詩로 쓰는 時論

  • : 이흥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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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왕에게 충신·현신賢臣·명신名臣,
 
  간신奸臣·영신臣·우신愚臣이 있듯이
 
  국가에도 해야 할 말을 하는
 
  현신·명신 같은 ‘비교우위적’인 언론과
 
  듣기 좋은 말만을 골라가며 나날이 더
 
  나발 불듯 부채질하는 언론이 있습니다.
 
  간특하고 속이 좁고 매욱하기까지 한
 
  간신 영신 우신 같은, 언론이 있습니다.
 
  충간忠諫이든 비판이든 옳은 말을 하는
 
  언론은 천고千古에 소중한 것이지만
 
  지지·동조同調든 찬양이든 선동이든지
 
  사실을 구부리고 비틀어서 아부하며
 
  듣기 좋은 말만 골라서 하는 언론은
 
  만고역적萬古逆賊처럼 백해무익합니다.
 
  말로써 말을 배반하고 말로써 민심을,
 
  천심·천리를 반역하기 때문입니다.
 
 
  의자왕義慈王 20(660)년 백제가
 
  망할 때의 충신 성충成忠과
 
  흥수興首의 이야기를 생각하면
 
  1천 300여 년이 지난 지금도 우리는
 
  분한 피눈물(憤淚·血淚)이
 
  절로 날 것만 같습니다. 유배중에,
 
  또는 옥에 갇혀 죽으면서까지 올린
 
  “적군(羅唐연합군)이 쳐들어오면
 
  육군은 탄현炭峴에서 막고
 
  수군은 백강白江에서 막으시라”는
 
  흥수나 성충의 일치된 예견과
 
  뛰어난 전략은, 간신·영신·우신들의
 
  분분한 우론愚論과 제왕의
 
  어두운 판단으로 무시되었습니다.
 
  백제는 망했습니다. 그리고
 
  천년이 넘도록 우리는 충신 성충과
 
  충신 흥수의 피눈물을 생각하며
 
  그들을 위해 흘릴 수 있는 우리 자신의
 
  피눈물의 가치를 생각합니다. (01.4.21)
 
 
 
 黃末軒씨의 씁쓸한 꿈
 
  1.
 
  옛날 황제헌원黃帝軒轅씨는 꿈에
 
  화서씨華胥氏의 나라를 여행하며
 
  지극한 황홀을 맛보았다. 그곳은
 
  모든 것이 자연스러워서
 
  최고통치자·권력자들(帥長)도 없고
 
  사람들은 자연스럽고 평등하게 살며
 
  애증愛憎이나 배반이나 이해利害나
 
  차별도 없고 생사가 같고(生死一如)
 
  사물과 내가 일치(物我一致)해서
 
  물에 들어가도 빠지지 않고
 
  불에 들어가도 타지 않고
 
  구름 안개도 시야視野를 가리지 않고
 
  뇌성벽력도 귀를 어지럽히지 않으며
 
  예쁜 것이나 못생긴 것(美惡)이나
 
  그 마음을 충동하지 않았으며
 
  산이고 골짜기(山谷)고 자유롭게
 
  걸어다닐 수 있는 세계였다.
 
  꿈을 깨 활연히 깨달은 바 있는 황제는
 
  300년 생애의 남은 28년 동안을
 
  그때 겪은 황홀한 마음의 자연스러운
 
  조용한(無爲無言) 정치를 해서
 
  나라가 크게 잘 다스려(天下大治)졌다.
 
 
  2.
 
  태고적 황제헌원씨의 자손을 자처하는
 
  황말헌黃末軒씨는 어느 날
 
  사람들의 머리가 모조리 거꾸로 달린
 
  희한한 나라에 간 꿈을 꾸었다. 사람
 
  사람마다 모두 가슴은 앞을 향했는데
 
  얼굴은 뒤를 향해 달려 있었다.
 
  유명하다는 김 아무개씨도 그랬고
 
  똑똑하다는 이 아무개씨도 그랬고
 
  영악하다는 권 아무개씨도 그랬고
 
  거리에서 만나는 장삼이사(張三李四),
 
  모든 사람의 머리가 거꾸로 모셔졌다.
 
  머리의 표면인 얼굴과 뒤통수뿐 아니라
 
  머리의 내용인 뇌수며 140억개의
 
  뇌신경세포까지도 모조리 거꾸로
 
  박혀 있는 것 같았다. 더 희한한 것은
 
  그들은 모두 그 기이한 현상을
 
  ‘화합’이며 ‘개혁’이며 ‘화해’며
 
  ‘신지식’이며
 
  ‘통일’을 향한 빛나는 성과라고 믿으며
 
  멀쩡하게 머리가 똑바로 달린
 
  황말헌씨를 보고는 일일이 ‘반反’자의
 
  접두사를 붙이며 일제히 조소嘲笑와
 
  매도罵倒를 퍼붓는 것이었다.
 
  ‘반화해’ ‘반개혁’ ‘반화합’ ‘반통일’
 
  ‘반신지식인’은 물러가라 물러가!…….
 
  꿈을 깬 황말헌씨는 태고적의 조상
 
  황제 때의 태평성세를 생각하며 공연히
 
  분하고 씁쓸하고 쓸쓸했다. (01.4.19)
 
 
 
 하늘이 무서운 公正
 
  ‘한국부동산신탁韓國不動産信託’의
 
  약칭이 하필이면 ‘한불신韓不信’이라는
 
  신문기사를 본 것이 엊그제인데, 요즘은
 
  또 공정·불공정·불공정·공정들이
 
  헷갈리는 기찬 뉴스를 연일 본다.
 
 
  (불신의 신용 剽竊표절·갈취喝取)
 
  (불공정의 공정 도용盜用·악용惡用)
 
  공정을 불공정이라고 하면
 
  하늘이 노할 것 같고 불공정을
 
  공정이라고 하면 땅이 요동할 것 같아
 
  “하늘이 무섭지 않느냐!”
 
  “땅이 두렵지 않느냐!”는 질타叱咤가
 
  곧 어디서 들리는 것도 같은데, 설사
 
  하늘이 노하고 땅이 요동치지 않더라도
 
  공정은 공정하게, 공정이라는 원리를
 
  지키는 것이 사람일 것 같은데
 
  불공정을 공정이라 우기며 행하는 것은
 
  사람의 짓이 아닐 것 같은데,
 
  사람이 사람 아닌 짓을 하면 결국
 
  사람이 사람도 아닌 볼장 다 본
 
  말세일 것도 같은데, 곧 마른 하늘에
 
  날벼락이라도 칠 것만 같은데,
 
  하늘의 때(天時)나 땅의 이치(地理)나
 
  사람의 화합(人和)이나가 다 그런데,
 
  하늘이 자꾸 무섭고
 
  땅이 자꾸 두려워지는데, 시비왈是非曰
 
  ‘외압 공정’ ‘시나리오 공정’이라니,
 
  ‘신용불신 공정불공정공정’. (01.4.19)
 
 
 
 言論自由, 1000의 얼굴
 
  신문을 맘대로 골라보기가 불편한
 
  언론자유言論自由가 있다면,
 
  신문광고를 뜻대로 골라 내기가 껄끄런
 
  시장경제市場經濟가 있다면, 가다가는
 
  싫은 신문도 억지로 받아 보아야 하는
 
  언론자유言論自由가 있다면, 내키지
 
  않는 신문에도 광고를 안 낼 수 없는
 
  시장경제市場經濟가 있다면.
 
 
  (거주지 선택의 자유도 여행의 자유도
 
  없는 민주주의도 세상에는 있지만)
 
 
  언론자유에도 시장경제에도 100의 얼굴
 
  1000의 얼굴이 있다면. (01.4.19)
 
 
 
 주적主敵주적主敵
 
  주적主敵이 주적더러
 
  나는 주적이 아니야 라고 말하며 너도
 
  주적이라고 말하지 말라고 말한다.
 
  주적주적하며 말한다.
 
 
  주적主敵이 주적더러
 
  나는 너를 주적이라고 찍어놓더라도
 
  너는 나를 주적이라고 찍지도 말고
 
  아예 입에 올리지도 말라고 찍는다.
 
  주적주적 찍는다.
 
 
  주적도 없고 주적 아님도 없는 것처럼
 
  주적主敵주적主敵주적主敵 말한다.
 
  주적主敵주적主敵 찍는다.
 
  비단보에 싸인 비수匕首처럼 찌르며
 
  시퍼런 도끼날처럼 찍는다. (01.3.6)
 
 
  TV의 쇠고기 弘報
 
 
  광우병/구제역으로 모두 야단들인데
 
  어느 TV가 쇠고기를 먹어도 된다는
 
  친절한 특집을 하는 것을 보면서
 
  TV의 뉴스나 해설이나 토론이 노상
 
  믿어야 할지 말아야 할지 하도 몰라서
 
  저 TV의 저 특집도 역시 믿어야 할지
 
  말아야 할지, 먹어얄찌 말아얄찌, 무럭
 
  무럭 의심이 솟았습니다. 뭉게구름처럼
 
  무럭무럭 의심이 솟았습니다. (01. 4.1)
 
 
 
 엄마, 어느 날의 젊은 엄마야
 
  --이진명의 詩 ‘저, 육박’*의 패러디
 
 
  길거리에서였다.
 
  아이를 업은 한 젊은 엄마가 걸어갔다.
 
  웬 소년의 남루한 소매가 한 행인의
 
  소매를 쌩! 치며 화닥딱! 튀었다.
 
  그 여자, 젊은 엄마의 오른손이
 
  우악스레 소년의 어깨를 콱 잡아쥐었다.
 
  그 여자의 왼손은 뒤로 돌아 들쳐업은
 
  아이를 받치고 있었다.
 
 
  “씨이팔!” 열 살 안팎의 너저분한 소년의
 
  때묻은 입에서 쌍소리가 튀어나왔다.
 
  “씨이팔, 난 고아란 말이야!”
 
 
  “오와, 너 고아니!
 
  오와, 너 참 머싯다!” 그리고
 
  그 여자는 한 박자를 매섭게 쉬었다.
 
  아이의 목덜미를 쥐어박듯 죄었다.
 
  “고아는 다 그렇니!”
 
 
  너무 씽씽한 ‘저 육박’
 
  목덜미를 죄는 저 육박.
 
  씽씽한 ‘육박’이 자꾸
 
  젊은 엄마를 떠나 시인 이진명을 떠나
 
  단독비행처럼 날며 메아리쳤다.
 
  자가증식을 했다. 육박을 했다.
 
 
  “고아는 다 그렇니!”
 
  “정치가는 다 그렇니!” “대변인은 다!”
 
  “권력은 다!” “TV는 다!” “신문은!”
 
  “다 그렇니, 다 그렇니!”
 
  “우와아 너희 참 멋있다!
 
 
  아, 엄마 엄마 젊은 엄마야. (01.2.24)
 
 
  *이진명의 시 ‘저, 육박’은
 
  ‘시와 시학’ 2000년 봄호에.
 
 
 
 우리를 울린 6명의 消防官
 
  2001년 3월 6일 아침 TV 뉴스에서
 
  서울 홍제동 화재 현장의 어제 순직한
 
  6명의 소방관의 영결식을 보며
 
  밥을 먹던 주부가 엉엉 울었습니다.
 
  같이 조반을 들다가
 
  우는 아내를 나무라던 남편도
 
  밥을 먹으며 말리며, 나무라며
 
  울었습니다.
 
 
  그날 아침 TV 뉴스를 보면서 아마
 
  그렇게 운 사람들은 많았을 것입니다.
 
  아마 어느 유명 정치가의
 
  TV 회견을 보는 사람들보다도 정말
 
  훨씬 더 많았을 것입니다.
 
 
  그리고 며칠이 지나면 아마 모두들 또
 
  깡그리 다 잊어버릴 것입니다. (01.3.6)
 
 
 
 政治家들에게 용서를
 
  “그들의 연설이나 그들의 기자회견에는
 
  하나도 진실됨이 없습니다” 자다가 문득
 
  그 시인의 말이 떠올랐습니다. 그것은
 
 
  ‘독재자들의 친구도 그들의 당원도 아닌’
 
  ‘주님’에게 드린 독실한 사제司祭,
 
  한 시인의 준절한 기도였습니다.
 
  1925년 니카라과에서 낳아, 미국서도
 
  공부를 하고 박사가 된 그 시인
 
  에르네스토 카르데날의 시
 
  ‘시편 5’*에 그 말은 있었습니다.
 
 
  “그들의 연설이나 그들의 기자회견에는
 
  하나도 진실됨이 없습니다” 그래요.
 
  꼭 독재자라서만이 아닙니다.
 
  “그들의 연설, 그들의 기자회견에는
 
  하나도 진실됨이 없습니다” 그래요.
 
  하나도 진실됨이 없기야 하겠습니까마는
 
  “그들의 연설, 그들의 기자회견”은
 
  대개는 다 그렇습니다.
 
 
  “그들의 연설이나 그들의 기자회견에는
 
  하나도 진실됨이 없습니다”
 
 
  그러나 주여! 우리는 기도합니다.
 
  우리는 모두 그들의 한배(同胞)입니다.
 
  그들을 용서하소서. 긍휼히 여기소서.
 
  그들을 인도하소서.
 
  저희에게 채찍을 내리시듯 저들을
 
  용서하옵시고 저들을
 
  인도하시옵소서. (01.4.22)
 
 
  *에르네스토 카르데날 ‘시편 5’
 
  송병선 옮김. ‘현대시’ 2000년 9월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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