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의 시인 탐험 - 趙炳華의 「귀향」준비

아직도 「꿈」을 말하는 팔순의 낭만주의자

  • : 이유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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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2년 간 50권의 시집, 37권의 수필집 내
 
 
  아래의 詩 「詩를 살다보니」는 片雲 趙炳華(편운 조병화) 시인의 미발표 최근작이다. 오랜만에 그를 만나 여러 이야기를 하던 중 최근에 쓴 것이라며 읽어 주기에 느낌도 좋고 게다가 그의 요즈음 심경이 엿보여 원고를 얻어와 여기 싣는다.
 
  읽어보면 알겠지만 그는 詩 쓰는 것을 「사는 것」이라고 표현하고 있다.
 
  <시를 살다보니/시는 알리는 세상이 아니라/느끼는 세상이어라, 퉁기는 세상이어라//시를 오래 살다보니/시는 배우는 세상이 아니라/느끼면서 더 깊은 곳으로 찾아가는 세상이어라//시를 오래 평생을 살다보니/시는 아는 것이 늘어가는 세상이 아니라/느끼며 생각하며 다시 잊어 가는 것이어라//시를 80이 넘도록 살다보니/시는 자랑이 아니라, 따지는 것이 아니라/느끼며 생각하며 깊이 인생을 살아가며/다시 텅 비어 가는 일이어라//아, 시를 오래 살아보니/시는 우주로 비어 가는 세상이어라.>
 
  28세 때인 1949년 첫 시집을 낸 후 여든이 된 2001년까지, 52년 동안 50권의 新作 시집과 5권의 詩論, 37권의 수필집, 5권의 畵集 등 막대한 저작물을 내오면서 광범위한 독자층을 형성해 온 詩人. 또 41년 동안 후학을 가르치면서 고교 교사에서 대학교수로, 마지막엔 대학원장을 거쳤고, 한국시인협회장과 문인협회 이사장, 최근엔 한국예술원 회장을 역임하는 등 명실공히 한국 문화예술계를 대표해 온 사람.
 
  趙炳華 시인이 지난 5월2일로 팔순을 맞았다. 경기도 안성군 양성면 난실리 고향에서 농악대를 불러 친지들과 즐기며 조촐하게 생일잔치를 치렀다. 이날엔 또 그의 어머니 묘소에다 마지막 시집이라고 생각하며 낸 50권째 시집 「고요한 귀향」을 바쳤고 片雲齊(편운재) 조병화 문학관에선 11회 片雲文學賞 시상식도 있었다.
 
  『이젠 난실리를 내 본거지로 삼고 있어. 건평 100여 평의 2층 건물이 문학관인데 거기에 내 저작물들과 그림·휘호들, 문인들의 육필 등 평생 지녀왔던 모든 것을 진열해 놨어. 학생 때 입던 내 럭비복도 있고 공도 있고 내 학교 성적표도 있고 말야. 6·25 사변의 戰禍를 거치면서도 용하게 다 견뎌왔던 것들이라, 둘러보면 학생들에겐 공부가 될 거라고 생각해. 특히 당시 조선의 최고 수재들이 모인다는 경성사범(지금의 서울대 사범대 전신)과 東京고등사범에 다니면서 반에서 노상 공부 1등 하던 친구가 말야, 럭비선수로 뛰고 했던 거, 요즈음 청소년들에겐 좋은 교훈이 될 것 아니겠어? 공부와 운동을 겸하는….
 
  2층엔 의자 50개 정도를 갖다놓고 소규모 단체가 와서 세미나도 할 수 있도록 해서, 많이 구경 오고 있어.
 
  거기 내 어머님 무덤 옆에 3년 전 먼저 간 아내의 무덤, 그리고 내 무덤도 만들어 놨어. 나 죽고 나면 문인장이다 뭐다 하지 않고 가족장으로 조용히, 내 50권째 시집 제목처럼 「고요한 귀향」을 하여서 묻히겠다고 우리 아이들에게 말하고 있어. 또 내가 이 세상에서 마지막으로 쓰는 詩를 새긴 시비도 하나 만들어 미리 세워놨지. 나중에 시비 건립한다고, 어려운 문인들 주머니 털지 못하게 말야. 그 詩를 읽어볼게.
 
  <꿈의 귀향
 
  어머님 심부름으로 이 세상 나왔다가
 
  이제 어머님 심부름 다 마치고
 
  어머님께 돌아왔습니다.
 
  조병화>
 
  …내가 이 세상에 나온 건 어머님 심부름하러 나온 것 아니겠어? 심부름 다 하고 이제 어머님께 돌아왔다는 것이야. 쓰고 싶은 詩 많이 남기고 대학원장과 예술원 회장도 겪고 국가서 주는 금관훈장도 받고… 이만하면 심부름 많이 한 것 아냐? 「꿈의 귀향」이란 내가 마음의 고향인 어머니 곁으로 돌아왔다는 뜻이야』
 
 
  47년을 지켜온 종로구 혜화동 107번지
 
 
  꼭 40년 만에 그의 거처를 찾아갔다. 전화로 『옛날 그 집이죠?』 했더니 『그렇지 뭐!』해서 대충 머리로 건물 위치를 그려보고 서울 종로구 혜화동 107번지의 그 집을 찾아간 것이었다.
 
  그러나 집은 기억 속에만 존재하는 듯 했다. 1층이 그의 부인이 하던 「김산부인과」였고, 2층 한 구석이 그의 서재인 일본식 건물이었는데… 하며 몇 차례 그 일대를 뱅글뱅글 돌았다. 없었다. 부동산 중개업소에 가서 물었다. 『선생님 집은 저기지만, 오늘도 아침에 사무실로 어김없이 출근하시는 것 봤다』며 부동산 중개업소 주인이 사무실 있는 곳까지 따라오며 가르쳐 줬다.
 
  혜화동 로터리의 주유소에 붙은 벽돌 건물. 2층 계단 끝에 그의 작업실 「片雲齋」가 있었다. 1층은 중국서점. 이 1층이 전날의 「김산부인과」였고 2층 한 곳이 여기였구나 싶어지자 그동안 무심하게 지나쳐온 내가 문득 어리석게 여겨졌다.
 
  일부가 이사 나간 방처럼 어수선한 방 한 가운데 趙炳華 시인이 앉아 있다가 벌떡 일어나 손을 내밀었다. 뻐드렁니에 가깝지만 희고 가지런한 이, 홍조 띤 뺨은 10여 년 만에 만났지만 그대로였다.
 
  목소리도 우렁찼고 장난기가 배어나는 웃음도 여전했다. 그러나 건강 이야기가 나오자 약간 슬픈 얼굴이 되더니 『괜찮아. 이렇게 계속 글을 쓰고 있으니 말야』 했다.
 
  그렇게 좋아하던 술도 집에서 「위스키 하루 한 잔」 정도로 줄이고 트레이드 마크 였던 파이프 담배도 끊어버렸다고 했다. 술은 조금만 마셔도 어지럽고 저녁엔 밤눈도 어두워져, 술자리를 피하고 있다고 했다.
 
  담배는 니코틴이 스며들면 나이 들어 좁아진 혈관에 부담을 주고 다리가 저리기 때문에 끊었다는 것. 다리 저린 것은 약을 복용하고 많이 나아졌다고 했다. 전에 애용하던 파이프 대여섯 개가 큰 재떨이 속에 먼지를 뽀얗게 쓴 채 머리를 맞대고 있었다.
 
  『후배들도 다들 담배를 끊어서 이젠 파이프 나눠 줄 사람도 없어졌어』
 
  片雲은 자신이 이사로 있는 경희대 의료원에 한 달에 한 번씩 가서 건강을 체크하고 혈압도 재고 약도 타온다고 했다. 그러나 그는 젊어서 운동으로 다진 체력과 오랜 규칙적인 생활 덕분에 지금도 건강한 편이라고 덧붙였다.
 
  저녁 9시 조금 넘어 취침하고 새벽 4시에 깨어나 맨손 체조를 10분 정도 한 다음 마른 수건으로 마사지하고, 아침뉴스를 보며 조반을 들고 8시께 출근하는 것이 수십 년 전부터의 생활 습관이다. 학교와 공직으로부터 떠나온 이후엔 20m 정도 떨어져 있는 이 작업실에 출근하여 점심 때까지 일하고 퇴근하는 것이 일과다.
 
  이와 함께 늘 새로운 詩를 생각하는 등 머리를 맑게 하고, 야채 중심의 小食(소식)을 하는 것이 건강에 도움을 주는 것 같다고 했다.
 
 
  그 많은 책은 어디로 갔을까?
 
 
  혜화동 107번지 집엔 片雲과 50줄의 장남 부부, 곧 미국에 건너갈 손녀 등 넷이 살고 있다. 손자 하나는 미국에서 공부 중이다.
 
  그의 사무실 문을 열고 들어갔을 때 받은 「나간 집」 같은 인상은 곳곳의 빈 書架(서가)와 탁자들, 흰 벽 때문이었던 것 같다. 가끔씩 본 그의 서재에서의 사진은 배경에 책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는 것이었고, 40년 전 우리들 詩 쓰는 친구들이 그의 서재를 「침공」했을 때도 사면 벽이 온통 책으로 채워져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그 많은 책들은 다 어디로 간 것일까?
 
  『경원대 문예창작과에 김삼주라고 있어. 인하대 대학원 내 제자인데 詩도 쓰고 평론도 하는 사람이야. 그에게 내 장서들을 다 맡겼어. 그러니까 경원대에 그 책들이 다 가 있는 셈이지. 지금도 부쳐오는 책들은 내가 읽어본 다음엔 삼주가 다 가져 가』
 
  어수선한 실내지만 구석구석에 片雲의 부지런함이랄까 50권의 시집과 37권의 수필집, 여덟 차례의 개인전과 다섯 차례의 詩畵展을 탄생시킨 잔재가 묻어 났다.
 
  그의 오래된 책상 위엔 지금도 詩가 쓰여지고 있는 원고지가 펼쳐져 있고, 여러 필기도구 사이에 그의 낯익은 만년필이 뚜껑을 닫은 채 누워 있었다. 부쳐온 詩 잡지와 시집이 몇 권, 읽다 만 듯한 소책자 「法句經」이 엎어져 있다. 책상 한 모서리엔 「片雲齋에서의 편지」 101꼭지까지의 원고가 차곡차곡 쌓여 있었다. 글쓰고 있던 것이 약간 겸연쩍은 듯 씩 웃으며 말했다.
 
  『詩가 안 쓰여지면 이 편지를 쓰고 말야. 내 만년의 삶을 기록하는 것인데 형식은 독자에게 주는 편지이지만 내용은 일기로, 詩 이야기가 많아. 계속 쓰다 120꼭지가 되면 달라는 출판사에 넘기려고 해』
 
  「片雲齋에서의 편지」는 1권과 2권이 이미 나왔고, 1권은 베스트셀러가 되어 7판까지 찍었다. 그때 받은 인세로 3년 전 작고한 부인이 암 투병을 할 때 입원비 충당에 큰 도움이 되었다고 했다.
 
  방 안에서 유달리 눈에 띄는 것은 몇 개의 종이박스 겉에다 「남기는 資料들」이란 쪽지를 붙여 놓고 있는 것이었다. 불길한 기분이 들어 『저거…』하며 우물거렸더니 『그거 김삼주 아이디어야. 내가 살면서 지녔던 모든 것은 난실리에 다 가 있으니까, 나는 그냥 이렇게 글쓰며 자료를 남기고 있는 거야. 또 문인들 편지도 받아 쌓아두고 말이야. 언젠가 나 없어지면 김삼주가 이 자료들 다 챙겨서 난실리에 가져다 놓을 거 아니겠어?』 하며 걱정 말라는 듯 장난스럽게 웃었다.
 
  그의 뒤에는 조각가 白文基씨가 만들어 줬다는 그의 얼굴상 조각이 지키고 있고 벽 일부에는 그가 쓴 휘호들과 그림 몇 점, 詩畵 한 점이 시선을 끌고 있었다. 테이블들 위엔 그의 글씨가 새겨진 도자기 몇 점이 있었고 좀 큰 카세트 한 대가 역시 먼지 쓰고 앉아 있었다.
 
  TV 같은 것은 없었다. 그러니까 그의 이 작업실은 오직 글을 읽고 쓰는 일과 손님을 맞아 담소하는 장소로만 열려왔을 뿐인 듯했다.
 
 
  어머니의 「죽음의 철학」을 바탕으로
 
 
  『여덟 살이었을 때 아버지를 여의었어. 나는 그때 난실에서 10리쯤 떨어져 있는 송전보통학교에 다니고 있었는데, 아버님이 돌아가시자 어머니는 안 되겠다며 고향의 논밭을 처분하시고 이듬해 서울로 이사를 하셨지. 서대문 밖에 있는 미동보통학교로 전학을 했는데 공부는 늘 1등을 했지.
 
  어머님은 낯선 서울에서 새 살림을 꾸리느라 참으로 고생이 많으셨는데 내가 「쉬어가면서 일 하세요」 하면 어머님은 그때마다 「살은 죽으면 썩는 것이니 아껴서 무엇하나」고 하셨어. 내 어머님은 내가 밤늦도록 공부를 하고 있으면 자신도 불을 켜놓고 바느질을 하셨는데 내가 「주무십시오」 하면 「네가 공부를 하는데 어미가 편하게 잠을 잘 수 있겠느냐」 하시며 일을 계속하는 것이었어. 하는 수 없어 내가 불을 끄고 잠든 척하면 그때서야 어머니 방에도 불이 꺼지곤 했지. 「사람의 살은 죽으면 썩는다」는 어머님의 이 말씀은 나에게 평생 어떻게 살아야 하나, 죽을 때까지 무엇을 하는 것이 최선인가를 결심하고 실천하게 했던 거야』
 
  미동보통학교를 수석으로 졸업한 片雲은 교장선생의 권유로 국비로 다닐 수 있는 경성사범에 진학한다. 경성사범은 80%가 일본인이어서, 한국인 아이들은 대부분 가난한 「이방인」이었다. 의무적으로 기숙사 생활을 했다.
 
  기숙사에서의 어느 날 밤 문득 그는 「왜 나는 日帝(일제)식민지의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났는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면 죽을 때까지 어떻게 살 것인가를 궁리하다가 어머니의 말씀처럼 「인생을 많이 사는 것」이 중요하다는 결론을 얻었다고 한다.
 
  『인생을 많이 살려면 많은 여행을 하며 살아야 한다고 생각하게 된 거야. 여행이라는 것은 「눈에 보이는 자연」을 보는 것과 「눈에 보이지 않는 상상의 세계」를 여행하는 것이라고 생각했지. 영혼의 세계를 많이 여행하는 것은 책을 많이 읽는 거라고 믿었어. 종교서적, 철학서적, 문학서적을 읽고 상상력도 키웠던 것인데 특히 짤막한 詩를 읽으면서 많은 에너지를 얻었지 않았나 싶어.
 
  그래서 충무로에 있는 서점에 갔는데 거기서 나는 운명적인지 모르지만 로버트 번즈의 시집에 손이 갔어. 이와나미 문고(岩波文庫) 책인데 나는 그걸 사서 호주머니에 넣고 다니며 틈만 나면 읽었지. 이해되는 것만 줄을 치고 외우다시피 하고 말이야.
 
  경성사범엔 수석 입학한 鮮于煇라고, 소설가로 조선일보 주필 하던 鮮于 있잖아 그하고, 훗날 세계적인 물리학자가 되는 金榮培 그리고 나, 이렇게 셋이 단짝이었어. 졸업 땐 내가 수석을 했지만 鮮于는 그때 민족사상이 강해서 학교 공부는 하지 않고 소설만 읽더니 나중에 소설도 쓰는 논객이 됐어. 金榮培는 지금 미국에 있는데 노벨 물리학상 문턱까지 간 유명한 학자야.
 
  도쿄고등사범 다닐 땐 헤르만 헤세의 소설을 많이 읽었지. 헤세의 소설은 그 자체가 철학이야. 그때도 나는 매일 시집을 읽었어. 내 전공이 물리학인데도 문학관계 책만 계속 읽었던 거야. 경성사범 때 럭비선수로 뛰었는데 고등사범에서도 럭비는 계속했지』
 
 
  「나 먼저 간다, 얘」
 
 
  훗날 그의 詩가 누구로부터의 영향 받은 것이 없는 독자적이 된 것도, 끊임없이 글을 써온 것도 어머니의 「살은 죽으면 썩는다」는 말에 근원을 두고 있는 것 같다. 말하자면 이런 어머니로부터 받은 부지런함에의 영향은 자신의 생애를 지탱해 준 힘이요 종교이며, 철학이고 삶 자체가 됐던 것이다.
 
  그의 어머니 陳鐘 여사(1882~ 1962)의 10주기를 기념하기 위해 낸 스물한 번째 시집 「어머니」 속에는 어머니에 대한 절절한 애정이 가득 담겨 있다. 그의 어머니 임종한 날을 노래한 「1962년 음력 6월3일」이라는 詩 가운데 다음 구절은 차라리 임종의 흐뭇함과 아름다움을 느끼게 할 정도다.
 
  <나 먼저 간다/얘,/잠깐이다/구순히 지내다 오너라/옳지/너 거 있구나/고맙다//당신 깊은 잠 깨실까/참는 이 마음/아, 먼 흐느낌이었습니다>
 
  편운은 난실리에 있는 어머니의 무덤 옆에다 墓幕(묘막)을 짓고 「片雲齋」라는 이름을 붙여 주말이면 내려가 머물면서 詩를 쓰고 그림을 그렸다. 어머니의 묘 옆에는 교과서에 실린 詩 「해마다 봄이 되면」을 片雲 자신의 글씨로 새긴 시비가 세워져 있다.
 
  片雲齋를 세우기 위해 그는 열심히 저축을 하고, 저축한 돈으로 기둥을 세우고, 다음 또 돈이 모이면 지붕을 올리는 등 몇 년에 걸쳐 집을 완성했다고 한다. 거기에서 글을 쓰고 그림을 그리며 만년을 보내리라는 꿈이 이뤄지고, 그 옆에 편운문학관까지 서게 된 것이다. 편운문학관은 1990년 당시 李御寧 문화부 장관이 1억원을 지원해 짓게 된 것이다.
 
  片雲은 도쿄고등사범 3학년 때인 1945년 6월 일시 귀국이라는 형식으로 서울로 돌아오는데 이것이 학창생활의 마지막이 되었다. 도쿄가 매일처럼 공습을 받게 되고 수업은 노상 공포에 휩싸여 있었기 때문에 「이러다가 폭격에 맞아 죽지나 않을까 싶어 어머니를 한 번 뵙고, 내 운명을 맡겨야지」 하며 돌아왔던 것이었다. 다음달 7월에 모교인 경성사범에 눌러앉게 되고, 한 달 후 광복을 맞는다.
 
  취직이 되고 나자 당시 경성의전(지금의 서울대 의대) 졸업반에 있던 22세의 金埈과 맞선을 보게 되고 광복 다음달인 9월에 그들은 결혼식을 올린다.
 
 
  물리학 선생이 詩를 쓰다
 
 
  부지런함이 몸에 밴 그는 계속 공부를 하고 싶어 견딜 수 없었지만 광복된 조국은 연구실도 실험실도 없었고 그를 이끌어 줄 만한 사람도 없어 한숨만 쉬었다. 게다가 살벌하게 돌아가는 사회 분위기와 이미 가정이라는 울타리에 갇혀버린 자신의 처지에 대해 그는 심한 좌절감을 맛보고 있었다.
 
  『광복 직후엔 나라 전체가 좌우익으로 나누어져 싸움질이고, 학교에선 매일처럼 국대안(國立大學案) 찬·반 데모가 대치되고, 신탁통치 반대다 찬성이다 하며 삿대질의 수라장이 되어 있었어. 좌익을 소리 높여 외치는 무리들이나, 우익을 떠드는 무리나 나에게는 모두 우습게 보이더군. 그들에게 속하지 않은 우리와 같은 무리는 기회주의자니 희색분자니 하며 매도당하고 말야. 절망적인 사회였어.
 
  이런 속에서 쓸쓸한 나머지 나는 나 자신을 찾기 위해 많은 애를 쓰고 있었어. 물리 선생으로 뉴턴이나 갈릴레오, 마담 퀴리를 가르칠 뿐, 내 인생의 흔적을 남겨야 하지 않겠느냐는 생각이 든 거야. 詩를 쓰기 시작했지. 「소라」라는 제목의 詩인데, 썼다기보다 詩가 절로 나온 것이야. 인천 월미도를 배회하던 중 바닷가에 있는 소라를 보고 꼭 내 자화상 같다는 생각이 들어 적은 것이지.
 
  <바다엔/소라/저만이 외롭답니다//허무한 희망에/몹시도 쓸쓸해지면/소라는 슬며시 물 속이 그립답니다./해와 달이 지나갈수록/소라의 꿈도/바닷물에 굳어간답니다//큰 바다 기슭엔/온종일/소라/저만이 외롭답니다>
 
  내가 처음으로 쓴 이 詩는 좌절감으로 방황하던 나를 구해준 셈인데, 그 후부터 詩를 쓰며 서서히 정신의 에너지를 충전시킬 수 있었어』
 
  첫 시집 「버리고 싶은 遺産」이 나온 것은 1949년 7월이었다.
 
  그가 경성사범에 있을 때 모더니즘 시론으로, 詩人으로 위치를 굳히고 있던 金起林이 영어선생으로 왔다. 그는 「물리를 가르치는 趙炳華 선생이 詩를 쓴다」는 이야기를 들었다면서, 써둔 詩를 보여달라고 했다. 부끄러웠지만 얼결에 책상 서랍 속에 둔 몇 편의 詩를 보여 주었다. 金起林은 이런 詩가 더 있는가 하고 물었고, 있다면서 더 보여 주었더니 다 읽고 난 그는 『책으로 냅시다』 했다. 그날 저녁 「珊瑚莊」이란 출판사를 경영하고 있는 시인 張萬榮을 만나게 되고 출판이 결정되었던 것이다.
 
  시집이 나오자마자 그는 자연스럽게 金起林을 둘러싸고 있던 문인들과 어울리게 되었다. 金光均 金璟麟 梁秉植 朴寅煥, 소설가 李鳳九 등 대부분 「모더니스트」 詩人이었다. 이들은 그의 문단 생활 초기 울타리가 되었다.
 
  그러나 패거리를 지어 활동하거나 이데올로기로 뭉쳐 큰소리치는 것을 싫어하는 片雲은 이들 모더니스트들과 어울리다가 점차 그들과 소원해진다. 詩도 독자적인 것을 썼다. 그는 훗날 「詩의 뿌리」란 글에서 이렇게 적었다.
 
  『이분들은 詩의 골격이나 언어의 멋이나 시대조류에 지나친 경향이 있었고, 나는 그것이 아니라 「인생을 어떻게 살 것인가」 하는 詩의 내용에 정신이 있기 때문에 이 詩 그룹들로부터 이탈하게 되었다. 나는 詩의 형식보다는 내용에 충실했었다. 나는 詩의 조류를 전연 무시해 버렸다』
 
  詩의 내용에 충실하고 자신의 인생, 자신의 감동이나 체험을 중시한 그는 자신의 詩를 「조-ism」의 詩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그는 詩를 생각하거나 쓸 때 아홉 가지의 「멀리하기」를 늘 염두에 두고 있다고 밝힌 적이 있다. 이 아홉 가지는 ① 의미(뜻) 없는 詩 멀리하기 ② 감동과 감격이 없는 詩 멀리하기 ③ 읽어서 즐거움이 없는 詩 멀리하기 ④ 무언가 새로움을 주지 않는 詩 멀리하기 ⑤ 詩로서의 리듬이 없는 詩 멀리하기 ⑥ 무리하게 엮은 詩 멀리하기 ⑦ 생존에 관계없는 詩 멀리하기 ⑧ 내 마음을 풀어 주지 않는 詩 멀리하기 ⑨詩의 아름다움을 지니지 못하는 詩 멀리하기 등이다.
 
  이들 「멀리하기」의 반대편에 그의 50권에 달하는 방대한 詩를 관통하는 詩 정신이 담겨 있는 것이다.
 
 
  「詩의 그림자」란 호를 가졌던 부인 金埈
 
 
  ―선생님의 詩를 보면 여러 다양한 사실들이 나타나 있는데 정작 선생님의 가족이나 아내를 이야기한 것이 없더군요.
 
  『죽고 나서 쓴 게 이거야. 여기에다 안사람 이야기를 처음으로 썼어. (47권째 시집 「먼 약속」을 꺼내 펼쳐서 들고) 이것 봐 「먼저 간 아내 詩影 金埈에게」라고 했잖아. 시영이란 건 안사람 아호야. …진명여고 다닐 때 담임선생이 그에게 호를 지어주고 도장을 파줬다고 하더군. 결혼할 때 난 경성사범 물리선생이었는데 어떻게 「詩의 그림자」란 호를 가진 여자를 만나게 됐는지… 그 사람도 詩人의 그림자 밑에서 평생 나로부터 미움만 받고 살았던 건데…. (그는 이 말을 하다 입을 다물고 맨손으로 눈물을 훔쳤다) 3년 전인 1998년 3월에 세상을 떴는데 많이 미안하더군. 다급하게 살다 보니까 가정에 많이 소홀했지 뭐.
 
  우린 오래 전부터 사이가 좋지 않았어. 그 사람이 산부인과 의사 아냐? 내가 아내에게 얹혀 사는 것 같아 괜히 반항하고 말이야. 발단은 자존심 때문이었어.
 
  나는 경성사범에 있다가 인천의 제물포고교로 옮겨 물리와 수학을 가르쳤는데 매달의 봉급은 봉투째 집에 갖다주곤 했지. 그런데 어느 날 金起林 선생이 金秉旭이라는 詩人을 보내 잘 부탁한다는 거야. 그를 접대하려면 돈이 필요해 집으로 뛰어가 집사람에게 얼마의 돈을 달라고 했는데, 아내가 요구액의 절반만 내놓는 거야. 기분이 몹시 상해 돈을 돌려 주고 학교 수위에게 돈을 빌려 저녁 값을 치르고 나머지는 모두 그의 용돈으로 주었어. 김병욱은 대구 출신 멋쟁이 詩人이었는데 6·25 사변 때 월북했어.
 
  그 일이 있고 나선 내 봉급을 3대 7로 나눠, 내가 3을 쓰고 7을 생활비로 내놓게 됐는데, 나는 월급 받으면 항상 그렇게 했어』
 
 
  「의사 마누라」 콤플렉스
 
 
  그는 1949년 서울고교로 옮겨온다. 집과 부인의 병원은 인천에 있었다. 그는 통근을 했는데 수업이 끝나면 곧장 인천으로 가지 않고 명동의 「휘가로」 다방에 가서 이봉구, 장만영, 박인환 등과 어울려 문학 이야기로 꽃을 피웠다. 밤늦도록 선술집을 돌고, 그는 서울고교로 돌아와 도서실에서 「고독하게」 잠이 들곤 했다. 그 서울고교는 지금 경희궁으로 복원돼 있다.
 
  6·25 전쟁이 있기 두 달 전 그는 제2시집 「하루 만의 위안」을 1000부 냈으나 전쟁이 터지고 나라 전체가 난리를 겪는 통에 책이 어떻게 되었는지 모른다. 월북한 양 모라는 詩人이 신문에 시집 신간 평을 썼던 것을 읽은 기억뿐 시집이 이 세상에 존재하는지조차 모르겠다고, 그는 평생 애석해 한다.
 
  6·25 전쟁 때는 피난을 가지 못해 고생이 막심했다가 「1·4 후퇴」 때야 부산으로 피난을 간 그는 의사인 아내가 돈을 내 송도에 새 집을 짓는다. 겉으론 안정된 생활 같았지만 그의 내면은 만신창이였고 심지어 자살까지 생각하고 있었다. 불안한 戰時(전시) 상황에서 돈 많은 사람들은 미국이다 일본이다 하다못해 제주도로 도망을 치는 어수선한 상황이 벌어지고 있던 무렵이었다.
 
  그런 어느 날 문인들 몇몇을 불러 집들이 겸 잔치를 벌였다. 毛允淑, 李軒九, 金光洲, 金煥基 등이었는데 잘 먹고 간 그들은 소문을 흘리고 다녔다. 「조병화가 의사 마누라 덕에 호화판 피난살이를 하고 있더라」는 것이었다. 이 일이 있은 후 그는 아무리 친한 사람이라도 집으로는 부르지 않았다.
 
  「의사 마누라」를 뒀다는 것이 그만 그의 콤플렉스가 된 것이다.
 
  片雲은 평생 굵직굵직한 상을 많이 받았음에도 수상식에는 부인 동반 없이 늘 혼자 앉아 영광을 누렸다. 詩에서도 그렇지만 어떤 자리에서도 가족에 대한 언급이 없었다. 방송국 같은 곳에 나와 이야기를 해달라는 요청이 많았는데, 그때마다 그는 가족 이야기를 묻지 않는다는 다짐을 받고서야 나가곤 했다고 한다.
 
  그러나 부인이 3년 가까이 암 투병을 하는 과정에서 그는 거의 병원을 통근하다시피 했다. 간병을 하면서도 「오, 죽음을 다스리는 여신이여/지금 어디메쯤 가까이 다가와 계시는지 알 수 없으나/무섭지 않게 겁나지 않게 낯설지 않게/부드럽게 오셔서는/곧장 지체없이 데려가 주옵소서…」 하는 詩를 썼고, 세상을 뜬 아내를 묻고 나서는 「목숨을 거두면서 누구도 모르게/슬쩍 내비친 그 눈물을/어찌 잊을 수가 있으리//그 눈물을 어찌 무엇이라 말할 수 있으리/그 무엇과 비할 수 있으리…」 하며 애통해 했던 것이다.
 
 
  술과 친구들
 
 
  서울고교 학생들로부터 「술통」이란 별명을 얻고 있던 趙炳華 시인은 서울 수복 후엔 주로 박인환 金洙暎 등과 술을 마셨다. 특히 김수영은 편운이 맥주집에 앉아 있으면 『야! 여편네 덕에 부르주아지로 잘 사는 놈아 너는 맥주 마시니? 프롤레타리아인 나는 소주나 겨우 몇 잔하고 왔다』며 앞자리에 털썩 주저앉는 것이었다.
 
  늘 불만에 차 막말을 하는 김수영은 일부러 편운의 아킬레스腱을 건드리기 좋아해 이것이 싸움의 발단이 되곤 했다. 아내 덕에 사는 것이 아닌데도 일부러 놀려대니 열불이 안 날 수 있느냐는 것이었다. 박인환이 싸움을 뜯어말리기도 했지만 박인환 자신도 주정이 심해 분위기가 시들해지고, 이튿날엔 둘이 화해를 하곤 했다. 그러면서도 그들 셋은 명동 일대에서 매일같이 술을 마셨다.
 
  『둘 다 일찌감치 저 세상으로 갔지만 말야. 니체 식으로 보면 박인환은 아폴로的이고, 김수영은 디오니소스的이라 할 만했지. 김수영은 어두웠고 박인환은 밝은 편이어서 무척 대조적이었어. 그 때문에 우린 잘 어울렸고, 그게 서로에게 우정은 물론이고 많은 詩的 자극을 줬지 않나 싶어. 글쓰는 사람끼리는 선의의 라이벌 의식이랄까 이런 게 있어야 서로 발전이 있는 것 같아』
 
  1950년대 명동에서 시작한 편운과 친구들의 술집 편력은 1960년대 들어서는 李漢稷 趙芝熏 全鳳健 金光林 全光鏞 등과 함께 광화문 국제극장 뒷골목을 거쳐 무교동으로, 1970년대 초엔 다시 종로와 관철동의 「낭만」으로 옮겨간다.
 
  그러나 1970년대 중반 관철동의 술집 「낭만」에서 가끔 만나본 조병화 시인 주변은 늘 쓸쓸했던 것 같다. 옆자리가 비어 있기 일쑤였고, 맥주병이 몇 개 놓여 있었는데 안면 있는 문화인이 간혹 앞에 앉아 있거나 할 정도였다. 술이 좀 취하면 얼굴이 조금 붉어지긴 했지만 빙글빙글 웃는 것으로 그가 술이 취했구나 싶을 뿐이었다.
 
  22년여 동안 경희대 교수로 있었던 그는 대부분의 낮 시간을 강의와 연구실에서 보내고 퇴근하면서 무료한 저녁시간을 「낭만」에서 보냈던 것이다.
 
 
  베스트셀러 시집 「사랑이 가기 전에」 이야기
 
 
  趙炳華 시인의 시집들 가운데 제5시집 「사랑이 가기 전에」는 공전의 베스트셀러로 전쟁에 시달리고 피폐했던 젊은 한국인들의 가슴을 사랑의 노래로 달래 주던 책이었다. 正音社에서 출간한 이 시집은 4년에 걸쳐 중판을 거듭, 시집이 베스트셀러가 되는 새로운 사건을 만들었다.
 
  이 시집에는 가난한 피아니스트와의 러브 스토리가 있다고 한다. 부산 피난 시절 경성사범 제자가 찾아와 서울대 강사로 있는 노○○라는 여성이 음악평론을 쓴 것이 있는데 편운을 통해 신문에 소개시켜 달라고 부탁하는 것이었다.
 
  어려운 일이 아니라면서 제자와 함께 그 여성이 머물고 있는 곳을 찾았다. 그녀는 결핵을 앓고 있었다. 연주 評 원고를 받아 친구인 金奎東이 문화부장으로 있는 연합신문에 전했는데 게재가 되었다. 이를 계기로 둘은 급속하게 친하게 된다.
 
  결핵 약이 몹시 귀하던 시절에 약을 구해 주고, 음식점에 달려가 영양식도 사서 넣어 주는 등 열심히 간호하다 둘은 사랑에 빠진 것이다. 외로웠던 두 사람은 동거를 하다시피 했다. 부산에서 시작한 이들의 사랑은 서울 수복 후까지 연결되고 그때 썼던 詩들을 모아, 혜화동에 이웃하며 살던 정음사의 崔瑛海 사장에게 전해 책이 된 것이다.
 
  시집이 나왔을 때 두 사람의 로맨스를 알고 있는 崔사장이 노○○에게 소포로 책을 부치겠다면서, 片雲에겐 『어차피 헤어질 사이 아냐? 이 책으로 끝내야 해! 안 그러면 가만 두지 않을 거야』 하며 협박을 했다. 책을 받은 그녀에게서 전화가 왔는데 『나도 자존심 있는 여자로 더 이상 연락도 만나지도 말자』는 것이었다.
 
  그 여성은 얼마 후 바이올리니스트와 결혼도 하고 모여대 교수가 되어 잘 지내다가 근년에 정년퇴직했다고 한다. 편운은 『그 사람 그후 잘 살고 있어서 나도 마음이 편안했다』고 밝히고 있다.
 
  이 시집의 대표적인 詩 「이렇게 될 줄 알면서도」의 전반부를 옮겨본다.
 
  <이렇게 될 줄을 알면서도/당신이 무작정 좋았습니다//서러운 까닭이 아니올시다/외로운 까닭이 아니올시다//사나운 거리에서 모조리 부스러진/나의 작은 감정들이/소중한 당신의 가슴에 안겨들은 것입니다//벗이 있어야 했습니다/밤은 약한 사람들의 최대의 행복/제한된 행복을 위하여 밤을 기다려야 했습니다//눈치를 보면서/눈치를 보면서 걸어야 하는 거리/연애도 없이 비극만 깔린 이 아스팔트//어느 이파리 아스라진 가로수에 기대어/별들 아래/당신의 검은 머리카락이 있어야 했습니다//…>
 
  趙시인은 시집을 내고 돈 벌 것이라고는 생각도 못하고, 많이 팔리는 것 자체에 만족하고 있었다. 책이 나오고 4년 후인 1959년 여름방학 중이었다. 어느 날 崔瑛海 사장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신문에 봤더니 자네 독일 프랑크푸르트에서 열리는 국제 PEN대회에 朱耀燮씨랑 참석하더군. 부인에게 도움 안 받는 자네라 여비는 어떻게 마련하나? 내가 그 동안 시집 「사랑이 가기 전에」 인세 모아둔 것 있는데 액수가 꽤 될 거야. 그거 다 줄게. 갖고 가서 유럽여행 잘 하고 돌아와』하는 것이었다.
 
  그가 전해 준 원고료로 편운은 난생 처음 유럽을 순방하고 돌아왔는데 이를 계기로 그는 PEN 대회 때마다 한국대표로 참석하는 등 해외여행을 자주 하게 된다. 그때 유럽을 돌며 받은 인상을 詩로 쓰고 다양한 풍물 스케치를 해 신문에 연재까지 하고 책으로 묶는 여러 가지 행운을 갖는다.
 
  그는 당시 유럽여행이라는 신선한 문을 글과 스케치로 열어 보인 최초의 문인이었던 것이다. 38세 때였다.
 
 
  41년 간 교단 생활
 
 
  도쿄고등사범에서 물리학을 전공한 그는 1945년 경성사범 교사를 시작으로 1986년 1학기로 정년 퇴임까지 41년 동안 교단에 서왔다. 제물포고교, 서울고교까지는 물리나 수학을 가르쳤으며 특히 서울고교 재직 땐 물리선생이면서도 작문을 맡아 가르쳤고, 문예반을 이끌었다. 1959년부터 경희대로 옮긴 그는 경희대에서 22년 동안 문리과대학장, 교육대학원 원장을 역임했고, 인하대에선 부총장과 대학원장을 하는 등 화려한 5년을 보냈다. 대학에선 자신의 전공인 물리학은 제쳐두고 현대詩論 등 문학 관계 강의만 했다.
 
  그의 경력 가운데 특이한 것 중 하나는 광복 이듬해부터 1970년까지 24년 동안 대한럭비축구협회 이사를 역임했다는 것이다. 학생 때 럭비선수였고 서울고등학교 재직 땐 럭비 팀을 창설하고 감독 코치를 해 전국체전에서 우승까지 한 경력이 작용했던 것이다. 詩人과 럭비. 전혀 어울리지 않는 장르를 어울리게 한 이가 그다.
 
  그는 서울고교에서만 10년을 근무했는데, 인기만점의 교사였다. 詩를 쓰고 스포츠도 좋아하고, 물리선생이 詩와 철학 이야기를 섞어가며 지루할 수 있는 수업시간을 재미있게 보낼 때, 그리고 항상 웃고 소탈하게 학생들을 대하고, 특히 훈육주임 앞에서 곤욕을 치르는 학생의 편을 드는 선생일 때, 당연히 그 사람은 오래 기억에 남는 교사가 되게 마련이다. 당시의 서울고교 출신 거의 전부가 趙炳華 선생을 자랑스럽게 여긴 것은 이런 그의 친근감에 근거하고 있는 것 같다.
 
  대학교수 사회에서도 그는 부지런하고 시간 잘 지키고, 항상 일찌감치 출근해 틈만 나면 책상 앞에 앉아 책을 읽거나 글쓰는 사람으로 알려져 있다. 「그는 가끔 손수 라면을 끓여 들기도 했다. 하여간 쉬는 시간은 거의 볼 수 없이 작품생활에만 열중하는 것이었다」고 趙東奎 경희대 교수는 자신의 회고담에서 적었다.
 
  趙炳華 시인의 회갑 기념 문집에는 선배 친구 동료 제자 등 많은 사람이 편운과의 교우관계를 써놓았는데, 그 중 소설가며 서울대 교수였던 全光鏞이 쓴 글은 그의 숨겨진 일면을 엿볼 수 있게 한다.
 
  〈1970년 여름, 서울에서 제37차 국제 PEN대회가 열렸을 때 나는 준비위원회의 사무국장으로, 그는 재정위원장으로, 소임을 맡았을 때 그의 정확한 판단과 치밀한 계획과 과감한 실천력은 대회를 치르는 데 큰 구실을 하였다. 아마도 그때 그와 KAL 趙사장과의 인간적인 연분의 덕이 아니었다면, 그 무렵 막 신축된 KAL빌딩의 그 산뜻하고 시원하게 넓은 사무실에서 외국문인들을 접대하며, 나라의 체모를 살릴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하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낭만주의자인 그는 조직을 이끌어 가는 솜씨 때문에 조직사회의 리더로 발탁돼 활약했을 뿐 감투 지향적 인물은 아니다. 나서거나 운동을 해서 조직의 長을 맡은 것이 아니라 후진들이나 동료에 의해 떠밀려서 된 게 대부분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그는 일단 자리를 맡으면 뭔가를 이룩해 놓고 물러나는, 책임질 줄 아는 사람이었다. 한국 시인협회 회장을 맡을 때도, 한국 문인협회 이사장도 어쩔 수 없이 승격된 경우였음에도 협회의 재정이나 위치를 격상시켜 놓았었다. 예술원을 맡았을 때도 한 달 60만원씩 주던 「교통비」를 100만원으로 올리게 해 예술원의 체면을 세웠고, 회원들로부터는 뜨거운 박수를 받은 바 있다.
 
  모든 부분에서 뛰어난 발상과 합리적인 처신으로 한국 사회의 중심 축에서 벗어난 적이 없었던 그는, 사리가 분명해 남의 어려움을 비켜가지 않고 도와 주고 가난한 詩人들에게 자존심을 살려 주는 일에 늘 앞장을 섰던 사람이다.
 
  그러나 片雲은 정작 자신의 詩에서만은 고독과 외로움, 혹은 독자적인 인생 詩를 강조하면서 詩 같은 삶을 산다는 각오로 사물과 사건을 꿰뚫어 왔다. 그가 첫 시집을 낸 후 52년 동안 3000편 가까운 詩를 써왔던 이면에는 詩 자체를 삶의 가장 의미 있는 흔적이라고 생각하고, 끊임없이 삶의 흔적을 남겨온 결과에 다름 아니라는 것이다.
 
 
  조병화 식으로 쓰는 조병화 詩
 
 
  김기림, 김광균 등 초기 한국 모더니스트들과 어울렸으면서도, 박인환, 김수영 등과 비슷한 나이로 경쟁하는 입장에서 작품 활동을 했으면서도 그는 그들과 내면적으로는 아주 다른 詩를 썼다. 趙炳華 시인다운 詩만을 써왔던 것인데 그것은 그의 방대한 詩 작업을 일관하고 있는 개성이기도 하다. 그의 詩에는 그가 보고 느끼거나 생각한 것 이외에는 거의 쓰여져 있지 않다.
 
  그는 누구의 영향을 받았던 적이 없었고, 詩的 스승도 선배도 따로 없었다. 추천을 받아 시단에 데뷔하지도 않았는데, 첫 시집이 그를 詩人으로 만들어 준 것이다. 그가 영향을 받았다면 대학 다닐 때 독서 차원에서 읽은 헤르만 헤세의 철학적 소설들에서 인생의 의미를 많이 터득했다고 할 정도였다.
 
  많은 문학지망생들이 고전적 詩나 소설을 읽고 감명과 모방의 단계를 거치는 것과는 대조적인 경우라 할 만하다. 자연과학의 길을 걷다가 詩의 길로 급회전했기 때문으로도 볼 수 있겠다.
 
  최근 그는 「詩, 그 運命」이라는 글에서 팔십을 넘어 인생을 마감하려니 「詩는 결국 나의 운명 바로 그것이었다」며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詩는 실로 현실적인 생활은 되지 못한 것이었지만, 그만큼 불안한 것이지만, 그만큼 몽매한 것이지만, 나에겐 큰 위안이 되며, 정신의 빛이 되며, 스스로를 보는 철학의 밝은 눈이 되며, 살아가는 기쁨이 되며, 의지가 되며, 믿음이 되며, 자기 자신 혼자 살아가는 항로의 흔들리지 않는 그 고독한 등대가 되었다.
 
  그 詩라는 고독한 등대 때문에 나는 흔들리지 않는 내 인생을 내 철학대로, 내 꿈대로 그렇게 맑게 밝게 훤하게 후회 없이 나대로 곧게 살아온 것이다. 존재의 고독을, 생존의 위기를 견디어 내면서 오히려 그 존재의 고독을 더 높이, 더 깊이, 더 넓게 키우며 그 키운 고독의 힘으로 생존의 위기를 이겨 나온 것이다.
 
  나의 작품들은 그러한 생존의 투쟁 속에서 고독을 키우며 고독과 더불어 살아 온 삶의 따뜻한 유적들이다. 그렇게 살아 온 흔적으로서, 내가 이러한 詩가 없었더라면 이 긴 인생을 어떻게 살았을까, 하고 때때로 나를 뒤돌아볼 때가 많다〉
 
  趙炳華 시인의 詩에 대한 인식은 단순할 정도다. 詩를 많이 쓰고 적게 쓰는 것이 문제가 아니고, 오직 자신의 詩에 얼마만큼 많은 진실과 감동을 담아 내느냐가 중요하다는 것이다. 따라서 그는 절대로 남의 詩를 잘못 썼다고 비평하지 않는다. 잘못 썼으면 언급 안 하면 되지 않느냐는 것이다.
 
 
  시인은 외롭게 하는 일
 
 
  이런 그의 생각과 관련해 에피소드가 하나 있다. 1965년 11월에 나온 그의 제14시집 「내일 어느 자리에서」를 준비할 무렵 이야기였다. 1995년에 낸 「세월은 자란다」란 책에서 그는 이렇게 써놓고 있다.
 
  〈1960년대 시단에서는 소위 難解詩가 무슨 유행병처럼 극성을 부리고 있었습니다. 이 판국에서 어느 잘난 척하는 詩人이 내 詩를 쉽게 쓰는 詩라고, 나의 작품을 흠집 내는 글을 썼던 것이었습니다. 기분이 상해서 「내일 어느 자리에서」 다시 보자, 하는 생각이 들어 시집 제목을 그렇게 달았던 것입니다〉
 
  그 「잘난 척하는 詩人」이 누구였는지는 아는 사람만 아는데, 趙시인은 그와 가급적이면 대면을 삼갔다. 이 사실을 아는 사람들이 몇 년 후 어떤 세미나 자리에서 화해 자리를 따로 마련했으나 두 사람의 서먹서먹함은 쉽게 지워지지 않았다. 그 관계는 더 멀어져 있을 것이다.
 
  요즈음 젊은이들 詩 많이 읽느냐고 하니까 그는 대뜸 요즈음의 젊은 사람들 詩가 散文化(산문화)되어 가고 있는 것 같다며 못마땅해 했다. 산문시는 내용을 복잡하게 한 에세이와 다를 게 뭐냐면서, 詩는 詩 고유의 운율이나 형태를 벗어나서는 안 된다고 주장하는 것이었다.
 
  詩人을 외롭게 하는 것은 발표한 詩를 두고 형편없는 것이라고 매도당하는 것이라는 것. 詩를 비평함에서도 좋은 점을 내세우는 것이 詩人을 기쁘게 해주고 새로운 세계나 새로운 언어를 탐색하는 데 도움을 줄 것이라고 했다. 詩人과 비평가들이 패거리를 지어 시류를 타고, 자신들의 작업이 시대적 정당성이 있는 것처럼 주장하는 것은 넌센스이며 이런 넌센스에서 벗어나야 한국 詩가 골고루 발전할 것이라고 그는 주장했다.
 
  그는 1990년부터 편운문학상을 제정해, 해마다 그의 생일인 5월2일에 시상하고 있다. 그 해 가장 우수한 작품을 쓴 詩人과 평론가에게 각 300만원씩, 신인상 100만원 등 해마다 700만원을 상금으로 주고 있다. 은행에 원금이 적립돼 있고 그 이자로 상금을 지급하기 때문에 중단될 염려는 없지만 금리가 너무 낮아진 요즈음은 비용까지 포함하면 돈을 더 보태야 한다고 했다.
 
  수상자 선정은 상의 권위를 잇기 위해 전회 수상자들이 모여 결정한다. 片雲이 하는 일은 시상식에 참여하는 것이 고작이다.
 
 
  꿈을 꾸고 있는 사람
 
 
  나는 사흘에 걸쳐 그의 작업실을 찾았고, 하루는 경기도 안성 그의 고향에 있는 片雲文學館도 가 보았다. 좀더 많은 이야기를 듣기 위해서, 또 그의 과거가 모두 진열돼 있는 현장을 둘러보기 위해서였다. 내가 간직하지 못한 그의 저서 몇 권도 서명을 받아 얻었다.
 
  그와의 만남과 고향 방문에서 계속 눈에 띄는 것이 있었는데 그것은 「꿈」이라는 글자였다. 「꿈」은 자신의 책을 증정할 때도 썼고, 「꿈의 귀향」이란 詩碑 아래에도 크게 「꿈」이 각인이 돼 있다. 편운문학관 옥상에 태극기와 나란히 펄럭이는 깃발도 「꿈」이었다.
 
  이 상식적이고 촌스럽기까지 한 「꿈」이라는 말을 그는 언제부터, 왜 쓰게 된 것일까? 그의 「꿈」은 도대체 무엇을 뜻하는 것일까?
 
  『꿈이란 말은 희망과 허무, 두 가지 뜻을 갖고 있잖아? 「꿈을 갖는다」 할 때는 희망이고 「한바탕 꿈이었다」 할 때는 허무를 뜻하니까. 내가 지금껏 詩를 살아온 것도 꿈이야. 나의 詩 , 나의 삶 자체가 「꿈」이란 말로 영속되었으면 싶기도 하고…』
 
  묻힐 곳을 미리 장치해 놓고 편안하게 「남기는 자료들」을 세상에 남기고 있는 원로詩人의 오늘의 꿈은 무엇일까? 그것은 영원한 고향인 그의 어머니 곁으로 「고요한 귀향」을 준비하는 것일 게다.
 
  당신 어머니의 심부름은 벌써 완수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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