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연구] 37세의 국민가수 신승훈(申昇勳)의 24時

『時代와 世代를 초월하는 발라드 곡을 남기고 싶어요』

  • : 이은영  chosun3030@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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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전에 사시는 아버지께「月刊朝鮮과 인터뷰를 하게 됐다」고 했더니, 무척 좋아하시더라구요. 요즈음 들어오는 인터뷰 신청을 모두 거절했는데, 아버지 때문에 月刊朝鮮과 인터뷰를 하게 된 거예요. 간혹 아버지께서 서울에 오실 때 月刊朝鮮을 사다가 제게 갖다 주시면서 「아무리 연예활동을 해도 이 정도는 알아야 한다」고 하세요』

회식을 마친 것은 밤 12시30분.
신승훈은 뮤직 비디오를 만들기 위해 서울 청담동의 편집실로 떠났다.
수백만의 마음을 휘어잡는 음악 역시 고단한 노동의 새벽 속에서 만들어지고 있었다
가수 申昇勳(신승훈·37)은 1990년 데뷔한 이래 14년 동안 모두 1400만 장의 음반을 판매했다. 50만 장만 넘어도 「대박이 터졌다」고 환호하는 우리 가요계에서 일년에 100만 장씩 음반을 팔았다는 얘기다.
 
  「미소 속에 비친 그대」가 수록된 1집이 140만 장, 「보이지 않는 사랑」이 수록된 2집은 158만 장, 3집 「널 사랑하니까」 170만 장, 4집 「그 후로 오랫동안」과 베스트 앨범을 합쳐 247만 장, 5집 「나보다 조금 더 높은 곳에 니가 있을 뿐」 180만 장, 그리고 6집 「지킬 수 없는 약속」 105만 장 등 발표하는 앨범마다 100만 장 이상의 판매고를 기록했다. 누구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밀리언 셀러 作家(작가)이다.
 
  주간 가요순위紙 「뮤직박스」는 최근 「全앨범이 가요차트 1위를 기록한 가수」, 「가요차트 1위를 가장 많이 한 가수」, 「가요차트 1위 곡을 가장 많이 작곡한 가수」로 신승훈을 선정했다. 가요 전문가들은 신승훈을 두고 『건국 이래 최대 불황에 허덕이는 음반시장을 거침없이 돌파한 유일한 뮤지션』이라고 얘기한다.
 
  신승훈은 지난 2월, 발라드와 미디움 템포의 댄스곡, 뮤지컬 가수와의 듀엣, 국악을 접목시킨 새로운 음악 등을 담아 9집 앨범을 발표했다. 그는 새 앨범 발매를 기념하는 대형 라이브 콘서트를 서울 올림픽공원 체조경기장에서 가졌고, 全國 13개 도시를 돌며 콘서트를 했다.
 
  순회 콘서트, 뮤직 비디오 편집으로 바쁜 그를 만나기 위해 약속을 잡았다. 그의 매니저는 『도저히 시간을 따로 내기가 어렵다. 오늘 신승훈씨가 지방의 삼성전자 장미축제에 가는데 합류하면 어떻겠느냐』며 미안한 표정이었다.
 
  지난 6월4일 오후 5시. 서울 압구정동.
 
  스타크래프트 밴의 문이 열렸다. 핑크색 티셔츠에 청바지 차림의 신승훈이 차에서 내려 기자를 반갑게 맞았다. 밴의 뒷좌석에는 무대의상이 스무 벌쯤 걸려 있었다. 코디네이터 겸 메이크업 아티스트로 보이는 20代 젊은 여성은 차 소리가 시끄러운데도 곤히 잠을 자고 있었다.
 
  기자가 신승훈씨 옆자리에 앉기가 무섭게 앞 좌석 조수석에 앉아 있는 매니저가『출발합시다』고 외쳤다.
 
  신승훈은 『月刊朝鮮과 인터뷰를 하게 돼서 정말 영광입니다』며 웃음을 지었다. 20代와 30代의 감성을 사로잡고 있는 그가 月刊朝鮮을 잘 알고 있다는 게 의외였다.
 
  ―月刊朝鮮 독자세요.
 
  『가끔 읽는 편이에요. 대전에 사시는 아버지께 「月刊朝鮮과 인터뷰를 하게 됐다」고 했더니, 무척 좋아하시더라구요. 요즈음 들어오는 인터뷰 신청을 모두 거절했는데, 아버지 때문에 月刊朝鮮과 인터뷰를 하게 된 거예요. 간혹 아버지께서 서울에 오실 때 月刊朝鮮을 사다가 제게 갖다 주시면서 「아무리 연예활동을 해도 이 정도는 알아야 한다」고 하세요』
 
  9집 앨범을 발표하고 나서 정신 없이 분주한 그가 月刊朝鮮과의 인터뷰에 흔쾌히 응해준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스케줄을 부모님에게 모두 얘기하나요.
 
  『그럼요. 전화로 말씀드리죠. 제가 맏아들이에요. 아버지는 제게 늘 「앨범을 냈다고 가수가 아니다. 많은 사람들이 네 노래를 따라 불러야 가수다. 시간이 지나도 두고두고 추억할 수 있는 노래를 불러야 한다」고 말씀하세요』
 
 
 
 작사·작곡 위해 6개월간 칩거
 
   ―국민가수가 되라는 이야기군요.
 
  『그렇죠. 그런데 저는 요즈음 「국민가수」라는 말을 새롭게 해석하고 있어요. 흔히 볼펜 하면 모나미를 꼽잖아요. 모나미가 「국민볼펜」인 셈이죠. 그런데 곰곰이 생각해 보세요. 모나미 볼펜은 누구나 한 번쯤 사서 쓰지만 너무 흔해서 아무 곳에나 던져 버리잖아요』
 
  신승훈은 상징적인 표현을 즐겼다. 국민가수를 모나미 볼펜에 비유한 것이 그 중 하나다. 신승훈은 『국민이 모두 좋아하는 가수가 되는 것도 중요하지만, 시대를 초월하고 세대를 초월할 수 있는 제대로 된 명품 발라드 곡을 남기고 싶어요』라고 했다.
 
  ―이미 「발라드의 황제」라는 이름을 얻었잖아요.
 
  『단순히 한 시대를 풍미한 발라드가 아니라, 발라드 마니아들에게 끝없이 불려지고 추억되고 싶어요. 우리가 앨튼 존의 음악을 찾듯이 말이에요』
 
  ―발라드를 고집하는 이유가 있나요.
 
  『다른 장르는 어울리지 않거든요. 제가 인기가수 50여 명의 모창을 할 수 있어요. 자꾸 해 보면서 내게 어떤 창법이, 어떤 음색이 어울리는지 정확하게 알게 되었어요』
 
  신승훈은 실험정신이 뛰어나다. 노래 한 곡을 만들면서 1년이고 2년이고 실험을 한다. 그의 사전에 「번거로움」이라는 단어는 없다. 무엇이든 해 보고 또 해 본다. 이러한 깡이 밀리언 셀러가 될 수 있었던 저력이었다고 한다.
 
  ―요즈음 가요계에서는 6개월만 안 보여도 가수가 잊혀지잖아요. 앨범 하나를 준비하는 데 2년씩 투자하면서 불안하지 않나요.
 
  『불안하죠. 하지만 서두르고 싶지 않아요. 지금은 「가수 신승훈」이지만 곡을 쓸 때는 「가수 신승훈」을 버려요. 작사·작곡을 위해 적어도 6개월 정도는 아무 생각 없이 구상을 해요. 심지어는 멜로디도 안 쓰고 머릿속에서 구상만 할 때가 있어요. 살이 엄청 쪄서 음식점에 가도 사람들이 저를 못 알아볼 정도가 되어 버리기도 해요』
 
  ―대부분의 곡들이 그렇게 오랜 産苦를 겪나요.
 
  『그렇지는 않아요. 순간 순간 떠오르는 곡들도 많았어요. 「보이지 않는 사랑」은 미국 가는 비행기 안에서, 「미소 속에 비친 그대」는 버스 안에서, 「널 사랑하니까」는 일본의 어느 도시 신호등 앞에서 떠올랐어요. 순식간에 써 내려갔죠』
 
  아니나 다를까. 신승훈이 가는 곳에 실과 바늘처럼 따라다니는 것이 바로 디지털 녹음기다. 그는 차를 탈 때, 걸어갈 때 디지털 녹음기를 주머니에 혹은 가방에 넣어 다닌다. 어디에서든 떠오르는 멜로디가 있으면 주저 없이 녹음기를 꺼낸다.
 
  본격적인 인터뷰를 하기 위해 가방에서 디지털 녹음기를 꺼내자 신승훈은 관심 있는 눈으로 쳐다보았다. 녹음기 작동을 제대로 하질 못해 끙끙대자 그는 『제가 녹음기에 대해 잘 안다』며 금방 고쳐 주었다.
 
  그는 소년처럼 『제 녹음기는 편집까지 되는 최신형이에요』라고 자랑했다.
 
 
 
 신승훈을 음악으로 내몬 첫사랑의 여인
 
   「사랑노래가 다 비슷한 것 아니냐」고 하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렇지 않다.
 
  요즈음 사랑노래는 단순하다.
 
  사랑하는 사람이 한 사람이 아니고, 싫어서 헤어지면 그만이다. 몸이 멀어지면 마음이 멀어지고, 설사 헤어진다고 하더라도 눈물과 탄식, 통곡이 없다. 떠나는데 바짓가랑이 잡으면 스토커로 오해받기 십상이다. 참고 기다릴 이유가 없는 신세대의 사랑 방식을 여실히 보여 준다.
 
  배호의 사랑노래가 지금의 50代와 60代의 심금을 울렸다면, 「보이지 않는 사랑」은 20代와 30代의 마음을 흔들었다. 신승훈의 이 노래에는 「피가 맺히도록 그리워서 검은 눈을 적시는」 애절함이 없다. 하지만 떠나는 사랑을 못 잊어 몸부림치는 비통한 부르짖음은 마찬가지다.
 
  신승훈의 발라드는 슬프다. 그의 노래에는 「내가 살아 있는 동안 한 번만이라도 너를 만나고 싶다」는 첫사랑에 대한 미련이 남아 있다.
 
  ―사랑노래가 主전공인데 절절한 사랑을 경험했나요.
 
  『내 노래에 흐르는 애절한 사랑의 대상은 한 여자였어요. 첫사랑과 헤어졌고, 그녀와의 이별이 내 음악 창작 활동의 뿌리였어요』
 
  금요일 오후라 고속도로가 꽉 막혔다. 행사장까지는 아직 한 시간을 더 가야 했다.
 
  신승훈을 음악으로 내몬 첫사랑은 어떤 여자였을까?
 
  ―첫사랑과 왜 헤어졌나요.
 
  『내가 음악 하는 것을 반대했거든요. 너무 가난했으니까요. 만나면 제 주머니에 2000~3000원이 들어 있었어요. 가수로 데뷔할 무렵에 헤어졌어요』
 
  ―여자친구와의 이별이 창조적 예술 욕구와 역량을 일깨워 준 셈이군요.
 
  『그런 셈이죠. 「미소 속에 비친 그대」,「보이지 않는 사랑」, 「그 후로 오랫동안」 등 내 곡의 대다수가 그녀가 떠나고 난 뒤에 지은 곡들이에요. 첫사랑 그녀가 울면 늘 비가 왔었어요. 화창한 날에 같이 영화를 보다가도 그녀가 울면 그날은 반드시 비가 내렸거든요. 참 신기했었어요. 내 노래 중에 「그 후로 오랫동안」의 가사가 바로 그 추억과 연관되는 내용이에요. 다른 노래 부를 때는 비교적 담담한 편인데 이 노래만큼은 아직까지도 가슴이 떨려요. 노래 부르면서 깊게 심취하게 돼요』
 
  「그 후로 오랫동안」의 가사는 이렇다.
 
  <우연인지 몰라도/내가 눈물 흘릴 때마다/하늘에서 비가 내렸어 (중략) 그 후로 오랫동안 비가 왔어/내리는 비만큼 나도 울었어/하지만 더욱 견딜 수가 없는 건/어디선가 너도 나처럼 울고 있다는 생각에/하늘이여 나를 도와줘/그렇게 울고 있지 말고/내 님이 있는 곳 너도 쉽게 알 수 있잖아〉
 
  ―그 여자친구 소식은 알고 있나요.
 
  『최근 「결혼해서 잘 살고 있다」는 소식을 전해 들었어요. 순간 그녀에 대한 기억이 끝나 버리더군요. 마음이 편안해진 거죠. 사실 누구에게나 있을 법한 사랑인데 내 경우는 조금 오래도록 남은 것 같아요. 나에게 음악적 영감을 불어넣어 준 유일한 존재였기 때문에 그랬겠죠』
 
 
 
 곡을 쓰는 사람의 마음이 진실해야
 
   「이번 9집에 실린 사랑노래에도 옛사랑에 대한 추억이 묻어 있느냐」는 물음에 그는 『이번에는 전과 많이 다르다』고 했다.
 
  9집의 노래들은 신승훈 특유의 슬프고 애절한 목소리에 새로운 창법과 색다른 멜로디가 가미됐다. 24인조 오케스트라의 선율이 절묘한 조화를 이루며 그는 자신의 노래 전반에 「슬프지만 울지 않는다」는 哀而不悲(애이불비)의 정서를 담았다.
 
  ―사랑노래는 곡도 곡이지만 가사가 중요하죠.
 
  『그렇지요. 어떤 가사가, 어떤 리듬과 멜로디가 사람들의 가슴을 후벼 파는지 이제 조금 알 것 같아요. 제 경우 슬픈 사랑노래의 가사가 조금씩 바뀌었어요. 지금까지 제 노래는 「하늘이여 나를 도와줘」하면서 슬픔에 호소했어요. 이제는 「슬프지만 울지 않는」 절제의 정서로 노래해요』
 
  ―사람들의 마음에 다가가는 곡과 가사는 어떤 건가요.
 
  『쓰는 사람의 마음이 우선 진실해야죠. 나이가 들면 들수록 가사 쓰기가 힘들어요. 가사를 쓰기 전에 잠언집이나 시집을 많이 읽지만 예전같이 감수성이 되살아나지 않아요. 가사를 쓰려고 머리를 쥐어 짜내다가 나도 모르게 「소설을 쓰고 있다」는 자괴감이 들고, 세상의 때가 묻은 나를 돌아보게 되죠』
 
  ―결혼에 관심이 있나요.
 
  『그럼요. 흔히 밤에 외로움을 느낀다고 하는데 제 경우는 아침에 외로움이 느껴지더라고요. 요즘 들어서 부쩍 그런 생각이 들어요. 제 이상형은 딱히 없어요. 예쁜 여자보다 현명한 여자, 나랑 말 잘 통하는 여자… 이 정도예요. 남자와 여자가 만나서 서로를 알려면 오래 만나야 하는데, 제가 연예인이라 자칫 잘못되면 상대 여자가 평생 「가수 신승훈의 여자였다」는 스캔들로 기억되어야 하니까, 조심스럽죠』
 
 
 
 현장을 확인하고 나서 부를 곡을 선정
 
   ―오늘 무대에서도 「애심가」를 부르실 건가요.
 
  『신곡이니까 부르고 시작해야죠. 다음곡들은 분위기를 봐서요』
 
  신승훈은 분위기가 어떠한가에 따라서 얼마든지 음악을 달리할 수 있는 가수다. 그만큼 폭이 넓다. 「무슨 노래를 부를 것이냐」는 기자의 질문에 그는 불현듯 생각이 난듯 매니저를 불렀다.
 
  『오늘 행사가 어떤 분위기인지 현장에 도착하면 재빨리 내려서 체크해 주세요』
 
  그의 차에는 데뷔 때부터 지금까지 불렀던 노래를 담은 CD들이 준비돼 있었다. 대기업 행사의 관객층은 어린아이부터 중장년층에 이르기까지 다양하다. 신승훈은 현장에 가서 노래를 고르려고 했다.
 
  그는 「가수 신승훈」으로 돌아와 깐깐하게 모든 것을 챙기기 시작했다. 좀 전까지 한가하게 얘기를 나누던 그 남자가 아닌 것 같았다. 행사장이 가까워지자 차 속은 분주해졌다.
 
  ―바쁜데 국내 기업의 행사까지 찾아다니는 게 번거롭지 않나요.
 
  『천만에요. 제 노래는 386층이 압도적인 팬을 이루고 있어요. 아직까지 제가 그들에게 꼭 부르고 싶은 가수로 뽑히고 있다는 것이 행복해요. 요즘 뜨는 가수도 많은데 「꼭 신승훈이 와야 한다」고 하니 얼마나 고마워요. 기업이 마련한 무대에서보통 서너곡 부르도록 돼 있어도 5~6곡 쯤 부르고 내려오는 편이에요』
 
  목적지 아산까지는 앞으로 30분 정도가 남았다.
 
  메이크업을 맡은 여성이 그의 옆자리로 다가와 분장을 했다.
 
  ―신승훈씨의 패션이나 분위기가 데뷔 때와 마찬가지로 큰 변화가 없다는 얘기를 많이 하더군요.
 
  『제가 사회 분위기에 맞춰 그때마다 바꾸면 「줏대 없다」는 소리를 듣지 않았을까요. 많은 사람들은 변화를 優(우)로, 변화가 없는 것을 劣(열)로 보더라고요.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요. 저는 劣이 될지라도 우리나라 발라드에 한 획을 긋고 싶어요. 신승훈의 색깔이 있고, 신승훈 사랑노래만의 맛이 있다는 것을 보여 주고 싶어요』
 
 
 
 영화狂
 
  서울 강남 청담동의 「m-net」 녹음실. 신승훈은 매일 밤 이곳을 찾는다. 주로 하루 일과를 마친 자정 무렵이다.
 
  신승훈은 「영화狂」이다. 그가 뮤직 비디오 편집만큼은 직접하는 이유다. 6월 들어 일주일을 거의 매일 밤 편집실에서 꼬박 새우고 동이 트고서야 귀가했다.
 
  편집실에서 신승훈은 오랫동안 몰두해서 고민했다. 가요계에서 「신승훈만큼 지루한 것을 잘 참는 가수가 없다」는 말이 도는 이유를 실감했다. 그러고 보니 그는 충청도 출신이다.
 
  9집 앨범에 선보인 「애심가」는 국악을 접목한 새로운 장르에의 도전이었다. 며칠째 그는 편집실에서 MBC 드라마 「茶母」의 未방영 장면들을 보면서 자신의 뮤직 비디오 편집에 몰두했다.
 
  ―이미 방영된 드라마의 영상을 뮤직 비디오의 영상으로 선택했나요.
 
  『국악 선율의 「애심가」가 「茶母」의 영상과 잘 어울릴 것 같은 생각이 들었어요. 기왕이면 한국 특유의 색깔을 내고 싶었고요. 지난해 11월 중국 上海에서 아시아의 가수들이 모여 콘서트를 한 적이 있어요. 저는 「전설 속의 누군가처럼」을 불렀어요. 그런데 이게 아프리카 리듬이었어요. 다른 나라 가수들은 자기 나라 전통악기를 들고 나와서, 다들 자기 나라 음악을 보여 줬어요. 한국 가수가 아프리카 리듬으로 노래를 불렀으니…. 그때 「내 노래에 국악을 접목시켜 불러 봐야겠다」는 생각이 스쳐 지나갔어요』
 
  그는 『노래를 부르는 것도 중요하지만 한국 가수가 한국의 문화를 보여 줄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을 절실히 느꼈다』고 했다.
 
  1970년대 이후 우리 대중가요는 팝적인 요소를 깔고 발전했다.
 
  트로트를 제외한 한국 유행가의 여러 양식 중 번역·번안 가요의 비율이 가장 높은 게 포크다. 요즘은 노래의 억양을 영어식으로 바꾼 랩과 테크노 뮤직, 강렬한 메탈적 요소가 뒤섞여 한국의 음색이나 리듬이라고는 눈 씻고 찾아봐도 없다. 신승훈 역시 이런 사회적 분위기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던 가수이기도 했다.
 
  ―유행을 너무 따르다 보니 요즘 가수들은 생명이 짧은 것 같아요.
 
  『그렇죠. 딱 3년이라고들 해요. 예전에 방송사에 가요 프로그램이 많았는데 1990년대 이후로 많이 줄었어요. 가수가 노래 부를 프로그램이 없으니까 개그맨처럼 웃겨야 뜨는 세상이 되었어요. 가벼워지니까 오래가지 못하게 되고요』
 
 
 
 인기보다 팬과의 의리가 중요
 
   ―똑같은 곡조, 비슷한 가사의 복제품 가수들이 쏟아져 나오죠.
 
  『저는 조바심을 내는 후배들에게 이렇게 말해요. 「네 이름을 브랜드라고 생각해 봐라. 이름 알리기까지 얼마나 힘들겠냐? 일시적인 인기보다 팬들과의 의리를 소중하게 생각하는 가수가 되어야 한다」고 말이에요』
 
  ―후배들이 많이 찾아오나 보죠.
 
  『처음에는 「팬이었어요」라고 말하면서 순수하게 인사를 해요. 그러다 인기가 있으면 「신승훈 별것 아니다. 따라잡을 수 있겠다」고 생각되는지 연락이 없어요. 3~4년 지나 인기가 떨어지면 「선배님은 어떻게 14년 동안 견디셨어요」 하고 물어보러 와요』
 
  신승훈은 자신의 인기비결을 이렇게 설명했다.
 
  『일종의 신뢰인 것 같아요. 우리가 콜라를 마실 때 그 맛에 대해 새삼 감탄하지 않잖아요. 그러면서도 꾸준히 찾게 되지요. 그런 의미가 아닐까요. 우리나라 가수로서 마치 서양의 콜라 같은 한국 전통음료로 남고 싶어요』
 
  신승훈은 직접 노래를 작사·작곡하고 편곡까지 하는 「싱어 송 라이터」다.
 
  『우리나라에서는 노래를 받아서 부르는 가수와 직접 곡을 써서 부르는 가수에 대한 평가가 똑같아요. 미국은 뮤지션에 대한 자부심이 대단해요. 제가 후배들에게 「곡을 직접 써 보라」고 말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어요. 직접 곡을 써 보고 편집해 봐야 음악을 들을 줄 알거든요』
 
  신승훈은 대학에서 경영학을 전공했다. 충남大 재학시절 8학기 중 5학기를 全額 장학금을 받은 모범생이었다고 한다.
 
 
 
 중국 진출 준비 중
 
  그는 중국 진출을 준비하고 있다. 한국 가수들의 중국 진출이 앞서거니 뒷서거니 하고 있지만 댄스음악이 主流를 이루고 있다. 중국은 원래 발라드 중심의 노래가 강세다. 지난해 영화 「엽기적인 그녀」 덕분에 신승훈의 노래 「I Believe」가 중국에서 히트를 쳤고, 중국 최고의 여가수 쑨난이 「Loving you」를 불러 화제가 됐다.
 
  신승훈은 중국에 가서 노래를 부르겠다는 것이 아니다. 작곡가나 프로듀서로 활동할 계획을 갖고 있다. 『중국 가수들에게 한국 특유의 가락과 멜로디의 발라드뿐만 아니라 다양한 곡을 작곡해서 주고 싶다』는 게 그의 포부다.
 
  『중국 가수들에게 발라드 곡을 써 줄 거냐』고 묻자, 그는 『잘 부르는 곡이 발라드일 뿐이지, 재즈부터 헤비메탈까지 모두 쓸 수 있다』고 자신감을 내비쳤다.
 
  ―대형 콘서트는 경비가 엄청나게 들죠.
 
  『그렇죠. 보험료만 해도 어마어마해요. 지난 2월 서울 올림픽공원 체조경기장에서 단독 콘서트를 가질 때 100억원짜리 「행사 종합보험」에 가입했어요. 공연할 때 새로운 연출기법을 사용하다 보면 안전사고가 나기 쉽거든요』
 
  ―공연기획은 주로 혼자 하는 편이라면서요.
 
  『그런 편이에요. 평소에 세계적인 공연을 담은 비디오를 많이 봐요. 하지만 모방은 하지 않아요. 독창적인 것을 개발하려고 노력하지요』
 
  ―앞으로의 공연계획은.
 
  『6월21일에 호주교포 위문공연이 있고, 7월에 경희大 공연, 10월에 일본 공연이 예정돼 있어요 』
 
  신승훈은 음악이라는 영역에서 벗어나면 누구보다 털털했다.
 
  두 차례 만난 신승훈은 티셔츠에 청바지 차림이었다. 『항상 이런 차림이냐』고 물었더니 그는 이렇게 대답했다
 
  『솔직하고 싶어서요. 가장 편한 옷 입고 이야기해야 솔직해지잖아요. 하지만 노래할 때는 최대한 화사하고 예쁜 옷을 입어요. 내 노래를 듣기 위해 시간 내서 찾아온 팬들에게 나의 최상의 모습을 보여 주는 것이 의무잖아요』
 
  공연이 끝나고 극성 팬들의 환호소리가 메아리치는 가운데 신승훈의 밴은 빠른 속도로 행사장을 빠져나왔다.
 
  ―공연하면서 행복했나요.
 
  『노래 부를 때에는…』
 
  ―노래 부르지 않을 때는 행복하지 않다는 이야기인가요.
 
  『…』
 
  신승훈은 대답하지 않았다. 몰아쉬는 숨소리가 거칠다. 담배를 한 대 물고서야 입을 연다.
 
  『관객이 다섯 살 어린이부터 칠십을 넘긴 할아버지·할머니까지 앉아 있더라고요. 오늘 같은 분위기가 제일 힘들어요. 스피커 소리가 작아서 뒤쪽 사람들은 라디오소리처럼 들리거든요. 마이크 소리를 최대한 높였어요』
 
  노래를 부른 후 지친 모습의 그에게 말을 걸기가 미안했다. 20여 분 즈음 흘렀나 보다. 그는 담배 서너 대를 연거푸 피웠다.
 
  ―담배 피우는 걸 처음 봤습니다.
 
  『노래 부르기 전이니까 안 피운 거예요』
 
  신승훈은 한번 맺은 인연을 오래 간직하는 스타일이다. 기획사도 스태프들도 최소 10년 이상 함께했다. 음반 판매량이 1000만 장이 넘었는데, 기획사에 『차 한 대 뽑아 달라』고 요구하지 않았다고 한다.
 
 
 
 CF를 안 하는 까닭
 
  ―밀리언 셀러 작가인데 돈은 많이 벌었나요.
 
  『제 또래들에 비해 많이 벌었겠지만, 남들이 생각하는 만큼 모으지 못했어요. 일년에 옷하고 악기 사는 데 억단위가 넘게 들어가요. 돈에 대해 욕심이 너무 없었거든요. 새 앨범 낼 때마다 인세를 100원씩 늘린 정도였어요. 나보다 못한 가수들도 인세를 1000원씩 받았는데 저는 겨우 200원, 300원씩 받았거든요. 보채지 않고 「그런가 보다」 했어요. 저는 맏이라서 그런지 어릴 때부터 부모님들의 사정을 먼저 살피는 편이었어요』
 
  ―상업광고를 많이 찍었으면 수입이 크게 늘었을 텐데.
 
  『아마 그랬을 거예요. 하지만 안 찍었어요. 심각하게 발라드 부르면서 광고에서는 촐랑대면 그것도 이상하지 않을까요』
 
  ―대전에서 꽤 유명한 통기타 가수였다면서요.
 
  『대학 등록금을 벌려고 노래를 했어요. 제가 어릴 때부터 눈치가 빨랐어요. 초등학교 때 유성에 가서 온천을 하고 나면 아버지가 갈비와 냉면을 사 주셨어요. 근데 몇 년 후에는 냉면만 사 주시더라고요. 그러더니 나중에는 우동만 사 주시는 거예요. 순간 「아, 우리 집이 가난해졌구나」 알아차렸어요. 학비를 벌려고 통기타를 시작했죠』
 
  ―단순히 학비 때문이었나요.
 
  『노래를 어릴 때부터 잘 불렀어요. 하지만 엄마가 「피아노 학원에 가라」고 2만원을 주시면 쿵푸 도장에 등록해 버릴 정도로 음악에 관심이 없었어요. 학원에 다니는 누나 어깨너머로 피아노를 배워 웬만한 곡은 칠 수 있었어요. 가수 된다는 생각은 못 했어요. 나중에 기타를 치면서 음대를 가볼까 생각하기도 했지만 아버지가 경영학과에 입학하기를 원하셨어요』
 
 
 
 아버지의 힘
 
   신승훈은 아버지에 대해 각별한 생각을 갖고 있었다. 얘기를 할 때마다 툭툭 『아버지』가 나왔다. 그는 『맏이라서 그렇다』고 했다. 무대에서 내려온 신승훈은 마치 가슴에 감정을 텅 비워낸 듯했다.
 
  소년으로 돌아온 것처럼 묻지도 않았는데 성장기 시절을 이야기하는 걸 보니 노래를 부르고 내려온 뒤에는 가족이 그리운 것 같았다.
 
  ―아버지와 자주 통화하나요.
 
  『그럼요. 아버지가 자주 전화해 주세요. 제가 외국에 간다고 하면 「여권은 챙겼냐, 뭐는 챙겼냐」 하나하나 꼼꼼하게 말해 주시는데 그런 아버지에게 「잊어버릴 뻔했는데 아버지 덕에 다 챙겼다」고 말해요. 그래야 좋아하시거든요』
 
  대화 중간에 휴대폰이 몇 차례 울렸다. 그는 걸려오는 전화를 가리지 않고, 무조건 받았다. 그리고는 『나 지금 인터뷰 중이야. 나중에 전화해라』 하고 말했다. 걸려 오는 전화들 중에는 여자 연예인이 더러 있었다. 그는 남자 후배한테 하듯이 『오빠 바쁘다. 나중에 통화하자』라며 끊었다.
 
  ―스캔들이 없기로 유명한데.
 
  『없어야죠. 부모님을 봐서라도 그런 일은 없어야 해요』
 
  그는 또 아버지 얘기를 했다.
 
  『연예인이 되었지만 항상 부모님을 먼저 생각하면서 행동해요. 孝가 부모님을 위해서보다 어쩌면 나를 위해서 더 필요한 것 같아요. 제가 맏이라서요』
 
  신승훈은 『가수가 되어서도 「책임감 없다」는 소리를 듣고 싶지 않아서 어지간하면 끝까지 버티고 이겨냈다』고 한다.
 
  신승훈의 손과 발은 여자보다 더 예쁘다. 「손가락이 너무 작다」는 말에 『손과 발이 작고 아담해야 부지런하고 노래를 잘한다』고 했다. 그러고 보니 조용필, 서태지 등 유명한 가수의 손과 발이 모두 작다.
 
  어느새 차는 서울 인터체인지에 진입하고 있었다.
 
  힘들게 노래 부른 사람은 신승훈인데 스태프들이 코까지 골면서 곤히 잠을 자고 있다. 그는 『지방공연이나 행사에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차 안에서 주로 영화를 본다』고 했다.
 
 
 
 충청도 사내
 
  서울 압구정동 로데오 거리에 밤 11시가 넘어서 도착했다.
 
  신승훈을 비롯해 모든 스태프가 오후 4시 이후에 음료수만 마신 터라 몹시 시장했다. 그는 『자주 가는 고기집이 있다』며 고기집으로 차를 가게 했다. 그는 편집실로 가야 한다며 술을 마시지 않았다
 
  ―고추장 양념을 한 삼겹살을 좋아하나봐요.
 
  『네에. 제가 좋아하는 음식이 워낙 시골스러워요. 고추장 양념이 충청도 스타일이거든요. 엄마가 끓여 주신 된장찌개 맛을 못 잊어서 특별한 경우 아니면 대부분 된장찌개를 먹어요. 막창도 좋아해요』
 
  ―스태프들과 회식을 자주 하나요.
 
  『일이 잘 끝나면 한잔 하죠. 비즈니스도 그렇겠지만 밥 먹고 술 마시면서 이야기하고 회의하는 것은 별로 좋지 않아요. 술情, 밥情 들어서 좋을 것도 없고요. 모든 것이 흔쾌히 결정되고 잘 풀리고 나서 한잔 하는 게 좋죠』
 
  ―앞으로 어떤 노래를 부르고 싶으세요.
 
  『아직 인생 경험이 부족해서 삶이 묻어나는 노래를 제대로 부를 수 없지만 앞으로 애절한 사랑노래보다 삶에 대한 사랑노래를 부르고 싶어요. 시대를 초월하고 세대를 초월해서 추억될 수 있는 명곡 발라드를 꼭 만들 거예요. 지금은 하나 하나 점을 찍고 있는 단계지만 나중에 보면 이 점들이 하나의 선이 될 거예요』
 
  서른일곱 살인 신승훈은 아침에 외로움을 많이 느낀다는 자신의 얘기와 달리 그날 밤 외로움을 많이 타는 것 같았다.
 
  『결혼이 내 음악인생에 큰 전환점이 될 거예요. 이제는 아침에 부드러운 목소리로 나를 깨워 줄 사람이 있었으면 좋겠어요』
 
  회식을 마친 것은 밤 12시30분.
 
  신승훈은 뮤직 비디오를 만들기 위해 서울 청담동의 편집실로 떠났다.
 
  수백만의 마음을 휘어잡는 음악 역시 고단한 노동의 새벽 속에서 만들어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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