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시 정부를 통해 세계 질서를 바꿔가는 이념 - 新보수주의 인맥 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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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2차 세계대전 후 좌파의 親蘇정책에서 출발 후 反蘇로 돌아서다
● 1970년대 초 新좌파 및 反유태주의에 자극받아 우경화, 카터에 실망, 공화당으로 전향
● 레이건 때 처음으로 외교-국방 정책 결정에 힘 실어
● 9ㆍ11 테러로 주도적 위치
● 美 지도하에 인류사회 개선, 국익을 위해 軍事力 사용 주장
● 북한 정권을 사라져야 할 「문명의 敵」으로 인식
● 유태인 많고 親이스라엘 입장 견지

周 湧 植 美 존스 홉킨스大 국제대학원(SAIS) 선임연구원
1962년 서울 출생. 중앙대부고·서울大 심리학과 졸업. 美 콜로라도 주립大 MBA. 존스홉킨스大 국제정치학 박사. 저서 「부시행정부의 안보정책」.
미국의 패권주의, 미국의 제국주의라는 말이 국제정치를 휩쓸고 있다. 그것이 하워드 진(Howard Zinn)이 쓴 책 제목처럼 「오만한 제국」이든, 「선의의 패권 국가」든 간에 미국이 과거 로마 제국을 능가하는 막대한 영향력을 갖고 世界를 끌고 가고 있는 것이 엄연한 현실이다. 미국이라는 기관차의 공식 기관사는 부시 행정부이지만 그들에게 아이디어를 불어넣고 있는 것은 新보수주의자들이다. 일명 「네오콘(Neocon)」이라 불리는 新보수주의자들은 21세기 미국 패권주의의 기획가이자 전도사라 할 수 있다. 新보수주의를 알아야 부시가 보이고, 미국이 보인다.
 
  新보수주의는 1930년대 미국 左派운동을 주도한 자유주의 사상의 한 분야로 주로 뉴욕 출신의 유태系 지식인들을 중심으로 시작됐다. 1929년 대공황을 기점으로 부상하기 시작한 左派운동은 기존 체제에 근본적인 변화가 불가피하다는 주장 아래 많은 지식인들의 호응을 불러일으켰다.
 
  당시 좌파운동은 공산주의자(communist), 진보주의자(progressive), 자유주의자(liberal) 세 그룹으로 나눠졌다. 특히 소련의 볼셰비키 혁명을 「하나의 과감한 사회 경제 실험」이라 여기며 급진 개혁론을 주장한 진보주의자들은 공산주의자들과 적극적으로 연대하여 좌파 지식인 그룹을 이끌었다.
 
  철학자 시드니 후크(Sidney Hook)는 『당시 공산주의의 영향은 미국 주요 문화생활을 주도할 정도로 강했다. 이는 그 시대를 살지 않은 사람들에게는 믿기지 않을 것이다』고 말했다.
 
  독재체제를 반대하며 공산주의자들과 일정 거리를 유지하고 있던 자유주의자들도 유럽에서 파시즘이 발호하자 親소련적인 입장을 취하게 된다. 역사가 윌리엄 오닐(William L. O’Neill)의 말 대로 소련을 反히틀러 운동의 중심지로 보고 있었던 것이다.
 
  제2차 세계대전 종전까지 자유주의자들은 나치와 소련 간에 불가침 협약을 체결했던 1939~41년의 짧은 기간을 제외하고는 진보주의자들과 함께 親소련, 진보적인 세계관을 내세우며 민주당의 외교정책을 지지했다. 이들은 헨리 월러스(Henry Wallaceㆍ당시 트루먼 정부 재무장관)을 중심으로, 뉴딜式 개혁 정책의 확산, 민족 자결주의 확립, 제국주의의 종말, 빈곤으로부터 인류 해방을 위한 대규모 경제 개발정책 등을 주창했다.
 
  또 이들은 전쟁 후에도 美蘇 우호 관계는 지속될 것이고, 戰後 세계질서 구축에 소련의 협력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보았다.
 
  후에 新보수주의자들에게 많은 지적 영향을 준 신학자 레인홀드 니버(Reinhold Niebuhr)도 역시 美蘇가 이념적으로 서로 양립할 수 있고 戰後 세계 건설에 공통된 이해관계로 인해 상호 협력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니버에 의해 설립된 「민주행동 연합」 의장 프랭크 킹돈(Frank Kingdon)은 진보주의자와 자유주의자들에게 공화당 외교 정책을 이끌고 있던 反소련 고립주의자들을 의회에서 몰아 낼 것을 독려했다.
 
 
 
 美蘇관계 악화로 「要衝地」개념 등장
 
   하지만 1945년 제2차 세계대전 종식후 美蘇관계의 악화는 자유주의자와 진보주의자가 결별하는 계기가 된다. 1945년 중반 東유럽 문제를 둘러싸고 美蘇간의 긴장이 심화되자 진보주의자들은 미국의 强性정책이 소련과의 관계를 악화시키는 원인이며, 특히 소련과의 관계 개선을 위해 원자 폭탄에 관한 정보를 모스크바와 공유할 것을 주장했다.
 
  한편 니버, 역사학자 아서 슐레진저, 아서 슐츠버거(당시 뉴욕 타임스 매거진 社主), 저널리스트인 조셉 앨솝과 스튜어트 앨솝 등은 공산 독재체제의 위험성과 자유주의 제체의 타당성을 지적하며, 反소련·反스탈린 정책을 주장했다. 진보주의를 대변하는 잡지 「네이션」, 「뉴 리퍼블릭」등을 「제5열 분자」라고 비난하며 反共노선으로 선회한 자유주의자들은 이후 자유주의, 반공주의의 기본 전략개념이 되는 「vital center (요충지)」를 제시했다.
 
  슐레진저는 1949년 자신의 저서 「The Vital Center」에서 세 가지의 전략을 제시했다. 첫째는 자유 민주주의는 공산주의와 같은 전체주의와 서로 양립할 수 없다는 양분론적인 세계관이며, 둘째는 미국은 공산주의 침략으로부터 자유사회를 보호하는 「요충지」가 돼야 한다는 반공주의, 셋째는 미국이 공산주의의 확산을 방지하는 외교정책을 택해야 한다는 封鎖(봉쇄)전략 개념이었다.
 
  1947년 서유럽 국가에 대한 戰後 복구 사업 지원 계획인 마샬 플랜을 둘러싼 논쟁은 자유주의자들의 입장을 공고히 하는 계기가 되었다. 월러스를 중심으로 한 진보주의 진영은 「미국 진보 시민들(The Progressive Citizens of America)」이라는 단체를 중심으로, 트루먼 대통령의 마샬 플랜을 「전통적인 트루먼式 반공주의」라며 반대하는 입장이었던 반면, 니버 등이 중심이 된 「민주주의식 행동을 위한 미국인(Americans for Democratic Actionㆍ1947년 UDA에서 개칭)」은 서유럽 국가들에 대한 경제 원조를 反소련 정책의 구체적 대안으로 받아들이며 적극적인 지지를 보냈다.
 
  니버는 한 걸음 더 나아가 소련의 요구를 받아들이느니 차라리 전쟁의 위험을 감수하고 적극적인 공세로 反蘇 정책을 취할 것을 주장했으며, 슐레진저는 마샬 플랜을 확대해 서유럽 국가들에 대해 군사적 지원도 해야 된다고 주장했다.
 
  이들이 주장한 「요충지」 개념은 자유주의, 진보주의 진영 사이를 오가던 미온적인 자유주의자들로부터 폭 넓은 지지를 받기 시작했다. 그 때까지 진보진영을 대변해 온 「뉴 퍼블릭」誌가 슐레진저의 얘기를 보도하기 시작한 것을 보면, 요충지 개념이 美 자유주의 진영 외교정책의 主流로서 자리를 잡아가기 시작했음을 보여준다. 실제로 슐레진저의 「The Vital Center」가 출간 된 후 그 전략 개념에 대한 자유주의 진영의 합의가 더욱 공고해지고, 워싱턴 정가와 특히 민주당 정책결정자들 사이에 많은 공감을 불러 일으켰다.
 
  또한, 향후 美 냉전 정책의 기본 지침서가 된 「NSC(美 국가안전보장회의)-68」 문서에도 요충지 개념이 반영됐다. 1950년 폴 니츠(당시 국무부 정책기획실장)을 중심으로 작성된 이 문서는 美蘇체제의 양립 불가, 세계 反共 봉쇄정책 보루로서의 미국 등 요충지의 핵심 내용이 담겨 있다.
 
 
 
 美 역할 강화, 세계 反共정책의 보루로
 
  이때부터 요충지 개념을 지지하는 자유주의자들은 냉전 자유주의자로 불리며 향후 20년간 美외교정책에 막대한 영향력을 미친다.
 
  1960년대 후반부터 1970년대 중반까지 미국은 국내외적으로 혼란의 시기였다. 1964년쯤 일어나 1960년대末 전국적으로 확산된 反戰사상과 대내외 정책의 급진적 개혁을 요구하는 新좌파 운동은 요충지 개념의 핵심인 반공주의와 자유민주주의적 개혁을 정면으로 부정했다.
 
  더구나 1968년 리처드 닉슨 대통령의 공화당이 집권하자, 자유주의자들은 기존의 외교정책에 대한 代案을 놓고 분열하게 된다. 1970년 설립된 외교 전문지 「포린 폴리시」는 당시 자유주의자들의 정책 대안을 기록하고 있는데, 1976년까지의 논문들을 분석해 보면 대체로 세 부류로 나누어 볼 수가 있다.
 
  첫째 그룹은 1950년대 수정주의 역사학자 윌리엄 윌리엄스의 영향을 받은 新좌파주의자들로, 이들은 요충지의 반공주의적 봉쇄 정책을 시대 착오적인 것으로 보았다.
 
  이들은 공산권 국가들이 서로 다른 이해관계로 분열돼 있으며, 소련은 더 이상 미국에 위협적인 존재가 아니고 오히려 서방 국가들과 화해를 모색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또 미국은 자국의 이익을 위해 제3세계 국가들에 대해 제국주의적인 정책을 취하고 있으며, 이는 장기적으로 미국의 이익에 손실을 가져올 것이라며, 제 3세계 정책의 근본적인 수정을 요구했다.
 
  두 번째 그룹은 중도적 자유주의 학파로 당시 하버드大 교수였던 스탠리 호프만이 대표적인 인물이다. 이들은 요충지는 낡은 개념이며, 세계는 더욱 다원화돼 이데올로기의 대립보다 환경·인구·경제·인권 문제 등이 국가간의 협력을 통해 해결 가능하고 봉쇄 정책을 필요로 하지 않는 국제 문제가 증가하고 있다고 보았다. 따라서 미국은 무리한 개입 정책을 절제함으로써 격렬한 국제 분쟁에 개입하는 것을 피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세 번째는 카터 정부 시절 안보보좌관을 지낸 즈비그뉴 브레진스키로 대표되는 그룹으로 요충지의 핵심인 반공주의는 유지하되, 점차적으로 脫이데올로기化하고 있는 세계적 흐름을 주목해 정책을 수정해야 한다는 입장을 취했다.
 
  이러한 자유주의자들의 전략적, 이념적 변화, 특히 新좌파주의자들의 급진 노선, 또 당시 키신저를 중심으로 추진되었던 공화당 정부의 데탕트 정책 등을 포함한 1960년대 말~1970년대 초의 여러 상황은 일부 자유주의자들에게는 위기 상황으로 인식되었다.
 
  후에 「新보수주의자」로 불리는 이들은 주로 뉴욕 출신 유태계 인사들로 대외적으로는 요충지에 입각한 반공 봉쇄정책을 지속하고, 대내적으로는 자유민주주의 틀내에서의 정치·사회개혁을 주장하며, 다른 자유주의자들과 결별하기 시작한다. 이들이 자유주의 진영으로부터 자신들의 정체성을 재정립하기 시작한 데는 당시 흑인 사회와 新좌파 세력들 간에 팽배 해가는 反유태주의도 작용을 했다.
 
  흑인 사회에 번져 나가고 있던 권익 신장을 위한 저항주의는 몇몇 유태인 상가를 폭력적으로 공격하는 사태로 발전되고 있었다. 비슷한 시기 이스라엘이 중동전에서 승리하며 아랍 영토의 일부를 점령하자 新좌파 지식인들은 시온주의(Zionism)를 제국주의로 비난하기 시작했다. 이같은 두 가지 反유태주의는 서로 무관한 것이었으나, 같은 시기에 일어남으로써, 유태계 지식인들 사이에 위기감을 증폭시켰던 것이다.
 
 
 
 新보수주의 代父 어빙 크리스톨은 잡지인
 
   新보수주의 제1세대로 불리는 이 지식인 그룹을 대표하는 인사로는 「코멘터리」誌 편집인으로 시작, 후에 「인카운터」誌와 「내셔널 인터레스트」誌를 창간하는 新보수주의 대부 어빙 크리스톨(Irving Kristol)을 비롯, 후에 상원의원으로 선출되는 다니엘 모이니핸(Daniel P. Moynihan), 코멘터리 편집인 노먼 포드호레츠(Norman Podhoretz)와 부인 미쥐 덱터(Midge Decter), 前 버클리大 교수 네이산 글레이저(Nathan Glazer) 등을 들 수 있다.
 
  또 후에 新보수주의 그룹에 가담하는 前 유엔 대사 진 커크패트릭(Jean Kirkpatrick), 新보수주의 외교 정책 이론가였던 前 존스홉킨스大 교수 로버트 터커(Robert Tucker)와 역사학자로 중동 전문가 월터 래쿼(Walter Laqueur) 등도 빼놓을 수 없는 인사들이다.
 
  이들 유태계 지식인들과 新좌파 진영 간의 격렬한 논쟁이 본격적으로 시작되는 것은 1970년이었다. 선봉장은 포드호레츠였다.
 
  그는 주로 코멘터리誌를 통해 新좌파 진영의 급진 논리를 정치, 교육, 사회, 예술, 외교 등 각 분야 별로 공격하며 많은 지식인들의 공감을 끌어냈다. 하지만 아직 이들은 美 지식인 사회에서 정체성을 확립하지 못하고 있었다.
 
  新좌파 진영은 이들을 유태인 기득권 세력을 유지하기 위한 「새로운 보수주의자(new conservative)」라 비난하는 반면 보수 진영은 이들을 「믿기지 않는 보수주의자」, 「脫급진주의자」로 보고 있었다. 新보수주의(neoconservatism)라는 이름이 주어진 것은 1976년 무렵이다.
 
  新보수주의자들은 이때부터 자신들의 이념 체계를 본격적으로 다져나가기 시작 했다. 1980년대, 1990년대 2세대 新보수주의자들에게까지 깊은 영향을 미친 논리의 핵심은 첫째 내적으로 자유민주주의를 강화하고, 외적으로는 소련의 팽창 정책을 저지해야 한다는 것, 둘째 전체주의에 대한 강한 불신과 외교 정책에 있어서의 이데올로기의 중요성, 셋째 미국 지도력 하에 인류사회 개선, 넷째 국익 보호를 위한 군사력 사용과 지도층의 단호한 결단력의 필요성 등이었다. 크리스톨이 『미국은 끊임없이 제국주의적인 강국으로 있어야 한다』라고 표현했듯이, 新보주의자들은 이때부터 미국의 패권주의를 위한 비전을 제시하고 있었다.
 
  新보수주의자들은 전통적으로 루스벨트, 트루먼, 케네디 대통령의 정책을 지지 하며 민주당 主流와 연계해 왔다. 하지만 1968년 시카고 전당대회부터 조지 맥거번을 중심으로 한 좌파적 「新정치(New Politics)」 개혁 세력과 정책 노선을 놓고 대립하게 된다.
 
 
 
 카터에 실망, 공화당으로 전향
 
   당시 민주당 후보 지명전에서 新보수주의자들은 베트남戰 반대, 對蘇관계 개선, 고립주의 등을 주장하는 맥거번 진영과 맞섰으나 그들이 지지한 반공주의자 헨리 잭슨은 낙선했다. 맥거번이 大選에서 패배한 후 新보수주의 그룹은 허버트 험프리, 잭슨 지지자들과 함께 연합하여 「新정치」 세력에 도전하지만 1974년 캔자스 시티 전당대회에서 민주당은 맥거번의 정책 노선을 지지함으로써 당내 非주류로 전락하게 된다. 카터 행정부가 들어서는 1976년 大選은 新보수주의의 정치 행로에 분수령이 된다. 그때까지 크리스톨을 제외한 대부분의 新보수주의자들은 민주당원으로 남아 있었고, 모이니핸은 뉴욕州에서 연방 상원의원으로 선출돼 있었다.
 
  新보수주의자들은 소련이 核무장을 비롯, 군사력을 재확장하고 있으며, 제3세계에 있어서 확장 정책을 지속해 미국의 영향력을 약화시키려 한다고 판단, 강력한 反蘇 봉쇄정책을 강화할 것을 주장하였고, 특히 중동에서 親이스라엘 정책을 채택할 것을 강력히 요구했다.
 
  그러나 카터 행정부는 對蘇 유화정책을 선호하는 입장이었고, 對중동 정책 역시 미온적이었다. 더구나 이란 이슬람교혁명, 니카라과 좌익혁명, 소련의 아프가니스탄 점령 그리고 흑인 지도자들의 反유태주의 묵인 등은 新보수주의자들로 하여금 민주당과 결별케 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됐다. 제2의 트루먼의 출현을 기대할 수 없었던 그들은 1980년 2월까지 대부분 공화당으로 전향하게 된다.
 
  1976년 레이건은 대통령 후보 지명전에서 공화당 主流의 키신저式 對공산권 외교를 『미국의 군사적 우위 상실과 시기적으로 일치했다』고 간접적으로 비난하며, 국방력을 강화하고 도덕적 선명성을 확립해 소련에 대해 전략적, 이념적 우위를 확보할 것과 제3세계에서의 공산주의 확장을 저지할 것을 강력히 주장했다.
 
  이는 당시 포드 대통령을 지지하고 있던 공화당 주류파에 대한 도전이었다. 비록 후보 지명전에서 패했으나, 레이건의 강성 외교정책은 新보수주의자들에게 신선한 충격이었다.
 
 
 
 레이건 행정부에서 이념적 지도부 형성
 
  1980년 레이건이 대통령에 당선되자 新보수주의자들은 자신들의 이념을 현실화할 수 있는 기회로 보고 레이건 행정부와 의회를 통해 외교 정책 결정에 참여한다. 레이건 당시 유엔대사를 지낸 진 커크패트릭과 국무부 국제기구- 인권문제 담당 차관보를 지낸 엘리엇 에이브럼스(Elliott Abrams), 당시 국방부 국제 안보정책 차관보를 지냈고 現 부시 행정부 新보수주의자들의 대부라 일컬어지는 리처드 펄(Richard Perle) 등이 그 예이다.
 
  특히 진 커크패트릭의 활약은 주목할 만하다. 그녀는 개인의 자유, 민주주의와 시장경제 등 미국이 추구하는 가치를 全세계에 전파해 뿌리를 내리게 하는 것이 美외교의 핵심이 되어야 한다고 믿었다.
 
  조지타운大 교수 출신인 그녀는 정연한 이론적 논리로 유엔에서 미국의 입장을 설득, 관철시키며 레이건 外交의 戰士(전사) 역할을 맡았다. 특히, 제3세계에서 左派와 反정부 세력을 탄압하는 권위주의 정권을 지원하는 미국의 정책에 대한 비난 여론에 대해 그녀는 『민주주의는 점진적으로 확립돼 갈 수 밖에 없으며, 공산주의식 전체주의와 민주주의로 가는 과정에 있는 권위주의는 구별돼야 한다』는 논리로 레이건式 냉전 정책을 합리화시켜 나갔다.
 
  진 커크패트릭 정책의 다른 중요한 면은 親이스라엘 정책이었다. 이스라엘의 국가성을 부인하는 나라들에 맞서 그녀는 이스라엘의 자위권, 영토 보유권을 강력하게 방어해 나갔다. 그녀는 1983년 KAL機 격추 사건 당시 『민항기에 대한 소련의 계획적인 공격』이라고 全세계를 향해 소련 당국을 비난하기도 했다. 그녀에 대한 레이건의 신임은 알렉산더 헤이그 국무장관과의 관계에서 잘 나타나 있다. 원래 유엔 대사는 내각의 일원으로 국무부와는 독립적으로 對유엔 정책을 추진할 수가 있으나, 현실적으로는 국무부의 협조가 필요했다. 헤이그는 실무 경험이 없었던 그녀를 아마추어로 취급했고, 그녀는 원칙주의를 내세우며 헤이그에 맞섰다.
 
  레이건은 항상 두 사람 간의 갈등이 있을 때마다, 커크패트릭의 편을 들어 주었고, 헤이그가 해임된 후 그녀는 1985년 레이건 행정부를 떠나기 전까지 유엔 정책을 주도했다.
 
 
 
 反共에서 공산주의 격퇴-패배론 등장
 
  레이건 행정부 1기는 新보수주의자들이 외교정책에 있어서 실무경험을 쌓으며, 보수주의 진영으로 정체성을 확립하게 된 시기였다. 제2의 데탕트라는 레이건 행정부 2기에 접어들면서 新보수주의자들은 다시 한번 정체성을 재정립해야만 했다.
 
  무엇보다도 반공주의에 입각한 그들의 외교정책 논리가 冷戰 종결이 현실화되면서 수정이 불가피해졌기 때문이었다. 포드호레츠 등 「코멘터리」誌를 중심으로 활동한 新보수주의자들은 1980년 초부터 『봉쇄 정책을 넘어, 공산주의를 격퇴시키고 패배시켜야 한다』며 초강경 정책을 택할 것을 주장해 왔다.
 
  소련의 쇠퇴가 명백해지고 고르바초프 등 개혁 세력의 등장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소련의 야욕이 아직 끝나지 않았으며, 소련의 군사력이 미국을 능가하고 있으며, 페레스트로이카 역시 자신들의 정권을 공고히 하기 위한 허구에 불과하다는 극단적인 입장을 버리지 않았다. 이러한 코멘터리의 극단적인 反共 논리는 냉전 종식을 기대하는 미국인들에게 설득력이 없었다.
 
  따라서 크리스톨, 터커를 중심으로 한 중도적 新보수주의자들은 1985년 「내셔널 인터레스트(NI)」라는 국제문제 전문지를 창간하여, 現 정세에 맞는 설득력 있는 논리를 전개하려 했다.
 
  보수적 성향의 재단인 올린 앤드 스미스 財團의 지원으로 시작된 이 잡지는 그 설립 취지에서 『소련의 위협으로부터 국익을 보호·증진한다』는 新보수주의의 전통적 반공주의를 강조했으나, 현실 분석에 있어서는 코멘터리와 많은 차이를 나타냈다.
 
  먼저 소련의 국력은 쇠퇴하고 있으며, 수년內 국제질서는 큰 변화를 겪을 것이라고 예측했다. 특히 소련은 경제적, 기술적 제한으로 군사비를 격감할 수밖에 없으며, 서방 국가의 지원을 절실히 필요로 할 것이기 때문에 외교 정책에 있어서 획기적인 변화가 불가피할 것이라고 예견했다.
 
  NI誌가 세인들의 주목을 받게 된 것은 1989년 동구권 붕괴 불과 몇 개월 전에 출간된 프란시스 후쿠야마(Francis Fukuyama)의 「역사의 종언(The End of History)」이라는 논문이었다. 전체주의에 대한 자유 민주주의의 궁극적인 승리를 예견한 이 논문은 수많은 찬반론을 불러일으키며, NI誌를 창간 4년 만에 전문지로서의 위상을 확립케 하는 계기를 만들었다.
 
  이 잡지가 新보수주의 논리를 주도하게 되었다는 것은 또 다른 의미가 있다. 그때까지 新보수주의를 이끌던 지식인들이 뉴욕에서 활동했으나 그후 워싱턴으로 근거지를 옮기기 시작했다.
 
 
 
 이스라엘 비호
 
  1980년 말~1990년대 초는 新보수주의자들이 보수주의 진영으로 정체성을 확립하면서도, 전통 보수주의와는 차별성을 두는 시기였다. 1986년 NI誌는 향후 新보수주의 외교정책에 대한 지침을 제시한다. 「본보기 혹은 십자군(Exemplar or Crusader)」이라는 제목의 논문에서 터커는 국제사회에서 자유 민주주의를 증진시키는 것이 미국의 국익을 향상시키는 것은 분명하나, 미국의 국제문제 개입은 제한적이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즉 외교 정책의 나침반으로 이데올로기와 국익의 결합을 주장한 것이다. 이는 당시 윌슨 대통령的인 국제주의를 지지하는 자유주의자와, 특히 힘의 논리와 국익 우선만을 내세우는 공화당 보수주의자와는 다른 新보수주의 외교정책을 제시한 것이었다.
 
  新보수주의자는 또 중동 문제를 놓고 부시 행정부의 보수주의 외교담당자와 대립한다. 新보수주의자들은 걸프戰 당시 사담 후세인을 제거하지 않은 데 대해 강한 불만을 갖고 있었다. 더구나 걸프戰 이후 부시 행정부는 아랍과 이스라엘의 화해를 주선하면서 이스라엘에 유연한 자세를 취하라고 압력을 넣는 등 냉담한 對이스라엘 정책을 취했는데 이 또한 新보수주의자들을 격분케 했다.
 
  1992년에는 러시아系 유태인들의 이스라엘 이주를 위해 이스라엘 정부에 100억 달러 상당의 차관을 지급하는 문제가 이슈가 되었다. 당시 부시 대통령은 지급 보증 前에 이스라엘 정부로부터 점령 지역에 거주지를 추가 건설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받으려 했으나, 이스라엘 정부와 워싱턴의 親유태계 인사들에 의해서 좌절됐다.
 
  당시 국무장관 제임스 베이커가 사석에서 유태인들에 대한 강한 불만을 표현한 것이 언론에 유출되어 화제가 되기도 했다. 이러한 일련의 사건들은 당시 유태계 新보수주의자들과 공화당 主流 보수주의자들 간의 불편한 관계를 잘 나타내 주는 것이다.
 
 
 
  [新보수주의의 워싱턴 인맥]
 
  1990년대 초 또 한 가지 주목할 점은 칠순을 앞두고 있는 크리스톨, 커크패트릭 등 1세대 新보수주의자들에 이어 2세대 新보수주의자들의 등장이다. 「이코노미스트誌는 2세대 新보수주의자들이 크게 세 가지 면에서 다르다고 지적 한다.
 
  첫째는 정치적 성향이 태생적으로 공화당이라는 점이다. 둘째, 1세대가 미국內 자유 민주주의에 의한 사회·정치 개혁에 많은 관심을 가졌던 반면, 이들은 사회보장 제도 개혁, 소수 차별 금지조치 철폐 등 자신들이 추구하는 국내 정치, 사회 개혁이 이미 主流 보수사회의 정책이 된 만큼, 외교문제에 초점을 두고 있다는 것, 셋째는 정치집단이 아닌 知的, 사회적으로 형성된 일종의 派閥(파벌)이라는 점이다. 예를 들면, 그들은 대부분 교수·지식인·변호사 출신으로 사회적 배경이 비슷하며, 미국기업연구소(AEI) 등 같은 연구소 중심으로 활동하고 있으며, 「위클리 스탠다드」와 같은 잡지를 다 같이 애독하고 있다는 것이다.
 
  단적으로 말하면 1세대보다 더 지적, 사회적으로 동질적이고 결집력이 강하며, 태생적인 보수로 정통 보수파들과의 관계도 원활할 수 있다는 점이다.
 
  조지 워싱턴大 교수 존 엘만(John Ehrman)이 그의 저서 「新보수주의의 부상(The Rise of Neoconservatism)」에서 지적한 바와 같이 1세대가 「요충지」부터 「역사의 종언」까지 지적·정치적 방황의 긴 여정을 겪으며 반공주의, 자유민주주의의 원칙에 입각한 이념적 정체성을 확립하는 데 기여 했다면, 2세대 新보수주의자들은 확고한 정체성을 밑거름으로 現 부시 행정부의 외교정책을 결정짓는 요직을 장악함으로써, 자신들의 신념을 실현하는 新보수주의 전성시대를 열고 있다고 할 수 있다.
 
  現 부시 행정부에 참여 중인 新보수주의 계열의 인사들은 대략 20여 명으로 대부분이 외교·국방 관련 분야의 요직을 차지하고 있다. 新보수주의자들의 아성인 국방부를 보면 현재 新보수주의 외교 정책의 代父로 알려진 리처드 펄이 최근까지 국방자문위원회를 장악해 왔다.
 
 
 
 부시 정부의 外交-國防 분야 대거 진출
 
   1970년대 헨리 잭슨의 보좌관으로 일하면서 新보수주의자들과 인연을 맺게 된 그는 「암흑의 왕자」로 불릴 만큼, 新보수주의를 혐오하는 사람들에게 主공격 대상이 되어 왔다.
 
  그는 新보수주의자들의 최대 國防 프로젝트인 미사일 방어 체제를 기획했다. 펄은 이 미사일 방어체제는 외부 침략으로부터 美 본토뿐만 아니라, 동맹국들을 核위협으로부터 보호하고자 하는 인도적인 차원에서 추진되는 것이라고 도덕적 당위성도 설파했다. 국방부 副장관 폴 울포위츠는 新보수주의 안보 정책의 이론가이자, 정책 입안·결정자이다. 그는 10여 년 전 국방부 정책차관으로 재직 당시, 現 부시 정부의 「국가 안보전략」의 초안으로 알려진 「국방 정책 지침(Defense Policy Guidance)」 작성자이기도 하다.
 
  그는 또 부시가 대통령 지명전에서 한 연설문 중 국방 정책에 관한 부분을 작성하는 등 大選 기간 중 부시의 안보정책에 대해 자문 역할을 했다. 정책 차관인 더글러스 페이스(Douglas Feith)는 親이스라엘 중동 전문가로 펄이 그의 후견인 역할을 해왔다.
 
  페이스는 1996년 펄과 함께 이스라엘 당시 수상 네타냐후에게 보낸 편지에서 오슬로 평화협상을 백지화하고, 웨스트 뱅크(西岸)와 가자 지방의 영토권을 거듭 주장할 것을 제안했다. 국제 안보담당 차관보 크라우치(J. D. Crouch)는 부시 前 행정부의 전략 核감축을 비난했던 강경파 인물로, 1995년 북한 核, 미사일 시설에 대한 제한적 군사력 사용을 주장한 인물이다.
 
  NSC와 국토안보부 역시 新보수주의자들이 대거 입성해 있다. 주요 인물로는 現 정부 核 배치 정책의 청사진이 된 보고서를 작성한 것으로 알려진 스테판 해들리와 로버트 조셉을 비롯, 엘리엇 에이브럼스, 웨인 다우닝 등이 新보수주의 인맥이다. 또 딕 체니 부통령의 보좌관 루이스 리비와 에릭 에들만은 新보수주의 정책을 부통령과 백악관에 전달하는 주요 역할을 하고 있다.
 
  국무부는 대개 콜린 파월 국무장관을 비롯, 리처드 아미타지, 리처드 하스(Richard Haas) 등 주로 현실주의 정책을 지지하는 인사로 구성돼 있으나, 체니의 강력한 추천으로 제3인자 자리인 군축 및 국제 안보담당 차관에 임명된 존 볼튼은 『UN 같은 것은 없다』고 발언 할 정도로 일방주의를 강력하게 지지해 온 新보수주의자다.
 
  기타 행정부내 주요 新보수주의 인사로는 아프가니스탄 全權 대사를 지냈고 미국의 아프가니스탄 공략을 예견하는 저서로 한때 화제가 됐던 잘마이 칼리자드를 꼽을 수 있다.
 
 
 
 「비밀 결사대」로 불려, 부통령 체니의 인맥
 
   新보수주의자들을 일컬어 「비밀 결사대」라고도 한다. 그 네트워크가 조직적이고 결집성이 강하다는 말이다. 新보수주의자들의 최대 후원자는 체니 부통령과 럼즈펠드 국방장관이다.
 
  체니는 부시 前 행정부 때 국방장관을 지내 부시 가문과는 인연이 깊은 사람. 하지만 당시 안보보좌관을 지낸 브렌트 스코크로프트가 자신의 저서 「변화된 세계(A World Transformed)」에서 말하고 있듯이, 체니는 아버지 부시를 비롯, 다른 안보 정책결정자들과는 코드가 잘 맞지 않았던 매파의 수장이었다.
 
  그는 소련의 개혁 정책은 거짓이며, 소련 붕괴를 촉진시키기 위해 더 강압적인 정책을 택할 것을 주장했고, 한국과 유럽에서 전술 핵을 철수하자는 파월의 의견을 강력히 반대했으며, 걸프전에 대비해 소형 핵무기를 사용할 방법을 연구하도록 지시하기도 했다.
 
  그가 부시의 러닝 메이트가 된 것은 강성이지만 對人 관계에서 친화력이 있고, 10여 년에 걸친 의회 경험으로 워싱턴 정가에 경험이 많으며, 또 국제문제에 해박했기 때문이었다. 사실 現 부시 행정부 고위급 안보 정책 담당자 중 콘돌리자 라이스와 파월을 제외하고는 대부분이 체니의 인맥이라 볼 수 있다.
 
  부시가 취임 직전 인디애나州 상원의원이었던 댄 코스트와 면담 후 그가 국방장관감으로 부적절하다고 판단한 뒤, 체니는 럼즈펠드를 적극 추천했다. 럼즈펠드는 1970년대 포드 행정부 당시 국방장관으로 있을 때 체니를 백악관 수석 보좌관으로 추천한 체니의 워싱턴 후견인이다.
 
  럼즈펠드도 소련과의 무기 감축을 위한 전략무기 제한회담(SALT-II) 협상을 좌절시킨 대표적 매파 인물이다. 체니와 럼즈펠드는 新보수주의는 아니나 그들의 강성 정책은 新보수주의 정책과 상통하는 점이 많다.
 
  新보수주의 정책을 대중화하는 역할을 하는 대표적 인사는 「위클리 스탠다드」誌의 편집장 윌리엄 크리스톨이다. 그는 現 정부의 新보수주의 정책의 타당성을 일반 대중들에게 알리고, 또 대중적 지지를 확보해 현 정부內 新보수주의자들에게 힘을 실어 주는 「윤활유」 역할을 하고 있다.
 
  이 잡지 외에 新보수주의 성향의 글은 「뉴 리퍼블릭」, 「내셔널 리뷰」, 「어메리컨 스펙테이터」 등 잡지와 「월스트리트 저널」, 「워싱턴 포스트」 등 일간지의 매파적 성향의 필진들에게서도 자주 찾아 볼 수 있다. 1997년 크리스톨은 로버트 케이건과 함께 PNAC라는 연구소를 출범시켰다.
 
  미국의 패권주의 시대를 여는 프로젝트를 연구하는 기관이란 뜻이다. 설립 취지에서 PNAC는 미국의 보수주의는 국제사회에서 미국의 역할에 대해 전략적 비전과 외교정책 지침을 제대로 제시하지 못 하고 있다고 비난한 후, 레이건式 강경책으로 미국의 글로벌 리더십을 확립할 것을 천명하고 있다.
 
  PNAC는 국방-안보, 중동-동아시아-발칸 등 지역문제, 글로벌 이슈 등으로 현안을 분류해 자신들의 견해 외에 신문, 잡지, 기타 연구소 간행물 등에 실린 美 전역의 新보수주의 및 보수주의 의견을 인터넷을 통해 체계적으로 일반 대중들에게 전달하고 있다. PNAC 설립 취지에는 체니, 럼즈펠드, 울포위츠 등 정부 고위층 인사와 부시 대통령의 동생 젭 부시를 비롯, 新보수주의 지식인 및 사회 보수주의자(social conservatives), 軍産 복합체에서 대거 지지 서명을 했다.
 
  PNAC 외에도 AEI, 헤리티지財團, 에딕스 & 퍼블릭 폴리시(Ethics and Public Policy) 등 보수 성향의 연구소들이 수시로 新보수주의자들의 입장을 대변해 주고 있으며, 가장 강력한 反新보수주의 연구소로는 카토(CATO)연구소와 루드윅 본 미제 연구소(Ludwic Von Mise Institute)를 들 수 있다. 新보수주의 프로젝트는 주로 브래들리, 올린, 스카이프(Scaife) 등 미국의 국제 문제에 대한 적극적인 개입을 지원하는 재단들로부터 후원을 받으며, 국방 산업 분야에서도 지원을 받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血緣-學緣으로 뭉친 氏族 관계
 
  新보수주의자들의 인맥 구조 중 가장 특이한 점은 혈연, 학연 혹은 오랜 친분 관계로 氏族과 같은 관계를 형성하고 있다는 점이다. 新보수주의자들 간의 氏族 관계를 보면 원조인 어빙 크리스톨의 부인 저투르드 힘멜파도 역시 新보수주의자다.
 
  지난 大選 캠페인에서 공화당은 부시를 한 마디로 「온정적 보수주의자」라고 이념적 성향을 표현했는데, 이는 저투르드의 영국 빅토리아時代에 관한 연구에서 힌트를 얻은 것이었다.
 
  어빙 부부의 아들이 윌리엄 크리스톨이다. 또 어빙의 수제자가 리처드 펄이며, 펄은 시카고大 교수이며 1세대 新보수주의자인 알프레드 월스테터(Alfred Wohlstetter)의 사위이다.
 
  월스테터는 또 울포위츠의 스승으로 펄과 울포위츠가 워싱턴에 데뷔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노먼 포드호레츠의 부인 미쥐 덱터 역시 新보수주의자이며, 그들의 사위가 엘리엇 에이브럼스다.
 
  아들 존 포드호레츠도 新보수주의 칼럼니스트로 활약하고 있다.
 
  노먼의 수제자가 진 커크패트릭과 리처드 파이프이며, 그는 레이건이 소련을 「惡의 제국」으로 지칭하도록 조언한 사람이다.
 
  그의 아들 대니엘 파이프 역시 反이슬람 운동가이다. 로버트 케이간의 부친 도널드와 형제인 프레드릭은 2000년 大選 직전 新보수주의 국방정책의 핵심인 국방비 증액을 강력히 요구하는 「미국이 잠자는 동안(While America Sleeps)」이라는 책을 출판했다.
 
  공화당 主流에도 속해 있지 않았고, 강력한 정치적 조직체도 없이 개인적인 인맥에 의해서 네트워크를 구성해 온 新보수주의자들이 現 부시 행정부에서 핵심 세력으로 전면에 부상하게 것을 이해하자면 우선 냉전 이후 美 지식인 사회의 외교 논쟁을 살펴 볼 필요가 있다.
 
 
 
  [新보수주의 浮上]
 
 
 고립주의와 국제주의간 外交노선 논쟁
 
  1980년대 말 미국 경제의 상대적 침체, 지역통합 주의의 浮上, 소프트 파워(soft power)의 중요성 등 일련의 국제 질서 변화로 인해 일어난 미국 쇠퇴론은 고립주의자와 탈냉전 국제질서 구축에 적극적 개입을 지지하는 국제주의자들 사이에 치열한 외교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그 제1차 외교 논쟁은 1990년대 중반 국제질서가 미국의 패권주의로 재편성되기 시작하면서 국제주의자들의 승리로 끝났다. 그후 美패권주의의 의미와 전망을 둘러싸고 벌어진 제2차 논쟁은 크게 세 가지 주장으로 분류될 수 있다.
 
  공화당 정통 外交노선을 지지하며, 부시 前 행정부 안보 정책의 主流를 형성했던 현실주의자들은 기본적으로 미국의 패권이 오랜 기간 지속될 수 없다고 보고 있었다. 국제 관계는 군사력, 경제력 외에 정보·통신, 기술의 발달 수준, 사회·문화·지식수준 등 다양한 요인에 의해서 규정되는 만큼, 미국이 모든 면에 있어서 최강의 위치를 지속적으로 유지할 수 없다는 것이다.
 
  따라서 국제 질서는 多極체제로 전환될 것이고, 미국의 국익을 위해 중국, 일본, 유럽 등 강대국들과 힘의 균형을 이루며 국제 질서를 유지해야 한다고 주장해왔다. 또 脫냉전 시대의 주요 위협은 이 강대국들간 힘의 균형이 무너지는 데서 기인할 것이라고 예측했다.
 
  클린턴 행정부의 개입·확대 정책으로 대변되는 자유주의적 국제주의(liberal internationalism)는 미국의 패권주의가 지속되지 않을 것이라는 점에서는 현실주의와 공통된 입장이다. 그러나 다른 경쟁 국가들의 힘이 강화됨에 따라 미국의 상대적 위치가 약화될 것이라고 예견하는 현실주의자와는 달리, 국가간 상호 의존성이 점점 더 깊어지는 現 국제 체제에서는 미국의 독자적 행위 영역이 축소될 수밖에 없다는 것이 현실주의자와의 차이점이다.
 
  하지만 미국은 지속적으로 강대국의 위치를 유지할 수 있으며, 국제 사회에서 다른 국가들의 행위에 지대한 영향을 미칠 것으로 보고 있다. 따라서 미국은 시장 경제, 자유 민주주의가 국제 사회에 자리 잡을 수 있도록 후원자의 역할을 해야 하며, 국제 안보협력 체제를 구축해 지역 분쟁, 테러집단, 불량 국가들에 의한 대량 살상 무기(WMD)의 확산을 방지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국제 평화구축이 자유주의적 국제주의자들의 가장 큰 관심 사항인 것이다.
 
  脫냉전 시대에 접어들며 新보수주의자들은 『직면한 위험이 없으므로 정상 상태로 회귀해야 한다』는 현실주의적인 공화당 主流 외교 정책가들의 견해를 반박하며 미국은 국제사회에서 독재정권이나 적대적 이데올로기의 발호를 저지하며, 국익과 자유민주주의 수호를 위해 「惡의 화신」과 투쟁해야 한다고 주장해 왔다. 또 미국의 안보에 대한 위협은 끝나지 않았으며 적대적 집단, 국가들로부터의 위협을 제거하기 위해 국방력을 증대시키고 미국의 영향력을 지속적으로 확대해 나가야 한다고 주장했다.
 
 
 
 9ㆍ11로 新보수주의 存在 이유 확립
 
  9ㆍ11 테러는 2차 외교 논쟁에서 新보수주의자들의 손을 들어 주었던 사건이었다. 윌리엄 크리스톨은 필자와 면담에서 자신이 2000년에 「내셔널 인터레스트」誌에 기고한 「직면한 위험」의 논지를 설명하며, 냉전 종식 후 전문가들 대부분이 안보 위협은 끝났다고 판단했으나, 新보수주의자들은 불량 국가, 테러 집단들에 의한 위협을 지속적으로 경고해 왔고, 9ㆍ11 테러는 자신들의 본 국제 정세의 흐름이 정확했음을 증명해 주는 것이었다고 말했다. 9ㆍ11 테러는 新보수주의의 존재 이유 자체였다고 말할 수 있다는 것이다.
 
  新보수주의자들이 전면에 부상 한 두 번째 이유는 보수 대단결의 필요성이다. 냉전 종식후 과거 10여 년은 미국內 보수주의자들에게는 위기의 시기였다. 클린턴 행정부 8년간 공화당 主流 보수주의자들은 국내 문제에 치중한 나머지 외교 문제에 대한 명확한 정책 대안이 없었고, 리더십마저 不在했었다.
 
  따라서 9ㆍ11테러 이후 안보 문제가 가장 중요한 이슈가 된 이상 新보수주의 대세론은 보수주의內 호응을 얻을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됐다. 워싱턴에 있는 대부분의 보수 성향 연구소들이 新보수주의의 정책을 많이 대변하고 있다는 것이 이를 반증해 주는 것이다.
 
  셋째로 9ㆍ11 테러는 미국인들의 전투적 애국심을 불러일으켰다. 외교 전문가 월터 미드는 「특별한 소명 (Special Providence)」이란 저서에서 미국의 외교사를 이끌어 온 네 가지 아이디어는 해밀턴的인 경제 제일주의, 윌슨的인 국제주의와 도덕주의, 제퍼슨的인 격리주의, 잭슨的인 전투적 애국주의라고 정의했다.
 
  이 중 잭슨的 포퓰리즘이라고 하는 것은 중서부 농장 지대에서 국제 문제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이 농업에 종사하던 사람들이 국가의 영토, 권리, 가치 등이 침해 받았을 때 괭이를 놓고 총을 들고 전쟁터로 나가는 것과 같은 것으로, 전투적 애국주의는 한번 불을 붙이기가 힘드나 일단 불이 붙으면 쉽게 꺼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아프가니스탄, 이라크 등에서의 성공적인 군사작전은 미국인들의 영웅주의와 잭슨의 포퓰리즘과 공명하며, 新보수주의 정책에 대한 미국인들의 지지를 지속적으로 강화해 주고 있다.
 
 
 
  [탈냉전 후 新보수주의 외교 정책의 특징]
 
 
 미국의 패권은 인류를 위해서 필요
 
  냉전 종식 후 新보수주의자들의 주장은 다음 6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첫째, 냉전 시대 미국의 정책은 소련과 공산권에 대한 견제·봉쇄뿐만 아니라, 본질적으로는 세계대전 이후 미국이 추구하는 국제질서를 세우고자 하는 것이었다. 따라서 그 같은 노력은 탈냉전 시대에도 계속 돼야 하며, 미국의 가치·원칙·이데올로기에 부합하는 국제질서를 적극적으로 유지 확대해야 하며 이를 위해 도덕적 선명성, 명확한 국익 개념을 바탕으로 한 능동적인 외교 정책이 필요하다.
 
  둘째, 미국의 영향하에 善意의 패권주의를 구축해야 한다. 국제사회는 서로 다른 체제간의 충돌이며, 냉전 종식은 공산권에 대한 미국 자유민주주의 체제의 승리였다. 현재의 국제질서는 바로 미국의 규범과 가치를 구현한 것으로, 인류는 과거 어느 때 보다도 진일보한 국제 환경에서 생활하고 있다. 따라서 미국의 패권주의는 인류 사회를 위해서도 유지돼야 한다.
 
  셋째, 미국의 패권주의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막강한 국방력을 보유해야 하며, 무력행사를 주저해서는 안 된다.
 
  넷째, 국제 문제에 대한 개입은 지정학적 요인에 의해서가 아니라 미국의 패권을 유지하겠다는 신념과 열정에 의해 결정돼야 한다. 국제질서를 파괴할 수 있는 위기 상황이 발발할 가능성이 있을 때는 예방적 차원에서 개입, 간섭할 수 있어야 한다.
 
  다섯째, 국제기구, 국제법, 혹은 多者주의 해결 원칙은 현재 국제사회에서는 신뢰할만 한 것이 못 되며, 미국의 권리를 제한할 뿐이다. 미국의 패권을 유지해 온 기본축은 동맹 관계로써 友邦과의 관계를 돈독히 하는 것이 중요하다.
 
  따라서 우방국들에 대한 위협은 곧 미국에 대한 위협으로 봐야 한다. 그러나 동맹관계가 미국의 국익에 장애가 된다면 미국의 일방적인 행위도 불사해야 한다.
 
  여섯째, 특히 주목할 부분은 불량 국가들에 대한 정책이다. 新보수주의자들은 전제적 정치 체제를 지닌 불량 국가들은 자유민주주의, 시장경제 원칙을 기반으로 한 국제사회 속에서는 생존할 수 없기 때문에, 대량살상 무기 개발 및 확산 등 끊임없이 現 질서를 파괴하는 행위를 할 수밖에 없다고 본다.
 
  이러한 선악 양분론적인 시각을 지닌 新보수주의자들은 정책 목표가 대량 살상무기 제거 등 제한적이고, 군사 행위시 국제 공조가 필요하다는 현실주의자들의 입장과는 달리 초강경 정책을 취할 것을 주장해 왔다. 불량 국가들과의 협상은 불가능하며, 궁극적인 해결 방안은 政權교체라는 것이 新보수주의 정책의 핵심이다.
 
  新보수주의자들의 脫냉전 전략이 처음 공식 문서로 나타난 것은 1992년 現 국방부 부장관 폴 울포위츠와 現 부통령 수석 보좌관 루이스 리비가 작성한 「국방정책 지침(Defense Policy Guidance)」이다.
 
 
 
  [부시 행정부의 新보수주의 정책]
 
 
 全방위 패권주의 추구
 
   일종의 「팍스 아메리카나」 건설을 위한 정책 건의안으로 핵심 내용은 적성 국가의 도발을 사전에 방지하기 위한 압도적 군사력 유지와 대량 살상무기를 보유하고 있는 것으로 의심되는 국가들에 대한 선제 공격권이었다.
 
  좀더 구체적인 新보수주의 외교 정책은 2000년 PNAC가 내놓은 「미국의 국방력 재건」이라는 보고서에서 비롯됐다. 이 보고서는 크게 미국의 패권주의 유지 확대를 위한 국방력 증대 방안과 新방위 전략 두 부분으로 나눠져 있다.
 
  국방력 증대 방안으로 미사일 방어체제 구축, 국방비 증액, 우주 공간 장악을 위한 宇宙軍 창설, 최첨단 無人병기 개발, 차세대 핵무기 개발 등이다. 이 중 미사일 방위 체제는 新보수주의자들의 최대 프로젝트로 1997년 조직된 럼즈펠드 위원회를 시작으로 美 국방정책의 최고 관심사 중 하나로 추진되어 오고 있다.
 
  이 보고서가 제시한 新방위 전략으로는 전방위 방어를 위한 군사력 再배치, 미사일, 대량 살상 무기에 대한 대응 확산 정책, 美 공군의 선제공격 능력 강화와 북한, 이라크·이란의 위협 행위 불용인 등이었다. 즉 기존의 공화당 현실주의의 전략 개념인 억지, 봉쇄, 집단 방위를 넘어서는 全방위 패권주의 정책인 것이다.
 
  2001년 부시 대통령의 국정 연설은 국방비 증액, 미사일방어 체제 구축, 양분론적 세계관(특히 「惡의 축」 발언) 등 新보수주의 정책을 반영하고 있다. 작년 9월 백악관이 발표한 「국가 안보 정책」도 선제 공격권, 방위선 확장, 대량살상 무기 대응 확산전략 등 新보수주의 정책의 기저를 담고 있다. 또 의회의 선제 공격권 승인은 新보수주의 정책이 부시 행정부의 主流 정책으로 확립됐다는 것을 보여 주는 중요한 사례이다.
 
 
 
 대량 탈북사태 유도
 
  선제 공격권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는 것이 일방주의적 군사 행동이다. 밥 우드워드는 저서인 「전쟁 중인 부시(Bush at War)」에서 지난 8월 콜린 파월의 조언을 받아 부시는 이라크에 대한 일방적인 선제 공격을 보류하고 유엔을 통한 해결책을 모색하기 시작했다고 적고 있다. 다자주의 해결을 선택 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우드워드의 책이 나온 지 5개월이 안 되어 미국은 이라크를 공격했다. 이라크의 대량살상 무기 개발에 대한 확증이 아직 나타나기 前이었다. 부시 행정부는 후세인 제거, 중동 민주화라는 新보수주의의 전략 구도를 따라간 것이고 그 과정에서 UN의 권능을 무시하는 일방주의적 군사 행동을 감행했다. 이 역시 부시 행정부內에서의 新보수주의자들의 위상을 말해 주는 것이다.
 
  그동안 부시 행정부의 對北정책을 살펴보면 新보수주의자들이 이끌어 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부시 집권 초, 파월은 對北정책을 『클린턴 정부가 떠난 자리에서 시작하겠다』고 말해 제네바 합의에 의한 접근법이 계속될 것으로 예상됐다.
 
  그러나 그 해 6월 발표된 정책 검토는 강도와 범위에 있어서 클린턴과는 상당히 다른 강경 정책을 제시했다. 이는 新보수주의자들의 입장을 반영한 것으로, 核미사일 개발에 대한 검증 강화, 核확산 방지를 넘어선 대응 확산 정책, 재래식 무기 감축, 북한 주민과 난민에 대한 인권문제 등이 그것이다.
 
  울포위츠는 1995년 1월 의회 청문회에서 제네바 합의는 문제를 해결한 협정이 아니고, 문제 해결을 연기했을 뿐이라고 부정적인 견해를 밝히면서, 재래식 무기 감축 등을 포함해 좀더 포괄적인 접근법의 필요성을 강조하며, 경제 제재를 통한 해결 방안을 시사했다.
 
  또 북한 인권 문제와 난민문제 해결은 울포위츠의 평소 지론으로, 특히 난민촌 건설은 북한 주민의 탈북을 대거 유도함으로써, 아프리카 수단 난민의 경우처럼 북한 정권에 상당한 압박 요인으로 작용할 것이라고 보고 있다. 부시 대통령의 「惡의 축」 발언 역시 新보수주의자들의 對북한 정책 결정에 있어서 행정부內 위상을 잘 나타내 주고 있는 사항이다.
 
  그러나 新보수주의 對북한 정책이 반드시 아프간이나 이라크의 경우처럼 선제공격을 통한 정권 교체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新보수주의자들은 상황에 따라서는 불량 국가들에 대해 경제 제재, 봉쇄 정책, 反체제 단체 지원을 통한 점진적인 정권 붕괴전략을 택해야 한다고 주장해 왔다. 또 군사력 사용에는 동맹국들과의 협조가 중요하며, 다만 동맹 관계가 미국의 국익에 장애가 될 경우에는 일방적인 군사 행위 역시 불가피하다는 것이다.
 
 
 
 『북한 정권은 살아 남아서는 안 되고, 남을 수도 없다』
 
  新보수주의자들의 영향력을 고려할 때, 앞으로 부시 행정부의 對북한 정책을 이해하는 데는 세 가지 측면을 고려해 볼 수 있다.
 
  첫째, 다른 불량 국가들과 마찬가지로 정권 교체를 궁극적인 해결 방안으로 보고 있다는 점이다. 북한의 대량살상 무기 개발은 체제 보존을 위한 생존 수단의 일환이나 이는 또 現 국제질서 속에서 살아남을 수 없는 북한 체제의 속성인 것으로 보고 있다. 북한은 지금의 국제질서 속에서는 개혁·개방이 불가능하며, 경제 원조나 안보 보장 등 외교적 방법으로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라는 것이다. 기본적인 전략은 적극적인 봉쇄 작전을 통해 북한정권의 붕괴를 유도하자는 것으로, 이는 북한의 개혁·개방을 전제로 하는 한국 정부의 정책과는 그 출발점이 근본적으로 다른 것이다.
 
  둘째, 군사적 수단을 배제하지는 않고 있으나, 현실주의자와 같이 이라크와는 달리 외교적 해결 방안에 우선순위를 두고 있다.
 
  리처드 펄에 따르면 세 가지 이유에서 북한의 상황이 이라크와는 다른 전략을 필요로 한다는 것이다. 우선 지정학적으로 군사적인 작전은 한반도 외에 중국, 일본, 러시아를 포함한 대규모 지역 분쟁을 야기할 가능성이 높다는 점, 북한은 후세인 정권과 달리 지역 패권의 야욕을 가지고 대량살상 무기를 개발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 이라크와는 달리 군사적 공격에 의한 북한 민주화가 쉽지 않다는 점 등이다.
 
  상원 외교전문가 짐 도란이 주장하는 「해방 전략」, 윌리엄 크리스톨이 말하는 「공격적 봉쇄」는 점진적인 정권 교체에 그 목표를 두고 있다.
 
  그러나 북한 대포동 2 미사일의 발사 등 美 본토에 직접적인 위협을 가하는 행위에 대해서는 군사적 대응을 할 가능성이 상당히 높다.
 
  셋째, 부시 정부의 외교적 방안을 온건파 현실주의자들의 정책으로 인식해서는 안 된다는 점을 상기해야 한다. 2000년 6월에 발표된 「정책 검토」는 핵, 미사일 문제 외에 재래식 무기 감축, 인권 문제 등 평소 新보수주의자들의 입장을 많이 반영하고 있었던 점을 감안 할 때, 향후 부시 정부의 외교적 해결 방안 또한 新보수주의 전략의 일환으로 추진될 것으로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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