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신 교육정보] 전직 교사의 세 자녀 조기유학 체험기

미국 교육의 힘은 계속되는 시험에서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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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누구나 불안해하고 걱정하는 것이 유학 가서 처음 적응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혼자 보내도 될까? 시기는 언제쯤이 좋을까? 우리 아이는 과연 영어를 언제부터 알아들을까? 친구는 어떻게 사귀게 될까? ESL(제2국어)이 있다는데 어떻게 운영되고 어떻게 도움을 받아야 하는 건가?
● 아이들은 거의 매일 「퀴즈」라는 쪽지시험을 본다. 한 단원을 마칠 때마다 이렇게 실력을 점검한다. 계속되는 쪽지시험들이 성적에 반영되다 보니 매일 예습, 복습을 하지 않을 수 없고 실력은 늘게 된다. 미국 교육의 경쟁력이 이런 쪽지시험의 연속에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 딸아이는 등교 첫날 아파트 앞까지 오는 학교버스를 타지 않고 내게 데려다 달라고 했다. 학교 앞에 내려다 주고 꼭 안아 주었다. 아이는 비 맞은 새마냥 바들바들 떨고 있었고 눈에는 눈물이 그렁그렁했다. 그런 아이를 뒤로 하고 돌아오는 차 안에서 「과연 내가 잘 하는 짓인가?」하고 스스로에게 의문이 들었다
● 우리 아이들은 예고된 시험이나 과제물은 우수하게 잘한다. 그러나 예고 없이 갑작스럽게 보는 시험이나 학교에서 작성해서 내야 하는 과제물이 있을 경우는 거의 최하 점수다


許 美 寧
1958년 서울 출생. 1981년 2월 건국대학교 국문학과 졸업. 1981년 3월부터 2003년 2월까지 건국대학교 부속중학교 국어교사로 재직.
지난 1월 처음 미국에 와서 둘째 아이가 다니던 고등학교. 올해는 유난히 눈이 많이 내렸다.
2003년 7월, 나는 미국 동부 어느 중소도시의 한 아파트에서 이 글을 쓴다.
 
  아이 셋은 집 가까이에 있는 커뮤니티 컬리지(Community College·2년제 전문대학)의 여름학기 수업(Summer Session)을 들으러 갔다. 수업은 보통 두 시간이지만, 아빠의 반 강요로 아이들은 모두 학교 도서실에서 오후 4시 정도까지 각자 공부를 하고 온다. 다행히 아이들은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다는 걸 빨리 깨닫고 옆을 보거나 다른 길을 기웃거리지는 않는다. 『지금도 늦지 않았으니 서울로 돌아가라』는 아빠의 말이 제일 큰 협박으로 들리는 아이들이다.
 
  첫아이는 서울에서 대학 1년을 다니다 휴학한 후, 美 로스앤젤레스에서 2003년 1월부터 5월까지 어학연수를 한 학기 마치고 가족과 합류했다. 컬리지에서는 이번 여름학기도 ESL(English as a Second Language)코스를 들으라고 하였지만 테스트를 거쳐 상담교사와 의논하여 미국 아이들이 대학을 준비하면서 듣는 읽기와 쓰기 과목을 신청하여 듣고 있다. 어려울 줄은 알았지만 많이 힘든가 보다. 쓰기 시간은 교수님도 친절하고 우리나라 아이들이 문법에 강하니까 어느 정도 자신감도 있고 잘 따라가는 모양인데, 읽기 시간에는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는 눈치다.
 
  그 시간에 오는 미국아이들은 우리로 치면 읽고 쓰는 데는 아무 문제가 없는, 단지 대학 진학을 위해 제대로 된 영어문법을 익히기 위해 온 학생들이 대부분이다. 그에 비해 겨우 읽고 독해가 따로 이루어지는 우리 아이는 그 심각성이 어느 정도일지 짐작이 간다.
 
  서울에서는 그래도 영어 하나는 전교 1∼3% 안에 들던 아이가, 여기서는 영어로 읽으면 몇몇 아이들이 키득거려 그럴 때마다 주눅이 더 들고 자존심도 상하여 心的(심적)으로 최악의 상태를 겪고 있는 듯하다.
 
  집에 와서도 세 아이 중 시간이 제일 모자라 쩔쩔 맨다. 교수님 말씀으로는 자기 시간에 한국 학생은 처음이라며, 다른 나라 학생들도 한 번에 이 시간을 통과한 학생이 없이 거의 두 번을 들었다고 하시더란다.
 
  아이는 점점 큰 벽에 부딪히는 기분이 드는가 보다. 영어를 못 하는 같은 외국인끼리 ESL에서 계속 시간을 보내느니 힘들더라도 한번 도전해 보겠다는 의욕은 처음 1주일, 곧바로 최악의 위기를 맞는 듯했다.
 
  본인의 말로는 高3 때의 단어 실력만 살아 있어도 이 정도는 아닐 거라며 땀을 뺀다.
 
  그렇게 2주일이 지나면서 첫아이는 다시 의욕이 살아나기 시작했다. 쓰기 시간 시험에서 99점으로 1등을 했고, 읽기 시간에는 과제물 해 간 것을 보고 교수님이 「좋아졌다, 감동받았다」고 하시며 열심히 하라고 하셨단다. 이번 학기에 꼭 통과를 하여 가을학기에는 컬리지 영어(College English)를 듣겠노라고 한다.
 
 
 
 영어는 아직도 바닥 수준
 
  둘째아이와 막내는 지난 6월에 각각 10학년과 8학년을 마치고 방학을 했지만, 방학 전 컬리지에서 운영하는 여름학기 프로그램 중 수학과정을 미리 테스트받아 수강신청을 해 두었다. 테스트는 컴퓨터로 실시되는데 결과도 그 자리에서 나온다.
 
  본인의 修學(수학) 가능한 반도 모두 기재해 놓았다. 둘째아이와 막내는 모두 성적이 좋게 나와 나름대로 고민하여 선택을 했는데, 다니다 보니 레벨 선택이 그렇게 잘 된 것 같지는 않다. 두 아이 다 겁을 좀 먹고 실력보다 낮은 반에 수강신청을 한 것 같다.
 
  그래도 6週 완성반으로 운영이 되는데, 숙제도 많고 「퀴즈」(쪽지시험)도 많이 봐 많은 시간을 할애하여 공부하고 있다.
 
  여기는 뉴욕이나 뉴저지 등의 대도시가 아니라 별도의 학원이 그렇게 많이 마련되어 있지 않다(혹 있어도 내가 잘 모를 수도 있고). 그나마 미국 온 지 6개월밖에 안 된 아이들을 방학이라고 서울로 보낼 수 없어 등록을 한 것인데 결정을 잘한 것 같다. 영어는 어차피 시간이 걸릴 테고 우리 아이들의 강점인 수학을 어떤 식으로든 보강해 주어야 했다. 그나마 처음 와서 결정한 것으로는 만족한다. 별도의 규정은 없지만 보통 한 단원이 끝나면 「퀴즈」가 있는데 1주일에 한 번 정도로, 성적에 포함이 된다. 둘째아이는 이번 週 퀴즈에서 75점 만점에 74점을 받았고, 막내는 25점 만점에 24점을 맞았다. 아직 듣기와 말하기가 유창하지는 않지만 수학과목은 그런대로 따라가는 모양이다.
 
  둘째아이는 대학에서 운영하는 SAT(Scholastic Aptitude Test·美 대학 진학 적성 시험)반에도 등록하여 같이 듣고 있다. 수업 내용은 SAT를 푸는 요령과 영어와 수학의 문제풀이를 중심으로 운영되는 수업이다. 수학은 60문제 중 예닐곱 문제 정도 틀리고, 영어는 거의 바닥 점수라 아이가 무척 실망했다. 영어의 깊이가 없어 문제의 핵심 파악이 어려운 모양이다.
 
  SAT의 영어는 우리나라 修能(수능)시험의 언어영역과 비슷하며 Ⅰ. 문장 완성(19문항) Ⅱ. 분석(19문항) Ⅲ. 중요 독해(40문항) 세 부분으로 나뉘어 있다. 시간이 해결해 줄 문제라고 했다. 지금은 당연히 그럴 수밖에 없다고 위안하는 게 내 역할의 전부다. 아이들에게 다음 시험에 좀더 잘하면 된다고 위로를 한다. 둘째아이는 뭐든 완벽하기를 바라고 잘해야 된다는 생각이 강해 더욱 힘들어 한다. 나도 같이 겁이 나면서도 아이가 여유를 가질 수 있도록 하기 위해 혼자 태연한 척을 한다. 그리고 이것도 아이에게 큰 공부라고 스스로 위안하고 있다.
 
 
 
 막내, 학교 테니스部 들어가는 게 목표
 
  세 아이 중에 가장 먼저 수업을 마치고 오는 막내는 수업을 끝내고 나오는 순간부터 점심 먹을 생각을 하는 지극히 낙천적이고 고민 없는 아이다. 혼자서 조정하여 공부해야 할 시간이 제일 많은 아이면서도 계획성이 없는 아이다. 그래도 나는 시간표를 짜 주지 않았다. 짜 줘도 제대로 할 아이가 아니라는 걸 누구보다 엄마인 내가 잘 알기에. 그냥 저 혼자 도서실에서 서성거리거나 이 책 저 책 뒤적이다 오더라도 시간을 보내는 단련을 해야 한다는 게 내 생각이었다.
 
  막내는 그렇게 2週를 설렁설렁 제멋대로 보내다가 드디어 3週째는 제 할 일을 찾았다. 학교에서 준 영어단어책(단계별로 단어가 나와 있고, 단어의 설명과 예문이 같이 기재되어 있고, 뒤에 따로 문제가 나옴)을 외우기 시작한 것이다. 녀석이 스스로 단어 익혀 가는 법을 터득한 것이다. 기다린 보람이 있었다.
 
  막내는 일주일에 세 번 오후 3시부터 4시30분까지 테니스 레슨을 받는다. 서울에서 석 달 정도 레슨을 받다 왔는데 여기서 별 어려움 없이 중급 정도의 반에서 코치를 받고 있다. 워낙 음악이나 미술에 소질도 취미도 없는 아이라 운동으로 태권도와 테니스를 가르쳤다.
 
  학업에서의 시간 안배는 엉터리인 녀석이 테니스 시간 조정 및 체력 조절은 거의 완벽 수준에 가깝다. 레슨이 없는 날은 클럽하우스(150세대 정도의 아파트에 헬스클럽과 수영장, 테니스장이 무료로 운영됨)에 가서 스스로 체력 훈련까지 하고 온다. 9월에는 9학년으로 둘째아이와 같은 고등학교를 들어갈 텐데 그때 학교 테니스부에 들어가 학교 대표선수로 활동하는 정도가 우리의 목표다.
 
  나름대로 세 아이가 여름방학 6週를 여름학기에 쏟고 나면 조금이라도 더 나아지리라 생각하고 있다. 이렇게 나는 세 아이를 데리고 「체험 삶의 현장」이 아닌 「체험 早期(조기)유학의 현장」에 서 있다.
 
  22년간 다닌 직장을 그만두면서 선택한 이 길이 과연 어떤 모습으로 펼쳐질지는 일을 저지른 내 자신도 아무런 확신이 없다. 「비단길」이 될지 「가시밭길」이 될지, 그리고 결과에 대해서는 더더욱 확신이 없다. 다만 애들에게 기회를 준다는 미명하에 나는 오늘도 이 길을 가고 있다.
 
  세 아이의 미래가 어떻게 전개될지는 정말 나도 불안하고 궁금하다. 아이들은 자기들 이야기를 쓴다고 매우 싫어한다. 물론 나도 아이들 심정과 다르지 않다. 유학을 성공적으로 마친 것도 아니고 앞으로 갈 길이 멀고 불확실한데 자기들 이야기를 낱낱이 밝히는 걸 어느 누가 좋아하겠는가? 본인들 이름이 거론되는 걸 너무 싫어하고 두려워해서 나는 아이들 순서로 이름을 대신했다.
 
  그런 아이들의 불만을 뒤로 하고 내가 이 글을 쓰는 이유는 우선 유학에 성공한 아이들의 뒷이야기는 우리 주변에서 어렵지 않게 구해 읽을 수 있다. 그리고 유학 정보도 예전같지 않아 유학원이 대신해 주지 않아도 조금만 관심을 갖고 노력을 하면 인터넷이란 좋은 정보망을 이용하여 얼마든지 얻을 수 있다.
 
  누구나 불안해하고 걱정하는 것이 유학 가서 처음 적응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혼자 보내도 될까? 시기는 언제쯤이 좋을까? 우리 아이는 과연 영어를 언제부터 알아들을까? 친구는 어떻게 사귀게 될까? ESL이 있다는데 도대체 어떻게 운영되고 어떻게 도움을 받아야 하는 건가? 학교는 어떻게 선정해야 좋은가? 한국 아이들이 좀 있는 데가 나은가 아니면 없는 데가 나은가? Honor반이 있고 GHP반이 있다는데, 그 기준이 뭐고 어떻게 해야 대학 진학에 유리한가?
 
  나는 아는 게 정말 별로 없었다. 아이들 유학을 결심하고 이 책 저 책에서 정보를 얻고자 했지만 유학 완전초보 엄마의 눈높이에서 말해 주는 지침서는 없었다. 대부분은 유학을 성공리에 마친 아이들의 부모들 이야기거나 아니면 학교 체제나 운영에 관한 객관적인 槪論(개론)들로서 내가 불안해하고 궁금해하는 세세한 문제들은 다루고 있지 않았다. 그렇다고 그런 궁금한 사항들을 내가 지금 샅샅이 기록할 수 있다는 얘기는 아니다. 지금의 내 상황에서 그나마 기억이 제일 생생할 때, 내가 겪었던 어려움이나 그동안 알게 된 몇 가지 사실을 간략하게 전달할 뿐이다.
 
  올 상반기 해외 유학·연수 비용이 지난해 같은 기간보다 29% 증가한 8억2090만 달러로 사상 최고치라는 한국은행 집계의 도움을 받지 않더라도 평등화 정책으로 하향 평준화된 公(공)교육, 公교육의 자리를 대신한 私(사)교육에 쏟아 붓는 가계지출은 엄청나다. 기업체와 연구기관이 요구하는 실력을 갖춘 졸업자를 배출하지 못하는 우리 대학을 버리고 교육 선진국으로 떠나는 유학생 행렬을 보면서 지금 이 땅의 부모들은 다 같은 심정을 안고 살아가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지금의 내 경험이 아이들의 유학을 먼저 마친 유경험자인 선배들에게는 너무나 하찮고 우습게 들릴지도 모른다. 또 염려스러운 건 나의 짧은 지식으로 제대로 알지 못하고 전달하는 것이 있지 않을까 하는 것이다. 그런 걸 알면서 나는 감히 용기를 내어 이 글을 쓴다. 나처럼 너무나 초보자이면서 경험이 없고 겁이 많은, 早期유학을 한 번이라도 생각했거나 지금 생각 중인 나 같은 심약한 부모를 위해서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었으면 하고 말이다.
 
 
 
  첫 한 달의 기억
 
 
 가장 긴 하루
 
   첫아이는 2002년 12월27일 로스앤젤레스로 먼저 어학연수를 떠났다.
 
  2003년 1월11일 나는 둘째아이와 막내를 데리고 뉴욕 케네디공항行 아시아나항공 비행기에 올랐다. 미국에서 사업을 하는 친구가 미리 얻어 놓은 아파트의 입주 예정일이 1월14일이라 친구의 집에서 며칠 신세를 졌다. 미국은 차가 없으면 꼼짝하지 못하는 곳이라며 온 지 나흘 만에 친구가 차부터 구입하자고 했다.
 
  운전도 서툰데다가 길도 아직 익숙지 않은 겨울 밤길에 눈까지 내렸다. 앞서가는 친구 차를 따라가면서 서러움과 두려움이 동시에 밀려왔지만 나를 보호해 줄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다만 내가 보호해야만 할 두 아이가 운전하기를 너무 싫어하는 제 엄마를 잘 알기에 『괜찮아? 엄마, 정말 괜찮아?』 하면서 눈을 동그랗게 뜨고 바짝 긴장하고 있을 뿐이었다. 두 아이는 친구의 주선으로 집 근처의 학교에 보냈다. 마침 겨울방학과 시험기간이라 1월28일에야 첫 등교를 할 수 있었다.
 
  둘째아이는 10학년으로 고등학교 1학년에, 막내는 8학년으로 중학교 2학년에 입학을 시켰다. 일단 담당 상담교사를 만나 제반 사항을 의논하고 과목과 레벨을 정해야 했다. 우선 아이들 영어 실력이 어느 정도인가가 관건이라 입학절차를 마치자마자 ESL 선생님으로부터 레벨 테스트를 받았다. 시험에서 두 아이는 다 양호한 평가를 받았다. 미국에 오기 전부터 외국 학생들을 위한 ESL반이 있다는 말은 들었지만 막상 어떻게 운영되는지는 알지 못했다. 외국인이 그렇게 많지 않은 미국의 중소도시(인구 50만 명에 한국인은 250명 정도)라 이 학교는 작년에 처음 ESL을 운영하게 되었다고 한다.
 
  친구와 같이 갔지만 제도 자체를 잘 이해할 수 없어서 나는 그냥 그들이 정해 주는 반에 아이를 넣었다. 중학교와 고등학교 ESL 선생님은 같았지만 상담교사는 달랐다. 막내도 중학교 상담교사를 만나 겨우 입학절차를 마쳤다. 다행히 ESL 선생님이 같아서 많은 도움을 받았다. 그렇게 입학절차를 마치고 드디어 학교 가는 첫 날.
 
  둘째아이는 제대로 잠을 자지 못하는 눈치였다. 서울에서 무엇이든 자신감 있게 잘하던 아이가 두려움에 떨고 있었다. 미국아이들이 내 옷을 보고 뭐라고 그러면 어쩌나, 영어를 못 한다고 뒤에서 흉을 보면 어쩌나, 선생님 말씀을 하나도 못 알아 들으면 어쩌나, 점심은 누구랑 먹나… 나는 아이의 불안한 심정을 이해할 수 있었다. 어른인 나도 이렇게 불안하고 두려운데 하물며 한창 신경이 예민하고 섬세한 나이에 전혀 다른 환경에서 아이 혼자 헤쳐나가야 할 장애는 보통 두려움 이상이리란 생각이 들었다.
 
  막내는 의외로 尋常(심상)했다. 남자 아이라 그런지 그냥 손 한 번 들어 보이더니 유유히 校舍(교사) 안으로 사라졌다. 아이들이 돌아올 때까지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서성거렸다. 아무 일도 손에 잡히질 않았다. 바싹바싹 입이 마르고 피가 마르는 기분이 들었다. 오후 3시10분, 학교 버스를 타고 막내가 먼저 들어왔다. 들어오는 얼굴 표정부터 살폈다. 심상한 얼굴로 배고프다며 먹을 것을 찾았다. 얼마나 다행인지!
 
  20분 뒤 드디어 둘째아이가 벨을 눌렀다. 지친 모습이었지만 다행히 얼굴은 밝았다. 어땠냐고 묻는 내게 녀석들은 경쟁하듯 학교에서 있었던 일을 쏟아놓기 시작했다. 막내 녀석은 엄마 앞에서는 태연한 척을 했지만 은근히 긴장을 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ESL반에서 만난 아이들이 교과서 받는 일과 자리 배정 받는 일들을 모두 친절하게 잘 도와주고 점심도 같이 먹자고 해서 같이 먹고 버스기사가 무서울까 봐 걱정했는데 친절해서 좋았다며 안심하는 눈치였다. 걱정스러웠던 둘째아이는 ESL 선생님께서 소개해 준 같은 학년의 ESL반 친구가 모든 교실을 시간마다 데려다 주고 점심도 같이 먹었다고 한다. 첫날이라 학교 지리를 잘 몰라 집에 오는 버스를 놓칠 뻔했으나 역시 ESL반에서 만난 친구의 도움으로 버스를 놓치지 않았다고 한다. 큰 짐을 벗은 기분이 들었다. 미국에 와서 가장 긴 하루였다.
 
 
 
 학부모 면담
 
  텔레비전과 신문, 컴퓨터 없이 한 열흘을 지내면서 완전히 세상과 고립되어 낙도에 떨어진 느낌이 들었다. 우리에게 한꺼번에 주어진 많은 시간을 감당해 내기가 쉽지 않았다. 한국에서 부친 뱃짐이 예정보다 늦어져 하루하루를 일회용품으로 살면서 그래도 아이들은 무료함을 잘 달래는 편이었다. 일주일을 그렇게 보내다가 누구 하나 영어를 제대로 하는 사람은 없었지만 텔레비전과 컴퓨터는 사야겠기에 용기를 내서 나갔다. 텔레비전은 모델을 보고 어렵지 않게 구입할 수 있었다. 문제는 컴퓨터였다. 모델을 골라 구입은 했는데 프로그램 설치가 만만치 않았다.
 
  서울에서 설치방법을 잘 알아 온다고 왔지만 우리가 설치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그래도 막내가 남자라고 그 이상한(?) 영어로 판매원과 두 시간여를 끙끙거리더니 영어와 한글 프로그램을 모두 설치하는 데 성공하였다. 판매원도 녀석이 되지도 않는 영어로 애를 쓰는 게 안됐는지 최선을 다해 주는 눈치였다. 나는 몰라서 못 하고, 셋 중에 그래도 좀 나은 둘째아이는 겁이 나고 틀리면 어쩌나 하는 두려움 때문에 입을 닫고, 결국 철부지 막내 녀석이 영어로 판매원과 함께 케이블과 인터넷까지 설치했다.
 
  다른 학교로의 轉學(전학)을 며칠 앞두고 ESL 선생님으로부터 학생들 부모와 면담 신청을 받는다는 안내문이 왔다. 나는 면담 날짜와 시간을 적어 아이 편에 보냈다. 이민자들이나 駐在員(주재원) 가족, 그리고 유학생 가족 등 이곳 미국에 와 있는 대부분의 부모들이 아이들을 학교에 보내고 나서 학교를 찾아가거나 선생님 면담을 하는 일이 드물다고 한다. 일단은 영어가 되지 않아 그런 경우가 많고, 다음은 바빠서 그렇다고 한다. 이곳 미국 초·중·고에서도 부모의 역할은 다양하다고 한다. 학기 초에 반 전체 학생의 부모들이 정해진 날 자신의 아이 자리에 앉아 담임을 만난다. 그 담임으로부터 1년간의 학급운영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1년간 우리 아이를 맡을 선생님이 누구인가를 확인하는 기회다. 보통 일과가 끝나는 저녁 시간에 실시하기 때문에 아버지의 참여도가 높다.
 
  그런 학기 초의 전체 학부모회의 이외에도 학부모들의 자원봉사가 수시로 이루어진다. 우리나라 부모들의 참여도는 낮다고 한다. ESL반 학생은 모두 외국인이니 더 말할 나위도 없다. 아이의 말로는 면담신청을 한 부모는 나 혼자라고 한다. 나는 아이의 전학도 있고 마지막 인사를 하여야 할 것 같아 못 하는 영어지만, 하고자 하는 말을 쪽지에 메모해 가지고 갔다. 선생님은 입구에서부터 아주 반갑게 나를 반겨 주셨다. 면담은 ESL반 교실에서 이루어졌다. 선생님은 두 아이가 수업 시간에 공부한 내용을 따로따로 파일에 담아 놓았다.
 
  내가 영어를 잘 못 하는 걸 알고 내가 알아들을 수 있도록 천천히 쉬운 단어를 사용하며 애를 써서 설명해 주었다. 내가 다 알아들을 수는 없었지만 선생님의 마음은 읽을 수 있었다. 전학을 가게 된 사정을 대강 얘기했다. 그동안 고마웠다고, 나의 영어가 부족해 선생님께 내 마음을 다 전할 수가 없다고 했다. 근사한 말을 메모해서 열심히 연습했지만 연습한 건 하나도 생각이 나지 않아 결국 내 엉터리 영어로, 또 단어만 나열하고 말았다. 하지만 선생님이 나를 포옹하며 눈물을 흘렸다. 짧은 순간이었지만 나는 감사해서 눈물을 흘렸고, 선생님은 영어로 표현하지 못한 내 마음을 읽고 울었다.
 
 
 
 「오드」(odd·홀수)를 못 알아들어서…
 
  둘째아이는 영어로 말하는 것 자체도 어색해하고 자신이 하는 말이 틀리면 어쩌나 하는 두려움으로 등교 첫 週는 거의 입을 다물고 지냈다고 한다. 옆에서 친구들이 하는 말을 듣고 웃기만 하니까 친구들이 『참 말이 없는 아이구나』 하더란다. 서울에서는 학교 다니면서 쉬는 시간도 모자라 수업시간까지 떠들다가 종종 꾸지람을 듣던 아이다.
 
  등교 첫날 첫 수업은 무슨 말인지 거의 못 알아들었다고 한다. 일주일 정도 지난 후 수업 진행을 이해하게 되면서 미리 집에서 예습을 해 가니 아는 단어들은 거의 다 들리고 수업의 70∼80% 정도를 이해하게 되었다고 한다. 근 한 달 동안 과제나 시험예고를 선생님께서 칠판에 적어 주실 때는 괜찮았지만 말로 해 주실 때는 정확히 알아듣지 못해서 해야 할 범위보다 훨씬 많이 해 가지고 가기도 했다.
 
  항상 자신감이 넘쳐 걱정인 막내는 미국 와서 한 달은 마음 고생을 많이 했다. 아이들이 분명 자기를 보고 무슨 말을 하는 것 같은데 알아들을 수 없고, 선생님이 하시는 말씀도 거의 들리지 않았단다. 흩어져 있는 교실을 제대로 못 찾아 헤매면서도 말이 제대로 나오지 않아 더듬거렸다. 사물함 열고 닫는 아주 간단한 일도 3일간이나 친구의 도움을 받아야 했다. 姓(성·last name)과 이름(first name)을 바꾸어 말한 적도 많다. 수학 과목은 숙제가 있다는 것을 첫날부터 느낌으로 알아들었지만 나머지 과목들은 1주일이 넘어서야 알았다.
 
  수학 숙제는 p.100∼110까지 오드(odd·홀수) 번호만 해 오라고 했는데, 「오드」를 못 알아들어서 짝수, 홀수 페이지를 모두 해 가고 과제도 기한 날짜(due day)를 못 알아듣고 미리 해 가지고 가서 사물함에 며칠씩 보관하기도 했다.
 
 
 
  미국의 교육제도
 
 
 ESL(English as a Second Language)
 
  두 녀석이 모두 매일매일 적응해 나가는 게 나아 보였다. 서울에서 가족들이나 친구들이 제일 궁금해하는 것이, 애들이 적응을 잘하는가였다. 모두가 한결같이 물어보는 게 『적응은 잘해?』였다. 그 「적응」의 정도가 누가 자로 재어 논 것도 아니고, 어느 시기에 얼마만큼 해야 잘하는 건지 나 자신도 잘 모른다. 일단은 학교 가기 싫다고 안 하고, 괜히 왔다고 안 하고, 돌아가겠다고 안 하고, 학교에서 있었던 일을 신나게 말하고, 부정적인 면보다 긍정적인 면을 더 많이 얘기하고 그러기에 나는 그냥 나 편한 대로 애들이 잘 적응해 가는구나 생각한다. 그래서 물어보는 이에게 그냥저냥 잘 적응해 가는 편이라고 애매모호하게 대답하였다.
 
  아이들이 그나마 마음의 위안을 삼으며 좀더 빠른 시간에 안정을 찾아갈 수 있었던 이유는 학교의 ESL 수업 덕분이라고 본다. ESL은 영어가 모국어가 아닌 외국인을 위하여 운영되는 영어 보충수업이다. 먼저 다니던 학교 ESL반에는 다행인지 불행인지 한국 아이가 한 명도 없었지만 모두 영어를 잘 못 하는 외국아이들이라 그나마 나름대로 同病相憐(동병상련)의 마음으로 서로 위안이 되었던 모양이다. 나중에 알았지만 ESL 수업 운영은 학교마다 조금씩 차이가 있었다. 우리 아이들이 미국에서 다녀본 학교가 단 두 학교이니 내가 비교할 수 있는 학교도 두 학교밖에 안 되지만, 같은 지역에서도 이렇게 달리 운영되는데 지역이 넓고 州(주)마다 법이 다른 미국에서 「이것이 ESL 운영 방법이다」라고 딱 잘라 정의를 내리기는 어려울 것 같다.
 
  아이들이 처음 다닌 학교에서는 ESL 제도가 작년에 처음 운영되었다고 한다. ESL반 전체 학생은 중학교와 고등학교를 합해 20여 명 정도로 그 숫자는 항상 일정하지 않았다. 학생 수가 많지 않아 중학교와 고등학교의 ESL이 같이 운영되었다. ESL 선생님이 두 분으로 한 분이 중학교 아이들을 담당하고 다른 한 분이 고등학교 아이들을 담당했다. 우선 아침에 담임 조회를 ESL 선생님이 맡고 그날 그날의 일정을 알려 준다.
 
  고등학생인 둘째아이의 경우 수학, 과학, 컴퓨터, 그리고 ESL에서 기초적인 영어 수업을 들었다. ESL에 소속된 학생들 중 같은 학년이거나 같은 과목을 들어야 할 경우 될 수 있으면 같은 레벨의 수업을 듣게 한다. ESL 선생님이 동행하여 교실 뒤에 앉아 아이들을 보살펴 준다. 수업 중 퀴즈나 시험이 있을 경우 이해를 못 하는 아이는 따로 불러 같은 내용의 퀴즈와 시험문제를 부연 설명으로 이해할 수 있도록 한 다음 시험을 치르게 한다.
 
  둘째아이는 학교에 간 지 이틀 만에 과학 시험을 봤다. 첫 시험은 地形(지형)에 관한 단원이었는데 시험을 보는 줄도 몰랐고, 시험 유형도 전혀 모르는 상태에서 시험을 보아 72점을 받았다. 1주일 뒤 배운 단원에서 같은 유형의 시험이 있었다. 아이는 새벽 2시까지 그 단원을 모두 외워서 시험을 봤다. 결과는 102점(100점 만점에 혹시라도 실수하면 덤으로 받을 수 있는 보너스 문제가 있는데, 그 보너스 점수 문제까지 다 맞은 점수이다). 과학 선생님이 따로 불러 칭찬을 아끼지 않으셨다고 한다. 둘째아이는 그렇게 해서 1주일 후 두 번째 시험부터 ESL 선생님 도움 없이 정규반에서 일반 아이들과 수업을 받고 시험을 보았다. 둘째아이는 우리나라 아이들의 강점인 수학과 과학에서 아주 특출한 재능을 보여 줬다.
 
  과학 선생님은 『몇 년 만에 너같이 열심히 하는 학생을 가르치게 돼 기쁘다』고 하셨단다. 손재주가 별로 없는 이곳 아이들에 비해 꼼꼼하고 성실한 둘째아이의 그림 솜씨로 과학 선생님 수업 자료를 맡아서 그려다 드렸다. 미술을 전공할 거냐며 놀라면서 아이들 보는 데서 보너스 점수를 주었단다. 그렇게 둘째아이는 학교에서 괴퍅하고 점수 안 주기로 유명하여 학부모 항의가 많이 들어온다는 과학 선생님을 감동시켰다. 전학을 가게 되어 인사를 드리러 갔더니 너무 서운해하시며 언제든 도움이 필요하면 찾아오라는 당부의 말씀도 했단다.
 
 
 
 『나도 그 기분 알아요』
 
  막내도 역시 중학교 담당 ESL 선생님이 같이 다니면서 뒤에서 봐주었다. 사회성이 좋아 걱정을 덜했지만 나름대로 마음의 고충이 있었나 보다. 어느 날인가 막내에게 『엄마가 영어도 못 하고 제대로 하고 싶은 말도 못 해 요즘 얼마나 속상한지 아니?』 한 적이 있었다. 나는 무심코 한 말인데 녀석은 심각하게 『나도 그 기분 알아요』하는 거다. 순간 겁이 더럭 났다. ESL반 아이들은 안 그런데 정규반 아이들과 수업 할 때 몇몇 못된 아이가 자기를 흉보는 소리가 들릴 때도 있단다. 『쟤, 영어 하나도 못 하나 봐. 바보 아니야?』 그러면 녀석은 속이 부글부글 끓을 텐데 그냥 참았던 모양이다.
 
  며칠 뒤 수학 시험이 있었다. 녀석이 이미 서울에서 배우고 간 단원이었다. 둘째아이의 성화로 수학에서 필요한 모든 용어들을 이미 집에서 외우고 갔다. 녀석은 계산기 없이 만점을 받았다. 놀리던 녀석들이 『쟤 천재 아니야?』 하더란다. 『너는 어떻게 계산기 없이 하냐』며 그게 계산기 없이 계산이 가능하냐고 하더란다.
 
  그래서 우리나라 애들은 다 계산기 없이 이 정도는 푼다고 하니 놀라더란다. 녀석은 수학 시험으로 자신의 위치를 확실히 구축하고 친구들과의 친분을 돈독히 해 갔다. 밸런타인데이에는 어떤 여자아이가 몇몇 남자아이들에게만 초콜릿을 주었는데 자기도 받았다며 받아 온 초콜릿을 사진 찍어 놓기까지 하였다. 그렇게 어렵게 처음 두 週 정도를 보내면서 아이들이 몸도 마음도 조금씩 커 가는 느낌이 들었다. 언제 생각해도 아픈 만큼 성숙해진다는 말은 진리인 것 같다.
 
 
 
 계속 이어지는 퀴즈(Quiz)와 시험(Test)
 
   두 달을 그렇게 다니다가 지난 4월1일 전학을 하였다. 새로 전학한 학교는 먼저 학교보다 규모가 컸다. 한 학년이 640명 정도로 중학교와 고등학교가 완전히 분리되어 서로 2km쯤 떨어져 있다. 여기도 역시 중학교와 고등학교의 ESL 선생님은 서로 왔다 갔다 한다. 이번 학교의 ESL은 학생 수가 많고 중학교는 10여 명으로 8학년엔 한국 아이가 한 명이 더 있다고 한다.
 
  고등학교는 20여 명으로 10학년에 우리 아이 하나만 한국 학생이다. 지금의 ESL이 먼저 학교와 다른 점은 우선 ESL 학생 개개인을 각자의 레벨에 맞는 정규 수업반에 등록시킨다. 그 다음 정규반 아이들의 자습시간에 해당하는 2교시(1시간10분 정도) 동안 ESL반 아이들은 ESL반에 모여 ESL 선생님의 보충을 받거나 도움을 받는다. 이번 학교의 ESL 선생님은 ESL 학생의 全과목 보충 선생님과 학교 생활에 도우미 역할을 하는 거다.
 
  아직 둘째아이가 대학에 원서를 내지 않아 잘 모르지만 이곳 미국 학생들이 대학에 원서를 낼 때 고등학교 상담교사의 추천서가 필요한데, 외국인 학생은 ESL 선생님의 추천서가 같이 필요하다고 한다. 먼저 유학을 보낸 사람들의 말에 따르면 빨리 ESL을 마치고 나오는 게 좋다는 사람도 있고, 그래도 충분할 때까지 있는 게 좋다는 사람도 있다. 나도 이제 넉 달을 학교에 보내본 사람으로 뭐라고 단정지을 수가 없다. 일단은 내가 ESL을 나오고 싶다고 나오는 게 아니라 어느 정도 실력이 돼야 하는데, 그 기준을 평가하기 위한 시험이 정기적으로 실시된다. 시험은 어휘력, 작문, 독해, 듣기, 말하기 등의 내용을 평가한다. 점수에 따라 다음 네 단계로 나뉜다. 레벨 0(0∼54점), 레벨 1(55∼172점), 레벨 2(173∼242점), 레벨 3(243∼264점), 레벨 E/M(exit/monitor·265∼300점). 마지막 단계가 되면 의미상 ESL을 마치게 되는데 그렇더라도 언제든지 ESL 선생님의 도움을 받을 수 있다.
 
  둘째아이의 경우 먼저 학교에서 3월에 본 ESL 시험에서 레벨 2를 통과했고, 5월에 본 시험에서 레벨 3을 통과했다. 막내는 4월에 본 시험에서 레벨 1을 통과했고, 그 후론 더 보지 않았다. 보통은 1∼2년 사이에 대부분의 아이들이 ESL 과정을 마친다고 한다. 둘째아이도 다음 학기 정도만 더 들으면 될 것 같다.
 
  나는 처음 아이들이 「퀴즈」를 봤다고 해서 흔히 라디오나 텔레비전에서 말하는 말 그대로의 퀴즈인 줄 알았다. 아이들이 말하는 퀴즈는 짧게 설명하자면 「간단한 시험」이다. 굳이 우리 식으로 표현하자면 쪽지시험 정도로 생각하면 될 것 같다. 물론 성적에 들어간다. 과목별로 거의 每週 퀴즈가 있고 그보다 좀더 긴 기간을 두고 시험(test)이 있다. 누가 미국식 열린 교육에 시험이 없다고 했는지 나는 도무지 이해가 안 된다. 몇 년 전 月刊朝鮮에 게재된 글에 「미국에서 실패한 열린교육을 가져간 한국교육」이라는 문구가 생각난다.
 
  내가 본 미국식 교육은 정말 시험의 연속이다. 끊임없는 시험과의 싸움이다. 우리는 얼마 전 우리 아이들을 시험 지옥으로부터 해방시킨다는 美名(미명)하에 시험의 수를 과감히 줄였다. 그래서 1학기에 중간·기말고사 두 번, 그리고 2학기에 중간·기말고사 두 번으로 1년에 총 네 번의 시험을 치르게 된다. 물론 7차 교육과정으로 수행평가 실시에 따른 과목별 특성으로 중간 중간 쪽지시험을 치르는 경우가 있긴 하지만 대부분은 교육정책상 시험을 피한다.
 
  대부분의 중·고등학교가 같은 시기에 시험을 보기에 학생이 있는 집에서는 이 시험 기간이 무슨 큰 전쟁을 치르는 기간으로, 온 가족이 같이 긴장하고 시험이 끝나는 날 같이 허물어지게 된다. 시험이 끝나는 날 극장과 노래방 심지어 찜질방까지 고물고물한 중고생들로 만원사례를 이루는 우리만의 진풍경을 만들어 내기도 한다.
 
  그나마 초등학교는 그 시험조차도 없다. 담임 선생님의 재량에 따라 많이 다르지만, 정기적인 시험제도는 사라진 것으로 안다.
 
  두 아이 모두 늘 퀴즈와 시험공부 그리고 과제에 많은 시간을 할애한다. 물론 우리 아이들의 경우는 영어가 부족하여 시간이 더 소요된다. 하지만 학업에 뜻이 있는 대부분의 이곳 아이들도 연일 계속되는 퀴즈와 시험 그리고 과제로 인해 다른 걸 별로 생각할 겨를이 없다. 여기서도 학업에 별 뜻이 없는 아이는 시간이 많다. 하지만 본인이 공부를 해야겠다고 마음 먹은 아이들은 각 과목 모두 오너(honor)반에 들려고 노력하고 그 반에서도 「A」를 받으려고 애쓴다. 그들의 학업의 강도는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세다. 방과후에는 특별활동 성격의 특기·적성을 살릴 수 있는 개인적인 레슨이나 운동을 빼고는 학업을 위한 또 다른 학원의 필요성을 못 느낀다. 대도시에 있는 학교에 다니는 우리나라 早期 유학생의 경우 서울과 마찬가지로 각종 학원을 다니게끔 주변 여건이 형성되어 있다고 한다.
 
  성격이 느긋한 막내는 역시나 건성건성 순간의 암기력만을 믿어 제 누나보다는 공부량이 훨씬 적지만, 둘째아이는 타고난 꼼꼼함 때문에 항상 많은 시간을 투자한다. 수학은 우리나라 아이들 대부분이 그렇지만 Honors반이라고 하여 좀 잘하는 반에 들어갔지만, 사회 과목은 그렇지 못하여 GHP(Gifted/ High Potential)반에서 듣는다. 영어는 CP(College Preparatory·大入준비학교)와 GHP반에서 각각 한 시간씩 듣고 ESL에서는 모르는 숙제가 있을 경우 도움을 받는다.
 
  수학이나 과학과 달리 영어는 우리 아이들이 따라가기에 어려움이 많은 게 사실이다. 중·고등학교를 통틀어 영어 과목 전교 1, 2등을 놓치지 않은 둘째아이의 경우도 매일매일 두려워하면서 영어와 싸우고 있다. 막내는 철없이 나부대니 어려운 줄 모르고 대충 보내지만 머지않아 어려움을 뼈저리게 느끼게 될 것이다. 어차피 넘어야 할 산이고, 풀어야 할 문제이기에 대안은 없다.
 
 
 
 즉석 시험에선 항상 애먹어
 
   예고된 시험이나 과제물은 우수하게 잘 한다. 예고해 준 시험은 집에서 철저히 준비해 가기 때문에 어렵지 않게 좋은 점수를 받는 것이다. 그러나 예고 없이 갑작스럽게 보는 시험이나(여기도 깜짝시험 같은 게 있다) 갑자기 그 학교에서 작성해서 내야 하는 과제물이 있을 경우는 거의 최하 점수이다. 일단은 어휘력이 부족하고 쓰기가 자유자재로 되지 않으니 어려울 수밖에 없다. 시간이 해결해 주겠지, 노력하면 나아지겠지 하면서 아이를 위로하고 있다. 거기에 비해 집에서 해 가는 과제물에서는 최상의 점수를 받아 온다.
 
  어떤 때는 보너스 점수까지 받아 만점보다 더 높은 점수를 받는다. 방학 전 사회 과제물의 경우는 선생님이 보고 몇 시간이 걸렸냐며 놀라더란다. 사실 그 과제물은 몇 시간이 아니라 며칠이 걸려서 해 간 거였다. 며칠이라고 말을 할 수 없어 그냥 웃기만 했다고 한다. 역시 보너스 점수까지 받아 왔다. 한국식 교육과 미국식 교육의 장점만을 취하여 또 하나의 교육의 금자탑을 만들어 볼 수 있지 않을까 하고 잠시 착각에 빠져 본다.
 
  막내의 경우 일단 배우는 과목 수가 적고 修行(수행)평가라고 하는 것이 한국에 비해 적고 오히려 퀴즈와 시험이 많아 본인은 그게 더 낫다고 생각을 한다. 수행의 경우도 완벽한 것을 원하는 것이 아니라 성실함과 태도를 보는 것이 더 많아 점수를 항상 「A」나 「B」를 받아 온다. 한국에서의 막내의 수행평가(실기점수)는 항상 「B」나 「C」였다. 미술은 밤을 새워 그려가도 최하 점수, 바느질도 최하 점수, 피아노 건반 치기나 노래도 최하 점수, 유일하게 「A」를 받는 수행평가는 체육이었다.
 
  얼마 전 막내의 ESL반에서 주어진 단어를 하나하나 그림으로 표현해 가는 숙제가 있었다. 썩 잘 그린 그림이 아니었는데 생각이 뛰어나다며 칭찬을 아끼지 않는 선생님 덕분에 아이는 처음으로 그림에 자신감을 가졌다. 그리고 못 쓰는 글씨지만(이곳 아이들은 대부분 글씨를 못 쓴다) 숙제를 해 가면 잘 해 왔다고 하니 스스로 알아서 해 가고 나도 자연 잔소리가 줄어든다. 일단은 욕심 부리지 말고 애들이 적응할 수 있도록 여유를 갖고 지켜보자는 마음에 성적에 대해 「A」다 「B」다 따지지 않으니 일단 내 마음도 조금은 편하다.
 
  처음부터 한국에서 자주 들었던 아이비 리그(Ivy Leage) 대학 진학의 꿈은 접은 지 오래다. 내가 먼저 욕심을 버려야 나도 아이들도 평화로울 수 있다는 생각을 했다. 평범한 아이들에게 부담을 주고 싶지 않았다. 이제 겨우 걸음마를 시작한 아이에게 뛰라고 하는 건 우리 모두에게 불행이란 생각이 들었다. 능력에 맞는 학교 다니다 좀더 나은 학교로 전학해서 제 갈 길을 가게 해 주고 싶다. 그리고 인생이 참 행복하고 살 만한 가치가 있다는 걸 알게 해 주고 싶다. 다만 엄마로서 욕심을 부리자면 나보다 좀더 나은 환경에서 좀더 넓은 세계를 보고, 듣고, 배워 스스로 깨달아 가길 바랄 뿐이다. 그저 앞으로 살아가려면 영어는 잘해야 그나마 사람 구실을 할 것 같기에 부모로서 할 수 있는 뒷바라지를 해 주고 있는 것뿐이다.
 
  특히 둘째아이가 애매한 시기에 와서 부담을 많이 가질까 봐 항상 실력에 맞는 대학을 강조하고 있다. 여기서 대학을 다니는 것만으로도 훌륭한 도전이라고 주지시키고 있다. 둘째아이는 자기에게 미국에서의 일류대학을 강요하지 않는 부모에게 감사해하고 있다. 우리 부부도 그런 생각을 갖고 조용히 열심히 노력하는 둘째아이를 고맙게 생각한다.
 
  고등학교에서는 수시로 보는 퀴즈와 시험 외에 한 학기에 배운 전체를 평가하는, 우리로 치면 중간고사(mid-term exam)와 기말고사(final exam)같은 시험이 주요과목에 한하여 3~4일에 걸쳐 치러진다. 그러나 이 시험은 그동안의 단원별 퀴즈나 시험을 통해 평균 점수가 A(90∼100%) 이상이고 그동안 받은 점수에 C(70∼80%) 이하의 점수가 하나도 없는 학생에게는 면제가 된다.
 
  다시 말해 평균 점수는 A가 되더라도 최저 성적에 C가 하나라도 있는 학생은 시험을 면할 수 없다. 면제된 학생들은 다른 학생들이 시험을 보는 동안 집에서 쉬게 된다. 평소에 열심히 공부한 학생들에게는 아주 유리한 시험제도이다. 기말고사를 보게 되면 일단 시험 범위가 많아 부담이 된다. 반대로 중간중간 단원을 평가할 때 잘 해 놓은 학생들에게는 꿀맛 같은 휴가가 주어지는 것이다. 둘째아이는 새로 전학 간 학교에서 두 달밖에 수업을 못 했는데 두 달 동안 본 퀴즈와 테스트 평균 점수가 통과되어 기말고사를 보지 않게 되었다.
 
 
 
 미국 교육의 경쟁력
 
  내가 지켜본 이 몇 달 동안, 짧은 소견이지만 미국 교육의 경쟁력이 이런 쪽지시험의 연속에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는 미국의 열린 교육을 배운다며 시험을 줄이느라 갖은 방법을 동원하여 교육의 下向(하향) 평준화를 이루어 가고 있다. 학교는 교육의 주체를 떠나 학생들에게 또 다른 社交(사교)의 場일 뿐 그 안에 있는 선생님들과 아이들 그리고 그 밖에 있는 학부모 모두에게 불만과 불안의 온상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우리나라 학교에는 잦은 시험도 그리고 등수(성적의 백분율은 기재하되 석차는 기재하지 않게 되어 있음), 체벌, 정학, 퇴학도 없다. 방과후 아이들은 하나 둘 제2의 하루를 시작한다. 학원에서 본격적인 공부를 하는 것이다. 회초리가 있고, 등수도 적나라하게 밝혀지는…. 등수가 떨어지면 가차없이 낮은 반으로 밀려나도 아무 소리 못 한다. 학원 선생님 말씀 한마디에 천당과 지옥을 오간다.
 
  아이들은 그렇게 무섭게 학원에서 공부 하고 학교에 가서는 선생님이 실력이 없다고 한다. 서울시내 중고등학교 교사 任用(임용) 고사가 얼마나 힘든지를 조금이라도 아는 사람이라면 적어도 그런 말을 할 수는 없다. 물론 가르치는 기술이 학원 선생님들보다 못할 수는 있다. 일단 대학을 갓 졸업한 신임부터 정년을 앞둔 老(노)선생님까지 다양한 연령대와 다양한 연령만큼이나 각양각색의 구성원을 갖고 있는 학교와 달리, 가르치는 것 하나만을 무기로 프로 중의 프로만을 모아 놓은 학원이 다를 수밖에 없다.
 
  역시 짧은 소견이지만 우리의 아이들에게 다른 장소가 아닌 학교에서의 잦은 시험과 많은 숙제 그리고 「사랑의 매」와 정학, 퇴학의 엄격한 학교 규율을 돌려 주자. 학교는 하루에 한 번만 다니게 하자. 또 학원비에 허덕여 아파트를 줄여 가야 하는 우리 부모들의 호주머니를 조금은 생각하자. 자기네 대학의 입학 가능한 수능 점수를 높게 기재해 달라고 학원가에 로비하는 교수님들의 웃지 못할 뉴스를 보지 않을 수 있도록 학교가 다시 교육의 칼자루를 쥐어 교육의 주체로 의무를 다하게 하자.
 
  현 입시교육 위주의 열린 교육이라는 제도下에서 우리의 학교는 그 기능을 학원에 맡기고 하나의 사설 모임단체 정도의 역할만을 강요당하고 있다. 우리의 학교가 다시 학교 본연의 場으로 돌아와 지금의 학원 역할까지 다시 할 수 있을 때 교육 선진국을 찾아 떠나는 유학생들의 행렬은 줄어들 것이고, 우리의 교육은 再起(재기)할 수 있게 될 것이다.
 
  미국 대부분의 학교가 조금씩의 차이는 있지만 학년별 학생 수준에 맞는 과목별 수준 학습을 한다. 새 학기가 시작하기 전에 학생 개개인으로부터 과목 신청과 레벨 신청을 받는다. 우리 아이들이 다니고 있는 학교는 주요 과목(영어·수학·사회·과학)마다 레벨 차이가 있는데, 우선 영어·사회·과학은 8학년까지는 세분화되어 있지 않고 두 단계 정도로 나뉘어져 있다. 9학년(우리 학년제로 치면 中3으로 이곳에서는 9학년부터를 고등학교로 한다)부터는 보통 4∼5단계로 세분화되어 있다.
 
 
 
 수준별 학습
 
  수학만 7학년부터 세분화해 놓았다. 크게 오너(Honor), GHP(Gifted/ High Potential), CP(College Preparatory), 어플라이드(Applied)반으로 나뉘는데, 그 안에서 또 단원으로 나뉘기도 한다. 오너, GHP, CP반은 대학 진학을 위해 준비하는 학생들을 위한 반이고, 어플라이드반은 대학을 진학하지 않고 곧바로 사회로 진출할 학생들을 위한 반으로 보면 된다.
 
  제일 높은 반이 우리가 한 번쯤 들어본 오너반이고 그 다음이 GHP반 그리고 CP반 순이다. 그렇다고 오너반이나 GHP반, CP반이 우리가 보통 생각하는 우열반으로 우수한 반과 열등한 반으로 생각하면 많은 오차가 있다. 이 부분이 내가 아직 완벽히 풀지 못한 부럽고도 합리적인 미국 교육의 한 제도이다.
 
  우리의 교육제도 중 꾸준히 제도적으로 시행을 해 오면서도 정착을 시키지 못하고 실패라면 실패라고 할 수 있는 수준별 학습 및 학습 지진아 교육에 대한 전반적인 운영이 그것이다.
 
  이런 내 생각과 달리 이곳에서의 수준별 수업은 별 무리 없이 합리적으로 운영되었고, 그래서 부러웠다. 물론 이곳에서도 교육열이 높은 부모들은 아이들에게 굉장한 강요를 한다. 이곳에서 만난 이민온 지 16년 된 知人(지인)의 말로는 몇몇 아이들을 빼고는 아이비 리그에 진학하는 대부분의 아이들이 거의 어렸을 때부터 만들어진다고 한다.
 
  우리나라 교포 2세나 유학생들이 그런 경쟁을 뚫고 입학하는 것이며 또 졸업을 하는 건 굉장한 일이라고 했다. 그래서 그들은 대학에서 원하는 고등학교 全과목 A는 당연하고 그것도 오너반에서의 A를 강조하며(오너반 A점수 비중이 기타반 A점수 비중에 비해 더 높음) 그 밖의 과외 활동으로 특기활동, 봉사활동, 학내 외에서의 모든 자치활동 등에 많은 비중을 둔다. 여기에서의 레벨 선택은 전적으로 학생과 학부모의 의견을 존중한다.
 
  먼저 학기의 성적이 완전히 무시되는 건 아니지만 본인이나 학부모가 굳이 오너반을 고집하여 선택하여도 등록은 할 수 있다. 다만 결과에 대한 책임은 전적으로 학생과 부모가 진다. 그래서 오너반에서 A를 받기가 불안한 몇몇 학생들은 성적이 되면서도 GHP나 CP반에 등록하여 수업을 받는다. 학년이 같아도 듣는 과목 수나 종류가 다르고 레벨이 다르니 아이들은 다른 친구들에게 관심이 없다. 다른 친구가 무슨 과목을 듣는지 어떤 레벨을 듣는지 별 신경을 안 쓴다. 비록 영어를 레벨이 낮은 반에서 들어도 수학은 높은 반에서 들을 수 있고, 설사 주요과목 전부를 레벨이 낮은 반에서 듣는다고 하더라도 주눅이 들거나 본인이 열등한 아이라고 생각하고 다니는 아이가 하나도 없다.
 
 
 
 한 재벌 회장의 인물觀
 
  나는 그게 너무 신기하다. 성적이 부진해도 그들이 주눅들거나 열등감을 갖지 않고 만족할 만한 무엇이 있는 건지. 아이들이 성적이 부진하다는 이유만으로 죄인으로 살거나 심지어 어린 나이에 성적을 비관하여 자살하게 하는 우리의 현 교육 현실에서 정말 부럽기 그지없다. 왜 이곳 미국에서 그렇게 많은 학자들이 공부를 해 왔으면서도 우리에게는 그런 좋은 기술을 전수하지 못하는지? 조만간 새 학기가 시작되고 아이들을 통해 좀더 이야기를 들어 보면 이 궁금증은 다소 풀릴 수 있을 것 같다.
 
  어차피 세상을 이끌어 가는 두뇌는 전체의 몇 %이다. 대다수에 속하는 많은 우리의 자손들이 마음의 상처를 받지 않고 건강하고 긍정적이고 밝은 마음을 가질 수 있게 도와주는 게 우리 어른의 몫이라고 생각한다. 흔히 하는 말이 인생은 성적순이 아니라고 한다. 그러면서도 내 아이가 우수하기를, 내 아이 성적이 월등하고 내 아이가 일류대학에 입학하기를 이 땅의 모든 부모는 바란다.
 
  성적이 우수하면 대부분 용서가 된다. 다소 非도덕적이거나 非인간적인 행동을 해도 우리 어른들은 참 많이 관대하다. 그러나 반대로 성적이 부진하면 원수도 그런 원수가 없다. 사사건건 아이를 모든 것에 모자라는 것마냥 몰아붙인다. 그리고 그런 아이에게 우리 어른들은 관대하지 않다. 『네가 하는 짓이 그렇지, 뭐』로 단칼에 아이를 묵사발을 만들고 만다.
 
  지금도 내 교사생활 중 기억하고 싶지 않은 초년 교사 시절. 학업 성적에 목숨을 걸고 학생들을 달달 볶아 성적을 올리려고 늦게까지 남아 학생들에게 고통을 주고 괴롭혔던 일, 그리고 학생들에게 완벽하기를 강요하며 힘들게 했던 일들이 그것이다. 그런 성적이 별게 아니라는 걸 알게 되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학생들이 모두 내 기준에 맞게 완벽할 수 없다는 걸 부족한 내 아이들을 통해서 깨달았다. 그리고 나는 먼저 내 시행착오로 고통받았을 제자들에게 사죄하는 마음으로 아이들에게 성적만을 강요하지 않는 선생님이 되도록 노력했다.
 
  나와 같이 늙어 가는 나이가 되어 지금까지 찾아오고 만나는 제자들은 모두 성적이 우수했던 학생들이 아니다. 대게는 내게 무진장 매를 맞거나 한두 번씩 문제를 일으켰던 아주 마음이 따뜻하고 인간적인 아이들이다. 세상은 똑똑한 사람도 필요하지만 인간적이고 마음이 따뜻한 사람이 많을 때 더 살 만하지 않을까 한다.
 
  어느 책에선가 우리나라 대기업을 이룬 한 회장은 사람의 채용 기준에서 학력에 50점, 인물에 50점을 배정한다고 했다. 그리고 『학과 성적이 좋다고 해서 꼭 훌륭한 인재라고 할 수는 없다』라는 어록을 남겼다고 한다. 우리나라 최고의 기업으로 세계의 기업과 어깨를 견줄 만한 기업의 토대를 마련한 인물의 생각을 우리는 여기서 그냥 간과해서는 안 될 것 같다.
 
  그래서 나는 학원은 늦어도 무거운 짐을 들고 가는 동네 할머니의 짐을 집까지 들어다 드려야 마음이 편하고, 학원에서 열심히 공부하는 것보다 친구들과 PC방에서 게임을 하고 편의점에 가서 삼각김밥과 사발면 한 그릇을 나누어 먹으며 웃고 떠드는 걸 더 좋아하는, 나의 아들과 같은 많은 평범한 한국 아이들에게 희망을 걸고 있다.
 
  미국에서 週 5일 수업이 정착되었다는 건 들어서 알고 있었지만 막상 그 체제에 들어오고 나니 처음에는 많이 어색했다.
 
 
 
 부모와 교사의 막강한 권한
 
  미국은 週 5일 동안만 철저히 수업을 한다. 토요일은 완전 휴일이다. 하지만 학생들도 주 5일 동안 무섭게 공부를 한다. 중학교는 오전 7시10분에 보통 학교버스를 타고 등교하여 7시35분에 담임의 출석체크가 있고 곧바로 7시40분에 1교시가 시작된다.
 
  초등학교는 그보다 조금 늦은 오전 8시30분쯤 시작하고, 고등학교는 본인이 운전을 하여 등교하는 학생도 있고 하여 중학교보다는 조금 늦고 초등학교보다는 조금 빠른 7시50분에 1교시를 시작한다. 그리고 대개 오후 3시30분 정도에 집으로 돌아온다.
 
  집에 돌아와서는 거의 숙제로 시간을 보낸다. 미국 학생들은 생각보다 독서를 많이 한다. 그리고 매일은 아니지만 일주일에 몇 번 특기교육으로 각자 알아서 악기나 운동 등을 따로 지도받는다. 그리고 일요일은 대부분 가족과 같이 보낸다. 대부분의 직장도 주 5일 근무라 주말에는 부모가 아이들과 시간을 같이 보낼 수 있다. 미국 대부분의 아이들은 본인이 독립할 수 있는 만 18세까지는 전적으로 부모의 보호와 통제 아래에 있다.
 
  내가 주변에서 본 미국의 부모는 생각보다 엄격했고, 아이들은 생각보다 부모의 말을 잘 듣고 무서워했다. 우선 운전할 수 없는 미성년자의 경우 부모가 같이 움직여 주지 않으면 꼼짝 할 수 없으니 자기 마음대로 행동한다는 건 거의 불가능하다. 대도시처럼 교통이 편리하지 않은 이런 중소도시에서 자신의 차가 있는 고등학생 몇몇을 제외한 나머지 아이들이 움직일 수 있는 방법은 별로 없다. 토요일, 일요일 이틀간을 완전히 부모의 통제와 지도下에 있게 되는 것이다. 부모의 권한만 막강한 것이 아니라 교사의 권한 또한 막강하게 느껴졌다.
 
  듣던 대로 미국에 체벌은 없었지만 학생들은 전적으로 교사의 통제와 보호下에 있었다. 성적표에는 퀴즈와 시험에 의한 ABCD의 성적 표기 이외에 각 항목이 서술형으로 기재되어 있다. 학부모 대부분이 선생님들의 평가를 신뢰한다. 수업시간에 혹시라도 학생이 수업에 방해되는 행동을 하거나 선생님에게 예의에 어긋나는 행동을 했을 때 가차없이 선생님의 벌칙이 가해지는데, 심지어 아이는 밖으로 쫓겨나 따로 마련된 공간에 갇혀 있는 벌을 받게 되는 경우도 있다.
 
  더 심한 행동을 해서(남의 물건에 손을 대거나, 여자아이를 때리거나) 교장 선생님의 지도를 받게 될 경우 그 부모가 같이 지도를 받게 되고, 아이는 학교버스를 못 타고 부모의 차를 타고 登下校(등하교) 하게 된다. 이럴 경우 미국은 보통 맞벌이 부부가 많아 그 고초는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다.
 
  그러면 아이는 그 일이 얼마나 여러 사람을 괴롭히는지 알게 되고 스스로 너무 힘들어 하게 되면서 같은 잘못을 되풀이 할 확률은 훨씬 감소되는 것이다. 우리나라의 경우 부모는 내 아이의 말만 듣고는 일단 교무실로 달려와서 난리치기가 일쑤인데 여기서는 어느 부모도 교사의 판단에 이의를 제기하지 않는다. 그동안 교사들이 쌓아 놓은 신뢰의 성과겠지만 부러웠다.
 
 
 
 합리적인 시간표
 
  우리는 월화수목금토 일주일 단위로 시간표가 짜여 있는 데 비해 이곳은 시간표 1, 2, 3, 4, 5, 6으로 계속 돌아간다. 요일별로 시간표가 짜여 있는 것이 아니라 월요일이 「시간표 1」이었으면 화요일은 「시간표 2」가 되는 것이다. 만약 수요일이 공휴일이라 쉬었으면 목요일은 「시간표 3」이 되는 것이다. 참 합리적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새 학기가 시작하면서 다음 학기 수강 신청을 받는다. 수강할 과목은 전적으로 학생과 학부모 그리고 상담교사의 몫이다. 전체 이수할 학점(10학년의 경우 6.5학점, 나머지 학년의 경우 6.25학점)만 정해 주고 앞에서 언급한 주요과목은 본인의 능력에 맞는 것을 선택한다. 주요과목 이외에 선택과목(Electives)은 학생들의 개성과 소질에 따라 본인이 결정한다.
 
  둘째아이가 다니는 고등학교의 경우 크게 다섯 가지의 선택과목(Business Information Technology, Art, Music, Family and Consumer Sciences, Technology Education)으로 나누어져 있는데 그 안에 다시 20∼30여 개의 수강 과목들이 들어 있다. 미술반을 예로 들면 Painting, Drawing, Photography, Art history, Ceramics, Jewelry and Metals. Computer Art 등이 각각 또 그 안에서 세 단계 정도의 레벨로 나뉘어져 있다.
 
  보통 중학교 때 이것저것 들어보고 본인의 적성에 맞는 것 한 가지를 선택하여 고등학교부터는 제일 기초단계에서 시작하여 어려운 과정까지 마치는 학생들도 있다. 차일드 디벨로프먼트(Child Development)반 같은 경우 학교를 다니면서 과정을 수료하고 졸업하면서 곧바로 대학에 가서 전공으로 더 깊이 있는 공부를 계속하는 경우도 있다. 음악반 중에 보컬이나 밴드부는 어느 정도 수준이 되어야 활동할 수 있기 때문에 대부분 어려서부터 기량을 키운 학생들이 활동하게 된다. 그리고 그런 활동들은 대학을 진학할 때 자기 소개서 자료가 되며 수상 경력이 있을 경우 가산점이 있게 된다.
 
 
 
 교과서를 물려 쓰는 나라
 
  교과서는 모두 학교에서 無償(무상)으로 제공되는데 보통 교과서 한 권의 수명이 5년 이상은 된다. 그 한권의 무게가 1.8kg 내외로 가로 20cm 세로 26cm 정도이며, 겉표지는 딱딱한 하드보드지로 우리의 백과사전같이 되어 있다. 아이들이 가지고 다니기엔 물론 무겁지만 그래도 착실한 아이 대부분은 그 무거운 교과서를 모두 등에 메고 다닌다. 학교에 사물함이 있어 두고 다녀도 되지만…. 선배들이 썼던 교과서를 물려받으면서 아이들은 교과서 표지 안쪽에 먼저 썼던 선배들 이름 밑에 자기 이름과 자기가 사용하는 연도 그리고 교과서 받았을 때의 상태(예를 들어 New라든가 Good)를 써 넣는다.
 
  그리고 파손되지 않게 주의해서 쓰도록 교사에게 지도를 받는다. 교사는 반드시 책 커버를 싸 오도록 지시하고 부모의 사인까지 받아 오도록 한다. 개편되는 교과서를 제외하고는 그렇게 해서 교과서 한 권을 몇 년을 물려 가며 쓴다. 만약에 그 교과서를 잃어버리거나 해서 본인이 물어내야 할 경우가 생기면 그 교과서 대금이 만만치 않다. 보통 4만∼5만원을 하기 때문에 분실하거나 함부로 사용하는 아이는 거의 없다.
 
  우리도 과거 한때 교과서를 물려 가며 공부를 한 적이 있지만 한참 옛날 이야기로 기억된다. 요새는 물려받은 교과서로 공부하는 학생도 없지만, 우리 아이들의 교과서는 그 수명이 1년으로 너무나 아깝게 금방 폐휴지로 전락하는 경험을 한 나로서는 참으로 부러워 보인 제도였다. 물자가 풍부한 나라면서도 절약도 무섭게 하는 나라구나 생각하면서, 한편으로는 학생들로 하여금 학습교재를 중요하게 다루게 하면서 일단 마음가짐을 다스리게 하려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轉學
 
 
 인터넷 활용
 
   처음 미국에 갈 때 우선은 시간이 없어 급한 대로 친구에게 가까운 곳에 집을 얻어 달라 하고는 학군 내에서 갈 수 있는 학교로 보냈다. 그 뒤 남편과 첫아이가 합류하게 되면서 집을 이사해야 했고 그러면서 아이들 학교도 좀더 나은 곳으로 옮겨야겠다고 생각했다. 남편이 오면 천천히 가을 새 학기에 옮겨야지 했던 당초 계획이 앞서 언급한 知人(지인)의 도움으로 조금 앞당겨졌다.
 
  다행히 인터넷이란 좋은 자료의 도움을 받아 몇몇 학교를 세밀히 검토하여 새로 갈 학교를 정했다. 인터넷에는 각 학교의 비교평가가 세세히 잘 나와 있었다. 선생님들 가운데 박사 소지자가 몇 명인지 기재되어 있고, 학내 징계 처벌자 수 및 외부 징계 처벌을 받은 학생 수까지 기재되어 있으며 前 학년도 SAT 지원자 전체에 대한 학교 평균 점수가 州 내에서 몇 % 정도인가까지 상세히 나와 있다. 판단은 전적으로 부모가 보고, 부모가 하는 것이다. 객관적인 자료로, 제시된 자료에 아무도 의심이나 토를 달지 않고 각자가 보고 판단하고 결정하면 되는 것이다.
 
  나는 인터넷 자료를 통해 내가 거주하고 있는 州에서 순위 5%에 해당하는 지금의 학교를 선택하게 되었다(참고로 먼저 학교는 같은 州에서 65%에 해당하는 학교였다).
 
  9학년부터 12학년까지 총 재학생 수는 2800명으로 2002학년도 졸업생의 진로는 졸업생 583명 중 68%가 4년제 대학에 진학했고, 16%가 2년제 대학에 진학했으며 다른 곳에 진학한 학생이 10%이고 나머지 6%가 취업이나 기술 부문에 종사하는 것으로 나와 있다.
 
  학교의 규모는 대지 약 18만 평으로 서울의 큰 대학 규모였다. 부속 시설은 정말 입을 다물지 못하게 했다. 강당과 수영장, 도서실, 미술실, 기술실, 피아노실, 농구실, 헬스장, 요리반을 위한 요리실 등은 그 규모와 시설이 일반 대학 전공실보다 훌륭했고, 특히 옥외에 있는 테니스장, 야구장 그리고 육상트랙은 고등학생만을 위한 시설로 보기에는 너무나 엄청났다. 체육을 싫어하고 못 하는 둘째아이는 격일로 실시되는 체육 때문에 처음 한 달은 고생을 많이 했다. 체육시간마다 그 육상트랙을 여섯 바퀴(2.4km 정도)씩 돌게 한단다.
 
  운동장에서 뛰는 아이는 없고 모두 교실에서 공부만 하는 상황에 있다가 이곳 고등학교의 시설을 보고 나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고 무척 부러웠다. 미국은 이렇게 땅이 넓은데 왜 우리는 그렇게 좁은 땅덩어리에서 복작거려야 하나. 왜 우리의 아이들에겐 운동장도 제대로 없어야 하는가….
 
 
 
 공립학교의 재정
 
  미국은 사립학교를 제외한 대부분의 공립학교가 비슷한 정도의 교육 혜택을 받을 것으로 알고 있지만 (적어도 나는 좀 그랬다) 막상 와서 보니 미국의 學群(학군)도 우리와 별반 다르지 않았다. 오히려 더 심하다고 할 수 있을 정도였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각 학교에 배정되는 州정부의 지원금도 천차만별인데다가 지원금을 제한 나머지는 그 지역 주민의 교육세(school tax)로 운영되기 때문이다.
 
  참고로 교육세는 노숙자를 제외한 집을 보유한 사람이나 세입자들의 몫인데, 보통 우리가 말하는 재산세를 내고 그의 두 배 이상이 되는 교육세를 또 낸다. 30만 달러 정도의 주택을 보유한 사람이 내는 교육세는 연 4000달러 정도(내가 거주하는 지역의 경우)이며 임대사업자는 교육세 부분을 집세로 받아 대신 낸다. 그러니 결국 세입자들도 교육세를 내는 셈이다. 더한 것은 학교에 다니는 아이가 없거나 사립학교를 보내더라도 교육세는 낸다.
 
  州정부의 지원금은 가난한 동네의 학교에 훨씬 많이 지원되고 잘사는 동네에 지원되는 지원금은 적다. 그 나머지는 지역 주민의 세금으로 충당되는데, 세금이 많이 걷히는 좋은 지역의 학교는 우수한 교사를 많은 연봉으로 스카우트해 오고 학교시설에 많이 투자를 하니 자연 좋은 학교가 되는 것이다. 그러니 자연 학부모들은 더 많은 세금을 내더라도 자식을 좋은 환경에서 가르치겠다고 과감히 이사를 하고 아낌 없이 세금을 낸다.
 
  반면 그렇지 못한 지역에서는 일단 정부에서 지원하는 지원금으로 운영되다 보니 많은 어려움이 있을 건 불을 보듯 뻔한 일이고 악순환은 계속된다. 그래서 나도 먼저 살던 곳의 집세에 거의 두 배에 해당하는 집으로 옮기면서 역시나 이곳 미국에 와서도 학군의 스트레스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물론 내가 이렇게 해서 옮긴 지금의 학교도 지난 6월 뉴스위크誌에 소개된 미국의 700大 공립학교에 들지는 못하는 학교다. 얼마나 더 좋은 학교가 많은지 짐작이 간다.
 
 
 
 더 나은 학교를 찾아서…
 
  이렇게 해서 두 달 만에 새로운 학교로 다시 전학을 하게 되었다. 둘째아이는 반대가 심했다. 다니던 학교도 아직 적응을 못 했는데 또다시 옮기면 자기는 너무 힘들다는 게 그 이유였다. 아이의 심정도 충분히 이해를 못 하는 바는 아니었지만 설득을 했다. 일단은 공부를 위해서 왔고 그러려면 더 나은 학교로 가야 하지 않겠냐고 했다. 인터넷에서 뽑은 자료를 보여 주며 하나하나 설명해 주었다. 물론 새 환경에 적응하기가 얼마나 힘들지 짐작은 가지만 그래도 아직 친한 친구도 사귀지 않았고 그 학교에 완전히 적응된 시기보다는 조금이라도 빠른 시일에 옮기는 게 낫다고 아이를 설득했다.
 
  둘째아이는 수긍을 했고 내 의견에 따라 주었다. 막내는 이미 친구들을 사귀어 이제 막 농구도 같이 하고 학교 가는 것이 재미있다고 할 즈음이라 설득하는 데 힘이 좀더 들었다. 어차피 넘어야 할 고비라면 시간을 늦추는 것보다는 빨리 겪는 게 낫다는 결론을 내리고 이사하기 전 계약서만 가지고 주민신고를 하고 학군 내 주민이라는 증명서를 발급받아 미리 서둘렀다.
 
  이사하는 날에 맞춰 아이들을 그대로 전학시키려고 했다. 아이들의 두려움은 먼저 다닌 학교 갈 때만큼은 아니더라도 역시 컸다. 또다시 새로운 환경의 적응이라는 파도를 넘어야 했다. 아이들이 가야 할 중학교와 고등학교의 상담교사를 따로 만나 면담도 끝냈다. 두 달 만에 아이들이 많이 달라진졌다. 처음 학교를 갈 때는 눈만 말똥말똥 뜨고 있더니만 이번 경우는, 특히 둘째아이는 상담교사와 거의 80% 이상의 대화를 나누었다.
 
  물론 어려운 용어나 단어를 사용하는 면담이 아니었기에 가능하였겠지만. 그래도 아이는 한 시간여에 걸친 면담 동안 제가 궁금한 것을 모두 묻고 많은 의문점을 풀고 나왔다. 먼저 학교에서의 시간표 작성이나 그 밖의 제반 사항 결정에서 우리가 아무것도 모르고 처신한 것에 비하면 長足(장족)의 발전을 이룬 셈이다. 상담교사는 매우 친절했고 호의적이었으며 두 달밖에 안 된 둘째아이의 회화 실력에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전학을 시키면서 한 가지 문제가 있었다. 둘째아이가 영어를 하도 두려워해서 한 학년을 낮추어 전학하는 문제를 상담교사와 장시간 면담을 했다. 중요한 문제라 내 영어 실력과 아이의 실력만으로는 힘들 것 같아 知人의 도움을 받아 같이 동행을 했다. 상담교사도 충분히 이해는 하지만 자기 혼자 결정할 문제가 아니니 회의를 해서 결과를 알려 주겠다고 했다.
 
  회의는 먼저 학교 ESL 선생님과 상담교사의 의견, 그리고 교장 선생님, 그 지역 담당 장학사의 의견을 모두 종합하여 결정하는 거라고 하였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먼저 학교 두 달 다닌 성적이 두 아이 모두 우수하여 능히 따라갈 수 있다는 먼저 학교 ESL 선생님의 말씀으로 결국 제 학년으로 전학하는 것으로 결정이 났다. 결정이 나고 상담교사와의 2차 면담이 있을 때 불안해하는 둘째아이를 위해 상담교사는 아주 친절히 여러 가지 도움이 되는 말을 해 주었다.
 
  『물론 지금의 네 영어 실력은 부족하고 불안하지만 앞으로 네가 대학을 진학할 때, 대학에서는 지금의 네 실력도 보지만 미국에 와서 2년 동안 공부한 네 능력을 더 본다. 그리고 너는 그 능력을 보여 주면 된다. 나는 네 능력이 뛰어나다고 본다. 그리고 우리는 앞으로 네가 얼마나 놀랄 만한 능력을 보여 줄지 기대가 된다』고 하면서 격려를 아끼지 않았다. 둘째아이는 그 후 자기 좋은 쪽으로만 생각하기 시작했다.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전학을 하면서 먼저 학교에서 들은 과목을 위주로 다시 시간표를 작성해야 했지만 똑같은 것이 없을 경우 다른 과목을 선택하여 수강할 수밖에 없었다.
 
  둘째아이는 앞에서도 잠깐 언급했지만, ESL 운영 자체가 달라 새로 전학한 학교에서는 수학은 오너반에서 듣고 영어는 그대로 ESL반에서 듣고, 과학과 사회를 GHP반에서 듣고 특기활동으로 마지막 시간에 매일 피아노를 치고 왔다. 막내는 수학과 과학은 오너반에서 듣고 영어와 사회는 GHP반에서 듣고 기타 과목으로 기술과 컴퓨터 그리고 보건학을 들었다. 특히 영어는 ESL반에서 따로 듣는 것이 없어 수업시간에 여느 아이들과 같이 듣기 때문에 많이 어려워했다. ESL반에서는 보충을 원할 경우 보충을 해준다.
 
  이렇게 4월1일 전학을 하여 두 달여를 다니고 6월16일 방학을 하였다. 아이들이 방학을 하고 나니 1막이 끝난 느낌이 들었다. 과연 개학을 하고 학년이 바뀌어 새 학기가 시작하는 2막은 어떻게 전개될지 나도 궁금하다.
 
 
 
  後記
 
 
 『서울이 아니라 뉴욕에 가서 능력을 펼쳐야…』
 
  2002년 가을. 첫아이가 대학 1학년, 둘째아이가 고등학교 1학년, 막내가 중학교 2학년. 나는 남편과 의논하여 세 아이 모두의 유학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무엇부터 어떻게 시작해야 할지 막막하고 앞이 보이지 않는 미로였지만, 불안한 한국의 교육현실 속에서 너무나 평범한 아이 셋에게 도저히 제 갈 길을 열어 줄 자신이 없었다. 소위 일류 대학이라는 데에 들어가는 소수 몇 %에 해당되지 못하고 그 언저리에서 또는 그 아래에서 맴도는 지극히 평범한 내 아이들에게 운이 따라 주기를 바랄 수만도 없었다. 또한 동네 학원만 다녀도, 학원 학습지만 집에서 풀어도, TV 방송만으로도 일류 대학에 척척 붙는 그런 특별하고 능력 있는 아이가 아니라는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부모로서 나는 애들에게 또 다른 길을 열어 줄 수밖에는 다른 뾰족한 방법이 없었다.
 
  이런 내 생각과 달리 아무데서나 잘하면 된다는 생각이 누구보다 강한 남편을 설득하는 것이 우선은 가장 큰 걸림돌이었다. 어떻게 설득을 할까? 몇 날, 며칠을 고민했는데 우연히 퇴근길 라디오에서 흘러나온 한 사람의 성공담이 해답이 되었다. 그 사람 말이 자기는 정말 산골 중에 산골에서 나고 자라 이곳 서울에 와서 이렇게 성공했다고 하면서 지금 서울에서 사는 사람들은 이제 서울이 아니라 뉴욕에 가서 자기의 능력을 펼쳐야 하지 않겠느냐고 하는 거다. 나는 옳다구나! 바로 그거다! 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날 나는 집에 오자마자 남편을 설득하기 시작하였다. 지금은 돌아가시고 안 계신 시아버님의 경우를 예를 들었다. 아버님은 그 옛날 산골에서 태어나 서울로 진출하시고 출세하셔서 많은 일가친척을 서울로 데리고 오는 집안의 기둥 역할을 하셨다. 이제 지금은 서울이 아니라 세계다. 애들이 나가서 노력할 곳은 이제 좁은 내 나라만이 아니라 세계이니 애들에게 기회를 주자고 했다. 말은 거창했지만 사실 내게도 확신은 없었다. 의외로 남편이 순순히 그러자고 했다. 당시 사회적으로 대학을 졸업하고도 취직을 못 하는 취업난이 남편에게 큰 영향을 끼친 것 같다.
 
  가장 큰 걸림돌을 아주 쉽게 넘은 기분이 들었다.
 
  이제 구체적으로 어떤 식으로 애들을 준비하느냐였다. 큰아이는 일단 다니던 대학을 1년 마치고 휴학을 한 다음 어학연수로 시작하는 걸로 결론을 지었다.
 
  다음은 막내. 중학교 2학년에 다니는 아들 녀석이다. 성격 좋고, 사회성 좋고, 초등학교 때는 전교 회장을 했고 중학교에 와서도 계속 임원을 했다. 녀석에게 부족한 건 항상 학업에 대한 열정이 부족하다는 것과 끈기 부족, 그래서 항상 수행평가로 인한 잔소리를 달고 살아야 했다. 교사의 입장에서 본 녀석은 운동 좋아하고 무엇보다 좋은 인간성으로 매력이 있는 아이다. 그런 아이에게 나는 교사의 입장이 아닌 평범한 엄마의 입장으로 매일 같은 잔소리를 퍼부어 댄다.
 
  아이의 좋은 점이 90이라면 나머지 10 때문에 나는 녀석과 매일 원수가 되는 거다. 정말 참을 수가 없었다. 그리고 애를 망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 들게 되었다.
 
  「우리나라에서 어느 대학, 어디 출신이라는 꼬리표 달기가 어려울 수 있는 아이다」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결심한 것이 막내의 유학이다. 물론 내가 교사이면서 유학이 도피가 될 수 없다는 사실을 누구보다 절실히 알고 있기에 많이 생각을 했다. 다만 녀석이 가지고 있는 장점을 살려 줄 수 있는 기회를 주고 싶었다. 그리고 어차피 한 번은 겪어야 할 단계라면 녀석에게는 진작에 마련해 주는 게 여러 모로 낫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것이 정말 좋은 기회가 될지 안 될지는 자신이 없지만 지금 내가 녀석에게 부모로서 해 줄 수 있는 또 다른 기회라는 사실만 내 스스로에게 강조를 했다. 다만 시기를 놓고 가장 위험요소가 적은 최적의 환경을 찾고 있는 중이었다. 이렇게 첫아이와 막내의 유학이 점점 구체화되어 가고 있을 즈음 둘째아이가 돌연 자기 의사를 피력해 왔다.
 
  둘째아이는 직장 다니면서 세 아이가 많다고 할까 봐서인지 정말이지 힘 안 들이고 혼자서 저절로 커 준 아이다. 뭐든 제 할 일을 제가 알아서 하는 그런 아이다. 그래서 아이 셋을 키우면서 너무 힘들었다는 말을 할 수 없게 만든 그런 아이다.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 1학년까지 임원을 빼놓지 않고 했다. 6학년 졸업 때는 구청장 상을 탔고, 중학교는 전교 2등으로 졸업을 하고 졸업식날 상장이 너무 많아 이 엄마를 너무나 감격하게 해 주었던 아이다.
 
  고등학교에 가서도 난다 긴다는 아이들 속에 1학년 첫 시험은 전교 20등, 1학년 2학기 말 고사는 전교 8등을 하였다. 첫아이의 경험으로 봐서 둘째아이는 착실한 노력형이기에 隨時(수시)입학을 마음먹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새벽 1시가 넘어 학원에서 돌아오는 아이를 기다리면서 「이렇게 2년을 더 해야 하는데」 하면서 점점 자신이 없었다.
 
  이렇게 해서 대학을 간들 대학만 가면 끝이라고 생각하고 시간을 보내다 다들 또 해외연수라는 이름으로 외국을 나가야 한다. 대학은 기업에서 요구하는 실력자를 배출하지 못하여 교육선진의 나라로 학생들을 빼앗기고 있는 실정이다. 아주 우수하여 특출난 재능이 있다면 모를까? 그렇지도 않은 지극히 평범한 아이가 이 땅에서 구실을 하기란 여간 힘든 게 아니지 않은가? 하는 생각이 항상 내 머리를 떠나지 않았다.
 
  그러던 중 둘째아이는 며칠을 고민한 끝에 자기도 유학을 보내 달라고 하는 거였다. 나는 너무 뜻밖이었다. 그래도 제일 힘 안 들이고 잘 적응해 주는 아이였는데 돌연 유학을 보내 달라고 하니. 둘째아이가 결심을 굳히게 된 첫 번째 이유는 주위의 몇몇 친구들의 유학이었다. 두 번째 이유는 어차피 대학을 가서 어학연수나 유학을 가야 한다면 언니, 동생과 함께 지금 가겠다는 것이다.
 
  많은 재산이 있는 건 아니지만 재산이 있다고 한들 그 재산을 운영할 능력이 없다면 그 재산은 없는 거나 마찬가지고, 우리가 가진 한도 내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는 게 최선이라는 결론을 우리 부부는 내렸다.
 
 
 
 학교에 사표를 내다
 
  세 아이의 유학을 결심하면서 제일 먼저 어떤 방법으로 보낼까 하는 것이었다. 첫아이와 막내만을 보내려고 했을 때는 첫아이는 우선 로스앤젤레스에 공부하고 있는 제 사촌언니가 같이 있고 싶다고 해서 그리로 보내려고 했고, 막내는 기숙사가 있는 사립이나 믿을 만한 외국인 집을 섭외해서 홈스테이를 시키려고 했다. 그런데 둘째아이가 가겠다는 바람에 모든 계획은 다시 수정 보완되어야만 했다. 둘째아이와 막내의 사립 고등학교 학비와 기숙사비가 만만치 않고, 일단은 애들이 모두 나가 있는 게 안심이 되질 않았다.
 
  그래서 차선책으로 선택한 것이 나의 유학이었다. 처음에는 나 자신도 반신반의했다. 내가 지금 과연 공부할 수 있을까? 겁이 덜컥 났지만 자꾸 긍정적인 쪽으로 생각이 굳혀졌다. 하면 하지 못할 건 뭔가? 공부를 하지 못하더라도 영어라도 좀 웬만큼 되면 좋지 않을까? 뭐 이런 무지갯빛 생각을 갖고 나는 내 계획을 추진해 나가기로 했다.
 
  시댁이나 친정 어느 쪽을 통틀어서도 외국에 나가 정착해 사는 일가 친척이 하나 없는 우리로서는 정말 시작부터 난관이었다. 동부냐 서부냐를 정하는 문제부터가 그야말로 문제였다.
 
  2001년 가을, 세계를 알아야 세상이 보인다며 싸움싸움 끝에 명화 그림을 떼어 버리고 世界全圖(세계전도)를 식탁 정면에 붙여 놓은 남편. 꼭 1년 뒤인 2002년 가을 세계 全圖 위에 미국 全圖가 붙게 되었다. 우리는 몇날 며칠 지도를 보며 미국의 동부와 중부와 서부를 논했다. 결론은 동부. 동부로 결론 나게 된 가장 큰 이유는 내 친구가 동부에 있기 때문이었다.
 
  미국에 있는 그 친구가 겨울에 잠깐 놀러 오라고 한 것이 아예 애들을 데리고 유학을 가게 된 것이다. 친구에게 내가 다닐 만한 학교를 알아보고 집도 구해 달라고 해 놓고는, 나는 비자를 신청하고 애들을 유학 보내겠다고 마음먹은 지 넉 달 만에 이곳 미국에 가게 된 것이다.
 
  아이를 혼자 보내야 하는 대부분의 부모들은 같은 고통을 안고 있다. 기숙사에 넣어야 하는지 친척집 신세를 져야 하는지 홈스테이를 시켜야 하는지 이곳 저곳서 얻는 정보는 많지만 막상 어떻게 생겼는지 어떻게 해야 하는지 감이 잡히지 않아 조금이라도 의지할 곳이 있으면 기대보려고 한다.
 
  가까운 일가 친척에게 아이를 맡겨 놓고 서로가 맘고생을 하다가 결국은 사이가 나빠진 예를 우리는 흔히 들어 알고 있고 있었다. 또 친구에게 부탁했다가도 그와 유사한 결과를 낳게 되는 경우를 드물지 않게 보아 왔다. 외국인에게 홈스테이를 시켜도 들려 오는 말은 나쁜 게 더 많았고, 그러니 자연히 좀 안면이 있다 싶으면 오히려 그런 사람이 낫다고 하며 부탁하게 되는 것이다.
 
  나도 혹시 주위에 없나 싶어 많이 두리번거렸지만 마땅한 대상을 찾지 못했다. 그렇다고 내 일을 보아 준 친구에게 부탁한다는 건 가장 가까운 친구를 잃을 것 같아 그렇게 하지 못했다. 그래서 결국 나는 나의 직장을 포기하고 아이들을 데리고 유학의 길에 오르게 된 것이다.
 
 
 
 「내가 왜 여기 와 있나」하는 생각도
 
  비자가 나오기 전에 학교에 말할 수 없어서 혼자서 조용히 학년 말 담임 업무를 처리했다. 22년을 하루같이 아프거나 힘들어도 눈만 뜨면 자동으로 나가던 내 인생의 한쪽을 접는 준비를 해 나갔다. 아무것도 모르는 선배 그리고 동료들, 후배들과의 즐겁고 행복한 나날들의 끝이 나에게만 카운트다운 되기 시작하였다. 너무나 일상적인 점심시간이나 대화시간에도 나만은 일상적인 것이 아니라 이제는 추억이 되어야 하기에 울컥울컥 감정이 북받치기도 했다.
 
  또한 졸지에 나의 마지막 담임반이 되어야 했던 철없는 녀석들도 하나하나 새롭게 각인시키려는 담임의 노력에 아랑곳 없이 늘 하던 대로 천방지축 즐거운 나날들을 보냈다. 학생들과 같이 2박3일 가을 현장학습을 가면서도 나는 차창 밖을 내다보면서 가슴이 뭉클했다. 내년에도 그리고 앞으로 적어도 몇 년은 이렇게 학생들을 데리고 즐거운 여행을 할 줄 알았는데 이번이 학생들과의 마지막 여행이 되겠구나 생각하고는 아쉬움과 안타까움에 코끝이 찡했다.
 
  방학을 한 달 정도 앞두고 비자가 나왔고, 나는 학교에 정식으로 사정을 말씀드렸다. 사립학교라 같은 학교에서 22년을 같이 근무하면서 한가족같이 지낸 선생님들이 모두 내 마음같이 섭섭해했다. 한 달 동안 거의 이별을 위한 식사에 초대되었다. 22년을 마감하는 절차였다. 항상 출근하는 차 안에서 마지막 인사를 어떻게 할까? 하고 고민을 했지만 끝내 근사한 마지막 인사말은 준비하질 못했다. 『솜털이 보송보송하던 모습으로 대학을 갓 졸업하고 우리 학교에 부임하셨던 선생님이 이제 대학생 딸을 둔 나이가 되셔서 우리 곁을 떠나신다고 합니다』 하면서 선생님들께 인사를 하라던 교장선생님 말씀에 벌써 내 감정은 저만큼 내 통제 밖으로 멀어져 갔고, 나는 그런 내 감정을 다독이며 22년을 마감하는 인사를 하고 나왔다. 친한 동료는 울음을 못 참고 뛰어 나갔고 많은 선배들이 따뜻한 격려를 아끼지 않았다.
 
  지금도 선생님들이 보내는 메일을 읽으면 읽을 때마다 가슴이 시리다. 그리고 눈물이 핑 돈다. 마지막 담임반에 장난꾸러기였던 녀석이 학교 홈페이지에 올린 「선생님을 돌려 주세요」라는 글을 읽고는 다리를 뻗고 엉엉 소리내어 한참을 운 적도 있다. 내가 아직 있어야 할 자리는 학교인데 「지금 내가 왜 여기 와 있나」하는 생각이 가끔 든다. 하지만 지금의 내 선택에 후회는 없다. 대개의 부모가 그렇지만 애들 인생이 잘 풀려야 우리네 부모의 나머지 인생이 있는 게 아닌가 하기 때문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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