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늙은 배우」들의 반란을 준비 중인 吳知明 감독

『코미디는 리얼리티가 생명… 죽기 전에 내 영화 한 편 만들고 싶다』

  • : 이은영  chosun3030@hanmail.net
글자 크기 조정
  • 스크랩
  • 본문 음성 듣기
  • 글자 크기 조정
URL이 성공적으로 복사되었습니다.
吳 知 明
1939년 충북 청원 출생. 성균관大 경제학과 졸업. 대학교 2학년 때 국립극단에 입단. 연극 「박꼬지」, 「이순신」 등에 출연. 1966년, KBS 4기 탤런트로 특채. 반공 드라마 「제3지대」에서 연기 시작. 1968년 「방랑대군」, 1970년 「번개같은 사나이」 등 150여 편의 영화에 출연. 1990년대 중반 이후 시트콤 「오박사네 사람들」, 「순풍 산부인과」 등에 출연. 영화 「까불지마」 촬영 중.
『아, 여보세요』
 
  전화 수화기를 통해 들려오는 목소리는 TV 시트콤 「순풍 산부인과」에서 들었던 오박사의 목소리였다.
 
  『중견 배우들을 모아서 영화를 찍고 계시다는데, 한번 뵐 수 있을까요』
 
  조심스럽게 얘기를 꺼냈는데, 대답이 싱겁다.
 
  『그래, 그러지 뭐…. 그럼, 내 사무실로 와』
 
  배우 吳知明(오지명)은 그 말 한마디를 툭 던지고 전화를 끊었다.
 
  다음날, 영화 「까불지마」의 제작 사무실을 찾았다.
 
  서울 강남구 논현동의 빌라 한 채를 세 얻어서 사무실로 쓰고 있었다. 현관 문이 열려 있어서, 살짝 들여다봤다. 사무실 안은 뒤죽박죽 아수라장이다. 현관에서 실내화로 갈아 신고, 마루에 올라섰는데도 누구 하나 눈길을 주지 않았다.
 
  스태프들 모두 제 할 일에 바빴다. 거실 벽에는 출연진들의 사진이 큼직하게 붙어 있었다. 촬영 스케줄, 대본으로 보이는 서류들이 책상 위에 흩어져 있었다. 다행히 스태프 중 한 명이 다가와 낡은 응접세트와 중고 책상 하나가 달랑 놓인 방으로 안내했다.
 
  吳知明씨가 금방 뒤따라 들어왔다. 유행이 지난 반소매 셔츠에 구겨진 양복 바지차림이었다. 푸석푸석한 얼굴이 브라운관에서 봤던 것보다 훨씬 나이 들어 보였다. 그는 인터뷰 내내 자신을 『늙은이』라고 불렀다.
 
  배우 吳知明은 무뚝뚝했다. TV 시트콤에서 보던, 약간 어리숙하고 그렇지만 유머 감각이 있는 중년 남자가 아니었다. 애써 질문을 하나 던지면, 『그렇지 뭐』, 『그럴 거야』라는 답이 돌아왔다. 재미있는 인터뷰가 될 걸로 기대가 컸는데, 그와의 대화는 한참 동안 短問短答(단문단답)을 벗어나지 못했다.
 
  ―점심식사는 하셨어요.
 
  『아니』
 
  ―사실은 저도 점심을 걸렀어요.
 
  『밥 먹어야지 그럼』
 
  吳知明씨는 큰 소리로 『어이』 하고 고함을 쳤다. 직원 한 명이 방에 들어오자 오씨는 간단하게 지시를 내렸다.
 
  『이 양반이 밥 안 먹었대. 메뉴판 갔다 보여 줘. 난 알지? 그걸로 해 주고』
 
  ―「그게」 뭔가요.
 
  『국밥』
 
  ―늘 국밥을 드시나요.
 
  『먹는 게 그렇지 뭐. 별게 있나. 사는 것도 마찬가지고』
 
  ―밖에 나가서는 안 드세요.
 
  『덥고 귀찮아. 그냥 여기서 먹는 게 편해』
 
  스태프들은 『吳知明 감독은 사무실로 국밥을 매일 배달시켜 먹는다』고 했다. 이야기는 대강 이랬다.
 
  <吳知明은 외출해서 밥 먹다가 누가 알아보는 것도 싫고, 사인해 달라고 하면 어색한 듯 우물쭈물한다. 야외 촬영 때엔 나이든 배우들을 설득해서 스태프들 사이에 줄을 서서 배식을 받는다. 젊은 사람들이 민망해서 앞을 양보해도 한사코 마다한다. 촬영 전날은 반드시 일찍 귀가해 컨디션을 조절하고, 직원들보다 일찍 퇴근할 때는 신발을 손에 들고 살금살금 나간다>
 
 
 
 스캔들에 대한 변명
 
   吳감독은 초혼에 실패하고, 마흔이 넘어서 재혼했다.
 
  24년을 함께 살았던 첫 아내에 대해 그는 『아내는 평범한 주부였고, 나 같은 사람하고 결혼을 안 했어야 했다』며 『나랑 결혼한 걸 보면 운이 없는 사람이야』라며 겸연쩍어했다. 그는 자신의 과오를 해명하려고 하지 않았다.
 
  대화를 나누면서 시시각각 그의 표정이 변했다. 그 표정 속에 정답이 있는 듯했지만 찾기는 어려웠다.
 
  ―젊은 시절 스캔들이 많았다고 하더군요.
 
  『난 스캔들이 별로 없었어. 진심으로 좋아하는 건 스캔들이 아니지. 다른 남자배우들은 잘 안 들키더라고. 살짝살짝 짧게 한단 말이야. 그런데 나는 한번 빠지면 정신을 못 차리고 오래갔거든』
 
  ―함께 연기할 여자 파트너를 직접 고른다면서요.
 
  『파트너는 주로 내가 택해요. 드라마 하기 전에 PD가 내게 꼭 상의를 해 와. 가끔 원하던 배우하고 못 하게 될 때도 있잖아요. 다른 남자배우들은 싫은 표시 안 하고 여배우들한테 잘 해 주는데 나는 안 그래요. 성질이 못된 거지』
 
  ―원하던 여배우와 같이 호흡을 맞추지 못했던 이유가 있었나요.
 
  『내가 원했던 여배우들이 공교롭게 때마침 구설수에 올랐거나 스캔들이 생겨 버린 거예요. PD들이 한사코 반대하죠. 이 배우만 빼고 하라는데… 뭐 그 여자 빼면 아닌데, 뭘』
 
  ―텔레비전에서는 구설수에 오른 배우를 되도록 안 쓰고 싶겠죠.
 
  『그랬겠지. 이해는 할 수 있지만 못 마땅해요. 하고 싶은 배우하고 해야 죽이 맞고 잘 되는데 말이죠. 평판이 안 좋아도 드라마가 살려면 그 배우를 써야 하는데…. 연기는 캐릭터에 딱 맞는 사람을 써 줘야 하는데, 요즘 PD들은 그런 고집이 없어서 시청자 눈치를 되게 살피더라고요』
 
  ―시청률을 먹고사는 게 드라마라 그렇지 않을까요.
 
  『요즘 젊은 PD들은 「쇼부」가 빠른 걸 좋아하나 봐요. 한창 뜨는 애들 데려다 놓고 반짝 시청률에 급급해요. 꾸준하지도 못하고. 드라마 시청률 올리는 게 영화보다 더 어렵지만 한번 올려 놓으면 전국민을 텔레비전 앞에 모이게 만들 수 있는데… 정말 아쉬워요』
 
  ―최근 3개 방송사 드라마의 내용이 재벌 아들과 신데렐라로 대동소이합니다. 요즈음 드라마를 어떻게 평가합니까.
 
  『드라마는 국민들 정서하고 맞아떨어져요. 1970~1980년대에는 지금보다 경제가 더 나빴지만 마음의 여유가 있었어요. 가난하지만 적금통장도 있었고 꿈도 있던 시절이었으니까. 지금은 불안하고, 일이 안 되고, 골치 아프거든요. 드라마를 차분하게 볼 여유가 없는 거죠. 그래서 자극적인 드라마가 뜨나 봐요』
 
  ―자극적인 드라마를 보면서 시청자들은 마음이 황폐해질 수 있잖습니까.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의 문젠데… 드라마 때문에 애들이 어떻게 됐다고 하지만 그런 것만은 아니에요. 시청자들 마음이 얼마나 간사한데… 시청자들은 선택도 빠르고 포기도 빨라서 재미없으면 영영 안 봐 버려요. 요즘은 채널이 100개가 넘어서 재미없으면 3초도 못 참아요. 「볼 것이 없다」고 말하겠지만, 텔레비전이 시청자 기대에 맞추려고 노력했지, 시청자가 텔레비전을 따라온 게 아니란 이야기죠. 그 나라의 시청자 수준이 국민 수준이라고 봐요. 요즘은 자극적이고 찰나적인 재미를 원하는 것 같아요. 재미에만 너무 매달리는 거죠』
 
 
 
 아버지에 대한 愛憎
 
   ―어찌됐든 「吳知明과 共演(공연)한 여배우들이 대성했다」는 얘기가 들립니다.
 
  『그런가… 내 딸로 출연했던 황신혜씨, 송혜교씨가 큰 스타가 돼서 그런 말이 나온 걸 거요. 인물들이 좋아서 자기들이 뜬 거지, 누가 누굴 띄우겠어요. 그런데 첫 눈에 「싹수가 있다」, 「싹수가 없다」가 보여요』
 
  ―배우의 「싹수」를 결정하는 가장 중요한 요인은 뭔가요.
 
  『집안이 중요한 것 같아요. 근본이죠. 사람은 부모한테 영향을 많이 받거든요. 내가 젊을 때 결혼관이나 여자관이 희미했던 것이 아버지로부터 영향을 받은 거 같아요. 아버지의 흔적이 내 습관에 은연중 배어 나오거든요. 그게 인간 아닌가 싶어요』
 
  환갑을 넘긴 남자는 자신의 콤플렉스를 부끄럽지 않게 털어놓았다. 가난보다 절박했던 것은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이었다고 한다.
 
  『아버지는 쟁쟁한 중앙 일간지의 간부였어요. 그 시절 아버지들 대부분이 그랬겠지만, 우리 아버진 특히 더 심했어요. 집에 돈도 잘 안 부쳐 주고 오지도 않았어요. 아버지가 없어서 그랬는지 氣가 없었던 것 같아요. 어머니가 아버지에 대해 좋은 말만 하셨으니까, 크면서 원망은 안 했어. 공부엔 취미가 없었나 봐요. 경북고등학교에 못 간 게 恨이 돼서 싸움질만 했어요.
 
  아버지를 정식으로 만난 게 대구상고 2학년 겨울방학 때였을 거예요. 아버지가 불러서 서울에 올라왔더니 「정복자」라는 영화 한 편을 보여 주면서 영어로 내게 뭘 물어요. 같이 간 여동생은 대답을 했는데 나는 못 했어요. 그때 「공부를 좀 해야겠다」 싶더라고. 내려와서 싸움을 접고 공부를 시작했죠』
 
  그는 서울大에 응시해 두 번 떨어지고 성균관大 경제학과에 진학했다. 대학교 2학년 때 우연히 명동을 지나다가 국립극단 단원 광고를 발견했다. 제일 마음에 든 것은「月 2만원을 준다」는 사실이었다.
 
  ―극단에 시험을 치려면 연기가 뭔지 알아야 하는 것 아닌가요. 대학에서 연극을 했습니까.
 
  『그땐 그럴 수 있었어요. 연극배우를 뽑는데 영어·국어 시험을 쳤거든. 연극을 하려면 인문적 교양이 있어야 했어요. 그때는 대학에서 연극을 시작했고, 셰익스피어 희곡을 읽었으니까. 그땐 사실 배우가 뭔지 잘 몰랐어요. 국립극단에 가서 보니까 나만 시원찮은 대학이더라고(웃음). 여운계씨는 고려大 국문학과 출신이고, 오현경씨는 연세大를 나왔고, 이순재·이낙훈씨는 서울大를 나왔으니까. 우리 때 연극하던 친구들은 다 학벌이 좋았어요』
 
  吳知明의 인생을 바꿔 놓은 작품은 국립극단에서 막을 올린 이광래씨의 번안작품 「해발 3500m」다. 당시 崔佛岩(최불암)은 「제작극회」에서, 이순재는 「실험극장」에서 활약하고 있었다.
 
  ―연극한다고 집안에서 반대하지는 않았나요.
 
  『어머니는 배우하는 걸 아편보다 더 나쁜 거라고 생각했어요. 아버지가 알까 봐 쉬쉬하셨고. 동생들도 그랬어요. 연극한다고 대학공부 제대로 못 했지, 여자관계는 복잡하게 됐지, 그래도 연극만큼은 열심히 했어요. 한 50여 편 했어요. 손숙·김금지씨가 내 파트너였죠』
 
 
 
 反共드라마의 주인공으로 名聲
 
   ―방송사로 옮기면서 대중적인 스타가 됐죠.
 
  『TV가 생기고 나서 연극배우들이 방송에 특채됐습니다. 崔佛岩씨가 나와 함께 KBS 탤런트 4기로 같이 들어갔어요. 박근형, 이순재, 여운계… 지금까지 드라마에서 이름을 날리는 배우들이 다 연극배우 출신입니다. 연극에서 「맛」을 배워서 가서 연기가 힘들지 않았어요. 월급 2만원에 혹해서 극단에 들어갔는데 2만원은 못 받았지만, 배우는 됐어요. 그때 그 밑천으로 방송 스타가 된 거예요』
 
  吳知明씨나 崔佛岩씨 같은 중견 탤런트는 드라마 한 회당 400만원 안팎의 개런티를 받는다. 吳씨는 『배우는 수입이 불규칙해 생활이 화려해 보이지만 윤택하지는 않다』고 했다.
 
  『배우는 多作(다작)을 할 수 없잖아. 정기적으로 월급을 받는 게 아니라 쪼개 쓰다 보면 결과적으로는 월급쟁이보다 못한 경우가 많아』
 
  ―40년 연기생활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일은 뭔가요.
 
  『나만큼 반공드라마에 자주 출연한 연기자는 없을 거예요. 신성일이 멜로 드라마에 나올 때 난 반공드라마를 했거든요. 「제3지대」, 「113 수사본부」 등 수없이 많았죠. 崔佛岩이 「수사반장」하고 내가 「113 수사본부」에 형사로 출연했어요. 그 덕분에 이후락씨, 김형욱씨를 다 만나 봤어요. 반공드라마에 출연했던 배우들을 불러서 술자리를 갖는 일이 잦았어요. 대한민국의 안보를 지키는 데 나름대로 힘을 보탰다고 자부해요』
 
 
 
 林英雄, 『吳知明은 100명에 한 명 나올 배우』
 
  인터뷰 내내 吳知明은 『연기는 내게 맞지 않는다』, 『나는 끼가 없다』고 했다.
 
  『배우가 나하곤 너무 안 맞아요. 나만큼 끼가 없는 배우도 없을 거예요. 사내자식이 분 바르는 것도 창피하고… 한창 액션배우하고, 반공드라마할 때는 재미가 있었어요. 잘 나갈 때 벌어 놓고 겸손해야 했는데… 나이 들면서 세상을 잘못 살았구나를 느꼈죠. 젊었을 때 기분대로 살았는데 이젠 과거를 반성하게 됐어요.
 
  한편으론 고마운 게, 태어날 때부터 그릇이 정해져 있는 것 같아서 내가 이만큼이라도 됐다는 거죠. 근데 영화 한답시고 분수를 모르고 까불기도 했죠. 내가 영화 제목을 「까불지마」로 정한 이유예요. 까불다가 자기 그릇도 못 찾아 먹고 깬다는 것을 일깨워 주고 싶었어요』
 
  그는 기자에게 이렇게 반문했다.
 
  『지금 생각하면 배우란 건 아무나 되는 건데 내가 그때 왜 그랬을까?』
 
  말은 그렇게 했지만, 그는 배우로서의 자질은 충분히 인정받았던 모양이다.
 
  林英雄(임영웅·現 산울림 소극장 대표)씨는 연극배우 吳知明을 『100명에 한 명 나올까 하는 배우』라고 극찬했다.
 
  『1964년 동인극단에서 「전쟁이 끝났을 때」라는 작품을 객원 연출한 적이 있었어요. 당시 김금지·이치우 등이 출연했고, 주인공 吳知明은 나치 장교 역할을 했었어요. 작품해석과 인물 이해력에 천부적인 소질을 보였어요. 당시 배우들은 연극에서 기초를 다져 연기공부를 했기 때문에 나이가 들어도 시들지 않고 노련미가 깊죠』
 
  吳知明씨는 가장 기억에 남는 배우로 지금은 고인이 된 추송웅을 꼽았다.
 
  30여 년 전, 추송웅이 국립극단 단원으로 들어왔을 때 吳知明은 『야, 나보다 더 찌그러진 그 얼굴에 사투리까지? 너 연기하지 마라』 했다고 한다. 훗날 「빨간 피터」가 되어 천재적인 연기로 각광받은 추송웅이 1985년 방송국으로 찾아와서는 『선배님이랑 한 무대에 서고 싶습니다』고 부탁을 했다.
 
  吳知明은 그 자리에서 흔쾌히 수락했는데 그로부터 한 달 뒤 추송웅이 세상을 떠났다고 한다.
 
 
 
 崔佛岩과 40년 연기 동지
 
   탤런트 崔佛岩은 친구 吳知明을 이렇게 평했다.
 
  『보통 사람들은 무슨 일 생기면 고민을 하다가 시간을 다 보내는데 知明이는 그렇지 않아. 자기 고집을 버리지 않아요. 생각이 아주 구체적인 친구야. 생각이 많고 깊어. 그런데 말은 짧게 해. 우린 골치 아파서도 그렇게 못 해』
 
  서울 홍익大 근처의 한 카페.
 
  밤 10시쯤. 영화 「까불지마」의 감독 吳知明과 주연배우 崔佛岩과 임현식이 잡지 화보를 찍는다고 해서 찾아갔다. 1층 한쪽 구석에 중견 배우 세 명이 형형색색의 티셔츠를 입고 앉아 있었다.
 
  崔佛岩씨는 기분이 좋아 보였다. 이 카페를 운영하는 사람이 崔씨의 아들이라고 한다.
 
  세 사람은 영화 「까불지마」를 놓고 이야기를 나눴다. 「늙은 배우」의 애환이 군데 군데 배어 나왔다.
 
  崔佛岩씨는 친구 吳知明을 격려했다.
 
  『야, 너하고 40년 연기인생을 같이 걸어왔잖냐. 니가 영화하자는데 그 영화가 어떤 영화냐, 돈 얼마 줄 거냐고 묻겠냐. 야, 흥행 안 돼도 상관없다. 걱정하지 마』
 
  吳知明은 흥행에 자신 없어 하는 崔佛岩과 임현식을 설득했다.
 
  『15년을 감방에서 썩은 늙은 조폭들이 벌이는 이야기니까, 젊은 사람들은 재미가 있을 거고, 늙은이들은 옛날 생각이 날 거야. 늙은이들이 만든다고 손님이 안 든다고 생각하지 마. 재미만 있으면 손님은 들게 돼 있어』
 
  자정을 넘겼지만 세 사람이 양주 한 병을 비우지 못했다.
 
  吳감독은 『우리나라 드라마와 영화에서는 중견 배우가 설 자리가 없다』고 한탄했다.
 
  『배우의 힘이 드라마의 3분의 1만 차지해도, 내가 이렇게 환멸을 느끼진 않았을 거야. 배우가 드라마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너무 작아. 중진 배우들은 전부 「밥상用」 배우가 됐어』
 
  ―밥상用 배우가 무슨 얘긴가요.
 
  『트렌디 드라마에 어른들은 식사 장면에만 나오는 거죠. 우리는 밥만 먹고 사나? 인생이라는 게 얼마나 복잡하고 다양한데 말이에요. 작가들도 시청자 눈치를 너무 많이 봐요. 40년 동안 연기할 수 있었던 게 어떻게 보면 좋은 작가를 만나서 그런 건데….
 
  요즘은 史劇(사극)에서도 젊은애들이 너무 많이 나와요. 할리우드에서는 70代 배우들이 영화의 주인공으로 나오잖아요. 잭 니콜슨이 오스카상을 거머쥐었을 때 환갑이었고, 「어바웃 슈미트」에서 여배우와 베드신을 찍었을 때가 66세였어요. 한국 사회가 早老(조로)한다는데 드라마나 영화도 마찬가지예요』
 
 
 
 『니들이 연기를 알아?』
 
  ―요즘 젊은 배우들에게 특별히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따끔하게 이야기할 건 없고 조금 섭섭한 게 있다면… 애들이 기획사에 소속이 돼 있으니 어쩔 수 없겠지만, 잘 못 나가는 선배와 후배한테 좀 심하게 행동해요. 드라마를 살리려면 같이 떠야 하거든요. 경쟁하면서 크는 건데』
 
  吳知明은 최불암과 임현식에게 시트콤 「순풍 산부인과」에서 자신의 아이디어가 성공했던 이야기를 자랑했다.
 
  『너 기억나니? 내가 SBS에서 처음 시트콤할 때 젊은 PD들이 다 안 된다고 했잖아. 근데 방송사 사장이 한번 해 보라고 했었아. 그게 바로 「순풍 산부인과」야』
 
  『그래 맞아. 그 무렵 네가 나오는 웃기는 드라마는 모두 히트쳤지』(崔佛岩)
 
  吳知明은 시트콤에 나와서 진짜를 보여줬다. 부드럽고 다정다감한 「드라마형」 아버지가 아니라 어리버리하고 버벅대는 아버지의 모습을 그대로 보여 줬다.
 
  『요즘 나이든 사람들이 시트콤에 나와서 너무 오버하다가 망가지는 경우가 많은 것 아냐』(崔佛岩)
 
  『코미디는 리얼리티가 기본이야. 나는 웃기려고 과장한 게 아니라 그때그때 상황에 따라서 나를 그대로 보여 준 거야. 지금도 내 꼴이 되게 웃기지 않아? 말도 버벅거리고….
 
  일부러 웃기려고 생각하면 안 돼. 저를 그대로 옮겨놔야지. 난 오버를 제일 싫어해. 가끔 후배놈들이 나를 따라 하더라고. 내가 「너 왜 그러냐」고 물으면 「그래야 떠요」하는 거야. 말도 안 되는 소리…. 배우가 따라 하면 천해 보여』(吳知明)
 
  「순풍 산부인과」를 촬영할 당시, 吳知明은 대본에 충실하기보다 그때그때 나오는 「애드리브」를 많이 사용했다.
 
  『우리가 집에서 마누라한테 「어이, 이것 좀 해봐. 빠…빠빠…빨리」라고 하지, 근엄하게 분위기 잡아서 「여보, 나 물 한잔 주지」 이렇게 말하지 않잖아. 이때까지 보여 준 게 연기지, 뭐. 순풍에서처럼 좀 버벅대는 게 우리 아니야? 사람들이 드라마 때문에 젠틀하고 다정한 남자배우에 익숙해져 버린 거야』
 
  그는 연기란 『물 흐르듯 자연스러워야 한다』고 했다.
 
  『나이 들어서 목소리도 탁해지고, 뭘 잘 잊고, 깜박거리고, 이걸 그대로 보여 줬어. 내 생활이고 삶이니까. 사람들이 吳知明이 변신했다고 하대. 배우는 배역만 다른 걸 할 뿐이지 스스로 변신이 잘 안 돼. 자꾸 변신하려고 생각하지 말고 그대로 솔직하게 보여 주면 되는 거야』
 
  吳知明은 『40년 동안 연기를 했지만 이제야 리얼리티 맛을 알게 됐다』고 했다.
 
  죽기 전에 평생의 꿈이었던 영화를 한 편 만들기로 결심했고, 그 영화가 코미디 「까불지마」라고 한다. 2년 만에 시나리오를 완성하고 영화사를 찾아갔지만, 번번이 퇴짜였다.
 
  『만나는 사람마다 「늙은이가 주인공으로 나와서 관객이 들겠어요」라고 그래. 안 가본 데가 없어』
 
  ―1년 반 동안 거절당했는데 끈질기게 기다리셨네요.
 
  『악이 생겨서 관둘 수가 있나. 이유가 하나잖아. 열 받게… 늙은 배우가 나오니까 영화가 재미없을 거라는데… 영화는 「어떻게 만들었냐」에 따라 다르다」고 봐. 얼마 전에 이수인 감독의 「고독이 몸부림 칠 때」라는 영화가 있었어. 그게 늙은이가 나와서 실패를 했다는 거야. 내가 그랬지. 「만약에 내 영화에 손님이 들면 어떡할래?」라고』
 
 
 
 환갑의 액션배우
 
   서울 양재동 KMTV 지하 주차장. 영화「까불지마」의 촬영 현장이다. 주연 셋을 빼고는 모두 20代, 30代의 젊은 스태프들이다.
 
  무술감독과 代役(대역)배우, 스턴트맨들이 갖가지 동작을 취하며 몸을 풀고 있다. 무술감독과 吳知明 감독이 심각하게 얘기를 나눈다. 스태프 40여 명이 여기저기 흩어져 있다.
 
  吳知明, 崔佛岩, 盧宙鉉(노주현)… 나이에 전혀 어울리지 않는 옷차림이다. 모두 20代 옷차림이다. 吳감독은 흰색 티셔츠에 색깔이 바래고 찢어진 청바지를 입고 있다. 吳감독은 연기 지도를 하다가, 바닥에 뒹굴기도 했다.
 
  멜로 드라마에 주로 출연해 온 盧宙鉉은 영 어색한지 한숨을 쉰다. 崔佛岩은 자신이 있는지 고개만 끄덕인다. 평소 친구 사이인 吳知明과 崔佛岩은 호흡이 잘 맞는다. 崔佛岩은 『예전에는 촬영을 하루 종일 해도 괜찮았는데 말이야. 이젠 몸이 힘들어』라고 했다.
 
  吳감독은 카메라에서 3m 뒤쪽에 마련된 모니터 앞에 앉았다.
 
  조감독의 『레디 고』 소리와 함께 배우들은 일제히 연기에 들어갔다.
 
  액션연기에 익숙하지 않은 盧宙鉉 때문에 몇 차례나 「NG」가 났다. 吳감독은 원하는 그림이 나올 때까지 촬영을 계속했다. 하지만 무리하지는 않았다. 연기란 억지로 되는 것이 아니란 걸 그 누구보다 잘 알기 때문이다.
 
 
 
 자기 일 묵묵히 하면 一流
 
  吳감독이 『잠깐, 쉬었다 합시다』며 휴식 사인을 줬다.
 
  화면구도를 바꿔 본다. 원하는 커트까지 다섯 번의 NG가 났다. 崔佛岩은 약간 투박하지만 자연스럽게 액션 장면을 소화해 냈지만, 盧宙鉉은 힘들게 자신의 부분을 마쳤다. 盧宙鉉은 즐겁게 연기를 했다. 계속 싱글벙글이다.
 
  吳知明은 40년 동안 배우로 활동하면서 연출에 대한 관심이 남달랐다. 1998년 영화진흥공사가 실시한 시나리오 공모에서 「애국시민 노기찬」으로 대상을 수상했다. 당시 심사를 맡았던 영화진흥공사 관계자는 『영화의 시놉시스와 대본이 완벽했다』고 했다.
 
  吳감독이 배우로 등장하는 장면으로 바뀌었다. 吳知明은 갈색 재킷을 걸쳤다.
 
  그는 빠르게 뛰어나갔다. 예순다섯의 남자라고는 상상하기 어려운 몸짓이다. 노련하게 상대와 발차기를 하고 벽에 밀어붙였다. 그가 1960년대에 이름을 떨친 액션스타였다는 사실이 새삼 떠올랐다.
 
  ―60代들이 組暴 역할을 소화하는 건 무리 아닐까요.
 
  『조폭이 나오지만 사실은 조폭영화가 아닙니다. 세 늙은이가 감옥에서 나오는 데서 이야기가 시작되거든요. 옛날 조폭을 보여 주면서 은글슬쩍 세상살이를 이야기하고 싶었어요. 요즘 애들이 보면서 공감도 하고 뭔가 느낄 수도 있게 만들었죠. 코미디는 캐릭터가 얼마나 재미있느냐에 따라 승패가 갈려요. 극중에 崔佛岩은 로맨틱하고, 盧宙鉉이는 현실주의자예요. 돈밖에 모르는…. 나야 뭐, 멍청하고 우유부단하죠』
 
  영화 「까불지마」는 동료의 배신으로 15년간 감옥생활을 하게 된 중년 組暴들의 이야기다. 감옥에서 나와서 배신자에게 복수하려다가 생각지도 못하게 배신자의 딸을 경호하게 되는 코미디다.
 
  『영화를 내 마음대로 내 성에 차게 만들고 있어요. 일류란 게 별 게 있나요. 삼류도 드라마 떠버리면 일류가 되는 거고, 일류도 한순간에 삼류가 될 수 있어요. 평생 일류를 유지하는 건 神도 못 해요. 일류에 목을 맨다고 되는 것도 아니고, 자기 일을 묵묵히 하면 일류가 되는 거고 애국자가 되는 거죠』
 
  吳감독은 이 영화를 통해 『겸손하게 살고 오만을 떨지 말라』는 메시지를 전하고 싶다면서, 『연기의 맛을 아는 중진 배우들의 도전을 지켜봐 달라』고 했다.●
  • 스크랩
URL이 성공적으로 복사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