美 역사상 최초로 여성 大選후보로 등장 가능성 높아
2004년 이후 공화-민주 양당에 뚜렷한 走者 없어
● 힐러리는 「國內 문제」, 라이스는 「國際 외교」전문가로
● 라이스는 홀로 高位職에 올라, 힐러리는 남편 덕에 有名人
2004년 이후 공화-민주 양당에 뚜렷한 走者 없어
● 힐러리는 「國內 문제」, 라이스는 「國際 외교」전문가로
● 라이스는 홀로 高位職에 올라, 힐러리는 남편 덕에 有名人
『도대체 우리가 기대했던 조지 알렌 상원의원은 왜 뜨지 않는 거야』
『힐러리가 여성은 물론 흑인·소수민족들에게서 폭발적인 지지를 누리고 있잖아. 공화당 남자들까지도 흘끔거릴 정도니』
『부시가 재임을 마쳐 가니(미국 대통령은 세 번 연임할 수 없음) 이제 백악관 주인을 공화당에서 민주당으로 바꿔 보자는 분위기도 있는 것 같아』
『콘디(콘돌리자 라이스의 애칭)는 어떨까. 그녀가 나서면 흑인과 소수민족 표도 빼앗아 올 수 있고…, 백인 보수층들이 달아날지 모른다는 것이 문제인데, 그거야 부통령 후보를 잘 고르면 만회할 수 있는 거니까』
『일리 있는 생각이야. 여자는 여자로 맞불을 놓는 것도 괜찮겠지. 좋아 백악관에 얘기해 보자고』
다음날 저녁 워싱턴의 포토맥 강변에 자리잡은 워터게이트 콘도미니엄. 콘디는 손수 끓인 커피 한잔을 홀짝거리며 강가를 바라보고 있었다. 조금 전 부시 대통령을 만나고 돌아오는 길이었다.
『내가 과연 해낼 수 있을까. 부시가 전폭적으로 밀어준다고 했으니…』
2006년 캘리포니아 주지사 선거에 뛰어들려던 그녀를 만류하던 부시가 이번만큼은 흔쾌히 OK를 했다.
이런저런 생각이 끝도 없이 밀려와 동녘이 훤해질 때 눈을 붙인 그녀가 출근 직전 문 앞에 배달된 워싱턴 포스트를 집어 들었다.
「콘디 출마 결정…. 미국 정치사상 여성끼리 첫 大選 격돌 가능성」
1면 톱에 주먹만 한 활자로 제목이 뽑혀 있었다. 공화당 수뇌부들이 콘디의 출마를 밀어붙이기 위해 언론에 미리 흘린 것이다.
콘디는 어린 시절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초등학교 때 그녀는 아버지와 함께 워싱턴을 방문한 적이 있었다.
『아빠, 저 집이 뭐야』
『응, 미국 대통령이 사는 백악관이란다』
『아빠, 제가 밖에서 백악관을 구경해야 하는 건 피부색 때문이에요. 두고 보세요. 전 반드시 저 안으로 들어갈 거예요』
『그래, 그러려무나. 너는 무슨 일이든지 할 수 있단다』
워싱턴 포스트에 특종을 뺏긴 美 언론들은 떠들썩했다. 아직 공화당과 민주당의 당내 競選(경선)이 남아 있는데도, 힐러리 클린턴과 콘디의 본선 대결을 기정 사실화하는 분위기였다. 6년 전 뉴욕 타임스의 칼럼니스트 윌리엄 새파이어가 2008년 大選은 힐러리와 콘디의 맞대결이 될 것이라고 예측한 것이 결국 들어맞고 있는 셈이다.
2002년 말 새파이어는 유태인연맹 모금 집회에서 연설 중 『2008년 미국 大選에서 라이스와 힐러리가 각각 공화당과 민주당 후보로 출마할 것이며 결국 라이스 후보가 승리하게 된다』고 예측했다. 그는 그 이유로 『힐러리가 2008년 大選에 출마하겠지만 그때쯤 캘리포니아 주지사인 공화당의 라이스 후보에게 패배할 것』임을 들었다. 당시 앤 아버에서 발행되는 지역신문 「앤 아버 뉴스」는 이 같은 추측을 기사화했었다.
두 여성의 大選 출마는 美國 정치사에서 많은 것을 상징한다. 1920년 연방 법률 제정을 통해 21세 이상의 여성이 남성과 동등한 참정권을 획득한 후, 처음으로 여성이 정치무대의 주연을 맡게 됐다는 것을 뜻한다. 미국에서는 1848년 뉴욕에서 女權대회가 최초로 개최된 후 1869년 전국여성참정권협회, 미국여성참정권협회가 잇따라 조직됐다. 이 두 조직은 1890년 全美여성참정권협회로 통합됐으며, 1869년 와이오밍, 1890년 워싱턴 캘리포니아 애리조나 캔자스 오리건, 1893년 콜로라도, 1896년 아이다호 유타 등 각 州에서 잇따라 여성 참정권을 얻어 냈다. 힐러리와 라이스는 女權운동가들은 아니지만 「여성도 남성에 결코 뒤질 것이 없다」는 각오로 평생의 이력을 다져 온 사람들이다. 그 점에서 두 사람은 미국 여성운동사의 끝자락에 소개될 만하다.
힐러리의 자서전 「살아 있는 역사(Living History)」의 몇 대목을 인용해 보자.
<나는 시카고 교외 중산층 가정에서 태어났다. 어렸을 때 친구들한테 맞거나 놀림당하고 오면 어머니는 『나가서 맞서라』고 말했다. 고교시절, 똑똑한 여학생들은 남자 친구보다 성적을 잘 받는 것을 부담스러워하곤 했다. 물론 나는 그렇지 않았다. 대학시절 힘들다고 하면 아버지는 『돌아오라』고 했고, 어머니는 『견뎌라』고 했다.
빌이 남부 아칸소주 주지사 시절 공직자 아내들이 늘 도마 위에 올랐다. 한 여성이 손질하기 편한 짧은 퍼머 머리를 했다가 비난을 받았다. 그녀와 연대하기 위해 나도 머리를 강하게 퍼머해 버렸다.
나는 「누구의 아내」로만 불리는 것이 어색했다. 나는 결혼 후에도 내 姓(성) 로댐(Rodham)을 고집했다. 남편은 상관 안 했지만 시어머니는 울었다.
2000년 뉴욕州 상원의원에 출마했을 때 선거 당일, 그동안 투표소에서 늘 빌의 이름만 보다 내 이름을 발견하니 매우 기뻤다.
1995년 중국 北京(북경)에서 열린 세계여성대회에서 매들린 올브라이트가 내게 『무엇을 성취하고 싶은가』라고 물었다. 나는 『여성을 대표하는 限界가 어디까지인지 시험해 보고 싶다』고 말했다>
힐러리는 지난 6월 자서전 홍보차 영국을 방문했을 때, 자신이 생애 동안 미국에서 여자 대통령이 선출되기를 희망한다고 말하면서, 여자 대통령의 남편을 「퍼스트 메이트(First Mate)」로 부르는 것이 어떠냐고 농담하기도 했다(mate의 사전적 의미는 부부 중 한쪽을 뜻함). 그러나 힐러리는 넘어야 할 벽이 있다.
앨 고어 등 다른 민주당 후보가 2004년 大選에 출마했다가 실패하는 것이 시나리오에 딱 들어맞는다. 그러나 만약 2004년 大選에서 민주당이 승리해 당선될 경우 그가 연임에 도전할 것이기 때문에 힐러리의 민주당 후보 入城(입성)은 쉬운 일이 아니다. 이 때문에 힐러리는 아직 『2004년 민주당 후보의 大選 승리를 도울 예정이며 2008년에 출마할 계획은 없다』고 말한 적이 있다.
콘디도 힐러리에 못지않는다. 그녀를 부시 前 대통령에게 소개시킨 브렌트 스코크로프트 前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은 그녀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그녀에게 압력을 가하리라 생각하는 건, 한 번으로 족하지요. 그녀는 무서울 정도로 강인한 성격의 소유자입니다』
「콘디: 콘돌리자 라이스 이야기」라는 제목으로 콘디의 일대기를 쓴 안토니아 펠릭스는 『콘디는 남성이 주도하는 분야에서 자신의 의지를 확고하게 관철시키는 강한 성격』이라고 평했다.
힐러리와 콘디는 어찌 보면 여성이라는 약점을 강점으로 승화시킨 사람들이다. 콘디는 2000년 부시의 선거운동 때 자신이 1980년대 말 러시아를 상대로 무기감축 협상에 참여했을 때를 술회하면서 『협상 파트너가 여성이라는 처음의 충격을 상대방이 잘 넘기면 오히려 플러스 효과를 가져왔다』고 말한 적이 있다.
하지만 콘디는 여성차별은 물론 힐러리가 전혀 겪어 보지 않은 인종차별이란 또하나의 벽을 뛰어넘었다. 그녀의 성공은 하나의 神話다. 그녀는 1950~1960년대 미국 남부 지역 중에서도 가장 가혹한 인종 분리 정책이 시행되던 앨라배마州 버밍햄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콘디는 흑인들의 流血 항거가 난무했던 어린 시절을 이렇게 회고한다.
『그런 엄청난 사건들이 내 추억을 모조리 앗아가 버렸어요. 백인 KKK단의 폭파 협박으로 학교에 가지 못한 날이 더 많았으니까요』
린든 존슨 대통령이 민권법에 서명해 인종, 종교 등을 이유로 공공장소에서의 흑인에 대한 差別 관행이 법적으로 금지된 것이 그녀가 여덟 살 때인 1964년이었다.
그녀의 일대기의 몇 구절을 인용해 보자.
<버밍험에서 자란 흑인 소녀인 콘디가 가장 가슴 아픈 것은 서커스 구경이나 키디랜드 같은 놀이 동산에 놀러갈 수 없다는 현실이었다.
어느 해인가, 여성 정장매장에서 옷을 고른 콘디가 白人 전용 탈의실로 향했다. 이때 白人 판매원이 콘디의 앞을 가로막고는 들고 있던 옷을 빼앗았다. 그리고는 黑人 전용 탈의실을 가리키며 『저기 가서 입어』라고 말했다. 그러자 라이스의 어머니는 분명하게 『다른 곳에서 돈을 더 주고서라도 같은 옷을 구입하겠다』고 말하자 기세에 눌린 직원은 탈의실을 쓰게 했다.
「두 배로 더 열심히!」 그건 단지 두 배로 더 열심히 하면 좋다는 뜻이 아니다. 반드시 두 배로 더 열심히 해야 한다는 의미이다. 나는 그렇게 해서 白人들도 이루기 힘든 일을 모두 해냈다>
힐러리와 콘디는 여성의 한계가 어디까지인지를 시험해 보겠다는 자세로 평생을 살아왔지만, 그 전략은 달랐다.
힐러리는 남편 빌을 뒤에서 지원해 주며, 빌의 승승장구를 등에 업고 揚名(양명)했다. 남편의 끊임없는 外道(외도)에도 불구하고, 르윈스키 스캔들이라는 그 험악한 사건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남편을 버리지 않았다. 사랑 때문이었을까, 필요 때문이었일까. 그 정답은 아무도 모른다.
힐러리는 웰슬리大에서 수학한 후 명문 예일大에서 법학을 전공했으나, 빌을 따라 시골인 아칸소州로 내려갔다. 그곳에서 로즈 법률사무소의 변호사로 일하긴 했지만 빌이 大選에 출마했을 때 그녀 자신이 전략팀을 따로 가동할 만큼 적극적으로 임했다.
빌은 전통적인 퍼스트 레이디의 이미지를 거부하고, 똑똑한 여자라는 이미지를 갖고 있는 그녀를 두고 『나를 찍으면 힐러리까지 덤으로 얻는다』고 말하기도 했다.
힐러리는 백악관 영부인 생활 8년 동안에도 자신의 역할을 찾기 위해 부심했다. 의회를 통과하지 못해 실패로 끝났지만, 대통령 무급 보좌관이라는 직함 없는 직함으로 건강보험 개혁을 시도한 것도 그녀였다. 그는 클린턴의 백악관 시절 사실상 권력의 2인자였다.
반면 콘디는 본인 스스로 스타를 추구했다. 그녀의 아버지는 어릴 때부터 그녀를 「리틀 스타」라 불렀다. 콘디에게 남성은 성가신 존재였는지 모른다. 언젠가 그녀는 『혼자 사는 것이 에너지를 집중할 수 있어서 좋다』고 말한 적이 있다.
그녀는 15세에 덴버大에 입학, 남들이 대학에 입학하는 나이인 19세에 학부를 마치고 26세 때 박사학위 취득과 함께 명문 스탠퍼드大 교수가 됐다. 콘디는 힐러리가 주부로 생활하고 있을 때 화려한 경력을 향해 일직선으로 뻗어 나갔다. 1987년 美 합동참모본부의 전략 핵정책 자문관, 1989년부터 1991년까지 국가안보위원회 소련-동유럽 국장 및 대통령 국가안보 특별보좌관, 1990년대 초반엔 ABC방송의 시사해설자, 그리고 1994년 「최연소, 첫 여성, 첫 흑인」이라는 진기록의 스탠퍼드大 부총장 취임…. 이라크戰을 통해 라이스는 파월 국무장관을 제치고 부시의 신임을 확실히 받아 냈다.
콘디에게도 남자가 있었다. 그녀의 일대기를 보자. <친구인 데보라 카슨에 의하면, 대학원시절 콘디의 남자 친구는 아주 뛰어난 풋볼 선수였던 브롱 코스였으며, 두 사람은 약혼까지 한 사이였다. 콘디는 지정석에 앉아, 미식축구를 관람했으며 NFL(미국 프로미식축구 리그) 선수의 부부동반 모임에도 그와 함께 참석했다. 콘디는 어머니와 함께 웨딩드레스까지 맞춰 둔 상태였지만 두 사람은 결혼 직전에 갈라서 버리고 만다. 콘디는 그 후로도 미식축구 선수를 비롯 여러 남성을 만났지만 다시는 약혼하지 않았다>
「戰士공주(Warrior Princess)」라는 애칭을 가진 콘디의 「남자」에 관한 보도는 2003년에도 있었다. 당시 로맨스 상대역은 前 미식축구 선수인 진 워싱턴(57)씨였다. 워싱턴은 이혼한 前妻와의 사이에 딸 둘(27·15)과 아들(13) 하나를 두고 있었다.
콘디는 NFL 이사로 활동 중이던 워싱턴을, 2002년 폴란드 대통령을 위한 백악관 공식만찬에 초청한 데 이어, 2003년 필리핀 대통령을 위한 국빈 만찬에도 초청했다. 워싱턴은 라이스를 미식축구 경기장 귀빈석으로 종종 초청해 왔다. 두 사람이 정담을 나누는 장면이 자주 목격되면서 워싱턴 정가에서는 『라이스가 사랑에 빠졌다』는 소문이 급속도로 퍼져 나갔다. 하지만 그런 소문도 연기처럼 사라지고 그녀는 다시 독신녀로 돌아왔다.
힐러리는 2008년 7월 전당대회에서 무난히 민주당 후보로 낙점됐다. 그녀의 이같은 순항은 일찍부터 大權 프로젝트를 계획대로 착착 진행시켜 왔기 때문이다. 그녀는 2004년 大選이 끝날 무렵 공화당의 정책결정에 이론적 기초를 제공하고 있는 보수적인 헤리티지 재단에 맞먹는 진보적 싱크탱크를 창설, 민주당의 의제를 부각시키는 데 막후에서 결정적 역할을 했다.
힐러리는 전국단위의 정치 조직도 일찌감치 구축하기 시작했으며 자신의 「정치 활동위원회(PAC)」를 통해 2002년 중간 선거 때 이미 73명의 민주당 후보들에게 60만 달러를 지원, 차차기를 위한 지원세력 확보에 나섰다.
민주당 저변을 형성하는 환경운동가, 노조원, 낙태권 옹호자들로부터 폭넓은 지지를 끌어 모았다. 2003년 영국의 선데이 타임스와의 인터뷰에서 『몇 해 전 누군가가 내게 대처 총리의 모습이 담긴 비디오 테이프를 보내와 그 후로 대처 총리의 차림새를 따라 했다』고 말할 정도로 그녀는 大權의 꿈을 키워 왔다.
힐러리가 그동안 부시 대통령을 앞장서 비판해 온 것도 정권교체를 이룰 적임자라는 인상을 심어 주었다. 그녀는 『부시 대통령은 허버트 후버 대통령 시절 이래 최악의 경제정책을 시행하고 있으며 재정적자 문제를 해결할 아무런 대안을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힐러리는 남편 빌 클린턴 前대통령이 재임 시절 쌓아 올린 재정 黑字를 부시 대통령이 탕진해 버리고 있다고 주장했다.
라이스는 당내 경선을 통과하기가 결코 쉽지 않았다. 2008년 1월 뉴햄프셔州 예비선거와 아이오와州 당원대회를 시작으로 점화한 州別 예비선거에서 몇몇 공화당 후보들과 엎치락뒤치락을 거듭했다. 중산층 이상의 白人 보수주의자들은 그녀에 대해 여전히 강한 거부감을 갖고 있었다.
콘디는 이들을 집중적으로 파고드는 선거전략을 펼쳤다. 그녀는 미국인들의 최고 인기 스포츠 중 하나인 미식축구장에 가서 선수들과 활달하게 어울리는 모습을 연출했다. 牧師(목사)이면서 미식축구 코치를 하기도 했던 아버지로부터 어렸을 때부터 미식축구의 ABC를 배운 그녀는, 미식축구의 미묘한 흐름까지 이해하는 전문가가 됐다.
텍사스 레인저스 야구팀의 구단주였던 부시 대통령과 친해진 것도 처음 만났을 때 미식축구에 대한 얘기로 의기투합됐기 때문이다. 특히 콘디는 『이라크戰에서 공격과 방어를 적절히 구사하는 미식축구를 적용해 분석했다. 전쟁도 미식축구와 다를 게 없다』고 말하기도 한다. 그녀의 남자친구였던 워싱턴은 『콘디는 잃은 것보다 더 많은 땅을 빼앗아 와야 한다는 점에서 정치와 미식축구가 비슷하다고 얘기한다』고 말했다.
그녀는 또 피아노를 연주하는 모습을 텔레비전에 비추기도 했다. 역시 중산층 이상 백인들이 그녀에 대해 갖고 있는 거부감을 희석시키기 위한 전략이었다. 그녀는 글자를 익히기 전 악보를 읽었다.
다섯 살 때 동네에서 첫 연주회를 가졌다. 음악과 과학 교사였던 어머니는 그녀를 천재 피아니스트로 키우려 했다. 그의 어머니는 물론 할머니, 증조 할머니도 피아노를 칠 줄 알았다. 그녀의 어린시절은 피아니스트의 길로 줄달음치는 기간이었다.
13세 때 자신이 천재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을 때까지 그녀는 하루 평균 5~6시간씩 연습에 몰두했다. 하지만 그녀는 2000년 부시를 도와 大選운동을 할 때 하루에 10시간 넘게 피아노 건반을 두드린 적도 있다. 2002년 4월에는 세계적인 첼리스트 요요마와 브람스의 곡을 협연하기도 했다. 어린 시절 못 이룬 꿈이 아팠기 때문일지 모른다.
결국 콘디는 현직 대통령인 부시의 물밑 지원에 힘입어 2008년 7월 공화당 전당대회에서 공화당 대통령 후보로 선출됐다. 자극적인 일부 신문들은 「흑인, 공화당의 頂上에 서다」라고 보도했다. 미국에서 흑인과 히스패닉 등 유색인종들은 대개 민주당을 지지하고 있는 것을 빗댄 말이다.
콘디가 공화당 후보로 선출되는 데는 캘리포니아 주지사라는 시나리오 외에 부통령이기 때문에 많은 지지를 받는다는 시나리오도 있다. 부시 대통령은 2004년 再選을 위해 심장 수술로 건강이 좋지 않은 딕 체니 부통령을 라이스로 교체한다. 부시-라이스로 선거에서 승리한 뒤 2008년에 라이스가 대통령 후보로 나선다는 내용이다
힐러리와 라이스의 본선은 치열하게 전개됐다. 여자라는 점, 그리고 각기 頂上을 향해 치달려 온 야망가라는 점, 정열적이면서도 냉철하다는 성격 정도를 빼놓고는 모든 것이 다른 두 女傑(여걸)의 대결은 全세계의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칼럼니스트인 빌 퍼거슨은 힐러리에 대해 『나는 힐러리의 모든 면을 싫어하지만 내가 유일하게 사랑하는 것은 그녀의 삼차원적인 성격이다. 이는 사람들을 긍적적이든 부정적이든 강렬하게 반응하게 한다』고 말했다. 콘디는 부모가 이름을 「콘 돌체자(con dolcezza·부드럽게)」라는 음악용어에서 따왔으나, 그녀의 목소리와 당돌한 태도 역시 사람들을 흥분하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각 당은 특별 태스크 포스 팀을 구성, 상대방의 약점을 파헤치는 데 주력했다. 공화당은 클린턴 행정부 때 백악관 법률 副고문을 맡고 있다가 자살한 빈스 포스터 얘기를 다시 끄집어냈다. 포스터는 힐러리의 절친한 친구였으며, 힐러리의 각종 비리를 은폐하는 데 앞장섰다는 의혹을 받던 인물이었다. 공화당은 이번에는 힐러리와 포스터가 연인 사이였다는 소문을 퍼뜨렸다. 클린턴처럼 힐러리의 백악관도 결국 부도덕하게 귀결될 것이라는 게 공화당의 흑색선전이었다.
1990년대 힐러리는 라디오 토크쇼에 출연해 포스터와 잠자리를 함께 한 적이 있느냐는 질문에 『그런 생각들을 하다니 도가 지나치군요. 물론 그런 적 없습니다』고 말했었다. 「주디컬 워치(Judical Watch)」라는 보수단체는 힐러리가 상원 의원 때부터 그녀를 「추잡한 여왕」으로 지목하고 이 단체의 「더티 더즌(Dirty Dozenㆍ선거 때 12명을 골라 벌이는 낙선 캠페인)」 리스트의 선두에 올렸다.
이 단체는 힐러리에 대해 화이트 워터 사건이나 상원의원 선거운동 당시 불법으로 200만 달러를 모금했다는 것 등을 거론하면서 「권력에 굶주리고 부패한」 인물로 맹비난했다. 하지만 힐러리는 백전노장이었다. 온갖 스캔들을 여유 있게 따돌렸다.
민주당은 콘디를 「부시의 푸들」이라고 몰아붙였다. 엄청난 재정赤字와 세계 곳곳에서 未完의 사업을 벌여 놓은 부시의 인기는 이미 하락할 대로 하락해 있었다. 민주당은 콘디를 부시의 아류에 불과한 인물이라고 폄하함으로써 그녀의 인기를 싹둑 자르려 했다.
실제로 콘디의 전략팀은 부시와의 관계 설정에 고민을 거듭했다. 하지만 결국 부시 공화당의 창조적 계승이라는 쪽으로 방향을 잡았다. 자칫 부시와 단절하는 모습을 보이다가는 정통 공화당원들의 표를 잃을 것을 우려했기 때문이다.
민주당 태스크 포스 팀은 또 콘디의 남자관계를 캐는 데 주력했다. 평생을 독신으로 지내 온 그녀가 유부남과 부도덕한 관계를 맺었을 가능성이 충분하다는 것이 그들의 판단이었다.
민주당 골수파 흑인단체들은 또 흑인 표가 콘디에게 쏠리는 것을 막기 위해 『콘디는 흑인들을 위해서가 아니라 백인들을 위해서 살아온 사람』이라고 포문을 열었다. 콘디는 이에 대해 2003년 부시 대통령이 미시간 대학의 소수계 우대제도에 반대입장을 밝히는 의견서를 연방 대법원에 제출하도록 지시했을 때, 자신이 反旗(반기)를 들었던 사례를 회고하며 逆攻(역공)에 나섰다.
콘디는 당시 이례적으로 밝힌 서면 성명을 통해 『다양한 학생을 입학시키기 위해 다른 요인들 중에서 인종을 하나의 요인으로 활용하는 것은 적절하다』고 부시와는 다른 입장을 보였다.
국가안보보좌관이 일반 사회 정책에 대한 입장을 성명을 통해 밝힌 것은 전무후무한 일이었다. 콘디는 그때 이미 大選 운동을 염두에 두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콘디와 힐러리 간의 네거티브 전략은 9월 大選 토론회를 고비로 잦아들기 시작했다. 힐러리는 백악관 안주인 8년간의 경험과 상원의원 6년 동안 닦은 국정 전반에 대한 경륜을 유감 없이 발휘했다. 유창한 러시아語와 불어까지 구사하는 콘디는 박학다식의 전형을 보여 주었다.
두 사람의 논쟁은 불꽃이 튀었다. 힐러리는 또박또박, 氣(기)가 잔뜩 실려 있는 목소리로 시청자들을 휘어잡았다. 콘디는 복잡한 사안의 핵심을 전달하는 능력이 탁월했다.
부시 前 대통령이 1989년 12월 몰타에서 열린 미·소 頂上회담에서 미하일 고르바초프 소련 대통령에게 라이스를 가리켜 『내가 소련에 대해 아는 것은 전부 이 사람이 들려준 것』이라고 말했었다. 아들인 부시 대통령도 『라이스가 복잡한 외교 문제를 쉽게 이해하게 해 준다』고 칭찬했다.
사람들은 힐러리는 국제 문제에 약하고, 콘디는 국내 문제에 약할 것이라고 생각했으나 두 사람은 예상 밖으로 전문가 뺨치는 정견을 보였다.
국제 문제에 대해 힐러리는 헨리 키신저의 외교 노선을 뒤따르는 현실주의자다. 국제기구를 존중하고 힘의 균형에 의한 국제질서를 추구한다. 반면 콘디는 외교정책을 인도주의적 관점이나 세계공동체 같은 개념보다 국익의 도구로 활용해야 한다는 소신을 갖고 있으며, 외교는 강력한 힘이 바탕이 돼야 한다고 믿고 있다. 그녀는 2000년 8월 공화당 전당대회 연설에서 『평화는 힘과 함께 시작되며 군대는 평화 유지의 가장 강력한 방패이자 가장 확실한 칼』이라고 말했었다.
두 사람은 각각 공화당과 민주당의 중도주의를 표방했다. 힐러리는 민주당의 급진파들을 달래며 백인 중산층을 끌어들이려 했고, 콘디는 공화당 보수파들을 끌어 안으며 소수민족들과 여성, 샐러리맨들을 공략하는 데 주력했다. 이들의 국내정책에 대한 공약은 대동소이했다.
결국 두 사람의 승부를 가를 최대 변수는 두 사람의 품성이라는 분석이 유력했다. 힐러리는 이 점에서 클린턴의 외조를 받는 모습을 끝까지 유지하려 했다. 대통령에서 대통령의 남편으로 입장이 바뀌어 다시 백악관에 들어가는 클린턴, 그리고 영부인에서 대통령으로 변신하는 힐러리의 모습을 상당한 유권자들이 보기 원했기 때문이다.
짝이 없는 콘디는 이 점만큼은 불리했다. 하지만 지금껏 그래 왔듯이 그녀는 백악관도 혼자서 걸머질 수 있다는 박력으로 밀고 나갔다. 마침내 선거 당일이 왔다. 과연 어떤 결과가 나왔을까.
2008년 미국 大選이 어떤 후보들이 나와, 어떻게 치러질지는 아직 아무도 모른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힐러리와 콘디를 얘기하고 있다. 인간은 걸어 보지 않은 길을 가고 싶어 한다. 이 두 사람은 어렸을 때부터 그 길을 꿈꿔 왔고, 지금 이 시간에도 그 길을 만들기 위해 절치부심하고 있을지 모른다.
꿈꾼다고 꿈이 꼭 실현되는 법은 없다. 콘디가 캘리포니아 주지사에 만족할지도 모르고, 힐러리와 빌이 파경을 맞으며 그녀의 정치인생이 쇄락할지도 모른다. 국내외적인 변수도 한두 가지가 아니다. 하지만 두 여성은 분명히 21세기 초강대국의 女帝(여제)를 꿈꾸고 있다. 꿈꾸지 않은 자에게는 미래가 없다고, 두 사람은 각자의 자서전과 일대기에서 말하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