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중인터뷰 - 韓日 막후 怪物崔書勉의 現代秘話史

  • : 오동룡  gomsi@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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崔 書 勉
1926년 강원 原州 출생. 연희전문 文科 수료, 충남大 대학원 문학박사, 단국大 명예문학 박사. 大東新聞 기자, 고아원 「聖방지거의 집」 원장, 서울천주교총무원 사무국장, 日本 아세아大 교수, 日本 도쿄 한국연구원 원장, 安重根 의사 숭모회 이사, 全國아리랑보존연합회 초대회장 역임. 現 국제한국연구원장, 한국몽골친선협회 회장, 韓日포럼 자문위원. 저서:「安重根 사료」, 「7년전쟁(임진, 정유왜란)」, 「몽골기행」, 「새로 쓴 安重根 의사」 등.
카이젤 수염의 怪物
 
 
  국제한국연구원장 崔書勉(최서면·76) 박사는 安重根 의사와 獨島에 관한 연구를 비롯, 韓日關係史에 관한 많은 자료를 발굴해 연구해 왔다. 崔씨는 1926년 강원도 原州에서 태어나 연희전문 文科를 수료했다. 한동안 言論界에 몸담았으며 대학에서 교편을 잡기도 했다. 1957년 渡日, 1969년 東京 한국연구원을 설립한 그는 1988년까지 30여년 간 近代 韓日관계 자료를 수집, 연구해 왔다. 그는 1988년 귀국해 서울 江南區 역삼동에 국제한국연구원을 설립, 일본과 한국을 오가며 「安重根 評傳」과 「회고록」 집필에 전념하고 있다.
 
  그의 국제한국연구원은 韓國學 관련 연구기관 중 드물게 희귀자료 20만여 점을 체계 있게 보관하고 있다. 특히 日帝 朝鮮總督府 시대의 문헌이나 安重根 의사 관련 자료, 서양인이 제작한 한국지도를 많이 소장하고 있다. 1974년 東京 간다(神田)의 古書店에서 발굴해 낸 安重根 의사의 옥중 수기 「安應七 自敍傳」을 포함한 이 자료들은 崔씨가 日本에서 19년간 한국연구원을 운영하면서 축적한 것이다.
 
  그는 安重根 의사를 日本人들에게 새로이 인식시켜 1969년 현역 대학교수와 언론사 논설위원들을 중심으로 「국제 안중근 연구회」를 결성하게 했다고 한다. 舊韓末 개화파의 주역인 金玉均을 연구하는 「金玉均 연구회」도 활발한 활동을 하고 있다. 壬辰倭亂 때 日本에 끌려간 聖女 「오타 줄리아」 자료를 스페인 선교사 문헌에서 발견해 낸 것도 성과 중 하나다. 해마다 5월 두 번째 주일이면 고즈시마(神津島) 섬에서 韓日 가톨릭 신자들이 참여해 「줄리아祭」를 지내고 있다.
 
  명성황후, 閔妃 시해사건에 관한 진상을 日本의 저명 작가 쓰노다 후사코(角田房子)에게 알려 「閔妃暗殺(민비암살)」이란 책이 나오게 한 것도 그다. 1969년에는 일본 야스쿠니(靖國) 神社에서 임진왜란 당시 함경도 지방의 의병활약상을 기록한 「北關大捷碑(북관대첩비)」를 발견하기도 했다.
 
  탁본된 北關大捷碑는 의병장 崔配天(최배천) 장군의 후손인 崔玉子(최옥자ㆍ83) 세종大 설립자의 주선으로 4월29일 강원도 강릉시에 있는 강릉 최씨 사당인 篁山祠(황산사)에 그 模拓(모탁)이 모셔졌다. 한몽친선협회 회장이기도 한 崔씨는 몽골을 20여 차례 다녀오면서 몽골 관련 자료와 수백 점에 달하는 古地圖를 모았다.
 
  지난 4월6일 서울 강남 르네상스호텔에서 만난 카이젤 수염의 崔書勉씨는 청재킷 차림이었다.
 
  日本에서는 그의 이름 앞에 꼭 「韓日외교의 怪物」이라는 수식어가 따라다닌다고 한다. 그는 광복 직후의 격동기에 左右를 넘나들며 金九(김구), 張勉(장면) 등 當代의 거물들과 交分을 가졌다. 日本에서는 기시 노부스케(岸信介)ㆍ후쿠다 다케오(福田赳夫) 前 日本 수상 등과 시이나 에쓰사부로(椎名悅三郞) 前 外相 같은 當代의 내로라 하는 정객들과 사귀었다. 韓日關係에서 그의 역할을 가리켜 가나야마 마사히데(金山政英) 前 주한 일본대사는 生前(생전), 「사케테 토오레나이 미치(さけてとおれないみちㆍ돌아서 갈 수 없는 길-日本 측의 입장에서 보면 崔씨를 통하지 않고는 한국과의 일이 성사되지 않는다는 의미)」라고 했다.
 
  崔書勉씨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가톨릭」과 「日本」이라는 두 가지 키워드를 알아야 한다. 「가톨릭」이 그와 盧基南(노기남) 대주교, 張勉으로 이어지는 연결고리 역할을 했다면 「日本」은 자유당 때 日本으로 亡命하면서 韓國學 전문가가 되는 계기를 마련해 준 것이다.
 
  崔書勉씨의 본명은 崔重夏(최중하). 연희전문 文科 학생이던 그는 金九를 중심으로 한 上海 임시정부 출신들이 만든 韓獨黨 산하 대한학생연맹(약칭 대한학련) 위원장으로 활동했다. 동시에 李始榮(이시영) 선생의 권유로 18세의 나이에 大東新聞에 입사해 기자로 일한다. 당시 같이 일했던 사람 가운데 新亞日報를 창간한 張基鳳(장기봉)씨와 權五哲(권오철) 前 동아일보 사회부장 등이 있다.
 
  그는 金九의 개인 심부름을 주로 했다. 白凡이 庸齋(용재) 白樂濬(백낙준) 연희전문 학장에게 전하는 편지도 그의 손을 통했다. 崔書勉씨는 白凡과 庸齋가 자신을 『학생이 아니라 마치 해방 전부터 독립운동을 한 동지처럼 대우했다』고 회고했다.
 
  ―白凡과는 어떻게 만나게 됐습니까.
 
  『대한학련의 기본 입장은 해외에서 임시정부를 구성해 정부를 유지한 분들이 정치를 해주셔야 올바른 建國이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자연스레 金九 선생을 지지하고 따랐어요. 학생운동은 爲堂 鄭寅普(정인보) 선생이 학생의 본분을 지키면서 하라는 말씀도 있어서 훌륭한 선생님을 모셔다가 강의도 들었습니다. 그런 연유로 金九 선생을 뵐 기회가 많았고요』
 
  ―金九 선생과 얽힌 에피소드가 있다면 소개해 주십시오.
 
  『한번은 金九 선생이 몸이 편찮으셔서 서울 용산 원효로 聖心高女(현 성심여고) 자리에 있는 성모병원에 입원하신 적이 있었어요. 가톨릭 신자 전용의 조용한 병원인데 그곳으로 절 부르셔서 신탁통치 결정에 대한 배경을 설명해 주셨어요』
 
  崔書勉씨는 당시 金九 선생이 들려준 것이 다음과 같은 내용이라고 했다.
 
  <내가 신탁통치를 반대하는 것은 국내에서 시작한 것이 아니다. 이미 해방 전인 1943년경 미국에 있는 학자와 영국 사람들이 앞으로 전쟁이 끝나면 朝鮮을 신탁통치하자는 사전논의를 했다는 이야기가 나왔다. 카이로회담 직전, 重慶에서 중국의 蔣介石(장개석) 총통이 날 불러 『카이로에 가면 朝鮮 문제가 나온다. 그때 英國과 美國을 상대로 어떤 대답을 해야 하냐』고 물었다.
 
  『만일 蔣介石 총통께서 신탁통치를 지지한다고 하면 나는 어디로 또 亡命을 해야 합니까. 내가 원하는 것은 조선의 즉각적인 자주독립이지 妥協(타협)이 아닙니다』라고 나는 蔣총통에게 이야기했다. 그 말을 들은 蔣介石 총통이 나를 『간디를 뛰어넘는 지도자』라고 했다. 결국 카이로에서 蔣介石 총통의 제안으로 「朝鮮을 적당한 시기에(…in due course…) 독립시킨다」는 것으로 결정했다>
 
  崔書勉씨는 당시 어린 자신에게 金九 선생이 신탁통치에 대한 배경설명을 해 준 것에 대해 『당신의 확고한 정치철학을 젊은이들에게 남겨 주시려는 것 같았다』고 회고하면서 『당시 귀국한 金九 선생에게 이 나라를 통치해 달라고 맡기지 못하는 이 民族은 얼마나 슬픈 민족인가 하는 게 내 학생운동의 출발이었다』고 말했다.
 
 
  張德秀 암살 사건
 
 
  1948년 2월4일, 당시 崔書勉씨는 韓民黨(한민당)을 창당, 외교부장ㆍ정치부장을 역임한 雪山 張德秀(장덕수) 살해 사건의 공범으로 지목돼 체포된다.
 
  雪山은 1947년 12월2일 종로경찰서 경사 朴光玉(박광옥)과 연희전문 학생인 裵熙範(배희범)에 의해 서울 동대문구 제기동 자택에서 살해됐다.
 
  『한독당, 한민당 兩黨 모두 신탁통치를 받아들일 수 없다고 美蘇共同委員會에 이야기한 날 밤에 張德秀가 南韓의 단독정부를 수립하는 데 동의했다고 하니까 대한학련 학생들이 「學兵 가라고 권유한 잘못을 용서받은 것이 엊그제인데, 또 배신을 하느냐. 이래서 建國이 안 되는구나」 하던 일은 있었지만 죽일 생각은 없었어요. 사건이 발생하고 수일 후에 張澤相(장택상), 盧德述(노덕술), 崔雲霞(최운하) 등이 태화관에서 나를 회유도 하고 연행해서 물고문도 했어요』
 
  美 군정 치하에서 진행된 재판에서 라만 검사(대위) 지휘로 조사가 이뤄졌다. 崔씨는 미국 사람들도 몽둥이와 전기로 고문하는 것을 보고 놀랐다고 한다. 용산 미군 조사실에서 취조를 받던 崔씨는 감방에서 살인혐의로 조사를 받던 當代의 俠客(협객) 金斗漢(김두한)을 만나기도 한다.
 
  『해외에서 36년 간 독립운동을 하다 귀국한 지 얼마 안 된 분들이 「崔선생, 당신이 예스해야 우리가 안 맞는다」고 무조건 자백하라고 해요. 世交間인 金溶植(前 외무부 장관) 변호사도 「崔선생, 당신이 이야기를 안 하면 90세 노인들이 다 희생을 당하니 무조건 했다고 하고 진실은 재판에서 밝히라」고 이야기를 했습니다』
 
  이듬해 3월2일 과도정부에서 첫 공판이 열렸다. 6회 공판 때는 白凡이 증인으로 불려와 『나는 왜놈 이외에 내가 죽일 놈이라고 말한 사람이 없다』고 使嗾(사주)설을 부인, 이 사건의 배후는 끝내 밝혀지지 않았다.
 
  21회의 공판을 거쳐 4월1일 美군정 포고령2호 위반으로 피고 10명 중 8명에겐 교수형, 2명에겐 징역 10년이 선고됐다. 그러나 미군 사령관 하지 중장은 이를 무기징역~5년으로 감형, 전국 교도소에 나눠 수감했다. 崔書勉씨는 무기징역 형을 선고받고 대구형무소로 갔다.
 
  1948년 부통령이 된 李始榮 선생은 崔書勉씨가 「張德秀 암살 사건」에 대해 억울함을 호소하자, 당시 李仁(이인) 법무부 장관에게 再審(재심)을 요청했으나 美 군정하에서 벌어진 재판이라 재심은 곤란하다는 이유로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李始榮 부통령이 改名해 줘
 
 
  그의 이름은 수감생활 중 崔重夏에서 崔書勉으로 바뀐다.
 
  『李始榮 부통령이 감방으로 사람을 보내 열심히 공부하라(書勉)는 뜻으로 이름을 「崔書勉」이라고 새로 지어 화선지에 써 보내셨습니다. 그것은 지금도 내 사무실에 걸려 있어요』
 
  崔書勉씨는 형무소에서 인생의 轉機(전기)를 맞는다. 崔씨의 모친이 原州에서 그를 출산할 때 담당의사였던 安思永(작곡가 安基永의 兄)씨가 형무소로 찾아와 『천주교를 같이 믿자』고 傳道(전도)해 가톨릭 신자가 된 것이다.
 
  崔씨는 1949년 10월 위장병으로 인해 1년6개월 만에 형집행정지로 석방된다. 尹亨重(윤형중ㆍ前 경향신문 사장) 신부에게 교리 강습을 받을 무렵, 6ㆍ25가 발발했다.
 
  『6ㆍ25 발발 며칠 후 교리를 배우러 신부님께 찾아갔더니 명동성동은 이미 인민군에게 점령됐어요. 尹신부 방에 가보니까 「崔선생, 급히 지방에 볼 일이 있어 가니 돌아와서 만나뵙겠습니다」라고 메시지가 남겨져 있었어요. 「난리 중에도 이렇게 약속을 무섭게 지키다니, 천주교를 믿을 수밖에 없구나」 하고 마음을 먹었습니다』
 
  피란을 못한 그는 人共 치하에서 광복군 제3지대장 출신 金學奎(김학규) 장군과 같이 지냈다. 6ㆍ25 때 인민군에 의해 형무소에서 석방된 金學奎 장군에게 南으로 피란하자는 결심을 하게 하고 경기도 수원시 조암리로 피난처를 제공했다. 아이가 없던 金장군은 그곳에서 처음으로 아들을 얻었다.
 
  金장군은 6ㆍ25 때 拉北(납북)을 면하게 해 준 崔書勉씨와 5ㆍ16 후 병든 몸을 육군병원에 입원시켜 치료해 준 朴正熙 대통령을 생명의 은인으로 여겼다고 한다. 申鉉俊(신현준) 해병대 초대 사령관이 崔씨에게 들려준 말에 의하면 『자신과 朴正熙 대통령은 광복 후 金學奎 장군의 광복군 제3지대에 소속돼 있었다』고 한다.
 
  1951년 1ㆍ4후퇴 때, 崔書勉씨는 부산으로 피난, 그곳에서 吳基先(오기선) 신부가 맡긴 고아 100명을 데리고 「聖방지거의 집」을 운영한다. 美 네브래스카州 오마하市에 에드워드 플래너건(Edward Flanagan) 신부가 집없는 소년들의 보호소인 보이스 타운(Boys Town)을 성공적으로 운영한 것을 모델로 崔씨는 모범적으로 고아원을 운영했고, 이 사실은 서울까지 전해졌다.
 
  이때 崔書勉씨를 도운 사람이 兪鎭午(유진오) 박사의 부인 李容載(이용재) 여사, 毛允淑(모윤숙) 시인, 現 대통령 부인인 李姬鎬(이희호) 여사, 金學仲(김학중) 前 가톨릭 醫大 성모병원장 등이었다.
 
  盧基南(1902~1984) 주교가 『敎區 본부에서 비서역과 천주교 총무원 사무국장을 맡길 테니 함께 일하자』며 固辭(고사)하는 崔씨를 네 차례의 설득 끝에 데려갔다. 이는 盧주교뿐 아니라 서울교구 사무총장인 張勉 박사와 인연을 맺게 된 출발이기도 했다.
 
  『천주교는 자랑스러운 종교였어요. 외국에서 가톨릭 신부가 오기 전에 신자(李承薰)가 먼저 천주교를 배워와서 전파한 것은 세계 傳敎史上 唯一한 경우지요. 그런 천주교가 3ㆍ1운동 때 많은 사람이 만세운동에 적극 참가한 것을 누가 알아 주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33人 중 가톨릭 신자가 하나도 없었기 때문이죠. 盧基南, 張勉, 尹亨重씨 등 뜻있는 분들은 천주교가 人材를 안 길러서 그렇게 됐다는 것을 절감했어요. 이런 상황에서 내가 盧주교의 부름을 받은 것입니다』
 
 
  日本으로 亡命
 
 
  崔書勉씨가 日本과 인연을 맺은 것은 타의에 의한 것이었다. 李承晩 정권은 1957년 崔書勉씨를 6ㆍ25 때 脫獄(탈옥)한 사람으로 몰아 체포하려 했다. 그를 救命하기 위해 위장병을 치료했던 서울大 병원 의사와 尹亨重 신부가 趙寅九(조인구) 담당검사를 찾아갔지만 소용이 없었다.
 
  『그 당시 李承晩 정권이 선거에서 표를 바꾸는 등 부정선거를 일삼았잖아요. 천주교에서는 이런 것은 못 참거든. 경향신문을 통해 맹공격을 했어요. 年老한 李承晩 대통령이 쓰러지면 정권은 반대당인 張勉 박사에게 넘어간다는 위기감에서 張勉 세력의 주요 인물들을 없애려는 것으로 보였습니다』
 
  그는 다울링(Walter C. Dowling) 주한 美 대사에게 신변보호를 요청했다. 그러나 다울링 대사는 『以北에서 넘어온 사람이 아니고 우방국인 남한에서 온 사람에게 망명 허가를 내줄 수가 없다』고 했다. 盧基南 주교의 주선으로 천주교 성직자로 변장한 그는 美 군용기를 타고 日本으로 密航(밀항)했다.
 
  공항에 出迎(출영)나온 日本 천주교 신도회장의 안내로 당분간 숨어 지냈다. 얼마 지나자 한국에 있는 포르투갈, 쿠바 신부들의 노력으로 이들 정부로부터 망명허가를 얻었다. 崔씨는 밀항자의 신분으로 초대 문부성 대신을 지낸 다나카 고타로(田中耕太郞) 당시 최고재판소장(대법원장)을 찾아가 출국할 수 있도록 도움을 요청했다.
 
  다나카 고타로 소장은 『법의 수호자로서 밀항자를 밀출국시킬 수는 없는 일이다. 내가 신원보증을 할 테니 자수해서 특별 체류허가를 받으라』고 권유를 했다. 崔씨는 이 권유를 받아들였고, 신원보증은 다나카 고타로 최고재판소장, 재정보증은 聖心女子大學 이사장이자 성심수도회 극동 관구장인 브리지트 키오(Brigitte Keog) 수녀가 하게 됐다.
 
  『다나카 고타로 선생이 「망명생활이라는 게 얼마나 고통스럽겠냐」며 피아노를 배워 위안을 삼으라고 권하던 기억이 납니다. 피아노는 배우기 쉬워 마흔이 넘어서 배운 자신도 1년에 한 번 獨奏會(독주회)를 한다고 했어요. 당초 이탈리아로 유학을 가겠다던 내 생각을 바꾸도록 한 분도 그분이지요. 日本人들에게 한국을 올바로 인식하도록 지도해 주는 것도 이 時期에 필요한 것 아니냐고 했어요』
 
  그후 문부성 장관을 지낸 오타 고조(太田耕造) 아세아大 총장과 재정보증인 브리지트 키오의 경제적 지원으로 본격적인 한국학 연구에 돌입한다. 만 5년간 비가 오나 눈이 오나 日本 국회도서관에서 자료 속에 묻혀 살았다고 한다.
 
  『한국 역사를 하나도 모르는 내가 무슨 한국사람이냐, 매일 매일 공부할수록 모르는 것이 많다는 사실에 부끄러워졌습니다. 속으로 이탈리아에 안 가길 잘했다는 생각을 했어요』
 
  崔씨는 1969년 게이오 의숙(慶應義塾)을 설립한 자유주의 교육사상가인 후쿠자와 유키치(福澤諭吉) 딸의 도움으로 그가 제공한 私邸(사저)에 東京 한국연구원의 문을 열었다.
 
  이를 계기로 崔씨는 1970년 10월 연세大 朴大善(박대선) 총장과 게이오大 사토사쿠 총장을 연결해 두 대학 간 자매결연을 맺는 계기를 마련하기도 했다. 日本에서 한국연구원을 만든 崔書勉씨에게 母校인 연세大가 많은 지원을 하자 그가 답례한 것이기도 했다. 한반도문제 전문가인 오코노기 마사오(小此木政夫) 게이오大(慶應大) 교수도 兩校 교류 제1호로 연세大에 유학한 인물이다.
 
  崔씨는 金九 선생이 生前에 언급한 친일파 처리방법을 소개했다.
 
  『어느 신문사 사장이 金九 선생에게 「선생님께서 빨리 친일파를 처단하지 않으셨기 때문에 나라가 이렇게 혼란하다」고 했답니다. 金九 선생은 「日本이 바로 이웃에 사는데 親日派는 많을수록 좋다. 없다면 만들어야지, 그게 무슨 소리냐. 내가 말하는 것은 「反민족적」 親日派를 처단하라고 한 것이지, 언제 단순히 親日派를 처단하라고 했느냐. 내가 中國에서 왔다고 親中派를 무조건 좋아하는 줄 아는 모양인데, 親中派도 아편장사 등을 하는 反민족적 親中派는 처단해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신문사 사장이 「그럼 언제 反민족적 親日派를 처단하시렵니까」 하니까 「建國이라는 북새통에 불을 끄려면 강도의 손도 빌려야 한다」면서 「전부 힘을 합쳐 일단 建國부터 하고 그 다음으로 숙청대상은 새로 생기는 국회에서 유권해석을 내려 기본법을 제정해야 할 문제」라고 말씀하셨답니다』
 
  崔書勉씨는 『日本이 우리나라를 통치한 방식은 총독과 고급 관리를 日本人 자신들이 직접 맡는, 세계 식민 지배 사상 유례가 없는 직접 통치였다』고 했다. 그래서 日帝에 협력한 사람이라고 해도 모두 처벌해야 하는 대상은 아니라는 것이 그의 지론이다. 예컨대 학병에 끌려간 사람은 규탄대상이 아니라, 오히려 慰撫(위무) 대상이라는 것이다. 당시 日本 제국주의의 강압에 저항할 수 있는 아무런 수단이 없었기 때문이다.
 
 
  총독부 간부, 『金性洙 선생이 진짜 애국지사』
 
 
  崔書勉씨는 呑虛(탄허) 스님이 작고하기 전, 『독립운동을 한 사람들이 어떻게 해야 反민족적 친일파를 가려낼 철학적 기준이 있느냐』고 물었다고 한다.
 
  『呑虛 스님은 「莊子의 人生訓(인생훈)을 보고 배워야지」 하시며 연필을 가지고 오셔서 인생훈 중 「불은 바깥에서 끄는 것보다 안에서 끄는 게 더 힘들다」는 말씀을 써 주셨어요. 밖에서 독립운동을 하기보다 국내에 거주하면서 항일운동 하기가 더 어려웠다는 뜻이었어요』
 
  그는 「안에서 불을 끈」 분으로 金性洙 동아일보 社主, 方應謨(방응모) 조선일보 社主를 꼽았다.
 
  『고등경찰의 총지휘자인 조선총독부 보안과장을 지낸 야기 노부오(八木信雄)를 잘 압니다. 술 한 잔을 하며 「당신쯤 되면 한국 사람을 전부 다 안다고 할 수 있는데, 조선 사람 중 진짜 애국지사를 한 명만 골라보라」고 했더니 주저없이 金性洙 선생을 꼽아요. 총독의 명령으로 귀족원 의원을 임명하려고 金性洙씨를 찾아가 도장을 찍으라고 하니까 아무 대답이 없더래요.
 
  시간을 너무 끌어 야기 노부오가 「빨리 도장을 찍어달라」고 하니까 「신문사, 방직회사까지 다 내놓았는데 이것을 안 하려면 또 무엇을 내놓아야 하느냐」고 하더래요. 이 순간 야기 노부오는 얼굴이 화끈 달아오르면서 그의 본심이 抗日(항일)에 있었다는 것을 느꼈답니다. 方應謨 선생도 평양에서 東亞日報 지국을 하다 朝鮮日報를 인수해 당시 東亞日報와 다른 잡지들에 실리지 못하는 反日的 내용, 심지어 사회주의적인 글까지도 수용하며 抗日을 했어요』
 
  崔씨는 『거짓 없는 자서전을 쓸 수 있다면 위대한 인물』이라고 말한다.
 
  『자서전을 쓰는 사람들은 수도 없이 많지만 루소나 오거스틴처럼 그 안에 자기 罪를 고백하고 있는 것은 드물다고 생각해요. 이런 의미에서 金九는 부끄러움을 고백할 수 있는 용기가 있었기 때문에 「白凡逸志」라는 역사적 참회록이 남았다고 생각해요』
 
  ―金九 선생이 위대한 분임에는 틀림없지만 李承晩의 단독정부 수립을 대체할 만한 현실적인 代案을 제시하지 못하지 않았습니까. 정치는 현실인데 실현 가능한 代案을 제시하지 못했고, 남북협상도 추진하다가 실패했단 말입니다. 국가 지도자로서는 李承晩에 비해 부족하다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金九 선생을 행정가적인 정치인으로 보면 안 되겠지요. 민족 독립운동 시기의 정치인은 교훈적 독립운동가여야 합니다. 金九 선생을 평가할 적에는 교훈적 독립운동가 金九로 봐야 합니다. 다시 말해 간디를 민족 독립운동에 있어서 훌륭한 사람으로 봐야지, 네루 시대의 정치인으로 봐서는 안 된다는 겁니다』
 
 
  日本을 다루는 거울, 「李承晩의 平和線」
 
 
  ―李承晩 대통령을 보는 視角이 그때와 지금 달라진 게 있습니까.
 
  『李承晩 대통령에 대한 평가는 기본적으로 역사의 테두리에서 평가를 하는 안목을 길러야지, 자기 환경이나 자기 감정 때문에 「全部 아니면 全無」라는 생각은 안 되겠다는 겁니다. 지금은 李承晩 대통령 아드님 李仁秀(이인수) 「우남 이승만 박사 기념관」 이사장과 잘 지내요. 나는 李承晩 정권에 대한 불만 때문에 망명을 했으면서도 日本에서 30년 동안 욕을 안 했어요. 그건 周易에 「不忌其國(불기기국)」이라는 말이 있는데 「외국에 가서 자기 나라를 욕하지 않아야 한다」는 뜻이죠.
 
  10년이 지나니까 강산도 변하더군요. 프란체스카 여사가 살아계실 때 함께 李承晩 대통령 墓에 참배도 했어요. 우리는 과거를 규탄할 줄은 알지만 미래를 그리는, 역사적 로맨스를 만드는 데는 부족하지 않느냐는 생각을 해서 金九 선생 아들 金信(김신)씨, 金性洙 선생 아들 金相万(김상만) 동아일보 前 회장, 李承晩 대통령 아들 李仁秀씨 등 세 사람을 초대, 식사라도 하려고 했는데 안 되더라고요』
 
  ―1952년 1월18일, 한국연안수역 보호를 위해 李承晩 대통령이 平和線(일명 李承晩 라인)을 그은 것이 그 뒤 韓日교섭에서 한국이 유리한 고지에 서도록 만든 것 아닙니까? 그 뒤 張勉이나 朴正熙 정권 때 말입니다.
 
  『당연히 유리했죠. 韓日관계에서 日本이 유일하게 弱者의 입장이 된 경우지요. 4ㆍ19가 나니까, 張勉 정권과 가까운 日本 首相이 날 불러 강연을 시키더니 협상을 제안했어요. 평화선은 그대로 놔두고 日本 배가 한국쪽 평화선 안에서 고기를 잡되, 잡은 뒤 鎭海나 馬山에서 가공하도록 하는 韓日水産合同公社를 만들자는 거예요. 고기만 잡게 해주면 생선값의 일부를 한국에 떨구겠다는 제안이지요. 金永善(김영선) 재무부 장관이 내게 사장자리를 제의한 적이 있어요. 아무튼 그때 평화선 때문에 일본 수산업계가 떠는 것을 봤어요.
 
  日本 사람들이 평화선 때문에 배가 잡혀가도 아무 소리도 못하고 고기를 잡아서 나눠먹자는 소리를 했습니다. 내가 李承晩 대통령 비판을 하다가도 이런 것을 보면 참 잘했다는 생각이 들어요』
 
 
  제자 盧基南 대주교에게 깍듯이 대했던 張勉 박사
 
 
  1951년 盧基南 주교에 의해 천주교 총무원 사무국장이 된 崔書勉씨는 직속상관인 사무총장 雲石 張勉을 처음 대면한다. 그는 張勉 박사를 「인격자」, 「조선왕조적 선비」라고 평했다. 1948년 제3차 유엔총회에 한국 수석대표로 참석, 한국의 국제적 승인을 위하여 노력한 張勉 박사는 1949년 초대 駐美大使가 돼 韓美 國交 발전을 위해 노력한다.
 
  『제3차 유엔총회에 갔을 때 일이에요. 변변하게 양성한 외교관 하나 없던 실정이라 張勉 박사는 외교문서 작성하는 것 하나부터 프랑스, 영국 외교관들에게 배웠답니다. 매일 아침 미사에 빠지지 않았는데 그때 濠洲(호주) 대표로 온 천주교 주교가 무슨 일로 왔느냐고 묻더래요. 「코리아에서 유엔 승인 문제로 왔다」고 하니까 「내가 앞장서서 도와주겠다」고 해 큰 덕을 봤답니다. 信仰(신앙)이 나라를 구해줬다고 말하더군요』
 
  실제로 張勉 박사는 외국에 나가면 호텔 잡은 다음에는 성당을 찾아 미사 시간을 확인하고 매일 아침 미사에 가서 領聖體(영성체ㆍ성체를 먹는 것)를 할 정도로 열성적인 신자였다. 張박사는 朴順天(박순천), 郭尙勳(곽상훈), 吳緯泳(오위영), 玄錫虎(현석호), 金永善(김영선)씨 등 2공화국 주요 정치인들 상당수를 가톨릭으로 改宗(개종)시켰다. 특히 張박사는 불교신도회 회장이었던 육당 崔南善(최남선)을 改宗시켰다. 病席(병석)에 있던 崔南善은 당시 KBS를 통해 충격적인 개종 발표를 했고 聲明書를 崔書勉씨가 낭독했다.
 
  李哲承(이철승) 前 의원도 입교를 권유받았으나 거절했다고 한다. 金在淳(김재순) 前 국회의장도 張勉 박사로부터 『자네 영혼을 내게 맡겨야겠네』라는 권유를 받았으나 『박사님, 저는 신사참배를 거부했던 朱基徹(주기철) 목사님에게 세례를 받은 기독교인입니다』라고 말해 더 이상 입교 권유를 받지 않았다고 한다.
 
  崔書勉씨는 『張勉 박사는 농담도 잘 하시고 말씀도 구수하게 하시는 분』이라고 했다. 『1925년 張박사께서 美 맨해튼 가톨릭대학을 졸업하고 귀국하니까 부친께서 아무날 아무시에 아무개집 딸과 결혼한다는 사실만 알려주고 신부감을 보여주시질 않더래요. 부친께 신부감을 보여달라고 했더니 「니가 봐 뭘해. 애비가 봤으면 됐지」라고 하시더랍니다. 결혼식장에서 절을 하다가 신부를 흘끔 보니 눈이 두 개 달렸길래 「이젠 살았구나」 했대요. 그렇게 말씀하시면서 「미스터 崔는 좋은 시대에 연애하고 장가가서 행복한 거야」라고 말씀하시더군요』
 
  ―張勉 박사가 정치에 入門(입문)한 과정을 들으셨습니까?
 
  『張勉 박사는 일제 때 서울 東星商業學校(동성상업학교) 교장에 취임, 광복 때까지 근무했어요. 어느 날 주한 미군사령관 하지 중장과 李承晩 대통령이 盧基南 주교에게 각계 대표를 망라한 民主議院(민주의원-1946년 구성된 美 군정청 자문기관) 28명을 선정하는데, 천주교 대표를 보내달라고 요청했어요. 그때 盧주교의 추천을 받아 민주의원이 되면서 정치에 입문한 겁니다. 張박사는 「盧주교께서 갑자기 추천해서 民主議員이 되었다」고 하시며 「내가 英語를 가장 잘하는 사람으로 돼 있대」라고 멋쩍어 하시더라고요』
 
  ―張勉 박사의 親日활동에 대해 들으신 적이 있습니까.
 
  『있을 수가 없지요. 기회도 없구요. 워낙 온순한 사람이 돼서요』
 
  ―張勉 박사가 創氏改名(창씨개명)한 것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張勉 박사는 日帝 때 다마오카 츠토무(玉岡勉)로 창씨개명을 했습니다. 그러나 진짜 친일파들은 창씨개명을 안 했어요. 영친왕 李垠(이은) 황태자도 姓을 갈았다는 말은 못 들었어요. 안 해도 견디니까. 창씨개명한 사람들은 오히려 독립운동자가 많아요. 안 하면 쌀 배급을 안 해주고 학교도 못 들어가는데요. 사람이 죽어갈 때 金哥(김가)라고 하면 입원이 안 되고 「가네야마」하면 되는데 창씨개명 안 할 재간이 있나』
 
  張勉 박사와 盧基南 대주교는 사제지간이다. 張勉 박사는 大神學校(대신학교, 現 가톨릭大)에서 영어와 일본말을 가르쳤다. 그때 제자가 盧基南 바오로 주교였다. 張勉 박사가 盧주교에게 『바오로야, 이것 읽어봐라』하고 시키기도 했다고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張勉 박사는 盧基南 대주교를 『주교님』이라고 깍듯이 모셨고, 盧基南 주교는 張勉 박사를 편하게 『장박』이라고 불렀다.
 
 
  5ㆍ16 군사혁명 때 피신한 것은 천주교식 처신
 
 
  ―張勉 박사는 5ㆍ16 군사혁명 때, 당일 새벽 5시부터 5월18일 정오까지 55시간 동안 수도원으로 피신, 國政(국정) 최고책임자로서 직무유기를 한 것 아니냐는 말을 듣습니다.
 
  『난 그렇게 보질 않아요. 그 상황에서 張勉 박사는 철저히 천주교式으로 처신했을 거라고 봅니다. 천주교에선 굶어죽을 지경이면 차라리 훔쳐 먹어 생명을 유지하는 게 옳은 겁니다. 목숨은 내 것이기도 하지만 하느님이 주신 것이기 때문이죠. 따라서 군사혁명이 났을 때 거기 앉아서 죽는 건 신앙이 용서를 안 했을 겁니다』
 
  군사혁명이 일어나던 날 새벽, 張勉 박사는 반도호텔에서 銃聲(총성)을 듣고 부인 金玉允(김옥윤) 여사와 함께 혜화동 갈멜수녀원으로 피신한다. 혁명군 측에서 盧주교를 통해 張勉 박사를 수소문하지만 결국 찾아내지를 못했다.
 
  『나중에 갈멜수녀원에서 張勉 박사가 나온 후, 盧주교가 프랑스인 수녀원장에게 전화로 「왜 거짓말을 했느냐」고 다그쳤더니 프랑스 대사한테 물어보라고 하더래요. 프랑스 대사가 하는 말이 「주교님, 그걸 질문이라고 하십니까. 프랑스에서는 政變(정변)이 나면 정치가가 숨는 데가 수도원입니다. 프랑스 정치 발달사는 수도원에서 감춰준 역사」라고 이야기를 하는 데 할 말을 잃었답니다』
 
  ―張勉 박사는 한국 정치사에서 보면 유약한 정권으로 평가되는 반면, 당시 海外의 평가는 歷代 가장 자유롭고 민주화가 실현된 시기였다고 평가하는데요.
 
  『이상주의적 민주주의 시기였지요. 張勉 박사는 인내심이 강한 분입니다. 張勉 박사가 부통령 때인 1957년 베트남의 고딘디엠(吳廷琰) 대통령이 한국에 왔어요. 李承晩 정부에서 고딘디엠 대통령 환영식을 열어 주면서 부통령인 張勉 박사를 안 불렀습니다. 더군다나 張勉 박사와 고딘디엠은 당시 스펠만(Spellman) 뉴욕 대주교가 「장차 아시아의 지도자가 돼야 한다」며 아끼던 사람들로 미국에서부터 교분이 있었습니다.
 
  張勉 박사는 인내심이 강하기 때문에 그런 수모를 겪으면서도 명동성당을 방문한 고딘디엠을 만났을 때 李대통령에 대해 한 마디도 불평을 안 했어요』
 
  張박사는 작곡가 安益泰(안익태)씨와 절친했다.
 
  『1955년 李承晩 대통령 80회 탄신일, 스페인에 살고 있는 安益泰가 귀국했어요. 천주교에서도 安益泰가 천주교 신자라는 걸 확인하고 張勉 박사에게 요청해 총무원 초청 환영파티를 열어준 적이 있어요. 국일관에서 환영 행사를 하는데 기생도 있을 거 아니에요? 張勉 박사가 기생들에게 「國歌를 지으신 분이니까 잡스럽게 굴지 마라」며 곤란한 장면을 멋지게 넘기시더라고요』
 
  4ㆍ19가 터지니까 安益泰는 日本에 망명중이던 崔書勉씨에게 電報를 친다. 「드디어 李承晩이 쓰러졌다. 이젠 張勉 박사가 대통령으로 나가야 한다. 張勉 박사가 나를 러닝메이트로 삼도록 盧基南 주교와 張勉 박사에게 부탁해 달라」는 내용이었다. 전보에 이어 편지도 도착했는데 보니 「He knows me very well.(그는 나를 잘 안다)」이라고 씌어 있었다.
 
  『安益泰는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자, 스페인에 가서 스페인 여인과 결혼해 살고 있었어요. 순진한 나는 그 내용을 그대로 張勉 박사와 盧주교에게 보냈어요. 盧주교가 유럽 가시는 길에 東京에 들르셨길래 安益泰가 부탁한 것에 대해 물었어요. 盧주교는 「한국 사람은 뭐 좀 성공하면 정치를 하려고 한다」고 이야기하시더니 「의사면 의사, 음악이면 음악으로 출세를 해야지, 그래서 장박(張勉)에게 그거 무시하라고 했다」고 하시더군요』
 
  崔書勉씨가 이 말을 安益泰에게 그대로 전했더니 『무식한 것들은 할 수 없구먼. 미국에 있는 폴란드 망명 정부 대통령이 피아니스트인 페테로프스키다. 이 사람은 연주가 끝나고 청중으로부터 열띤 박수를 받을 때면 「나에게 주는 박수를 고생하는 동포들과 조국에 달라」고 해 모금을 했다. 내가 그까짓 부통령 타이틀이 뭐가 필요하냐. 나는 6ㆍ25 후에 고생하는 동포들을 돕기 위해 페테로프스키가 되려고 한 거지』라며 섭섭해 했다고 한다.
 
  『어쨌든 張勉 박사는 음악인 安益泰를 좋아한 거지, 정치인 安益泰를 생각한 사람은 아닌 것 같았어요. 정치적 목적으로 安益泰같이 유명한 사람을 부통령 시키면 얼마나 유리하겠느냐는 고려를 절대로 안 하는 사람이에요』
 
  ―5ㆍ16 당시 혁명군은 해병대와 공수부대, 6군단 포병단과 30사단 및 33사단을 다 합쳐도 3400여 명 내외였습니다. 또 5ㆍ16 다음날 벨기에 국왕 訪韓이 예정돼 있어 경호 경비를 위해 경기도 경찰 4500명이 서울에 와 있었습니다. 張勉 박사가 쿠데타軍 타도 결심만 했다면 제압할 수 있었던 상황 아닙니까?
 
  『張勉 박사가 무리해서 쿠데타를 진압할 마음을 먹었다면 할 수도 있었겠지요. 천주교 신자인 李翰林(이한림) 1군사령관, 代子인 姜英勳(강영훈) 前 총리가 육사 교장으로 버티고 있었으니까요. 하지만 張박사는 신앙인의 입장에서 동포들끼리의 殺生을 하고 싶지 않았던 겁니다』
 
 
  張勉의 代子, 李會昌의 부친 李弘圭옹 추억
 
 
  崔書勉씨는 李會昌 한나라당 前 총재는 모르지만, 그의 부친 李弘圭(이홍규ㆍ97)옹은 잘 안다고 했다. 그가 李옹을 만날 때인 1955년은 李옹이 서울고검 검사 시절이다. 盧基南 주교를 비롯한 천주교 지도자들은 各界를 망라한 人材를 양성하는 데 골몰하고 있었던 때였다. 張勉 박사와 盧基南 주교는 李弘圭 검사를 崔書勉씨에게 소개했다.
 
  李옹은 1951년 총리로 있던 張勉 박사를 代父로 모시고 온 가족과 함께 가톨릭에 입교한 가톨릭 신자였다. 李옹은 「청백리」 판사로 이름높던 故 金洪燮(김홍섭)씨도 천주교로 개종시킨 사람이다. 李옹은 1965년 현역에서 물러나 변호사 개업을 하면서 가톨릭법조인회 회장을 맡아 오랫동안 무료 법률상담 및 변론활동을 벌여왔다. 이에 대한 공로로 1994년 12월 세계 인권선언일을 맞아 국민훈장 무궁화장을 받았다.
 
  李弘圭옹은 청주지검 검사로 있을 때, 李承晩 대통령과 가까운 충북지사 尹모씨를 구속한 일로 미운 털이 박혀 현직 검사로는 처음으로 구속되는 곤욕을 치르기도 했다. 혐의는 사상범이었다. 6ㆍ25 발발 직전, 서울지검 검사로 있을 때, 상부의 지시를 어기고 남로당원 혐의자를 풀어 줬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사상범 혐의는 풀리고 결국은 직권남용 혐의로 기소됐으나, 검찰의 공소취하로 풀려나 복직했다.
 
  崔書勉씨는 『李옹은 잡아넣어야 할 사람은 꼭 잡아넣고 억울한 사람은 반드시 풀어준 강직한 사람』이라고 했다. 『사실 좌익으로 말하면 당시 金大中씨도 가톨릭으로 입교했을 때 좋은 「보호색」을 쓴 것 아닌가요. 그 당시엔 가톨릭은 「反共」을 상징하는 최고의 보증수표였으니까요』
 
  ―金大中씨에 대한 잡음이 왜 나왔답니까.
 
  『張勉 박사가 金大中씨를 과할 정도로 重用(중용)하니까 잡음이 났지요. 주변에 鄭一亨(정일형), 金永善, 鄭憲柱(정헌주), 金應柱(김응주) 등이 잡음을 막는 데 도왔습니다』
 
  崔씨는 작년 여름 한 친구로부터 李弘圭옹이 살아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 즉시 李弘圭옹에게 전화를 했다. 1957년 渡日 후 45년 만의 통화였다. 96세였을 그가 살아 있으리라고는 꿈에도 생각 못했다는 것이다.
 
  『전화를 했더니 단박에 「최형 아니야?」하고 알아봐요. 어찌나 가슴이 뭉클하던지 그 길로 찾아가서 끌어안고 눈물을 흘렸어요(이야기를 하던 崔씨의 눈가에도 이슬이 맺혔다). 오는 6월25일이 盧基南 대주교 忌日(기일)인데 탄신 100주년이 돼요. 그날 盧주교를 잘 아는 사람들이 모여 「李弘圭가 얼마만큼 李承晩 治下에서 고통받던 천주교를 保護해 주었느냐」는 이야기가 많이 나올 겁니다』
 
  지난 5월2일 崔書勉씨는 서울 종로구 명륜동 2가에 있는 李弘圭옹의 집을 찾았다. 日帝시대에 지어진 허름한 한옥집에 들어서니 金四純(김사순ㆍ91) 여사가 반갑게 崔씨를 맞았다. 李옹은 臥病(와병)중인 까닭에 거동이 불편해 보였다고 한다.
 
  잠시 후 낡은 가구들로 채워진 안방으로 崔書勉씨가 들어서자 病色이 완연한 李弘圭옹이 온힘을 다해 崔씨를 향한 반가움을 표시했다. 혈기왕성한 「李弘圭 검사」의 사진이 벽을 장식하고 있었고 주위에는 聖畵(성화)들이 보였다. 두 사람은 한동안 잡은 손을 놓지 못했다. 날씨 이야기를 화제삼아 기념촬영도 했다.
 
  崔書勉씨는 李옹에게 『金大中씨가 李弘圭 검사의 신세를 그렇게 지고서 李會昌에게 그렇게 하면 안 되지』 하자 李옹은 말없이 잠자코 듣고만 있었다.
 
  『李弘圭씨가 그때 서울고검 부장검사였었는데 李弘圭씨가 없었으면 張勉 정권도 金大中 정권도 못 나왔을 거예요』라고 하자 그때까지 눈을 감고 잠자코 고개만 끄덕이던 李弘圭옹이 작은 목소리로 『그럼』 하고 수긍했다. 崔書勉씨가 李옹과 이야기를 계속했다.
 
  『자유당 정부에서 張勉 박사를 이모저모로 치려고 장난할 때, 중대한 국면마다 李弘圭가 부장검사니까 몰래 알려줬지요. 不義를 보면 못 참는 성격이었니까. 金大中씨도 멀리서 혜택을 본 것 아닙니까』
 
  다시 李弘圭옹이 고개를 끄덕였다.
 
  金四純 여사가 李옹을 대신해 崔書勉씨가 金大中씨를 李옹에게 소개한 사실을 이야기했다.
 
  『1957년 6월10일, 盧基南 주교님이 계시는 주교관에서 파티를 열 때 崔書勉씨의 소개로 金大中씨를 처음 만났어요. 우리도 張勉 선생의 代子이고, 그(金大中)도 代子라 서로 인사를 했습니다』
 
  金四純 여사는 과거 李弘圭옹이 사상범 혐의로 구속됐을 때의 상황도 이야기했다.
 
  『현직 검사를 빨갱이라고 조사를 했어요. 이 사람이 「너희가 나를 죽여봐라. 나는 빨갱이가 아니다」고 했어요. 옷이 집으로 왔는데 피가 묻어 있었습니다. 가만 있으면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어 두 살배기인 막내를 들쳐업고 법무장관에게 달려갔습니다. 장관실에 들어가니 대법관들이 놀라며 「우리가 있는데 왜 오셨냐」고 하길래 그 사람들을 무시하고 장관을 만나 「생사람을 잡는 게 장관이냐」고 따졌어요. 장관이 「사모님, 잘못했습니다」 하며 빌었어요. 빨리 남편을 석방하라고 이야기했습니다』
 
  金四純 여사는 李會昌 前 총재에 대한 언급도 했다. 그는 『아들이 「내가 정권을 잡더라도 절대로 정치보복을 안 하겠다」고 했습니다. 아들이 평소 金大中씨 욕하는 것을 듣지 못했고, 빈말은 안 하는 성격이라 그대로 실행할 겁니다』라며 『金大中씨가 세 아들 문제 때문에 어려움을 겪고 있지만 金大中씨가 마음 바른 것은 안다』는 요지의 이야기를 했다.
 
  崔書勉씨는 李弘圭옹에게 『꼭 백 살까지 사셔야 한다』면서 『그때 내가 좋은 술집을 예약을 할 테니 건강하시라』면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李弘圭옹이 작년에 민주당으로부터 「日帝 치하 해주ㆍ서울ㆍ광주 등지에서 10여 년 간 검찰 수사관으로 재직하면서 일제 침략자들이 수많은 독립운동가들을 고문하고 감옥에 보내는 데 적극 협조했으며, 일상 생활에서도 마루야마(丸山)로 창씨 개명을 하고 가족에게 일본어만 사용토록 했다」는 내용의 공격을 받았는데, 실제 親日을 했다고 보십니까.
 
  『친일이라고 주장하려면 증거를 내놓아야 하는데 증거가 없잖아요. 일제 때, 어떤 자리에 있었으니까 친일파다 하는 것은 무책임한 말이죠』
 
 
  경향신문 사무실에서 張勉 박사에게 金大中 소개
 
 
  대한매일 1999년 6월12일자에는 金大中 대통령이 張勉 박사를 만나 가톨릭 영세를 받는 과정이 나온다. 다음은 金대통령의 증언이다.
 
  <기자-張勉 박사를 만나기 전에도 성당에 나간 것으로 압니다. 영세를 받은 과정을 들려주십시오.
 
  金대통령-제 前妻의 처가가 가톨릭 집안이기 때문에 자주 성당에 나갔지만 정식으로 영세를 받은 것은 1957년이었습니다. 그때 저는 유명한 신학자이기도 한 尹亨重(윤형중) 신부로부터 교리강독을 받았고 盧基南 대주교의 방에서 金哲珪(김철규) 신부라고, 그때 우리 민주당과 매우 가까운 신부님으로부터 영세를 받게 되었습니다.
 
  이 모든 일은 崔書勉씨라고, 그때 서울교구 사무국장으로 있던 제 친구가 주선했는데, 張박사를 代父로 소개해 준 사람도 그였습니다. 이렇게 해서 저는 張박사하고 영적으로 代父ㆍ代子의 관계가 되었고, 그 인연으로 저는 신파의 총수인 張박사 밑에서 젊은 엘리트로서 활약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崔書勉씨에 따르면 당시 웅변학원을 하고 있었던 金大中 대통령은 金相賢(김상현) 前 의원과 함께 경향신문 4층에 있던 자신의 천주교 총무원 사무국장 방으로 자주 놀러왔다고 한다. 그때 金대통령은 崔書勉씨에게 『천주교 신자가 됐으면 좋겠으니 신부를 한 분 소개해 달라』고 요청한다. 崔書勉씨는 당시 崔南善, 金性洙, 吳華英(오화영) 등에게 교리를 가르쳐 명성이 높은 尹亨重 신부를 소개했다.
 
  金大中씨는 하루도 빠지지 않고 교리학습을 했다고 한다. 尹亨重 신부는 崔書勉씨에게 『자네가 보낸 그 사람 똑똑해. 질문하는 거 신랄하고…』라고 말했다고 한다. 영세를 받은 金大中씨는 崔書勉씨에게 「토마스 金大仲(편집자 注ㆍ金大中 대통령의 改名 전 이름)」이란 사인이 적힌 사진을 하나 보냈다.
 
  영세를 받고 나서 金大中씨는 『뭐가 되고 싶냐』는 尹亨重 신부의 질문에 『정치가가 되고 싶다』고 말했다고 한다. 尹신부는 崔書勉씨에게 『직속 상관이 張勉 박사니까 자네가 소개하라』고 이야기했다. 崔씨는 金大中 대통령을 서울 소공동에 있던 경향신문 고문실에서 부통령 겸 민주당 최고위원인 張勉 박사에게 소개했다.
 
 
  美 CIA는 『金大中이 표 얻기 위해 가톨릭 신도됐다』고 의심
 
 
  ―金대통령을 소개한 후 張勉 박사가 崔박사께 어떤 이야기를 했습니까.
 
  『고맙다고 그래요. 張勉 박사와 盧基南 주교는 천주교의 가장 큰 고민이 人材難이라고 말해 왔어요. 우리가 3ㆍ1운동 때 천주교 대표가 참가 못한 것을 한스럽게 생각했으니까요. 인물을 길러보자는 의미에서 李弘圭, 金大中씨 등을 환영한 겁니다』
 
  그때 崔씨는 盧基南 대주교, 張勉 박사, 韓昌愚(한창우) 경향신문 사장 등으로부터 정계진출 권유를 받았으나 이를 거절하던 시기였다. 「張德秀 사건」 관련자로 정치적으로 크는 것이 張勉 박사에게 累(누)를 끼칠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고 한다.
 
  그는 張勉 박사에게 『나는 정계 진출을 안하니 나를 생각하시듯이 金大中씨를 생각해 달라』고 말했다. 이런 깊은 내용이 있어선지 張勉 박사와 盧주교는 金大中씨를 각별히 대해 주었다고 한다. 그렇지 않았던들 金大中씨가 하루아침에 민주당 상무위원, 선전부장이 될 수는 없었을 것이라고 崔씨는 말했다.
 
  『1972년 金大中씨가 망명한 뒤 美 CIA와 한국 중앙정보부로부터 질문을 받았고, 주일 미국 대사 로버트 잉거솔의 특별보좌관인 아마코스트(주일 美대사 역임)가 직접 찾아와 물었습니다. 주로 「金大中 종교는 가짜 아니냐. 金大中 자신은 가톨릭에 다니면서 부인이 개신교에 나가는 것은 선거 때 표를 얻으려는 전략 아닌가」 등이었습니다. 나는 사람을 공격할 게 있고 안할 게 있다고 했어요. 나와 金大中의 관계를 소개하고, 그 사람의 신앙은 의심하지 말라고 했어요』
 
  ―경향신문 안에 있던 총무원 사무실에서 일할 때 金大中 대통령과 기억나는 일이 있습니까.
 
  『어느 날 나에게 「최형! 천주교 총무원 사무국장이니 경향신문에 발언권이 있지 않느냐. 신문사에 破紙(파지-신문 인쇄과정에서 나오는 못 쓰는 종이)가 나오는데, 破紙를 나에게 불하하면 그 돈으로 훌륭한 웅변가를 양성하겠다」고 그랬어요.
 
  破紙가 뭔지도 몰랐던 나는 당시 韓昌愚 경향신문 사장에게 「내 친구 金大中이 젊은 사람을 기르는 데 도움이 된다고 파지를 달라 한다」고 했어요. 破紙 이야기를 하니까 韓사장이 깜짝 놀래요. 알고 보니 그 동안 破紙를 처분한 돈이 신문사 총무국장의 「호주머니 돈」이 되고 있었다는 게 드러났어요. 金大中씨 덕택에 경향신문 부패방지에 큰 도움이 된 셈이죠. 이때 金大中이란 사람이 보통이 아니구나 생각했습니다』
 
 
  『韓民統 관련, 내란 음모사건 때 거짓말한 金大中』
 
 
  1980년 金大中 내란 음모사건 당시, 金大中씨는 검찰 조사과정, 그리고 재판과정에서 한국민주회복통일촉진국민회의(일명 韓民統) 일본 본부의 성격, 그리고 이 단체에 참가한 郭東儀(곽동의)와 裵東湖(배동호) 등이 북한ㆍ조총련과 연계된 간첩 혹은 親北 左派(좌파)라는 사실이 제기되자, 『재일교포 崔書勉씨에게 물어본 즉, 베트콩파(1960년대 초 북한의 지령을 받은 郭東儀, 裵東湖를 중심으로 하는 불순분자들이 민단 조직 내에 만든 反韓조직)는 反민단계 사람으로서 그들과 韓民統을 결성하는 것은 국가에 이로울 것』이라는 말을 들었다고 진술했다.
 
  이 진술의 사실 여부를 가리기 위해 계엄보통군법회의 검찰부는 일본에 거주하고 있는 崔書勉씨에게 진술을 요청했다. 崔씨는 『본인이 베트콩파들과 연합하여 韓民統을 조직해도 의심받을 일이 없다고 했다는 것은 전연 근거 없는 말이며 오히려 그 반대』라며 金大中씨와 반대되는 진술을 한 바 있다.
 
  『나는 金大中씨에게 「위험하니까 (그 조직에) 가지 말라」고 했지요. 그러나 수사관들은 「金大中이는 당신이 가라고 해서 갔다고 한다」는 거예요. 金大中씨가 내 이야기와 정반대로 진술한 것을 보니 당시에 얼마나 다급했으면 그렇게까지 이야기했겠는가 생각하니 인간적인 憐憫(연민)이 들더군요』
 
  ―그때 金大中 대통령과 사상문제로 토론한 적은 없었습니까.
 
  『보통사람보다는 「참신하다」는 느낌을 받았어요. 새로운 이야기를 많이 했으니까요. 내가 놀란 게 대학엘 다녀본 일이 없는 사람인데 讀書量(독서량)이 대단하다고 생각했어요. 말하는 게 논리적이고. 바꿔 말하면 누구보다 부지런했던 거라. 그가 통일을 金九에게 제대로 배우고 민주주의를 張勉에게 제대로 배웠다면 오늘의 실패는 없지 않았을까 생각해요』
 
 
  후쿠다가 金大中 대통령에게 「형님」이라고 한 사연
 
 
  ―金大中 대통령을 일본 정치인에게 소개해 주시지 않았습니까.
 
  『1964년 金大中씨가 6代 국회의원에 당선되어서 日本으로 날 찾아왔어요. 앞으로 정치가로서 친하게 지낼 만한 사람을 소개해 달라길래 自民黨 내 최고 실력자인 후쿠다 다케오(福田赳夫) 당시 대장상을 소개해 줬어요. 한참 이야기를 들어보니 후쿠다가 생각하기에 똑똑하거든.
 
  이야기가 길어지니까 그만 끝낼 심산으로 「金선생, 올해 몇 살이시냐」고 물었어요. 「서른아홉」이라고 하니까 후쿠다가 갑자기 「형님」 했어요. 金大中씨가 깜짝 놀라 「제가 왜 兄이 되느냐」고 하니까 후쿠다가 「내가 명치 38년생(1905년생)인데 그날부터 한 살도 먹지 않았다. 당신이 서른아홉이니까 내 兄이 아니냐」고 했어요. 후쿠다와 金大中씨의 시작은 이렇게 좋았어요.
 
  하지만 金大中씨는 후쿠다와의 인연을 소중히 하지는 못했어요. 朴正熙 대통령 욕을 하려다 보니 「日本이 朴正熙를 지원하면 도미노 현상이 일어나 한국도 베트남처럼 된다」고 해서 기시 노부스케(岸信介) 수상이나 후쿠다 다케오 등 일본 보수진영과 거리가 멀어졌습니다』
 
  ―金大中 대통령은 日本에 머무는 동안 강연에 자주 나갔습니까.
 
  『제한된 강연이지요. 자민당 내에서 좌경적 경향의 우쓰노미야 도쿠마(宇都宮德馬) 의원이 이끄는 아시아·아프리카 의원연맹같이 인원 수도 적고 영향력이 없는 곳에서 강연을 했어요. 강연 원고를 봐달라고 해서 봐주곤 했는데 전문성은 없지만 一過性 강연으로는 괜찮았어요. 강연도 잘하고』
 
  1973년 8월8일 金大中 납치사건이 발생한다. 崔書勉씨와 도쿄 한국연구원에서 함께 일하던 가나야마 마사히데(金山政英) 前 駐韓 일본대사는 이 사건을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를 상의했다고 한다. 崔씨는 『일본 국내에서 일어난 사건이므로 일본인이 해결해야 한다』고 가나야마 前 대사에게 말했다. 두 사람은 韓日 간 경제협력이 한창 진행중인 상황에서 순조로운 양국관계에 금이 갈 수도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朴대통령을 주한 대사 시절부터 잘 알았던 가나야마 前 대사는 청와대에 「대통령 각하, 분명한 조치를 취하십시오」라는 내용의 짤막한 전보를 치기도 했다.
 
  ―金大中 납치사건은 왜 일어났다고 보십니까.
 
  『분명한 것은 金大中씨가 日本에서 영웅처럼 환대받으니까 그를 납치한 것은 절대 아니라는 겁니다. 일본 사람들조차도 「왜 남의 나라에 와서 제 나라 욕을 하고 다니냐」고 빈축을 사던 시기에 납치사건이 벌어졌어요. 나는 金大中 납치사건은 일본의 이러한 분위기, 한국의 필요가 어우러진 합작품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金大中 납치사건이 난 다음 日本 언론의 반응은 어땠습니까.
 
  『朴正熙 정권은 예상한 대로 軍人이 혁명을 일으켰기 때문에 법을 무시하는 정권의 정체가 드러난 것 아니냐고 떠들고 싶었을 거예요. 역사학자들은 한국이 國運 융성기에 접어들어 이런 일이 일어난다고 긍정적으로 생각하는 사람도 있었고.
 
  당시 日本 정부는 朴正熙 대통령이 경제건설이라는 명확한 革命의 목적을 일본에 전달한 상태였기 때문에 金大中 납치사건을 귀찮게 받아들였습니다. 한국 관련 사건이니까 우리는 너무 개입하지 말자. 대신 白晝(백주)에 日本에서 끌려간 사건이고 美國이나 외국이 인권문제로 불쾌하게 생각하니까 日本은 한국 정부에 공식적으로 항의하는 線에서 마무리짓자고 한 것입니다』
 
 
  金大中-李姬鎬 관계
 
 
  ―朴正熙 대통령께 단도직입적으로 물어보셨습니까.
 
  『정말 몰랐다고 그러더라고. 내가 물으니까 「너도 그런 질문하냐」는 표정이었어요. 李澔(이호) 당시 駐日대사가 훌륭한 처신을 했습니다. 납치사건이 났는데 상황파악은 안 되니까 바로 비행기 타고 서울에 와 청와대에 가서 사표를 냈어요. 朴正熙 대통령이 「내가 안 했다」고 하니까 「각하가 결백하시면 도로 가겠습니다」 해서 東京으로 돌아갔습니다. 나는 朴正熙 대통령이 전혀 몰랐다는 것을 그것으로 알아요』
 
  ―李姬鎬 여사와도 잘 아십니까.
 
  『金大中씨와 결혼하기 전부터 알았어요. 전국경제인연합회를 만든 李元淳(이원순)씨 조카이기도 하고. 李姬鎬씨가 서울대 사범대에 다닐 때 崔圭夏(최규하) 대통령이 英語 선생을 했어요. 어느 날, 金大中씨가 나한테 묻더라구요. 李姬鎬를 아냐구. 그래서 난 「그렇게 깨끗하고 훌륭한 여자를 이제껏 못 봤다」고 했더니 「나하고 결혼하게 됐다」고 이야기를 해요.
 
  내가 아는 李姬鎬씨는 자기가 나서지 않고 남자를 출세시키는 천재적인 희생심이 있는 여자인데, 金大中씨가 그것을 꿰뚫어보고 결혼을 결심한 것 같아요. 내가 반대해도 자기는 그 여자와 결혼해야겠다고 하더군요』
 
  ―대통령이 된 이후에 金大中 대통령을 만난 것은 언제입니까.
 
  『단독으로 만난 일은 없고, 金九 선생 출판기념회에서 만났어요. 내가 휠체어를 타고 있으니까 人波(인파)를 헤치고 와서 악수한 게 마지막입니다』
 
 
  『비가 5㎜만 더 오면…』
 
 
  朴正熙 前 대통령과 崔書勉씨의 첫 만남은 가나야마 마사히데(金山政英) 駐韓 일본대사가 다리를 놓아 성사됐다.
 
  1971년 봄, 日本 아세아대학에서 강의를 하던 崔書勉씨는 국회 文公委 위원 소속으로 일본 시찰하러 온 朴正熙 前 대통령의 처남 陸寅修(육인수) 공화당 의원을 만난다. 국회 문공위원장인 강원도 春川 출신 申玉澈(신옥철) 의원이 고향 선배로서 그를 陸의원에게 소개했다. 崔書勉, 陸寅修 두 사람은 日本땅 東京 신주쿠(新宿) 그랜드 호텔에서 날이 새는 줄도 모르고 舌戰(설전)을 벌였다.
 
  『내가 「張勉 정권을 더럽게 뺏어가고 張勉 박사와 盧基南 주교, 金大中씨를 쫓아낸 너희들이 나쁜 놈이지 뭐냐」고 하자, 陸寅修씨가 「朴正熙 대통령은 金大中씨가 말하는 불쌍한 농민들을 위해 革命(혁명)을 일으켰는데, 金大中씨가 농민들을 위해 한 일은 고작 입으로만 떠든 것이다」라며 맞섰어요』
 
  이 일은 朴正熙 대통령에게 알려졌다. 朴대통령은 가나야마 마사히데(金山政英) 駐韓 일본대사를 만난 자리에서 崔書勉씨 이야기를 꺼냈다.
 
  朴대통령은 가나야마 大使에게 『그 친구(崔書勉)가 日本에서 金大中 (일본 체류) 신원 보증을 하고 내 욕만 하고 다닌다면서요?』라고 했다. 가나야마 대사는 『앞으로 日本하고 일을 하려면 일본에서 한국연구원을 운영하는 崔書勉씨를 통하지 않고는 일이 안 되니 한 번 만나보십시오』라며 만남을 주선했다.
 
  崔書勉씨가 朴대통령을 처음 만나던 날, 마침 비가 촉촉히 내렸다. 그 해 봄은 유난히 가뭄이 심했다. 저수지의 물은 말라붙은 지 오래였고 논 바닥은 바짝 타들어가 5월이 지나도록 논에 모를 낼 수 없었다.
 
  崔書勉씨는 군사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朴正熙에게 「한 방 먹인다」는 각오로 집무실에 들어섰다.
 
  청와대 대통령 집무실에는 李承晩 대통령 시절부터 사용해 온 회의용 소파가 그대로 사용되고 있었다.
 
  집무실에는 마르고 왜소해 보이는, 그러나 강한 인상의 朴대통령이 오른쪽 다리를 꼬고 꼿꼿하게 앉아서 손님을 기다리고 있었다. 朴正熙가 먼저 입을 열었다.
 
  『오늘 崔원장이 와서 그런지 조금 전부터 (비가) 내리고 있는데, 大田까지 모를 심을 수 있답니다. 최소한 5㎜만 더 오면 서울까지 모를 심을 수 있을 텐데…. 崔원장이 오시니까 비도 내리고, 참 기분이 좋은 날입니다』
 
  日本 정객들의 요란스럽고 자기 자랑 일색의 접대에 익숙해 있던 崔書勉씨는 朴正熙의 첫인사가 인간적으로 다가왔다.
 
  崔씨는 朴대통령의 시계가 왠지 허름해 보여 『어느 나라製냐』고 물었다. 朴대통령이 『내가 경제건설을 한다고 하면서도 변변한 공장이 하나 없어서 시계나 조립해 보라고 시켰다. 그 시계공장(시티즌) 낙성식에 갔다 오면서 시계 완제품 하나를 1500원 주고 샀는데 1년이 지나도록 1분도 안 틀린다』고 했다. 고위 공직자나 국회의원들이 日本에 오면 롤렉스 시계 등 고급 시계를 사느라고 난리법석을 떨던 시절에 朴대통령의 검소한 국산시계를 본 崔書勉씨는 반대로 한 방 먹은 기분이 들었다고 한다.
 
  崔書勉씨가 朴대통령에게 『나도 무정부주의자였었는데, 대통령은 언제까지 공산주의자였습니까』라고 묻는 등 두 사람은 세 시간 동안 진솔한 대화를 나눴다. 세 시간 동안 집무실의 모든 시간과 사물의 움직임은 정지된 듯했다고 한다. 전화 한 통 걸려오는 곳이 없었고, 비서가 들어와 메모를 전하지도 않았으며, 마치 「종이가 날면 소리가 날 듯」 조용한 분위기 속에서 대화가 이어졌다고 한다.
 
  『인텔리의 약점인데, 「이 사람이 나를 얼마나 대접하고 있는가」 하는 것이 피부로 느껴졌어요. 너무 융숭한 대접을 받으니까 내쪽에서 먼저 「아이고 12시에 약속이 있습니다」 하고 일어났어요』
 
  崔書勉씨가 『오늘 한 가지 감동을 느끼고 가는 게 있습니다』고 하니까 朴대통령이 큰 소리로 『뭡니까』 하고 물었다. 『대통령이란 사람이 바닥에 구멍 난 구두를 신고 있다는 것에 감동을 받았습니다』고 하니까 朴대통령이 崔씨의 어깨를 탁 치면서 『좋은 구두도 많은데 하필 그걸 보고 가십니까』라고 했다. 朴正熙와 한 번 대결해 보리라 마음 먹었던 崔書勉은 이날 이후 朴正熙의 팬이 되고 말았다.
 
 
  日本 정부의 朴正熙 思想 검증
 
 
  1961년 朴正熙가 군사 쿠데타로 집권하자, 日本 이케다 하야토(池田勇人) 내각은 쿠데타로 집권한 정권을 승인하느냐 마느냐 하는 문제에 봉착했다. 특히 朴正熙의 사상문제에 대해 확신을 갖고 있지 못했던 日本 정부는 朴正熙와 관련된 일본내 모든 人脈(인맥)을 동원했다. 마침내 朴正熙의 滿軍인맥과 日本 陸士 동창생들 중 滿軍과 陸士 동창인 오이 가즈히사(押井和久)란 인물을 찾아냈다. 그는 日本 防衛♥(방위청) 중앙자료대 中國 반장으로 근무하고 있었다.
 
  오이 가즈히사가 당시 官房長官(관방장관)인 오히라 마사요시(大平正芳)에게 호출됐다. 오히라를 만나기 전날 밤 그는 崔書勉씨를 찾아와 朴正熙에 대해 알려 달라고 했다. 당시 아세아大 교수로 朴正熙의 군사 쿠데타를 못마땅하게 여겼던 崔書勉씨는 好意的(호의적)인 이야기를 해주지 않았다.
 
  오히라 관방장관에게 호출당한 오이 가즈히사는 『朴正熙가 빨갱이인지 아닌지 그 이야기만 해달라』는 재촉을 받는다. 오이 가즈히사는 『헤어진 지 이미 오래라 그 사람이 공산주의자인지 아닌지는 알 수 없다. 다만 동급생으로서 思想이 조금 다른 것 같았다. 지금 그 사람이 자신의 사상에 대해 뭐라고 하고 있냐』고 물었더니, 오히라가 『자신은 공산주의자가 아니라고 한다』고 했다.
 
  오이가 『그럼 그 말이 맞을 것이다』고 했더니, 오히라가 『당신이 어떻게 장담하냐』고 했다. 오이는 『朴군은 내일을 위해 오늘 말을 만드는 사람이 절대로 아니다. 그가 말하는 것 자체가 그의 전부다. 그건 내가 보장한다. 그가 쿠데타를 했다면 신념이 있어서 했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朴正熙에게 「金大中 부통령 제안」 했으나 참모진 반대로 成事 안 돼
 
 
  朴正熙가 만주군관학교 생도 시절 사용했던 이름은 다카키 마사오(高木正雄). 그가 1963년 10월, 제3代 대통령에 당선되던 날, 그의 滿軍 동기들은 日本에 있는 同期生의 횟집에 모여 『다카키君이 대통령이 됐다. 모두 축하하러 가자』며 환호를 올렸다고 한다.
 
  참의원 비서를 하던 朴正熙의 滿軍 선배 이나바 도라기치(稻葉寅吉)가 『취임을 축하하러 한국에 가면 그것은 朴正熙에게 辱(욕)이 될 것이다. 우리는 동창생 중에 대통령이 나온 것 하나만으로 만족해야 한다』며 이들을 말렸다. 이나바 도라기치와 친했던 崔書勉씨가 훗날 이 이야기를 朴대통령에게 했더니 『사실은 그때 그런 놈들이 올까봐 참~』 하며 걱정했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고 한다.
 
  朴正熙 정권이 출범하면서 추진한 경제개발 계획에 대해 日本 정부도 긍정적이었다. 戰後 요시다 시게루(吉田茂) 내각도 한국 경제 再建이 日本 경제에도 활력소가 될 수 있을 것이란 판단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일본은 1971년 大選 이후 金大中씨가 미국 일본 등지에서 反체제 운동을 전개하면서 『일본이 朴正熙 정권을 지원하면 부패해 도미노 현상으로 공산화될 것』이라며 朴正熙 정권을 맹비난하는 것에 신경이 쓰였다.
 
  후쿠다 다케오(福田赳夫) 당시 外相이 崔書勉씨에게 『당신 사무실에 묵고 있는 金大中이란 사람 때문에 골치가 아프다. 「정치가」 金大中을 朴正熙 대통령이 優待(우대)해서 본국으로 불러들이는 방법이 없겠는가』 하고 물어왔다. 즉 한국 정부가 金大中씨에게 정치 무대를 제공하면 남의 나라에 와서 자기 나라 욕을 하겠느냐는 뜻으로 받아들여졌다.
 
  후쿠다는 張勉 정권 때 재무장관을 지낸 金永善씨가 思想界(사상계)에 글을 써 朴정권을 공격하다 어느 날 갑자기 통일원 장관이 되면서 정권과 타협한 것을 염두에 두고 한 제안이었다. 당시 청와대 참모진들이 朴대통령에게 『金永善씨를 누르는 것보다 타협하는 게 낫다』고 朴대통령에게 건의를 해서 받아들여졌다는 것이다.
 
  崔書勉씨는 이를 한국문제에 정통한 「朝鮮戰爭」의 저자 카미야 후지(神谷不二) 게이오大 교수와 상의했다. 카미야 후지는 『매우 건설적인 제안』이라면서 에토 신기치(衛藤瀋吉)ㆍ고타니 히데지로(小谷秀二郞) 등 주변 정치학자 6人의 의견을 추가로 수렴해 이른바 「후쿠다ㆍ카미야 案」을 만들었다.
 
  이 제안의 내용은 朴正熙 대통령이 金大中에게 「부통령」 자리를 마련해 擧國內閣(거국내각)을 구성하라는 것이었다. 한국으로서는 金大中씨가 朴대통령의 경제건설에 협력하면 부패를 막을 수 있고, 일본 입장에서도 金大中의 反정부 활동이 없으면 對韓 경제건설에 나서기가 훨씬 수월할 것이라는 계산이 섰던 것이다.
 
  崔書勉씨가 대표로 한국을 방문했다. 崔書勉씨는 한국의 「민주주의」와 「부패」 두 가지 문제를 일거에 해결할 기회라고 판단해 적극적으로 찬동했던 것이다.
 
  한국에 오기 전, 崔書勉씨는 東京 한국연구원에서 金大中씨에게 「후쿠다ㆍ카미야 案」에 대해 의견을 물었다.
 
  『고생하던 사람이라 이 제안에 혹하고 덤빌 줄 알았는데 金大中은 아주 냉랭했어요. 「될 리도 없고 그리 돼서야 되겠느냐」는 말을 했어요. 나는 金大中씨가 「信念(신념)에 미친 사람이지, 자리에 몸을 파는 政治家는 아니다」고 느꼈어요. 당시 정부에 반대하던 사람도 장관 자리를 주면 하루아침에 180도 태도를 바꾸는 사람이 한둘이 아니었는데…』
 
  ―金大中 대통령의 本心은 무엇이었다고 보십니까.
 
  『두 가지죠. 하나는 나는 끝까지 민주주의를 위해 싸워야겠다는 것과 또 하나는 朴正熙가 정권을 잡고 있는데 나를 부통령으로 데리고 가겠느냐는 생각이었을 겁니다』
 
  崔書勉씨는 訪韓해 朴正熙를 만나 「후쿠다ㆍ카미야 案」을 전달했다.
 
  『朴대통령의 첫 마디가 「日本 사람들이 우리를 그렇게 걱정해 주느냐」고 그래요. 그러면서 우리 제안에 무조건 「노」 하면 실례니까 「생각해 보겠다」고 하더군요』
 
  朴대통령은 「후쿠다ㆍ카미야 案」을 청와대에서 金永善의 경우처럼 참모들에게 물었으나 참모들이 한 사람도 동의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 바람에 「金大中 부통령 제안」은 없었던 일로 돼 버렸다. 崔書勉씨는 『朴正熙라는 사람은 독재자임에도 개혁적인 일을 추진하려면 독단적으로 결정하지 않고 참모에게 의견을 물어 투표로 결정하는 민주성이 있다는 것을 그때 알았다』고 회고했다.
 
 
  『작은 약속을 철저히 지킨 朴正熙』
 
 
  ―朴正熙 대통령을 한 마디로 평가하신다면.
 
  『작은 약속을 지킬 줄 아는 사람입니다. 카터 美 대통령이 방한할 무렵인 1979년경, 한 번은 朴대통령이 「崔원장, 내일 점심을 같이 합시다」 해서 「내일은 유학생들을 모아 놓고 식사를 내기로 했습니다」고 사양했습니다. 그러자 「아, 그거 대통령하고 밥 먹기로 했다고 하시지」 해서 「(제가) 손윗사람하고는 응석으로 약속을 취소할 수 있지만 손아랫사람들이라 곤란합니다」고 답했어요』
 
  崔書勉씨는 미국에 있는 한인단체로 李承晩 대통령이 만든 同志會(동지회)는 없어지고 安昌浩(안창호)가 만든 興士團(흥사단)이 아직 살아 있는 이유가 安昌浩 선생이 약속을 지켰기 때문이라고 朴대통령에게 설명했다.
 
  安昌浩 선생은 尹奉吉 의사의 폭탄 투척을 예고한 金九 선생의 피신 전갈을 받고도 당시 임시정부에서 활동하던 李裕弼(이유필)의 아들과 생일 케이크를 자르기로 한 약속을 저버릴 수 없다며 피신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전갈을 가지고 간 메신저가 『아~ 애하고 한 것을 가지고 뭘 그러십니까』라고 했더니 安昌浩 선생이 책상을 주먹으로 내리치며 『이놈, 우리가 日本하고 싸우는 이유가 일본놈들이 淸日戰爭과 露日戰爭 때, 독립시켜 준다고 해놓고 약속 안 지킨 것 때문인데, 작은 약속이라도 안 지키면 독립운동 그만두어야지』 하며 약속을 지키다 결국 日警에 붙잡혀갔다고 한다.
 
  朴대통령이 이 말을 듣고는 심각한 표정을 짓더니 『내일 예정인 시피엑스(CPXㆍ지휘소 작전훈련) 참석 일정을 하루 미루도록 하라』고 柳赫仁(유혁인) 정무수석에게 지시하더니 崔씨와 점심을 약속하더라는 것.
 
  『日本에 사는 나는 CPX가 무슨 소리인 줄 몰라 PX(營內 매점)로 잘못 알아듣고 「무슨 물건을 사러 가시길래 그렇게 중요하게 생각하십니까」하니 破顔大笑(파안대소)를 하시더니 시피엑스에 대한 설명을 해주셨습니다. 朴대통령이 CPX 훈련에 빠진 것은 이때뿐이었다고 합니다』
 
 
  미키(三木) 수상 內定 사실 미리 朴正熙에게 알려
 
 
  崔書勉씨은 1974년 자민당 수상 改選(개선)에서 다나카 가쿠에이(田中角榮) 내각의 뒤를 이어 예상을 뒤엎고 미키 다케오(三木武夫)가 선임될 것을 미리 朴正熙에게 알려준 일이 있다. 당시 언론계와 政街에서는 후쿠다 다케오(福田赳夫)를 차기 수상으로 점쳤다.
 
  崔씨는 어느 날, 朴대통령에게 急電(급전)을 띄운다. 「다음 首相은 미키가 된다. 후쿠다가 되면 좋고 미키가 되면 나쁘다는 식으로 쓰는 신문들의 사설부터 못 나오게 막아야 한다」는 내용이었다. 이 電文을 본 朴대통령은 믿기지 않아 당시 중앙정보부장, 駐韓 일본 대사에게 물어봤고 대답은 『후쿠다』였다.
 
  당시 駐韓 美 대사 슈나이더(Sneider)가 離任(이임) 인사를 겸해 朴正熙 대통령과 골프회동을 가졌다. 슈나이더도 일본 주재 1등 서기관을 지낸 사람이라 일본 사정에 정통했다.
 
  『朴正熙가 다음 수상을 물어 보니 슈나이더도 역시 「당연히 후쿠다」라고 했어요. 朴正熙는 「미키가 수상이 될 수도 있을 텐데, 한 번 알아보시오. 정치는 알 수 없어」라며 여운을 남기는 말을 했답니다』
 
  이틀 후, 신문들이 미키가 새 수상이 됐다고 보도했고 중앙정보부장과 駐日대사는 체면이 말이 아니었다. 슈나이더 대사는 그제야 『야~ 朴正熙는 시대에 드문 先見之明(선견지명)이 있다』하며 극찬을 하는 바람에 朴대통령 콧대가 한껏 높아졌다. 이 일이 있은 후에 朴대통령이 청와대로 崔書勉씨를 초청했다.
 
  『「崔원장 덕택에 내가 체면이 섰는데 어떻게 알았느냐」고 물으셔요. 「제가 정치가도 아니고 평론가도 아니지만 좋은 친구가 있어 알게 됐지요. 그는 후지다 요시로(藤田義郞)라는 산케이신문(産經新聞) 정치부장 출신인 정치평론가」라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사연인즉, 시이나 에스사부로(椎名悅三郞) 자민당 부총재가 자신과 친한 언론인인 후지다 요시로에게 다음 총리를 미키 다케오로 결정하는 裁定文(재정문)을 써달라고 부탁한다. 그들은 비밀유지를 위해 일본말이 안 통하는 한국 요정 코리아하우스를 회동 장소로 정했다.
 
  그 자리에서 후지다 요시로는 裁定文을 쓴 뒤, 「한국에서는 멋도 모르고 후쿠다가 되면 매파니까 좋고 미키가 되면 비둘기파니까 좋지 않다고 하는데 이런 식의 한국신문 論調(논조)는 韓日양국의 미래에 좋지 않은 영향을 줄 것이다」고 생각하고 친구인 崔씨를 찾아가 이 사실을 알려줬다. 그 길로 崔書勉씨는 陸寅修씨에게 전해 朴대통령이 알도록 했던 것이다.
 
  朴正熙는 崔書勉씨에게 『좋은 친구를 崔원장만 알지 말고 내게도 소개해 달라』면서 소개를 부탁했다. 崔씨는 朴正熙에게 후지다 요시로, 기우치 노부다네(木內信胤), 무라마쓰 고(村松剛) 등 일본인 학자 등을 소개했다.
 
  ―1972년 7월부터 1974년 7월까지 在任한 다나카 가쿠에이(田中角榮) 일본 수상과 朴대통령은 인간적으로 잘 안 맞는 사이였습니까.
 
  『당시 사토 에이사쿠(佐藤榮作) 내각의 大藏相(대장상)이었던 다나카 입장에서는 金永善 재무장관을 통해 張勉 정권과 친했는데, 쿠데타가 일어나자 기분 나쁠 수밖에요. 그게 출발점이에요. 그러나 日本 정치가가 자기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다른 나라 원수를 좋다 나쁘다 할 수는 없지요. 다나카의 日帝시대를 아는 金永善이 관계복원에 많이 기여했습니다.
 
  全斗煥씨가 日本에서 40억 달러를 받은 것도 다나카가 구상했다는 게 孔魯明(공로명) 前 외무부 장관의 기억입니다』
 
 
  『朴正熙는 스승을 많이 가졌던 사람』
 
 
  崔書勉씨는 『우리나라 정치가들도 자기가 정권을 잡으면 마치 자기가 제일 높은 것으로 착각하는 것에서 벗어나 스승을 모시는 풍습이 있었으면 좋겠다』고 했다. 그는 朴正熙를, 존경하는 선생을 일부러 많이 만들어 가졌던 사람으로 기억한다.
 
  『朴正熙는 歷史를 알기 위해 李瑄根(이선근) 前 문교부 장관을 정기적으로 만났고, 詩를 배우려고 朴木月(박목월)씨, 文學은 八峰 金基鎭(김기진)씨, 農業은 柳達永(유달영)씨를 찾는 등 선생이 많았어요. 나 같은 것도 나이는 어리지만 日本 사정을 말하는 선생의 하나였는지 모르지요』
 
  崔書勉씨는 東京에서 입수한 檀園(단원) 金弘道(김홍도)의 열두 폭 그림을 朴正熙에게 선사했다. 단원 그림은 영친왕 李垠 황태자가 가지고 있던 것을 자신의 그림 선생인 요시다(吉田) 日本 학습원大 교수에게 선물한 것이었다. 요시다 교수가 제2차 세계대전 때 東京 공습을 받을 때도 소중하게 간직하던 것을 崔씨가 입수한 것이었다.
 
  나중에 들은 이야기지만 朴正熙는 즉시 국립박물관장을 불러 『복제도 하나 만들어 잘 보관하라』고 지시했다고 한다.
 
  『朴正熙는 귀중한 물건을 입수하면 즉시 국립박물관으로 옮겼어요. 그런 것을 후임 대통령들이 좀 배워야 하는데….
 
  朴正熙는 귀중한 것이 들어오면 또박또박 국립박물관에 보내 놓는 습관이 있어서 문화재를 遺失(유실)시키질 않았어요. 세계가 배워야 할 대통령의 자세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내가 감정한 것이 독립기념관에 없으면 「朴대통령이 어김없이 국립박물관에 보냈구나」 하고 새삼 그를 생각하게 돼요. 우스운 얘기로 朴正熙 대통령이 돌아가신 후, 내 日本 친구들이 신당동 朴대통령 私邸(사저)에 慰問(위문)을 갔어요. 朴槿惠(박근혜)가 日本 손님들에게 茶(차)를 내왔는데 찻잔과 잔 받침이 다 짝이 안 맞아요. 일본 사람들이 「朴正熙는 검소한 사람」이라고 놀라면서 朴正熙는 죽어서도 가르쳐주는 게 있는 사람이라고 했어요』
 
  崔書勉씨는 崔錫采(최석채) 前 조선일보 주필에게 들은 朴正熙 대통령의 친인척 관리에 관한 일화 하나를 소개했다.
 
  『1963년, 대통령에 당선된 朴正熙 당시 최고회의 의장에게 조카인 故 朴在錫(前 국제전기 회장)씨가 청와대에 찾아온 적이 있었답니다. 朴의장은 자신이 대통령이 됐으니 친인척들은 청와대 출입을 삼가야 하기 때문에 이것이 내 임기중 마지막 만남으로 생각하라고 이야기했답니다.
 
  조카를 전송하러 현관에 나갔던 朴의장은 느닷없이 검정 지프가 나타나 조카를 태우고 가니까 놀라 故 權尙河(권상하) 정보비서관에게 「대체 무슨 차냐」고 물었답니다. 당시엔 지프가 최고의 차였으니까요. 權비서관이 「각하의 조카를 어떻게 걸어가시게 합니까. 제가 만들어드렸습니다」고 말씀을 드렸답니다』
 
  이튿날 朴正熙 의장은 대구사범 동기인 權尙河의 사표제출을 요구했다.
 
 
  朴正熙 대통령의 축농증 수술
 
 
  朴正熙 대통령은 崔씨에게 항일독립운동과 일본 사정을 많이 물었다고 한다. 崔씨에게 『백범일지를 일곱 번이나 읽었는데 어느 부분에서 펼쳐 읽어도 名文』이라고 말한 적도 있었다.
 
  ―崔원장께서는 朴正熙 대통령과 金大中 대통령 두 분과 사귀셨는데, 어느 분과 더 가까웠습니까.
 
  『朴대통령은 나를 친구도 부하도 선배도 아닌 일정한 선이 있는 관계로 대했습니다. 외국에 사는 내게 좋은 인상을 심어주려고 대접을 잘한 것 같아요. 金大中씨는 민주주의 실현을 위해 같이 싸운 「糟糠之友(조강지우)」이고, 朴대통령은 국가건설을 위해 같이 노력한 「재취 관계」라고 생각할 뿐 親疎(친소)관계로 따질 수는 없습니다』
 
  ―10ㆍ26 사태가 났을 때 느낌은 어땠습니까.
 
  『최후도 영웅답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癌(암)에 걸려 죽는 것보다 문제의식을 남겨준 죽음이 아니었나 하는 생각입니다. 金載圭(김재규) 부장이 민주주의라는 명분 때문인지 좌천될 것을 두려워해서 저지른 것인지 알 수 없지만, 朴正熙는 그런 것도 모르고 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 모두가 국가건설을 위해 자신을 따라주는 사람들이라고 마지막까지 생각을 했으니까요. 난 마지막 순간에 옆사람에게 「난 괜찮아(너희들은 빨리 도망가)」라고 했다는 말을 듣고, 이 한 마디가 너무나 가슴에 닿았습니다. 죽는 순간까지 남 걱정을 하는 朴正熙의 인간적인 모습이 그 한 마디에 몽땅 녹아 있는 겁니다』
 
  崔書勉씨가 일본에 머문 지 30년을 기념해 1997년 펴낸 기념문집 「崔書勉과 나(崔書勉と私)」에 보면 朴正熙와 관련한 많은 자료들이 있다.
 
  기념문집에는 朴正熙의 축농증 수술 사실이 등장해 눈길을 끈다. 아시카와 리쿠오(足川力雄) 東京후생연금병원 이비인후과 부장은 1978년 2월 朴正熙 대통령의 코수술을 위해 한국을 방문한다. 다음은 그가 1987년 7월21일 일본 프레스센터에서 열린 崔書勉 滯日 30주년 기념행사장에서 밝힌 내용이다.
 
  당시 日本에는 축농증 환자가 많이 발생하던 시기였고 한국도 역시 물기가 많은 쌀을 먹는 민족이라 축농증 환자가 많이 발생했다. 아시카와 교수는 당시 지케이의대(慈惠醫大)에서 이비인후과 연구반의 반장으로 축농증 연구에 몰입하고 있었다.
 
  <1978년 2월 서울大 盧寬澤(노관택) 교수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지금 東京제국호텔에 머물고 있다. 한 번 만나고 싶다』고. 제국호텔에서 만나자 서울大 閔獻基(민헌기) 교수의 큰아버지의 코가 좋지 않기 때문에 한번 서울에 와서 진찰해 줬으면 한다고 의뢰했다. 4월1일 訪韓하자, 환자는 뜻밖에 朴대통령이었다.
 
  두려운 마음속에 4월2일 청와대 官邸(관저)를 방문하게 됐다. 내 이름은 서울大 「李박사」라는 가명으로 바뀌어 있었다. 의무실에서 진찰한 결과, 아주 심한 축농증으로 고름이 咽喉(인후)를 막아 단단한 고름 덩어리를 형성하고 있었고, 지금까지 다섯 차례의 수술을 받은 경험이 있다고 했다.
 
  나는 閣下와 이야기를 하던 중 이분을 위해 최선을 다해 치료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마음이 들었다. 한 마디로 각하는 내가 진심으로 노력해서 고쳐드리지 않으면 안 되는 분이라는 기분이 들게 하는 무엇인가가 있었다. 게다가 각하의 복장, 시계 등을 보면 매우 검소해서 그것만으로도 깊은 감명을 받았다.
 
  5월에 수술을 했고, 6월에 수술 결과를 진찰하는 것으로 일단 치료를 성공적으로 마쳤다. 이듬해 1979년 9월, 駐日 한국대사인 金正濂(김정렴)씨를 통해 감사의 편지를 받았다. 우리 부부는 각하로부터 비공식적인 초대를 받았다. 11월2일 訪韓할 예정이었으나 金載圭 중앙정보부장에 의해 대사건이 일어났다. 우리들은 11월 하순에 국립묘지를 찾아 朴대통령 각하 부부의 冥福(명복)을 빌었다>
 
  崔書勉씨에 의하면 아시카와 리쿠오씨는 朴대통령의 편지를 액자에 넣어 응접실에 걸어놓고 있다고 한다. 그들 부부는 특별한 일이 없는 한 매년 10월26일 서울 동작동 국립묘지에 있는 朴正熙 대통령 묘소를 참배한다고 한다.
 
  崔書勉씨가 소개하는 수술과 관련한 또하나의 일화. 朴正熙 대통령의 장모 李慶齡(이경령) 여사가 老患(노환)으로 고생하자 어느날 朴대통령은 처남인 陸寅修씨를 불러 『빨리 치료하라』고 호통을 친다. 陸씨는 세브란스 병원 등에서 치료를 했지만 차도가 없자 崔書勉씨에게 日本의 좋은 의사를 알아봐줄 것을 부탁한다.
 
  이경령 여사가 日本에 오기로 한 날, 崔씨는 하네다(羽田)공항으로 영접을 나갔다. 이때 한국 정부는 1973년 8월8일 일어난 金大中 납치사건을 해결하기 위해 여러 경로로 解法(해법)을 찾고 있었다. 당시 다나카 가쿠에이(田中角榮) 총리에게 사죄하기 위해 金鍾泌(김종필) 총리를 일본에 보낸 시점이었다.
 
  崔씨가 기다린 비행기에서는 뜻밖에도 金鍾泌 총리가 내렸다. 때마침 金鍾泌 총리를 영접하기로 했던 日本 外相이 나오지 않아 崔書勉씨가 金鍾泌 총리를 영접하는 해프닝이 벌어졌다. 두 사람이 악수하는 사진은 당시 NHK에 보도됐다고 한다.
 
  崔씨는 의료전문지인 保健同人社 오와타리 준지(大渡順二) 기자의 주선으로 도쿄大 교수 출신인 가나가와현 노인센터 의사를 소개받았다. 「돌팔이」 의사에게 10년 치료를 받아도 소용없지만 名醫(명의)는 단숨에 병을 진단했다. 의사가 얇은 종이를 이경령 여사의 얼굴에 대고 『한 번 불어보시지요』 하고 말했다. 李여사는 신음소리만 낼 뿐 「후~」하는 바람을 내지 못 해 종이는 움직이지 않았다. 의사는 『호흡기장애이니 운동을 하시라』는 처방을 내렸다. 이 소식을 접한 朴대통령은 『名醫는 뭐가 달라도 다르구먼』이라며 감탄했다.
 
  한번은 崔書勉씨가 담석증으로 수술을 하기 위해 來韓한 적이 있었다. 朴대통령은 『日本의 외과수술이 우리보다 나을 텐데 왜 우리나라에서 수술을 받는가』고 물었다.
 
  崔씨는 『수술은 몸에 칼을 대는 것인데 100% 성공한다고 장담할 수 없다. 서울고 초대 교장으로 「서울고 뒷동산에 뼈를 묻겠다」던 金元圭(김원규) 교장도 日本에서 客死(객사)했는데, 나는 「드라이 아이스」에 묻혀 고국에 돌아가는 게 싫다. 6ㆍ25 전쟁 기간 동안 한국의 외과기술이 비약적으로 발전했다. 나는 나의 주치의를 소중히 한다는 차원에서 성모병원에서 수술을 받겠다. 내가 일본에서 수술을 받으면 주치의 金學仲이 얼마나 배신감을 느낄 것인가』라는 말을 했다. 朴대통령은 『崔원장은 한국에 올 적마다 나를 한 대씩 갈겨주고 간다』고 했다고 한다.
 
 
  「지키지 못한 약속」
 
 
  崔書勉씨는 朴正熙 대통령과 10ㆍ26 직전인 1979년에 나눈 이야기를 들려 주었다.
 
  『어느 날 朴대통령이 내게 「崔원장, 우리 둘이 가보지 못한 데가 많은데 日本에 좋은 데 있으면 안내해 달라」고 해요. 그때가 돌아가시기 수개월 전이지. 그래서 「대통령 그만두십니까」라고 물었더니, 朴대통령은 「국민소득이 2000달러가 넘어야 투표에 진실성이 있고, 2000달러가 넘어야 민주주의의 맛이 난다. 내 책임은 거기까지다」란 이야기를 해주셨어요.
 
  나는 그분이 2000달러가 넘는 그 시점에 국민과의 약속을 지키고 물러나려 했다고 확신합니다. 그렇게 생각하지 않고는 「朴正熙論」이 성립이 안 됩니다. 革命의 동기도 「보릿고개」를 넘자는 것이었으니까 金載圭가 일을 저지르지 않았어도 임기 이상은 안 했으리라고 봅니다. 그는 약속을 잘 지키는 사람이기 때문이지요.
 
  혹자는 朴대통령이 3選개헌, 민정이양 불이행 등에 대해 국민적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고 반론을 제기할지도 모르지만, 내가 말하는 약속이란 「정치적 약속」이 아니라 「인간 對 인간」의 약속을 잘 지키더라는 말입니다』
 
 
  한국에 뼈 묻은 가나야마 大使
 
 
  崔書勉은 일본인 중 한국을 사랑해 한국에 묻힌 日本人 가나야마 마사히데(金山政英) 前 駐韓대사를 잊지 못한다.
 
  『내가 죽으면 뼈를 한국에 묻어다오. 저 세상에서도 韓日 양국을 위해 일하고 싶다』
 
  제2代 駐韓 일본대사(1968∼1972년)를 지낸 가나야마가 1997년 11월1일 88세로 별세하면서 남긴 마지막 말이다. 그의 유언대로 가족은 그의 유해를 한국에 묻기로 하고 그 해 12월13일 遷葬式(천장식)을 갖고 경기도 파주 가톨릭묘지에 있는 崔書勉씨의 假墓(가묘) 옆에 안장했다.
 
  일제 때 조선시대의 文化(문화)를 일본에 소개한 총독부 관리인 아사카와 고(淺川巧)가 한국에서 죽어 망우리에 묻힌 적은 있지만, 일본에서 죽어 한국에 묻힌 일본인은 그가 처음이다.
 
  가나야마 前 대사는 원래 유럽통으로 한국에 대해 아무 것도 몰랐던 인물이었다. 폴란드 대사로 임명된 지 석달도 안 된 1968년 6월, 그는 갑자기 한국 부임 명령을 받았다. 한국 門外漢인 자신이 왜 발탁됐는지 어리둥절했다. 그러나 그는 한국에 부임하면서 두 나라 관계 발전의 「매개체」가 되겠다고 결심했다. 당시 한국은 朴正熙 대통령을 필두로 경제 건설에 매진할 때였다.
 
  그는 본국에 한국의 중요성을 이렇게 설명했다.
 
  『韓日관계 진전을 위해선 당당한 파트너십이 중요하다. 과거 우리가 잘못했던 일을 청산하기 위해서도 한국에 협력해야 한다』
 
  그가 朴대통령 친서를 사토 에이사쿠(佐藤榮作) 총리에게 직접 전달하면서 포항제철 건립 지원을 호소한 일은 유명한 일화다.
 
  어느 날 朴正熙 대통령이 가나야마 대사에게 술 한 잔 하자며 청와대로 招致(초치)했다. 朴대통령은 『대사는 주한 일본대사 아니냐. 그럼 한국 일도 도와야 하는 것 아닌가』면서 『사토 수상에게 내 親書를 전하고 答(답)이 없으면 올 필요가 없다』고 했다.
 
  가나야마는 외교관으로 부임해 국가 원수의 이렇게 큰 신임을 받은 영예로 『무엇을 아끼겠냐』며 朴대통령의 「特使」를 자청, 일본 外務省에 들르지도 않은 채 곧바로 수상관저로 가서 사토 수상을 만났다. 그는 사토에게 『이것을 朴대통령이 써줬는데 답이 없으면 올 필요가 없다고 하더라』며 긴장을 시켜 놓았다. 편지를 뜯어본 사토는 『이것(포철 건설)은 안 돼. 안 된다고 그렇게 이야기를 했는데…』라고 잘라 말했다.
 
  실제로 야하다 세이테츠(八幡製鐵所ㆍ新日鐵의 前身)는 한국의 제안에 대해 『나사 하나 못 만드는 나라가 제철회사를 세우겠다니 우습다』며 콧방귀를 뀌었다. 가나야마는 『日本이 제철회사를 만들 때도 마찬가지였다. 지금 우리가 한국을 보는 것처럼 유럽 선진국이 일본을 비웃지 않았느냐. 그럼에도 日本이 무리해서 야하다 세이테츠를 만들었기 때문에 우리가 淸日戰爭, 露日戰爭에 이길 수 있는 원동력을 만든 것이다. 한국 정권이 이 사실을 알기 때문에 그런 논리로는 수긍을 못한다』고 사토 수상을 설득했다.
 
  사토가 新日鐵의 이나야마(稻山寬) 사장에게 『저녁에 만나자』는 전화를 걸면서 적극적인 지원으로 돌아서게 됐다. 물론 朴泰俊(박태준) 前 포철회장, 유명한 양명학자이자 역대 首相의 스승 역할을 한 야스오카 세이토쿠(安岡正篤) 등 많은 인사들이 운동을 해서 분위기를 조성했지만 결정적인 순간은 朴正熙 「작사」, 가나야마 「작곡」이라는 게 崔書勉씨의 주장이다.
 
  『당시 후쿠다, 기시 수상 등은 韓日 간에 어려운 때는 상대방이 겪은 아픔을 공유하고 도우려는 마음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에 이르러서는 日本 정부는 오히려 한국의 덕을 보려 하고 있습니다. 앞으로 韓日관계를 잘 만들어가는 데 참고해야 할 사건입니다』
 
 
  浦鐵, 地下鐵 건설에 지대한 공로자
 
 
  가나야마는 서울지하철 건설에 숨은 공로자이기도 했다. 1970년 3월 日本 적군파들이 일본항공 여객기 요도號를 납치해 평양으로 가다가 김포공항에 착륙했을 때 그는 범인들에게 『나를 인질로 잡고 승객들을 풀어 주라』고 말했을 정도로 책임감을 보였던 인물이다.
 
  1972년 10월유신 직후, 미국에서 귀국길에 金大中씨는 자신의 책 출판을 위해 日本을 방문했으나 비자 발급이 안 돼 入國이 거부되자, 하네다(羽田)공항 내 출입국 관리사무실에서 崔書勉씨에게 入國할 수 있도록 해달라고 긴급 요청을 했다. 崔書勉씨는 가나야마에게 부탁을 했고 가나야마는 일본 法務省 입국관리국장에게 『한국 대통령 선거에 출마했던 사람을 日本이 홀대해선 안 된다』며 비자발급을 주선해 특별 체류 허가를 내주게 하기도 했다.
 
  1972년 1월, 대사 임기가 끝나자 자녀가 열두 명이나 있던 그를 위해 日本 정부가 파리문화관장 자리를 주었으나 가나야마는 『餘生(여생)을 한국을 위해 일하고 싶다. 일본 외교에서 한국이 차지하는 비중을 일본 사람들에게 일깨워야 한다』며 사양했다. 그리고 東京한국연구원인 崔書勉씨를 찾아와 상무이사 자리를 얻었다.
 
  ―朴대통령이 만든 고속도로나 浦鐵 등은 그 당시 1960년대 스케일로는 상상이 안 되는 것입니다. 朴대통령은 일본 陸士 교육을 받으며 戰爭史를 통해 日本의 明治정부가 야하다제철소를 건설할 때의 과정을 배우고 이것이 뇌리에 박힌 게 아니었을까요.
 
  『군수산업이나 중화학공업, 제철공업 등에 대해 살필 기회가 있었을 겁니다. 한번은 朴대통령이 미쓰비시 사장을 한국에 데려왔으면 좋겠다고 해요. 朴대통령은 內臣(내신)도 잘 썼지만 外臣(외신)도 잘 썼어요. 가나야마 주한 대사와 같은 훌륭한 사람도 자기 부하처럼 만들었고, 외국인을 만나면 꼭 자기 사람을 만들어요. 朴正熙 대통령의 욕을 하던 사람도 만나면 욕을 안 해요.
 
  日本의 재벌 1, 2위인 미쓰이(三井)나 미쓰비시(三菱) 사장이 새로 취임하면 한국 대통령을 만나야 비로소 사장이 된다는 이야기가 있었어요. 당시 한국은 많은 투자액수 때문에 일본 측으로 보면 중요한 국가였어요. 마치 신임 日本 首相은 미국 대통령을 만나고 와야 일본 수상이 되듯이. 어느 날 朴대통령이 미쓰비시 사장을 만나게 해달라고 하기에 미쓰비시만 부르면 향후 균형에 문제가 있다는 것을 대통령에게 건의했어요.
 
  놀라운 건 朴대통령이 내 제안을 그대로 받아들여 두 회사 사장을 같은 날 만났다는 것입니다. 현지에서는 대통령이 미쓰이를 먼저 만나느냐 미쓰비시를 먼저 만나느냐 하는 것을 두고 두 회사가 각축전이 벌어졌더군요. 미쓰이는 10시에 오라고 해서 먼저 만난다고 좋아했고, 미쓰비시는 11시에 오라고 하니 섭섭하게 생각했어요.
 
  朴대통령이 할 말은 미쓰비시에 있었으니까 미쓰이 사장을 먼저 만나 30분 간 이야기하고, 미쓰비시 사장과 30분 정도 이야기를 하고는 「아, 약속 있어요? 점심 같이 합시다」했습니다. 대통령이 점심을 먹자는 데 마다할 사람이 있어요?
 
  미쓰비시 사장은 점심까지 먹고 왔단 말예요. 미쓰이 측은 우리가 처음 만났으니까 자존심을 갖게 됐고, 미쓰비시 사장은 밥까지 먹었는데 하면서 자존심을 갖게 했지. 이게 朴正熙의 用人術(용인술)이야』
 
 
  가토 前 간사장 외면한 金泳三
 
 
  崔書勉씨는 金泳三(김영삼) 대통령 시절, 韓日 양국 지식인 간 대화채널을 위해 공식 출범한 한일포럼 한국 측 자문위원으로 임명된다. 崔씨는 초대 회장인 일본 측 오와다 히사시(小和田恒ㆍ前 외무차관) 마사코(雅子) 日本 왕세자빈의 부친을 비롯한 日本 대표들과 함께 청와대로 金泳三 대통령을 예방했다.
 
  『金대통령이 50여 명의 日本 대표단을 접견하면서 아무한테 말을 안 걸고 내게만 「崔書勉 선생 아니냐. 어떻게 여기 계시냐」하고 물어요. 한국 측 회장이자, 金泳三 대통령의 경남고 동창인 裵載湜(배재식) 서울大 명예교수가 외교관 출신으로 관방장관, 방위청장관, 자민당 정조회장 등 요직을 두루 거친 가토 고이치(加藤紘一)를 「차기 간사장」이라며 소개했어요』
 
  가토를 소개받은 金泳三은 어찌된 영문인지 얼굴을 외면했다. 국제무대에서 있을 수 없는 의전상의 결례라 裵회장도 깜짝 놀랐다.
 
  『그는 몇 번 대화를 시도했는데 金대통령이 영 상대를 안 하는 것을 눈치채고 포기했어요. 그날 저녁 가토가 내 방엘 찾아와 어찌된 영문인지 이유를 묻습디다. 나도 모르겠다고 했어요. 나중에야 金泳三 대통령이 이북동포에게 쌀을 지원해 주려는 시점에 당시 자민당 정조회장인 가토가 선수를 쳐서 북한에 먼저 쌀을 지원한 것을 불쾌하게 생각한다는 사실을 알았어요. 金泳三씨가 모처럼 동포애를 발휘하려는 것을 싹부터 잘라버렸으니 얼마나 기분이 안 좋았겠어요. 日本은 북한과 관계개선을 할 때 반드시 한국과 먼저 상의해야 한다는 것은 日本 정치인들의 상식인데 그것을 어긴 가토의 태도를 金泳三 대통령이 불쾌하게 생각한 겁니다』
 
  ―요즘 韓日關係에서 인간적으로 日本과 한국을 연결하는 연결고리 역할을 해줄 수 있는 정치인으로는 누가 있습니까.
 
  『金鍾泌씨가 제1인자입니다. 韓日 간 최고의 인물, 말하자면 「존재감」이 있는 사람은 아직까지도 金鍾泌씨입니다. 日本 사람들은 세상이 다 바뀌었어도 아직도 金鍾泌씨를 만났다는 것 하나로 화제가 돼요. 언제든지 써먹을 수 있고. 朴泰俊, 金守漢(김수한), 金潤煥(김윤환)씨 등도 日本에 인맥이 있지만 우리나라에서는 충분한 대접을 못 받아요. 이건 우리나라가 사람을 안 기른다는 이야기도 됩니다.
 
  餘談(여담)으로 日本 사람들에게 인기가 있으려면 知的(지적)으로 「축적」이 있어야 해요. 日本사람들은 지금도 論語(논어)나 유교경전을 읽는 연구회가 많을 정도로 문화적인 것을 좋아합니다』
 
  ―崔원장께서는 日本 정치인 중에는 누구와 가장 친했습니까.
 
  『기시 노부스케(岸信介), 「한국에 TV 방송국을 만들어주겠다」고 제안한 오히라 마사요시(大平正芳), 후쿠다 다케오(福田赳夫), 시이나 에쓰사브로(椎名悅三郞) 등도 잘 알지요』
 
 
  『天皇은 2600年前 在日 한국인』
 
 
  ―일본인들의 對 한국관을 말씀해 주십시오.
 
  『韓日關係를 이야기할 때 日本 사람들이 한반도를 바라보는 두 가지 관점이 있어요. 日本사람은 한반도를 어머니의 젖꼭지로 보는 對한국관이 있는가 하면, 꼭 匕首(비수)를 목에 들이대는 모습으로 바라보는 두 가지 시각이 있습니다. 처음 한반도는 日本에게는 젖꼭지의 존재, 즉 뭐든지 주는 고마운 존재였단 말예요. 匕首로 볼 때는 日本이 한반도에 쳐들어가고 싶을 때입니다. 대륙침략의 名分을 만든 거지요』
 
  ―얼마 전 日本 天皇이 자신은 백제 계통의 후손이라고 이야기했는데 참 충격적인 이야기죠.
 
  『그럼요. 日本 天皇은 初代부터 오늘날 127代에 이르기까지 「우리는 大陸(대륙), 즉 朝鮮에서 건너왔다」고 믿고 있습니다. 그러니 역대 천황들은 「朝鮮에 한 번 가봤으면」 하는 것이 당연한 꿈이었을 것입니다.
 
  우리가 대국적으로 天皇이 월드컵을 「핑계」삼아 온다고 하면 「아! 先祖가 가서 고생하시더니 임금이 됐습니까. 百濟 좀 보고 가시고 新羅도 좀 보고 가십시오」하지는 못할망정 못 오게 하는 게 愛國인 줄 착각하고 있어요. 壬辰倭亂 때 陶藝工의 후손으로 성공한 沈壽官(심수관)이 오면 박수치고, 天皇은 못 오게 하고, 이건 모순입니다. 沈壽官은 500년 전 在日 한국인이고, 天皇은 2600년 前 在日 한국인입니다』
 
  ―기시 노부스케, 후쿠다 다케오 등 日本 내 명문가 사람들은 자신들의 祖上이 한반도에서 왔다는 자각이 있습니까.
 
  『물론이지요. 기시 수상에게는 내가 직접 들었어요. 가까운 先祖가 조선과 무역을 하는 사무관을 했는데 朝鮮에서 통신사가 오면 그렇게 집안이 감격을 했답니다. 후쿠다 다케오에게는 내가 직접 「당신은 지금 日本 수상이지만 한복 바지 저고리를 입고 두루마기, 갓을 쓰면 영락없는 경상도 시골 面長이다」고 말했어요. 후쿠다도 「내가 한국사람의 얼굴인 것은 틀림없다」고 하더군요. 8세기경 후쿠다의 출신지인 群馬縣(군마현)에 한국에서 渡來人들이 많이 왔다고 했습니다』
 
  제2차 세계대전 발발할 때와 패전 직후 두 차례 일본 외상을 지낸 도고 시게노리(東鄕茂德ㆍ1882~1950)의 선조는 壬辰倭亂 때 잡혀간 도예공의 후예다. 그는 다섯 살 때까지 朴茂德(박무덕)이라는 이름을 사용했다고 한다. 가고시마(鹿兒島)縣에 살았으며, 그곳에는 지금도 檀君(단군)을 모시는 神社가 있었다고 한다. 한국에는 남아 있지도 않은 단군교 기도문도 있을 정도로 도예공들의 집단 거주지였다고 한다.
 
  건국 직후 駐日 대표부 공사로 있었던 鄭桓範(정환범)씨가 崔씨에게 들려준 이야기가 있다. 맥아더가 최고 사령관인 일본 점령군 총사령부로부터 『군사재판에서 금고 20년 형을 선고받은 한국인 A급 戰犯(전범)이 있다. 만나고 싶다면 신청을 하라』는 연락을 받았다. 鄭공사는 이 사실을 즉시 李承晩 대통령에게 보고했다. 그러나 李承晩 대통령으로부터는 아무런 회답이 없었다.
 
  아깝게도 도고 시게노리의 400년 만의 정신적 歸鄕(귀향)은 이뤄지지 못했다. 도고 시게노리는 20년형을 선고받고 복역중 1950년 사망했다.
 
 
  『安重根만큼 안 알려진 위인이 없다』
 
 
  崔書勉씨가 최근 혼신의 노력을 기울이고 있는 것은 제대로 된 安重根 연구다. 그는 『安重根만큼 안 알려진 유명한 인물이 없다』고 했다. 그 예로 安重根을 연구하는 한국 학자 중 安重根의 키(164cm)와 그가 있었던 監房(감방) 호수를 아는 사람은 거의 없다고 한다. 美日 등 외국학자들은 어느 인물에 대해 기본적인 연구부터 시작하는 것에 비해 한국학자들은 總論(총론)에만 강하고 各論에는 약한 인상을 받는다고 한다.
 
 
  최근 安重根 연구의 걱정스런 현상은 한국 사람은 무책임하게 原料(원료) 없이 安重根을 쓰고, 日本 사람은 原稿(원고) 하나를 보면 열 개로 부풀려 쓰려고 하는 통에 安重根 연구가 잘못된 길로 가고 있다는 것이다. 日本에서 安重根傳이 열 권 정도 출간됐으나 올바른 「安重根 傳」을 발견하기 어렵다고 한다.
 
  생각다 못한 그는 安重根 의사가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를 죽인 1909년 10월부터 1910년 4월까지 日本에서 발행된 전체 신문 중 安重根 관련 자료를 몽땅 훑기 시작했다. 『安重根 의사가 돌아가신 날, 서울 명동성당에서 미사가 있었다고 서울에 있던 日本 신문 기자가 보도한 사실을 발견했어요』
 
  현재 安重根 연구자들이 바이블처럼 인용하는 책은 당시 滿洲 일일신문사가 펴낸 「安重根 공판기록」인데, 崔書勉씨는 그 책의 오류를 이렇게 지적한다.
 
  『安重根은 재판 때 「왜 나는 말을 길게 했는데 통역은 짧게 하느냐. 이렇게 되면 재판장, 변호사, 검사도 모두 일본인인데 그럼 재판은 「쇼」가 아니냐」고 했답니다.
 
  그 말로 미루어 짐작할 수 있는 것은 安重根의 이야기는 이 책에 실리지 않은 것이 많았다는 겁니다. 훗날 日本 정부가 安重根 공판기록이라는 것을 만들어 출판을 했어요. 비교적 자세하긴 한데 큰 의문이 생겼어요. 日本 아사히(朝日)신문에 「그자가 무슨 義兵 중장이랍시고 건방지게 호통을 치고 있는가. 더군다나 그자는 우리 伊藤公에 대해 『伊藤이가… 伊藤이가』 하고 해라를 하고 있다」고 신문에 났어요. 그런데 日本 공판기록을 보면 꼭 「이토님」이라고 존대를 쓴 것으로 났는데, 아! 이것도 거짓말이구나 하고 알 수 있어요』
 
  崔씨는 한국의 어느 신부가 자신의 책에서 「安重根이 죽기 전에 바라던 고해성사와 성체성사를 천주교에서 받아들이지 않았다」고 주장한 것은 사실과 다르다고 말했다.
 
  『安重根은 1910년 3월 여순에서 프랑스人 빌레헴(한국명 洪錫九) 신부를 네 차례 만나 고해성사와 성체성사를 했어요. 이같은 사실이 滿洲 일일신문과 오사카 아사히신문 등 6大 일본 일간지에 실려 있는 것을 확인했습니다』
 
  崔書勉씨는 얼마 전, 日本 모 단체에서 강연을 하기 전, 伊藤博文의 손자가 『나 같은 사람이 참석해도 되느냐』고 문의하는 전화를 걸어왔다. 崔씨가 『伊藤博文의 아들은 셋이다. 첫째는 외무대신과 주한공사를 역임한 이노우에 카오루(井上馨)의 조카를 양자로 받아들였고, 둘째는 몰래 낳아 기른 분기치(文吉)이고, 셋째 아들이 신기치(眞吉)다. 신기치만 서울에서 같이 지냈다. 셋째 아들의 아들이면 대환영이다』고 하니, 그 사람이 『당신이 한국 사람인지 일본 사람인지 모르겠다. 우리집 사정을 어떻게 그리 잘 아냐』며 감탄했다고 한다.
 
 
  『獨島에 대한 감정적 대응은 자제해야』
 
 
  崔書勉씨는 우리 측이 獨島에 대한 논리를 좀더 발전시켜서 日本을 설득하지 않고 감정적으로 대응하면 마치 「獨島는 일본 것이다」고 떠들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가 된다고 했다.
 
  崔書勉씨는 獨島에 대한 일본 측 자료는 독도가 일본 것이라는 증거가 희박하기 때문에 일본 측 자료 발굴을 서둘러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獨島 연구를 위해서는 먼저 金玉均(김옥균ㆍ1851~1894)에게 관심을 가져야 한다고 했다. 金玉均이 獨島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1881년 이후, 두 차례 일본을 돌아보면서 나가사키(長崎)항에서 울릉도産 목재를 놓고 상인들이 실랑이를 벌이는 것을 목격하고 나서였다고 한다.
 
  金玉均이 싸우는 이유를 물어봤더니 상인들이 말하길 『울릉도産 재목으로 옷장을 짜면 벌레도 없고 향기가 좋다. 이것을 배급받으면 큰 수입을 얻기 때문에 서로 배급을 많이 받으려고 싸우는 것이다』고 했다.
 
  『金玉均이 東京 히비야(日比谷)공원 인근 호텔에서 밖을 내다 보니 서양사람들이 日本 外務省에 자꾸 들락거렸습니다. 영문을 알아 보니 日本 근해에서 고래를 잡기 위한 허가를 받으려는 것이었어요. 당시 日本 사람들은 휘발유가 생산되기 前 고래기름이 燈油(등유)로, 프랑스에서는 香水(향수)의 원료로 쓰인다는 사실을 몰랐어요. 日本人들도 「저놈들이 日本 근해에서 고래를 잡으려고 하는데, (허가) 도장만 찍어 주면 좋아라고 하며 돈을 잔뜩 놓고 간다」고 말했답니다.
 
  그래서 金玉均은 무릎을 쳤어요. 귀국한 金玉均은 「울릉도 捕鯨事(포경사) 겸 東南諸島 개척사」로 자리를 옮겨요. 당시 사정을 잘 몰랐던 사람들은 金玉均이 좌천됐다고 했습니다. 金玉均이 先見之明이 있는 게 울릉도만 해도 돈이 되는데 동남, 즉 獨島를 의식한 직함을 붙인 것입니다. 이 자료가 日本 사료관 안에 있는데 동남제도 개척사와 日本 회사가 계약을 맺은 기록도 나옵니다』
 
 
  獨島에 관심 기울였던 金玉均
 
 
  崔書勉씨는 獨島를 연구하기 위해 朴正熙 대통령에게 軍艦(군함)을 빌려 포항에서 울릉도를 항해했다. 삼척, 강릉이 지리상으로 울릉도에 가까움에도 여객선이 포항에서 울릉도를 가는 것을 보고 이것은 필시 海流 때문일 것이라고 추측하고 이를 증명해 보이기 위한 것이었다.
 
  崔씨는 당시 출판된 「日本 沿岸 항해지」의 저자인 영국의 세인트존스 함장 지도에 獨島가 三峰(삼봉)으로 표시돼 있는데, 우리 역사 기록에 獨島가 三峰島(삼봉도)라고 기록돼 있어 文獻(문헌)이 일치함을 보고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고 한다.
 
  우리나라 古地圖에는 울릉도와 한반도 사이에 于山島(우산도)인 獨島가 실려 있는 것이 많다. 그런데 獨島는 실제로는 울릉도 밖에 있다. 그렇다면 울릉도 안에 있는 우산도라는 獨島를 어떻게 봐야 하는가.
 
  崔書勉씨는 『이 문제는 우리가 풀어야 할 중요한 문제』라고 했다. 이를 위해 崔書勉씨는 海流에 의해서 이러한 지도가 그려지지 않았는가 하는 假說(가설)을 세우고 해류답사를 거듭했다. 실제로 울릉도 獨島와 한국에서 가장 가까운 곳은 강원도 삼척 일대이다.
 
  그럼에도 울릉도에 가는 배는 三陟(삼척)에서 가지 않고 그 밑에 있는 浦項(포항)에서 출발한다. 이것이 곧 海流의 지배를 받는 현상 때문이라고 판단하고 답사를 계속한 것이다.
 
  그 결과, 비밀을 발견했다. 즉 포항에서 해류를 따라 엔진을 끈 채 항해하면 獨島가 먼저 보이고 나중에 울릉도가 나타난다. 그러다 보니까 옛날 사람들은 독도가 울릉도와 한반도 사이에 있는 것으로 생각했고 古地圖에도 그렇게 표시돼 있다는 것이 그의 설명이다.
 
  崔書勉씨는 이 답사를 기초로 서울 안국동에서 구입한 400여 장의 지도를 분석해 시대順으로 독도의 위치를 點(점)으로 표시한 결과, 현재 지도상의 「獨島 移動 軌蹟說(독도 이동 궤적설)」이라는 假說을 세울 수 있었다. 덧붙여 그는 『일본 측이 옛날부터 우리가 獨島를 일관되게 獨島라고 부르는 것과는 달리 다케시마(竹島)와 마쓰시마(松島) 두 가지로 혼동해 불렀다』면서 『독도가 일본 고유의 영토라면 이런 혼동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했다.
 
  崔書勉씨는 최근 日本에서 강연 도중 韓日關係를 걱정하는 한 日本人으로부터 『다케시마(竹島)문제를 어떻게 해결할 방법이 없겠느냐』는 질문을 받았다고 한다.
 
  그래서 崔書勉씨는『다케시마(竹島)는 일본 것 아니냐』고 반문했다. 예상 외의 반문에 놀란 그 일본인은 『그럼 왜 한국은 日本 영토라는 데 동의 안 하냐』고 물었다. 崔씨는 『우린 獨島(독도)를 우리 것이라고 했지, 언제 다케시마를 우리 것이라고 했느냐. 자기 마누라를 남에게 내 것이라고 이야기하는 사람을 보았느냐』고 이야기를 해주었노라고 했다. 그는 덧붙여 『너희들이 다케시마라고 하는 한 절대로 너희 것이 될 수 없다. 獨島를 인정하고 한국과 싸워야지, 다케시마는 너희 마음대로 가져가라』고 말했다고 한다.
 
 
  40년째 이어진 「가위질」
 
 
  崔書勉씨에게 술과 담배는 남다른 의미가 있다. 연희전문 1학년 때부터 50년이 넘도록 하루 두 갑 이상씩 피운 담배는 이국땅의 서러움과 고독을 달래 준 친구였다. 취침 전 습관처럼 시바스 리갈 반 병을 마시는 술은 崔씨에게 「催興劑(최흥제)」가 아니라 「睡眠劑(수면제)」다. 관절염이 심하기 때문에 알코올 기운에 의지해야 熟眠(숙면)을 취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는 최근 모진 마음을 먹고 담배를 끊었다. 간접흡연이 건강에 더 해롭다는 주변의 이야기를 듣고 나서였다. 이제 그에게 남은 친구는 20만 점에 이르는 「자식」 같은 자료뿐이다.
 
  지금도 東京과 서울을 수시로 오가는 崔씨는 아침에 눈을 뜨는 곳이 서울이든 東京이든 어김없이 日刊 신문을 쌓아놓고 文化面 「가위질」을 시작한다. 40년째 한 번도 거르지 않은 日常이다. 그의 오른손 중지 두 번째 마디에는 큰 사마귀 같은 티눈이 「훈장」처럼 박혀 있다.
 
  『만나는 친구마다 사마귀를 만져보고 크기가 작아지면 「요새 일 안 하는구나」하고 경각심을 줍니다(웃음)』
 
  일본 신문에서는 고고학ㆍ철학ㆍ환경 부분을, 한국 신문에서는 한국사ㆍ독립운동사ㆍ교육사 등을 오려낸다. 특히 「이규태 코너」는 한국 국민에게 한국인의 자부심을 길러 주는 글이라 그가 가장 아끼는 연재물이다.
 
  崔씨는 呑虛 스님이 지어준 別號(별호) 方寸(방촌ㆍ사람의 마음은 가슴속 한 치 사방 넓이 속에 깃들어 있다는 의미)처럼 넉넉한 마음으로 맺힌 것을 푸는 인생을 살아왔다. 한국에 올 때마다 1962년 작고한 모친 산소를 찾는다는 崔書勉씨.
 
  『先親이 내가 태어난 지 한 달 이레 만에 돌아가셔선지 어머니가 지금도 내게는 저 세상 사람 같지 않아요. 난 어머니 산소에서 풀을 뽑을 때가 제일 흡족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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