 백악관 참모요원으로 근무했다. 1996년 독일 윌즈버그에 주둔하고 있는 1사단 참모장을 거쳐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의 다국적 사단 참모장을 역임했다. 주한미군 2사단장 부임 직전 육군성 전략기획 및 정책참모부장을 지냈다. 美 공로훈장을 여섯 차례 수상했다.
李 南 圭 前 朝鮮日報 국제부장
吳 東 龍 月刊朝鮮 기자
두 여중생 사망사건의 뒷수습을 맡았던 우드 소장은 한국을 떠나면서 『아버지 세대는 한국 땅을 지키면서 싸우고 죽었다』고 말했다.
존 R. 우드
1972년 美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하고 포병소위로 임관했다. 1978년 38포병 1대대 사격지휘장교, 2사단 1여단 화력 지원장교로 한국에 근무했다. 시카고大에서 경영학 석사, 美 참모대학에서 군사학 석사학위를 받았다. 모교인 웨스트포인트에서 경제학 조교수를 지냈다. 1984년 백악관 연구원으로 선발돼 국가안전보장회의(NSC)에서 백악관 참모요원으로 근무했다. 1996년 독일 윌즈버그에 주둔하고 있는 1사단 참모장을 거쳐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의 다국적 사단 참모장을 역임했다. 주한미군 2사단장 부임 직전 육군성 전략기획 및 정책참모부장을 지냈다. 美 공로훈장을 여섯 차례 수상했다.
李 南 圭 前 朝鮮日報 국제부장
吳 東 龍 月刊朝鮮 기자
지난 8월 초 2사단의 3개 여단 중 하나인 2여단 병사 3600여 명이 이라크로 떠난 뒤여서인지 적막감이 감돌았다. 2사단 관계자는 『해외 근무를 마치고 본국으로 갈 걸 기대했던 병사들이 전쟁터인 이라크로 차출됐고, 이 때문에 2여단 파병 환송식은 悲感(비감)한 분위기였다』고 했다.
환송식에 한국 측 관계자들이 많이 참석하지 않아 분위기가 쓸쓸했다고 한다. 대한적십자사 부녀회원들이 떠나는 미군 병사들을 위해 꽃다발과 간단한 다과를 준비했지만, 전쟁터로 떠나는 2여단 장병들은 굳은 표정으로 떠나버렸다고 한다.
「캠프 레드 클라우드」에서 만난 美 2사단 관계자들은 냉랭해진 韓美관계에 대한 섭섭함을 완곡하게 드러냈다.
2사단 채양도 공보관은 『2사단이 평택으로 떠나면 2사단 사령부 부지는 시민공원이나 아파트 단지가 될 것』이라고 했다. 위병소를 들어서자 근무 중인 미군 병사가 『Second to None(천하무적)」이라는 구호로 경례를 했다.
장교들은 『Ready to fight tonight!(오늘 밤에라도 싸울 준비태세를 갖추자!)』이라는 구호로 경례를 했다.
2년의 임기를 마치고 9월14일 離韓(이한)하는 주한미군 2사단장 존 R. 우드 소장은 버지니아州 노포크에 있는 美 합동군사령부 합동시험참모로 부임한다. 美軍을 미래의 상황에 맞게 전환시키는 게 그의 새로운 임무다.
진행 중인 「을지포커스렌즈」 훈련을 위해 벙커를 지키고 있던 존 우드 장군이 반갑게 기자 일행을 맞았다.
사령부 건물 2층에 위치한 존 우드 장군의 사무실은 간소했다.
조그만 책상 하나와 소파 하나가 전부였다. 책상 옆에는 장성기와 함께 태극기와 성조기가 나란히 서 있었다. 존 우드 장군은 부드러운 미남형 얼굴로 미국 영화 배우 로버트 레드포드를 연상시켰다. 차분한 목소리의 그는 학자 냄새가 물씬 풍겼다. 우드 장군은 한국産 유자차를 권했다.
─가장 존경하는 군인은 누구입니까.
『리지웨이 장군입니다』
매튜 B. 리지웨이 장군은 1950년 겨울 중공군이 한국전쟁에 개입한 시점에 美 8군사령관 겸 UN軍 총사령관으로 부임, 전세를 역전시켰다. 일선부대를 방문하면서 병사들의 사기를 북돋워 주었고, 혹한 속에서 고투하고 있는 병사들의 생활여건을 개선해 준 德將(덕장)이었다.
─리지웨이 장군을 존경하는 특별한 이유가 있습니까.
『저는 32년간 軍에 몸을 담고 있습니다. 「새로운 세대」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임무를 충실히 수행하는 思慮(사려) 깊은 군인이 되고 싶습니다. 그 점에서 리지웨이 장군을 존경합니다』
─한국군 지휘관 중에 기억에 남는 인물이 있습니까. 『제너럴 팩(白善燁 장군)입니다. 白장군은 전투에서 용감한 군인이었고, 자기 나라를 사랑하고 우리나라와의 동맹관계를 사랑했습니다. 白장군은 제 아버지(윌리엄 우드)와 함께 저의 영웅입니다』
존 우드 소장은 벽을 가리켰다. 그곳에는 白善燁 장군이 多富洞(다부동) 전투가 한창이던 1950년 8월 대구의 동촌비행장에서 팔장을 끼고 있는 사진이 걸려 있었다. 당시 한국군 제1사단장이었던 白善燁 장군은 낙동강 전선을 돌파하려고 총공세를 편 인민군 3개사단을 저지하기 위해 미군 제1기병사단과 함께 격전을 벌였다. 다부동 전투는 인천상륙작전으로 시작된 大반격의 발판이 됐다.
리지웨이 장군이나 白善燁 장군은 「德將」으로 불렸다. 그가 생각하는 바람직한 지휘관像을 짐작할 수 있게 한다.
존 우드 장군은 역대 美軍 지휘관들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얘기했다.
『맥아더 장군은 위대한 정치가였습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아버지는 東京에서 근무하셨기 때문에 그를 잘 알고 있었습니다. 저는 아이젠하워 장군도 좋아합니다. 그는 강한 군인이었지만, 개성적인 사람은 아니었습니다. 그는 실무적인 사람이었고, 그 덕으로 대통령까지 될 수 있었습니다. 콜린 파월 장군은 새 세대 장군으로 좋아합니다. 그는 2사단에서 대대장을 지냈습니다. 아주 사려 깊고 현명한 장군입니다』
─조지 패튼 장군은 어떻게 생각합니까.
『저는 자기 임무를 잘 수행하는 강한 군인을 좋아합니다. 하지만 패튼 장군은 개성이 너무 강했어요』
존 우드 장군은 2002년 7월 2사단장에 부임했다. 미군 장갑차에 의한 여중생 사망사고가 터진 직후였다. 그는 그 후 여중생 교통사고가 反美의 거센 폭풍으로 이어지는 과정을 지켜보며 마음 고생을 적지 않게 했다. 두 여학생의 죽음에 항의하는 시위대가 이곳까지 몰려왔고, 시위대가 던진 돌에 미군 헌병들이 피를 흘리는 광경을 직접 목격했다.
존 우드 장군에게 月刊朝鮮(2003년 3월호) 한 권을 선물로 건넸다.
우드 장군의 시선은 月刊朝鮮에 실린 화보에 한참 동안 머물렀다. 화보는 「미선 효순양 교통사고」 발생 5일 뒤(2002년 6월18일)에 美 2사단의 「캠프 하우즈」에서 열린 미군들의 여중생 추모 행사 사진들이었다.
존 우드 사단장은 화보의 제목과 사진설명, 관련 기사를 공보관에게 번역해 달라고 했다. 공보관의 번역을 10여 분간에 걸쳐서 들은 그는 『이 책은 나에게 더 없이 좋은 선물이다. 미국에 가져가겠다』며 『사실, 두 여중생을 위한 촛불추모를 가장 먼저 한 것은 우리 2사단 병사들이다. 주한미군이 여중생 사망사고 이후에 취했던 일들이 너무나 알려지지 않아 아쉽다』고 했다.
러셀 L. 아너레이 당시 美 2사단장을 비롯한 공병여단 장병 500여 명은 촛불 추모행사를 갖고 교통사고로 숨진 여중생을 추모했다. 행사에 참석했던 주한미군 공보관 金永圭(김영규)씨는 『당시 추모행사에 참석한 미군 장병들은 엄숙하고도 무거운 표정이었고, 일부 울먹이는 병사들도 있었다』고 기억했다.
주한미군들은 모금을 시작, 두 여중생의 유가족에게 2만2000달러(약 2640만원)의 성금을 전달됐다. 주한미군과 한국인 독지가들이 2002년 9월13일 사고현장에 추모비를 건립했고, 유족들에게 각각 배상금 1억9500만원을 지급했다. 大選 분위기에 편승한 「효선·미선양」 추모 촛불집회는 주한미군 측의 이런 애도 움직임과 보상 사실에는 눈감은 채, 反美 정서를 뜨겁게 달궜다.

존 우드 장군은 부임하자마자 여중생 추모비 건립을 추진했다. 미군 장병들은 성금을 내 추모비를 건립했고, 제막식에는 효순·미선양의 부모가 초청됐다. ─장군이 부임하기 직전 美軍 장갑차에 의한 여중생 사망사건이 일어났습니다. 훈련 중 발생한 교통사고가 反美운동에 이용돼 엄청난 정치적 파장을 일으켰고, 전통적인 韓美동맹을 파괴했습니다. 당시 주한미군이 이 문제를 더 원만하게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은 없었을까요.
『그 비극적 사건은 제가 부임하기 한 달 전에 일어났지만, 저는 한국인들의 감정, 우리 병사들의 심정을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무어라 표현할 수 없는 슬픔과 고통이었습니다. 저는 이 사건을 계기로 우리가 좀더 대화와 토의를 하고, 이해해야 할 시기가 되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저는 상호 이해와 존경이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것을 체험했습니다』
존 우드 장군은 취임 3개월 후인 2002년 11월, 경기도內 지방정부 대표, 민간인 지도자, 지역內 한국군 관계자들이 참가하는 韓美협력협의회(KAPC)를 발족시켰다. 이 조직은 그동안 다섯 차례의 실무회의와 여섯 차례의 본회의를 가졌고, 항공기 소음 문제, 헬기 저공비행 피해 문제 등 상정된 43건의 의제 중 32건을 해결했다고 한다.
그는 경기도 주민을 미군 기지로 초청해 「좋은 이웃의 날」을 열기도 했고, 「韓美친선의 날」을 주최하기도 했다. 부인 마거릿 여사와 함께 파주에 있는 지산중학교를 방문해서 1日 영어교사로 봉사를 했다. 역대 어느 미군 지휘관보다 韓美관계 개선을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인 것이다.
존 우드 장군은 『내가 가장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것은 한반도에서 군인으로서 임무를 수행한 사실』이라고 했다.
『저는 철두철미한 軍人입니다. 제가 한국에 온 이래 우리 사단의 훈련 중 안전사고율은 60% 포인트나 줄었습니다. 이것은 다른 지역에 주둔하고 있는 미군의 안전사고율과 비교할 수 없는 성과입니다. 우리 병사들은 한국 상황에 잘 대처할 수 있게 됐고, 그들은 한국을 위해 좀더 잘 싸울 수 있게 된 겁니다』
지난 8월2일, 동두천 「캠프 케이시」의 인디언 헤드필드에서는 리언 라포트 주한미군사령관(대장), 찰스 캠블 8군사령관(중장), 존 우드 소장, 2여단장 게리 패튼 대령, 金鍾煥(김종환) 합참의장, 白善燁 예비역 대장, 南在俊(남재준) 육군참모총장, 千明洙(천명수) 경기도 부지사, 최용수 동두천 시장 등이 참석해 이라크로 출병하는 2사단 2여단전투단을 환송했다. 2여단은 40여 년간 한국에 주둔했다. 특히 1/506보병대대는 노르망디 상륙작전, 베트남전 햄버거 힐 작전 등에서 혁혁한 전공을 세워 세 차례 부대표창을 받은 최강의 부대로 1987년 한국으로 이동해 왔었다.
존 우드 소장은 환송연설에서 이렇게 병사들을 격려했다.
『테러리스트들이 미국에 왔듯이, 이제 우리 2사단 장병들이 테러리스트에게로 간다. 하지만 테러리스트들이 절망과 두려움을 가져온 것과는 달리 우리 2사단 장병들은 희망과 안전을 가지고 간다. 훗날 이라크人들은 그들이 누리는 새로운 자유와 희망이 여러분의 노력으로 실현됐다는 것을 기억하게 될 것이다』
이날 환송식에 참석했던 2사단 관계자들은 『당시 병사들의 분위기가 우울하고 쓸쓸했다』, 『「2여단이 태극기의 물결 속에 한국에 왔는데 떠날 때는 마땅히 보여야 할 한국 친구들이 나타나지 않았다」는 말이 나왔다』며 섭섭함을 표시했다.
2여단장 패튼 대령이 마지막 경례를 하자 캠블 장군, 존 우드 장군은 땅만 바라보며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채양도 공보관은 『자기를 따르던 부하들을 死地(사지)로 보내는 지휘관의 마음이 편치만은 않았을 것』이라고 했고, 존 우드 장군은 『환송식장에서 떠나가는 부하들을 보면서 가슴이 뭉클했다』고 얘기했다.
『대학에 아이를 떠나보내는 부모의 심정을 생각해 보세요. 아이가 선택한 상황에 대처할 수 있도록 만반의 준비는 시켰지만 이제 실제로 혼자서 그 일을 해내야 합니다. 그런 심정이었어요. 가슴이 뭉클하지 않을 수 없었어요.
나는 이라크에서 중요한 임무를 수행할 병사를 훈련시켰다는 것이 자랑스럽습니다. 그들은 다른 문화를 받아들일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새 임지에서도 잘 해낼 수 있을 겁니다. 그들은 한국에서 연합사의 일원으로 근무했기 때문에 연합작전의 중요성을 잘 이해하고 있습니다.
지금 2여단 병사들은 바그다드市 서쪽 美 해병사단에 배속돼 임무를 수행하고 있습니다. 나는 매일 보고를 받고 있습니다. 모두 한국과 한국의 푸른 숲을 그리워 한답니다. 그리고 가끔 거리에서 한국군을 만나는 것이 그렇게 반갑다고 하더군요. 사실 한국인과 미국인의 사이가 그렇게 먼 것은 아닙니다』
─美 지상군의 최일선 부대인 제2사단의 최우선 임무는 군사분계선(DMZ) 북방에 배치된 북한군의 위협에 대처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단장으로서 북한군에 대처하는 것보다 기지 주변에서 벌어지는 反美 시위에 더 신경을 써야 했던 것 아닙니까. 『시위대들의 일부 구호나 적대행위는 놀라운 것입니다. 저는 1978~1979년에 이곳에서 일했고, 저의 아버님도 이곳에서 근무하셨습니다. 그러나 나는 전체적인 구도를 이해하고 있었습니다. 나는 우호관계의 기초와 동맹관계의 힘을 알고 있습니다.
모든 것을 전체적인 측면에서 파악하는 우리 가족의 전통이 도움이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동맹관계를 계속 강화하는 것보다 중요한 것은 없습니다. 나의 임무는 그 관계를 강화하고 더 잘 이해하도록 하는 것이었습니다.
나는 우리 병사들에게 한국인들을 존경하도록 충고했습니다. 그들은 한국을 좋아하고 있고, 내가 사랑하는 만큼 그들도 이 나라를 사랑하기를 바랐습니다. 전체적으로 보면 발전을 위한 긍정적인 요소가 있었습니다.
우리는 지역사회와 다시 유대를 강화할 필요가 있었고, 그들의 이야기를 들을 필요가 있었습니다. 나는 장병들에게 너무 자기 말만 하지 말고 경청하라고 충고했습니다』
─서울 거리에서 미군이 폭행을 당하고, 미군들이 한국 주둔을 기피하게 될 정도로 상황이 악화됐을 때는 지휘관으로 괴로웠을 텐데.
『아닙니다. 제가 있는 동안 한국 근무를 연장하겠다고 지원한 병사가 3배나 늘었습니다. 한국 근무가 나쁜 것은 아닙니다. 훈련도 좋고 지역사회도 아주 훌륭합니다. 시설도 아주 좋아졌습니다. 그래서 병사들이 한국을 좋아하는 겁니다. 많은 병사들이 한국으로 오겠다고 지원하고 있습니다. 나는 마치 내가 두 개의 다른 장소에서 살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을 받습니다. 한국은 아주 풍요한 나라입니다. 하지만 어떤 사람들은 우리를 다른 색깔로 보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후임자에게 하고 싶은 충고가 있다면….
『우리는 이곳 지방 정부와 일종의 동반자 관계를 수립했습니다. 그 덕택으로 우리는 좀더 원활하게 의사소통을 할 수 있었고, 좀더 주민들을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문제를 그대로 내버려두면 안 됩니다. 즉시 해결해야 합니다. 그 관계를 계속 발전시켰으면 합니다. 우리에겐 많은 친구가 있습니다. 그들은 우리에게 아주 중요한 존재입니다』
─한국의 젊은 세대들은 미국적 문화와 생활양식을 좋아하면서도, 종종 격렬한 反美감정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그 젊은이들은 우리 병사들을 만나서 이해할 기회를 갖지 못한 아주 새로운 세대들입니다. 하지만 그들은 우리 병사와 같은 또래입니다. 우리 병사들 대부분이 18세에서 24세까지의 젊은이들입니다. 그들은 미래에 같은 열망을 가지고 있습니다. 나는 우리 병사와 한국의 젊은이들이 만나서 친구가 될 수 있는 기회를 마련하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한국의 언론에 대해 불만은 없습니까. 『민주주의 제도 아래서는 다양한 목소리가 있게 마련입니다. 우리 병사들은 그것을 이해하고 있습니다. 우리 軍人들의 임무는 자유를 수호하고 민주주의를 지키는 것입니다. 작년에 한국전에 참전했던 老兵(노병)들이 한국을 방문했었는데, 그들은 자유의 승리와 민주주의의 성장을 자기들 눈으로 확인했습니다. 우리 아버지와 마찬가지로 그들은 그것을 위해서 이곳에서 싸웠습니다』
─反美정서가 더 확산되지는 않을까요.
『그동안의 문제를 反美라는 측면에서만 해석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反美감정이나 反美주의가 세력을 얻고 있다는 주장이 있기는 하지만, 나는 아직 그런 것을 보지 못했습니다.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오랫동안 유지되어 온 동맹관계의 힘과 중요성입니다. 그러자면 의사소통이 계속되어야 합니다.
50년간 사이가 좋았다고 이야기만 해서는 안 됩니다. 좌절을 느낄 때가 있지만, 그것은 우리 관계가 성장하는 과정에서 생기는 자연스러운 현상이라고 보아야 합니다. 나는 이 과정에서 한 역할을 맡을 수 있었다는 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합니다』
─장군은 한국에 오기 전 독일, 보스니아에서 근무했습니다. 한국에서 일어났던 일과 유사한 경험을 한 적이 있습니까.
『여중생 사망사건에 비견할 만한 일은 없었습니다. 한국에서는 제가 설명할 수 없는 여러 가지 요소가 복합되어 그런 사건이 발생했다고 생각합니다』
존 우드 사단장은 『복잡한 정치·사회 현상에 비하면 나의 임무는 「병사들을 안전하게 훈련시키고, 유사시에 일어나 싸울 수 있도록 대비하는 비교적 쉬운 일」』이라고 했다.
주한미군의 핵심 전력인 美 2사단은 한국전쟁 때 북한군의 남침 주공로였던 문산과 의정부, 동두천 일대에 배치되어 있다. 2사단은 M1A1 重전차를 주축으로 하는 기갑부대인 제1여단, 공중강습 輕전투부대인 제2여단, 최신 AH-64D 아파치 롱보우 헬리콥터를 보유한 항공여단, M109A6 팔라딘 자주포를 장비한 포병여단 등으로 구성된 최첨단 전투부대다.
동두천 남쪽에 있던 제2여단은 이라크로 이동했다. 동두천에 잔류하고 있는 제1여단이 2사단의 핵심전력이지만, 주한미군 再배치계획에 따라 곧 한강 이남인 평택으로 옮겨가게 된다. 한국의 안보를 지탱해 온 미군의 「인계철선」 기능은 완전히 사라진다.
─美 2사단이 한강 이남으로 옮겨가면 주한미군이 북한군의 장거리포 射程(사정)거리를 벗어나게 되고, 미군이 좀더 자유로운 입장에서 북한 수뇌부를 정밀 공격할 수 있게 됐다는 견해가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對北 억지력이 강화된다는 주장입니다. 반면 미군의 對北 억지력이 크게 손상된다는 우려도 있습니다. 어느 쪽입니까. 존 우드 장군은 『추측은 하고 싶지 않다』면서 조심스럽게 답했다.
『한 가지 확실히 말씀드릴 수 있는 것은 우리가 동맹국에 대한 지원 방어능력을 약화시킬 수 있는 조처는 절대로 취하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앞으로의 전투에서 중요한 것은 「병력이 어디에 있느냐」가 아니라 「무엇을 할 수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우리들의 계획은 변화를 위한 자연스러운 과정입니다. 우리는 계속 변하는 다양한 임무를 수행할 수 있는 충분한 능력을 보유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지금 전환기에 있고, 그 과정에 있습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우리는 동맹관계를 약화시킬 조치는 취하지 않을 것이고, 억지력은 유지할 것입니다』
─북한 장거리포 기지에 대한 대응 포격, 북한 특수부대의 해상 침투저지 등 주한미군이 맡아 왔던 임무들이 한국군에게 인계될 경우, 戰力 공백이 발생하는 것은 아닐까요.
『나는 전술을 조정하고, 전투방식을 개발해서 그런 변화에 대처할 수 있었던 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합니다. 미군과 함께 첨단무기가 철수되지 않을지 걱정하는 사람이 있는데, 우리는 계속 모든 분야에서 위협을 물리칠 수 있습니다. 이건 확언할 수 있습니다』
채영도 공보관이 손목시계를 가리키며 약속했던 인터뷰 시간이 끝났음을 알려왔다. 존 우드 장군은 을지포커스렌즈 훈련을 위해 벙커로 돌아가야 한다.
─한국을 떠나면서 한국민들에게 하고싶은 이야기가 있습니까. 존 우드 사단장은 준비해 온 메모지를 꺼냈다.
『이곳에서 위대한 동맹군과 함께 근무할 수 있었던 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합니다. 그것은 큰 혜택이었습니다. 우리는 그들과 함께 훈련을 하면서 우리가 누구인지 알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전투방식을 개선할 수 있었습니다. 나는 특히 우리 사단에서 근무한 1500명의 카투사 병사들에게 감사를 드리고 싶습니다.
그들은 유능한 병사들이고 어려운 임무를 훌륭히 수행했습니다. 그동안 우리 부대를 거쳐 간 카투사 병사는 25만 명 가량 됩니다. 나는 그들을 「동문」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나는 우리 부대 주변 지역사회가 우리 병사들을 받아들인 데 대해서도 감사드리고 싶습니다.
우리가 시작한 韓美협력협의회(KAPC)는 매우 건설적인 발전을 이룩했습니다. 매일 만나고 함께 일했던 한국군 장병들에게도 감사드립니다. 우리는 강력한 팀으로서 유대를 발전시켰습니다. 그것은 매우 가치 있는 관계입니다. 이 모든 사람들과 작별해야 한다는 것은 슬픈 일입니다』
존 우드 장군은 테이블 위에 있는 색 바랜 흑백사진을 보라고 했다.
셔츠에 美 2사단 배지를 단 군인이 아기를 안고 있는 사진이었다. 셔츠를 입은 사람은 그의 아버지 윌리엄 우드이고, 품에 안겨 있는 어린이가 존 우드 장군이다.
『한국으로 떠나기 전 아버지가 나를 안고 찍은 사진입니다. 아버지는 1950년 7월 낙동강 전투에 투입된 美 2사단 작전장교로 참전했습니다. 내가 2사단장으로 부임한다고 알려드렸더니 아버지가 50여 년간 지갑에 간직하고 있었던 조그만 종이쪽지를 주셨습니다.
1950년 9월 북한군의 총공세로 美 2사단이 위급한 상황에 처했을 때 사단장 로렌스 B. 카이서 장군이 예하 9, 23, 38연대에 전달하라고 친필로 써준 死守(사수)명령이었습니다.
「모든 장병은 사단과 국가의 명예를 걸고 마지막 한 사람까지 현 위치를 지킬 것」
그것은 피의 서약이었습니다. 그날 밤 2사단 장병들은 자기 자리, 다시 말해서 한국의 땅을 지키면서 싸우고 죽었습니다. 나는 이 작전명령서를 볼 때마다 내가 병사들을 충분히 훈련시켰는지, 전투에 임할 태세가 되어있는지를 自問(자문)하게 됩니다.
중요한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 떠나는 아들에게 아버지가 줄 수 있는 그 이상 귀중한 충고는 없을 것입니다. 그동안 어려운 문제에 직면할 때마다 이 메모를 꺼내 봤습니다. 이 메모는 韓美 동맹관계를 위해 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바쳤다는 사실을 일깨워 주었습니다』
존 우드 장군의 부친은 1945년 美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하고 1950년 美 2사단 작전장교로서 낙동강 전선에서 싸웠다. 1951년 6월까지 한국전에서 복무한 뒤 미국으로 돌아갔고, 1963년 美 1기병사단 대대장으로 한국에서 두 번째로 복무했다. 그는 1973년 전역한 후 워싱턴 D.C. 근교인 알렉산드리아市에서 노년을 보내고 있다.
『공정대원이었던 아버지는 낙하산으로 강하를 너무 많이 하셨기 때문에 척추를 다쳐 거동이 불편하십니다. 그래도 가끔 같은 부대에서 근무했던 한국인 친구들 이야기를 많이 하십니다. 한국 근무는 우리 가족의 한 전통이 되었습니다. 아버님이 한국에서 근무했고, 처남도 한국에서 근무했습니다』
존 우드 사단장은 부인 마거릿 여사와의 사이에 리, 앤 마리 두 딸을 두고 있다.
존 우드 장군은 기자 일행에게 한복을 곱게 차려입은 부인 마거릿 여사와 촬영한 사진을 보여 주며 『한복이 잘 어울리지 않느냐』고 윙크를 해보였다. 우리는 『30세의 한국 신부 같다』고 맞장구를 쳤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