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중연구] 독립·反共·護國 인재의 寶庫 - 황해도 사람들 이야기

石田耕牛의 우직함으로 抗日-建國-護國-近代化의 주역이 되다

  • : 배진영  ironheel@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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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承晩·金九부터 李會昌·蔡命新·奉斗玩까지

조선시대에 소외받았던 황해도 사람들은 近代로 접어들면서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기독교 등 西歐 文物을 받아들여 李承晩·金九 등 선각자들을 배출했다.
物産이 풍부해 日帝시대에도 左翼세력이 발을 붙이지 못한 반면, 교육열이 높았다.
이러한 배경에서 자라난 황해도 사람들은 光復 후에는 反共투쟁과 近代化의 선봉이 됐다
지난 3월1일 서울 시청 앞 광장에서 열린 3·1절 反核反金正日국권수호국민대회에서는 「黃」字 표시가 달린 노란 모자를 쓴 참석자들이 많이 보였다. 황해도민들이었다. 재향군인회, 각종 참전군인단체, 실향민 단체 등에서도 조직적으로 참가했지만, 노란 모자 덕분인지 이들은 눈에 확 들어왔다.
 
  이날뿐 아니라 지난해 3·1절 국민대회 이후 각종 애국 집회가 있을 때마다 「黃」字 표식을 단 노란 모자를 쓴 황해도민들은 조직적으로 집회에 참석했었다. 지난 4월10일 서울 광화문 동화면세점 앞에서 열린 救國기도회에서도 황해도민들을 여럿 만날 수 있었다. 載寧 출신 權永華(권영화)씨는 『고향을 등진 외로운 처지에 친목회를 겸해 애국집회가 있을 때마다 참석한다』고 말했다.
 
  安應模(안응모·前 내무부 장관) 황해도중앙도민회장은 『황해도민들은 日帝下 抗日 독립운동의 兩大 巨木인 李承晩(이승만) 박사와 金九 선생, 抗日투쟁의 序章을 장식한 安重根(안중근) 義士 등을 배출했으며, 光復 후에는 자유민주주의와 수령 독재의 싸움에서 고집스럽게 자유민주주의의 편에 서서 투쟁해 왔다』고 자부했다.
 
   황해도 사람들은 近代 이후 抗日독립운동-建國-護國-近代化 과정에서 중심적 역할을 해 왔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安應模 황해도중앙도민회장, 李敬南(이경남) 한국발전연구원장, 朴祥俊(박상준) 海州東中 총동창회장 등 황해도 출신 인사들은 한결같이 「石田耕牛(석전경우)」로 알려진 황해도 사람들의 기질을 먼저 꼽았다. 李敬南 원장의 말이다.
 
  『황해도 사람들은 성실하게 돌밭을 가는 황소처럼 우직하고 끈질긴 데가 있다. 그러면서도 자기가 지켜야 할 최후의 線이 도전받았을 경우에는 체념하거나 자폭하지 않고 성난 황소가 뿔을 휘두르며 돌진하듯이 용기 있게 나서는 것이 황해도 사람들이다. 그런 기질이 日帝 시대에는 독립운동으로, 光復 후에는 反共투쟁으로 나타났다』
 
  朴祥俊 회장도 『자기를 내세우지 않되, 자기가 옳다고 믿는 바를 위해서는 눈앞의 이해관계를 따지지 않고 뛰어드는 황해도人의 기질이 反共유격군의 바탕이 됐다』고 말했다.
 
 
 
 기독교가 가장 먼저 전파된 곳
 
  둘째, 조선시대에 소외되었던 것이 近代 이후에는 오히려 긍정적으로 작용했다는 분석도 있다. 李敬南 원장은 이렇게 말한다.
 
  『조선시대 때 황해도에서는 名賢이나 勢道家(세도가)가 배출되지 못했으므로 南道 지방처럼 班常(반상)의 구별이 엄격하지 않았다. 이 때문에 儒敎的 관점에서 보면 생활양식이 세련되지 못하고, 예의범절이나 언어생활도 粗野(조야)한 편이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그들의 思考와 행동을 강력히 구속하고 지배할 因習(인습)과 전통이 희박했기 때문에 황해도 사람들은 자유분방한 思考를 가질 수 있었다. 近代化의 여명기에 황해도가 많은 선구자들을 배출할 수 있었던 이유도 여기에 있다』
 
  셋째, 황해도 지역이 기독교를 비롯한 西歐 문물이 가장 먼저 들어온 곳이라는 점도 近代 이후 황해도에서 인물이 많이 나온 원인 중의 하나다.
 
  우리나라에 가장 먼저 들어온 기독교(개신교·改新敎) 선교사는 1832년 영국 선박 로드 암허스트號를 타고 황해도 長淵郡(장연군) 長山곶에 온 칼 구츨라프였다. 그는 한 달간 머물면서 주민들에게 한문으로 된 聖書와 교리서를 나누어 주며 선교활동을 벌였다.
 
  1866년 미국 상선 제너럴 셔먼號를 타고 왔던 영국인 로버트 J. 토머스 목사와 이듬해 제너럴 셔먼號의 행방을 찾기 위해 파견된 미국 군함 와추세트號를 타고 온 H.코버트 목사도 長淵郡 일대에서 짧은 시간이나마 선교활동을 했다. 이들의 영향을 받아 長淵郡 九味浦 인근 송천 마을에서 기독교에 관심을 가지는 사람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1884년 徐相崙(서상륜)이 송천 마을에 소래교회를 세웠다. 우리나라 땅에 한국인의 손으로 세워진 최초의 교회였다. 이에 앞서 그는 중국 瀋陽(심양)에서 미국 선교사 존 로스와 함께 聖經을 우리말로 번역하기도 했다.
 
  소래교회에서 시작된 기독교 신앙은 信川(신천)·松禾(송화)·殷栗(은율)·安岳(안악)·載寧(재령)·鳳山(봉산) 등 인근 지역으로 확산됐다. 이후 황해도 서부 지역은 平壤(평양)·宣川(선천)과 함께 전국에서 기독교 勢(세)가 가장 활발한 지역 가운데 하나가 됐다. 1885년 來韓한 미국 선교사 H.G.언더우드도 3개월간에 걸쳐 海州·長淵·信川·載寧·沙里院(사리원) 일대에서 선교활동을 벌였다.
 
  황해도는 天主敎와도 인연이 깊다. 최초의 한국인 神父인 金大建 神父가 1845년 체포된 곳이 바로 長淵郡 해안이기 때문이다.
 
  6·25 당시 강화도·교동도에서 유격 활동을 벌였던 朴祥俊 회장은 『反共유격대가 활동했던 압록강 하구에서 강화도에 이르는 서해안 지역은, 우리나라에 西歐 문물이 가장 먼저 들어온 지역이기도 하다. 기독교 등 西歐 문물을 통해 자유와 민주주의를 먼저 접했던 이 지역에서 光復 後 反共투쟁이 활발하게 전개된 것은 우연이 아니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失鄕民의 23%가 황해도민
 
 
 
 
  넷째, 황해도 지역이 物産이 풍부하고 풍요한 지역이었던 것을 이유로 꼽기도 한다. 경제력은 곧 교육열로 이어졌다.
 
  李敬南 원장에 의하면 8·15 光復 당시 황해도의 경지 면적은 5380km2로 전체 면적의 32.1%였다고 한다. 전체 면적에 대한 경작 면적의 비율은 전국 제1위였으며, 戶當 경지 면적도 2.14ha로 전국 1위의 廣作農家 지대였다고 한다. 논이 경작 면적의 71%에 달했다. 조와 밀 생산은 전국 1위, 콩과 고구마 생산은 전국 2위였다.
 
  朴祥俊 회장은 『日帝 末 식량난이 극심할 때에도 土海線(개성 인근 토성-황해 해주 간 철도) 열차 안에서는 인절미를 팔았다』고 회고하면서 『이렇게 物産이 풍부하다 보니 경제력을 바탕으로 교육에 대한 열정도 높았다』고 말했다.
 
  이러한 환경 때문인지 日帝 시대에 공산주의가 황해도 지역에 뿌리내리지 못했고, 光復 후 황해도 출신으로 북한 정권下에서 두각을 나타낸 사람도 드물다.
 
  李敬南 원장은 『日帝 시대에 황해도에는 공산주의자들이 거의 없었다. 황해도 출신으로 공산당(북한 노동당) 요직에 오른 사람은 光復 직후 활동했던 金德泳(김덕영·중앙위원), 1970년대 남북대화 때 내려왔던 柳章植(유장식) 정도였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안기부 차장 등을 역임한 安應模 도민회장도 『현재 북한 요직에 있는 사람들 가운데 황해도 출신은 그다지 눈에 띄지 않는다』고 말했다.
 
  황해도민들이 대거 越南하게 된 계기는 1946년부터 시작된 토지개혁이었다. 전국 제1위의 廣作農家 지대였던 만큼 토지개혁의 파장은 컸다. 백남득 명예 信川군수는 『토지개혁 때 강제 移住명령을 받고 가족이 越南했다』고 말했다.
 
  당시 越南한 황해도민들의 정확한 수는 알 수 없다. 1970년 以北 5道民들이 假호적을 취득할 당시 신고한 황해도민들은 126만5000여 명이었다. 당시 집계된 실향민의 총수는 546만3000여 명이었다. 황해도민들이 전체 실향민의 23%를 점하는 셈이다(1988~2003년까지 통일부 이산가족정보통합센터에 상봉신청을 한 실향민들 가운데 황해도민들이 차지하는 비율은 24.3%였다). 현재 失鄕民 2, 3세를 포함한 황해도민 수는 191만6000여 명으로 추정된다.
 
 
 
 5·16의 實兵 지휘관들
 
 
 
 
  황해도의 反共 기독교 전통이 역사적으로 實證된 사건이 5·16 군사혁명이다. 한국 현대사의 전화점이 됐던 5·16 혁명의 한 가운데에 황해도 출신들이 포진해 있기 때문이다. 이들은 대부분 거사 당시 實戰 부대를 동원하는 행동대 역할을 맡았다.
 
  5·16 당시 혁명군의 主力이었던 김포해병여단을 이끌고 한강다리를 건넜던 金潤根(김윤근) 준장은 殷栗 출신이다. 독실한 기독교인인 그는 부대출동에 앞서 軍牧을 불러 출동 장병들의 武運을 기원하는 기도를 올리도록 했다. 나중에 이 이야기가 외부에 알려져 5·16 직후 미국인들이 군사혁명에 대해 품고 있던 의구심을 해소하는 데 일조했다고 한다.
 
  그는 수도방위사령관, 국가재건최고회의 외교국방위원장 등을 역임한 후 해병 中將으로 예편했다. 수산개발공사 사장, 에스콰이아사회과학재단 이사장 등을 지냈다. 현재 황해도 출신 예비역 장성들의 모임인 黃星會 회장을 맡고 있다.
 
  해병대와 함께 혁명군의 주력이었던 제1공수전투단장 朴致玉(박치옥) 대령은 黃州, 공수대대장 金悌民(김제민) 중령은 信川 출신이다. 이들은 거사 성공 후 국가재건최고회의 최고위원을 지냈지만, 張都暎(장도영) 일파 反혁명 사건에 연루돼 실각했다.
 
  5·16 당시 5사단장이던 蔡命新(채명신) 준장은 5월18일 예하 2개 연대 병력을 서울에 進駐시켜 미군이나 야전군에 의한 혁명진압 가능성을 좌절시켰다. 그는 平南 中和 출신 독립운동가였던 아버지 채은국 志士가 日警을 피해 황해도 谷山에 피신해 있을 때 태어났다. 6·25 때는 백골병단을 이끌고 유격전을 펼쳤다. 5·16 후 감찰위원장을 지냈고, 民政 이양 후에는 軍으로 복귀해 육군작전참모부장, 駐越 한국군사령관, 제2군 사령관을 역임한 후 육군 中將으로 예편했다. 駐스웨덴·그리스·브라질 대사를 지냈다. 현재 대한해외참전전우회 명예회장, 베트남전참전전우회 회장을 맡고 있다. 지난 3월에는 6·25참전전우기념사업회 회장에 선임됐다. 얼마 전에는 이라크로 파병되는 자이툰 부대를 방문, 강연을 통해 越南戰 당시의 경험을 후배 장병들에게 전수했다.
 
  2軍 사령부 예하 공병대대장으로 대구를 점령했던 張東雲(장동운) 중령은 載寧, 任光燮(임광섭) 중령은 黃州 출신이다. 張東雲씨는 육군 준장으로 예편한 후, 주택공사 총재, 원호처장 등을 지냈다. 任光燮씨는 준장으로 예편한 후, 대한해사협회 회장, 도로공사 부사장, 5·16민족상 사무총장 등을 지냈다.
 
  1軍 포병참모로 李翰林(이한림) 1軍사령관 체포에 일조했던 鄭鳳旭(정봉욱) 대령은 安岳 출신이다. 6·25 때 인민군 中佐로 국군에 귀순한 그는 朴正熙 대령이 3군단 포병단장으로 근무할 때 그 밑에서 부단장을 지냈다. 좌익 前歷을 가진 두 사람은 同病相憐의 情을 나누는 사이가 됐고, 이것이 인연이 되어 鄭대령은 5·16에 가담했다. 그는 7사단장, 육군제3사관학교 初代 교장을 거쳐 육군 少將으로 예편했다.
 
 
 
 5·16의 브레인들
 
  吳致成(오치성), 金炯旭(김형욱), 柳承原(유승원), 康誠元(강성원) 등은 육군본부에 근무하면서 5·16에 가담한 황해도 출신 인사들이다.
 
  信川 출신인 吳致成 前 내무부 장관은 육군대령으로 5·16에 참여, 국가재건최고회의 내무위원장·운영위원장을 지낸 후 육군 준장으로 예편했다. 공화당 사무총장, 무임소 장관, 국회의원(6~8代, 10代), 국회 내무위원장을 지냈다. 1971년 내무부 장관으로 임명됐으나, 당시 공화당 主流이던 金成坤(김성곤)·吉在號(길재호) 등과 갈등을 빚다가 10·2 抗命 파동으로 물러났다.
 
  육군 중령으로 5·16에 참여했던 金炯旭 前 중앙정보부장도 信川 출신이다. 5·16 후 국가재건최고위원을 지냈고, 3共 때에는 중앙정보부장으로 있으면서 3選 改憲을 저돌적으로 추진했다. 그 과정에서 공화당 의원들의 원성을 산 그는 3選 改憲 직후 중앙정보부장 자리에서 물러났다. 제8대 국회 때 공화당 전국구 의원으로 잠시 登院했던 그는 10월 維新 後 미국으로 망명했다가, 1979년 프랑스 파리에서 실종됐다. 1991년 3월 서울가정법원이 실종선고를 내림에 따라 법적으로 「사망」했다.
 
  인천시장, 대통령민정수석비서관, 국회의원(8~10代)을 지낸 柳承原 前 의원, 혁명 후 경찰에 투신, 경남·충북·강원도 경국장, 해양경찰대장 등을 지낸 申用寬(신용관)씨도 信川 출신이다.
 
  沙里院 출신인 康誠元 前 의원은 중앙정보부에 근무하면서 공화당 事前조직에 참여, 공화당 사무차장, 국회의원(8代, 공화당 전국구) 등을 역임했다. 1975년부터 성원목장을 경영하면서 서울우유협회 조합장, 낙농업협동조합연합회장 등을 지냈다. 1996년 성원유업을 창립하고, 1999년 한국종축개량협회 회장을 맡는 등 정치인보다는 酪農人(낙농인)으로서 더 많은 일을 했다.
 
  5·16 혁명 주체 세력에만 황해도 출신들이 포진해 있던 것은 아니다. 5·16 당일 張都暎 육군참모총장의 命에 따라 1개 중대 병력의 진압군을 출동시켰던 30사단장 李相國 준장은 殷栗 출신이다. 그는 혁명 후 反혁명죄로 獄苦를 치렀다. 후일 陸士 동기인 朴正熙 대통령의 배려로 경부고속도로 추풍령 휴게소를 운영했다.
 
  혁명군 장교들을 체포하기 위해 6관구 사령관으로 출동했던 헌병차감 李光善(陸士 5기) 대령은 長淵 출신이다. 그는 陸士 동기생인 金在春 6관구 참모장의 설득으로 혁명군에 가담해 거사 성공 후 서울시경국장, 헌병감 등을 지내고 육군 준장으로 예편했다.
 
 
 
 崔世寅 前 1軍 사령관 등 배출
 
  5·16 주체 세력말고도 軍에서 활약한 황해도 출신들은 많다. 육군 大將 한 명, 해군참모총장 한 명, 공군참모총장 한 명, 해병대 사령관 한 명을 배출했다.
 
  2000년 同和연구소(以北 5道民들이 설립한 남북한 및 失鄕民 문제 연구기관) 자료에 의하면 1999년 末 현재 황해도 출신 예비역 장성은 모두 98명이다(平北 135명, 平南 113명, 咸南 66명, 咸北 60명).
 
  張昌國(장창국) 前 합참의장은 생전에 陸士 5기생들에 대해 회고하면서 『反共의식이 뚜렷하고, 당시로서는 高학력인 舊制(6년제) 중학교 졸업 이상의 황해도 출신들이 많이 入校했다』고 말한 적이 있다. 越南한 젊은이들이 마땅한 일자리를 찾기 어려웠던 것도 한 원인이라고 한다.
 
  鳳山 출신 崔世寅(최세인) 장군은 육군정보참모부장, 3군단장, 陸士 교장을 거쳐 4共 시절 1軍 사령관을 지냈다. 예편 후에는 진해화학 사장,(주)영풍 부회장 등을 지냈다.
 
  沙里院 출신 閔丙權(민병권·군사영어학교) 예비역 육군 中將은 朴正熙 대통령 시절 원호처장, 무임소 장관, 교통부 장관, 국회 국방위원장, 6~9代 국회의원 등을 역임했다.
 
  安重根 義士의 조카인 安椿生(안춘생) 장군은 平山 출신. 중국 國府軍 장교로 中日전쟁에 참전하기도 했던 그는 광복군이 창설된 후에는 광복군 駐남경지대장 등을 지냈다. 光復 후 국군에 입대해 육군 인사참모부장, 국방부 차관보 등을 지낸 후 육군 中將으로 예편했다. 1951년 4년제 정규 육군사관학교가 설치되자 당시 李鍾贊(이종찬) 육군참모총장은 국군의 정통성을 바로 세우기 위해 일본군이나 만주군 출신 장성들을 제쳐 두고 安椿生 장군을 陸士 교장으로 발탁했다고 한다. 9代 국회의원(維政會), 광복회 회장, 독립기념관 初代 관장, 대한노인회장 등을 지냈다.
 
  沙里院 출신 朴賢植(박현식) 장군은 駐越백마부대장(9사단)·국방대학원장 등을 지낸 후 육군 中將으로 예편했다. 5·16 직후에는 현역 군인 신분으로 서울市 교육감을 지냈는데, 원칙을 지키면서도 교원들을 배려해 좋은 평가를 받았다. 1971년에는 현역 신분으로 청와대 사정담당특별보좌관실에 파견근무를 하기도 했다. 예편 후에는 初代 치안본부장을 지냈다.
 
  碧城 태생 李光魯(이광로) 장군은 朴正熙 대통령 시절 경호실 차장보를 지냈고,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 내무위원장, 수도군단장 등을 역임한 후 육군 中將으로 예편했다. 국회의원(13代), 국회 사무총장, 황해도 지사를 지냈다.
 
 
 
 海參총장 한 명, 空參총장 두 명
 
   그 밖에 육군 中將으로 예편한 황해도 출신 군인들로는 군수기지사령관을 지낸 安宗勳(안종훈, 松林), 6군단장을 지낸 崔泳龜(최영구, 海州), 군수사령관을 지낸 崔景根(최경근, 甕津) 장군 등이 있다. 安宗勳 장군은 1980년 5·17 계엄확대 조치 당시 陸本회의 석상에서 유보적인 의견을 제시했다가 얼마 후 옷을 벗었다.
 
  육군의 少將, 准將級 장성들 가운데 예편 후 요직을 거친 사람들로는 裵德鎭(배덕진), 李大鎔(이대용), 金元熙(김원희), 安武赫(안무혁) 장군 등을 꼽을 수 있다.
 
  信川 출신 裵德鎭(陸士 5기) 前 체신부 장관은 1軍 통신참모로 있던 중 5·16 혁명이 나자 체신부 장관으로 入閣했다. 그 후 軍에 복귀해 통신감(육군 少將)으로 예편한 뒤, 국가안전보장회의 사무총장 겸 비상기획위원장, 행정개혁위원회 부위원장, 방직협회장 등을 역임했다.
 
  金川 출신인 李大鎔 前 駐越공사는 越南 敗亡 후 5년간 억류생활을 한 것으로 유명하다. 그가 현역 육군 준장으로 駐越경제담당 공사를 지낸 것은 당시 越南의 티우 대통령이 그와 美 육군지휘참모대학 동기생으로 절친한 사이였기 때문이다. 1979년 越南에서 돌아온 후에는 한국화재보험협회 이사장, 생명보험협회 회장, 육군사관학교 총동창회장 등을 역임했다. 현재 자유수호국민운동 상임의장을 맡고 있다. 6·25 때는 7연대 1중대장으로 楚山까지 北進했었던 것으로도 유명하다.
 
  海州 출신인 金元熙(陸士 9기)씨는 육군 준장으로 예편한 후 朴正熙 대통령 시절 조달청장, 대통령 총무수석비서관을 지냈다.
 
  安岳 출신 安武赫(안무혁·陸士14기) 前 국가안전기획부장은 공병여단장(육군 준장)으로 예편했다. 5共 시절 사회정화위원장·국세청장·국가안전기획부장으로 활약했고, 14代 국회에서 민자당 전국구 의원을 지냈다. 1990년 한국발전연구원을 만들어 月刊 한국발전리뷰, 각종 강연 및 세미나 등을 통해 保守右翼 이념을 전파하고 있다.
 
  황해도 출신 해군 제독으로는 먼저 사리원 출신 張正吉(장정길) 前 해군참모총장을 꼽을 수 있다. 2함대 사령관, 海士 교장, 合參 차장, 해군참모차장 등을 거쳐 2001~2003년 해군참모총장을 지냈다.
 
  延白 출신 鄭容根(정용근·海士 11기) 제독은 해군작전사령관·해군사관학교장을 지내고 中將으로 예편한 후 황해도 지사를 지냈다. 해병대 사령관을 지낸 趙基燁(조기엽·海士 15기) 예비역 해병 中將도 延白 출신이다.
 
  공군에서는 두 명의 황해도 출신 공군참모총장이 나왔다. 이들은 둘 다 海州 출신으로 정치적 격변기에 공군참모총장을 지내고, 예편 후에는 교통부 장관을 지냈다는 공통점이 있다.
 
  白凡 金九 선생의 아들 金信(김신) 前 공군참모총장은 日帝下에서는 國府軍 공군에서 복무했고, 光復 後 공군에 입대했다. 공군행정참모부장·공군참모차장 등을 거쳐 4·19 후 공군참모총장에 임명됐다가 5·16 혁명을 맞았다. 공군 中將으로 예편한 후에는 朴正熙 정권 시절 駐中(대만)대사, 교통부 장관, 국회의원(9代·維政會) 등을 역임했다.
 
  尹子重(윤자중) 前 공군참모총장은 空士 교장·공군작전사령관·공군참모차장 등을 거쳐 1979~1981년 공군참모총장을 지냈다. 大將으로 예편한 후에는 교통부 장관을 지냈다. 朴正熙 대통령 시절 중앙정보부 차장보를 지낸 尹鎰均(윤일균·사관후보생 4기) 예비역 공군 준장은 安岳 출신이다. 공군본부 정보국장, 중앙정보부 2국장, 同차장보, 정보학교장 등을 지냈다.
 
 
 
 국무총리 두 명
 
 
 
 
  황해도는 官界에서는 白斗鎭(백두진)과 鄭元植(정원식)씨 등 두 명의 국무총리를 배출했다. 信川 출신인 白斗鎭 前 국무총리는 李承晩 정권 시절 初代 외자청장, 식산은행장(오늘날의 산업은행 총재), 재무부 장관을 역임한 경제통으로 1952~1954년 제4대 국무총리를 지냈다. 2共 시절 5代 민의원 의원에 당선된 후, 7~10代 국회의원을 지내면서 국회 부의장, 제10代 국무총리(1970~1971년), 維政會 의장 등을 역임했다. 維政會 의원으로 登院한 제10代 국회에서는 車智澈(차지철) 경호실장의 지원을 받아 야당의 반발을 무릅쓰고 국회의장이 되었으나, 10·26 사태 후 물러났다.
 
  鄭元植 前 국무총리는 載寧 출신으로 서울大 사범대학장, 문교부 장관을 거쳐 1991~1992년 제23대 국무총리를 지냈다. 이후 제14대 대통령직인수위원장, 세종연구소 이사장, 대한적십자사 총재 등을 역임했다.
 
  황해도 출신 부총리도 두 명이 나왔다. 載寧 출신인 金裕澤(김유택) 前 부총리는 初代 부총리 겸 경제기획원 장관으로 朴正熙 대통령 초기 경제개발의 기틀을 닦았다. 李承晩 정권 시절에는 한국은행 총재, 재무부 장관을, 경제기획원 장관에서 물러난 후에는 7代 국회의원을 지냈다.
 
  長淵 출신인 申秉鉉(신병현) 前 부총리는 朴正熙 대통령 시절 청와대 경제특보, 한국은행 총재를 지냈다. 5共 시절에는 상공부 장관을 거쳐 두 차례(1980~ 1982, 1983~1986) 부총리 겸 경제기획원 장관을 역임하면서 물가안정에 바탕을 둔 경제성장을 달성하는 데 기여했다. 1984년 11월부터 3개월 동안 陳懿鍾(진의종) 당시 국무총리가 臥病(와병) 중일 때에는 국무총리 권한대행을 지내기도 했다.
 
  3共 초기 상공부 장관을 지낸 李丙虎(이병호)씨는 金川 출신이다. 4共 시절 건설부·상공부·동력자원부 장관을 지낸 張禮準(장예준)씨는 鳳山 출신이다. 그는 1980년대 초반 駐사우디아라비아 대사를 지내기도 했다. 그의 뒤를 이어 동력자원부 장관이 된 梁潤世(양윤세)씨는 谷山 출신으로 제2차 오일 쇼크와 정치적 급변의 와중에서 석유 확보를 위해 고생했다.
 
  3共 초기 교통부 장관을 지낸 安京模(안경모)씨는 碧城 출신이다. 日帝下 철도국 기수로 출발해 교통부와 건설부의 요직을 거친 후 1964~1967년 교통부 장관을 지냈다. 이후 국가기간고속도로계획조사단장으로 경부고속도로 건설의 기초를 닦았다. 수자원공사 사장, 산업기지개발공사 사장, 한국건설기술연구원장 등으로 1980년대 중반까지 현역에서 활동했다. 公州에서 한식당 「녹원」을 경영하면서 老年을 보내고 있다.
 
  松禾 출신 吳源哲(오원철) 前 경제제2수석비서관도 朴正熙 대통령 시절을 이야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대표적 경제관료다. 엔지니어 출신으로 1950년대 말 시발자동차 공장장을 했던 그는 朴대통령 시절 상공부 화학공업1국장, 화학광공차관보 등을 거친 후 경제제2수석비서관으로 발탁됐다. 경제제2수석비서관 시절 중화학공업추진위원회 기획단장을 겸하면서 사실상 중화학공업 및 방위산업 건설의 총책임자로 활약했다. 朴대통령 시절의 경제개발 전략을 7권짜리 「한국형 경제건설」로 정리했다.
 
 
 
 洪性澈과 安應模
 
  황해도 출신 관료 가운데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 지난 5월 사망한 洪性澈(홍성철) 前 국토통일원 장관이다. 殷栗 출신인 그는 해병대 대령으로 예편한 뒤 駐美공사로 官界에 발을 들여놓았다. 이후 朴正熙 대통령 시절 丁一權 국무총리 비서실장, 대통령정무수석비서관, 내무부 장관, 보건사회부 장관을 역임했다. 盧泰愚 정권 시절에는 대통령 비서실장, 국토통일원 장관을 지냈다. 평화통일정책자문회의 수석부의장, 이북5도민 중앙연합회장, 민족통일중앙협의회 의장, 황해도중앙도민회장 등으로 통일 및 실향민 관련 단체에도 오랫동안 관계했다.
 
  沙里院 출신으로 駐네덜란드 대사 등을 역임한 崔完福(최완복)씨는 1980년 국토통일원 장관을 지냈다.
 
  1共 시절 공보실장, 5·16 군사정권 시절 공보부 장관을 지낸 吳在璟(오재경)씨는 甕津(옹진) 출신이다. 관광공사 총재, 동아일보 사장 등을 역임했다.
 
  海州 출신 金聖鎭(김성진)씨는 朴正熙 대통령 시절 한국일보·동양통신 기자로 일하다가 정부에 들어가 대통령공보수석비서관, 문화공보부 장관을 지냈다. 이후 연합통신 사장, 서울언론재단 이사장, 駐싱가포르 대사, 大宇 부회장 등을 역임했다. 작년 6월 洪一植(홍일식) 前 고려大 총장 등과 함께 보수 성향의 인터넷 매체 뉴스앤뉴스닷컴(www.newsandnews. com)을 만들었다.
 
  黃州 출신 金甲現(김갑현·女)씨는 대한 YWCA 연합회장으로 일하다가 1991년 정무제2장관(여성담당)을 지냈다.
 
  金喆壽(김철수) 前 상공자원부 장관은 載寧 출신. 상공부 통상진흥국장, 특허청장, 무역진흥공사 사장 등을 역임한 통상전문가로 퇴임 후에는 세계무역기구(WTO) 사무차장을 지냈다. 현재 세종大 총장으로 있다.
 
  甕津 출신 吳正昭(오정소)씨는 안기부 대공수사국장, 同제1차장을 거쳐 金泳三 정권 말기에 국가보훈처장을 지냈다.
 
  경찰 출신으로는 安應模 前 내무부 장관이 가장 유명하다. 碧城 출신인 그는 충남도경국장, 치안본부장 등을 거쳐 5共 시절 대통령정무제2수석비서관, 충남지사, 조달청장을, 6共 때에는 안기부 제2차장, 同제1차장, 내무부 장관 등을 역임했다. 한국자유총연맹 총재를 거쳐 1998년부터 황해도중앙도민회장으로 일하고 있다. 베트남대사관에 근무할 때에는 李穗根(이수근)을 체포, 압송하기도 했다.
 
  그 밖에 경찰에서 활약한 황해도 출신 인사들로는 松禾 출신 白錫春(백석춘) 前 충북도경국장, 載寧 출신의 宋齊根(송제근) 前 경찰대학장, 安岳 출신 元容九(원용구) 前 경찰대학장, 遂安 출신 咸璇鎔(함선용) 前 충북도경국장 등이 있다.
 
  법조계에서 활약한 황해도 출신 인사들 가운데 대법관(3~5共 때는 대법원 판사)을 지낸 사람들을 꼽으면 1共 시절 金世玩(김세완, 信川), 金斗一(김두일, 谷山), 3~4共 시절 閔文基(민문기, 信川), 洪淳曄(홍순엽, 延白), 5~6共 시절 尹雲永(윤운영, 甕津), 李會昌(이회창, 瑞興)씨 등을 들 수 있다. 강직한 법관으로 유명했던 金世玩 前 대법관은 2共 시절 審計院(심계원·監査院의 전신) 원장을 지냈다. 李會昌씨는 5共 시절 대법원 판사를 지내고 변호사로 일하다가 6共 때 다시 대법관을 지냈다.
 
  碧城 출신 鄭順錫(정순석)씨는 1共 때 검찰총장을 지냈다. 鳳山 출신 金基錫(김기석) 변호사는 서울고검장을 거쳐 金泳三 정권 시절 법제처장을 지냈다. 법무부 차관과 대한변호사협회장을 지낸 金潤根(김윤근) 변호사도 鳳山 출신이다.
 
 
 
 李承晩과 金九
 
   황해도 출신 政界 인사를 꼽으라면 독립운동사의 두 巨木 李承晩 대통령과 金九 선생을 첫 손가락에 꼽을 수 있다.
 
  李承晩 대통령은 황해도 平山에서 태어나 두 살 때 서울로 이주했다. 金九 선생은 3·1 운동 직후 上海로 망명하기 전까지는 줄곧 황해도 일대를 무대로 활동했다. 그는 동학농민운동 당시에는 海州·碧城(벽성)·信川을 무대로 활약했고, 일본인 土田讓亮을 살해한 곳도 安岳 ♥河浦(치하포)였다. 殷栗·信川·安岳 등지에서 애국계몽운동을 벌이다가 105人 사건으로 獄苦를 치르고 나온 후에는 安岳에 한동안 은거했다. 3·1 운동 직후 上海로 망명한 후에도 安岳 일대에서는 그의 이름이 오랫동안 전해졌다. 李敬南 한국발전연구원장의 회고다.
 
  『어렸을 때, 임시정부의 密使가 황해도에 독립운동 조직을 만들려고 침투했다가 일본 경찰에게 검거된 일이 있었지. 마을 어른들은 「곰보 영감이 한 일」이라며 수군거렸어. 「곰보 영감」이란 白凡 선생을 두고 하는 말이야. 은근히 자랑스러워하는 눈치였어』
 
  제1, 2공화국 시절 활약한 인사들 가운데는 후일 한국민주당-민주국민당-민주당-신민당으로 이어지는 야당 인사들이 눈에 많이 띈다.
 
  松禾 출신인 張德秀(장덕수)는 日帝下에서 東亞日報 주필·부사장 등을 지내면서 언론을 통한 민족의식 고취에 앞장섰다. 光復 後 宋鎭禹(송진우) 등과 함께 한국민주당을 창당해 외교부장·정치부장 등을 지냈으나, 1947년 암살됐다. 東亞日報 기자였던 그의 형 張德俊(장덕준)은 1920년 일본군이 만주의 한국 교민들을 학살한 혼춘사건을 취재하다가 일본군에게 살해당했다. 그의 동생 張德震은 上海 臨政에서 활동하다가 중국인에게 살해됐다.
 
  松禾 출신인 咸尙勳(함상훈)은 한민당 선전부장으로 활약했다. 황해도 지사를 지낸 咸錫勳(함석훈), 소설가이자 언론인인 咸大勳(함대훈)이 그의 형제이다.
 
  載寧 출신인 金相敦(김상돈) 前 서울시장은 3·1 운동에 참가했고, 朝鮮日報 이사 등을 지냈다. 독립촉성국민회 소속으로 제헌국회 의원에 당선되어 反民特委 부위원장을, 이후 야당인 민주국민당, 민주당 소속으로 3~5代 국회의원을 지냈다. 2共 때에는 初代 民選 서울시장을 지냈다. 5·16 후 미국으로 망명, 反정부 운동을 벌이기도 했다.
 
  殷栗 출신인 白南薰(백남훈) 前 의원은 日帝 시대 때부터 친분이 두터웠던 金性洙, 宋鎭禹 등과 함께 한민당을 창당했다. 한민당 부위원장, 민주국민당 대표최고위원, 민주당 대표최고위원, 신민당(2共) 전당대회 의장, 민정당(3共) 최고위원, 5代 국회의원 등을 지냈다.
 
  海州 출신인 金仁湜(김인식) 前 의원은 대동청년단 소속으로 제헌국회 의원을 지냈다. 1994년 이후 제헌국회 의원들의 모임인 제헌동지회 회장을 맡고 있다. 작년 제헌절 기념식에서는 金大中 정권의 對北 비밀송금을 강력히 비판했다.
 
  安岳 출신 姜成國(강성국) 前 서울 市의회 의원은 4·19 이후 서울 市의회 의원에 당선된 후 민주당에 입당했다. 1961년 5·16 후 육군첩보부대(HID) 주도下에 황해도 용매도에서 남북한 비밀접촉이 열렸을 때, 그는 육군 중령으로 위장하고 우리 측 대표로 활약했다. 후일 공화당 청년국장·홍보국장을 지냈다.
 
  그 밖에 申鉉謀(신현모, 제헌국회), 吳澤寬(오택관, 제헌국회), 金庚培(김경배, 제헌국회, 2代,), 金泰熙(김태희, 2代) 吳誼寬(오의관, 2代), 鄭基元(정기원, 2~3代), 金勳(김훈, 4~5代), 兪英濬(유영준, 4代), 尹明運(윤명운, 4~5代), 朴德永(박덕영, 4代), 張翼鉉(장익현), 白斗鎭(백두진, 5代) 등이 1·2共 시절 국회의원을 지냈다.
 
  1·2共 시절 두각을 나타낸 황해도 출신 정치인들이 한민당-민주당으로 이어지는 야당에 많았다면, 3·4共 시절에는 여당인 민주공화당 소속이 대부분이어서 흥미롭다. 이들 가운데는 5·16 주체세력 등 軍 출신, 관료 출신들이 많다.
 
  언론인 출신으로 6代, 9代 국회의원을 지낸 徐仁錫(서인석) 前 의원은 沙里院 태생이다. 공화당 대변인, 국무총리 비서실장을 지냈다. 7代 국회의원, 대한적십자사 부총재 등을 지낸 李메리(女) 前 의원은 平山 출신이다.
 
  金裕琸(김유탁) 前 의원은 信川 출생으로 7~10代 국회의원, 공화당 사무차장, 국회경제과학위원장 등을 역임했다.
 
  9代 국회의원을 지낸 金三峯(김삼봉) 前 의원은 海州 출신. 6·25 때 학도병으로 참전해 부상당한 후 상이군경회 회장을 지냈다. 황해도민회장, 대한민국헌정회 사무총장 등도 역임했다.
 
  10代 국회의원을 지낸 李明春(이명춘) 前 의원은 鳳山 출신. 1970년대에 국무총리 비서실장과 행정조정실장으로 陸士 동기인 JP를 보좌했다.
 
 
 
 李會昌·白基琓은 大權 도전
 
 
 
 
  1980년대 이후 활약한 황해도 출신 정치인으로는 먼저 遂安(수안) 출신 奉斗玩(봉두완) 前 의원을 꼽을 수 있다. 1970년대 방송인으로 朴正熙 정권을 향해 따끔한 비판을 하곤 했던 그는 1980년 5共 출범과 함께 정치인으로 변신, 11~12代 국회의원을 지내면서 민주정의당 대변인, 국회 외무위원장 등을 역임했다. 1990년대 이후에는 방송계에 복귀해 YS나 DJ를 향해 쓴소리를 하기도 했다. 대한적십자사 부총재도 지냈다. 요즘도 「바른 사회를 위한 시민회의」 공동대표, 천주교 한민족돕기회장, 클린인터넷국민운동본부 이사장, 反核反金正日국권수호국민대회협의회 운영위원장 등으로 바쁘게 보내고 있다.
 
  11~12代 민정당 국회의원을 지낸 李贊赫(이찬혁) 前 의원은 松禾 출신. 젊은 시절 反共·노동운동에 투신한 이후 전국철도노조 위원장, 한국노총 위원장 등을 역임했다. 정계에서 물러난 후에도 한국산업인력관리공단 이사장, 국회기능올림픽대회 한국위원회 회장 등 노동계 관련 일을 했다. 현재 한국노동문제연구원장으로 각종 右翼 행사에 참여하고 있다.
 
  延白 출신인 趙容直(조용직) 前 의원은 공화당 黨僚(당료) 출신으로 12代(한국국민당), 14代(신민주공화당, 민주자유당) 국회의원을 지냈다.
 
  安岳 출신인 文龍珠(문용주·女) 前 의원도 공화당 당료 출신으로 11代 때 민정당 소속 국회의원을 지냈다. 현재 탈북난민보호운동본부 여성위원장을 맡고 있다
 
  영화배우 출신 정치인 申榮均(신영균) 前 한나라당 의원은 황해도 平山 출신. 서울大 치대를 졸업하고 치과병원을 개업하기도 했던 그는 1960년 영화배우가 되어 「빨간 마후라」, 「연산군」, 「남과 북」, 「미워도 다시 한번」 등에 출연해 일세를 풍미했다. 그는 한국배우협회 회장, 영화인협회 이사장, 명보극장 회장 등 영화인·사업가로 성공한 후 1996년 정치에 뛰어들어 15·16代 의원을 지냈다.
 
  황해도 출신 정치인들은 3·4共 시절에는 여당 일색이었으나, 11代 국회 이후에는 야당 의원들도 눈에 띈다. 尹潽善(윤보선) 前 대통령의 비서관을 지낸 尹起大(윤기대)씨는 平山 출신으로 11代 국회에서 민한당 전국구 의원을 지냈다. 平山 출신으로 동국大 재학 중 4·19에 참여했던 張忠準(장충준)씨는 12代 때 신한민주당 전국구 의원을 지냈다. 15代 때 새정치국민회의 소속 국회의원을 지낸 趙澈九(조철구)씨는 延白 출신이다.
 
  李協(이협) 前 민주당 최고위원은 瑞興(서흥) 출신. 중앙일보 기자 출신으로 1980년 DJ의 공보비서로 정계에 입문했다. 13~16代 국회에서 국회문화관광위원장, 새천년민주당 사무총장, 同최고위원을 지내는 동안 「깨끗한 정치인」이라는 평을 들었다.
 
  그 밖에 平山 출신 李相賢(이상현, 15代), 甕津 출신 河根壽(하근수, 14~15代), 碧城 출신인 金仁泳(김인영, 13~15代)씨 등이 있다.
 
  1990년대 이후 황해도 출신으로 대권에 도전했던 정치인이 두 사람 있다. 한 명은 李會昌 前 한나라당 총재이고, 다른 한 사람은 在野 출신 白基琓씨다.
 
  瑞興 출신인 李會昌 前 총재는 대법관·감사원장 등을 역임하면서 형성된 「대쪽」 이미지를 정치적 자산으로 삼아 1997년과 2002년 두 차례 한나라당 후보로 대통령 선거에 나섰으나 좌절했다.
 
  殷栗 출신 白基琓씨는 韓日협정 반대 운동을 시작으로 3~5共 시절 在野운동으로 일관했다. 민족통일민중운동연합 부의장, 전국노동조합협의회 고문 등을 지냈고, 1987년과 1992년에는 대통령 선거에 출마하기도 했다. 백범사상연구소와 통일문제연구소를 운영하고 있다.
 
 
 
 황해도 기업들_영풍, 신동아, 태평양
 
  황해도 출신들이 일으킨 기업인들을 보면 경제개발 초기에 해당 분야의 기초를 닦은 중견 기업들이 많다. 李罕洙(이한수) 前 서울신문 사장은 『황해도 출신 기업들은 재계에서 크게 두각을 나타내지는 않았어도 우리 사회가 필요로 하는 분야에서 활약한 견실한 기업들이 많다』고 말했다. 일부 황해도 출신 기업인들은 「개성상인」으로 분류되기도 하는데, 李 前 사장은 『황해도 출신 기업인들은 개성상인들에 비하면 악착 같은 맛이 적다. 여기서도 모나지 않은 황해도 사람들의 성품이 나타난다』고 말했다.
 
  段泗川(단사천, 瑞興) 前 계양상사·해성산업 회장, 徐成煥(서성환, 平山) 前 태평양화학 그룹 회장, 鄭寅旭(정인욱, 載寧) 前 강원산업 회장, 張炳希(장병희, 鳳山) 前 영풍그룹 회장, 崔昌杰(최창걸, 鳳山) 前 고려아연 회장, 崔聖模(최성모, 사리원) 前 대한생명 회장, 許昌成(허창성, 甕津) 前 삼립식품 회장, 趙東植 (조동식, 安岳) 前 인켈 회장 등이 그들이다.
 
  張哲鎭(장철진, 鳳山) 前 영풍산업 회장, 崔基鎬(최기호, 사리원) 前 (주)영풍 회장, 趙乃璧(조내벽, 鳳山) 前 라이프 그룹 회장, 丁明植(정명식, 延白) 前 포항제철 회장, 延萬熙(연만희, 延白) 前 유한양행 회장, 李漢垣(이한원, 長淵) 前 대한제분 회장, 印玹喆(인현철, 金川) 前 삼천리 그룹 회장, 孔永熙(공영희, 碧城) 前 공영토건 대표, 金龍燮(김용섭, 平山) 남양산업 회장, 吳善煥(오선환, 延白) 前 코리아 제록스 사장 등도 황해도 출신으로 재계에서 활약한 인물들이다. 李春燮(이춘섭, 黃州) 대한흥농종묘 회장은 種苗(종묘) 개량을 통해 농업발전에 크게 이바지했다.
 
  이 가운데 崔聖模 前 대한생명 회장이 일으킨 신동아 그룹, 에너지 산업 분야를 개척했던 강원산업, 한때 오디오 업계에서 명성을 떨쳤던 인켈 등은 몰락하고 말았다.
 
  금융계에서는 金奉殷(김봉은, 信川) 前 장기신용은행장, 沈遠澤(심원택, 鳳山) 前 신탁은행장, 安永模(안영모, 碧城) 前 동화은행장, 張寬植(장관식, 谷山) 前 강원은행장, 洪性叔(홍성숙, 碧城) 前 강원은행장, 閔壽峰(민수봉, 信川) 前 상업증권 사장, 李俊永(이준영, 平山) 前 대유증권 회장, 金天壽(김천수, 碧城) 前 국민신용카드 사장, 崔丙億(최병억, 海州) 前 대한생명 부회장, 李種禾(이종화, 長淵) 前한국감정원장, 李致寧(이치녕, 鳳山) 前 한국조폐공사 사장 등이 활약했다.
 
  초·중등 교육계에서는 具本錫(구본석)·金元圭(김원규) 前 서울시 교육감이 특히 유명하다. 具本錫 前 교육감은 경기女高 교장을 지냈다. 金元圭 前 교육감은 서울高 교장을 지내면서 학생들을 철저하게 공부시키면서도 스승으로서의 따뜻함을 잃지 않은 「참스승」으로 이름을 떨쳤다.
 
  學界에서는 「國寶」(국보)를 자칭했던 국문학자 梁柱東(양주동, 長淵) 前 동국大 교수, 불문학자 金鵬九(김붕구, 甕津) 前 서울大 교수, 영문학자 崔載瑞(海州) 前 연세大 교수, 중국문학자 車相轅(차상원, 海州) 前 서울大 교수, 여행가로 유명한 金燦三(김찬삼, 信川) 前 세종大 교수, 金蘭洙(김난수) 前 광주大 총장, 예술원 회원을 지낸 金元福(김원복, 信川) 前 서울大 音大 교수, 교육개혁위원장을 지낸 金宗西(김종서, 長淵) 前 덕성여대 총장, 유네스코 해양과학위원장을 지낸 朴炳權(박병권, 沙里院) 박사, 사회부 장관을 지낸 朴術音(박술음, 金川) 前 한국외국어大 교수, 盧武鉉 정부의 경제정책 담당자들에게 많은 영향을 준 邊衡尹(변형윤) 前 서울大 교수, 李元卨(이원설, 長淵) 前 한남大 총장, 辛世浩(신세호, 延白) 前 교육개발원장, 학술원 회원을 지낸 李燦(이찬, 延白) 前 서울大 교수, 영문학자이자 학술원 회원인 趙成植(조성식, 海州) 前 고려大 교수, 학술원 회원인 趙載英(조재영, 延白) 前 서울大 農大 교수, 학술원 회원을 지낸 원로 법학자 崔泰永(최태영, 殷栗) 前 서울法大 학장, 詩人 咸東鮮(함동선) 중앙大 교수, 국제법학자인 洪性化(홍성화, 平山) 前 건국大 법과대학원장 등이 활약했다. 6000여 件의 발명품을 만들어 기네스북에 오른 발명가 申錫均(신석균)씨도 平山 출신이다.
 
  의학계에서는 具國會(구국회, 碧城) 前 한양大 의대 학장, 학술원 종신회원 金鳴善(김명선, 長淵) 前 연세大 부총장, 朴良元(박양원, 海州) 前 경희의료원장, 朴鍾茂(박종무, 碧城) 前 한양大 의료원장, 柳在德(유재덕, 海州) 前 연세大 세브란스병원장, 李文鎬(이문호, 遂安) 서울중앙병원장, 李鍾九(이종구, 沙里院) 아산재단 생명과학연구소장 등이 유명하다.
 
  언론계에서는 최초의 女기자 崔恩喜(최은희) 선생, 李東旭(이동욱, 沙里院) 前 동아일보 사장, 洪性♥(홍성유, 碧城) 前 중앙일보 부사장, 金德寶(김덕보, 甕津) 前 중앙일보·동양방송 사장, 李罕洙(이한수, 載寧) 前 서울신문 사장, 金光涉(김광섭, 載寧) 前 합동통신 부사장, 崔鍾律(최종률, 海州) 前 경향신문 사장, 安秉勳(안병훈, 鳳山) 前 조선일보 부사장 등이 활약했다.
 
  崔靑林(최청림, 黃州) 前 조선일보 편집국장, 梁興模(양흥모, 鳳山) 前 조선일보 논설위원, 劉庚煥(유경환, 長淵) 前 문화일보 논설고문, 閔泳斌(민영빈, 信川) 시사영어사 회장, 申成淳(신성순, 平山) 前 중앙일보 편집국장, 劉承範(유승범, 延白) 前 연합통신 상무, 劉日演(유일연, 海州) 前 코리아 타임스 편집국장, 尹國柄(윤국병, 甕津) 前 한국일보 편집국장 등도 있다. 全斗煥 前 대통령 퇴임 후에도 그의 곁을 지킨 閔正基(민정기) 前 대통령공보비서관은 沙里院 태생으로 대한일보·중앙일보·동양통신에서 기자 생활을 했다.
 
 
 
 金東鍵 아나운서도 황해도 출신
 
  방송인으로는 宋道均(송도균, 延白) 現 SBS 사장, 洪意衍(홍의연, 海州) 前 MBC 제작국장 등이 있다. 인기 아나운서 金東鍵(김동건, 沙里院)씨와 MC 李相璧(이상벽, 甕津)씨, 코미디언 겸 MC 宋海(송해, 載寧)씨도 황해도 출신이다.
 
  李罕洙 前 서울신문 사장은 『황해도 출신 언론인들은 대개 사건을 악착같이 추적하는 기질은 다소 부족하지만, 성격이 원만해 취재원 관리를 잘 하는 편이었다. 사건 기자로서보다는 편집이나 논설, 관리 쪽에서 능력을 발휘한 경우가 많았다』고 했다.
 
 
 
 郭善熙(목사), 金辰明(소설가), 兪浩(방송작가)
 
  종교인으로는 소망교회 당회장을 지낸 郭善熙(곽선희, 長淵) 목사, 朴奉培(박봉배, 甕津) 前 감리교신학대학장, 朴聖謙(박성겸, 安岳) 前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장, 池元祥(지원상, 載寧) 前 한국기독교 100주년기업사업협의회장, 前 천주교 제주교구장 金昌烈(김창렬, 延白) 主敎, 前 한국교회사연구소장 崔奭祐(최석우, 信川) 신부, 鄭雲彩(정운채, 甕津) 前 천도교 敎領, 韓廣道(한광도, 谷山) 前 천도교 종무원장 등이 황해도 출신이다.
 
  문학계에는 여류 소설가 姜敬愛(강경애, 長淵)씨, 在美 소설가로 「순교자」 등을 지은 金恩國(김은국, 黃州)씨, 원로 소설가 崔泰應(최태응, 殷栗)씨, 「무궁화꽃이 피었습니다」 등 베스트셀러 대중 소설 작가 金辰明(김진명, 黃州)씨, 여류 시인 盧天命(노천명, 長淵)씨 등이 있다. 언론인 李敬南(安岳)씨는 시인, 劉庚煥(長淵)씨는 아동문학가로 활약했다.
 
  음악계에는 여류 작곡가 金順愛(김순애, 安岳) 前 이화女大 교수, 金昌九(김창구, 沙里院) 前 국립교향악단장 등이 있다. 「빨간 마후라」, 「꽃 중의 꽃」 등을 작곡한 黃文平(황문평, 海州)씨는 지난 3월 他界했다.
 
  미술계에서는 원로 동양화가 盧壽鉉(노수현, 谷山)·卞寬植(변관식, 甕津) 화백, 미술평론가이자 언론인인 李龜烈(이구열, 延白)씨, 서울올림픽 미술총감독을 지냈고 토속적 냄새가 풍기는 그림을 많이 그린 李滿益(이만익, 海州) 화백 등이 유명하다.
 
  영화 및 연예계에는 兪賢穆(유현목, 沙里院) 감독, 영화배우 申榮均(平山)씨, 원로 배우로 예술원 회원인 張民虎(장민호, 載寧)씨, 탤런트 金炳基(김병기, 平山)씨, 남정임이라는 藝名으로 더 유명한 영화배우 李民子(이민자, 松禾)씨, 탤런트 韓仁洙(한인수, 甕津)씨 등이 있다. 원로 방송작가 兪湖(유호, 海州)씨, 「지금 평양에서」 등 反共物을 많이 만든 방송작가 金東賢(김동현, 平山)씨도 황해도 출신이다.
 
  丹靑匠(중요무형문화재 48호) 기능보유자 金聖洙(김성수, 信川)씨, 매듭장(중요무형문화재 22호) 기능 보유자 金喜鎭(김희진, 海州, 女)씨, 봉산탈춤(중요무형문화재 17호) 기능보유자 尹玉(윤옥, 鳳山, 女)씨 등은 전통문화를 이어 온 황해도 사람들이다.
 
  李承晩·金九 外에도 황해도에서는 수많은 抗日 독립지사들이 배출됐다.
 
  한글학자 周時經(주시경) 선생은 鳳山 출신이다.
 
 
 
 朴殷植·安重根 배출
 
  민족주의 역사학자로 李承晩에 이어 임시정부 대통령을 지낸 朴殷植(박은식, 1859~1925) 선생은 黃州 출생이다. 구한말에는 皇城新聞·대한매일신보 등에 애국적인 논설을 많이 썼고, 「韓國痛史」, 「韓國獨立運動之血史」 등을 썼다. 예비역 육군 中將 출신인 朴始昌(박시창) 前 광복회장이 그의 아들, 朴維徹(박유철) 前 독립기념관장이 손자이다.
 
  舊韓末 대한제국군 正領(정령: 오늘날의 대령) 출신으로 임시정부 군무총장과 국무총리를 지낸 盧伯麟(노백린) 선생은 松禾(송화) 출신이다.
 
  伊藤博文을 사살한 安重根(안중근) 義士는 海州 출신이다. 동생 安定根(안정근), 安恭根(안공근), 사촌동생 安明根(안명근) 등도 독립운동사에 이름을 남겼다.
 
  여류 독립운동가 金마리아 여사는 長淵 출신이다.
 
  동양척식회사에 폭탄을 던진 羅錫疇(나석주) 義士는 載寧 출신이다. 臺灣(대만) 臺中(대중)에서 히로히토(裕仁) 일본 천황의 장인인 구니노미야(久邇宮邦彦王) 大將을 刺殺(척살)한 趙明河(조명하) 義士는 松禾 출생이다.
 
  3·1 운동 당시 민족대표 33人 가운데 한 사람인 朴熙道(박희도)는 海州 출신으로 기독교계의 대표적인 민족 지사였으나 日帝末 훼절했다. 기독교계를 대표해 민족대표 33人 가운데 한 사람으로 참여했던 吳華英(오화영) 선생은 6·25 때 납북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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