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 제국과 漢族 국가를 동시에 멸망시켜 오늘의 세계사를 만든 4세기 北方 흉노족의 빅뱅과 게르만족의 대이동.
그 현장에서 느껴 본 역사와 인간의 숨결.
코모_밀라노_바젤_바덴바덴_뉘른베르크_필센_프라하_드레스덴_베를린_바이마르 11일 여행기
375년 볼가강을 건넌 몽골系 흉노족(훈족) 기마군단은 게르만족을 공격했다. 게르만족은 로마지역으로 밀려 들어가 문명세계를 붕괴시키고 中世 암흑기를 열였다. 고트족, 색슨족, 프랑크족, 반달족, 롬바르드족들이 이탈리아·프랑스·영국·스페인·지중해 연안에 세운 나라들이 오늘날 유럽 諸國의 모태가 되었다. 비슷한 시기의 흉노족 기마군단은 중국과 한반도로 南進하여 5胡16國과 가야·신라를 세운다. 그 1700년 뒤 우리 몽골족 대한민국 여행단은 다시 게르만의 세상으로 들어갔다
趙 甲 濟 月刊朝鮮 편집장〈mongol@chosun.com〉
李 相 欣 月刊朝鮮 기자〈hanal@chosun.com〉
그 현장에서 느껴 본 역사와 인간의 숨결.
코모_밀라노_바젤_바덴바덴_뉘른베르크_필센_프라하_드레스덴_베를린_바이마르 11일 여행기
375년 볼가강을 건넌 몽골系 흉노족(훈족) 기마군단은 게르만족을 공격했다. 게르만족은 로마지역으로 밀려 들어가 문명세계를 붕괴시키고 中世 암흑기를 열였다. 고트족, 색슨족, 프랑크족, 반달족, 롬바르드족들이 이탈리아·프랑스·영국·스페인·지중해 연안에 세운 나라들이 오늘날 유럽 諸國의 모태가 되었다. 비슷한 시기의 흉노족 기마군단은 중국과 한반도로 南進하여 5胡16國과 가야·신라를 세운다. 그 1700년 뒤 우리 몽골족 대한민국 여행단은 다시 게르만의 세상으로 들어갔다
趙 甲 濟 月刊朝鮮 편집장〈mongol@chosun.com〉
李 相 欣 月刊朝鮮 기자〈hanal@chosun.com〉

- 이탈리아 북부 코모市와 인접해 있는 코모湖. 이 호수는 알프스 산맥의 빙하가 녹은 물이 고이면서 형성됐다. 주변 경관이 아름다워 해마다 많은 관광객이 찾아온다.
이번 여행의 경로는 스위스의 취리히 공항에 내린 다음날 육로로 이탈리아 밀라노 근교의 코모로 이동하여 그 뒤 독일 남부의 바덴바덴, 戰犯 재판으로 유명한 뉘른베르크, 체코의 프라하, 舊동독지역의 드레스덴, 베를린 등지를 여행하고 프랑크푸르트를 통해 인천공항으로 돌아오는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저는 機內에서 참고자료를 보고 있습니다. 車中에서 강연회도 있고 설명도 해야 되기 때문입니다. 한국에 있을 때 읽는 유럽 역사책과 機內에서 읽는 것과 현지에서 읽는 맛이 다 다릅니다. 책에 현장감각이란 것이 더해지면 활자가 살아나기 때문입니다.
스위스 하면 알프스, 시계공업, 은행이 연상됩니다. 스위스에 로마군대가 들어온 것은 서기 前 107년이었습니다만 오랫동안 버티지 못했다고 합니다. 그들은 게르만족에 밀려 나가고 게르만족이 스위스에 터잡고 살게 되었다고 합니다. 이들은 서서히 그리스도교를 받아들였습니다. 스위스는 1032년부터 신성로마제국의 지배下에 들게 됩니다. 신성로마제국이란 지금의 독일과 오스트리아 일대의 수많은 도시국가와 小公國을 아우르는 느슨한 제국이었습니다. 거창한 이름에 걸맞지 않게 중앙집권적인 국가도 아니었고 소속 국가들이 절대적으로 충성을 바치는 그런 중심부도 없었습니다. 로마라는 이름을 빌린 페이퍼 캄퍼니 비슷한 연방국가라고 할까요. 그 중심부는 항상 독일이었습니다. 프랑크 왕국의 전성기를 만든 샬레마뉴 大帝는 9세기에 지금의 프랑스, 독일, 이탈리아 북부를 통일했습니다.
그가 죽은 뒤 아들들 사이에 제국이 분할되었습니다. 독일을 차지한 왕조 속에서 오토 1세가 출현했는데, 906년에 그가 최초의 신성로마제국 황제가 되었습니다.
이 신성로마제국 황제는 독일 황제라고도 불리었습니다. 14세기부터는 오스트리아의 합스부르크 왕조가 신성로마제국 황제를 겸하게 되었지요. 이 합스부르크 왕조의 오스트리아 군대는 1806년 나폴레옹이 지휘한 프랑스 군대에게 대패하였습니다. 이것이 신성로마제국의 종말이 됩니다.
그 이후 프러시아가 독일민족의 챔피언 국가가 되어 외교의 鬼才(귀재) 비스마르크와 참모총장 몰트게의 지도下에서 1871년에 오스트리아를 제외한 전체 독일을 통일하게 됩니다. 신성로마제국을 「제1제국」, 비스마르크가 통일한 독일을 「제2제국」, 히틀러가 집권한 뒤 나치가 통치한 독일을 「제3제국」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독일은 유럽에서 민주주의의 역사가 가장 얕은 나라입니다. 불과 60여 년 前에 유태인들을 학살하는 공장을 만든 나라가 독일입니다. 독일이 일으킨 이런 학살과 전쟁도 민주주의의 토대가 약했다는 것과 관계가 있을 것입니다. 민주주의 국가는 전쟁, 특히 침략전쟁을 결단하기가 매우 어렵다고 합니다. 따라서 세계의 민주화가 진행되면 전쟁의 횟수도 줄어들 것입니다. 다시 스위스로 이야기를 돌립니다. 신성로마제국의 지배下에 있던 스위스의 작은 나라 셋이 연맹하여 합스부르크 왕조에 저항하기로 한 것이 서기 1291년 8월1일이었습니다. 이것이 오늘날의 스위스 연방을 만드는 시초가 되었습니다.
이 저항운동을 배경으로 한 전설이 윌리엄 텔 이야기입니다. 활을 잘 쏘는 윌리엄 텔이 아들의 머리 위에 사과를 얹어 놓고 활을 쏘아 맞추는 이야기는 잘 아실 것입니다. 영국을 제외한 당시 유럽 군대는 활을 잘 쓰지 않았습니다. 활은 멀리서 쏘는 것이라 비겁한 무기라고 하여 금지시킨 나라도 있을 정도였습니다. 騎士道(기사도)가 한창 떨치고 있을 때여서 군인은 당당하게 칼로 결투해야 한다는 생각이 있었습니다. 따라서 개인기 위주의 전투를 가르쳤는데, 13세기에 침입한 몽골 기마군단의 활과 기동과 조직적 전술에 휘말려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연전연패한 것이 중세 유럽 군사였습니다. 스위스 군대는 실용적이라 활을 主무기로 이용한 듯합니다.
1315년 스위스 군대는 침공한 오스트리아 군대를 대패시켰습니다. 이를 본 스위스의 다른 小國들이 연맹에 가담하기 시작했습니다. 취리히, 베른, 루체른 같은 나라들이지요. 오스트리아 군대를 連破(연파)한 스위스는 간이 커졌습니다. 이제는 합스부르크 왕조의 영토로 들어가 싸우면서 국토를 넓히려 했습니다. 그들은 지금 프랑스 남부에 있지만 당시는 유럽의 강국이었던 부르고뉴 公國 군대를 격파하기도 했습니다. 작은 나라로 분열되어 있다가 통합한 나라들은 시너지 효과가 발생하여 팽창주의 정책을 쓰는 경우가 많은데 스위스도 그런 예입니다.
스페인을 통일한 찰스 5세와 필립 2세 시절의 스페인이 세계 제국이 된 것, 독일 통일 이후 거대한 국력을 주체하지 못한 독일이 두 차례나 세계대전을 일으킨 경우가 있습니다. 스위스는 그러나 1515년 프랑스와 베니스 공화국 연합군에게 대패하여 실력의 한계를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분수를 알아차리고 對外팽창정책을 포기합니다. 그러고 나서는 중립국임을 선언합니다.
스위스 군인들의 용맹성은 유럽 諸國에서 유명하게 되었습니다. 傭兵(용병)으로 이들을 많이 데려갔습니다. 바티칸 용병이 대표적입니다. 16세기 초 유럽은 마틴 루터 교수 때문에 종교분쟁에 휩싸입니다. 독일 비텐베르크 대학의 신학 교수였던 루터는 바티칸의 부패행태에 분노합니다. 특히 교황청이 면죄부를 돈 받고 팔아 聖 베드로 사원을 짓는 것을 보고는 참을 수 없었습니다. 그는 1517년 10월31일 95개조의 항의서를 발표하여 바티칸의 가톨릭에 도전합니다.
全유럽이 루터의 종교개혁에 찬동하는 신교도와 반대하는 가톨릭파로 갈려 피비린내 나는 내전, 전쟁, 음모, 쿠데타를 되풀이합니다. 여기에 영향을 받지 않는 나라는 없었습니다. 스위스에도 신교도들이 생기고 세를 확산해 갔습니다. 특히 장로교의 창시자가 된 프랑스의 칼빈이 제네바로 와서 이 도시를 금욕주의의 원칙에 따라 독재적으로 통치했습니다.
스위스가 하나 다행이었던 것은 종교 내분에 외세를 끌어들이지 않은 점입니다. 이는 대단한 지혜라고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당시 독일은 그 반대였습니다. 독일의 신교도는 독일의 구교도를 치기 위해서 프랑스의 신교도를 끌어들이고 독일의 구교도는 독일의 신교도를 치기 위해서 프랑스의 구교도를 불러들여 국제 전장으로 만들었습니다.
스위스가 종교 내분을 內政으로 국한시키고 외세의 개입을 차단한 것은 대동단결의 정신이나 대승적 관용이 없으면 불가능합니다. 大義를 위해서 小利를 버리는 이런 자세는 스위스 사람들의 尙武정신에서 나왔다고 저는 추정합니다. 그런 대범한 정신은 명분을 중시하는 文民전통에선 좀처럼 볼 수 없습니다. 어쨌든 유럽을 거의 130년간 참화로 몰아넣었던 종교분쟁에서 스위스가 안전하게 머물러 있었다는 것이 오늘날 스위스의 번영 토대가 되었습니다.
1618~1648년 사이 독일은 30년전쟁의 무대가 되었습니다. 유럽의 열강들이 이 전쟁에 참여했습니다. 독일 사람의 3분의 1이 죽었습니다. 이 전쟁을 마무리하는 웨스트팔리아 조약은 그 뒤 약 250년간 유럽의 질서를 유지했습니다. 이 조약의 핵심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신교냐 구교냐의 선택은 국가나 정부가 정할 것이 아니라 사람들에게 맡기자는 것입니다. 일종의 종교선택의 자유 선언이지요. 이런 종교의 자유를 얻기 위해 120년간을 싸운 것을 생각하면 우리가 지금 누리고 있는 헌법상의 권리로서의 종교자유란 것이 얼마나 값비싼 것임을 새삼 실감할 수 있습니다.
북한의 金正日이란 자는 17세기 유럽 사람들이 누렸던 종교의 자유조차 주민들에게 금하고 있으니 이 자야말로 한반도의 1등 가는 守舊세력입니다. 이 자를 추종하는 남한 내 親北세력이 진보라 자칭하고 기자, 학자들이 그대로 따라 불러 주는 것은 거의 정신병적 상황입니다.
웨스트팔리아 조약은 스위스를 중립국으로 인정해 주기로 약조하였습니다. 그 뒤 지금까지 400년간 스위스는 한 번도 전쟁에 휘말리지 않았습니다(프랑스 대혁명 뒤 프랑스 군대가 들어와 스위스를 통치한 적은 있지만 스위스 사람들의 저항으로 곧 물러나고 유혈사태는 벌어지지 않았다).
전쟁으로 날이 새고 날이 지는 유럽에서 스위스처럼 오래 평화를 유지한 나라는 달리 없습니다. 스위스의 1인당 국민소득이 세계 최고급인 것도 장기간의 평화시기에 축적해 둔 富의 결과일 것입니다.
스위스 사람들이 예뻐서 유럽 열강들이 이 나라를 침략하지 않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면 국제관계를 모르는 순진한 사람들입니다. 스위스 국민의 무장력이 침략전쟁을 저지한 것입니다.
스위스는 인구 약 700만 명에 군대가 약 40만 명입니다. 대부분이 집에서 근무하는 우리식의 예비군입니다. 軍복무기간이 몇 년인지 아십니까. 요사이는 좀 줄었는데 그래도 20년이랍니다. 스위스에서 기차를 타면 기관총을 들고 집에 돌아가는 군인들을 많이 만납니다. 이들은 집집마다 무기고를 갖고 있습니다. 그 아름다운 알프스 땅 속은 복잡한 군사시설로 하나의 지하세계를 이루고 있습니다. 제2차 세계대전 때 독일군도 스위스 공략을 엄두내지 못했습니다. 核폭탄이 터졌을 때 세계에서 생존율이 가장 높을 나라가 스위스라고 합니다.
스위스는 중립국의 지위를 유지하기 위해 극도로 신경을 씁니다. 유엔 기구가 많이 와 있으나 유엔 가입국은 아닙니다. EU에도 가입하지 않고 유로도 쓰지 않습니다. 스위스는 군사문화 때문인지 여자들에 대한 참정권을 아주 늦게 인정하였습니다. 1971년입니다.
한 지역은 1991년에 연방정부가 위헌 판결을 하니까 할 수 없이 여자들에게 투표권을 주었습니다. 스위스 사람들 가운데 3분의 2는 독일어를 쓰고 프랑스어는 18%, 이탈리아어 사용자는 약 10%입니다. 로마시대의 古語를 지금도 쓰고 있는 종족이 1% 정도 됩니다.
스위스는 유명한데 스위스 사람들 중에 유명한 사람들이 생각나지 않는 것은 웬 일일까요. 시스템이나 법치를 중심으로 움직이는 선진사회는 영웅을 허용하지 않는 면이 있습니다.
1000년간 공화국을 유지해 온 베니스가 그런 경우이고 스위스도 비슷한 것 같습니다. 스위스 사람들은 경제나 과학·군사에는 밝은데 예술에는 좀 둔감한 것 같아 이 분야의 유명인사를 많이 배출하지 못했습니다. 남한 면적의 약 40%를 차지하는 스위스는 인류문명사의 한 寶石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고슴도치처럼 작지만 강한 국가群이 있습니다. 세계 제국 唐과 싸워 독립을 보존했던 천년왕국 新羅, 1000년간 한 번도 정변 없이 공화국을 유지하였던 베니스, 지금의 이스라엘과 싱가포르 같은 나라들입니다. 이 나라들은 軍·官·民이 일치단결하고 尙武정신으로 무장하여 자주국방을 한 나라들입니다.
9월18일 오후 6시, 우리 일행은 스위스 취리히 공항에 도착했습니다. 공항에서 호텔까지 전세 버스로 이동했습니다. 앞으로 10박11일 동안 우리 여행단의 발이 되어 유럽의 이곳저곳에 실어 나를 버스의 운전사는 체코 사람 톤다氏였습니다. 그는 프라하에서 아홉 시간을 달려 취리히까지 왔다고 했습니다. 차창 밖으로 보이는 취리히는 온통 숲과 나무에 둘러싸여 있었습니다. 시내를 다니는 자동차나 전차조차도 숲 속에서 튀어나오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우리는 취리히 시내에 있는 인터콘티넨털 호텔에 여장을 풀었습니다.
9월19일, 이날 일정은 좀 빡빡하게 진행되었습니다.
스위스 취리히에서 이탈리아 코모로 가기 위해서는 알프스 산맥을 넘어가야 합니다. 알프스 산맥을 가로지르는 도로가 여럿 있지만 우리 여행단은 세계에서 두 번째로 긴 고타르 터널(전장 16.3km)이 있는 길을 따라 이탈리아로 들어갔습니다.
군데군데 알프스 산맥의 빙하가 녹아 생긴 호수와 가파른 산들로 그림 같은 경관이 이어졌습니다.
고타르 터널은 전쟁이 났을 때를 대비하여 그 내부가 거대한 군수물자 저장고·장기 대피시설로 설계되어 있습니다.
취리히를 출발한 지 약 4시간 만에 이탈리아 코모市에 도착했습니다. 코모는 인구 약 8만 명의 도시로 실크 등 견직물 산업으로 유명한 곳입니다. 2000년 前 로마시대부터 별장지로 번성했던 곳입니다. 건물, 마을에 그런 시간의 축적이 묻어 있습니다.
코모市 인근에는 코모湖라는 아름다운 호수가 있습니다. 이 호수는 북쪽에 있는 알프스 산맥의 빙하가 녹아 고이면서 생겼습니다. 코모湖는 우리나라 소양강처럼 남북으로 길쭉하게 생겼으며, Y자를 거꾸로 놓은 모양을 하고 있습니다. 가장 깊은 수심은 410m로 유럽에서 가장 깊다고 합니다.
코모에서 점심을 먹은 뒤 밀라노 방문을 마친 우리는 저녁 9시가 되어서야 코모에 되돌아왔습니다. 일행은 코모 북쪽에 있는 몰트라시오라는 작은 마을에 있는 그랜드 임페리알레 호텔에 들었습니다.
여행단은 코모호수의 별빛이 반사되어 창문으로 들어오는 호텔 레스토랑에서 식사를 했습니다. 일행 중 몇 명은 코모호수의 夜景에 취해 밤 늦게까지 호수를 바라보며 노래를 불렀습니다.
다음날인 9월20일, 月刊朝鮮 여행단은 호텔 바로 앞에 있는 선착장에서 여객선을 타고 코모호수 북쪽으로 약 1시간30분 떨어진 곳에 있는 「벨라지오」라는 마을을 방문했습니다.
벨라지오까지 가는 여객선은 호수를 지그재그로 운항하면서 호수 양편에 있는 10여 개의 크고 작은 마을 선착장을 거쳐갑니다. 여객선은 주민과 관광객을 동시에 실어 나르고 있었습니다.
배에 오른 일행들은 주변의 풍경에 감탄사를 쏟아내기 바빴습니다. 여객선 위로는 관광객을 실은 수상 이착륙 비행기가 날아다녔고, 호수 양쪽에는 석회암 돌산이 직벽을 이루고 있었습니다. 무엇보다 아름다운 것은 호숫가에 오밀조밀하게 들어선 집이었습니다.
집은 한 채가 산중턱에 떨어져 있기도 하고, 수백 세대가 모인 제법 큰 마을이 호숫가를 따라 죽 늘어 서 있기도 했습니다. 높은 산꼭대기(2000m 이상)에 마을이 형성된 곳도 있었습니다. 동네가 있는 곳엔 어김없이 교회가 하나씩 들어 서 있었습니다.
兩水里처럼 양쪽 호수가 合流하는 벨라지오는 상주 인구 800여 명에 불과한 작은 마을입니다. 이 작은 마을에 해마나 150만 명이 넘는 관광객이 찾아온다고 합니다. 미국 라스베이거스에 있는 최고급 호텔이 객실 3000석을 갖춘 「벨라지오 호텔」이라고 합니다. 이 작은 휴양지가 서양인들에게 주는 이미지가 독특한가 봅니다.
우리 여행단이 선착장에서 산 위를 향해 가파른 좁은 골목을 따라 5분 정도 걸어 올라가자 「안티코 포조」라는 레스토랑이 나타났습니다. 이 레스토랑에서 코모湖에서 잡았다는 생선 요리를 먹었습니다.
이 식당의 마당에는 천막이 있었는데, 기둥 하나를 한켠에 박아 놓고 그 위에 세 개의 팔을 뻗어 천막을 친 모습이었습니다. 아주 효율적인 공간 활용. 디자인은 멋일 뿐 아니라 생활이고 과학인 것입니다.
벨라지오 마을 한켠에는 호수를 따라 제법 큰 정원(빌라 멜치 가든)이 꾸며져 있습니다. 여기서 바라본 코모湖는 바다가 협곡 속으로 깊숙이 들어온 듯한 天下절경의 모습이었습니다. 이탈리아의 환한 태양 아래서 눈부신 경치였습니다.
코모에 도착한 첫날, 버스로 한 시간을 달려 밀라노 구경을 갔을 때 이야기입니다. 우리는 밀라노 중심 광장에 있는 대성당 앞에 내렸습니다.
우리는 운전사에게 오후 5시에 같은 장소로 와서 대기해 달라고 부탁했었는데 대성당 구경을 하고 같은 장소로 돌아왔으나 버스가 보이지 않았습니다. 오후 6시부터 「최후의 만찬」을 보기로 예약이 되어 있는데 5시20분이 되어도 버스는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지하철로 이동하기로 하고 사람들을 급히 불러 모으는데 모퉁이를 도는 흰색 버스가 보였습니다. 우리 버스였습니다. 버스 기사는 길을 잘못 들어 고생한 듯 땀을 뻘뻘 흘리고 있었습니다. 유럽 여행의 성패는 버스 기사에게 달려 있다는 말은 과장이 아니었습니다.
버스를 타고 도착한 곳은 15세기 말에 브라만테가 설계한 산타 마리아 델레 그라체 교회였습이다. 「최후의 만찬」은 오랜 복원공사로 인해 일반 공개가 금지되어 있다가 몇 년 전부터 제한 공개를 하고 있습니다. 20명 이하가 단체로 15분만 관람할 수 있습니다. 이 교회와 그림은 유네스코에 의해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어 있습니다. 「최후의 만찬」을 보기 위해 매표소 입구를 들어서서 오른쪽으로 꺾어 10m 정도 들어가자 철문이 하나 나타났습니다. 이곳에서 검표원이 표를 검사하고 관람객을 안으로 들여보냈습니다.
일행이 안으로 모두 들어서자 뒤쪽의 철문이 자동으로 닫혔습니다. 그러자 이번에는 자동 유리문이 앞을 가로막습니다.
이렇게 유리문 세 개를 더 통과한 후에야 「최후의 만찬」을 만나 볼 수 있었습니다.
관람객들이 벽화에 너무 가까이 다가서는 것을 막기 위해 그림이 그려진 교회 식당의 벽면 약 3m 전방에는 허리 높이의 칸막이를 쳐 놓았습니다. 「최후의 만찬」 앞에 선 일행 중 한 명이 중얼거리듯 말했습니다.
『무슨 관람절차가 이렇게 복잡하지』
이 말을 들은 李기자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원래 문화재란 자국민들이 좀 극성맞게 보호해야 다른 나라 사람들도 귀하게 여기는 것 아닙니까』
예수가 열두 제자와 만찬을 하고 있는 이 그림을 보는 순간 입체적으로 생동한다는 인상을 가장 먼저 받았습니다. 원근법 덕분에 벽 속으로 따로 방이 하나 만들어져 있고 그 안에서 예수가 만찬을 주도하고 있는 느낌이었습니다. 등장인물들도 모두 움직입니다. 표정이 제각각 심각합니다. 그들의 손짓이 긴박한 그 무엇인가를 표현합니다. 저는, 손이 말처럼 수많은 정보를 전달할 수 있다는 것을 이 그림을 보고 알았습니다.
이 그림의 순간은 「요한복음」에 나옵니다. 예수는 십자가에 못 박혀 죽기 하루 전 열두 제자들을 불러 모아 놓고 저녁을 먹으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중 하나가 나를 팔리라 하시니 제자들이 서로 보며 뉘게 대하여 말씀하시는지 의심하더라. 예수의 제자 중 하나 곧 그의 사랑하시는 자가 예수의 품에 의지하여 누웠는지라 시몬 베드로가 머리짓을 하여 말하되 말씀하신 자가 누구인지 말하라 한대 그가 예수의 가슴에 그대로 의지하여 말하되 주여 누구오니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빵) 한 조각을 찍어다가 주는 자가 그니라 하시고 곧 한 조각을 찍으셨다가 가롯 시몬의 아들 유다에게 이르시되 네 하는 일을 속히 하라 하시니, 이 말씀은 무슨 뜻으로 하셨는지 그 앉은 자 중에 아는 이가 없고(하략)〉
다빈치의 「최후의 만찬」은 예수가 『너희 중 한 사람이 나를 팔 것이다』라고 선언한 직후의 순간을 잡은 것입니다. 열두 명의 제자들은 놀라고 의아해하고 불안해하면서 또 서로를 의심하고 혹시 나를 가리키는 것이 아닌가 하여 겁을 먹고 있는 상황입니다. 이 그림을 보면 등장인물들은 이렇게 말하는 것 같습니다.
『누구지?』
『네가 예수님에게 물어 봐』
『아니, 이게 무슨 말씀인가?』
『정말이야?』
『저놈 아닐까』
『이걸 어쩌지』
이 그림은 세 사람끼리 뭉쳐서 수근수근하는 모습입니다. 예수의 왼쪽 손은 빵으로 향하고 있습니다. 문제의 인물인 가롯 유다는 예수 쪽으로 얼굴을 돌린 바람에 표정이 보이지 않고 얼굴이 시커멓게 되어 있습니다. 유다의 등 뒤로 누구의 것인지 알 수 없게 처리된 손이 칼을 잡고 바깥으로 쑥 나와 있는 모습이 보입니다. 「배신의 칼」처럼 느껴집니다.
이 그림의 맨 오른쪽에서 두 번째 인물은 머리카락과 수염이 길고 어디서 많이 본 얼굴입니다. 안내자는 열두 제자 중 디모데인데 다빈치 자신의 얼굴이라고 설명해 주었습니다.
이 그림이 그려진 곳은 교회의 식당이고 벽화의 무대도 식당입니다. 예수의 등 뒤로 세 개의 창문이 보입니다. 창문 너머로 그려진 경치는 다빈치가 자랐던 토스카니 지방이라고 합니다. 이 경치로 해서 이 식당이 그림 속으로 더 연장되어 있는 느낌이 듭니다.
이 그림이 美術史的으로 중요한 것은 다빈치가 새로운 畵法을 썼기 때문입니다. 종전의 벽화 그리기는 벽에다가 회칠을 한 다음 축축한 상태에서 제한된 시간안에 그림을 그리는 프레스코 방식이었습니다. 다빈치는 마른 벽에다가 그렸습니다. 그러기 위해서 물감을 새로 개발했습니다.
즉, 안료를 달걀의 흰자위와 섞어서 만든 물감을 썼던 것입니다. 이렇게 한 이유가 있었습니다. 다빈치는 그림을 그릴 시간을 길게 갖고자 했습니다. 이 기간 그는 밀라노의 거리를 쏘다니면서 그림의 모델들을 구했다고 합니다. 특히 가롯 유다의 모델을 구하러 감옥에 자주 갔다고 합니다. 교회 책임자가 그리기를 빨리 끝내 달라고 요구하자 다빈치는 『그렇다면 귀하를 유다의 모델로 그리겠다』고 협박했다고 합니다.
名作을 그리기 위한 시간벌기, 그것을 위한 새로운 技法(기법) 개발, 이 때문에 이 그림은 완성된 지 20년이 지나서부터 그림물감이 말랐다가 벽에서 떨어지는 등 손상이 가기 시작했습니다. 그 뒤 여러 차례 이 그림은 복원공사를 당해야 했습니다. 지금 우리가 보고 있는 「최후의 만찬」 중 다빈치가 그린 원래 상태는 10%도 안 된다는 說도 있습니다.
물론 안내자는 이런 의문제기에 대해서 펄쩍 뛰었습니다.
그리는 데 3년이 걸렸지만 다빈치는 이 그림을 준비하는 동안 손·발 등 인체에 대해서 많은 데생을 남겼습니다. 그 데생물들은 지금 영국 윈저城 왕실도서관에 보존되어 있습니다. 이 준비과정을 살펴볼 때 다빈치는 역동적인 이 그림을 그리기 위하여 해부학, 기계학, 탄도학, 광선과 소리의 반사에까지 연구를 깊게 하였음을 알 수 있다고 합니다. 이 그림은 15세기 말 르네상스 시대의 과학이 총 집결된 곳이기도 하다는 이야기입니다.
다빈치는 예수의 그림만은 미완성 상태로 남겨두었습니다. 예수의 이미지가 애매합니다. 그는 예수를 그릴 만한 자격이 자신에겐 없다고 생각했다고 합니다.
다빈치가 이 그림을 통해서 후세에 전하려고 한 메시지는 무엇일까. 예수의 「폭탄선언」을 맞은 제자들의 너무나 인간적인 반응을 통해서 인간 본연의 모습을 보여주려고 한 것일까. 아니면 그냥 극적인 장면을 그린 것뿐인가.
月刊朝鮮 유럽 역사·문화 기행단이 어느 도시에 들어갈 때마다 저(趙)는 車中에서 그 도시의 역사적 배경을 설명했습니다. 그 도시를 둘러싸고 일어났던 전쟁, 혁명, 산업, 종교, 예술 따위를 알려주는 이유는 도시의 건물이나 예술품들을 구경할 때 그 낱낱의 의미를 큰 틀 속에서 이해하도록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역사라는 토양과 무대를 이해한다면 그 위에 그려진 것들을 더 잘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예컨대 이탈리아 밀라노의 중심부에는 거대한 고딕 성당이 있습니다. 세계 4대 성당 중 하나라고 불리고, 고딕 성당 가운데는 가장 크다고 합니다. 고딕이라고 하면 첨탑이 생각납니다. 이 성당은 그 첨탑이 135개나 됩니다. 「첨탑의 숲」이라고나 할까요. 거기에 붙어 있는 聖像(성상)은 3000개가 넘습니다. 성당은 하느님이 인간의 손을 빌려 만든 것이란 표현이 들어맞는 건물입니다.
1386년에 건축이 시작되었고 정면이 완성된 것은 나폴레옹이 이탈리아를 점령한 1805~1809년 사이 그의 명령에 의해서라고 합니다. 지금도 지어지고 있는 성당이라고 볼 수 있는데, 그렇다면 600년 이상의 건축史가 축적된 건물입니다.
성당은 겉에서 보면 복잡하지만 안으로 들어가면 높고 거대한 공간입니다. 52개의 기둥이 네 개의 회랑을 구분시켜 놓고 있습니다. 이 고딕 성당의 높이는 최고 첨탑을 기준으로 148m이며 건물 폭은 91m입니다. 겉모양은 하얀 정면으로 해서 아주 화려한 느낌이 듭니다. 광장이 넓어 건물의 전체를 볼 수 있습니다.
이 밀라노 성당과 스칼라 오페라 극장을 연결하는 약 200m의 갤러리아는 고급품이 많은 쇼핑센터街입니다. 19세기 말에 지은 이 회랑형 쇼핑가는 세계 건축가들이 지금도 놀라는 작품입니다. 1861년에 이탈리아 통일을 성취한 엠마뉴엘 2세를 기려 그의 이름을 딴 이 회랑은 밀라노의 두 대표적 건물(성당과 오페라좌)을 연결시킵니다.
종교와 예술을 商街가 이어 준다는 것은 여러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경제적 바탕이 있어야 종교도 예술도 가능하다는 메시지로 해석되었습니다.
유럽 여행을 직업적으로도 많이 해본 愼鏞碩 단장의 車中 설명에 따르면, 밀라노를 중심으로 한 北이탈리아가 유럽에서 가장 국민소득이 높다고 합니다. 알프스 산맥의 남쪽 기슭에 있어 경치도 좋고 역사 유적도 많은데다가 섬유업 등 산업도 발달하여 돈도 잘 도니 가장 살기 좋은 곳의 하나일 것입니다.
이탈리아의 중심은 로마가 쇠퇴하면서 밀라노, 베니스, 피렌체 등 북부로 옮겨집니다.
서기 313년은 서양사에서 아주 중요한 해다.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밀라노에서 칙령을 발표하여 기독교를 허용한 해이기 때문입니다.
382년 테오도시우스 황제는 기독교를 국교로 만들어 버립니다. 이때 이미 로마 제국은 망조가 들었을 때입니다.
밀라노는 5, 6세기 게르만 민족 대이동의 파도를 맞습니다. 게르만족의 일파인 롬바르드족이 북쪽 독일 지방에서 밀려 내려와 이탈리아의 3분의 2를 점령합니다.
유럽의 역사를 이해하려면 로마세계의 끝장을 내고 암흑기를 연 게르만족의 이동을 이해하여야 합니다. 게르만족은 로마 전성기 때 라인강 동쪽 숲 지대에 살았습니다. 이들은 잘 조직되고 전투적이라 로마군단의 침략을 라인강에서 저지하여 그 동쪽을 빼앗기지 않았습니다. 로마 시대 라인강은 문명과 야만의 경계선이었습니다. 게르만족을 로마 사람들은 「바바리안」, 즉 야만인이라 불렀습니다. 당시 로마군단의 병정들 평균 키는 160cm인데 게르만족은 10cm가 더 컸다고 합니다. 이 게르만족이 4세기부터 동쪽에서 공격을 당합니다. 훈족의 홀연한 출현입니다. 훈족은 지금 몽골 고원에 있던 흉노족이 기후변화로 살 수 없게 되자 西進하여 유럽에 나타난 무리라고 합니다. 최근 국내의 한 학자는 훈족이 西進한 흉노족이고 흉노 중 일파는 한반도로 南進, 신라·가야 지역을 점령했다는 취지의 논문을 썼습니다만, 전혀 사리에 맞지 않는 주장은 아닙니다.
훈족은 기마군단이었습니다. 그들이 보병 중심의 게르만족을 간단하게 무찌를 수 있었던 것은 말 발걸이를 발명하여 말을 타고도 활을 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훈족에 밀린 게르만족은 이탈리아, 프랑스, 영국, 스페인, 지중해 연안 등 로마세계로 밀려듭니다. 고트족, 반달족, 프랑크족, 색슨족, 롬바르드족들입니다.
밀라노는 롬바르드족이 이탈리아를 점령하고 파비아를 수도로 하여 왕국을 만들었을 때 중심이 되었습니다. 8~9세기에 가면 게르만족의 일파인 프랑크족이 지금의 프랑스, 독일, 이탈리아 북부를 통일하여 프랑크 왕국을 세웁니다. 이탈리아의 롬바르드族 왕국을 멸망시킨 것은 프랑크 왕국의 페핀 대제이고 그 아들 샬레마뉴 대제는 교황으로부터 신성로마제국의 황제라는 호칭을 받습니다.
샬레마뉴 대제가 죽은 뒤 프랑크 왕국은 분열되고 밀라노 중심의 북부 이탈리아는 작은 도시국가로 나눠집니다. 이때부터 1860년까지 이탈리아는 약 1000년간 통일국가를 이루지 못합니다.
이탈리아, 스위스, 독일, 체코를 급하게 버스로 돌아다닌 저희 月刊朝鮮 역사·문화기행의 한 특징은 「車中대화」입니다. 유럽 여행은 버스 여행인 경우가 많습니다. 이번에도 버스에서 40명의 여행객들이 빠짐없이 대화에 참여했습니다. 신변잡담에서부터 외국 여행의 경험, 자신의 직무와 관련된 이야기, 나라 걱정 등 화제가 다양합니다. 여기 참여하신 분들이 거의 50代 이상이기 때문에 하고 싶은 얘깃거리가 많습니다. 이런 이야기 속에서 무서운 名言들이 튀어나오기도 합니다.
이번에도 좋은 말들이 많았습니다.
『많이 여행하고 먹고 마시고 즐긴 것은 不渡가 나도 빼앗기지 않는데, 내가 가진 것은 다 없어지더라. 그러니 열심히 즐겨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이 나이가 되어 뒤돌아보니 남는 것은 추억이더라. 인생이란 것도 결국은 추억만들기가 아닐까 한다』
『한국은 山이 헐벗던 시대가 끝나자 이제는 개울과 江이 헐벗는 시대가 왔다』
『나는 평생 누구하고 싸워 본 적이 없다. 왜냐하면 싸우면 다 손해니까. 이겨도 손해고 져도 손해고. 그런데 예외가 하나 있었다. 빨갱이들하고는 싸우지 않을 수 없었다. 안 싸우면 내가 죽으니까』
9월21일 코모에서 스위스 바젤로 오는 車中에서 한 여행객이 인도 여행에 대한 소감을 발표했습니다.
그 요지는 인도 사람들은 비록 못살지만 평화롭고 선하며 만족한 생활을 하고 있다는 내용이었습니다. 인도, 네팔, 티베트 지방을 여행하고 돌아오는 분들이 흔히 그런 인상을 받는 경우가 많다고 합니다. 가난해도 행복한 것처럼 보인다는 것이죠.
이런 시각에 대해서 40代 기업인이 반론을 제기했습니다.
『나는 인도 사람들이 불쌍해서 못 견디겠더라. 이 지구상에 희망이 없는 곳이 있다면 그곳은 인도일 것이다. 시골에 가 보면 끔찍한 일이 일어난다. 여자는 결혼할 때 지참금을 가져가야 한다. 그 돈이 너무 작다고 시댁에서 구박하고 구타하다가 죽이는 경우도 있다. 그러고 나서는 시체를 불태워 버리고. 경찰이 수사도 못 한다. 길을 가다 보면 길가에 앉아 있는 힘 없는 여인들이 보인다. 밀어 버리면 그냥 쓰러져 죽을 것 같은 모습이다. 양말 만드는 일을 시킨 적이 있다. 여인이 하루 종일 일하면 우리 돈으로 몇 원을 번다. 이런 사람들이 행복하다고 생각하는 관광객들이 있다면 그런 사람들은 죄를 짓는 것이다』
조국을 떠나면 애국자가 된다는 말이 있습니다만, 車中대화는 주로 이렇게 진행되었습니다. 인도에 대한 상반된 여행소감을 들으면서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人情은 근대화를 견디어 낼 수 있는가」
1970년대 朴正熙 대통령은 새마을사업을 하면서 농어촌 주택 개량사업을 펼쳤습니다. 한국 농촌의 상징물인 초가집이 없어졌습니다. 사라지는 초가집을 바라보면서 안타까워하는 사람들은 초가집에 살지 않은 사람들이었습니다. 한 언론사 사장이 朴대통령에게 『초가집을 보존할 수 있도록 해달라』 했더니 朴대통령은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당신은 초가집에서 사는 것이 얼마나 고통스러운 것인가를 아는가. 구렁이가 지붕에서 떨어지고 비가 새고…. 당신은 초가집이 구경거리로 보이는가. 그렇게 좋다면 당신이 먼저 초가집에 가서 살아보지 그런가』
인도 사람들의 그 평화롭고 선하게 보이는 상태가 과연 인류사의 진행방향인 근대화, 즉 산업화와 민주화를 견뎌 낼 수 있을 것인가. 페루에서 만나는 인디오 소년의 그 순진무구한 눈망울은 페루가 산업화되면서 일상생활이 과학화되고 합리화될 때까지도 유지될 것인가. 아마도 불가능할 것입니다.
한국은 절대로 미국처럼 이혼율이 높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던 때도 있었습니다. 그렇게 생각하는 이들은 20세기 초 미국의 이혼율도 그렇게 높지 않았다는 점을 몰랐습니다. 지금 한국의 이혼율이 미국을 닮아 가고 있습니다.
한국에서 이혼율이 늘고 있는 것은 산업화 과정의 피할 수 없는 결과일 것입니다. 여자도 독립적으로 생활 능력을 가질 수 있도록 한 산업화 과정에서 가족의 윤리와 여자의 역할·기능이 바뀐 것입니다. 그렇다고 이혼율이 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인도 사람과 같은 마음의 평화가 계속되도록 근대화의 시계를 늦출 수 있을 것인가. 불가능합니다.
더 큰 의문은 과연 지금 인도 사람들은 행복한가라는 사실관계입니다. 인도를 며칠 둘러보는 여행으로 인도 사람들의 행복을 자신할 수 있는가. 네팔을 여행하고 어떻게 무슨 근거로 그들의 행복도가 우리보다 높다고 하는가. 귀하는 인도 네팔 사람처럼 그렇게 살면서 행복을 느껴 볼 용기가 있는가.
이처럼 여행은 여러 가지 想念을 만드는 자극제인 것 같습니다.
단체 여행은 對話입니다. 車中에서, 식탁에서 대화가 끊이지 않았습니다. 여행에 참석한 사람들의 직업과 경험이 다양했기 때문에 대화의 주제 역시 다양하게 전개되었습니다. 일행 중에는 건축 전문가, 여행 전문가, 와인 전문가들이 있었습니다. 이들은 여행단이 방문할 도시에 있는 건축물의 특색에 대해서 설명을 하거나, 식사 때 곁들이는 와인에 대해서도 해설을 하는 등 자신들의 경험과 전문지식을 나누어 주곤 했습니다.
저와 愼鏞碩 이사장은 車中 강연을 적절하게 분담해서 진행했습니다. 愼鏞碩 이사장이 방문하는 도시의 개략적 설명과 그 도시의 특색과 문화를 체험적으로 설명하고 나면, 저는 해당 도시의 역사와 인물을 설명하는 데 상당한 시간을 할애했습니다.
미국에서 온 한 사업가는 『車中에서 수준 높은 강연을 들을 수 있게 된 것이 무엇보다 큰 소득』이라고 말했습니다. 어느 여자 사업가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는 것이 이렇게 즐거운 경험인지 몰랐다』고 했습니다.
李기자도 차 안에서 여행 소감을 발표할 기회를 가졌습니다. 『스위스 취리히 공항에 내리는 순간부터 창 밖으로 펼쳐지는 잘 가꾸어진 나무와 숲이 부러웠기 때문에 우리나라도 산과 강의 산림을 보존하는 데 힘을 기울여야 한다』는 취지의 내용이었습니다.
愼鏞碩 이사장이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했습니다.
『나는 국내의 작은 面 단위까지 다녀보지 않은 곳이 없다. 그러면서 느낀 것은 이제 한국은 산이 헐벗는 시대가 가니까 개울과 강이 헐 벗는 시대가 왔다는 것이다. 우리의 강과 개울 중에 한 곳이라도 편안하게 보존되었다고 느끼는 곳을 볼 수가 없다. 우리나라는 하천관리란 개념조차 없다. 자갈이고 모래고 개울 돌이고 간에 모조리 채취하여 집을 짓는 데 쓰고 있다. 교육 이민에 이어 공해 이민이 곧 올지도 모른다』
9월21일, 아침 코모를 출발한 여행단은 점심 무렵에 스위스 북부에 있는 바젤에 도착했습니다.
바젤은 인구가 약 17만 명으로 스위스와 독일의 접경 도시입니다. 주민들은 독일어를 사용하고 있으며 거리의 풍경도 독일과 비슷했습니다. 바젤市에 들어서자 각종 공장이 즐비해 한눈에 보아도 이곳이 번창한 공업과 상업 도시임을 알 수 있었습니다.
바젤 시내를 가로지르는 라인강은 프랑스와 독일의 국경을 가르며 흐르다가 독일 내륙을 지나 네덜란드를 거쳐 北海로 흘러 들어갑니다. 이 때문에 스위스는 유럽의 내륙에 있으면서도 바다와 통할 수가 있고, 유럽 내의 주요 국가와 운하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바젤은 스위스 상업과 교통의 중심지로 서 취리히에 이어 스위스에서는 두 번째로 큰 도시입니다. 세계의 많은 은행과 상업기관이 몰려 있어 금융업도 발달했습니다.
바젤에 들른 月刊朝鮮 여행단은 바이엘러(Beyeler) 현대미술관을 방문했습니다. 이곳에서는 현대 추상회화의 시조라고 일컬어지는 「폴 클레」 작품 특별 전시회가 열리고 있었습니다.
바이엘러 미술관은 외관이 단촐하고 규모도 작은 직사각형 형태의 미술관이었습니다. 비록 외관은 화려하지 않지만 이 미술관은 현대미술史의 획을 그은 거장들의 유명한 그림들을 방마다 가득 소장하고 있습니다.
愼鏞碩 이사장은 『현대미술을 이끈 大家의 그림이 이곳에 있다는 것도 대단하지만, 그 大家들의 작품 중 가장 대표적인 그림이 이곳에 많이 있다』고 했습니다. 미술책에서나 보았던 세잔느, 모네, 피카소, 마티스, 고흐 등의 작품을 직접 볼 수 있었습니다.
벽에 걸린 대형 그림에 너무 가까이 가면 부저가 울리게 되어 있어 관람객이 그림에 손 대는 것을 방지하고 있었습니다.
예닐곱 살 남짓한 아이 두 명과 함께 온 어느 아버지는 두 아이의 손을 꼭 잡고 다니며 귓속말로 그림을 설명해 주었습니다. 두 아이의 손을 꼭 잡고 다니는 것은 혹시 아이들이 그림을 훼손하거나 장난을 쳐서 다른 사람의 관람에 방해를 줄까 봐 그런 것 같았습니다.
우리 여행단이 21일 저녁 무렵에 도착한 곳은 바덴바덴이었습니다. 「Baden-Baden」 地名에는 유래가 있습니다. Baden이라는 말은 「목욕한다」는 뜻입니다. 이 지역에 온 로마군인들은 여기서 솟아나는 온천을 개발하여 목욕시설을 만들었습니다. 목욕을 문화로 승격시킨 것은 로마 사람들인데 바덴바덴에는 로마식의 큰 목욕탕이 있습니다.
이 주변의 州는 「바덴-뷔르템베르그(Baden-Wu..rttemberg)」로 불립니다. 1871년 독일통일제국이 등장하기 전 바덴 공국과 뷔르템베르그 왕국이 있었습니다. 1866년 프러시아는 오스트리아와 싸우게 되는데 두 州는 오스트리아 편을 들었습니다. 프러시아가 오스트리아에 이겨 독일의 여러 小國들을 병합하려고 할 때도 두 州는 반대편에 섰습니다. 1870년 普佛 전쟁에서 프러시아가 이긴 후에야 두 州는 프러시아에 합병되었습니다.
바덴바덴은 「바덴州에 있는 바덴市」란 뜻입니다. 1980년 이곳에서 국제올림픽 위원회가 서울을 1988년 올림픽 개최지로 선정함으로써 인구 5만4000명의 이 도시가 한국에 잘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바덴바덴의 공원에는 근대 올림픽의 창시자인 프랑스인 피에르 구르당의 동상이 있습니다. 올림픽위원회는 이곳에서 회의를 자주 한 모양입니다.
바덴바덴은 19세기 유럽의 귀족들이 가장 가고 싶어 하는 휴양지였습니다. 우리 여행단이 묵은 「유로 호프(Europaischer Hof) 호텔」은 160년 된 호텔인데, 투르게네프 홀이 있습니다. 러시아 작가 투르게네프가 와서 오래 머물렀기 때문에 그렇게 이름이 붙었다고 합니다. 이때 러시아 문호 도스토예프스키가 결혼하여 기차를 타고 이탈리아로 여행 가는 도중에 바덴바덴에 들렀다고 합니다.
지금 바덴바덴에는 유명한 카지노가 있는데, 도스토예프스키는 이 카지노에서 돈을 잃고는 이탈리아 여행을 포기하고 돌아갔다는 것입니다. 돈을 날린 도스토예프스키는 유로 호텔에 묵고 있던 투르게네프를 찾아가 도움을 받았다고도 합니다.
후일담입니다만, 도스토예프스키는 이때의 경험을 바탕으로 「도박사」라는 소설을 썼다고 합니다. 영국의 빅토리아 여왕도 이 도시에 온 적이 있습니다. 유로 호텔에는 1850년대에 독일 통일을 위해 뛰고 있던 프러시아 황태자 빌헤름도 묵었다고 되어 있습니다.
바덴바덴의 중심부에는 「리흐텐탈러 알레」라고 불리는, 개천가 산책로가 있습니다. 개천의 바닥에도 돌을 깔아 놓았습니다. 黑林의 중심부답게 개천 양쪽에는 키가 큰 나무들이 많습니다. 이 산책로를 따라 걸었던 19세기 위인들을 생각해 보았습니다. 19세기 중엽, 유럽은 이탈리아 통일과 독일 통일을 둘러싸고 전쟁과 혁명이 터지는 소란기였습니다. 그런 역사를 만들어 가던 영국의 빅토리아 여왕, 프러시아의 빌헬름 황태자, 鐵血재상 비스마르크 같은 인물들이 이 산책로를 걸으면서 골똘한 생각에 빠졌을 것이라고 생각하니 풍경뿐이 아닌 역사의 숨소리가 가슴으로 다가오는 듯했습니다.
9월22일 오후, 우리는 잠시 바덴바덴을 벗어나 黑林지역을 관통하고 있는 고속도로를 달렸습니다. 고도 900~1000m의 부드러운 산악지대가 길이 160km, 폭 60km에 걸쳐서 스위스 국경 쪽(남쪽)으로 뻗어 있습니다.
「黑林(Schwarzwald)」이란 이름을 붙인 것은 서기 전 1세기경 이 지역으로 진출했던 로마군인들이었습니다. 숲이 울창하고 검게 보여서 그렇게 붙였답니다. 우리를 안내한 관광가이드 여자분에게 이런 질문을 해 보았습니다.
『몇 년 전에 이런 기사가 실렸습니다. 黑林을 관장하는 산림경찰이 남편감으로 가장 인기가 있다는데 사실입니까』
『농담이지요. 부인이 왜 산속에서 살려고 하겠습니까. 도시에서 살고 싶지』
黑林지대의 나무들, 특히 전나무 세고비아 등은 키가 매우 큽니다. 독일 사람들처럼 큽니다. 토질은 무르다고 합니다. 뿌리도 깊게 박히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1999년 겨울에 큰 바람이 불어 이 지역의 산림이 많이 쓰러졌습니다. 그 흔적이 남아 있는데 산봉우리 전체의 나무들이 몽땅 쓰러진 곳도 많습니다. 쓰러진 나무를 목재로 만들어 파느라고 유럽에서 일대 건축붐이 불었다고 합니다.
토질이 풍성하니까 나무들이 하늘을 향해서 직선으로 곧게 뻗어 있는 대신에 뿌리는 깊게 들어가지 않았습니다. 사람도 양지 바른 곳에서 구김살 없이 살다가 보면 마음은 곧게 자라지만 현실에 뿌리를 깊게 내리지 못해 逆境에 처했을 때 쉽게 넘어지는 수가 있습니다.
黑林 속으로 난 2차선 고속도로 B500을 따라 달렸습니다. 오른쪽으로는 프랑스의 알사스-로렌 지역에 뻗어 있는 보즈스 산맥이 보였습니다. 4500만 년 전에는 黑林산맥과 보즈스 산맥이 한 덩어리였다고 합니다. 지각변동이 일어나 두 산맥으로 갈라지고 그 사이의 계곡을 따라 라인강이 흐르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해발 1100m에 있는 「뭄멜제」라는 山頂호수에 들렀다가 돌아오는 길에는 「자스바하발덴(Sasbachwalden)」이란 山間마을을 방문했습니다. 인구 800명의 마을인데 목조건물 바깥 층층마다, 발코니마다 꽃으로 장식한 것이 화사했습니다. 독일의 마을 꽃장식 경쟁에서 금메달을 받았다고 합니다. 화이트 와인과 레드 와인을 생산하는 마을인데 마침 포도들을 거두어 들이고 있었습니다. 알이 작고 아주 단 포도였습니다.
月刊朝鮮여행단이 바덴바덴을 출발하여 뉘른베르크 재판으로 유명한 독일 바바리아州 북부 도시 뉘른베르크에 도착한 것은 9월23일 정오였습니다. 인구 50만 명의 이 도시 중심부는 제2차 세계대전 때 연합군의 폭격으로 잿더미가 되었습니다. 약 6000명이 공습으로 죽었습니다.
戰後 서독 정부는 미국 마셜플랜(Marshall Plan)의 도움으로 이 도시의 중심부를 재건하였습니다. 무너진 건물의 벽돌과 石材를 그대로 복원에 사용하였습니다. 뉘른베르크는 보통 도시가 아닙니다.
독일정신을 상징하는 도시입니다. 미국 매사추세츠州는 「미국의 정신(The Spirit of America)」이라고 불립니다. 17세기 초 매사추세츠 플리머스에 메이플라워號를 타고 상륙한 청교도들이 미국의 건국정신을 심었습니다. 미국의 독립과 건국을 주도한 사람들이 매사추세츠에서 주로 배출되었습니다. 그래서 「미국의 정신」이란 별명을 자랑스럽게 자동차 표지판에 달고 다니는 것이 그들입니다.
뉘른베르크에 사는 독일 사람들은 그렇게 자랑할 만한 분위기가 아닙니다. 히틀러와 이 도시 이름이 연관되어 있는 부분이 너무 많기 때문입니다. 이 도시 사람들에게 히틀러와 뉘른베르크를 관계짓는 이야기를 하면 질색한다고 합니다. 히틀러는 지우고 싶은 악몽인데 지워질 수가 없는 것이지요.
10~19세기 독일과 오스트리아를 무대로 존속했던 신성로마제국의 비공식 수도가 뉘른베르크였습니다. 많은 독일 小國의 왕들도 이 도시에 저택을 두었습니다.
히틀러의 나치당은 1927년부터 이곳에서 전당대회를 열었습니다. 나치당이 인종우월주의에 기초하여 독일정신을 이어받는다는 상징성을 강조하고 싶어 했겠지요.
1935년 전당대회는 특히 유명합니다. 이 대회에서 수십만 명의 군인들과 당원들을 광대한 운동장에 모아 놓고 히틀러가 선동연설을 하는 장면은 리펜스탈이 제작한 「의지의 승리」라는 기록영화에 잘 담겨 있습니다. 여자 영화감독이자 배우였던 리펜스탈은 그 다음해에는 베를린 올림픽 기록영화(한국에서는 「민족의 증언」이란 제목으로 개봉되었다)를 찍었는데 이 또한 不朽(불후)의 명작입니다. 특히 이 영화에서는 力走하는 손기정 선수가 잘 찍혀 있습니다. 리펜스탈은 최근 100세를 넘기고 사망했습니다.
1933년 이곳에서 처음으로 유태인의 경제활동을 보이콧하는 운동이 일어났습니다. 1935년에 나온 뉘른베르크 법은 유태인으로부터 독일 국적을 박탈하는 내용이었습니다. 연합군이 승리한 후 뉘른베르크에 戰犯 재판소를 만들어 히틀러의 부하로서 학살을 자행한 핵심요원 수십 명을 처형한 것도 독일정신의 어두운 면을 청산하려는 의지의 표현이었습니다. 이 도시의 이름을 빌려 나치 독일의 인류사적 범죄행위를 명백히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아데나워 수상이 이끄는 기독교민주당은 전후 서독을 이끌어 가면서 히틀러적인 독일, 침략적인 독일, 후진적인 독일, 프러시아적인 독일의 전통을 청산하고 영국ㆍ프랑스를 지향하며 진정한 민주국가로 재탄생하려는 길을 걸었습니다. 그 연장선상에서 독일통일이 왔던 것입니다. 서독 민주화의 당연한 결과로서 말입니다.
뉘른베르크 舊시가지 한복판 「로렌처 카페 하우스」라는 데서 먹은 점심은 돼지의 무릎을 삶은 것이었습니다. 연탄 한 장만한 크기의 음식이었습니다. 손으로 뜯어 먹으면서 옛날 게르만족들이 이렇게 먹었을 것이라고 상상해 보았습니다. 독일에 들어오면 모든 것이 한 단위 커지는 듯합니다. 사람은 물론이고 자동차, 주택, 개까지도 큽니다. 벌써 독일인들의 에너지와 野性(야성)이 느껴지는 것 같았습니다. 이런 에너지를 가진 독일인들이 8000만 명이나 모여 살고 있으니 주변국가들이 경계심이나 공포감을 갖지 않을 수 없을 것이라는 생각도 해 보았습니다.
오후에는 시내 중심부에 있는 독일 민족박물관에 갔습니다. 독일의 역사를 관통하는 유물을 담고 있습니다. 로마시대 유물로부터 중세를 거쳐 현대에 이르기까지 게르만족의 歷程을 알 수 있습니다.
저는 이런 데 오면 항상 무기부터 먼저 봅니다. 갑옷, 칼, 石弓, 대포, 소총 등이 한 방을 가득 채우고 있었습니다. 세계 여러 나라들 가운데 무기로써 박물관을 꾸릴 수 있는 나라는 유럽, 러시아, 터키, 일본 정도일 것입니다. 군사문화가 강력한 영향을 끼친 나라들입니다. 일본의 옛날 무기는 유럽에 비교해서도 절대로 떨어지지 않습니다. 군사문화를 제대로 거친 나라만이 주체적인 근대화에 성공하여 선진국이 되었다는 것은 심각하게 연구해 보아야 할 주제입니다.
뉘른베르크 중심부에는 큰 城이 있습니다. castle(캐슬)型 城이 아니고 wall(월)型입니다. 이 안에는 자동차가 들어오지 못하니 시민들이 안심하고 遺跡을 찾아다닐 수 있습니다. 유럽의 문화재를 유적이라고 부르는 것은 적당치 않다는 생각도 듭니다.
수백 년 된 성당은 유적으로 물러나 있는 것이 아니라 오늘도 신도들이 찾아와 예배를 드립니다. 400~500년 된 옛 집안에서는 오늘도 사람들이 생활하고 있습니다. 뉘른베르크 성벽에는 수백 년 전의 모습을 그대로 지닌 가게들이 붙어서 지금도 장사를 하고 있습니다. 물론 취급품목은 달라졌지만 말입니다. 유럽에서 역사는 저 멀리 있는 것이 아니라 생활 속에 들어와 있습니다. 역사 속에서 생활이 이뤄지고 생활이 역사로 변합니다. 인간은 역사를 구경하는 것이 아니라 호흡하면서 생활의 일부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유럽 사람들은 수많은 전쟁, 학살, 혁명, 평화, 번영의 기복을 거치면서 역사란 것은 순결한 것일 수 없고 그렇다고 폐허일 수는 더욱 없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역사는 인간들의 집단작품이므로 인간 그 자체처럼 빛과 그림자가 함께 있어야 하고 그럴 수밖에 없다는 것을 인정합니다.
金泳三 당시 대통령처럼 옛 중앙청 건물의 과거를 캐내어 조선총독부 건물이었으므로 「사형」을 선고하고 「처형」(파괴)해 버리는 그런 야만의 파괴를 하지 않습니다. 중앙청은 한국의 현대사가 만들어지는 무대였고 목격자였습니다. 중앙청을 처형한 것은 한국현대사 그 자체를 처형한 만행이었습니다. 그 代價를 金泳三 前 대통령은 치를 자격도 능력도 없습니다.
9월24일, 저희 月刊朝鮮 여행단은 오전 8시에 뉘른베르크를 출발하여 프라하로 향했습니다. 한 2시간 달리니 국경 검문소가 나왔습니다. 독일에서 체코로 들어가는 트럭이 줄을 서 있었습니다.
운전기사 톤다氏가 우리 일행 40명의 여권을 모아 체코 입국 관리소에 건네 주었습니다. 수속에 40분이 걸렸습니다. 프랑스-독일 국경 사이엔 아예 검문소가 없습니다. 다른 EU(유럽연합) 국가의 국경통과는 여권 검사 없이 이루어집니다. 체코는 1999년에 NATO(북대서양조약기구)에 가입했으나 EU에는 내년에 가입할 예정입니다. 따라서 유로貨를 쓰지 않고 「크로나」라는 自國 화폐를 씁니다. 국경 출입국 관리소 내 환전소에서 바꾸니 1유로가 30크로나였습니다.
체코로 들어가 프라하로 달리는데 프랑스 농촌과 비슷한 풍요한 농촌 풍경이 전개되었습니다. 잘 뻗은 고속도로, 정비된 농토, 관리된 山林 등 정리정돈이 잘된 나라의 山河였습니다.
우리는 중간에 「필센」이란 도시에 들러 점심을 먹었습니다. 필센은 현대 맥주 제조법을 발명한 도시입니다. 필센 맥주는 최고급 맥주입니다. 그 맛의 상큼함, 적당히 쓴맛, 깊은 느낌은 저 같은 反주류파에게도 부드럽게 다가왔습니다. 필센은 13세기에 건설된 도시인데, 聖 바톨로뮤 성당 광장은 한때 유럽에서 가장 넓었다고 합니다. 1295년에 건축이 시작된 이 고딕 성당의 첨탑은 높이가 102.6m로서 체코에서 최고입니다. 광장은 200m×150m쯤 되어 보였는데 광장을 둘러싼 건물群은 르네상스, 바로크 등 여러 형식의 경연장 같았습니다.
우리는 용케도 큰 식당을 하나 찾아내 점심을 시켜 먹을 수 있었습니다. 필센 생맥주가 무척 맛있었습니다. 유럽의 고급식당은 단체 손님을 잘 받지 않습니다. 40명이 들어갈 수 있는 식당을 구하는 것이 「코스 디자이너」 愼鏞碩씨의 고민거리였습니다.
필센은 공업도시입니다. 1859년에 설립된 스코다 기계공장은 무기와 자동차를 생산했습니다. 제2차 세계대전 때 연합군의 집중공습을 받았습니다. 이 공장에서 만들어지는 스코다 자동차는 공산주의 시절 동구권의 총아였습니다. 필센의 역사를 보면 15세기 종교개혁가 후스의 운명과 연결됩니다. 필센市는 후스에 동조했습니다. 이 도시는 세상의 종말이 올 때 구원받을 다섯 도시 중 하나로 일컬어졌습니다. 후스가 화형당한 뒤 그의 신봉자들이 반란을 일으키자 필센市는 그들과 맞서는 입장으로 바뀌었습니다.
신교도들이 1618년 프라하에서 신성로마제국과 로마교황을 상대로 봉기하자 필센은 신교도 군대에 점령당했습니다.
2년 뒤 신교도 군대는 구교도 군대에 대패했고 그 뒤 300년간 독립을 포기해야 했습니다. 1648년에 웨스트팔리아 조약으로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 왕조가 체코의 지배권을 공인받은 이후 보헤미아(지금의 체코) 지방은 신교에서 다시 구교화됩니다. 이런 역사의 격변을 지켜본 聖 바토로뮤 성당은 오늘도 광장을 내려다보고 있습니다.
프라하로 가는 車中에서는 건축학을 전공한 한 여행단원의 건축강의가 이어졌습니다.
『건축의 역사는 내부를 어떻게 만들 것인가 하는 것에서 시작됐기 때문에 건물은 외관보다 내부를 보고 판단해야 한다. 서양의 교회는 神을 위한 것이기 때문에 조각이 많고 조각은 거의 성경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따라서 성경을 모르면 서양 건축 특히 고딕 건축을 잘 이해할 수가 없다. 서울에서 세계에 내놓을 만한 건물이 하나 있다면 宗廟(종묘)이다. 위엄 있고 소박한 모습이 자랑스럽다』
우리 여행단이 체코의 프라하에 도착한 것은 9월24일 오후 4시 무렵이었습니다. 프라하에 도착한 우리 일행은 예약해 놓은 음악회를 보기 위해 이동했습니다. 꼬불꼬불 좁은 프라하 거리를 관광객 틈에 섞여 몇 번 돌아나가자 오래된 건물 하나가 나타났습니다. 이 건물은 클레멘티눔이라는 수도원이었습니다. 예배당이 연주홀이었고 간이 의자가 300개 정도 놓여 있었습니다. 연주시간인 오후 5시가 되자 기타, 플루트, 첼로, 오보에로 구성된 4중주 악단이 나와서 연주를 시작했습니다. 연주곡은 모차르트, 드보르작, 비발디, 스메타나 등의 곡목이었습니다.
드보르작이 작곡한 「신세계」 교향곡의 라르고와 스메타나의 「나의 조국」을 프라하에서 들으니 두 음악가의 애국심이 절실하게 느껴졌습니다. 음악도 역사적 현장감이란 게 있는 모양입니다.
저녁을 먹은 뒤 밤늦게 일행 네 사람과 함께 舊市街 광장과 카를 다리를 걸어 보았습니다. 이 광장과 다리는 프라하城과 함께 이 도시의 가장 유명한 구경거리입니다. 독일 젊은이들을 필두로 하여 많은 관광객들이 들뜬 기분으로 밤거리를 쏘다니고 있었습니다. 다리와 광장의 조명은 환상적이었습니다. 광장 근처에 있는 고딕 성당의 첨탑 부분이 창공에 솟아올라 밤하늘을 배경으로 하여 청동색으로 검푸르게 빛나고 있었습니다.
이 광장에는 종교개혁가 후스의 동상이 있습니다. 1372년 후스는 보헤미아(체코의 지역 이름)에서 가난한 농부의 아들로 났습니다. 그는 프라하의 카를 대학에 들어가 공부했고, 신학대학 학장도 지냈습니다. 그에게 영향을 준 것은 영국의 종교개혁 신학자 존 위클리프였습니다.
당시 부패한 천주교는 보헤미아 지방 토지의 반을 차지하고는 농부들에게 무거운 세금을 부과하고 있었습니다. 이 지배층에 대한 반감이 종교개혁 사상과 맞물려 후스를 행동하는 지식인으로 만들었습니다. 그는 면죄부를 판매하는 체코 왕을 비판하기도 하였습니다. 말하자면 당대의 두 권력집단인 정권과 교회를 다 敵으로 돌린 것입니다. 1415년 종교재판에서 그는 사형을 선고받고 火刑에 처해졌습니다.
舊市街 광장의 후스 동상은 1915년 화형 500년이 되는 해에 만들어졌습니다. 후스가 처형된 이후 그의 추종자들은 신교도 군대를 만들어 반란을 일으켰고, 이것이 200년 뒤인 17세기 초 30년전쟁의 불씨가 되어 이 지역을 戰亂으로 몰아넣습니다.
카를 다리는 신성로마제국의 카를 4세가 1400년에 완공한 길이 500m, 높이 50m, 너비 20m의 돌다리입니다. 舊시가 쪽 다리는 높이 40m 가량의 탑이 서 있고 다리 난간을 따라서는 30여 개의 조각상이 서 있습니다. 참으로 아름다운 다리입니다. 블타바江(독일어로는 몰다우江)은 한강의 반 정도 폭을 가진 강인데 프라하의 한가운데를 흐릅니다.
이 강을 가로지르는 이 다리는 아름답기도 하고 견고하기도 합니다. 만든 지 550년간은 사람, 마차뿐 아니라 자동차까지 통과시켰습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에야 차량통행을 금지시켰습니다.
밤중에 이 다리 위에 서서 주변을 둘러보니 언덕 위의 프라하城과 舊市街 광장의 성당 첨탑이 은은한 조명 속에서 오막살이처럼 경건한 불빛을 내고 있습니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는 연인의 프러포즈를 거절하기 매우 힘들 것입니다. 다리 위에선 집시로 보이는 걸인 여자가 큰 셰퍼드犬을 끌어 안고 앉아서 구걸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 모습이 너무 처량하여 동전을 던지고 지나가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작년 여름에 블타바강에 큰 홍수가 나서 카를 다리가 유실될 뻔했다고 합니다. 시내의 침수로 지난 연말까지 지하철이 운행되지 못했습니다. 프라하에는 카를 4세 大帝가 만든 다리, 학교, 城 등이 무척 많습니다. 그는 신성로마제국의 황제로서 프라하를 수도로 정하고 이 지역을 집중적으로 개발한 모양입니다. 다리 입구에 놓인 그의 동상은 세종대왕처럼 아주 인자스러운 임금님 모습입니다.
잘 만든 다리는 많은 사람들에게 편의뿐 아니라 즐거움을 주고, 훌륭한 관광자원으로서 후손들에게 돈벌이를 시켜 주는가 하면, 시민들의 놀이터이고 거리 악사들의 무대일 수 있다는 것을 카를 다리가 모범으로 잘 보여 주고 있습니다.
아름다움은 이처럼 힘이 셉니다. 우리 여행단의 한 사람이 『이 다리가 만들어지던 때가 朝鮮개국 무렵인데 우리 조상들은 무엇을 했는지 모르겠다』고 말했습니다. 다른 사람이 이렇게 중얼거렸습니다.
『체코에 카를 다리가 있다면 우리에겐 선죽교가 있다』
프라하에는 600년 된 건물들이 많습니다. 카를 4세 때가 이 도시의 전성기인데 그때부터 600년간 戰火에 휩쓸리지 않았으므로 이 도시는 여러 양식의 아름다운 건물들을 하나하나 추가해 가면서 진주 같은 모습을 만들어 낸 것입니다. 프라하에 오면 슬라브 냄새보다는 독일 냄새가 더 많이 납니다. 체코 민족의 피에는 폴란드나 러시아와는 달리 슬라브 민족과 독일 민족의 피가 섞여 있습니다. 양쪽의 좋은 점을 다 받은 것 같기도 합니다. 슬라브 민족의 양순함, 憂愁, 예술성, 독일 민족의 근면과 성실과 치밀함이 융화된 것이 체코의 민족성, 예술성, 그리고 역사의 성격이 아닌가 생각되었습니다. 이것이 예술과 공업과 맥주로 유명한 체코의 국가적 성격을 만든 것이 아닐까요.
블타바강을 내려다보는 언덕에 800년에 걸쳐 건설된 城은 길이 570m, 너비 128m입니다. 그 안에 성당과 대통령궁 등 건물들이 들어서 있습니다.
이 城門이 대단합니다. 城門 위에 큰 석조상이 두 개 있는데, 칼과 몽둥이로 사람을 때리고 찔러 죽이는 모습입니다. 우리 여행단의 안내인은 『합스부르크 왕조가 체코를 지배하면서 너희들이 반란을 일으키면 이렇게 된다는 것을 보여 주기 위해서 만든 조각이다』고 설명했습니다.
여행단의 일원이 『그렇다고 저런 식으로 피지배 민족을 자극해서야 되겠는가』라고 의문을 제기했습니다. 이 조각상은 1767~1770년에 만들어진 그리스 신화 타이탄像입니다. 맞아 죽고 찔려 죽어가고 있는 사람은 두 청년인데, 그 손동작이 끝까지 칼과 몽둥이를 든 사람에게 저항하는 모습입니다. 이 조각상을 본 체코 사람들은 합스부르크 왕조에 대해서 분노하는 마음이 저절로 우러나왔을 것 같습니다.
우리 여행단의 일원은 『金泳三 前 대통령이 여기에 와서 저 조각상을 보았으면 민주화에 역행한다고 중앙청처럼 당장 때려부수라고 했을 것이다고 말했습니다. 이 조각상이 주는 메시지는 간단했습니다. 「권력자에게 어설프게 대들다가는 맞아 죽는다」는 뜻.
이 조각상 밑에서 不動자세로 서 있는 두 군인의 옷이 아주 아름답습니다. 분청색깔의 군복인데, 이 옷에는 유래가 있습니다. 체코 출신의 영화감독 밀로시 포르만이 감독한 영화 「아마데우스」는 모차르트의 일생을 그렸습니다. 이 영화는 비엔나가 배경이지만 프라하에서 촬영되었습니다. 민주화 이후 하벨 대통령은 이 영화의 의상담당자를 불러 대통령궁 성문지기 군인들을 포함한 전체 군인들의 정복을 새로 디자인해 달고 했다는 것입니다. 분청색 군복은 제2차 세계대전 전에 존재했던 체코공화국의 군복과 비슷하다고 합니다.
오늘(9월25일) 城은 인파로 붐볐습니다. 한 해에 프라하를 찾는 관광객은 6000만~1억 명이라고 합니다. 우리나라 전체 입국 관광객의 열 배라는 이야기입니다. 물론 인근 독일지역 관광객들이 와서 하루 만에 돌아가곤 하는 경우도 많습니다만, 지금 세계에서 관광객들이 가장 많이 모이는 곳이 프라하임은 확실합니다. 인구 120만 명의 도시가 관광객 半, 시민 半이란 인상을 받았습니다. 관광객들이 많으면 소매치기도 많은 법, 종일 여권이 든 호주머니를 감싸고 다녀야 했습니다.
城 안에는 옛 王宮이 있습니다. 이 건물 안에는 합스부르크 왕조가 파견한 총독이 근무했던 총독부 방이 있습니다. 1618년 5월28일 新敎로 개종한 체코의 귀족들은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 왕조가 보낸 관리들과 그 비서들을 이 방의 창 밖으로 던져버렸습니다. 이들은 죽지는 않았다고 합니다만, 이 사건은 그 뒤 중앙유럽을 피비린내 나는 종교전쟁으로 몰아간 「30년전쟁」의 도화선이 되었습니다.
지금은 평화롭기 짝이 없는 프라하이지만 인류역사상 가장 참혹한 전쟁 중의 하나가 여기서 發火된 것입니다.
체코는 1938년 뮌헨 협정의 희생물이 됨으로써 제2차 세계대전의 발발에 한 원인으로 제공됩니다. 1968년에는 공산정권下에서 민주화 운동이 일어났다가 소련군의 개입으로 침묵했지만 1989년 11월 「우단 혁명(Velvet Revolution)」을 통해서 공산독재를 무혈로 끝장냅니다. 체코 사람들이 보여 준 최근의 행태는 「현명」과 「신중」과 「교양」이란 말로 상징됩니다. 실력과 분수에 넘는 행동을 자제하다가 결정적 시기가 오면 결정적으로 행동함으로써 역사를 확실하게 전환시키는 힘은, 저의 추측입니다만, 과거의 시행착오에서 나온 것이 아닌가 합니다.
30년전쟁은 체코 사람들의 희망과는 반대로 결말이 났습니다. 구교도 세력이 이 지역에선 이겼기 때문입니다. 합스부르크 왕조는 다시 이 지역을 통치하게 되었고 그들은 신교도들을 再구교화하는 정책을 폅니다. 체코 사람들은 30년전쟁을 통해서 현명함을 체득했고, 그것은 1989년 11월 공산정권 타도 때 가장 극적으로 발휘되었던 것입니다.
1989년 11월17일 공산당 지배下의 체코 정부는 민주화 시위를 벌이는 학생들을 구타했습니다. 여기에 항의하는 시위가 바츨라프 광장에서 연일 계속되었습니다. 한때는 70만 명의 시위대가 이 광장을 메웠습니다. 1989년 11월24일 이 광장거리가 내려다보이는 언덕 위 국립박물관 발코니에 알렉산더 두브체크(1968년 민주화 운동을 주도했던 공산당 서기장)와 바클레브 하벨(뒤에 대통령)이 나타나 공산당 정권 타도를 선언했습니다. 공산정권은 즉시 정부를 인계하고 조용히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습니다.
오전에 우리는 민주화의 현장인 바츨라프 광장을 거닐었습니다. 지금은 철거된 우리 중앙청과 거의 같은 크기의 국립미술관에도 들어가 보았습니다. 이 국립박물관의 위치가 옛 중앙청을 개조해서 쓰던 중앙박물관과 비슷했습니다. 다시 한 번 중앙청을 부수어 역사를 파괴한 정치인들의 無知에 흥분하는 목소리들이 자연발생적으로 터져 나왔습니다.
한국 사람들은, 특히 지도층은 체코 사람들과는 달리 역사의 실패에서 배우지 못하고 똑같은 형식의 실패를 되풀이하는 아주 위험한 경향이 있습니다. 임진왜란에 적절히 대응하지 못한 교훈을 살리지 못하고 그 뒤 40년 사이에 정묘호란, 병자호란을 겪었습니다. 피할 수 있었던 것을 우리가 스스로 불러들인 전쟁이지요.
6ㆍ25전쟁으로 수백만 명의 인명을 잃고도 지금 한국은 그 전쟁을 초래했던 金正日 세력에 속고 국내 좌익세력의 발호를 허용하는 바보짓을 하고 말았습니다. 한 여행객의 말이 가슴에 와 닿았습니다.
『당하고도 정신 차리지 못하는 사람들!』
프라하 관광은 대부분 도보로 이루어 집니다. 차도와 인도 할 것 없이 시내 대부분의 도로는 작은 직사각형 돌조각을 박아서 만들었기 때문에 편한 신발을 신지 않으면 큰 낭패를 당할 수가 있습니다.
프라하에서 마지막 날, 저녁식사는 프라하의 분위기가 넘치는 곳에서 했습니다. 「콜코보나」라는 술집 겸 음식점이었는데 우리의 허름한 맥주집 같은 곳이었지만 명소라고 합니다. 공산주의 시절 체코의 지식인과 反체제 인사들이 이 술집을 드나 들며 체코의 민주화 운동을 준비했다고 합니다.
이 집의 오리 요리가 아주 일품이었지만 그것이 나오기 전에 나오는 음식이 너무 많아 거의 손도 대지 못한 것이 아쉬웠습니다. 생맥주 한 잔이 1유로(1300원). 독일권에선 와인이 맥주에 밀리고 있었습니다.
9월26일, 우리 여행단은 프라하의 메리오트 호텔에서 駐체코공화국 李浚熙 한국 대사를 모시고 강연을 들었습니다. 체코에 대한 단편적 지식들을 하나의 흐름으로 정리해 주는 것 같은 유익한 강의였습니다. 잘 아는 사람의 이야기는 쉽고 간략한 법입니다.
李대사는 체코의 역사를 잘 해설해 주었는데, 그 핵심은 체코인들이 일찍부터 독일, 오스트리아와 소통하면서 서구와 일체가 되어 움직였다는 점이었습니다. 이 나라는 독일-오스트리아의 게르만 문화권과 함께 발전해 왔기 때문에 슬라브的 후진성을 면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체코인들의 특징을 李대사는 「교양있고, 진지하고, 겸손하며, 잘 훈련ㆍ교육된 점」이라고 요약했습니다. 체코 사람들은 현명하고 똑똑한데도 어리숙한 척하기도 하면서 문제들을 슬기롭게 풀어 간다고 했습니다. 무식하면서도 똑똑한 척하고, 실력이 없으면서도 허세를 부리는 사람들이 지도층에 너무나 많은 한국의 사정과 퍽 다릅니다.
체코는 현재 1인당 GNP가 약 7000달러, 구매력은 1인당 1만4000달러 수준으로 한국을 바짝 좇아 오고 있습니다. 문화와 역사의 축적에서 우러나는 체코의 저력이 아주 단시간에 공산치하의 흔적을 지워버리고 서구로의 복귀를 성공시키고 있는 셈입니다.
우리 月刊朝鮮 여행단은 9월26일 오전 8시30분에 프라하를 출발하여 엘츠비르게 산맥을 넘어 3시간 만에 東獨 지역의 드레스덴에 도착했습니다. 드레스덴이 州都로 있는 작센(영어로는 Saxony)州는 1871년 독일 통일제국이 탄생하기 전엔 독립王國이었습니다. 인접한 프로이센(영어로는 프러시아)과 함께 독일민족의 패권을 다툰 적도 있습니다.
드레스덴은 18세기엔 「북쪽의 피렌체」라는 별명을 들었습니다. 유명한 예술가, 건축가, 음악가들이 베니스 같은 이탈리아 지방에서 많이 몰려와 이 도시를 아름답게 가꾸었습니다.
드레스덴의 거의 모든 건축물들은 1945년 초의 대공습으로 잿더미가 되었습니다. 영국 공군이 주도한 공습으로 이 도시에 몰려 있던 피란민 등 3만 명 이상이 죽었습니다. 이때 불타 없어졌던 오페라 하우스는 동독 정부에 의해 복원되어(7년간) 1985년에 다시 문을 열었습니다. 우리 일행은 이 오페라 하우스의 내부를 30분간 둘러 보았습니다. 공습 때 부서졌던 석재를 다시 끌어모아 복원했기 때문에 외관은 고색창연합니다. 이 오페라 앞 광장(극장 광장) 주변에는 성당, 옛 궁전, 박물관, 교회 등 엄청난 건물들이 즐비합니다. 작센 왕국의 위엄이 되살아나는 듯합니다.
작센 지역 주민들은 신교를 믿었습니다. 18세기 작센의 아우구스투스 왕은 폴란드 왕을 겸하기 위하여 가톨릭으로 개종하여 큰 성당을 지었습니다. 독일에서 가장 큰 신교 교회당(십자가 교회와 성모교회)과 성당이 광장 주변에서 공존하고 있습니다. 작센, 롬바르디, 프랑크 같은 이름은 게르만 부족의 이름입니다. 앵글로·색슨(Anglo-Saxon)족도 게르만족의 일파인데 아마도 작센(Saxony)과 색슨은 같은 뿌리의 종족이었고, 그 일파가 영국으로 건너가 나라를 세운 경우일 것입니다.
古代 한반도에 살던 기마민족의 일파가 일본에 건너가서 古代일본을 세운 경우와 같습니다. 한국의 古代史는 민족의 이동, 특히 북방 기마민족의 南進과 渡海를 이해하지 않으면 제대로 파악되지 않습니다.
오랜 기간 농경민족으로 살아온 우리는 한국사를 붙박이 시각으로 아주 좁게 보고, 해석하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해외에 나와서 바라보는 세계 속의 한국이 더 정확한 우리의 모습일 수 있습니다.
오후 2시20분 우리 일행을 태운, 체코기사 톤다氏가 모는 버스는 다시 북쪽으로 향했습니다. 프로이센의 수도로서 독일 통일의 中心이 되었던 베를린을 향해서 약 3시간30분을 달렸습니다. 車中에서 독일 역사 책을 읽으니 왜 작센 왕국이 프로이센에게 독일 통일의 주도권을 빼앗겼는지 알 것 같았습니다.
19세기 초 프랑스의 나폴레옹 군대가 독일로 쳐들어올 때 작센은 나폴레옹과 동맹했고, 프로이센은 나폴레옹에 맞서 싸웠습니다. 프로이센은 1806년에 대패하고, 베를린 주변은 점령지로 전락했습니다. 프로이센은 절치부심하여 재기를 노리다가 1813년 러시아 원정에 실패한 나폴레옹 군대를 라이프치히에서 대패시키는 데 주역이 되었습니다.
1815년 워털루 전투 때도 저녁 무렵 나타난 프로이센 군대가 웰링턴 장군의 英軍을 도와 나폴레옹 군대를 꺾고 세계사의 전환점을 만듭니다. 프로이센은 이런 결전의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독일민족의 챔피언」이 되어 1871년 독일 통일을 주도할 수 있었습니다. 작센은 독일 민족의 숙적인 프랑스 편에 섰다가 주도권을 놓친 것입니다. 그 차이는 州都인 드레스덴과 首都인 베를린의 격차로 나타난 것입니다.
외교란 결국 국제사회에서 줄을 서는 문제입니다. 李承晩, 朴正熙, 全斗煥, 盧泰愚 네 대통령은 이 줄서기에서 대성공을 거두거나 실수를 하지 않았습니다. 金大中 前 대통령과 親北세력은 세계에서 가장 잘 나가는 나라와는 원수가 되려 하고, 가장 못 나가는 집단과는 친구가 되려 하는 게 아닌가 걱정스런 행태를 보였습니다.
우리 여행단은 9월27일 오후 베를린에 도착해서 중심부를 둘러 보았습니다. 베를린 장벽은 다 철거되고 역사의 유물로서 일부를 남겨 놓았습니다. 거기에다가 예술가들이 여러 가지 그림·글·만화를 남겨 놓았습니다. 현장예술이라고 할까요. 그중 가장 인기가 있는 것은 브레즈네프 소련 공산당 서기장과 동독 공산당 서기장 호네커가 남녀처럼 진하게 입맞춤하는 사진입니다. 동성연애자도 아닌데 어떻게 저럴 수가 있느냐 하는 역한 느낌이 드는 사진입니다.
우리 여행단의 愼鏞碩 단장은 서울올림픽 유치에도 관계한 적이 있는데 그는 『베를린 장벽의 붕괴 등 공산권의 민주화에는 88 서울올림픽이 적지 않은 공헌을 했다』고 설명했습니다. 12년 만에 온전하게 열린 올림픽에 스포츠 강국인 공산권 선수들이 많이 출전하자 이 나라들은 집중적으로 중계방송을 했다고 합니다.
텔레비전을 통해서 소개된 한국의 모습에 동구 사람들은 경악하고 분노했다고 합니다. 美帝의 착취로 「거지 천국」이 되었다는 북한의 선전을 믿고 있었는데 자신들보다도 더 잘 사니 우리는 무엇인가 하는 자각이 생겼다는 이야기를 저도 1996년에 舊동구권을 취재할 때 많이 들었습니다. 이런 좌절과 분노가 공산정권으로 향하고 이런 민심을 소련 서기장 고르바초프가 방치하면서 공산권 붕괴는 시작되었습니다. 1988, 1989년에 폴란드, 헝가리, 체코, 동독, 루마니아 등이 차례로 민주화되는 데 서울올림픽은 큰 심리적 동기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내각제인 독일의 정치권력이 나오는 本山인 거대한 연방의회 건물은 최근에 새로 단장하여 인기가 있습니다. 히틀러 시대인 1933년 이 건물이 불탔는데 히틀러는 이 화재를 정치적으로 이용하여 반대파를 탄압하고 독재권을 잡았습니다. 건물의 정면에는 「Dem Deutschen Volke(독일민족을 위하여)」라는 글이 있습니다. 이 건물의 가운데에 있는 돔은 유리 半球(반구)로 투명합니다. 이 유리돔에는 나선형으로 통로를 만들어 사람들이 등산하듯이 올라갈 수 있습니다.
돔 위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면 국회의원들이 일하는 모습이 보입니다. 國事의 비밀이 새어나간다고 걱정도 했지만 의회는 이 유리 돔을 통해서 국민들이 자신들을 내려다보고 있다는 것을 의식하면서 정치하기로 결정한 것입니다.
베를린은 공습으로 시가지의 85%가 파괴되었다고 합니다. 폭격받은 상태로 그대로 서 있는 유명한 건물이 카이저 빌헬름 추모 교회 건물입니다. 교회가 폭탄을 맞고 무너졌는데 부서진 조각들을 치우고 교회의 前面 탑만을 폭격받은 그대로 남겨두었습니다.
밤에 그 앞에 서 보았습니다. 청동색으로 조명받고 있는 거대한 탑이 절벽처럼, 장엄한 성곽처럼, 전쟁처럼, 신앙처럼, 기괴한 짐승처럼 아래를 내려다봅니다. 저는 이번 여행 중 이 건물 아래 서서 위를 올려다볼 때 가장 큰 감명을 받았습니다. 온전한 교회에서 느낄 수 없는 역사의 드라마, 인간의 악마성과 위대성, 그리고 진리·순수·절대자를 갈구하는 인간의 본성을 폭격의 현장예술에서 느낄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날 저녁 愼鏞碩 단장이 재미있는 이야기를 했습니다. 국내 여행사들이 여행객들에게 제공하는 엉터리 정보 때문에 國富 유출이 수억 달러에 이를 것이란 지적이었습니다.
여행사는 유럽 여행객들에게 호텔에서 자거나 음식을 먹을 때 팁을 얼마씩 주라고 권유하고, 따라오는 가이드는 『팁을 놓고 왔지요』라고 문책하듯이 하는데 그럴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통상적인 봉사 이상의 서비스를 받았다든지 호텔 직원에게 과외의 일을 시켰다든지 하여 마음에서 우러나올 때 팁을 주면 됩니다. 보통의 경우는 팁을 줄 필요가 없습니다. 유럽에는 물이 나쁘니 반드시 생수를 사 먹으라고 당부하는 안내자나 안내문이 있는데 이것도 말이 아닙니다. 유럽의 수도물은 안전합니다. 한국보다 안전합니다. 물 좋은 코모나 바덴바덴 같은 데서 나오는 수도물은 우리 기준으로는 약수인데 왜 생수를 사 먹습니까』
심심풀이로 그동안 이렇게 낭비된 팁과 물값을 계산해 보았더니 적어도 5억 달러는 될 것이라는 결론을 얻게 되었습니다. 정보는 정말 돈인 모양입니다.
베를린 시내를 돌아다니다 보면 건물과 거리 이름에서 「프리드리히(Friedrich)」라는 이름과 자주 만납니다. 프러시아(獨語로는 프로이센) 왕가 출신 역대 왕들의 이름이 모두 프리드리히, 영어로는 프레데릭입니다. 17~18세기 200년간 프러시아가 비약적인 발전을 이룩하여 유럽의 강국으로 등장한 것은 이 기간에 통치한 프리드리히 왕들이 모두 賢君이고 장기집권하였기 때문입니다. 특히 「군인왕」이라 불리는 프리드리히 1세(재위 1713~1740)와 프리드리히 大王(재위 1740~1786) 시절의 73년간 프러시아는 강력한 군사력을 구축하고 여기에다가 경제와 문화와 예술을 덧붙여 베를린 주변을 잘 가꾸었습니다. 한 국가가 발전하려면 위대한 지도자가 연속해서 나와야 한다는 표본이 프러시아일 것입니다.
한국도 몇백 년에 한 번 나올까 말까 한 지도자인 李承晩과 朴正熙를 연속으로 가짐으로써 30년간 비약적인 발전을 했습니다. 두 사람을 이은 全斗煥, 盧泰愚 두 분도 시대가 요구하는 역할을 열심히 하려고 했습니다. 1948~1992년의 44년간이 발전기였다면 金泳三 정부 이후 10년간은 좋게 말하면 조정기이고, 盧武鉉 대통령이 실패하면 혼란기 또는 쇠퇴기라고 기록될 것입니다.
1640년부터 1688년까지 48년간 프러시아를 통치했던 選제후(신성로마제국의 황제를 선출하는 데 투표할 자격이 있는 제후라는 의미) 프리드리히 빌헬름은 유태인과 프랑스 신교도들을 받아들여 나라를 발전시키는 개방정책을 썼습니다. 1671년 그는 베니스에서 추방된 50명의 유태인이 재산을 가지고 베를린으로 오도록 초청했습니다.
그는 또, 프랑스에서 루이 14세가 종교의 자유를 허용했던 「낭트 칙령」을 폐기하자 프랑스의 신교도들인 유그노 6000명을 베를린으로 받아들였습니다. 이 유태인과 신교도들은 성실한 부자이자 기능인들이었으므로 프러시아 발전에 큰 힘이 되었습니다. 1700년이 되면 베를린 시민 5명 중 한 명은 프랑스인이었습니다.
반면, 히틀러의 인종우월주의·인종차별주의는 독일 사람들에게 재앙을 안겨다 주었습니다. 인간이 관용하면 발전하고 증오하면 자신도 망치고 주변도 괴롭힌다는 것을 잘 보여 주는 對照일 것입니다. 관용은 자신 있는 사람만 가질 수 있는 미덕입니다. 증오는 열등감의 발산인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우리가 지도자를 선택할 때 이런 점을 참고로 할 필요가 있을 것입니다.
프리드리히 大王의 사망 후 약 반세기 프러시아도 쇠태와 혼란 속으로 빠져들었습니다. 1806년 프러시아 군대는 예나에서 나폴레옹 군대에 대패하여 베를린이 7년간 프랑스군에 점령당하는가 하면 1848년에는 부르주아 민주혁명이 기도되었다가 진압당하기도 했습니다.
수십 개 국가로 분열되어 있던 독일인들은 이 기간에 민족주의 열정을 갖게 되는데, 이 힘을 잘 이용하여 독일을 통일한 것이 카이저 빌헬름 1세, 외교의 비스마르크, 군사의 몰트케였습니다.
이렇게 하여 통일된 독일 사람들이 그 시너지 효과를 주체하지 못하고 외부로 팽창하면서 두 차례 세계전쟁을 일으켜 거의 1억에 육박하는 인명손실을 끼쳤습니다. 1945년 이후 독일인들은 이런 과거를 청산하고 민주화의 길을 걸었고 1990년의 동서독 통일은 그 자연스런 결과였습니다.
독일의 역사를 살펴보면 국가나 민족은 흥망과 盛衰의 기복을 반드시 거치면서 발전한다는 것을 보여 줍니다. 일직선으로 뻗기만 하는 역사를 가진 나라는 없습니다. 문제는 쇠퇴와 혼란기의 교훈을 살려 다시 발전과 성장을 도모할 수 있는 복원력을 가졌느냐 하는 것입니다. 한국의 오늘을 사는 사람들에게도 이 질문이 가능할 것입니다. 당신들은 30도로 기울고 있는데 복원할 능력이 있는가, 의지가 있는가, 그렇다면 국가와 체제의 틀을 깨지말라! 기우는 배에 구멍을 낼 생각을 하지 말고 구멍 막을 생각을 하라!
9월27일 아침, 우리 일행은 베를린을 출발하여 프랑크푸르트로 향했습니다. 일행 중 네 명이 다른 스케줄로 베를린에 남기로 하는 바람에 버스 탑승자는 36명으로 줄었습니다.
우리 버스는 고속도로를 이용하여 550km 남쪽의 목적지로 달리기 시작했습니다. 독일의 고속도로는 속도제한이 없는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사실이 아닙니다. 우리가 달린 고속도로의 최고 허용속도는 시속 130km였습니다.
바이마르 근방에 와서 교통체증이 생겨 1시간을 손해 보았습니다. 공사 준비를 한다고 3차선을 1차선으로 좁혀 놓았기 때문이었습니다. 우리는 바이마르 휴게소에 들러 맥도날드 햄버거로 점심을 때웠습니다.
바이마르는 인구 6만2000명에 불과한 작은 도시이지만 바이마르 헌법 때문에 유명합니다. 이 도시는 옛날부터 괴테, 실러, 바흐, 리스트, 칸딘스키, 클레, 니체 등 독일정신을 대표하는 소설가, 미술가, 음악가, 철학가들이 거처를 정하고 공부와 작업에 정진했던 곳입니다.
제1차 세계대전에서 독일제국이 패배하고 카이저 빌헬름 황제가 망명해 버린 뒤 독일의회는 모범적인 민주헌법을 기초하기로 하였습니다. 베를린은 당시 공산당 세력과 제대군인이 다투는 무대가 되어 있었습니다. 그런 소용돌이 속에서는 制憲작업이 잘될 것 같지 않았습니다. 의원들은 학구적인 분위기에다가 자유스러운 도시인 바이마르에서 헌법을 기초하였습니다. 국회가 헌법을 통과시킨 것은 1919년 7월31일이고 의회는 그 1주일 뒤 베를린으로 돌아왔습니다.
바이마르 헌법은 그러나 히틀러의 등장을 막지 못했습니다. 히틀러는 쿠데타로 집권한 것이 아니라 바이마르 헌법下의 선거를 통해서 집권한 뒤 헌법을 없애 버리고 독재로 선회했습니다. 이상적인 헌법下의 선거가 독재자를 만들어 낼 수 있다는 것을 보여 준 것입니다.
1919~1934년간의 독일 정부를 「바이마르 공화국이라고 부르는데 이제는 바이마르가 독재자의 등장을 허용한 헌법과 체제의 대명사가 되었습니다. 제2차 세계대전 뒤 서독은 헌법수호청 같은 것을 두고는 자유를 파괴하려는 세력에게는 자유를 주어선 안 된다는 정신에 따라 우리나라 국가보안법보다도 더 엄정한 체제수호법을 운용하여 왔습니다.
20세기 건축에 큰 영향을 끼친 「바우하우스(Bauhaus) 운동」도 바이마르에서 일어났습니다. 바우하우스 스쿨을 1919년에 바이마르에서 만든 이는 월터 그로피우스였는데, 그는 건축물이 예술일 뿐 아니라 일상 생활의 기능과 결합되어야 한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일상적으로 보는 사각형의 아파트나 공공건물은 기능성이 강한 건물인데, 이런 설계는 당시로선 아주 도전적인 것이었습니다.
건축가들은 『평면형 지붕이 어떻게 독일적일 수 있는가』라고 바우하우스 건축가들을 비판했습니다. 폴 클레, 바실리 칸딘스키, 피에트 몽드리안 같은 천재 화가들이 바우하우스 운동에 동참했습니다. 나치는 집권한 뒤 바우하우스 운동이 독일 전통을 파괴한다고 1933년에 해산시켰습니다.
폴 클레는 유태인인데 스위스로 망명하여 많은 그림을 남겼습니다. 저희 일행은 코모에서 바덴바덴으로 올 때 스위스 바젤에 잠시 들러 유명한 현대미술관을 방문하였습니다. 거기에 클레의 특별전이 열리고 있었습니다. 저는 난해한 그림에 익숙지 않는데 클레의 그림 도록을 보다가 「순교자의 머리」라는 제목이 특이하여 찾아가 보았습니다.
소품인데, 중세 때 수술받은 것 같은 흉칙한 얼굴이었습니다. 이빨은 다 망가져 서너 개만 남고 얼굴을 기운 흔적이 있고 눈동자는 뽑혀버린 듯 흰색 동그라미로만 붙어 있고…. 해설문을 보니 클레가 나치 독일치하에 살고 있을 때 유태인이 당하는 고통을 표현했다는 것입니다. 한 시대의 殺氣와 狂氣가 느껴졌습니다.
우리 버스는 프랑크푸르트로 달려갔습니다. 주변 풍경은 심심했습니다. 산이 보이지 않고 농토는 풍요하게 보였지만 프랑스처럼 윤택한 것 같지는 않았습니다.
외국에 나오면 새삼 일본의 위력을 실감합니다. 10년 동안 불경기라지만 GNP(국민총생산) 기준 일본의 國富는 우리가 다녀온 독일과 스위스, 체코를 합친 것보다도 많습니다. 동양에서 뒤늦게 근대화를 한 나라가 어떻게 단시간에 서구를 추월할 수 있었는가, 참으로 경이롭습니다. 일본을 두려워하지 않는 정도가 아니라 우습게 보는 유일한 나라가 한국이란 이야기도 있습니다.
일본은 非西歐 국가로서는 유일하게 선진국에 진입한 나라입니다. 서양 사람들의 동양 사람들에 대한 시각이 달라진 것에도 일본이 기여한 바가 큽니다. 일본의 주체적인 근대화는 비록 주변국가들을 괴롭히면서 진행된 면이 있다고 해도 우리가 알아야 할 대목입니다. 특히 和魂洋才(화혼양재)라고 하여 일본인의 정신을 중심으로 하되 서양의 제도와 문물을 받아들여서 나라를 발전시켜야 한다는 주체적ㆍ실용적 전략은 오늘날에도 효용이 있는 話頭입니다.
月刊朝鮮 여행단이 10일간의 취리히-코모-밀라노-바젤-바덴바덴-뉘른베르크-필센-프라하-드레스덴-베를린 여행을 마치고 프랑크푸르트 공항으로 가는 車中에서 저는 「몽골」을 주제로 한 이야기를 꺼냈습니다. <왜 나는 몽골에 흥미를 느끼는가. 한국인은 누구인가, 나는 누구인가라는 주제로 생각을 많이 해보았다. 나를 알기 위해서, 그리고 한국인을 이해하기 위해서였다. 한국인은 인종적으로는 몽골인이다. 한반도에 들어온 이후엔 북방민족의 종교인 샤머니즘 위에다가 불교·유교·기독교를 받아들였다.
몽골적인 것, 샤머니즘적인 것은 우리의 무의식이나 본능 속에 하나의 유전인자로서 스며 있다. 위기에 처했을 때 신바람이 날 때 감정이 북받칠 때 몽골적인 것이 표출된다.
몽골 인종의 공통점이 있다. 오기가 세다. 유아독존이다. 이 하늘 아래서 자신이 독립적인 존재라고 생각한다. 몽골인은 또 돌아다니기를 좋아한다. 세계 인종 중 가장 광범한 분포를 보인다. 북극에서 칠레 남단까지, 일본에서 이집트까지 퍼져 있다. 몽골인은 자연친화적이다. 자연과 인간을 일치시킨다. 무당의 중계에 의해서 인간이 자연과 대화할 수도 있다고 믿는다.
이러다가 보니까 몽골인은 자연 속에서 잘 견딘다. 자연이 친구이므로 자연도 몽골인을 잘 받아 주는 것이다. 친구의 품 안에서 생존할 수 있는 방법과 체질이 있으므로 1240년에 몽골 기마군단 15만 명이 러시아를 겨울에 관통하여 이듬해 봄에 유럽에 나타날 수 있는 괴력을 발휘한 것이다. 나폴레옹도, 히틀러도 실패한 러시아 동계작전을 몽골인들만 성공시켰다.
군사력 면에서 세계사를 보면 兩大 흐름이 있다. 로마 보병군단과 몽골 기마군단이 그것이다. 중국은 장교 양성 국가기관을 만든 적이 없으므로 군사문화를 제대로 꽃피워본 적이 없다. 한국은 동양 최초로 화랑도라는 장교 교육기관을 만들었으나 이어지지 못했다. 일본만이 동양에서 무사도를 발전시켜 상무국가를 만드는 데 성공했다.
18세기 말의 세계를 보자. 4大 제국이 있었다. 大英제국, 오스만 튀르크 제국, 淸제국, 인도대륙의 무갈제국. 이 중 3大 제국은 유목기마민족 출신이 세운 제국이었다. 튀르크족이 건설한 오스만 제국, 여진족이 세운 淸제국, 중앙아시아에서 남하한 몽골 기사단이 세운 무갈제국(무갈은 이란어로 몽골이란 뜻)이 그것이다.
16세기부터 소총이 보급되자 활을 주무기로 하는 몽골 기마군단의 우월성이 약화되면서 몽골·튀르크계의 세계 지배가 끝장나기 시작한다. 이런 배경을 놓고 볼 때 몽골계 한국인은 자신의 잠재력을 재해석할 수 있다. 한국인의 피 속에 흐르고 있는 거대한 에너지와 신바람과 폭발력은 분명히 몽골적이다.
한국은 몽골계 제국 중 마지막 남은 강국일는지 모른다. 우리는 칭기즈칸이 몽골인이었다는 데 대해 자부심을 느끼지만 지금의 몽골인들은 같은 민족이 한국이란 강국을 만들어 잘 살고 있는 데 대해서 자랑하고 있다고 한다. 몽골적인 장점을 잘 가꾸면 한국이 선진국으로 도약하는 데 써먹을 수 있는 슬기를 찾아낼 수 있다.
하나 여담이 있다. 몽골인의 유전인자를 조사해 보면 알코올이 몸에 들어갔을 때 이를 물과 탄산가스로 분리하여 배출해 주는 효소가 부족한 경우가 다른 민족에 비해 매우 높다. 한국인, 몽골인, 일본인은 술에 약한 체질이 약 30%이다. 서양사람들은 1% 미만이다. 즉, 체질적으로 한국인은 술에 약하고 서양인들이 세다. 그런데 한국인들은 기질적으로 술을 좋아한다. 체질이 기분을 따르지 못한다. 그래서 술만 마시면 헛소리를 하는 사람들이 많다. 이런 사정을 모르는 서양인들은 술을 마시고 酒辭(주사)를 늘어 놓는 이들을 용서하지 않지만 한국에선 워낙 그런 사람들이 많아서 용서가 된다.>
<4~6세기의 東아시아와 유럽은 매우 비슷한 형태의 대혼란기를 겪었다. 東아시아에선 북방 기마민족이 중국과 한반도 그리고 일본 열도로 내려오면서 여러 종족이 나라를 만들고 부수고 하는 격동기를 연출하다가 6세기 말 隋·唐 나라로 통일되었다.
유럽에선 동북쪽에 살던 게르만족이 훈족에 밀리면서 이탈리아, 프랑스, 스페인, 지중해 쪽으로 밀고 들어와 西로마를 멸망시키고 여러 나라를 만들었다가 8세기 프랑크 왕국으로 대충 통합된다.
중국은 삼국시대에서 통일을 이룬 晉이 4세기 초에 북방민족의 남진으로 망해 버리고 그 뒤 중국은 5胡16國 시대로 접어든다. 북방의 다섯 종족이 16개 나라를 중국에서 만들었다는 이야기이다. 흉노, 鮮卑, 羌(강: 티베트계), 갈족 , 저족(티베트계) 등이 그들이다. 한반도에선 북방에서 내려온 기마민족이 이 기간에 고구려, 백제, 신라 지역을 정복한다.
훈족의 침입에 의한 게르만족의 대이동으로 로마문명권의 집권세력은 게르만족이 되었다. 西고트·東고트·반달·색슨·롬바르드·프랑크족이 스페인·이탈리아·프랑스, 영국지역으로 밀려들어 나라들을 많이 세웠다. 이것도 東아시아에서 일어난 기마민족의 여러 나라 건국과 비슷하다.
로마 지역을 점령한 게르만족은 곧 기독교를 받아들여 기독교의 수호자가 된다. 중국을 점령한 북방 유목민족들도 중국의 선진된 문물을 받아들여 漢化된다. 5세기 北중국을 통일한 北魏(북위)가 그런 경우이다.
왜 이런 일이 동양과 서양에서 거의 동시에 일어났는가. 4세기에 몽골고원에서는 기상이변이 일어났다. 小빙하기가 찾아와 목초가 얼어 죽었다. 유목민족들은 목초가 있는 남쪽과 서쪽으로 나아가지 않으면 안 되었다. 남쪽으로 내려간 민족은 중국과 한반도를 점령하고 서쪽으로 간 훈족은 지금의 동부 유럽을 거쳐 중부 유럽까지 진출하여 게르만족을 밀어 버림으로써 로마 문명세계가 대격변기를 맞았다는 이야기이다.
몽골족과 튀르크족은 세계사의 주먹이었다. 準군사조직으로서 농경민족을 쉽게 지배했다. 농경민족은 앞선 정신문화, 종교·제도 등으로 이들을 쇠뇌시켜 문명화시켰다.
누가 이기고 누가 졌는지 판단이 곤란하다. 게르만족의 대이동은 서부 유럽의 지배민족을 로마인에서 게르만족으로 대체했고 북방 민족의 南下는 東아시아 지역의 지배민족을 북방 기마민족으로 대체했다. 거대한 권력교체였던 것이다.>
우리 여행단 40여 명은 독일圈 여행을 끝내고 9월28일에 仁川공항에 무사히 돌아왔습니다. 여행은 모험인데, 사고만 없으면 일단 성공입니다. 돌아와서 아주 재미있는 논문과 접했습니다. 車中 강연·토론 때 자주 제기되었던 한국인과 흉노족·훈족의 관계를 다룬 논문이었습니다.
前 한국기술원 기계공학과 겸직교수로서 한국문화유산의 과학성을 다룬 책을 쓴 적이 있는 이종호씨는 최근호 白山學報에 「게르만 민족 대이동을 촉발시킨 훈족과 韓民族의 親緣性에 관한 연구」라는 흥미로운 논문을 발표했습니다. 서기 375년에 홀연히 西유럽에 나타나 게르만족을 공격하여 로마 지역으로 밀어 버림으로써 로마세계를 붕괴시킨 훈족이 신라·가야 종족과 그 뿌리가 같을 가능성이 있다는 주장이 실려 있습니다.
이종호씨는 훈족은 지금 몽골고원에 있던 흉노족이 西進한 것이라는 전제下에서 훈족이 남긴 유물과 가야·신라 지역의 유물을 비교하여 훈족과 가야·신라족의 뿌리가 흉노에 닿는다는 視覺(시각)을 보여줍니다. 이종호씨가 훈족과 신라·가야족의 연관성을 탐구하게 된 계기는 독일 ZDF 방송의 다큐멘터리가 훈족과 신라·가야족들의 연관성을 맨 처음 제기한 데서 비롯되었습니다. 이 독일 방송 프로그램은 자유베를린 방송사 편집자이자 다큐멘터리 작가인 옌스 페터 베렌트와 미국 코넬 대학과 베를린 공과대학 교수였던 아이케 슈미트가 훈족을 집중 취재한 것을 바탕으로 만든 것입니다.
서기 375년 훈족의 유럽 침공에 의한 게르만 대이동은 로마 시대를 마감하고 중세 암흑시대를 연 역사적 대사변이었습니다. 오늘의 유럽 각국은 게르만족의 여러 종족이 로마 지역을 점령하여 세운 나라들을 뿌리로 삼고 있습니다. 게르만 대이동은 현대 유럽의 모태이기도 한 것입니다. 이런 대사변이 신라 및 가야족(즉 한민족)과 같은 뿌리의 흉노족(훈족)에 의하여 촉발되었다면 한민족을 보는 시각도 많이 달라질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물론 가야·신라족이 서쪽으로 가서 훈족이 되었다는 이야기는 아니고 한민족과 훈족의 조상이 흉노족으로 불리면서 몽골고원에서 살다가 일족은 서쪽으로 나아가서 훈족이 되고 다른 쪽은 한반도로 들어와 한민족의 뿌리인 신라·가야 지배층이 되었다는 의미입니다.
이종호씨는 훈족과 가야·신라족의 유사성을 주로 고고학적으로 설명했습니다.
첫째, 西유럽에 지금도 살고 있는 훈족 후예들에게서 몽골리안 반점이 발견된다.
둘째, 훈족이 쓴 예맥각궁이 한반도에서 쓰인 활과 비슷하다.
셋째, 훈족의 머리 골상이 偏頭(편두·납작머리)라는 점이다. 三國志 魏志東夷傳에는 辰韓(진한·신라지역) 사람들이 모두 偏頭라는 기록이 있다.
넷째, 훈족의 이동경로에서 발견되는 청동으로 만든 항아리는 북방 유목민족의 祭儀용기인데 같은 것이 가야 지방에서 발견된다.
다섯째, 훈족은 이 항아리를 말 잔등에 싣고 다녔는데, 1924년 경주 金鈴塚에서 발굴된 기마인물상토기가 항아리를 싣고 있다.
여섯째, 이 항아리에서 발견되는 문양이 신라 금관에서 발견되는 유물과 비슷하다.
이종호씨는 중국의 삼국지 魏志東夷傳과 김부식이 쓴 三國史記가 북방 종족이 신라로 유입한 기록을 더러 남기고 있는 점에도 주의했습니다. 4세기 무렵부터 신라지역에 거대한 績石木廓墳을 남기면서 등장한 지배민족이 흉노계통의 기마군단일 것이란 說도 인용하고 있습니다.
요컨대 흉노족들은 중국의 漢제국과 싸우다가 점차 밀리면서 세 번 서쪽으로 이동하는데 네 번째 이동은 서기 350년경입니다. 이 네 번째 종족이동의 물결을 탄 흉노족이 먼저 유럽 쪽으로 진출해 있던 훈족과 결합하여 볼가강을 건너 게르만 지역으로 돌입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비슷한 시기에 흉노족의 일파는 東進을 개시하여 가야나 신라로 들어왔다는 것입니다. 훈, 흉노, 한민족의 뿌리는 서기 4세기 이전으로 거슬러 오르면 몽골고원 지대를 누비던 기마민족인 흉노와 연결된다는 이야기입니다.
크게 보면 흉노의 일파는 서쪽으로 나아가 훈족이 되고 다른 일족은 한반도로 들어와 가야·신라 지역을 차지하여 先住民들을 지배하였다는 것입니다. 훈족, 흉노족, 신라·가야인들이 남긴 금관, 항아리, 馬具 등이 거의 같은 모습인 것이 이런 설을 뒷받침한다는 이야기입니다.
이종호씨는 흥미 있는 논문에서 이런 논평을 했습니다.
<훈, 흉노, 한민족의 親緣性을 찾는다는 것이 이제까지 알려지지 않은 퍼즐을 하나 하나 맞추는 것과 다름없다. 고대사를 다루는 퍼즐을 완벽하게 맞춘다는 것은 원래 불가능한 일이지만 375년, 西유럽을 공격하여 새로운 유럽의 질서를 만들게 한 훈족의 지배민족이 한민족일 가능성이 있다는 것은 매우 의미심장하지 않을 수 없다. 이제까지 한민족은 조그마한 한반도 내에서 外侵(외침)만 받고 세계사에서 미미한 역할만 했다고 알려져 있는데 한민족이 세계사의 가장 중요한 한 장면을 장식했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위의 논문이 흥미로운 것은 게르만족 출신인 독일 방송과 흉노족의 후예로 추정되는 한국인이 비슷한 결론에 도달했다는 점입니다. 고고학자 金秉模 박사는 신라·가야는 흉노계, 고구려·백제는 扶餘계(몽골족)가 지배민족이라고 단정합니다. 훈족이 흉노족이라면 당연히 신라·가야족의 뿌리는 흉노·훈족과 이어집니다. 다만, 그런 논리를 공개적으로 전개한 사람들이 없었을 뿐입니다.
우리에게 흥미로운 점은 가야를 흡수통합한 뒤 3국 통일을 이룬 신라의 지배층이 『우리는 흉노계통으로서 중국인과는 出身이 다르다』는 자기 정체성에 대한 의식과 자부심이 있었을 것이라는 점입니다. 삼국사기 列傳 金庾信傳과 文武王의 碑文으로 추정되는 글에서도 『우리의 선조는 小昊金天氏』라는 주장이 나옵니다. 소호김천씨는 귀순한 흉노족에게 漢武帝가 내어준 姓입니다. 삼국통일의 元勳인 金庾信과 文武王은 『우리는 漢族과는 다른 북방 기마민족 출신이다. 우리 조상들은 한때 漢高祖로부터 조공을 받았는데 너희들의 식민지가 될 수는 없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을지 모릅니다.
이런 자부심과 정체성을 근거로 하여 신라는 당시 세계 최대 강국이었던 唐을 상대로 7년 전쟁을 벌여 唐세력을 한반도에서 추방함으로써 삼국통일을 완수하고 한민족의 보금자리를 확보했을 것입니다. 민족이 존재하기 위해서는 이런 자존심과 자의식이 있어야 합니다. 그런 점에서 대한민국의 뿌리인 신라통일의 지배층이 가졌을 흉노족(훈족)과의 연대의식이 연구 대상으로 등장하는 것입니다.
신라통일 이전, 특히 6세기 이전의 신라 고분에서는 중국의 영향을 받은 것 같은 유물은 나오지 않습니다. 북방 기마민족 계통의 유물이 압도적인 가운데 로마 지역으로부터 수입한 유리 그릇이나 칼, 구슬 장식 등이 많습니다. 신라 지배층은 분명히 중국과 뿌리가 다릅니다. 이런 출신의 차이에서 우러나온 우월의식이나 正體性이 신라가 對唐결전을 통해서 민족의 독자성을 확립하는 데 원동력이 되었다면 과장일까요?
고대사는 상상력이 동원된 여지가 많아 재미있습니다. 이런 생각도 해볼 수 있습니다. 가야·신라 지배층은 같은 흉노족 출신으로서 그렇게 적대적이지는 않았던 모양입니다. 신라가 가야를 흡수 통합하는 과정이 아주 평화롭습니다. 신라에 흡수된 金海 금관가야 왕족의 직계 후손인 金庾信이 삼국통일의 주역이 되는데, 이는 가야왕족이 신라에서도 重用되었음을 의미합니다.
唐을 세운 李世民 등 지배층은 그 뿌리가 흉노계 鮮卑族 拓跋部 출신입니다. 이 부족은 北魏-北周-隋-唐으로 이어지는 국가의 건국세력이었습니다. 出身으로 보아 唐과 신라의 지배층은 흉노로 연결되어 친근성이 있었을 것입니다. 이것이 羅唐 연합의 정서적 기반이 되었을지도 모릅니다. 독일圈 여행은 이처럼 한민족의 뿌리에 대한 논점으로 귀결되었습니다. 여행은 자아를 발견하기 위한 모색이기도 한 것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