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는 식량을 구하러 집을 나갔고 어머니는 외할아버지·외할머니를 모시며 갖은 고생을 하다 모두 굶어죽고 병들어 죽었다. 오누이만 남아 함경북도 새별군에 있는 친할머니·친할아버지 집에 이사간 임철·소연 남매는 두만강을 건너 중국에 들어갔고 그곳에서 꿈에 그리던 아버지를 만난다. 그후 아버지가 먼저 서울로 왔고 지난 1월 남매가 入國에 성공했다.
月刊朝鮮은 3년 가까이 북한과 중국을 떠돌다 서울에 온 임철군의 手記 「아빠 찾아 3만리」를 原文대로 게재한다.
1장·어머니의 사망, 중국으로 脫出
나의 집은 함경남도 고원군 수동탄광이었다. 1997년 아빠는 탄광에서 일했고 엄마는 집에 있었다. 나는 인민학교 2학년에 다녔고 소연이는 유치원에 다녔다. 이때 우리 집안 생활은 매우 재미있었다.
나는 학교에서 공부를 잘했고 소연이는 유치원에서 제일 귀여웠다. 소연이는 매일 유치원에서 집으로 돌아오면 아빠 엄마 앞에서 재롱을 부리며 춤도 추고 노래도 하며 집안을 소란케 했다.
소연이가 노래를 부를 때면 아빠 엄마는 웃는 얼굴로 박수를 쳐 주었다. 그러면 소연이는 더 좋아 흥이 나서 노래를 부르곤 했다.
내가 2학년 2학기 때부터 우리 집도 다른 집처럼 식량난에 걸리게 되었다. 배급을 타지 못해 집 쌀독은 텅 비어 있었다. 이렇게 되다 보니 어머니와 아버지는 서로 의논하여 집에다 신발 수리장을 꾸렸다. 그런데 신발 수리를 하려면 도구가 있어야 하는데 이것은 모두 돈으로 사야 했다. 그런데 돈이 없어 아빠 엄마는 여기 저기 뛰어다녀 겨우 돈을 마련했다. 돈을 모으는 동안 우리는 아끼느라고 밥도 제대로 먹지 못하고 학교를 다녔다.
아빠 엄마는 돈을 모아 가지고 도구를 다 사왔다. 다음 이것을 집안에 설치해놓고 「신발 수리」 간판을 집 앞에 내걸었다.
신발 수리는 아빠 엄마가 같이 하는데 엄마는 신발 수리만 하고 아빠는 직장에 갔다와서 도와 주곤 하였다. 신발 수리하는 기술은 엄마가 새별에 계시는 할아버지한테서 배웠다.
신발 수리 간판을 내건 다음날부터 신발 수리장에는 손님들이 하나 둘씩 모여들었다. 신발 수리는 신발을 꿰매 주고, 뜯어진 것을 붙여 주곤 하는 일이다. 이날부터 엄마는 신발 수리를 시작하였고 우리집은 「신발 수리 집」으로 불렸다.
내가 학교 갔다와서 보면 엄마는 언제나 검은 장갑을 끼고 신발을 깁곤 하였다. 어머니는 얼마나 바쁜지 나에게 밥을 차려 주지도 못하고 나 혼자 꺼내 먹어야 했다.
저녁이면 아빠가 돌아와 엄마를 도와 신발을 수리하였다. 전에는 저녁이 되면 모두 한 자리에 모여 앉아 소연이가 춤추고 노래하는 것을 보았을 텐데 이제는 그렇지 않았다.
소연이가 돌아오면 그저 『오! 소연이 돌아왔니』라는 말 한 마디를 던지고는 신발수리에만 열심이었다. 이러면 소연이는 불평을 하면서 트집을 부리곤 하였다.
그리고 저녁밥은 쌀밥이 아니라 마른 옥수수 떡이었다. 이 옥수수 떡은 시간이 지나면 돌처럼 굳어져 먹을 수 없었고, 먹기 매우 힘들었다. 소연이는 떡을 뜯어먹을 때마다 깨무느라 찌푸린 인상을 하곤 하였다.
소연이가 계속 투정을 부리면서 『엄마 이렇게 딱딱한 거 내가 어떻게 먹어?』라고 할 때면 엄마는 『내일은 맛있는거 해 줄게』라고 대답해 주곤 하였다.
소연이는 이 말을 듣고 『음 좋아! 우리 엄마 제일이야!』라고 하면서 빙글빙글 웃곤 하였다.
그런데 이때 뜻밖의 일이 생겼다. 글쎄 새별에 계시던 외할머니와 외할아버지가 먹을 것이 없어 우리 집에 와서 살겠다는 것이다. 외할아버지와 외할머니는 원래 있던 집을 다른 사람에게 주고 다시 돌아갈 생각을 하지 않고 우리 집으로 온 것이다.
우리도 먹고 살기 바쁜데 어떻게 외할아버지·외할머니까지 같이 살겠는가. 아빠는 외할아버지네가 온 것을 보고 그렇게 반가운 표정이 아니었으며 그날 저녁 어머니와 말다툼을 하였다. 내가 들어 보니 아버지가 말하기를 어떻게 외할아버지네를 먹여 살리겠는가 하는 것이었다.
엄마는 할 수 없다면서 힘들어도 같이 살아보자고 하였다. 그러자 아버지는 『에이-』라는 말 한 마디를 하고 가만 있었다.
그러나 이와 반대로 소연이는 외할머니 품에 안겨 영원히 같이 살자고 졸라대기까지 하면서 외할머니가 제일 좋다고 하였다.
이때부터 우리는 식량사정이 더 어려워졌다. 이제는 딱딱한 옥수수 떡마저 못 먹고 풀죽을 먹어야 했다. 이렇게 되자 아빠는 엄마보고 신발 수리만 하지 말고 같은 도구를 가지고 자전거를 수리해 보자고 하였다.
이 상황에서는 어떻게 할 방법이 없었다. 다음날 엄마는 「신발 수리」라는 간판을 떼고 거기에다 자전거를 더 포함해 「신발, 자전거 수리」라는 간판을 다시 붙였다.
외할머니·외할아버지가 오다 보니 우리 집은 더 어려워져서 소연이와 내가 아침에 학교와 유치원에 갈 때에는 거의 굶고 다녔다. 아빠 엄마는 저녁에도 쉬지 않고 자전거 수리와 신발 수리를 끊임없이 해 나갔다. 그래도 가족이 6명이나 되다 보니 일을 해도 풍족한 날이 없었다.
1998년 5월 아빠는 이대로는 계속 살아갈 수 없다면서 식량 구하러 떠나겠다고 하였다. 엄마는 눈물을 흘리며 『떠나세요. 가서 몸조심하고 식량을 많이 구해와요』라고 말하며 아빠의 배낭에다 마른 풀떡 몇 개를 넣어 주었다.
떠날 때 소연이도 아빠한테 『아빠 먹을 거 많이 가지고 와요』라고 말하면서 아빠 품에 안겼다. 아빠는 『음, 먹을 거 많이 가지고 올 테니 기다려라』라고 말하고는 집을 떠났다.
아빠가 떠난 다음 엄마는 아빠가 올 때까지 살아서 기다려야 한다며 신발수리를 계속해 나갔다.
그런데 아빠가 없다 보니 또 한 가지 난관이 있었다. 전에는 아빠가 탄광에서 퇴근할 때 집안에 땔 석탄을 매일 가져왔는데 이제는 가져올 사람이 없었다. 그때 또 외할아버지는 늙고 굶어서 병에 걸렸었다. 외할머니도 건강이 좋지 못했다. 때문에 가져올 사람은 엄마밖에 없었다.
그런데 엄마는 신발 수리를 해야 되기 때문에 시간이 없었다. 또 나를 보내자고 하니 너무 작아 근심이 될 것 같았다.
엄마는 매일 한 번씩 석탄 가지러 가기 위해 시간을 짜내었다. 일을 쉬지 않고 빨리 해치우고 시간이 생기면 옷과 배낭을 지고 밖으로 달려나갔다. 그리고 한 2~3시간 지난 후에 들어오곤 하였다. 들어와서는 석탄을 부려놓고 또 작업을 시작했다.
엄마는 귀하게 시간을 짜내서 석탄을 가지고 온 걸 보면 대단히 무거웠으며 양도 또 대단히 많았다. 나는 속으로 항상 「엄마가 매우 힘드시겠다」라고 생각하곤 하였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엄마가 이렇게 애써도 풀죽도 배불리 먹기 힘든 것이었다.
바로 이때 외할아버지가 낮에 누워 계시다가 사망하셨다. 외할아버지는 눈을 감고 손을 배 위에 올려놓고 사망하셨다. 이때 외할머니와 엄마는 대단히 세게 울었다.
그때 외할머니는 온 종일 우셨다. 그때 동네 사람들이 모여와 집에 있던 널들을 가지고 棺(관)을 만들어 거기에다 외할아버지를 넣어가지고 산에 묻었다. 나도 매우 슬펐다. 이제 내겐 외할아버지가 없구나 하고 생각하니 더욱 슬펐다. 이렇게 나의 외할아버지는 돌아가셨다. 그것도 풀죽도 제대로 잡수지 못하고 돌아가셨다.
이후에도 엄마는 계속 힘들게 일해 나갔다. 시간이 있으면 신발을 수리하고 시간만 있으면 석탄 지러 가곤 하였다. 나는 이런 엄마가 불쌍했다.
그래서 하루는 내가 엄마에게 『엄마, 엄마가 힘든데 제가 석탄 지러 가 보겠어요』라고 했다. 그러자 엄마는 『안 된다. 대단히 힘들단다』라며 안 된다고 하는 것이었다. 그래도 내가 계속 가겠다고 졸라대자 엄마는 한 번 가 보라고 하였다. 그래서 나는 배낭을 지고 석탄 가지러 버스 역전으로 갔다. 가보니 낡은 버스가 맥을 잃고 있는 것이었다.
그래서 내가 한 아줌마에게 『저 버스 안 가요?』라고 물어보자. 하는 말이 『저 버스는 기름이 없어 못 간다』하는 것이었다.
이러면 어찌 하는가? 탄광까지 거리가 10리는 되었다. 걸어가자고 해도 1시간이 걸릴 것이고 더군다나 힘들 것이었다. 할 수 없이 나는 한 번 가보자 하고 걸었다. 절반도 못 갔는데 다리가 아프고 맥이 없었다. 그래서 한번 쉬고 다시 걸었다.
탄광에 도착하자 석탄 무더기가 쌓인 곳에는 사람들이 개미떼처럼 모여 탄을 줍고 있었다.
이 사람들이 석탄을 줍기에 나도 거기에 있는 검은 것들을 다 배낭에 집어 넣었다. 몇 덩이 넣지 못했는데 배낭이 다 차 집으로 돌아오려고 내려왔다. 배낭이 작아 그리 무겁지 않았다. 그런데 한참 가다보니 완전히 주저앉을 것처럼 다리가 아팠다. 그래서 쉬고 또 쉬어가지고 겨우 집에 돌아왔다.
나는 이때 엄마가 얼마나 맥이 없었을까 하고 다시 생각해 보았으며 이런 엄마가 불쌍하였다.
집에 오니 엄마는 내 배낭을 받아가지고 헤쳐보았다. 그런데 이게 뭔가. 모두 뚝덩이들이었다. 석탄이 아니라 완전한 돌들이었다. 엄마는 이걸 보고 웃으면서 석탄이 어떤 건가 가르쳐 주며 다음부터는 호미를 가지고 가서 잘 파 오라는 것이었다. 이때 나는 대단히 부끄러웠다.
다음에 나는 또 석탄을 지러 갔다. 이번엔 호미를 가지고 가서 하나하나 골라 가지고 왔다. 그런데 어찌나 무거운지 어깨가 아팠다. 집에 와서 헤쳐 보니 이번엔 완전한 석탄이었다. 나는 대단히 기뻤다. 그런데 어깨가 대단히 아팠다. 그래서 헤쳐 보니 글쎄 피부가 시뻘겋게 벗겨진 것이었다. 이때 나는 많이 아팠다. 내가 이런데 엄마는 얼마나 힘들까 싶었다.
그런데 아니나 다를까 엄마는 몸이 불편하다면서 머리가 아프다고 했고 기침까지 했다. 엄마는 처음에는 감기겠지 하고 가만 있었는데 점점 더 아팠다. 그래서 병원에가서 진찰해 보니 「늑막염」이라는 병이었다.
이 병은 너무 무거운 것을 져서 늑막에 물이 찼다는 것이다. 이 병을 치료하려면 약을 많이 써야 되지만 기본은 운동을 하지 말고 가만히 휴식해야 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만약 엄마가 휴식하면 우리 집안은 누가 먹여 살린단 말인가? 엄마는 이런 진단을 받고도 받은 체 만 체하고 계속 일에만 열중했다. 원래 하루 24시간이라면 20시간은 쉬어야 되는데 엄마는 한두 시간씩 쉬곤 하였다. 이러다 보니 엄마의 병은 날이 갈수록 더 악화되었다. 외할머니는 엄마가 아파할 때마다 『야, 에미야. 맥을 잃지 말고 불사조처럼 일어나야 한다』라고 계속 힘과 용기를 더해 주곤 하였다. 이러면 엄마는 계속 힘을 되찾고 일어나곤 하였다.
그러던 어느 날 낮에 집에 누워계시던 외할머니가 숨을 가쁘게 몰아쉬다가 사망하셨다. 엄마에게 그렇게 힘과 용기를 주시던 외할머니도 이젠 돌아가셨다. 엄마는 외할머니가 사망하신 걸 보고 거의 까무라칠 정도로 우셨다.
『어머니, 이렇게 죽 세 끼도 변변히 먹지 못하고 돌아가시면 어떡해요. 난 혼자서 어떻게 살아가란 말입니까?』라고 통곡하며 우는 엄마의 울음소리는 온 마을에 울려퍼졌다.
나와 소연이도 그때 슬프게 울었다. 나와 소연이는 이젠 외할아버지, 외할머니를 다 잃어버린 셈이었다. 우리는 엄마와 함께 외할머니 곁에서 얼마나 울었는지 모른다. 그런데 이젠 외할머니를 내가자니 棺이 없었다. 그래서 의논하던 끝에 우리 집 앞에 있는 나무 창고를 허물어 그 나무로 관을 만들어 거기에다 외할머니를 눕혔다.
관은 썩고 부슬부슬 떨어질 정도였지만 할 수 없었다. 외할머니를 소달구지에다 태우고 산에 올라가 외할아버지 곁에다 눕혔다. 지금도 외할아버지와 외할머니는 나란히 누워 계실 것이다.
외할머니가 돌아가신 후부터 엄마는 병이 더 악화되어 자리에 눕게 되었다. 소연이와 나는 학교도 못 가고 집에서 엄마를 간호해 드렸다. 소연이는 엄마의 머리에 수건으로 찜질도 해주고 다리도 주물러 줬으며 나는 석탄을 날라오고 집에 불을 땠다. 그런데 이렇게 앓는 엄마에게 미음을 쑤어 줘야 하는데 풀죽도 겨우 먹는 상태에 어떻게 미음을 쑤어 주겠는가?
집에는 먹을 것이 다 떨어졌다. 그러자 엄마는 또다시 일어나 신발 수리를 시작하였다. 아픈 몸에 허약하고 얼굴은 창백하며 찌푸린 인상이 당장 쓰러질 것 같은 모양이었다. 오는 손님들도 엄마를 근심해주며 어떤 사람들은 약도 갖다 주었다. 그러나 이 모든 것들도 엄마에겐 힘이 되지 않았고 오히려 병은 점점 더해갔다.
그러던 어느 날 엄마는 갑자기 나보고 병원에 가서 의사 선생님을 데리고 오라는 것이었다. 소연이는 엄마 곁에 있게 하고 나는 병원으로 쏜살같이 달려갔다. 의사 선생님을 만나 우리 엄마가 아픈데 빨리 가자고 재촉하고는 집으로 왔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엄마가 마지막 숨을 가쁘게 몰아쉬고 있었다. 내가 엄마한테 다가가 『엄마, 왜 그래?』라고 물어보았다. 그런데 엄마는 숨을 가쁘게 몰아쉬며 아무 대답도 없이 손만 내 저을 뿐이었다. 이러던 엄마가 갑자기 숨 쉬던 것을 뚝 그치고 손을 맥없이 떨구는 것이었다. 내가 웬일인가 손을 들어 심장에 대보니 아무런 반응이 없었고 심장이 뛰지 않았다.
갑작스레 놀란 나는 『엄마! 엄마!』 하고 계속 불러보았으나 눈을 뜬 엄마는 아무런 반응없이 꼼짝 않고 있었다. 이제서야 나는 엄마가 돌아가셨다는 것을 알았다.
나는 너무 어처구니 없어 놀라 한동안 멍청해 있었다. 이러다가 옆에서 소연이가 부르는 소리를 듣고야 정신을 차렸다. 어느새 나의 눈에는 나도 모르게 눈물이 글썽해 있었다.
소연이도 내가 우는 것을 보고 알아차렸는지 자기도 엄마를 붙잡고 『엄마! 엄마!』하고 울었다. 이때 우리의 울음소리를 들은 마을 사람들이 달려와 엄마가 돌아가신 걸 보고 눈물을 흘리며 우리를 막 떼놓았다.
어느 새 우리집에는 사람들이 꽉 찼다. 나는 마을 사람들을 비집고 밖으로 나와 벽에 기대고 통곡하며 울었다. 『엄마! 엄마!』 하고 엄마를 부르며 우는 나의 울음소리는 온 마을에 울려퍼졌다. 소연이는 아직도 엄마 곁에서 슬피 울고 있었다.
내가 밖에서 집안으로 들어와 보니 어느새 마을 사람들이 엄마를 이불로 덮어 놓고 그 겉에다 보를 쳐놓고 있었다.
나는 그 자리에서 다시 한번 눈물을 흘리며 슬피 울었다. 마을 아주머니들은 우리를 달래며 울지 말라고 위로해 주었으나 「이제는 엄마가 없는데 내가 어떻게 살아갈까」 하고 생각하니 더 슬펐다.
엄마가 죽은 이날 밤 나는 엄마 곁에서 자려고 했으나 마을 사람들이 안 된다는 바람에 옆집에서 잤다.
다음날 마을 아주머니들은 우리 집에 와 여러 가지 음식들을 준비하고 있었다. 그리고 아저씨들은 무엇을 의논하고 있다. 내가 가서 들어 보니 엄마를 내갈 관이 없다는 것이다. 온 마을을 다 뒤져도 관이 없고 우리 집에도 없었다.
그래서 아저씨들은 아빠가 있던 직장에 찾아가 棺을 만들어 달라고 하였다. 직장장은 우리 집에 직접 와보고는 판자들을 모아 겨우 허술하고 작은 관 하나를 만들었다. 그날 오후 사람들은 엄마를 관에 안장하였다. 나는 이때 다시 한번 설움이 북받쳐 엄마의 시체에 다가가 울었다.
어느 새 엄마는 관 속으로 들어갔고 관 뚜껑을 닫았다. 사람들은 엄마를 소달구지에다 싣고 외할머니, 외할아버지가 있는 산에 가서 엄마를 그 곁에 조용하고 편히 잠들도록 묻어주고 물고랑도 파주었다. 이렇게 나는 세상에서 제일 사랑하는 엄마를 잃어버렸다.
엄마가 죽은 후 집에는 우리 둘만 있게 되었다. 밥은 탄광 노동자 합숙에서 먹곤 하였다. 아침이면 집을 나서 합숙으로 밥 먹으러 가곤 하였다. 점심, 저녁도 합숙에서 먹고 집에 돌아와 잠을 자곤 하였다. 그런데 저녁에 우리끼리 자자니 너무 무서웠고 두려웠다.
그래서 어느 날은 불도 끄지 않고 온 밤을 지샐 때도 있었다. 합숙에서 주는 것은 물과 옥수수를 섞은 밥, 풀죽, 감자 삶은 것, 또 옥수수 국수 등인데 옥수수 국수는 너무 부풀어 대단히 굵으며 먹을 때면 막 메스꺼울 정도였다.
그래도 우리에게 이만큼이라도 차려지는 것이 다행이었다. 그런데 합숙에서 먹으면 늘 배가 고팠다. 그저 조금씩 주나마나 하는데 이것을 먹고 한 시간도 못 가서 또 배가 고프다. 나는 이때 인민학교 3학년을 다녔고 소연이는 1학년을 다녔다. 나와 소연이는 배고프다 보니 어느 땐 학교에 가고 어느 땐 가지 않고 하였다.
배고프고 돈이 없다 보니 우리는 그저 장마당의 먹을 것들이나 구경하고 먹고 싶어하며 하루를 보내곤 하였다. 소연이는 먹을 것들을 볼 때마다 먹고 싶어 군침을 삼키곤 했고 어떨 땐 침까지 흘렸다.
그래서 한 번은 이런 소연이가 불쌍해서 아줌마한테 『그 빵 절반만 좀 주세요』라고 빌었더니 그 아줌마는 눈을 부라리며 『가라, 가라, 가라, 안 된다. 어디 너희들을 줄 것이 다 있겠니?』라고 말하며 못 준다고 하였다. 그래서 다시 한 번 빌어봤으나 욕이나 먹을 뿐 헛수고였다.
마을 사람들도 우리를 동정만 해 줄 뿐 우리를 자기 집에 데려다가 밥 한 끼 먹여 주는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 하긴 자기들도 먹지 못하는데 어떻게 우리를 먹여 주겠는가.
이 중에서도 나를 동정해 주고 불쌍히 여겨주는 옆집 아저씨가 있었다. 이 아저씨는 나이가 많으셨는데 우리에게 잘 해 주셨다. 어느 날 이 아저씨가 우리집에 찾아와 말하기를 『철이야, 너희 친할아버지 친할머니가 계신다던데 그 곳에 가서 살지 않겠냐?』라고 물어보는 것이었다.
그래서 내가 『그런데 연락을 못하잖아요. 가면 좋은데…』라고 대답하자 그 아저씨가 『그럼 한번 전보를 쳐보자. 그러면 연락할 수 있잖니?』하며 고개를 끄덕이는 것이었다. 그래서 나는 그러자고 하고 친할머니에게 전보를 쳤다.
그런데 전보를 치고 한 달을 기다려도 할머니는 오지 않았다. 그래도 또 한 장을 쳤다. 그런데도 종 무소식이었다. 그래서 안타까웠다. 한 장 더 쳐 보기로 하고 한 번 더 쳤다.
친할머니에게 세 번째 전보를 친 다음날 아빠가 다니던 직장 사람이 우리집에 왔다. 내가 왜 왔느냐고 물으니 집 때문에 왔다는 것이다.
내가 『집이 어째서요』 물으니 『너희 집을 내놓아야 한다. 이 집은 국가 집이기 때문에 국가에 바쳐야 한다』고 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내가 『안 돼요. 이 집은… 이 집을 내 주면 우리는 어디 가랍니까? 제발 이 집은 다치지 말아 줘요』 하고 간구하자 그 아저씨가 말하기를 『우리도 이러고 싶지 않았는데 郡黨(군당)에서 지시하는 바람에 지금 집을 내놓아야 한다』라고 하는 것이었다.
이제는 할 수 없었다. 그 아저씨가 안 된다고 딱 잘라 말하기 때문에 나는 『그럼 아저씨, 제가 할머니한테 전보를 쳤는데, 저희 할아버지가 우리를 데려갈 때까지만 기다려 주세요. 네, 부탁이에요. 이 집이 없으면 우리는 갈 데가 없어요』라고 애타게 말하자 아저씨는 할 수 없는지 『그럼 내가 한 번 말해보겠다』라고 대답하고는 집에서 나갔다.
아저씨가 왔다 간 다음부터 나는 더 무서웠고 두려웠다. 사태가 이런데 할머니에게 보낸 전보는 무소식이니 대단히 안타까웠다. 그 아저씨가 왔다 간 다음에도 집 때문에 몇 번이나 왔다갔다 하였다.
그러던 어느 날 그렇게도 기다리던 할머니가 우리집에 도착했다. 할머니는 전에도 우리집에 왔다 간 적이 있다. 우리가 집에서 누워 있는데 『똑똑』하고 문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또 집 때문에 온 사람일 거라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문을 열고 들어오는 사람은 집 때문에 온 사람이 아니라 할머니였다. 나는 너무 기다리고 또 뜻밖이어서 할머니를 보자마자 할머니한테 안겼다. 한동안 슬프게 울었다. 전보를 세 번 보내고 또 석 달이 지나도록 기다렸던 할머니었다.
할머니는 나와 소연이를 앉혀놓으시고 집안을 둘러보시더니, 『네가 전보에 엄마가 사망하셨다고 썼는데 이것이 정말이냐?』라고 묻는 것이었다. 그래서 나는 엄마가 사망하셨다고 대답하고 엄마가 사망한 경과를 할머니에게 자세히 알려 주었다. 울면서 듣던 할머니는 내 말이 다 끝나자 장판을 주먹으로 치며 통곡하였다. 『야, 에미야 어쩌다가 이렇게 됐니…』 하며 몇 시간 동안이나 우셨다.
할머니가 집에 온 다음날 소연이와 나는 할머니와 같이 엄마를 묻은 산으로 음식을 가지고 올라갔다. 가서 먼저 외할아버지와 외할머니에게 절을 올린 다음 엄마에게 갔다. 할머니는 엄마 묘지로 다가가 푹 주저앉으며 또다시 통곡했다.
『이 에미야, 어째 이렇게 빨리 가는 거냐. 그럼 이 불쌍한 아이들은 어떡하구. 아! 어쩌다 이렇게 됐냐, 어쩌다 이렇게 됐냐…』 하며 통곡하는 소리가 온 산에 울려퍼졌다.
그러면서 할머니는 마지막으로 『내가 얘네를 데려갈 테니 에미는 안심하고 있어라』라는 말을 남기고 절을 한 뒤 함께 산에서 내려왔다. 할머니는 집에 와서 우리에게 『할머니하고 같이 가서 살자. 너희들끼리 여기서 어떻게 살겠냐. 며칠 있다가 떠나자』라고 말하였다.
우리는 이 말을 듣고 좋았지만 외할머니, 외할아버지와 특별히 사랑하는 엄마를 두고 가자니 슬프기도 하였다.
하지만 우리는 할머니를 따라가야만 살 수 있었다. 할머니가 온 다음에도 집 때문에 사람이 왔었다. 그 아저씨는 할머니와 집을 언제 비울 것인가를 확인하고 돌아갔다. 며칠이 지나 우리는 짐을 다 싸가지고 할머니와 함께 그동안 엄마와 함께 지냈던 정든 집을 나섰다. 이 집은 참으로 뜻이 깊은 집이었다. 엄마와 함께 고난을 극복해 나가던 일들이 서서히 떠올랐고 엄마가 사망하던 일이 서서히 떠올랐다.
나는 이 집을 떠나는 것이 대단히 아쉬웠다. 그래서 가는 길에도 몇 번이고 고개를 돌려 보았다. 남몰래 떠나니 바래 주는 사람이 없었다. 우리는 가던 길에 한 번 더 엄마를 보려고 산으로 올라갔다. 마지막으로 엄마에게 절을 올린 다음 산을 내려와 고원역으로 향하였다. 이때가 엄마와의 마지막 상봉이었다.
우리는 걸어서 고원역에 이르렀다. 그리고 기다리다 청진까지 가는 기차를 탔다. 차 안에는 사람들이 너무 많아 우리는 자리에 앉지도 못하고 짐을 깔고 앉았다. 그러다보니 잠도 제대로 자지 못했고 더군다나 짐을 잊어버릴까봐 할머니와 나는 잠을 자지 않고 온밤 뜬눈으로 지새웠다.
다음날 우리는 청진에 도착했다. 청진역전에서 우리는 마른 옥수수빵을 조금씩 먹고 청진―학송까지 가는 기차를 탔다. 그런데 기차가 갈 시간이 되었는데 도무지 떠나지 않았다. 어째서 떠나지 않는가 물어 보니 앞에 끄는 기관차가 모자라 없다는 것이었다. 몇 시간 정도 기다리면 되는가 물어 보니 모른다고 했다. 우리는 찻간에서 기다리고 기다리고 또 기다렸다.
그런데 저녁이 되어도 차는 끄떡하지 않았다. 이렇게 날은 가고 4일째 되는 날 겨우 청진역을 빠져나왔다. 다음날 차는 학송 역전에 도착했다. 그런데 할머니네 집은 새별인데 학송에서 새별로 가자면 대단히 멀었다. 차도 없고 할 수 없어 우리는 함께 걸어서 할머니네 집에 도착했다.
할머니네 집에 도착하니 집에는 할아버지가 있었고 또 어떤 애기가 있었다. 우리는 처음 그 애기가 누군지 몰랐다. 알고 보니 이 애기는 고모의 아이었다.
이름은 윤미였다. 윤미는 처음 우리를 보고 무서워 슬슬 피했다. 집은 매우 작았고 집들이 붙어 있었다. 그리고 집 앞에는 허술하게 판자로 만든 할아버지가 일하는 신발 수리장이 있었다.
할아버지는 우리를 보자 눈물을 흘리며 대단히 기뻐하였다. 그리고 조금 있다 작은아버지와 작은어머니 그리고 사촌 동생들도 와 모두들 반갑게 인사했다. 모두 모여 앉아 이야기를 나누며 몇 시간을 보냈다.
할아버지는 신발 수리를 하셨고 작은아버지는 직장 일을 하였으며 작은어머니도 할아버지처럼 신발 수리를 하였다. 할아버지는 신발 수리를 집 앞에서 하셨고 작은어머니는 아침마다 장마당에 나가 신발 수리를 하고 있었다. 우리는 할머니네 집에 있으면서 학교는 다니지 않았다. 그저 집에서 윤미와 함께 놀곤 하였다.
윤미는 처음에 우리를 무서워하더니 얼마간 우리와 지낸 다음부터는 무서워하지 않았다. 그리고 고모는 얼마 전에 중국으로 넘어갔다는 것이다. 그래서 윤미는 할아버지 할머니가 봐 주고 있었다. 작은아버지의 아이들인 사촌동생들은 원래 학교 다닐 나이인데 학교도 유치원도 다니지 않고 집에서 놀고 있었다.
먹을 것이 없다 보니 학교에 다니지 않는 것이었다. 할아버지는 아침이 되면 죽을 잡숫고는 집앞에 나가 신발 수리를 하셨다. 그리고 할머니는 어디로 가는지 계속 아침을 잡숫고는 집을 나갔다. 그래서 우리는 계속 사촌동생들하고 놀곤 하였다.
우리가 할머니네 집에 와서 얼마간 있던 어느 날 할아버지와 할머니는 먹을 것이 없어 중국에 있는 친척들한테서 지원받으러 가야 한다고 하였다. 그러면서 집에는 나와 소연이, 그리고 윤미 셋이 있으라는 것이다.
할머니는 『10일 동안 있다가 올 테니 그때까지 밥은 작은아버지 보고 지어달라 하고 집은 너희들 세 명이 잘 보고 있어라. 올 때 맛있는 것과 멋있는 옷을 많이 가져올게, 좋지?』라고 말하고 다음날 아침 기차를 타고 집을 떠났다.
할머니네 집에 있는 동안 우리는 그저 집에서 사촌동생들을 데리고 놀곤 하였다. 아침이면 작은아버지가 와서 아침, 점심, 저녁밥을 지어놓고 직장에 나가곤 하였다. 그러면 우리는 작은아버지가 해 주는 죽을 먹곤하였다. 그리고 설거지는 소연이가 하였다. 소연이는 온 하루를 윤미와 함께 보냈다.
저녁이 되면 나, 소연이, 윤미 세 명이 자는데 할머니가 없다 보니 무서웠다. 자리를 펴고 누우면 마치 누가 들어올 것 같이 무서워서 잠이 들지 않았다. 특별히 저녁이 되면 천장에서 쥐새끼가 바스락 바스락하고 소리내는데 이럴 때면 소름이 끼치면서 막 무서웠다.
이렇게 하루를 보내고 또 보내고 드디어 10일이 되는 날이 왔다. 그런데 아침부터 기다리는 할머니와 할아버지는 오지 않았다. 이때 나는 너무 안타까웠다. 기차역전도 가보고 길에서도 기다리며 온종일을 보냈다. 무서움증은 더했고 혹시 할머니한테 무슨 일이 생기지 않았을까 걱정도 했다.
나는 맥을 잃고 집에 돌아왔다. 동생들도 할머니가 오기를 눈 빠지게 기다렸다. 나는 이때 사람을 기다리는 것이 제일 안타까운 일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나는 집에 들어와 조금 있다가 『이젠 할머니가 안 오겠지…』라고 생각하고 앞마당을 나섰다. 그런데 내가 걸어갈 때, 뒤에서 소연이가 『오빠! 할머니 할아버지가 왔다. 빨리 와!』라고 나를 부르는 것이다.
나는 이때 소연이가 거짓말하는 줄 알았다. 소연이는 나를 놀리려고 거짓말을 많이 하였기 때문이다. 나는 소연이 말을 듣고 혹시나 해서 집에 가 보니 정말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와 있었다. 너무 기뻐 달려가 할아버지 품에 안겼다. 그리고 눈물이 글썽해서 『할아버지, 어째 이제야 왔습니까?』하고 말하며 할아버지를 바라보았다.
할아버지는 나를 보고 『오, 기차가 없어서 이제야 왔다』라고 대답하였다. 할머니는 맛있는 것과 멋있는 중국제 옷을 내놓고 우리에게 나누어 주었다. 그러면서 『너희들, 정말 용케 지냈구나. 이것은 선물이다』라고 말하며 우리 앞에 내놓았다.
그리고 또 옆에는 큰 지함(紙函)이 있었다. 그걸 뜯어 보니 그 안에는 우리가 그렇게 기다리고 기다리던 흑백 텔레비가 있었다.
나는 너무 기뻐 콩콩 뛰며 텔레비를 만져보았다. 이땐 흑색 텔레비가 대단히 귀중했다. 마을에 열 집이 있으면 겨우 한 집만 있었다. 나는 너무 좋아 어쩔줄 몰랐다. 할머니는 그 다음날 지원받은 물건들을 더러 작은아버지집에 가져다 주었다. 그때 작은아버지네는 생활이 대단히 어려웠다.
작은아버지는 직장만 다니고 아무 일도 할 줄 몰랐다. 그래서 작은어머니가 신발 수리로 돈을 조금씩 버는데 네 명 식구가 먹고 살기 대단히 힘들었다. 그래서 할머니는 먹을 것이 조금 생기면 계속 갖다 주곤 하였다. 할머니는 나와 같이 작은아버지네 집에 갔었는데 작은아버지는 그 적은 물건을 받고도 너무 좋아 어쩔 줄을 몰라했다.
할머니가 지원받아 온 후에 우리는 옥수수죽이라도 조금씩 먹었다.
그런데 이때 이상한 일이 생겼다. 할아버지가 중국에서 지원받은 후부터는 신발수리를 잘 하지 않으시고 집에 있는 이불이랑 사발이랑 하나하나 팔아버리는 것이었다. 어느 날 내가 밖에서 놀다가 집으로 들어오려다가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말하는 소리를 들었다. 할머니가 『중국으로 가려면 이 가구를 모두 팔아 돈을 모아야 하는데 사겠다는 사람이 없으니 야단이에요』라고 말하는 것이었다. 나는 이 말을 들었을 때 조금 놀랐고 왜 가구들을 파는지 알게 되었다.
하긴 뭐 이때 우리 마을에서도 중국으로 도망간 사람들이 많았다. 이때 할아버지의 말이 들려왔다. 『아, 정말 야단이에요. 빨리 중국으로 가야겠는데… 여기서 가만 있다가는 굶어죽고 만단 말이오. 이제 저 조금 지원받은 것마저 다 두들겨 먹으면 그땐 끝장이란 말이오. 어쨌든 최선을 다해 물건들을 팔아야겠소…』라고 말하는 할아버지의 얼굴에는 근심이 가득차 있었다.
이튿날부터 할아버지와 할머니는 아침 일찍 집을 나섰다. 그리고는 저녁 늦게야 집에 돌아오곤 하였다.
이렇게 며칠 지난 어느 날 할머니는 가구 장사꾼들을 데리고 왔다. 그리고 이 말저 말 하며 가격 흥정을 하는 것이었다. 흥정을 다했는지 장사꾼들은 사람들을 시켜 이불장, 그리고 거울, 식장, 밥상 등을 모조리 가져갔다.
그리고는 할머니한테 얼마간의 돈을 주었다. 할머니는 장사꾼들이 나간 다음 이불장 자리를 쓸면서 『에이 할머니가 시집올 때 가져온 이불장, 이불 다 헐값으로 팔아버렸구나. …후…』라고 말하며 한탄하는 것이었다.
집안의 가구란 가구는 모조리 팔아버려 이젠 텅 빈집이었다.
그리고 며칠 있다가 할아버지는 누가 텔레비를 사겠다는 사람이 있다면서 내가 그렇게 아끼고 좋아하던 흑백 텔레비를 천에 싸가지고 어디로 나갔다. 상황이 이렇게 되니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다.
이렇게 우리는 모든 물건을 팔아가지고 얼마간의 돈을 모았다. 할머니는 돈을 다 모으고도 여기저기를 돌아다녔다. 드디어 집을 나서는 날이 왔다.
우리는 얼마간의 도중식사를 짐 안에 넣고, 가는 도중 필요한 물건들도 짐 안에다 넣었다. 최대한으로 짐을 없앴다. 짐들을 다 없애고 보니 짐은 할아버지가 지고 나는 도중식사를 가방에 넣고 어깨에 메었다. 할머니는 윤미를 업었다.
다음 무엇을 잃어버렸는가 두리번거리고 보니 사진들이 있었다. 그 안에는 돌아가신 엄마의 사진과 우리 가족의 사진이 몇장 있었다. 나는 이것을 주워 짐 안에 넣을까 하다가 너무 자리가 없이 빼곡히 차 있어 갈 때 주머니 안에 넣어 가지고 가려고 생각했다.
드디어 아침 해가 조금 떠오르자 사람들의 목소리가 들리기 시작하였다. 할머니는 이걸 듣고 『야! 철이야, 누구도 모르게 빨리 마을을 빠져 나가야 한다. 만약 들키면 우린 죽는다. 그러니 너는 할아버지와 소연이를 데리고 빨리 나가야 한다』 하고 나에게 말하는 것이었다.
이때 작은아버지와 작은어머니, 그리고 사촌동생들이 들어왔다. 그들은 작은 소리로 울며 우리와 작별인사를 하였다. 우리는 시간이 급하기 때문에 빨리 나가야 했다.
할머니와 할아버지도 울며 『만약 살아 남으면 언제든 꼭 만날 수 있을 거다』하고 말하였다. 이 소리를 들은 나는 대단히 슬픈 감을 느꼈다. 나와 소연이 그리고 할아버지는 부랴부랴 짐을 지고 작은아버지네하고 포옹을 한 다음 빠른 걸음으로 집을 나왔다.
할머니는 집에서 뭐하는지 조금 있다 나오겠다고 하였다. 만약 모두 같이 나오면 알아볼까봐 따로따로 나온 것이다. 우리 셋은 머리도 들지 않고 할머니와 만나기로 한 장소로 빠른 걸음으로 거의 뛰다시피 빨리 갔다. 우리는 약속 장소에 머물러 할머니가 오기를 기다렸다.
할머니를 기다리는 동안 우리는 낯이 익은 땅을 다시 한번 바라보았다. 물론 고생도 많이 했지만 그래도 정든 땅이었다. 한참 우리가 산을 바라보고 있는데 할머니가 윤미를 업고 오는 모습이 보였다. 할머니는 우리를 보자 빠른 걸음으로 다가왔다.
그리고는 조금도 쉬지 않고 기차 역전으로 나갔다. 나갈 때도 아는 사람이 있을까 앞뒤로 나누어 갔다.
기차 역전에 도착해서 우리는 좀 기다리다가 삼봉까지 가는 기차를 탔다. 그런데 기차에 사람이 얼마나 많은지 앉지도 못하고 서서 갔다. 원래 삼봉까지 가는 데 4~5시간 걸리는데 차가 얼마나 늦게 가고 연착되는지 열 몇 시간을 갔다.
2장·아빠·고모는 한국으로…
우리가 삼봉에 도착한 것은 깊은 밤이었다. 사람 소리는 하나도 안 들리고 개구리 우는 소리만 들릴 뿐이었다. 할머니는 우리를 데리고 어느 한 집으로 갔다.
집 주인은 할머니를 아는지 아니면 미리 약속했는지 따뜻하게 맞아 주었다. 우리는 그 집에서 죽을 대충 먹고 집 주인이 깔아주는 잠자리에 누웠다. 잠자리에 눕자마자 소연이와 윤미는 잠에 곯아떨어졌다.
그러나 나는 도저히 잠들 수가 없었다. 그래서 집에서 떠나오던 것부터 곰곰 생각해 보았다. 그런데 이때 생각나는 것이 있었다. 그것은 내가 가져오려고 놓아두었던 사진을 너무 바쁘게 떠나오다 보니 잊어버리고 가져오지 못한 것이었다.
특별히 두고 온 사진 중에는 엄마의 사진이 들어 있었다. 나는 갑자기 머리가 띵했다. 엄마의 제사 때는 사진이 없어서 어떻게 제사를 지내겠는가 하는 것이 제일 먼저 머리에 떠올랐고 엄마가 보고 싶을 때면 그 사진을 보려고 했는데 가져오지 못했으니 어떻게 하면 좋단 말인가!
나는 내가 미워서 한동안 울음을 터뜨렸다. 그러나 후회한들 무슨 소용이 있으랴!
다음날 할머니는 우리를 남겨두고 혼자 어디를 나갔다. 할머니는 그 뒤에도 나갔다가 깊은 밤에 들어오곤 하였다.
이렇게 우리는 그 집에서 며칠 지냈다. 그러던 어느 날 오후 할머니는 우리를 데리고 어느 마을의 한 집으로 데리고 들어갔다. 알고 보니 이 집은 할머니와 연계하는 집이었다.
우리는 이때까지 우리가 어떻게 해서 중국으로 가는지 몰랐다. 그저 여하튼 중국으로 간다는 것만 알고 있을 뿐이었다.
그런데 이때 할머니와 이 집 주인이 말하는 걸 들었다. 알고 보니 이 집 주인이 우리가 중국으로 넘어가는 걸 도와 주는 집이었다. 우리는 「두만강」을 넘어간다는 것이었다.
우리는 이 집에서 또 하루를 보냈다. 다음날 오후 우리는 점심을 대충 먹고 집 주인을 따라 어디로 갔다. 가는 도중에 총을 메고 줄서서 가는 군대들도 많이 보았다. 집 주인은 우리를 데리고 계속 가다가 어느 철길 옆에서 머물렀다.
집주인은 우리에게 『이제 강을 넘어갈 때 소리를 치거나 떨어지지 말아야 합니다. 꼭 손을 잡고 건너가야 합니다. 그리고 저 건너편에 도착하여서는 머물러 있지 말고 빨리 뛰어 산 속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그러지 않다간 중국 변방대한테 잡히고 맙니다. 그러니 주의하십시오』라고 말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우리를 보고 빨리 건너가라는 것이었다. 나는 그때까지 너무 긴장해서 그러는지 강이 보이지 않았다. 그런데 숲을 헤치고 보니 정말 앞에는 큰 강이 흐르고 있었다. 나는 이때 정말로 놀랐다.
할아버지는 소연이를 업고 할머니는 윤미를 업고, 나는 할머니와 할아버지의 손을 잡고 강에 들어섰다. 강에 들어서자마자 강물이 얼마나 찬지 뼛속까지 추위가 스며들었다.
이때는 겨울이 시작된 11월 말이었기 때문이다. 강 중간쯤 들어서니 물 높이는 내 배까지 찼고 몸이 당장 얼어떨어질 것처럼 찼다.
나는 너무 긴장하여 추운 것도 아랑곳 하지 않고 할아버지와 할머니의 손을 꼭 잡고 용감히 건너편 강둑을 향해 걸어갔다. 소연이와 윤미도 발이 절반쯤 물에 잠기었으나 소리 하나 내지 않았다.
그때 상황이 그렇게도 긴장했던 것이다. 우리는 한걸음 한걸음 뒤도 돌아보지 않고 걸어갔다. 거의 강둑에 도착하려고 할 때 별안간 물이 깊어지면서 내 배까지 차던 물이 갑자기 목까지 올라왔다.
나는 이때 너무 놀라 막 소리를 지르려고 하였다. 그러다가 자신을 억누르고 『억!』하고 약간의 소리를 질렀다. 우리는 강둑에 도착해 내가 먼저 올라가 할아버지와 할머니를 끌어올렸다.
할아버지는 너무 지쳐 완전히 맥을 쓰지 못하며 비틀비틀하는 것이었다. 그러다가 내가 손을 잡고 끌어올려서야 겨우 올라왔다.
우리는 다 올라와서 한숨도 쉬지 않고 할머니를 따라 강둑을 넘어 앞으로 향하였다. 그리고 나무가 무성하고 사람이 보이지 않는 곳에 머물러 잠깐 앉았다. 우리는 여기서 옷을 다 갈아입었다. 나와 소연이, 그리고 윤미는 너무 추워 오돌오돌 떨며 앉아 있었다. 우리는 여기서 날이 새까맣게 질 때까지 기다렸다.
드디어 날이 어두워 사람이 잘 보이지 않자 우리는 할머니를 따라 전진해 나갔다. 완전히 엎드려 기어가는 우리의 모습은 쥐가 무엇을 도적질하러 가는 모습과 같았다. 가다가 사람 인기척이 나거나 불빛이 보이면 엎드리곤 하는데 이 모습은 완전히 敵後(적후)에 나가는 정찰병들이었다.
우리는 이렇게 캄캄한 밤에 할머니의 인솔에 따라 겨우 어느 마을 어귀에 도착하였다. 길은 얼마나 까다로운지 꼬불꼬불 오솔길이었다. 할머니가 지원을 받곤 하던 먼 친척집에 도착하였다. 집안으로 들어가자 친척들은 대단히 반가워하였다. 우리는 도착하자 먼저 차려 주는 밥부터 먹었다.
이밥을 가득 담고 먹음직스러운 반찬들은 보기만 해도 살 것 같았다. 배가 굉장히 고픈 데다가 꿈에서 보았던 음식들을 먹으니 저절로 슬슬 넘어갔고 맛이 있기도 하지만 딱 꿈만 같았다. 그리고 여기서는 매끼 이렇게 먹는다는 소리를 들으니 이제부터는 이밥을 먹게 되었구나 하는 생각에 대단히 기뻤다.
할아버지와 할머니 그리고 소연이와 윤미도 너무 좋아 게걸스레 밥을 먹었다. 우리는 그 집에서 주는 중국 옷들로 모두 갈아입었다. 중국옷들은 얼마나 멋있고 좋은지 나는 그때 그 옷을 입고 계속 거울만 바라보았다. 마치 지옥에서 천국으로 올라온 것과 같았다. 우리는 이날 밤을 그 집에서 지냈다.
다음날 아침이 되자 우리는 또 맛있는 이밥을 먹고 자리에 앉았다. 그런데 이때였다. 할머니가 내 곁으로 다가오더니 『철이야, 아버지가 이제 여기로 온다』라고 뜻밖의 말을 하는 것이었다.
나는 너무 뜻밖이어서 내 귀를 의심하였다. 그리고 믿어지지 않아 『할머니 거짓말하지 마세요. 아버지가 어디에 있다구 여기서 만납니까?』하고 비웃었다.
할머니는 얼굴에 웃음을 띄우며 『믿어지지 않겠지. 그럼 기다려 봐라』하고 말하는 것이었다. 나는 이 말을 듣고 혹시나 해서 기다려 보았다.
우리가 한참 앉아서 기다리는데 갑자기 문이 열리더니 웬 사람이 들어왔다. 그는 들어와서 우리를 자꾸만 바라보는 것이었다. 내가 찬찬히 보니 이 사람은 다름아닌 우리가 그렇게 기다리고 기다리던 아빠였다.
나는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라 너무 어리벙벙하여 눈을 비비고 다시 보았다. 그런데 정작 만나고 보니 인사는 했어도 어쩐지 눈물은 나지 않았다. 소연이도 그랬다. 이것은 너무 뜻밖에 일어난 일이었기 때문이다.
할머니와 할아버지는 막 울며 아빠한테로 다가갔다. 아빠는 할머니와 할아버지를 앉히고 우리한테로 다가와 웃는 얼굴로 이름을 불렀다. 그리고는 소연이를 품에 안았다. 나도 너무 기뻐 어쩔 줄을 몰라했다. 아빠는 우리를 한 번씩 안아 주고 윤미한테로 다가가 『윤미야, 윤미 엄마두 이제 가면 있다』라고 말하는 것이었다.
나는 고모도 아빠와 같이 있다는 소리를 듣고 더욱 놀랐다. 아빠는 우리와 몇 시간 동안 기쁨을 나누었다. 그리고 갑자기 우리 보고 가자는 것이었다. 알고 보니 아빠는 여기에 살지 않고 멀리 떨어진 곳에 살고 있었다. 우리는 옷을 모두 입고 아빠를 따라 밖으로 나왔다.
친척들은 우리를 버스 정류장까지 바래다 주었다. 버스 정류장에서 친척들과 작별 인사를 나누고 버스에 올랐다. 버스는 서서히 우리가 첫발을 내디뎠던 곳을 떠나갔다.
우리는 버스를 타고 몇 시간을 갔다. 가는 도중 우리의 마음은 대단히 기뻤다. 그것도 타보지도 못했던 버스를 타고 가니 재미있었고 즐거웠다.
할아버지와 할머니도 기뻐서 어쩔 줄을 몰라 했다. 몇 시간을 가서 기차역에 이르렀다. 기차역은 대단히 컸고 멋 있었다. 더군다나 안에 들어가 보니 여러 가지 보지 못했던 것들이 있었다.
아빠는 우리를 의자에 앉혀놓고 차표 사러 가겠으니 여기에 가만히 있으라는 것이었다. 나는 이때 「아빠가 이제는 중국말이랑 중국에 대한 것을 다 아는 모양이다」 하고 생각하였다. 우리는 아빠의 지시대로 의자에 앉아 꼼짝하지 않았다. 그것은 아직도 무서움증이 많았기 때문이다.
사방에서 들려오는 말소리들은 모두 혀 꼬부라진 처음 듣는 소리들이었고 사람마저 막 무서웠다. 그런데 이때였다. 우리가 가만히 앉아 있는데 어떤 여자가 와서 우리한테 별난 소리로 뭐라고 말하는 것이었다.
우리는 너무 무서워 그 소리를 들은 척 만 척하고 고개를 돌려 다른 데를 바라보았다. 그 여자는 한참 뭐라고 말하더니 그냥 가버렸다. 나는 이 여자가 왔다 간 다음부터 무서워 진땀이 줄줄 났다. 조금 있다가 아빠가 왔는데 차표를 사고 또 도중식사들을 사왔다.
우리는 기다리다가 기차를 탈 시간이 되어 아빠를 따라 기차를 탔다. 기차에 오르니 정해진 자리가 다 있었고 자리에 앉으니 대단히 푹신푹신하였다.
조선 같으면 딱딱한 나무 의자이었겠는데 그렇지 않았다. 그리고 창문들도 모두 있었고 어느 한 사람이나 서있지 않았다. 또 떠날 때에는 소리 하나도 없이 서서히 가는데 창문을 보지 않고는 가는지 안 가는지 분간하기가 어려웠다.
조선 같으면 떠날 때에는 콱 하며 막 넘어질 때도 있었겠는데 그렇지 않았다. 그리고 또 가는 도중 손님들은 먹을 것을 식탁 위에 가득 올려놓고 계속 먹으며 가는 것이었다. 조선 같으면 손님들이 기차를 타고 갈 때면 도중식사도 없어 굶는 형편인데 중국은 전혀 딴판이었다. 우리는 가고가고 또 갔다. 어느 새 날은 새까매졌다.
내가 조금 잠들었는데 할머니가 나를 깨웠다. 목적지에 도착했다는 것이다. 우리는 짐을 가지고 기차에서 내렸다. 이때 웬 여자들이 우리한테로 다가왔다. 가까이 가서 보니 그 중 한 여자는 다름아닌 고모였다. 바로 윤미 엄마인 것이었다. 고모는 다가와 기뻐하며 우리들을 하나하나 포옹해 주었다. 할머니와 할아버지는 고모를 보자 너무 기뻐 포옹하며 우셨다.
고모는 윤미한테로 다가가 『이게 내 딸이야?』 하고 농담을 하면서 윤미를 꼭 껴안았다. 윤미는 너무 어린 나이에 엄마와 헤어지다 보니 엄마를 알아보지 못하고 슬슬 피하였다.
이윽고 우리는 아빠를 따라 어느 차로 다가가 그 차를 탔다. 밖은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 캄캄해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다. 조금 후에 차는 기차역을 떠나 한참 달렸다. 한 몇 시간이나 달렸나 차가 멈추었다. 내리라고 해서 내리고 보니 밖은 캄캄한데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다.
우리는 아빠를 따라 고모랑 함께 한참 걸어갔다. 한참 걸어가니 앞에 무슨 집 같은 것이 보였다. 아빠는 대문을 열고 그 집으로 우리를 이끌고 성큼성큼 들어갔다. 이때 별안간 사방에서 개짖는 소리가 듣기 싫게 들려왔다. 우리는 무서워 주춤하였다. 그러자 아빠가 『일없다』라고 하며 우리를 데리고 들어갔다.
대문을 열고 들어가니 집이 있었고 우리는 집문을 열고 들어갔다. 들어가니 캄캄한 게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다.
이때 고모가 다가가 전등 스위치를 찾아 불을 켰다. 그러자 어슴푸레한 붉은 불이 켜지더니 집안이 보였다. 방은 작고 부엌도 있었는데 방과 붙어 있었다. 이불장과 옷장도 있었다.
우리는 이제 신발을 벗고 방으로 올라갔다. 올라가자마자 고모는 할머니한테서 윤미를 받아 안아가지고 포옹하며 기뻐하였다. 그나저나 1년이나 헤어져 있던 엄마였다.
고모는 너무 기뻐 기쁨을 감추지 못하였다. 아빠도 들어오자마자 소연이를 안고 기뻐하였다. 우리는 가지고 온 짐들을 모두 풀어놓고 옷도 벗고 자리에 앉았다.
그리고 이때까지 있었던 일들을 모두 아빠와 고모에게 들려 주고 아빠와 고모도 중국에서 있었던 일들을 모두 우리에게 알려 주었다. 알고 보니 아빠는 집을 떠나 식량 구하러 간다고 해놓고 식량을 구할 방법이 없으니까 할 수 없이 맨손으로는 돌아갈 수 없길래 중국으로 넘어온 것이었다. 그리고 고모는 그저 지원받으러 나왔다가 아빠를 만나 같이 있게 되었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우리는 또 한 가지 일을 알게 되었다. 아빠는 중국에 와서 말도 모르고 아무것도 모르는 신세에, 또 도망쳐온지라 잡힐 수도 있었다.
이때 아빠가 도움받을 사람을 만났는데 지금 아빠를 보호해 주며 같이 있는 어느한 아줌마였다. 아빠는 하는 수 없으니까 이 아줌마의 보호를 받으며 같이 있는 것이었다.
이 아줌마는 중국 신분을 가진 중국 조선족 아줌마였는데 중국말도 잘하였다. 아빠가 있는 집은 아래 마을에 있었다. 그리고 우리가 지금 들어와 있는 집은 산 가운데 있는 외딴집이었다.
고모는 중국에서 아빠를 만났지만 아빠와 같이 있지 못하고 아빠가 있는 곳에서 조금 떨어진 시내의 다른 사람 집에서 살고 있었다.
아빠는 엄마의 사망 소식을 듣고 매우 슬퍼하였다. 그러나 슬퍼한들 무슨 소용이 있으랴. 돌아가신 엄마가 다시 돌아올 수도 없는 거고.
이날 밤 아빠와 고모는 집에 가지 않고 여기서 같이 잤다. 아빠가 말하기를 우리는 이제부터 이 집에서 살아야 된다는 것이었다. 다음날 아침이 되자 고모와 아빠는 집으로 돌아갔다.
할아버지와 나는 아빠를 바래다 주고 집 주변을 한번 돌아보았다. 집은 진흙으로 만든 벽체에 위에는 볏집으로 되었다. 그리고 주위에는 맨 나무들이었다. 옆에는 큰 길이 하나 있었는데 드문드문 사람들이 다니는 것도 보이고 또 차들도 있었다.
밑으로 마을이 보였는데 보이는 마을에 바로 아빠가 살고 있었다. 그리고 또 집에는 개가 두 마리 있었는데 처음엔 개들이 계속 나만 보면 짖기만 하였다. 그러다가 점차 익숙해져서 나는 매일 개만 데리고 놀았다.
그동안 아빠는 매일 한 번씩 집에 왔다갔다 했는데 올 때마다 자전거에 쌀이랑 반찬거리들이랑 옷이랑 가져오곤 했다. 아빠가 가져오는 걸로 매일 이밥만 먹는 게 대단히 좋았다.
비록 사람들이 없는 곳에 있지만 매일 잘 먹고 잘 입고 하니 좋기만 하였다. 우리는 이렇게 계속 생활하였다. 그러다가 어느 날 나는 갑자기 감기에 걸려 자리에 눕게 되었다. 아빠는 올라와서 나를 데리고 아빠가 있는 마을로 갔다. 그리고 그곳 의원으로 가서 무슨 주사를 놔 주는 것이었다.
병에 물이 절반 정도 차고 줄이 쭉 이어진 그것은 주사 같기도 하고 대단히 별났는데 아프지도 않고 대단히 좋았다. 나는 이것을 몇 시간 동안 맞고 아빠를 따라 어느 한 집에 들어갔다. 이 집이 바로 아빠가 있는 집이었다.
위에는 볏집으로 올렸는데 초가집이었지만 들어가보니 대단히 넓었다. 안에 들어가니 할머니 한 분이 계셨다. 할머니는 대단히 늙으셨는데 내가 아빠한테 누구냐고 물어보니 이 할머니는 아빠와 같이 있는 아줌마의 어머니되는 분이셨다. 나는 들어가 그 할머니와 인사를 나누었다. 할머니도 나를 보고 대단히 반가워하셨다.
아빠는 나보고 밥을 먹고 집으로 가자고 하면서 내가 밥 먹는 동안 조금 기다리셨다. 한 반 시간 정도 기다렸을 때 갑자기 집문이 열리더니 웬 아줌마가 들어왔다. 키는 큰 편이고 몸도 좋았다.
아빠는 그 아줌마가 들어오자 나에게 소개시켜 주고 나를 또 그 아줌마에게 소개시켜주었다. 나는 그 아줌마에게 인사를 하였다. 이 아줌마가 바로 아빠와 같이 있는 그 아줌마였다. 이렇게 나는 처음으로 이 아줌마를 보았다. 나는 아빠 집에서 밥을 먹고 아빠 자전거를 타고 같이 집으로 올라갔다.
집으로 올라오면서 이제부터 이 아줌마를 後(후)엄마라 생각하고 엄마라 부르라는 아빠 말에 나는 좀 서글픈 감이 들었다.
그러나 아빠는 한 가지만은 분명히 말해 주었다. 지금 부르는 엄마는 말 그대로 後엄마이지 우리의 진짜 엄마는 돌아가신 친어머니라고, 이 엄마가 우리를 낳아 주고 길러준 친엄마라며 엄마는 죽어도 잊지 말아야 한다고 말해 주었다.
나는 아빠의 이 말을 듣고 아빠는 아직도 엄마를 진정으로 사랑하고 있구나 하고 다시 한번 생각하게 되었다.
우리는 중국에 넘어와 첫 집에서 겨울도 채 나지 못하고 이사하게 되었다. 나와 소연이는 아빠집에 가서는 흐리멍텅 놀지 않았다. 중국 엄마한테서 중국 글을 익히기 위하여 (중국말의 子母音) 병음을 부지런히 연습하였다. 중국에서 있으려면 중국말과 중국 글을 알아야 하기 때문이었다.
중국 엄마는 어렸을 때부터 중국에서 살다 보니 중국말을 매우 잘하였다. 어렸을 때에는 열 살 전까지 조선말과 글을 모르고 자랐었다고 하였다. 우리는 매일매일 중국 엄마한테서 말과 글을 조금씩 익혀갔다. 그런데 이 중국말과 글은 배우기 쉬운 것이 아니었다.
배우고 돌아서면 까먹고 배우고 돌아서면 까먹고 기억나지 않았다. 그러다가 우리는 1999년 새해 양력설을 맞이하였다. 1998년 11월에 건너와서 처음 쇠는 설이었다.
아침 일찍 우리는 먹을 걸 가지고 아빠와 자전거를 타고 할아버지가 계시는 공장 부엌칸으로 새해 절을 올리기 위해 찾아갔다. 할머니네 집에 가니 할아버지가 반가워하며 맞아 주었다.
이날 다른 곳에 있던 고모도 왔었다. 모두 자리에 앉자 우리는 할아버지와 할머니 그리고 아빠와 고모에게 세배를 올리었다.
우리가 세배를 다 올리자 할아버지 할머니 아빠와 고모는 우리한테 각각 중국 돈 2원씩 주었다. 우리는 이 돈을 받고 매우 기뻤다. 이날 중국 엄마는 친척집으로 가 할아버지 집에 오지 못하였다. 할아버지는 『우리가 고생을 하며 두만강을 넘던 것이 어제 같은데 벌써 새해가 돌아왔구나』 하고 이야기를 펼쳐 놓았다.
나는 할아버지의 이런 말을 들으며 엄마도 이 자리에 같이 왔으면 얼마나 좋을까 하고 생각을 하며 눈물을 흘렸다. 우리는 설 명절 이야기로 가득 채우고 다시 집으로 돌아왔다.
우리는 집에 돌아와서도 공부를 열심히 하였다. 우리가 아빠네 집에 있던 어느 날 아빠가 우리한테 말하시기를 『철이야, 소연아 이사해야 된다. 너희 둘은 할머니랑 같이 살아야 한다. 짐을 꾸려라』하고 말하였다.
우리는 아빠가 짐을 꾸리라고 하기에 옷들과 학용품들을 모두 짐에 넣었다. 짐을 다 꾸리자 아빠는 짐을 양손에 들고 따라오라고 하였다. 골목골목 길을 따라 가다가 어느 한 벽돌집에 다다랐다.
아빠는 짐을 가지고 벽돌집으로 들어갔다. 집안에 들어가자 집은 원래 있었던 곳보다 훨씬 넓었다. 그리고 끝에는 부엌이 위치하고 있었다. 이때 웬 두 사람이 들어왔다. 돌아서서 보니 그 둘은 중국 엄마와 중국 사람이었다. 이 중국 사람은 이 집주인이었다. 중국 엄마와 중국 사람은 중국말로 한참 얘기하였다. 아마도 집을 흥정하느라고 그러는 것 같았다. 한 두세 시간 기다렸다.
밖에서 드르릉 하는 차소리가 울렸다 우리가 나가보니 할아버지 할머니 윤미가 차에서 내리고 고모도 뒤에서 내렸다. 차위에는 가구들이 쌓여 있었다.
우리는 할머니한테로 다가가 짐을 받아들고 윤미 손을 잡고 왔다. 이때 집문이 열리더니 중국 엄마가 나오셨다. 아빠는 중국 엄마가 나오자 할머니에게 다가가 『저 사람이 바로 내가 말하던 그 여자』라고 소개시켜 주었다. 할머니는 소개를 다 받고 나서 중국 엄마한테로 다가가 인사를 나누었다.
이날 우리는 온 집안 식구들이 달라붙어 짐을 나르고 정돈하며 정신들이 없었다. 오후부터 저녁까지 다 해서야 겨우 정돈이 되었다. 짐을 다 정돈해 보니 집이 깨끗하고 한결 더 넓어보였다.
할아버지는 집이 크고 좋자 입을 다물지 못하였다. 그러면서 『무슨 우리한테 이런 집을 마련해 주는가』 하고 물었다. 이때 아빠는 부모님과 아이들을 좋은 집에 있게 하고 싶었다고 말하였다. 나는 아빠의 이런 효성심을 보고 아빠를 더 존경하게 되었고 이 다음에 나도 크면 아빠처럼 되겠다고 맹세까지 하였다.
이렇게 우리는 중국에 와서 살던 두 번째 집을 떠나 세 번째 집으로 이사왔다.
이때 아빠는 중국 엄마와 함께 농사도 지어 주고 탈곡도 도와 줘 조금씩 돈을 벌곤 하였다. 그러다 보니 매우 가난하게 생활했다. 우리는 한없이 지루한 나날들을 보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아빠가 저녁에 집으로 찾아왔다. 무슨 영문인가고 물으니 우리가 다같이 이사해야 된다는 것이었다. 라디오를 들으니 지금 북한에서 중국으로 간첩들을 파견하여 脫北(탈북)하여 생활하고 있는 탈북자들을 모두 잡아오라고 했다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아빠는 이곳 사람들은 모두 우리가 탈북자라는 걸 알고 있으니 위태롭다는 것이었다. 또 당장 떠나야 한다며 내일 이사하겠으니 짐을 싸라고 하였다.
우리는 아빠의 이 말을 듣고 당황하여 두말 하지 않고 짐을 싸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아빠는 오늘 저녁은 중국 엄마와 버스를 타고 어디 갈 것인가를 살펴보고 오겠다는 것이었다. 아빠는 이 말을 남기고 부랴부랴 집을 나섰다. 할머니는 아빠가 나서자마자 짐을 싸자며 우리를 재촉했다. 우리는 할머니 지시에 의해 이불장과 옷장 그리고 여러 가지를 모두 지함에 싸고 짐 안에다 모두 넣었다.
버스는 우리를 싣자마자 무정하게도 세 번째 집과 작별 인사를 나눌 기회도 주지 않고 서서히 떠나버렸다.
차는 한참 달리다가 시내가 거의 끝나는 작은 마을 같은 곳에서 우리를 내려놨다. 우리는 아빠의 인솔에 따라 짐들을 마을 어귀에 갖다 놓은 다음 하나하나씩 운반하여 어느 집 앞에 갖다 놓았다.
짐을 다 날라놓자 아빠가 이 집이 바로 우리 집이라고 말했다. 빨간 벽돌집인데 몇집이 붙어 있었다. 그리고 집들은 한 집 한 집 벽돌로 경계를 갈라놓았다. 겉에서 보기에도 작아보였다.
이튿날 아침 아빠와 중국 엄마는 이제부터 쓸 물건들을 사오겠다며 집을 나서 장마당으로 나갔다.
아빠와 중국 엄마는 나갔다가 저녁 무렵에 집에 들어왔는데 큰 지함을 들고 왔다. 아빠는 들어와서 그 지함을 풀었다. 지함을 여는 순간 나는 깜짝 놀랐다. 내가 그렇게 바라고 바라던 텔레비가 지함 안에 담겨져 있는 것이 아닌가. 나는 그 자리에서 너무 좋아 아빠에게 감사하다고 몇 번이나 말했는지 모른다.
아빠는 텔레비를 가져다가 우리와 할머니네가 자는 방에다 설치해 놓았다. 다 설치해 놓고 실험해 보자 텔레비가 나오는데 이게 뭔가? 글쎄 한 번도 보지 못했던 채색이 나왔다. 빨간 옷은 빨간 옷으로 파란 옷은 파란 옷으로 명백하게 나오는데 이거야말로 꿈만 같았다.
게다가 더 놀라운 것은 텔레비가 올 때 무슨 작은 물건이 따라왔는데 글쎄 이 작은 것으로 누르면 텔레비가 조종되는 것이었다. 音量(음양)을 누르면 소리가 커지기도 하고 작아지도 하고 또 채널을 누르면 통로가 바뀌곤 하였다.
또 텔레비를 보니 조선에서는 한 개 통로밖에 안 나오던 것이 중국에서는 몇개나 되었다. 나는 이걸 보고 또다시 놀랐고 감탄을 금치 못했다. 나는 너무 놀랐고 또 기뻐서 한동안 그 자리에 가만히 서 있었다. 텔레비 세계에 대하여서는 소경이던 나는 이제 눈을 뜨게 되었다.
저녁이 되자 우리는 맛있는 음식들을 먹고 자리에 앉았다.
이제부터는 텔레비 감상시간이었다. 텔레비를 켜자 우리 모두는 텔레비 세계로 빠져 들어갔다. 우리는 이 집에서도 편히 살지 못했다. 맨날 조심하며 살아야 했다.
어느 날이었다. 아빠가 갑자기 우리에게 『우리 생활실태를 녹음해서 한국에 보내기로 했다』는 것이다. 나는 갑자기 이런 말을 하기에 믿어지질 않아 정말인가 하고 몇번이나 물어보았다. 그러면서 아빠는 정말이라며 내일 녹음하겠는데 오늘은 생활한 것을 되살리며 곰곰 생각해보라고 하였다.
아빠는 그날 저녁도 공책을 들고 뭘 물어볼 것인가 하는 것을 구체적으로 적고 있었다.
아침이 되자 우리는 밥을 먹고 운동을 했다. 우리가 앞마당에서 놀고 있는데 아빠가 우리를 불렀다. 집에 들어가 보니 녹음기가 설치되어 있었다. 아빠는 우리를 앉혀놓고 어떻게 해야 된다는 걸 알려 주었다.
중국 엄마는 우리가 녹음한다는 소리를 듣고 어디로 놀러나갔다. 이윽고 녹음이 시작되었다. 나와 소연이는 가슴이 조금씩 두근거렸다. 아빠가 『시작한다』하고 말하고 손으로 녹음기 스위치 두 개를 같이 『착』하고 눌렀다.
녹음이 시작되자 아빠는 우리에게 먼저 처음부터 물어보았다. 아빠가 모든 것을 사실 그대로 성심성의껏 말하라고 해서 우리는 모든 것을 사실 그대로 녹음에 담았다. 드문드문 가다가 말문이 막히거나 소연이가 잘 말하지 못하면 아빠는 녹음기를 멈췄다가 다시 알려 주고는 녹음하곤 하였다.
처음엔 좀 마음이 두근거렸다. 하지만 조금 지나자 두근거리던 마음은 없어지고 매우 자연스러워졌다. 우리는 북한에서 힘든 생활을 하던 눈물어린 사연들을 하나도 빼놓지 않고 모두 녹음하였다.
녹음하다가 엄마가 사망하던 사연에 가서는 소연이가 막 울먹울먹하였다. 우리는 녹음을 쉬었다 다시 하고 쉬었다 다시 하며 오전시간을 다 보내고 오후시간을 다 보내서 녹음을 모두 끝마쳤다. 아빠가 그저 모두 사실 그대로 말하라고 해서 우리는 아빠가 묻는 물음물음마다 모두 그대로 열심히 말하였다.
다음날 아빠는 우리가 녹음한 걸 다시 들어보며 검사하였다. 다 듣고 아빠는 우리가 잘했다고 칭찬해 주었다. 그날 오후 아빠는 엄마와 함께 우체국으로 가서 이걸 한국으로 우편을 통해 보냈다.
어느 날이었다. 아빠가 중국 엄마에게 말하기를 『내가 어제 전화를 받았는데 그 한국에 계시는 조선일보사 선생님이 며칠 후에 오신다』라고 하였다. 아빠가 이걸 우리에게 직접 말해 주지 않고 내가 엿들은 것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우리가 학교에서 돌아오자, 아빠가 『이제 한국 선생님이 오는데 아마 우리들 때문에 올 것이니 말을 잘 들어야 한다』고 하였다. 우리는 이 말을 듣고 『알았다』 하고 스쳐버렸다. 이렇게 며칠이 지났다.
아빠는 다시 한국 선생한테서 전화를 받았다. 그리고는 내일 온다며 고모와 중국 엄마를 그날 심양으로 보냈다. 아빠는 집에 있으며 소식만 기다렸다. 엄마와 고모가 떠난 다음날 저녁이었다. 우리 둘은 잠자리를 펴고 누웠다. 아빠는 우리 먼저 자라며 눕지 않았다. 우리는 아무 생각없이 잠자리에 누워 잤다. 내가 한참 자고 있는데 갑자기 버스럭 버스럭 하는 소리가 났다. 그래서 나는 이 소리에 눈을 떴다.
눈을 떠보니 중국 엄마가 돌아왔는데 옆에는 웬 사람이 있었다. 그리고 아빠가 있었고 짐들도 많았다. 이때 내가 눈 뜬 것을 본 아빠는 나를 보고 일어나라고 하더니 이 선생님이 바로 그 「조선일보사」 선생님이라고 하였다. 나는 그 선생님에게 머리를 숙여 인사를 하였다. 그러자 그 선생님은 나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이렇게 몇시간을 보내자, 날이 밝았다. 아침이 되자 소연이도 일어났고 우리는 세면을 하였다. 이날 아침은 아빠가 이 한국 선생님을 데리고 식당으로 갔다. 우리는 엄마와 함께 집에서 밥을 먹었다. 몇시간이 지나자, 아빠와 선생님은 돌아왔다. 이 선생님은 집에 오자 웃옷을 벗고 우리와 마주 앉았다. 그리고는 우리가 녹음한 테이프를 다 들었다며 우리한테 북한에서 살던 실태를 하나하나 다시 물어보았다.
우리는 선생님이 물어보는 것을 모두 사실 그대로 대답해 주었다. 이렇게 이 선생님은 몇시간 동안이나 우리와 대화를 하였다. 그날은 오후에도 계속 대화하였다. 그리고 그 선생님은 무엇을 적기도 하였다. 또 그 선생님은 우리 둘의 사진도 찍었다. 선생님은 우리집에 며칠 동안 있었다. 또 아빠하고 얘기도 많이 하였다. 우리에게 시계도 선물해 주었고 많은 것을 해 주었다.
그 일이 있은 뒤 어느 날 아빠가 가족회의를 열었다. 아빠가 처음 이런 말을 꺼냈다.
『아버님네는 따로 나가서 사시는 게 어떻습니까?』라고 할아버지한테 물어보았다.
그러자 할아버지가 『이사라고? 응응… 그래 그러는 게 좋겠다. 집도 작고 하니 집만 있다면 우리끼리 조용히 사마』 하고 미리 생각했듯이 말을 하였다. 나는 이 말을 듣자 깜짝 놀랐다.
「할아버지랑 어디 가 산단 말인가. 또 할아버지네가 가면 우린 어쩐단 말인가?」하는 생각부터 앞섰다.
그 다음에도 아빠와 할아버지는 무슨 말을 계속했다. 몇 시간 후에 이야기가 끝났는지 모두 자리에서 물러났다. 할아버지는 이 얘기를 한 다음부터 기분이 상했는지 아무 말도 하시지 않았다.
다음날 아빠는 중국 엄마와 함께 집을 얻어 본다며 버스를 타고 떠났다. 아빠가 떠난 다음에도 할아버지와 할머니는 계속 아무 말도 하시지 않으셨다. 아마도 할아버지네는 아빠가 귀찮아 쫓으시는 것처럼 생각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나도 할아버지가 이러자 아무 말도 하고 싶지 않았다.
그날 저녁이 돼서야 아빠가 돌아왔다. 와서는 집이 마련되어 있다는 것이었다. 흑룡강성 해림市의 어느 집인데 우리가 처음 중국에 와서 살던 곳이라는 것이었다.
나는 이때서야 비로소 우리가 살던 곳 이름을 알게 되었다. 그러면서 아빠는 거기는 고모네와도 가까우니 좋다는 것이었다. 할아버지와 할머니는 별로 안 좋은 얼굴색으로 이것을 승낙하였다. 이제 일주일 후에 이사하자고 아빠가 말하였다.
우리는 할머니네가 이사간 다음 집에서 공부를 시작하였다. 전에 배운 것을 하나하나 익혀가면서 열심히 공부를 하였다. 그리고 하루에 중국말 열 개 단어씩 외우곤 하였다.
그날 임무를 다 완성하지 못하면 저녁밥을 못 먹곤 하였다. 그런데 중국 말을 배우기가 쉽지 않았다. 어제 열 개 외웠다면 오늘은 세 개밖에 기억나지 않았다. 우리가 이렇게 계속 배운 것을 익히지 못하자 아빠는 고민 끝에 우리를 학교에 보내기로 하였다. 그래서 어느 날 아빠는 중국 엄마와 같이 학교를 찾아다녔다.
그날 저녁에 돌아온 아빠가 『시내 학교에 보내자니 돈이 너무 많이 들어. 그리고 여기서 좀 떨어진 농촌학교가 있는데 거기에 다니기로 하자』라고 하였다.
그런데 그 곳은 여기서 좀 멀었다. 만약 그 학교를 다니자면 자전거 없이는 다니지 못할 형편이었다. 그래서 아빠는 고민 끝에 또 이사하기로 하였다.
첫째로 시골이니까 집세가 싸겠고, 둘째로 우리들 학교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이사를 한 뒤 학교에 간다는 말을 듣고 그 날 저녁 우리는 잠자리에 누워 전에 배웠던 것을 되살려 보았다. 아니 그런데 이게 웬 일인가? 글쎄 곱하기 나누기도 모두 기억이 나지 않았고 전혀 모르는 것이다. 소연이는 북한에서 2학년 올라갈 때 왔으니까 2학년에 다니면 되는데 내가 큰 문제였다. 나누기 곱하기도 모르다니, 숨이 막힐 일이었다. 이때 나는 이렇게 한심했었다.
다음날 아침 나는 세수를 하고 이를 닦고 옷을 깨끗이 입고 중국 엄마가 사준 가방에다 책 몇 권을 넣고 동생, 아빠, 중국엄마와 같이 집을 나섰다.
학교에 들어가는데 다른 아이들이 중국돈 1000원을 냈다면 나는 중국돈 500원을 냈다. 그리하여 소연이와 내가 학교에 들어가는데 돈 1000원을 냈다. 이것은 다른 아이 한 명이 내는 값과 같았다.
나는 4학년 2학기에 들어갔고 소연이는 2학년 2학기에 들어갔다. 모든 것이 다 끝나자 교장선생님은 먼저 나를 데리고 교실 안으로 들어갔다. 그때 나의 마음은 얼마나 두근거렸는지 모른다. 그래도 『이곳은 조선족 학교니까 조선말도 하고 일 없겠지』라고 생각하며 마음을 진정시키곤 했다.
이곳은 조선족 아이들만 모여서 공부하는 조선족 소학교였다. 이때는 교장선생님도 내가 북한에서 온 아이라는 것을 전혀 모르고 있었다. 처음부터 아빠가 알리지 않기로 했다.
만약 다 알면 좋지 않기 때문이었다. 나는 교장선생님을 따라 교실로 들어갔다. 수업시간이었다. 교장선생님이 선생님과 학생들에게 나의 이름을 소개시켜 주고 앞으로 함께 공부할 것이라고 했다.
그러자 우렁찬 박수가 들렸고 나는 머리를 숙여 인사했다. 인사가 끝나자 선생님은 나를 빈 자리에 앉혔다. 교장선생님은 내가 자리에 앉는 것을 보고 나가셨다. 수업 시간이 끝나자 아이들은 나한테로 다가와 이것저것 물어보았다. 맨처음 아이가 어디서 왔는가 나에게 물었다. 나는 이 아이의 질문에 조금 망설이다가 내가 처음 있던 해림에게 왔다고 대답해 주었다. 그러자 그 애는 알았다는 듯이 머리를 끄덕였다.
이날 우리는 수업 한 시간을 하고 집으로 돌아왔다. 이렇게 우리는 쉽게 학교를 다니게 됐다. 다음날부터 우리는 본격적으로 학교를 다니기 시작했다. 수업시간에는 선생님 설명들을 모두 귀담아 들었다. 특별히 漢語(한어)는 하루에 한 시간씩 있는데 그 시간에는 더 특별히 귀담아 들었다. 그리고 귀담아 듣고는 집에 와서 또 중국 엄마한테서 배우곤 하였다. 그런데 이 漢語는 대단히 힘들었다.
어느 날이었다. 선생님은 내가 북한 아이인 줄 모르니까 漢語 교과서를 읽어보라고 하였다. 이 말을 들은 나는 단번에 얼굴이 빨개져 버렸다. 그리고는 선생님한테 지금은 못 읽겠다 하고, 다음에 읽겠다고 대답해 주었다. 그러자 선생님은 괜찮다면서 계속 읽으라고 하였다. 그래도 내가 안 읽겠다고 하자 선생님은 더는 시키지 않았다. 나한테는 이 방법밖에 다른 방법이 없었다.
나는 매번 漢語 시간을 계속 이런 방법으로 넘기곤 했다. 그러다 보니 모든 과목중에서 漢語 시간이면 나에겐 대단히 불안한 시간이었다. 다른 건 다 잘하는데 漢語가 막혔다. 나는 이런 漢語를 잘하려고 집에서도 열심히 공부했다.
그래서 몇 달이 지난 후에는 글자를 조금씩 읽을 수 있게 되었다. 그러던 어느날 나는 선생님의 지명을 받아 교과서를 읽게 되었다. 그래서 글자도 조금 알아 한번 읽어 보았다. 그런데 내가 읽는 글자글자마다 아이들이 모두 웃는 것이었다.
나는 이때 정말로 창피해서 눈물을 흘릴 뻔했다. 글자도 틀리게 읽거니와 중국 글을 읽는 데는 聲音(성음)이 있는데 이것이 틀리면 뜻이 전혀 다르게 변하고 또 웃겼던 것이다. 나는 이날에 당한 창피함을 영원히 잊지 못할 것이다. 나는 이날부터 漢語에 더 열심히 노력을 기울였다. 그런데 모든 것이 쉽게 되지 않았다.
바로 이때 해림에 계시던 할머니네가 우리 마을로 이사를 왔다. 그것은 해림에서 또 불길한 소문이 떠돌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아빠는 미리 이걸 예방하기 위해 우리가 있는 곳으로 옮긴 것이다. 집은 마을 뒤켠의 초가집을 잡았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나는 아빠와 함께 할머니 집으로 갔다. 우리가 방에 들어서 앉자 할머니는 무슨 망설이는 일이라도 있는 듯이 계속 진정하지 못했다. 그래서 아빠가 무슨 일이 있으면 말하라고 하였다. 이제야 할머니는 아빠한테로 바싹 다가와 『내가 오늘 동네 아매들과 놀다가 어떤 아매가 마음이 곱고 순진해서 잘 지내자고 우리가 북한에서 왔다고 말해 줬어. 이거 일 없겠소?』하고 말하는 것이었다.
이 말을 들은 아빠는 놀라면서 『그러면 안 됩니다. 그 노인이 우리도 다 아는데 그렇게 하면 어쩝니까? 누구한테도 말하지 말아야지. 천길 물 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속은 모른다고, 어떻게 믿습니까?』라고 말하자 할머니도 난처해 하며 『이미 다 말해놨는데 어떻게 하겠소?』라고 말하며 걱정하였다.
그러자 아빠는 곰곰 생각해 보더니 『안 되겠습니다. 이사해야겠습니다』라고 말하고는 또 다른 말들을 많이 하였다. 하여튼 이사하자는 뜻이었다. 옆에서 듣고 있던 나에게는 큰 불행이었다. 이제 겨우 마음이 안착됐는데, 또 이사가자니 말도 안 되었다. 그러나 이런 상황에선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그리하여 다음날부터 우리는 또 짐을 싸기 시작했다. 짐은 전보다 더 늘었다. 짐을 다 싸니 한 차가 되었다.
드디어 이사할 날이 왔다. 이날도 車가 와 짐을 실었다. 車는 한 30분 달렸다. 다 달리고 멈춰서니 어느 한 아파트였다. 내가 중국 엄마한테 여기가 우리 집인가 물어 보니 그렇다고 하였다. 나는 믿어지지 않았다. 어떻게 우리가 아파트에서 살 수 있단 말인가?
잠자는 방 두 칸, 화장실, 부엌, 중간방, 다음 또 조그만 방 하나가 있었다. 우리는 집을 다 본 다음 짐들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텔레비는 중간방에다 놓고 뭐는 어디다 놓고… 물건들을 다 놓고 청소까지 깨끗이 해놓자 시간은 많이 흘러갔고 집은 보기 대단히 좋아졌다. 이렇게 우리는 또 다섯 번째 집을 떠나 여섯 번째 집으로 이사해 왔다.
한 주일 있다가 아빠는 할머니네도 이사를 시켰다. 그곳도 고모와 연계하기가 가까운 어느 농촌이었다.
그동안 우리는 돈을 아껴 썼다. 이것은 아빠가 한국에 가겠다고 했기 때문이다. 중국에서 아빠는 말도 모르니 한국으로 가기로 결정했다. 중국에 사는 조선족으로 위장하고 말이다. 아빠는 첫째로 한국에 가야 살 수 있고, 둘째로 한국은 우리와 한 민족이기 때문이라고 했다.
우리는 아빠를 한국으로 보내기 위해 온갖 힘을 다 썼으며 아빠도 열심히 노력하였다. 이런 노력 덕분에 돈을 다 모으고 아빠는 한국으로 가기 위해 중국 엄마와 집을 나섰다. 만약 아빠가 가면 우리는 중국 엄마와 함께 있어야 했다.
아빠와 중국 엄마가 가자 고모가 집에 와서 중국 엄마가 올 동안 밥을 해 주었다. 아빠가 집을 떠난 지 보름이 되는 날 중국 엄마가 아빠를 바래다 주고 집으로 돌아왔다. 중국 엄마는 아빠가 간 다음 매우 슬픈 표정이었다. 중국 엄마가 돌아온 그날 저녁 아빠한테서 전화가 왔다. 이제 금방 한국 비행장에 도착했다고 하였다. 우리는 이 말을 듣고서야 안심하였다. 이렇게 아빠는 우리를 두고 한국으로 갔다.
아빠가 간 다음 우리는 중국 엄마와 세 명이서 살았다. 우리는 계속 열심히 학교를 다녔다. 그러던 5학년 1학기 시험에서 나는 우리 반에서 2등을 하는 자랑스런 성과를 거두었다. 이때 나는 세상의 무엇보다도 더 기뻤다. 이렇게 나는 중국글과 말을 따라잡았다.
내가 5학년 때 아빠는 한국에서 무슨 조사받는 기관을 거쳐 사회에 나왔다고 하였다. 그리고 두 달 후에는 아빠가 돈을 보내 고모를 한국으로 가게 하였다. 그런데 고모는 중국말을 몰랐다. 때문에 고모도 조선족으로 위장해야 하는데 옆에서 동행자가 있어야 했다. 이때 마침 중국 엄마가 아는 여자가 한국으로 가려고 했다.
그래서 고모는 이 여자와 함께 바다로 해서 한국으로 넘어갔다. 고모도 한국에 도착하자마자 북한 사람이니 조사기관으로 갔다. 이제는 아빠와 고모, 즉 집안의 기둥들이 다 한국으로 갔다.
아차 내가 잊어먹었군! 고모가 가기 전에 할아버지는 몸이 쇠약해져 풍이라는 병을 만나셨다. 그래서 할아버지는 얼마 더 사시지 못하고 그만 하늘나라로 가셨다. 할아버지의 마지막 유언이 꼭 한국으로 가라는 것이었다.
할아버지가 돌아가신 다음 얼마 안 있다가 고모가 한국으로 갔다. 이제는 다 갔으니 남은 사람은 할머니, 나, 소연이, 윤미였다. 나와 소연이, 중국 엄마는 같이 있고 윤미와 할머니는 다른 곳으로 이사해 있었다.
시내로 이사온 우리는 그래도 계속 열심히 공부하였다. 아빠는 한국으로 가고 집에는 중국 엄마와 나 소연이 셋이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갑자기 아빠한테서 전화가 왔다. 이때 전화를 받은 것은 중국 엄마였다. 중국 엄마는 아빠한테서 뭐라고 말을 듣고는 알았다며 전화를 내려놓았다. 그리고 중국 엄마는 이제 일본에서 기자들이 우리를 만나러 온다는 것이었다. 만나러 오는 이유는 또 우리 생활 실태와 우리들을 보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우리와 얘기를 나누려고 하는 것이었다.
이렇게 며칠이 지났다. 저녁쯤에 우리집에 전화가 왔다. 통화가 끝나자 중국 엄마가 우리에게 말하였다. 지금 일본 사람들이 여기서 얼마 떨어진 「목단강」의 어느 한 호텔에 와있다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중국 엄마는 내일 가야 한다고 하였다.
다음날 우리 셋은 옷을 단정히 입고 거리로 나갔다. 우리는 택시를 집어탔다. 한 반 시간이 걸려 택시는 큰 도시인 「목단강市」에 도착하였다. 우리는 택시에서 내려 돈을 내고 다음 곧바로 그 호텔을 찾아들어갔다. 호텔은 매우 화려하고 멋있는 고급호텔이었다.
우리는 중국 엄마를 따라 계속 들어갔다. 들어가다 중국 엄마는 엘리베이터 앞에서 멈추었다. 그리고 엘리베이터 스위치를 눌렀다. 나는 여기서 더욱이 놀랐다. 난생 처음으로 보는 엘리베이터였다. 조금 있다 엘리베이터 문이 서서히 열리었다. 우리는 중국 엄마를 따라 안으로 들어갔다. 우리는 처음으로 타보므로 매우 신기하였다. 올라갈 때 얼마나 어지럽던지 혼났다. 몇초도 안 걸려서 1층에서 4층으로 올라갔다.
이윽고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자 앞에 웬 사람이 서있었다. 이 사람은 우리를 보자 한국 말투로 『혹시 일본 기자들을 만나러 온 분들이 아니에요?』 하고 물어보았다. 그래서 우리가 옳다고 대답하자, 그는 반갑다며 악수를 했다. 우리는 그의 안내를 받아 어느 방으로 들어갔다. 들어가자 웬 사람 한 명이 있었다.
조선족 사람은 우리에게 일전의 한국 손님처럼 우리의 생활실태에 대해서 묻기 시작했다. 우리는 전에 대답했던 것처럼 물어보는 것 모두 그대로 대답해 주었다. 그러자, 이 선생은 말을 듣고 일본선생에게 일본 말로 번역해 주곤 하였다.
이렇게 우리는 몇시간 동안 얘기를 나누었다. 얘기가 끝나자, 우리는 일본 선생의 안내를 받아 사진 한 장을 찍었다. 그리고 중국 엄마에게 무슨 종이봉투를 주었다. 나는 그들과 헤어져 집에 가면서 이렇게 생각했다. 「우리가 대단한 것 같아. 한국, 일본 기자선생들까지 만나구 정말 대단한 것 같아」하고 생각했다. 택시는 반시간 달려 집에 도착했다. 집에 들어가서 우리는 먼저 밥부터 먹었다. 밥을 다 먹고 중국 엄마가 일본 사람이 준 종이봉투를 뜯었다. 봉투를 열어 보니 그 속에는 중국돈 1000원이 들어 있었다.
3장·몽골 잠입-두 번의 탈출
우리는 계속 세 명이서 지냈다. 그러던 어느 날 갑자기 낯선 남자들이 우리집에 전화를 걸어왔다. 이 사람들이 누군가 알아 보니 고모를 배에 태워 한국으로 보내던 사람들이었다. 이 사람들은 중국 엄마에게 만나자고 하였다.
그래서 중국 엄마는 나가서 그 사람들을 만나고 왔다. 중국 엄마는 갔다와서 『지금 우리더러 돈을 내라 한다』고 하였다. 나는 무슨 영문인지 몰라 다시 물어보았다. 그러자 중국 엄마가 고모와 같이 간 여자를 말하며 『지금 고모 돈은 다 냈는데 그 여자가 돈을 내지 않았단다. 그래서 고모를 보내 준 사람들이 이 여자집에 가서 돈 내놓으라고 했더니, 돈이 없다고 하여 그 여자와 같이 간 고모를 생각해 우리집에 와서 돈을 내놓으라고 하는 것이다. 그 돈 액수는 엄청나다』라고 이야기해 주었다.
우리는 이 일을 전화로 아빠한테 알렸다. 그러자 아빠는 그저 가만 있으라고만 하였다. 그런데 이 남자들은 글쎄 우리집은 어떻게 알았는지 집까지 찾아와 행패를 부렸다는 것이다.
집에 와보니 담배꽁초들이 여기저기에 굴러다녔다. 우리는 이 일을 다시 아빠한테 자세히 알려 주었다. 그러자 아빠가 말하기를 빨리 그 집에서 떠나라고 하였다. 떠나서 멀리 다른 곳에 가 있으라고 하였다.
그러지 않다간 큰 피해를 입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날 저녁으로 중국 엄마를 따라 돈만 가지고 집을 나왔다.
집을 나와서 어디로 갈까 하다가 중국 엄마의 친척이 되는 집으로 가기로 하였다. 그래서 우리는 그날 저녁으로 택시를 타고 4시간이나 갔다.
중국 엄마의 친척집은 완전한 농촌인데 농사를 짓고 살았다. 우리는 이 집에다 아무 얘기도 하지 않고 그날 밤을 잤다. 다음날이 되자 중국 엄마는 아침부터 생각을 신중히 하고 있었다. 아무래도 그들이 꼭 따라올 것만 같았다.
이렇게 계속 생활하던 어느 날 아빠한테서 전화가 왔다. 그때 전화는 우리 집에 없고 중국 엄마의 친척집에 있었다.
가서 전화를 받아보니 아빠가 말하기를 이제 한 10일 있다가 어느 한 한국 선생이 우리를 데리러 온다는 것이다. 전에도 그저 그렇게 될 것 같다고만 했는데 이번처럼 데리러 온다고 말하기는 처음이었다. 그래서 정말인가 물어 보니 정말이라고 하였다.
그러면서 이제 할머니와 윤미도 올 것이라고 했다. 할머니와 윤미는 아빠의 친구가 데려다 우리집까지 온다는 것이었다. 만약 할머니와 윤미가 오면 그 한국 선생님의 지시에 따라 소연이와 나까지 합쳐 네 명은 그 선생님 따라 하라는 것이었다. 그러면 한국까지 무사히 올 수 있다고 하였다. 우리는 알았다고 대답했다.
일주일이 지난 후 할머니와 윤미, 그리고 데려다 주는 아빠의 친구가 지금 연길역에 도착했다는 것이다. 그러니 빨리 데리러 오라고 하였다. 중국 엄마와 나 소연이는 이 소식을 받고 즉시로 택시를 타고 연길역에 도착하였다. 그런데 아무리 둘러봐도 할머니 일행은 보이지 않았다.
한참 두리번거리고 있는데 옆에서 『야, 여기다. 철이야』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래서 내가 돌아 보니 할머니와 윤미가 손을 흔들고 있었다. 우리는 너무 보고 싶던 할머니와 윤미인지라 단숨에 달려갔다. 할머니는 전보다 많이 야위셨고 윤미는 키가 많이 컸다. 우리는 한참 거기서 기쁨을 나누다가 택시를 타고 다시 집으로 왔다.
집에 도착해서 옷과 짐들을 모두 내려놓고 이야기를 나누었다. 할머니는 이틀전에 아빠한테서 전화를 받고 아빠 친구를 따라 왔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우리는 그동안 있었던 일들을 모두 털어놓고 이야기를 나누었다. 다음날 아침, 할머니를 바래다 준 그 아저씨는 돌아갔다.
며칠 있다가 아빠한테서 또 전화가 왔다. 아마 그 선생이 내일쯤 올 것이라고 하였다. 우리는 이렇게 되자, 이번엔 정말 가는구나 하고 생각했다. 이 소식에 제일 슬퍼하는 것은 바로 중국 엄마였다.
이때까지 중국에 처음 와서부터 우리를 도와 주며 함께 하던 중국 엄마였다. 비록 친 엄마는 아니지만 우리의 심정을 다 이해하고 친 자식같이 따뜻이 대해 주던 중국 엄마였다. 중국 엄마는 이 소식을 듣고 매우 슬퍼하였다. 이제는 중국땅엔 자기와 연관이 있는 사람들은 없어지겠구나 하는 슬픔 때문일 것이다. 나와 소연이도 대단히 슬펐다.
언젠가는 친 엄마가 아니라고 막 행패를 부리던 나였다. 그런데 중국 엄마는 그 일이 언제 있었던가 하는 식으로 하나도 노하지 않았다. 이제는 중국 엄마 곁을 떠난다니 생각할수록 슬펐고 가슴이 아팠다.
어느덧 하루가 다 가고 그 선생이 올 날짜가 되었다. 이날 오후 6시쯤 어느 조선족에게서 전화가 왔다. 지금 그 선생이 연길의 어느 호텔에서 기다린다고 하였다. 이 조선족은 아마도 안내자일 것이다.
즉시 중국 엄마는 옷을 입고 혼자서 호텔을 향하였다. 중국 엄마가 한두 시간 정도 있다가 갑자기 어떤 사람하고 집에 들어섰다. 우리는 그 선생님을 보자 대뜸 알아차리고 인사를 하였다.
그러자 그 선생님은 들어와서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우리의 머리를 쓸어 주었다. 그리고 윤미를 보고 한국말로 『얜 걸을 수 있어요?』하고 할머니한테 물어보았다. 그러자 할머니가 『걸을 수 있습니다』라고 대답하자 그 선생님은 그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는 가지고 온 짐가방에서 물건들을 꺼냈다. 동복, 신발, 양말 등 할머니, 나, 그리고 소연이의 물건들을 모두 꺼내놓았다. 그리고는 중국 엄마에게 뭐라고 한 참 얘기하였다. 다음 그 선생님은 『다시 뵙겠습니다』하고 인사를 하고는 집을 나섰다. 우리도 그 선생에게 인사를 하였다. 그리고는 가지고 온 짐들을 모두 정리하였다.
이것은 모두가 아빠가 보낸 것이었다. 전번에 아빠가 신발이랑 그 선생에게 주었다고 하였다. 우리는 물건들을 모두 치웠다. 중국 엄마는 그 선생을 바래다 주고 집으로 들어왔다. 그리고 우리에게 말하였다.
『이제 12월3일에 도문에 오랍니다. 거기 가면 사람이 기다리고 있답니다. 그대신 준비를 잘 하랍니다』
다음날 할머니는 윤미 신발이 없어 엄마와 함께 나가서 신발을 사왔다. 다음 우리는 짐들을 싸기 시작하였다. 될수록 짐들을 최대한 없앴다.
내가 책들을 싸가자고 하자 할머니는 나를 꾸짖었다.
『야, 이게 뭐 공부하러 가는 줄 아니, 다 필요없어』하며 다 가져가지 말라고 하였다. 다음날 우리는 택시를 타고 도문으로 향하였다. 2시간 정도 가니 도착하였다.
우리는 차를 타고 도문 기차역에 도착했다. 도착하자마자 우리는 기차역 안으로 들어가 의자에 앉았다. 우리는 앉아서 그 선생이 데리러 오기를 기다렸다. 10분이 지나고 20분이 지나고 계속 기다렸다.
그런데 1시간이 지나도 오지 않았다. 그래서 중국 엄마는 밖으로 나가 그 선생을 찾아보았고 우리는 안에서 사람마다 그 선생인가 살펴보았다. 계속 찾다가 2시간 정도 지났다.
그래서 중국 엄마는 앉아서 기다려 보자고 하여 우리는 앉아 있었다. 우리는 윤미와 소연이를 특별히 앞에 세워 그 선생이 알 수 있게 하였다.
이때였다. 어떤 사람이 우리에게 다가왔다. 그 사람은 우리에게 『한국으로 갈 사람들인가요?』하고 물어보는 것이었다.
그래서 우리가 맞다고 하자 그는 그 선생이 보내서 온 사람이라고 하였다. 이 사람은 우리를 안내하는 중국 조선족 사람이었다. 그 사람은 우리에게 따라오라면서 짐을 졌다. 우리는 그 사람을 따라 한참 가다가 어느 한 방에 들어갔다. 방에 들어가자 사람들이 대단히 많았다. 나는 이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이겠지 하고 생각하였다. 그런데 이게 아니었다.
조선족 사람은 거기에 있는 사람들에게 우리를 소개해 주었다. 그리고 이 사람들은 우리와 같이 가야 할 사람들이라고 했다. 나는 여기서 이걸 보고 깜짝 놀랐다.
내가 세어 보니 우리까지 포함해 15명이었다. 그리고 더욱 놀라운 것은 이 사람들은 모두가 북한 사람들이었다는 것이다.
이 속에는 청년들도 있었고 할머니들도 있었고 성인들도 있었다. 그러나 아이들은 우리 세 명뿐이었다.
중국 엄마는 우리가 갈 때 춥다며 옷을 사주려 하였다. 그런 걸 나는 겨우 사양했다.
언제 떠나는가 물어 보니 이제 10시에 베이징行 기차가 있는데 그것을 타고 베이징으로 간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 선생은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물어 보니 그 선생은 먼저 준비해 놓으라고 한 뒤 먼저 떠났다는 것이었다. 우리는 10시가 될 때까지 이야기를 나누다가 10시가 다 되어서야 기차 타러 객찰역으로 나갔다.
한 5분 동안 걸어서 기차가 있는 곳으로 다가갔다. 우리는 기차를 탔다.
이때까지 중국 엄마는 한시도 우리 곁을 떠나지 않고 우리와 함께 하였다. 그리고 또 기차에도 같이 탔다.
중국 엄마는 기차에 오르자 눈물부터 흘리며 할머니의 손을 잡았다. 그리고 나와 소연이를 잘 키우라고 하였다. 그리고 할머니도 눈물을 흘리며 뭐라고 말하면 좋을지 몰라 『혼자 두고 우리만 가니 정말 미안하구나 미안하구나…』 하며 계속 눈물을 흘렸다.
그리고 중국 엄마는 우리한테 다가와 눈물을 흘리며 우리를 껴안았다. 그리고 아프지 말고 잘 있으라면서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 나와 소연이도 너무 슬퍼 막 흐느끼며 눈물을 흘렸다. 우리는 한참 동안 얘기를 하며 눈물을 흘렸다.
어느덧 차는 떠나갈 시간이 되고 밖에서는 『호르륵-』 하는 호루라기 소리가 들려왔다. 중국 엄마는 내려가야 하니까 우리 손을 꼭 잡다가 기차에서 내려 우리 창문이 있는 앞으로 다가왔다. 그리고 눈물을 흘리며 손을 흔들었다. 나는 차마 이걸 볼 수 없어 엎드려 울었다.
어느덧 『붕-』하는 기차 소리가 나더니 차가 떠나기 시작했다. 나는 이때서야 일어서 중국 엄마가 있는 쪽을 향하여 손을 흔들었다. 중국 엄마는 따라오면서 계속 손을 흔들었다.
어느덧 기차는 빨리 달려 중국 엄마의 모습은 이젠 보이지 않았다. 나는 너무 슬퍼 한참동안 엎드려 슬프게 울었다. 나는 창문을 바라보며 『나의 엄마들은 어째 이렇게 계속 없어지는 것인가. 우리는 엄마복이 없는 모양이다』하고 한탄하였다.
기차는 이런 슬픈 나의 마음도 몰라 주고 계속 산과 들을 지나 달리기만 하였다. 이렇게 우리는 중국에서 같이 있었던 엄마와 헤어졌다. 기차는 달리고 달리고 또 달렸다.
나는 묵묵히 창문만 바라보았다. 기차를 타고 가다가 어느덧 점심시간이 되었다. 중국 조선족 사람은 라면 한 봉지를 뜯어 거기에다 뜨거운 물을 부어왔다. 그리고는 우리 15명에게 모두 먹으라고 주었다. 우리는 그걸로 점심을 먹었다. 점심이 지나서도 기차는 계속 달렸다.
그래서 언제쯤 돼야 베이징에 도착하는가고 물어 보니 내일 오후쯤에 도착한다고 하였다.
우리는 그날 저녁도 라면을 먹고 기차 안에서 잠을 잤다. 저녁에 잠들었다가 눈을 떠보니 날은 훤히 밝았고 동쪽에서는 해가 떠오르고 있었다. 아침이 되어 우리는 세수도 안하고 또 라면을 먹었다. 기차는 가고 또 갔다.
어느덧 오후 1시가 되었다. 이때 조선족 사람이 거의 다 도착했다며 짐을 메라고 하였다. 우리는 재빨리 자기 짐들을 챙겨 메고 도착하기를 기다렸다. 기차가 복잡한 역전에서 멈췄다. 여기가 바로 베이징인 것이다.
우리는 조선족 사람을 따라 줄을 서서 기차에서 내렸다. 우리가 다 내리자 조선족 사람은 우리를 데리고 역전을 빠져나왔다. 나오던 길에 본 역전은 매우 멋있었다. 눈부시게 황홀하며 대단히 넓었다. 정문을 다 빠져 나오자 우리는 깜짝 놀랐다. 앞에 거대하고 높은 건물들이 우뚝 거인처럼 서 있는 것이 아닌가? 그리고 도로에는 차들이 쉬지 않고 달리고 있었다. 우리는 이런 황홀한 광경을 처음 보았다.
우리는 식당에서 점심을 맛있게 먹고 식당을 떠나 역으로 나갔다. 거기서 조선족 사람은 차표를 사서 우리들에게 한 장씩 나누어 주었다. 그러면서 『이제 갈 곳은 내몽골 지방이니 오늘 오후 5시에 떠나면 새벽에 도착할 것인데 지금 산 표는 침대표입니다. 그러니까 갈 때 편히 누워서 가시고 또 새벽 3시 전에는 모두 깨어나 주십시오』라고 우리에게 알려 주었다.
우리는 여기서 얼마간 기다렸다. 그리고 5시가 되어서 우리는 객찰구역으로 나가 표를 보이고 정해진 자리를 찾았다.
정말 침대칸이었다. 우리와 같이 가는 일행들도 모두 우리 옆에 있었다. 침대 위에 올라가서 짐을 내려놓자마자 피곤해서 나도 모르게 잠들었다.
계속 자는데 별안간 할머니가 나를 부르는 소리가 났다. 그래서 벌떡 일어나 보니 밖은 새까맣고 기차는 한창 달리고 있었다. 이때 할머니가 다음 도착할 역이 우리 목적지니 빨리 일어나라는 것이었다. 그래서 나는 정신을 차리고 짐들을 챙겨가지고 내릴 준비를 하였다. 이윽고 열차가 역전에 도착해 서서히 멈추었다.
우리는 줄을 서서 나가기 시작했다. 우리가 다 나가자 우리를 안내할 사람들이 왔다. 어느 할머니 되는 분과 어느 형님이 왔다. 그들은 인사하더니 우리를 안내하였다. 우리는 기차역전 안으로 들어갔다.
들어가면서 보니 무슨 괴상한 글자들이 씌어 있었다. 그래서 내가 저건 무슨 글잔가고 물어 보니 저건 몽골 글자라는 것이었다. 우리는 안내를 따라 역전 안으로 들어가 의자에 앉았다. 우리를 안내한 그 할머니와 형님도 같이 와서 조선족 사람과 무슨 얘기를 나누고 있었다.
우리는 역전 안에서 몇 시간 있었다. 나는 여기서 잠시 졸았다. 거의 아침이 되자 그 할머니는 우리를 데리고 역전을 나왔다. 그리고는 거리로 나가 식당으로 들어갔다. 우리에게 아침밥을 먹이기 위해서였다. 그 할머니는 중국말을 매우 능숙하게 하였다. 할머니는 중국말로 우리에게 밥을 대접하라고 식당 아주머니에게 일렀다.
잠시 후 식당 아주머니는 밥과 반찬들을 차려 주었다. 우리는 음식을 먹고 식탁에 앉아 기다렸다.어느덧 날은 밝아 태양이 서서히 떠올랐다. 날이 밝자 그 할머니는 우리를 식당에서 나오라 하고는 어디로 데려갔다. 우리는 한참 그 할머니를 따라갔다. 그 할머니는 우리를 데리고 버스가 있는 데로 갔다. 그리고는 그 차 주인과 흥정하였다.
한 10분 걸렸을까. 다 흥정했는지 조선족 사람은 우리에게 올라타라고 하였다. 그래서 우리는 버스에 올라탔다. 우리가 버스에 올라타자 버스는 서서히 그 식당을 떠났다.
버스는 시내를 누비며 빠르게 달렸다. 어느덧 버스는 시내를 벗어나 넓고 넓은 초원을 달리기 시작하였다. 이제 우리가 가야 할 목적지까지는 5시간이 남았다고 했다. 버스 안에서 보는 초원의 풍경은 아름답기 그지없었다. 넓고 넓은 초원은 끝이 보이지 않았다. 버스가 너무 오래 가기 때문에 버스 안에서 잠들었다. 한 2시간 지나 눈을 떠 보니 차는 계속 달리고 있었다.
차가 한 시간 정도 더 가자 나는 멀미가 나기 시작하였다. 전에도 차를 오래 타면 멀미가 나곤 했는데 그 고통을 견디기 어려웠다. 멀미가 나기 시작하자 머리가 빙빙 돌아가고 메스꺼웠다. 나는 속으로 「이제 더한 고통을 당할지도 모르는데 이런 멀미 때문에 아파한단 말이야. 안 돼」하고 다짐하며 계속 참아냈다.
차는 몇 시간을 가다가 목적지에 도착하였다. 아주 작은 도시였다. 이곳 기차역에 도착하자 어떤 사람이 차에 올라탔다.
안경을 끼고 몸이 약해 보이며 키가 큰 사람이었다. 이 사람은 올라타자마자 우리에게 인사부터 하였다. 그리고 자기는 그 선생님의 일을 도와서 여러분들을 한국으로 갈 수 있게 도와 주는 사람이라고 하였다.
이때 또 세 명이 올라탔는데 다 남자들이었다. 한 분은 할아버지되는 분이고 두 사람은 젊은 청년들이었다. 이 사람들이 타자 우리와 같이 안내하며 왔던 할머니가 이 할아버지를 『여보』라고 불렀다.
그래서 우리는 이 다섯 사람이 다 한가족이란 걸 알았다. 그 할머니, 할아버지, 형님, 청년 두 명을 합쳐서 다섯 식구였다. 이 집 식구들은 모두 키가 크고 체격들이 좋았다.
이들이 다 올라타자 안경 낀 사람이 중국말로 운전수에게 뭐라고 말했고 운전수는 차를 돌려 달리기 시작했다. 방향은 계속 인가들이 없는 쪽이었다. 안경 낀 사람은 차칸에서 우리에게 계속 안심하라고 하였다. 그러면서 주의 사항들을 알려 주었다. 나는 우리가 나라 국경을 넘어야 한다는 말에 깜짝 놀랐다. 이 말은 처음 듣는 말이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 주의 사항들을 모두 기억하였다. 어느덧 차는 달려 人家가 하나도 없는 곳으로 달렸다. 한참 달리고 보니 글쎄 이게 무엇인가? 옆에 글쎄 철조망이 쭉 쳐 있는 것이었다. 이것은 마치도 우리가 텔레비전에서 봤던 38선과 같았다. 나는 이것을 보고 다시 한번 놀랐다. 글쎄 우리가 이런 걸 넘어야 된다는 게 말도 안 되었다. 버스는 거기서 한 몇 분 동안 더 가다가 멈추었다.
그리고 우리는 버스에서 모두 내렸다. 우리를 내려놓자 안경 낀 사람은 그저 할아버지만 따라가면 된다고 하였다. 그리고 우리를 데려오던 조선족 사람과 안경 낀 선생은 그 버스를 타고 다시 돌아갔다. 이제 초원에는 우리들 20명밖에 남지 않았다. 앞에는 철조망이 보였다. 우리는 거기서 더 머물지 않고 뒤로 깊숙이 들어갔다. 지금은 날이 밝으니 저녁 때까지 기다려 건너가야 했다. 우리는 거기서 가져온 음식들을 모두 먹어치웠다.
그런데 이때 내가 보니 그 할머니도 있었다. 나는 그제서야 이 할머니도 우리와 같이 갈 북한 사람이란 걸 알게 되었다. 이 할머니의 본래 고향은 중국인데 조선에 아빠 따라 나갔다가 다시 중국으로 들어왔다. 이제 중국에서 생활한 지 5년이나 되었다고 했다. 우리는 여기서 새까만 밤이 될 때까지 기다렸다. 우리를 안내하며 같이 갈 할아버지가 말하기를 그저 건너가서 군대들한테 잡히면 된다고 하였다.
어느덧 앞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새까매졌다. 우리는 행동을 개시하기 시작하였다. 앞 뒤에는 남자들이, 가운데는 여자와 아이들 총 20명이 살금살금 기어갔다. 다음 우리는 벌떡 일어나 철조망에 바싹 붙었다.
남자들이 짐들을 모두 철조망 위로 던져 건너가게 한 다음 철조망을 들어주었다. 그러면 우리는 그 사이로 기어서 빠져 나갔다. 빠져 나가서 우리가 다시 철조망을 들어 주면 뒤에 있던 사람들이 들어오고 하였다. 우리는 짐들을 재빨리 주워 다시 계속 앞을 향해 뛰었다. 한참 가니 또 철조망이 있었다.
우리는 여기서도 살살 기어 빠져나갔다. 그때 윤미도 살겠다고 허둥지둥 기어나오는 것이 나는 지금도 잊혀지지 않는다. 이렇게 빠져나가고 철조망 네 개를 넘었다. 다행히 이 네 개가 전기가 투입되지 않아 무사히 넘었다. 그러다가 한참 가는데 갑자기 불꽃이 팍! 튀었다.
보니 한 줄로 된 전기선이 설치되어 있었다. 우리는 그 줄을 막 끊어던지고 계속 앞을 향해 달려갔다. 한창 달려가자 앞에서 웬 불빛이 반짝이는 집들이 보였다. 이제는 중국땅을 넘어서 다른 나라 땅에 들어선 것이다. 우리는 여기서 한동안 쉬었다.
그러다가 우리는 토론을 하였다. 이 할아버지가 말하기를 그저 철탑이 있는 국경경비대들한테 잡히면 된다고 하였다. 그래서 우리는 모두 자리에서 일어나 철탑이 보이는 곳으로 성큼성큼 걸어갔다. 한참 걸어가자 정말 철탑이 보였다. 우리는 좀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철탑을 향해 걸어갔다. 거의 다 가자 갑자기 검은 그림자가 보였다. 이때 이 할아버지가 앞으로 나서며 말했다.
허리를 굽해 인사를 하며 『조선 사람들입니다』라고 말하였다. 그러자 이 사람은 뭐라고 큰 소리를 지르며 총을 팍 들이댔다. 이윽고 다른 군인들이 소리치며 총을 들고 우리를 둥그렇게 포위했다. 그리고 무어라고 막 큰소리로 소리쳤다.
우리가 알아듣지 못하고 가만히 서 있자 한 군인이 우리를 총으로 치며 무릎 꿇고 앉으라고 했다. 그래서 우리는 무릎을 꿇고 앉아 아무 소리도 안하고 가만 있었다. 한참 엎드려 있는데 갑자기 또 일어나라고 하였다.
그리고 우리들에게 자리를 옮겨서 옆으로 가서 엎드리게 하였다. 이 동안 군인들은 무슨 연락을 하는지 바쁘게 뛰어다녔다. 우리는 쥐죽은 듯 가만 있었다.
이때 윤미의 코고는 소리가 들렸다. 그래서 머리를 들어 보니 윤미는 다른 아저씨한테 업혀 한참 자고 있었다. 이 소리를 들은 이 나라 군인들은 뭐라고 말하며 계속 웃었다. 우리는 이렇게 몇 시간 동안 기합을 받았다.
한참 있다가 차들이 불빛을 내뿜으며 왔다. 차들은 우리 앞에 와서 섰다. 차가 서자 갑자기 군인들이 달려들어 어른들을 묶고 눈을 싸매가지고 차 위로 올려보냈다. 우리는 아이들이라서 묶지도 않고 눈을 싸매지도 않았다. 차는 두 대가 왔는데 나는 두 번째 차에 할머니와 윤미·소연이는 첫번째 차에, 따로 탔다.
우리가 차에 다 타자 군인 두 명이 총을 메고 군견을 데리고 차 위로 올라왔다. 이윽고 우리를 실은 차는 달리기 시작했다. 차는 한 반시간쯤 달리다가 어느 한 군대들이 있는 본부에 들어왔다. 밖을 내다 보니 맨 군대 천지였다.
차를 세우자마자 군인들이 한 명씩 우리한테 달려들어 팔을 잡고 집안으로 데려갔다. 건물 안으로 들어가 보니 방이 몇 개 있었는데 모두 나무로 된 감방이었다. 이윽고 사람들이 다 들어오자 군인들은 우리를 감방으로 내몰았다.
나와 소연이 그리고 할머니 윤미, 어떤 형님은 제일 끝방 안에 갇혔다. 방 안에 들어가 보니 이게 뭔가?
방은 얼마나 작은지 어이 없을 정도로 작았다. 그것도 그렇고 창문이라고 사람 머리만한 게 하나 있었는데 공기는 대단히 나빴다. 더구나 요렇게 작은 방에 우리 다섯 명이 들어간다는 게 말도 안 되었다. 그리고 너무 피곤해 자려고 누우니 다섯 명이 겹쳐 누워도 자리가 모자랄 지경이었다.
잠이 오지 않았으나 육체가 피곤하여 나는 곧 잠 속으로 빠졌다. 내가 잠을 한창 자고 있는데 별안간 막 뒤지는 소리가 났다. 그래서 눈을 떠 보니 군인들이 우리 몸수색을 하고 있었다. 짐은 원래 처음 왔을 때 다 빼앗겼다.
그리고는 몸 안에 있는 것들을 모두 수색해갔다. 심지어 자고 있는 윤미의 몸까지 모두 뒤져 중국돈 30원을 꺼내갔다.
몸수색을 다 마치고 나자 어느덧 날이 밝았다. 날이 다 밝고 아침도 다 지나갔는데 어째 아침밥을 주지 않았다. 더욱 중요한 것은 물이었다.
물조차도 주지 않아 우리는 혼났다. 그러다가 할머니가 보초병을 불러 물 먹는 시늉을 하며 달라고 했다. 얼마간 있다가 보초병은 물을 가져왔다. 또 화장실에 가는 문제도 골치 아팠다. 그래서 오줌이 마려우면 또 오줌 누는 시늉을 하며 빨리 오줌누러 가게 해달라고 했다. 그러면 보초병이 문을 딱 열어 한 명만 내보내고 다시 문을 걸었다. 그리고 총을 쥐고 우리를 화장실에 데려다 주고 지켰다가 또 데려오곤 하였다.
방은 몇 개 있었는데 한 방에 몇 명씩 따로 갇혀 있었다. 점심이 되자 밥이 왔는데 글쎄 노린내 나는 양고기 밥을 가져왔다. 냄새만 맡아도 메스꺼웠고 한 입을 대니 당장 토할 것만 같았다. 우리는 이걸 한 숟갈도 먹지 않았다.
그러자 군대들은 이걸 다시 내갔다. 저녁 무렵이 되자 또 밥을 들여왔는데 빳빳한 옥수수빵 몇 개와 양고기 국물을 가져왔다.
배고프던 찰나여서 우리는 점심 때와는 달리 게걸스럽게 다 먹어치웠다. 저녁 늦게 여자군인 한 명이 들어왔다. 그는 우리에게 말을 걸었는데 이것은 뜻밖에도 조선말이었다.
그는 먼저 우리에게 『조선에서 오셨어요?』하고 서툰 조선말로 물어보았다. 그래서 우리는 조선에서 왔다고 대답하고 덧붙여 한국에 가게 해달라고 했다. 그는 우리의 이름과 나이를 모두 적었는데 글은 조선글이 아니라 영어글로 적었다. 그리고 조금 있다가 이 여자군인은 나갔다.
물어 보니 다른 사람들도 모두 적었다고 하였다. 이날 밤 우리는 또 하루를 감방에서 잤다. 아침이 되자 별안간 군인들이 우리를 끌어내었다.
그래서 무슨 일인가 보니 사진 찍는 것이었다. 우리는 모두 사진을 찍고 다시 감방 안으로 들어왔다. 이날 오전도 우리는 이곳에서 주는 비린내 나는 음식들을 조금 먹었다. 여기서 우리는 윤미의 덕을 많이 보았다. 어떤 장교들은 윤미를 보고 너무 작으니 불쌍하다고 과자도 주었다. 과자가 오면 우리는 이 과자를 나눠 먹곤 하였다.
이날 오후였다. 갑자기 군인들이 우리에게 옷을 다 입고 나오라고 하였다. 우리가 나가니 다른 방 사람들도 모두 나왔다. 이때 우리는 이 사람들이 우리를 한국으로 보내 주는가 보다 하고 은근히 기뻐하였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우리를 중국으로 넘겨 보내지 않을까? 만약 그러면 우리는 다시 북한으로 가게 되는데」하고 걱정도 되었다.
아윽고 사람들이 다 나오자 군인들은 우리를 몰고 버스가 서 있는 쪽으로 갔다. 여기서 보니 버스 옆에 우리 짐들이 모두 있었다. 우리는 가서 자기 짐들을 모두 챙겼다. 이윽고 우리는 그 버스를 탔다. 뒤로는 군대차가 있었다.
정문이 쭉 열리더니 우리를 실은 차는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고 이 부대를 떠났다. 차는 정처없이 계속 달렸다.
그러다가 우리는 어느 한 건물을 보게 됐는데 중국글로 중국과 이나라의 국경이었다. 우리는 이 글을 보고 대뜸 알아차렸다. 앞을 보니 중국 경비대 장교들이 서 있었다. 그래서 우리는 더 지체할 것 없이 막 차에서 내리뛰겠다고 덤볐다. 그러자 차는 서서히 멈추었다.
차가 다 멈추자 우리는 차에서 내리 뛰어 우리가 왔던 길로 다시 뛰었다. 이때 뒤에 있던 군대 차에서 군인들이 내리더니 우리를 막 잡았다. 그래서 우리는 모두 내려 하나로 크게 뭉쳤다.
그리고는 우리가 왔던 길로 계속 걸어갔다. 그러자 몽골 군대들이 막 우리를 돌려세우며 차 안으로 들이밀었다. 우리는 흩어지지 않고 꽉 뭉쳐 한 사람이 차 안으로 들어가면 모두가 가서 그 사람을 꺼내오고 하면서 완전히 투쟁 시위를 벌였다. 어떤 장교는 안 되겠는지 어떤 형님을 발로 걷어찼다.
조금 있다가 저 건너편에서 한 분대쯤 되는 군대들이 총을 메고 뛰어왔다. 그리고는 우리들에게 달라붙어 막 떼놓기 시작하였다.
한 사람 한 사람씩 떼놓는데 빠져나온 사람은 군인들을 잡아 군인들이 다른 사람을 붙잡지 못하게 하였다. 이러다가 우리는 모두 땅에 꿇어 앉았다.
우리 모두 통곡하며 울었다.
이때 한 사람이 앞에 나와 『하나님! 주여! 우리를 도와주소서』하고 외치자 우리 모두가 『주여!』하고 외쳤다.
이때 우리는 하나님을 몰랐지만 사람들이 모두 그러기에 우리도 같이 따라 했다. 그리고 우리는 계속 『주여! 주여!』하며 통곡하였다.
이때 우리가 얼마나 통곡하였는지 옆에 있던 장교들도 이걸 보고 눈물을 흘렸다. 장병들도 우리를 보고 떼어놓을 생각을 하지 않고 옆에 가만 서 있었다.
이때 이걸 보고 있던 중국 장교들이 뭐라고 말하고는 다시 차를 타고 돌아갔다. 일이 이렇게 되자 군인들은 손시늉으로 우리를 다시 본부로 데려가겠으니 이제는 차에 타라고 하였다. 그래서 우리는 다시 버스에 탔다. 형님들은 만약을 생각하여 중국 쪽으로 가면 운전사를 떨어뜨리고 뛰쳐나갈 생각으로 운전사 곁에서 감시하였다. 보니 차는 정말 그 본부 쪽으로 가고 있었다.
그런데 이때였다. 갑자기 한 할머니가 쓰러졌다. 아까 투쟁시위를 할 때 너무 힘을 많이 빼서 쓰러진 것이었다. 차는 빨리 본부를 향해 달렸다.
본부에 다 도착하자 군인들은 할머니를 업어 군대 병원으로 데려갔다. 이때 남자들은 모두 다시 감방 안에 넣어 놓고 여자들과 우리 아이들은 병원으로 같이 따라갔다.
병원에 도착하자 간호사들이 발을 문지르며 치료해 주었다. 한참 치료하자 군인들은 우리보고 같이 이 방에 있으면서 간호해 주라고 하곤 모두 나갔다. 이 할머니는 잠시 후 정신을 조금 차렸다.
얼마간 지나서 장교 한 명이 들어오더니 우리 인원을 확인하고 나갔다. 그 후에도 장교는 몇 명이나 들어왔다 나갔다 하였다. 그들이 들어올 때마다 우리는 그들에게 조선지도를 그려놓고 우리는 북한에서 왔는데 한국으로 보내달라고 부탁하곤 하였다.
이걸 들은 장교들은 알았다고 머리를 끄덕이고 나가곤 하였다. 우리는 병원에 들어온 다음부터 다른 남자들은 어떻게 되었는지 전혀 모르고 있었다. 이날 저녁 우리는 여기서 해 주는 밥을 먹고 잠자리에 누웠다. 잠자리는 군인들이 가져다 준 담요들을 깔고 동복들을 덮고 잤다.
다음날 새벽이었다. 갑자기 군인들이 우리 위생실로 들어왔다. 우리는 모두 깨어나 옷들을 다 입었다. 그러자 군인들은 줄로 할머니들의 손을 묶었다. 그리고 눈가리개를 가져와 우리 모두의 눈을 가렸다. 우리는 갑자기 어리둥절해졌다.
군인들은 우리 팔을 끼고 우리를 버스가 있는 데로 데려갔다. 그리고는 버스에 태웠다. 나도 눈을 가렸지만 조금 가려서 벗길 수 있었다. 눈가리개를 살짝 내려놓아 조금 보이도록 하였다. 버스는 우리들을 다 싣자 달리기 시작했다. 내가 보니 맨 여자들이었고 남자들은 나까지 세 명이었다.
다른 형님과 우리를 안내하던 할아버지 두 명이 같이 탔다. 버스가 달리기 시작하자 이 할아버지가 『우리를 중국으로 넘겨보낸다오』라고 말했다.
이를 들은 할머니들은 정말인가 하며 막 통곡하기 시작했다. 옆에는 한 사람당 한 명씩 군인들이 팔을 붙잡고 있었다. 어떤 할머니는 『주여! 주여!』하고 외쳤다.
그리고는 『우리를 왜 버리십니까?』하고 막 통곡하였다. 그러자 다른 할머니들도 따라서 통곡하기 시작했다. 버스는 계속 달렸다. 내가 간판을 보니 거기에 「중화인민공화국」 하고 중국 글이 써 있었다.
나는 이때야 모든 것을 다 알았다. 지금 우리들은 중국으로 가는 길이다. 중국으로 넘어가게 되면 무조건 우리를 조선으로 넘길 것이다. 그러면 우리는 조선에 가서 죽게 된다.
버스는 조금 더 가다가 중국 국경경비대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뒤에는 짐들을 실은 차가 있었다.
차가 도착하자 군인들은 우리를 다짜고짜로 버스에서 내려놓았다. 그리고 내가 보니 두 나라 군인들이 서로 거수 경례를 하고 있었다. 우리가 다 내리자, 군인들은 우리가 썼던 눈가리개와 손을 모두 풀어주었다. 여기서도 할머니들의 통곡은 그치지 않고 계속되었다. 이 나라 군인들은 우리를 중국 군대들에게 넘겨 주었다. 그리고는 다시 차를 타고 돌아갔다.
『이 새끼들아. 너희들은 사람이 아니냐. 우리를 이 지경으로 만들어놓고 어딜 가?』하고 통곡하는 할머니들의 통곡소리는 온 부대를 소란케 만들었다.
우리만 남게 되자 중국 군인들은 우리들을 미리 준비했던 소형 버스에 태웠다. 남자 둘은 뒤의 트럭에 탔다. 그 트럭 안에는 우리들의 짐이 있었다.
그런데 우리는 나머지 다른 사람 열 명이 보이지 않아 계속 두리번거렸다. 이윽고 우리를 태운 버스는 중국 국경경비대 건물을 벗어나 달리기 시작했다. 차 안에서도 할머니들의 통곡은 계속되었다.
우리가 너무나 통곡하자 중국 장교가 말하였다. 그는 중국말로 『당신들은 조선사람들이라면서?』하고 말을 걸었다. 차 안에는 장병 두 명과 장교 한 명이 있었고 앞의 또 하나 트럭에는 다른 군인들이 타고 있었다.
이 말을 듣고 중국에서 가장 오래 살았던 할머니가 중국말로 울먹이면서 『그래요. 우리를 지금 조선으로 보내는 거죠?』하고 말하였다.
이 말을 듣자 중국 장교가 『하하하』 하고 웃었다. 그리고는 우리가 이때까지 조선으로 가는 걸로 알고 있었는가 하며 통쾌하게 웃는 것이었다. 우리는 이 말을 듣고 어리둥절해졌다. 그러면서 중국 장교는 우리에게 『마음을 놓으세요. 우리는 지금 조선으로 보내는 것도 아니고 경찰한테 넘기는 것도 아니니 마음을 푹 놓으세요. 우리도 이제 당신들이 조선에 가면 죽는다는 걸 아는데 왜 조선으로 보내겠습니까?
우리는 지금 아무 데도 알리지 않고 그저 당신들이 가고 싶다는 곳에 가서 내려놓고 오겠으니 거기서 잘 살아나가시오. 그저 다음부터는 우리 구역으로만 오지 않으면 되오』하고 뜻밖의 말을 하였다.
우리는 이 말을 듣고 자기의 귀까지 의심하였다. 우리를 조선으로 보내지 않고 아무 데나 가게 한다니 정말 꿈만 같았다. 우리는 처음에는 잘 믿어지지가 않아 다시 물어보았다. 그러자 중국 장교가 정말이라며 자기는 이걸 하늘에 대고 보증한다고까지 말하는 것이었다.
우리는 이 말을 듣고 정말 꿈만 같았다. 나는 이 말을 듣고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한편으로는 믿어지지가 않았지만 이 말이 맞는지 틀린지 어쩔 수가 없었다. 버스는 달리고 계속 달렸다.
그러면서 중국 장교는 지금 우리는 당신들을 보내 주려고 기차역으로 간다고 하였다. 차는 몇십분을 더 달려 정말 어느 한 농촌 마을의 기차역에 이르렀다. 차는 그 마을로 좀 들어가 집이 없는 곳에서 멈추었다.
차가 서자 아까 그 장교보다 더 높은 장교가 차 안으로 들어왔다. 그리고는 아까 그 장교처럼 똑같이 그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저쪽 남자들도 자기가 설득시켰다고 했다. 조금 있다가 우리는 버스에서 모두 내렸다. 우리가 버스에서 모두 내리자 장병들이 우리에게 짐들을 주었다. 그래서 우리는 그 짐들을 모두 둘러멨다.
우리는 중국 장교들을 따라 기차역으로 나갔다. 이쪽 할아버지와 형님은 아직도 쇠고랑을 손에 차고 있었다.
우리가 기차역전에 나가자 마침 기차가 왔다. 그 장교가 말했던 것이 사실이었다. 기차가 도착하자마자 우리는 모두 기차에 올라탔다.
다음 중국 장교 두 명과 장병 네 명 모두 6명이 같이 기차에 탔다. 이 군인들은 우리를 호위해 줄 사람들이라고 하였다.
우리가 탄 기차는 서서히 역전에서 벗어났다.
다른 장교들은 그저 밑에서 손만 흔들어 주었다. 우리가 탄 기차는 어느 한 큰 도시가 목적지였는데 우리는 거기에 도착해서 다시 기차를 갈아타야 한다고 했다. 그동안 이쪽 할머니와 장교는 계속 무슨 이야기를 나누었다. 이날 저녁은 기차에서 잤는데 저녁은 군인들이 사온 빵으로 먹었다.
다음날 오전 드디어 목적지에 도착했다. 이 목적지에서 우리는 또 기차를 갈아 탔다. 우리는 두 번째 기차를 타고 그날 저녁 7시쯤에 목적지에 도착하였다. 우리가 여기까지 도착하자 중국 장교가 우리에게 물어보았다.
『당신들은 어디로 가고 싶소?』
우리는 한동안 서로 논의하며 생각했다. 논의 끝에 우리는 장춘에 가기로 했다. 장춘엔 아는 사람들도 있었고 연락하기도 쉬운 곳이었다.
우리가 장춘에 가겠다고 하자 중국 장교는 알았다며 곧 장춘行 차표를 살 돈을 주었다. 군인들은 자기네가 타고갈 기차가 도착해서 빨리 가야 했다.
그들은 우리에게 돈을 주고 작별인사를 하였다. 그리고는 막 개찰구역으로 뛰어갔다. 우리는 이 군인들이 대단히 고마웠다. 이들은 우리 생명의 은인과 같았다. 아니 우리 생명의 은인이었다.
장춘까지 가는 차는 밤 10시에 있었다. 우리는 이때까지 역전 의자에 앉아 기다렸다. 어느덧 10시가 다 되고 장춘으로 갈 기차가 왔다.
우리는 빨리 짐들을 가지고 표를 산 다음 개찰구로 갔다. 개찰구를 통과해 우리는 기차에 탔다. 장춘으로 가는 기차에 타고 나서야 비로소 마음이 놓이는 것 같았다. 기차는 서서히 역을 떠났다. 이날 저녁 우리는 기차에서 잤다.
다음날 아침 우리는 중국 군인이 준 돈으로 라면을 사먹었다. 이날 오후 우리는 그렇게 바라던 장춘역에 도착했다. 우리 일행 중엔 원래 장춘에 있던 한 아줌마가 있었다. 그 아줌마는 특별히 대단히 좋아했다.
우리는 즉시 장춘에 있는 교회 사람에게 연락하였다. 조금 지나 어떤 남자 한 명이 왔다. 우리는 그와 인사를 나누었다.
교회 선생님의 안내를 받아 집으로 들어갔다. 집은 아파트였는데 들어가니 매우 좋았다. 방이 몇 칸씩 있고 화장실도 따로 있고 대단히 좋았다. 우리는 짐과 옷들을 모두 벗어던지고 밥부터 먹었다. 정말 대단히 오랜만에 먹는 밥이었다. 한 사람이 몇 사발씩 먹었다. 그 뒤 자리를 펴고 피곤한 몸을 잠 속에 맡겼다. 다음날 아침 눈을 떠보니 날이 다 밝았다.
우리는 세면을 하고 아침밥을 먹었다. 그리고 오전이 됐는데 그 교회 선생님이 찾아왔다. 그 선생님이 찾아와서 말하기를 여기는 오래 있을 처지가 못 되니 이제 훈춘에 계시는 교회 선생님이 데리러 온다고 하였다. 그러면서 그분이 오늘 오후에 여기 도착한다고 했다.
그날 오후였다. 집으로 웬 여자가 찾아왔다. 알고 보니 이이가 바로 그 교회 선생이었다. 이 여자는 우리를 국경까지 안내해 주던 그 조선족의 부인이다. 그는 와서 우리에게 인사를 하였다. 그리고는 이 장춘은 위험한 곳이니, 훈춘으로 빨리 가는 게 좋다며 오늘 저녁 기차를 타고 훈춘으로 가자고 하였다.
기차에서 밤을 보냈다. 다음날 오후 기차는 달려 도문역에 도착하였다.
이 도문역은 우리가 처음 출발했던 곳이었다. 그런데 이제는 제일 마지막이 되는 곳으로 변했다. 기차는 도문역에 서서히 닿았다.
도문에서 훈춘까지 버스를 타고 한 시간 정도를 가야 했다.
훈춘 시내는 작다 보니 그렇게 멋있지 못하였다. 우리는 아파트 계단에 올라섰다. 한 4층에 올라서서 여자 선생은 다 왔다며 열쇠로 문을 열고 들어갔다. 우리는 들어가자 깜짝 놀랐다.
글쎄 집이 얼마나 크고 화려한지 몰랐다. 방은 화장실까지 합하여 여섯 개나 되었다. 선생집은 딴 데 있었고 이곳은 그저 텅빈 집이었다. 선생은 여기가 바로 우리가 지낼 집이라며 짐들을 다 풀라고 하였다.
이날 저녁 우리는 선생이 가져다 준 재료로 밥을 지어먹었다. 다음날 아침이었다. 맨처음 우리를 국경까지 데려다 준 그 조선족 선생이 왔다. 우리는 거기서 너무 기뻐 어쩔 바를 몰랐다. 우리는 한동안 앉아서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 조선족 선생이 말하기를 『이제 한 번 더 한국으로 가는 것을 시도해 볼 것입니다. 그때까지는 임시로 이 집에서 계셔야 합니다』하고 말하였다. 우리는 이 말 중에 다시 시도한다는 말을 듣고 대단히 기뻤다. 지금 우리 모두는 갈 곳이 없었다.
우리는 훈춘에서 계속 지냈다. 우리는 훈춘에서 밖에 한 번도 나가지 않았다. 선생이 특별히 우리에게 나가지 말라고 하기에 나가지 않았다. 밖에 나가지 않고 계속 집에만 있자니 답답하기 그지없고 대단히 지루하였다. 온종일 뒹굴뒹굴 집에서만 놀아야 했다. 그저 우리는 그 선생이 빨리 오기만을 기다렸다.
이런 속에서 우리는 2001년 1월1일 설날을 보냈다. 1월2일 밤 10시에 우리가 그렇게 바라고 바라던 그 선생님이 도착하였다. 그 선생님은 와서 우리의 손 하나하나를 다 잡아 주었다. 그리고 기쁜 소식을 우리에게 전하였다.
그것은 우리와 같이 동행하다 떨어졌던 사람들이 모두 한국으로 무사히 도착했다는 것이다. 이 말을 듣고 무엇보다 기뻐한 사람들은 이쪽 할머니 가족이었다. 이날 밤은 너무 늦어 그 선생은 다른 데로 갔다가 내일 아침 오겠다며 나섰다.
우리는 모두 기차역에 모였다.
이번에 우리는 꼭 한국으로 간다는 신념을 안고 죽음을 각오하고 갔다. 특별히 이번에는 전부 여자들과 아이들이라 아무런 반항할 힘도 없었다. 우리는 이날 저녁을 기차에서 잤다. 다음날 오후 우리는 베이징 역에 도착했다. 베이징 역은 전과 다름없이 멋있었다.
베이징 역에 내리자 벌써 사람들이 와서 대기하고 있었다. 그 중엔 지난번 우리가 갈 때 버스에 타 가지고 안내하던 그 약하고 키 큰 사람도 와 있었다.
우리는 베이징 역을 빠져나왔다. 그런데 우리뿐만 아니라 또 다른 사람 두 명이 계속 우리 뒤를 따라오고 있었다. 그들은 여자였다. 그래서 저 사람들은 누군가 물어보니 저 사람들은 이번에 우리와 같이 갈 脫北者들이라고 하였다.
우리는 사람들의 안내를 받아 버스를 탔다. 한 반 시간 정도 가다가 어느 한 식당으로 들어갔다. 그 식당에서 점심밥을 먹었다. 다음 그 안경 낀 키가 큰 사람은 우리 모두를 이끌고 베이징 어느 호텔로 들어갔다. 고급호텔이었다. 우리는 호텔 열쇠를 가지고 호텔방으로 들어갔다. 들어가니 호텔방은 정말 멋있었다.
방이 2층으로 형성됐는데 총 15명이 들어가서 잘 수 있었다. 이 호텔에서 하룻밤을 잤다. 다음날 아침 안경 낀 키가 큰 사람은 밖에 나가서 햄버거를 가득 사왔다. 우리는 이걸로 아침밥을 대신하였다.
이날 오후 안경 낀 키큰 사람은 이제 우리가 가야 할 곳의 차표를 사러 역전으로 나갔다. 저녁 10시쯤 돼서 우리가 타아 할 기차가 왔다.
안경 낀 선생은 우리에게 차표를 모두 나눠줬는데 보니 침대표였다. 우리는 개찰구에 나가 다 통과한 다음 정해진 침대 칸에 가서 탔다. 우리는 모두 헤어지지 않고 한 주변에 모두 자리잡고 있었다. 이윽고 열차가 서서히 베이징 西역을 떠나기 시작했다. 열차에서 그 선생님은 우리에게 당부하였다.
『이제 가는 곳은 그 나라 국경을 넘는 지대입니다. 이제 내일 아침 7시에 도착하게 됩니다. 그러면 도착해서 신속히 모여주십시오』라고 당부하였다. 우리는 이 말을 듣고 알았다고 하고는 모두 제 자리로 돌아갔다.
나는 돌아가자마자 잠이 들었다. 잠에서 이상한 꿈을 꾸었다. 글쎄 내가 대한민국으로 비행기 타고 날아가고 있었다. 내가 눈을 떴을 때는 기차가 한참 달리고 날이 점점 밝아왔다.
나는 일어나자마자 세수를 하고 옷들을 모두 주워 입었다. 그리고 짐들이 다 있는가, 검사까지 해보았다. 이때까지도 소연이와 윤미는 아직도 자고 있었다. 나는 이들을 보고 장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또 이렇게 어린 나이에 이런 고생까지 해보는 아이들은 이 세상에 이 애들밖에 없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시계를 보니 6시30분이었다. 그래서 나는 소연이와 윤미를 깨웠다. 할머니는 세수하러 가고 없었다. 우리는 모두 일어나 옷을 입고 내릴 준비를 하였다. 어느덧 차가 서더니 목적지에 도착하였다. 우리는 그 선생님의 말대로 모두 한 자리에 모였다. 그리고 차에서 내렸다. 안경 낀 선생이 우리를 데리고 개찰구역으로 나가 통과하였다.
우리가 모두 빠져나오자 그 선생님은 우리를 데리고 계속 어디로 걸어갔다. 그러다가 어느 한 식당으로 들어갔다. 우리도 모두 식당 안으로 들어갔다. 여기서 우리는 아침밥을 먹었다.
그리고 시계를 보니 거의 10시가 되었다. 그 선생님은 저번에처럼 우리가 내려놓은 구간에서 계속 철조망들을 넘어가서 군인들한테 잡힌 뒤 본부로 호송되면 된다고 하였다.
우리는 이 말을 듣고 대단히 무서웠다. 그 끔찍한 곳을 또 찾아가야 된다니 치가 떨리었다. 우리는 여기서 계속 앉아 있다가 점심까지 먹었다.
오후에도 그 선생님은 우리한테 주의할 사항들을 가르쳐 주었다. 우리 일행은 두 명이 늘어나서 모두 11명이었다. 우리는 하나님께 계속 우리를 한국으로 보내달라고 기도하며 빌었다.
이렇게 우리는 이 식당에서 캄캄한 저녁이 될 때까지 기다렸다. 어느덧 날은 저물고 앞은 보이지 않을 만큼 캄캄하였다. 드디어 우리는 의자에서 모두 일어나 식당에서 나왔다.
이때 안경 낀 선생이 달려오며 버스를 가져왔으니 빨리 가자고 하였다. 그래서 우리는 조선족 선생과 그 선생님과도 변변히 작별인사를 나누지도 못하고 버스에 올라탔다. 우리가 탄 버스는 서서히 그 선생님들을 멀리하며 달리기 시작했다.
이 선생님들은 우리의 은인들이었다. 이게 바로 이 선생님들과의 마지막이었다. 나는 속으로 만약 우리가 이번에도 한국으로 가지 못하고 죽더라도 이 선생님들은 꼭 잊지 않을 것이라고 다짐했다.
우리를 태운 버스는 어두운 밤길을 헤치며 앞으로 나갔다. 버스는 거의 한 시간을 달렸는데 어디로 가는지 잘 보이지 않았으나 인가가 없고 국경선 철조망이 있는 데로 가는 것은 명백하였다.
버스는 계속 가다가 갑자기 멈춰섰다. 그리고는 우리에게 『여기가 바로 넘어갈 곳입니다. 여기로 계속 나가면 됩니다. 당신들이 꼭 한국으로 갈 것을 진심으로 빕니다』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우리는 이 안경 낀 선생에게 이제 만약 한국에 가면 이 은혜를 꼭 갚겠다고 하였다. 이윽고 우리는 차에서 내렸다. 앞은 캄캄한 게 오직 철조망이 어슴푸레 보였다. 그 차는 우리를 내려놓자마자 줄행랑을 놓았다.
이제 이 넓은 초원에 남은 것은 오직 우리 11명뿐. 우리가 사느냐 죽느냐가 달려 있는 곳이었다.
우리는 여기서 더 지체하지 않았다. 우리는 안경 낀 선생이 알려 준 길로 가기 시작했다. 조금 가니 철조망이 나타났다. 우리는 전에 경험이 있는지라 먼저 짐들을 던져 넘어가게 한다음. 남자들이 쇠사줄을 올리면 여자들이 거기로 기어서 넘어가곤 하였다.
여자들이 넘어가서 또 줄을 들어 주면 남자들이 넘어왔다. 철조망과 철조망 사이의 거리는 대단히 넓었다. 이렇게 순식간에 뛰어서 철조망들을 넘었다. 우리가 두 번째 철조망을 넘을 때였다. 갑자기 옆에서 불빛이 보였다. 이땐 우리들이 넘었을 때였다.
우리는 재빨리 넘어서 앞으로 막 뛰었다. 그러자 뒤에서 순찰차가 지나갔다. 이때 우리의 간은 콩알만해졌다.
순찰차가 우리를 보지 못하고 지나가자 우리는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우리는 이렇게 철조망 다섯 개를 넘었다. 철조망을 다 넘고 다른 나라땅에 들어서서 좀 쉬자고 앉았다. 그런데 이때였다. 갑자기 왁왁 지껄이는 요란한 소리가 나며 군인들이 총을 쥐고 달려오는 것이 아닌가. 이 군인들은 잠복 근무병들인 것 같았다.
우리는 여기서 꼼짝 못하고 잡혔다. 군인들은 우리한테 달려오자 우리에게 손을 올리고 엎드리라고 하였다. 그래서 우리는 전에처럼 또 그렇게 엎드렸다.
나는 엎드려서도 『하나님! 하나님! 우리를 한국으로 가도록 도와주소서!』 하고 계속 마음속으로 빌었다. 우리가 한참 엎드리고 있을 때였다.
갑자기 불빛들이 비치더니 군대 차들이 왔다. 그들은 우리에게 얼굴을 들게 하여 전깃불로 하나하나 비쳐보았다. 내가 보니 그 속에는 전에 왔을 때 봤던 장교들도 있었다. 그들도 우리를 보고 낯이 익은 듯 계속 보았다. 한참 있다가 우리는 그들에게 이끌려 차 안에 갇혔다.
다행히 이번에는 묶지도 않고 눈도 싸매지도 않았다. 그들은 우리를 싣고 차를 몰기 시작했다.
처음엔 중국 쪽으로 몰고가는 것 같았다. 그래서 우리는 지금 당장 중국에 넘기는가 보다 하고 죽었구나 생각했다. 그런데 가던 차가 방향을 꺾더니 본부 쪽으로 향했다.
이때 우리는 콩알만하던 간을 겨우 펴며 또한번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차는 계속 가다가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우리는 이곳이 눈에 익었다. 그들은 우리보고 옷입는 흉내를 내며 나오라고 하였다. 그래서 우리는 옷들과 짐들을 모두 가지고 나왔다.
우리가 밖으로 다 나오자 소형버스 하나가 왔다. 우리는 이들이 또 우리를 중국으로 보내는가 해서 마음을 조였다. 군인들은 우리에게 버스에 타라고 하였다. 버스에 다 타자 소형버스는 문을 닫고 서서히 부대 정문을 나가기 시작했다. 앞뒤를 계속 봐도 따라오는 군인들이 하나도 없었다. 우리는 차가 가는 쪽 방향을 잘 주시해 봤다.
군인들이 또 중국 쪽으로 끌고 가는 게 아닌가 하는 근심 때문이었다. 군인들이 상냥하게 구는 것을 보고는 한국으로 보내는 것 같았고 어떻게 생각하면 또 아니었다. 우리들이 탄 차가 가는 방향을 보았는데 중국 쪽이 아니라 기차들이 서있는 역전이었다.
어느덧 차는 역전에 도착했다. 차는 기차 옆에서 멈추었다. 차가 서자 군인들은 우리에게 차에서 내리라고 하였다. 우리는 모두 짐을 들고 차에서 내려 기차 앞에 섰다. 잠시 후 우리는 군인들과 함께 기차에 탔다. 이곳이 바로 우리가 전에 갇혔던 본부였다.
우리는 여기 들어와서 또 전에처럼 감방 안으로 즉시 들어갔다. 그런데 한 가지 이상한 일이 생겼다. 우리가 전에 올 때는 막 으르렁거리던 것이 지금은 상냥하게 구는 것이었다. 우리는 전에처럼 맨끝방에 우리 가족과 한 할머니와 같이 갇혔다. 이날 저녁 우리는 감방 안에서 잤다.
다음날 아침이 되자 밥을 가져다 주었다. 전에처럼 뻣뻣한 옥수수 빵에 기름이 둥둥 뜨는 노린내 나는 양고기국이었다. 배 고프다 보니 이걸 조금씩 먹었다. 또한 군인들은 우리가 물을 좀 달라고 하면 전에는 몇시간이 걸려서야 가져다 주던 것이 이제는 곧바로 주곤 하였다.
그런데 또 한 가지 이상한 것은 우리를 하나도 조사하지 않는 것이었다. 그저 가만 있게만 하였다.
이들이 도대체 어쩌자고 그러는지 우리는 알 길이 없었고 도대체 어떻게 되는 건지 답답하기만 하였다.
이렇게 우리는 또 하루를 감옥에서 보내고 새 날을 맞았다. 그런데 이날 아침은 대단히 소란스러웠다. 이때였다. 갑자기 장교들이 우리 방에 들어왔다.
우리가 어디로 가느냐고 손시늉으로 물으니 이 나라 수도로 간다고 했다. 우리는 이 말을 듣고 대단히 기뻤다. 수도로 간다는 건 곧 한국으로 간다는 말이었다. 그날 오후쯤 돼서야 차는 기차역을 떠났다. 우리가 차지한 자리는 침대칸이었다.
우리 일행은 친절한 사람들의 도움을 받아 서울행 비행기에 오를 수 있었다. 엄마 잃고 북한·중국을 떠돌기 3년, 먼 길을 돌아서 아버지·고모가 있는 남한에 도착한 것은 매섭게 추운 겨울날이었다.●








































