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터 리프만은 한 나라의 외교·안보정책에서도 가지고 있는 실력과 자산을 넘어서는 발언과 약속을 남발할 경우 「부도」가 날 수 있다고 경고했다. 『외교에서 부도란 싸우지 않아도 될 전쟁을 치르게 되거나, 전쟁을 치르며 온갖 고생 끝에 얻은 평화도 오래 지키지 못하게 되는 상태』를 말한다
국제관계에서 안보문제는 공기 중의 산소 같다는 얘기를 한다. 공기나 안보 모두 평소에 많이 있으면 전혀 고마운 줄 모르지만, 적어지면 몹시 불편해질 뿐 아니라 목숨까지 잃게 된다는 사실에 착안한 비유이다. 최근 북한 核문제나 駐韓美軍 문제 등을 놓고 진행되는 國內의 논의들 중 상당수는 한국이 어떤 선택을 하든 아무런 부담이 없다는 전제 아래 이뤄지는 것처럼 보인다. 연일 미국 언론들에는 한국민들의 反美감정이 보도되고 있고, 駐韓美軍철수 주장은 이제 미국內에서도 左派논객들의 전유물이 아니라 일부의 右派 논객들까지 가세하는 형국이 돼가고 있다.
물론 현재의 韓美 마찰을 풀기 위해서는 韓美행정협정(SOFA)개선이나 北核정책조율 등에서 미국 측이 한국의 의견을 경청해야 할 필요가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韓美동맹을 얘기하면서 한국에 대한 미국의 방위공약이 항상 不變(불변)이었고, 한국이 싫어해도 미군은 억지로 주둔하는 것으로 전제하는 데는 문제가 있다. 지난 한 세기 동안의 역사는 미국의 對韓 공약이 흔들린 적이 여러 차례 있어 왔음을 보여 주고 있기 때문이다.
광복 이후와는 상황이 많이 다르지만 舊韓末 러일전쟁 기간 중 미국은 가장 극적으로 한국을 버리는 例를 보여 줬다. 1904년 러일전쟁 직전부터 전쟁이 계속된 1년 반 동안 高宗황제는 이제 기댈 곳이라고는 미국뿐이라고 판단했다.
영토 야심을 보이지 않은 선진국인 미국을 끌어들여 일본과 러시아를 견제하기 위해 高宗은 미국에 金鑛(금광), 전차부설권 등 많은 경제적 利權을 넘기면서 미국을 붙잡으려 했다.
한때 덕수궁에 불이 났을 때는 궁궐 바로 옆 정동 미국 공사관에 접한 왕실도서관으로 피신해 사실상 왕실이 미국의 보호下에 있는 것처럼 보이게까지 하려는 처량한 외교를 벌이기까지 했다.
그런 심정에서 시어도어 루스벨트 대통령의 딸이 극동순방에 나섰을 때는 그녀 일행의 訪韓을 극진하게 환대해 미국의 환심을 사려는 儀典(의전)공세까지 펼쳤던 것이다.
그러나 이미 루스벨트 정부는 당시 대한제국은 자생력이 없는 국가로 판단하고 있었다. 한 해에 몇 번씩 총리대신과 外部대신이 바뀌고, 자주국방 없이 외교만으로 中立이 보장된다고 믿는 대한제국은 도대체 自力독립이 불가능한 나라라고 판단했던 것이다.
1902년 英日동맹이 체결되었다. 이제 영국의 지원을 받게 된 일본이 한국을 장악하기 위해 러시아와 결전하는 일만 남은 사태가 눈앞에 닥친 것이다. 그런데도 高宗은 『列强의 외교경쟁이 본격화되니 이제야말로 한국의 중립이 보장되게 됐다』며 잘못된 정세판단을 내리고 있었던 것이다.
당시의 미국은 필리핀을 점령하고는 있었지만, 군사력면에서 東아시아에서 경쟁하던 여러 歐美 열강들 중 한 나라에 불과했다.
이런 한계 등을 고려해 루스벨트 대통령은 러시아의 滿洲(만주) 침식과 태평양 진출을 막아주는 代價로 戰勝國(전승국)인 일본이 한국을 보호국화하는 데 신속히 동의해 주었던 것이다.
대신 미국의 필리핀 통치에 일본이 간섭치 않는다는 내용의 합의를 받았다. 이것이 유명한 가쓰라-태프트 密約(밀약)이었던 것이다.
光復 이후 미국의 정책은 오늘의 현실에 좀더 직접적인 참고가 된다. 1945년 봄 미국은 제2차 세계대전 말기 소련군이 폴란드 등 점령지역에서 벌이는 非인간적인 공산화정책을 목도하게 된다.
그러면서 소련과 합의에 의한 신탁통치보다는 한국에 직접 군대를 파견키로 결정하면서 38선 이남으로 미군을 진주시키게 된다. 그러나 한국內 左右대립으로 인한 혼미가 계속되는 가운데, 미국內에서 병력감축의 압력을 받은 트루먼 행정부는 1947년 駐韓美軍을 철수하기로 결정했다.
그 당시 미국의 極東전략은 일본과 필리핀 등을 연결해 對공산권 방위망을 구축한다는 소위 「島嶼(도서)방어전략」으로 전환됐다. 이런 틀 속에서 반드시 방어할 가치가 없다고 본 한국에서 미군을 철수해 갔던 것이다. 이후 李承晩(이승만) 정부는 여러 차례 미국에 안보지원을 촉구했고, 1949년 중국 공산화 이후에는 국무부를 중심으로 美 정부 안에서도 한국안보에 대해 우려가 제기되기도 했다. 그러나 한번 결정된 철군은 번복하기 어려웠고, 결국 그 힘의 공백을 노린 북한의 남침으로 한국전쟁의 비극이 시작됐던 것이다.
6·25 전쟁 발발과 함께 다시 개입한 미군은 1953년 휴전 이후에도 韓美상호방위조약이 체결되면서 현재까지 주둔해 오고 있다. 그러나 그동안 미국 정부 안에서는 여러 차례 駐韓美軍 감축 계획들이 立案돼 검토되곤 했다.
1950년대 아이젠하워 행정부 당시에는 부담스런 한국 방어에서 빠지기 위해 한국을 中立化시키자는 방안이 국방성內에서 활발하게 검토됐다. 그러나 당시 中蘇양국의 위협이 계속되고, 일본이 극동안보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맡기를 꺼리고 있다는 현실 등을 고려해 철군계획이 채택되지 않았던 것이다.
1960년대에는 한국이 베트남戰에 전투부대를 파병하면서 駐韓美軍 감축논의가 비교적 잠잠해졌다. 그러나 1969년 출범한 닉슨 행정부는 본격적인 駐韓美軍 減軍(감군)정책을 추진했다.
베트남 전쟁으로 지친 미국은 이제 東아시아에서 美 지상군을 감축하고, 대신 해·공군력 중심으로 동맹국을 지원하겠다는 닉슨 독트린을 채택했다. 그 일환으로 미국은 1970년 거의 일방적으로 美 7사단(2만 명)을 철수시켰다.
당시 한국군 전투사단들이 베트남戰에 파견돼 있던 상황에도 불구하고 진행된 일방적인 철군정책을 겪으면서 朴正熙 정부는 장기적으로 駐韓 美 지상군의 완전철군이 있을 것으로 판단했다.
그래서 소총·박격포 등 국산무기 개발과 함께 미사일과 核무기 개발까지 추진하면서 자주국방과 중화학공업 건설에 나서게 됐던 것이다.
1977년 등장한 카터 행정부는 닉슨 독트린의 연장이라며 美 지상군 완전철군을 추진, 韓美관계의 최대 긴장기를 초래했다. 그러다가 1979년 소련의 아프가니스탄 침공 등으로 新冷戰기류가 도래하고, 보수적인 레이건 정부가 등장하면서, 駐韓美軍 철수론이 들어가고 韓美안보가 강화되는 시기가 1980년대 중반까지 계속됐다.
이후 고르바초프의 新思考외교로 소련의 위협이 줄어들고, 冷戰종결이 이뤄진 1980년대 후반 이후 미국은 東아시아 지역의 전략환경 변화에 맞춰 駐韓美軍을 단계적으로 감축해 간다는 계획(EASI)을 입안했다. 그러다가 1990년대初 북한 核사찰 위기가 시작된 이후 미군 감축계획이 동결돼 현재에 이르고 있는 것이다.
1990년대 이후 미국은 항상 駐韓美軍 문제가 거론될 때마다 『「한국민이 원하는 한」 駐韓美軍은 계속 주둔할 것』이라는 발언을 하고 있다. 대다수 한국민이 원하지 않으면 떠날 수도 있다는 시사이다.
東아시아에서 미국은 地政學的인 특성상 駐韓美軍보다는 駐日美軍을 중시해 왔다. 駐日美軍은 기본적으로 미국이 東아시아 및 中東 등지로 군사력을 투사(Power Projection)하는 데 필요한 거점기지로서 광범위한 세계 전략과 연계돼 있지만, 駐韓美軍은 북한의 南侵(남침) 저지라는 훨씬 한정된 목표에 초점을 맞춘 부대들이기 때문이다.
동시에 지상전투를 꺼리고 해·공군력으로 군사적 우위를 유지하고자 해 온 미국 국방전략의 특성상, 자칫 대륙의 사태에 휘말리게 되는 단초를 제공할 수 있는 駐韓美軍보다는 자유롭게 해·공군력 중심의 군사력 투사를 할 수 있는 일본기지들을 선호해 온 것이 사실이다.
때문에 정말 한국에서 환영받지 못할 경우, 駐韓 美 지상군을 감축하고, 最惡의 경우 철수하는 방향으로 미국이 정책을 취할 가능성이 있다.
冷戰기간 중 미국이 駐韓美軍을 배치해온 배경에는 소련이 주도하는 공산블록과의 대치에서 한국이라는 前哨(전초)기지를 잃을 경우, 미국이 주도하는 자유진영 전체의 안보와 미국의 신뢰도에 큰 타격을 입는다는 우려가 항상 작용하고 있었다.
그러나 冷戰이 끝난 이후 미국이 駐韓美軍의 역할을 거론할 때는 이같은 汎세계적인 고려는 상당부분 의미를 잃게 됐다. 중국 위협론이 등장하면서 駐韓美軍의 가치가 새로 부상한 측면이 있지만, 소련이 주도하던 공산권 전반의 위협만큼 중국의 위협이 절박한 것은 아닌 것이 사실이다.
때문에 韓美동맹은 당장의 北核대응을 넘어 이제 새롭게 그 의미와 역할을 다시 규정해야 하는 전환기를 맞고 있는 것이다. 국제체제적인 측면에서 駐韓美軍의 존재 이유가 줄어든 현실에서 韓美동맹에 어떤 새로운 역할과 의미를 부여할 것인지 양국의 정부와 민간이 머리를 맞대고 협의해야 할 시점인 것이다.
일본의 경우 이미 1990년대 10년간 계속 이같은 논의를 해오면서 冷戰 이후 美日동맹을 안정권으로 진입시킨 데 비해, 한국의 경우 당장 급한 對北정책조율에 밀려 오히려 시기적으로 늦은 감마저 있는 게 현실이다.
이런 시점에 일고 있는 한국內 反美감정의 악화는 美 의회와 여론, 정책입안을 맞은 행정부 안에 여러 가지 논의를 촉발시킬 수 있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만일 北核문제에 대한 조율과정에서 한국정부가 북한과 미국 사이에 中立노선을 취해갈 경우, 실제 한국에 대한 협상 카드로서 부시 행정부가 駐韓美軍 감축을 시사할 가능성이 있다.
駐韓美軍 철수를 지지하는 한국內 인사들은 논의의 개진에 앞서서 과연 駐韓美軍이 철수할 경우 한국이 안게 될 부담을 생각해야 한다.
현재의 한국군은 계속된 현대화에도 불구하고 정보·작전·유사시 전쟁물자 보급·해공군지원 등에서 아직도 거의 절대적인 對美의존 상태에 있는 것이 현실이다.
안보상황 악화에 대한 우려로 외국투자가 위축되고 주식시장이 악화되는 등 한국경제에 대한 여파도 고려해야 한다. 또 장기적으로 미국이라는 우방이 빠져나간 상태에서 한국 혼자의 힘으로 러시아와 일본, 중국 등의 주변대국들을 어떻게 다뤄 갈지에 대한 구체적인 전략이 서 있어야 한다.
정말 國政 책임자들이 새로운 국가전략으로서 장기적으로 미군감축을 추진해야겠다고 판단한다면, 발언에 앞서 한국이 치러야 할 비용과 갖춰야 할 준비 등이 무엇인지 철저히 검토한 후 조심스럽게 입장을 개진해야 한다. 당장의 햇볕정책에 지장이 되니 美北간 等距離(등거리)정책을 추진한다는 발언 등은 한국이 처한 안보현실을 모르는 아마추어적 短見의 표출로 볼 수밖에 없다.
미국의 저명한 언론인이자 사상가였던 월터 리프만은 외교문제에 대한 탁견으로도 존경받은 인물이었다. 그는 우드로 윌슨 대통령과 함께 제1차 세계대전 후 파리 평화회의에 참석했고, 이후 다시 제2차 세계대전 발발과 冷戰의 가열을 목격하면서 미국 외교에 날카로운 비판과 견제를 던졌던 지식인이었다.
그가 한 관찰들 가운데는 아직도 金言으로 남아 있는 「리프만 갭 (Lippmann Gap)」이라는 말이 있다.
한 나라의 외교·안보정책에서도 가지고 있는 실력과 자산을 넘어서는 발언과 약속을 남발할 경우 「부도(Bankruptcy)」가 날 수 있다는 경종이다.
그는 『외교에서 부도란 싸우지 않아도 될 전쟁을 치르게 되거나, 전쟁을 치르며 온갖 고생 끝에 얻은 평화도 오래 지키지 못하게 되는 상태』라고 지적했다. 韓美관계를 생각하는 토론에서 한국인들은 리프만 갭의 교훈을 한번 되새겨 봐야 할 시점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