近代 올림픽 위기의 內幕

테러·藥物·프로化·부패… 108년 만에 發祥地로 돌아온 아테네 올림픽은 순수성을 지켜낼 것인가. 良識의 IOC위원장 로게의 첫 시험무대는 지금 테러 非常!

  • : 고두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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高 斗 炫 스포츠칼럼니스트
1935년 일본 오사카 출생. 한국해양대학 항해과 졸업. 서울신문 체육부 기자·同주간스포츠부장·체육부장. 한국체육대학 사회체육대학원 강사 역임. 한국신문협회상·아산체육기자상 수상. 저서 「스포츠의 영웅들」, 「한국을 이끄는 사람들-손기정」 등 다수.
BC 450년경 만들어진 古代 그리스의「원반 던지는 사람」조각상. 古代 올림픽은 전투기술과 체력을 겨루는 場이었지만, 올림픽 기간 중에는 전쟁도 중지했다.
8월13일부터 29일까지 그리스의 아테네에서는 제26회 올림픽이 열린다. 近代올림픽 탄생 108년 만에 發祥地로 되돌아가는 것이다.
 
  그동안 두 차례의 세계대전을 비롯해 수많은 難關을 돌파하면서 살아남은 올림픽은 겉보기에 엄청난 발전을 이룩했다. 그러나 현재 올림픽은 테러의 위협과 도핑(금지약물 복용)의 확산, 개최지 유치를 둘러싼 금전 스캔들 등의 부패, 그리고 프로선수들에게의 문호개방이 가져온 理念의 喪失로 골병이 들 대로 들어 있다.
 
  적지 않은 올림픽 관계자와 스포츠 저널리스트들은 『올림픽이 滅亡의 조짐을 나타내고 있다』고 우려한다.
 
  과연 올림픽의 聖火는 이번 世紀에서도 계속 밝게 타오를 수 있는 것일까.
 
  『아이, 추워! 물이 차가워서 헤엄치지 못하겠어. 나 기권할래』
 
  수영 경기가 치러진 4월의 제아灣에 뛰어든 미국 선수는 바닷물에 들어가자마자 입술이 새파래지면서 튀어나오고 말았다.
 
  1896년 4월6일부터 15일까지 아테네에서 열린 제1회 올림픽은 경기 시설, 대회 운영 등 모든 면에서 엉성하기만 했다.
 
  참가 12개국 245명 가운데 대부분은 그때 아테네나 유럽에 와 있던 여행자나 아테네에 살고 있던 사람들이다.
 
  올림픽은 제3회 대회(1904년 미국 센트루이스)까지 자유참가였음으로 아무나 마음만 먹으면 출전할 수 있었다. 아테네에 놀러왔던 영국인 여행자는 경기 전날 친구로부터 올림픽이 열린다는 이야기를 듣고 테니스 경기에 나가 2冠王이 됐다. 그러나 테니스 슈즈는 미처 준비하지 못했기 때문에 가죽창의 구두를 신고 경기를 치러야만 했다.
 
  첫 올림픽에서는 자금이 어려웠던 탓도 있어 우승자에게는 銀메달과 올리브冠, 2위에는 銅메달과 月桂冠이 주어졌으며 3위 표창은 없었다. 우승자만 표창한 古代올림픽에 견주면 그래도 후한 施賞이었다고 할 수 있겠다.
 
  그로부터 1세기를 넘긴 2004 아테네 올림픽은, 최첨단 장비를 갖춘 38개의 초현대식 시설에서 200개국 1만500명의 선수들과 6000명의 임원들이 참가한 가운데 28개 종목(301개 세부종목)에 걸쳐 힘과 기량을 겨룬다.
 
  地球上 최대의 종합 스포츠 이벤트를 취재하기 위해 세계 각국에서 2만1500명의 보도진들이 몰려들 예정이다. 올림픽을 앞두고 3년 전에 新국제공항이 만들어져 하루 600편의 항공기 離·發着이 가능해졌고, 지하철도 1개 노선이 3개 노선으로 늘어나는 등 아테네의 交通網도 충실해졌다.
 
 
 
 피로 물들었던 1972 뮌헨올림픽
 
  IOC(국제올림픽위원회)와 조직위원회의 가장 큰 걱정거리는 원만한 대회운영이 아니다.
 
  자크 로게 IOC위원장의 『올림픽 최대의 敵은 테러와 도핑이다』라는 말처럼 아테네 올림픽은 지금 무엇보다도 테러를 警戒하고 있다.
 
  테러에 의해 피로 물들었던 첫 올림픽은 1972년의 뮌헨 대회였다.
 
  9월5일 새벽 5시 팔레스타인 게릴라 「검은 9월」 소속 8명의 테러리스트들이 복면으로 얼굴을 가리고 선수촌의 이스라엘 선수단 숙소를 급습해 선수와 코치 2명을 총으로 쏘아 죽인 뒤 선수 등 9명을 인질로 잡고 농성했다.
 
  범인들은 이스라엘에 억류 중인 아랍인정치범의 석방을 요구했다.
 
  그 뒤 西獨경찰과 오랜 시간의 교섭 끝에 범인들은 탈출을 위해 인질들과 함께 뮌헨 近郊의 공군기지로 이동할 것을 허가받았다.
 
  경찰은 공항에서 인질을 구출할 계획이었다. 그러나 공항에서의 인질 구출 작전은 실패로 돌아가 인질 모두와 경관 1명 그리고 범인 몇 명이 사망하고 말았다.
 
  사건 다음날 추도식에서 브런디지 IOC위원장이 『우리들은 테러에 굴복하지 않는다. 경기는 계속해야 한다』고 말한 대로 대회는 하루만 중단되고 계속됐다. 이스라엘 선수단은 바로 선수촌에서 철수하고 귀국길에 올랐다.
 
  범행을 미리 내다본 사람이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다. 조직위원회가 대회 개막 몇 달을 앞두고 西獨의 범죄심리학자들을 불러 비밀회의를 가진 적이 있었다. 모든 테러의 가능성을 점치고 그 대책을 세우기 위해서였다.
 
  이 자리에서 뮌헨市警의 지벨 자문위원은 팔레스타인 게릴라의 선수촌 습격과 농성의 가능성을 예언했다. 그러나 『테러를 막기 위해서는 올림픽 개최를 중지할 수밖에 없다』는 그의 주장은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불행히도 예언은 들어맞고 말았다.
 
 
 
 警備비용만 1조4000억원
 
   팔레스타인 게릴라에 의한 이스라엘 선수단 숙소 습격사건이 있었던 1972년 뮌헨 올림픽의 警備비용은 200만 달러였다.
 
  그러나 테러리스트들이 올림픽을 노린다는 사실이 증명된 뒤부터 警備비용은 대회 때마다 늘어나 2000년 시드니 올림픽 때는 4억 달러(약 4800억원)에 이르렀고, 이번 아테네 대회에서는 10억 유로(약 1조4000억원)라는 엄청난 액수로 치솟았다. 경비인원은 4만5000명, 이 가운데 경찰관이 2만5000명, 군인이 7000명, 해안경비대원이 3000명, 소방관이 1500명, 민간안전요원이 3500명, 훈련받은 자원안전요원이 5000명이다.
 
  사상 최고의 올림픽 警備비용 10억 유로 가운데 2억5500만 유로는 新정보시스템(C41)의 구축에 쓰였다. 1400대의 카메라, 센서, 컴퓨터와 정보 機器를 연결하는 이 하이테크網은 통제사령부가 아테네 全域에서 무엇이 일어나고 있는지를 순식간에 파악하고 다음에 무엇을 해야 할 것인지를 분석 판단하는 두뇌 中樞 역할을 한다.
 
  2002년 솔트레이크 동계올림픽에서도 이 시스템 설치를 맡았던 미국 기업 SAIC가 그리스 정부와의 계약으로 「C41」을 설치했다. 만약 아테네 올림픽이 테러에게 직격당했을 경우에 대비해 1억7000만 달러(약 2040억원)의 보험계약을 맺은 것만 보아도 IOC가 테러에 얼마나 신경을 쓰고 있는지 알 만하다.
 
  올림픽이 테러에 의해 중지됐을 경우에도 IOC와 스포츠界를 4년 동안 이끌어 나가는 데 필요한 경비 2억 달러(약 2400억원)의 예비기금을 마련하기로 하고 이미 1억6700만 달러는 저축해 놓고 있다.
 
  지난 6월25일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는 그리스 정부로부터 요청이 있었던 아테네 올림픽의 對테러 警戒支援(경계지원)을 결정했다고 발표해 IOC와 조직위원회로 하여금 안도의 한숨을 내쉬게 만들었다. NATO가 올림픽의 경계지원에 나서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지난해 11월 초까지만 해도 그리스 정부와 조직위원회는 아테네 올림픽의 對테러 警備를 그다지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았던 것 같다. 그리스內의 좌익그룹 「혁명투쟁」 등 과격파들이 조직적인 大型테러를 감행할 충분한 능력을 갖추고 있지 않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전통적으로 그리스의 국내과격파는 국제테러와의 연계가 없었고, 갑자기 그런 연계가 이루어지리라고 생각되지도 않았다.
 
  그러나 지난해 11월15일과 20일 이웃나라 터키의 이스탄불에서 영국 관련 시설 등을 표적 삼아 연쇄 폭탄테러가 일어나자 그리스에는 강한 긴장감이 감돌았다. 그리스 신문에 따르면 이 사건 직후 영국경찰의 테러對策 전문가들이 그리스에 입국해 미국·영국·이스라엘 등 7개국으로 이루어진 올림픽 警備 자문그룹의 긴급회의가 열렸다는 것이다.
 
  反美 성향이 짙은데다 이라크 파병에도 뿌리 깊은 반대가 있었던 그리스에서는 美英을 과녁으로 삼는 과격파의 칼날이 그리스를 겨냥하지는 않을 것이라는 안이한 생각이 지배적이었다.
 
  하지만 이웃나라 터키에서 있은 테러사건을 계기로 무차별 테러에 대한 인식을 새로 지니게 된 것 같다. 그리스에서 최대 부수를 자랑하는 신문 「타네아」는 『그리스에서도 테러가 일어날 가능성이 높아지고 있다』는 그리스 첩보기관의 극비 분석내용을 보도했다.
 
 
 
 『심각한 테러 일어나면 올림픽은 끝장』
 
  1972년 뮌헨 올림픽 수영 7관왕인 미국의 마크 스피츠는 팔레스타인 게릴라의 이스라엘 선수단 숙소 습격사건이 일어나자 바로 미국으로 돌아가 버렸다. 자신의 경기 스케줄이 모두 끝난 탓도 있지만 유태계 미국인이었던 스피츠는 자신이 테러의 다음 표적이 될까 두려웠다는 이야기다.
 
  마크 스피츠가 얼마 전 『테러위협이 심각해지면 미국은 아테네 올림픽에 나가지 않을 수도 있다』고 말해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즉각 스피츠의 발언은 미국 올림픽위원회의 공식 입장이 아니라는 발표가 나오기는 했으나, 미국이 다른 어느 대회보다도 이번 아테네 올림픽에서의 안전에 신경을 쓰고 있는 것만은 사실이다.
 
  샤킬 오닐 등 NBA의 농구스타들은 올림픽 출전을 포기했고, 참가 예정인 선수들도 다른 대회 때와는 달리 안전을 위해 가족의 동행을 피하고 있다. 미국 정부가 대회를 전후해서 연방 수사요원 100명을 아테네에 보낼 것이라는 이야기도 있다.
 
  그리스 정부는 경기장이 자리 잡은 5개 도시에 미사일 방어망을 구축해 미사일 공격에도 대비하고 있다. 지난 3월14일 밤 그리스 경찰은 아테네 올림픽 主경기장 근처의 미국계 은행 앞에 설치한 소형폭탄을 제거했다. 5월5일에도 아테네의 경찰서에서 폭탄테러가 일어났다.
 
  두 사건 모두 국내 극좌파의 소행으로 밝혀졌으나 이라크·사우디 등에서 무자비한 테러를 감행하고 있는 이슬람 과격파들이 아테네 올림픽만은 조용히 넘어가 준다는 아무런 보장이 없다.
 
  그리스 경찰이 여러 테러집단의 움직임에 날카로운 시선을 보내고 있는 것은 당연하다.
 
  미국 메릴랜드 대학의 테러對策 전문가인 그린버거 교수는 『앞으로도 올림픽의 警備비용은 늘어만 갈 것이다. 그렇게 되면 거액의 警備비용이 큰 부담으로 작용해 올림픽 유치에 나서는 도시의 수효가 줄어들 것』이라고 우려한다.
 
  그린버거 교수가 우려하고 있는 사태는 이미 일어나고 있다. 2014년의 동계올림픽을 유치하려는 취리히는 막대한 警備비용 탓에 스위스 정부의 지지를 얻어 내는 데 애를 먹고 있다.
 
  막대한 警備비용을 들이고도 실제로 심각한 테러가 일어난다면 올림픽에는 치명적인 상처를 입히게 될 것이다.
 
  생명까지 걸고 올림픽에 출전하려는 선수는 드물 것이고, 스폰서는 열리지 못하거나 테러로 중단될지도 모르는 올림픽에 돈을 대려고 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테러의 표적이 될까 봐 두려움에 떨고 있는 근대 올림픽과는 달리 古代 올림픽에서는 停戰이 철저히 지켜졌다.
 
  기원전 776년부터 서기 393년까지 1200년 가까이 이어진 고대 올림픽은 한마디로 戰鬪기술과 체력을 겨루는 마당이었다.
 
  혼자서 모는 馬車(戰車라고도 불림)레이스는 인기가 가장 높은 종목이었고, 무거운 甲胄(갑주)를 걸친 채 방패를 지니고 뛰는 경주도 기원전 6세기에 시작됐다.
 
  레슬링은 접근전에서 빼놓을 수 없는 기술이었고, 스파르타에서 태어났다는 복싱, 그리고 손가락으로 눈찌르기와 물어뜯기 이외는 모든 공격이 허용됐던 판크라티온(Pankration)에 이르러서는 때론 사망자가 나올 만치 거의 목숨을 건 거친 경기였다. 만능의 鐵人을 가려내는 5種경기는 창 던지기, 원반 던지기, 멀리뛰기, 단거리 달리기와 레슬링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停戰 철저히 지켜진 古代 올림픽
 
  고대 올림픽이 各 도시국가들의 깊은 관심을 끌었던 까닭은 종교적 행사였기 때문만은 아니고 戰鬪力을 비교하는 무대였기 때문이다.
 
  올림픽에서 우승자의 배출은 그 도시국가의 전투력이 막강함을 자랑하는 좋은 기회였다.
 
  전투력의 경쟁터였던 고대 올림픽에서 대회를 끼고 3개월 동안 停戰이 철저히 지켜졌다는 것은 신기한 노릇이다. 올림픽停戰의 주된 목적은 아테네나 스파르타 등 도시국가는 물론이고, 기원전 5세기에 이르러서는 프랑스와 이집트까지 넓혀졌던 식민지들로부터 선수와 관객들이 대회 개최지인 올림피아까지 안전하게 여행할 수 있도록 보장하기 위해서였다. 1200년 가까운 오랜 세월에서 停戰을 깨뜨린 것은 올림픽의 전통적인 주최권을 놓고 올림피아 근방에서 벌어졌던 두세 차례의 작은 전투뿐이었다.
 
  고대 올림픽의 본을 따서 근대 올림픽에서도 IOC가 여러 차례 UN의 올림픽 停戰결의 채택을 얻어 냈으나 실현된 것은 1994년 릴레함메르 동계올림픽 기간 중 舊유고 분쟁의 당사자들 사이의, 그것도 단 하루 동안의 停戰뿐이었다. 그렇다면 어째서 고대 올림픽에서는 그토록 철저히 停戰이 지켜진 것일까?
 
  停戰을 위반했을 경우 엄청난 벌금을 물어야 했던 것도 이유겠지만, 그보다는 「으뜸의 神」인 제우스에게 바치는 올림피아祭典을 망칠 경우 神의 노여움과 징벌이 두려웠기 때문이다.
 
  고대 올림픽의 停戰은 같은 神을 받들고 함께 올림픽의 권위를 존중했던 그리스 문화권 안에서였기 때문에 가능했다는 풀이다.
 
 
 
 세계를 경악시킨 벤 존슨의 失格
 
   테러가 「외부로부터의 위협」이라면 도핑은 「내부로부터의 붕괴」라 할 수 있다.
 
  1960년 로마 올림픽의 사이클 경기 도중 덴마크의 옌센이라는 선수가 사망했다. 검사 결과 피로감을 줄이고 견디는 힘을 키우기 위해 투여되는 안페타민과 니코틴酸이 검출됐다. 이것이 올림픽에서 약물복용으로 선수가 사망한 첫 사례다. 이 사건이 일어나고 나서야 IOC는 도핑의 심각성을 깨닫기 시작했다.
 
  스포츠에서 도핑이 규제되어야 하는 데는 두 가지 큰 이유가 있다.
 
  하나는 약물의 힘을 빌려 경기력을 향상시킨다는 것은 스포츠의 근본적 가치인 스포츠맨십에 어긋난다는 것이고, 또 하나는 약물의 남용은 선수들의 건강을 해칠 뿐 아니라 자칫 잘못하면 목숨까지 빼앗기 때문이다.
 
  IOC의 금지약물은 정신흥분제, 交感신경흥분제, 中樞신경흥분제, 마약진통제 등 종류가 여러 가지다.
 
  1960년대부터 1980년대까지 근육증강제인 아나볼릭 스테로이드의 사용자가 도핑의 主流를 이루고 있었다. 알약인 이 합성호르몬은 發育不全으로 사춘기가 되었는데도 남성다움이 나타나지 않는 청소년이나 나이 들어 衰弱에 시달리고 있는 노인들을 돕기 위해 처방되는 약이다.
 
  그러나 이 약을 스포츠 선수에게 대량으로 투여해서 트레이닝을 시키면 근육을 보강하고 체중을 불리는 효과가 있다. 그래서 육상의 단거리 선수, 투척 선수나 역도 선수들 가운데는 이 약의 유혹에 넘어간 사람들이 적지 않았다.
 
  서울 올림픽이 열리고 있었던 1988년 9월26일 아침 사마란치 IOC위원장은 네비오로 국제육상경기연맹 회장으로부터 긴급 전화를 받고 안색이 변했다. 이틀 전 남자100m 결승에서 9초79의 驚異的인 세계신기록을 세우면서 금메달을 차지한 캐나다의 벤 존슨이 도핑 테스트에 걸렸다는 충격적인 내용이었다.
 
  『폭탄이 터진 느낌이었다. 하필이면 올림픽의 스타선수인 벤 존슨이 걸렸단 말인가! 우리들의 이미지를 망가뜨리는 최악의 사태였다』고 사마란치는 그때를 돌이킨다.
 
  『아니 그럴 리가 없을 텐데…』
 
  같은 날 아침 선수촌에서 이 사실을 알게 된 벤 존슨의 코치 찰리 프란시스는 도무지 존슨의 도핑 陽性반응이 믿기지 않았다.
 
  벤 존슨이 검사 6週 전에 사용을 중지했던 근육증강제인 스타노조롤이 검출됐기 때문이다. 6週 전에만 사용을 중지하면 종전의 검사방법으로는 검출해 낼 수 없었던 약물이다. 프란시스 코치는 한국인 의사들이 참여했던 도핑검사기관의 능력을 과소평가했다가 큰 낭패를 보았다는 뒷이야기다.
 
  벤 존슨의 도핑 陽性반응을 가장 먼저 파악한 것은 한국의 보도기관들이었다. 한국의 보도기관들은 도핑검사기관의 한국인 관계자로부터 이 사실을 제보받았을 가능성이 크다.
 
  최초로 이 빅 뉴스를 온 세계에 알린 AFP통신의 맥카라 記者는 『한국의 보도기관들이 존슨의 陽性반응을 알아냈다는 소식을 듣고 IOC의 메로드 醫學문제위원장에게 전화를 걸어 사실 여부를 확인했더니 그의 대답은 「사실이다」라는 것이었다』고 당시를 말한다.
 
  프란시스 코치는 뒷날 그가 지은 책 「스피드 트랩(Speed Trap)」에 『약물은 100m 달리기에서 1m 가량 앞당겨 주는 효과가 있다. 약물을 사용해서 다른 頂上級 선수들과 같은 조건에서 겨루느냐, 아니면 약물을 거부하고 우승을 체념하느냐의 선택이 있을 뿐이다』라고 썼다.
 
  프란시스의 말대로 단거리나 멀리뛰기 그리고 투척 등 순발력이 필요한 종목의 頂上級 선수들 가운데 많은 사람들이 약물을 쓰고 있었을 것이라는 게 육상 관계자들의 지배적인 견해다.
 
  벤 존슨은 금메달을 박탈당하고 세계 신기록도 抹消(말소)당했으며, 그 뒤 두 번 다시 약물복용 때와 같은 뛰어난 성적을 보여 주지는 못했다.
 
 
 
 舊동독 비밀경찰의 機密문서
 
   조직적으로 도핑에 관여한 대표적인 나라는 舊동독이다.
 
  東西를 가로막고 있던 베를린의 장벽과 함께 동독이 무너진 지 얼마 안 되는 1990년 12월 舊동독의 軍醫官학교에서 비밀경찰이 미처 廢棄하지 못한 機密문서가 발견됐다. 그 문서에는 1960년대부터 30년 가까이 계속되어 온 舊동독의 擧國的인 도핑 실태가 담겨 있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독일은 東西로 나뉘었고, 동독은 경제력을 바탕 삼은 국력에서나 국제사회에서의 位相에서나 서독에 크게 뒤졌었다. 동독은 공산주의의 宗主國인 소련과 마찬가지로 국위를 선양하고 공산주의 체제의 우월성을 증명하기 위한 수단으로 스포츠를 택했다.
 
  가장 손쉬운 방법 가운데 하나가 약물에 의한 선수들의 체력 강화였다. 동독이 온 나라의 힘을 기울여 실시한 도핑의 성과는 놀라운 것이었다. 1976년 몬트리올 올림픽 여자 競泳 13개 종목 가운데 11개종목의 금메달을 동독이 싹쓸이했다.
 
  여자 競泳의 미국 대표선수인 셜리 바바쇼프는 『금메달을 차지하기 위해 동독 여자선수들과 같은 몸을 갖고 싶지는 않다』고 빈정댔다.
 
  아닌 게 아니라 동독 여자선수들의 딱 벌어진 어깨, 근육질의 몸은 웬만한 남자선수 뺨치는 정도였다.
 
  1976년 몬트리올 올림픽부터 스테로이드 검사가 도입되고, 1984년 로스앤젤레스 올림픽부터 테스토스테론 검사가 도입되는 등 IOC의 잇단 反도핑조치에 대해 동독의 도핑연구소들은 그때마다 교묘한 도핑 흔적 지우기의 手法을 개발해 냈다.
 
  1976년 이후 다른 공산국가 선수들은 여러 명이 도핑 테스트에 걸렸으나 동독은 고작 2명만이 적발됐을 뿐이다.
 
  도핑 박멸을 위해 1989년부터는 경기가 열리지 않고 있을 때라도 불시에 도핑검사가 실시되기 시작했다. 일이 이렇게 되자 늘 사용할 수 있는 약물의 量이 제한되면서 동독의 경기력은 시들기 시작했고, 체제 붕괴와 함께 동독 스포츠의 「검은 전설」도 끝이 났다.
 
 
 
 20명의 사이클 선수 죽인 에포(EPO)
 
  舊동독은 특히 도핑의 효과가 컸던 여자 육상·수영 선수들을 대상으로 열세 살짜리 소녀에게도 스테로이드 알약을 마구 먹이고 테스토스테론을 주사했다.
 
  그 결과 여자선수의 몸에는 털이 많이 났고, 근육은 남자처럼 울퉁불퉁해졌으며, 목소리는 굵어졌다. 內臟질환, 피부염에 시달린 것도 힘들었지만 子宮의 退化, 胎兒의 奇形化는 여성에게 치명적인 부작용이었다.
 
  부작용은 정신에도 미쳤다. 분노에 사로잡혀 공격적인 성격으로 변했으며, 性慾은 비정상적으로 강해졌다. 1985년 월드컵 육상경기대회 여자 400m 릴레이에서 세계기록을 세운 이네스 게이펠도 그 희생자 가운데 한 사람이다. 後遺症은 시간이 흐를수록 심각해졌다.
 
  게이펠에게는 심장병, 腎臟질환, 肝기능장애 등이 나타났다.
 
  『신체도 신체였지만 가장 타격을 입은 것은 정신이었다 공격적인 활동이 끝난 뒤에는 암흑의 세계로 추락하는 우울증에 빠졌다. 마구 먹어대는 過食症이 시작됐고 무력감에 사로잡혔다』고 게이펠은 자신의 어두운 시절을 되돌아 보았다.
 
  『몇 차례 자살까지도 생각했다. 그러나 나의 어딘가에 살아야겠다는 의지가 남아 있었다. 나는 달리는 능력을 나 자신을 해방시키는 데 쓰기로 했다』
 
  베를린의 장벽이 무너지기 직전인 1989년 그때 스물아홉 살이었던 게이펠은 서독으로 탈출했다.
 
  舊동독이 무너진 뒤 비밀경찰의 기밀문서를 증거 삼아 도핑재판이 열렸다. 몇천 명이나 되는 비밀경찰 간부, 과학자, 코치 등 도핑에 관련됐다고 여겨지는 사람들이 재판정에 불려 나왔지만 그 가운데 100명도 안 되는 사람들만이 유죄선고를 받았다. 그것도 모두가 罰金刑(벌금형) 등을 선고받았을 뿐 禁錮刑(금고형)은 단 한 사람도 없었다.
 
  도핑의 下手人 가운데 적지않은 사람들이 舊동독으로부터 미국·영국·프랑스·호주·중국·그리스 등 세계 각국으로 흩어져 나갔다. 아마도 그들 가운데 일부는 그곳에서 승리至上主義者들에게 舊동독의 검은 遺産인 도핑의 노하우를 퍼뜨리고 있는지도 모른다.
 
  2002년 시드니 올림픽을 앞두고 IOC와 조직위원회는 에포(EPO·엘리스로포에틴)의 검사방법 개발에 온 힘을 기울였다. 에포는 혈액 중의 赤血球를 증가시켜 산소 섭취 능력을 높여 주기 때문에 육상·스키·사이클 등의 장거리 선수가 사용할 경우 持久力이 향상된다.
 
  1998년 7월 프랑스와 벨기에의 국경에서 세계 최대의 사이클 레이스인 투르 드 프랑스에 참가한 프랑스 페스티나 팀의 자동차에서 대량의 에포가 세관에 적발되어 큰 충격을 불러일으켰다.
 
  지난 10년 동안 네덜란드·벨기에 등의 젊은 사이클 선수들이 20명이나 사망했으며 그들은 에포의 지나친 사용으로 피가 끈적끈적해져 血栓(혈전: 혈관 안에서 피가 엉기어 굳은 덩어리)이 생겨 죽은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그동안 검출방법이 없어 IOC와 시드니 올림픽 조직위원회를 조바심치게 만들었던 에포의 검사방법은 올림픽 개막 직전에야 호주가 개발한 혈액검사와 프랑스가 개발한 소변검사를 하나로 묶어 완성됐다.
 
  『에포검사가 실시된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중국은 재빨리 에포 陽性반응자 7명을 포함해 모두 27명을 대표선수단에서 제외했으며, 그 가운데는 세계적으로 이름난 여자 中長距離 집단인 「馬軍團」도 끼어 있었다.
 
  그러나 시드니 올림픽에서는 에포와 함께 악명을 떨치고 있는 금지약물인 인간성장호르몬(hGH)의 검사방법은 개발하지 못했다.
 
 
 
 遺傳子 조작까지 등장할지도
 
  1998년 세계수영선수권대회에 참가하기 위해 시드니 공항에 내린 중국팀의 한 선수가 팀 전원이 사용할 수 있는 分量의 인간성장호르몬을 지니고 있다가 공항세관에 적발됐다. 근육 증강 효과가 있는 인간성장호르몬은 금지약물이었지만, 검사방법이 없었기 때문에 실제로 소지하고 있는 경우를 적발하는 것 이외에는 단속할 방법이 없었다.
 
  腦下垂體(뇌하수체)가 분비하는 蛋白(단백)호르몬인 인간성장호르몬은 의료목적에만 사용되어야 하지만, 현재 세계에서는 의료목적에 사용되는 2배 이상의 量이 생산되고 있다고 한다. 그렇다면 생산되는 반 이상의 量은 어디에 쓰이고 있는 것일까?
 
  20년 가까이 검사방법이 없었던 인간성장호르몬도 아테네 올림픽에서는 검출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소식이다. 인간성장호르몬의 검사방법은 이미 과학적으로 완성됐으나 『어떤 인종에게도, 어떤 경기종목에서도 이 검사방법이 유효하다』는 것을 검사자료로 완전히 뒷받침해 法的 확실성을 증명하는 과제만이 남아 있다고 한다. 아테네 올림픽에서도 도핑 대책은 또 하나의 승리를 거두게 되는 셈이다.
 
  하지만 아테네 올림픽을 앞두고 인간성장호르몬을 비롯해 몇 가지 도핑에 대한 새로운 검사방법이 확립되더라도 미리 공표되지는 않을 것이란다. 자크 로게 IOC위원장은 『새로운 검사방법이 완성되더라도 공표하지는 않겠다. 종전에는 빠져나갈 수 있었던 도핑이 처음으로 적발됐을 때 비로소 세계는 새로운 검사의 존재를 알게 될 것』이라고 말한다.
 
  IOC는 마치 노름판에서처럼 도핑을 시도하는 선수와 코치들에게 心理戰을 펼치기 시작한 것으로 보인다. 아마도 2008년 北京 올림픽까지는 종전의 도핑검사로는 도저히 밝혀낼 수 없는 새로운 도핑인 遺傳子(Gene) 도핑이 퍼지게 될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
 
  미국 캘리포니아주립대학 샌디에이고 캠퍼스의 分子遺傳學者인 프리드맨 박사는 遺傳子 도핑의 위협이 다가오고 있음을 두려워하는 사람 가운데 하나다.
 
  원래 유전자療法은 先天性 질환 등의 치료를 위해 개발됐다.
 
  그러나 특정 호르몬을 만들어 내는 유전자의 DNA(염색체의 주요 구성요소로 유전정보를 지님)를 선수의 팔다리 근육에 注入하면 그곳에서 호르몬을 꾸준히 생산할 수 있게 된다. 예컨대 인간성장호르몬의 DNA를 직접 근육에 한 차례만 注入해도 2주일 동안 근육量을 25%나 늘릴 수 있다. 가능성만으로 이야기한다면 에포의 생산유전자를 注入한다면 적혈구量을 최대 50%나 늘릴 수 있다.
 
  다만 에포 투여가 지나치면 혈액이 너무 진해져서 죽을 수도 있기 때문에 그 생산량을 어떻게 조절하느냐가 어려운 문제라 빠른 시일 안에 등장할 것 같지는 않다는 전망이다. 언젠가는 유전자 操作으로 괴물 같은 선수가 경기장에 출현할 날이 올지도 모른다. 그렇게 된다면 스포츠는 개개인 단련의 성과를 겨루는 마당이 아니라 과학의 성과를 겨루는 마당으로 변할 수밖에 없겠다.
 
 
 
 도핑대책에 소극적이었던 사마란치
 
   『1980년대에 사마란치 위원장에게 「도핑검사 방법을 개발하기 위한 恒久的인 체제를 확립해야 하며 그러기 위해서는 비용이 필요하다」고 말한 적이 있다. 그랬더니 사마란치의 대답은 「그거 좋지. 하지만 내 돈은 쓰지 말게」라는 것이었다』
 
  뒷날 IOC와 세계反도핑기구(WADA)의 醫學문제위원장을 맡은 룬크비스트는 이렇게 돌이켰다.
 
  애당초 사마란치는 스포츠를 깨끗이 지키기 위한 도핑대책에는 별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1998년 7월 투르 드 프랑스의 충격적인 도핑사건이 터졌을 때 사마란치 위원장은 스페인 신문과의 인터뷰에서 『선수의 건강만 해치지 않는다면 그것은 도핑이 아니다』라고 말했다.
 
  건강에 해롭지만 않다면 페어 플레이 정신에서 벗어난 부정한 방법으로 경기력을 향상시켜도 아무런 상관없다는 투의 사마란치 발언은 큰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IOC의 首長이란 사람이 스포츠의 기본 가치인 페어 플레이 정신은 털끝만치도 마음에 두고 있지 않다는 비난에 사마란치와 IOC는 당황했다. 사마란치의 후임을 놓고 金雲龍 위원과는 라이벌 관계에 있었던 딕 파운드 위원(캐나다의 변호사)은 때를 놓치지 않았다.
 
  『우리들은 8월에 긴급 집행위원회를 열고 이 문제를 어떻게 수습할 것인지를 검토했다. 그 자리에서 내가 독립된 反도핑기구의 창설을 제안했다』고 파운드는 밝혔다.
 
  투르 드 프랑스의 도핑사건은 선수나 코치들이 경찰에 연행됐다는 사실 때문에 IOC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
 
  『스포츠가 형사범죄로서 재판받게 된다는 것은 중대한 문제였다. 투르 드 프랑스에서 일어난 일은 올림픽에서도 일어날 수 있기 때문이다』라는 것이 파운드의 설명이다.
 
  1999년 2월 IOC의 제창으로 열린 세계反도핑회의에서는 스포츠界와 각국 정부가 반반씩 참여하고 자금도 분담하는 세계反도핑기구(WADA) 창설에 합의했다. 2000년부터 활동을 시작한 WADA의 회장에는 파운드가 취임했다.
 
 
 
 뇌물 먹고 쫓겨난 IOC위원들
 
   2000년 시드니 올림픽을 앞두고 사마란치 IOC위원장은 AP통신과 인터뷰를 갖고 자신이 위원장으로 지낸 20년을 회고했다.
 
  『나는 1992년 바르셀로나 올림픽을 끝으로 물러났어야 했다. 그러나 위원장으로서 올림픽 창설 100주년인 1996년 애틀랜타 올림픽의 개막을 선언하고 싶은 욕심에 사로잡혀 은퇴의 때를 놓치고 말았다』고 사마란치는 인터뷰에서 후회의 심경을 털어놓았다.
 
  사마란치는 역대 IOC위원장이 경험하지 않았던 큰 수모를 겪는다. 1998년 12월11일 솔트레이크의 TV 방송국에는 『솔트레이크 동계올림픽의 조직위원회가 올림픽 유치를 위해 IOC위원들을 買收했다』는 제보가 들어왔다. 처음에 조직위원회는 이 의혹을 否認하려 했고, IOC의 首腦部도 소극적인 반응을 보였다.
 
  그러나 조사가 진행됨에 따라 2002년의 솔트레이크 동계올림픽의 유치를 둘러싸고 IOC위원들을 대상으로 金品授受, 호화접대, 가족이나 친척들에의 지나친 편의제공 등 꼼짝할 수 없는 증거들이 속속 드러났다. 1999년 IOC위원 6명이 추방되고 4명이 사임하는 등 이 사건으로 10명의 위원들이 IOC를 떠났다.
 
  솔트레이크뿐만 아니라 1998년에 동계올림픽을 개최한 일본의 나가노(長野)조직위원회도 대회 유치를 위해 IOC위원들에게 지나친 호화접대를 했다는 사실이 뒤늦게 밝혀져 IOC의 명예와 권위는 땅에 떨어졌다.
 
  이미 1980년대 후반부터는 대리인(Agent)이라는 이름으로 중개인이 나서 개최지 결정 때 IOC위원들의 표를 모아 주는 代價(대가)로 50만~100만 달러를 유치위원회로부터 챙긴다는 이야기가 널리 퍼져 있었다. 이 스캔들로 IOC의 이미지가 더럽혀질 것을 두려워한 사마란치 위원장은 여러 가지 개혁을 서둘렀으나 그렇다고 IOC에게 뚜렷이 찍힌 오점이 짧은 시일 안에 말끔히 씻겨질 것이라고 믿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솔트레이크 동계올림픽의 뇌물 스캔들로 추방되거나 사임한 10명의 IOC위원들 대부분이 사마란치의 心腹들이었다.
 
  IOC는 매우 특이한 조직이다.
 
  AP통신의 유럽스포츠 부장을 지내고, 특히 올림픽과 IOC의 얼개 및 역사에 대해 잘 알고 있던 제프리 밀러는 그의 著書 「올림픽의 뒷면(Behind the Olympic Rings)」에 이렇게 썼다.
 
  『IOC는 세계에서도 보기 드문 특이한 조직이다. IOC 총회를 언제나 취재하는 소수의 단골 언론인 그룹을 제외하면 IOC위원이란 각각 자기 나라를 대표하고 있는 것도 아니고, 각각의 NOC(국가올림픽위원회) 대표도 아니라는 사실을 알고 있는 記者는 매우 적다.
 
  올림픽에 관해 최고의 권위를 지니고 있는 것이 IOC다. 누가 임명해서 그러한 권한을 주었는지 물어보아도 만족스러운 대답을 기대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IOC는 그 어느 누구에게도 허가받지 않고 조직을 창설하고 권력을 장악했다. IOC는 세계 어느 곳으로부터도 지시를 받지 않고, 오히려 올림픽조직위원회나 각각의 지역에서 올림픽 운동을 보급 및 통할하는 NOC 위에 군림하고 있다』
 
 
 
 바티칸 方式으로 구성된 IOC
 
   각국의 대표로 구성되는 조직을 UN 방식이라고 부른다면, IOC는 바티칸 방식으로 구성되어 있다. 근대 올림픽의 創始者인 쿠베르탱은 각국의 대표로 IOC를 구성하는 것은 위험하다고 여기고 있었다. 그렇게 되면 IOC는 정치적 흥정의 마당이 되고 말기 때문이다. 그래서 IOC위원은 IOC가 임명하기로 했다. 마치 로마교황청이 각국의 고위 聖職者를 임명해 교황청을 대표시키는 것과 비슷하다 해서 이를 「바티칸 방식」이라 부른다. IOC위원도 자기 나라 대표가 아니고 IOC가 그 나라에 파견하고 있는 올림픽 운동의 使節인 셈이다.
 
  쿠베르탱은 신념과 良識을 지닌 人士로서 올림픽 정신을 지키려 했다. 얼핏 보기에는 非민주적인 것 같은 IOC의 구성은 정치의 간섭을 배제하면서 올림픽과 IOC가 100년 이상이나 長壽하는 데 크게 이바지했다. 하지만 상업주의에 치우친 사마란치가 사령탑에 앉으면서 자기와 코드가 맞는 사람들을 조직 안에 받아들이고 重用하면서 IOC의 體質은 쿠베르탱의 뜻과는 달리 변질해 버린 느낌이다.
 
  세계의 젊은이들에게 스포츠를 통해 우정을 다짐하게 만들고 내일의 세계 평화에 이바지하겠다는 理念 하나로 올림픽을 출범시킨 IOC는 초기에 무척이나 가난했다.
 
  쿠베르탱은 정치꾼·장사꾼들을 배제하고 명예를 중하게 여기는 爵位(작위)를 가진 귀족 출신을 많이 위원으로 받아들였다. 위원들은 주머닛돈을 털어 각자 年間 50 스위스 프랑의 회비를 내면서 IOC 운영을 지탱했고, 총회 개최경비를 절약하기 위해 중요 안건을 우편투표로 결의하기도 했다.
 
  초기의 IOC 사무국은 스위스 로잔에 있던 쿠베르탱의 자택 안에 있었다.
 
  晩年의 쿠베르탱은 경제적으로 매우 어려운 삶을 살아야 했다. 교육자이기도 했던 쿠베르탱은 고국 프랑스에서 교육개혁론을 주장했다가 받아들여지지 않자 외로이 스위스로 옮겨 살았다. 그의 재산은 올림픽 운동과 논문의 自費(자비) 출판 등으로 탕진됐기 때문에 부인과 독신녀인 딸과 함께 살면서 72세의 나이에도 일자리를 구하러 다녀야 했다.
 
  필자가 스포츠記者 생활을 시작했던 1960년대만 해도 오토 마이어 사무총장이 스위스 로잔에서 경영하는 시계점의 한 귀퉁이를 칸막이로 막아 IOC 사무국으로 썼고, 직원이라야 파트타임으로 일하는 타이피스트 단 한 사람뿐이었다.
 
  그러나 1960년 로마올림픽 때부터 불어나기 시작한 TV방영권료(2004 아테네올림픽=14억2700만 달러)와 스폰서 등이 내놓는 막대한 돈으로 IOC는 부자가 됐다. 로잔의 넓은 IOC 본부에는 190명이 넘는 직원들이 있다.
 
  1999년 발표에 따르면 IOC는 은행예금 등 2억3700만 달러의 자산을 지니고 있다.
 
  사마란치 위원장은 당시 로잔의 고급호텔 「로잔 팰리스」의 스위트룸에 머물면서 숙박비 등 체재비로 年間 약 20만 달러(약 2억4000만원)를 썼다. 집행위원들은 회의에 참석할 때마다 항공료·숙박비 말고도 1000달러(약 120만원)의 수당을 받고 있다.
 
  아마추어리즘을 완고하게 지키려 했던 브런디지(미국)가 1972년 뮌헨 올림픽을 끝으로 20년 동안의 IOC 사령탑에서 내려오자 그 뒤를 넘겨받은 킬러닌(아일랜드)은 1974년 올림픽 헌장에서 아마추어라는 語句를 빼버렸다. 그러나 여전히 프로선수들의 올림픽 참가는 막았고 올림픽에 출전하는 선수들의 광고 출연도 금지시키고 있었다.
 
  올림픽 안팎에서 아마추어리즘이 급속히 붕괴되어 가고 있는 가운데 재임 8년의 킬러닌이 올림픽에 대한 새로운 비전을 제시하지 못한 채 1980년에 위원장 자리를 물러나자 사마란치(스페인)가 그 뒤를 이었다.
 
  1976년 몬트리올 올림픽이 큰 적자를 기록해 올림픽의 存立 자체가 위태롭게 됐었으나, 1984년 로스앤젤레스 올림픽은 피터 위버로드라는 스포츠 마케팅에 뛰어난 센스를 지닌 비즈니스맨이 조직위원장을 맡아 2억1500만 달러의 흑자를 냄으로써 올림픽은 경제적 위기에서 벗어난다.
 
 
 
 올림픽의 프로化는 滅亡의 序曲(?)
 
  위버로드 조직위원장에게 한 수 배운 사마란치는 올림픽을 세계 최고의 구경거리 스포츠로 만들기 위해 프로선수에게 문호를 개방했다. 1988년 서울올림픽부터 테니스를 비롯한 일부 종목에 프로선수들이 참가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올림픽의 프로化에 비판의 목소리는 꽤 높다.
 
  반 댈런, 미첼 그리고 베네트가 함께 지은 「체육의 세계사(A World History of Physical Education)」에는 과거 스포츠의 適用이 겪은 실패를 오늘날 교훈으로 삼아야 한다면서 다음과 같이 썼다.
 
  『그 하나는 스포츠의 프로化의 위험성이다 그리스가 그 경험을 겪었다. 理想的이었던 올림픽 경기가 시들어 간 것은 이기기 위해서만 노력하게 됐을 때다.
 
  그 결과 스포츠는 餘技(여기: 직업이나 專門 이외에 즐기는 技藝)가 아닌 직업化 돼 버렸다.
 
  스포츠의 구경거리化에도 위험은 있다. 지난날 剛健했던 시민이 그저 어슬렁거리거나 구경하는 것만으로 만족하게 됐을 때는 국력이 衰退하는 조짐이다. 로마가 이 경험을 겪었다. 승리에 도취해 전쟁의 결과로 얻어진 노예나 상금이나 개선행진, 게다가 자유분방함이나 쇼에 만족하고 로마시민이 安易한 생활양식을 추구했을 때 몰락은 다가오고 있었다』
 
 
 
 프로선수에겐 금메달이 장난감?
 
   세계 청소년들의 교육의 마당이라는 올림픽이 프로선수에게도 문호를 개방함으로써 그 理念을 잃게 된다면 다른 대회와의 차별이 없어져 결국 滅亡하게 될 것이라는 우려도 있다.
 
  축구의 경우 올림픽이 프로선수 참가를 허용했어도 FIFA(국제축구연맹)는 『올림픽에는 24세 이하만 출전할 수 있으며 24세 이상은 3명만이 나갈 수 있다』고 못박아 출전자격에 제한이 없는 월드컵과 올림픽 축구의 수준차를 지키고 있다.
 
  IOC가 연령제한을 풀어 달라고 아무리 애걸해도 막대한 수입이 걸려 있는 월드컵의 수준과 권위를 유지하기 위해 FIFA는 고개를 가로젓고 있다.
 
  농구만 하더라도 미국 프로농구 NBA의 스타 플레이어들이 드림팀을 만들어 출전해도 그들에게 NBA 결승 때 같은 진지하고 박력 있는 플레이를 올림픽에서 기대하기는 어렵다. 그들에게 올림픽 금메달이란 그저 심심풀이에 지나지 않는다.
 
  야구도 마찬가지다. 미국 프로야구는 올림픽에 별 관심을 보이지 않고 있다. 당연히 그들의 최고 목표는 월드 시리즈 우승이지 올림픽 금메달은 아니다.
 
  일본 프로야구도 2000년 시드니 올림픽의 참가선수 차출에 패시픽 리그는 적극적이었지만 센트럴 리그는 소극적이었다. 말할 것도 없이 그들의 최고 목표는 일본 시리즈 우승이다.
 
  위성중계로 실시간에 온 세계의 모든 스포츠 빅 이벤트를 어디에서나 TV로 지켜볼 수 있게 된 지금 월드컵 축구, NBA농구, 미국 메이저리그 야구 등 수준 높은 인기 종목 경기와 맞설 수 있는 경기 내용을 올림픽은 갖고 있지 못하다. 그나마 올림픽이 지구 가족의 지지를 100년 이상이나 받아 온 것은 그 숭고한 理念 때문이다.
 
  『그 이념을 잃어버리면 古代 올림픽이 걸었던 쇠퇴와 멸망의 길을 근대 올림픽도 똑같이 걸을 수밖에 없다』는 주장에 反論을 펴기란 쉽지 않을 것 같다.
 
 
 
 IOC의 선택--로게의 良識
 
  2001년 7월16일 모스크바 IOC 총회는 사마란치의 후임으로 자크 로게를 위원장으로 선임했다. 1991년 IOC에 발을 들여놓은 지 이례적으로 단 10년 만에 로게는 조직의 최정상에 올랐다.
 
  벨기에의 정형외과 專門醫인 로게 위원장은 1968년 멕시코, 1972년 뮌헨, 1976년 몬트리올 등 잇달아 세 차례의 올림픽에 벨기에의 요트 대표선수로 출전했으며, 럭비 국가대표 선수도 지낸 진정한 스포츠맨 출신이다. 로게와 친분이 있는 KOC(대한올림픽위원회) 부위원장 張周鎬 박사는 이렇게 말한다.
 
  『로게 위원장은 현재 올림픽이 안고 있는 倫理的 문제점을 잘 파악하고 있는 사람이다. 그동안 파벌을 가지고 있지 않았던 로게 위원장은 이념을 같이하는 위원들을 규합해 혁신그룹을 결성해 나가고 있다. 그는 깨끗한 올림픽 운동을 펼쳐 나갈 것이다』
 
  쿠베르탱은 라디오 방송을 통해 이렇게 호소한 적이 있다.
 
  『올림픽은 高潔한 理想과 순수한 道德을 배우는 마당이 될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당신들이 육체가 달성할 수 있는 것과 같은 수준까지 도의심과 公平無私한 사상을 높일 수 있어야만 가능한 이야기다. 미래는 당신들에게 달려 있다』
 
  여러 가지 심상치 않은 滅亡의 조짐이 올림픽을 위협하고 있는 가운데 로게 위원장이 이번 세기에서도 올림픽을 살아남게 하기 위해 과연 어떤 새로운 가치관을 정립해서 제시할 것인지 올림픽을 사랑하는 지구 가족은 진지한 눈초리로 주목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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