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욕 이야기] 블라인드 데이트 (Blind Date)

  • : 임혜기  haeky33@yaho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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林 惠 基
美 뉴욕 거주. 서울 출생. 이화여대 정외과 졸업. 渡美 후 뉴욕 조선일보 칼럼니스트, 뉴욕 한국일보 기자, 뉴욕 한국일보 문화 섹션지 라이프 타임스 편집장 역임. 장편소설「셋은 언제나 많고 둘은 적다」,「사랑과 성에 관한 보고서」등 출간. 그 외 수필집과 번역서 다수.
한국에서 연말휴가를 보내기로 하고 한국을 다녀왔다. 서울에 와서 대학원에 다니는 조카를 만난 순간 『너도 이젠 결혼을 해야지』라는 말부터 건넸다. 『건강하게 잘 지냈지』 하던가, 『학교 공부는 어떠냐』고 묻는 것이 기본이지만 대화의 순위는 절박한 것이 앞서게 마련이다.
 
  주위에서 결혼 재촉하는 것이 질색이라는 조카에게 결혼할 마음이 없냐고 묻자, 『하고 싶지만 아직 상대가 없어요. 그런데 자꾸 재촉하니 듣기 싫어요』 해서 내 말문을 닫게 한다. 부지런히 주위를 둘러보라는 충고를 했지만 수준급 제안은 아닐 것이다.
 
  친구들을 만나면 신랑감, 신부감 없느냐는 말이 오간다. 모두들 결혼 상대자를 찾느라고 야단인데 이래서 안 되겠고, 저래서 안 되겠다는 타박도 많다. 결혼하기가 참 어려워진 것 같다.
 
  배우자를 택하는 성향을 테스트한다며 어느 모임에서 이런 질문을 받았다. 딸기, 사과, 포도, 키위 그리고 바나나 중 어느 과일을 가장 좋아하느냐는 것이다. 좋아하는 과일에 따라 그 사람의 배우자 선택의 선호와 기준을 점친다는 것이다.
 
  나는 사과를 택했다. 사철을 두고 싫증을 내지 않고 열심히 먹는 유일한 과일이기 때문이다. 사과를 좋아하는 사람은 상대방의 성격을 가장 중요하게 여긴다는 그럴듯한 분석이 나왔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무엇보다 결혼 상대자는 성품이 좋아야 한다는 나의 주장과 일치하는 해석이다.
 
  그 외의 과일은 각각 다른 선호를 지니고 있었다. 딸기를 좋아하는 사람은 생김새를 먼저 따지고, 포도를 좋아하면 재력을 우선으로 친다고 했다. 키위는 학력과 지식에 높은 점수를 주고, 性的(성적) 매력에 먼저 끌리는 사람은 바나나를 좋아한다는 것이다. 이런 분석은 물론 근거 없는 오락적 발상이다. 그래도 그곳에 모인 우리들은 모두 근사하게 맞는다고 좋아했다. 그럴 수밖에 없을 것이다. 과일이 대신한다는 성향이 누구에게나 조금씩 있는 바람이기 때문이다. 그중 하나를 높이 친다는 분석에 그럴지도 모른다고 자기 암시를 걸 수 있을 것이다.
 
 
 
 과일로 알아보는 배우자 선택 기준
 
  사람들이 배우자를 선택하는 조건은 이렇게 단순한 다섯 가지로만 나눌 수 있는 건 아니다. 이 간단한 주관식 대답도 순순히 따라 주지 않고 고민하는 사람이 있는 걸 보았다. 다섯 가지 과일 중 무엇이 좋으냐는 질문에 무슨 덜미라도 쓰는가 싶어 정답을 찾으려고 머리를 싸매는 타입이 있었다. 모두 싫어하는 것뿐이라며 다른 과일을 대라고 떼쓰는 사람도 있다.
 
  이렇듯 다양하고 복잡한 인간의 안목에 조건과 취향의 코드가 척 들어맞을 수 있는 확률은 과연 얼마나 되겠는가. 미모만 높이 사거나 재력에 끌려 결혼했다가 헤어지는 유명인을 우리는 종종 본다. 자신이 세운 조건에 실망하는 건 그런 조건을 세운 그들 자신이다.
 
  그런 면에서 미국 젊은이들은 상대를 찾는 방법이 좀더 자연스럽다. 바꿔 말하면 순수하다. 조건을 내세우고 사람을 만나는 경우는 드물다. 이야기가 통하면 상대방에게 곧 호감을 갖지만 상대방이 지닌 배경이나 학벌, 직업 때문에 사랑하게 되지는 않는다.
 
  뉴욕 타임스에는 주말마다 결혼을 알리는 코너가 있다. 사진과 함께 그들의 학벌과 부모와 직업을 밝히고 둘이 만나게 된 동기도 가볍게 소개한다. 이곳에서 그들이 만난 계기를 눈여겨보면 거의 대학이나 직장 또는 모임에서 만나 대화가 통해 호감을 느낀 것으로 나타난다. 친구의 소개로 블라인드 데이트를 가지고 만났다는 커플도 많다. 블라인드 데이트란 말 그대로 상대방에 대해 전혀 아무것도 모른 채 만났다는 이야기다.
 
  상대방과 가까워지고 좋아지게 된 배경에는 서로에게서 많은 공통점을 발견했다는 고백이 가장 많다.
 
  언젠가 다시는 결혼하지 않겠다고 결심한 49세의 이혼녀가 재혼을 알리는 기사를 읽은 일이 있었다. 말을 키우고 조련하는 이 여인은 말과 사는 생활에서 인연을 만나지 못할 것으로 여겼으나 승마를 즐기는 동갑내기 사업가를 만나 결혼하기에 이르렀다. 말들을 자식처럼 여기기 때문에 하루 종일 대화가 끊이지 않는다는 신부가 목장에서 승마복에 면사포를 쓰고 결혼한 사진이 기억에 남는다.
 
  요즘 한국 젊은이들은 말은 통하지만 대화가 없는 세대 같다. 농담 따먹기 식의 가벼운 말들에 익숙하고 진지한 주제의 의견 나눔에 서투르다. 명작과 명화와 클래식에 대해 아는 바도 없고 금세 골치만 아프다. 서로 교감할 수 있는 깊이의 대화 길이 막혀 있는 듯싶다. 그러다 보면 대화가 필요 없는 조건만 더욱 따지게 된다.
 
  미국에 사는 한국 교포들도 자녀에게 조건을 많이 내세운다. 내 주위엔 아주 너그러운 얼굴로 『우리는 아이들에게서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다. 단지 한국 사람과 결혼하라고 말한다』는 사람이 많다. 그건 조건도 아니고 당연지사로 여긴다. 그러나 2세들은 서양 사람과 결혼하지 말라는 부모의 강요에 부담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마침 한국계를 만날 여건이 된다면 다행이지만 만남이 쉽지 않은 젊은이들은 이 요구가 부당하게 여겨질 것이다.
 
  한국 교포들을 보면 서양 사람들보다 자녀 결혼에 적극적이다. 혼기가 되면 대부분 결혼을 재촉한다. 자녀의 배우자 상대가 마음에 들지 않으면 결혼하겠다는 자식을 뜯어말리는 일도 필사적이다. 하여간 자식의 결혼을 좌지우지하고 싶어 한다. 그러나 절대 횡포로 여기지 않는다.
 
  이곳 친구의 아들과 잘 아는 분의 딸이 결혼하게 되었다. 서로 걸맞은 집안이고 서로가 탐내는 신랑과 규수이고 나무랄 데 없는 완벽한 결혼이라고 장담해도 좋을 혼사다. 양쪽을 모두 잘 아는 나는 좋은 말이라도 옮겨서는 안 된다는 걸 알았다. 좋은 뜻의 말도 생각하기에 따라 달라짐을 느꼈기 때문이다.
 
  미국 교육을 받은 두 젊은이는 분열된 핵가정을 만들어 단둘이서 행복해질 꿈을 꾸는데 이들 부모인 舊세대는 그들이 자신들의 품에서 떠나지 않을 것이라는 기대를 가지고 있다. 계속 근처를 배회하며 간섭할 꿈을 못 버린다. 자기 자식이 너무 아까워 서로가 뺏기는 기분으로 마음이 아프고 서운해하는 걸 본다.
 
  나의 딸은 가끔 코흘리개 때부터 알아온 남자 친구 두 명의 이름을 대며 누가 더 좋으냐고 묻는다. 내가 좋다는 편과 더 가까워지겠다고 생색을 낸다. 『누가 더 좋아?』 하면 나는 간단히 『나이더(neither)』 한다. 딸이 정색을 하고 『왜 모두 싫어?』 물으면, 나는 『둘 다 바보 아냐?』 한다. 딸아이는 골을 내고 나는 엄숙해진다. 은연중에 똑똑한 남자를 사귀라는 것이 나의 메시지다. 항상 주장하는 못 말릴 조건이다. 남자는 똑똑해야 한다. 다만 모든 방면에서 우수할 필요는 없고 한 분야에서 똑똑하면 된다는 생각이다.
 
 
 
 요즘 여자는 너무 똑똑해
 
  여자가 너무 똑똑하면 손해를 보는 것도 보았다. 얼마 전 인터뷰한 정구영 박사가 며느리를 결정한 이야기도 그 예다. 정 박사는 한국을 방문하게 된 아들에게 선을 보도록 주선했다. 그리고 마음에 드는 두 여성 중에 누구를 택하느냐는 난관에 봉착했다. 아들은 심사숙고를 한 후 마음을 정했다. 매사에 논리적인 답변을 원하고 도전적인 반응을 보이는 똑 부러진 여자는 부담스러웠다고 한다. 상대방을 편안하게 해주는 여자가 질리도록 똑똑한 여자를 이긴다는 원리다. 법정의 공방에선 다르지만 결혼 상대자일 경우 단연 우세하다.
 
  사실 똑똑한 남자와 편안한 여자는 훌륭한 짝이다. 즐거운 남자와 심각한 여자, 순한 남자와 깍쟁이 여자도 어울린다. 교만한 남자와 겸손한 여자 역시 환상적이다. 조건에 연연하지 말고 내게 없는 걸 채워 주고 내게 넘치는 것을 平準(평준)할 수 있는 혼인이 이상적인 결혼이 아닌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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